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0세대 대부분은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먹고살기 힘들던 지난날이 있었다. 청년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 경험을 들려주면 마치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현재의 청년들이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으면서 개개인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어른들이 굶주리며 일할 때 지금의 시니어들은 가사를 도와가며 열심히 공부했고 달려왔다. 책도 부족하고 TV나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시대, 아이들의 정서 함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친구와 싸웠을 때 어떻게 풀어야 할지,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할지, 부모님께 꾸중 들으면 화가 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 때 아이들 옆에는 만화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세상을 알려준 만화에 대한 기억들을 꺼내보자.
최초의 단행본 만화 작가 ‘코주부’ 김용환
코가 뭉뚝하고 키는 작달막하지만 다부진 모습의 ‘코주부’는 김용환 작가의 대표 캐릭터다. 때론 모자를 쓰고 점잖은 어른으로 나와 신문에서 당대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사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코주부’가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 잡지에 연재된 를 통해서였다. 청소년 교양지였던 은 10만 부 가깝게 판매되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잡지였다. 책이 부족했던 시절, 읽을거리가 풍부했던 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곳에 빼어난 이야깃거리인 를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당시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에 연재된 ‘코주부 삼국지’는 1955년 만화책 로 발행되면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김용환의 만화는 세련된 그림, 재미있는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그는 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이미 아동만화를 많이 발표한 작가였다. 최초의 단행본 만화를 발표한 작가도 김용환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발표된 만화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만평이라고 소개하지만, 어린이에게 친숙한 만화책이 처음 나온 것은 해방 후였다. 바로 동화작가 마해송의 작품인 를 김용환이 만화로 각색해 1946년에 발표한 다. 이 작품은 해방 후 아동문화를 만들기 위해 을유문화사에서 만든 아협만화문고 시리즈 중 하나다. 한국 최초의 단행본 만화로 기록되었고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7호로 등록되었다.
김용환은 만화 발표 외에도 만화신문과 만화잡지를 직접 발행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1948년, 최초의 만화신문인 의 기획자, 작가로서 참여했고 도 직접 발행했다. 또 한국전쟁 후인 1956년엔 성인시사만화잡지인 를 통해 시사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물론 각종 신문에도 시사만화를 발표했다. 이렇듯 김용환은 한국 만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방송인 만화가 신동우
가정에 TV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한 만화가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슥슥슥 그림으로 그려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충격적이었다. 바로 신동우 작가였다. 그가 유명 방송인이 된 것은 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1967년 1월 7일 서울 대한극장을 비롯해 많은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만화영화)이 전국을 강타했다. 이 작품의 탄생은 신동우 작품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인데, 이 연재만화를 대본으로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우리나라 최초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든 것이다. 홍길동에 관한 만화는 이전에도 많았고 이후에도 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신동우 작가의 은 홍길동에 대한 이미지를 고착화시킬 정도였다. 이 작품은 허균의 에 대한 가슴 벅찬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홍길동’ 외의 주변 인물인 ‘호피’와 ‘차돌바위’, ‘곱단이’ 등의 캐릭터도 개성 있게 묘사되어 있어 매력적이다.
신동우는 1970년대에 유행했던 잡지의 만화 광고로도 유명하다. 오랫동안 진주햄소시지 제품을 일상 만화로 풀어냈는데,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웹툰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의 미학으로 전쟁의 상흔을 위로한 김종래
휘영청 밝은 달은 금준의 마음을 알듯 구름을 머금고 내려다본다. 나쁜 사또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러 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엄마를 찾아 나선 금준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풍천노숙을 하며 전국을 떠돌다 지쳐 장승에 기대어 엄마를 불러본다. 김종래의 중 한 장면이다. 김종래는 한국전쟁 이후 많은 사람이 파괴된 삶과 가족과의 이별로 고통스러워할 때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감동 만화로 인기를 누린 작가다.
1956년에 발표한 은 한국전쟁 당시 충남 예산의 한 가족사를 다룬 만화다. 주인공 김일, 최도천, 향순이가 전쟁을 겪으면서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되는 내용으로, 전쟁 후유증을 겪던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김종래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특히 1958년 에 연재했던 는 당시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 금준이 전국을 떠돌며 온갖 위기에 맞서 나가는 사이, 두만강 건너로 팔려간 엄마는 모진 수모를 겪으며 아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다. 이렇게 아들과 엄마가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 구조는 독자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버렸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까지 그의 만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2년에 발표된 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피란을 가던 한 가족이 엄마와 헤어져 무일푼으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며 겪는 이야기다. 엄마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영진이네 가족 이야기이지만 전쟁 이후 사람들의 사나운 인심, 영진이 선생님 같은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을 감동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김종래의 만화는 치밀한 구성과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애잔하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했다. 또한 길가의 돌부리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섬세한 필체가 특징이다. 25년간 4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그중 시리즈는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소녀들의 판타지를 보여준 엄희자
1960년대 초반에는 예쁜 공주들이 만화책 속에 등장했다. 이전에도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가 다수 있었지만 엄희자 작가의 등장으로 순정만화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큰 눈 속에 들어가 있는 빛나는 별, 머리를 장식한 예쁜 리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주인공은 순식간에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로 영화나 영미소설의 스토리를 각색한 작품이 많았는데, 현대적인 패션들을 한껏 뽐내며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최고 인기였다.
소설 을 만화로 만든 , 소설 을 각색한 등 서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화려한 패션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만화방에서 빌려온 엄희자의 만화책을 보면 찢긴 페이지가 많았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 주인공의 모습이 소녀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만화 주제는 권선징악이었고 순정만화는 그러한 교훈이 더 강했다. 만화 속에 나오는 악당은 착한 주인공을 질투, 음해하고 모함하지만 결국은 주인공의 선행으로 회개하고 반성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엄희자의 작품에 그려진 아름답고 순수하고 맑은 감성도 이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소년·소녀들의 명랑사회를 보여준 길창덕
1970년대는 ‘꺼벙이’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만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범생이나 천재나 능력자가 많았다.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어린이상이 그러했던 것이다. 비록 아이일지라도 어른들의 몫을 나눠서 해냈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씩 먹고사는 것이 안정이 되던 1970년대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어른의 몫을 나누지 않아도 되었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광고카피가 등장할 정도로 아이들의 철부지 같은 모습이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길창덕의 다. 1970년에 에서 연재를 시작해 으로 옮겨 1977년에 완결된 작품으로 잡지뿐 아니라 단행본으로도 만들어져 1970년대를 풍미했다.
머리의 기계충 자국과 졸린 눈에 약간 모자란 듯하지만 착하고 여린 심성의 꺼벙이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많이 해서 항상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명랑 어린이다.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살다 상경한 여동생 꺼실이가 후에 등장하면서 그 재미는 한층 더 배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 , , 등 그의 작품 속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말썽을 부리고 엉뚱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는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가족들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잘 살자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가족의 희로애락 그려낸 이상무
가난하지만 명랑한 아이인 독고탁은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항상 대문에서 주저한다. 대문을 열면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직 어린아이인 독고탁의 키만큼 달려들기 때문이다. 개는 독고탁이 좋다고 달려들지만 그는 자기 몸집만큼 큰 개에 겁을 먹는다. 무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항상 머리를 굴리며 대문을 들어서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이상무의 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귀여운 모습과는 달리 희귀 성인 ‘독고’와 강한 이름인 ‘탁’이라 불리는 이 아이는 6남매의 막내로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의 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서 슬프다. 아버지의 실직과 교통사고, 일찍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권투 유망주였던 형은 돈을 받고 경기를 하게 된다. 독고탁의 가족에게 벌어진 시련은 1970년대 여느 가정에서 겪었을 법한 일들이다. 독고탁은 누나들의 살뜰한 보살핌이 필요할 정도로 어렸지만 집 안의 어두운 분위기를 재빨리 눈치 채는 섬세한 아이였다. 또, 그런 독고탁을 통해 가족 드라마의 희로애락을 만화 속에 진하게 담아낸 작가가 이상무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과 스포츠가 등장한다. 특히 같이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는 끝없는 경쟁을 해야 하는 스포츠 세계의 현실을 만화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자기훈련과 노력들로 보여준다. 좌절의 순간에는 가족들의 응원이 있었고 무한 경쟁이 아닌 사람 간의 교류가 있었다. 이상무 작품의 인물들은 악인이라도 사람 냄새가 난다.
