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밀리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과 해남을 ‘남도 답사 1번지’로 꼽았다. 그 여파는 컸다. 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으니까. 그런데 진도를 젖혀두고 남도 문화의 끌텅과 태깔을 논하는 건 좀 어폐가 있다. 진도야말로 노른자다. 시(詩)·서(書)·화(畵)·창(唱)·무속의 곡간이기 때문이다. 2013년 정부에 의해 전국 최초의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알고 보면 돌올하고 뜯어보면 찬연한 문화지구 진도에서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빼어나다.
운림산방은 전통회화의 한 본산이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장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의 창작 산실이며, 5대에 걸친 그의 직계 화맥(畵脈)이 박힌 곳이다. 진도의 진산 점찰산 아래 둥지를 튼 품새는 또 어떻고? 널찍한 터는 호방한 맛을 준다.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안온하다. 산의 푸른 치맛자락을 거머쥐어 수려하고 청신하다. 겨울이 좋다고 혹한에도 얼싸절싸 피어나는 동백꽃 무리는 꾹 눌러 점점이 칠한 붉은 물감처럼 흥건해 기발하다.
원래 이곳엔 소치의 화실과 침식을 위한 초가 하나, 그리고 소치가 만든 연못이 있을 뿐이었다. 단출해서 오히려 그윽했으리라. 꾸밈없이 적막해 한갓졌으리라. 이후 현대에 이르러 보탠 구조물이 많아졌다. 그래도 본색이 어디 가겠나. 진도의 어떤 이들은 운림산방 일원을 ‘몽유진도’(夢遊珍島)라 부른다. 이곳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맞먹을 실경산수를 연상하는 거다.
소치가 뉘신가? 이름을 좀 날린 화가에 그치지 않는다. ‘소치는 묵신(墨神)이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걸 보면, 그림으로 달통한 게 많은 기재(奇才)였다.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을 주름잡았던 걸사(傑士)다. 헌종의 호감을 사 어연(御筵)에 먹을 풀어놓는 영예를 누리고, 함께 서화를 논하기도 했다. 임금을 패트론으로 삼았던 셈이다. 소치의 집안은 변변치 않았다. 허균의 후손으로 한때는 양반 가문이었지만 여러 대에 걸쳐 거듭된 영락으로 어디다 명함을 내밀 건더기가 없었다. 그러나 소치에겐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자청해 그리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낮잠과 끽다(喫茶)로 충분해
그렇다고 일취월장이 절로 가능했으랴. 화가의 창의적 상상력은 기초가 부실한 채로는 터져 나올 리 없다. 그리고 기초라는 건 확장과 성숙에 대한 본능이 추동한 탐구심으로 다져진다. 소치에겐 이 탐구 정신이 내장돼 있었다. 과연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가? 궁구가 깊었던 청년기에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에 갔다가 본 공재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통해 소치의 눈이 번쩍 열렸다. 그는 기록했다. ‘비로소 나는 그림 그리기에 법(法)이 있음을 알았다.’
복 가운데 최고는 인연 복이라 한다. 난데없이 떠올랐다 간데없이 사라진 그림쟁이들이 숱했지만, 소치는 인연 복이 많아 비상을 거듭했다. 해남 두륜산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맺은 선연은 돛을 밀어주는 순풍이었다. 초의는 구도(求道)라는 이름의 양탄자를 타고 세사의 모든 영역을 비행한 인물이다. 일지암은 그 비범한 이착륙의 베이스캠프였다. 28세 때 초의의 문하에 들어간 소치는 이 작은 암자에 머물며 세상을 건너는 법을 배웠다. 소치는 자서(自敍)에 이렇게 썼다. ‘초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 어찌 고고하고 담백하게 살 수 있었겠는가?’ 소치의 생애에 녹아든 개결한 풍정은 초의에게서 얻은 지성과 화엄정신의 발현이었던 셈이다.
초의가 소치의 정신적 아비였다면, 추사 김정희는 예술적 푯대였다. 소치에게 추사를 소개한 건 초의였으니 인연이 인연을 낳았다. 천재는 준재를 척 알아보는 법. 소치의 작품을 본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 소치만 한 그림을 그리는 이가 없다”고 탄복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찬사만 능사로 삼을 추사가 아니다. 소치여! 그대가 서격(書格)을 터득했는가? 신운(神韻)을 익혀 구사하는가? 그쯤의 깐깐한 일갈로 갈 길 먼 예술 항로를 통찰하게 했다. 이른바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으로 예술혼을 돋우길 주문했다. 추사의 지향은 대상의 형상화보다 정신세계를 끄집어낼 수 있는 관조의 깊이를 중시하는 데 있었다. 소치는 추사의 이 고고한 예술철학에 감명을 받아 길을 교정하거나 노정했을 테다. 그러니 스승을 선망하는 마음이 오죽했겠나. 그는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를 번번이 찾아갔다. 버들잎처럼 작은 배를 타고 사나운 바닷길을 건너가 배움을 청했다. 소치가 제주에서 그린 ‘완당선생 해천일립상’은 추사의 지엄한 풍모를 오마주한 초상화다.
이제 소치의 그림을 볼까. 운림산방에는 소치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소치기념관이 있다. 그저 풍경을 즐기려 운림산방을 찾는 관광객이 즐비하지만 알짜배기는 소치의 그림들에 있다. 소치기념관은 한옥 건물 하나로 꾸린 미술관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기념관치고는 자그마하고 치레 없이 조촐하다 못해 밋밋하다. 소치의 담박한 성정을 고려한 구조라 봐야 할까? 전시실엔 산수화, 병풍 그림, 묵죽도, 모란, 괴석 등 다양한 유형의 그림들이 걸렸다. 물기를 배제하기 위해 붓에 먹을 살짝 찍어 바르는 붓질로, 마치 긁힌 자국 같은 필선을 연출하는 갈필(渴筆)에 능했던 소치의 개성을 직감할 수 있는 작품도 많다. 소치 허련은 ‘허모란’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모란 그림을 즐겨 그려서다. 전시실에서도 모란이 흔하게 눈에 띈다.
걸작이란 평판을 얻은 작품은 운림산방의 전경을 부채에 그린 ‘운림각도’(영인본. 원본은 서울대 소장)다. 소치 만년의 작품이다. 근골이 거칠게 드러난 점찰산과 억실억실한 노송들, 푸른 연못과 소박한 산방 두 채가 어울려 써늘한 정취를 자아낸다. 눈길을 붙잡는 건 지팡이를 짚고 연못가를 거니는 노인이다. 속세에서 벗어나 산야의 은자로 사는 이의 고독한 심회를 풀어냈을까? 늙어서는 산천이 스승이다. 말 없는 산야에서 음양의 조화를 읽는다. 여백에 쓴 화제엔 다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깊은 산골에 있는 나의 집에 여름이 오면 뜰에 푸른 이끼가 깔린다. 소로엔 떨어진 꽃잎들이 가득하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니 솔 그늘에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긴다. 단잠에서 깨어나면 솔가지 모아 차를 달여 마신다.’
산림에 사는 이의 영일(迎日)이 완연하다. 인간사에 대한 관심일랑 안으로 거둬들였나? 낙화와 낮잠과 끽다(喫茶)면 그만이었다. 숫제 선풍(仙風)이 비친다. 그래도 긴가민가 늘 궁금한 건 그림이었을 테다. 말년까지 붓을 내려놓지 않았으니. 후손에게 남긴 유지에도 그림 소식이 난무해 두고두고 새길 만하다. ‘붓 재주 하나로 성가(成家)할 생각을 마라! 먹을 항상 입에 물고 다녀라!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서린 뜻이 여러 겹이다. 그림을 밥 먹듯이 그리되 통 크게 밀어붙이라는 독촉이다. 웅장한 메시지다.
소치 허련이 남긴 저작과 화맥의 아우라
소치실록
자서전 성격의 문집으로 소치의 생애와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정밀한 자료다. 소치 연구의 핵심 텍스트이기도. 1867년에 쓴 ‘몽연록’(夢緣錄)과 1879년에 집필한 ‘속연록’(續緣錄)을 합본해 ‘소치실록’(小痴實錄)이라 이름 붙였다. ‘몽연록’은 운림산방에서 완성했다. 소치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황량한 곳에서 홀로 슬퍼하며 서책은 물론 모든 것을 버렸다. 뜻밖에 손님이 찾아와 며칠을 쉬는 동안 문답한 것이 있는데 이걸 엮어 책을 만들었다.’
문답식의 다소 특이한 유형의 자서전을 쓴 정황을 밝히고 있다. 대화체 문집이라 쉽고 흥미롭게 읽힌다. 조선의 화가 중 소치 외에 자신의 화필 생애를 세세한 기록으로 남긴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소치실록’이 현대의 대중에게 알려진 건 1974년 한 매체를 통해 한글 번역 연재물이 게재되면서였다. 당연하게도 소치 연구자와 애호가들의 환영을 받았다.
소치는 스스로 밝혔듯 ‘조실부모해 의지할 곳이 없었고 견문도 넓히지 못한 채로’ 성장기를 통과했다. 이 불우한 과거를 보상받고 싶었을까? 남종화의 거두로 부상하면서 그는 당대 명망가들과 적극적인 교유를 했는데, 사교 일화와 의미심장한 예술적 교감의 내용을 낱낱이 책에 담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군주 헌종, 고명한 선사 초의, 광활한 예술 세계를 구현한 추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술회한 대목들이 특히 재미있다. 소치의 생애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진면목과 삶의 방식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5대로 이어진 소치 화맥
진도에는 이런 얘기가 돌아다닌다. “양천 허씨들은 빗자루 몽둥이만 들어도 걸작이 나온다.” 소치 가문에서 화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생긴 우스갯소리다. 소치의 화맥(畵脈)은 직계 후손 5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전무후무한 화업의 행진이다.
