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간정(草澗亭) 원림(園林)을 찾아 길을 나선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다. 햇살이 따갑다. 매서운 폭염이다. 그러나 땡볕을 먹고 여름 꽃이 피고 과일이 실팍하게 여무니 해를 향해 눈총만 쏠 일 아니다. 접때엔 물 폭탄처럼 장대비 내렸다. 장자 말하길, 자연은 자애롭지 않아 만물을 하찮게 여긴다 했던가. 폭우도 폭염도 무심한 자연의 순행(順行)이다.
초간정 원림에 들어서자 솔숲이 펼쳐진다. 뙤약볕 아래 솔은 푸르다. 대낮 천지가 밝아 초록 솔잎들 한결 환하다. 실바람조차 없어 미동 없이 고요한 소나무들. 외양은 그러하나, 쏟아지는 햇볕에서 양분을 취하는 솔의 내장기관엔 1초의 정지도 없을 것이다. 겉으로 푸르디푸르게 양양하고, 안으로 마당쇠처럼 분주한 저 여름 소나무들. 저마다 꼿꼿한 지체로 개결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서리를 뒤집어쓰거나 불볕이 내려치거나, 언제 어디서나 늘 푸르른 소나무. 해서, 선비정신의 표상이다. 푸른 갓에 푸른 도포를 걸친 소나무의 의연한 모습에서 옛사람들은 선비의 풍모를 읽었다. 그래서 소나무를 학자수(學子樹)라 일컬었다. 공자는 문필수(文筆樹)라 불렀다. 대나무, 매화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통했다.
선비란 어떤 사람인가. 수기(修己)를 일삼은 존재였다. 마음과 학문을 갈고닦아 세상에 이롭게 쓰이기를 갈구한 사람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권력의 농간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고 살기를 미션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지식을 채우고, 기개를 돋우기 위해, 참된 선비는 쉼 없이 공부를 했으며, 지독하게도 노년마저 공부에 바쳤다.
보라, 여기 초간정에도 조선 선비가 살았다. 곧은 선비정신이 깃들어 숨 쉬는 정자다. ‘대동운부군옥(大同韻府群玉, 보물 제878호)’, 이는 조선조의 저작 중 매우 독특한 명저다. 이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 책은 단군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지리, 역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망라, 운별(韻別)로 분류 수록했다. 전거(典據)의 충실성과, 민중 중심적 시각으로 일찍부터 그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편찬자는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초간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초간정을 짓고 칩거, ‘대동운부군옥’을 완성했다. 책을 집필하며 조선 지식인들을 통절히 질타했다. 중국의 역사엔 밝으면서 조선의 일엔 아둔하다고.
원림엔 소나무 외 느티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등속이 함께 어울려 숲을 이룬다. 숲의 안통으로는 계류가 여울져 흐른다. 물소리 찰랑이는 계곡 바위 벼랑 위에 초간정이 있다. 조촐한 규모와 단아한 태로 질박하고 곱살한 운치를 자아내는 정자다. 온돌방 하나를 중앙에 조성해둔 건 애초 정사(精舍)로 쓰여서겠지. 초간 선생은 이곳에서 드시고 마시고 주무시며 집필에 임했다. 정사였다지만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른 대청이 누마루처럼 후련하다.
차경(差境)이라 하지. 마루의 열린 공간으로 정자 바깥의 자연 풍광이 렌즈로 당긴 듯 끌려 들어온다. 솔숲이 정자 내부로 들이치고, 숲 너머 산이 들어오고, 산 걸린 하늘 자락까지 스며든다. 마루 아래로 눈을 던지면 솰솰 굽이치는 계류가 청신하다. 공부면 공부, 집필이면 집필, 쉼이면 쉼, 풍류면 풍류, 초간 선생은 이곳에서 누릴 것 다 누렸을 게다. 그러나 여한 없이 누릴 걸 다 누리는 삶이 있던가? 눈시울 적실 일이 한둘이던가? 선생의 비통한 글 한 귀가 가슴에 아리다.
‘그대, 상여에 실려 그림자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니, 나 이제 어찌 살란 말이오.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九曲肝腸) 미어져, 차마 슬퍼할 말을 찾지 못하겠네.’
상처(喪妻) 뒤 선생이 ‘초간일기(草澗日記)’에 남긴 글이다. 사별이란 아파 세상의 모든 별들이 저문 듯 암담해진다. 정녕 보내지 않았음에도 훌쩍 떠난 사람의 그림자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쳐보지만, 이미 부질없다. 제아무리 의연한 선생이라지만, 슬픔에 사무쳐 갈피없이 흔들렸을 테지.
