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뜻은 ‘불도를 구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일으킴’이라는 뜻이다. 쉽게 얘기하면 ‘처음처럼’이다. 소주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지만,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기 때문에 이 말이 나온 것이다.
가장 쉬운 예가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것일 것이다. 화장실 갈 때는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며 절박한 심정으로 갔는데 급한 볼일을 다 보고 나니 마음이 뻔뻔하게 달라진다는 뜻이다.
비슷한 예로 남에게 돈을 빌릴 때는 온갖 약속을 다 해가며 빌렸는데 막상 갚으려니 갚기 싫은 것이다. 이런 경우 돈을 빌려준 사람이 오히려 처지가 난처해진다. 돈을 갚으라고 하자니 말이 안 나오고, 말을 꺼냈는데 거절하거나 이유를 대며 연기하면 실망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너무 독촉하다 보면 돈을 갚지 않기 위해서 끔찍한 일을 벌이기도 한다. 돈 잃고 사람 잃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험해지는 것이다.
남녀 문제도 그렇다. 처음엔 상대방의 마음에 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일단 사귀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진다. 호르몬 작용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초발심을 잃은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해마다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이유도 그 당시 초발심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드라마에서도 어려운 시절 여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정작 출세하고 나서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스토리가 많다. 출세하고 나니 옛 여인은 귀찮은 존재가 되고 새 여인에 정신이 팔리는 것이다. 욕심이 싹 트면서 초발심을 잊는 것이다. 이런 남자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은 예측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 때에 따라 감정 변화가 심해 친소관계가 달라지면 어떻게 진전될지 불안해진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진정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친척이나 오래된 친구가 오래간만에 봐도 편하고 친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심리학 박사 이민규 씨의 신간 ‘지치지 않는 힘’에 보면 “목표가 있는 사람은 휘둘리지 않는다”, “길게 보는 사람은 서두르지도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초발심을 계속 유지해나가는 심지가 굳어야 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종로 3가 전철역 12번 출구 옆에 ‘그래도 한 우물을 파라, 결국 이긴다’라는 글귀가 유리에 캘리그래피로 쓰여 있다. 필자가 캘리그래피를 배울 때 각자의 좌우명을 제출하라고 해서 써낸 것이 채택된 것이다. 초발심을 그대로 유지하다 보면 결국 목표를 달성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사는 편이 편하다. 잔머리를 안 굴려도 되기 때문이다. 단점은 ‘고집이 세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단골로 가는 치킨 전문점이 있다. 전통시장인 대전 중앙시장 안에 있는 집이다.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에 고작 7000원이다. 가격이 이처럼 착해서인지 언제 가도 손님들로 북새통이다.
그제도 이 집에 들러 전기구이 통닭과 소주 한 병을 시켜 먹었다. 셈을 치르려 보니 메뉴판 위에 ‘외상사절’이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맞아! 외상을 주기 시작하면 버릇이 되고 결국엔 단골손님마저 아예 단절되지…’라는 생각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래전 시장 어귀에서 순대 전문 식당을 했다. 먹는장사이다 보니 가끔 외상을 청하는 손님도 있었다. 박절하게 거절하기 뭣해 외상을 줬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이듯 외상 손님들은 하나같이 다시는 우리 가게를 찾지 않았다.
식당이 생각만큼 안 됐기에 일찍 처분을 했다. 그러곤 슈퍼마켓을 차렸다. 그러나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꼭두새벽에 문을 열고 자정이 넘어서야 문을 닫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단골손님이 느는 만큼 외상 손님도 시나브로 증가했다.
‘다시는 외상을 주지 말아야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금방 갖다 주겠다며 소주와 담배를 사간 이웃은 한 달이 돼도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았다. 자정이 넘도록 가게 밖 파라솔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문을 닫아야 하니 계산을 하고 드시든가 하시죠” 해도 셈은 나중에 치르겠다며 맥주를 한 병 더 주고 문을 닫든가 말든가 하라며 적반하장이었다.
이미 만취한 사람과 드잡이를 할까 싶어 함구하며 문을 닫았지만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선친께선 생전에 술을 물처럼 드셨다. 아내 없는 홀아비라는 자괴의 신세타령에 덧붙여 경제적 고립무원이었던 당신을 자학하며 침면(沈湎, 술에 절어서 헤어나지 못함)으로 사셨다.
가장이 돈은 안 벌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면 누란(累卵)의 위기에 봉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술은 담배처럼 중독성이 심각하다. 그래서 이미 취했음에도 더 취해 아예 인사불성이 되길 원하는 게 알코올 중독(자)의 특성이다.
