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기계 기술자이면서 시인이다. 기술자가 시를 쓴다는 것도 드문 일인데 그동안 시집도 두 권이나 펴냈다. 그는 젊어서부터 열사의 나라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지역 건설 현장을 두루 경험한 산업 전사였다. 능통한 영어 실력으로 큰소리를 치고 대우도 받으며 해외생활을 마쳤다. 그의 시집을 선물받아 읽어봤다. 이국의 색다른 풍경과 고국의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철철 넘치는 시가 많았다.
K와 주말에 가벼운 등산을 하고 소주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아내와 황혼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K의 부부금슬은 그가 쓴 시집에도 잘 나타나 있고, 평소 부부사이를 봤을 때도 전혀 이상함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K의 집은 서울 송파다. 청주 현장에서 근무할 때 그는 금요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 일요일 오후에 내려오는 주말부부 생활을 했다. 그의 아내는 끼니마다 먹을 국거리와 반찬을 손에 들려 보냈다. 주중 하루는 아내가 직접 청주로 내려와 청소도 해주고 올라갔다. K도 주위의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들을 사진으로 찍고 거기에 감성을 살린 글을 몇 줄 적어 매일 아내에게 보내주곤 했다. 잉꼬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혼을 결심한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주말이면 함께 골프를 치던 K의 아내의 어께가 고장이 났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상태가 점점 더 심해져갔다. 수술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다. 그러는 동안 결국 병을 더 키웠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상태가 심각해 수술밖에 방법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K는 사표를 던지고 아내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년이 흘렀고 오늘 필자와 만났다.
아내가 한쪽 팔을 거의 못 쓰니 머리도 감겨줘야 하고 음식도 K가 다 해야 했다. K로서는 최선을 다해 살림도 하고 아내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데도 아내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내의 잔소리는 늘어갔고 K가 견디다 못해 어느 날 한마디 했다고 한다.
“당신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타박만 하느냐?”
그러자 아내도 지지 않고 볼멘소리를 하더란다.
“나는 당신이 외국에 나가 있을 때 아이들 키우며 이보다 더한 고생을 수없이 했어요.”
결국 K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나도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그 뜨거운 모래바람, 햇볕 속에서 고생을 엄청 했다.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히 살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렇게 나에 대해 불만이 많다면 우리 헤어집시다. 당신 팔은 내가 어떻게 하든 고쳐주리다. 그리고 내 재산 절반을 딱 잘라서 주겠소. 그 돈이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아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 모습을 보면 아내도 내심 황혼이혼을 꿈꾸고 있었던 모양이라며 이제 갈라서야겠다고 말한다.
그때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등산 간 사람이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K는 서둘러서 일어났다. 그렇다! 남자도 힘들 때는 위로를 받고 싶고 “고마워요, 감사해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보통의 사람이다.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해. 하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영화 ‘버킷리스트’ 속 대사다. 인생의 기쁨과 타인을 기쁘게 하는 지점이 같은 사람을 찾자면, 그이가 바로 배우 박인환(朴仁煥·73) 아닐까? 평생 연기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고,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니 말이다. 데뷔 후 53년 동안 100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하며 숱한 기쁨을 공유해온 그가 이번엔 버킷리스트 달성을 꿈꾸는 시니어들의 유쾌한 행보를 그린 영화 ‘비밥바룰라’로 노년의 즐거움을 나누고자 한다.
“그래 맞아, 브라보!”
2016년 연극 ‘아버지의 선물’ 출연 당시 짤막한 인터뷰를 통해 인연을 맺은 박인환은 1년여가 흐른 뒤에도 기자의 명함에 적힌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이 드라마, 영화, 연극 등 7개 작품에 주·조연으로 활약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 그의 미소는 여전히 편안하고 건강해 보였다. 1945년 1월 닭띠 태생인지라 2017 정유년 한 해의 감회가 남다르리라 예상했지만, 그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 우울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부턴가 잊고 지내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벌써 70대야? 옛날 같으면 그냥 늙은이도 아니고 곧 떠날 사람인데, 이렇게 활동해도 되나? 그런데 요즘은 100세 시대잖아요. 내가 인식하는 숫자대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다행히 배우는 정년퇴직이 없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활동하려 해요. 흔한 말이지만, 정말이지 무대 위에서 쓰러질 때까지 연기하고 싶습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연기자로 남고 싶다는 박인환은 그야말로 오로지 연기뿐인 인생을 살아왔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공, 연기 인생 53년 차,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배우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연기만 해온 것’이 아닌 ‘연기밖에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제가 장남인데 군대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연기를 그만두고 취직하려고 성균관대 경영학과 편입 지원서까지 받아놨는데, 때마침 ‘나병(한센병)은 전염병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공연에 참여할 수 있게 됐어요. 지방 순회공연이라 3개월 돌았더니 제법 돈을 주더라고요. 배우를 해도 괜찮겠다고 다시 마음을 바꿨죠. 그런데 그 뒤로 한 10년간 돈을 못 만졌어요. 친구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길로 전향하기 시작했죠. 그땐 소위 빽만 있으면 취직은 문제없던 시절인데 나는 연줄도 없고, 장사를 하려 해도 밑천이 없으니 다른 일은 꿈도 못 꿨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뿐이었고, 계속하다 보니 지금까지 질기게 살아남은 거죠.”
생계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 ‘연기’
스스로 별다른 재능이 없어 연기밖에 못 했다는 그는 연극무대를 떠나 TV 드라마로 적을 옮기면서도 고초를 겪었다. 당시만 해도 연극배우는 예술가, 방송 연기자는 딴따라라는 인식이 강했고 드라마를 찍는다고 하면 돈에 눈이 멀어 무대를 버렸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야 했기에, 예술가의 사명보다는 가장의 책임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고상한 말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밥벌이였어요. 돈을 벌어야 했고, 직업이 배우였고, 일이 곧 연기였죠.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짐을 들 때도 있고 삽질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뭐든 해야 돈이 나오잖아요. 연극이든 드라마든 역할이 도둑이든 경찰이든 가리지 않고 다 해야 했어요. 이런저런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누군가는 나를 보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며 좋게 이야기하는데, 내겐 생계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죠. 아마 아내와 둘만 살았다면 견딜만했을 거예요. 그런데 자식이 생기니 도무지 타협이 안 되더라고요. 어른들은 배고파도 참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당장 우유 먹이고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언제까지 예술 타령하며 작품을 따져 고를 수는 없었어요.”
