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시니어의 가장 큰 자산은 시간이다. 시간 부자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많아도 일상이 무료하다면 고통의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장수도 축복이 아니고 재앙으로 다가온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여가를 즐기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취미활동을 들 수 있다. 취미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필자는 손쉽게 취미를 계발하는 방법으로 ‘덧칠하기(Micro Adventure)’를 권하고 싶다. ‘덧칠하기’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상의 습관이나 관심 가진 분야를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등산이 취미였던 분이 산삼을 연구해 산을 즐기면서 산삼을 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수채화를 그렸다. 그 경험을 살려 60세에 사진을 배움으로써 평생 취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과 관련한 영역을 확대해 하루를 25시로 산다. 과거의 경험에 덧칠을 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용돈도 벌고 사회공헌도 하는,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삶을 즐긴다.
사진은 취미라기보다 일상생활로 바뀌어가고 있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어떤 취미보다 돈이 적게 들면서 새로운 직업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특히 돈이 드는 취미에서 돈이 되는 취미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시니어에 꼭 맞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 돈이 많이 들기도 한다. 장비 구매와 사진 촬영지 여행 비용 때문이다. 그러나 늘 휴대하는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찍을 수 있고 일상에서 사진 소재를 찾을 수도 있어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훌륭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저렴한 카메라(일반인이 손쉽게 살 수 있는 보급기로 렌즈 포함 50만원 주고 산 중고품을 지금도 쓴다)를 사용하고 요즘엔 스마트폰을 주로 이용한다. 전시회용 작품을 만들거나 취미활동용으로 부족함이 없다. 사진 재능기부와 사진 기술을 전수하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장애인 시설이나 양로원 등에서 사진 촬영 봉사를 하고 실버대학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사진 지도를 하며 보람을 느낀다. 사진 촬영이 필요한 곳이면 발걸음을 아끼지 않는다. 혹자는 필자에게 “돈도 안 되는 일 그렇게 힘들여 봉사하느냐?”고 하지만 재능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취미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공인 사진작가가 된 필자는 이제 사진으로 돈을 버는 직업인이 됐다. 또한 취미활동이 바탕이 되어 KBS1
을 비롯한 여러 방송 프로그램과 SBS 라디오에 출연하며 방송인이 되었다. 동년기자 선임과 명예기자도 사진이 근간이었고 글을 쓰면서 원고료도 받는다.
, , 등 사진과 관련한 책 세 권도 출간했다. 또한 사진 취미생활을 통한 여가생활의 본보기가 되면서 여가설계 강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강사료를 받는다. 취미에 머무르기만 하면 성장이 없다. 어떠한 취미를 선택하더라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도 처음에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다. 당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더 좋은 사진을 글에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운영되는 사진교실에 참가하게 됐다. 60세의 늦깎이였고 카메라 장비는 소형 카메라 하나였다. 촬영 경험도 많지 않았다. 고급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동호인들을 볼 때 주눅이 들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형편에 맞는 카메라로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듯 공인 사진작가가 되어보자는 욕심이 생겨 사진을 배운 지 3개월 후부터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잘될 리가 없었다. 28번의 도전 중 절반을 낙선하고 15번 수상해 사진작가 인증을 받았다. 그 후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진을 배운 지 3년이 되던 2013년에 대한민국사진대전(국전)에 입선하고 부산일보 전국사진대전에서도 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많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공모전 출품으로 얻어지는 점수가 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정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고 사진작가 명함도 만들 수 있다. 사진 전문가가 되면 다양한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전시회를 열어 작품 판매도 할 수 있다. 향후 작품에 대한 가치도 높일 수 있다. 사진 갤러리를 중심으로 하거나 프로필 사진과 가족사진을 촬영해주는 카페 운영, 사진관 운영, 사진 여행단 운영을 할 수 있다. 수요가 많은 사진 강사로 데뷔할 수도 있다.
전문가는 자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필자는 사진작가 인증에 그치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사진을 배운 지 벌써 8년째에 접어들었고 찍은 사진도 50만 장에 이른다. 사진을 찍다가 파파라치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강화도 군부대 옆에서 석양을 촬영하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선택한 취미생활을 오래 할 수 있고 제2의 직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 남이 권유하는 취미나 유행하는 취미를 선택하면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분야에 집착하기보다는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취미가 좋다.
어린 시절에 즐겨 했으나 생업으로 미뤄뒀던 취미를 끄집어내 덧칠하면 평생 취미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모험가 제임스 후퍼가 제안한 ‘덧칠하기’다.
필자는 은퇴 후에 수채화를 그리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꿈을 덧칠해 사진으로 바꾼 셈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3년 정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몰입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필자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사진 기술과 취미생활 계발을 선도할 ‘청학빛그림학교’를 꿈꾸고 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함께 의견을 나누면서 소통하는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다. 인터넷 방송은 한정된 공간이 아닌 열린 인터넷을 통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시니어에겐 아직 친숙하지 않겠지만 요즘 청소년을 비롯해 20대 사이에선 1인 방송이 유행이다.
인터넷 발전으로 여러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이 생겨나고 있다. 자신의 일상이나 특정 주제를 선택해 보여주는 블로그, 페이스북 등의 SNS를 시작으로 이제는 일반인이 직접 콘텐츠를 제작하고 운영하는 1인 방송이 대세다. 이와 더불어 콘텐츠 창작자를 일컫는 ‘BJ(Broadcasting Jockey)’, ‘크리에이터(Creator)’가 새로운 직업군으로 떠올랐다. 1인 방송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자유롭게 콘텐츠를 만들어냄으로써 보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보여주는 역할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댜양한 콘셉트의 1인 방송
1인 방송을 이용하는 기본 과정은 이렇다. 방송 진행자(BJ 또는 크리에이터)가 동영상을 송출하면 시청자는 사이트에 접속해 보고 싶은 채널을 선택해 시청하면 된다. 각 채널에는 채팅 화면이 있어 실시간으로 사람들과 소통도 가능하다. 1인 방송에서는 누구나 콘텐츠를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그 주제 또한 매우 다양하다. 특히 그중에서 꾸준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방송이있다. 바로 먹는 방송 ‘먹방’, 메이크업 관련 콘텐츠 ‘뷰티’, 직접 게임을 하는 영상을 보여주는 ‘겜방’이 대표적이다. 크리에이터도 젊은 층을 넘어 70대 할머니, 일반인, 연예인까지 폭넓게 확대되고 있다.
자극적인 내용으로 물들어가는 1인 방송
1인 방송은 비싼 장비나 거액의 제작비 없이도 제작과 송출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 개인이 시청자들의 실시간 피드백을 받으며 진행하다 보니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는 매력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 측면 또한 존재한다. 바로 갈수록 심해지는 선정성이다.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내용일수록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BJ는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무분별한 콘텐츠 제작으로 음란물과 동물 학대 장면 등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한 자극적인 방송은 젊은이들이 1인 방송에 열광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실시간 인터넷 방송의 유해 정보에 대한 집중 모니터링을 실시했지만 “방송은 끝나면 사라지는 휘발성 방송인데다 24시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1인 방송도 수익을 낼 수 있을까
2017년 아프리카TV(1인 방송 플랫폼) 상위 1~5위 스타급 BJ의 상반기 수입은 최소 3억에서 최대 5억으로 확인됐다. 아프리카TV에는 ‘별풍선(1개당 약 100원)’이라는, 방송 진행자에게 일종의 후원금을 보낼 수 있는 제도가 있다. 당연히 많은 시청자를 보유한 BJ일수록 수입도 늘어난다. 얼마 전 생중계 서비스를 시작한 유튜브의 경우 클릭 수에 따라 수입이 결정된다. 이때 발생하는 수입은 조회수 1회당 약 1원 정도다. 이러한 체재에 현혹된 많은 사람이 크리에이터를 선망 직업으로 꼽는다. 이런 현상에 대해 크리에이터 백봉기는 조언한다.
