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집 앞에는 공원이 있었다. 11월의 찬바람에 느티나무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벗어던져야 할 지난날의 안락했던 생활의 옷처럼 그렇게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공원 안에는 낡은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 위에 소주병이 몇 개 던져져 있었다. 낭만을 말하기에는 현실감의 무게가 너무 큰 풍경이었다. 누군가 먹고 버린 소주병이 낙엽 위에서 뒹굴었다. ‘공원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 이 공원의 느티나무와 사귀어 친구가 되어야지. 내가 가는 곳마다 다행히도 나무들이 늘 있었어.’ - '행복한 우동가게' 중에서.
비로소 평범함이 좋다
소설 '행복한 우동가게'의 강순희 작가는 전남 강진에서 평범하고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문학소녀였던 작가가 결혼과 함께 충주 땅에 살면서 안정적이고 평온한 일상은 여전히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오지게 고단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평범치 않은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중학교 때 가출도 해봤어요.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늘 살던 곳이 지루했고, 엄마랑 아버지랑 늘 같이 사는 평범함이 싫었어요. 그러나 보름 만에 돌아왔죠. 쬐끄만한 아이의 머릿속에 평범함이 싫다 해서 달라지는 건 불편함인걸 알았나 봐요. 하하... 이젠 미래에 대한 반전을 기대할 생각도 없고. 비로소 지금의 평범함이 너무 좋아요. 내 인생에 더 이상의 반전이 없길 바라요."
느닷없는 파도에 실리다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애환이 서린 IMF는 강순희 작가의 일상에도 태풍처럼 덮쳐왔다. 그리하여 세상 어려움 모르고 살던 그녀는 어느 날 밀가루 풀풀 날리는 주방에서 더딘 손으로 반죽을 하고 우동을 끓여내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우여곡절로 마주한 세상은 녹록지 않았죠. 남들이 보기에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산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힘이 날 이끌고 온 겁니다. 우동 먹으러 오는 분들, 그리고 글 쓰는 이들의 모임이나 성당의 신부님 말씀을 비롯해서 늘 좋은 말들을 많이 들어요. 듣는 것만이 내 할 일이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나 보고도 말을 좀 해보라고 해요. 뭐 근사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요. 다만 '사는 게 내 힘대로 안되더라, 다만 남아있는 내 인생도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최고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런 말만 하고 돌아왔어요." 해탈한 듯 편안하게 소리 내어 웃는다.
강순희 작가는 소설가의 꿈을 키우던 시절을 보내고 1996년 평화신문 평화문학상과 1997년 문예사조 '이발사는 가위로 가지치기를 한다'로 등단했다. 그 후 소설 '백합 편지' 등 차분히 창작활동을 하던 중 예기치 않은 삶의 풍파에 떠밀려 시작한 우동가게가 또 다른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내 삶이 지극히 소설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다양한 말들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하나하나의 삶 또한 소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안 쓰곤 못 배기는 이상한 우동가게 아줌마는 어느 날인가부터 우동을 끓이다 조금만 짬이 나면 글을 쓰게 되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우동소설을 쓰다
"이전에는 소설을 썼죠. 문학 소설을 썼는데 내 취향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나만의 글을 써요. 문학 장르의 틀에 맞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나만의 우동소설을 씁니다. 정석이나 기본을 배제하지는 않으니 반란은 아니겠죠. 한때 난(蘭)을 그렸어요. 선생님께서 '난이라는 식물의 기본이나 속성을 알고 쳐야지 난이 나오지' 말하셨어요. 그렇게 우동소설을 쓰고 있어요."
문학과 생활의 구분이 없는 나날 속에서 틈틈이 적어둔 우동 가게의 단상이 '행복한 우동가게' 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동가락을 뽑아내며 함께 부대끼고 삶의 애환을 나누던 주방 여인들의 고된 삶의 체취를 순한 눈으로 풀어놓은 두 번째 이야기, 이어서 우동 가게에서 내다보이는 작은 공원의 느티나무와 소통하며 나눈 위안의 시간을 글로 빚은 세 번째 이야기, 이른바 그녀의 우동소설이다.
"우동소설이 언뜻 수필 같지만 소재와 주제가 거의 똑같아요. 조각보처럼 이것저것 옴니버스로 엮어서 책을 만든 것입니다. 이젠 기회가 되면 펴내려고 한 사람을 배경으로 써 놓은 또 다른 장편소설이 있어요. 우동을 끓이면서 소설 쓰는 일은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해서 어려움은 있어요.
제겐 책이 나오고 나면 이어질 책을 또 준비해 두어야 하는 숙제 의식 같은 게 있어요. 요즘도 원고 청탁이 오면 그제야 써보려고 머리를 짜내며 집중하려 하면 진전이 잘 안돼요. 시간에 쫓기며 책임을 완수하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미리 준비해 두는 편이죠. 나만의 고질적인 준비성이나 책임감도 한 몫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습작이 되고 말지도 모르겠지만 숙제를 잘하고 싶은 거죠."
"그러나 써내고 나면 잊어버리려 합니다. 써낸 후엔 독자의 몫이니까요. 전에 책 나오고 출판기념 모임이 있었어요. 진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칫하면 내 자랑이 될 수 있고 책과 내 모습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시간이니까요."
지금은 충주에서 활동하는 시인이나 여류 등단 작가들과 '문향회‘ 활동을 하며 소통을 한다. 연수동 우동가게 옆 느티나무가 만들어낸 시인의 공원에서 시 낭송회도 하고 문향회의 밤을 열기도 한다.
우동집을 향해 손을 내민 소박한 사람들의 악수
작가의 우동가게에 들어서면 놀라운 풍경에 멈칫하게 된다. 가게 내부의 모든 벽에는 덕지덕지 붙어있는 메모들로 도배되어 있다. 우동을 먹고 가는 사람들이 털어놓은 고단한 삶과 넋두리가 빼곡히 적혀있어서 다가가 읽는 맛이 특별하다. 무명 시인의 가슴 저미는 속 깊은 이야기, 아픔과 슬픔 가득한 몇 줄 글의 애잔함, 누군가의 사랑의 언어, 또는 반짝이는 축하의 말이나 행복한 재잘거림들이 줄줄이 겹쳐서 펄럭인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내 이웃들의 이야기다.
"우동을 먹고 메모쪽지를 남기고 가면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어봐요. 사람에 대한 진정성을 봅니다. 이웃 사람이거나 또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 등 다 자기의 말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일필휘지 써낸 글에선 자칫 자신감만 엿보일 수도 있어요. 눈물로 쓴 듯 마음 저린 몇 줄도 있고요. 휘갈겨 썼거나 마음 담아 꼭꼭 눌러 쓴 것이나 그 분들이 한 장씩 써 놓고 간 것이 그 사람의 대표작이 될 수도 있기에 소중합니다. 내게 힘을 주는 이유죠.