그동안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준비했지만 이미 답을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이제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자녀들도 어엿한 성인이 됐고, 우리 시대 아버지 연기의 대표주자로 다양한 작품에서 러브콜을 받을 텐데 말이다. 앞으로는 원하는 작품을 골라 출연해도 되지 않을까? 질문을 바꿔 물어 보기로 했다.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에요. 누가 찾아줘야 연기를 하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동년배 중에 역할이 없어 노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을 안 받는다고 해도 써주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직업이 겉보기엔 부러울 수 있지만, 그 속에서는 아주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거든요. 운동선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더 능력 있는 후배들이 계속 나오니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죠. 그 와중에 내 나이에 들어오는 역할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고요. 여전히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스케줄만 맞으면 웬만한 역할은 다 하려고 합니다.(웃음)”
연기 경력 합계 203년, 시니어벤져스의 열정
한때는 농담 삼아 사이코드라마의 괴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욕심 없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연기 베테랑인 그이지만 젊은 시절보다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체면치레는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촬영장에 가면 대개 최고참이죠. 후배들이 많으니 더 조심해야 해요. 어른인데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괜히 모범을 보인답시고 뭔가 했다가 주책없어질지 모르니 가급적 조용히 있으려 해요. 작년에 드라마를 하면서 대사를 잘 못 외운 적이 있어요. 한 번 NG를 냈는데, 당황하니까 계속 틀리는 거예요. 후배들이 다 쳐다보는데 망신스럽기도 하고, ‘아, 이제 내가 그만할 때가 됐나?’ 싶은데, 한편으론 다들 속으로 ‘선생님 이제 좀 쉬시지’라는 생각을 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 더더욱 이 난관을 딛고 넘어서야겠더라고요. 1시간 연습할 거 2시간 연습하고, 세 번 볼 거 네 번, 다섯 번씩 봐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대사 외웠습니다.”
후배들이 주를 이루는 현장이 아닌 신구, 임현식, 윤덕용과 함께한 ‘비밥바룰라’ 촬영장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발걸음할 수 있었다. 척하면 척, 연기 경력 합만 무려 203년인 네 배우의 앙상블은 두말할 것 없이 완벽했고, 촬영을 마치고 곁들이는 소주 한 잔은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특별히 시니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 만큼 네 배우가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대본에 변화를 주는 등 중장년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연기 그 이상의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도 젊은이가 있을 때나 격식 차리려고 하지, 우리끼리는 서로 별명도 막 부르고 애들처럼 장난도 치고 그래요. 몸은 늙었어도 감성은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노인은 이럴 것이다’라는 상상보다는 중장년 세대가 공감하는 현실적인 상황과 대사를 표현하고 싶어서 이성재 감독과 미팅을 자주 했어요. 또 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니어를 만나 의견을 들어보라고 조언했죠. 그 덕분에 젊은 관객이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들만의 웃음과 감동 포인트를 잘 살려낸 것 같아요. 아마 우리 세대가 본다면 가슴을 툭 하고 건드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나이자 전부인 나의 버킷리스트
박인환이 연기한 영환은 ‘비밥바룰라’의 다른 세 주인공을 이끌며 ‘친구들과 한집에 살기’, ‘영정사진 같이 찍기’, ‘미팅하기’ 등 그들만의 버킷리스트를 이뤄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새해도 밝았고, 이번 작품을 계기로 그도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딱히 생각해보지는 않았어요. 아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은 천지 차이라고요.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어떻게 죽을 것이고, 죽고 나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라는 거죠. 반대로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하는 게 버킷리스트인데, 글쎄요. 떠오르는 게 없네요.(웃음) 그저 내년에 ‘비밥바룰라’가 잘되면 희망찬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버킷리스트가 없다는 말이 어쩐지 아쉬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가 원하는 일과 바라는 것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고민 끝에 완성한 버킷리스트 첫 번째 항목은 바로 ‘‘비밥바룰라’가 흥행해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하기’다. 배우로서 특별할 것 없는 진부한 바람일지 모르지만, 인터뷰 내내 가식 없는 정공법을 택했던 그를 보았기에 얼마나 간절하고 묵직한 소망일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토록 그가 쉼 없이 많은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막힘없이 솔직한 답변을 들려줬다.
“이제는 돈 때문이 아니라 불편한 인사치레를 받기 싫어서 작품을 해요. 식당을 가거나 택시를 타면 꼭 사람들이 ‘요새 안 보이시네요?’, ‘어디 아프세요?’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도 개봉하는데 내가 안 보인다니… 그런데 정말 쉬고 있으면 아니라는 말도 못 할 거 아녜요. 작년 11월에도 아주 바빴어요.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사람이 간사해서 며칠 쉬니까 지겹더라고요. 일을 해야 진정한 휴식의 즐거움을 아는 거지, 매일 쉬는 사람에겐 지루한 일상인 거죠. 연기를 할 때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껴요.”
이제는 아낌없이 즐길 때
결국 버킷리스트 추가 항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연기를 향한 열정은 단 하나의 바람이 아닌 그의 전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차차 새로운 항목들을 만들어나가길 바라며, 끝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와 ‘비밥바룰라’ 관객들에게 새해 인사를 부탁했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뭐든 낭비하는 법이 없어요. 절약 정신이 배어 있죠. 늘 이걸 꼭 사야 해? 저걸 꼭 먹어야 해? 그러면서 돈이 있어도 ‘됐어, 됐어’ 하고, 때론 자식들의 효도도 마다하며 살죠. 그런데 이제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가 있으니 문화생활을 즐겼으면 해요. 그래도 괜찮잖아요. ‘비밥바룰라’ 같은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그려나가면 좋겠어요. 새해에는 우리 세대가 더욱 즐겁게 잘 살길 바랍니다.”
토요일 아침에 회원들과 테니스 시합을 하면서 운동은 물론 덕담과 웃음이 오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여성회원들이 가벼운 먹을거리도 갖고 오니까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석이조 (一石二鳥)가 아니라 일석 오조 정도는 된다. 이런 날 아침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문자 한통이 날아들었다. 예전에 함께 운동하던 K씨가 자신의 아내가 이침에 사망했다는 비보다. K씨는 55년생이니 아직 60대 중반이 못되었고 그의 아내는 이제 겨우 60대 초반나이에 들어섰다.
부랴부랴 병원에 달려 가보니 K씨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반쯤 넋이 나가 멍하니 앉아 있다. 힘없이 아주 수동적으로 문상객을 맞이하고 있다. 돌아가신 분은 어젯밤에도 아들하고 밤 열두시까지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 아침에 코피가 나는데 멈추지 않는다고 하여 119 구급차를 불러서 대형병원으로 기는 도중 절명했다고 한다. 이미 죽어서 병원에 왔기 때문에 최종 사인(死因)은 '불명'으로 기재되어있다고 한다. 이런 허망한 일이 어디 있나!
남편이자 상주인 K씨도 더 이상 사망원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고 자꾸 물어본다는 것도 고문에 가까운 질문으로 보여 더 묻기가 어려웠다. 문상 간 우리 일행들이 모여서 과연 사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리형식으로 추정해 보았다. K씨는 공기업에서 퇴직 후 작은 빌딩의 관리인으로 취업하여 대부분의 주야 시간을 빌딩에서 먹고 자고 지낸다. K씨의 아내는 착실한 크리스천으로 교회 일에 매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가정이다.
