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중국 동진(東晋)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대(宋代) 초기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지금부터 1600여 년 전 인물인데, 하지 않은 말이 뭐가 있을까 싶을 만큼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노래한 시인이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그의 시는 후세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평담은 평범하면서 담담하고 평이하면서 담백하다는 뜻이다. 도연명과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시가 너무 쉽다고 깔보기도 했다지만 시든 서예든 음악이든 모든 예술이 지향하는 최고 경지는 평담과 천진이 아닐까.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도 “시는 평이하고 담백하게 하는 데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연명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쓴 산문시 ‘귀거래사’(歸去來辭)다. “돌아가리라. 전원이 바야흐로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라고 시작된다. 이 시 이후 귀거래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감’이라는 뜻으로 정착됐다.
귀거래사는 전문 334자 모두가 보석같이 빛나지만, 그중에서도 서두 부분의 다음 몇 줄이 특히 유명하다(이치수 번역).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悟已往之不諫]
앞으로의 일은 바른길 좇을 수 있음을 알았다네[知來者之可追]
실로 길을 잘못 들었으나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으며[實迷塗其未遠]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네[覺今是而昨非]
마지막 줄을 요약한 금시작비(今是昨非)는 그 뒤 삶의 반성과 전환, 깨달음과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성어가 됐다. “책을 보다 지난날이 잘못됨을 깨닫고, 술잔 잡고 지금이 옳음을 아네[觀書悟昨非 把酒知今是]”. 이것은 명나라 말기에 장호(張灝)라는 사람이 옛 경전의 좋은 글귀를 전각가들에게 새기게 해서 엮은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 1629년)’에 나오는 시다. 여기에 실린 건 아니지만 앞부분이 “나를 성찰하니 어제가 그른 줄 깨닫겠네[省己悟昨非]”라고 돼 있는 시도 있다. 둘 다 출전은 몰라도 도연명의 시에서 유래된 표현임은 분명하다.
조선조의 문신 이광진(李光軫, 1513~1566), 임의백(任義伯, 1605~1667) 같은 분들은 당호를 금시당(今是堂)으로 짓기도 했다. 이광진의 별서(別墅)였던 밀양의 금시당은 수령 400여 년을 헤아리는 은행나무로 유명하다. 또 2015년 제68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도 제목의 뿌리는 도연명이다.
그런데 이 ‘금시작비’는 전에 저지른 일을 덮어 변명하는 변절의 둔사(遁辭)로 쓰이거나 내 잘못을 제쳐두고 남을 비난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달 4일 윤석열 검찰총장을 향해 “정치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금시작비(今是昨非)의 자세와 어긋난다”고 한 말에 뱀의 독이 묻어 있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냈다고 정홍원 국무총리를 호되게 닦달하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추 장관은 “정부를 공격한다든지 정권을 흔드는 것이 살아 있는 권력 수사라고 미화돼선 안 된다”는 말도 했는데, 그에게는 모든 일이 금시작비가 아니라 금시작시(今是昨是)인 것 같다.
1주일 후 추 장관은 “(윤 총장이) 대권후보 (여론조사 지지율) 1위로 등극했으니 차라리 (총장직을) 사퇴하고 정치를 하라”는 말도 했다. 언론이든 정치인이든 대권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게 좋지만, 등극은 아예 맞지도 않는 표현이다. 등극(登極)이란 문자 그대로 더 오를 곳이 없는 상태, 임금이나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닌가.