“큰 수익을 목표로 1인 방송을 시작한다면 실망할 수 있어요. 어마어마한 수입을 내는 BJ는 일부에 불과하거든요. BJ 수도 이미 너무 많고 그들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죠. 돈이 목표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방송을 한다면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거예요.”
크리에이터 백봉기가 전해주는 1인 방송 준비 Tip
주제 선정 재미있는 주제를 선택해야 많은 클릭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이에요. 저는 해외에서 반응이 좋았던 아이디어를 참고한다거나 새로 나온 신제품을 먼저 입수해 사용후기를 남기는 영상을 찍기도 하죠.
촬영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이 장비에 욕심을 많이 냅니다. 제가 해드리고 싶은 말은 입문 단계 땐 욕심 부리지 말라는 거예요. 촬영하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걸 구입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요즘엔 핸드폰으로도 얼마든지 잘 찍을 수 있어요.
편집 저는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강의를 보고 배웠어요. 온라인 강의가 힘들면 오프라인에서도 배울 수 있죠. 편집 프로그램으로는 ‘곰믹스’, ‘윈도우 무비메이커’ 등 무료 편집 프로그램이나 ‘프리미어’, ‘파이널 컷’ 등 유료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어요.
업로드 개인 채널에 편집을 끝낸 영상을 첨부하면 올릴 수 있어요. 편집이 어렵다면 영상 그대로를 끌어와도 괜찮아요. 특히 업로드할 땐 간결하면서도 어필이 되는 제목을 달았는지 꼭 확인해주세요.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제목도 중요하니까요!
‘도슨트(docent)’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작품을 관람객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전시 해설자다. 관람객이 적극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게 해주며,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또 미술관, 박물관이라는 장소에 대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도슨트는 ‘지킴이 역할’도 함께한다. ‘지킴이’란 전시품이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다. 미술관에 따라서 전시 해설과 지킴이 역할을 구분 없이 함께하는 곳도 있고, 철저히 분리된 곳도 있다.
‘도슨트’에 도전하다
시니어가 되면 젊었을 때 하던 일들은 웬만하면 정리하고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려는 사람이 많다. 대신 용돈 정도만 벌 수 있는 일거리를 원한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즐길 수 있고, 비용도 적게 들 만한 취미를 찾기 위해, 여러 교육기관에서 이것저것 배워보지만 잘할 수 있고, 재미도 있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본인에게 꼭 맞는 취미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필자도 그랬다.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에서 여러 교육을 받아보다가 겨우 만난 것이 ‘도슨트’다.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가능
전시품을 수집하고 기획해야 하는 큐레이터는 전문지식이 많아야 하지만, 도슨트는 전문지식이 없어도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교육 과정을 거쳐 도슨트로 활동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박물관, 미술관, 기념관에는 정기적으로 도슨트를 선발해서 교육을 시키고 자원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자원봉사는 비용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육도 무료다. 그러므로 도슨트 입문에는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지원 정보를 알 수 있다.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경험을 하고, 실력과 경력을 쌓은 후 원한다면, 자연스럽게 급료를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업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현재 유일하게 교육을 시켜 자원봉사가 아닌 급료를 받고 일할 수 있도록 취업 알선을 해주는 곳이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다.
이곳의 교육 프로그램은 시니어 도슨트로서 취업을 했을 때의 마음가짐, 서양미술사, 한국사, 설명할 원고작성,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와 관람객들을 대하는 자세 등을 가르친다. 필자도 이곳에서 교육과정을 마친 후, 취업 알선을 해줘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관람객과 공감대 형성이 요령
작품을 전시할 때는 항상 작품 설명을 써둔다. 그런데도 읽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관람객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 설명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함께 얘기해주면 즐거워하면서 다른 관람객한테도 꼭 설명해줄 것을 부탁까지 한다. 다른 관람객도 본인처럼 안 읽고 가면, 이렇게 좋은 내용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에서다.
시니어가 설명을 해주니까 젊은 사람이 설명해주는 것보다 이해가 잘되고 더 크게 감동된다고, 고맙다고, 기뻐하며 갈 때면, 필자도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 실제로 관람객들도 필자가 설명하는 것을 볼 때면 참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면서 그들도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람객도 행복하고 작품을 설명하는 필자도 행복하고, 이렇게 관람객과 도슨트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하나의 재미이면서 보람이기도 하다.
도슨트 활동이 가져다준 삶의 변화
도슨트를 하기 전에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늘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도슨트 활동을 하면서 관람객들과 작품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필자의 삶의 가장 큰 변화다.
시니어가 하면 시너지 효과 더 좋다
젊은 사람들은 아직 부족한 다양하고 소중한 경험들을 시니어는 갖고 있다.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아둔 경험들을 녹여내 도슨트 활동에 덧입힌다면 관람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이 만족스러워하는 도슨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관람객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젊은 사람보다 시니어가 해야 시너지 효과를 더 낼 수 있고, 시니어에게 특히 좋은 취미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 취미를 찾지 못한 시니어에게 ‘도슨트 활동’을 취미로 삼아볼 것을 적극 권하고 싶다.
도슨트 Tip
첫째, 설명할 때 긴장하면 관람객과 소통이 안 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 또는
가족과 이야기하듯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설명한다.
둘째, 작품 설명은 핵심만 몇 개 골라서 설명한 후 흥미를 끌 수 있고 의미 있는 소재
중에서 작가나 작품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때 세대별로 공감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춘다.
셋째, 시간 배정이 중요하다. 설명은 풀타임의 80%만 하고, 나머지는 질문을 받는다.
사람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30분이 넘어가면 지루해한다.
넷째, 과도한 복장과 구두, 액세서리, 헤어스타일은 전시 관람에 방해가 된다.
전시 작품보다 시선이 집중돼서는 안 되기 때문에, 관람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한 복장을 한다.
당구는 남녀노소가 사시사철 즐길 수 있는 게임이자 스포츠다. 어느 동네에서나 당구장은 많아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용료도 한 시간에 1만원 내외로 싼 편이다(강남 고급 당구장은 한 시간에 1만5000원 하는 곳도 있다). 저녁시간이면 직장인들로 붐비고 빈 당구대가 없어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아 요즘은 당구장이 급증하고 있다.
필자가 당구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진학 후인 1971년이었다. 당시 당구장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배우지 않으려 했는데 또래 친구들은 모이면 당구장으로 향하니 같이 어울리려면 방법이 없었다. 그 시절엔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당구장으로 몰려가곤 했다.
그동안 당구장은 동네 불량배들이나 술 취한 취객들이 담배를 피워가며 소란스럽게 했던 장소로 인식되어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2018년 1월부터는 당구장도 금연지역으로 지정되기 때문에 벌써부터 금연을 실시하거나 흡연 장소를 분리한 곳도 많이 생겼다. 시니어의 학창 시절에 당구장은 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초등학교를 포함한 전국 종별 당구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다. 특히 수원 매탄고등학교에서는 당구부를 통해 당구 선수를 집중 육성하고 있고 당장 프로세계에서도 통하는 실력 있는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다.
