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얼이 담긴 성곽과 고즈넉한 멋이 흐르는 선운사 등의 문화유적과 수박, 풍천장어, 복분자 등 각양각색의 먹거리가 넘치는 고창. 봄이면 짙푸른 청보리밭이 반기고, 여름에는 샛노란 해바라기가 인사한다. 가을에는 마치 구름이 내려앉은 듯한 하얀 메밀꽃밭이 손짓하고, 겨울이면 눈 덮인 하얀 설원도 유혹한다. 한반도 첫 수도 고창군은 농생명 식품산업을 천년대계로 설정한 도시답게 이름난 특산물이 넘쳐나며, 유입 인구도 많아 귀농귀촌인의 만족도가 특히 높은 곳이다.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나려는 예비 귀농귀촌인이 산, 들, 바다, 강, 갯벌이 모두 있는 고창을 선택하는 이유를 찾았다.
걸음걸음마다 문화와 치유가 깃들다
도시 생활에 지친 예비 귀농귀촌인이 정착지를 고를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연 환경이다. 고창은 청정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생태계의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초로 2013년 5월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신비로운 원시 해안을 간직한 갯벌을 비롯해 고인돌 박물관, 선운산 도립공원, 운곡람사르습지, 동림저수지 등이 핵심 관광지로 특별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머물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고창군의 다양한 즐거움
또한 고창에는 구석구석 전통과 문화가 새겨진 명소가 꽤 많다. 산세 좋고 물소리 좋은 선운사 계곡 아래 홀로 핀 한 송이 꽃이 그림 같다. 누군가는 사계절 모두 명소가 되는 고창 선운사로 진입하는 첫 관문인 선운산 도립공원에 발을 들이고서야 고창 여행이 시작됐음을 실감한다고도 말한다. 그만큼 선운사는 고창을 대표하는 명소다. 선운사는 고즈넉한 멋이 어우러진 외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백제 위덕왕 24년인 57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산이고, 조선 후기에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가 산중 곳곳에서 장엄한 불국토를 이뤘다. 그림자 짙은 숲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사찰에서는 흔하지 않은 강당 건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봄을 알리는 3~4월의 동백꽃과, 9~12월 초 꽃무릇과 단풍으로 이어지는 가을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약 5000평의 동백나무숲과 높이가 15m나 되는 천연기념물 제367호인 삼인리 송악도 있다.
선운사에서 역사와 자연의 진수를 경험했다면 발걸음을 옮겨 성곽길에 흠뻑 빠져보는 것도 좋다. 고창의 중심에 다다르면 길게 뻗은 성곽과 웅장한 문이 시선을 사로잡는데, 바로 고창읍성이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1년인 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축성했는데, 원형이 잘 보존된 성곽으로 평가받는다. 현지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모양성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활약했다. 30~40분 동안 고창의 전경과 숲을 보며 느긋이 성곽을 걸어 보면 고창읍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고창을 채색하는 또 하나의 색다른 문화지로 학원관광농장을 들 수 있다. 학원농장은 청보리밭축제로 유명한 관광 농장이며, 봄이 되면 청보리밭과 함께 광활한 유채꽃밭이 장관을 이룬다. 서울 여의도의 4.5배에 달하는 면적이 노란 유채꽃으로 뒤덮인 땅은 고창의 새로운 봄 풍경으로 각광받는 중이다. 또한 여름에는 수천 수만 그루의 샛노란 해바라기가 인사하며 가을에는 메밀꽃이 이어지는 등 봄, 여름, 가을에 걸쳐 꽃의 축제가 계속된다.
3만 평에 달하는 대지에 만들어진 농촌 체험형 테마공원인 상하농원으로 들어서면 우선 유럽풍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부에는 햄 공방, 과일 공방, 빵 공방, 발효 공방 등이 있어 다양한 가공품을 만드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고, 농원상회에서는 각각의 공방에서 솜씨 좋은 농부들이 만들어낸 먹거리들을 구입할 수 있다. 가볍게 공방과 상회를 구경한 후 유기농 목장으로 향하면 젖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옆에는 양떼 목장이 있어 귀여운 양들을 구경할 수 있는 등 이국적인 광경들을 볼 수 있다.
고창군에서 만나는 다채로운 특산품 먹거리
고창 하면 볼거리와 함께 먹거리로도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복분자와 풍천장어다. 단맛과 신맛을 함께 지닌 복분자는 뛰어난 효능으로도 유명한데 간을 보호하고, 눈을 밝게 하며, 기운을 도와 몸을 가뿐하게 만든다고 한다. 특히 복분자로 만든 담금주는 기름진 장어와 궁합이 좋아 고창 내 어느 장어 식당을 가더라도 판매하니 풍천장어 구이와의 절묘한 맛의 조화를 느껴보자.
선운산 일대에 서식하는 풍천장어는 고창의 으뜸 식재료로 유명하다. 풍천은 선운사 어귀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인천강 지역을 뜻한다. 실뱀장어는 민물에 올라와 7~9년 이상 성장하다 산란을 위해 태평양 깊은 곳으로 회유하기 전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지역에 머무는데, 이때 잡힌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한다.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들이칠 때 장어가 바람과 함께 바닷물을 몰고 온다고 해서 풍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창의 풍천장어는 유달리 고소한 맛이 강하며 육질이 탱탱해 씹는 맛도 좋다.
고창 먹거리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고품질 다품종이라는 것이다. 고창군은 최고의 자연 생태 환경을 자랑하듯 복분자, 수박, 멜론, 고추, 땅콩, 고구마, 아로니아, 블루베리, 풍천장어, 바지락, 천일염 등 전국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가진 농특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기업에서도 그러한 고창 먹거리의 강점과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있다. 예를 들어 하이트진로는 고창군의 흑보리를 이용해 인공 첨가제가 없는 기능성 건강음료 ‘블랙보리’를 출시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인 고창 식품 산업 성공 신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에는 복분자 발사믹 ‘식초’도 핫하다. 2019년에는 국내 최초로 ‘식초문화도시’ 선포식을 했는데,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면역력 열풍을 타고 복분자 발사믹 생산 업체가 4배 이상 매출 증대를 기록했을 정도다.
귀농귀촌 1번지, 고창군의 귀농귀촌 정책들
살아보니 더 좋아진다는 입소문이 도는 고창군은 대한민국 귀농귀촌 1번지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귀농귀촌인이 다른 지역보다 고창군을 더 많이 찾는 요인으로는 지자체의 적극적인 귀농귀촌인 유치 노력이 꼽힌다. 고창군은 2007년 전북 최초로 귀농인 지원 조례를 제정하고 귀농귀촌 전담 부서를 설치했다. 또 귀농귀촌인 모임과 협의 체제를 구축해 귀농귀촌인의 눈높이에 맞는 차별화된 귀농귀촌 정책을 펼치고 있다.
고창군 대산면으로 내려온 지 4년째라는 한 60대 귀농인은 “주변의 많은 귀농귀촌 선배들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고창은 외지인이 텃새 걱정 없이 뿌리 내리기 좋은 곳”이라며 “온천과 실버타운이 있어 적당히 바쁘게 살면서 농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즐기며 노후를 꿈꿔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1년 고창군 귀농귀촌 관련 총사업비는 7억5100만 원으로 4개 분야, 20개 사업을 추진한다. 4개 분야는 귀농귀촌 유치와 활성화, 정착, 귀농창업 활성화다. ▲귀농귀촌 유치 사업비는 2억1000만 원으로 귀농귀촌의 최적지로서 고창을 홍보하기 위한 박람회 참가와 농촌 체험을 위한 홈스테이, 고창에서 한 달 살아보기, 초보 귀농인 서포트 지원 사업 등을 추진한다. ▲귀농귀촌 활성화 사업비는 1억7600만 원으로 마을환영회, 재능기부, 실용교육, 동아리 지원, 귀농체험학교 등으로 꾸려진다. ▲귀농귀촌 정착 지원 사업비는 3억3250만 원으로 영농 정착금과 농가주택 수리비, 소규모 귀농귀촌 기반 조성을 지원한다. ▲귀농창업 활성화 사업비는 3250만 원으로 컨설팅과 창업 실행비로 구성되어 있다.
