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트레비네는 조용한 강변 마을이다. 레오타르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트레비슈니차 강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소도시. 오스만 시대의 아치형 다리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마을을 잇는다. 고요한 소읍은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든다. 강물 속으로 마을 풍치가 풍덩 빠져 반영되어 흔들거리면 긴 여행자의 묵은 시름이 사르르 치유된다.
모스타르에서 트레비네까지 첩첩산중 길고 긴 여행
한여름, 크로아티아는 지긋지긋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로 도망쳤고 이내 트레비네(Trebinje)로 떠난다. 필자가 예약한 숙소는 개울 옆, 아름다운 전원 카페 분위기가 나는 그런 곳이다. 새로 신축한 듯 모텔은 깔끔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촉수 낮은 불빛의 어둠침침한 야외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는다. 숙소 사람들일까? 생각보다 손님들이 많다. 맑은 개울물을 담아낸 작은 연못 속에는 송어가 살아 움직인다. 모텔 직원은 자기네 음식이 최고라고 했지만 모험은 하기 싫어 야채샐러드와 바다 생물인 오징어 요리를 시킨다. 샐러드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메인 요리는 나오지 않는다. 질 좋은 지역 와인 한 잔을 더 시켜 홀짝홀짝 마실 즈음에야 요리가 상차림된다. 작은 삶은 오징어와 삶은 감자, 삶은 근대가 올려져 있다. ‘음식을 참 맛있게 하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준급이다. 어디를 가든 음식 잘하는 곳엔 손님이 많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다가 한 아주머니랑 스치듯 대화를 나눈다. 스위스에서 살다가 이제는 고향으로 내려왔단다. 그러면서 내일 올드타운을 가면 자기 남편이 안내해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낯선 누군가에게 여행 안내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처럼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녀는 가족이 있는 테이블로 날 끌어당긴다. 그녀가 이끈 테이블에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무척 깐깐해 보이는 남편 말고도 여러 명이 함께 앉아 있다. 남편은 내일 집으로 찾아오라면서 아주 꼼꼼하게 이름, 주소, 전화번호, 약도를 그려준다.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이지만 왠지 진심이 느껴진다.
트레비슈니차 강과 아르슬라나기치 다리의 조화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다음 날, 죽을 만큼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침 한 방울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이 아프고 온몸은 천근이다. 일단 메인 타운에 가서 약국부터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전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말도 해줘야 할 것 같다. 타운까지는 5km. 택시를 부르면 간단할 일을 또 걷고 있다. 땡볕이 강렬해 발걸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카메라를 꺼내든다. 나무가 거의 없어 흰 빛을 띠는 카르스트 지형의 레오타르 고산과 트레비슈니차 강이 휘도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트레비네의 대표 명소인 ‘아르슬라나기치’ 다리(길이 80m 높이 6m)는 무심한 시민들 때문에 위치를 놓치고 만다. 한참을 더 걸어서 메인 타운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야 먼발치의 다리를 보게 된다. 아치형의 다리와 트레비슈니차 강이 한데 어우러진 풍치가 멋지다. 트레비슈니차 강에 이 다리가 만들어진 것은 15세기(1574년) 오스만제국 시대다. 오스만제국 시절 트레비네는 두브로니크와 이스탄불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다리 이름은 당시 다리 통행료 징수권을 갖고 있었던 ‘아르슬란 아가(Arslan-aga)’라는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지도자인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pasa Sokolovic, 1506~1579) 명에 의해 유명한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 1489~1588)이 건설을 맡았다. 그는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Visegrad)의 다리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말고도 대단한 작품이 아주 많은 건축가다. 원래는 훨씬 더 북쪽에 있었는데 트레비슈니차 강에 수력발전소가 생기면서 1972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이 다리는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건축된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아주 잠깐은 아픔도 잊는다.
보스니아의 오래된 도시에서 만난 ‘드라간’ 부부
도심 구경 대신 전날 밤 식당에서 약속한 집을 찾아 나선다. 긴가민가하면서 한 집을 기웃거리다가 전날 만난 남편 드라간을 만난다. 반갑게 맞이하는 아주머니 외에 아들도 있다. 키가 2m나 되는 아들은 화가란다. 그는 트레비네 근처의 작은 마을에 작업실이 있고 가을에는 스위스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말한다. 작품을 팔아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쓸 정도라면 나름 유명한 화가일 것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주인아주머니는 소시지와 동유럽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고급 산양 치즈까지 내어준다. 이 집에는 송로버섯을 찾는 강아지도 있다. 이내 부부와 함께 시내로 나섰고 ‘드라간’은 자신이 태어난 이 도시에 대해 많이 알려주려 애쓰고 있다.
트레비네는 보스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스릅스카(Srpska) 공화국에 속해 있다. ‘태양과 플라타너스 나무들의 도시’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355년까지 세르비아 왕국에 속해 있다가 이후 보스니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오스만제국의 지배(1463~1878)를 받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향권(1878~1918년) 아래로 들어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도시 방어를 위한 요새가 건축되고 광장, 공원, 학교, 공장 등이 들어서는 등 규모가 확대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던 1945~1990년에는 수력발전소와 댐, 인공호수, 터널 등이 건설되면서 급격히 발전했지만 보스니아 내전은 이 도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트레비네 메인 타운에는 오래된 유적지가 없고 묘지만 많다.
드라간 부부와 함께 1908년에 설립된 세르비아 정교회를 찾는다.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보스니아이지만 그들은 그리스 정교회다. 트레비네는 10세기부터 가톨릭 교구가 생겼고 ‘가톨릭 10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던 도시다. 또 중심 광장인 ‘자유광장(Trg Slobode)’으로 가는 길목에도 19세기 말에 세워진 자그마한 성모 탄생 교회가 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자유공원 앞의 카페는 유명한 배우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라고 드라간은 말한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공원 한쪽에 마련된 청과물 시장에서 복숭아를 사면서 요반 두치치(Jovan Ducic, 1871~1943) 동상을 발견한다. 요반 두치치는 세르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트레비네 도서관에는 두치치가 기증한 장서 수천 권이 전시되어 있다. 또 이 도시 언덕 위에는 2000년, 그를 기리기 위해 코소보의 그라차니차 수도원을 본떠 완공한 헤르체고바카 그라차니차 수도원이 있다. 드라간 부부와 함께 ‘체바피(Cevapi 혹은 체바치치(Cevapcici))’도 먹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어릴 적 추억을 듣는다. 약 덕분에 목은 좀 나아졌고 여러 가지를 보여주려는 현지인에게 감동받아 한국식으로 몰래 밥값을 낸다. 그들은 한국식 ‘밥값 계산’에 감동했는지 기어코 차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까지 안내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면서 고향 떠나 스위스에서 살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드라간. 그는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나이 든 그가 여행객과 대화를 할 정도의 영어구사를 하는 것도, 외국인을 안내해주겠다는 마인드도 스위스에서 얻은 지식일 것이다. 그는 내게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그리고 트레비네에 오면 ‘내 집’에서 언제든 ‘공짜’로 묵으라는 말도 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집에 다시 가서 정담을 실컷 나누고 싶다.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하지만 가는 곳마다 스토리는 달라진다. 매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들. 묘한 인연의 발자취를 트레비네에 남겼다. 인터넷을 못해 지속적인 연락은 못하지만, 내 가슴속에 영원한 추억을 남긴 드라간. 동양인이 그곳으로 여행을 온다면, 나와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분명히 반길 것이다.
>>Travel Data
가는 방법 한국에서 직항은 없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있다.
