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한반도와 만주에 살고 있던, 오늘날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우리 선조들 간에 말이 통했을까?
언어의 진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오늘날 어린아이들이 하는 말을 어른들이 못 알아듣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천년 넘게 고립되어 진화되어 온 제주도 방언을 본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하다. 산이나 강으로 나눠진 채 교류가 없이 지나온 삼국시대 선조들 간의 말이 다를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삼국시대는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삼국 간에는 물론이고 말갈, 부여, 낙랑, 마한, 진한, 변한, 가야, 왜 등 주변 국가들과도 끊임없이 접촉하고 충돌하면서 일면 국제정치의 냉혹함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 시기였다.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어이다. 같은 말을 쓰고 서로 간에 말이 통하면 ‘우리라는 감정(we-feeling)’을 느끼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야만인’은 우선 그리스 말을 쓰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는 이어인(異語人)을 말한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고유한 지식과 역사, 세계관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문화적 보편성으로, 나아가 오늘날 관점에서 ‘민족’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삼국 간에는 사신이 수시로 교환되었다. 과연 이들이 ‘한국어’의 초기 단계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말’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글’은 중국의 ‘한자’만으로 교신했을까? 필자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에 나타난 기록들로부터 유추해 보았다.
자세히 읽어보면 는 삼국 간의 접촉을 기술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표현은 파사 이사금 26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고구려 동천왕 22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등이다. 이 사례들은 이들이 어떤 ‘말’이나 ‘글’로 의사소통을 했는지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은 어떤가? 내물왕 18년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百濟王移書曰]’,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기를[答曰]’, 눌지왕 34년 ‘고구려 사자가 와서 말로 통고하기를[使來告曰]’, 고구려 장수왕 12년 신라의 사신을 ‘왕이 특별히 두텁게 위로했다.[王勞慰之特厚]’,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승려 도림이 ‘문 앞에서 고하기를[詣王門告曰]’, ‘왕을 모시고 앉아 조용히 말하기를[從容曰]’ 등은 표현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삼국 간에 어느 정도 의사표현이 자유스러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열전’ 제1 ‘김유신’ 편에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치자고 청한 데 대해 고구려가 거부하는 대화가 나온다. 이후 옥에 갇힌 김춘추가 고구려왕이 총애하는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을 주고 두 사람은 토끼와 거북의 설화를 주제로 ‘농담을 나눈다’ 그리고 ‘석방되어 신라 국경을 넘으면서 고구려 호송인에게 그들을 속였음’을 말한다.
고구려는 개로왕을 잡아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곧 죄목을 헤아린 다음’ 죽였다. 백제 항복 당시 신라 태자 김법민(金法民, 후일 문무왕)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夫餘隆)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꾸짖는다’. ‘열전’, ‘김인문’ 편에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보장왕이 잡히자 ‘인문이 고구려왕을 당의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헤아려 꾸짖었다. 고구려왕이 두 번 절을 하자 영국공이 그에게 답례했다’. 김인문은 보장왕에게 직접 말을 했으며 영국공은 보장왕이 절을 하자 몸짓으로 답례했다는 것이다. 그 외 백제 무왕(武王)인 서동(薯童)과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 ‘기이’ 제2) 등,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많다.
삼국 간 언어의 차이는 오늘날 서로 다른 방언 정도인 듯하며 이를 극복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오늘날 언어에 관한 간단한 이론 한 가지를 덧붙여 보자. 에 관한 연구로 알려진 앨버트 메라비언은 3V 이론을 제시한다. 얼굴을 마주보는 대화에서 상대방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언어의 의미(verbal 혹은 words)가 7%, 말의 억양(vocal 혹은 tone of voice)이 33%, 표정(visual/ facial, body language)이 55%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말의 ‘언어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혹은 말의 억양을 ‘느끼고’ 상대방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의미’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남녀가 싸울 때 여자가 “I hate you(난 네가 싫어!)”라고 해도 남자는 오히려 섹시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최근 국어학자들은 34~37권에서 삼국의 지리가 한자로 기록된 것을 거꾸로 유추하여 당시의 우리말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글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원래의 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 많은데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서 그 기원을 추적하면 삼국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진(秦)에서 수-당 시대 중국어의 변천과 우리말의 변천을 통해 우리말의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인데, 설명이 전문적이어서 필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44권에 나오는 ‘居柒夫 或云 荒宗(거칠부 혹운 황종)’은 ‘거칠 황’ ‘부와 종은 우두머리’라는 걸 이해하면 ‘거칠부라고 발음하고 (혹은) 이것은 황종으로 쓰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국어에서 ‘거칠’은 ‘거츨’로 발음된다. 그러면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는 이를 어떻게 발음했는지, 또 ‘거칠’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삼국이 비슷하게 사용했는지 등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 단서는 중국 ‘24서’ 중 하나인 , ‘동이열전’, ‘신라’ 편에 나온다. ‘신라는 문자가 없고 나무를 조각하여 편지를 했다. 말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는 구절이다. 중국인들이 신라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이 통역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백제인과 신라인 간에는 서로 말이 통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삼국 중 경제나 안보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백제가 제일 먼저 멸망했다.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군이 덕물도에 도착한 것이 660년 6월 21일, 당군이 전투를 시작한 것이 7월 10일, 그 하루 전인 9일 황산벌 전투가 있었고, 12일 부여성이 포위되며, 13일 의자왕이 공주성으로 탈출하지만 18일 항복한다.