우동, 사람, 느티나무, 강 작가의 행복의 쓰리콤보
그래서 책 속에는 시원한 우동국물을 우려내고 우동가락을 뽑아내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시간을 견디며 살았던 날에도 다녀가신 분들이 두고 간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속 깊이 그 진심을 담아 두었다. 마음이 심란할 땐 창밖으로 보이는 시인의 공원에 나가면 느티나무가 그녀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이런 것들이 작가에겐 더없이 충분한 행복의 쓰리콤보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하고 있는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 등 예술은 어쩌면 사치일지 몰라요. 물론 그들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귀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지만요. 그렇지만 누군가를 위한 휴머니즘이라고 또는 약자를 위한 대변이라고 하면 자칫 오류가 될 듯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매체를 통해 굳이 표현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진정한 소설가고 멋진 사람이다 싶어요. 진실을 안고 가잖아요."
가게 안에 붙어있는 작가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나지막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노트북이 열려있었고 몇 권의 책과 필기도구들이 편하게 흩어져 있다. 사람들이 두고 간 이야기들이 그녀의 소설 속으로 저장되고 있는 중일 게다.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품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이전의 우동 가게에서 떨어져 뒷골목으로 옮겨왔어요. 서른아홉에 시작한 첫 가게에서 다시 고요하게 이 골목으로 스며든 게 나이 육십이었어요. 이곳도 생각만큼 고요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조용하게 이 상황을 즐기려 합니다."
어느덧 시니어로서 넓어진 품도 생겼고 여유로움도 생긴 표정이다. 그 얼굴에서 치열함이나 조바심이 엿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내민 우동소설에 저자 사인을 해주며 그녀는 주방을 향해 파전과 막걸리를 청한다.
"내게 힘든 시간이 있었다고 하지만 신은 너무도 평등해요. 나도 편하게 누리며 잘 살던 시절이 있었죠. 어느 날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의 여파로 어쩔 수 없이 한동안 가족들이 해체되고 생계를 위해 우동 가게를 시작한 게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죠. 그러나 젊었으니까 마흔 중반까지는 버틸만 했어요. 생계를 위해서 힘들게 일은 하지만 기운이 있고 젊고 이쁜 때였잖아요. 갱년기가 지나고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며 50이 넘으니까 여자라기보다는 비로소 사람으로 살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더라고요."
밤새 우려낸 깊은 우동국물의 담백함이 배인 그녀의 미소가 환하다. 이젠 그 품으로 예기치 않은 세월이 와락 다가온다 해도 두 팔 벌려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다. 세월이란 게 우리에게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것만이 아니란 걸 강 작가는 말한다.
"이제 60이 넘었어요. 쉰의 아홉수를 지나고 60 초반엔 나이가 나를 위축시키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나이 먹는 게 차츰 나쁘지만은 않아요. 내 나이 63세. 이젠 누군가 객기를 부리고 무슨 말을 해도 잘 받아들여요. 나랑 다르다고 불편해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그렇구나 이해하고 빨리빨리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제는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하하..."
△갬성 충만,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카페 식물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초록의 푸릇푸릇함과 유니크한 의자와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한 옆의 라운지로 나가보자. 바람이 통하는 야외 공간의 자연 속에서 건강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꽃을 피운 선인장과 높은 천정에 닿는 떡갈나무와 함께 편안함에 잠길 수 있는 힐링 포인트다. 커피, 녹차라떼 등의 다양한 음료가 있고 와플이 맛있는 충주의 감성 카페다. *주소:충주시 연수동 1154
-정봉기 아뜰리에
충주는 온천지역으로 알려진 수안보가 아주 가깝다. 충주 사람들은 수안보 온천물에 세수하러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충주에서 조금만 달리면 수안보에 조각가 정봉기 님의 작업실과 갤러리가 있다. 이탈리아 유학 후 수안보 숲 속에 자리 잡은 작가의 안목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입구의 마당에서부터 조소 작품이 가득하다. 뜰에서 바람 쐬며 구경하다가 카페에 들어가면 독특한 내부구조와 조각 작품들로 눈이 호강한다. 인체와 꽃을 오브제로 한 조소 작품들이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다. 2층 테라스 테이블에 앉으면 푸른 숲 속에 잠긴 채 계곡 물소리를 듣는 시간이 된다. *주소: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관동 길 74-1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37년의 삶 동안 극한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며 끝내 자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879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런 고흐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는 궁핍하지만 숭고한 예술혼을 지닌 형에게 금전적,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흐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동생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수만 668통에 이른다. 그중 고흐의 예술적 고뇌와 작품의 비화를 엿볼 수 있는 편지 40여 통이 담긴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기고 엮음, 예담)
◇ 마스터피스에 얽힌 비화
고갱이 사랑했던 고흐의 ‘해바라기’
한 집에서 작업하던 고갱과 심하게 다툰 후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만다. 고갱은 집에 두고 온 자신의 습작 대신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중 하나를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고흐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기 습작을 주며 내 해바라기 그림을 요구하는 건 정말 우습다. 그는 내 해바라기 그림을 두 점이나 가지고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해라”라고 쓴다. 이미 해바라기 그림 두 점이 있고, 심한 다툼 후에도 또 한 점을 달라고 한 것을 보면 고흐의 해바라기를 향한 고갱의 사랑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조카 ‘빈센트’를 위한 ‘꽃 피는 아몬드 나무’
테오는 고흐를 향한 존경의 뜻을 담아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 짓는다. 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고흐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조카가 내 이름을 땄다고 하니 그 아이를 위해 침실에 걸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라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 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뭇가지 그림”이라고 묘사했다. 이 그림이 바로 고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꽃 피는 아몬드 나무’(1890)다.
◇ 고흐의 추천 도서
빈곤한 생활에도 독서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고흐는 “빵을 먹어야 살 수 있듯 책에 대해 열정을 갖고 끊임없이 정신을 고양하고 탐구할 필요를 느낀다”고 말했다. 당시 진지하게 독서에 몰두하며 성경을 비롯해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디킨스 등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1887년 여동생 윌에게 쓰는 편지에 에밀 졸라의 ‘삶의 환희’, ‘목로주점’, 볼테르의 ‘캉디드’, 모파상의 ‘좋은 친구’ 등에 대해 “그들은 우리가 공감하는 삶을 묘사하고 있어 진실을 듣고자 하는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킨다”라며 권유하기도 했다.
