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재미 중 하나는 명산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을 만나는 일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마음의 걱정을 한 줌 정도는 덜어놓고 올 수도 있고,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수행 중인 승려의 인사를 받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대웅전으로 향할 때 거치는 누각의 그늘 아래 앉아 맞는 산바람도 사찰이 주는 선물이다. 전국 명산마다 유명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곳은 역시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3대 사찰로 손꼽히는 쌍계사, 화엄사, 천은사를 취재를 핑계 삼아 다녀왔다.
자연의 멋 그대로 살린 쌍계사
주변 볼거리가 가장 많은 사찰이다. 섬진강을 따라가다 화개장터가 등장하면 화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볼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아름답다. ‘하동 십리벚꽃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벚꽃이 피는 시기가 아니더라도 늘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길을 걷다 마주하는 강가에 펼쳐진 녹차밭의 광경도 압도적이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쌍계사가 등장한다. 쌍계사는 계곡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거대한 사찰을 만들겠노라며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늘 계곡 물소리가 경내를 불경처럼 맴돈다. 주변에 앉아 한참이나 물속을 바라보며 소위 ‘물멍’이 요즘 유행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압도적인 것은 절 안 곳곳 장식처럼 서 있는 대나무 숲이다. 쌍계사의 창건 전설에 왜 호랑이가 등장하는지 이해될 정도.
쌍계라는 절의 이름이 처음부터 쓰인 것은 아니다. 신라 성덕왕 21년(722) 대비와 삼법 두 스님이 칡꽃이 핀 눈 쌓인 계곡을 찾아 호랑이의 인도로 이 절을 세웠을 때는 옥천사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 신라 헌강왕 때 동명의 다른 사찰과의 혼선을 막기 위해 절 앞에 흐르는 시냇물의 이름을 따 쌍계라는 호를 받았다. 신라의 문인 최치원이 쌍계석문 4자를 써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
경내에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가 버티고 서 있다.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道不遠人, 人無異國)”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마음의 안식을 원할 때 천은사
운전을 좋아한다면 알 만한 길 노고단로 초입에 위치한다. 이 길은 해발 1000m가 넘는 성삼재 휴게소까지 갈 수 있고, 길이 급격한 코너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와인딩을 즐기려는 많은 운전자들이 찾는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워낙 길의 굴곡이 심해 실제 차들의 운행 속도는 매우 느린 편이다.
성삼재에서 굽이치는 도로를 지나 천은사에 도착하면 매우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넓은 천은저수지의 잔잔한 물결과 공원처럼 펼쳐진 절 입구가 인상적이다. 산을 내려오며 격해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을 준다.
천은사로 가려면 감로천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그곳에서 수홍루를 만나게 된다. 다리 위에 정자가 지어진 독특한 형태다. 저수지와 입구에 조성된 공원의 규모를 생각하면 절 자체는 아기자기한 편이다. 거대한 구조물들이 위압감을 주거나 엄숙함을 강요하는 모양새도 아니다. 주변을 지나던 등산객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안정감을 준다.
이 절 역시 통일신라 시대인 흥덕왕 3년(828)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중건할 때 절터 주변에서 나오는 구렁이들을 잡았다가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 뒤로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대표적 천년고찰 화엄사
지리산이 낯선 이라면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이다. 사찰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지리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등산로, 관광지로서의 매력도 충만하다. 특히 연기암까지 올라가는 등산로는 계곡과 숲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당일 등산 코스로 애용된다.
화엄사는 대표적인 천년고찰로 지리산에서 만날 수 있는 사찰 중 가장 큰 절로 손꼽힌다. 특히 중층으로 이뤄진 각황전은 전국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경복궁 근정전에 비교될 정도지만 그보다는 작다. 이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됐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엔 대웅전이 가장 큰 규모로 무게중심을 잡는 것이 보통이지만, 화엄사의 경우 각황전이 대웅전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최근 화엄사에는 새로운 볼거리가 등장했다. 각황전 좌측 길로 오르다 보면 사사자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말 그대로 4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탑이다. 탑을 완전히 해체해 새롭게 복원하는 데 무려 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국보 제35호로 지난 9월 말 관람객에게 공개됐다.
사찰의 규모만큼이나 유물도 많다. 각황전만큼 거대한 바로 앞 석등은 국보 제12호고, 영산회괘불탱과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도 국보로 등록됐다.
‘사적기’에 따르면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緣起)조사가 창건했다고 나온다. 문무왕 때는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절에 보관했다고 한다. 이때 의상대사가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곳이 지금의 각황전이다. 각황전은 조선 중후기인 숙종 때 지어진 건물로, 본래 장육전이 소실되어 복원하면서 숙종이 현판을 ‘각황전’이라 사액했다.
긴긴 산중 살림을 정리하고 충주 시내 복판에 있는 아파트를 정처로 삼은 것도 어쩐지 그답지 않지만, 술을 자못 꺼리는 기색이야말로 이변이라면 이변이다. 마주 앉자마자 술부터 목으로 털어 넣는 게 김성동(75)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객이 들고 간 술병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6, 7년 만에 재회한 참이다. 완연하기론 무자비한 세월이 그를 훑고 지난 뒷자리의 스산함이다. 백조 털처럼 희디흰 머리칼이야 개결한 느낌을 주지만, 눈빛에 실린 기운은 예전과 딴판이다. 억병으로 취하고도 몽롱해지는 일 없이 시퍼렇던 눈빛에 이젠 우수와 피로가 반반씩 얹혀 있다.
김성동은 시대가 낳은 소설가다. 시대를 대표할 지경으로 이름을 드날린 작가이기도 하지만, 질곡의 한 시대가 그를 문학의 바다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친이 살았던 시대의 파랑이 그에게까지 엄습해 평생의 족쇄로 작용했다.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문학이라는 쪽배를 얻어 타지 않았다면 벗어나기 어려웠을 굴레였다.
“나 같은 출신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었겠나? 좀도둑, 부랑아, 또는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나에겐 그나마 재능이라는 게 있어 타락하지 않고 소설가로 살아온 셈이다.”
김성동이 말하는 ‘출신’이란 실로 광기에 찬 시대의 산물이며 천형처럼 가혹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빨갱이’의 자식, 불온한 씨앗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좌익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와중에 처형됐고, 남편의 이념과 이상을 공유했던 어머니 역시 지역의 여성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한 죄목으로 옥살이를 했다. 할아버지와 큰삼촌 역시 좌익 간부였다. 집안이 통째 소용돌이에 뛰어들었으니 이후의 풍비박산과 후유증의 크기와 깊이에 대해선 두말하면 잔소리. 김성동은 철들기 전부터 철창 없는 감옥 같은 세상에 던져졌으며, 철들고 나서는 두려움과 외로움 외에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정서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주와도 같은 붉은 낙인. 삐딱한 시선들. 전망 부재의 미래. 무엇보다 괴로운 건 연좌제의 사슬이었단다.
“연좌제에 묶여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다.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 없었고, 군인이 되더라도 장교가 될 수 없었으며, 사법고시에 붙을 경우에도 임용의 길이 막혀 있었다. 이게 연좌제에 따른 ‘삼불(三不)의 덫’이다. 출세를 꿈꾸기는커녕 당장의 호구지책이 막막했지. 그래 고3 때 출가해 절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절 아니고는 갈 곳이 없었고, 중 아니고는 할 짓이 없었던 거다.”
승려 생활을 하다가 소설가로 등단했지? 장편 ‘만다라’로 문단과 대중을 사로잡았고.
“세상에서 박수를 치더라고. 돈과 명예도 얻었다. 이렇다 할 ‘쯩’을 가지기 힘들었던 나에게 소설가라는 ‘쯩’이 주어진 건 하나의 활로였다. 연좌제가 나를 문학으로 밀어 넣은 셈이다.”
2018년엔 6권짜리 대하소설 ‘국수’(國手)를 출간해 저력을 과시했다. 자그마치 27년간의 집필을 통해 완간한 이 소설로 선생의 존재감이 새삼 부각됐다. ‘국수’를 완간한 감회가 각별했겠다.
“일을 좀 해냈다는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미심쩍긴 하지만 비로소 말년에 소설을 좀 썼다는 기분, 그런 거.”
미심쩍다?