뿐만 아니라 상습적 외상까지 필자에게 강권하셨다. 외상으로 술과 담배 따위를 가져만 갔지 도무지 갚지 않았던(사실은 갚을 능력이 못 되었던) 우리 부자(父子)에게 동네에 하나뿐이던 구멍가게 주인은 점점 냉담해졌다.
“밀린 외상값을 다 갚기 전에는 우리 가게에 얼씬도 하지 말거라! 나는 뭐 땅 파먹고 사는 줄 아니?” 당시엔 자정부터 통행금지였다. 필자는 자정이 임박해 시키는 술심부름, 그것도 외상으로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술 채근(採根)이 가장 싫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의 집 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새우잠을 청하는 등의 풍찬노숙을 점철했다. 그 시절의 트라우마로 필자는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외상’은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을 뜻한다. 외상이 잦으면 단골손님마저 잃게 되는 외상(外傷)을 반드시 입는다. 이게 바로 필자가 경험한 외상의 경제학(經濟學)이다.
2018년 4월, 아들의 결혼식을 잘 마쳤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내외는 각종의 선물을 꺼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다 아는 상식이겠지만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공짜는 없다. 자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나왔다.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 것 역시 부모님의 은공이다. 따라서 자녀는 반드시 효도를 기본으로 견지해야 마땅하다. 아무튼, 결혼식을 잘 치름에 따라 그 연장 선상의 당연한 보답 행보에 들어섰다. 그건 하객으로 참여해 주신 분은 물론이거니와 부득이 불참하셨지만, 축의금을 보내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였다.
지난주의 저녁 식사 대접이 이의 방증이다. 횟집에서 만난 지인들과 상의 끝에 수족관에서 도다리와 노래미를 골랐다. 대표적 흰살생선인 도다리는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도 있듯 제철인 지금이 가장 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전어 굽는 냄새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지만 도다리 회를 펼쳐 놓으면 술을 싫어하는 이도 냉큼 소주잔을 든다. 소주와 매운탕까지 잔뜩 먹고 마시며 환담을 하노라니 지인이 걱정스러운 듯 한 마디 했다.
“우린 잘 얻어먹어서 고맙긴 하지만 오늘 너무 과용하는 것 아닙니까? 적자 나면 안 되잖아요.”
그날 모인 사람은 모두 네 명. 세 사람이 낸 축의금만을 따지자면 15만 원이다. 따라서 그 금액에 육박하는 지출이 발생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엄연히 고마움을 표시하는 자리이거늘 금액을 저울질하면서 먹는 술과 밥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각박한 세상일까!
“걱정 마십시오! 저 안 망합니다.”
나의 호언장담에 그들도 함박웃음을 보였다.
아내는 오늘 저녁 지인들에게 저녁을 산다고 했다.
“기왕이면 비싸고 맛난 거 사 드려. 그래야 욕 안 먹어.”
자녀를 결혼시키자면 여기저기서 축의금이 들어온다. 한데 그건 다 ‘빚’이다. 고로 반드시 갚아야 한다.
조의금도 마찬가지다. 동창 중에 얌체가 눈 밖에 났다. 자신의 자녀 결혼과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도 사방팔방에 죄다 알렸다. 축의금과 조의금을 그렇게 ‘챙겼지만’ 정작 이후론 친구들의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처럼 속이 죄 들여다보이는 ‘고바우’는 상대방이 먼저 간파한다. 반면 비록 애옥살이일망정 손겪이(손님을 대접하는 일)가 정당하다면 역시도 사람됨이 됐다며 인정을 받기 마련이다.
싹은 돋았어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막상 꽃을 피웠으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꼭 그렇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윤똑똑이일세~”라는 표현은 최악의 폄훼다.
평소 예의와 의리를 잃으면 사람도 아니란 게 어떤 교조(敎條)이다. 오늘도 나의 손겪이는 계속될 것이다.
후드득후드득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꼭두새벽부터 잠에서 깼다. 창문을 여니 더욱 요란했다. 아, 이런 날엔 비가 오면 안 되는데…! 하지만 전지전능한 하늘에서 하는 일에 무력한 인간이 대체 무슨 힘이 있을 텐가.
모쪼록 오전 중에나 비가 그쳤으면 하는 바람 간절했다. 시간은 저벅저벅 흘러 관광버스가 도착했다는 기사님의 전화가 왔다. 처조카의 차를 빌려 바리바리 짐을 싣고 동행할 하객들을 기다렸다.