◇ 현대에 만나는 고흐의 삶
영화 ‘러빙 빈센트’는 전 세계 107명의 유화 작가들이 참여해 10여 년에 걸쳐 고흐의 작품 130여 점을 재현한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이다. 고흐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모티브로 시얼샤 로넌, 크리스 오다우드, 에이단 터너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고흐의 초상화 속 인물을 연기해 화제를 모았다.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의 조셉 룰랭, ‘아르망 룰랭의 초상’의 아르망, ‘닥터 가셰의 초상’의 가셰 등을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
‘그대, 나의 뮤즈 – 반 고흐 to 마티스’ 전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3월 11일까지 열린다. 반 고흐를 비롯한 르누아르, 카유보트, 클림트, 마티스 5인의 거장이 자신들의 뮤즈를 만났던 순간을 표현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이번 전시에서는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릴 당시 영감 받은 남프랑스의 노란 태양과 따뜻하게 쏟아지던 햇살을 간접 경험하고 ‘별이 빛나는 밤’, ‘자화상’ 등을 미디어아트로 감상할 수 있다.
공자(BC551~BC479)는 ‘논어’ 양화편(陽貨篇) 26장에서 “마흔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산다면, 그 인생은 더 볼 것이 없다(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고 설파한다. 스스로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했으니 마흔 살을 인격이 형성되는 때로 본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도 “태어날 때는 부모가 만든 얼굴이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신이 얼굴을 만드는 것이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모든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다시 ‘논어’ 옹야편(雍也篇)에서 공자는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뒤에야 군자다운 것이다(文質彬彬 然後君子)”라고 쓰고 있다. 사람의 얼굴과 인성을 언급한 예는 얼마든지 더 많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자화상’이나 ‘자소상(自塑像)’ 작업이 제일 힘들다고 말한다. 거울을 보고 스케치하자면, 극사실의 사진처럼 묘사할 수는 있겠으나, 얼굴 내면의 깊은 속내를 표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그렇다. 성인이 되고 한 20여 년 지나오면서 가정적으로 일가를 이루고, 사회생활의 역경을 체험하며 얼굴도 그 과정을 따라 변할 수밖에 없을 터다.
박근자(朴槿子, 1932~) 화가는 영화감독 유현목(兪賢穆, 1925~2009)의 아내로 잘 알려진 여성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화가로 입문하며 유 감독과 결혼. 그러나 자녀가 없어 마음의 빈 공간을 그림 그리기로 채워나갔다.
“현미경 사진을 보면 확대된 자연 속에 이미 추상화가 존재함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인간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고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있어요. 자연은 확대해 볼수록 정교하고 조화가 있지만, 인간이 만든 것은 거칠어지고 부조화가 나타나요.” 추상화의 변이다. 1973년 이래 1979년까지는 “내 자신에 내재 된 ‘속 얼굴’을 캔버스에 형상화하기 위해 고심하였다”고 ‘얼굴’ 전에 쓰고 있다. 얼굴만을 주제로 서너 차례 개인전도 열어 호평을 받았다.
박 화가는 1969~1970년에는 한 일간지의 임시 해외 특파원으로 글·그림 취재차 세계여행을 하며 유려한 문체와 수준 높은 드로잉으로 신문 지면의 격을 높였다. 1977년에는 에세이집 ‘얼굴’을 출간하기도 했다.
“50년대 초반 미술대학 시절부터 ‘얼굴’이란 소품은 하나의 습작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얼굴’이라는 소품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뜻을 지니고 계속 구현되고 있는 변치 않는 유일한 화제(畵題)이다.” 에세이집에 있는 박 화가의 글이다.
[그림1]은 1979년의 전시회 출품작 ‘푸른 눈의 소녀’ 이다. 박근자 화가의 그림은 너무 귀해서 실물을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회 이상의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 규모가 작고 작품들도 적어서 화랑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술품 수집가이면서도 학술적 연구의 궤적이 큰 분에게서 두 점의 드로잉을 입수했다. 마치 큰 보물을 얻은 듯 가슴에 꼭 안고 돌아오는 길이 행복했다.
종이에 수채와 크레용으로 단숨에 그린 ‘얼굴’의 반쪽은 파란 유리 빛에 물들어 있다. 두 눈은 연녹색으로 크기와 각도가 어긋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어 깊은 사색의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슬며시 맑고 투명한 속내가 엿보인다.
신양섭(申養燮, 1942~)은 언필칭 발군의 화가다. 서라벌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1978~1981년 연 4회 국전 특선을 하고 1981년 대통령상을 차지했다. 국전 대통령상은 화가 지망생에게 최고의 영예이며 해외 견학의 기회까지 주어져 견문과 식견을 넓히는 디딤돌이 된다.
신 화가는 50여 년 미술활동을 하면서도 350여 점의 작품만 남겨 과작(寡作)의 작가로 유명하다. 또 다른 별호는 ‘흰색의 화가’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흰색 바탕에 흰색의 질료로 고향의 산천, 오두막, 소, 새와 들 등을 묘사하며 두터운 마티에르로 평면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다.
1989년 ‘하얀 추억’이라는 타이틀의 전시에서 그가 출생해 유년을 보낸 충청도 시골의 소소하고 칙칙한 풍경들을 마음으로 정화해 흰색을 주조로 한 환원의 작품세계를 나타냈다면, 2010년 인사동 노화랑에서 8년 만에 연 초대전에서는 ‘내 안의 풍경’이라는 주제를 통해 흰색을 주조로 하되 캔버스에 면섬유나 종이부조 등을 붙이고 채색도 좀 더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작품세계를 성찰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선 시간과 수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잖아요.” 과작의 변이다.
“신양섭의 작품은 마치 흙벽의 푸근한 질감을 연상케 한 바 있으며 시골의 담 벽이나 부엌의 연기에 그을린 아궁이처럼 정감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마음의 풍경‘은 자기 속에 걸러진 것, 물고기와 사람, 나무와 새, 여인과 교회 등 아무런 맥락도 갖지 않는 사물들이 서로 비집고 자리함으로써 또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범신(汎神)적 차원을 형성하는 것”이라 평론가는 정의했다.
[그림2]는 1989년 ‘하얀 추억’ 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유년의 부친 얼굴이거나, 사십 중반의 작가 자화상일 것이다. 흰 바탕에 두터운 물감을 덧바름으로써 질박한 얼굴을 표현했다. 머리며 이마, 눈, 코, 입 모두 범상치 않다. 입술의 연붉은 채색은 언어로 그 무엇인가를 소통하려는 메시지로 읽힌다. 내면에 관류하는 복잡한 사유가 뒤엉켜 흘러넘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구름을 그릴 수 없듯, 마음속 희로애락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 표정을 그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은 그 마음결의 한 끝이라도 그리고자 애써왔다. 살아오면서 ‘더럽혀지기 이전의 순결한 마음’을 찾을 수 없게 황폐해진 현대인들의 얼굴에서도 한 자락 맑은 빛을 엿보려는 줄기찬 노력이,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정화(淨化)의 경지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노 시인(老詩人)은 우이동 솔밭공원을 거닐며 청여장(靑黎杖, 지팡이)을 한 손에 꼭 부여잡고, 시 한 수를 낭송했다.