“제대로 된 소설이 아니라는 얘기다. 원래 15권으로 완성을 보려 했으나 미완에 그쳤으니까. 한 시대의 뒤안길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강대하로 펼치고자 한 의도에 미달한 작품이라 만족할 수 없었다. 그보다 아쉬운 건 순수한 조선말을 더 많이 찾아내 문장에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수’를 완독한 평론가가 있을까?”
‘국수’는 조선 말엽의 정치사회적 격변을 민중사적 관점으로 세밀하게 풀어헤친 작품이다. 세월 따라 허공으로 흩어진 전통사회의 토속어들을 푸짐하게 되살려내기도 했다.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이 지독한 집념으로 수집한 조선말을 문장에 대대적으로 도입했는데, 이는 ‘국수’가 가진 정체성의 핵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 때 손에 든 책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사기도 했다.
나는 김성동 소설의 애호가지만 ‘국수’를 다 읽지 못했다. 조선말들의 도도한 행진에 질려서다. 오염되지 않은 순정한 토속어들은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소화하기 어렵더라. 평단의 반응은 어땠나?
“반응? 평론? 그런 거 거의 없었다. 평론은 고사하고 ‘국수’를 완독한 평론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순수한 우리말들 앞에서 다들 그냥 나가떨어진 것 같다.”
진땀을 빼게 하는 작품이 ‘국수’만은 아니다. 김성동이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구도소설 ‘꿈’에서도 조선말을 소낙비처럼 쏟아냈다. 원로작가 서정인은 ‘꿈’에 대해 말하길, ‘이를 악물고 읽었지만 완독에 실패했다’고 했다.
쉽게 읽히면서도 재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아니고선 독자들의 환심을 사기 어려운 게 요즘의 독서 시장이다. 조선말을 과도하게 구사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전혀! 조선말에 관한 나의 관심은 신앙에 가까울 정도다. ‘찔레꽃머리’라는 조선말의 뜻을 아나? ‘모내기철’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조상들이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다.”
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한다.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며 자생적으로 유전한다. 게다가 한글은 어떤 말이든 흡수하는 포용력을 갖고 있지 않나?
“요즘의 우리말은 이미 왜색과 양색에 물들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적어도 시인과 소설가라면 모국어의 원형을 지켜낼 책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나? 순교처럼 치열하게.”
작가라면 다들 개성을 돋우기 위해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글을 쓴다. 한국 작가들의 소설 품질에 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기만의 빛깔을 내는 작가가 드물더라. 하나같이 영어나 일본어 번역체 문장에 길들여져 개성을 느끼기 어렵다. 저자의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읽어보면 한 사람이 쓴 소설처럼 문체가 다 똑같더라고. 문장 한 줄만 읽고도 누구의 작품인지 대번에 알 수 있는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가 하나라도 있던가?”
김성동은 널찍한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베란다로 들이치는 햇살을 비스듬히 받으며 의자에 고즈넉이 앉은 그의 몸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 한 점 조각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벽마다 가득 채워진 책장. 심심파적으로 쓴 서예들. 그가 ‘성자’라 부르는 부모님 사진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그가 새벽마다 그 앞에 좌정하는 미륵불상 하나. 예전의 산중 살림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집 안 풍경이지만 뭔가 밋밋한 분위기다. 문장의 미화 작업에 도가 튼 반면, 환경미화엔 젬병이라 그저 어질러놓고 사는 건 여전하지만 생기의 함량이 예전과 다르다. 전에는 발이 달렸는지 날개가 달렸는지 책들이 우르르 책상과 방바닥으로 내려와 춤을 추었다. 육필 원고 더미들이 덩달아 생동하는 스텝을 밝았다. 말하자면 전엔 창작 열기로 후끈했다. 그가 사는 곳이 창작의 천국 아니면 지옥임을 알게 했다. 한데 지금은 공기가 다르다.
연좌제와 사찰이 글 쓸 힘을 추동해
내가 아는 김성동은 소설이라는 기저질환을 앓는 이다. 온몸으로 소설의 현(鉉)을 탄주하는 인물이다. 소설이 써지지 않으면 마치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한 듯 몸을 떨며 절규하고, 날밤을 지새워 술을 마시며 뜻대로 풀리지 않는 작품에 사무쳐 각혈과도 같은 넋두리를 토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사람이다. 그의 술타령은 과도해 징그러운 구석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순정한 문학정신엔 경이로웠다. 그런데 이제 소설을 손에서 놓았나? 75세란 물러설 나이? 그가 말하길 “힘이 빠져 소설을 쓸 엄두를 낼 수 없다”는 게 아닌가.
“소설은 기운이 있어야 쓸 수 있다. 난 ‘국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했다. 나이도 있고, 이제 일을 벌이기보다 정리하는 단계다. 절대적인 에너지를 갖고 소설에 몰입했던 시절은 저문 셈이다. 여전히 글을 쓰긴 한다. 소설 대신 역사 에세이를.”
올해 72세인 하루키는 새벽마다 1시간씩 마라톤을 한다더라. 재능보다 체력으로 승부를 내는 세계, 그게 소설 쓰기의 한 측면일지도.
“힘이 달리면 글을 물고 늘어질 수 없다. 단어 하나를 끝없이 파고드는 게 나의 글쓰기인데 그게 되지 않더라고. 몇 날 몇 밤씩 육필 원고를 쓸 수 있었던 과거의 체력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술 마시기도 힘에 부치더라.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필름이 딱 끊기거든. 뭘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소설을 쓰지 않는 선생을 예상하지 못했다. 죽는 그날까지 펜을 잡을 기세에 충천했었으니까.
“요즘 내가 평생 맛보지 못한 안도감을 느낀다. 왜냐고? 연좌제 사슬이 풀렸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어머니가 타계하면서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사찰(査察)에서 비로소 해방됐거든. 어머니 작고 전에는 매달 한 번씩 기관원이 찾아왔었다. 그 공적 라인이 사라지자 평온감이 몰려들더라고. 한편으로는 서운하던데!”
후련한 게 아니고 서운했다고?
“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평생 글 감옥에 갇혀 살았다. 목이 조여드는 것 같은 강박감을 가지고 소설을 썼거든. 사방팔방으로 꽉 막힌 유폐의 심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소설이었으니까. 소설이 아니고선 살 수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연좌제와 사찰이 나로 하여금 글 쓸 수 있는 힘을 추동시켰다고. 그런데 사찰이 끝나자 긴장감이 확 풀리더군. 이게 소설을 쓸 힘을 앗아간 요인이기도 하다.”
비바람의 횡포가 있어야 꽃을 피우는 나무. 그가 체화한 창작의 생태계가 그쯤? 족쇄가 사라지자 맥이 풀려 소설 쓸 맛을 잃었다는 얘기에 삶의 역설이 느껴져 씁쓸하다. 감시와 억압의 공기를 마시며 우울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뒤늦게 찾아온 평온과 고통의 산물인 소설의 빛,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값진 인생의 열매일까.
노년이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좋은 때다. 눈길이 순해지고, 적당한 둔감으로 인생을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터인데, 김성동의 구름처럼 나른한 눈빛으로 보자면 그는 어느덧 바깥보다 안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졌나 보다. 맵찬 언설을 예사로 쏟아냈던 그의 입에서는 이제 온순한 언어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온다. 이런 그를 여전히 기습하는 건 외로움, 또는 허무다.
“불경(佛經)은 가르치길 일체가 무상하니 집착을 놓으라 한다. 그러나 무슨 수로 집착에서, 욕망에서 벗어나겠나? 소설이라는 반성문을 통해 정직하게 나를 들여다보기를 거듭했지만 가벼워지기 어려웠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건 늘 외로움이라는 놈이었다. 실존의 고독, 이건 어쩔 수 없는 화두다. 더 큰 덩어리에서 보면 인생은 결국 허무한 것이고.”
보이는 것 없는 길 위에서 홀로 앓기. 인생사 그렇게 덧없더라는 얘기다.
내가 가진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의 목록을 죽 적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좋은 습관보다 나쁜 습관의 개수가 더 많았다. 내가 오죽잖은 인간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습관 따라 성격이 만들어지고, 성격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했던가. 좋은 습관이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기본을 뻔히 알면서도 실족한다. 좋은 습관은 몸에 붙이기 어려운 반면, 나쁜 습관은 나도 모르게 도둑처럼 스며들어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게 아닌가.