목욕탕에서 웃고 떠드는 한패의 젊은이들의 팔뚝에 전부 입을 벌리고 있는 물고기 잉어의 문신이 있다. 순전히 문신 때문에 이들로부터 조폭의 냄새를 맡는다. 요즘 들어 부쩍 문신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과시용으로 또는 남들과 차별화된 멋으로 한다. 예전에는 문신한 사람을 경찰에서 불신검문 하기도 하고 문신이 지나치면 군대에도 가지 못했는데 요즘은 민주화 바람을 타고 처벌이 많이 완화된 모양인지 많다.
나이든 우리세대는 문신이란 조폭이나 행실이 나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이마에 낙인을 찍기도 하고 노예의 표시로 새기는 불도장도 있었다. 지금도 가축을 구별하기 위해 인식표로 불도장을 찍는다. 우리의 조상들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하여 우리의 몸을 훼손하는 것을 불효로 쳤다. 당연히 금방 자라는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았다. 하물며 몸속에 검은 먹물이나 이물질을 넣는 문신은 생각지도 못할 큰일 날 자해행위였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조폭을 검거하면 조폭 조직을 나타내는 단체 문신을 보여줬다. 이런 학습효과로 목욕탕에서 등짝에 커다란 용무늬 문신을 한 젊은이를 보면 혹 조폭이 아닌가? 겁이 나서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 일반인의 보편적 행태다.
오늘 보니 내가 자주 가는 편의점의 총각도 팔뚝에 꽃과 뱀의 조화를 이룬 문신이 있다. 그동안 문신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여름이 되어 소매 없는 티셔츠를 입으니 확 들어났다. 평소 얌전한줄 알았는데 문신을 보는 순간 총각에 대한 이미지가 신선함에서 불편함으로 변했다. 혹시 이 총각이 조폭? 아니면 비행소년?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기분이 씁쓸하다.
편의점 총각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물어봤다.
“그 문신 얼마나 오래 가는 거야?”
“ 평생 가지요.”
말투와 표정으로 보아 당당하고 문신을 한 것에 자랑스러움이 배어난다. 이런 총각을 상대로 문신이 몸에 해롭고 어쩌고저쩌고 해봐야 소귀에 경 읽기고 꼰대소리만 듣는다.
문신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가 되었음도 잘 안다. 지하철 에서 가끔 보는 광경이지만 탤런트처럼 아주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의 팔뚝에 꽃무늬 문신은 복점처럼 귀엽고 깜직하다. 스포츠 선수가 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기위한 문신은 팬 서비스의 일종으로 보기 좋다. 시대가 변했는데 미용의 한 방법으로 하는 가벼운 문신까지 나쁘다고 말하거나 이를 탓하려는 마음은 없다. 문신의 부작용으로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도 감수하고 스스로 하겠다는 사람을 굳이 말릴 생각도 없다.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처럼 색조에 변화를 주면서 사람을 돋보이는 지워지는 문신은 애교로 봐주고 싶다. 하지만 문신이 흉악하고 저질스러워 바라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이나 위압감을 준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젊은 한때 우쭐하는 만용으로 문신을 한 사람이 나중에 후회하고 돈을 들여 다시 지우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문신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할 때가 있다. 대학입학 때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걸”, 대학졸업을 할 때는 “스펙 좀 쌓아둘걸”, 결혼을 할 때는 “돈 좀 모아둘걸”, 직장을 다닐 때는 “좀 더 성공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3년에 출간된 의 저자 브로니 웨어는 10여 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던 중 문득 자신의 삶이 너무 단조롭고 무의미하다고 느껴 모든 생활을 접고 호주에서 호스피스 간병인으로 생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수많은 이가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는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는 그 경험으로 쓴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 5가지는 ① “내 뜻대로 살걸” ② “일 좀 덜 할걸” ③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걸” ④ “내 감정에 좀 더 충실할걸” ⑤ “도전하며 살걸”이다. 5070세대도 이런 후회를 해본 적 있을 것이다.
5070세대가 젊었을 때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이 있을까? 일에 치여 야근이 일상이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다 커버렸고, 아내와도 너무 멀어진 것 같다. 현역에 있을 때는 나름 네트워크가 탄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은퇴하고 나니 연락은커녕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도 많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서운함을 감출 수는 없다. 과거 직장생활할 때 눈치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속병만 키우던 시간들, 하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이 살아온 세대가 지금의 5070세대인 듯싶어 씁쓸하다.
지금까지 후회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달라지면 된다. 5070세대가 앞으로의 삶을 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돈·연금·봉사·기부 등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대상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가족관계 측면에서 가치 있는 노후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한 시간을 충전하라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1945~2013) 선생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25년간 월간 에 자전적 수필 ‘가족’을 연재했다. 가족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은 사후에 로 발간되었다. 그가 부인과 나눈 마지막 말은 “사랑해요”, “여보, 나도 사랑해”였다고 한다. 황혼이혼과 졸혼이 회자되는 세상이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최인호 선생이 세상에 던지고 간 마지막 선물이다.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글자를 딴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소홀하기 쉬운 ‘가족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달 고등학교 선후배 모임에 참석했을 때 퇴직한 한 선배가 해준 이야기다. 그동안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선배는 퇴직한 지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해 뜨기 전 눈뜨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해 뜨면 눈뜨고, 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됐다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고 격려하며 지원하던 아내도 이제는 은근히 불편해하는 눈치 같아서 걱정이란다. 선배가 조심스레 아내에게 “여보! 우리 여행이나 같이 다닐까?” 하자, 동네 스포츠센터 언니, 동생들과 함께 여행 가기로 했으니 혼자 가란다며 푸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퇴직 전에는 늘 가족과 함께 여행 가자고 하던 아내가 이제는 자기보다 더 바쁜 사람이 되었다며 걱정한다. TV나 신문에서 퇴직 후에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아내와 취미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 무시하고 지나친 게 지금의 서먹함으로 이어진 것 아닌지 후회가 된다고 했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5070세대가 배우자와 나누는 대화시간은 하루 1시간 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50대의 70%, 60대의 60%, 70대의 50%가 그 정도밖에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공무원 인생이모작 교육에서 만난 어느 수강생의 이야기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말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학원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이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아들이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졌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불러볼까 하다가 나올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하지만 자신이 거실에 있는 동안 나오지 않아 포기했단다. 부모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녀들과 서먹해진 걸까? 자녀교육을 시킬 때 무관심이 최고라는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으로 그동안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 건 아닌지, 흘러간 시간이 너무 아쉽다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5070세대는 특히 은퇴한 뒤에 배우자는 물론 자녀와의 관계에서 뜻밖의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가족들에게 휘둘리거나 조급해하면 가족 파탄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김치가 맛있어지려면 오랜 시간 익어야 하는 것처럼, 가족관계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숙고하다 보면 이 기다림의 시간도 잘 여물어갈 것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 늘리자
건강검진 후 “검진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앞으로 살 날이 9개월 정도 남으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당황스럽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것이다.