시공 속에 있으면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 물방울
너 황홀히 존재하고 있음이여
소멸 직전에 아슬아슬함을 지니고 있건만
거뜬히 너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하나로 꿰뚫린 빛과 그림자
소멸과 생성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번갈아 이어지는
유무상통의 존재의 비의(秘儀)
그것을 투시하는 눈이 있는 한
너의 아름다움은 늘 영롱하고
신선할 수밖에 없다
박희진(朴喜璡, 1931~2015) 시인 댁을 자주 왕래하던 2011년 초봄 최근 습작한 시라며 ‘팔순을 넘긴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 소묘’ 두 장의 습작 노트를 보여준 일이 있는데 위의 시는 ‘물방울 소묘’다.
박 시인은 1990년에 발간한 수상집 ‘투명한 기쁨’의 표지도 김창열(金昌烈, 1929~) 화백의 물방울 그림으로 장식한 바 있다.
“1972년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 살 때, 작업하다 뒤집어놓은 캔버스 위에 튄 물방울, 크고 작은 물방울이 캔버스 뒷면에 뿌려져 햇빛에 반사되는 순간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었어요. 나는 그걸로 그림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으로 평생을 살아왔어요. 가끔 그 물방울이 영혼과 닿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했지요.”
노 화백은 술회하고 있다. 물방울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의 화업 50여 년은 영롱한 물방울 태어남과 스러짐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유년기부터 익혀온 한학과 접목하여 캔버스나 한지에 한자를 쓰고 그 위에 물방울을 얹은 ‘회귀(回歸)’ 시리즈로 작품의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주옥같은 작품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을 제주시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착공, 2016년 9월 개관했다.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물방울 그림’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나 10호 이내의 소품이 아주 귀해서 그 희귀성이 작품가를 올려놨다. 최근 경매에서 1975년에 그린 3호 작품이 무려 470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 작품[사진]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700만 원에 낙찰받았다. 13개의 크고 작은 물방울이 X자로 배열되어 긴장감과 역동성을 주고 있다. 얼룩진 물 자국 위에 맺힌 방울방울에 빛이 부서져 아련한 그림자를 만들고, 가슴 가득 푸르른 영혼이 일렁이게 한다.
형진식(邢鎭植, 1950~) 화백은 일반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나, 예술인들과는 깊은 연고를 맺고 있는 분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후 모교인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1976년부터 2006년 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길러냈다.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즘에 반대해 무심사 미술전람회로 통칭되는 ‘앙데팡당(independent)’ 전에 출품함으로써 정형화된 그룹 활동을 벗어나 자유로운 추상의 세계를 지향했다.
“호흡하는 공간 속에서 자연을 자연답게 인식하는 일, 순수함에 환원되어지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작업이 아닐까, 얼음은 투명하고 맑아야만 얼음이 아닐까. 그것은 마치 불투명한 대상을 세척 정화하는 순수함만이 남기 위한 인식인 것이다. 뭉친 가운데서 흐트러짐, 널려져 있는 가운데서의 일관성, 입체에서의 평면적 접촉, 평면 속에서의 입체적 구조의식, 이러한 것은 서로 묶여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애매한 속성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열려진 상황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체의 지향성만 표상화되는 것이다.”
이 작가는 보여주거나 알려주는 작가가 아니라 제시하는 작가란 생각이 든다. 몇 회의 개인전에서 종이 위에 연필, 크레용 등으로 손 가는 대로 그려 낸 드로잉을 보면, 활기찬 생기(生氣)의 리듬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선 하나하나가 마치 충전(充電)된 것처럼 공(空)을 가로지르며 또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며 그 공을 긋는 행위의 궤적을 흰 종이에 정착시키는 것이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이일(李逸, 1932~1997) 선생이 개인전 머리말에 쓴 글이다.
이 그림[사진]은 13년 전 ‘아름다운 가게 미술품 경매’에서 낙찰받은 작품인데, 같은 크기의 네 작품이 한 세트로 나와 바로 구입했다. 장방형의 캔버스 중앙에 파란 유화 물감을 떨어트리고, 자연스런 반동으로 물감이 튄 상태에서 최소한의 드로잉으로 마무리했다. 마치 만년필에서 푸른 잉크가 흩뿌려진 것처럼 자연스런 무늬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네 작품을 한데 모으거나 종횡(縱橫)으로 늘어놓아도 그 또한 아름답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선생의 마지막 글씨 ‘판전(板殿)’은 기교나 힘을 뺀 아이들의 붓장난 같아서 순진함이 배어나왔다고 하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말년 작품들도 ‘아이들의 손짓 같다’고 한다. 순수로 회귀하려는 마음이 저절로 예술로 승화된 것이리라.
물방울처럼 금방 소멸되어도, 찰나의 순수가 영혼을 빛나게 한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은퇴하면 고생은 끝나고 안락한 행복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인생 100세 시대를 어떻게 하면 더 보람 있게 살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구석에 두고 실현하지 못한 글쓰기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문학소년의 꿈’이었다.
은퇴하자마자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이 관악 기자학교였다. 기사작성의 실전교육을 마친 후 몇 군데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하고 기자가 되었다. 밤새워 글을 쓰면서 블로그 활동도 했다. 세상과 대화하는 또 다른 길이 열렸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수년 동안 몇몇 신문과 블로그에 썼던 글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도 오프라인 기사가 몇 차례 실렸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아내와 아들이 ‘애독자’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가족은 평소 상대방의 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시인으로 활동하는 아내의 말처럼 실력도 문제이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문학도 아들에게도 독후감을 요구했으나 대답하지 않고 눈길을 피했다. 척하면 삼천리. 배워야 한다.
관악문화원 문학반을 찾았다. ‘맛보기 강의 들어보고 수강 신청하라’는 안내가 재미있었다. 아담한 강의실에서 몇십 명이 모여 오순도순 토론도 하며 문학수업이 진행되었다. 10년 넘도록 계속 이어져온 문학창작교실이란다. 매주 화요일 오후 저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강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에 수강생의 창작 시와 수필 낭독, 토론이 끝나면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바로 여기야!’ 무릎을 탁 쳤다. 이후 글쓰기에 코를 박았다.