현지 교통 사라예보를 기점으로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가 운행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택시밖에 없었다. 필자처럼 모스타르에서 접근하거나 몬테네그로의 포드고리차에서 이용하는 편이 낫다.
음식과 숙박 올드타운에 체바피를 잘하는 집이 있다. 또 모텔 스튜데낙(Motel Studenac)은 음식과 숙박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먹은 생선스프는 최고였다. 또 트레비네는 질 좋은 와인 산지다. 브라나츠 와인은 발칸의 희귀 품종으로 타닌과 산도가 높아 명성이 높다. 포드루미부코예 1982(Podrumi Vukoje 1982) 와이너리가 유명하다. 시내에서는 택시를 타야 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트레비네는 작은 도시다. 매일 산책하고 근교의 산을 다닌다 해도 한 달 머물기는 버거울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기점을 두고 크로아티아나 몬테네그로를 연결하면 된다. 렌터카를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리투아니아 관광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발트 3국의 중간에 위치한 라트비아로 들어갔다. 북쪽으로 가는 길이다. 나름대로 국경을 넘을 때 입국 수속이나 검문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싱겁게도 버스가 그냥 지나쳤다. 검문소가 있긴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국경선 개념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지 않았다.
라트비아의 첫 방문지는 바우스카의 룬달레 궁전이었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따 만들었다는데 규모만 작을 뿐 정말 비슷했다. 아름다운 궁전도 그랬고 뒷마당의 정원도 그랬다. 댄스를 알고 나서 보니 과연 궁전 내부가 그 옛날 귀족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화장실이 없다는 베르사이유 궁전과 같이 오렌지 나무를 심어 놓은 정원에 숨어 볼일을 봤겠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코스는 유르밀라 해변이었다. 발트해가 바로 보이는 휴양지라서 근사한 집들이 많았다. 다만, 큰 기대를 했던 발트해는 모래는 아주 작은 입자라서 좋은데 굴 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해변을 걷다가 곧바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아직 낮 기온이 22도 정도라서 수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다음에 가본 곳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였다.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피터 대성당, 상인들이 700년간 사용했다는 검은 머리 전당, 라트비아의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 정복자 스웨덴의 문, 돔 성당, 구 시청사 등을 돌아 봤다. ‘한자동맹’이라 하여 학창시절에 얼핏 들었으나 ‘한자’의 뜻이 ‘상인의 친구’라는 뜻이란다. 상공업이 발달한 무역도시라서 무역상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리가에서 유람선을 타고 강 한쪽의 구 시가지, 반대편의 신 시가지를 감상하는 코스도 있었다. 우리 일행 30명만 타고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였다.
라트비아의 스위스라는 시굴다, 라트비아의 허파라는 체시스를 둘러 봤다. 라트비아를 지배했던 독일기사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독일과 발트 3국 사이에 폴란드가 위치해 있는데도 독일은 틈만 잇으면 폴란드를 침공했으니 발트 3국도 독일의 영향력이 컸다는 얘기이다.
발트 3국의 특산품으로 호박이 있다. 소나무의 송진이 열과 압력을 받아 굳어져 만들어진 천연 보석이란다. 자연산이라 조금씩 색이 달랐다. 싼 것은 10유로 목걸이부터 크기와 모양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그 옛날 소나무가 많던 육지가 바다가 되었는데 그때 가라앉은 소나무들이 호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발트 3국의 호박은 바닷물에 뜨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열이 나도록 문지르면 한약재 냄새가 나는 것도 특징이라고 했다.
이날 밤은 변두리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방이 넓고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는 넓은 세미나 실이 있었다. 낮의 룬델라 궁전을 떠올리며 귀족들 춤을 춰보자며 모였다. 30명 중 남성들은 피곤하다며 빠졌고 여성들만 모인 자리에서 비엔나 왈츠를 가르쳤다. 전진하며 회전하면서 발 모으고 후진하며 역시 회전하면서 발을 모으면 되는 간단한 춤이다. 전진 스텝은 잘 했다. 그러나 후진 스텝이 조금 어려웠는지 엉덩이가 뒤로 빠지는 것만 빼고는 모두 무난히 소화했다.
스위스 출신의 유엔인권위원회 자문위원인 장 지글러의 를 읽고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만 생각해, 상대적 빈곤과 불행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장 지글러의 글은 깨달음 이상으로 다가오는 분노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지구별에는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매일 3만5000여 명의 아이들이 굶주린 채 죽어가고 있으며 10억 명 이상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촌에는 120억 명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식량을 생산할 수 있지만 한쪽에선 굶어 죽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지구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식량 생산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인도적 지원과 도움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굶주린 아이들의 부모나 민족성이 게으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 지구촌 한쪽에서는 남아도는 식량을 버리고 있고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당장 굶주리고 있는 목숨보다 강대국과 다국적 기업의 이익이 앞서고 있습니다.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일도 강대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이익이 앞서지 않는 곳에서는 또 다른 문제들이 즐비합니다. 족벌과 군벌로 무장된 분열이 정의를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적인 식량 지원은 아이들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총칼로 무장한 군벌의 손에 들어가 또 다른 전쟁의 물자로 사용되었습니다.
인간을 기아로 몰아넣는 이 증상을 우리는 학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대량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인간이 굶주리고 있는 동안 엄청난 양의 옥수수가 소의 먹이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3세계의 주식인 곡물은 투기 대상이 되었으며, 남쪽의 농경지는 헤지펀드의 약탈에 남아나지 않을 지경입니다. 또 자국의 탄소연료를 줄이기 위해 농업연료를 생산한다는 미명 아래 태워 없애는 옥수수는 셀 수조차 없습니다. 세계의 식량 자본가들이 시장에서 자행하는 농업 덤핑은 제3세계의 농업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도 안 자고 농사를 지어도 덤핑가로 들어오는 수입산에 밀려 제값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환경도 빈민의 편이 아닙니다. 매년 약 600만 헥타르의 땅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73%가, 아시아 대륙의 71%가 사막화의 영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수많은 인구가 식수가 부족해 환경난민이 되어 고향을 등진 채 떠돌 수밖에 없습니다. 사막화뿐이 아닙니다. 말레이시아, 콩고, 가봉 그리고 아마존 일대에 남아 있는 원시림이 매년 수백만 헤타르씩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이 들어서고 목재 판매회사들이 불법으로 벌채해서 숲을 마구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허파인 이 원시림의 파괴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세계적으로 환경난민이 2억500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사이에 그 숫자는 10억 명까지 불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환경난민은 도시로 몰려들어 정착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60% 이상의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게 됩니다. 문제는 도시인구의 증가가 삶의 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구가 판자나 비닐, 녹슨 함석으로 지은 초라한 빈민촌에서 살게 됩니다. 환경난민의 희망은 도시에서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해진 일자리도 거주지도 사회보장 자격도 없이 살게 됩니다. 그러니 정기적인 수입도 없고 의료 혜택은 물론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대국의 음모도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최빈국 부르키나파소의 개혁자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는 사회 정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충분한 식량을 생산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거대한 행정조직을 축소해 부정부패를 줄이고 자치구역을 설정해 탈중앙집권화를 실시, 도로건설과 수도사업 그리고 보건의료사업 등을 자치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철도를 건설하고 인두세를 폐지하였습니다. 토지를 국유화하여 경자유전을 실시했습니다. 부르키나파소는 4년 만에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었으며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나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러나 부르키나파소의 성공은 정치 부패에 시달리던 이웃 국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정권의 꼭두각시 정권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상카라의 개혁을 별로 반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음모에 상카라는 결국 동지였던 참모에게 살해당했고 부르키나파소는 과거로 회귀하고 말았습니다. 부패는 만연했고 농민은 절망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 기근, 종족 분쟁 등에 대해 선진국이나 국제원조기구들은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저자인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토지 개량도, 사막화 대책도, 농업 지원도 결국은 응급조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기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장 지글러는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인 신자유주의,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을 바로잡지 않고는 기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는 선진국에서 만든 경제원리이자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기아는 선진국의 경제논리에 의해 탄생한 것일까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최근의 여행 트렌드는 친구나 연인과의 여행보다는 가족과 함께 떠나는 테마 여행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여행의 보편화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보인다. 여행이 일상이 된 현재, 보다 일상적인 이벤트로서 가족과 함께하는 모습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인 류시호씨는 며느리, 사위, 손주 등 온 가족과 자주 여행을 떠난다. 이번 5월에 떠나는 여행지 그곳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류시호 시인ㆍ수필가
얼마 전, 가족 9명을 데리고 보라카이로 여행을 떠났다. 큰아들 부부와 작은아들 부부가 직장을 다니며 고생하기에 손주들과 시원한 바다에서 여유롭게 쉬도록 우리 부부가 경비를 마련했다. 여행은 어디를 가든 즐겁다. 준비할 때부터 기분이 좋다. 우리 가족은 그동안 강원도 양양의 바닷가에서, 강원도 영월에서, 그리고 충북 수안보에서 숙박을 하면서 여러 번 가족여행을 했기에 서로가 여행 분위기를 잘 느낀다.