나쁜 습관 중에 최고봉은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 스스로 고통을 불러들이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버릇이다. 평소 지인들은 나를 따뜻하고 다정해 화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지만 그거 오진이다. 내 생각에 천국이란 분노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그래 나름 마음을 다스려 분노를 관리함으로써 천국 건설에 이바지하려 하지만 자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나는 남들에게 웬만해선 크게 화를 내지 않는 편이다. 이견으로 충돌해도,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넘겨버린다. 알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꽤나 이상하고 꽤나 이기적이고 꽤나 애처로운 존재이니, 가급적 보듬어 내 상처를 줄이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화를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흔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속에선 화가 부글거리는 것이다.
가족 앞에선 더 좀팽이가 된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에 전전긍긍이 많다. 천하무적 분노의 화신인 아버지는 여차하면 화를 앞세우는 분이다. 화를 생산하는 장기 하나를 몸 안에 가지고 있는 양 작은 일에도 쉽게 격분하는 캐릭터다.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분노의 번갯불을 내리칠 때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때로 대거리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고령의 아버지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 끝내 참아내지만 안에서 들끓는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괴로움을 겪는다. 참는 척할 뿐, 이미 나 역시 분노의 정상에 올라선 당장의 실정을 알기에 고통스럽다. 결국은 고통이 겹이다. 꾹 참아내는 고통과,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가져다주는 고통이 이중으로 겹친다. 참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분노할 것 없이 감정의 평정을 유지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일상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분노의 감정을 능히 해치울 묘안이 내게 있을 리 없다. 다만 내가 모자란 인간이라는 걸 자각하는 것으로 나 자신과 협상한다. 문제의 원인이 내게도 있음을 자인하는 거다. 그 왜 있잖은가? ‘내 탓이오!’ 상대의 분노에 맞서기보다 까짓것 대범하게 받아들여 나의 분노를 허공으로 날려버리지 못한 내 탓!
나는 절집에 관한 책 두 권을 낸 바 있는데, 취재를 위해 돌아다닌 절이 많은 편이다. 궁금한 건 도(道)며 해탈이 무엇인지,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걸림이 없어지는지, 뭐 그런 거였다. 도를 말하는 승려들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고매하고 오묘한 언어로 도를 말하는 방식인데, 너무 관념적이고 어려워 귀에 맺히는 게 별로 없었다. 다른 하나는 아주 쉬운 말로 도를 말하는 방식이다.
나에겐 후자가 구미에 맞았고, 믿음이 갔으며, 소낙비처럼 시원해 두고두고 반추하는 맛이 났다. 이를테면 첩첩산중 암자에서 만난 어떤 노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승려는 한마디로 웨이터라고. 남에게 서비스를 하는 게 본분이며, 완벽한 서비스 맨을 일컬어 도인이라 하는 것이야!” 쉽고 시원하지 않은가? ‘도란 중생의 똥을 치워주는 데에 있다.’ 일찍이 원효도 그렇게 가르쳤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의 원효 버전이다. 모름지기 남에게 나를 아낌없이 쏟으라는 충고들이다. 이타(利他)의 바다에서 살면 수행자이건 중생이건 통한 자라는 메시지다. 나는 이런 언설이 좋다. 내게 쓸모가 커서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 인색해질 때, 나쁜 습관의 노예로 헤맬 때,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이 말씀들을 새기면 힘이 된다. 문제의 원인이 알고 보면 비좁은 나의 이기심에 있다는 걸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관계의 불화나 분노로 야기되는 고통이 결국은 그릇 작은 내 탓임을 인정하면 뜻밖에도 환하게 밝아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매사 내 탓으로 돌리고 초연하게 처신하기가 어렵다. 따지고 보면 내 탓이 아님이 자명해 앙앙불락 괴로워지는 경우도 있고, 내 탓임이 분명할지라도 그런 줄을 모르거나 외면한 채 날뛰는 경우는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은 도돌이표처럼 돌아가 악습과 분노의 처리에 무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십상이다.
무엇으로 대책을 삼아야 하나. 정토회 법륜 스님의 얘기에 귀 기울일 만하다. 요점은 이렇다. 명철하고 재미있고 화통한 이 스님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 붙은 습관과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화 역시 습성이 되면 뜯어내기 힘들다. 화가 솟구칠 때마다 전기충격기로 한 번씩 몸을 지지는 충격요법이 가장 확실한 대책이지만 그건 고문이라 잔혹하다. 그렇다면 화가 붙은 대로 태연하게 사는 게 답인데, 이 경우엔 과보(果報)를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화를 떼어내려고 고통을 겪느니 그냥 놔두고, 대신 창의적으로 살아 인생을 보완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법륜 스님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화가 치솟아 뚜껑이 열릴 때면 아하,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그렇게 자신을 주시해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화를 내는지도 모르는 채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는 우행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다. 아하,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또렷이 인식하기를 거듭하다 보면 참회와 각성이 일어나면서 서서히 화의 규모를 줄여나갈 수 있고, 언젠가는 분노 처리에 유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방법은 상당한 효험이 있다. 내가 사용해본 경험으로는 약발이 ‘짱’이다.
눅눅한 한여름 더위가 기승이다. 습하고 더운 날씨가 몸을 지치게 하고,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훌쩍 떠나고 싶어도 쉽지가 않은 요즘, 브라보가 서울 사는 ‘1970년생 영숙’ 씨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산림휴양지 3곳을 꼽아봤다.
서울시 중구 기준으로 1시간 내외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초여름 숲의 싱그러운 경치까지 즐길 수 있어 일석이조다. 잠시 여유를 찾아 역병과 무더위에 지친 마음을 달래줄 ‘산캉스(산+바캉스)’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성인처럼 삼성(三聖)산에서 누리는 푸른빛 힐링, 삼성산산림욕장
삼성산은 안양시 명칭이 유래한 곳이다. 고려가 세워지기 전의 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금주(지금의 시흥)와 과주(지금의 과천)를 점령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다 산꼭대기에서 피어오르는 오색구름을 목격했다. 이때 홀연히 나타난 능정이라는 승려가 “이곳에 절을 짓고 안양사라 칭하면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말했고, 이에 왕건이 절을 세워 안양사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다. 이때의 안양사는 폐사되고 없다. 하지만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뜻하는 ‘안양’이 지명으로 남아있다. 현재의 안양사는 1950년대 후반 유명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로 재창건한 사찰이다.
삼성산의 ‘삼성’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윤필대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해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하듯 삼성산산림욕장에서는 성인이 된 듯 삼성산 일대의 수려한 자연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근처에 있는 안양예술공원에서 예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삼성산산림욕장은 안양예술공원 입구에서부터 안양사와 제1·2전망대를 지나는 5km 구간이다. 관악산과 함께 다녀오기 좋은 삼성산은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인근의 마애정 옆 작은 샛길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등산을 즐기는 시니어라면 1전망대나 2전망대를 거쳐 삼막사까지, ‘등린이’ 시니어라면 1전망대까지만 오르기를 추천한다. 이번 주말에는 성인처럼 녹음 속에서 마음 수양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하철 타고 떠나는 치유와 힐링의 숲, 계양산산림욕장
계양산산림욕장은 연간 500만 명 이상이 찾는 인천 명소다. 봄에는 튤립꽃 전시를, 가을에는 단풍놀이를 즐길 수 있어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자랑한다.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어 수도권 등산객들도 많이 찾는 계양산의 명소는 둘레길과 장미원이다. 이 외에도 계양산성과 문화회관, 어린이공원, 어린이과학관 같은 다양한 즐길거리가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산림욕장 내에는 계양산 능선을 따라 ‘치유의 숲길’, ‘측백나무길’ ‘하늘길’ ‘우리꽃길’ ‘해맞이길’ 등 계양산 둘레길로 향하는 다양한 산책 코스가 마련돼 있다. 이 중에서 무장애데크길이나 계양산성 탐방로는 걷기가 편하고 난이도가 높지 않아, 연로한 어르신이나 어린 아이들도 함께 이용하기 좋다. 특히 무장애데크길 옆에는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면역력을 강화해 주는 피톤치드를 내뿜는 편백나무가 곳곳에 있어 매력적이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시니어에게 무장애데크길을 추천한다.
계양산 둘레길은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발표한 ‘언택트 여행지 100곳’에 선정된 바 있다. 야외 관광지이면서, 자체 입장객 수를 제한해 거리두기 여행이 가능한 관광지로 인정받았으니 마음 놓고 다녀와도 좋겠다.