당구는 ‘캐럼’이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4구 경기와 3구 경기가 대세다. 일반적으로 200점 이하의 동호인들은 4구 경기를 즐기고 200점 이상이면 3구 경기에 도전할 만하다. 4구 경기는 흰색이나 노란색 수구가 결정되면 나머지 빨간색 공 2개를 맞혀야 하는 경기다. 3구 경기는 흰색, 노란색 공으로 각자 수구가 결정되면 나머지 두 개의 공을 3쿠션 이상 거쳐 맞혀야 하는 경기다. 보통 두 사람이 경기를 하지만, 3명 또는 4명도 같이 칠 수 있다. 여성들은 당구대에 포켓이 6개 달린 포켓볼을 쉽게 배워서 칠 수 있지만, 요즘은 4구 경기나 3구 경기에 출전하는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다. 당구는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아 오히려 여성들의 섬세한 감각이 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구는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이며 우리나라 강동궁 선수가 우승한 적이 있다. 세계적으로도 국제대회가 많이 열리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우승하는 일도 점차 늘고 있으며 현재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선수도 많다. 최근에는 대기업 후원으로 상금 규모도 높아졌다. 소위 ‘4대 천왕’이라는 브롬달, 산체스, 야스퍼스, 쿠드롱 같은 세계적인 선수도 출전해 우리 선수들과 승부를 겨룬다. 24시간 방영하는 당구 전용 방송도 있어 동호인 사이에서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당구는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아 시니어가 즐기기 알맞은 스포츠다. 당구를 치기 위해서는 당구대 옆으로 계속 걸어야 한다. 공을 맞히기 위한 노력으로 집중력도 좋아진다. 당구공은 둥글고 회전이 가미되면서 여러 가지 물리적인 변화와 기하학적인 형태로 움직인다는 성질을 알아야 한다.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으며 익혀온 기술을 발휘하면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승패가 걸려 있고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승패가 결정되므로 재미도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날씨와 관계없이 즐길 수 있다. 어느 동네이든 당구장이 있으므로 접근성도 좋다. 장성한 자녀들은 물론 손주들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다양한 당구교실 현재의 시니어는 대부분 필자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며 당구를 배웠다. 아직 당구를 모른다면 주변 지인 중 잘 치는 사람에게 가르쳐 달라고 하면 좋다. 요즘은 당구 교육도 꽤 체계화되어 있어 몇 개월이면 웬만한 수준으로 즐길 수 있다. 책도 있고 동영상도 많다. 레슨해준다고 광고해놓은 동네 당구장, 구청에서 운영하는 당구교실에서도 배울 수 있다.
수강료 구청에서 운영하는 당구교실은 지정 당구장에서 배운다. 서울 송파구에서는 주 3회, 3시간(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에 월 3만원을 받고 가르친다.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월 5만원을 받는다. 개별로 가르치는 비용은 당구장마다 다르다. 이미 단체반을 운영하는 곳도 있고 개인레슨 수준으로 가르치는 곳도 있다. 단체반은 비용이 싸지만 개인레슨은 비쌀 수밖에 없다. 비교해보고 자신에게 잘 맞는 곳을 선택해야 한다.
고수가 되기 위한 과정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이론과 실제 연습, 실제 경기 등을 거쳐야 하니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당구에 너무 투자하다 보면 생업에 지장이 생긴다. 그렇다고 당구를 잘 쳐서 직업으로 삼기도 어렵다. 프로 선수들도 상위권이 아니면 큰 수입은 안 된다.
당구 매너 승패가 걸린 게임이지만 승부욕에 집착하면 안 된다. 이겼을 때 너무 좋아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하면 안 된다. 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억울해하거나 화를 내면 안 된다. 상대방을 격려해주고 잘 친 경우는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당구는 매너의 경기다.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될 만큼 떠들거나 상대의 플레이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
기술을 위한 노하우 배울 때 기초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잘못 배운 기초는 고치기가 어렵다. 이론과 실습을 위한 시간 투자도 필요하다. 당구는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야 기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구 제품 구매 따로 당구 제품을 살 필요는 없다. 당구장에 있는 큐를 사용해 쳐도 되는데 개인용 큐를 맞추는 사람도 있다. 가격은 10만 원 정도부터 꽤 고가인 큐도 있다.
프로선수 자격 당구를 직업으로 삼으려면 당구장을 개업하거나 프로 선수가 되면 가능하다. 동호인들끼리 돈을 모아 당구장을 개업하면 당구도 즐기고 자주 모여 소통할 수 있다. 당구를 즐기는 데에는 큰 실력이 필요하지 않지만, 교습을 할 수 있는 수준이나 프로 선수가 되려면 소질도 있어야 하고 많은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추억담 카투사로 근무하던 시절, 휴게소에 포켓볼 당구대가 있었다. 처음 접하는 당구 방식이었는데 미군이 대부분인 대대에서 가장 잘 쳐서 인기가 많았다. 큐가 제대로 관리가 안 되다 보니 나중에는 대걸레를 이용해 치기도 했다.
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재 중 하나. 특히 산으로 둘러싸여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일까. 시니어가 은퇴 후 원하는 새로운 직업이나 취미를 꼽을 때 단골로 선택되는 분야가 바로 목공예다. 뚝딱뚝딱 제품을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완성된 제품을 보며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배우자나 가족이 만들어진 가구를 반겨준다면 이보다 즐거울 순 없을 것. 또 솜씨가 좋다면 팔아 생활비에 보태는 것까지 기대할 수 있다.
목수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 긴 역사로 인해 현대에 들어와서 목수가 담당하는 영역은 방대해지고 기능도 세분화됐다. 국내에는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형틀을 담당하는 형틀목수와 목조주택을 짓는 목골조목수, 한국의 전통가옥을 만드는 한옥목수 등으로 구분하고,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내장목수와 선박목수, 가구목수 등도 있다.
목공 혹은 목공예는 정의에 따라 나무로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에서 건축까지 그 분야가 방대하다. 하지만 나무로 가구나 소품을 제작하는 분야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육기관, 시간, 비용 천차만별
목공예가 시니어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다양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연이나 귀농, 귀촌의 대체제 역할도 한다. 나무를 직접 만들고 다듬으며 자연을 손으로 느끼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귀촌 시 반드시 알아야 할 기술로도 꼽힌다.
당장 생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매력 중 하나. 간단한 식기에서 쟁반, 식탁에 이르기까지 만들지 못하는 것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다.
상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 숙련이 되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실제로 목공예 교육기관을 살펴보면 수업에 참여하는 시니어가 의외로 많다.
한 교육기관 관계자는 “시니어의 경우 당장 직업으로 연결짓기보다 노후생활을 위한 준비나 취미활동을 겸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하며 “절박함 대신 느긋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젊은 수강생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솜씨도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목공예 학원부터, 지자체, 목공방, 기술교육원, 프랜차이즈까지 활동 중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집 근처 목공방을 찾는 것. 상당수 목공방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자체 교육과정을 운영 중에 있다. 또 일부 협회나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목공방의 경우 자격증반을 운영하기도 한다.
별도의 교육과정 없이 운영되는 목공방에서도 배울 수 있다. 상품 제작을 겸한 목공방에선 수업료 겸 시설 이용료를 합한 금액을 지불하면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일정 기간 동안 목공방 장비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기술교육원 교육과정은 일반 학원 프로그램과 동일하다. 교육시간은 기관에 따라 제각각이다. 간단한 소품이나 책꽂이를 만드는 과정은 하루나 이틀 안에 끝나기도 하지만 자격증 취득과정은 최소 이수 교육시간이 40시간정도다. 기간에 따른 교육비용도 천차만별이다. 하루짜리 체험학습은 1만원 내외이지만 창업반이나 자격증 과정은 수백만원 이상인 경우도 있다.
목공예 관련 자격증은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국가자격증인 목공예기능사가 있고, 민간자격증으로는 목공지도사, 목공DIY교육사 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목공소나 판매용 제품을 제작하는 목공방에 취업하려면 자격증 취득이 필수적이지만, 취미나 여가생활이 목적이라면 자격증이 큰 역할을 하진 않는다고 귀띔한다.