이런 정도의 문자 지식과 언어 실력으로 장관직을 수행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까.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허균(許筠)의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은 동·서인이 대립할 때 김효원(金孝元, 1542~1590)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됐던 사람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그에 대해 “자신은 선을 좋아한다고 했으나 시비가 분명치 못하고 사람을 취하는 데에도 착오가 많았다”고 썼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됐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추 장관을 보며 이런 이야기도 생각했다.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거백옥(蘧伯玉)은 공자가 그 행실을 칭찬했던 사람이다. 겉은 관대하지만 속은 강직한 성품으로, 잘못을 고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그가 “나이 50에 49년의 잘못을 알게 됐다[行年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고 했다는 말이 나온다. 줄여서 오십세지비(五十歲知非)라고 하는데, 도연명이 이 말에서 금시작비를 생산해냈는지 모르겠다. 정조 임금도 이 말을 본받아 “나이 50이 다 돼서야 재위 24년 동안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또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자신의 묘비명에 “나이 90에 89년의 허물을 알겠구나[年九十而知八十九非]”라는 말을 삽입한 바 있다. 추 장관은 김 전 총리를 당연히 좋아하지 않을 텐데, 아직 일흔도 안 된 1958년생이니 앞으로도 작비(昨非)를 저지르다가 금시(今是)를 깨닫게 될 시간은 충분하다 하겠다. 그런데 추 장관의 윤석열 찍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 같다. 그가 금시작비라는 말을 되뇌면서, 가슴을 치면서, 귀거래사를 읊으면서 드디어는 어디론가 평담하게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습도가 제법 높았던 날이었다. 다녀온 지 시간이 좀 지났어도 머체왓 숲길은 아직도 가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도 그 숲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 단지 안개비 뿌리던 날의 감성이 보태져서는 아니다.
햇살 쏟아지는 한낮이거나 숲이 일렁이며 바람소리 윙윙거리는 날이었다 해도 신비롭던 풍광의 그 숲은 여전히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숲은 저만치서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수수한 풍치에 끌리듯 다가갔다. 거길 걷는 이들의 오롯한 순례는 머체왓이기에 가능했다. 빼곡했던 숲의 적막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발걸음 소리마저 자연 속에서 일부가 되었다. 머체왓 숲은 그런 곳이었다. 오감이 열리던 그날의 시크릿한 숲의 언어를 기억한다.
머체왓 숲은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있다. 머체왓이란 낱말은 제주도민에게도 익숙지 않다. '머체'는 '돌이 엉기성기 쌓이고 잡목이 우거진 곳', '왓'은 '밭'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를테면 돌과 나무가 우거진 척박한 숲길이라는 뜻이다. 오르내림 경사의 난이도도 거의 없는 쉬운 길인데도 말 그대로 군데군데 이끼 낀 돌무더기가 있고 쭉 평탄하지는 않다. 제주엔 무수한 오름과 둘레길이 있지만 이처럼 손이 덜 탄 머체왓 숲길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한가롭게 걸을 수 있다.
입구 안내판의 머체왓 숲 프로그램과 숲길 안내도를 들여다본다. 희망자는 체험 프로그램이나 숲길 탐방코스별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숲길은 두 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는 머체왓 숲길(느쟁이왓 다리- 방애 혹- 제밤낭 기원 쉼터- 조록낭길- 전망대- 옛집터- 서중천 전망대(다리)- 숲터널- 올리튼물- 연제비도를 돌아 6.7㎞, 약 2시간 30분),
2코스는 머체왓 소롱콧길(방사탑 쉼터- 움막 쉼터- 편백낭 쉼터- 소롱콧 옛길- 중잣성- 편백낭 치유의 숲- 오글레기도- 서중천 습지- 숲터널- 전망대(다리)부터는 1코스와 중복되는 6.3㎞, 약 2시간 20분).
그 외 남쪽으로 3㎞의 서중천 탐방로가 있다. 진입하다 보면 저류지 공사를 하는 곳이 있어 코스를 조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머체왓 숲길은 지난번 태풍 복구 작업으로 탐방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을 걸어놓았다.
머체왓 소롱콧 숲길에 들기 전, 눈앞에 새하얀 메밀밭이 펼쳐졌다. 마치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문장처럼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한 그 광경이었다.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은 아니었지만 초입의 드넓은 목장지대 초원을 뒤덮고 자잘하게 피어난 메밀꽃이 비에 젖어 촉촉했다. 고립무원처럼 적막하던 숲에 젊은 남녀 한 팀이 들어서니 비로소 자연과 사람의 어우러짐이 조화롭다.