한 마리 학처럼 자유로와 한강, 북한까지 관망하는 심학산산림공원
경기도 파주에 있는 심학산은 조선시대 왕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가 궁궐을 도망나왔는데, 이 곳에서 찾았다고 해서 ‘학을 찾은 산’, 심학(尋鶴)산으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학이 좁은 궁궐에서 벗어나 심학산에서 탁 트인 전망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추측을 부를 정도로 심학산은 멋진 전망으로 유명하다. 산 정상에 올라 감상할 수 있는 서해의 낙조가 일품이다. 이 외에도 파주출판단지와 자유로, 한강 하구, 김포, 관산반도를 바라보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점도 심학산만의 매력이다.
심학산은 다른 산에 비해 높지 않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어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심학산 둘레길 역시 난이도가 높지 않아 무릎이 좋지 않은 시니어도 운동 삼아 걷기에 적당하다. 우거진 숲이 햇빛을 가려주니 무더위를 피하기도 좋다. 심학초교에서 약천사,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의 끝에는 정상전망대가 있다. 날이 좋다면 저 멀리로 북한까지 볼 수 있다. 또 전망이 가장 좋은 낙조전망대도 있다. 멀리 나서지 않고도 빨갛게 저무는 노을을 보며 기분을 전환하고 싶다면 심학산 둘레길을 걸어보자.
늦깎이 소설가로 데뷔한 오세영(68) 작가는 첫 작품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단숨에 밀리언셀러 작가로 발돋움한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그의 섬세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은 많은 이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최근 정약전의 삶을 다룬 소설 ‘자산어보’로 돌아왔다. 그가 매료된 정약전의 삶과 더불어 역사소설의 가치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의 데뷔작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한복 입은 남자의 사진이 모티프였고, ‘대왕의 보검’은 칼이 소설의 첫 단추였다. 그렇다면 ‘자산어보’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얘기일까?
“유배지에서 자연과학 서적을 쓴 정약전의 삶이 흥미로웠어요. 악조건 속에서도 해양생물에 관한 서적을 집필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다양한 이론과 현장 실무를 다룬 실용서는 당시 학문적으로 신선한 시도였죠. 열린 사고를 통해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연 사람. 주자학에 발을 딛고 손으로 실학을 매만지는 학자. 그게 참 강렬했어요. 그를 보고 역사적 시간과 공간이란 씨줄과 날줄을 엮어서 만들어낸 것이 이 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추리소설과 같이 사건이 전개된다. 해녀의 죽음, 재벌 행세를 했던 사상도고와 마을 사람들 간의 공방 등 다양한 사건이 추리소설처럼 긴박하게 흘러가고, 정약전은 마지막 순간에 신스틸러처럼 등장해 이를 모두 해결한다.
“모든 사건의 해결은 정약전이 도맡죠. 다만 사건의 중심은 민중이에요. 약전의 삶을 빌려왔지만, 중요한 건 그에게 어부로서 물고기 지식을 알려줬던 창대와 같은 민중이에요. 약전의 ‘자산어보’도 결국 민중의 삶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죠. 소설을 쓸 때 역사를 위인의 관점이 아니라 민중의 관점을 통해 새로운 각도로 접근하는 편이에요. 이를 재밌게 전달하기 위해서 추리소설처럼 썼어요. 역사란 도착지를 목표로 하지만 재미란 내비게이션을 소설 속에서 작동시키는 것이죠. 고증은 철저히 해야 하지만 재미를 놓칠 수는 없어요.”
도서관은 영감의 서랍
1993년 조금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했는데, 이 데뷔의 출발점은 한 권의 책이었다.
“역사의 재미에 눈을 뜬 건 중학교 때 박종화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읽고 나서였어요. 학부도 역사를 전공했는데, 생각한 것과 달랐어요. 소설 속 역사는 살아 있는 역사였지만,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는 역사는 죽은 역사처럼 느껴졌어요. 이후 직장생활을 10년 정도 했는데, 번아웃이 왔어요. 문득 저 책이 생각나는 거예요.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그때의 전율과 감동이 제 맘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꺼진 삶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선택한 것이 역사소설가였어요.”
그렇다면 시간이 지난 지금, 첫 소설을 쓸 때와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
“처음 쓸 때는 서술에 집중했어요. 사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생생함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때부터 최대한 간결하게, 독자들이 잘 읽을 수 있게 글을 쓰려고 노력했어요. 짧은 설명은 괄호로 덧붙이고, 길면 주석을 달았어요. 군더더기를 최대한 덜어낸 거죠. 대신 본문은 장면이 그려지고 생생한 현장감을 줄 수 있게 묘사와 현재형 시제를 많이 쓰려고 노력했고요.”
역사소설은 사료를 기반으로 해야 하기에 방대한 자료를 읽고 분류하고 정리해야 한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사료를 정리하면서 힘든 점도 있을 터.
“원하는 사료를 찾는 게 정말 쉽지 않죠. 사료가 없는 것도 많고요. 최악의 경우엔 소설을 엎어야죠. 다행히 아직까진 그런 경우는 없어요. 이를 방지하려고 도서관에 자주 가요. 정치, 철학, 역사 등 모든 분야가 있잖아요. 가서 보고 끌리는 아무 책이나 읽어요. 조선 시대 표류기부터 시작해서 철학의 역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어요. 하나를 알면 둘을 깨우치는 사람은 아닌데, 도서관에서 읽었던 건 서랍에 넣어둔 것처럼 잘 기억해요.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고요. 일종의 박람강기(博覽强記)라고 할까요? 이 축적된 데이터와 함께 확신이 서면 그때부터 집필 작업에 들어가요. 제게 도서관은 영감의 서랍 같은 곳이에요.”
무명의 역사를 복원
그가 영감의 서랍 속 사실을 토대로 만든 역사소설의 가치는 무엇인지 물었다.
“삶의 외연을 넓히는 지름길은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는 거예요. 배우 윤여정이 오스카상을 받듯이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상을 못 받으리라는 법도 없잖아요. 법대 나왔다고 무조건 변호사를 할 필요도 없고요. 역사도 마찬가지예요. 역사를 교과서 외우듯이 틀에 박혀서 바라볼 필요가 없어요. 역사를 맘대로 바꿀 수는 없죠. 다만 새로운 각도를 통해 바라보면서 역사를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죠. 그게 역사소설의 역할이라고 봐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까요?”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더불어 역사소설에 관한 그만의 소신을 밝혔다.
“제가 하는 일은 무명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에요.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해석될 때가 많아요. 또한 위대한 리더나 위인은 소수일 뿐, 그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히고 살아가는 건 민중들이에요.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무명의 역사를 조명하는 건 그 시대를 새롭게 보는 돋보기와 같아요. 앞으로 쓸 책도 그런 책이 될 거예요. 간단히 얘기하면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은 들어봤지만 잘 모르는 고려 시대 승려 ‘묘청’에 대한 얘기를 써보려고요.”
한 줌의 먼지처럼 사라져간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고 취합하는 일. 그것은 매우 고되지만 재밌는 일이었다. 그는 역사란 퍼즐의 이음새를 자신만의 결로 깎고 다듬어 모나지 않은 그림으로 완성할 때 보람을 느꼈다. 역사적 사실에 발을 디딘 채 무명의 역사를 복원하며 소설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 일. 독자들을 위해 더 좋은 소설을 쓰고자 노력하는 일. 아마도 그것은 새로운 학문적 성취에 힘쓰고 이를 통해 민중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애썼던 실학자 정약전의 정신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역사의 퍼즐을 다듬는 실학자로서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며 마친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 강진 동구 밖 주막집의 옹색한 뒷방에 몸을 의탁하는 것으로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처음 그에게 쏟아진 건 냉대뿐이었다. ‘서학을 믿는 대역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그를 사람들은 전염병자 대하듯 배척했다. 유배의 시작은 그렇게 비참했다. 그러나 기이하도록 강인한 다산은 운명의 농간에 굴종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유배의 고난을 학문과 정신의 도약대로 삼아 오히려 일취월장했다.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18년 중 10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사무치는 고독을 피할 수 없는 게 유배다. 고결하고 개결한 풍모를 유지한 다산이었으나 때로 서러워 대성통곡을 했던가 보다.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취하여 산에 올라 목메어 우니/ 울음소리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지네.’