본지에서 기획한 귀농귀촌 우수 지자체 10選의 심사 기준은 귀농귀촌을 선택한 퇴직 예정자들이 △지원정책 내용 △자연과 문화환경 △ 귀농귀촌 멘토 조언 △토양 특산물 현황 등을 고려해 선정했다.
3학년 2반 수업은 현재진행형
덕포진교육박물관 1층의 난로 옆에 앉아서 이인숙 선생님을 기다리며 남편이신 김동선 관장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적함이 적당히 어울리는 박물관 외부와는 달리 전시관 내부는 아주 오래전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와글거리는 듯하다.
“박물관이 조용하지요. 코로나19 이전엔 동창회 모임이나 학생들이 단체로 많이 왔는데 요즘은 모든 게 뜸해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은 이인숙 선생님의 교직 생활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이 있는 1층 인성교육관, 일제강점기부터의 교육과정 관련 사료가 전시된 2층, 3층의 농경문화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전의 방대한 교육 자료들이 새록새록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감성 문화공간이다.
“우린 부부 교사였지요. 어느 날부터인지 아내가 자꾸 눈이 침침하다고 해요. 그래서 병원을 갔다가 시력이 아주 많이 나빠진 걸 알았어요. 한 6년 정도 병원을 계속 다니다가 더 이상 회복 불능… 의사가 그만 와도 된다고 해요. 그래서 빨리 사표를 내게 했어요. 시력을 잃고 평생 천직이었던 일을 그만두는데 그 좌절감에 난리가 났지. 그 기분을 이해하죠. 그래서 살고 있던 대치동 아파트를 팔고 이 박물관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도 재현해서 지금도 아내의 수업은 진행 중인 듯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녀의 풍금 소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전시관 입구를 향해 이인숙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슬로 모션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동시에 들려오는 콧노래가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반가워요. 여긴 처음인가?” 하이톤 목소리가 힘차다. 오래전에 놀러 온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풍금 치며 ‘오빠 생각’을 들려주었다고 했더니 “그럼 노래 먼저 불러줄까?” 하면서 풍금 앞에 앉아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를 시작으로 “솔솔 부는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에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시냇물은 졸졸졸 노래하며 흐른다~”를 불러주신다.
3학년 2반 교실에 퍼지는 풍금 소리가 마법처럼 금방 추억 속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전에 들었다던 ‘오빠 생각’도 불러줄게요” 하면서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늪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실 제~♪” 순식간에 기분이 경쾌해졌다. 그리고 따뜻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있을 때 새로움이 보인다
마주 앉은 이인숙 선생님의 가꾸지 않은 머리에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인다.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겼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한 듯, 그런데 잘 살펴보면 좀 바뀐 듯도 합니다.
“바뀌어야지.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고 생각해요. 그대로인 것만 좋은 것은 아니잖아. 그대로이면 고리타분해져요. 디지털과 섞어놔야 추억의 새로운 면도 보이거든.”
요즘은 영국에서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이 덕포진교육박물관 일을 함께 한다. 젊은 세대인 아들 덕분에 새롭게 바뀌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동심이라는 추억이 늘 기억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기억력도 더 좋아져요. 살다 보면 오래된 것들을 소홀하게 생각하는데 이것들을 디딤돌로 삼아 가꾸어진 것에 나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요즘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현재의 디지털 밑거름이 아날로그입니다. 고생 없는 성공을 사상누각이라고 하듯 어르신들의 역사는 오늘의 든든한 밑거름입니다. 뿌리를 단단하게 해야 튼튼한 나무로 키울 수 있어요. 이 박물관에 저장된 모든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고 행복한 추억입니다.”
인정하기와 경청
그렇다면 시니어들과 젊은 세대의 간격을 잘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일이나 어떤 해법이 있을까요.
“난 어르신이나 실버란 말보다는 선배라는 말이 좋아요. 노인대학보다는 선배대학이 어떨지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선배와 후배잖아요. ‘라테는…’으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젊은 그들을 인정해야 해요. 도움을 주고 싶다면 짧고 임팩트 있게 전해야겠지요.
특히 시니어들에겐 경청이 중요해요. 독불장군처럼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겐 치매나 우울증도 빨리 온다는군요. 성경에도 있잖아요. 귀 있는 자 들을지어다.”
긍정의 힘은 아주 세다
어려움이 많은 요즘입니다. 흔들림 없이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이런 말이 있어요. ‘행운은 지각은 하되 결석은 하지 않는다.’ 언제든 온다는 말이죠. 무엇을 이루려면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습, 연습, 죽도록 연습입니다. 죽도록 연습해도 죽지는 않아요. 하하. 그리하여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현실 탓, 환경 탓 하기 전에 너 자신을 바꾸어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염두에 두는 가치나 마음가짐이 있을까요.
“간단하죠. 내겐 긍정의 힘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살림집에 화장실이 없고 문 밖에 있어요.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다시 양말을 신고 주섬주섬 옷을 잔뜩 입고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걸어 나와야 해요. 귀찮다고 생각 않고 운동하러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앞을 못 보니까 캄캄한 밤이어도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하면서 나옵니다. 하하하. 내 불편을 배우자나 자식이 대신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은 나 자신의 일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어려움을 넘어선 힘이 있을 것 같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한탄스러웠지만 빠르게 긍정적으로 바뀌려고 노력했습니다. 말로만으로는 될 리 없어요. 방법을 찾았죠. 좋은 말 외우기입니다. 가장 최고는 노래죠. 내가 생각할 때 대부분의 노랫말은 가장 맞는 말입니다. 노래가 암흑기의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뀌게 했지요.”
그러면서 갑자기 “노래 한번 해볼까” 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이어서 패티김의 “사랑이란 두 글자는 외롭고 흐뭇하고~”, 가곡 그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까지 부르신다. 타고난 출중한 노래 실력이었다.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도중에 틈틈이 들려준 노래가 10곡이 넘었다.
여전히 목소리에 힘이 있고 맑은 소프라노여서 들으면서 즐거운 기운을 얻는다. 매사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다. 노래와 함께 즐기는 것이 시 외우기라고 말한다. ‘나만의 두뇌 스포츠’라면서 150편의 시를 외우고 있다니 놀랍다. 그러면서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을 줄줄이 읊는다.
나 자신을 가르치면서 산다
이처럼 시종일관 긍정적이고 기운찬 시간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 시도 외우고 노래도 하고, 운동 삼아 박물관 3층을 오르내려요. 그러다 보면 주변도 보입니다. 내 앞가림만 하려고 하지 말고 소외된 사람을 찾아보고 마음을 나누다 보면 이게 내 행복이다 생각되고 마음이 열리죠. 시니어라면 그러다가 하고 싶은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고요. 무심히 시간을 보내는 셀프 킬링이 아닌 셀프 힐링이 된다는 거죠.”
이화여대 초등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직 22년, 시력을 잃고 교직을 떠났다.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지금도 찾아오는 관람객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렇지만 외부에 기대할 만한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산다.
그래서 자신만의 멘털 스포츠라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번씩 좋은 일 하고, 10번 웃고, 100자 쓰고, 1000자 읽고, 10000보 걷기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여건상 쉽지 않다.
“하루 100자 쓰기는 어느 노래든 1절 가사를 꼭꼭 눌러 쓰면 얼추 100자 됩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몇 줄 가사 쓰기 쉽잖아요. 나 그게 하고 싶어요. 또 요즘엔 없으면 불편한 스마트폰과 운전면허… 이 두 가지, 내가 그게 없어요.”
유쾌하다가 간간이 쓸쓸할 때도 있다.