이번 가족여행은 해외로는 처음 가는 것이라 어린 손주 3명이 걱정스러웠다. 이동 중 간식을 먹이는 문제도 그랬고 장거리 비행 중 아프지나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염려가 됐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인천공항까지 가는 길에도, 비행기에 탑승할 때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게이트 번호가 100번이 넘는 곳이라 탑승구로 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 열차를 타고 가서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탑승시간에 임박해서 겨우 게이트에 도착했다. 그동안 여러 번 해외여행을 했지만, 공항 내에서 지하철로 이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륙할 때 큰 손주는 좋아서 웃고 작은 손주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장거리 비행기를 타다 보니 둘째 손주가 기내 공기가 안 좋아서인지 좁은 곳이 갑갑해서인지, 며느리 가슴에 음식물을 토하기도 했다. 막내 손주는 인천공항 비행기가 이륙할 때, 그리고 보라카이 섬과 가까운 칼리보 공항으로 비행기가 착륙할 때 울어댔다. 기압 차이로 귀에 통증이 왔던 것이다. 막내 손주가 어디가 불편한 건지 표현을 잘 못해 며느리가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 외 시간은 비행기 안에서도 잘 놀아 다행이었다.
작년과 재작년에 필자가 방문한 베트남과 미얀마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한국인들을 우대해줬는데 이곳은 세관 심사가 너무 까다로웠다. 보라카이 휴양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 하루에 이곳을 찾는 여행객이 2만 명이나 된다 하니 작은 섬의 인기가 대단하다. 이 섬의 치안은 안전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10년 전 필리핀을 여행할 때도 총기사고가 있었다. 최근에는 불법으로 유통되는 총기가 100만 정이나 된다는 뉴스도 있었다. 심지어 총기 규제가 허술하니 ‘필리핀에서는 택시를 타지 말라’는 경고도 있다.
칼리보 공항에 내리니 밤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인 가이드가 아닌 필리핀 가이드가 서 있었다. 필리핀 가이드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한국인을 바꿔줬다. 그분이 하는 말이 오늘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와서 안내하느라 자신이 두 시간 거리인 보라카이에 있으니 현지 가이드와 같이 오라고 한다. 공항에서 낯선 필리핀 사람이 우리 가족들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실망도 했는데 어두운 밤에 그 외국인을 따라 목적지인 보라카이로 가려니 걱정도 됐다. 그러나 가는 동안 필리핀 가이드와 대화를 한 뒤 불안감은 조금 가셨다.
얼마 후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가는 부두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배를 타니 한국 여행객들이 많았다. 그제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섬에 도착하니 보라카이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자전거 택시 베디카부와 오토바이를 개조해 좌석을 몇 개 만든 3륜 오토바이 트라이시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타고 우리 가족은 호텔로 이동을 했다. 10여 년 전,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는 미군이 사용하던 군용 지프를 개조한 작은 버스 지프니가 대중교통 역할을 했다.
우리 가족이 예약한 호텔은 이 지역에서 꽤 유명한 호텔로 시설이 아주 좋았다. 다음 날 호텔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국인 모델이 촬영을 하고 있어 관계자에게 문의하니 인기 있는 호텔이라 한국에 선전하려고 찍는다고 했다. 그만큼 괜찮은 호텔이라는 의미라서 기분이 좋았다.
보라카이는 세계 3대 화이트비치라는 소문에 세계 여러 나라의 자유여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보아하니 한국인들도 많이 온 것 같았다. 숙소인 ‘파라다이스 가든’에는 넓은 부지에 야자수를 비롯한 다양한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조용한 휴식과 레저 스포츠를 즐기기에도 적합해 보이는 이곳은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상쾌한 물줄기를 내뿜는 인공폭포가 마련된 옥외 수영장이 인기였다. 전체적으로 안락한 분위기에 우수한 시설로 불편이 없었고 도보로 5분 거리에 화이트비치가 있어 참 편리했다.
호텔에서 주는 아침은 열대식물이 있는 정원에서 가족 9명이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먹었다. 아름다운 섬 보라카이의 멋진 정원에서 식사를 하니, 대기업에서 스트레스받으며 일하는 큰아들 부부, 부부 공무원으로서 민원인들에게 시달리며 일하는 작은아들 부부가 기분이 좋은지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손주들도 신이 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파트에 사는 손주들에게 늘 했던 “조심하라”는 말을 안 해서 필자도 즐거웠다.
옥외 풀장에서는 가족 모두가 물놀이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우리 부부가 손주들과 놀아주니 아들과 며느리들이 오랜만에 해방된 기분이라며 이구동성이다. 점심은 보라카이 다운타운 디몰(D-mall)에서 먹기로 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아서인지 멕시코식, 일식, 그리스식, 스페인식, 이탈리아식, 스위스식, 한식 등 여러 나라 음식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필리핀 음식점에서 닭고기와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을 주문했다. 공장에서 만들었는지 종이에 싼 밥도 나왔다. 손주들과 며느리들이 맛있게 먹어주니 기분이 좋았다. 후식은 자리를 옮겨 필리핀 특산물인 망고로 만든 망고쉐이크를 주문했다. 가족들 모두가 좋아했다. 길을 걷다가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젤라토를 사 먹기도 했다. 그런데 큰손주가 망고쉐이크가 맛있다고 또 사달라고 하니, 둘째 손주도 덩달아 자기도 사달라고 해서 할머니가 지갑을 분주히 열고 닫아야 했다. 가족들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사는 맛이 났다.
다음 날, 바다에서 물놀이도 하고 밀가루 같은 모래로 손주들과 두꺼비집도 지으며 놀았다. 큰손주는 신이 나서 아예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어서 필리핀 전통 선박으로 엔진 없이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돛으로만 이동하는 세일링 보트를 탔다. 그물망에 앉아 바람을 느끼며 보라카이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즐겼고, 가족 모두가 흥겨워하니 쪽빛 바다, 흰 파도, 그리고 멋진 모래사장이 있는 이곳으로 여행을 잘 온 것 같다.