그러나 다산은 자폐적 감상이나 자기연민에 젖어 지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잠깐 외로움과 설움에 잠길망정, 그건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는 유배의 불운을 공부로 집어삼켜 해치웠다. 책상다리를 하고 일단 서책 앞에 앉았다 하면 일어날 줄 모른 다산이었다. 오죽했으면 방바닥에 눌려 닳은 복숭아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겠는가.
이런 공부벌레가 드물다. 이런 기적적인 학문의 포식자가 다시없다. 이토록 초인적인 정진을 통해 다산은 이곳에서 학문과 사상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다. 다산초당은 이른바 ‘다산학’의 산실이며, ‘조선실학’의 태실이다. 불후의 명저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해 자그마치 500여 권에 이르는 갖가지 경집과 문집이 이곳에서 생산되거나 기획되었다. 그 다산성과 품질의 우수성은 세상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산이라는 거목의 전모를 헤아리기란 어쩌면 가당치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얘기도 있지 않던가. ‘다산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다산을 아는 사람도 없다.’
다산초당은 원래 고산 윤선도의 가문인 해남 윤씨네 소유의 산정(山亭)이었다. 그런데 다산의 어머니가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이런 연고로 다산이 다산초당에 거처하게 됐던 거다. 다산초당은 중앙에 있는 본채 초당과 좌우편에 있는 동암과 서암으로 이루어졌다.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 쓴 편액이 있다. ‘정약용이라는 보배가 머문 산방’이라는 뜻을 지닌 이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다산보다 24세 연하였던 추사는 경학을 배우거나 차를 나눔으로써 다산과 교제하며 지냈는데, 편액으로 흠모의 마음을 전한 셈이다.
유배라는 궁지에 몰렸으나 다산은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과의 교유도 활발했다. 특히나 절친하게 지낸 승려 둘이 있는데, 저 아래 해남 두륜산 일지암에 머물렀던 초의선사와 여기 만덕산 백련사의 주지였던 혜장이 바로 그들이다. 다산초당은 이렇게 학문 전당이자 담론과 우정이 오고간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진흙을 딛고 올라오는 연꽃처럼, 고통스러운 유배를 차라리 자양으로 삼아 삶다운 삶의 정상으로 날아오른 다산의 행장이 선연하게 서린 유적지라는 점에서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다산초당의 특별한 가치가 또 하나 있다. 다산이 이곳에 조선 원림의 상징이라 일컬을 만한 정원을 조성했다는 게 그렇다. 유배객이 정원을? 언뜻 낯설게 들린다. 다산은 수원의 화성(華城)을 설계한 건축공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초당 일곽의 조경에 무신경했을 리 없다. 유배의 갑갑한 심사를 해갈하기 위해서라도 정원 조성이 필요했을 테다. 다산은 우선 연못을 파고 뒷산의 물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갯가에서 모아 가져온 괴석들로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어놓고 ‘진짜 산보다 더 낫다’고 흡족해했다. 연못 주변엔 관상수를 심고 곳곳에 화단을 만들어 화초를 가꾸었다. 다산의 시를 보면 초당에 심은 식물 수가 30종에 달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정원이 다산 생시의 바로 그 정원?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와 비교하면 더러 다르다. 예컨대 원래 연못은 상지와 하지 두 곳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뿐이다. 초가였던 집들을 기와집으로 복원한 건 내내 입길에 오르고 있다.
답사 Tip
다산초당 들머리에 다산박물관이 있다. 다산의 친필 간찰과 다양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다산초당에서 천년고찰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도 빼어나다. 다산이 자주 걸었던 길이다. 거리는 약 1km.
산을 애호하는 건 산에 사는 나무나 다람쥐만이 아니다. 사람도 산을 좋아한다. 특히나 한국인은 등산을 유난히 좋아하는 민족이다. 등산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냐고, 다투어 천명하는 이들이 많다. 등산에 거의 미친 사람도 숱하다. 손에 쥐면 쥘수록 번뇌의 개수도 많아지는 게 인생이다.
작가 조세희의 말마따나 ‘정신만 빼고 모든 게 다 있는 게 요즘 세상’이다. 욕망과 물신의 사주로 뭐든 배가 터지도록 탐닉하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지구라는 행성이다. 그러나 마음은 때로 갈피 없이 흔들린다. 모래밭에 세운 부실한 가건물처럼 자주 휘청거린다.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산을 찾아간다. 몸 건강을 생각해 산을 ‘야외 헬스장’처럼 애용하는 이들도 많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초록으로 반짝이는 별이 지구라지. 뭔가 고차원의 다른 별에서 바라보면 지지고 볶는 인간들로 바글거리는 지구가 영락없는 지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히 그러기만 하랴. 희로애락의 요지경으로 점철되는 게 지구 위의 풍정이지만, 한 번 태어나 근사한 인생을 실현하고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몸을 벗기에 좋은 게 지구별에서의 삶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 등산의 효시
이렇게 골치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이 행성에서 최초로 산에 오른 이는 누구였을까? 등산의 효시를 또렷하게 짚어내기는 어렵다. 창으로 먹이를 꿰기 위해 산야를 누빈 선사시대의 호모사피엔스를 등산의 시조로 봐야 할까? 저 높은 산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으로 산에 오르거나, 하늘의 별과 달, 또는 신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보려고 산정에 오른 자를, 혹은 산 너머 부족들의 동향을 영특하게 탐지하기 위해 은밀히 고산에 올라간 자를 최초의 등산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게다.
여하튼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행위는 아득한 과거부터 계속 이어졌다. 우리의 선조들도 일찍부터 산에 올라가 다양한 용무를 봤다. 고대부터 숭산(崇山)을 신앙으로 삼은 민족이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그리고 대체로 산이 나지막하고 아기자기해 오르기도 쉽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이런 유순한 산세는 오늘날까지 한국에 산행이 성행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다.
역사서를 보면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에서도 등산이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산행이 더욱 활발했다. 학술적·군사전략적·유람적 성격의 산행이 잦았다. 암벽을 오르느라 용을 쓰는 모습이 드러나는 민화까지 보여 흥미롭다. 무엇보다 확연한 건 문인 사대부들이 즐긴 유람 성격의 산행 역사다. 자연에서, 즉 산수의 본질에서 삶의 유토피아와 학문의 지향점을 찾은 게 성리학자들이지 않은가. 사대부들은 산처럼 물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는데, 그들은 산행 뒤에 흔히 ‘유산기’(遊山記)를 기록해 남겼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은 1900년대 중반, 서구의 알피니즘(Alpinism)을 통해 유입됐다. 정상 정복의 성취 욕구를 중심에 둔 등산의 이념과 기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급적 더 높은 산을, 가급적 더 단시간에 후다닥 오르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등산이 대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조선 선비들이 산을 즐긴 전통적 방식은 이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대략 세 가지 코드로 산을 즐겼다. 가만히 앉아서 산을 관조하는 ‘관산’(觀山)과 흐뭇한 경치를 즐기는 ‘요산’(樂山), 산을 돌아다니며 노니는 ‘유산’(遊山)이 그것이다.
이 셋 가운데 ‘유산’의 방식으로 산행을 했던 이들이 남긴 기행산문이 바로 유산기다. 유산기 안에는 물론 ‘관산’과 ‘요산’의 정신과 감성 역시 화학적 합성처럼 결부돼 있다. 조선이 남긴 진귀한 문화유산인 유산기는 총 560여 편에 달한다. 한가락 한 선비들이라면 다들 유산기를 남긴 것 같다.
자못 거창했던 선비들의 유산(遊山) 대열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의 산행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번거로운 행위였다. 접근 경로도 열악하고 맹수가 들끓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거침없이 산을 올랐다. 산을 우주의 축약으로 본 거시적 자연관을 지닌 선비들에겐 산이야말로 생생한 체험을 해볼 만한 수신(修身)의 아카데미였던 것이다. ‘나여! 너는 누구냐?’ 그런 자문자답을 습으로 삼았던 선비들은 산행을 또한 자성(自省)의 찬스로 삼았다.