소치의 화업 2대를 전수한 이는 넷째 아들 미산 허형이다. 소치는 원래 큰아들 허은의 재능을 높이 쳤다. 그러나 허은이 요절하는 바람에 허형이 맥을 이었다. 허형이 그린 묵모란과 묵매는 부친을 능가한다는 평판이 있다. 3대를 이은 건 허형의 두 아들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이다. 허건은 갈필로 그린 필선의 생동감으로 호평을 받았다. 동상 걸린 다리를 절단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장애를 오히려 창작의 화톳불로 삼는 강골의 근성을 과시했다. 소치의 운림산방을 복원하기도 했다. 허림은 사물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로 명성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요절하고 말았다.
4대 맥은 임전 허문에게 이어졌다. 그는 수묵의 농담(濃淡)을 활용한 독창적 화법인 ‘운무산수화’에 능하다. 임전 이후 현재의 5대째 화맥은 허건의 손자 허재와 허전, 허건의 조카 허청규와 허은에게 이어지고 있다. 물보다 진한 피가 5대째 그림으로 이어져 가문을 통째 수묵의 바다로 밀어 넣었다. 그 바다의 아우라가 휘황하다.
남녀노소 누구나 유튜브를 운영하는 1인 미디어 시대다. 최근 유명 유튜브 채널에는 대선 후보가 나란히 출연하는 등 기존 레거시 미디어 못지않은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여러 유튜버 사이에는 중장년들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오랜 기간 한 분야에서 쌓아온 전문성을 무기로, 젊은 창작자 사이에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재천 교수 '최재천의 아마존'
교과서에서 나오는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을 쓴 최재천 교수. 그는 세계적인 생물학자이자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다. 최재천 교수는 1년 전부터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을 운영 중인데,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채널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며칠 전 구독자 10만 명을 돌파했고, 현재는 11만 명을 넘어섰다.
최재천 교수의 채널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지난 달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은 이상한 겁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리면서다. 해당 영상은 조회수 61만 명을 돌파했다.
최 교수는 한국 사회의 저출산 현상에 대해 "진화생물학자인 제가 보기에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진화적 적응 현상"이라며 "주변에 먹을 것이 없고 숨을 곳이 없는데, 번식을 하는 동물은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금 애를 낳는 사람은 바보다"라며 "머리가 얼마나 나쁘면, IQ가 두 자리가 안 되니 애를 낳는 것이냐. 애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은 아무리 계산해봐도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와 같은 최 교수의 의견에 대해 네티즌들은 "세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젊은 생각이 멋지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최재천 교수는 10만 구독자 돌파 소감에 대해 "1년이 훌쩍 넘도록 이게 언제 구독자 수가 늘어나냐면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정말 감사하다"면서 "제가 최근에 팀원들에게 '뭔일이냐'라는 말을 많이 했다. 저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일환 변호사 '차산선생법률상식'
대법관을 지낸 박일환(70) 변호사는 지난 2018년 12월부터 '차산선생법률상식'을 운영 중이다. 30년 이상 판사로 일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법률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법률 상식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현재 구독자는 13만 명을 넘어섰다. 초반에는 법에 문외한 딸이 영상 편집을 맡았고, 손주도 종종 출연해 친근한 느낌이 강했다. 현재는 법률 방송과 함께해 영상 퀄리티가 좋아졌고 좀 더 전문적인 느낌이다. 박일환 변호사는 일을 그만둔 이후에는 유튜브 운영에 더욱 힘쓸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김양수 농부 '귀농TIME'
전남 귀농 산어촌 서울 센터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 '귀농TIME'. 여기에서 '농부의 정석' 시리즈를 맡고 있는 김양수 씨(54) 씨는 가장 인기 스타이다.
그가 지난 4월에 올린 '진딧물의 정복자, 숨겨둔 비법 대공개' 영상은 27일 현재 조회수 43만 명을 돌파했다. '귀농TIME' 콘텐츠 중 누적 조회수 1위다. 매우 간단하면서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비법은 많은 귀농·귀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귀농TIME'에서 '뚝심으로 70대에 토종 다래 명인이 되다'는 누적 조회수 13만회, '직접 만든 강력한 천연 기피제로 해충들을 몰아내는 비법 대공개'는 10만회, '꿀고구마 1년 순수익 1억 달성, 3가지 핵심 키워드'는 7.4만회를 각각 기록하며 그 뒤를 이었다.
고수·도사·달인의 '고도달TV'
'고도달TV'의 운영자는 '고수' 최종찬 씨(71), '도사' 유시탁 씨(72), '달인' 정상곤 씨(72)다. 이들은 경복고, 서울대를 졸업한 동문으로 오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주변에 도움이 되는 노년'이라는 목표로 의기투합한 세 친구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겠다는 각오다.
'고도달TV'에서는 키오스크 사용법, 건강검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기, 추억의 먹거리, 자녀·손주들과 잘 지내기 등 같은 생활 밀착형 소재들을 다뤘다. 시니어들에게 많은 정보와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7월 첫 영상을 올렸고, 현재 구독자 수는 2천 명이 채 안 된다. 지난달 '2021 제1회 시니어유튜버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더욱 주목 받고 있다.
배우 연규진이 KBS 2TV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를 통해 32년 만에 예능 나들이에 나서 화제다. 브라운관 출연도 지난 2014년 방송된 KBS 1TV '산 넘어 남촌에는2' 이후로 7년 만이다.
특히 연규진은 방송에서 아들 연정훈과 며느리 한가인을 언급해 더욱 화제를 모았다. 현재 연규진은 '연정훈 아버지', '한가인 시아버지'로 통하지만, 그도 유명한 배우였다. 원래는 연정훈이 '연규진 아들'로 불렸다. 그렇다면 연규진은 누구일까, 좀 더 자세히 알아봤다.
연규진은 1945년생으로 만 75세이며, 1969년 TBC 공채 8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5년 간의 무명 생활 끝에 1974년 TBC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1990년 MBC에서 방송된 드라마 '똠방각하'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김영애 등과 식품회사 오뚜기의 전속 모델이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잘나갔다는 의미이다.
그 외에 연규진은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코리아게이트', '남자 셋 여자 셋', 'LA 아리랑'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앞서 말했듯 '산너머 남촌에는 2' 이후로는 특별한 작품 활동이 없다.
연규진은 배우 활동 뿐만 아니라 스타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서울대 무용과 출신인 아내와 방송사에서 우연히 만나 1972년 결혼했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들이 바로 연정훈이다. 연정훈은 KBS 1TV '노란 손수건'에서 한가인을 만나 지난 2005년 결혼했다. 연정훈과 한가인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또한 연규진의 재산 규모는 준재벌급 정도로 알려졌다. 동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업 수완이 남다르고, 원래 집안 자체도 좋다고 한다. 과거 TV조선 '호박씨'에서 "연규진 씨 부모님이 약사였다더라. 부모님이 모은 재산으로 연규진 씨가 연흥극장을 운영했고 그 재산으로 부동산 재테크를 했다고 전해진다"는 얘기가 나온 바 있다.
원래 연규진은 연정훈 한가인 부부와 판교에서 같이 살았다. 그곳은 250평 정도의 부지에 50평 정도의 2층 건물로 60억에 달하는 고급타운하우스로 알려졌다. 이후 2010년 연정훈 한가인 부부는 남산에 위치한 고급 빌라로 이사했다.
연규진은 지난 10일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서 극장 소유 루머에 대해서 "그건 소설을 써 놓은 거다. 족보 상의 먼 친척들이 운영할 뿐, 나와는 관계 없다"고 해명했다. 다만, 자신이 재테크를 잘 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와 함께 연규진은 '한가인이 재벌가라서 시집 갔다'라는 루머도 언급하며 "우리 며느리가 '뭐 때문에 저 집에 시집을 갔을까'부터 퀘스천이 된 거다. 나는 방송에서 본인 신상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앞서도 연규진은 연정훈과 한가인이 드라마에서 눈이 맞아 결혼했다고 강조했다.
연규진의 며느리 사랑 또한 유명하다. 그는 지난 방송에서도 "한가인이 아직도 그렇게 예쁘냐"는 질문에 "보고만 있어도 예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일 못해도 괜찮다. 내가 예쁜 여자한테 약하다"며 "손주는 두 명이다. 위에가 딸, 밑에가 아들. 6살, 3살이다"고 애정을 표했다.
정직한 길을 걸어온 사람은 진실하고 솔직하다. 소박하고 따뜻하다. 무엇보다 겸손하다. 우선 내 진로를 모색하고, 그 도상에서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사회로 시선을 확장하며 꾸준히 쉼 없이 걸음을 뗀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성실하고, 사람답고, 정의롭다고 말한다. 고영회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갖기 어려운 전문 자격증을 셋이나 갖고 있다. 변리사이자 이공계의 꽃이라 불리는 2개 기술 분야의 전문가다. 시쳇말로 꽃길만 걸어온 것일까. 함께 그가 걸어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서울대 합격한 알밤, 몸 팔러 중동으로
“보리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가 서울대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고향이 진주 동편의 진양군 금산면 시골인데 서울에 사시던 6촌 형님이 전화 연락을 주셨고, 그 전화를 받은 동네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려주신 거죠. 학교 다니는 틈틈이 농사를 돕고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녀야 했던 곤궁한 시절이었죠. 중학교 1학년 때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밀린 병원비, 그 후 형제들 학비, 생활고로 인한 이런저런 빚에 눌려 집안 형편이 상당히 어려웠지요. 아버지의 폐암은 젊은 시절 7, 8년간 일본에서 광부 생활을 하셨던 게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빈곤의 대물림을 끊어보려고 돈 벌러 갔던 것이 오히려 병환을 불러왔으니 가난은 더 험상궂은 얼굴로 우리 가족을 덮쳤던 거지요.”