선생님께 박물관은 시간 여행이나 마음 나누기 말고도 또 어떤 의미일까요.
“내 마음의 보물입니다. 질 바이든 여사가 백악관에 들어가서도 교직을 유지하잖아요. ‘남을 가르치는 것은 나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다’라면서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의 3학년 2반 교실이 있어서 지금도 나 자신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살게 합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약 1년이 지났다. 하늘길이 닫혔고, 각자 꿈꾼 여행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길어지는 ‘집콕’ 생활은 새로운 여행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방구석에서 세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고, 매일 지나는 동네에서 숨겨진 명소를 찾는 재미를 발견했다. ‘이런 것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은 것들이 관광이 되고, 산업으로 성장했다. 여행이 달라졌다.
글로벌 온라인 여행정보 기업 부킹홀딩스가 최근 전 세계 28개국 2만여 명의 여행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2021년부터는 총 9가지의 여행 방식이 대중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온라인 여행 ▲기술을 접목한 여행 ▲근거리 여행 ▲안전한 여행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 각국의 랜드마크에 발 도장을 찍는 대신 익숙한 장소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여행을 즐기는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다.
‘현실감 최강’ 대세는 몰입형 콘텐츠
코로나19 이후 주목받고 있는 여행 방식은 ‘랜선 여행’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IT 기기를 통해 즐기는 여행으로,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여행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새롭게 떠오른 문화다.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의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콘텐츠다. 크리에이터가 특정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맞게 실제 상황인 것처럼 연기하는 롤플레잉 ASMR 영상은 유튜브에서 꾸준히 관심을 끄는 콘텐츠 중 하나다. 이어폰을 착용한 뒤 눈을 감는 순간, 원하는 곳 어디로든 ‘상상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중 ‘공항 ASMR’, ‘비행기 ASMR’은 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밟고 실제 비행기를 타는 것 같은 생생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승무원의 말소리부터 탑승 안내 방송, 공항 특유의 시끌벅적한 느낌까지 완벽하게 재현한다.
오랜 ‘집콕’으로 유튜브가 식상하게 느껴진다면, 혹은 진짜 여행지를 구경하고 싶다면 각국 관광청 홈페이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오스트리아 관광청, 두바이 관광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자국의 관광지를 360도 영상이나 고화질 사진으로 홍보하는 몰입형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호주 관광청의 ‘8D로 체험하는 호주’ 영상이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에스페란스 해변에서 돌고래가 뛰노는 소리, 세계에서 가장 작은 페어리펭귄이 이동하는 소리, 킴벌리의 호라이존탈 폭포 소리 등 현장에서나 들을 법한 생동감 넘치고 입체적인 소리가 오감을 자극한다.
세계의 문화 예술을 실감나게 접하는 방법도 있다. ‘구글 아트 앤 컬처’는 구글과 제휴한 주요 박물관 2000여 곳의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한다. 가상현실(VR)과 거리 뷰 기능을 통해 런던 대영박물관, 파리 오르세미술관 등 세계적인 박물관과 도서관을 360도로 산책하듯이 둘러보고, ‘아트 카메라’ 시스템으로 작품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다. 앱을 다운받으면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증강현실(AR) 기술을 이용한 ‘아트 프로젝터’ 기능을 누르면 카메라 화면 속에 3차원 예술 작품이 나타나 서 있는 곳을 박물관으로 만든다.
랜선 여행의 진화는 어디까지? 실시간 현지 투어
인터넷 서핑을 통해 여행 분위기를 내는 것을 넘어 이제는 집 안에서 ‘진짜 여행’을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은 여행사와 숙박업소 등 관련 산업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비대면·비접촉 여행 관련 각종 상품을 내놓고 있기 때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집에서도 패키지 관광이 부럽지 않은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행상품 중개 플랫폼을 운영하는 마이리얼트립은 최근 해외에 거주 중인 여행 가이드들이 실시간으로 관광지를 찾아다니며 소개하는 ‘랜선 투어’ 상품을 출시했다. 실제 여행사 프로그램처럼 이용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생동감 넘치는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스페인 소도시 세고비아의 골목을 둘러보는 여행부터 홍콩 야경 투어, 로마 시내 워킹 투어 등 콘셉트도 다양하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투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 투어에 참가한 이용자들은 “실제로 가이드와 함께 걷는 기분이다”, “집에서 ‘치맥’하며 바르셀로나를 둘러보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등 만족스러운 후기를 남겼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와 게스트를 연결하는 플랫폼의 특성을 살려 ‘온라인 체험’을 선보였다. 각국의 호스트들이 원격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이용자들에게 각국의 문화·예술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일본 승려와 함께하는 명상, 현직 멕시코 셰프의 타코 수업, 고고학자와 이탈리아 와인 역사 배우기 등 원하는 체험을 선택하면 현지인과 생생하게 교류할 수 있다. 가격은 프로그램마다 다르지만, 대개 2~4만 원대다.
한편 일본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일본항공(JAL)은 최근 대면 형태로 실시하던 비행기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원격으로 전환하고, 인쇄업체 톳판인쇄사는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해 일본 유명 문화재를 온라인으로 견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의 최대 여행사 JTB도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과 마우나케아 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온라인 투어 서비스를 도입했다.
나만 아는 여행지, 숨은 명소를 찾아서!
콧바람을 쐬어야 비로소 여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구석 여행에 흥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인파가 바글바글한 ‘핫플레이스’를 갈 수도 없는 노릇. 이 때문에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숨은 여행지를 찾아 떠나는 트렌드가 생겨났다. 실제로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6월 발표한 국내여행 의향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기존 유명 관광지보다 숨겨진 여행지나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는 곳으로 여행할 것’이라는 응답이 1순위로 높았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런 트렌드를 반영해 지난해 ‘언택트 관광지 100선’을 내놓았다.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 ▲개별 여행 및 가족 단위 테마 관광지 ▲야외 관광지 ▲자체 입장객수를 제한하는 관광지 등 거리두기 기준을 충족하는 여행지를 모아놓은 목록이다. 여행지는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0곳의 여행지를 천천히 살펴보면, 생소한 관광 명소가 눈에 띄면서 우리나라가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차박’도 새롭게 부상한 언택트 여행 문화다. 차에서 관광과 숙박을 모두 해결하는 차박은 거리두기에 최적화된 여행이다. 차로만 방문이 가능한 이색 명소를 들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터넷 카페 ‘차박캠핑클럽’ 운영자 ‘둥이아빠’의 추천에 따르면, 차박의 대표 명소는 충북 충주 목계솔밭이다. 광활한 대지에 화장실과 개수대 등 편의시설을 모두 갖춰 그야말로 차박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충주 수주팔봉 캠핑장과 삼탄유원지, 양평 광탄유원지, 여주 신륵사 등이 차박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숨은 여행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뉴노멀 시대의 또 다른 트렌드는 동네 걷기 여행. 동네 걷기 여행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콘텐츠는 카카오TV의 웹 예능 ‘밤을 걷는 밤’이다. 밤을 걷는 밤은 가수 유희열이 서울의 밤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담아낸 프로그램으로, 익숙한 거리에서도 색다른 매력을 찾아내 보는 묘미가 있다. 때로는 정해진 방향 없이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 우연히 멋진 풍경을 만나면 멈춰서 감상도 한다. 부담 없이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듯한 편안한 콘셉트 때문인지 2020년 12월 기준 누적 조회수가 560만 회를 돌파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언제쯤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까. 아직은 미지수다. 이렇게 애쓰며(?) 노는 게 마스크 없이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는 여행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배낭을 챙기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여행을 즐겨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될 수 있다.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고독을 그린 이로 유명하다. 예건대 작품 ‘브루클린의 방’에선 먹먹한 창 밖 풍경 앞에 홀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어찌 해볼 수 없는 외로운 심상이 감도는 그림이다. 삶에 만연한 고독과 피로를 도려내 캔버스에 담았다. 인생사의 답답하고 불안한 연극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사실 일상이란 고달픈 것, 군중 속에서도 외로운 게 사람이다. 미술은 이 참을 수 없는 고독과 불쾌에 숨통을 열어준다. 한 모금의 청량제. 길 위에서의 잠깐 휴식. 미술작품 관람의 의미가 그쯤에 있을 게다. 그러기에 미술관을 만나면 반갑다. 여기에 거리를 걷다 쉬어가기 좋은 미술관이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이다. 소음과 차량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신사동 길모퉁이에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은 코리아나화장품이 설립한 미술관이다. 2003년에 개관했으니 어언 20여 년에 가까운 연조가 묵직하다. “돈을 벌기만 하면 무슨 재미? 작으나마 뜻있는 사회 환원을 하리라.” 코리아나화장품 유상옥 회장이 미술관을 설립한 연유가 이와 같다. 그는 일찍부터 미술품과 화장 관련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에 푹 빠져 살았다. 오직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시작한 취미생활이었으나 점점 수집 물량이 늘어 집이 미어터질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숙고 끝에 미술관과 화장박물관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두 개의 뮤지엄을 들여앉히기 위해 6층 건물을 지어 ‘스페이스 씨’(space*c)라 이름 붙이고서.