당군이 백마강에 나타나서 사비성을 에워싼 지 6일 만에, 신라와의 황산벌 전투 후 9일 만에 백제는 사라진 것이다. 한 달이 안 된다. 8월 2일 백제 왕궁에서 열린 승리 축하연에서 단 아래 앉은 의자왕은 단상의 김춘추와 나-당 장수들에게 술을 치는 모욕을 당하고 곧 당나라로 끌려간다.
신라군은 백제인들을 어루만지면서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다. 무열왕과 아들 법민(후일 문무왕) 등 신라의 최고위층 조차 딸과 누이를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잃었다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도층이 이러니 승리감에 도취한 일반 군졸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학살하여 쓰러진 시체가 풀더미같이 쌓였다.
당은 백제 처리에 대해 명확한 로드맵이 없었던 것 같다. 고구려 공격을 위한 후방 기지가 제일 목표였지만 백제 지역 평정을 위해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의 부용국(속국)으로 존속시키거나 신라와 대등한 지위로 만들려 했다. 당은 663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을 당에서 데려와 웅진도독과 백제군공으로 임명하고 문무왕과 동격으로 백마의 피를 머금는 맹약을 맺게 한다. 부여융은 문무왕이 태자 시절 백제의 항복을 받으면서 말 아래 꿇려앉혀 침을 뱉으면서 모욕을 준 인물이다.
이 모든 상황이 백제 부흥운동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었다. 백제인들은 왕조의 멸망이 ‘한순간의 실수’로 일어난 것일 뿐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신라와의 전쟁은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서양에서 가장 비겁한 행위로 간주되는 ‘뒤에서 등을 찔린 것(die Dolchstoß Legende)’과 같이, 얼떨결에 뒤통수를 맞고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전에는 빌빌거리던 놈들이 집을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정신을 차려 한번 진검승부를 해보자고 나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우리의 역사에서 실패한 에피소드나 소극(笑劇)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인 것이다.
부흥운동은 멸망 직후 곧 시작된다. 부흥군은 오늘날 대전 유성구와 무주 일대에 진을 치고 당군과 신라군을 공격한다. 무주는 부여-웅진을 잇는 수도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8월 26일 나-당 점령군은 예산의 부흥군을 공격하지만 이기지 못했다. 반대로 부흥군이 9월 23일 사비성에 있던 동료들을 탈취하고 부여 남령(금성산)에 올라 보란 듯이 영채[木柵]를 세우고 사비성을 공격하자 20여개 성이 호응한다. 신라는 10월에 무열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선다. 부흥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다음해 661년 2월 황산벌에서 전사한 관창(官昌)의 아버지 김품일(金品日)이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구원하지만 백제군의 기습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보자. 부흥운동이 왕조의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면 의자왕을 계승할 왕을 세우고 흩어진 부대들을 중앙의 지휘 아래 흡수하며 수도 사비성을 탈취하고 가능하면 많은 성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키우는 등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야 할 것이다.
초기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 )과 장군 부여복신(扶餘福信), 승려 도침(道琛) 등이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많은 부흥군 부대가 백제의 부활을 확신한 듯 부여풍의 지휘 아래 들어왔다. 그러나 661년 3월 부흥군이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면서 신라군과 벌인 웅진강 어귀 전투에서 1만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임존성으로 퇴각한다. 신라군 역시 군량이 떨어져 물러난다.
무승부로 끝난 것 같은 이 전투에서 병력 보충이 어려운 부흥군은 치명적 손실을 입으며 이것이 부흥운동의 전환점이 된다. 마치 1908년 의병 부대들이 서울 30리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퇴한 후 의병의 기세가 꺾인 것과 비슷하다.
의자왕을 계승하는 왕을 세우는 문제는 그의 아들인 부여풍을 영입함으로써 순조로이 해결된 것같이 보이지만 함정이 있다. ‘일본서기’는 661년 8월 ‘복신이 (부여풍을) 마중 나와 절하고 국정을 위임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실력자가 명목상의 군주를 맞이한 것이었다.
각지의 부흥군들은 통합되지 못하고 ‘독립 왕국’으로 존속했으며, 도침이나 복신은 스스로 ‘장군’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당의 사자에게 거만한 자세로 “등급이 낮아 일국의 대장인 나의 상대가 아니다”라면서 답장도 없이 돌려보낸다. 군사적 대치상황을 외교를 통해 풀어가면서 백제 부흥이라는 최종 목표로 나아가는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다. 도침은 백제가 이미 회생한 것같이 ‘일국’의 대장이라고 거드름을 피우지만 험준한 주류성에 처박혀 만족하는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당군은 후방을 평정하면서 지구전으로 이들을 옥죄는 전술을 택한다.
부흥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내분이었다. 부여복신과 도침이 서로 경계하는 가운데 부여풍은 조정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양측의 갈등은 서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인식될 정도로 커졌다. 먼저 도침이 당한다. 부여풍도 복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제의(祭儀)나 주관할 뿐 실권을 가지지 못한 존재로 전락하자 불만이 증폭된다. 복신이 병을 핑계로 부여풍을 유인하자 부여풍이 선수를 쳐서 그를 제거한다. 부흥운동의 중앙을 지휘하던 3명 중 2명이 사라진 것이다. 이 현상이 권력집중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겠지만, 부흥군의 분열을 가속화함으로써 부흥운동은 더욱 약화된다.