창업 쉽지만 제품 판로가 문제
목공예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분야이다 보니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편. 그래서 목공예 시장에서는 구인보다는 구직 인력이 훨씬 많은 편이다. 한때는 목공방을 통해 좋은 디자인의 저렴한 가구를 구매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저가의 중국산 가구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이 위축되어버렸다. 여기에 이케아 같은 다국적 기업까지 가구시장에 참여하면서 목공방들이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장 취업을 목적으로 목공예를 배우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든 시니어의 경우 목공소나 목공방들이 채용을 기피하는 대상이다. 급여도 적은 편. 그래서 아예 목공방을 차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는 사업의 의미보다는 작업실 개념으로 목공방을 만들기도 하고 몇몇 사람이 뭉쳐 공방을 내는 경우도 있다. 메리우드협동조합이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 이곳은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목공예를 배운 동기 6명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목공방으로 경력 단절 여성이나 시니어를 대상으로 목공예를 지도하고 있다. 나무사랑협동조합도 이와 비슷한 사례. 송파구 시니어복합문화공간 실벗뜨락에서 목공예 수업을 함께 들었던 수강생들이 모여 공방을 만들었다.
목공방 창업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비다. 목공용 장비를 기본적으로 갖추려면 2000만원 내외로도 충분하지만, 제대로 가구를 만들려면 7000만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이 창업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 것은 예산이 아닌 영업력이다. 만들어진 제품의 판로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창업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장 위축으로 한때 난립했던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최근 확 줄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헤펠레목공방이 대표적이다. 전국에 70여 개 목공방을 가맹점으로 두고 있다.
요즘 목공예 분야에서 주목하는 분야는 업사이클링(up-cycling). 폐품을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과 업그레이드(upgrade)가 합쳐진 용어다. 재활용할 재료에 가치를 더해 더욱 쓸모 있는 제품으로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다.
목공 분야의 경우 상품적재용 깔판인 파렛트나 와인상자와 같은 폐목재를 생활용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많다. 폐목재는 단가가 낮아 수익성이 좋은 편이다. 최근 많은 목공방들이 폐목 리사이클링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자연친화적 나무라는 소재에 스토리와 공익성이 더해지면서 소비자 반응도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목공예를 하는 시니어들 사이에선 방과 후 학습이나 목공예 체험교육 강사활동도 인기가 높다. 제품 제작보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덜하고, 보람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산시 광덕산 자락으로 귀촌한 이웅기(66)씨는 시골을 홍보한다. ‘도시에 사는 시니어여, 시골로 가시라!’ 삭막한 회색 건물 숲에서 탈출하라는 얘기. 시골 자연 속에서 인생 후반을 흡족하게 누리라는 전갈. 도시라고 매력이 없으랴. 건강한 삶이 도시에선들 불가하랴. 그렇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씨의 생각은 다르다. 도시보다 수준 높은 게 시골의 여건이란다.
이웅기씨는 죽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남들보다 밀리거나 뒤진 게 없었다. 그는 천안시에 있는 선문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다. 누릴 거 대충 다 누렸을 게다. 응분의 실력으로 도회의 풍속을 기민하게 섭렵했을 게다. 그러나 미련 없이 시골행 열차를 탔다. 행선지를 바꾼 여행자처럼 인생행로를 변경했다.
“은퇴 이후에도 흔히들 은퇴하지 않은 것처럼 부대끼며 삽니다. 도시에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왜 굳이 답답하게 서울에 눌러 살까. 서울의 그 비싼 아파트를 팔아치우면 얼마든지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을. 집 짓고도 여윳돈이 남아도는 것을. 귀촌처럼 안전한 노후대책이 드물다는 생각이에요.”
시골에 구미가 당기면 과감하게 털고 내려오라는 얘기다. 자연을 애호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촌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다. 이웅기씨의 귀촌에 각별한 결단은 필요치 않았다. 시골살이는 오랜 꿈이었기에. 마음은 진즉 앞장서 산골에 가 있었기에. 아내(안경희씨·62) 역시 귀촌 지망생이었기에. 사직을 하고, 아파트를 팔고, 주변인들과 쾌히 작별인사를 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아하, 땅을 사는 과정엔 지체와 곡절이 있었더란다.
살터를 찾는 일은 시장에서 두부를 사는 일과 달라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 기다렸다는 듯 맨발로 달려 나와 품에 안기는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한동안 전국을 누볐다. 그는 풍수에 일가견이 있다. 그의 눈은 매섭게 보고 깐깐하게 따지는 눈이다. 발품을 판 만큼 일쑤 눈에 드는 게 있었다. 그러나 계약 단계에서 땅을 거둬들이거나 값을 올려 포기해야 했다지. 인연은 뜻밖에도 천안 인근, 수려한 산촌에서 맺어졌다. 소풍 삼아 찾아간 산골 물가에서였다. 물가의 밝은 둔덕, 초승달 모양새의 땅덩이 1000평을, 그는 쾌재를 부르며 사들였다. 거기에 서둘러 집을 짓고 벽송재(碧松齋)라 당호를 붙였다. 푸른 솔숲에 에둘린 집이구나.
풍광을 보는 눈들은 엇비슷한 모양이다. 산수의 미모를 기차게 추구하는 이들이 이 골짝에 일찌감치 입장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 숫자가 많다. 삼삼한 터 여기저기에 멀끔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펜션도 많으니 휴가철엔 꽤나 버글거릴 게다. 덩달아 땅값도 뛰었다지. 산촌치고는 화려한(?) 현주소! 그래도 대자연이 압도해 시간조차 나른히 흐르는 것만 같다. 적막으로 채워진 공간은 고즈넉해 참신하다. 사방에서 일어서는 멧부리에선 우뚝한 맛이 난다. 골짜기는 깊숙한 멋을 풍긴다. 지겨운 세속의 난리블루스를 잊기에 족하다.
시골 살더라도 일은 놓지 말아야지
이씨의 집 곳곳엔 장항아리들이 즐비하다. 왜? 그는 된장을 담가 판다. 간장, 고추장, 청국장도 품목으로 삼았다. 산중에서 그저 노닐거나 빈둥거리기란 그의 적성에 맞질 않다. 일이 그의 본분사! 또는 일에서 낙을 찾고, 일로 만족을 구가하는 게 그의 본분사! 그는 날마다 고속도로처럼 분주한 눈치다. 된장 사업은 성업 중이고.
“시골에 살더라도 일을 가지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생동하니까.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며 세월을 흘려버릴 순 없는 일 아니겠어요? 70세까진 뭐든 직업 활동을 하자는 작심으로 일을 찾았어요. 된장 사업이 적격이라 본 건 아내의 손맛을 믿어서였죠. 이게 무모한 판단일 수 있었지만 귀촌 초기에 즉시 일에 뛰어들었고, 열심히 매달렸고, 덕분에 썩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결이 뭐죠?”
“운도 따랐겠지만, 최상의 전통 장류를 생산하겠다는 초심을 견지했어요. 이 산골의 자연 환경, 즉 깨끗한 공기, 맑은 물, 풍부한 일조량도 장류 숙성에 호조건입니다. 순수한 천일염과 죽염을 재료로 장을 만든다는 점도 특장이에요. 방부제, 발효억제제, 조미료 등을 철저히 배제, 최상품 장류 생산에 주력했어요.”
“귀촌을 해 장을 담가 파는 사람들이 드물진 않죠. 시골에 살며 택할 수 있는 일거리 중에 비교적 유망한 업종일까요?”