대체로 미술관 건축들은 그 독특한 외양부터 튄다. 웬만하면 유명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 누가 보더라도 감흥이 돋을 건축물을 짓고자 노력한다. 건물은 물론 정원이라든가 외부 공간 전체에 예술미를 부여하기 위해 각별한 신경을 쓴다. 이건 하나의 트렌드로 건축가마다 가급적 기발한 방법을 동원한다. 그렇게 미감을 구현한 미술관 건축물이 이미 곳곳에 들어섰다. ‘스페이스 씨’는 이 대열에서 어느 정도 비켜서 있다. 얼른 돋보이게 지은 건물이 아니다. 신사동 대로변에 고만고만한 세련미를 가지고 늘어선 빌딩들의 무개성한 모습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외양이니 말이다.
왜 이렇게 지었을까. 이 건물의 설계를 맡은 이가 건축가 정기용(2011년 작고)임을 알고 나면 수긍이 된다. 그는 겉멋을 애써 추구하는 건축을 극히 싫어했다. 고도의 조형 구사로 예술적 건축을 설계하기에 능해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통하는 르 코르뷔지에를 불신할 정도였다. 이탈리아 건축가 지오 폰티는 ‘건축가는 신(神)’이라 주장했다. 이 역시 정기용에겐 가당찮은 허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을 학문적으로 구분하면 예술이나 기술이 아니다. 차라리 인문사회과학 영역에 속한다.”
건축 행위를 인문학으로 본 정기용의 관심사는 결국 인간의 문제였다. 그 무엇에 앞서 인간의 삶과 일상의 편의성을 존중하는 집이라야 집다운 집이라 봤다. ‘거주하는 사람의 생활 흔적이 서서히 누적되어 그 사람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집’을 좋은 집이라 했다. 건축물을 읽는 철학이 이랬는데 겉멋에 쏠릴 리가. 사람의 삶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건축을 추구한 그였으니 ‘스페이스 씨’ 역시 실사구시와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설계했을 걸 알 만하다.
그렇다고 건축이 무덤덤하기만 하다면 무슨 맛? 고수는 은연중 묘수를 쓴다. 티내지 않은 듯 티를 남긴다. ‘스페이스 씨’를 밖에서 보면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을 건물 전면의 유리벽에 붙여 설치한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층계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외부에 그대로 드러난다. 건물 내부에서 외부를, 외부에서 내부를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함으로써 내·외부 풍경이 소통되도록 했다. 흔히 집의 내부에서 내다보이는 ‘뷰’를 중시한다. 그러나 정기용은 달랐다. ‘삶이란 풍경을 소비하는 것, 혹은 풍경과 관계 맺는 것’이라 했던 그는 건물 내부에서 움직이는 사람 풍경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길 바라며 벽을 허문 것이다. 층마다 나무들을 심은 정경에서도 풍경의 기운과 서정을 중시한 의도가 읽힌다.
여성 관련 탐색전 자주 열어
이처럼 곰곰 뜯어볼 게 드물지 않은 ‘스페이스 씨’는 서울에 유일한 정기용 작품이다. ‘스페이스 씨’를 설계하며 들인 공이 많아서였을까. 대장암 투병을 하다가 타계하기 하루 전날, 정기용이 코리아나미술관 유승희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란다. 무엇이 고마웠을까. 유 관장의 얘기는 이렇다.
“이미 지쳐 몇 마디 못하시더라. 고맙다고, 건물을 고치지 않아 고맙다고, 그 한마디뿐이었다. 살아 숨 쉬는 건축, 사람을 중심에 둔 건축을 지향한 그의 설계를 받은 건 ‘스페이스 씨’의 행운이다.”
코리아나미술관의 전시 기획엔 뚜렷한 지향이 있다. 화장품 회사가 설립한 미술관답게 여성성, 여성의 노동, 여성의 몸 등등 여성의 정체성 탐색을 테마로 한 전람회를 자주 열었다. 여성주의를 표방한 셈이지만 성차별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메타포로서의 여성 내러티브를 내세우진 않았다. 억눌린 타자가 아닌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여성, 즉 대안적 여성을 모색하는 기획전을 미술관의 지표로 삼았다. ‘텔 미 허 스토리’(Tell Me Her Story), ‘아티스트스 바디’(Artist's Body), ‘히든 웍스’(Hidden Works) 같은 전시회들로 화단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분명한 방향성에 추동된 양질의 미술전 개최로 존재감을 돋운 셈이다.
현재 진행되는 ‘호랑이는 살아있다’ 전은 성격이 전혀 다른 기획전이다. 왜 호랑이를 테마로 삼았을까. 자연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는 공포의 대상만은 아니다.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인도에선 신의 수레를 끄는 신수(神獸)로 섬김을 받았다. 우리의 토속신앙에 등장하는 호랑이 역시 하늘과 소통하는 신령한 존재이지 않던가. 민화에 나타나는 호랑이는 재롱떠는 고양이처럼 귀엽고 익살스러워 민간에 스민 호랑이 애호 풍정을 웅변한다. 이렇게 역사와 신화, 민속을 관통해 특유의 위상으로 존재하는 ‘호랑이 현상’의 광활한 스케일과 의미를 재조명하자는 게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이겠다. 다른 변수도 있다. 지금이 바로 호랑이를 부각할 시절이라는 거다. 유승희 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88올림픽 때 ‘호돌이’ 마스코트가 각광을 받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 호랑이가 새삼 인기를 끄는 분위기다.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에 열광하는 대중들을 보라. 호랑이 마니아들이 늘고, 호랑이라는 이름을 상호로 쓰는 카페도 많아졌다. 이 급작스런 바람을 미술전을 통해 부양하고, 우리 민족의 상징인 호랑이를 미술 코드로 해석하고 싶었다.”
전시실은 지하 1·2층에 있다. 1층 전시실에선 호랑이 관련 전통 장신구와 조선시대의 수묵화 등을 볼 수 있다. 층고 8m에 이르는 지하 2층 공간은 큐브형 갤러리로 대형 퍼포먼스를 펼치기에 적격이다. 여기엔 호랑이 관련 국내외 작가들의 회화와 다큐, 영상작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이번 기획전의 타이틀로 채용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호랑이는 살아있다’이다. 비록 소품이지만 백남준의 기재(奇才)를 즐기기엔 충분하다. 그는 말하길,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빤한 생각, 지루한 감상이다”라 했다. 타고난 삐딱이 기질과 사람을 사로잡는 쇼맨십, 그리고 기존 사조와 형식을 갈아엎는 도발의 힘을 지렛대로 미술세계를 통째 전복하고 떠난 사람. 백남준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그가 그립다.