663년 초 주요 거점에서 저항하던 부흥군이 항복함으로써 백제의 전선은 급속도로 무너진다. 뒤늦게 8월 백제 부흥을 위해 일본 지원군이 금강하구 백강구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과 싸우지만 패배한다. 일본 지원군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부흥운동이라는 관점에서는 안티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용문사 가는 도로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도로 양 편으로 길게도 이어진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만추의 여정이 가득한, 휘어진 길. 그 뒤로 아스라이 옛 추억 한 자락이 떨어지는 낙엽 위로 오버랩된다. 형형색색으로 변한 산야 속에 유난히 노란 단풍잎이 눈을 시리게 한다. 이렇게 도로변에 은행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용문사에 노거수 은행나무가 성성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려주려 함이었으리라.
◇ 단풍 든 한적한 산길에서 만난 정지국사부도
용문사의 가을은 화려하다. 해마다 이곳의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기 위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든다. 주차비(소형 3000원)와 입장료(성인 2000원)를 내고부터는 누구나 걸어야 한다. 입구 쪽에 단풍 든 공원 앞으로 2007년에 개관한 양평 친환경 농업박물관(용문면 신점리 508-10, 070-7715-3796, http://sam.go.kr)이 있다. 옛 성루를 연상케 하는 한옥 모양의 박물관 앞으로 분수가 솟구친다. 유치원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눈 속에는 감성이 많이도 묻어 있는 듯하다. 실내에는 양평역사실과 친환경농업실이 있고 사찰요리를 만들어보는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주변의 공원에는 아이들 취향인, 귀여운 조형물과 시비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사자상 양 귀 쪽으로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모습도 해학적이다.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이지만 이번 여행길에는 곧추 정지(正智)국사부도 팻말(0.5㎞)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산길은 큰 도로와는 달리 한적하다. 아직 걸음이 서투른 유치원생들과의 눈높이 대화가 싱그럽다. 부도까지 올라가야 하는 길목은 붉은 단풍이 에워싸고 있다.
우선 정지국사탑비를 만난다. 비문은 권근이 지은 것이라지만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버렸다. 80m 정도 오르면 정지국사부도(보물 제531호)가 홀로 있다. 정지국사(1324∼1395)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 8세 때 장수산 현암사로 동진출가(童眞出家)했다. 바로 선을 닦다가 능엄경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민왕 2년(1353)에는 무학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스승으로 한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1356년, 귀국해서는 은둔하면서 수행에만 힘썼다고 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제자 조안이 이곳에 부도와 비를 세웠고, 나라에서는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개풍 영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사찰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무수한 돌탑이 있다. 넓은 터에는 ‘산사무공(山寺武功)’이라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무공 템플스테이가 펼쳐지는 곳이며 108탑을 조성하는 듯하다.
◇ 국내에서 가장 큰 용문사 은행나무는 단풍 들기도 더뎌
조금 더 내려오면 용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경내의 건축물과 함께 단풍 든 용문산(1,157m)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50m, 둘레 12.3m)에 눈길이 머문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 전해오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수령이 대략 1100여 년에서 15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정미의병 때 톱을 댔더니 피가 났고, 불을 질렀을 때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던 신목(神木). 노익장을 과시하듯 잎이 무성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단풍도 더디 든다.
경내 약수에 목을 축이고 잠시 둘러본다. 이 사찰은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진성여왕 6년(892)에는 도선국사가,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세종 29년(1447)에는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대적으로 중건했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그 후 왜군이 전소시켰고 6·25 때도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을 비켜날 즈음, 찻집 솔내음, 다래향에서 맛있는 대추약차의 그윽한 향내에 취해보거나 용문산 정상까지 산행을 해도 된다.
◇ 상원사에 오르면 속세의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
굳이 산행을 안 해도 된다. 찻길이 잘 나 있기 때문. 상원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불부터는 민가가 사라진다. 울창한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갈 수 있는 임도 운전이 아슬아슬하지만 잠시 차를 멈출 수 있는 공간이 반갑다. 시원한 물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곳에도 아름답게 단풍이 들었다. 물소리, 새소리, 단풍 숲까지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길이다.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싶을 생각이 절로 드는 곳. 찻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누군가 정성스레 가꿔 놓은 텃밭, 작은 연못,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 잘 쌓은 돌담이 해사한 웃음으로 반긴다.
돌계단을 따라 경내에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3층석탑을 에둘러 대웅전, 선방으로 이용되는 청운당, 요사채인 제월당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삼성각이다. 절 마당, 트인 공간 저 멀리 용문산 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상원사는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보우선사(1301∼1382)가 여기 머물며 정진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조안선사가 중창했으며 무학대사(1327~1405)가 왕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효령대군(1396~1486)은 원찰로 삼았다. 세조 8년(1462)에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찾아왔다가 중창불사를 했다고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순종 원년(1907)에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다가 1918년에 복원했으나 6·25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이후 1969년이 되어서야 주지 덕송이 초막삼간을 짓고 복원에 착수, 1970년에 주지 경한니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사자석상을 닮았지만, 정확한 형태가 아닌, 예사롭지 않은 조형물이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한데 조합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또 사찰 내에는 철조 여래좌상(경기문화재자료 제119호)이 있다. 상원사 가까이 있는 윤필암은 고려 중엽 모덕이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 보릿고개 연수리 정보화 체험마을의 돌담 따라 걷기
상원사에서 내려오면 ‘연수리 보릿고개 정보화 체험마을’을 만난다. 연수리는 연안마을과 장수마을을 합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수골’이라고 불렸다. 현재 보릿고개마을은 성공한 정보화마을이다. 다양한 체험거리는 계절에 맞추어진다. 봄에는 산나물 채취, 냉이 캐기를 하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가을에는 밤 줍기와 등산을, 겨울에는 청국장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한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돌담장에 형형색색으로 색칠해 볼거리를 준다. 사계절 체험객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슬로푸드 음식체험이 인기다. 보리떡 직접 만들어보기, 지천에 난 쑥을 직접 뜯어 쑥떡 만들기, 농민들이 재배한 국산 콩으로 두부 만들기, 잘 익은 호박으로 호박밥 지어 먹기 등. 체험객들이 늘 찾는, 성공한 체험마을이다.