더욱 거세진 폭우 탓에 하객들의 참석률은 매우 저조했다. 하는 수 없지 뭐, “선생님, 출발하시지요!” 관광버스 기사님도 따지고 보면 지입차(持入車) 형태의 ‘사장님’이다. 따라서 고루하게 ‘기사님’ 내지 ‘사장님’이라고 호칭하기보다는 ‘선생님’이 훨씬 낫다.
수원을 향해 출발한 버스가 도착한 건 예식 1시간 전인 오후 2시쯤.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시렁거렸다. 주변의 목련꽃은 진즉에 처참함의 종말을 고했고, 벚꽃 역시 어느새 모두 낙화한 채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이윽고 하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빗길을 뚫고 와주신 분들이 정말 고마웠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와중에 호텔 직원이 와서 혼주 자리로 가서 앉으란다. 양복 왼쪽에 꽃을 꽂고 아내의 곁에 착석했다.
경력이 풍부해 보이는 사회자가 ‘성혼선언문’은 신랑 아버지께서 하실 거라며 필자를 무대 정중앙에 불러세웠다. 연습한 ‘성혼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바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양가를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랑 홍관호 군과 신부 강미지 양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여러 하객들께서 모인 이 자리에서 일생 동안 함께할 부부가 되기로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이 혼인의 증인 중 한 사람으로서 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아울러 시종일관 믿음직하게 자라준 아들이 고맙고, 금지옥엽 고운 따님을 주신 사돈 어르신께도 감사 올립니다.
오늘 탄생한 이 부부가 건강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탑만을 견고히 쌓으면서 잘 살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이 덕담 하나를 추가하면서 마칩니다. ‘남편은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되 나이는 기억하지 말고, 아내는 남편의 용기는 기억하되 실수는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2018년 4월 14일 신랑 아버지 홍경석. 고맙습니다!”
다시금 허리를 꺾어 진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일반 예식장은 대부분 뷔페식이다. 따라서 정작 예식보다는 음식을 먹는 데 더 열중하는 구조다.
하여 신랑신부는 안중에 없고 축의금을 내는 즉시 식당으로 직행하는 게 관행이자 수순이다. 그러나 어제 아들의 예식은 ‘비싼’ 호텔에서 했기에 격부터 달랐다. 예식이 본 궤도에 올라야만 비로소 음식이 나왔다.
따라서 하객들은 꼼짝없이(?) 예식의 전 과정을 눈에 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덕분에 하객들의 이탈 없이 예식은 더욱 화려함을 뽐낼 수 있었다. 예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객들이 앉은 좌석을 돌며 인사를 시작했다.
아내의 옷깃을 잡아끌며 앞잡이에 나섰다. 친구와 동창들, 가족과 친인척 역시 이구동성으로 신랑 신부를 향한 칭찬을 남발했다. 어느새 만취한 죽마고우는 재작년의 딸에 이어 아들마저 결혼을 시켰으니 “너는 이제 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 했다”며 부러워했다.
한술 더 떠 심지어 ‘브라보 유어 라이프(BRAVO YOUR LIFE)’라고까지 추켜세웠다. 그런가,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그보다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가 더 맞는 거 아닐까 싶다.
예식을 마치니 비로소 비가 그쳤다. 집으로 돌아와 참았던 소주를 들이켰다. 술잔 속에서 “자네 오늘 수고 많았어! 이제 당신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로 더 멋지게 살아봐~”라며 주신(酒神) 바커스(Bacchus)까지 박수를 보냈다.
수제 맥주(Craft Beer)가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수제 맥주를 파는 음식점이 늘어나더니 직접 만들 수 있는 공방까지 생겨났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천차만별인 수제 맥주! 강신영(65), 김종억(64) 동년기자가 맥주공방 ‘아이홉’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봤다.
촬영 협조 아이홉
1. 물에 맥아추출물 넣고 끓이기
맥주를 만들기에 앞서 강신영, 김종억 두 동년기자의 기분이 매우 들떠 보였다. “맥주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보자 옛날엔 1만cc도 넘게 먹어봤다며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특히 강신영 씨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할 때 무알콜 맥주를 사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먹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무알콜 맥주만 판매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무엇일까? 맥주 마니아치곤 상당히 밋밋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국산 맥주였다.
맥주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국산 맥주처럼 깔끔하고 청량한 느낌이 강한 ‘라거’와 비교적 풍미가 강하고 탄산감이 적은 ‘에일’이다. 이번 ‘아이홉’에서 만들 맥주는 에일의 한 종류인 ‘페일 에일’. 오렌지, 자몽, 귤 등 상큼한 향이 특징이다.