몇 년 전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라는 카피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광고가 있었다. ‘가족시간계산기’로 앞으로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주는 내용이었다.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자신의 나이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 잠자는 시간, TV 보는 시간, 스마트폰 보는 시간, 친구 만나는 시간, 혼자 보내는 시간 등을 빼보니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나왔다. 결과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9개월! 참고로 필자의 경우는 약 11개월이었다.
‘가족시간계산기’는 누구나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참고1]의 ②번 기대여명은 통계청 홈페이지를 방문해 연령별 기대여명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귀찮다면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인 82세에서 자신의 나이를 빼고 계산하면 된다. ‘가족시간계산기’를 작성하다 보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 점검해볼 수 있다.
가치소비를 통해 가족관계 강화해보자
‘가족시간계산’을 통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어떤 배우자, 부모가 될 것인지 액션플랜(action plan)을 작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야말로 소통과 공감의 시간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 ‘배우자와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데이트하기’, ‘배우자와 마주앉아 한 시간 이상 대화하기’, ‘배우자 또는 자녀와 함께 여행하기‘ 등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해본다.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와 삶을 위한 징검다리를 하나씩 옮겨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몇십 년을 같이 살아왔어도 배우자와 자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왔다면 반성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가치 있는 소비와 실천으로 꽉 막힌 대화의 문을 열어보자. 처음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되더라도 인내심과 배려심을 갖고 접근하면 봄눈 녹듯 그동안의 소통 단절은 스르르 사라질 것이다. 필자도 당장 실천하겠다.
최근의 여행 트렌드는 친구나 연인과의 여행보다는 가족과 함께 떠나는 테마 여행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여행의 보편화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보인다. 여행이 일상이 된 현재, 보다 일상적인 이벤트로서 가족과 함께하는 모습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인 류시호씨는 며느리, 사위, 손주 등 온 가족과 자주 여행을 떠난다. 이번 5월에 떠나는 여행지 그곳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류시호 시인ㆍ수필가
얼마 전, 가족 9명을 데리고 보라카이로 여행을 떠났다. 큰아들 부부와 작은아들 부부가 직장을 다니며 고생하기에 손주들과 시원한 바다에서 여유롭게 쉬도록 우리 부부가 경비를 마련했다. 여행은 어디를 가든 즐겁다. 준비할 때부터 기분이 좋다. 우리 가족은 그동안 강원도 양양의 바닷가에서, 강원도 영월에서, 그리고 충북 수안보에서 숙박을 하면서 여러 번 가족여행을 했기에 서로가 여행 분위기를 잘 느낀다.
이번 가족여행은 해외로는 처음 가는 것이라 어린 손주 3명이 걱정스러웠다. 이동 중 간식을 먹이는 문제도 그랬고 장거리 비행 중 아프지나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염려가 됐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인천공항까지 가는 길에도, 비행기에 탑승할 때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게이트 번호가 100번이 넘는 곳이라 탑승구로 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 열차를 타고 가서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탑승시간에 임박해서 겨우 게이트에 도착했다. 그동안 여러 번 해외여행을 했지만, 공항 내에서 지하철로 이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륙할 때 큰 손주는 좋아서 웃고 작은 손주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장거리 비행기를 타다 보니 둘째 손주가 기내 공기가 안 좋아서인지 좁은 곳이 갑갑해서인지, 며느리 가슴에 음식물을 토하기도 했다. 막내 손주는 인천공항 비행기가 이륙할 때, 그리고 보라카이 섬과 가까운 칼리보 공항으로 비행기가 착륙할 때 울어댔다. 기압 차이로 귀에 통증이 왔던 것이다. 막내 손주가 어디가 불편한 건지 표현을 잘 못해 며느리가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 외 시간은 비행기 안에서도 잘 놀아 다행이었다.
작년과 재작년에 필자가 방문한 베트남과 미얀마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한국인들을 우대해줬는데 이곳은 세관 심사가 너무 까다로웠다. 보라카이 휴양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 하루에 이곳을 찾는 여행객이 2만 명이나 된다 하니 작은 섬의 인기가 대단하다. 이 섬의 치안은 안전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10년 전 필리핀을 여행할 때도 총기사고가 있었다. 최근에는 불법으로 유통되는 총기가 100만 정이나 된다는 뉴스도 있었다. 심지어 총기 규제가 허술하니 ‘필리핀에서는 택시를 타지 말라’는 경고도 있다.
칼리보 공항에 내리니 밤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인 가이드가 아닌 필리핀 가이드가 서 있었다. 필리핀 가이드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한국인을 바꿔줬다. 그분이 하는 말이 오늘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와서 안내하느라 자신이 두 시간 거리인 보라카이에 있으니 현지 가이드와 같이 오라고 한다. 공항에서 낯선 필리핀 사람이 우리 가족들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실망도 했는데 어두운 밤에 그 외국인을 따라 목적지인 보라카이로 가려니 걱정도 됐다. 그러나 가는 동안 필리핀 가이드와 대화를 한 뒤 불안감은 조금 가셨다.
얼마 후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가는 부두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배를 타니 한국 여행객들이 많았다. 그제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섬에 도착하니 보라카이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자전거 택시 베디카부와 오토바이를 개조해 좌석을 몇 개 만든 3륜 오토바이 트라이시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타고 우리 가족은 호텔로 이동을 했다. 10여 년 전, 마닐라를 방문했을 때는 미군이 사용하던 군용 지프를 개조한 작은 버스 지프니가 대중교통 역할을 했다.
우리 가족이 예약한 호텔은 이 지역에서 꽤 유명한 호텔로 시설이 아주 좋았다. 다음 날 호텔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국인 모델이 촬영을 하고 있어 관계자에게 문의하니 인기 있는 호텔이라 한국에 선전하려고 찍는다고 했다. 그만큼 괜찮은 호텔이라는 의미라서 기분이 좋았다.
보라카이는 세계 3대 화이트비치라는 소문에 세계 여러 나라의 자유여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보아하니 한국인들도 많이 온 것 같았다. 숙소인 ‘파라다이스 가든’에는 넓은 부지에 야자수를 비롯한 다양한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조용한 휴식과 레저 스포츠를 즐기기에도 적합해 보이는 이곳은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상쾌한 물줄기를 내뿜는 인공폭포가 마련된 옥외 수영장이 인기였다. 전체적으로 안락한 분위기에 우수한 시설로 불편이 없었고 도보로 5분 거리에 화이트비치가 있어 참 편리했다.
호텔에서 주는 아침은 열대식물이 있는 정원에서 가족 9명이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먹었다. 아름다운 섬 보라카이의 멋진 정원에서 식사를 하니, 대기업에서 스트레스받으며 일하는 큰아들 부부, 부부 공무원으로서 민원인들에게 시달리며 일하는 작은아들 부부가 기분이 좋은지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손주들도 신이 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파트에 사는 손주들에게 늘 했던 “조심하라”는 말을 안 해서 필자도 즐거웠다.
옥외 풀장에서는 가족 모두가 물놀이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우리 부부가 손주들과 놀아주니 아들과 며느리들이 오랜만에 해방된 기분이라며 이구동성이다. 점심은 보라카이 다운타운 디몰(D-mall)에서 먹기로 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아서인지 멕시코식, 일식, 그리스식, 스페인식, 이탈리아식, 스위스식, 한식 등 여러 나라 음식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필리핀 음식점에서 닭고기와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을 주문했다. 공장에서 만들었는지 종이에 싼 밥도 나왔다. 손주들과 며느리들이 맛있게 먹어주니 기분이 좋았다. 후식은 자리를 옮겨 필리핀 특산물인 망고로 만든 망고쉐이크를 주문했다. 가족들 모두가 좋아했다. 길을 걷다가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젤라토를 사 먹기도 했다. 그런데 큰손주가 망고쉐이크가 맛있다고 또 사달라고 하니, 둘째 손주도 덩달아 자기도 사달라고 해서 할머니가 지갑을 분주히 열고 닫아야 했다. 가족들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사는 맛이 났다.