아무도 뜯어말릴 길이 없도록 지독한 유산의 버릇을 가진 걸로 유명한 이는 남명 조식(1501∼1572)이다. 그는 지리산의 ‘황소갈비 같은 산마루’를 무려 열일곱 번이나 주파했으며, ‘유두류록’(流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차라리 지리산의 넋이 되고 싶었나? 기행문을 보면 “(지리산 탐승을 하다가) 초가지붕에 걸린 박처럼 죽은 송장이 되고 싶었다”고 썼으니 말이다.
남명은 평생을 일관해 경(敬)과 의(義)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새벽처럼 명증하게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고자 진력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쩔렁쩔렁 소리를 내는 방울인 성성자(惺惺子)를 늘 허리춤에 차고 살았던 건 정신의 해이를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이런 그에게 지리산은 도심(道心)을 기르는 수련장이었다. 비지땀을 쏟으며 오르막을 오르는 것을 ‘선(善)을 좇는 것’이라 했고, 내리막에서 힘쓰는 것 없이 저절로 흘러 내려가는 것을 ‘악(惡)을 좇는 일과 같다’고 빗댔다.
선을 행하긴 어렵고 악에 편승하긴 쉽다는 것을 얘기한 셈이다. 산의 운치를 맛보고, 풍경의 미태를 반기며, 벼랑을 움켜쥐고 버티는 노송의 고고한 기품을 감상하는 데에서 나아가, 인간됨의 도리를 산을 통해 새삼 깨닫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었던 거다.
그런데 조선 선비들이 고리타분한 공부벌레에 그친 건 아니었다. 풍류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살았으니까. 공부는 공부대로 열나게 하고, 짬짬이 놀 때는 또한 열나게 놀았다. 해서, 유산 목적의 산행은 풍류를 즐기는 여정이기도 했다. 주로 명산을 골라 탐승했던 그들의 유산 행차는 자못 거창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 빙벽을 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이 셰르파를 고용하고 원정대를 조직하는 정도는 저리 가라는 듯 화려하게 팀을 짜고 산에 올랐다.
지리산을 오를 때 남명이 거느린 무리의 면면은 실로 다양했다. 선두 대열엔 예인이나 기생들을 배치해 허리에 찬 북을 치거나 피리를 불게 했으며, 남명과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뒤를 따르며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음식 꾸러미나 술통을 짊어진 짐꾼들은 후미 대열을 형성했고, 길 안내는 지리산의 물정을 잘 아는 승려가 맡았다.
유산기의 귀감으로 꼽히는 ‘청량산 유록’을 남긴 주세붕(1495~1554)이 청량산을 오르며 대동한 유흥 그룹의 구색도 장관이었다. 당대 풍류계의 선수였던 주세붕 역시 인근의 공무원과 선비, 기생과 가수, 연주하는 재인, 여종 등을 두루 대동했으니, 마치 물고기들을 꼬챙이에 꿴 두름처럼 기다란 행렬이 산길을 따라 주르륵 이어졌다.
선비들의 유산에 술과 가무가 있는 유흥은 아마도 유행 품목이었던 것 같다. 요즘의 등산객들도 일쑤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나 하산 뒤에 기념으로 한잔 걸치곤 하는데, 조선 선비들의 풍성한 유흥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음마야, 선비들이 엄청 요상하게 놀았네?” 이렇게 의아해하며 눈에 쌍심지를 켤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왕지사 노닐 거라면 제대로 노니는 게 사리에 맞겠다.
게다가 조선 선비들이 유산 중에 즐긴 풍류는 어디까지나 청유(淸遊)였다. 거칠거나 혼탁한 구석이 없었다. 산중 유숙의 달밤에 한잔 마시며 주거니 받거니 음풍영월의 시를 지어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다. 분수와 염치를 중히 여겨 처신을 맑게 하길 본분으로 삼은 게 선비 정신이지 않겠는가. 두 눈으로 보지 않아서 모를 일이긴 하지만, 산에 올라 엉덩이에 뿔난 짓을 한 삐딱이 선비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이제 퇴계 이황(1501~1570)이 산을 사랑한 방식을 살펴볼까? 퇴계는 산을 연인처럼 평생 애지중지했다. 고도로 발육한 합리적 이성과 세련된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산은 족집게 레슨 교사처럼 믿을 만한 선생이기도 했다. 그는 도학(道學)의 번성을 평생 과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거경궁리(居敬窮理, 경건한 마음으로 이치를 추구함)로 일관한 석학이었다. 그리고 그 위업에 부합하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퇴계 본인은 자신을 매우 혹평했다.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다”고 탄식했다. 어이 하나? 그는 산에서 배우는 것으로 부족분을 채우고자 했다. 그에게 산은 ‘보는’ 게 아니고 ‘읽는’ 대상이었다.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 하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그는 시를 통해 이렇게 읊었다. 사람들은 흔히 산의 외물(外物)에 경도된다. 그러나 퇴계는 근원적인 묘리를 내장하고 있는 게 산이라 보았다. 글을 읽어 진리를 길어 올리듯, 산 또한 근본 이치를 깨칠 수 있는 학당이니 산을 유람하는 일이란 결국 인생 공부라 판단했던 거다.
퇴계도 유산기를 남겼다. 소백산을 탐승한 뒤 ‘유소백산록’을 썼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 유산 일정은 3박 4일. 당시의 직분은 풍기군수. 건강 상태는 매우 불량해 대동한 승려들이 의논을 하더니 견여(肩輿, 좁은 길을 오를 때 잠시 쓰는 간단한 가마)를 타고 오르라고 권유했고, 퇴계는 응했다. 이렇게 해서 때로는 두 다리로, 때로는 말을 타고, 비탈길에선 견여를 이동 장비 삼아 유산을 했다.
이런! 견여를 탄 퇴계야 편했겠지만, 가마꾼들은 그 무슨 고생이람.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꼴불견이겠으나 만족스러웠던 퇴계는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마”라는 논평을 적어두었다. 사람의 도리를 평생 궁구한 천하의 도학자였지만 내 몸 편하고자 남의 몸에 얹혀가는 결례엔 마음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윗분’이 따로 있고, ‘아랫것’이 별도로 있었던 계급사회에서의 일이었으니, 퇴계보다는 시대가 자아낸 소극(笑劇)이라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퇴계는 말했다. “나는 산야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DNA 자체가 산에 심취하게 구성됐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그의 호 ‘퇴계’(退溪)의 뜻이 선연해진다. 그는 항상 뒤로 물러서 계곡으로,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산을 체험하고 궁구하며 얻은 특유의 지론도 많았다.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도산잡영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예로부터 산림을 즐겼던 사람엔 두 종류가 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섬기며 즐기는 사람이 있었고, 도의(道義)를 기쁘게 여기고 심성을 기르면서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를 따르자면 윤리를 어지럽힐까 두렵고, 후자의 경우는 성현이 남긴 글 찌꺼기를 탐하는 데에 그칠까 두렵다.
그러나 차라리 후자를 위해 힘쓸지언정 앞의 것을 위해 스스로를 속이진 않으리라.”
지금까지 조선조에 성행한 유산기와 선비들의 산에 관한 생각을 대략 살펴봤지만 편린에 불과할 따름이다. 고릿적 선비들의 유산과 오늘날의 등산이 서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요량해볼 만한 대목도 없진 않을 게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잴 것도 없다. 풍속이란 어차피 시대를 따라 변전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산을 탐스럽게 주유한 건 옛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풍류는 오졌고, 심성은 산에다 조율했으니까. 특히 퇴계의 지론은 청명해 구미가 동한다. 그를 통째 청산이라 일러도 실언은 아니리라.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약 1년이 지났다. 하늘길이 닫혔고, 각자 꿈꾼 여행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길어지는 ‘집콕’ 생활은 새로운 여행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방구석에서 세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고, 매일 지나는 동네에서 숨겨진 명소를 찾는 재미를 발견했다. ‘이런 것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은 것들이 관광이 되고, 산업으로 성장했다. 여행이 달라졌다.
글로벌 온라인 여행정보 기업 부킹홀딩스가 최근 전 세계 28개국 2만여 명의 여행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2021년부터는 총 9가지의 여행 방식이 대중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온라인 여행 ▲기술을 접목한 여행 ▲근거리 여행 ▲안전한 여행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 각국의 랜드마크에 발 도장을 찍는 대신 익숙한 장소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여행을 즐기는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다.