박수진 지도교수는 저명 시인이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주옥같은 시와 동요가 여러 편 실렸다. 강의 전반에는 지도교수가 품격 높은 작품들에 대한 해설을 진행한다. 지도교수는 왕성한 창작활동과 재능기부를 하면서 매주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 열정적인 강의를 했다. 주입식이 아닌 토론이 곁들인 강의였다. 매번 예정시간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누구 하나 지루해하지 않았다.
강의 때마다 수강생들은 시나 수필을 써와서 강의에 참가한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습작품 첨삭지도가 토론식으로 이루어진다. 작성자가 먼저 낭독하고 참가자들이 자유토론으로 의견을 말한다. 수강생들이 진땀 흘리는 시간이다. 남의 작품을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다가 자기 작품을 발표할 때는 어린아이가 된다.
한 줌의 작품은 이리 찢기고 저리 벗겨진다. 앞과 뒤를 바꾸고 넘어진 가지를 자르고 나면 모양새가 갖춰진 한 편의 작품이 재탄생한다. 작품이 새로 태어나는 눈부신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들은 감동하며 박수를 친다. 살아 있는 문학 공부다.
단기가 아니고 연중 계속 이어지는 수업이 이곳의 특징이다. 마치 학교에 다니는 기분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 문우들을 사귀었다. 화려한 전직의 은퇴자와 문학에 관심 있는 가정주부가 많다. 이분들은 오랜 기간 문학반에서 수강하면서 현재 시인,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도 몇 번씩 한 프로들의 ‘심화 과정’이다. 수업이 끝나면 가끔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환담을 나눈다. 걸쭉한 인생 이야기는 훌륭한 글쓰기 소재가 된다.
관악문화원 문학아카데미 회원의 동인지 출판 준비가 한창이다. 모두가 두툼한 동인지에 작품과 이름을 올릴 것이다. 연말에는 합동으로 시를 낭송하고 수필을 발표한다. 젊은 시절 줄줄이 외었던 시 구절 하나 온전히 기억나지 않지만 글을 쓰면서 그 기억을 되살린다.
우리 에 ‘기사’를 올리고 블로그에는 ‘작품’을 올린다. 신문기사가 감정을 섞지 않는 주지적인 글이라면, 문학은 주정적이다. 두 가지를 동시에 배우면서 쓰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두 분야의 글쓰기는 동전의 양면 같다. 보는 관점만 다를 뿐이다. 양쪽을 어우를 수 있어 즐겁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살아온 삶 ‘70년 체험’ 이야기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손주를 돌보면서 옛 조상들의 삶을 생각한다. 이제 ‘30년‘ 삶에 대해 고민한다.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관악문화원 문학아카데미 동호회 안내
위치 관악문화원 관악산 입구 주차장 바로 위
전화번호 02-885-5975, 878-1931
강의와 토론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반부터 2시간
개설 과정 문학반 외 서예반, 무용반 등 40여 개
수강료 3개월분 6만원, 연중 강의 계속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대학 시절,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신 은사님을 그리워하며 민병삼 소설가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해 5월의 교정은 참 따뜻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청옥색 무명을 펼쳐놓은 것 같은 청명한 하늘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꽃가루처럼 쏟아져 눈이 부셨습니다. 그 5월 어느 날이 저한테는 벅차고 두려운 하루였습니다. 숙명에 묶이는 순간이었고요.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해에 강의실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가 1965년 가을학기였지요. 과묵하신 선생님은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을 만큼 범접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듬해에 마침 학교신문 에서 문학상 공모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학에 뜻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교지에 고작 콩트나 발표했던 게 전부였을 만큼 일천해서 감히 문학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단편소설을 덜컥 내고 말았습니다. 아마 치기였던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이 선정될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그게 입선작이 됐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느닷없이 “민 군, 소설을 써보게” 하고 슬쩍 떠보는 듯한 어조를 흘리셨지요. 저는 그저 선생님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소설을 써보라고!” 하고는 더 보태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갑자기 소설을 쓰라니… 저는 선생님의 제안을 환청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벅찼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지요. 그건 제가 과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습작을 권하셨다는 건 언감생심 낭중지추까지는 아니라도, 저한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지요. 그건 감격을 넘어서 미래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숙명으로 묶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 세대가 1960년대를 질곡에 비유했지만 저한테는 그게 억압된 자유와 희망 없는 민주주의에 묶인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그것이었지요. 민주투사들은 저 같은 부류를 여물이나 처먹는 돼지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빨리 졸업하고 취직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비로소 고백하지만 그때 습작을 하면서도 ‘소설’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써야 소설다운지를 깨닫지 못하고 대구 쓰기만 했지요. 그러다 보면 소설이 될 것으로 믿었고요.
시간은 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소설’은 잠시 접어야 했습니다. 기약 없는 유예였지요. 문학? 소설? 그건 구름이었습니다. 취직이 먼저였으니까요. 선생님은 제자들의 취업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셨지요. 그저 추천장이나 써주고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데리고 직접 회사나 학교로 찾아가는 게 예삿일이 돼버렸습니다.
이때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마침 경남 거제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구한다며, 제 동기 중에서 희망자를 찾아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순간이 제 운명을 또 한 번 바꿔놓았습니다. 그 학교에 제가 갈 것을 자청했습니다. 선생님이 놀라시며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를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굳혔고, 농어촌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시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엷게 번졌습니다. 제가 작심하고 소설에 전념할 것 같아 기특하다는 표정이었지요.
그때가 1967년 2월 하순이었고, 신학기를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부임할 곳이 도서지방이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두어 시간을 가야 했습니다.
서울역에 졸업 동기들과 함께 선생님이 배웅을 나오셨어요. 뜻밖이었습니다. 선생님까지 나오실 것으로는 상상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거제도에 가서 딱 1년만 있으라고 하시면서 담배 한 보루를 손에 쥐어주셨어요. 자식 같은 나이의 제자한테 담배라니…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맸습니다.
사실 저는 기약 없이 떠났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가면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서울역에서 저를 배웅하시던 선생님 얼굴이 어른거려 곧 채찍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습작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단편 한 편씩을 선생님한테 우송하기로 스스로 다짐했지요. 그 약속은 거의 지켜졌습니다. 문제는 원고의 질에 있었습니다. 제가 읽어봐도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플롯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해 오로지 이야기 만드는 일에만 몰두한 탓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반성할 줄을 몰랐습니다. 반성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학지를 통해 등단하려면 2회 추천을 받아야 했지요. 그때 선생님이 월간의 소설 추천위원이셨습니다. 추천위원으로 선생님을 비롯해 김동리, 황순원, 오영수, 안수길 선생 등이 계셨습니다.