어릴 적 그의 별명은 알밤. 머리가 크고 영특해서 그렇게 불렸다. “알밤, 이리 와봐라.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든 대학까지 보내주마.”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받아든 합격 통지서에 여울졌다.
1977년, 서울대 자연계열로 들어간 후 건축학과를 택했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이라는 생존의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던 고달픈 대학 시절이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버텨나갔지만 간혹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다. 건축과를 나오면 100% 취업이 되던 때라 국내 경기 호재와 함께 중동 건설 붐을 타보자 결심했다. 1982년,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을 통해 공사 현장 기사로 파견됐다.
“그 당시 중동에 가는 걸 ‘몸 팔러 간다’고 했어요. 국내에서 30만 원 월급쟁이가 거기 가면 80만 원 이상 받을 수 있었어요. 2.5배나 많았던 거죠.”
그는 4남 2녀 중 넷째 아들이지만 선친이 집안 살리려고 일본 광산에 돈 벌러 갔듯 그도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빚에 눌려 고 씨 가족이 야반도주할 거라는 소문까지 동네에 돌던 때였다. 바람이 불었다 하면 모래가 비처럼 내리고 모래밭에 달걀을 묻으면 익어서 나오던, 말 그대로 열사의 땅이었다. 그렇게 3년 3개월을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며 돈을 벌어 집안의 빚을 얼추 갚고 나니 20대가 저물고 있었다. 중동의 모래 열기처럼 식을 줄 몰랐던 건축 경기가 1980년대 중후반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경기 좋을 때는 고용했다가 일이 없으면 그냥 잘라버리거나 가차 없이 책상을 빼버리는 현실을 보면서 제 미래도 암울하게 느껴졌습니다. 말로는 기술 강국을 지향한다 하면서도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대우와 처우는 실망스러웠지요.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소모품 다루듯 했으니까요.”
기술사란 별을 두 개나 땄으나
그에게 도전은 일상이다. 길이 아니다 싶은데도 뭉개고 있을 이유가 없다. 미래를 다지기 위해 엔지니어로 전문성을 갖추기로 마음을 다잡고 퇴근 후 독서실로 직행해 자정까지 공부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의 노력으로 1991년 기술계의 최고봉이라 할 기술사 자격증을 땄다. 건축시공 기술사와 건축기계설비 기술사, 기술 분야 최고의 타이틀을 두 개나 갖게 되었다. 합격률은 5% 미만, 이공계에서 기술사는 그만큼 영예로운 이름이다. 그렇게 엔지니어로서 자긍심을 갖는가 싶었으나 제도적 구멍과 허점은 여전했고 깊숙이 들어갈수록 실망스러웠다.
이렇게 하늘의 별을 두 개나 땄지만 제대로 빛이 나지 않은 대신 그의 근성이 빛을 발했다. 모순과 불합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근성 말이다. 단합된 목소리와 응집된 힘을 내기 위해 2002년 대한기술사회를 발족, 초대 회장이 되어 기술사 제도 개선 운동을 펼쳤다. 문제가 있는데도 덮어두면 구성원들이 고통을 받고, 그 신음에 무심하면 사회 전체가 병들기 마련이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술사에 대한 처우가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변리사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기술사의 제 위치 찾기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금 회의가 일면서 이대로 고여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향 전환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수험생 가장, 37세 늦깎이 변리사로
엔지니어로 소위 잔뼈가 굵어가던 때, 인생을 전환하기엔 늦었다면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는 30대 중반에 그는 변리사 시험에 도전한다. ‘그간 무수한 시험을 치렀고 따지고 보면 인생 자체가 도전과 통과의 시험 치르기가 아닌가.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그때 포기하면 된다. 세상을 살면서 할걸, 하지 말걸 하는 후회는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6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두 딸을 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진로 변경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겪어왔지만 고생 중에 돈 고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수험생 가장’이 된 후 새삼 절감했다. 기술사 준비할 때와는 또 다른 압박감 탓인지 연거푸 두 번을 낙방했다. 첫 시험에서 1.1점 차로 떨어졌기 때문에 두 번째 시험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성적을 받아보니 결과는 더 나빴다. 또 한 번 고배를 마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이란 각오로 세 번째 도전에서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공부에만 매달리느라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설상가상, 하루는 독서실에서 돌아와 보니 네 살 딸애가 피를 쏟고 있는 거예요. 병원에서 진단 내린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이란 병명조차 무서웠지요. 원인 모를 피를 쏟고, 쏟았다 하면 좀체 멈추질 않는 거예요. 한방 치료를 통해 체질을 완전히 바꾸고 나서야 근 5년간 지속된 병세가 잡혔지요. 아내는 당시 둘째 아이를 가졌던 터라 만삭인 상태에서 큰애를 데리고 병원을 다녔는데 출산을 앞두고는 어쩔 수 없이 시골 어머니께 도움을 청했지요. 그런데 얼마 안 지나 이번엔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어요. 아내는 둘째를 이집 저집에 맡긴 채 입원 중인 큰아이와 어머니를 간병해야 했고, 저는 퇴근과 동시에 작은애를 찾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심청이 젖동냥하듯 작은애가 고생했지요.”
돌이켜보면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 재정적·가정적 위기를 딛고 고진감래하여 1995년 변리사가 된 기쁨은 그래서 더욱 컸다. 그해 응시자는 5000여 명, 이 가운데 30명이 합격했으니 약 150대1의 경쟁을 뚫은 것이다. 그는 1958년생 동갑 응시생과 함께 최고령 합격자로 37세에 늦깎이 변리사가 되었다.
변호사의 변리사 자동 자격 금지 법제화 이루다
변리사 자격 취득 후 성창특허법률사무소를 내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기술사 세계에서 보아온 불합리한 관행이 변리사 세계에도 고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변호사에게 변리사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제도가 그중 하나.
이 관행을 뜯어고쳐 법에 명시된 변리사 고유 권한을 되찾고자 그는 37대 대한변리사회 회장(2014~2016년)에 취임했다. 관성적으로 주어지던 변호사의 변리사 자격 자동 취득 금지를 법제화하기 위해 4000여 변리사회 회원의 수장이 되어 임기 2년 동안 총력전을 펼쳤다. 2015년 12월 31일, 회장 임기 만료 2개월을 앞두고 마침내 변리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변호사가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기 위해서는 6개월의 실무교육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후 매년 300~400명이 받던 자동 자격이 30~40명 선으로 줄었으니 법 효율은 90%에 달한 셈이다.
변호사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던 변리사 자격이 고 회장에 의해 75년 만에 사실상 폐지된 것이다. 변리사회 출범 이래 전례 없던 법 개정이자 고 회장의 승리였다. 그 일이 실제로 성사될 것이라 믿은 사람은 없었다. 4만 회원이 등록된 변호사회는 덩치만 해도 변리사회보다 10배나 크고 국회 상임위, 법사위 등의 80~90%를 변호사가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기 집단에 불이익이 되는 법안을 통과시켜줄 성싶냐는 게 상식이었고 또한 지배적 견해였기에.
“저라고 그걸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직접 뛰어들어보니 본질과 이치가 들어옵디다.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몸으로 뛰어보면 답이 나옵니다.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이 종종 나오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연임에 도전했다. 변리사회 회장의 연임 금지 규정이 폐지된 점 또한 도전을 부추겼다. 한 번 더 회장이 되면 변호사의 변리사 자동 자격 금지 제도 법제화에 이어 이번에는 법에 규정된 특허침해소송 대리권을 변호사로부터 오롯이 되찾아올 기회였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변리사회 회원 중 변리사 자격을 가진 변호사 50여 명이 조직적으로 투표를 한 것이다. (변리사회는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회원, 변호사로서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는 회원, 특허청 출신 회원, 이렇게 한 지붕 세 가족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자동 자격 제도 폐지로 불이익을 당하자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고 회장의 재선을 저지하고 나선 것.
‘눈엣가시이자 미운털 고영회’를 떨어뜨리기 위해 상대 후보를 적극 지지, 상대 후보와의 표 차는 투표한 변호사 수만큼 벌어져 465대415로 고 회장이 낙선했다. 이른바 역선택을 당한 것이다. 이후 시험 출신 젊은 변리사들의 선거 복기로 부정선거 정황이 드러나면서 신임 회장의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37대 고영회 회장에 이은 38대 회장이 두 달 만에 해임되어 변리사회 초유의 불명예를 안게 됐다. 사필귀정이었다.
물오른 인생 3막, 다시 쓰는 통합이력서
변리사 업계에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기며 20여 년 혼신으로 일했던 변리사에서 최근 그는 기술사 업무로 다시금 방향을 전환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거라더니 싫어서 나갔던 집을 30년 만에 돌아왔다고 할지, 환갑 즈음부터 처음 배운 도둑질인 기술사 업무에 나중 배운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변리사로서는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는 점도 작용했고요.”
현장 경력, 전문 기술사 경력, 법률 문제에 정통한 변리사 경력 등 제각기 핀 꽃이 연륜으로 버무려져 건설 분쟁 해결 전문가로 독보적 지위에 올랐다. 40년 경륜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이력서로 인생 3막을 연 것이다. 속된 말로 변리사로서는 한물갔지만 기술사로서는 한창 물이 오르고 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곧장 그 길을 가는 사람도 있지만, 돌아간다 싶었던 길을 지금 와서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30년 전 일이 다시 본업이 된 저처럼 말이지요. 현실이 고통스럽다 해도 그 고통이 미래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고통 자체도 지나고 보면 경험이란 측면에서 삶을 풍요롭게 하지요. 당장은 죽을 맛 같아도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태어났으니 고생도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긍정적 마음이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적 진리를 믿고 한세상 살아내야지요.”