마을을 비켜 용문으로 오는 동안에도 눈이 시리다. 곳곳에 멋지게 지은 전원주택들이 구슬처럼 박혀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그리고 경기도 영어마을 양평캠프도 있다. 실제 미국 버지니아의 마을을 재현한 이국적인 캠퍼스다. 그래서 와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학습 목적이 아닌 관광객들은 6000원이라는 입장료를 감수해야 한다.
용문면에도 할 거리가 있다.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용문면 삼성리∼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또 용문장날(5일, 10일)도 볼만하다. 국철이 생기면서 장날은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다. 지역에서 나오는 가을 특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Travel Tip
- 주소
용문사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문의 : 031-773-3797, http://www.yongmunsa.org
상원사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220-5, 문의 : 031-773-4634
보리울체험마을 문의 031-774-7786, http://borigoge.invil.org
기타 문의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 031-773-5101
- 찾아가는 방법
자가용 서울 → 6번국도 이용 → 마룡교차로에서 341지방도로로 좌회전 → 덕촌삼거리에서 직진 → 용문산 관광단지 주차장
대중교통 수도권전철 중앙선이 용문까지 운행(2009년 12월 개통)되고 있다. 용산역~용문역(05:20~22:58) 약 1시간 30분 소요. 용문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용문사, 연수리행 등 각 방향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 용문시외버스터미널 : 031-773-3100, 용문역 : 031-773-7788
- 추천 맛집
용문산 입구에 중앙식당(031-773-3422), 한마당식당(031-773-5678), 용문산식당(031-773-3434) 등 산채요리 음식점이 있다. 그외 용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무쇠솥에 오랫동안 달여 낸, 국물 진하고 고기 넉넉한 고바우집(031-771-0702, 설렁탕)을 비롯하여, 이북식 만두가 맛있는 회령만두국(031-775-2955)이 괜찮다. 용문읍에 있는 강원식당(031-773-4459, 막국수, 묵채밥 등)도 괜찮다.
- 주변 볼거리
용문산에는 용계, 조계골(신점1리)이 있다. 또 용문면에서는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2010년 5월 3일 개장되었고 용문면 삼성리에서 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간신히 연락이 닿아 원고를 청탁했더니 “나는 컴퓨터도 안 하고 육필로 쓰잖여. 글씨도 못 알아볼 건데 그냥 됐시유. 내가 보니께 나랑 안 맞는 것 같유. 그 책하고는. 난 부족한 사람인디. 글 못 쓰니께 다른 선상 알아봐유. 난 하루도 술 없이는 못 사는구먼그려.” 구수한 충청도 말씨에 그대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사양하던 작가 김성동은 고색창연한 200자 원고지(金聖東이라고 인쇄돼 있다)를 노끈으로 묶은 글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문학은 삶과 우주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지”라는 그의 육성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아카시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막걸리 받아 큰 슬픔을 안고 사는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총소리였다. 총소리는 잇달아서 들려왔다. 사타구니에 꼬랑지를 말아들인 삽살개가 마룻장 밑으로 숨어들었고, 삼키면서 길게 끄는 동네 개들 울음소리만이 높이 떠서 흩어지고 있었다. 불에 덴 것처럼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아낙이 속적삼을 헤쳐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렸다. 등꼬부리 노파가 두 팔로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를 끌어안았고 공포에 질린 눈길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던 식구들 눈길이 사방으로 돌려졌다.
*해설피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1950년 첫 때. 조선 나이로 네 살이었으니, 이 누리에 벌레몸을 받아 태어난 지 꼭 2년 8개월 되던 때였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중생에게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은 네 살 적부터인데, 총소리이다.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이 총소리라는 것이 얄망궂다. 꼭 무슨 팔자소관인 것만 같아 눈앞이 부우옇게 흐려오니, 운명인가. 전정(前定)된 명운(命運) 말이다. 저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 같은 것. 그것으로부터 이 중생 살매는 비롯되었으니까. 아직 이빨도 다 솟지 않은 네 살짜리 어린 것 넋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던 그 총소리 말이다.