‘현실감 최강’ 대세는 몰입형 콘텐츠
코로나19 이후 주목받고 있는 여행 방식은 ‘랜선 여행’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IT 기기를 통해 즐기는 여행으로,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여행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새롭게 떠오른 문화다.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의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콘텐츠다. 크리에이터가 특정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맞게 실제 상황인 것처럼 연기하는 롤플레잉 ASMR 영상은 유튜브에서 꾸준히 관심을 끄는 콘텐츠 중 하나다. 이어폰을 착용한 뒤 눈을 감는 순간, 원하는 곳 어디로든 ‘상상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중 ‘공항 ASMR’, ‘비행기 ASMR’은 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밟고 실제 비행기를 타는 것 같은 생생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승무원의 말소리부터 탑승 안내 방송, 공항 특유의 시끌벅적한 느낌까지 완벽하게 재현한다.
오랜 ‘집콕’으로 유튜브가 식상하게 느껴진다면, 혹은 진짜 여행지를 구경하고 싶다면 각국 관광청 홈페이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오스트리아 관광청, 두바이 관광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자국의 관광지를 360도 영상이나 고화질 사진으로 홍보하는 몰입형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호주 관광청의 ‘8D로 체험하는 호주’ 영상이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에스페란스 해변에서 돌고래가 뛰노는 소리, 세계에서 가장 작은 페어리펭귄이 이동하는 소리, 킴벌리의 호라이존탈 폭포 소리 등 현장에서나 들을 법한 생동감 넘치고 입체적인 소리가 오감을 자극한다.
세계의 문화 예술을 실감나게 접하는 방법도 있다. ‘구글 아트 앤 컬처’는 구글과 제휴한 주요 박물관 2000여 곳의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한다. 가상현실(VR)과 거리 뷰 기능을 통해 런던 대영박물관, 파리 오르세미술관 등 세계적인 박물관과 도서관을 360도로 산책하듯이 둘러보고, ‘아트 카메라’ 시스템으로 작품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다. 앱을 다운받으면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증강현실(AR) 기술을 이용한 ‘아트 프로젝터’ 기능을 누르면 카메라 화면 속에 3차원 예술 작품이 나타나 서 있는 곳을 박물관으로 만든다.
랜선 여행의 진화는 어디까지? 실시간 현지 투어
인터넷 서핑을 통해 여행 분위기를 내는 것을 넘어 이제는 집 안에서 ‘진짜 여행’을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은 여행사와 숙박업소 등 관련 산업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비대면·비접촉 여행 관련 각종 상품을 내놓고 있기 때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집에서도 패키지 관광이 부럽지 않은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행상품 중개 플랫폼을 운영하는 마이리얼트립은 최근 해외에 거주 중인 여행 가이드들이 실시간으로 관광지를 찾아다니며 소개하는 ‘랜선 투어’ 상품을 출시했다. 실제 여행사 프로그램처럼 이용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생동감 넘치는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스페인 소도시 세고비아의 골목을 둘러보는 여행부터 홍콩 야경 투어, 로마 시내 워킹 투어 등 콘셉트도 다양하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투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 투어에 참가한 이용자들은 “실제로 가이드와 함께 걷는 기분이다”, “집에서 ‘치맥’하며 바르셀로나를 둘러보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등 만족스러운 후기를 남겼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와 게스트를 연결하는 플랫폼의 특성을 살려 ‘온라인 체험’을 선보였다. 각국의 호스트들이 원격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이용자들에게 각국의 문화·예술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일본 승려와 함께하는 명상, 현직 멕시코 셰프의 타코 수업, 고고학자와 이탈리아 와인 역사 배우기 등 원하는 체험을 선택하면 현지인과 생생하게 교류할 수 있다. 가격은 프로그램마다 다르지만, 대개 2~4만 원대다.
한편 일본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일본항공(JAL)은 최근 대면 형태로 실시하던 비행기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원격으로 전환하고, 인쇄업체 톳판인쇄사는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해 일본 유명 문화재를 온라인으로 견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의 최대 여행사 JTB도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과 마우나케아 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온라인 투어 서비스를 도입했다.
나만 아는 여행지, 숨은 명소를 찾아서!
콧바람을 쐬어야 비로소 여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구석 여행에 흥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인파가 바글바글한 ‘핫플레이스’를 갈 수도 없는 노릇. 이 때문에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숨은 여행지를 찾아 떠나는 트렌드가 생겨났다. 실제로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6월 발표한 국내여행 의향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기존 유명 관광지보다 숨겨진 여행지나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는 곳으로 여행할 것’이라는 응답이 1순위로 높았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런 트렌드를 반영해 지난해 ‘언택트 관광지 100선’을 내놓았다.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 ▲개별 여행 및 가족 단위 테마 관광지 ▲야외 관광지 ▲자체 입장객수를 제한하는 관광지 등 거리두기 기준을 충족하는 여행지를 모아놓은 목록이다. 여행지는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0곳의 여행지를 천천히 살펴보면, 생소한 관광 명소가 눈에 띄면서 우리나라가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차박’도 새롭게 부상한 언택트 여행 문화다. 차에서 관광과 숙박을 모두 해결하는 차박은 거리두기에 최적화된 여행이다. 차로만 방문이 가능한 이색 명소를 들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터넷 카페 ‘차박캠핑클럽’ 운영자 ‘둥이아빠’의 추천에 따르면, 차박의 대표 명소는 충북 충주 목계솔밭이다. 광활한 대지에 화장실과 개수대 등 편의시설을 모두 갖춰 그야말로 차박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충주 수주팔봉 캠핑장과 삼탄유원지, 양평 광탄유원지, 여주 신륵사 등이 차박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숨은 여행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뉴노멀 시대의 또 다른 트렌드는 동네 걷기 여행. 동네 걷기 여행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콘텐츠는 카카오TV의 웹 예능 ‘밤을 걷는 밤’이다. 밤을 걷는 밤은 가수 유희열이 서울의 밤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담아낸 프로그램으로, 익숙한 거리에서도 색다른 매력을 찾아내 보는 묘미가 있다. 때로는 정해진 방향 없이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 우연히 멋진 풍경을 만나면 멈춰서 감상도 한다. 부담 없이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듯한 편안한 콘셉트 때문인지 2020년 12월 기준 누적 조회수가 560만 회를 돌파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언제쯤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까. 아직은 미지수다. 이렇게 애쓰며(?) 노는 게 마스크 없이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는 여행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배낭을 챙기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여행을 즐겨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될 수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 거리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인 가을 인사동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국으로 돌아왔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덕수궁 돌담길, 인사동, 삼청동, 남산 가리지 않고 걸어 다녔던 내 젊은 시절의 거리들이 오늘 하루 종일 행복 세포를 일깨우며 알알이 기억을 일깨웠다. 늦은 밤까지 스산한 거리를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따스한 차 한 잔 앞에 놓고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재클린의 눈물’(Les Larmes de Jacqueline: Jacqueline’s Tear)을 듣고 있다.
유독 가을이 좋다. 형형색색 화려한 옷을 갈아입은 자연을 보는 순간만큼은 걱정도 괴로움도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더 흐느적흐느적 돌아다니고 싶다.
얼마 전 공주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다 문득 마곡사 표지판을 보는 순간 그곳의 가을을 보고 싶어 운전대를 돌렸다. 지난해 겨울바람 불던 어느 날, 마곡사 대웅전 옆 돌계단 위에 가만히 앉아 바람에 부딪혀 ‘찰랑찰랑’거리던 풍경소리가 갑자기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풍경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정지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 적막함과 평안함도 그대로 말이다. 오래된 사찰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내 취미의 시작은 아마도 산사의 풍경소리에 매혹됐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면, 화려한 연등은 의외로 흥을 돋운다. 적막함 속 고요한 산사와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고색창연한 기와에 화려한 연등은 안 어울리는 듯 어울리며 품격을 더해준다.
그래서 삶에 지친 이들이 산사에 가면 위안과 평안함을 얻고 그곳에서 잠시 평화를 얻은 후 돌아갈 곳에서의 인연을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찾은 마곡사는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품위 있고 격조 있는 마곡사의 가을 사진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워낙 전통 있는 사찰이라 많이들 알겠지만 마곡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한때 출가해 승려 생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해 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 하은당 스님 제자로 출가해 원종이란 법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묵었던 전각은 ‘백범당’이라 불리고 있다. 백범당 바로 옆에는 김구 선생이 해방 직후인 1946년, 50여 년 만에 다시 마곡사를 찾아,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들과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당시 김구 선생은 마곡사의 대법당인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주련은 사찰이나 서원 또는 한옥의 기둥이나 바람벽 등에 장식으로 붙이는 글씨를 말하는데 이 기둥에 시구를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고 부른다. 불교사, 서예사,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산사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말씀이나 고승들의 말씀 등을 적어 걸어놓는다.