이제 5·6층으로 올라가 화장박물관을 볼까. 화장의 시원을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찾아낸 연구 보고서도 있다. 화장이 여성의 전유물만도 아니었다. 예컨대 신라의 화랑들도 화장을 즐겼으니까. 인류는 왜 그렇게 화장에 꽂혔을까. 화장 재료와 도구의 변천사는 어떤 것일까. 화장으로 외모를 가꿔 내면까지 아름답게 다듬을 수 있는 메이크업이 가능할까.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관람하기 좋은 박물관이다. 국내 유일의 화장전문박물관인 이곳엔 남녀용 화장도구와 화장품과 용기들, 동경(銅鏡), 그리고 도자기와 미인도, 은장도 등등 온갖 골동품이 숱하게 전시돼 흥미롭다. ‘백자에 물든 푸른빛’이라는 타이틀의 청화백자 기획전도 볼 만하다.
화장박물관 관람까지 마치고 거리로 나서자 화장하기 어려운 얼굴들이 오고간다.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렸으니 도리 없다. 너나없이 마스크를 쓰다니. 이게 무슨 기발한 미술 퍼포먼스가 아닌 ‘레알’ 현실임은 얼마나 큰 불운인가.
● Exhibition
◇남겨진, 미술, 쓰여질, 포스터
일정 10월 24일까지 장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광고나 홍보를 위해 사용된 미술 포스터를 한데 모아 선보인다. 전시기간이 지나고 나면 본연의 목적은 사라지지만, 포스터가 지닌 예술·기록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 기획했다. 전시작은 박물관이 자체적으로 입수해 소장하거나 기증받은 것으로, 총 1000여 점의 포스터 중 미술사적 의의가 큰 작품 60여 장을 선별했다. 1960년부터 2010년까지 시대별로 다양하게 만들어진 포스터의 발전 과정과 이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일정 12월 19일까지 장소 스페이스 씨
한국을 대표하는 동물이자 한민족 정서 깊은 곳에 자리하는 존재, 호랑이의 상징성을 유물과 회화, 설치 작품 등으로 살펴본다. 액운을 물리친다고 알려진 호랑이 발톱 노리개부터 조선시대 무관의 의복을 장식한 호랑이 문양 흉배 등 특유의 용맹성과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위주로 전시한다. 더불어 도상의 전통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잃어버린 호랑이를 찾아서’ 등 현대적 관점이 담긴 동시대 작가의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 호랑이 기운을 얻어 힘을 내길 바란다는 관장의 소망이 담겼다.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
일정 10월 8일~2021년 2월 7일 장소 롯데뮤지엄
‘그라피티의 제왕’이라 불린 흑인 낙서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 기획전으로 바스키아가 남긴 예술세계 전반을 조망한다. 대표작 150여 점과 팝아트계의 거장 앤디 워홀과 협업한 작품도 선보인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초 미국 뉴욕 화단에 작품을 공개하며 이름을 알렸고, 2년 뒤 첫 개인전을 열며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미술뿐 아니라 음악, 패션 등 여러 영역에서 해석되고 있다.
◇1978, 우리 가족의 라디오
일정 11월 15일까지 장소 서울생활사박물관
1978년 서울에 사는 가상 캐릭터 영희의 집을 재현해 당시 유행하던 라디오 문화를 되짚어본다. 택시 운전사인 영희 아버지의 카 라디오부터 오빠의 휴대용 라디오, 영희의 카세트 라디오까지 다양한 추억의 라디오와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프로그램을 조명한다. 영희의 방에서는 1970년대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진행했던 황인용 전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들어볼 수 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금성 A-501과 1960년대 라디오 편성표 등 라디오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 Movie
◇돌멩이
개봉 9월 30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정식 출연 김대명, 송윤아, 김의성 등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30대 청년 ‘석구’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범죄자로 몰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드라마 ‘미생’의 김 대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양석형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입체감 있는 캐릭터로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김대명의 섬세한 연기력이 돋보인다. 실제로 김대명은 8세 지능을 가진 어른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연기를 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빌런’으로 종종 등장했던 배우 김의성은 석구의 보호자인 노신부 역을 맡아 인자한 매력을 선보인다. 2017년 한 배우 오디션에서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만장일치로 합격한 신예 배우 전채은의 활약 또한 주목된다.
◇테슬라
개봉 10월 21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마이클 알메레이다 출연 에단 호크, 이브 휴슨 등
교류 전류 전송 장치를 비롯해 라디오, 무선 원격 조종 기술, 리모컨 등 유용한 발명품을 만들어 오늘날 천재 과학자로 평가받는 니콜라 테슬라의 삶을 조명한다. 테슬라의 라이벌이자 상사였던 토머스 에디슨과 결별한 뒤 자본가 J.P. 모건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커런트 워’가 테슬라와 에디슨의 대결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오로지 테슬라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감독은 선댄스영화제에서 네 차례나 상을 거머쥔 마이클 알메레이다가 맡아 과학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감각적 비주얼을 연출했다.
◇언힌지드
개봉 10월 예정 장르 스릴러, 범죄 감독 데릭 보트 출연 러셀 크로우, 카렌 피스토리우스, 가브리엘 베이트먼, 지미 심슨 등
도로 위에서 크게 울린 경적 때문에 분노가 폭발한 한 남자가 복수를 하기 위해 운전자를 뒤쫓는 내용으로, 현실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보복운전을 소재로 한 영화다. 영화 ‘레미제라블’, ‘노아’ 등에서 활약한 배우 러셀 크로우가 필모그래피 사상 최악의 악역으로 변신해 눈길을 끈다. 러셀 크로우의 살기 가득한 눈빛 연기와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이 극한의 공포를 선사한다. 북미 개봉 당시 셧다운 이후 극장가에 처음 선보인 영화로, 북미 및 해외 7개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코로나19를 날려버릴 최고의 스릴”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 Book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김재환 저·북하우스)
김재환 영화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을 촬영하며 3년간 느낀 점을 섬세한 시선으로 풀어낸 책이다. 문해학교에 다니며 한글 공부를 하고 아들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써보는 등 배움과 설렘으로 가득한 칠곡 할머니들의 노년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냈다. 칠곡 할머니들이 직접 쓴 순수하고 담백한 시도 함께 실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최윤 외 공저·생각정거장)
올해 한국문학을 빛낸 단편소설을 엄선한 작품집이다. 총 여섯 작품이 수록됐으며 대상작은 최윤의 ‘소유의 문법’.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수상작 외 최윤의 자선작 ‘손수건’과 지난해 대상 수상작가 장은진의 자선작 ‘가벼운 점심’도 함께 수록됐다.
◇척추·관절 되살리는 자생력 스트레칭 (이진호 저·비타북스)
자생한방병원이 집필한 척추·관절 종합 건강서다. 척추·관절에 통증이 생기는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결리고 뻐근한 목, 묵직한 허리 등 통증을 관리할 수 있는 부위별 스트레칭 55가지와 질환별 스트레칭 45가지를 담았다. 스트레칭 전후 지압하면 효과를 높여주는 혈자리도 소개한다.
◇우리 술 한주 기행 (백웅재 저·창비)
코로나19로 ‘혼술’, ‘홈술’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주목해볼 만한 도서. 한주 전문가 백웅재가 양조장의 메카 홍천, 충주, 문경 등 전국 각지의 특색 있는 양조장 20여 곳을 소개한다. 한주 관련 산업에 종사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전통주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고 맛깔스럽게 풀어낸다.
◇길 (박노해 저 ·느린걸음)
‘하루’,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에 이은 박노해 시인의 세 번째 사진 에세이. 20여 년간 지도에도 없는 길을 걸으며 직접 담은 37점의 흑백 사진을 실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길 차마고도, 눈 덮인 만년설산과 끝없는 사막길 등 길 위의 다양한 풍경을 소개하며 ‘나만의 길’을 찾아나갈 것을 제안한다.