아버지는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
총소리를 듣던 때가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중생은 영 입을 열지 않는 것이어서 벙어리인 줄 알고 큰 걱정들을 하시는 판이었는데, 느닷없이 입을 열더라는 것이다. 마당에 깐 멍석에 둘러앉아 식구들이 막 저녁상을 받는데, 멍석 가장자리를 기어 다니던 아이가 한밭[대전]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세 차례나 부르짖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조선정판사 사건’이라는 미 군정과 그 사냥개들이 쳐놓은 덫에 치여 절망적 ‘피고회의’나 하던 리관술(李觀述)·송언필(宋彦弼) 선생 같은 선배 독립운동가들이며 인민 계관시인 유진오(兪鎭五)선생, 그리고 10월항쟁·여순항쟁·4·3항쟁을 비롯한 지리산·태백산·일월산 같은 재산인민유격대 *싸울아비들과 함께 총하지혼(銃下之魂)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정(而丁)선생[朴憲永]의 비선(秘線)으로 대전·충남 지역 조직장인 아버지가 대전형무소로 끌려가셨던 것은 당신 나이 서른두 살 때인 1948년 늦가을이었다. 리승만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운 뒤였다. 평양행과 지리산 입성을 놓고 손톱여물을 썰던 끝에 얼굴도 못 본 자식놈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들렀던 고향집에서 당신을 맞이한 것은 벌써 몇 달째 그물을 치고 있던 서청(서북청년단) 출신 서울시경 특별경찰대였던 것이다.
뒷동산으로 피란 갔던 그때 이야기를 썼던 것이 『그해 여름』이라는 단편소설이다. 군사깡패들한테 잡지를 폐간당하고 나서 무크지로 박아냈던 에 실렸던 것이니, 꼭 30년 전이다. 그 소설이 어떤 유명한 친왜작가 이름을 딴 문학상에 후보작으로 올랐으나 심사위원 모두 입을 다물었다고 하니, ‘반미소설’이라는 것이었다. 조치원·대전 방어선이 무너지며 금강방어선으로 뒷걸음질하던 북미합중국 병대가 보령·청양 경계인 화성장터에서 양키병정·토인병정 구경나온 아녀자 여남은 명을 죽였던 참이야기를 바탕삼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딴 이야기인데- 요즈음 이른바 문학상이라는 것이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등단해서 십년만 되면 적어도 서너 개씩 문학상을 목에 걸고 흰목 잦히는 작가들이다. 작가를 장삿속으로 써먹으려는 속셈을 보고 어떤 문학상을 거부했던 것이 1983년이었다. 물론 소설 됨됨이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이른바 등단 40년임에도 무슨 창작기금과 절집동네에서 주는 무슨 상 말고는 하나도 받아보지 못한 중생이므로, 더구나 눈에 밟히는 『그해 여름』이다.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른 다음부터 떠오르는 것은 배고픔이다. 할아버지는 손님이 오면 꼭 아비 없는 손자를 사랑방 명색으로 불러 “이 으른께 절허구 뵙거라.” 그리고 식구들은 쫄쫄 굶는데도 꼭 진지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들여놓는 손님 진짓상을 보며 이 중생은 눈을 꼭 감았다.
주칠이 벗기어져 희뜩희뜩한 개다리소반에는 보리가 조금 섞이고 검정콩이 박힌 옥 같은 쌀밥과 췻국 한 대접, 그리고 김치와 호박무침에 간장과 고추장 보시기가 놓여 있었다. 재게 오르내리는 수저를 바라보던 이 중생은 미주알을 눌러 막고 있던 두 발꿈치에 힘을 주어야만 하였으니, 거시침이 흐르면서 그만 힘도 내음도 없는 물방귀가 비어져 나왔던 것이다. 서른 날에 아홉 끼밖에 못 먹는 *애옥살이일망정 손이 오면 꼭 진지대접을 하고 먼 길 온 과객한테는 *사슬돈푼이나마 노잣닢까지 쥐어주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집은 가난도 비단가난이었다.
나의 소설은 어머니를 위로해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살그미 눈을 떠보니 밥주발은 반 넘어 주욱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목예반에 숭늉대접을 받쳐든 어머니가 들어오셨고, 아흐. 저이가 숙냉이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남겨진 밥은 내 차지가 되는 겨. 그만 상을 내가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떨어지기만을 목젖이 녹아들게 기다리고 있는데, 얼라? 숭늉 한 모금을 마시고 난 그 늙은 과객사람은 숭늉을 밥그릇에 부어버리는 것이었고, 으아앙! 꼴깍 소리가 나게 생침만 삼키고 있던 이 중생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던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으니, 업(業)이었던가. 배고픔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외로움이었고, 외로움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 때문이었지만 백지에 먹물이 찍힌 것이라면 콩나물을 싸온 신문지 쪼가리까지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백자 원고지로 쉰 장쯤 될 소설을 써보았던 것은 온전히 끔찍한 고문후유증의 우울증으로 괴로워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였다.
“슬프구먼그려. 겁나게 슬프다니께.”
“온 삭신 사대육신 팔만사천마디가 죄 자귀루 죅여놓은 조긧대갈 같다”고 네 방구석을 맴돌면서도 자식이 지었다는 소설을 낭독으로 들으며 엷은 살푸슴(미소)을 보여주시던 기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데, 주인공이 서울로 가는 장면에서 그 소설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을 그려볼 재주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말하는바 리얼리즘이 뭐고 모더니즘이 뭔지 알 리 없는 때였으나, 그렇게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이 아니고는 땅띔도 못 하는 것은 그때부터 이미 비롯된 것이었다.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은 상상 곧 *수꿈 꾸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의 변증법을 알았다고나 할까. 그때에 어머니한테 들었던 말이다.
“얘기든 노래든 그저 모름지기 슬퍼야 혀. 그게 진짠 겨.”