남편이 집에 없으니 아내는 식사를 부실하게 먹거나. 라면 등으로 대충 때우거나 건너뛰기도 하면서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들을 했다. 주위에 혼자 사는 여자들을 보면 남편이 있고 없고에 따라 여자의 식사수준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옆집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티격태격 부부 싸움도 했지만 늘 시장을 봐오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남편인 할아버지가 죽자 늘 빈손으로 집에 들어오고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간다. 보살펴줄 사람도 없고 간섭할 사람도 없으니 대충 먹고 대충 지내는 것 같다. 서로 보호해주기도 하고 눈치도 봐야하는 가족의 보이지 않는 힘이 대단하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기러기아빠들이 건강상태가 좋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본다. 친구 P씨는 지방의 태양광 발전소에서 혼자 근무했다. 저녁에 라면에 소주 몇 잔으로 저녁을 대신하는 날도 많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아침에 죽어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에 불과했다.
퇴직하고 제2의 직장은 급여가 적어도 근무조건이 나빠도 ‘나이든 나를 채용 해주는 것도 고맙지’ 하고 감지덕지 한다. 평생현역이라는 말도 듣기 좋고 월 100만원의 수입은 은행에 10억 가까운 돈을 정기 예금한 것과 같다며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사회적 요구에 K씨처럼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렵지 않는 은퇴자도 일자리에 내 몰리고 너도 나도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나이든 남편이 일을 하니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아내도 봉사활동이나 몇 푼 밖에 못 받는 싸구려 허드렛일에 매달린다. 나이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거의 막노동수준의 일이다. 남편이 어렵게 돈을 버는데 나만 잘 먹을 수는 없다는 자격지심에 절약이 도를 지나치어 굶기까지 한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사는가! 가족들에게 유언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는 것은 비극이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의식 없이 무조건 일만하는 것도 문제다. 나이에 맞게 적당하게 일하고 영양보충에 돈도 쓰면서 인생을 즐겁게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죽은 뒤에 아등바등 많이 번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늙어갈수록 부부란 함께 살면서 때로는 힘을 내는 엔진역할도 하고 때로는 몸을 쉬게 하는 브레이크 역할도 하고 더러는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서로 대신 해 주어야 한다.
가족·친구들과 어울려 ‘송년주’ 한잔 나누기 딱 좋은 시기다. 헌데 나에게 지난 여름부터 금주령이 내렸다. 송년은 커녕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친구들과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는 나에게 ‘송년금주’는 어려운 숙제가 되었다. 술 배운 후 처음 맞는 이 난국을 이겨내고 금주에 성공할 수 있을까, 금주 금단증상은 얼마나 심할까 생각이 깊어갔다.
담배를 끊으면서 금단증상으로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군대복무 시절 늦게 배운 담배가 제대 때는 골초가 되었다. 20여 년 전 어느 휴일, 친구와 등산을 마치고 ‘일요담배’를 맛있게 한대 피웠다. 헌데 월요일부터 생담배 타는 냄새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악취가 코에서 진동하였다. 금연경험자가 ‘금단증상의 한 형태 같다.’고 말하였다. 손 떨림·체중증가·우울 등은 종종 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담배를 한 대만 피워도 금단증상이 다시 처음처럼 강해진다.’고 하였다. 완전히 끊자 다행히 금단증상의 강도가 점점 낮아졌다. 10년 넘어 금연에 성공하였다.
금주를 시작한지 어느덧 몇 달 지났다. 군대생활 중에 발생한 발톱무좀을 치료하러 피부과 의원에 갔더니 “무좀약을 복용하는 동안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의사가 말하였다. 발톱이 제 기능을 못하면 ‘관절손상이 크다’고 경고하였다. 발의 관절을 보호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이 기회에 완치하여야 한다. 치료를 하면서 금주를 시작하였다. 아직까지는 금단증상이 없어서 다행이다. 송년모임이 매우 허전하게 느껴졌다. 술잔을 돌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이 정겹게 보였다.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의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도 저랬을 텐데!’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학창시절 산행시작 때는 산에서 취사가 허용되었다. 석유버너에 불붙이는 방법을 익히고 코펠까지 준비한 다음에야 등산 패에 낄 수 있었던 옛이야기다. 몇 명이 어울려 각자 쌀·찌개거리·반찬을 가져와 합동취사를 하였다. 버너를 준비하여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는 담당을 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술을 준비하였다. 한겨울에는 눈을 걷어내고 고기를 구워서 소주 한잔으로 추위를 달랬다.
세월이 지나면서 산에서 취사가 금지되고 정상까지 오르는 본격산행이 시작되었다. 도시락을 푸짐하게 준비하여 산상 뷔페식을 즐겼다. 덩달아 산술의 참맛을 알기 시작하였다. 계곡이나 식당에서 마셨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잔 술에 가슴이 탁 트이곤 하였다. 어려웠던 일을 다 잊을 수 있었다.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고 구름 위를 거닐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간이 부풀었다. 발아래에 세상이 조개껍질처럼 엎드렸다. 술을 즐기지 않는 친구도 한모금쯤 입에 댔다. 술 향기에 취하고 흥에 겨웠다.
여기까지는 즐거운 추억이다. 옛날에는 등산복에 배낭 메고 나서면 놀러가는 한량으로 보는 경향이 일부 있었다. 이제는 산행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건강을 다지는 필수 운동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금도 하늘을 날 것 같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능선 어려운 길을 멀리하고, 쉬운 둘레길을 찾는 횟수가 많아졌다. 대여섯 시간 산행이 두세 시간으로 확 줄었다. 정상까지 오르지 않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친구들도 막걸리 한잔을 입에 댔다 떼기를 반복하였다.
사회은퇴 후 사회평생교육장, 재능기부 봉사장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만났다. 그들과는 학창시절의 동창이나 사회생활에서 만났던 동료들과는 또 다른 정을 느끼고 있다. 세상풍진을 털어내고 고향 뒤안길에서 만난 어릴 적 동무 같다. 누구의 손이라도 덥석 붙잡고 싶은 그런 송년이다. 텁텁한 막걸리 한사발이면 딱 좋을 것 같다.
헌데 송년금주다.
건배사 총집합이라는 책의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브라보마이라이프’라는 잡지의 별책 부록으로 독자에게 서비스하는 손바닥 크기의 소책자이다. 해마다 내용을 시대에 맞게 수정하여 발간한다. 건배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시니어라면 그 나이 때문이라도 모임에서 건배사를 해 줄 것을 제의 받는다. 멋들어지게 순발력과 재치를 발휘해야 하는데 너무 진부한 구닥다리 옛날 건배사를 하거나 모임의 성격과 동떨어진 따로국밥 건배사이면 분위기를 오히려 망친다.