저녁에는 가족 모두가 방에 모여 맥주와 위스키,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손주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 특히 손주들이 이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니며 즐거워하니 아들과 며느리들도 만족스러운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동안 국내 여행을 자주 함께하며 가족 간 사랑을 나눴던 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부모와 형제는 수족 같고 처자식은 의복과 같다고 했다. 어른이든 아이이든 사랑을 받아야 삶의 활력이 생긴다. 사랑은 살아가는 이유가 될 만큼 아름다운 감정이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어깨 위에 올려놓은 자식과 손주를 절대로 짐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녀들은 가족이 함께 있을 때는 소중함을 잊고 살지만 공부와 취업, 그리고 결혼 때문에 떨어져 살거나 부모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제야 부모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각자 자기 둥지에서 살다가 인간관계, 심리적인 문제 등이 생겼을 때, 가족을 찾는다. 가족이 가장 편하고 세상 어느 누구보다 든든한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는 늘 따뜻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안아주고, 아버지는 투명한 빛으로 자녀들의 길을 밝혀주기에 부모가 오래 곁에 있다면 최고의 복이다.
이 세상에서 가정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집이 대궐같이 으리으리하고 돈이 많아도 가족 간에 사랑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이라 할 수 없다. 가정의 행복을 맛본 사람은 인생의 햇볕을 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빛으로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울 수 있다. 보라카이로 떠난 가족여행은 행복했고, 무사히 귀국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덕분에 가족들의 아름다운 미소는 오랫동안 우리 가정의 풍경이 되고 에너지가 됐다.
주말에 큰손주가 오면 “할아버지 할머니 보라카이 또 가요. 그리고 망고쉐이크 사주세요” 한다. 그 말에 필자와 아내는 싱긋이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 계획을 짜본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행복이다. 재충전의 기회도 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동안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면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떠나보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는 시간 속에 어쩌면 꽃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웃음꽃이 만발할 것이다.
>>류시호 시인ㆍ수필가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후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 중부매일신문의 오피니언 ‘아침뜨락’에 2008년부터 고정필진으로 있다. 이외 대구일보와 현대문학신문의 필진으로 있으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2016년 문학 창작금 수혜(受惠)를 받았다. 서울특별시장의 ‘서울사랑 이야기 공모전’ 수상 외 6건을 수상했고, 저서로 과 등 4권이 있다.
맞벌이가 대세인 요즘 손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의 절반이 조부모 몫이다. 예전에도 손자녀의 돌봄이 있었지만 밥이나 챙겨주는 소극적 양육이었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또래 아이들과 떠들고 장난치고 밤이 깊어 가는지도 몰랐고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면 그때 달려서 엄마 품에 안기면 끝이었다. 과외공부도 없었고 고작 학교 숙제가 발목을 잡는 그야말로 숙제였다.
지금의 아이 양육은 먹이고 씻기는 일은 기본이고 시간 맞춰 과외수업 현장으로 내 몰아야하고 교통사고나 유괴의 우려가 없는지 늘 매의 눈으로 아이를 살펴봐야 한다. 금쪽같은 내 손주 누구나 다 잘 기르고 싶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잘 기르는 방법은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떤 놀이를 해줄까?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아할까? 늘 궁금증은 있었다. 그러던 차에 건강가정 지원센타에서 "3가지로 좋은 조부모 되기"강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참가하게 되었다. 3가지는 "마음이 통하는 조부모, 신체 놀이가 통하는 조부모, 구연동화가 통하는 조부모" 가 가되기 위한 교육이었다. 손자녀의 마음을 읽고 유아의 눈높이에 맞춘 조부모의 구연동화는 장차 손자녀가 살아가는데 마음속에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고 강사가 강조한다. 할머니 무릎에서 들었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봐서 틀린 말이 아니다. 피아제(스위스출생, 아동발달심리학자 1896~1980)의 인지 이론에 의하면 유아기의 심리는 돌멩이를 비누로 상징하고 모래로 밥을 짓고 풀잎으로 나물을 만들어 소꿉놀이를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보고 듣는 직관적 사고로 무생물도 살아서 숨 쉬고 느끼고 자란다는 물활론적 판단을 갖고 있다. 더구나 자기가 꾼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믿으며 사물이나 현상을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사물의 여러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은 다르다. 내 아이를 키울 땐 거창한 이런 걸 모르고 못 느끼고 가슴의 사랑으로만 키웠다. 나이 들어서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면서도 피아제의 인지 이론을 공부했지만 감동 없이 그러려니 했다. 잊고 있던 유아기의 심리상태를 선생님 말씀과 그동안 손자녀의 행동을 견주어보니 아이들 마음이 이런 마음 이었구나 하고 이해가 가고 배우고 안다는 것이 즐겁다. 유아원에서 첫 아이에게 아빠 직업을 물었더니 도둑 잡는 경찰관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너희 아빠 참 훌륭하시다. 우리 친구들 여기 봐요! 누구 아빠 대단해요 우리 박수 한번 쳐줘요"한 후 다음 유아에게 아빠 직업을 물으면 경찰관 이라고 대답 한단다. 그 다음 유아도 또 그 다음 유아도 모두가 자기 아빠가 경찰관이라고 대답 한단다. 유아에게 거짓말 한다고 야단 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유아의 심리 상태란다. 아이들끼리 소꿉놀이 하는 걸 유심히 보면 모래로 밥을 하고 풀잎을 뜯어서 김치를 담근다. 아이들 세계는 그것이 정상이다.구연동화를 위해서는 작품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동화를 익힌 후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고 녹음을 해서 듣고 고쳐가며 많은 실연을 해야 자연스러운 동화구연이 된다. 시니어에게도 봉사활동이나 직업으로도 구연동화가는 매력적임에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풍부한 인생사가 들어있으니 자연스럽게 실감나는 구연동화가 가능하다.
원래 구연동화는 어떠한 소품도 사용하지 않고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동화를 입으로 연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다양한 교재를 활용하거나 집에 있는 간단한 소품들을 이용하면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음의 높낮이 와 등장인물에 적합한 음성을 모방하고 가끔 효과음을 넣는다면 아이들은 행복하고 놀라운 가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좋은 조부모되기 위해 노력하고 아이의 마음 상태를 알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인도 유아의 심리상태로 돌아간다. 얼굴과 목소리는 녹슬었지만 마음만은 유아가 된다. 회춘이 따로 없다. 생각이 젊으면 몸도 젊어진다. 유아의 눈높이에 맞는 종이접기, 구연동화 실제 해보기로 서툴지만 한바탕 웃음으로 끝이 났다. 배움은 끝이 없고 배워야 산다.
를 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퇴임 후 예순두 살의 나이로 이스탄불과 중국의 시안(西安)을 잇는 1만2000km에 이르는 길을 걷는다. “침대에서 죽느니 길에서 죽는 게 낫다”고 말한 그는 은퇴 이후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여행을 통해 꼼꼼히 기록했다. ‘나이 듦’은 생각하기에 따라 젊음보다 오히려 장점이 많을 수 있다. 속도를 늦춰 살고 여유 있게 세상을 바라보면 된다. 이미 쓴 노트의 페이지는 되돌릴 수 없다. 아직 남아 있는 빈 여백에 새로운 인생 이야기를 쓰는 일, 지금 바로 시작하자.
이 글은 필자의 현장 경험을 가감 없이 반영한 ‘생생 정보’다.
여행지 선택, 어떻게 해야 하나?