20L의 물을 채우기 위해 김종억 씨가 나섰다. 2L짜리 통으로 10번을 옮겨 담아야 한다. 중간에 몇 번 넣었는지 살짝 잊어버리는 위기(?)도 있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강신영 씨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다. 여기에 맥아추출물을 넣어 섞어준 뒤 물을 끓인다. 맥아추출물은 한 통에 약 2만5000원.
2. 홉 넣고 식혀주기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두 동년기자는 수제 맥주 시음에 빠졌다. ‘아이홉’ 대표가 만든 페일 에일과 스타우트(흑맥주)를 마시며 연신 향이 깊다며 한두 잔을 비워냈다. 이미 수제 맥주의 매력에 빠져버린 듯하다. ‘아이홉’은 시중에 나와 있는 다양한 수제 맥주도 판매하고 있다. 맥주를 만들면서 다른 수제 맥주도 맛볼 수 있으니 다양한 안주거리를 준비해가도 좋겠다. 물이 끓을 때쯤 두 동년기자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언제 홉을 넣을지 결정해야 한다. 맥주 레시피가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홉을 넣고 얼마나 끓이냐에 따라 맥주의 향, 풍미, 쓴맛이 결정되는데 이때 오래 끓일수록 향은 날아가고 쓴맛이 나는 맥주가 된다. 원하는 시간대에 홉을 넣고 난 뒤엔 ‘칠러’를 사용해 물을 식혀준다.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스로 물이 흘러들어갔다가 반대쪽 호스로 나오면서 뜨거운 물을 식혀주는 방법이다. 온도가 20~23℃로 내려갈 때까지 식혀주면 된다. 이때 칠러를 위아래로 흔들어주면 맞닿는 표면적이 넓어져 더 빨리 식힐 수 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100℃가 넘던 물의 온도가 20℃까지 떨어졌다. 이제 발효통에 옮겨 담고 효모를 첨가한 뒤 약 일주일간 숙성시키는 일만 남았다.
3. 효모를 뿌린 맥아즙 숙성하기
발효통에 담기 전 가장 중요한 단계! 바로 효모가 죽지 않도록 발효통과 손을 깨끗하게 소독하는 일이다. 맥주는 균에 의해 쉽게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소독을 하지 않을 경우 맛이 손상될 수 있다. 발효통에 소독약을 뿌려 깨끗하게 소독했다면 맥아즙을 반복해서 부으며 산소를 공급해준다. 위 작업은 두 사람의 팀워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맥아즙 위에 건조 효모를 뿌려주면 발효를 위한 준비 과정은 끝난다.
두 동년기자는 마음이 급해져 “이제 가져가면 되나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풍미가 제대로 나는 맥주가 되기 위해선 일주일 동안의 발효 과정과 또 한 번 일주일간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이주일 뒤 탄생할 수제 맥주를 기다리며 동년기자는 체험을 종료한다.
동년기자 체험 후기
강신영 동년기자
맥주의 황금빛! 그 색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기분이 아주 좋아져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꼽는 색이죠.(웃음) 그만큼 전 맥주를 좋아해요. 그래서 오늘의 체험은 유익했고 또 즐거웠어요. 우리가 음식점에 가서 맥주는 시켜봤어도 만들어본 적은 없잖아요. 이렇게 직접 만들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작업이란 걸 알겠어요. 그래도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어요. 필요한 장비를 갖추는 데 약 50만 원 정도 든다고 하니 애주가들은 충분히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가장 좋았던 건 맥주 이론에 관해 설명을 들을 때였어요. 맥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무엇인지, 홉을 넣는 시간에 따라 왜 맛이 달라지는지, 효모를 넣는 이유 등 맥주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됐어요.
재미 ★★★★☆
정보 ★★★★☆
만족도 ★★★★★
김종억 동년기자
‘술’ 하면 기절할 뻔했던 순간이 기억나요. 옛날에 진급 심사를 앞두고 상사가 냉면 그릇에 소주랑 맥주를 섞어서 마시라고 줬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술 잘 먹는 사람이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며 부추기는 시절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참….(웃음) 오늘 처음으로 수제 맥주를 시음할 기회가 있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수제 맥주보단 카스, 하이트처럼 운동 끝나고 먹었던 맥주가 제 입맛엔 맞는 것 같아요. 근데 확실히 수제 맥주가 풍미가 깊고 도수도 높더라고요.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할 것 같아요. 끝나고 맥주를 바로 가져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니 아쉽더라고요. 그래도 기다린 만큼 맛도 더 있겠죠?