건배사의 대원칙은 ‘KISS'라고 한다. Keep It Simple and Short, 단순하고 짧게 해야 한다.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요점을 짧고 굵게 해야 한다. AT&T법칙도 있다. A는 Appropriate '상황과 분위기에 맞게 T는 Timely 즉 시간을 맞추고 마지막 T는 Tasteful로 참석자들의 취향과 성향을 고려해 그에 맞추라는 말이다. 그래야 어색하지 않고 남들이 좋아하는 건배사가 된다고 이 책자에서 설명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준비와 연습이라는 말처럼 중요한 말이 없다. 나는 술자리에 가게 될 때는 건배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가정아래 한두 개를 준비해 간다. 준비가 되었으니 지명을 받아도 당황하지 않는다. 건배사 없이 밋밋하게 끝나려고 하면 ‘잠간!’ 하고 브레이크를 건 후에 권주가는 못 부르더라도 건배사 하나정도는 하고 끝내자고 분위기를 돋운다.
건배사 소책자에 수록된 건배사가 약 300여개가 된다. 이를 다 외울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10여개의 건배사를 집중적으로 외우고 표정과 말의 강약을 연습하면 될 것 같다. 아이디어를 보태서 변형을 하거나 새롭게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
시니어들에게 잘 어울릴만한 건배사 몇 가지를 소개하면
1. 빠삐용: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용서하며 살자
2, 빠삐띠또: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또 만나자
3, 소취하 당취평: 소주에 취하면 하루가 즐겁고 당신에 취하면 평생이 즐겁다
4, 여보당신: 여유롭고 보람차고 당당하고 신나게
5, 언행일치: 언제나 행복하게 일마다 치밀하게
6, 오바마: 오늘처럼 바라는데로 마음먹은 대로
7, 장동건: 장수하고 동안으로 건강하게
8, 해당화: 해가 갈수록 당신과 함께 화려하게
9, 재건축: 재미있고 건강하게 축복하며 살자
10,아리랑: 아름다운 이 순간 서로 사랑 합시다
‘김영란’법 영향도 있지만 송년회나 동창회도 간소화되고 횟수도 대폭 줄어들고 있다. 술자리가 준다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도 좋고 절약의 의미로도 바람직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데 술이 없어질 수는 없고 술이 있는 한 건배사는 영원하다. 싫다는 사람에게 건배사를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지명을 받았는데도 머뭇머뭇 뒤로 빼는 것도 시니어답지 못하다. 미리부터 연습을 반복해서 많이 연습하면 억양이 부드럽고 발음도 정확해 지고 여유롭다.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임수정이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이슬 같은 여자 임수정과 참이슬을 마주하고 흥이 돋는 밤을 보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주세요~” 이 노래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가사 그대로 무작정 임수정이 좋아 죽었었다. 이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그녀의 전성기 시절 피가 끓는 청년 이봉규는 마치 그녀가 나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애타게 원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입을 헤~ 벌리고 넋을 놓은 적이 많았다.
중년이 되어서도 “임수정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배철수가 진행하는 ‘콘서트 7080’에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나이를 먹어도 아직도 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오늘 임수정을 만나고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조그만 선술집에서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대뜸 물었다. “아직도 이슬 같은 비결이 뭡니까?” 그녀는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일까? 담담한 표정으로 “‘참이슬’을 많이 먹어서 그래요”라고 받아치며 소주병을 능숙하게 흔들고 딴다. 정확한 주량은 말하지 않았지만 “남들 마실 만큼은 마신다. 어지간해서 잘 취하지 않는다”고 믿기 힘든 말을 던진다. 의아한 반전에 한량 이봉규도 움찔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한 술자리가 2차까지 이어지면서 한바탕 무르익어갈 무렵에서야 눈치를 챘다. 술도 약한 편은 아니지만 정신력이 강해서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는 걸. 임수정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술자리에서 흐트러지면 늑대들은 아마 제정신 차리기 힘들 것이다. 어려서부터 약간 틈만 보이면 자신에게 남자들이 달려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자기방어가 몸에 배어 있다. 특히 술자리에서는 더욱 철저하다. 인터뷰하는 나와의 술자리도 매니저인 그녀의 사촌 동생이 옆자리에 딱 붙어서 경호했다. 매니저가 사촌 동생인 점도 아마 철저한 자기관리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전히 매력적인 임수정
이자카야에서 소맥 폭탄주로 한껏 흥이 오른 우리는 2차로 피아노가 있는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시절 꿈에 그리던 임수정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취기 때문에 용기를 냈지만 내심 그녀에게 피아노를 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소 TV에서 도발적인 톤으로 윽박지르는 이봉규의 거친 표정을 많이 보아왔던 임수정은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의 노래를 경청했다. 내친김에 그녀를 무대로 불러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그녀가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네다섯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20여 명의 손님들은 환호했다. 나의 손놀림은 평소보다 더 들떴고 힘이 들어갔다.
가슴은 뿌듯했고 온몸의 마디마디는 ‘연인들의 이야기’ 음절에 따라 춤췄다. 노래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멀리 떨어진 바텐의자에서 슬며시 웃으며 박수 치는 내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터뷰하면서 나는 임수정에게 내 아내를 소개했고 아내는 인터뷰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만치 바텐의자에 앉아 관람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임수정도 무장해제하고 나와 2차까지 상당히 마실 수 있었고 또 노래까지 부른 것이다. 대중가수가 조그만 라운지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큰 인심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거기 오신 손님들에게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황홀한 밤이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임수정은 여고 재학 중 미인대회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면서 모델로 먼저 데뷔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는 가수와 배우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계동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 계동균과 작사가 박건호 두 사람은 임수정의 외모와 음색에 딱 어울리게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했다.
1982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연인들의 이야기’ 연주곡이 그해 방영된 KBS2 드라마 ‘아내’의 OST로 삽입되었는데 발칵 뒤집혔다. 드라마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방송국에 이 노래에 대한 전화와 편지 문의가 빗발쳤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두 명의 여성이 엮어가는 기구한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 ‘연인들의 이야기’ OST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30만 장이 넘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뒤돌아보면 미처 준비도 안 된 임수정에게 벼락스타의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와 관련해서 “한번은 탤런트 강부자 씨가 슬픈 노래인데 왜 웃으면서 노래를 하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로 준비가 안 됐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시절을 겪고 난 후 임수정은 노래나 삶의 철학이 원숙해졌다. “최근에 강부자 씨를 만났더니 노래가 확 달라졌다고 칭찬을 해줬다”며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에는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배우 정윤희와 맞먹는 외모의 소유자이고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임수정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호사가들은 소설을 쓰면서 입방아에 올렸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당시 임수정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한꺼번에 밀어닥쳐서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다. 일종의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였다. 30만 장의 앨범이 팔려나간 ‘연인들의 이야기’에 이어 1985년 ‘사슴 여인’이란 곡을 내놓았는데 그 가사가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밤거리에서 사랑을 먹고 사는 사슴 여인”이라는 가사가 직업여성을 뜻한다며 방송사 심의에 걸려 노래가 전파를 탈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임수정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레코드사 이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힌 것이 결정타였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여린 성격의 임수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걸 다 던지고 198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비주얼만 강하고 오디오가 약하지 않느냐?”는 말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고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고생 끝에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 분들은 소중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올라가다 보니까 소중함을 잘 몰라서 공백기를 갖게 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나이를 먹은 지금 뒤늦게 밝히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사실 임수정은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청순한 목소리와 그녀만의 독특한 비브라토(vibrato)는 상당한 음악적 가치가 있었다.