전 세계의 유명인들이 망명국으로 선택한 곳은 유럽이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그들이 유럽을 정착지로 선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럽은 소도시별로 다양한 매력이 있다. 유럽 여행 좀 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여행지를 나라가 아닌 도시로 구분 짓는다. 다양한 ‘인문’을 접할 수 있는 것 이 유럽 여행의 큰 매력이다. 또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라서 운치 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어느 계절이 여행하기 좋을까?
여행 갈 때는 좋은 계절을 선택하는 것이 기본이다. 봄이 가장 좋다. 여름이나 가을도 무난하다. 유럽의 여름은 지중해성 기후라 한국보다 훨씬 뜨겁지만 대신 습도가 낮다. 더우면 바닷가 근처에서 머물며 해수욕을 즐기면 된다. 가을 단풍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며, 겨울에는 설경을 감상할 목적이 아니라면 피하는 것이 좋다. 특히 북유럽 쪽의 겨울은 낮이 아주 짧다. 오후 3시쯤 해가 지기 때문에 관광할 시간이 너무 짧다. 겨울 여행은 긴긴 밤 속에서 보내는 날이 많을 수도 있다. 젊은 나이도 아닌데 굳이 타지에서 돈 써가면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
비자 등 각 나라별로 주의해야 할 사항
유럽의 많은 나라가 솅겐조약(Schengen Agreement)을 맺었다. 솅겐조약은 180일 이내에 90일까지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는 규정이다. 그래서 솅겐국 내에서 총 체류가 90일을 초과하지 않으면 된다. 한 달 체류는 문제되지 않는다. 참고로 유럽연합(EU)은 회원국 총 28개국에서 영국이 탈퇴(2016년)하면서 27개국이 되었다. 알기 쉽게 권역별로 정리하면, 서유럽권(프랑스, 이탈리아, 몰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독일,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동유럽권(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체코,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폴란드, 헝가리), 북유럽권(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발트 3국(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이다.
숙소 구하기와 추천 사이트 소개
여행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박이다. 상황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겠지만 밥을 해먹을 수 있는 독채를 빌려 쓰는 게 좋다. 외국에는 캠핑시설이 엄청 잘되어 있다. 자동차를 렌트해서 여행할 경우 캠핑장을 적극 활용하면 된다. 외국의 시니어들은 값싼 호스텔을 많이 애용한다. 단, 호스텔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휴식을 취하기 힘들다. 숙박기간은 미리 정할 필요가 없다. 일단 며칠 동안 지내보고 더 연장할 것인지는 그때 정해도 늦지 않다. 사람 마음은 늘 바뀌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숙소를 서로 바꿔서 지내는 방법도 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하다. 이동을 많이 하지 않으면 경비 절약에 큰 도움이 된다.
추천할 수 있는 대표적 해외숙박사이트
에어비앤비www.airbnb.co.kr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익스피디아www.expedia.co.kr
부킹닷컴www.booking.com
여행 경비 줄이는 방법
우리나라 환율을 기준해서 환율이 낮은 나라를 선택하면 된다. 참고로 동유럽이나 발트 3국은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 피서철의 유명 관광지를 피하는 것도 경비를 아끼는 방법이다. 환율이 낮은 나라라도 피서철에는 여행객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행태가 일상화되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선진국도 다르지 않다.
신용카드와 현금,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여행 중에 쓸 카드는 미리 만들어가는 게 좋다. 분실이 염려되겠지만 해외 현지인들이 한국에서 만든 카드를 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비상시에 쓸 현금은 옷 속이나 자신만 아는 비밀스러운 곳에 넣어둔다.
여행 가방은 최대한 간편하게 싸라
여행은 가볍게 해야 한다. 휴식을 하러 떠난 여행지에서 많이 가져간 짐 때문에 이런저런 부담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럽의 골목들은 한국과 달리 엄청나게 울퉁불퉁하다. 옛것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기에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부족한 물품은 현지에서 구입하면 된다. 실제로 의류 등은 한국보다 훨씬 싸다.
최악의 영어 실력, 여행지에서 괜찮을까?
각 나라별 언어를 익힐 시간은 없다. 영어만 할 줄 알면 어디선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어 실력이 최악이라면 짧고 간단하게 말하면 된다. 어린아이가 이해할 정도로 쉽게 언어를 구사하면 상대가 충분히 알아듣는다. 영어권이 아닌 나라의 현지인들도 영어 실력은 나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니 영어를 못한다고 절대 고민하지 말라. 무엇보다 전 세계 공용어인 ‘제스처’가 있으니 여행에 있어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해본 적 없는 배낭여행, 어떻게 하나?
모든 일이 숙달되기까지는 누구나 초보 시절을 겪어야 한다. 처음부터 베테랑은 없다. 패키지여행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배낭여행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생하고 돈 많이 쓰는 여행을 왜 하는지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배낭여행의 매력을 백번 설명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다. 그러나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지금이라도 바꿔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방법이 있다. 패키지여행을 자유여행으로 바꾸면 된다. 패키지여행을 가서 가이드 안내대로 따라다니지 않고 일행들에서 빠져나와 자유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패키지여행 반 자유여행 반으로 구성된 이색적인 여행 프로그램들이 많다. 패키지여행이 온전한 배낭여행보다는 안전성을 보장해주니, 그렇게 몇 번 실행해보라. 어느새 배낭여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여행자 보험, 반드시 들어야 하나?
여행자 보험은 3개월을 기준으로 한다. 물건을 잃어버리면 그 지역 경찰서에 가서 확인서를 받아오면 된다. 한국에 돌아와서 보험을 청구하면 의외로 황당할 때가 많다. 잃어버린 물건 가격에 상관없이 소정의 액수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건 변상은 기대 이상으로 박하지만 한 푼도 못 받는 것보다는 낫다. 또 현지에서 몸이 아플 경우 병원에 가는 데 도움을 준다.
강도를 만났을 때 대처법
여행지에서는 가끔 ‘강도’를 만나기도 한다. 특히 치안이 안 좋은 나라에서는 강도를 만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여행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행지의 도둑들은 혼자 행동하지 않고 대부분 두세 명이 함께 움직인다. 이들은 처음에는 ‘여행자’인 척하고 따라 붙는다. 그러고는 경찰이라고 하면서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이럴 때는 재빨리 상황 판단을 해야 한다. 제복을 입었는지 확인부터 하라. 말대꾸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또 그들의 허점을 먼저 공략하면 된다. “제복을 입지 않았군요?”라고 말하거나 ‘경찰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하면 그들은 도망가기 바쁘다. 동양인들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푼돈’을 뜯으려는 자들이지 사람까지 해치려는 생각은 안 한다.
예방접종주사, 꼭 맞고 가야 하나?
예방접종을 하고 가면 훨씬 안전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방주사 비용은 생각보다 비싸다. 특별히 ‘위험지역’이라는 보도가 없는 나라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지역을 자주 이동하지 않는다면 전염병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아플 때 도움 받는 법
현지 약국에서 약을 구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 젊은 약사가 있는 곳을 선택하라. 나이든 약사는 대부분 영어를 잘 못해서 설명이 어렵다. 현지에서 병원에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픈 곳에 대해 유창한 영어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치료를 안 해주는 병원도 있다. 이럴 때는 현지인이 운영하는 민박집 도움을 받아라.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다. 인터넷으로 찾으면 가능하다.