어쨌든 습작에 게을리하지 않아 1968년 8월호에서 선생님한테 초회 추천을 받았습니다. 1차 관문을 통과해 절반의 성공을 한 셈이었지요. 그때가 마침 여름방학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남해안으로 여행하는 길에 제가 머물러 있는 ‘장승포’에 들르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도착하시는 시간에 맞춰 부두로 나갔지요. 선생님이 배에서 내리시는 모습을 보고 은사이기 전에 아버지와 해후하는 듯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장승포에서 딱 하룻밤 묵으신 선생님은 이튿날 곧장 남해로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버스에 오르시면서 “계속 써!” 하는 말씀만 남기셨어요. 그 짤막한 두 마디에서 행간을 읽지 못했으면 매우 섭섭했을 뻔했습니다.
저는 그다음 해에 거제도를 떠났지요. 꼭 2년을 있었습니다. 서울에 오기는 했으나 교사 자리가 저를 기다린 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또 이 학교 저 학교로 저를 데리고 다니셔서 모 여고에 채용이 됐습니다. 그때가 1969년 2월이었습니다. 저는 추천완료를 받기 위해서 소설 습작에 매진했습니다. 심지어 숙직을 대신하면서까지 썼으니까요.
소설을 쓰는 일이 중노동일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못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걸 선생님한테 배웠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70년 에 추천이 완료됐지요. 선생님한테 사사한 지 햇수로 4년 만이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작가가 됐습니다. 기쁜 마음에 앞서 두려움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작가로서 홀로 서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이 작고하신 지 4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 그리워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선생님은 저에게 참스승이셨습니다. 중국의 한퇴지(韓退之)는 ‘사설(師說)’에서 ‘옛날의 학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이라 함은 도(道)를 전하고, 업(業)을 주고, 의혹을 푸는 소이(所以)다’라고 했습니다.
만우(晩牛) 박영준(朴榮濬) 선생님.
선생님은 품격이 높고 맑은 풍류사종(風流師宗)이셨습니다. 저에게는 진정한 사부님이셨고요. 제가 등단한 지 올해로 47년이 됐습니다. 아직은 뇌와 손가락이 망가지지 않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민병삼(閔丙三)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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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충남 대전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70년 월간 으로 등단. 소설집 , 등. 장편소설 , , , , , , 등 다수. 한국소설문학상, 동서문학상, 유주현문학상 수상.
“라디오코리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89년 2월 1일, LA의 한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오고 한국 노래가 나왔던 거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한인들을 울렸던 목소리는 지금도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28년 동안, 그가 마이크를 놓았던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저 방송이 좋아 방송쟁이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덧 라디오코리아는 그의 인생이 되어 있었다.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회장(69). 그는 부인할 수 없는 LA의 라디오 스타다.
“죽을 때까지 하자던 장희는 울릉도로 가버리고, 글쎄 나만 이러고 있네요. 하하하.”
올해로 28주년을 맞은 라디오코리아와의 인연을 묻자 최영호 부회장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랬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라디오코리아는 ‘이장희’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희가 홀연히 떠났고 라디오코리아는 위기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후 10년, 라디오코리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동안 광역주파수를 가진 자체 라디오방송국도 마련했고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지역과 하와이까지 지국을 넓혔다. 최근엔 한국의 종편채널 ‘TV조선’과 손잡고 TV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영호 부회장의 공이 적지 않았다.
라디오코리아의 주인도 바뀌고, 건물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는 바뀌지 않았다. ‘부회장’이라는 묵직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스튜디오 안 마이크 앞이다. 28년을 한결같이 들어온 목소리. 이제 사람들은 라디오코리아 하면 ‘최영호’를 떠올린다.
‘라디오코리아’ 너는 내 운명
“참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에요. 미국에 오기 전 장희(가수 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동아방송 이라고. 장희랑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예요. 친구가 일하는 방송국에 가서 재미 삼아 원고도 써주고 음악도 고르며 놀곤 했어요. 그때 김병우 PD도 알게 됐고요. 나중에 세 사람이 모두 미국 LA에서 만난 거예요. 운명이었죠. 우리에게 라디오코리아는.”
1974년, 대학(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을 졸업하고 큰누이가 사는 LA에 와 있던 최 부회장은 김병우 PD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때가 1988년, 무역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최 부회장은 짜릿함을 느꼈다. 곧 이장희까지 합세,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려면 주파수(스테이션)를 사야 하는데 값이 어마어마합니다. 때문에 같은 주파수를 여러 다른 커뮤니티가 시간별로 렌트해서 나눠 쓰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아시안 라디오 Am1300에서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방송을 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김병우 PD가 한국에 레코드판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방송 인력을 뽑았어요. 프로를 원했기 때문에 필기시험, 실기시험 갖출 건 다 갖춰서 했습니다. 다섯 명을 뽑았는데 그들이 라디오코리아 공채 1기입니다. 그중엔 현재 라디오코리아 보도본부장을 맡고 있는 송봉후씨도 있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상당히 좋았어요. 지금도 좋지만…(웃음).”
최 부회장은 1989년 2월 1일 12시를 잊을 수가 없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 송봉후 아나운서의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디오코리아입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의 한인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이 방송이 진짜냐, 내일도 하느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장희가 맡은 음악 프로그램 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시간이면 방송국 앞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다. 그야말로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였다.
잊을 수 없는 그날, 4월 29일
“라디오는 참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들으면서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한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라디오를 들었죠. 봉제공장에서, 미장원에서, 방앗간에서, 운전을 하면서 모두가 라디오를 들었던 겁니다. 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수백 명의 한국인 여직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미국인 감독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힘들었지만 낭만이 있던 시절이죠.”
라디오코리아는 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함께 울고 웃었다.
가장 떠오르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 부회장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1992년 4월 29일의 LA폭동 이야기를 꺼냈다.
“퇴근을 하려는데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싶더라고요. 직원들에게 퇴근하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사우스 센트럴 일대는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폭도들은 북쪽으로 밀고 올라와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 불길이 치솟아도 소방대는 오지 않았고 떼를 지어 가게 물건들을 약탈해가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리쿼스토어인데 폭도들이 쳐들어온다.”
“지금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고 있다.”
“웨스턴 길로는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
최 부회장은 재빨리 특별 생방송을 결정하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폭도들의 위치를 알려주면 상인들은 미리 대비를 했고, 운전자들은 자동차에서 방송을 들으며 안전한 길로 갈 수 있었다.
“상상해보세요. 스마트폰도 GPS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눈앞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건물이 불타는 전시 상황과 같은 곳에서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한인들에게 목숨 줄이었습니다. 경찰이 한인타운을 지켜주지 않자 한인들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죠.