이런 인생관을 가진 그에게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조차도 ‘참 좋은 시절’이 보장된 셈이 아닌가!
지난해부터 매년 60만 명에 달하는 베이비부머들이 만 65세 고령인구로 편입되고 있다. 이들은 노인이기를 거부하며 계속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사회는 이들을 노인으로 규정해 모두 은퇴시켜 골방으로 몰아넣는다. 뛰어난 역량을 갖춘 베이비부머도 예외는 아니다. 노인으로 편입되고 있는 베이비부머를 포함해 시니어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노년학 전문가인 한경혜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그 해법을 들어봤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그 나라에 대한 입국 비자를 받고 태어난다. 그런데 그 나라에 입국하기 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막상 입국하면 그때 비로소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 나라는 ‘노년기’라는 나라다.”
한경혜 교수는 베이비부머를 비롯해 많은 시니어들이 ‘노인’이라 불리게 됐을 때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로 노인을 타자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언급하면서, 메리 파이퍼의 ‘또 다른 나라’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 설명했다.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워낙 부정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노인, 나이 듦과 거리두기를 한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자신이 노인으로 분류되는 시점이 되면 뒤늦게 적응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노인에 대한 부정적·차별적 문화를 바꾸는 것이 베이비부머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한 교수는 노년학과 가족학 전문가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연구자다. 그는 “나이 듦은 개인의 내적 변화뿐 아니라 개인 간의 상호작용 과정”이라며 “나이가 들어 만 65세가 되더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라 불리거나 분류되는 걸 거부한다”고 말했다. 실제 많은 노인들이 자신은 ‘저 노인네들’과 다르다는 언급을 자주 한다. 젊고 활기차게 살기를 희망하고, 그러기 위해서 운동하고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주변에서 자신을 노인으로 대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이 노인이라는 나라에 이미 입국했고 이를 부정할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인이 참석하는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이 상당히 높다. 놀라운 점은 노인들도 이렇게 대답한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다. 특히 65세에서 75세에 이르는 프라임타임에 있는 초기 노인들은 노인으로 불리거나 묶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어떤 연령 집단보다 노인은 개인차 커
한경혜 교수는 “우리나라는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부정적이어서 노인 집단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며 “그러다 보니 노인들과 자신을 경계 짓고, 중장년들도 노인이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80 넘은 노인들도 자신만은 다른 노인들과 다르다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노인을 위한 상품이 시장에 등장해도 실질 소비자인 노인들이 거부해 시니어 시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노인이기를 원하지 않으니 노인이라는 타이틀을 건 상품이 잘 팔릴 리 만무하다. 실제로 국내 시니어 시장은 10년 넘게 규모가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으나 실질적인 성장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마케팅을 위해 액티브 시니어나 오팔세대 같은 긍정적인 용어를 만들어 기존의 노인 이미지와 차별화해 시니어 시장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 교수는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액티브 시니어와 오팔세대 같은 성공한 노인 집단이나 노년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마케팅 용어도 결국 한계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단순히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노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뿌리 깊다는 점이 근본적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노인을 획일적인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노인 집단 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노인 집단 내에서도 젊은 노인, 고령 노인 등 연령에 따른 차이가 있고, 학력과 삶의 경험 등 수많은 차이점이 가져오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많은 연구에서 노인 집단은 다른 어떤 연령 집단보다 개인차가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노인층이 적극적 소비자로서 스스로 드러내기를 주도한다면, 시니어 시장이 본격화되고 상당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노년학에서 대상으로 삼는 노인은 복지가 필요한 일반적인 시니어와 성공적인 노년을 만들어가는 액티브 시니어로 나뉜다. 한 교수는 “최근까지 노년학은 노년의 어려움, 노인 문제에 집중해서 연구되고 담론이 만들어진 경향이 있다”며 “높은 노인 빈곤률이나 황혼이혼 증가, 치매와 간병의 어려움 등 사회문제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더 커지고, 노인 인구 증가를 사회적 부담으로 보는 시각이 강화될 우려가 크다. 나이 듦의 긍정적 측면, 노인을 사회적 자원으로 활성화하는 방안 등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연령 구분 사회를 세대 통합 사회로
그런데 이런 변화를 모색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시니어들에게 너무 폐쇄적이고, 기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다. 한경혜 교수는 “베이비부머가 가진 뛰어난 인적 자원을 생각하면 이들을 활용할 방법이 나와야 한다”며 “시니어들을 역(易)연령보다 기능적 연령으로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 연령에 따라 구분하는 사회를 이제는 연령 통합 사회, 세대 통합 사회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태어난 생일에 따라 달력이 결정하는 역연령이 아니라, 각 개인이 가진 신체 연령이나 재능 등 실제 의미 있게 작동하는 기능적 연령으로 시니어를 개인마다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한 교수는 최근 노년기에 편입되기 시작한 베이비부머가 노인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베이비부머는 부모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학력이 높다는 점에서 사회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을 뿐 아니라 그 수도 많다.
한 교수는 “베이비부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집단이 함께 노년기에 진입해 생애 후반기 경로를 개척한다는 점에서 흔히 선구자라 불린다”며 “이들이 어떻게 노년기를 보내느냐가 노인, 노년에 대한 앞으로의 문화를 이끌 동인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밝혔다. 또 그는 “전쟁 후 경제적 활성화가 이뤄지는 시기에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낸 베이비부머는 이런 면에서 운도 좋았고, 또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의 열매도 누린 집단”이라며 “액티브하지 못한 동년배들을 위해 시민의식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발전을 주도하며 사회경제적 과실을 따먹은 베이비부머가 액티브 시니어로서 사회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시민의식이나 사회에 대한 기여는 베이비부머 자신의 노년기 삶의 질, 행복과의 관련성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한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겪게 되는 신체적·사회적 변화는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직장과 자녀 등 평생을 바친 삶의 중요한 축이 노년의 삶에서는 빛이 바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려고 그렇게 애쓰며 살았나’, ‘내 삶의 보람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은퇴하고 나이를 먹었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커진다”며 노년기 의식의 흐름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노후 준비와 건강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된다. 하지만 고령층으로 갈수록 삶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게 되는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활동이 그 해답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한경혜 교수는 최근 오픈한 ‘노년학 제3의 공간’ 연구소를 중심으로 노인, 노년기에 대한 연구를 즐겁게 이어갈 예정이다. 노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나 편견은 노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탓이라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탄탄한 연구를 통해 노인의 적확한 실상을 보여주려는 목적의식을 근저에 두고 있다. 한 교수와 그의 뜻을 이어받은 이들이 노년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 한국에서 노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그의 바람처럼 베이비부머가 적극적으로 시민 참여에 나서고 노인 문화를 긍정적으로 바꿔, 국내에서도 시니어 시장이 꽃 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경혜 교수는 최근 노년기에 편입되기 시작한 베이비부머가 노인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베이비부머는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학력이 높은 액티브 시니어로 사회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건강한 노후를 위해서 면역은 필수인데, 잘못된 상식과 습관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면역력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살펴보고, 올바른 면역 상식을 소개한다.
면역력은 높을수록 좋을까? No!
높은 면역력을 건강의 지표로 여기지만,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다. 최근 코로나19 환자의 상태를 급격히 악화시키는 현상으로 잘 알려진 사이토카인 폭풍이 바로 그 예다. 사이토카인 폭풍 외에도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은 면역 과잉으로 인한 대표적인 사례다.
고기를 먹으면 면역력이 떨어진다? No!
치아와 잇몸이 약한 시니어는 씹기 힘들고 소화가 어려워서 육류 섭취를 꺼린다. 하지만 육류를 통해 섭취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면 면역력이 떨어진다. 전문가들은 50세 이후 단백질을 체중 1kg당 하루 1.2g 정도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면역력 향상에 찬물 샤워가 좋다? Yes!
찬물 샤워가 면역 체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찬물 샤워를 하면 백혈구 수가 늘어나고, 이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우리 몸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찬물 샤워는 혈액 속도를 느리게 만들기 때문에 노인, 심장병 및 고혈압 환자는 피해야 한다.
저체중은 감염병에 취약하다? Yes!
저체중은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감염성 질환에 취약하다. 특히 저체중 노인은 영양소 섭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면역 세포의 기능이 약해지고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감염에 쉽게 노출된다.
백신 후유증 클수록 면역이 생긴다? No!
백신의 부작용과 효능은 무관하다. 서울대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 공동 연구팀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과 화이자 백신 접종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상 반응의 정도에 따른 백신 효과의 차이는 없었다.
수면이 백신 효과에 영향을 미친다? Yes!
수면이 백신 효과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이런 효과는 독감 주사, H1N1 독감 주사, A형 간염 주사와 같은 다른 백신 주사에서도 관찰됐다. 백신 접종 당일에는 평소보다 수면 시간을 늘리는 게 좋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출현으로 면역력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면역은 우리 몸에 침투하는 바이러스와 같이 해로운 물질에 대항하는 천연 방패 역할을 한다. 건강한 노후를 위해서 면역은 필수인데, 잘못된 상식과 습관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면역력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살펴보고, 올바른 면역 상식을 소개한다.