재미 ★★★★☆
정보 ★★★★★
만족도 ★★★★★
지난 가을에 도시여행 해설가과정 교육을 받았는데, 그 교육에서 필자가 우리 조를 대표해서 해설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성북동에 대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터라, 성북동을 해설하기로 정하고 답사를 갔다.
평소에 아담하고 아름답다고 입소문난 길상사엘 갔다. 경내를 둘러보다가 ‘길상화 보살’의 사당과 공덕비 앞에서 그만, 넋을 잃고 답사온 목적도 잊은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만 꽂혀버린 것이다.
필자가 필이 꽂힌 것은 한편의 시가 적힌 ‘시비(詩碑)’였다. 시비에는 기생 진향이와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열정적인 뜨거운 사랑이나, 순애보적인 아름다운 사랑한번 변변히 해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랑이야기만 들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푸욱 빠져 버리곤 한다.
필자가 푹 빠져버린 기생 진향이는 누구인가?
그는 1916년에 ‘김영한’이라는 이름의 한 여인으로 태어났다.
김영한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16살에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에 입문했다. 진향이 21살때 25살의 백석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그때 백석이 처음으로쓴 詩가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인데, 이 시에서의 나타샤는 백석이 사랑한 기생 진향이다. 25살 젊은 청년 백석의, 진향을 사랑하는 애절한 마음이 담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인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힌당나귀 타고 산곬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곬로가 마가리에 살쟈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곬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눈은 푹푹 날이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1937년, 백석이 겨울에 쓴 최초의 원문-
✻ 마가리: 오두막집 출출이: 뱁새 고조곤히: 소리없이, 고요히
아들이 기생과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백석의 부모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다. 백석은 진향에게 만주로 가서 둘이 함께 살자고 했지만, 진향이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6.25전쟁으로 인하여 남과 북이 갈라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볼 수 없게 된다.
그 후, 진향은 37살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2년 뒤, 성북동 산골짜기에 땅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지어 경영하기 시작했다. 기생이란 옷을 벗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경영주 김영한’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은 1987년,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법정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법정스님은 그 청을 사양하였다. 김영한은 근 10년 가까이 법정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고, 이에 법정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여 요정 대원각이 사찰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1995년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2년 후, 지금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하였다. 법정스님은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기부할 당시의 대원각 재산은 싯가가 천억 원에 달했는데,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그 많은 재산을 모두 다 기부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기자가 물었다. 이에 김영한은 "천 억은 백석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백석의 생일엔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백석을 그리워했다.
1996년, 백석이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년 뒤 1999년 11월, 김영한은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은 떠나고 없지만,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는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의 공덕비와 백석의 詩碑가 세워졌다.
사랑의 꽃씨 한 알 가슴에 품고, 일생을 ‘그리움’으로 고이고이 키워낸 꽃 한 송이 길상화(법명).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던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숭고하게 승화시킨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가 기생 진향이에서 길상화 보살이 되기까지엔, 백석을 향한 그리움이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문형!
독하게 추운 겨울입니다. 한파가 그야말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수도가 얼고 비닐하우스의 농작물도 성장을 멈추어 서민들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이은 화재 참사도 한파 이상으로 춥게 합니다. 기후 온난화를 꽤 걱정했으나 올겨울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입춘 절기가 코 앞인데 추위는 물러갈 줄 모릅니다. 예전부터 입춘 추위가 있다 했으니 봄기운은 더 멀리 머물고 있나 봅니다. 이런 겨울이면 지리산 청학동 계곡 언덕배기 자그마한 마을 초가집에 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방문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기 위하여 문풍지를 달곤 했습니다. 요즘 같은 좋은 바람막이가 아닌 종이를 잘라 풀로 붙여 칠흑 같은 자정이면 고요를 타고 문풍지를 울리며 찬바람이 새어들기 마련이었습니다.
문형!
집 안에 도배해 본 경험이 있나요? 저는 도배를 많이 해 보았습니다. 요즘엔 도배 전문가에게 맡깁니다만, 예전엔 직접 했습니다. 저 같은 촌놈은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쉬울 것 같아도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은 정말 심심산골이었습니다. 반듯한 집이 아닌 허술한 초가집으로 요즈음 그림에 나오는 운치 있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곧 쓰러져 갈 것 같았고 기둥들이 곧지 못하여 방의 벽은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황토벽돌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넣은 대나무 거푸집에 잘게 썬 지푸라기를 넣어 반죽한 황토를 채워 벽을 만들었습니다. 으레 벽면이 울퉁불퉁해서 도배는 쉽지 않았습니다. 칼바람이 윙윙대는 깊은 겨울 저녁이면 그런 시절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들어감은 추억을 되돌려보며 나름의 행복에 젖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어린 시절에 살던 초가집은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정성껏 지었으나 설계도나 자재가 오늘날 같지 않아 방안이어도 찬바람이 귓전을 때리기 예사였습니다. 외풍이라 했습니다. 차가운 공기는 내려앉고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과학이 외풍을 설명합니다. 외풍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도배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인테리어 측면도 있으나 당시는 벽에서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를 막고 찬바람을 다소라도 줄이는 방편이었습니다. 도배한 방은 그렇지 못한 방보다 훨씬 따뜻했습니다. 도배는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보기 흉한 부분을 감춰주기도 했습니다. 도배는 삶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도배라는 말에 정감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문형!