교통수단 이용 방법
여행지에서 이동은 필수다. 인터넷으로 미리 교통 정보를 알아보고 가겠지만 이 방법보다 유용한 것은 현지에 도착해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찾는 것이다. 친절한 가이드가 있는 곳도 있고 달랑 지도 한 장만 주는 곳도 있다. 상황에 따라 가이드에게 질문을 하면 된다. 특히 어려운 지명은 발음이 어려워 상대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으니 메모지에 써서 보여줘라. 그들은 전문가다. “싼 것을 원한다”고 말하면 2클래스를 알아서 척척 끊어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익숙해져도 직접 티켓 창구로 가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라. 자동기계를 잘못 이용하면 티켓 값을 순식간에 날릴 수 있다. 티켓을 발부받으면 정확한 날짜에 예약이 되었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 정확한 날짜가 아닌 ‘이틀 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날짜 계산이 잘못될 수도 있다.
여권을 잊어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여행 중에 여권은 생명줄과도 같다. 복사본을 준비해가지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여권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경우를 대비해 증명사진 두 장 정도는 미리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가까운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하는데, 큰 도시의 경찰서는 이런 과정이 훨씬 복잡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작은 파출소를 선택해서 신고하는 것도 방법이다. 신고 후 그 나라의 수도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면 임시 여권을 만들어준다. 계획했던 여행 날짜만큼 충분히 머물 수 있다.
국세환급금(Tax Refund) 받는 요령은?
여행지에서 특산물을 살때는 ‘Tax Refund’가 표시된 현지 숍에서 사라. 물건을 구매했다고 말하면 영수증을 발급해준다. 말하지 않으면 절대 영수증 발급을 안 해준다. 영수증은 모아놨다가 마지막으로 여행하는 나라 공항에서 제출하면 된다. 대부분은 자국의 영수증만 환급해준다. 다른 나라의 영수증은 ‘Tax Refund’ 바로 옆에 있는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푼돈이라도 아끼면 적지 않은 돈이 된다.
기타 주의해야 할 사항들
여행지에서는 늘 변수가 있다. 이럴 때는 벌어진 상황에 맞춰 계획을 빨리 바꿔야 한다. “끝까지 해볼 테야” 하는 고집이 더 큰 변수를 일으킬 수 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에 한국에 비상연락책을 두어 명 구해놓는다. 현지에서 일이 생기면 필자의 블로그(www.sinhwada.com)에 댓글을 남겨도 된다. 인터넷의 세상은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되고 가깝고 빠르다.
스위스 중부의 호수 도시, 루체른. 로이스 강에는 14세기의 목조다리 카펠 교가 긴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강변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가옥들이 줄지어 있다. 밤이 되면 호수 물길 따라 흔들리는 야경이 더 멋지다. 스위스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로 소문난 곳. 1897년 여름, 이곳을 찾은 마크 트웨인은 “휴식과 안정을 취하기에 가장 매력적인 곳”이라고 격찬했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루체른 호수의 또 다른 이름은 ‘월광소나타’
루체른(Luzern, 해발 437m)은 취리히와 인터라켄의 중간쯤에 있다. 알프스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루체른의 아름다움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음악가는 물론 빅토르 위고, 괴테, 실러, 바이런 등 문학가들도 즐겨 찾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이 월광소나타로 불리게 된 배경에도 루체른이 있다. 베를린 태생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음악평론가인 루트비히 렐스타프(1799~1860)가 베토벤의 제1악장에 대해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 같다고 평했기 때문이다. 루체른이 외부에 알려진 시기는 8세기, 수도원이 세워지면서부터다. 도시 명은 켈트어와 로망스어가 혼합된 로체리나(Lozzerina, 늪의 거주지)에서 유래했다. 13세기에는 장크트 고트하르트 고개(2108m)가 개통되면서 알프스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고, 1332년에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했다. 루체른에서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은 로이스 강을 길게 잇는 목조다리 카펠(Chape, 204m) 교다. 1333년에 축조된 카펠 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목조다리. 지붕이 있는 다리의 천장에는 축조 당시 새겨진 그림과 글씨가 이어진다. 다리 중간의 팔각형 석조물 바서투름(물의 탑)은 등대 겸 방위 탑이었다. 카펠 교 위쪽으로는 1408년에 세워진 슈프로이어 교(Spreuerbrucke)가 있다.
바그너가 결혼한 마테우스 교회와 빈사의 사자상
로이스 강과 루체른 호수를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Altstadt) 골목이다. 곡물 시장, 와인 시장, 뮐렌 시장 등이 있는 그곳에 마테우스(matthaus) 교회가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와 코지마(1837~1930)가 결혼식(1870)을 한 곳이다. 리스트의 딸이었던 코지마는 당시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 겸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다. 바그너와 24세나 나이 차이가 났던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기 전에 이미 바그너의 아이를 낳았다. 어쨌든 둘은 평생을 같이했다. 또 빙하공원으로 가면 ‘빈사의 사자상’(Lo ¨wendenkmal)이 있다. 작은 연못 위 바위 절벽 속에 들어앉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에는 스위스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좁은 국토의 스위스는 농경지가 적은 산악지대인데다 지하자원도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젊은이들은 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외국 부대 용병으로 참가해 돈을 벌어야 했다.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를 지키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있었다. 다른 국가들의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끝까지 남아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죽어간 이유는 단 하나. 후세들에게 용병자리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선대의 처절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자상은 1820년, 덴마크의 조각가 토르 발센이 시작해 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자의 발아래에는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가 조각되어 있다. 마크 트웨인은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했다. 또 두 개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끄는 호프 교회(Hofkirche)가 있다. 735년, 이 도시에 처음 세워진 수도원이다. 17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1645년에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525년,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두 개의 첨탑은 화재 때 피해를 입지 않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1640년에 4950개의 파이프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건물 주변으로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묘석들이 남아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루체른 호수 따라 찾아가는 리기 산
루체른에는 멋진 리기(Rigi, 1797m) 산과 필라투스(Pilatus, 2132m) 산이 있다. 특히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리기 산은 스위스 최대의 관광 휴양지.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타고 비츠나우(Vitznau)까지 1시간 정도 가면 된다. 유람선 여행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스위스 풍치를 보여준다. 호반을 정원 삼은 300~400m의 언덕 위에 터전을 잡은, 아름다운 스위스 가옥들과 전원 풍경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작은 도시, 비츠나우에 도착하면 산악열차 리기 쿨름(Rigi Kulm)이 눈앞에 있다. 리기 쿨름은 1871년 5월 21일에 개통한 유럽 최초의 산악열차. 리기 산 중턱 마을인 리기 칼트바트(Rigi Kaltbad, 1453m)를 거쳐 30분 정도 가면 정상에 이른다. 그곳에는 1861년, 스위스 최초로 산정에 세워진 호텔이 허허벌판에 우뚝 서 있다. 여러 갈래의 산책로(30km)를 따라 여름에는 하이킹을 즐기고 겨울에는 스키나 썰매를 탄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르는 이유는 멋진 풍치를 보기 위함이다. 미텔란트(Mittelland) 지방의 13개 호수와 켜켜이 이어지는 산들이 파도를 친다. 마치 ‘천국이 여기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산은 리기 칼트바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베기스(Weggis)로 10여 분 내려오면 된다. 435m 고지에 위치한 휴양도시 베기스는 여행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
Travel Tip!
현지 교통:루체른 선착장에서 비츠나우까지 매시간 유람선이 운행된다. 스위스 패스(www.swisstravelsystem.com)가 있으면 무료. 시내는 걸어 다니면 된다.