면역력은 높을수록 좋을까? (X)
높은 면역력을 건강의 지표로 여기지만,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다. 최근 코로나19 환자의 상태를 급격히 악화시키는 현상으로 잘 알려진 사이토카인 폭풍이 바로 그 예다. 이 현상은 인체에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면역 물질이 과다하게 분비돼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사이토카인 폭풍 외에도 바이러스와 싸우는 림프구가 많아지면 면역 과잉으로 인한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이 발생한다.
고기를 먹으면 면역력이 떨어진다? (X)
치아와 잇몸이 약한 시니어는 씹기 힘들고 소화가 어려워서 육류 섭취를 꺼린다. 하지만 육류를 통해 섭취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면 면역력이 떨어진다. 전문가들은 50세 이후 단백질을 체중 1kg당 하루 1.2g 정도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따라서 면역력 강화를 위해 매일 일정한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박민수 서울ND의원 원장은 “빈혈이 심한 경우엔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한 쇠고기 등의 붉은 고기가 괜찮다”라고 설명했다.
면역력 향상에 찬물 샤워가 좋다? (O)
찬물 샤워가 면역 체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 연구팀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온수 샤워 그룹보다 냉수 샤워 그룹이 감기 같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29% 정도 낮았다. 찬물 샤워를 하면 백혈구 수가 늘어나고, 이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우리 몸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찬물 샤워는 혈관 수축을 일으켜 혈액 속도를 느리게 만들기 때문에 노인, 심장병 및 고혈압 환자는 피해야 한다.
저체중은 감염병에 취약하다? (O)
저체중은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감염성 질환에 취약하다. 특히 저체중 노인은 영양소 섭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면역 세포의 기능이 약해지고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감염에 쉽게 노출된다. 실제로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저체중인 사람의 폐결핵 발생 위험은 정상 체중인의 2.4배다. 박 원장은 “저체중 개선을 위해서는 단백질 및 지방 섭취와 더불어 근력 운동으로 근육량을 늘리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백신 후유증 클수록 면역이 생긴다? (X)
백신의 부작용과 효능은 무관하다. 서울대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 공동 연구팀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과 화이자 백신 접종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상 반응의 정도에 따른 백신 효과의 차이는 없었다. 박완범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연구 결과 백신 접종 후 부작용의 심각도와 항체 형성은 특별한 관련이 없었다”며 “부작용 발생 시 우려하지 말고 타이레놀 등 진통제를 복용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수면이 백신 효과에 영향을 미친다? (O)
수면이 백신 효과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영국의 의학 저널 ‘란셋’(The Lancet)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백신을 맞은 후 4시간 이하의 수면은 백신 효과를 낮추는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로 이런 효과는 독감 주사, H1N1 독감 주사, A형 간염 주사와 같은 다른 백신 주사에서도 관찰됐다. 백신 접종 당일에는 평소보다 수면 시간을 늘리는 게 좋다. 접종 당일 잠을 충분히 자기 위해서 일주일 전부터 일정한 시각에 일어나는 연습을 하면 좋다.
지난 28일 방송된 MBN ‘속풀이쇼 동치미’ 459화에서는 여성의 갱년기 증상에 관한 이야기가 방송을 탔다.
이날 50대 배우 김성희는 “2년 전에 갱년기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완경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너무 무의미하고 모든 것이 무기력했다”고 밝혔다. 이어 “밥도 못 먹고 늘 슬프고 죽고 싶었다”며 “캐스팅도 안 되고 애만 기르고 봤더니 얼굴도 변해 있었다”고 토로했다.
같은 또래의 여성 출연자들은 그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2017년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우울증 환자는 61만4379명에 달한다. 이중 여성은 40만8191명으로 약 66%를 차지한다. 여기서 40~59세 중년 여성은 13만여 명으로 여성 우울증의 약 32%, 전체 우울증의 약 22%로 적지 않은 수치다.
많은 중장년 여성들이 매사에 흥미를 잃고 무기력해짐을 경험한다. 예전 같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사소한 일에 속이 상하고 잘 잊지도 못한다. 큰 이유 없이 자신감도 떨어지고 잦은 분노와 우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40~50대 여성 우울증 원인은?
과거에는 갱년기 우울증의 원인을 노화로 인한 외모 변화나 떨어지는 신체 기능으로 인한 ‘상실감’과 같은 심리 원인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신경생물학적 원인이 갱년기 우울증 발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증거가 밝혀지고 있다.
갱년기에 대한 정확한 의학적 용어는 ‘폐경이행기’다. 보통 여성은 40대 중반 정도부터 4~7년 정도의 폐경이행기를 거쳐 평균 50세에 최종 월경을 하고 1년이 지나면 완전한 폐경으로 진단한다. 이 시기를 ‘폐경이행기’라고 하며, 여성 대부분은 55세 전에 폐경에 이른다.
폐경이 찾아오면 급격한 호르몬 변화를 겪는데 이때 발생하는 여성 호르몬 결핍 증상 중 하나가 ‘우울증’이다. 여성 호르몬 감소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활성화시키고,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분비량을 감소시킨다.
일반 우울증과 다른 점은?
갱년기 우울증은 일반 우울증과 다르게 갱년기 증상에 따른 신체 증상이 동반된다. 호르몬 변화가 뇌 기능에도 영향을 미쳐 인지 증상도 나타난다.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현국 교수는 “갱년기의 호르몬 변화는 전두엽과 선조체라는 뇌의 부위를 연결하는 부위에 과부하를 유발해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든다”며 “이에 따라 갱년기 우울증에는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기억력 감퇴 같은 인지 능력 이상 증상을 동반한다”고 말했다.
또 임 교수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자기감정을 억제하는 데 익숙해 몸에 여러 증상이 발생한다”며 “소화가 안 되거나 변비가 생기는 등 이유 없이 몸에 크고 작은 이상 증상이 생겨 병원을 찾는데 알고 보면 우울증 증상인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는 갱년기 우울증 증상이 전형적이지 않아 쉽게 판별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감정을 억제하는데 익숙해지는데, 우울증으로 생기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몸에 곳곳에서 엉뚱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질병을 일으키는 원리와 비슷하다. 감정 작용은 전기적 작용과 화학적 물질, 호르몬을 방출한다. 그런데 감정을 억제하면 이런 신체 활동을 막아 몸의 방어 기능까지 망가뜨리게 된다.
갱년기 우울증 예방과 극복은?
전문가들은 갱년기 우울증을 예방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서적 지지와 건강한 생활습관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① 도움 청하기
혼자 참지 말고 남편이나 자녀, 친구 등 주위 사람에게 증상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사람들의 관심과 정서적 지지는 우울증에 큰 도움이 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다.
② 규칙적인 생활습관
평소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잠드는 생활만으로도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 또 일정한 시간에 건강한 식단으로 끼니를 챙겨먹는 식습관도 중요하다. 하루에 30분 이상 햇볕을 쬐며 운동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준다. 햇볕을 충분히 받으면 세로토닌 분비가 증가하며 기분이 좋아지고, 꾸준히 운동하면 떨어지는 체력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기분 전환까지 꾀할 수 있다.
③ 취미생활
아무리 무기력하고 우울하더라도 막상 본인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면 기분을 바꿀 수 있다. 거창한 취미활동이 아니더라도 사람들과 만나 잠깐 수다를 떨며 교류하는 것도 취미가 될 수 있다.
임 교수는 “갱년기 우울증에는 잘 먹고 잘 자며 충분히 쉬는 게 제일 중요하다”며 “현재 갱년기를 겪고 있을 베이비부머 세대는 다른 세대보다 더 쉬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 쉬어야 갱년기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증상이 심하다면 치료가 필요하다. 갱년기 우울증을 겪는 여성 대부분은 나이가 들면서 겪는 어쩔 수 없는 기분 변화라고 느끼고 방치한다. 그런데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놔두면 증상이 오래 지속돼 타인과의 관계를 위협할 수 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산부인과 김선미 교수는 “폐경은 질병이 아닌 정상적인 노화의 단계지만 폐경 이행기에 관련 증상이 심하다면, 폐경호르몬요법과 같은 치료법으로 증상에 맞는 치료를 권장한다”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평생 먹고 살 만한 재력을 갖춘 중장년 여성들에게도 폐경과 함께 갱년기 우울증이 찾아온다. 그만큼 갱년기 우울증은 본인이 부족하고 약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 노화를 겪으며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므로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우울증을 해소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2004년 2월 28일 난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유는 40년간 몸담아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쫓겨나다시피 잃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교육계에 퍼진 정년 단축이 내게 먼저 닥친 것이다. 그렇다고 난 미리 준비한 계획은 전연 없었다. 만 61살 일손을 놓기에는 빠른 나이다. 당장 내일부터 할일이 없다. 가진 기능이나 특기도 없고 남과 같이 기운이 세거나 막노동을 할 정도의 힘도 없다. 또 바둑이나 장기, 화투 등 오락도 취미도 없고 내놀만한 운동기능도 전연 없다. 오직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샛님같은 아주 여린 봄꽃같은 난 모든 일에 쓸모가 없었다.