다음 날, 바다에서 물놀이도 하고 밀가루 같은 모래로 손주들과 두꺼비집도 지으며 놀았다. 큰손주는 신이 나서 아예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어서 필리핀 전통 선박으로 엔진 없이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돛으로만 이동하는 세일링 보트를 탔다. 그물망에 앉아 바람을 느끼며 보라카이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즐겼고, 가족 모두가 흥겨워하니 쪽빛 바다, 흰 파도, 그리고 멋진 모래사장이 있는 이곳으로 여행을 잘 온 것 같다.
저녁에는 가족 모두가 방에 모여 맥주와 위스키,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손주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 특히 손주들이 이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니며 즐거워하니 아들과 며느리들도 만족스러운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동안 국내 여행을 자주 함께하며 가족 간 사랑을 나눴던 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부모와 형제는 수족 같고 처자식은 의복과 같다고 했다. 어른이든 아이이든 사랑을 받아야 삶의 활력이 생긴다. 사랑은 살아가는 이유가 될 만큼 아름다운 감정이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어깨 위에 올려놓은 자식과 손주를 절대로 짐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녀들은 가족이 함께 있을 때는 소중함을 잊고 살지만 공부와 취업, 그리고 결혼 때문에 떨어져 살거나 부모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제야 부모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각자 자기 둥지에서 살다가 인간관계, 심리적인 문제 등이 생겼을 때, 가족을 찾는다. 가족이 가장 편하고 세상 어느 누구보다 든든한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는 늘 따뜻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안아주고, 아버지는 투명한 빛으로 자녀들의 길을 밝혀주기에 부모가 오래 곁에 있다면 최고의 복이다.
이 세상에서 가정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집이 대궐같이 으리으리하고 돈이 많아도 가족 간에 사랑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이라 할 수 없다. 가정의 행복을 맛본 사람은 인생의 햇볕을 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빛으로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울 수 있다. 보라카이로 떠난 가족여행은 행복했고, 무사히 귀국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덕분에 가족들의 아름다운 미소는 오랫동안 우리 가정의 풍경이 되고 에너지가 됐다.
주말에 큰손주가 오면 “할아버지 할머니 보라카이 또 가요. 그리고 망고쉐이크 사주세요” 한다. 그 말에 필자와 아내는 싱긋이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 계획을 짜본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행복이다. 재충전의 기회도 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동안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면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떠나보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는 시간 속에 어쩌면 꽃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웃음꽃이 만발할 것이다.
>>류시호 시인ㆍ수필가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후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 중부매일신문의 오피니언 ‘아침뜨락’에 2008년부터 고정필진으로 있다. 이외 대구일보와 현대문학신문의 필진으로 있으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2016년 문학 창작금 수혜(受惠)를 받았다. 서울특별시장의 ‘서울사랑 이야기 공모전’ 수상 외 6건을 수상했고, 저서로 과 등 4권이 있다.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정년퇴직 이후의 삶,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의욕과 체력이 따라주는 젊은 시절부터 ‘취미의 씨’를 뿌려두는 게 중요하다. 취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으면 “젊었을 때 했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꽤 된다.
그러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는 걸 방해하는 건 의욕도 체력도 아니고 ‘오래 계속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이자 타이밍’이니 남은 삶에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재미’와 ‘보람’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의 ‘애호가’일 것이다.
일본 시니어들의 취미
일본에서는 고령자가 계속할 수 있는 취미로 주식, 등산, 워킹, 낚시, 독서, 자수, 골프, 볼링, 시쓰기, 체스, 데생, 원예, 역사, 장기, 분재, 서예, 유화, 과자만들기, 수묵화, 시계수집, 게이트볼, 꽃꽂이 등을 꼽는다. 크게 몸을 움직이는 취미, 머리를 쓰는 취미, 손동작이 필요한 취미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취미는 운동 부족을 해소해주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 또한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넓혀주고 쓸쓸한 노후의 고독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60대 남녀의 인기 취미 순위
350개 이상의 취미를 소개하는 일본의 ‘취미찾기닷컴’이 조사한 인기 순위를 잠깐 살펴보자. 먼저 60대 남성은 혼자 하는 여행, 사이클링, 오토바이, 재택근무, 사진, 전자공작(PIC), 절과 신사 순례, 주식, 워킹 순으로 조사됐다. 60대 여성의 경우는 혼자 하는 여행, 재택근무, 온천 순례, 절과 신사 순례, 워킹, 자수, 양궁, 등산, 심리학 순으로 인기가 있었다. 참고로 50대 남성의 취미로 사격, 50대 여성의 취미로 소설쓰기, 기타, 퍼즐 맞추기 등이 눈에 띄었다.
내 꿈을 찾아라~ 인생은 60부터
일본의 주쿄(中京) TV는 매주 일요일 아침 5시 45분부터 을 방송하고 있다. ‘아라칸’은 Around Kanreki의 줄임말로 칸레키는 우리말로 환갑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은 환갑 전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꿈에 도전해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힌트를 제안하고 있다. 이 방송에서 소개된 이색 취미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2015년 12월 6일 방송에서는 빙상 위의 컬링(curling)이 아닌 날씨와 관계없이 체육관에서 즐길 수 있는 ‘커롤링(curolling)’이 소개됐다. 20여 년 전 나고야에서 시작된 이래 경기 인구 40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스포츠로 체력보다는 두뇌게임이라는 점에서 ‘마루 위의 체스’라고도 불린다.
2016년 1월 10일에는 미술 취미로 ‘어탁(魚拓)’이 소개됐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어탁’은 기존의 수묵(水墨) 중심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등을 바꿔가며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꼭 물고기가 아니어도 되며 모든 사물의 본을 떠서 작품으로 만드는 ‘탁화(拓畵)’라는 장르가 새롭게 소개됐다.
그다음 주인 1월 17일에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차려입고 컨트리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컨트리 댄스가, 3월 13일에는 1960~1970년대에 붐이 일어나 일렉트릭 기타에 빠졌던 세대들이 밴드를 결성해 제2의 청춘을 만끽하는 모습이, 4월 17일에는 실제 동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리얼 양털 퀼트 아트가, 8월 7일에는 다양한 무늬가 특징인 넥타이를 재활용해 가방과 인형 등을 만드는 리폼이 소개됐다. 이 밖에 9월 4일에는 경이로운 종이접기의 세계, 9월 11일에는 걸리버 여행기를 방불케 하는 미니어처의 세계, 10월 9일에는 종이를 오려내 그림을 만드는 ‘키리에(切り絵)’, 10월 23일에는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철도 모형 등이 소개됐다. 2017년에 들어와서는 우쿨렐레와 돌하우스(미니어처 장난감 집), 천사의 소리 핸드벨 음악, 볼펜 그림의 세계 등이 전파를 탔다.
이색(異色) 취미보다는 다양한 취미
인구가 많아지고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면서 취미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이색적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끌던 취미들은 최근 덕후(마니아, 광)들이 등장하며 주류와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다. 그만큼 취미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셈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역시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 개척하는 자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령자들에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치매 예방 차원에서 손가락과 뇌를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주산, 바둑, 장기, 손글씨, 그림, 색칠하기, 민요, 노래방, 꽃꽂이 등을 권한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게 하거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 것도 좋다.
몸 푸는 기분으로 이런 취미는 어떨까?
사단법인 일본 화살불기 레크레이션협회는 폐활량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화살불기를 권한다. 실제로 전국의 화살불기 교실에는 60~70대 회원들이 많은데 90세가 넘은 고령자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수집이 취미인 사람들은 모으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수집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취미활동을 확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도자기 수집을 하는 사람이 도예 교실을 다니며 직접 만들어보거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떨까? 또 인물과 동물, 자연 풍경 등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독거노인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등 자신의 취미와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재능기부 나눔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좀 더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들이 많다. 먼저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취미를 선택해보자.