임수정이 가창력이 없다는 비판은 일종의 어깃장이다. 음악에 정석이 어디 있을까? 어떤 목소리와 창법이 노래를 잘하는 것일까? 수치로 계량화된 것도 없고 그저 당시의 유행과 통론에 치우쳐 마음에 안 든다고 비판하는 군중심리의 일종이다.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니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줘야 한다. 대중이 선택한 음악이고, 대중이 사랑한 가수다. 거기에다 이슬 같은 청초한 외모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임수정의 매력이다. 음악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의 외모는 아주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다. 심지어 스포츠인과 정치인의 외모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임수정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추억을 무너트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20대 때 제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많이 망설였지만, 팬들이 ‘감성가수’ 하면 ‘임수정’ 하고 바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노래를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예쁜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100세 시대다. 팬들도 나이를 먹고 가수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70세에 아직도 전 세계 무대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올리비아 뉴튼 존’보다 임수정은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녀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당연히 술자리도 자주 갖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술 잘 마시는 것도 하나의 능력으로 본다. 그래서 ‘술상무’라는 말까지 생겨났는지 모른다.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술자리가 큰 부담이다. 못 마시더라도 눈치껏 마셔야지 너무 빼는 모습을 보이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술은 약일까, 독일까. 한의학에서는 의미 없는 질문이다. 자연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존재 이유가 있다. 약과 독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약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독이 된다. 사물의 성질을 정확히 파악해서 적재적소, 적합한 사람에게 쓰고자 하는 것이 한의학이다.
의학(醫學)에서 ‘의(醫)’라는 한자에 술을 의미하는 ‘유(酉)’가 보인다. 이는 술이 병을 치료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뜻이다. 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약재는 술이다. 약방의 감초로 알려진 감초가 3467번 나오는데 술은 4384번이나 나온다. 을 술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술은 절대 나쁜 음식이 아니다. 많이 마시면 문제가 될 뿐이다.
술만큼 강한 약은 별로 없다. 빠르게 반응이 나타나는 음식도 많지 않다. 술을 먹으면 바로 심장이 뛰고,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면서 감정도 변한다. 어떤 사람은 구토를 하고, 졸려서 잠을 자기도 하고, 용감해지기도 하고, 말이 많아지기도 한다. 분노와 슬픔, 기쁨 등 온갖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술은 뜨겁고 향이 강하다. 약 기운을 전신에 운행시키고, 온갖 사기와 나쁜 기운을 없애주며, 혈맥을 통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두텁게 하고, 피부를 윤기 있게 하고, 우울함을 없애주고, 화나게 하고, 마음껏 이야기하게 만든다.
을 보면 인체의 기본인 정기신혈(精氣神血)을 보하는 보약들은 대부분 술과 함께 복용하거나 술로 빚어서 복용한다. 대표적인 보약인 경옥고도 술과 함께 복용한다. 피부에서 머리카락, 오장육부, 뼈, 뇌수, 자궁 등 인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약 기운을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한 약재는 보통 술에 담가 먹는다.
술은 발효식품이라서 소화도 돕는다.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를 음식도 술과 함께 먹으면 1차, 2차, 3차, 4차까지도 먹게 된다. 나이 드신 분들이 식사 중 반주를 하는 이유는 소화가 잘되기 때문이다.
술만큼 혈액순환에 좋은 약이 있을까? 알코올을 조심하라는 권고는 주량 때문이다. 잠자기 전 정종을 소주 컵 한 잔 분량을 데워서 마시면 손끝과 발끝이 시리고 저린 데 도움이 된다. 혈액순환의 주체인 심장질환 약재에도 대부분 술이 들어간다. 여성은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데 혈액순환 장애가 잘 일어난다. 자궁질환 약재 역시 술이 많이 쓰인다. 어혈을 푸는 데도 최고다. 교통사고, 추락, 타박상, 허리를 다쳤을 때도 도움이 된다.
물론 많이 마시면 독이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 때문에 고생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주량을 능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억지로라도 마셔야 하는 분위기다. 그렇게 1년, 2년, 10년을 살다 보면 알코올성 간염이나 성인병 등 다양한 병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는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어깨와 전신이 무거우며 몸이 붓기도 한다. 속도 편치 않아 소화가 안 되고 소변도 시원치 않게 나온다. 설사와 구토를 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주습(酒濕)이라 표현한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인 것처럼 몸에 술의 습기가 잔뜩 쌓여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가면 당뇨, 황달, 시력 장애, 기침, 천식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술을 C2H5OH로 획일화할 수는 없다. 맥주, 막걸리, 소주, 양주, 과일주 등은 각각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어제 담은 술과 오늘 담은 술도 사실 다른 술이다. 과일주, 약초주에는 과일과 약초의 약성이 담긴다.
산행할 때 막걸리를 마시면 밥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든든하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중에 밥을 안 먹고 막걸리만 먹는 사람이 있다. 밥심만큼 힘이 나기 때문이다. 막걸리 한 사발은 밥 한 그릇이다. 곡주에는 곡기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밤에 막걸리 두 잔을 마시면 밥 두 공기를 야식한 셈이 된다. 그래서 다음 날 몸이 붓거나 전신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탁주는 숙취가 오래간다. 특히 면 종류를 같이 먹으면 해독이 더 어렵다.
양주, 안동소주 등 증류주는 입에 들어가자마자 기화되어 머리에서 손발 끝까지 퍼져나간다. 막힌 기를 뚫어주고 몸을 금방 덥혀준다. 곡주와 달리 머리가 아픈 것도 덜하며 소변도 잘 나온다. 물론 적당히 먹었을 때의 이야기다. 과음하면 어떤 술이든 문제를 일으킨다.
맥주는 발아시킨 맥아(麥芽)와 홉(hop)의 성질 때문에 차갑다. 맥주를 많이 마시면 아랫배가 차가워지면서 배가 나온다. 그래서 몸이 차가운 사람보다는 뜨거운 사람에게 좋은 술이다.
술을 마실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단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둘째, 면 종류, 감과 함께 먹으면 술독이 잘 풀리지 않는다. 셋째, 배불리 먹은 후에는 음주를 주의하고, 취한 후에는 억지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넷째, 얼굴이 흰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지 말아야 한다. 피부가 흰 사람은 폐가 술독을 잘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취한 후에는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섯째, 술은 적당한 양을 천천히 마시는 게 좋다. 일곱째, 취했을 때 갈증 때문에 물 또는 차를 찾게 되는데 많이 마시면 허리, 콩팥, 다리가 약해지고 무거워진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가난하고 배가 고파서 글을 쓰는 일의 힘겨움을 아는 사람, 대하소설 의 작가 김주영은 요즘 경상북도 청송에서 살고 있다. 의 성공은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어줬지만, 사회적 성공과 별개로 그의 삶은 비로소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와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덤덤하고 무심하게 작품과 인생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외로운 아버지들이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고독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남자들을 대변하는 듯한 김주영의 묵직한 목소리와 이야기에 취하는 동안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시대 끝자락을 살았던 보부상들을 철저하게 조사한 자료들을 통해 생생한 필체로 그려낸 대하소설 의 작가 김주영은 1939년생으로, 올해 일흔아홉 살이다. 등단한 지 벌써 47년, 대한민국 문단에서 원로 중의 원로 작가이지만 소설가로서 그의 영혼은 얼마 전 새로운 장편소설 을 내놓을 정도로 여전히 살아 있다.