탐방 Tip
예천 초간정 원림은 담양 소쇄원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원림으로 불린다. 초간정 옆 별채에선 한옥 체험 민박을 운영한다. 초간 종택(보물 제457호)이 초간정에서 2km 거리에 있으니 함께 답사한다.
꽃은 환희의 절정이며,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의 축복이다. 인간 세상에 꽃이 없다면 단 며칠도 생명을 유지할 식량을 구할 수조차 없다. 꽃은 지극히 소중하고 귀하면서도, 너무 흔하게 널려 있다. 아기가 연필을 잡으면서 제일 먼저 그리는 것도 꽃이며, 출생의 축하 꽃다발에서 생일, 입학, 졸업, 결혼,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도 꽃송이로 추모한다.
모든 화가들이 꽃을 그리는 데는 어떤 감정이 이입되기 때문일까? 갓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에서 마른 꽃묶음까지 다양한 형태의 꽃그림을 보며 우리는 화가들의 속내를 엿보려 한다.
여러 해 전 미술품 경매회사에서, 국내 은행 합병에 따른 소장 미술품을 경매에 올린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은행들은 화가들의 전시회를 통해 그림을 구입하거나, 유수한 화랑에서 구입하므로 출처, 진위 등은 염려할 필요가 없고 다만 작가와 가격에 유의하면 된다.
평소 전시회를 관람하며 눈에 담아 두었던 김경희(1948~ )화가의 꽃그림 ‘또 하나의 열정’을 그 경매에서 만나 운 좋게 낙찰 받았다. 80호 크기의 대형 그림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작가는 건축학을 전공하였지만, 일찍이 박고석(1917~2002) 화백과 전상수(1929~ ) 화백을 사사하여 화업을 닦고 미국 유학 중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다.
여느 화가들이 원색 쓰기를 저어하는 데 반하여, 과감한 원색을 자유자재로 풀어낸다. 거칠 것 없는 대담한 붓질로 빚어낸 색채의 흩어짐과 모임이 스케일 큰 구도 속에 ‘정물화’를 생동감 있게 변화시킨다. 그믐밤 즈음의 화원에는 붉은 맨드라미가 꽃대를 뽑아 올리며 꽃무리를 이끌고 있다. 무당벌레가 은밀히 속삭이고, 고추잠자리 한 쌍도 꽃 위에 앉으려는 찰나가 설화처럼 고즈넉하다.
붉은색과 초록의 대비도 좋고, 왼쪽 위로 열린 하늘에 이우는 달빛과 흩뿌려진 별들의 점묘도 화려하다. 꽃의 환희이며, 도도한 생명의 예찬이다. 이 작가의 수채화들 또한 속기를 벗어난 명징하고 고아한 정신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작품 입수가 어렵긴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어떤 그림을 수집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미술잡지 ‘월간미술’ 1996년 3월호는 서병기(1919~1993) 화가의 ‘작가발굴’ 기사로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서병기는 1930년대 서양화의 메카라는 대구 지방을 중심으로 이인성(1912~1950), 서진달(1908~1947), 주 경(1906~1985) 등과 함께 미술활동을 했다. 그는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유학하였으나, 가정사정으로 중도에 귀국하였다가 다시 출국, 소미야 이치넨(曾宮一念· 1893~1994) 화백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며, ‘광풍회’와 ‘춘양회’를 통해 작품 활동을 하였다고 전한다. 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첫 국내전을 열었고, 1963년 대구 공보관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연 것이 국내전의 전부다.
그 해 일본에서 2인전을 열어 일본 화단의 큰 호평을 받았고, 1979년에 세 번째 개인전도 일본에서만 열렸다. 저간 십여 년의 열정이 녹아든 이 전시에 35점의 작품이 소개되었다고 전한다. 대구의 대저택에서 1964년 서울로 이주하였고, 1973년에는 부인과 사별했다. 유난히 금실이 도타웠던 그는 거의 매일, 경기도 송추 인근의 부인의 묘원을 찾곤 했다고 유족들이 전한다. 그곳의 풍광을 눈에 가득 담아 와서 찬찬히 화폭에 옮겼다. 아내에 대한 곡진한 그리움이 화필에 녹아 한 송이 두 송이 눈물어린 꽃이 되었다.