맛집과 숙박:호수 주변이나 구시가지에 레스토랑이 많다. 강변 옆의 라트하우스 양조장(Rathaus Brauerei)은 하우스 비어를 생산하는 곳으로 블론드 비어가 대표적이다. 또 뮐렌 광장에는 대형 쿱(coop) 마켓이 있다. 숙박은 루체른 시내를 이용하면 된다. 리기 산 중턱에 있는 리기 칼트바트 호텔(www.hotelrigikaltbad.ch)에서는 온천욕이 가능하다.
여행 포인트:필라투스 산을 가려면 알프나하슈타트(Alpnachstad) 역에서 등산 철도를 이용해 필라투스 역(2070m)까지 오르면 된다. 눈 덮인 필라투스 산 풍치가 매우 빼어나다.
문의
루체른 홈페이지:luzern.ch
유람선:lakelucerne.ch
스위스정부관광청:myswitzerland.com/ko
일본의 나카노 교코(中野京子)라는 독문학 및 문화사 강사가 쓴 책이다. 책을 쓸 때 박물관을 따분해하는 남편이 과연 재미있게 읽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패션, 그림에 무감각한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미술이론을 강의하는 이연식 미술사가가 번역했다.
일본에는 남들이 관심을 안 갖는 분야에서 집중 연구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명화만 해도 몇몇 이름난 화가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공부할 것이 엄청나다. 그런데 유럽에 가보면 웬만한 오래된 성이나 고건물에는 사람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서양 역사나 문화사를 모르면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다. 황제였는지 왕비였는지 우리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봐도 잘 모르는 것이다. 알게 되었다 해도 그림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다. 초상화의 경우는 대부분 얼굴 표정을 본다. 그러나 저자는 패션을 봤다. 이 책은 남성 패션에 한정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옷은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특히 남자들에게는 중요했다. 오늘날에는 패션이라고 하면 여성들을 떠올리지만, 20세기 이전에는 남자들의 패션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남성은 각선미를 과시했고, 여성들은 다리를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수컷이 더 화려한 동물도 많다. 공작새, 꿩, 사자 등을 보면 그렇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처형당한 루이 16세가 도망치다가 붙잡혔는데 처음에는 평민복으로 남루하게 갈아입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궁전에서 시중 들던 신하를 불러 확인했을 정도란다. 그 당시 옷은 바로 그 사람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는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그림부터 시작해서 세례자 요한, 다윗, 모차르트, 스위스 용병,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 루이 14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잉글랜드 왕 찰스 1세, 그 외 다른 귀족들과 서민들을 그린 그림과 패션 설명이 나온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프란시스코 고야 등 유명 화가도 있지만, 미술사를 따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화가들도 그렸다. 그래도 미술가들이 인정하는 명화 반열에 속한다.
남자의 패션은 황제급이나 군인들 패션이 화제에 오를 만하다. 황제라면 막강한 권력과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다 했을 것이다. 옷에 들어가는 돈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패션도 권위의 상징이다. 서양에서는 붉은 색을 황제 칼라로 썼다. 군인의 복장에도 권위라는 특별한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남자 패션의 정점이 군복이라는 말은 틀린 말 같지 않다.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인데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실제로는 산길에 익숙한 나귀를 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대하게 보이려고 볼품없는 나귀를 근육질의 잘생긴 말로 바꿔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은 그래서 과장이 많이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시대만 해도 옷을 제대로 격식을 차려서 입으려면 많이 불편했다고 한다. 일단 옷감이 신축성이 없으니 입으면 답답했을 것이고, 지퍼도 없을 때이니 단추나 끈을 사용했을 것이다. 옷 한 번 입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실감이 난다.
귀족들이 즐겨 입었던 모피는 값도 비싸지만 벼룩이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 중고 의상을 내다 파는 시장을 벼룩시장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벼룩을 없애는 약이 딱히 없어서 모피를 입으려면 벼룩에 물리는 괴로움을 참아야 하는 불편함 있었다고 하니 웃음이 난다. 오늘날에는 모피를 포함한 중고 의류를 살 때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되니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글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위원.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한국은 지난 8월 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축구 8강전에서 온두라스에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고도 0-1로 져 2연속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한국은 2012년 런던 대회 3위 결정전에서 숙적 일본을 2-0으로 꺾고 꿈에도 그리던 올림픽 축구 메달을 거머쥐었다. 1948년 런던 대회에 처음 출전한 지 64년 만에 이룬 대업이었다. 이때 기쁨이 워낙 컸기 때문인지 올림픽 2회 연속 조별 리그 통과(8강)라는 쉽지 않은 성적을 올렸지만 적지 않은 축구 팬이 한국의 주전 공격수 손흥민을 비롯한 대표 선수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구 팬들은 행복해 했는데.
8월호에 소개한 김호와 ‘바늘과 실’ 사이인 김정남이 축구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1960~70년대 초반에는 축구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김정남은 평생의 축구 파트너인 김호보다는 약간의 행운이 있었다. 김정남은 1943년생으로 김호보다 한 살 위다. 이 차이로 김정남은 21살 때인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함흥철(GK) 김정석 차태성(이상 FB) 우상권 차경복(이상 HB) 이이우(FW) 등 선배들과 함께 출전하는, 그 무렵 축구 선수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1964년 도쿄 올림픽 성적을 살펴보면 그건 꼭 기회이자 행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한국은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월남(남베트남)을 3-0(서울), 2-2(사이공, 오늘날의 호치민) 합계 5-2로 누르고 도쿄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뒤에 대회를 보이콧하지만 북한은 태국을 7-0(5-0 2-0)이란은 인도를 6-1(3-0 3-1)로 제치고 올림픽 출전권을 차지했다. 개최국 일본은 이탈리아가 불참한 D조에서 1승1패를 기록해 조별 리그를 통과했지만 8강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0-4로 져 탈락했다. 이란은 A조에서 1무 2패를 기록해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이란은 그나마 멕시코와 1-1로 비겨 승점을 1을 건지기라도 했다.
한국은 C조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대패했다. 좀 거칠게 말하면, 묵사발이 된 것이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암흑기였다. 이전 출전 올림픽인 1948년 런던 대회는 자유 참가제로 나선 것이고 8강전에서 스웨덴에 0-12로 크게 졌다. 1회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누른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막내로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던 김정남은 그 대회에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김정남은 “경기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참패한 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축구 인생에서 아프고 부끄러운 대목 가운데 하나지만 이를 계기로 더욱 분발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 9회 메르데카컵 대회에서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과 공동 우승하면서 국가대표 선수들은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되찾게 됐다. 아시아 지역 친선 대회이긴 했지만.
김정남은 스포츠계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서울 토박이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은로초등학교 6학년 때 골목길에서 축구공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무렵 운동선수가 되는 일반적인 과정이다. 축구인인 외삼촌의 지도 덕분에 남들보다 축구를 잘했고 서울 보성중학교에 진학한 뒤 축구 선수 출신인 체육 교사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게 했다. 어머니는 5남 3녀 가운데 장남인 김정남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축구가 재미있어 몰래몰래 공을 찼다. 큰형의 영향으로 쌍둥이 형제인 김강남-김성남이 실력 있는 선수로 활약한 내용은 중·장년 축구 팬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호 편에서 소개했듯이 김정남은 1960~70년대 한국 최고의 최종 수비수였다. 그러나 선수 생활 초기에 김정남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김정남이 다닌 보성고는 축구 실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무렵 서울에서 동북고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전학했지만 이른바 초고교급 선수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을 좀 찬다고 하면 가는 곳이 공격수 또는 미드필더다. 김정남은 경기에 나가기 위해 포지션을 수비수로 바꿨고 이 결정이 요즘 유행하는 표현인 ‘신의 한 수’가 됐다. 김정남이 끝까지 미드필더를 고집했다면 한국 축구대표팀 주전 수비수,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 김정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수비수로 자리를 옮긴 김정남은 한양공고 3학년 때인 1962년 국가대표에 처음 뽑혀 메르데카배컵 대회에 출전했다. 요즘은 종목별로 고교 선수들이 심심찮게 국가대표로 선발되지만 그 무렵 고교생이 태극 마크를 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김정남의 경기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증거다.