슬슬 발동을 걸어보자
지난 2014년 5월에 구성된 댄스 그룹 ‘TGK48’은 일본 기후 현 다지미 시의 고령자들이 만든 그룹이다. 그룹명은 일본의 인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다지미, 겐키(건강), 고레샤(고령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를 기치로 내걸고 2016년 8월 60대 42명, 70대 21명, 80대 1명 등 총 64명(남성은 5명)으로 구성된 ‘TGK48’은 힙합도 소화하는 본격 댄스 그룹으로 공공시설을 빌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가량 연습을 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최근 춤을 잘 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행사와 스포츠 대회에 출연,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강사 레슨비 등 연간 100만엔가량의 운영비는 다지미 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고령자의 의료비와 개호비 등의 삭감과 관련해 길게 내다본 다지미 시의 획기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6년 3월 16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TGK48’ 멤버 35명의 체력을 측정한 결과 전 항목에 걸쳐 동세대의 일반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깜빡이는 빛을 보고 도약하는 데 걸리는 ‘전신 반응속도’는 무려 0.3초대로 20대 수준으로 나타났다. 5초간 빠르게 스텝을 밟는 ‘서서 스텝핑’의 평균 횟수도 60대 멤버가 40.1회, 70대 멤버가 37.7회를 기록해 젊은이 못지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이들의 체력을 측정한 기후대학교 교육학부의 가스가 히카루 교수는 “힙합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몸의 움직임을 맞추는 춤으로 신경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눈 녹지 않은 시골길을 굽이굽이 지났다. 길게 늘어진 소나무의 그림자는 쓸쓸하고 차가웠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끼 낀 옛 유적을 찾아가는 기분. 굽이치는 소나무 숲길을 지나 만난 심훈기념관(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97)에는 소설 의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 그리고 작가 심훈이 옛이야기를 나누 듯 서 있다.
, 로 대표되는 심훈(1901~1936)은 한국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문학가로만 말하기에는 다재다능했고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문학인으로 각인돼 있지만 영화인이었고,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일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저항과 계몽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온 지표 같은 인물이었다.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3월 5일 투옥됐다가 8개월 만인 11월 6일 석방된 심훈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중국으로 망명했다. 말이 좋아 망명이지 밀항을 선택해 지인의 집을 떠돌아다니며 생활했다. 1923년 다시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난징과 상하이, 항저우 등에 머물며 견문을 넓히며 수학했다.
영화인, 소설가, 시인으로서의 삶
귀국 후 연극과 영화,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흥미를 가졌던 분야는 영화였다. 1924년 첫 부인 이해영과 이혼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에도 영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25년 조일제가 번안한 소설 이 영화화됐을 때는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로도 도전했으며 192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다음 해에 일본에서 제대로 된 영화 수업을 받고 돌아온 심훈은 영화 원작 집필·각색·감독에 제작까지 도맡았다. 단성사에서 개봉해 큰 성공을 거뒀지만 심훈이 마지막으로 제작한 영화가 됐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해 2년 후 무용수였던 안정옥과 재혼했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이직하지만 사상 문제에 부딪혀 퇴사하고 말았다.
소설에 마지막 힘을 쏟다
영화 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성공적 데뷔를 한 후에는 신문 연재소설에도 관심을 갖고 매진했지만 검열 장벽에 막혀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과 가 연재 도중 중단됐다. 같은 해 저항시 또한 검열로 빛을 보지 못한 채 심훈이 세상을 뜬 후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됐다. 1933년 장편소설 (조선중앙일보), 1934년 장편소설 (조선중앙일보)이 연재됐고 1935년 심훈의 대표작인 장편소설이자 유작인 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됐다. 1936년에는 단편소설 (신동아)를 발표했다.
뜻밖의 관심, 시에 담다
심훈은 저항시인이자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작품세계는 꼭 그렇지 않다. 그가 쓴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랑에 아파하는 마음, 동성애, 스포츠를 다룬 작품도 눈에 띈다. ‘오오, 조선의 자매여’는 1931년 4월 영등포역 기차선로에 뛰어든 홍옥임과 김용주의 이야기를 접하고 쓴 시다. 결핍과 금지, 검열의 시대에 동성애 그리고 자살을 선택했던 여성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그의 유작시인 ‘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호외 뒷면에 쓴 시로 손기정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우승을 접한 감격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1929년에 쓰인 ‘야구’ 또한 흥미롭다. 야구 시즌을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라 그런가 야구장의 함성이, 홈런의 짜릿함이 시에서 느껴진다. 무엇보다 1929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야구를 보고 느끼고 시로 표현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 시를 계기로 심훈의 종손 심천보씨는 심훈 80주기였던 작년 9월 16일 한화 이글스 홈경기 시구에 나선 바 있다.
심훈기념관과 집필 장소인 필경사
심훈기념관 이야기를 하면서 유작 소설인 를 빼놓을 수 없다. 심훈기념관 옆에는 가 집필된 곳으로 알려진 필경사와 심훈의 묘가 나란히 있다. 기념관 일대는 의 실제 배경이 된 곳이다. 소설 속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했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모델은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이다. 당시 심재영은 청년들과 함께 당진 부곡리에서 공동경작회를 조직,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심훈기념관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농우회’ 회원의 실제 주인공들 단체 사진과 개인 사진들이 하나하나 전시돼 있다. 심훈은 1932년 서울에서 가족의 터전인 당진으로 내려와 를 집필하고 난 뒤 1936년 장티푸스로 생을 마감했다.
>>관람 정보
개관시간 10:00~17:00 입장료 무료 문의전화 041-360-6883 휴관일 매주 월요일 주소 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97 ✽자가용 이용 바람
5070 시니어 매거진 는 최근 우리 사회의 중심축을 담당하며 주목받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정의하고, 액티브 시니어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 등을 알아보기 위해 대대적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50대와 60대 329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으며, 이 중 본인 소득이 있고, 자신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응답자를 ‘액티브 시니어’로 정의했다.
여기에 액티브 시니어 중에서 연평균 가구소득이 1억원 이상, 즉 월 소득이 830만원 이상인 액티브 시니어들을 따로 구분했다. 이들을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라고 이름 붙이고 별도의 통계자료를 산출했다. 설문에 참여한 총 403명의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사고방식이나 구매패턴 그리고 여가생활을 즐기는 방법에서 50~60대 전체나 일반 액티브 시니어와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활자 매체 활용에 익숙
이번 전체 조사에서 고소득 시니어층인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가 대조군과 가장 많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났다. 즉 정보를 어떤 태도로 대하며, 어떤 방식으로 접하고 또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관한 조사였다. 만약 성공에 관한 교과서로 불리는 스티븐 코비의 이 국내에서 다시 쓰인다면 이 부분을 참고해야 하지 않을까. 쉽게 예상할 수 있듯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모든 미디어를 접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일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주간지, IPTV, 인터넷 등 모든 분야에서 이용률이 높았다. 심지어 라디오 청취도 적극적이었다. 다만 뒤처진 분야를 꼽자면 바로 TV와 케이블TV였다. 이러한 조사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보편적으로 ‘바보상자’라고 이야기하는 TV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거부감이 있지만, 활자 매체와는 익숙한 세대. 그러면서 첨단 미디어에도 반드시 적응하고 마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성공의 잣대를 돈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해도, 조사결과를 분석해 보면 성공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도 거뜬히 소화
다른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영화 역시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84.8%가 최근 1년간 극장을 이용한 경험이 있는 반면, 50~60대는 56.2%에 그쳤다. 라디오 청취에 대해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49.7%가 응답해 27.4%가 응답한 성인 평균과 차이를 보였다. 인터넷 활용도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가 높았다. 50~60대는 64.0%에 그쳤지만,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88.0%에 달했다. 이 부분은 다른 조사에서도 반영이 됐는데, ‘인터넷은 내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답한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43.9%로 역시 50~60대 평균(23.2%)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인터넷과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활용도 마찬가지. 이들의 SNS 활용은 48.7%로 절반 정도는 SNS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일반 50~60대는 23.2%만이 활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어떤 SNS의 활용도가 높을까? 조사결과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가 가장 좋아하는 SNS로 네이버 밴드(68.1%)가 꼽혔다. 카카오스토리(59.6%), 페이스북(36.9%), 블로그(13.5%), 인스타그램(7.6%)은 그 뒤를 이었다. 네이버 밴드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네이버 밴드의 기반인 폐쇄적 동호회 활동을 선호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내가 아는 지인들로 한정지어 일상을 공유하는 것을 더 편안해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 젊은층이 선호하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의 활용도 눈에 띈다. 이는 해외 기반의 SNS에 거부감이 없고, 인적 관계를 국내에 한정짓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50~60대의 페이스북 이용률은 20.4%, 인스타그램의 이용률은 1.8%에 불과했다.