퇴직 후 생활은 기상하여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전철을 타고 종점에 도착해 값싼 점심과 목욕이 전부며 할 일이 없이 멍하니 약장사 구경만 종일토록 관람하며 흘러간 유행가에 젖어 마실 줄 모르는 막걸리 한 두잔에 취하거나 해져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길 몇달째 참다참다 폭발한 아내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살바에는 다 죽자고” 짜증을 낸다. 이러길 수차례 어느날 울분과 흥분을 참지 못한채 길거리를 방황하는 난 가슴이 답답하여 길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지나가는 고등학생의 신고로 119가 몇분만에 도착하여 난 분당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평생 처음타본 응급 앰뷸런스에 계속 말을 시키는 간호원 구급대원의 봉사에 처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수분 후에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기본 검사와 링겔 등 응급처치를 받고 병실 구석 후미진 코너 침대에 눕혀졌다. 사방을 살펴보니 별별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 목숨을 거둘 것 같은 나이든 할머니, 뼈만 앙상하여 마치 해골같은 머리가 흰 할아버지, 한쪽 발이 없는 중년의 남자, 울다지쳐 버린 갖난애, 거기다가 지독한 소독약 냄새.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없었다. 아비규환 속 분위기에 젖기도 전에 난 담당 간호원에게 이제 멀쩡하니 퇴원하겠다고 말하니 반기는 기색을 하며 뒤늦게 찾아온 아내가 퇴원 수속을 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와 시원한 내방에 누워 명상에 잠겼다. 병원에서 본 환자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내 나이 61세,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는 너무 젊은 나이임을 실감했다. 뭔가 해봐야하고 한번 죽이되든 밥이되든 시도해 보고 후회해도 늦지않을 것 같아, 난 큰 결심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벼룩시장’, ‘교차로’ 등 길가에 비치된 정보지를 봤다. 내게 맞는 일감은 없었다.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친구와 만나 울분을 풀 셈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았다. 친구와 어울려 동물원을 걷는데 눈에 뜨인 광고판에 ‘한국에서 처음 시도하는 동물해설사’ 양성기사가 확 눈에 들어왔다. 난 친구에게 컨디션이 안좋아 먼저 간다는 핑계로 일찍 돌아와 동물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나는 동물해설사이자 한 마리의 영리한 원숭이
“여보셔요. 거기 서울동물원 기획과죠. 동물해설사를 뽑는다는데, 나이 제한은 없나요?”
“어떤 서류를 갖추어야 하나요?”
난 급한 마음에 여러 가지 궁금한 문제를 애원하다시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다양한 서류를 갖추어 인터넷 접수를 했다. 다행히 서류전형엔 합격했다. 그뒤는 몇 주간 강습이었다. 강의 내용은 수많은 동물과 멸종위기의 동물 종보전, 자연생태계 복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을 막고 인간과 공존하는 법 등 다양한 전문적인 교육이었다. 교육이 끝나면 필기시험과 면접 실연을 통해 실제 동물 앞에서 뭇관중이 보는 가운데 동물해설을 하며 최종선발을 거쳐 43명을 뽑는데 난 당당히 합격했다. 난 기뻐 날뛰면서 방안을 빙돌며 괴성을 질렀다. 아내가 놀라 날 쳐다보았다. 마치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 같았다.
이렇게 환희의 순간을 만끽한채 동물원의 출근은 계속되었다. 동물원의 일과는 날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했다. 이유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그날 체험학습을 올 아동 수 대로 당근, 배추잎(케일), 사료 등을 손질하는 것인데 당근은 하나하나 씻어 크기가 알맞게 자른 뒤 바구니에 준비하며 물기를 닦는 것이다. 그리고 코스별로 해설을 하며 체험교육을 시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최고의 광대처럼 재미있고 교육적인 산 교육이어야 인기가 있어 환영받는다. 즉 해설 방법 및 내용은 이러하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셔요. 저는 동물해설사 xxx입니다. 제 별명은 영리한 원숭이구요. 오늘은 여러분을 남미 페루에서 많이 사는 기니피그 먹이주기, 다음엔 말, 나귀 다른 점 관찰, 다음에 사막에 사는 미어캣은 무엇을 즐겨먹나요? 여러분이 만약 이 침에 쏘인다면 생명이 위험하지만 이 동물은 즐겨먹는 전갈을 맛있게 먹지요. 다음엔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토끼 먹이주기, 꼭 장갑을 끼고 먹이를 줘야해요 하며, 케일잎과 배추잎을 잡는 법을 알려주고 다음엔 원숭이, 그리고 염소, 양 등의 특징을 설명하고 먹이를 주면 돼요. 먹이를 던지거나 동물을 귀찮게 하면 안돼요.”
머리를 흔들며 재롱을 떨고 나이 많은 노인답지 않게 귀여운 표정, 손짓으로 윙크를 날리며 분위기를 잡고 해설이 끝나면 지도일지를 깨알만한 글씨로 가득 채운 뒤 일과를 반성하고 정리한 뒤 귀가하는 것인데 이 생활이 어찌나 즐거운지 나의 즐거운 변신은 대만족이며 거기다가 듬직한 해설사 월급을 받는다. 도랑치고 가재 잡고 하듯이 건강챙기고 시간보내고 급료 받는 나이든 늙은이로는 최대한 대우며, 피복, 모자, 소지품, 간행물 등 다양한 혜택을 받아 최고의 나날을 보낸다. 정말 교직에 버금가는 변신이다. 나의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 변신을 준비하고 실천했다.
실패의 나날에서 난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
-모형항공(글라이더, 고무동력 입상 및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동물원 해설이 없는 쉬는 날의 무료함을 달래고 내 취미생활 건강을 위해 고심하던 어느날 난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 블랙이글 축하비행과 공군참모총장배 스페이스 첼린져 모형항공기 대회를 참관했다. 아주 멋진 행사며 이 늙은 나이에도 나도 참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다. 내 자신도 할 것 같아서 서울과학사를 찾아가 모형항공기 셋트를 구입했다. 설명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만들었다. 밤을 새우면서 거의 완벽하게 조립하여 인근학교 운동장에서 시험 비행을 해봤다. 처음 만든 모형비행기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날고 체공 시간은 1분대였다. 몇 번을 날려봐도 아주 잘 날라서 기분이 아주 좋았고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몇 번을 연습했다.
그리고 예선대회 즉 경기, 인천 예선대회가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에서 있었는데 그 대회에 참가했다. 내 차례가 되어 공군 보조원이 50m 후방에서 글라이더를 날려 주는데 왠지 몹시 서툴러서 믿음이 가지 않아 몇 번을 뒤돌아 보면서 뛰는데 글라이더가 영 상승을 하지 않고 왼쪽으로 “휙” 곤두박질하며 앞날개가 활주로 바닥에 부딪쳐 두동강이로 갈라져 1차 비행은 0점이었다. 난 당황해서 날개 조각을 회수하고 2차 비행 순서만 기다리고 있는데 남은 한 대 글라이더도 날개가 튼튼하지 못해 날개 중앙에 금이 가있었다. 급히 강력 접착제를 바르고 순서를 기다렸다.
두 번째 마지막 시합에서는 옛학교 과학주임이 와서 보조역할로 글라이더를 뒤에서 잡아주어 사수, 조수, 보조가 맞아 멋지게 바람을 가르며 높은 창공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앞날개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망가진 채 공중에서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에 꼴아 박았다. 더 이상 기회도 없고 글라이더도 없어 퍽 아쉬웠지만 난 대강 비행기 잔해를 끈으로 묶어 보루지 박스에 쳐넣고 승용차편으로 귀가했다. 1년간 공들인 노력이 허사였고 그 공역과 재료비 등이 너무 아까워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무참하게 실패한 나는 집에 돌아와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하며 내년을 기약했다.
실패의 원인분석
◎ 모형 항공기가 튼튼하지 못해 쉽게 부서졌다.
→ 다른 참가자들은 낚싯대 카본으로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 재료 문제
◎ 견인자(사수)와 보조자(조수)의 싸인이 전연 안 맞음
→ 혼자만의 힘으로는 글라이더를 띄울 수 없음. 보조자 대동해야 함. : 보조자 양성
◎ 바람의 강약에 맞는 견인 연구
→ 견인 기술 부족. 연습이 필요함.
또 실패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또 재료 및 여러 가지 계측장비 등을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또 기록이 좋은 모형항공기는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어 살펴봤다.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한국 최고의 장인에게 사사 받았다. 그러니까 한국 모형항공의 대부 격인 경복궁 옆 동학과학 심xx 사장의 50년 이상의 노하우를 하나씩 익혀가며 모형항공기 킷트 공장제품을 이용하지 않고 수제품을 하나씩 만들었다. 즉 앞날개, 동체 수평, 수직꼬리날개 종이는 외제를 사서 가볍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해에 대한 준비를 하나씩 진행했다. 제작 기술도 늘고 요령이 생겨 견인방법도 바람의 세기를 큰 연을 만들어 날리면서 익혔고 이탈 및 체공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는 나의 각오는 연습으로 더욱 자신을 얻어갔다.
실패 후 1년이 지나 난 또 제 10 전투비행단 활주로에 시합을 위해 섰다. 조수는 우리집 차남이다. 평소에 같이 호흡하며 연습을 한 터라 손발이 “착착” 맞았다. 내 차례가 되어 계측하는 심사위원 대위의 신호가 떨어졌다. 난 무수히 연습을 한 터라 자신있게 센바람을 줄의 길이와 느슷함과 당김의 조화를 섞어 요리조리 걷다 뛰다하며 글라이더를 마치 살아있는 황새처럼 어루고 달래며 하늘 높이 띄우며, 그러니까 상승기류를 찾아 마치 강태공의 잉어낚시인양 뛰면서 글라이더 상태를 보며 살펴시 이탈시켰다. 많은 참가자와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무한대∞”를 연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일반부에서 3분(1차), 2차 3분 도합 6분으로 1위, 금상을 받았다.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 상을 받는다고 축하박수가 유난히 컸다. 이렇게 예선은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고 회심의 미소를 먹음은 채 기쁜 마음으로 본선 대회를 준비했다. 대회는 9월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지만 난 마음을 다시 잡고 제작 및 견인을 더욱 열심히 했다. 글라이더는 완전히 터득했다.