“장 담그는 사람들의 80% 정도는 실패합니다. 세상의 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수만 성취한다는 것. 부지가 넓어야 하고, 공장 지어야 하고, 항아리 가격 비싸고, 초기 투자부터 부담되는 분야이지요. 그러나 유망한 측면도 있어요. 가령, 초중고 급식 재료로 안전한 전통 장류를 채택하는 추세가 확산될 텐데요, 고품질 장류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두세 배의 매출 확대를 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장류가 아니더라도, 여하튼, 시골에서 오히려 더 나은 일, 더 좋은 찬스를 찾을 수도 있다는 건 분명해요.”
귀촌한 지 어언 10년. 이웅기씨는 이제 노련한 시골생활자. 소일거리 삼아 시작한 된장 사업의 규모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연간 매출은 2억 원. 내년부터는 아산시에 소재한 모든 중고교에 된장을 공급한다. 그렇게 되면 매출은 두세 배 는다. 그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촌귀농인 대상의 각종 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장류 관련 지원 사업 공모에 응모, 1억 원의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 그걸 밑천 삼아 사업을 전개했던 것.
소소하게 시작한 일이 사업화되면서부터 그는 엄청 바빠졌다. 도시에서 우리는 흔히 숨 막히게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탄식을 한다. 이씨는 그게 싫어서 귀촌을 했다. 그러나 시골에 와서도 다람쥐처럼 부산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는 기껍다. 삶에 자연이 붙어 있기 때문이겠지. 현실 도피처로 낭만적인 시골생활을 꿈꾸는 사람이 있지만, 어딜 가더라도, 시골에 살더라도, 삶의 끔찍한 증상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꾸역꾸역, 고독이나 권태가 밀려든다. 어쩌나? 이씨는 내 마음 안에, 내 몸 안에 자연을 담는 게 상책이라 본다. 그는 자연의학에 관한 한 전문가를 자처한다.
마음을 좋게 쓰는 게 좋은 삶
“귀촌 이후 저의 만족, 저의 행복의 대부분은 자연과 함께하는 데에서 비롯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으로 자연이 들어오고, 그런 와중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이게 행복이라 봐요. 그렇게 되면, 비로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게 됩니다.”
“병이 나기 전까진 몸을 기계처럼 부리는 게 사람이죠. 아무거나 맛있는 음식이면 뱃속에 잔뜩 집어넣죠. 자연의학의 요체는 뭐죠?”
“몸이 원하는 걸 알아채는 거. 바로 그겁니다. 건강하지 않고선 행복이고 성공이고 다 소용없어요. 건강하긴 위해선 몸이 원하는 걸 섭취해야 해요. 일례로, 입에서 쉰내가 나면 신 음식을, 단내가 나면 단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 그 무엇보다 사람의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걸 알아야겠지요. 건강 문제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예요.”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겠죠. 그러나 마음은 날뛰는 망둥이를 닮았어요.”
“예컨대, 아파트 위층에서 애들이 뛰는 소리에 분개해 살인까지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마음을 잘 써 위층 애들이 내 손자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노력을 해야죠. 마음을 좋은 쪽으로 쓰는 게 좋은 삶의 길이니까.”
“천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젊은 사람이 중병에 걸려 사경에 처하기도 해요. 신기하게도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산골에서 풀을 주로 뜯어먹고 건강을 회복하기도 하죠.”
“의학적,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도 자연의학은 고칩니다. 자연식을 통해 기적적 회생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공기 좋은 산골에서 오염되지 않은 산야초를 먹게 되면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몸 아픈 사람들에겐 귀촌귀농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놈들은 명물이다. 힘이 세다. 산야초 또는 잡초 말이다. 잡초는 그 강한 생명력으로 사람에게 이치를 가르친다. 뛰어난 약성으로 사람을 돕는다. 보잘것없는 잡초야말로 미래 식량의 대안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은 보잘 것 많은 잡초. 잡초 밟기를 극구 삼가는 사람이 있다. 남의 얼굴을 구둣발로 밟고 지나는 건 결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잡초를 극진히 대접하긴 사실 힘들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 모든 생명들은 동등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은 갸륵하다. 귀촌 생활은 자연과 생태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와의 조우이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관을 활짝 열 수 있다면 쓸쓸한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겠지.
아름다운 건 자연만이 아니다. 여자도 아름답다. 아내도 아름다운 존재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이나 귀농을 싫어합니다. 불편이 많아서죠. 제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어요. 딱히 서로 정서가 비슷해서는 아니고, 묵묵히 남편을 따라준 거죠.”
“혹시 독재를 일삼는 남편? 마초?(웃음)”
“제가 여성 예찬론잡니다. 남자는 하염없이 나약한 동물이지만 여자는 강해요. 정글에서도 암컷들이 훨씬 강해요. 여자들에겐 별다른 단점이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남자보다 여러모로 나아요. 지구력, 지속력, 생명력 등등에서 더 우월하니까. 아내를 통해 그걸 실감해요. 수굿하고 진득한 이 사람은 평생 불만이라는 걸 내비치질 않았어요. 아, 팁 하나! 귀촌은 반드시 아내와 대동해야 합니다. 남편이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은 뒤 합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간 필경엔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시골생활엔 여자가 할 몫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특히나 원주민들과의 융화엔 안식구의 역할이 절대적이지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부부가 서둘러 된장 작업장으로 들어간다. 교수에서 장류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이씨의 어깻죽지에 의기양양이 비친다. 상상력이란 창작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귀촌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이 창의를 가져오고, 마침내 만족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내게 한다. 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에의 도전은 어쩜 최상의 회춘 전략!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노인복지센터에는 작은 카페가 하나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사회적 기업 은빛행복가게의 꿈나눔까페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보통의 카페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커피를 내리고 있는 바리스타들의 연령이다. 모두 유니폼을 입고 있어 평범한 카페인 줄 알았는데, 모자 사이로 나온 흰머리를 보고서야 이들이 시니어임을 알아챘다.
하용자(河龍子·64)씨는 이곳에서 일한 지 3년 차 되는 베테랑이다.
“은퇴 후에 아이들 다 키워놓고 돌아보니 나이 먹고 할 수 있는 직업이 있어야겠더라고요. 할 만한 것이 뭐가 있나 고민을 했죠. 그러다 우연히 어르신취업훈련학교에서 진행하는 내일행복학교의 커피학교 과정을 알게 됐어요.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죠. 워낙에 커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데다, 바리스타라는 직업이 강한 근력이 있어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지금 나이에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배우는 과정이 모두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고압의 증기를 뿜어내는 기계를 만져야 하는 일이다 보니 막연히 겁이 난 적도 있다고 했다. 또 초보 바리스타 시절에는 손님이 커피를 받기 위해 줄 서 있으면 마음이 조급해져 하지 않아도 되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다고.
바리스타는 단순히 커피를 추출하는 직업이 아니다. 고객을 상대해야 하므로 늘 손님을 맞이할 준비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일들이 쉽게 익숙해졌을까?
“제가 이래 봬도 백화점 의류매장에서 매니저를 10년이나 했던 사람이에요. 사람을 대하는 일은 능숙해요. 백화점이 까다로운 손님이 많은 곳인 만큼 제대로 단련이 된 셈이죠. 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여유도 생겼죠. 물론 이곳 손님들이 나이가 많은 편이라 반말하시는 분도 많고 불친절한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유연하게 잘 대처하고 있어요.”
단순 응대뿐만 아니라 이제는 단골 성향까지 꿰고 있을 정도가 됐다. 자주 오는 고객의 커피 성향을 파악해놨다가 기호에 맞게 농도를 조절해 내놓는다. 얼굴을 잊지 않는 매니저 출신만이 가능한 무기다.