여가생활도 경제력 따라 차이 커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경제력과 직결되는 여가생활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소위 아직까지는 귀족 스포츠로 분류되는 골프가 대표적.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 중 10명 중 4명은(38.7%) 최근 1년 중 골프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이와 유사한 41.4%가 최근 1년간 골프웨어를 구입했다고 답했다. 연간 평균 라운딩 횟수는 16.49회였다. 또 해외 골프에 대한 경험 역시 15.6%로 적지 않았다. 뮤지컬이나 미술 전시회와 같은 문화생활에서의 차이는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최근 1년간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21.8%가 뮤지컬을 관람한 적이 있다고 답했지만, 전체 50~60대 중에서는 2.9%만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 숫자의 의미를 다시 계산하면 3299명 전체 50~60대 중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를 제외하면 뮤지컬을 경험한 시니어는 단 몇 명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엄청난 차이다. 시내 뮤지컬 극장에서 50~60대 시니어를 만난다면 그는 가구소득 1억 이상의 고소득자라고 단정지어도 거의 틀림이 없다고 간주할 수 있다.
다른 문화 분야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비슷하게 나타난다. 독서량도 차이가 난다.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의 절반 이상(50.9%)이 최근 1년간 도서 구입 경험이 있다고 했지만, 50~60대는 18.2%만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최근 1년 평균 구입 권수 역시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8.9권이라고 했지만, 50~60대는 5.2권에 불과했다. 독서량 역시 차이가 나서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최근 1년간 10.5권을 읽었다고 답했지만, 50~60대는 6.3권을 읽었다고 답했다. 1인당 평균 여행 경비를 묻는 질문에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평균 343만원을 사용한다고 말한 반면, 50~60대 전체는 평균 201만원이라 답해 상대적으로 빠듯한 경비로 해외여행을 하고 있었다.
백화점에선 ‘귀한 손님’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의 소비 성향 역시 남달랐다. 물건을 구입할 때 인터넷의 정보를 많이 참고했고(40.8%), 모르는 정보가 있으면 검색해본다고 했다(52.5%). 또 신문이나 TV에서 본 제품을 검색해본다는 의견(42.3%)도 모든 대조군에 비해 가장 많았다. 즉 물건 구매를 하기 전에 충분히 정보를 확인하고 꼼꼼하게 검토한다는 의미다. 제품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확인하지만 구매는 직접 한다. 장소는 바로 백화점. 최근 3개월 이내 백화점에서의 구매 경험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의 76.2%가 그렇다고 답했다. 50~60대 전체(35.2%)는 물론, 액티브 시니어(37.6%)보다도 두 배 이상 높았다. 월 1회 이상 백화점을 이용한다는 응답 역시 확연하게 높았다(52.9%). 50~60대 전체는 15.7%에 불과했다. 이런 구매 패턴은 곧 실적으로 나타나서, 백화점 주요 고객을 지칭하는 VIP 혹은 MVG에 해당하는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는 20.2%에 달했다. 백화점별, 지점별로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갤러리아 백화점 VIP는 연간 2000만원 이상 구매실적이 있어야 하고, 롯데백화점 MVG의 경우는 1500만원 이상(본점·잠실점 2000만원)이 되어야 한다. 이런 대우는 은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은행 VIP 고객인가를 묻는 질문에 프리미엄 액티브 시니어의 55.7%가 그렇다고 답했고, PB센터는 44.2%가 이용한다고 답했다.
연극 연출가 김정숙(金貞淑·56)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녀를 존경해”, “멋있어”, “사랑해”.
‘김정숙’이란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같이 천사를 만난 경험담(?)을 쏟아내곤 했다.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연극 에서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씨처럼. 만나보자.
예전 같으면 대한늬우스에 나올 만한 국위선양(?)도 하고 돌아왔다. 그럼 한번 소리 소문 좀 내볼까?
김정숙 연출가는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하 모들)의 대표로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스물두 살에 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을 시작해 스물아홉에 극단 모들을 창단했다.
“운명이죠. 고등학교 때 연극을 보고 나서 ‘저 무대에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극단에 들어간 첫날, 연습실 바닥을 붙잡고 ‘아! 이제 도착했다. 여기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어’라고 서원처럼 의식을 치르듯 속으로 말했죠. 제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단 한 번의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연극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연극을 뺀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24시간이 늘 아깝고 모자라다. 그런데도 인터뷰 날 자정 전에 책상에서 일어난 일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뿌듯해한다.
“제가 몸 생각하지 않고 연극 생각만 하니까요. 어쩌다 12시가 넘어버리면 4시까지 잠을 못 자더라고요. 그런 날은 다음 날 스케줄에 무리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진짜 그러지 말자 해요.”
그녀의 또 다른 이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연출가의 분신과도 같은 극단 모들은 창단 이후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연극을 굳이 몰라도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 , , 등이 모들의 대표작. 특히 은 토종 창작 뮤지컬 중 최고라는 호평을 들으며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뮤지컬로 성공적인 삶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브로드웨이 식의 뮤지컬을 꿈꾼 건 아니었어요. 나는 음악의 비중이 크고 내용에 영향을 주는 소리극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나타나서 편리하게 이용했던 것뿐이죠. 그런데 마치 우리가 브로드웨이를 지향해서 가야 할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내가 원했던 소리극의 형태가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이 많이 닫혔어요.”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모들의 창작 뮤지컬을 보기 어렵다. 화려함 대신 소박한 사람 이야기, 고전 속 주변 인물들에 주목하는 연극이 주류를 이룬다.
행복한 연극을 아는 예쁜 사람
모들은 지난 2003년부터 과천시민회관 상주 공연단체로 입주해 있다. 시민극장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고, 모들의 대표 연극인 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프로그램 ‘신나는예술여행’에 선정돼 전국 8개 교도소를 돌며 공연하고 있다.
“저는 대학로나 대극장 공연에 연연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시골학교나 교도소에 가서 평생 연극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행복해요. 얼마나 기쁜지 제 마음에서 사랑의 샘이 퐁퐁퐁 솟는 거 같아요. 진짜로요(웃음). 내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 내 보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최근 2~3년 동안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 연극 보여주기’ 이런 걸 하고 싶어 해요. 공연하는 데 300만원이 들면 출신 동창회에 도움을 청하고, 3만원씩 100명이 내주시면 고향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고요. 화려하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일 말고 진짜 일을 하고 싶어요.”