1세들이 이민 와서 피땀으로 일궈낸 모든 것이 초토화될 상황이었습니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는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급한 일이었다. 한인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방송을 했다. 라디오코리아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똘똘 뭉치는 모습에 미국 주류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루는 화이트하우스에서 전화가 왔어요. 백악관 말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하겠다고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현직 대통령이 로컬 언론사를 직접 찾는 일은 처음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비서실장이 직접 한 말입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개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어요.”
야구광, 다저스를 만나다
최영호 부회장은 유명한 야구광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 다저스의 팬이 되었고 특히 ‘다저스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빈 스컬리 캐스터의 중계를 듣는 것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한 이듬해인 1990년, 최 부회장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 피터 오말리를 찾아갔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던진 말은 “라디오 중계 좀 합시다!”였다고.
“한인들이 다저스 중계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었습니다. 야구 중계를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재미있었던 것은 오말리 구단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를 한 거였어요. 당시 메이저리그 중계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렇게 세 가지 언어로만 했는데 한국어가 네 번째가 된 겁니다. 그해 9월 다저스와 신시내티와의 경기 중계를 하러 다저스구장에 갔지요. 그때의 감격이란… 그날 경기 녹음테이프는 뉴욕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 중계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최 부회장의 중계는 재미를 더했다. 경기 상황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뒷이야기 등 미국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긴 그의 중계는 한인 다저스 팬들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했다. 다저스 구단으로서도 대만족이었다.
“다저스 구단 측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팀에 한국 선수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외국 선수를 기용하는 데 꽤 적극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쉬웠죠. 4년 뒤인 1994년, 마침내 박찬호 선수가 LA에 오게 되었죠.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2년 동안 라디오코리아는 전 경기를 중계방송했어요. 당신을 응원하는 한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후의 메이저리거 활약은 모두를 신바람 나게 했어요. 박찬호 선수와 지금 뛰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보고 있으면 저 혼자 느끼는 보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지금도 다저스 경기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야구 중계만이 주는 짜릿함이 있다. 방송 경력 28년에 다저스 경기 중계만 27년, 그는 단연코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며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간혹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힘들게 일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빈 스컬리는 67년간 다저스 중계를 하다가 88세에 은퇴했다고(웃음).”
“인호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영호 부회장은 2013년 작고한 고 최인호 작가의 친동생이다. 세상없는 우애를 나누던 형이자 국민 작가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4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최인호 작가는 유독 LA와 인연이 깊었다. 3남 3녀 중 누이들과 동생인 최 부회장이 197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있었던 까닭에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다 가곤 했다. 참고로 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LA와 데스밸리 여행 중에 구상된 작품이다. 잡지 에 35년간 연재된 자전적 소설 을 비롯해 고인의 작품 곳곳에는 홀어머니와 그 밑에서 어렵게 자란 형제들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작가 아니랄까봐 까칠하고 예민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인호 형과 나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형의 글 쓰는 모습만 떠올라요. 자고 일어나 문틈으로 보면 역시나 글을 쓰고 있었고… 이사할 때마다 형의 습작들이 한 짐이었지만 어머니는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셨습니다.”
형 최인호와 아우 최영호만이 아는 신춘문예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형이 군대를 가면서 자신이 공책에 끄적거려놓은 게 있으니 원고지에 정필해 신문사에 보내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정성껏 써서 신문사에 보냈죠. 그렇게 당선된 작품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예요. 원고지 첫 장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정성을 들여 한자(漢字)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어령씨가 글씨가 너무 유치해서 읽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형과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 같은 형이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최 부회장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었던 ‘거인’이었다는 것을.
“정치, 경제, 문화, 예술계 전체가 애도를 표해왔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과 분향을 하고 흐느끼는 독자들을 보면서 형님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였는지, 한 시대를 품었던 예술가였는지 알게 됐어요. 아, 내 형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더 존경해야 했던 분이었구나 회한이 밀려와 많이도 울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고의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형이 하늘로 간 후로 지금까지 그는 그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라디오코리아 그의 사무실 책상에도 작가 최인호의 주옥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늘 곁에 두는데도 볼 때마다 마음이 철렁한다. 첫 장에는 어김없이 ‘영호에게’로 시작되는 형의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물들이다.
“갈수록 무뎌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갈수록 보고 싶어요. 큰누이를 잃고 많이 울던 나에게 형은 누이를 가슴에 묻으라 했어요. 인호 형도 그렇게 가슴에 묻어야겠죠.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형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그 깊이가 더해져요. 형 없이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또 많이 감사합니다. 형으로 인해, 형의 글들로 인해 깨닫는 것이 많아지니까요.”
지키고 싶은 이름, 방송인 최영호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TV보다는 인터넷을, 라디오보다는 MP3가 더 편한 세대다. 최영호 부회장은 방송은 변하지만 방송을 하는 정신은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라디오코리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로컬 방송의 생명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인 동포들이 라디오코리아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정말 소중한 겁니다. 라디오코리아는 미주 한인의 자본으로 만든 한인언론이에요. 진짜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 방송’인 거죠. 저는 한인 사회가 있는 한 라디오코리아도 존재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이크 앞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방송인이라고 칭한다.
“나는 마이크 앞에 방송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감투도 싫고 명예도 귀찮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 목소리가 변하면 청취자가 싫어할까요?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친구 같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을 위한 좋은 음악방송을 하고 싶어요. 깊은 밤에 함께 음악도 듣고 지난 얘기도 나누고요. 와, 이런 얘기 방송에서 해도 되나 싶은 것도 막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웃음).”
글 한만수 소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충북 영동은 워낙 산골이라서 전국적으로 소문난 난시청 지역이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이며 김천만 가도 몇 개의 라디오 프로가 나오지만 영동은 FM 주파수 하나만 간신히 잡힌다.
그 시절 라든지 라는 심야 방송이 유행했었다. 별도 새도 잠든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는 프로그램은 내게 신세계였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좋았지만 시청자들이 보내는 엽서의 내용이 가슴의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했다. 쿵작쿵작하는 트로트 선율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상하이 트위스트’ 라든지 ‘울리불리 트위스트’, 톰 존스의 ‘킵 온 러닝’ 같은 신나는 노래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청량음료였다.
그 밖에도 비틀스, 롤링스톤스,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목소리는 14세 중학생의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감성의 강물에 뜨겁게 소용돌이쳐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며 ‘하운드 독(Hound dog)’을 불렀다.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막 밀크캐러멜 포장을 뜯고 한 개를 입에 넣었다. 가능한 한 아껴 먹으려고 밀크캐러멜을 천천히 빨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언제 먹었는지 열두 개의 캐러멜을 모두 먹어 버렸다. 그는 다른 가수들처럼 마이크 앞에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요란한 밴드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개다리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는 완전히 충격이었다.