● Stage
◇오만과 편견
일정 9월 19일~11월 29일 장소 예스24스테이지 3관 연출 박소영 출연 김지현, 정운선, 홍우진 등
영국이 사랑하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연애소설을 2인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18세기 영국,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빙리’와 ‘다아시’가 조용한 시골 마을로 와 베넷 부부의 다섯 딸을 만나며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인 만큼 다양한 방식의 각색본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연극 ‘오만과 편견’은 단 두 명의 배우가 21개 캐릭터를 연기하는 독특한 연출이 돋보인다. 배우들의 퇴장과 무대의 이동 없이 의상과 소품만으로 캐릭터를 전환하는 것도 작품의 관람 포인트다. 제인 오스틴의 섬세한 감성에 극적인 매력이 더해져 고전 특유의 클래식한 아름다움과 로맨틱한 서사를 한층 더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풀어낸다.
◇머더발라드
일정 8월 11일~10월 2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출 김은영 출연 김재범, 김소향, 이건명 등
욕망을 향해 가는 세 남녀의 비틀린 사랑을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뮤지컬판 ‘부부의 세계’다. 결혼 후, 무료한 일상에 지친 ‘세라’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남편 ‘마이클’, 한때 불같이 사랑했던 옛 연인 ‘탐’과의 엇갈린 관계를 그려낸다. 귀를 사로잡는 강렬한 록 음악과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이 시너지를 이뤄 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을 이어가는 송스루 뮤지컬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다.
◇아들
일정 9월 15일~11월 22일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연출 민새롬 출연 이석준, 이주승, 정수영 등
프랑스 유명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가족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이자 최신작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관객을 찾아간다. 이혼한 부모와 그 사이에 놓인 아들의 갈등을 통해 가족의 해체와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마음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가족 간 발생하는 불편한 상황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한 사람의 생애에 필(feel)이 꽂혀 일생을 바칠 수 있을까? 그러는 사람의 삶은 정녕 아름답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올인한 사람이 있다. 바로 남한산성 만해 한용운 기념관 전보삼 관장이다. 그는 어떻게 한 사람의 삶에 그토록 매료된 걸까? 그 궁금함을 풀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가을이 오는 남한산성을 찾은 건 실로 오래만이다. 가까이 살면서도 와본 지 1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하기야 서울 살면서 남산에 다녀온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히려 지방 사람들에게 서울 하면 필수 코스가 남산이다. 아마 그들이 나보다 더 자주 찾지 않나 싶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은 주로 산성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음식점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떠난다. 필자도 그럴 심산으로 남한산성을 찾았다가 만해 한용운 기념관 안내판을 보고 둘러보게 됐다. 그러다가 이 기념관이 관이 만든 게 아니라 한 민간인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취재 욕구가 발동했다.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게 많았던 소년
전보삼 관장은 어린 시절부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강릉 집 근처에 포교당이 있었는데 궁금한 게 있으면 그곳에 가서 뭐든 묻곤 했지요. 윤회, 삶과 죽음 이야기 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스님들 사이에는 강릉 포교당에 가면 당돌한 중학생이 한 놈 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하네요.”
그는 중학교 때 이미 내용도 잘 모르는 ‘반야심경’을 줄줄 읽고 ‘팔만대장경’도 구매해서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생을 바꾼 책,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궁금한 것이 많았던 이 학생에게 어느 날 포교승이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을 던져줬는데, 이 시집이 전 관장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의미를 모르던 반야심경의 내용을 ‘님의 침묵’에 대입해보니 이해가 되었지요. ‘님은 갔습니다’라는 의미가 색즉시공(色卽是空) 아닌가요? 모든 물질적 형상들은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색즉시공이죠.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 아닙니까? 그때부터 ‘님의 침묵’과 만해에 필(feel)이 꽂혔지요.”
*공즉시색(空卽是色):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 현상의 하나하나가 그대로 실체라는 말. ‘반야심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만해의 시집을 읽으며 전 관장은 더 깊은 불교 공부를 했고 만해 한용운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만해에 관한 물건들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만해 한용운의 연구에 푹 빠지다
만해에게서 인생의 숭고한 삶의 가치를 깨달은 전 관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실천하리라 약속했다.
“첫째는 만해가 말년을 보냈던 성북동의 심우장을 찾는 일이고, 둘째는 망우리 공원묘지에 있는 만해의 묘소를 찾아보자 한 것이었지요. 마지막 다짐은 만해의 제자 강석주 스님을 찾아 생전의 만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이후 그는 삼청동 칠보사에 기거하는 강석주 스님을 찾아 만해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만해의 사상에 더욱 매료된다.
“강석주 스님이 기억하는 만해 스님은 ‘나라 사랑에 있어서 부처 같은 분’이었습니다. 또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고 독립운동사에서 만해의 업적은 아주 특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3·1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분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기도 했지요.”
전 관장은 1979년 12월, 만해 묘소를 찾아 주변을 정비하고 상석과 비석을 세워 묘비 제막식을 주도했다. 이뿐만 아니라 1981년 심우장에 기념관을 설립했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에게 한 세 가지 약속을 다 지켜냈다. 1980년 6월에는 ‘한용운 사상연구’를 펴냈고, ‘만해의 사상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1990년에는 성북동에서 남한산성으로 기념관을 옮겼다. 이때 강남구 개포동 아파트를 팔아 남한산성 근처 땅을 샀고 1998년에는 사재를 털어 현재의 기념관을 재개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념관에는 어떤 것이 있나?
기념관이 소장한 자료 하나하나에는 전 관장의 손때가 묻어 있다. 소장품에는 ‘님의 침묵’ 초간본과 130여 종의 판본이 있고,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 시집도 있다. 이 밖에 만해 친필 유묵과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추서한 건국공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 학술논문, 연구자료 등 3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관련 자료 수집 비화
만해와 관련된 자료라면 어디든 달려가 자료를 수집한 전 관장은 ‘님의 침묵’ 초간본을 샀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1978년 고서 경매장에 처음으로 ‘님의 침묵’ 초간본이 나왔어요. 그러나 이 책은 팔려고 내놓은 것이라기보다 경매장 흥행을 위한 상징적으로 나온 것이었어요. 아예 팔 생각이 없었으므로 시세보다 10배가 더 높은 가격을 붙여놓았어요. 그때 소장자를 알아놓고, 당시 교수 월급이 10만 원이었는데 1년을 모아 50만 원을 주고 구매했지요.”
사설 기념관을 운영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전 관장은 또 한 가지 비화를 들려줬다.
“소장품 중에 국가에서 만해 한용운에게 수여한 훈장이 있어요. 원래는 소장자의 집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던 거지요. 그래서 당시 총무처에 재발급을 의뢰했는데 훈장을 재발급한 사례가 없다는 거예요. 제가 여러 차례 기념관에 전시해 후세에 알릴 거라고 설득한 끝에 재심의가 처음 열렸고 결국 훈장 재발급을 받아냈지요. 훈장 재발급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일이랍니다.”
남한산성으로 기념관을 옮긴 동기
만해 기념관은 만해가 말년을 보낸 성북동 심우장에서 1981년 처음 문을 열었다. 그러다 1990년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당시 심우장은 문화운동을 하기에는 좋았지만, 공간이 좁고 외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남한산성이 떠올랐어요. 남한산성은 호국의 성지로 알려져 있고 찾는 사람도 많잖아요. 남한산성을 찾는 이들 중 10%만이라도 기념관에 들러 만해 스님을 알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 몰입한 아름다운 삶
전보삼 관장은 만해라는 한 사상가의 삶에 매료되어 몰입한 사람이다. 사설 기념관을 운영하며 사비로 자료를 수집하고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후세에 알리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앞으로 남은 생의 계획을 묻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만해 정신을 선양하고, 만해 정신과 철학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 정신과 사상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흰머리가 뒤덮인 전보삼 관장의 생애가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만큼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만해 기념관에서 열리는 행사
수시로 좋은 전시회 및 행사가 열린다. 10월 30일까지는 전길수 선생이 기증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전길수 선생은 1941년 경남 함양 출신으로 ㈜ 대우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재임하면서 평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40여 년 전부터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구룡산인 김용진, 긍석 김진만, 해강 김규진, 위당 이계호, 소하 김익효, 의재 허백련의 작품 등 기운 생동하는 사군자 작품 60여 점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체험 학습장도 운영
체험학습을 통해 만해의 사상과 민족 혼을 일깨우는 학습장이다.