엄마와 아내의 갑작스런 변신을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경제적으로 힘든 것도 아닌데 손님을 대하는 일에 대해 부정적이진 않았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남편이 적극적으로 밀어줬고, 아이들은 카페로 와서 제가 내린 커피를 마시고 간 적도 있어요. 이제 아이들도 커피에 관심이 생겨 드리퍼까지 사서 내려 마실 정도가 됐죠.”
하씨가 가장 자신 있는 커피는 기본 아메리카노다. 졸업시험 때 반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고, 본인도 가장 즐기는 커피라고. 가장 저렴한 메뉴이지만 한 잔 내릴 때마다 찌꺼기를 깨끗하게 닦아내는 등 허투루 내놓는 법이 없다. 맛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씨에게 ‘바리스타 하용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했다. 지금의 일에 만족하냐는 질문에 100% 만족한다고 답한다.
“다른 카페에 비해 이곳은 특별해요. 시니어들에게 취업 기회를 주기 위해, 한 달에 40시간만 일하며 여러 명이 일할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어요. 하지만 시니어 바리스타에게는 이런 자리도 무척 귀해요. 짧은 시간이지만 시니어 바리스타를 뽑아서 다행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해요. 그래야 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에게 모범이 될 테니까요. 이 나이에도 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제 삶에 활력을 주고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돼요. 다른 분들도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인생을 즐기며 사셨으면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취약계층, 사회적 패자들의 자활을 돕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디자인하는 이종수(63) 한국사회투자재단 이사장 겸 임팩트금융 추진위원회 단장, 남들이 ‘문제없다’를 외칠 때 그는 ‘문제 있다’를 외치며 우리 사회의 궁벽한 문제를 드러내고 찾아낸다. 그리고 해결을 도모한다. 철거민촌 소년이 글로벌 금융인을 거쳐 사회운동가가 되기까지의 진솔한 패자부활전 이야기를 들어봤다.
별명이 소셜 디자이너입니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나요.
“패자부활전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격차와 갈등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디자인한다고 해서 언론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빈곤의 사전 예방, 차단을 위해서는 단순히 퍼주기 식의 복지 지원이 아니라 한 사회 생태계 구성이란 전향적-종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젠 고기 잡는 도구를 빌려주는 것까지 함께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장을 만들고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환경 조성까지 해야 합니다. 취약 계층 자활도 단순한 지원을 넘어 융자의 시대를 지나 이젠 사회투자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게 제 일입니다. 빈곤도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이해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착한 금융 2.0은 복지 측면에서 개인 대상 직접 자금 지원이었다. 3.0은 사업 지원, 사업 아이디어 사전 자문과 사후 사업 멘토링까지 종합관리 시스템으로 패키지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4.0은 투자 생태계 마련, 즉 사회투자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업과 프로젝트를 발굴해 투자하고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개인도 종합검진을 미리 하면 중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빈곤, 취약 계층 발생도 사후 대책을 넘어 문제 요인을 사전에 진단, 예방하는 사회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이 이사장은 사회투자금융 활동의 선구자로서 늘 앞장서 각 단계마다 진화를 주도해왔다.
사회투자라는 용어가 아직은 낯선데요. 사회와 투자라는 용어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만.
“사회 문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예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문제는 너무 복잡해 주는 복지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많은 사회 문제가 경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식도 전통적인 복지에 금융경영 등과 같이 시장적인 방법을 융합해 해결해야 합니다. 사회투자는 재원의 선순환을 이루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주는 복지를 넘어 구조와 예방의 사회 인프라를 깔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간접자본과 같습니다. 다리, 항만 부두 등을 건설하는 데는 당장 비용이 발생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사회 발전의 근간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대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패자부활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이고 예방적인 차원에서 지속가능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사업에도 투자하는 등 다층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사회금융기관은 일반 은행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일반 은행이 돈을 빌려줄 때 수익과 담보를 본다면 사회투자를 지원하는 사회 금융기관들은 그 기업과 프로젝트가 어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과 기업의 철학을 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재무적 수치나 성과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즉 장애인, 노숙자, 저출산, 고령화, 청년 일자리, 주거 문제, 환경 문제, 자살률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가를 우선적으로 판단해 투융자를 결정합니다. 돈의 회수 가능성을 본다는 점은 같지요. 공익적 개념이더라도 지속가능하게 사업을 진행하려면 재원의 선순환이 필수이니까요.”
은퇴자들과 매칭 포인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설립한 사회연대은행에서는 시니어브리지라는 프로그램을 수년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은퇴하였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들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교육하고 논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벌써 400명 이상의 시니어들이 교육을 받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전문성을 갖고 사회적 기업에 컨설팅을 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봉사가 가능합니다. 일정 교육을 받고 커뮤니티를 구성,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어 재무적 성과를 내는 재무적 가치, 사회적 의미를 두고 봉사하는 사회적 가치. 이 중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가치에 점점 더 무게중심을 두게 되더군요.”
당면한 사회 문제 중 심각한 게 양극화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들 말합니다.
“부모의 가난이 새로운 연좌제가 되고 있는 것이죠. 요즘은 개천의 용을 보기가 힘듭니다. 개천에선 욕만 나오는 세태이지요. 싹수 있는 지렁이들의 신분상승 희망조차 개천 바닥 아래로 봉인돼버린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명문대 인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존재해요. 영국의 이튼스쿨 출신,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 등.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갈등과 적대감이지요. 리더들이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 개선 등 따뜻한 개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사장은 “실업, 저출산, 주거난, 장애인 문제 등이 곪아 터지면 결국 빈곤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사회적 비용이 더 크게 발생하기 전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이라는 책에서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며 “경제적 능력주의 사고는 가난한 사람을 불운한 게 아니라 실패자로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체제에선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고, 자선-복지-재분배-동정의 필요성은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과연 빈곤을 그들만의 인과응보에 의한 책임으로 볼 것인가.
한 부모가 아이를 서울역으로 데려가 노숙자를 가리키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산교육(?)을 했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다뤄진 적도 있지요.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복잡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상황이 개인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국민총생산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민총생산이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소외되고 낙오되는 사람들을 보듬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입니다. 이를 위해선 공동체 정신, 커뮤니티 정신이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온통 효율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자본주의가 실현돼야 합니다.”
개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사장님도 흙수저 출신의 개천룡이십니다. 어떻게 글로벌 금융인이 되셨는지요?
“사당동 달동네의 철거민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서강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이게 빨간 줄이 돼 국내 일반 직장에 취업이 안 되는 겁니다.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 직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친구가 권해줘서 우연히 응시한 미국 은행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참, 인생이란 알 수 없더군요.”
민청학련 경력(?)이 인생의 장애물이자, 도약대, 두 가지 역할을 했군요.
“20대 때 세상의 불공평,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질풍노도 같았어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제 가난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화가 꾹꾹 쌓여 폭발 직전이었지요. 처음엔 독방에 수감됐는데 매일 고함을 치고 벽을 쳤어요. 3개월 후 잡범들과 합방을 하면서 비로소 제 마음속 억눌린 화가 풀리더군요.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가난이라고 불만을 가졌던 게 사치였던 겁니다. 비교도 안 되게 별별 힘든 사연이 다 있더군요. 그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자’는 생각을 했지요. 책으로 배운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그 결심으로 대학생활 내내 구로동 공단에서 야학을 열심히 했어요.”
그 후에도 초심을 잘 유지하셨나요. 젊은 시절의 결심은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요.