문학의 가치를 돌아보다
“30대에는 하룻밤에 단편 하나를 써냈는데, 은 1년이 넘어도 끝이 안 나는 거예요. 글도 옛날처럼 열정적으로 안 써지고, 물론 다른 일들도 해야 해서 더 안 써지기도 하겠지만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싶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도중 영인문학관에서 열리는 강연회 때문에 전화가 왔다. 그는 “꼭 일을 하려고 하면 이렇게 전화가 온다”며 증거를 보여주듯 말했다. 나이 들어가는 시간은 스스로가 더 실감하게 된다. 그도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시원시원한 인상이었다.
“을 쓰면서 문학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문학이 밥을 사준다든지, 집을 사준다든지, 취직을 시켜준다든지 하지는 않죠. 그럼 문학에 뭐가 있나? 바로 삶의 의미와 지표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위로를 주죠.”
삶에 대한 위로가 답이다
김 작가는 푸시킨의 유명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예로 들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우울한 나날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올 테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라
“내가 알기로 이 시는 잡지나 신문에 발표한 게 아니고, 당시 진보적인 성향이어서 유배를 여러 번 가야 했던 푸시킨이 농장에서 일하는 처녀에게 화장지에 적어준 시예요. 그 처녀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었겠습니까. 푸시킨은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이 시를 쓴 거죠. 푸시킨이 죽은 지 170년이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는 러시아 국민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죠. 그 정도로 영구적인 감동을 주는 시입니다. 문학이 지향해야 할 지표란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어서, 을 쓰면서도 계속 이 시를 생각했어요.”
에는 한 남자가 나온다. 그는 교육도 못 받았고 키도 작으며 ‘사회에서 물먹고, 집에 들어와도 먹을 게 없어서 물을 먹어야 하는’, 세인의 눈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이다. 하지만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다. 키가 작으니 ‘상관에게 까여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낙천적이다.
그러고 보니 김 작가의 글에는 항상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대표작 에도 조선시대의 천민이었던 보부상이 주인공이었다.
“지금까지는 사회적 약자들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를 풍자하는 작품들을 썼죠. 그러나 은 안 그래요.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약자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이에요.”
체질과 맞지 않는 일 하면 사람만 우스워져
김 작가는 얼마 전 한 보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을 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는 SNS를 하지 않아 자신의 말이 인터넷에서 소란이 됐는지도 몰랐고 그랬다 해도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항간에는 정계에서 러브콜을 했다는 풍문도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이름도 널리 알려져 있고 소설들마다 민중이 자주 등장하니 어찌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풍문에 대한 진실을 듣고 싶었다.
“정치적으로 뭘 해보겠냐고 제안받은 적은 없고, 옆에 있는 분들이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말한 적은 있죠. 그런데 나는 떠밀려서 하는 걸 싫어해요. 난 거기에 맞지 않다 이거지. 내 체질과 맞지 않는 일에 계속 집적거리면 사람만 우스워져요.”
그는 소위 말하는 ‘외로운 늑대’였다. 그의 기질과 삶이 그로 하여금 그런 사람이 되게끔 만들었다.
“책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끝까지 책을 쓸 수 있도록 내 안의 열정과 스스로 분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으며 살고 있어요. 나를 부추겨줄 수 있는 힘이나 사람은 별로 없지 싶어요. 내 안에서 내가 찾아내야죠.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에요.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왔기에 나 스스로 얻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아요.”
문학을 하게 된 이유, 어머니
김 작가는 가족이 자신의 삶에 미친 힘이 너무 미미하다고 고백했다. 지독한 가난과 결손가정이라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채 어렸을 때부터 혼자 결정하고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스스로를 지지하고 믿도록 해줬다. 그러나 그런 그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아쉬움과 죄송한 마음을 감추기 힘든 듯했다.
“굉장히 팔자가 험한 분이었죠. 결혼을 두 번 하셨고 가난에 쪼들렸고 자식들에게 애먹고…. 그런 어머니에 대한 슬픔이 있어요. 어머니가 꽤 오래 사셨는데, 얼마 전에 아흔여섯 살로 돌아가셨어요. 나 때문에 고생했고, 재혼도 나 때문에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난 속에서 나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는 지금은 어머니를 이해하지만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가슴 아팠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든 이유들 중 하나가 됐다.
“어머니가 나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들었죠.”
오랜 시간이 걸려 열등감을 극복하고 마침내 어머니의 삶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그는 어머니에게 바치는 소설 를 썼다. 나이 일흔 살이 넘어서야 가능했던, 참회의 글이었다.
나이를 먹으니 포기하는 법을 알게 되더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사람 이름이나 책 제목이 잘 기억 안 날 때 그렇고. 옛날에는 술을 많이 먹어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소주 한 병 반 마시면 취하고 헛소리도 나오고. 헛소리 주제요? 같이 술 마시는 상대방에 대한 욕이죠(웃음). 그런데 욕을 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그리고 빨리 걷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나이를 먹으니 좋은 것도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포기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 좋단다.
“젊었을 때는 포기해야 될 것과 안 될 것을 구분 못하고 다 이룰 수 있다고 착각했죠. 나이를 먹으니 건드리면 안 되는 게 보여요.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좋은 옷을 입어야겠다’와 같은 욕구들. 그런 과욕은 필요 없어요. 많은 친구도 필요 없어요.”
어렸을 때 가난하게 자랐기에 외로웠고, 그래서 친구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요즘은 될 수 있으면 고민을 안 하려고 해요. 스트레스가 쌓이면 병이 옵니다. 그래서 바보가 되고 싶어요. 생각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아요. 소설 쓰는 일 외에는.”
아버지로서, 가정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
가급적 간단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살고 싶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김 작가의 모습에는 그 스스로 말한 포기의 정서가 배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친한 벗들은 다 죽고 홀로 남아 세상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이 된 그가 세상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고독에 단련된 사람이어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묵묵히 그 선택을 따라가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네 고독한 아버지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제 자식들에게 아버지로서는 무심했죠. 자식 일에 간섭을 전혀 안 했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독립적으로 컸지. 내가 그런 식으로 자라서인지 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논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죠. 한때는 세 곳의 신문 연재를 동시에 해야 했어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가정적일 수 있나요? 가정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
글이 곧 내 존재 자체
김 작가는 예전에 연애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간간이 밝혔다.