● 만해의 시를 이용한 시화 족자, 시화 등, 시화 부채 만들기 외
● 탁본: 태극기, 만해 영정, 남한산성 고지도 외
● 어린이 활동지: 만해와 역사 여행 등
전보삼 관장 약력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학위 취득, 신구대학교 교수 정년퇴임.
경기도박물관장(2015~2017년), (사)한국박물관협회회장(2009~2015년) 역임.
현재 (사)한국문학관협회장(2016~).
9월 전시소개
코로나19로 지친 브라보 독자를 위해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는 이달의 전시를 소개한다. 단, 전시장을 방문할 때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 방역 지침을 반드시 준수하자.
#퓰리처상 사진전
일정 10월 18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언론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 사진전이 6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1942년부터 2020년 퓰리처상 수상작까지 총 134점의 수상작을 선보인다. 한국인 최초로 퓰리처상 사진 부문을 수상한 로이터통신 김경훈 기자의 작품이 공개된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일정 9월 3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프로젝트 해시태그’ 공모사업의 결과 보고전으로, 팀 ‘강남버그’와 ‘SQC’의 작품이 전시된다. 강남버그는 강남의 과거와 현재를 표현한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의 쟁점을 날카롭게 분석하며, SQC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밀려난 종로3가 소수자들의 문제에 주목한다.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신규 지정된 국보·보물을 공개한다. 국보 제151-1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을 비롯해 총 83건 196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를 지키다', '예술을 펼치다', '염원을 담다' 등 총 3부로 진행된다.
#명상 Mindfulness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피크닉
'코로나블루'를 겪는 현대인들의 맞춤형 전시로 명상이 주는 힘을 총 8점의 설치미술 작품으로 설명한다.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 대만 작가 차웨이 차이, 미디어 아티스트 미야지마 타츠오 등 실제로 수행을 실천하는 각 분야 예술인들이 전시에 참여한다.
● Exhibition
◇퓰리처상 사진전
일정 10월 18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언론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 사진전이 6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1942년부터 2020년 퓰리처상 수상작까지 총 134점의 수상작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사진 부문에서 수상한 로이터통신 김경훈 기자의 작품도 공개된다. 제3전시실에서는 2014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취재 도중 사망한 여성 종군기자 안야 니드링하우스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진행한다. 수상작과 더불어 다큐멘터리 필름과 퓰리처상 주요 수상작을 미디어 아트로 구성한 영상 콘텐츠도 제공한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
일정 9월 3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지난해 진행한 ‘프로젝트 해시태그’ 공모사업의 결과 보고전이다. 전시에 참여한 ‘강남버그’와 ‘SQC’는 디자이너, 건축가, 연구자로 구성된 팀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창작자들 간 협업을 지원하는 사업 취지에 따라 선발됐다. 이번 전시에서 강남버그는 ‘천하제일 뎃생대회’, ‘강남버스’ 등 강남의 과거와 현재를 표현한 작품으로 한국 사회의 쟁점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SQC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밀려난 종로3가 소수자를 ‘도시퀴어’라 명명하며 이들의 문제에 주목한다.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신규 지정된 국보·보물을 공개한다. 국보 제151-1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을 비롯해 총 83건 196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를 지키다’, ‘예술을 펼치다’, ‘염원을 담다’ 등 총 3부로 구성돼 각각 기록유산과 예술품, 불교 문화재를 소개한다. 전시실 입구에서 보여주는 국보와 보물에 대한 전문가와 시민들의 인터뷰와 영상은 문화유산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전시장을 찾지 못하는 관람객을 위해서 박물관 누리집을 통해 온라인 전시도 진행한다.
◇명상 Mindfulness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피크닉
‘코로나블루’를 겪는 현대인들을 위한 맞춤형 전시. 명상이 주는 힘과 의미를 회화, 영상, 공간디자인 등 총 8점의 설치미술 작품으로 설명한다.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 대만 작가 차웨이 차이, 미디어 아티스트 미야지마 타츠오 등 실제로 수행을 실천하는 각 분야 예술인들이 전시에 참여한다. 동양적이고 자연적인 느낌을 주는 나선형 구조의 설치작품 ‘느리게 걷기’, 공간 전체를 주황빛으로 연출한 작품 ‘공간’ 등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들을 곳곳에 배치해 관람객들이 작품보다는 내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 Stage
◇캣츠
일정 9월 9일~11월 8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트레버 넌 출연 조아나 암필, 앨리스 배트, 헤이든 바움 등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T.S. 엘리엇의 우화집이 원작이다. ‘젤리클 축제’에 모인 고양이들의 다양한 사연을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초연 40주년을 기념해 세계적인 디바 ‘조아나 암필’, 한국인이 사랑하는 월드스타 ‘브래드 리틀’ 등 최고의 기량을 갖춘 배우들이 함께한다. 2017년 한국 뮤지컬 사상 최초 200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 진행되는 첫 공연이다.
◇킹키부츠
일정 11월 1일까지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연출 조광화 출연 이석훈, 박은태, 김지우 등
팝 가수 신디 로퍼가 작사·작곡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폐업 위기에 처한 구두공장을 살리기 위해 여장 남자용 부츠 판매에 뛰어든 두 남자의 도전기를 담았다. 1980년대 영국 W.J. 브룩스 공장의 실제 성공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마리퀴리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태형 출연 김소향, 옥주현, 김히어라 등
과학자 ‘마리퀴리’의 삶을 각색한 팩션 뮤지컬로 리튬 발견이라는 업적 뒤에 가려진 인간 마리퀴리의 고뇌를 밀도 있게 그렸다. 초연 당시 5인조였던 라이브 밴드를 7인조로 보강해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다.
● Movie
◇오! 문희
개봉 9월 2일 장르 코미디, 드라마 감독 정세교 출연 나문희, 이희준, 최원영, 박지영 등
평화로운 농촌마을, 뺑소니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 ‘문희’와 그의 아들 ‘두원’이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서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관록이 빛나는 나문희와 리얼리티 연기의 대가 이희준의 호흡이 작품에 재미를 더한다. 특히 59년 연기 인생 최초로 액션에 도전한 나문희는 나무에 오르고 트랙터로 논두렁을 달리는 등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을 선보여 기대를 모은다. 정세교 감독이 나문희를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쓴 만큼 ‘문희’가 나문희의 ‘인생 캐릭터’로 새롭게 등극할지 주목된다.