에든버러를 넘어 케냐까지 한국 연극을 알리다
지난 8월, 김정숙 연출가는 모들 단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이하 에든버러 프린지)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공연예술 축제의 백미인 에든버러축제는 공연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
축제기간이 되면 전 세계에서 7000여 단체, 3만여 명의 공연자와 관객이 몰려와 도시를 가득 메운다. 에든버러 방문은 이번이 다섯 번째. 좋은 공연이건 나쁜 공연이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 김정숙 연출가는 에든버러 프린지를 사랑한다.
“2008년에 처음 에든버러 프린지에 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갔어요. 당시 단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연극을 해왔는데 뭐했지? 내가 명예를 얻었나, 물질을 얻었나? 나는 연극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지? 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세계 연극 속에서 우리를 한번 비춰보자. 놓아보자’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가게 됐어요. 처음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좋아해줬어요. 매진에 객석 점유율 80%를 넘었고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더니 사람들이 티켓 박스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때 ‘아!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확인을 서로 하게 됐죠.”
올해 모들은 어린이극 과 그리고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를 가지고 에든버러를 다시 찾았다. 이번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은 김정숙 연출가의 치밀한(?) 계산으로 진행됐다.
“케냐에서 이 초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술경영지원센터에 항공권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두 곳은 가야 받을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에든버러 프린지와 케냐 공연을 엮은 거죠. 그런데 공연만 가지고 가는 게 아까웠어요. 케냐는 처음이지만 에든버러는 벌써 세 번째였거든요. 그래서 후배가 연출한 과 를 에든버러에서 공연해보자 했습니다. 4월까지 필요한 서류를 내야 했는데 그때 는 정말 시놉시스와 사진 한 장밖에 없었어요.”
에든버러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다. 전쟁이 끝나서 이런 페스티벌도 생겼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 바로 위안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과 시놉시스밖에 없었지만 에든버러 프린지 극장측은 흔쾌히 모들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주었다.
“이전 축제에 참가했을 때 작품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저희가 거리쇼라든지 홍보 면에서 기여를 많이 했어요. 극장에 우리가 바로 그 팀인데 를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줄 수 있냐고 물었죠. 바로 OK 하더군요. 그 한마디로 정말 에든버러에 가게 됐어요.”
딱 시놉시스 한 장이었다. 공연에 관한 정보가 적어 일반인 대상의 홍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관객이 를 찾아왔다.
“가 위안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잖아요. 하와이와 뉴질랜드에서 이 공연을 보러 오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80 노구를 이끌고 2차 세계대전을 실제 겪으신 분들이 오신 거예요. 하와이에서 오신 분은 이곳에서 볼 첫 작품으로 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4월에 공연 예매를 미리 해놨다면서 수첩까지 꺼내 보여줬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정숙 연출가는 다섯 번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참가 중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이 소중했다고 말한다. 모들 단원과 김정숙 연출가는 낮에는 , 저녁에는 를 무대에 올리고, 밤에는 다른 팀의 공연을 보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케냐에서 기립박수 받은
에든버러에서의 한 달 일정을 마치고 케냐 나이로비로 떠났다. NGO의 천국 케냐에는 NGO 활동가와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70년 된 국제 학교 로슬린 아카데미(Rosslyn Academy)가 있다. 이곳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학생이 관객이었는데 이런 공연을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아니었어요. 물론 영어로 공연을 했지만 ‘어떻게 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지?’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한 시점에 쿵, 짝을 맞추는 겁니다.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관객을 케냐에서 만났어요.”
게다가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이 몹시 감동스러웠다.
“교정 한 곳에서 쿠키를 팔고 있었어요. 먼 나라에서 공연 팀이 왔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요. 그런 기획을 어린이들이 했다는 말이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전 세계 아이들이 모여 편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학교였어요. 에든버러에서는 뛰어다니고 정신없었다면 케냐에서는 큰 위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관록이 묻어나는 시니어 배우들 모시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김정숙 연출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연(11.25~26 과천시민회관 소공연장)을 준비 중이고 교정시설 공연도 다녀야 한다. 과천 시민과 함께하는 연극 준비에도 여념이 없다. 시민극장에 시니어 층이 많다는 얘기에 시니어의 연극 참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극장에 60대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요. 배우 중에 저와 어렸을 때 같이 연극하던 선배가 오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두신 분인데 은퇴하고 나서야 돌아오신 거죠. 오디션 때 너무 멋있었어요.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거 같아요. 시니어들은 인생을 다 겪으신 분들이라 어떤 이야기든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무대로 돌아온다면 100% 환영하고 지원할 겁니다. 잘하실 수 있도록 적극 도와드릴 거예요. 내년에 무대에 올릴 작품에는 등장인물과 같은 나이의 배우들을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시간이 흘러 연극 일을 안 하게 되면 무엇을 할 건지 물어봤다. 돌아온 답변이 누룽지를 눌러 파는 누룽지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누룽지 한 컵에 1000원, 한 평짜리 가게를 얻어서 누룽지를 팔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마냥 철없고(?) 청순한 소녀 같다.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들을수록 맛있고 찰지다. 영락없는 이야기꾼. 아직은 우리 연극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극이 뭐냐고 물었다. 거침없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딱 하나인 거 같아요. 어쨌든 작업 안에서 마지막 선택은 항상 사랑이었어요. 일을 하다 보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를 고민하잖아요. 가끔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선택했어요. 연극을 향한 사랑.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랑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사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든버러축제(Edinburgh Festival)란?
에든버러축제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작된 공연 축제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정신을 치유하려고 만들어진 이 축제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와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Edinburgh fringe Festival)로 나뉜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100여 개의 공연을 전 세계에서 엄선하기 때문에 초청되는 것 자체가 영광. 프린지는 1947년 채택되지 못한 공연 팀이 축제가 열리는 주변에서 공연한 것이 지금의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로 정착됐다. 올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비롯해 한국의 14개 공연 팀이 참여했다. 2011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에 극단 목화의 가 최초로 초청됐으며 ‘헤럴드 에인절스’ 상을 수상했다.
김정숙
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
1982년 극단 에저또 입단
1984년 연출 데뷔
1989년 5월 극단 모시는 사람들 창단
주요 수상경력
-뮤지컬
스포츠조선 뮤지컬 희곡부문 대상, 1996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 1996
백상예술상 대상, 작품상, 희곡상. 1996
희곡작가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3
-연극
희곡협회 올해의 희곡작가상, 2003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연극상, 2011
대한민국 클린콘텐츠 국민운동본부 선정
클린콘텐츠상, 2015
폐경 후 5년이 지나면 골밀도가 50%로 감소한다고 한다. 골밀도가 감소하면 골다공증으로 골절 위험이 높다. 30세가 지나면 근육량도 일 년에 1%씩 감소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운동밖에 대책이 없다. 중·장년 여성들에게 권하는 운동으로 체중부하 운동으로는 달리기, 줄넘기가 있고 심폐기능강화 운동으로는 걷기, 수영, 에어로빅이 좋다고 한다. 근력운동으로는 볼 맨드, 덤벨이 좋고 유연성 운동으로는 요가, 필라테스, 요통체조가 좋다고 한다.
그런데 달리기는 걷기운동 단계를 거쳐야 한다. 줄넘기는 제자리에서 하는 운동이라 금방 식상해진다. 수영, 에어로빅 등은 수영장이나 에어로빅을 가르치는 곳에 가서 배워야 한다. 볼, 밴드, 덤벨 등은 헬스클럽에 가서 하는 운동이다. 요가, 필라테스, 요통체조도 마찬가지다. 단체로 배우는 운동은 남들과 어울려야 한다.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연령대가 안 맞아 힘겹거나 지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 걷기운동이다. 요즘은 양재천, 성내천, 탄천, 안양천, 중랑천 등 개울 옆에 산책길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걷기운동을 할 수 있다. 걷기운동하는 사람들은 제법 많다. 그런데 걷기운동도 매번 장소가 똑같으면 흥미가 떨어진다. 다른 곳에서도 해봐야 하는데 혼자 계획을 짜기가 쉽지 않다. 계획을 짰다 해도 실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동호회 회원들이나 지인들과 약속을 정해 지속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좋다.