“그래서 에서 창녀를 등장시켰는데, 연애소설은 안 되더라고요(웃음).”
이번 소설을 계기로 그는 다시 글을 쓴다면 위로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써보고 싶단다.
“독자, 평론가, 동료 문인 들 사이에서 내 평가는 이미 끝났어요. 좋은 작가로 보든, 형편없는 작가로 보든 간에 훌륭한 젊은 작가가 많기 때문에 이젠 관심을 못 받습니다(웃음). 도 이제 4쇄 정도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그를 가장 그답게 만들어주는 도구다. 고독 속에서도 그를 지탱시켜주는 최후의 지렛대는 거기에 있었다.
“글을 쓰는 행위야말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예요. 다시 태어나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남은 생은 바보 같은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고 그러다 ‘저 사람 바보야’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어요.”
석양을 뒤로 하고 청송 객주문학관 관사로 뒷짐 지고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바보 같아 보여 아팠다.
기쁠 땐 흥을 돋워주고, 슬플 땐 조용히 위로가 되어주었던 술. 그렇게 우리는 술과 많은 추억을 함께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줄만 알았던 술이 변신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를 맞이하는 기분으로 요즘 대세인 술을 알아보자.
전통주의 개념을 탈피한 막걸리의 등장
“막걸리카노….”
얼마 전부터 편의점에서 심상치 않은 이름의 음료가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하나 사서 캔을 따니 은은한 커피 향과 막걸리 특유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역시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막걸리카노’는 먹걸리와 아메리카노를 섞은 신(新)막걸리다. ‘고카페인 함류. 총카페인 함량 103mg’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우리 전통주도 세련된 디자인에 다양한 맛을 더해 전통주를 찾는 2030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막걸리를 선보이고 있다. ‘국순당’은 2012년 쌀과 유산균 발효를 통해 만든 ‘아이싱’을 시작으로 바나나, 복숭아, 크림치즈 맛 막걸리인 ‘바나나에 반하나’, ‘피치로 피치올려’, ‘치즈업 치얼업’을, 2017년엔 최초의 커피 막걸리 ‘막걸리카노’를 출시했다. 한편 ‘배상면주가’는 자사 막걸리 전문점인 ‘느린마을양조장’을 운영하며 망고파인, 트로피컬, 블루베리 등 하우스 막걸리를 판매하고 있다.
내 입맛에 맞게! 지금은 수제맥주 전성시대
“여기 판타스틱 페일에일 한 잔이요!”
“쇼킹 스타우트 한 잔 주세요.”
“원더풀 IPA요.”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에 가면 사람들이 독특한 이름을 대며 주문을 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하얀 거품이 먹음직스럽게 올라온 맥주가 나온다. 그렇다. 그들이 주문한 건 맥주다. 최근 방송과 언론의 주목을 받아 이슈가 된 수제맥주도 있다. 바로 청와대 ‘호프미팅’에 등장했던 세븐브로이 맥주다.
다양한 수입 맥주로 인해 시작된 수제맥주 붐은 국내 수제맥주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여기엔 2014년에 개정된 주세법 시행령이 한몫했다. 또 소규모 맥주 업체들이 자체 매장에서만 팔 수 있었던 규제도 사라져 외부로 유통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수제맥주를 주점뿐만 아니라 편의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수제맥주는 대기업이 아닌 개인이나 소규모 양조장에서 자체 개발한 맥주다. 일반 맥주보다 비싸다는 단점이 있지만, 제조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맛이 난다는 점이 특징이다. 수제맥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끝에 ‘에일’, ‘스타우트’, ‘IPA’ 등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붙는데, 이는 맥주 스타일을 의미한다.
맥주는 물, 홉, 맥아, 효모로 만들어진다. 홉은 맥주의 풍미를 더해주며 맥아는 맥주 특유의 달콤함과 색깔을 좌우한다. 마지막으로 넣는 효모가 맥주를 발효시킬 때 위로 떠오르느냐, 가라앉느냐에 따라 맥주를 크게 ‘라거’와 ‘에일’로 나눈다. 에일 맥주가 진한 향과 맛이 특징이라면 라거 맥주는 톡 쏘는 청량한 맛을 띤다. 에일 맥주 계열에는 쌉싸래한 맛에 풍부한 향이 나는 페일에일, 까맣게 볶은 맥아를 사용한 스타우트, 맥아 대신 밀을 사용해 부드러운 거품과 과일 향이 느껴지는 바이젠 등이 있다. 쌉싸래하고 상큼한 향이 특징인 필스너, 라거판 흑맥주인 둥켈, 풍부한 탄산과 높은 청량감의 페일라거는 라거 맥주에 속한다. 이처럼 수제맥주 뒤에 붙은 말의 의미만 알아도 자신에게 맞는 맥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소주의 반란. 증류식 소주의 부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소주(燒酒)를 ‘곡류를 발효시켜 증류한 술’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시는 소주의 상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증류식 소주가 아닌 희석식 소주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증류식 소주는 1965년 정부가 식량정책의 목적으로 곡물로 술을 만들지 못하도록 한 ‘양곡관리법’을 시행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증류주 복원과 전통주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소주의 자리는 주정에 물과 조미료를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꿰차고 난 뒤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1965년 처음 출시된 희석식 소주는 30도였는데 1973년에 ‘소주=25도’의 공식을 깨뜨렸고, 2006년엔 20도의 벽까지 허물어버렸다. 이후 소주의 도수는 점점 낮아졌고 2015년 혜성처럼 등장한 과일소주 ‘처음처럼 순하리’가 열풍을 일으키며 소주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소주에 달콤한 과일 향을 첨가하고 도수를 14도까지 파격적으로 낮춘 전략이 소비자의 입맛을 제대로 잡아버린 것이다. 각 주류 업체들은 순하리를 시작으로 ‘자몽에 이슬’, ‘좋은데이 과일 맛’ 등 소주에 과즙을 있는 힘껏 짜내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블루베리, 사과, 파인애플, 복숭아, 청포도, 석류 등 지난해 20여 종이 넘던 과일소주의 종류는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그 바람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고 이제 그 자리를 증류식 소주가 넘보고 있다.
국내 증류식 소주 시장은 2005년 출시한 광주요그룹의 ‘화요’와 하이트진로가 2006년 선보인 ‘일품진로’가 10년 가까이 꽉 잡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국순당, 롯데주류, 금복주가 각각 ‘려’, ‘대장부’, ‘제왕’을 출시하며 증류식 소주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 모두 하나같이 전통 방식으로 빚은 ‘증류식 소주’임을 강조하고 있다.