몇 해 전 인사동 어느 화랑에 서병기 화가의 작품이 입수되었다기에 즉시 달려가 아홉 점의 그림을 일괄 구입하였다. 모두가 두터운 종이에 유채로 그린 10호 안팎의 보관상태 만점인 그림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돌아와 그림 한 겹 한 겹 고급한지를 풀어 놓은 탁자 앞에 우선 침향(沈香)을 사르고, 죽로차 한 잔을 올리며 경외의 배관(拜觀)을 하였다.
공교롭게도 꽃그림이 여섯 점이고, 풍경화가 석 점이었다. 장미, 모란, 산나리, 아네모네들의 향내가 은은히 어리는 듯하였다. 짙붉은 모란 앞에서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마당에 서너 포기 모란이 필 때면 묵객과 더불어 김영랑 시인의 절창 같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염송해 왔기에 그 감회가 더하였다. 꽃병에 세 송이 만개한 모란이 잎 사이로 붉은 해 같은 광채를 발하고, 소용돌이처럼 오른 방향의 붓질과 달리 잎새들은 왼쪽으로 원을 그려 율동감을 주고 있다. 꽃병에도 꽃과 잎의 그림자가 어려 운치를 자아낸다. 저 세상 아내에 대한 피맺힌 사모의 헌화이리라.
이태 전 이른 봄 남도 여행 중, 담양의 소쇄원(瀟灑園) 제월당(霽月堂) 오백 년 된 마루에 반백년 친구와 나란히 앉아, 바람에 흩어지는 매화꽃을 바라본 적이 있다. 아련히 이어지는 먼 꽃길 사이로 가물가물 아련한 솔바람 길에서부터 한참의 세월을 담연한 눈빛만으로 되짚어 보았다. 설핏 대 그림자 사이로 꽃잎은 날아가는데 얼룩진 눈을 닦으며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글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joonlee@empas.com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우리나라와 미국 두 나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전시를 정부로부터 의뢰받아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가며 촬영할 때입니다. 지금은 모든 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는 우리나라가 소위 큰 나라라고 불리는 대국들로부터 여러 방면에서 휘둘리며 IMF를 선고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연신 어깨동무라고 표현했지만, 그 상태에선 누가 봐도 두 나라가 어깨동무를 하기에는 서로 무리였습니다. 내 눈엔 덩치가 크고 팔도 긴 미국의 손은 그래도 우리의 어깨에 닿았지만,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팔도 짧은 우리의 손은 미국의 어깨에 닿지 않는 안타까운 뒷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럴수록 예술을 통해 이 문제를 접근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히 사진은 이 일을 담당하기에 좋은 점이 많은 예술장르라는 접근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를 대강 훑으며 스케치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나름 충분히 준비하고 로드맵까지 미리 짜고 갔지만, 막상 현장에 들어서니 얼이 멍멍해집니다. 우선 미국이란 나라의 크기와 다양성 그리고 찾아 다녀야 할 장소와 그 거리를 인식하니, 주눅이 든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과 문화원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식사를 하고 일터와 집에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고 또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다시 촬영 현장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겼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진 작업은 현장에서 사진기 뷰 파인더를 통해 나를 보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풍광만 렌즈와 눈에 비칠 뿐, 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내가 들어간 현장이 스스로 감당되지 않을 때, 사진가로 사진기의 셔터를 도통 누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우리나라의 담양 소쇄원을 촬영할 때도 그랬습니다. 소쇄원의 계곡과 광풍각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제월당에 올라섰는데도 소쇄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월당까지 포함해 소쇄원 담장과 소쇄원으로 들어오는 대나무 숲 모두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뒷동산엘 올라갔다 왔는데도 셔터를 누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날은 소쇄원 양재혁 원장이 준비해준 한 보따리의 책을 받아들고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훑어 본 얼마 후, 다시 소쇄원에 내려가 몇 번 소쇄원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경우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미국동포들에게 힘을 얻고나서, 북미주에서 가장 높다는 위트니 마운틴(4500m)을 향했습니다. 그 산이 한눈에 보이는 자락에서 시작해 봉우리들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 좋은 장소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렇게 위트니 마운틴의 산세에 한동안이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위풍당당합니다. 시샘이 날 정도로 여러 모로 아름다운 산입니다. 그 산의 여기저기를 오르다, 무심코 밟고 가는 발밑 길바닥에 들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보니 그냥 맨땅인 줄 알았던 흙바닥에 많은 작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서는 몸을 더 낮추어야 했습니다. 아예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서야 눈높이가 겨우 맞았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는 들풀들이 한층 반짝거리는 것은 햇살도 그렇지만 높은 산이 그 뒤에서 그늘 배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산자락의 그늘은 색 온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었습니다. 감동이 커져, 평상심을 찾으려 숨을 크게 쉬며 작은 들풀에 초점을 맞추니, 카메라 뷰 파인더 안에서 웅장한 산자락이 정말 하늘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들풀의 반짝거림이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전체 노출을 셔터 스피드를 이용해 한 단계 줄였습니다. 피사계 심도는 뷰 파인더에 보이는 그대로 유지하고 명도와 채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나온 이미지입니다. 위풍당당한 위트니 산도 좋았지만, 작고 이름 모를 들꽃들 또한 연약하고 낮은 것이 갖고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한국을 떠나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참으며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동포들이 뷰 파인더 안의 들풀과 겹쳐 보인 것입니다.