칠순 다 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림
망팔(望八)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 잊히지 않는 그림이 있다. 이 많이 모자라는 하늘 밑에 벌레를 소설가로 만들어준 말이기도 하니, 운명인가. 할아버지 손에 잡혀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날 열두 살짜리 그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시 갇혀 있었다는 경찰서 구경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던 끝에 이사 간 집으로 갔는데, 철 이른 가죽잠바를 걸치고 완강한 어깨에 눈매가 사나운 사내가 할아버지를 잡고 일장 훈시를 하던 것이었다. 왜 이곳으로 이사를 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다가 누가 찾아오는지 한 달에 한 번씩 대전경찰서 대공과에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송판쪼가리로 해 단 대문명색 앞까지 배웅 나간 어린아이를 훑어보며 사내는 말하였다.
“붉은 씨앗이로군.”
두 손을 모아 앞으로 잡고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소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안녕히 가셔유우우.”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축댓돌 밑 아랫집에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황덕불빛을 뚫고 무당 사설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허어이이. 리로 리런나. 로리런나. 라리런나. 로런나. 리런나. 어허어이이. 두 발 가진 즘생에 살생부정이로구나. 총 맞은 원혼이요 칼 맞은 원혼이요. 몽둥이 맞은 원혼이요. 포탄 맞은 원혼이요. 신실히 적적히 물리쳐 줍소사. 시위들 하소사. 원통히 죽고 서럽게 죽은 중음신들아. 어서 속히 이승으로 나가서 만인적선하고 돌아오너라.”
다음은 4월 17일 뼈잿골에서 읽을 님들을 기리는 글이다.
뼈잿골의 제망혼문(祭亡魂文)
조선공산당 창건 90주년인 단제개천(檀帝開天) 환기(桓紀) 9285년 4월 17일을 맞아 불초(不肖) 김 아무개와 그 동무(同務)들은 삼가 쓴술 한 잔과 몇 점 보잘 것 없는 제물(祭物)로 눈물의 골짜기에 누워 계신 님들 혼령(魂靈) 앞에 엎드려 슬피 고하나이다.
아, 님들이시어. 님들 떠나신 지 어즈버 65년이 되었으나 못난 뒷자손들은 여태도 그 체백(體魄)조차 건져드리지 못하고 있음이니, 그야말로 비단할아버지에 거적자손이올습니다.
아, 님들은 아주 돌아가시렵니까. 저희들은 상기도 님들이 돌아가셨다고 믿어지지 않으니, 아마도 슬픔이 지나쳐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세월을 떠올리면 어찌 차마 말을 다하겠나이까.
아, 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은 떨리고 손끝은 흔들려서 차마 붓을 놀릴 수 없어 1950년 7월 27일치 기사를 읽어보겠나이다.
(......)
大田市에서도 7月 三,四일 경부터 련 五일간 尾軍의 지휘아래 人民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大田刑務所에는 濟州道麗水順天太白山事件 등의 우수한 祖國 아들딸들이 收監되어 있었다. 이들을 비롯한 七천여명의 人民들을 野獸들은 뒤로 결박하여 명태같이 트럭에 눞혀놓고 최고 一日 八十臺까지 동원하여 대덕군 사(산)내면 랑울(월)리로 운반하여 가소린을 퍼붓고 불질러 방공호로 몰아넣어 참살하였다.
(......)
(*인용된 신문기사는 맞춤법, 띄어쓰기, 종지부 없는 것, 한자 노출 등 그때대로임)
아, 서럽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무들과 힘을 모아 님들이 이루고자 하셨던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이오니, 너무 걱정을 마옵소서. 이 중생이 사바에 있는 만큼 님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옵소서.
아, 인생이 상수(上壽)를 누리는 이는 백년을 살 수 있다지만 그 나머지는 흔히 팔구십세를 넘지 못하는데 이 중생 나이 망팔이 다 되었으니, 인간에 있을 세월이 또 얼마나 되오리까. 아, *고루살이 세상을 위하여 짓는 밥이 채 뜸도 들지 않았는데 한 세상은 살같이 가고, 천지(天地)도 그 끝이 있다는데 산천은 말이 없습니다.
가마귀는 끊어진 솔언덕에 울고 묵은 풀은 우거졌는데, 쓸쓸한 산자락에 엎드려 한소리 통곡을 하니, *푸나무도 함께 슬퍼합니다. 와서 흠향(歆饗)하소서.
*해설피: 해가 질 때 빛이 약해진 꼴, *싸울아비: 전사(戰士)
*애옥살이: 가난한 살림살이
*사슬돈푼: 싸거나 꿰지 않은 흩어진 엽전, 얼마 안 되는 작은 돈
*살그미: ‘살그머니’의 준말로 그루박을 때 쓰던 말. 살그니, 살그래
*수꿈: 낮에 깨어서 꾸는 꿈이라는 죄수들의 은어로 상상을 이르는 말
*고루살이: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겨레가 추구했던 ‘평등세상’. ‘공동체’는 기독교 세상에서 나온 서구 개념임.
*푸나무: 초목(草木)
김성동(金聖東) 소설가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1976년 승려생활. 1975년부터 창작생활. 창작집 『彼岸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만다라』 『길』 『국수(國手)』 『꿈』, 산문집 『염불처럼 서러워서』 『외로워야 한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등.