◇카일라스 가는 길
개봉 9월 3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정형민 출연 이춘숙
80대 최고령 오지탐험가 이춘숙 씨의 ‘카일라스’ 순례 여정기를 담은 로드무비다. 자연을 거닐며 인생을 돌아보고 다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이 씨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개봉 9월 예정 장르 액션 감독 매튜 본 출연 랄프 파인즈, 해리스 딕킨슨 등
킹스맨 시리즈의 프리퀄 영화로 베일에 싸여 있던 킹스맨의 기원을 밝힌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전쟁을 모의하는 폭군과 범죄자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 Book
◇나는 당신이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주홍 저·비타북스)
대한민국 치매 주치의 박주홍 박사가 치매 예방에 좋은 생활 루틴을 제안한다. 컴퓨터를 배우며 치매를 늦춘 할머니, 꾸준한 산책으로 기억력이 개선된 환자 등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뇌 활성화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8개 지압법과 31가지 부위별 뇌 강화 운동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소설여행 (김유정 저·나무나무)
‘냉정과 열정 사이’의 피렌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발리 등 소설 속 도시를 향해 떠난 작가의 에세이. 17곳의 여행지 소개와 더불어 소설의 의미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코로나가 시장을 바꾼다 (이준영 저·21세기북스)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공저자인 이준영 교수가 코로나19 이후 변화한 소비 트렌드를 7개 키워드로 정리했다. ‘홈코노미’, ‘로컬리즘’ 등 포스트코로나 시대 소비 지형을 조망한다.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빅터 프랭클 저·청아출판사)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1946년 오스트리아의 한 시민대학에서 했던 강연을 책으로 옮겼다. 고난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들은 꽃철이 되면 아랫녘으로 떠나고 수목원을 찾지만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천 향교에 간다.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이곳에 가면 조용한 향교 담장 위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다. 옛 교육기관에서 꽃과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심 속에서 옛 시간과 소통하는 양천 향교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깐 걸어 들어가 사찰 홍원사 뒤편으로 가면 있다. 산을 등지고 안정감 있게 들어앉은 모양새다. 향교는 옛 성현들의 덕을 기리고 제를 모시며 지방 향리들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현대적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230여 개의 향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양천 향교만 남아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조선 태종 연간(서기 1411년경)에 설립된 양천 향교는 옛 선비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생활예절 교육과 함께 다양한 소통 창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그래서 더 조용해진 향교다.
담장을 둘러쌓았던 능소화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래도 잊지 않고 피어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꽃잎을 활짝 열었다. 능소화의 전설 속에는 그 옛날 구중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 이야기가 있다. 어여뻤던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임금이 자신을 찾지 않자 그리움에 점점 병이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장 밑을 서성이고 내다보며 오매불망 임금만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뜬 소화. 그녀는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그 영혼이 깃들었는지 소화가 지냈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꽃이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오래전 사신들이 중국을 드나들며 가져온 꽃으로 화사한 색상과 모습이 기품 있어 양반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대부 뜰에서만 볼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능소화가 다 피고 질 때 미련 없이 꽃송이를 톡 하고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소화의 지조를 닮은듯하다고 풀이한다. 능소화의 꽃말은 '영광', '기다림', '명예'다.
예전에는 능소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맘때면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운치 있는 한옥 담장을 뒤덮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변 산책길에서 굵은 나무 기둥을 칭칭 감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고 고속도로변의 높은 벽을 뒤덮으며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능소화 터널을 이룬 신식풍 조경의 공원도 생겨났다. 어느덧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능소화는 역시 담장을 타고 피는 게 제일 어울린다. 마침 향교 관리인이 굳게 잠긴 문을 잠깐 열어주어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 공간이 있는 마당까지 들여다봤다. 향교 옆길로 한 걸음 옮기면 궁산 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은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땅굴, 구암공원, 허준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강서 역사문화 둘레길을 알차게 돌아볼 수 있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때문에 실내 관람은 어렵다.
바이러스로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지금은 향교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주변 뜰을 거닐며 유생들의 선비정신과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는 시간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유유자적 생활 속 거리 두기에 적당하다.
향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 전에 한 번쯤 옛 성현들의 흔적을 통해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뜰에서의 담백한 어느 하루, 여름 햇살을 받은 능소화가 향교 담장 위에서 눈부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주변 볼거리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겸재정선기념관, 구암공원, 허준박물관, 궁산땅굴이 이어져 있다. 향교 입구 부근에 위치한 사찰 홍원사와 전통 방식으로 면을 만들어 국수를 주렁주렁 널어놓은 ‘옛날국수’ 집 구경은 덤이다.
△이타제면소의 잔치국수(5000원)와 굴림만두(4000원)로 맛난 한 끼가 가능한 곳이 근처에 있다.
2010년 전후를 즈음해 나는 알프스로 발길을 돌렸다. 히말라야 지역을 지겨울 정도로 쏘다닌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본의 아닌 ‘가난의 전시’가 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지역의 국가들은 세계 최빈국에 속한다. 덕분에 물가가 말도 안 되게 싸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트레커에게는 반가운 일일지 몰라도, 나이 든 어른으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다. 나 자신이 마치 ‘가난의 갤러리를 배회하며 우쭐대는 부르주아 관람객’처럼 느껴지는 게 싫었다. 알피니즘의 역사를 봐도 히말라야보다는 알프스가 우선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프스는 안중에도 없었다. 히말라야에 그토록 집중한 것은, 박정희 시대가 낳은 ‘성과 우선주의’의 우스꽝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높은 곳에 먼저 오르는 놈이 장땡’이었던 시절의 유물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박물관의 먼지 쌓인 진열대에서도 치워진 지 오래다. 등반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트레킹이라는 개념이 시작되고 크게 발전한 지역 역시 알프스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알프스는 제쳐놓고 히말라야만 고집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프스 트레킹에 대한 오해들
알프스 트레킹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그중 첫 번째가 “히말라야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알프스 트레킹을 할 경우 대개 산장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산장의 편의시설(샤워실, 화장실, 침대, 식당 등)은 매우 만족스럽다. 최소한 서울의 3성 내지
4성급 호텔 수준이다. 3성급 이상의 호텔에 머물면 당일 저녁식사와 다음 날 아침식사를 제공받는데 비용이 10만 원 수준이다. 과연 비싼 가격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1박에 3000원도 안 되는 히말라야의 로지에 비하면 비싸다. 하지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다르지 않은가.
알프스 트레킹의 매력 중 하나는 음식과 와인이다. 산장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서울의 웬만한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 레스토랑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근사한 와인을 제값 주고 마실 수 있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알프스 주변 국가는 이른바 ‘서양의 선진국’들이다. 선진국에서의 트레킹 비용을 최빈국과 단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두 번째 오해는 “알프스에 가면 자기 짐을 모두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그랬다. 인건비가 비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프스에는 차량과 케이블카 등을 이용한 딜리버리 시스템이 정착한 지 오래다. 즉 커다란 카고백에 짐을 잔뜩 넣어 가도, 당일 필요한 짐만 배낭에 챙겨 길을 떠나면, 딜리버리 서비스맨들이 그날의 종착지인 산장에 나머지 짐을 옮겨준다. 비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이제 짐이 무거워 알프스에는 못 가겠다는 말은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그림엽서 속 풍경 같은 ‘투르 뒤 몽블랑’
알프스 트레킹의 시그니처 코스는 당연히 투르 뒤 몽블랑(Tour du Mont Blanc, TMB)이다.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걸어서 넘는 아름다운 길이다. 당신이 알프스로 진출한다면 제일 먼저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곳곳에 깔끔한 편의시설이 넘쳐나는, 그림엽서 속 풍경 같은 길이다. 그래서 일단 알프스 트레커들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면, 이제 눈을 돌려 알프스 곳곳에 숨겨진 트레킹 코스들을 들여다보라. 당신은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살아생전에 그 매혹적인 코스들을 다 둘러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나는 2010년 이후 거의 매년 여름을 알프스에서 보냈다. 알프스 자락의 3대 산악도시로 흔히들 프랑스의 샤모니, 스위스의 체르마트, 이탈리아의 쿠르마유르를 꼽는다. 대부분의 트레킹 코스는 이 도시들 중 한 곳 이상을 통과한다. 내가 가본 아름다운 코스들 중 한 곳은 투르 몬테로사(Tour de Monte Rosa, TMR)다. 체르마트를 끼고 돌며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을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알프스 전역은 스키장용 케이블카 노선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체력이 부치는 사람은 차량과 케이블카를 이용해 다음 목적지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다.
심산(沈山)
작가, 심산스쿨 대표, 코오롱등산학교·한국등산학교 강사. 산악 관련 저서로 ‘마운틴 오디세이-심산의 알피니스트 열전’, ‘마운틴 오디세이-심산의 산악문학 탐사기’,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 등이 있다. 대한산악연맹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