개울가나 시내 길은 대체적으로 평탄하다. 운동 효과를 높이려면 약간의 높낮이가 있는 둘레길이 좋다. 평탄한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근육과 오르막 또는 내리막을 걸을 때 사용하는 근육은 다르다. 심폐량도 다르다. 그런데 둘레길에서는 중년 여성들이 잘 안 보인다. 부부가 손 잡고 오는 모습은 종종 보이지만, 중년 여성들끼리 가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둘레길은 인적이 드물어 안전상의 문제가 있기는 하다. 어떤 코스는 남자 혼자 가는데도 너무 호젓해서 신경이 쓰인다. 신문이나 뉴스에 종종 오르내리는 멧돼지와 조우할 수도 있다. 이런 길은 여러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게 안전하다.
둘레길 걷기는 좋은 운동이지만,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비바람 불면 가기 싫고 가더라도 고생한다. 혹서기나 혹한기도 그렇다. 실내운동으로 댄스스포츠를 겸하면 좋다. 지루하지 않고 체중부하 및 근력 강화, 심폐지구력까지 골고루 좋은 운동이다.
미술품 구입하기
문체부는 1995년을 ‘미술의 해’로 정하고, 미술 관계 문화 단체를 통해 ‘한 집 한 그림 걸기’ 운동을 전개했다. 국민의 보편적 경제 능력은 향상되었는데 문화의 수준은 거기 못 미쳐서, 우선 여러 장르의 미술품 중 그림을 사다 걸자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다. 그 후 해마다 5월이면 이 행사를 민간화랑 주도로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
당시 국민총생산이 1만 달러를 넘으며 문화의 욕구도 상승되고 있어 중산층 국민들에게 미술품을 소장하고 싶은 동기 부여가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자가용 승용차 구입하기, 레저 스포츠 즐기기와 더불어 비싸기만 한 줄 알았던 미술품도 잘 선택하면 한두 점 소장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가나 화랑들도 거품을 빼고 통상 거래 가격에 30%정도를 할인하여 특수층이 아닌 일반 중산층 소비자를 적극 공략하였다.
미술품 유통은 화랑이 독점하다시피 했으나, 1996년 , 1998년 , 2005년 이 설립되어 미술품 판매에 새 시대를 열어왔다. 이후 , , , , 등의 경매회사가 미술품 판매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화랑을 통해 은밀히(?) 거래되던 미술품들이 도록과 전시를 통해 모두에게 공개되고 가격도 떳떳하게 노출되었다.
경매회사별로 미술품 감정단을 두어 작품의 진위와 적정 가격을 산정하여 미술품 가치의 객관화에 기여하였다. 미술품 가격이란 것이 작가와 화랑 사이에서 내밀하게 형성되었고 같은 작가의 작품도 화랑별, 지역별로 각기 그 편차가 심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전시장이나 화랑에서도 가격을 표시하지 않아 도대체 작품을 팔기는 하는 것인지, 가격은 얼마인지를 몰라 묻기도 겸연쩍어 돌아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경매회사에 회원 가입(연 회비 10만~20만원)하면 연간 경매도록도 받아보고, 인터넷으로 경매 미술품을 검색하여 작가와 가격이 합당하면, 전시 기간에 직접 실물을 확인하고 큐레이터에게 세세히 자문하며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매회사는 온라인으로도 경매를 진행하고 있어 집에 앉아서도 다양하게(회비 납부 안 하는 준회원 가입으로)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다.
경매는 항상 최고가를 입찰한 사람에게 낙찰되며, 실수로 낙찰을 받더라도 취소가 안 되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 낙찰이 되면 수수료로 작품가와 16.5%의 수수료(부가세 포함)를 지불하고 작품을 인수하면 경매 과정은 종료된다.
그러나 초보자에겐 작품을 선택하기가 어렵기만 할 것이다. 우선, 주변의 화랑이나 전시장을 찾아 미술품을 자주 보며 안목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 미술품은 시각예술이므로 긴 시간 바라보다 보면 마음의 감흥이 오고 그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도 생긴다. 그래도 미술품은 금전적 가치가 수반되는 동산(動産)이므로 장르별, 작가별 가격 추이도 잘 살펴보고 수집하길 권한다.
미술품 보관하기
경매에서 낙찰받거나 화랑에서 구입할 때에는 반드시 영수증과 관련 도록(해당 미술품의 도록이 없으면 작가의 다른 도록이나 전시 인쇄물) 그리고 작품보증서를 꼭 받아서 함께 보관한다. 그림의 경우 대부분 유리 액자에 표구되어 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화나 서예 등은 굵게 말아서 신문지로 싸둬도 무난하나 유화나 드로잉 판화 등은 반드시 유리액자에 표구하고 뒷면이 통풍되게 걸어두면 된다.
미술품 팔기
최근 미술품 경매회사들의 소위 블루칩(blue chip) 작가(지명도 있고 수집가들에게 인기 있는)들의 작품 가격은 연평균 23% 이상의 수익률을 가져온다고 분석한 자료도 있다. 영구히 작품을 소장한다면 모르나, 여윳돈으로 한두 점 수집했다가 경매시장이나 화랑을 통해 판매할 때에는 계산을 꼼꼼히 해야 한다. 100만원이 작품가일 때는(낙찰가) 연회비, 수수료 등 부대비용이 37만원 가까이 되므로 그 작품가 137만원과 판매위탁 수수료 11%(부가세 포함)를 더하여 150만원 이상을 받아야만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단기매매는 금해야 한다.
이제는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어, 미술품 시장도 꾸준히 성장할 뿐 아니라 경매회사의 낙찰률도 70%를 상회해 금년 상반기 경매시장에서 960억원이나 유입되었다. 여유자금만 있다면 노후를 대비, 긴 안목의 투자도 가능하다고 본다.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는 작고(作故)작가이고 작품가가 6000만원 이상일 때 발생하게 되는데(세율 20%) 작품 소장자에게 80%의 기본 공제가 허용되어 우려할 바는 아니다. 6000만원에 구입, 1억원에 양도하면 차익 4000만원 중 3200만원이 공제, 800만원의 20%인 160만원만 세금이 발생하므로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사석원(史奭源, 1960~ )화가는 촉망 받는 인기 화가로 여기 소개한 작품 는 삼베 천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고 액자까지 손수 짠 멋진 그림이다. 인사동에서 ‘한 집 한 그림 걸기’ 행사할 때 아주 싸게 구입한 작품이다. 1984년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그는 수집가들이 손꼽는 이 시대 걸출한 화가다.
유년기 포천의 외가에서 지내며, 숱한 동물들(염소, 당나귀, 올빼미 등)과 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깔끔한 외모와 달리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방한 성품과, 두 권의 수상집(隨想集), 두 권의 기행록(紀行錄)을 펴낸 뛰어난 문장력은 만날 때마다 경외심(敬畏心)을 갖게 한다. 대작할 수 없는 나의 주량(酒量)이 야속할 따름이다.
이종구(李鍾九, 1955~ ) 화가는 정부미 쌀 포대에 농민의 실경(實景)을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다. 모교인 중앙대학교에서 후학을 열정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도 이 화가의 작품이다. 위의 그림 는 평소 이 화가의 소재인 농민, 소, 농기구(낫 삽 곡괭이)가 아닌, 북두칠성 아래 한 사발의 물을 그린 깊은 명상의 산물이다. 화랑 주인은 쌀 포대에 그린 시퍼렇게 날이 선 낫 그림을 권유했으나, 망설이다 이 그림을 택했다. 서재에 놓고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심상(心象)이 결곡해지기를 기원한다.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