글 세계음식문화연구원 양향자 이사장
네팔은 중국 티베트 지방과 인도 사이에 위치한 동서로 가느다란 나라로서, 정식명칭은 네팔왕국이다. 열대·온대 기후를 띠고, 히말라야의 산악 민족·티베트인·티베트계 네팔인들이 살고 있으며, 변화가 심한 자연환경과 복잡한 민족·종교(힌두교와 라마교 등)를 가진다. 이와 같이 복잡한 풍토 속에서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인도 요리와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 요리가 탄생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힌두교를 믿고 있는데, 힌두교도는 소를 신성하게 여기므로 쇠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다. 식사 전 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고, 음식은 손이나 젓가락으로 먹는데, 왼손은 부정하다고 여겨 사용하지 않는다.
아열대 기후의 연중농사가 가능한 네팔은 일 년 내내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풍성하다. 특히, 네팔 현지음식뿐만 아니라 네와르, 티벳, 중국, 인도의 다양한 현지음식을 맛볼 수 있으며 야크(네팔 또는 티벳에 사는 소의 일종)우유로 만든 네팔 특산 치즈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본토 유럽인들이 손꼽고 있다.
◇음식 문화의 특징
네팔의 주식은 쌀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식사는 2끼로 아침과 저녁에 밥을 먹는다. 하지만 아침을 먹기 전에는 모닝 티(Morning Tea)를 마시고, 점심때는 빵이나 만두 등 여러 가지 반찬에다가 찌우라(Beaten Rice)를 먹는다. 밥과 콩으로 만든 수프, 야채로 만든 반찬 그리고 피클이 나오며, 이것은 네팔말로 달(콩스프), 밧(익힌 밥), 떠러까리(야채반찬)로 구성된다.
이것을 핫(손)이나 쩜자(숟가락)을 이용하여 먹는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손으로 밥을 먹었지만 서구의 영향으로 점차 숟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달밧은 손으로 먹어야 맛있다. 달밧은 달과 떠러까리 그리고 밥이 잘 비벼져야 제 맛을 내기 때문이다.
아침과 저녁은 잘 먹고 점심은 간단하게 먹으며 계급과 지역에 따라 음식맛과 음식 종류도 약간 다르다. 즉, 열대 지방 사람들은 짜고 맵게 먹지만 추운 지방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달밧은 밥과 야채 그리고 반찬뿐만 아니라 고기반찬도 가끔 같이 먹는다. 고기는 주로 염소고기, 닭고기, 물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는 먹지만 소고기는 못 먹는다. 힌두교 국가인 네팔은 헌법의 규정상 소들을 국가적 동물로 신성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소를 잡아먹으면 헌법에 위반되어 큰 벌금이 부과된다. 물론 돼지고기도 이슬람교를 믿는 자들은 못 먹지만 힌두교 사람들 중에 하급 사람들은 먹는다. 또한 승려들은 고기를 못 먹으며, 상급 사람들은 물소고기나 닭고기를 못 먹는다.
◇네팔의 식사 예절
네팔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가지고 있어 높은 카스트 사람들이 낮은 카스트 사람들하고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지 못한다. 높은 카스트 사람의 집에서 낮은 카스트 사람이 밥을 먹게 된 경우에는 식당 밖에서 먹게 하며, 이 사람이 다 먹고 나서 그릇을 다 깨끗하게 씻어서 갖다 준다. 그런데 그릇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서 돌려줘도 받는 사람이 다시 한 번 씻는다.
이렇듯 네팔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조차 엄격한 예절을 지키는 나라이다. 신분적인 위아래를 나누는 것 외에도 나이에 따라 예의를 갖춘다. 가령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을 경우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먼저 식사를 시작해야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시작할 수 있고, 다 먹고 나서도 순서대로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는다. 또한 다른 사람의 그릇에 손이 닿으면 안 된다.
◇네팔 음식 즐기기
#달밧타카리(Daal Bhat Tarkari): 국(달), 밥(밧), 커리(타카리)가 함께 나오는 음식이다. 네팔인의 식탁은 항상 이 음식으로 준비된다. 마를 갈아 넣은 국은 맛있다.
#탄두리 (Tanduri): 맵게 절인 고기를 숯불에 천천히 구워 먹는 음식으로 보통은 쌀밥과 함께 먹는다.
#모모: 네팔식 만두로 모양도 맛도 우리나라의 만두와 거의 흡사하다.
#속티와: 밥에 섞어 먹는 음식으로 토마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야채를 재료로 하는 산지 마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파룰라: 맵게 절인 물 쇠고기를 숯불에 구워 생강즙을 많이 넣은 양념에 버무려 먹는 음식이다.
#데도: 볶은 옥수수를 넣어 끓이는 죽이다.
◇네팔의 대표적인 추천 요리 - 달밧타카리
커피녹두200g,야채 끓인 물 4C,다진 마늘 2TS,터메릭 1Ts,버터 2TS,머스터드분말 1/3Ts,커리가루 2/3Ts,마른고추(씨뺀 것) 4개,다진 토마토 1개, 다진 양파 1개,소금3/4Ts
1.녹두는 조리질하며 돌을 잘 골라내 씻는다.
2.야채 끓인 물에 녹두, 다진 마늘, 터메릭을 넣고 15분 동안 녹두가 부드러워 지도록 끓인다. 야채 물은 냉장고에서 쓰다 남은 양파, 양배추, 감자, 샐러리 등이 있으면 끓여 건더기를 건져낸 뒤 쓰면 된다.