저는 신혼 살림집의 도배와 페인트칠을 안사람과 함께 직접 했습니다. 그 버릇이 남아 어지간한 집안의 페인트칠은 직접 합니다. 전문 일꾼들에게 비할 수는 없어도 돈이 덜 들기에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하찮고 옹색해 보이기도 했으나 힘이 들어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지 싶습니다.
문형!
밤이 깊어 갑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별이 총총합니다. 자연과 함께함이 좋아 전원에 작은 집을 짓고 삽니다. 이 마을에도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저런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때론 잘못도 저지르고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사기도 합니다. 지나 놓고 보면 내가 잘못하였다는 후회가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흔 살에 가까워지니 깨닫고 반성하고 그러면서 세월을 가꾸어 가는 것이 인생살이란 생각이 더 들어갑니다. 젊은 시절의 나의 아집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니 이제 철드나 봅니다. 차가운 겨울날씨만큼이나 세상도 어려워 보입니다. 정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국민 대통합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정말 어려운 국면에 놓여있지 싶습니다. 한때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방법은 없을까요? 어떤 정치인은 입만 열면 모든 것을 촛불에 대입하고 있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그 반대쪽에 섰던 사람들을 또다시 내모는 표현으로 들려서 그렇습니다. 통합의 의지가 아닌 배척의 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선거에서는 편이 갈릴 수 있으나 선택된 지도자는 양편을 다 끌어안아야 바른 지도자가 되어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 오늘날 새겨 보아야 할 금언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요? 상처를 받은 이웃들의 뚫린 마음에 몰아치는 찬 바람을 막아 줄 도배가 필요합니다. 비뚤어진 마음의 벽에도, 외풍이 심해 찬바람이 쌩쌩 이는 냉랭한 분위기의 방에도 따사한 기온이 감도는 여유로운 무늬의 도배지를 바르고 싶습니다.
문형!
지난번 만났을 때 얘기했듯이 올해엔 행복은 덧셈, 나이는 뺄셈, 재물은 곱셈, 기쁨은 나눗셈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가끔 거닐던 산언저리에 쌓인 눈이 녹고 봄기운이 도는 춘삼월의 따뜻한 봄날을 택해 빈대떡에 소주 한잔 기울입시다. 그때까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나이에 건강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세상과 싸우지 말고 자아실현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미끄러운 길은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호가 춘곡(春谷)인 고희동 가옥을 지나 올라가다 보면 빨래골을 만나게 된다. 약간 지하에 있는 개구멍받이처럼 생긴 곳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옛날 궁녀들이 그곳에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했단다. 궁녀들이 비누 대신 곡물을 사용해 늘 뿌연 뜨물이 흘러나왔는데 사람들은 그 물에 빨래를 했고 그 뒤 빨래골이라 불려왔다 한다.
곡물로 머리를 감았다니 궁녀들의 호사를 알 수 있었고 예쁜 모습으로 왕의 눈에 들어보려는 암투가 느껴지기도 했다. 흘러내려오는 물로 동네 사람들이 비누 없이 빨래를 했다고 하니 민초들의 가난한 생활이 상상이 되었고 빨래터의 정겨운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바로 위쪽으로는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희빈이 살았다는 집이 있었다. 그렇게 세도를 부리던 장희빈도 사약을 마시고 죽었으니 인생무상이 따로 없다.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장희빈이 살았던 집이라니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돌다가 삼해 소주 공방에 들어갔다. 마당에서는 소주를 만들려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간단한 차와 직접 만든 편강, 김부각 등을 팔았다. 북촌민예관도 함께 있었는데 무형문화재 김복곤 악기장의 가야금이나 아쟁, 대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옆방에는 백남준 씨의 조형 작품들이 있었다.