새파란 멍이 온 몸에 퍼져 기력이 쇠약해도 고무동력기는 내려야 했다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본선, 공군참모총장대회, 고무동력기 이야기. 더 강하게 변신한 나의 모습
글라이더는 전국을 제패하고 몇 년간 노력 끝에 제 1인자로 자리메김 다. 이제는 고무동력부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역에는 값비싼 외국제품 및 부속으로 무장한 전국의 과학사의 문하생들이 주름잡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거기다가 최신장비, 풍향풍속 계측기, 강력한 드릴로 신축성이 뛰어난 고무줄을 사용하는 그들을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끈기와 변신의 귀재인 나는 하나씩 착착 계획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외제 고무동력기의 설계도를 수소문 끝에 구입하여 하나하나씩 내 기술로 개조했다. 고무동력기 동체, 외제는 값비싼 두랄루민·티타늄 등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이점을 가벼운 플라스틱을 말아 가늘게 쪼갠 대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트러스 공법으로 동체를 만들었는데 단단함은 물론 가볍기가 기본동체의 1/3 무게도 안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또 프로펠라의 크기가 기성품은 작기에 대추나무로 세밀하게 깎았고 고무줄은 미제를 구입했다. 또 프로펠라를 돌려 고무줄을 감는데 조수가 꼭 있어야 하는 번거러움을 덜기위해 혼자서도 고무줄을 감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다. 즉 강력드릴에 강철고리를 부착시킨 뒤 프로펠라 걸이를 세워있는 기둥이나 나무에 감고 프로펠라를 회전시켜 감는 방법인데 어른이 잡아주는 힘보다 서너배 많이 감고 아주 편했다. 이렇게 만전을 기한 나의 변신 기술은 공군참모총장배 본선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가슴쓰린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본선대회 1차 시기에서 연병장의 축구 꼴대에 고무줄 감기와 드릴을 이용해 두서너배 많이 감은 고무동력기를 날렸는데 연병장 주위 아주 높은 반절쯤 죽어가는 소나무에 걸려 프로펠라는 허공을 향해 “빙빙”돌면서 ‘퍼덕’ 거렸다. 급히 달려가 행사 보조위원에게 내려 줄 것을 이야기했다. 보조요원은 철제 사다리를 펴서 준비한 장대로 내리려고 애썼지만 고무동력기에 닿지 않고 위험하다는 핑계로 포기하라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난 보조원의 만류도 뿌리치고 사다리를 올라 소나무에 다람쥐처럼 올라가 장대에 갈쿠리를 달아서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고무줄이 가지에 감겨 풀리지 않아 한참만에 겨우 비행기를 내려서 떨어트리고 사다리가 걸쳐진 나무둥지를 디디는 순간 사다리가 넘어가 함께 떨어져 풀숲에 내동댕이쳐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회수한 비행기를 손보고 날개를 바로잡고 고무줄을 바꿔 꿰어 다시 드릴로 감아 마지막 2차시기에 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차시기 비행 체공 기록은 만점 3분 무한대였다.
내가 속한 조에서는 1등인데 다른 조의 기록이 궁금해서 각조의 기록을 조마다 쫓아 다니며 살펴봤다. 만점은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전체 시합이 끝나고 시상식만 남았는데 난 기록이 좋아 늦게까지 대기했다. 몇 시간 뒤 시상식이 열렸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는 마지막이었다. “일반부 고무동력 금상, xxx” 내 이름이 호명됐다. 별이 4개이신 공군참모총장님이 직접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시며 빙그레 웃으시며 “노익장을 과시하니 보기 좋습니다”하시며 부상과 상장을 주셨다. 그리고 기념촬영. 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국을 제패한 벅찬 변신이었다.
영광뒤에 따른 무서운 변화에 난 몇 달을 고생하며 치료에 온 정신을 쏟았다
-고무동력기를 내릴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아픈 이야기 (낙상사고 후유증에 헤멤)
하지만 시상식이 끝나고 귀가하는 승용차 안에서 엉덩이와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엉치뼈 그 다음엔 허리, 다음엔 목 등 차가 흔들릴 때마다 통증은 더 심했다. 난 천안 휴게소에서 내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팬티를 내리고 아랫도리를 살펴봤다. 멍 비슷하게 푸르슴한 색이 하체에 내려앉았다.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차를 타고 귀가했다. 금메달을 딴 기분이 가시지 않았기에 약간의 통증은 견딜만했다.
하루가 지났다. 통증은 온몸에 퍼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온몸을 살핀 뒤, 멍을 보고 주사와 처방전을 간호원에게 시키며 한달 가량 쉬면, 멍이 가실거니 걱정 말라며 진료를 마쳤다. 약국에서 복용약을 받아서 복용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온몸에 번진 시퍼런 멍, 거기다가 성기며 고환까지 자주빛 멍이 소변을 볼 때마다 공포가 더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난 아내 몰래 한방병원을 방문했다. 한의사가 내 온몸을 보는 순간 혀를 차며 “빨리 왔어야지요. 이지경이 될 때까지 참고 있어요. 피가 굳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하며 날 나무랬다. 그리고 온몸에 수없이 많은 침과 뜸을 뜨고 1시간 쯤 후엔 부항을 뜬다며 엉덩이 부분을 내리고 부항을 수십차례 색이 진한 부분마다 검붉은 피를 뽑았다. 참 신기하고 시원했다. 이러길 하루 건너 두달 치료 끝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 처음으로 한의학에 경이를 표했다.
멍이 가시자 마자 나의 변신은 계속되었다. 각종 모형항공대회와 더 나아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여 대표자격을 땄다. 그러니까 모형항공의 귀재로 변신한 나는 고등학교, 중학교 심지어는 경기도 과학연구원 위촉 강사로 뽑혀 모형항공 지도를 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드론이 대세라 막이 내렸지만 퍽 아쉽다. 그렇지만 난 드론에 도전하기엔 너무 손놀림이 늦어 포기했다. 내가 할 일이 아니기에.
낙방의 고배를 마시며 다져지는 나의 글쓰기 실력은 마침내 빛을 보았다
-백일장에 도전한 나의 이야기
나는 모형항공기 기능 섭렵을 끝내고 또 다른 변신을 꾀하던 어느 날 문득 백일장대회 현수막을 지나가던 길에서 눈여겨봤다. 또 변신의 기회를 잡으려고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먼저 서울 ‘교보문고’를 방문해서 백일장 입상문집을 사서 탐독했다. 그리고 입상작품의 특징과 글의 짜임, 쓰는 요령을 습득 뒤 나도 백일장대회에 참가했다. 내 딴에는 정성껏 바른 글씨와 내용을 그럴싸하게 써서 제출했다.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입상자 발표가 있는데 내 이름은 없고 정성을 쏟은 보람도 없이 낙방이었다. 영문을 몰랐다. 떨어진 이유를.
돌아오는 전철에서 난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반문해봤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그 뒤 계속 백일장대회에서 낙방을 연거푸 서너차례한 뒤 난 그 어떤 1% 부족한 내 자신을 찾았다. 그러니까 난 겉만 번지르한 실속 없고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만 늘어놓고 감동이 없는 허황된 글을 쓴 것이다.
내 결점을 찾은 뒤 백일장 대회를 기다린 어느 날 대전 동구에서 ‘우암송시열’ 백일장이 있었다. KTX를 타고 원거리 대회를 참가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문사가 참여한 전통 있는 대회라 난 기가 팍 죽었다. 축하공연이 끝나고 글제가 발표됐다. 주제는 ‘어머니’였다. 난 어머니와 같이 산 50년을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내 어머니는 70여리가 넘는 먼길을 걸어서 쌀을 머리에 이고 자취하는 전주의 언덕빼기 집까지 부식을 마련하여 난 배고픔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그리고 내가 교사로 발령을 받아 전등불도 안 들어오는 산간 벽지 오지 학교에 부임했을 때 삼시세끼를 따뜻한 밥을 해주시며 허름한 관사에서 동고동락하시며 내 뒷배를 후원하셨는데 끝내는 영화를 못 누리신 채 돌아가셨는데 눈물겨운 사연을 하나하나씩 깨알같은 글씨로 써냈다.
그뒤 서너 시간 뒤에 입상자 명단이 벽에 붙고 호명이 되었다. “수필부 금상, xxx 나오셔요” 처음으로 받은 상 그것도 장원이었다. 돌아오는 KTX열차가 왜 그리 느린지 난 처음으로 느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영광은 서울 한강 ‘구상백일장’, 고양 ‘어르신 백일장’, 수원 ‘정조대왕승모백일장’, 평택 ‘사랑사랑백일장’ 등 무수한 영광을 안은 채 난 제 2의 변신을 계속했다. 늙은 나이에 그 기쁨은 날 흥분케 했고 생에 대한 그 어떤 자신이 생기는 나날이었다. 난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변신을 꾀하고 싶어 도전을 계속했다.
젊은이와 경쟁에서 스피드를 요하는 시합은 무리인가
-KBS1 ‘우리말 겨루기’에서 변신은 요원한 길인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40분 KBS1 TV의 ‘우리말 겨루기’는 날 들뜨게 한다. 그러니까 방영되는 월요일에는 모든 약속과 내 생활은 비상이다. 몇 년째 노트와 동영상을 캠코더를 찍어보고 여기에 수반되는 문제집, 국어사전, 속담, 사자성어, 크로스워드 책. 필요한 서적은 모두 구입해서 보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모두 구입하여 보고 준비는 매일 밥 먹듯이 한다. 하지만 달인을 향한 내 꿈은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다. 석두일까? 자책도 해봤다. 치매증상이 있나? 치매 검사도 했지만 치매는 아니었다.