마곡사에 가면 대법당 대광보전 주련에서 이 문구를 한번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싶다. 김구 선생이 감개무량했다는 주련 문구가 마곡사 표지판에 소개돼 있다.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
발걸음 닿는 곳 구석구석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이 땅. 한국의 가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 지겨운 이, 오늘 당장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을 사각사각 밟아보자. 가을을 품에 가득 안는 것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날, 우리 인생의 앞날에 그 무엇이 무서울까? 무서울 게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패자의 역사는 폐허 더미에 묻히거나 전설로만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일까? 기를 쓰고 남을 짓밟아 승자로 남고 싶어 하는 이들은 유독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높은 탑을 쌓고 더 큰 영토에 집착하며 영역 표시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 역사는 승자를 주로 기록하지만 패자에게도 눈길을 준다. 아니 후세의 이야기꾼들은 승자보다 패자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며 가슴 절절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태생적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이야기꾼들의 귀는 승자보다 드라마틱한 패자의 삶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쓸쓸하기만 했던 부여 유적지, 미륵사지 복원으로 옛 영광 되찾아
옛 부여가 지배했던 지역을 여행할 때면 어쩐지 쓸쓸하다.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졌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 역사 현장들은 남루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웅진백제 시대의 도성이었던 공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가 1990년 가을. 공주에 가면 으레 그곳에 가야 한다는 일행을 따라 방문한 무령왕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역사적인 유적지, 옛 부여의 왕이 묻혀 있는 지하 무덤방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관람객을 차단하는 유리벽이 있었지만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론 왕의 무덤을 봤다는 두근거림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역사적 유물 현장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다는 것이 너무 위험해 보였다. 결국 1997년경 유리벽에 곰팡이가 생기고 물이 새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송산리 고분의 석실 관람이 전면 금지됐다. 현재는 모형전시관에서만 그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 돌아와 근 26년 만에 다시 공주 송산리 고분을 방문했을 때 무덤방 개방이 전면 금지된 것을 알고 아쉽기는 했지만 이제야 제대로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도굴꾼보다도 더 졸속으로 17시간 만에 유물들을 꺼내 옮겼다는 무령왕릉 발굴은 두고두고 한국 고고학계의 수치이자 치욕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당시 발굴 단장이었던 서울대 고고학과 故 김원룡 박사의 회고록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고구려 유적지는 대부분이 북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 비교 대상이 신라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백제의 유물들만 유독(?) 수난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도 든다. 사실 경주를 방문할 때 느끼는 깔끔하고 웅장한 박물관이며 유물 단장 상태를 보면 이런 의혹이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의혹을 한순간에 없애주는 곳을 다녀왔다. 익산의 미륵사지 터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조선총독부가 무너지기 전의 미륵사지 석탑을 실측하고 무너져 내린 석탑 뒷면을 콘크리트로 땜질해 세워놓았다.
지난해 4월 말, 몰락한 왕조의 찬란한 유산이 마침내 20년간의 해체와 복원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 준공식을 한다는 기사를 본 후,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익산 여행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전남 지역을 한 번 훑고 전북을 돌아다녀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차일피일 늦어졌다. 그러던 차에 지난 7월, 전남 장성 필암서원을 취재차 가야 할 일이 생겨, 벼르고 벼르던 익산 여행을 코스에 넣고 일정을 짰다.
미륵사지 동석탑, 일본의 호류지 목탑과 유사해 깜짝 놀라
마침내 익산 미륵사지 터를 방문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 끝자락 주중이라 그런지 찾는 이도 없었다. 고즈넉한 미륵사지 터 곳곳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복원해놓은 미륵사지 동석탑을 보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석탑이 자꾸 떠올랐다.
2016년 일본 교토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교토 여행 마지막 날, 나라 현의 호류지를 찾아가기 위해 일본 시골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기억이 샘솟았다. 호류지에서 봤던 5층 목탑과 그 위의 풍탁까지… 복원해놓은 미륵사지 동석탑의 모습이 호류지에서 봤던 목탑과 형태가 정말 똑같았다.
당시 교토를 건너가기 전 한국에서 경주 여행을 마치고 다음 날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해의 여행은 마치 천년의 시간과 공간이 건너뛴 듯 아주 특별하고 소중했다. 이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미륵사지 터에 복원된 동석탑을 보는 순간 4년 전 뜨거웠던 그해 여름, 찾는 이 없이 적막했던 호류지 사찰 경내의 그 목탑이 불현듯 떠올랐다.
백제와 고구려 장인들이 건너가 전수한 일본 아스카 문명의 꽃 ‘호류지’
일본의 아스카 문명을 꽃피웠던 쇼토쿠 태자에 의해 창건된 호류지(법륭사)는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세계적 불교문화의 보고다. 호류지 본당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호류지의 박물관인 대보장원에는 백제에서 선물했다는 설과 백제의 후예가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대형 목불상 ‘백제관음상’이 보존돼 있다. ‘일본관음상’이 아닌 ‘백제관음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면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가 일본에까지 건너가 꽃을 피웠던 건 분명해 보인다.
호류지의 금당 내 벽화는 고구려 승려 화가인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데, 1945년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아쉬운 대로 소실되기 전 촬영해놓은 사진을 근거로 디지털화된 3D금당벽화를 인터넷에서 감상할 수 있다.
동양 최대 미륵사지 석탑, 해체와 복원 20년 걸려
미륵사지 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감상해야 할 석탑은 당시 모습을 유추해 복원한 동석탑이 아니라 머리 부분과 위의 두세 층이 사선 모양으로 비스듬히 허물어진 서석탑이다. 국보 제11호, 동양의 최대 석탑이다. 20년 동안 일본이 뒷면에 발라놓은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본래 모습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치아 스케일링 기계까지 동원해 콘크리트의 흔적을 말끔하게 벗겨내, 마침내 1910년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문화자원을 조사하면서 유독 백제 문화 유적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미륵사지 석탑을 실측하고 빽빽하게 조사 보고서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미륵사지 터를 발견하고 조사할 당시 동석탑은 이미 무너져 내려 흔적만 남아 있었고 힘겹게 남아 있던 서석탑도 무너져가는 상태였다고 한다.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된 사리장엄구 등 볼거리 풍성해
일본이 미륵사지 서석탑 뒤에 콘크리트를 발라 세워놓은 것은 자신들의 본류를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였을까? 국립 익산박물관에는 뒷면이 콘크리트에 쌓인 채 흉물스럽게 숨 쉬고 있던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해 복원하기까지 걸린 20년간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서석탑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출토된 유물들도 전시돼 있다.
또한 익산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다큐멘터리(문화유산 채널 K-HERITAGE TV 제작)를 통해,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석탑 등을 촬영한 사진을 보며 백제 문화와 유적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몰락한 왕조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권력과 무상함 깨우치는 곳
7세기 백제의 무왕이 왕비의 청으로 불사를 일으켰다는 미륵사지.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이 나타나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대규모 사찰 미륵사지는 왕조의 몰락과 함께 오랜 시간 몰락과 소멸의 길을 걷다가 기적적으로 환생했다. 물론 똑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곳을 거닐며 고증에 입각해 해체와 복원을 하며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되살리기 위해 쏟았을 문화재 보존 관련자들의 정성을 느껴본다. 몰락한 왕조의 유물이 이제야 온전히 평가받고 그에 걸맞게 대접받고 있다는 안도감도 든다.
넓이가 5만 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 절터였다는 미륵사지. 양쪽의 석탑과 가운데 목탑, 가람도 3개나 있었다고 한다. 3탑 3금당의 구조로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했다는 미륵사지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절터 뒤편을 병풍처럼 막아서고 있는 안개 머금은 미륵산 자락과 주춧돌로 옛 영광을 유추해보며 광활한 절터를 걸어봤다.
흔적 없이 사라진 화려한 유물 대신, 세월의 이끼 낀 주춧돌만이 시간의 영겁과 헛되고 헛된 화려함을 누르고 2020년 후손들을 만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