계동에서 원서동을 지나 가회동 11길의 오르내림이 심한 골목에 다다르니 3경이 바로 눈앞이다. 포토존에서 멀리 남산타워가 보였다. 오늘은 날씨가 좀 흐려서 희미한 실루엣만 보였지만 날씨가 좋으면 타워가 선명하게 보여 많은 관광객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고 한다.
그윽한 정취를 가지고 있는 한옥들을 감상하며 4경을 지나 5경에 이르니 벽과 지붕이 맞닿을 듯 즐비한 한옥 골목이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전봇대나 전선이 보이지 않는 점이 특색이다. 주택업자가 모두 지하로 파묻어 분양했다고 한다. 외관은 고칠 수 없어 예전 모습 그대로이지만 집 안은 다 현대식으로 고친 한옥들이라 한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취운정(翠雲停)이라는 한옥이 나왔다. 이곳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으며 하루 숙박료가 140만 원이라니 보통사람은 하룻밤 지낼 엄두를 못 낼 것 같다.
6경에서도 남산타워가 보이는 포토존이 있는데 그 옆 유서 깊은 중앙고등학교는 ‘겨울연가’를 촬영지로 일본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고 한다. 필자가 대학생 때 좋아했던 남자 친구도 중앙고등학교 출신이었다. 학교 앞에 서니 그 시절이 생각나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슬쩍 궁금해져서 속으로 픽 웃음이 났다. ‘잘 살고 있겠지, 뭐’ 하면서.
7경의 북촌 전망대에서는 멋진 기와지붕들 너머로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청와대와 경복궁이 보였다. 8경은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이어서 필자 일행은 정독도서관 쪽으로 내려왔다. 정독 도서관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로 이전에는 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이 이 근처에 살았다 한다. 또 조선시대 총포를 만들었던 ‘화기도감 터’였다고도 한다.
오늘 탐방한 북촌 8경에서 우리나라 한옥의 지붕 곡선과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이렇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더 많은 분들이 전문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의 한옥마을을 찾아 아름다움을 느껴보기를 권하고 싶다.
겨울엔 유난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이 떠오른다. 잔뜩 움츠린 몸으로 밥 한 공기 말아 넣고 숟가락질만 몇 번 했을 뿐인데 얼었던 몸이 어느새 스스로 녹는다. 50년 전통의 맛은 물론 쫄깃한 식감까지 책임져줄 순댓국집 ‘대림동삼거리먼지막순대국’을 소개한다.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대림중학교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을 하나 지나면 학교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순댓국집을 찾을 수 있다. ‘대림동삼거리먼지막순대국’은 1957년 대림시장 안에서 소규모로 국밥과 국수를 판매하기 시작해 1959년 순댓국 전문식당으로 정식 개업했다. 이후 식당이 있던 자리에 학교가 들어서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해 같은 지역에서만 2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2013년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메뉴는 두 가지. 오직 순댓국(보통 5000원, 따로 6000원, 특 7000원)과 안주(소 6000원, 중 8000원, 대 1만2000원)로만 승부한다.
50년 전의 맛 그대로
50년이 넘는 기간, 시니어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식당을 물려받은 창업주 김준수 씨의 아들 김운창 씨는 “특별한 맛의 비법은 없다. 그저 전수받은 옛날 방식 그대로 만들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옛날 방식 그대로’가 얼마나 많은 정성이 필요한지 이곳의 음식을 먹어보면 알 수 있다. 돼지고기, 무, 배추, 쌀 등 새우젓을 제외한 모든 재료는 일체 국내산이다. 특히 순댓국 특유의 돼지 잡내를 없애기 위해 냉동이 아닌 생고기를 사용한다. 큰 가마솥에 뼈를 넣고 하루 종일 우려내는 육수는 깔끔하고 담백해서 냄새에 예민한 사람도 큰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치도 직접 만든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고춧가루를 사용해 일주일마다 약 60포기의 김치를 담근다. 김운창 씨는 재료에 신경 써야 하고 손도 많이 가는 일이지만 아직 옛 맛을 기억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옛날 방식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푸짐한 한 뚝배기의 가격은 5000원
식당으로 들어가면 50여 년간의 가격변천사를 보여주는 메뉴판이 눈에 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당시에는 순댓국 한 그릇이 150환. 1962년 화폐개혁 이후엔 3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줬다. 현재는 2011년 가격 인상을 마지막으로 7년이 지난 지금까지 5000원을 유지하고 있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서 내용물이 부실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막창, 암뽕, 오소리감투, 대창, 머리고기, 순대 등이 아낌없이 들어간다. 5000원이라는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밥을 말아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처음엔 매콤한 맛이 감돌지만 이내 돼지 내장의 구수한 맛이 뒤따라온다.