‘우리말 겨루기’ 예심이 인터넷에 뜨면 내 마음은 왠지 급해진다. 그러니까 예심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KBS홀에서 수많은 경쟁자와 한판 겨루기를 한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지필고사 20문제를 크로스워드, 십자말 칸을 인쇄한 용지와 대형 스크린을 비추면서 두 번 읽어주고 단 20분만에 답안지를 회수하여 30분쯤 채점이 완료되면 참가자의 10% 정도 합격자를 불러 2차 면접 및 실기 그리고 방송에 하자가 없고 유모어, 또는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재미있고 재치있는 참가자를 선별하는 테스트 과정이다. 난 예심에는 언제나 수월하게 통과하며 본방에 출연까지는 항상 무난하게 뽑힌다.
그 이유는 다 까닭이 있다. 40년간 교직에서 다져진 말솜씨, 동물해설사로 활동하면서 익힌 유모어, 평소 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가곡 레파토리가 있다. 예전 유럽 현지 이탈리아에서 외국 여행객 이탈리아 가곡 부르기에서 상을 탄 저력이 있기에 말이다. 예심을 합격한 나는 마지막 단계 면접에서 뜻밖에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는 면접심사위원의 청에 망설이다 정색을 하며 무대에서 그 당시 뜨는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열창했다. 면접대기자와 심사위원 전원이 앵콜을 연호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슈벨트의 세레나데’를 더 열정적으로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모두들 “늙은이가 웬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르지”하며 혀를 찼다.
며칠 후 인터넷에 합격자의 이름이 떴다. xxx 상위에 랭크된 내 이름 석자. 본방송 출연을 연락받고 밤새워 깨알같은 국어사전 글자를 돋보기도 쓰지않고 보던 어느 날 더 이상 눈이 침침하고 흐려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을 했다. 보름 후엔 글씨가 똑똑하게 보였다. 그런 어느 날 ‘우리말 겨루기’ 녹화가 있으니 10시까지 KBS 녹화장이 있는 본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담당 PD에게 받고 새옷을 입고 이발을 하고 달려갔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것이다. 이윽고 출연자 전원이 당도하여 분장실에서 마치 장가가는 새신랑마냥 아주 정성이 담긴 분장을 받았다. 기분이 황홀했다.
한 시간 뒤 녹화방송으로 ‘우리말 겨루기’가 엄지인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첫 단계부터 중간까지는 최상위 점수로 정상이었다. 우승이 눈앞에 보이며 젊은이들도 별것 아니구나 하며 자신이 생겼다. 마악 누름단추 벨을 누르며 우승을 확정짓고 싶은 감정이 앞섰다. 지나친 과욕이었다. 기다리면 결승단계에 진출하는데 감점이 시작됐다. 오답이 연속된 나의 경거망동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끝났다. 멋진 변신, 변태는 지나친 욕심과 만용 때문에 끝났다.
하지만 한 번 출연한 사람은 2년을 기다리기에 매미는 땅속에서 수년을 기다리는데 난 다시 변신의 칼을 간다. 2년간 그리고 화려한 날개를 펴며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그날의 변신을 꿈꾸며 오늘도 내 길을 간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의 변신은 계속될 것이며, 이 길을 기꺼이 간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 높게 보인다. 이제 내 나이 80.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가며 끝없는 변신을 꾀하며 더 행복한 나날을 영위해야 하지 않을까? 무한한 변신. 이제 무엇을 찾아 또 화려한 변신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변신은 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 만병통치약인가 보다. 나의 변신은 오늘도 계속된다.
•수상소감 - 우수상 미니자서전 은정남
“죽는 순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도전하고파”
응모하신 사람 중에서 나이가 좀 많습니다. 팔순이니까요. 그래서 저의 하찮은 글을 건져 올려주셔서 너무 고맙고요. 용기를 주신 선생님들과 캐나다에 이민을 간 아들한테 축하 인사 받았는데 정말 뿌듯합니다.
큰 용기와 힘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제 세상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쓰고 또 갈고 닦아야겠죠. 죽는 순간까지 숨이 멎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해보고 싶어 공모전에 출품하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노인들이 많잖아요. 노인들은 지하철 공짜로 타며 놀러 다니고 또는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이제 그런 걸 탈피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봤는데 이번에 글을 한 번 써봤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 신석정 시인이 저희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좀 잘 쓰려고 나름대로 좋은 책 많이 읽고 또 문학 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 항상 친구들이나 동호회 회원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했어요. 그러면 그분들이 모니터링해 주면 수정하며 첨삭하면서 배웠습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장원은 떼놓은 당상일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 가지고 소설을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동물해설사, 모형항공기, 우리말 나들이 도전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이나 사건을 소재로 삼아서 소설을 써보고 싶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어 행복합니다. 일감이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번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준비한 주최 측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다시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쓸 만한 어른들과 아까운 시니어들이 많거든요. 사실 어르신들은 좋은 자원과 자산을 갖고 있고 재능과 경험이 다양한데 쓸모없이 이렇게 소멸해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번 공모전이 뜻 깊은 일을 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시니어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믿어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건강한 치아는 오복(五福) 중 하나라는 옛말이 있다. 치아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건강한 치아로 잘 씹는 능력은 단순히 밥 먹는 즐거움을 주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시니어의 씹는 능력(저작 능력)이 신체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다.
‘잘’ 씹으면 건강 오고 ‘못’ 씹으면 건강 달아난다
노년기 건강 관리를 위해서는 고른 영양 섭취가 중요하다는 게 의학계의 정설이다. 이때 빠질 수 없는 능력이 씹는 능력이다. 무언가를 씹는 행위는 턱 근육을 발달시키고 침 분비를 도와 소화를 원활하게 한다.
반면 잇몸 질환이나 구강 기능의 저하로 씹는 것이 불편해지면 소화불량이나 위장장애로 이어질 수 있고, 영양 불균형까지 초래한다.
잘 씹는 능력은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동안 외모를 원하는 노인에게도 필수 조건이다. 음식물을 씹을 때 쓰는 저작근이 얼굴 피부의 탄력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근육을 덜 사용해 얼굴 근력이 떨어지면 얼굴 피부에 주름이 생기고, 탄력이 떨어지면서 나이 들어 보이기 십상이다. 저작근은 목·어깨·허리 등 여러 근육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잘 씹지 못하면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음식물을 잘 씹지 못하는 65세 이상 노인은 우울증이 발생할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잘 씹지 못하는 노인의 우울증 발생률이 잘 씹는 노인의 2배 가까이 높다는 것이다.
분당차병원 가정의학과 전혜진 교수와 군산대학교 식품생명과학부 두미애 교수 연구진은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참여한 노인 3747명의 음식물을 씹는 저작 기능과 우울증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8일 발표했다.
연구진은 평균 연령 72.65세의 노인들을 씹는 데 문제가 있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눴다. 치아나 틀니, 잇몸 등 구강 문제로 음식물을 씹는 데 불편함을 느낀다고 스스로 답한 노인들은 41.2%에 달했다.
우울증 평가도구(PHQ-9)를 이용해 연구를 진행한 결과, 씹는 데에 문제가 있는 노인군이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우울증 유병률이 약 1.945배 높았다. 성별과 소득수준에 따른 차이도 드러났다. 여성이 남성보다 2.206배, 저소득자가 고소득자보다 1.332배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았다.
연구진은 잘 씹지 못하면 먹는 즐거움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영양 상태가 악화되고, 단백질 섭취가 줄어들어 근육량이 감소하는 등의 결과를 낳는 것으로 진단했다. 단백질 섭취가 노년기 우울증 발병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과관계가 드러난 셈이다.
두미애 교수는 “씹는 문제가 있는 노인 중에서도 소득이 낮고 여성일 경우, 단백질 섭취가 적을수록 우울증 위험이 높았다”며 “씹는 데 문제가 있으면 전반적인 삶의 질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노화와 관련한 질병을 앓을 확률도 높다”고 설명했다.
이어 “적절한 단백질 섭취는 노년기 근육량 증가와 보존에 도움이 되고, 앞선 연구에서 낮은 근육량은 우울감과 연관돼 있다는 보고가 있다”며 “씹는 문제는 식이 조건을 악화해 삶의 질을 떨어뜨리면서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2018년 서울대 치의학대학원에서는 노년기 저작 기능 상실 여부가 인지장애 위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임플란트 등으로 빠진 치아를 재건하지 않은 노인이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인지장애위험이 2.74배 높았으며, 어금니가 없을 경우 인지기능 장애가 생길 위험도 커졌다.
이 외에도 치매에 걸릴 위험성이 약 3배 높아지며 인지능력이 떨어진다는 보고도 있다. 씹는 활동이 줄면 근육을 움직이며 뇌를 자극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바른 칫솔질과 입 체조로 노년기 구강 건강 지키자
그렇다면 노년기 구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잘 씹기 위해서는 건강한 치아가 필요하고, 치아 건강은 건강한 잇몸이 뒷받쳐준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지만, 이 역시 잇몸이 건강해야 가능한 일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17년 자료에 따르면, 잇몸병을 앓는 환자 중 55~59세 연령대가 가장 많았다.
이에 전문가들은 잇몸 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칫솔질을 올바르게 하고, 정기적으로 치과에 방문하는 등 꾸준한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입안이 건조하다고 느끼는 노인들이 많은데, 건조한 구강도 치주질환의 발생 원인 중 하나다. 이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에탄올이 없는 치약 사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은 ‘침 분비 입 체조’를 소개했다. 혀를 위‧아래‧좌‧우로 움직이고, 입안에서 시계 방향‧반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된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측에 따르면 입 체조는 구취 제거에도 도움을 준다고 하니, 마스크 속 입냄새가 고충인 노인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