김정남은 고려대에 진학해서 미드필더 포지션을 되찾았다. 그러나 국가대표팀에 들어가면 수비수로 위치가 바뀌었고 한 살 밑이지만 평생의 친구가 되는 김호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출전한 1960년대 중반 최고의 대회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이다. 둘에게, 그리고 한국 축구가 땅을 칠 만큼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김정남 김호 외에 이세연(GK) 서윤찬(HB) 이회택 정병탁(이상FW) 등 신세대 팬들도 알 만한 선수들이 이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올림픽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당시 경기 상황을 복기하면 이들이 가슴에 지니고 있는 올림픽 출전 불발의 한(恨)이 어느 정도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1965년 9월 24일 도쿄에서 막을 올린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A조 예선에서 한국은 자유중국을 4-2, 레바논을 2-0, 월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일진일퇴의 숨 막히는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 득실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15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속에 한국은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한국 축구가 이 예선 결과를 두고두고 아쉬워한 이유는 한국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본선에 오른 일본이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동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태국과 함께 멕시코시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출전한 일본은 조별 리그 B조에서 나이지리아를 3-1로 꺾고 브라질과 1-1, 스페인과 0-0으로 비겨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서 프랑스를 3-1로 잡은 일본은 준결승에서 우승국 헝가리에 0-5로 대패했으나 3위 결정전에서 홈그라운드의 멕시코를 2-0으로 누르고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축구 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 득점왕이 중년 이상 축구 팬이라면 잘 알고 있는 가마모토 구니시게다. 공격수 가마모토는 이회택, 수비수 야마구치 요시타다, 가타야마 히로시는 김정남, 김호와 여러 대회에서 마주쳤는데 한국 선수들이 이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경기력을 갖고 있었다. 김정남은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올림픽에도 출전했고 지도자로서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감독이라는 영예를 누렸다.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출전한 월드컵이었기에 축구인 김정남의 긍지는 더욱 컸다. 김정남은 50년 지기 김호와 함께 존경받는 축구계 선배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프랑스 남동부, 론 강과 알프스가 합쳐진 지역을 ‘론 알프스(Rhone-Alpes)’라고 한다.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4807m)이 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접경지대다. 스위스 제네바와 이탈리아 토리노, 밀라노와 가깝다. 이 일원을 사부아(Savoie)라 일컫는데 안시(Annecy)는 오트 사부아(Haute-Savoie) 주의 중심 도시다. ‘안시’는 동화 속에서 꿈을 꾸는 듯한 마을이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첫 방랑길에 오른 16세의 루소와 바랑부인이 만난 골목 프랑스 리옹에서 출발한 열차(ter)가 안시에 다다를 즈음, 종일 내리던 가을비는 서서히 멈추고 알프스 산맥에 걸친 구름은 빠르게 하늘로 퍼지고 있다. 안시 역에서 멈춘 기차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 론 알프스를 기대고 사는 안시는 1860년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좁아진 티우(Thiou) 운하 사잇길에서 장 자크 루소 골목으로 접어든다. 생 피에르 성당(Cathe´drale Saint-Pierre) 옆 작은 마당에는 루소의 흉상이 놓여 있고 이런 문구가 있다. “Jean-Jacques Rousseau rencontrait Ici Madame de Warens(장 자크 루소가 여기에서 바랑 부인을 만났다).”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루소(1712~1778)는 무작정 16세에 고향 스위스 제네바를 떠나 방랑길에 나선다. 그가 처음 도착한 도시가 안시였다. 그날 성당에서 하룻밤을 보낸 루소는 다음 날 운명의 여인 바랑 부인을 만난다. 그가 ‘엄마’라고 부르던 이 부인은 29세로 루소와는 13년 차이가 났다. 루소는 이리저리 방랑하다가 일이 잘 안 풀리면 바랑 부인을 찾아오던 그 관계는 13년간 이어진다. 바랑 부인은 루소의 후견인이자 연인, 스승이었다. 그의 암흑기나 다름 없던 청년기 추억을 남긴 곳이 안시였다.
티우 운하에서 만난 동화 속 올드 타운
루소 거리를 비껴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소로로 접어든다. 티우 강 구 시가지(Viellie ville) 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는 꽃으로 치장한 카페, 레스토랑이 이어진다. 12세기에 지은 중세풍의 건물과 작은 운하가 어우러진 골목은 마치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다. 주황색 석회암으로 지은 건물들 사이로 운하의 물결이 일렁거리면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내 마음까지 넋을 놓아 버린다. 운하 양쪽을 잇는 페리에르(Perriere) 다리 근처에는 12세기 초에 지어진 팔레 드 릴(Palais de L'lsle)이 있다. 안시를 소개하는 엽서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운하 한가운데 건축된 건물은 ‘섬의 궁전’이란 뜻이다. 제네바 공작의 거처였던 이곳은 이후 행정관청, 법원청사, 조폐국 등으로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와 2차 세계대전 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된다. 운하 끝,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헌신회가 보이면서 넓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 깊은 호수에서 안시를 조망하다
둘레가 약 40km인 넓디넓은 안시 호수(Lac d’Annecy) 위 저 멀리 산정의 구름들이 하늘로 향한다. 안시 호수에 알프스 산의 반영이 비친다. 유람선은 정박한 채로 있고, 시뉴 섬(Ile des Cygnes)에도 가을색이 짙어지고 있다. 큰 정원을 끼고 에둘러 난 호숫길에는 프랑스의 의사이며 화학자인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Claude Louis Berthollet, 1748~1822)의 동상이 있다. 그는 안시 근처의 탈루아르 몽맹(Talloires-Montmin) 태생이다. 또 바스(Vasse) 운하의 시작점에는 사랑의 다리(Pont des Amours)가 있다.
마을 언덕 위에는 12~16세기에 지어진 안시 성이 있다. 제네바의 영주들과 느무르 공작들의 거주지였던 이 건물은 1953년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어, 현대미술과 종교미술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인적 없는 골목을 따라 걸어 오르면 안시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다. 그곳에 성모 방문 수녀회(Basilique de la Visitation) 성당이 있다. 작고 조용하며 고풍스러운 안시 가옥의 지붕들을 조망하면서 사르르 상념에 빠져든다. ‘난 지금 그림책에 있는 프랑스 동화마을에 있는 거야’라고 말이다.
Travel Tip!
현지 교통편 인근 도시 리옹에서 열차를 이용하면 2시간 정도 소요 된다. 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안시행 정기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음식과 숙박 관광도시인 만큼 음식들이 맛있다. 퐁듀 등 사부아 지역의 전통 요리(사부아야르드, Savoyarde)가 특색이다. 일요일에는 노천시장이 열린다. 고급 휴양도시여서 명성 있는 국제 호텔은 물론 작은 가족적인 호텔들이 있다.
기타 정보가을에는 안시 이탈리아 영화 축제(10월), 사과와 꿀 페스티벌(11월) 등이 열린다. 겨울에는 알프스 산맥 능선에서 스키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안시의 스키 리조트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소로, 동계스포츠의 메카이도 하다.
오트 사부아주 웹사이트(www.haute-savoie.gouv.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