소풍을 가면 기껏해야 남진의 ‘님과 함께’를 함창하면서 손뼉이나 치고 있던 그 시절. 도시학생들처럼 나팔바지를 입고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춰 개다리춤과 트위스트를 추었다. 친구들 앞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되긴 했지만 성격은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광기를 품고 있었다. 나만 광기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은 요즘과 달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다. 부모님에게 상속받을 유산도 없었지만,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던 시대라서 모두들 미래에 대한 광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처음 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백일장에서 ‘운동장’이란 제목으로 산문을 써서 당선된 날 밤이다. 우등상도 아니고 모범상도 아닌 그저 글 잘 써서 받은 상은 집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혼자 밤중에 상장을 쓰다듬으면서 이다음에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은행원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행배지를 양복 재킷 깃에 찬란하게 달고, 잘 마시며 잘 먹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졸병 시절부터 우연찮은 기회로 선임들의 펜팔편지, 혹은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 시작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동기들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연애편지를 대필했다. 일요일에도 동기들은 화장실 뒤에 숨어 과자를 나누어 먹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선임이 사다 준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편지를 썼고, 동기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차려를 받을 때 나는 내무반 페치카 옆에서 편지를 썼다.
어느 날 문득 중학교 2학년 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부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설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이라 할 것도 없다. 연재 형태로 써서 내무반에 돌렸는데 세월이 고래심줄처럼 질길 때여서 나름 인기는 있었다.
전역을 하고 복직을 했지만 작가의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표를 내고 절간에 들어가거나, 어떤 소설가처럼 영등포역 근처 닭장 방을 한 칸 얻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결정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이 36세 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습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원치 않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날 혼자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똑같은 날이 계속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을 하고, 때가 되면 보너스를 타고, 또 한 해가 가고, 결국 나이가 들면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주 싫었다.
고생이 되더라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남은 생을 살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형제가 눈에 걸렸다. 전업주부로 사는 아내의 얼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임지로 전출 인사를 하러 가는 대신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는 갈등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막상 사표를 내니까 오히려 초연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지점장은 형식적인 반려와 함께 사표를 받아들였다. 서운함보다는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느꼈다.
세월은 결코 움켜잡을 수가 없고, 흘러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그때 상사들이 사직서를 반려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은퇴자로 아파트 경비를 서고 있거나,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선글라스 쓴 얼굴에 강아지를 끌고 공원 산책을 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 고등학교 출신의 사직서는 대학을 졸업한 지점장의 눈에는 퇴직금 청구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이 내게 축포를 터트려 준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어려웠던 점은 경제적 곤란이다. 그다음으로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타인의 시간에서 살아왔던 탓에 내가 직접 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음은 어서 빨리 글을 써야 경제적인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매일 집에 있으니까 아침부터 술을 마셔도 되고, 새벽까지 마시고 늦잠을 자도 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결국 1년 만에 서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안달을 하던 시절이다. 책 한 권 없는 내가 글을 쓰겠다고 고향에 내려가니 모두들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어린 시절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던 초등학교 동창들도 모임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입 권유를 한 것은 무려 4년 쯤 뒤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생존해 계시던 아버님의 절망과,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무시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형제들의 눈에는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일 것이다. 무슨 횡령이나, 사고를 쳐서 잘린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단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에게 그 시절에는 왜 나를 그렇게 대했냐고 묻지를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나라도 가족들과 같은 시선으로 못마땅해하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을 것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원고가 완성돼서 출판사에 우송하면 대답이 없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해 보면 “원고는 좋지만 우리 출판사와 색깔이 다르다”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수없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식으로 문학수업도 들어 보지 못한 내가, 간신히 소설 쓰는 것을 배워서 출판사에 제출했으니 채택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천리안’ 이라는 PC통신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강하다. 태블릿 PC도 일찌감치 구입을 했다. 스마트폰의 웹 활용법이라든지, 내 또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액정 태블릿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성격 탓이다.
그 당시도 나는 보기 드물게 16비트 중고 컴퓨터와 ‘도트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 청계천 전자상가에서 산 것으로 워드 기능은 있는데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통신을 하려면 단말기가 있어야한다. 담뱃값이 없어서 100원짜리 환희를 피우고 있는 내게 통신을 할 수 있는 단말기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집으로 왔다. 한국통신에서 ‘하이텔’ 이라는 통신을 개설하면서 농민후계자들에게 단말기를 한 대씩 대여해준다는 것이다.
천리안이며 하이텔 통신은 문학의 아웃사이더였던 내게 밀크캐러멜 같은 것이었다. 내 시야는 PC통신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넓어졌다. 동호회에 가입을 하고, 작품을 평하고, 가끔은 회원들을 영동 산골로 불러 내려서 밤을 새우며 문학을 토론하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했다.
유니텔이라는 통신회사가 생겨나면서 통신업계는 3파전이 됐다. 더불어서 대학생과 전문가들 전용이던 통신 세대는 고등학생부터 일반 직장인들까지 넓어졌다. 통신이 보편화 되면서 유료소설 사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신에서 익명으로 글을 올리던 작가들은 급속하게 유료소설 사이트로 편입이 됐다.
나는 유료사이트에 글을 쓰면서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연재가 끝나면 종이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통신으로 보는 문장과 종이책으로 보는 문장은 여러 부분으로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통신 세대들의 가독률쪽에서 보면 종이책의 문장은 무겁다. 나는 그 점을 재미와 신선한 스토리로 보완 하며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컴퓨터가 ‘286’으로 진화를 하면서 윈도라는 것이 생겼다. 윈도는 과거 텍스트 위주의 통신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들까지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유료소설 사이트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PC통신에 연재를 하던 작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숲에 고요히 잠겨들었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거의 10년간 하루 12시간 이상, 많을 때는 14시간 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키보드를 두들겼다. 통신에 연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난 필력이 있었기에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쓰면 못 썼지.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글을 못 쓴 적은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붙을 무렵 서서히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빵을 살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이아몬드로 연탄집게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라면 적어도 펄 벅의 같은 소설을 써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이 하루가 다르게 크기를 더해갔다.
나는 2002년 5년 정도 기한을 잡고 현대사 반세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갔다. 계획과 다르게 12년 6개월 만에 원고지 2만5000매 분량의 15권짜리 이 완간됐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2015년 1월에 ‘작가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같이 “이제 그만 쓰고 쉬어라, 쉬는 것이 어려우면 몇 년 쉬고 다시 시작하라”는 등 그동안의 여정을 치하했다.
나는 그 다음 날 새벽 6시 20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을 쓰면서 창작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장편소설 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내게 소설을 쓰는 시간은 밀크캐러멜의 맛을 아무도 모르게 음미하는 시간들이다. 내 사직서를 선뜻 받아 준 상사분들에게 땡규!를 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