“하하. 웬걸요. 몇 번의 초심 재생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레드카펫 깔린 외국 직장에서 고연봉의 좋은 대우 받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7명이나 딸린 해외생활을 하면서 ‘그때 그 마음’이 바래버렸어요. 꿈은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힘들어요. 내 삶은 우연찮게 사건이 ‘사연’을 상기하게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돌아보게 되었지요. 1996년 캄보디아에서 은행을 설립할 때인데요. 가난을 한탄할 틈마저 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에 지친 서민들의 우울한 눈동자를 봤어요. 까맣게 잊고 있던,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과 예전 결심이 떠오른 겁니다.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사표를 냈지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하지만, 가슴에서 발까지의 결심이 더 힘들더군요. 이후 캄보디아 농촌 빈민을 위한 자활 프로젝트, 인도네시아 농촌 빈민 직업 훈련 프로젝트 등 ‘가슴이 시키는 일’에 연달아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내전 등 내부 문제 때문에 아쉽게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에겐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이때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에 영감을 받아 귀국해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선 개념조차 없는 때라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한국형 사회연대은행을 기초부터 공부해가며 시작해 실행까지 도맡아서 했다.
세계 최대 보험중개사인 에이온코리아 사장으로 계시다 비정부 시민사회 단체인 사회연대은행 대표로 옮기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10년간 양다리 기간이 있었습니다. 두 곳이 인근 건물이어서 상호 양해 하에 두 곳의 장(長) 역할을 왔다 갔다 병행했지요. 그러다 사회연대은행 운영이 어려워져 직원 급여도 못 주는 상황에 직면했어요. 3개월 월급 못 줄 땐 가시방석이었어요. 웬만한 직장에서 그랬다면 야단이 났을 텐데, 마이너스통장 쓰면서도 견디는 모습을 보며, 나 혼자 편하게 지내도 되나 갈등이 생기고, 인간적으로 모순 상황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에이온에 사표를 냈고 마음이 가는 바를 좇고 나니 편해지더군요. 온전한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정한 이익과 불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결정이 오히려 쉬웠습니다. 버는 거야 옛날과 비교할 수 없게 줄었지만요. 막상 살아보니 상상했던 것보다는 불편하지 않아요. 밥값 내던 시절은 잊고 빈대가 되고, 기사 딸린 승용차를 타는 대신 대중교통 이용하고…. 많이 벌면 많이 쓰고, 조금 벌면 조금 쓰게 되는 게 사람 사는 이치더군요(웃음).”
사표를 쓴 당일에 스페인 산티아고로 직행, 혼자 도보순례를 하셨다면서요.
“모양만 좋은 ‘데코레이션 나’가 아닌 진짜 ‘내 안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만나기 힘든 게 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고요. 자신만이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 사람들 눈에 보이는 나는 내 참모습과 일치하는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보는 시간이었어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지지 말자고 결심했지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매일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이사장님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패자부활전, 초심 회복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그런가요. 격렬한 희망과 내려놓기, 그것이 제 나름의 인생 지혜입니다. 격렬한 희망이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긍정적 기회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하나 보면 실패였지만 돌아보니 그게 저수지가 됐어요. 감옥에 들어간 일이나, 젊은 시절의 방황이나 해외 돌아다니면서 은행을 설립한 일이나…. 또 하나는 내려놓기입니다. 돈뿐 아니라 일에 대한 욕심도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따라오더군요.”
이 이사장은 인터뷰 중 일어나더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을 펼쳐 한 대목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출발이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현재를, 지금을 버림으로써 미래를 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쥘 수 없는 것처럼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내려놓음은 익숙함에 찍는 단정한 마침표다. 나를 타성, 관성, 습성에 젖게 했던 세상의 기준과도 이별이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에서 80대 노부모를 모시고 산다. 소셜 디자이너란 별칭처럼 ‘남이 디자인해준 집’에서 사는 것은 재미없기 때문이란다. 아버님(86)은 시력을 상실하시고, 어머님(85)은 치매이시지만 그는 이 역시도 문제로 보지 않는다. ‘노인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 병환, 공양 문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 노인들이 어떻게 존엄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단다. 타고난 소셜 디자이너 이종수 이사장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한국인의 커피사랑은 어느 정도일까? 농림축산식품부가 올해 발간한 시장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20세 이상 성인은 1년 동안 413잔의 커피를 마셨다. 매일 한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 셈이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2014년에 비해 30% 이상 성장한 6조441억원 규모다. 이렇게 시장이 매년 성장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니어들도 커피를 기호식품이 아닌 사업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시니어를 위한 다양한 교육 과정도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내심 걱정도 된다. 주변을 살펴보면 카페가 즐비한데 인생 후반전의 또 다른 직업이 될 수 있을까?
“이 커피는 신맛이 나면서 약간 과일 향도 느껴지네요. 먼저 마신 것과 완전히 달라요.”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 내일행복학교의 바리스타교육 현장. 한 참가자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커피를 평가한다. 같은 원두로 내린 커피인데 로스팅(수확한 커피콩의 맛을 내기 위해 열을 가하는 과정)과 분쇄에 따라 달라진 맛을 보고 감탄한다. 이들은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 막 첫발을 내딛은 사람들이다.
내일행복학교의 바리스타교육은 최초의 시니어 대상 커피교육 과정으로 꼽힌다. 2010년 6월에 문을 열었고, 지금은 이 교육과정을 통해 배출된 시니어 바리스타들이 활동하는 카페가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운영되고 있다.
시니어 일자리의 첨병 역할
이 교육을 시작으로 현재는 다양한 기관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시니어 커피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니어 교육기관인 50플러스센터는 물론이고 사회복지관이나 지자체 차원에서의 교육도 진행 중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스타벅스도 시니어 대상의 커피교실을 개최한 적이 있다.
시니어들의 이 뜨거운 커피 열기를 어떻게 봐라봐야 할까? 관계자들은 청년들의 관심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바리스타 단기 교육과정을 운영 중인 서울남부기술교육원 관계자는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니어 입장에서 바리스타라는 직업은 여러모로 유용하다고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워낙 카페들이 많이 생기니까 자리가 나면 취업을 생각해볼 수도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직접 카페를 창업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어요. 또 반드시 직업이 아니더라도 모임이 많은 노후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죠.”
시니어 대상 커피 교육이 활성화된 데에는 지자체나 정부기관이 커피를 유용한 노인 일자리 대책의 한 분야로 판단한 것도 영향을 줬다. 커피를 내리는 일이 육체적으로 강한 근력을 요구하지도 않고, 비교적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시니어에게 적합하다는 인식이 많다. 실제로 부산시나 인천시 등 일부 지자체 공공기관에는 시니어 바리스타를 고용한 ‘실버 카페’의 설립이 붐을 이루고 있다. 공공기관에도 커피를 마시려는 수요가 존재하고 카페는 큰 예산 마련 없이도 어렵지 않게 설치가 가능하기 때문. 지역 내 사회복지관 등 교육기관과 연계해 시니어 바리스타를 수급하는 모델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공공기관 건물뿐만 아니라 활용 가능한 문화재 시설에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카페 창업 전망은 어떨까
시니어에게 카페 창업은 취미와 직업이 결합된 로망 중 하나로 꼽힌다. 매장이 클 필요도 없다. 가져가는 손님만 상대로 하면 그만이다. 꼭 대로변 임대료가 비싼 곳일 필요도 없다. 동네 단골이 생기면 그럭저럭 운영이 가능해보인다. 최근엔 장비 값도 내려가 쉽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식당이나 술집에 비해 노동 강도도 낮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까?
전문가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경쟁력 있는 카페를 유지해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고 설명한다. 미국과 유럽의 바리스타 교육관이자 시험 감독관인 신림 마티스커피 심병준 대표는 두 번 세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충고한다.