안주를 주문하면 주방에서 바로 고기를 썰어준다. 접시 한 판에 각종 부위가 채워져 올라가는데 돼지혀, 머리고기, 순대, 작은창자, 대창 등을 맛볼 수 있다. 찬바람에 식어 딱딱해지기 전에 새우젓을 살짝 올려 먹어보자. 쫄깃한 오소리감투와 부드러운 간은 절로 소주를 부르는 맛이다. 순댓국 두 그릇(보통), 안주(소), 소주를 시켜도 2만 원이 넘지 않는다.
주소 서울 영등포구 시흥대로 185길 11
예약 및 문의 02-848-2469
운영시간 08:00~21:00 매월 둘째, 넷째 주 화요일 휴무
‘아사히 맥주 CEO 히구치 히로타로의 불황 돌파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이다. 이 사람은 1986년 스미토모 은행에서 아사히 맥주 사장으로 부임한 사람이다. 당시 아사히 맥주는 소주 열풍에 1984년만 해도 회사 맥주 매출액이 전년도에 비해 마이너스 5%에 달해 맥주 시장은 포화 상태 또는 사양산업이라고 보던 때이다. 아사히 맥주는 한자로 ‘조일(朝日:뜨는 해)맥주’라고 쓰는데 당시 시장 점유율이 10%대 이하로 떨어지면서 ‘석일(夕日:지는 해) 맥주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랬다가 공전의 히트 상품 ’슈퍼드라이 맥주‘를 만들면서 기적적으로 업계 1위 업체가 되었다.
은행 출신이라 맥주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어떻게 그런 기적 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비결이 궁금했다. 그는 먼저 경쟁 맥주 회사에 가서 조언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경쟁회사라는 곳은 원래 경쟁회사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지 않지만, 당시 1위 업체인 기린 맥주 회장이 “좋은 원료로 맥주를 만들라”는 조언을 했다는 것이다. 가격 경쟁을 위해 한 푼이라도 싼 원료를 쓰던 아사히 맥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언이었지만, 그대로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성공한 것이다.
병행해서 3개월이 지난 아사히 맥주는 수거해서 폐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한 푼이 아쉬운 아사히 맥주 회사가 이 큰 결단을 고비로 ‘아사히 맥주는 신선하다’는 이미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뼈를 깎는 고통과 비슷한 비장의 결단이었다. 우리나라 삼성전자가 초기 휴대폰 사업 때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 불량 재고를 불태운 일과 비슷하다.
히구치 히로타로 사장의 위기 극복 과정은 필자의 직장 경력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필자는 1988년에 잘 나가던 LG 전자 수출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당시 스키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던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갔었다. 35살 나이에 공장장 겸 이사 직함을 받고 가니 10년 이상 근속했던 기존 직원들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 나이라면 기존 직원들은 과장 급 정도였을 때인데 필자가 봉제업체 출신도 아니고 사장의 친척도 아닌데 너무 높은 자리에 낙하산으로 내려 왔기 때문이다.
당시 그 회사의 스키장갑 수출량은 연간 1백만 켤레 생산에 1천만 불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버로드가 걸려 납품이 지연되는 사태가 속출하고 주문량도 제대로 못 채우는 상태였다. 불량품이 많이 발생하고 서두르다 보니 품질 또한 좋을 리 없었다. 바이어들의 클레임이 연이어 날아들고 직원들은 그에 대한 문책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여기까지가 한계라며 더 이상의 수주는 무리라는 분위기였다.
필자가 우선적으로 한 일은 회사의 문제점 파악이었다. 생산 구조가 본 공장 생산이 10%이고 나머지 90%가 외주 생산이라는 것을 중시하고 외주 직원들의 봉급을 올렸다. 봉급이 오르자 외주 직원들의 사기가 충천하며 생산량이 급증했다. 품질도 제자리를 찾았다.
다음으로 바이어 구조가 메이저 바이어가 75%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바이어 구조 분산을 지적했다. 결국 신규 바이어 확보는 필자의 몫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 스포츠 박람회를 돌며 신규 바이어 확보에 주력했다. 국내 생산으로 부족한 생산력은 중국, 스리랑카, 필리핀 등 해외 외주 생산으로 충당했다. 다행히 운 좋게도 스노보드 장갑의 열풍으로 바이어가 급증하고 회사 매출도 한계를 넘어 6년 만에 2배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국내 맥주 업계는 물론 사업하는 사람들이 필독해야할 만한 책이다. 경영자 한 사람의 역량이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배울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