‘내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어져 ‘이 땅의 주인은 이 땅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라는 전시 주제가 생겼습니다. 전체 전시 제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보낸 편지’로 잡아 보았습니다. 나라와 민족들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경쟁하고 반목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서로 다른 나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사진 작업을 하다 우연처럼 만들어진 생각입니다.
크고 웅장한 아름다움은 섬세하고 연한 것을 만날 때 더 돋보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비되어 서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바꿀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나름의 가치인 것입니다.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사람들이 나라의 영역이나 민족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그때 그렇게 사진에 담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나라들은 국경을 서로 낮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여권을 어렵지 않게 정부로부터 발급 받고 있으며, 외국 방문과 거주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전역에서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젠 누가 어느 땅에 살든 그곳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 그 땅의 주인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우리 부부는 중앙아시아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몽골국제대학교의 예술 감독으로, 나는 사진으로 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가는 하나의 길을 교수와 홍보대사로 이곳의 젊은이들과 의논하며 살고 있습니다.
배롱나무는 백일홍(百日紅)나무 또는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꽃이 적은 여름철에 백일 동안이나 피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의 꽃이 그렇게 오랫동안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송이의 꽃이 연속적으로 피고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멕시코가 원산인 초본 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해 나무백일홍 혹은 목백일홍이라고 부르며, 배롱나무라는 이름도 백일홍나무에서 배기롱나무를 거쳐서 배롱나무가 된 것이다. 예로부터 ‘열흘 붉은 꽃이 없다(花無十日紅)’ 하여 꽃은 수명이 짧은 것으로 여겼는데, 배롱나무가 이처럼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것이 신기해서 이름 붙인 모양이다. 꽃색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천일홍(千日紅)이나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화단을 지키는 만수국(萬壽菊)의 작명동기 또한 이와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이 오랫동안 피는 것을 보고 이름을 붙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수피를 보고 이름을 붙였다. 일본에서는 나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이 나무를 타다가 수피가 매끄러워서 떨어진다 하여 사루스베리(猿滑)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파양수(?痒樹)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는 ‘매끄러운 줄기를 긁어주면 모든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간지럼을 타므로 파양수라 한다’라는 중국 명대의 꽃 백과사전 의 기록에서 연유한 것이다. 충청도의 향명에 ‘간지럼나무’, 제주도의 향명에 ‘저금 타는 낭’ 즉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배롱나무의 매끈한 수피가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조선시대 사대부집 안채에는 금기시되었던 나무라고 한다. 절에 가면 흔하게 배롱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나무가 나무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속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수행에 용맹정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종소명 인디카(indica)는 인도가 원산지임을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중국남부가 원산지이며, 자주색의 꽃이 핀다 하여 중국이름은 자미화(紫薇花)이다. 중국 사람들은 자미꽃을 매우 좋아하였다. 특히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당 현종은 삼성(三省) 중 자신이 업무를 보던 중서성에 배롱나무를 심고, 황제에 즉위한 해에 중서성의 이름을 자미성으로 고쳤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과 대만 여러 도시의 시화(市花)로 지정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소쇄원, 식영정, 명옥헌 등 남부지방의 전통조경공간에서 정원의 화목으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명옥헌 원림의 연못 주위에는 스물여덟 그루의 붉디붉은 배롱나무가 7월부터 백일 동안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재현한다. 배롱나무의 또 다른 이름인 자미목(紫薇木)은 도교의 선계 중 하나인 자미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배롱꽃 만발한 명옥헌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어서 선계이자 이상향인 셈이다.
무더운 여름날 속세를 떠나 배롱꽃 만발한 별천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