“많은 시니어에게 카페 컨설팅 의뢰를 받는데 대부분 쉽게 생각하고 찾아와요. 커피는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시장입니다. 기계를 다루는 데도 노하우가 필요하지 않죠. 처음에 익히는 것이 힘들지, 알고 나면 커피를 내리는 과정은 매우 쉬워요. 하지만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곳이고, 이미 시장에서 커피 가격이 내려간 상태이기 때문에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게 되었어요.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창업 자본을 까먹기에 딱 좋죠.”
커피가 시니어들에게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고객층에 있다고 그는 분석한다. 카페는 요즘 유행하는 인형뽑기방이나 빨래방처럼 장비만 놓으면 그만인 분야와는 다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시니어들도 커피를 많이 즐기지만, 카페의 실질적인 고객층은 20~30대예요. 그런데 이들 입장에서 접객인이 나이가 많으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실제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바리스타를 고용할 때 청년들을 선호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고, 시니어가 운영하는 카페가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에요. 따라서 ‘내가 어른인데’ 하는 권위의식을 버리고 시니어가 가진 강점을 개발해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특히 커피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카페만의 특화된 경쟁력을 가지려면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공부가 필요해요.”
그렇다고 커피시장이 시니어에게 틈새 없는 레드오션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커피시장이 만들어낸 일자리가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퇴직 전 근무하던 분야가 무역과 관계되는 일이었다면 커피를 거래하는 일에 뛰어들어도 된다. 커피는 원유와 함께 선물시장에서 취급되는 주요 상품 중 하나다. 또 해외에서는 커피머신을 전문적으로 세척, 수리, 세팅하는 엔지니어가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는 추세다. 커피머신의 조정 값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예 커피콩을 직접 키워볼 수도 있다. 온난화하는 기후 탓에 국내에서도 커피콩 생육을 시도해보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커피, 어떻게 배워야 할까
커피를 배우는 과정은 워낙 다양해 꼭 집어 무엇이 옳다 말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 커피시장을 이끌었던 유명 바리스타들의 학원식 교육과정도 있고, 대학 교육과정도 있다. 가톨릭관동대학교, 나사렛대학교, 충북대학교 등의 평생교육원을 통해 커피를 배울 수도 있다. 단국대학교에는 문화예술대학원 커피학과가 운영 중이다. 학교가 부담스럽다면 앞서 설명한 각 지역 50플러스센터나 기술교육원, 사회복지관에서 하는 강의를 찾아 들어도 된다. 일부 문화센터도 바리스타 교육을 하고 있다.
커피 관련 자격증 중 국내 자격증은 모두 민간 자격증이기 때문에 필수조건은 아니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이야기한다. 취업을 하거나 카페를 창업하는 데 필수도 아닌 데다, 업계에서도 자격증에 따라 크게 대우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젊은 바리스타를 중심으로 바리스타 대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커피 추출 실력이나 자신만의 원두를 혼합한 블랜딩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 이를 계기로 업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도 있고, 인맥을 쌓을 수도 있다. 이런 대회는 시니어 바리스타 상대로도 열리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 노인고용 주간을 맞아 ‘시니어 바리스타 경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커피를 어디서 배우느냐보다는 커피를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기계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쉽고, 커피에 대한 공부뿐만 아니라 커피와 함께 고객을 유인할 상품이나 공간에 대한 고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치열한 대한민국의 커피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지난 9월 17일은 금융권에 종사한 적이 있는 시니어들이 그동안 갈고 닦았던 실력을 견주었던 특별한 날이다. 금융위원회 산하 신용회복위원회가 주관하는 신용상담사 자격 취득 시험일이었다. 신용상담사는 그동안 국가공인이 아닌 민간 자격증이었는데 올해 정식으로 공인 자격증이 되었다. 이미 자격을 취득했던 사람들도 완화 시험을 통해 네 과목 중 두 과목을 다시 합격해야 정식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올 수험생들은 명실상부한 1회 수험생이다. 잘만하면 1회 합격자가 될 테니 기쁨도 두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수험생들의 전언에 의하면 시험은 꽤 난이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분에 1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답안지 작성 시간을 감안하면 1분에 1문제 풀기에는 몹시 버거웠다고 한다. 읽다가 시간이 다 갔다고 푸념을 하는 수험생들도 있다. 상담사를 뽑는데 고시 수준으로 문제가 나왔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다. 작년 합격률이 8%였다고 하니 문제의 수준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그래도 올해는 1회 시험이고 작년에 너무 합격률이 저조했으니 올해는 좀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 했던 많은 수험생들이 뒤통수를 맞았다며 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베이비부머들의 은퇴는 금융권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금융권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더 일찍 은퇴하여 어렵게 사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러고 보니 소싯적 일반 회사에 다니던 사람들이나 화려했던 금융회사에 다니던 사람들이나 은퇴하고 나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이다. 갈 곳 없는 베이비부머들이 많아서인지 자격증의 쓸모는 차치하고 응시자는 넘쳐났다. 용산고에서 응시한 사람들만 해도 1100여명이나 되었다. 용산공고에서 완화시험을 보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1800여명이나 된다는 얘기다. 자격을 취득해서 쓸모가 있다면야 수만 명이 응시해도 상관은 없지만 이처럼 별 용도가 보이지 않는 자격증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용산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본 한 시니어는 “현대중공업에 다니다 퇴직하여 지금은 경영지도사로서 소상공인의 경영컨설팅을 해주고 있다.”면서 “신용상담사 자격을 취득하면 경영 컨설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응시했다.”고 답했다. 그는 몇 가지 자격증이 더 있는데 아마 노후를 대비해서 적극적으로 자격증을 취득했던 것 같다. 어쨋든 그에게는 자격을 취득하고자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시니어가 아닌 젊은이들은 왜 신용삼담사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것일까. 한 젊은 응시생은 “혹시 취업을 하는데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해서 시험을 보았다.”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응시한 줄은 몰랐다.”며 오히려 놀라는 눈치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자격증이 있다. 사실 변호사나 의사 자격증은 한번만 취득하면 평생을 잘 살 수 있다. 자연 노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예로부터 ‘사’자 들어가는 직업은 3가지 열쇠 정도는 받고 여자를 고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는 일찌감치 자격증 만능의 시대가 열렸다. 공인이든 아니든 따놓고 보자는 식이 되었다. 어디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자격증만 따면 된다는 식이다. 가히 자격증 홍수시대이다. 젊은이들의 취업이 어려우니 자격증의 몸값은 더 올랐다. 하지만 막상 취득하고 나면 써먹을 수 없는 자격증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후회한다. 아픔이고 슬픔이다. 이처럼 수험장에만 가도 그 시대의 아픔을 읽을 수 있다. 신용상담사 자격 취득 수험장에 깃든 아픔은 수많은 금융권 은퇴자와 젊은 미취업자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숨이 잘 대변하고 있다.
신용상담사는 신용이 훼손된 사람 즉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들의 신용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도와야 한다는 취지에서 생긴 자격증이다. 우리나라의 금융채무불이행자는 백만 명이 넘는다. 경제가 어려워질 때는 더욱 급속도로 그 수가 늘어난다. 외환위기 때는 300만명에 육박했다. 그 후 신용회복위원회가 설립되고 채무자회생및파산에관한법률이 제정되어 많은 금융채무불이행자의 경제회생을 도왔다. 앞으로도 그 임무는 막중할 것이다. 그러나 신용상담사를 필요로 하는 기관이나 단체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일찌감치 자격증의 한계가 노출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많은 은퇴자와 젊은이들이 자격 취득을 위해 담은 며칠이라도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겪는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