20도 이상의 높은 알코올 도수를 자랑하는 증류식 소주가 주당들의 입맛을 만족시켜 일명 ‘빨간 두꺼비’, ‘빨간 뚜껑’으로 불리는 참이슬 오리지널(20.1도)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와인은 역사상 인류가 가장 오래 즐긴 술로 꼽힌다. 최근에는 미국의 사우스플로리다 대학 연구팀이 학술지를 통해 시칠리아 동굴에서 6000년 된 와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기존 가설보다 30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터 와인과 접해왔다. 사료에는 중국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사위로 삼은 고려 충렬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본격적으로 국내에 와인이 소개된 것은 조선 후기 선교사들을 통해서다. 그런데 오랜 인연에 반해 실생활 속에서 왜 우리 와인은 찾아보기 어려울까. 충북 영동의 한 와이너리를 찾아 우리 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현재 국산 와인은 충북 영동과 경북 영천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곳 이외에 전북 무주와 경기 포천에도 많은 와이너리가 운영되고 있다. 현재 국내 와이너리는 150여 곳 이상 될 것이라고 업계에선 추산하고 있다.
충북 영동의 대표적 와이너리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컨츄리와인은 3대째 와인을 만들어오고 있는 와이너리다. 컨츄리와인의 시작은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컨츄리와인의 대표 김덕현(金德賢·34)씨의 할아버지인 김문환(金文煥)씨는 일제강점기 미크로네시아로 강제 징용을 떠나게 된다. 한때 스페인의 영토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그곳에서 김문환씨는 스페인 병사와 친분을 쌓게 되고 포도와 와인의 매력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영화 같은 이야기다. 해방 이후 고향인 영동으로 돌아와 포도농사와 포도로 가양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1965년이다.
그리고 그 뜻을 2대 김마정(金摩廷·63)씨가 이어받아 2010년 개인농가로는 최초로 주류제조면허를 취득해 본격적인 와인 생산에 나서게 된다. 현재는 3대인 김덕현씨가 생산과 판매 모두를 책임지고 있다.
한국의 와이너리가 살아가는 법
2대 김마정씨가 혼자 공부해 와인 제조에 뛰어든 독학파라면 3대 김덕현 대표는 정통 학구파라 할 수 있다. 미대를 졸업하고 업계에서 활약하던 디자이너였던 김 대표는 2009년 직장을 그만두고 와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국내 와인스쿨을 통해 기초를 닦은 후 대학 와인발효·식음료서비스학과에서 다시 공부했다. 소믈리에 자격증도 받았다. 이후 프랑스 보르도부터 LA 나파 밸리, 호주 바로사 밸리 등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 국가들 중 컨츄리와인은 어디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까. 의외의 답이 나온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 와인시장의 80% 정도는 자국산 와인이에요. 그만큼 와인의 품질도 높고, 소비자들도 일본 와인을 인정해주죠. 자국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또 스시와 같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일본 음식의 파트너로 세계시장에 많이 소개되어서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그에 반해 우리는 와인시장의 95% 이상이 수입 와인이에요. 국산 와인에 대한 평가도 아직은 낮은 편이고요.”
국산 와인이 외산과 경쟁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높은 주세(酒稅)에 있다. 수입 와인은 FTA로 인해 관세가 사라져 저가로 유통이 가능하지만, 국산 와인의 경우 ‘전통주’에 속해 높은 주세를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반면에 전통주의 범주에 속한 만큼 갖게 되는 장점이 있다. 바로 온라인 판매의 허용이다. 그동안 전통주는 우체국 등 제한된 곳에서만 온라인 판매가 가능했다. 하지만 국세청 고시 및 주세사무처리규정 개정안이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온라인 판매가 허용됐다. 실제로 컨츄리와인 역시 포털 쇼핑몰을 통해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면서 우리 와인의 주 고객층이 많이 낮아졌어요. 그간 와서 사가시거나 주문해주시는 분들의 연령은 40~50대가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온라인 판매가 시작되면서 20~30대 고객이 늘었어요. 입소문을 타서인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서울 홍대나 강남에서 저희 와인이 식당을 통해 소개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국산 와인 깔끔한 과일 향이 특징
김 대표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특징을 깔끔한 과일 향으로 정의한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대표적 포도 품종으로는 캠벨 얼리(Cambel Early)가 있어요. 가장 재배가 많이 되는 품종인데, 과일 향이 무척 강해요. 가볍지만 깔끔한 맛이라서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어요. 가벼운 디저트와 잘 어울린다고 평가받죠.”
국내 대표 품종인 캠벨 얼리는 수입 와인과 국산 와인 맛의 차이가 나는 가장 큰 요소로 지목된다. 수입 와인에서 많이 쓰이는 품종은 카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피노 누아(Pinot Noir), 시라(Syrah), 메를로(Merlot) 등이 있는데 캠벨보다 타닌 성분이 많아 무겁고 떫은 느낌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오히려 이런 맛의 와인 재료로는 국내에서는 포도(캠벨)보다는 산머루가 꼽힌다.
“캠벨과 산머루 와인 모두 또 하나의 특징을 갖는데 바로 단기숙성에 적합하다는 것이에요. 수입 와인에 비교하자면 갓 만들어진 와인을 즐기는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에 가깝죠. 우리 와인으로 장기숙성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봤는데, 여러 소믈리에분들이나 와인 애호가분들과 평가를 한 결과 장기숙성엔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컨츄리와인이 1년산과 2년산만 판매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김 대표는 수입 와인에 비해 갖고 있는 경쟁력으로 안전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꼽았다. 와인 역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인 만큼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와이너리의 경우 첨가물에 대단히 관대한 편이에요. 특히 저가 와인일수록 그렇습니다. 와인이 숙성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화방지제나 보존제를 많이 쓰죠. 우리 와인의 경우 이런 첨가물을 넣지 않으려고 멸균 작업을 별도로 진행합니다. 파스퇴르 살균법이라고도 불리는 저온 살균법으로 변질을 막고 있어요. 또 포도를 선별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선별하고요. 최종적으로 병입될 때까지 산소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다 보니 한 번에 생산할 수 있는 양에도 한계가 있어요. 대량생산 방식과는 거리가 있죠. 그래도 우리의 고집을 알아주시는 애호가들이 꾸준히 찾아주셔서 자긍심을 갖고 와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국산 와인의 역사는?▲▲
우리가 직접 와인을 만든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다. 포도를 으깨어 설탕과 소주를 부어 가양주(家釀酒)로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공식적인 최초 와인의 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포도가 아니라 사과였다. 1967년에 파라다이스 주식회사가 출시한 ‘애플와인 파라다이스’가 그것. 사과의 고장 대구에 공장을 차려놓고 12도의 사과주를 생산한 것이 시작이다.
포도주로는 1968년 주식회사 한국 산토리가 생산한 선리프트 와인·로제 와인·팸포트 와인이 꼽힌다. 이후 한국 산토리는 해태주조로 매각됐다. 1977년에는 토종 기술과 포도로 만든 ‘마주앙’(구 동양맥주·현 롯데주류)이 나오면서 한국 와인 역사에 새 장이 열린다. 1970년대에 정부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곡주보다는 과일주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한때 와인은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수입 와인이 소개되면서 국내 와인의 위세는 갈수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