3.방망이로 익힌 녹두를 찧는다. 알갱이가 씹히도록 하려면 몇 번만 찧고, 크림 상태로 만들려면 입자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찧는다.
4.팬을 달궈서 버터를 녹여 머스터드 분말에 커리 가루와 마른 고추를 넣어 볶아 향을 낸다.
5.마른 고추는 건져낸 다음 양파를 연한 갈색이 나도록 볶은 후 토마토를 넣고 볶는다.
6.녹두를 빻은 것에 (5)를 넣고 끓이면서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요즘 내가 푹 빠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달마도 삼매경이다.
중국에 불교를 포교한 인도 출신의 승려이자 철학자인 보디다르마의 음역으로, 보통 달마라고 줄여 부르는 보리달마(菩提達磨) 대사를 그린 달마도는 중생의 액을 막아주고 사업장이나 집안이 편안과 강녕을 줄 뿐만 아니라 수맥차단과 소원성취를 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달마도를 그리는 것은 그런 이유는 아니고 집중해 붓을 놀리면 마음도 가라앉고 묵은 때가 씻겨내려가는 기분 때문이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보며 내 자신의 문제점도 되돌아볼 수 있는 덤도 있다. 물론 벗들에게 작은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
△이태문
1965년 서울 구로동 출생. 동구로 초등학교, 구로중학교, 관악고등학교 졸업
1999년 와 2000년 으로 데뷔. 에도 작품활동
연세대 국문과 졸.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일본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1997년 도일
도쿄외국어 대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동대학원 외국인연구자, 일본여행문화연구소 공동연구원을 거쳐 게이오대학, 와세다대학, 니혼대학, 무사시노대학, 오츠마여자대학 등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어 강의
번역서는 '백화점' '박람회' '운동회' 등
연등이 꺼지기도 전 이른 아침 여명이 찾아왔다. 얼마 만에 보는 경이로운 풍경인가. 고요한 산사에서의 아침은 그 자체가 보약이요 힐링이다.
“뒤돌아보면 참 미련하게 살았다”라는 말이 절로 나는 곳, 내려놓을수록 많은 것을 가져가게 되는 곳,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진정한 나를 찾게 되는 곳, 이곳은 산사(山寺)다.
여행은 충전이다. 그러나 바리바리 싸들고 떠나, 먹고 취하고 즐기다 보면 오히려 충전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모처럼 만의 여행에서 얻은 건 피로와 스트레스뿐이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사찰이다. “불교에 입문할 것도 아닌데 웬 사찰이냐”고 의아해할 수 있지만, 요즘은 사찰의 기능도 다양해졌다.
일상에 찌든 사람, 정서적 안정이 필요한 사람,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 힐링이 필요한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정기간 사찰에 머물며 사찰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가 여행의 새 트렌드로 떠올랐다.
워킹 산행 중 무심코 지나쳤거나 잠시 쉬어갔던 산사가 이젠 여행의 조연에서 주연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굳이 산사가 아니라도 좋다. 도심 한복판 사찰에서도 템플스테이를 진행하는 곳이 많다.
그렇다고 무작정 사찰로 떠나는 것은 금물이다. 템플스테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가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는 비결이다.
우선 떠날 준비가 됐다면 템플스테이가 가능한 사찰부터 찾아보자.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홈페이지(templestay.com)에서는 템플스테이가 가능한 사찰과 신청방법, 일정 등 템플스테이 관련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홈페이지에서 템플스테이 정보를 제공하는 전국 사찰은 66개로 봉은사(서울 강남구), 화계사(서울 강북구), 묘각사(서울 종로구) 등 서울에만 9개의 사찰이 있다.
사찰에서 수련복을 지급(어린이 제외)하기 때문에 준비물은 의외로 많지 않다. 개인 세면도구와 따뜻한 옷, 운동화 등만 준비하면 된다. 그밖에 귀중품과 현금 등은 가급적 준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찰마다 특색 있는 프로그램도 많다.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는 음식 맛있기로 유명하다. 특히 콩잎 김치에 된장찌개를 비벼 먹는 진관사 밥은 불교 신도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다.
KBS 드라마 ‘세종대왕(2008)’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이곳은 실제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집현전 학자들의 비밀 연구소로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진관사 요리에는 오신채(五辛菜·매운 맛을 내는 다섯 가지 채소)가 없어 깔끔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1박2일 코스에 참가하면 참선과 다담, 발우공양(평상시 승려들의 식사), 예불, 108배 등 기본 코스와 함께 사찰 음식 체험, 연꽃 만들기, 전통 떡 만들기 등 다양한 코스가 함께 들어간다.
경기 양주시의 육지장사에는 살 빼는 프로그램이 있다. ‘다이어트 템플스테이’로도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2박3일 일정으로 거품 뺀 공양과 사과, 당근을 갈아 만든 주스를 마시며 강도 높은 허리 운동, 108배 등이 이어져 바쁜 사찰체험이 진행된다.
충남 서산의 서광사에서는 바둑두며 깨달음을 얻는다. 매월 2주·4주째 10명 이상 멤버로 진행한다. 보통 2박3일 코스로 탁본, 공양 등 기본 프로그램에 바둑대회가 포함된다. 바둑 수련관 시설은 첨단시설을 갖췄다. 72명이 한꺼번에 둘 수 있는 공간에 디지털계시기까지 달려 있어 바둑 애호가들에게 인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