소롱콧길은 일대의 지형지세가 작은 용(龍)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코’의 의미는 ‘코지’, ‘곶’의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서중천 주변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 둘레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피톤치드의 숲 내음이 늘 고여 있는 듯하다. 빼곡한 숲 틈으로 가끔씩 하늘이 열리고 조금씩 걸어 들어갈수록 청정 숲은 마치 제주의 속살로 파고드는 듯 신비로웠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초원을 지나 온통 숲인데도 돌담이 가끔 보였다. 밭을 둘러친 돌담을 밭담, 무덤 둘레의 돌담을 산담이라 하는데 경계를 짓기 위함이라고 한다. 집과 집을 구획하는 울담, 전통 초가의 외벽에 쌓은 축담 등 역할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지닌 돌담들은 경계의 의미를 넘어 있는 그대로를 삶 속에 끌어들인 제주 사람들의 혼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밭 한가운데 돌담이 둘러친 묘지가 독특했다. 자손들이 밭을 매다가 "할무니이~" 하고 불러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잠깐 쉬면서 할머니에게 가슴속에 담아둔 고자질도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돌무덤이 어쩐지 정겨워 보였다.
조금씩 비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숲길은 고요했다. 이끼와 고사리가 자라는 길을 걷다가 오래된 고목 아래 펼쳐진 젖은 평상에 앉아봤다. 이따금씩 이렇게 쉼터가 나타나고 숲놀이를 할 수 있도록 배려된 공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나무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길 옆 아래에선 저속으로 흐르는 서중천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운치와 편백나무 향의 상쾌함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숲과 초원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된다. 어디서든 바다를 볼 수 있는 제주에서 이렇게 작은 냇물을 끼고 걷는 소소한 맛이라니, 그저 좋다. tvN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에 머체왓 숲이 나왔을 때 배우 공효진이 "여기 가만히 있으니까 정신이 사납지 않고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지의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신비로운 숲, 인적 없이 적막해도 생동감이 넘친다. 곳곳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도 느껴진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건강한 기운이다. 마음껏 숨을 쉬어도 안전한 곳. 자연이 주는 자비로움에 둘러싸여 복 받은 느낌이다. 요즘 너무 흔해져버린 힐링이란 말을 이곳에서는 쓰고 싶지 않다. 머체왓이나 소롱콧처럼 제주만의 토속적인 말이 따로 없을까. 초원, 꽃, 나무, 하늘, 구름, 빗방울, 돌, 물, 바람까지 제주 근원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숲이다.
이토록 순수한 머쳇골에도 제주의 역사가 서려 있음을 상기할 일이다. 진입로에 들어서자 시비가 눈에 띈다. 비석에 '시비를 세우는 뜻'이라는 글이 있다. "한남리 머쳇골은 제주 역사 속에 '잃어버린 마을이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머쳇골에 살았다는 문태수(78세) 씨는 ‘4.3 이전까지는 조상 대대로 대여섯 가구가 목축업을 하며 살아왔다’라고 회고했다. 오승철 시조시인은 머쳇골 집터의 무늬, 4.3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터무니 있다'라는 시로 2014년 오늘의 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한남리 주민들과 서귀포문인협회에서는 '잃어버린 마을'의 기억을 복원하고 제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복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이것은 뜻있는 다양한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제작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오승철 시조시인의 시 '터무니 있다'도 새겨져 있다.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 꿩으로 우는 저녁
아름다운 제주가 아픔의 땅이기도 한 것을 숲길을 잠깐만 걸어도 알 수 있다. 원시의 자연을 내어주며 쉬다 가라고 숲은 말하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통증도 새겨져 있다. 발걸음을 늦추고 놀멍, 쉬멍, 걸으멍 정글 탐험하듯 미로와 같은 길을 걸으며 그들을 기억한다. 머체왓의 생생한 자연 속에 풍덩 빠져서 치유의 시간을 만나며 삶의 에너지를 얻고 가벼워지는 곳, 기어이 다시 올 수 있도록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한 구절처럼 또 다른 길을 남겨두었다.
*머체왓 숲길 방문객지원센터: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주변에 가볼 만한 곳과 맛집
△머체왓 식당
머체왓 식당은 머체왓 숲길 지원센터와 같은 건물에 있다. 주변엔 식당이 없고 오직 여기뿐이다. 그렇다고 밥상이 허술하지 않다. 오리백숙이나 옥돔구이 정식처럼 한상 차림도 있지만 단품 메뉴도 있다. 반찬이 깔끔하고 정갈하다. 맛도 괜찮다. 줄 서서 먹는 맛집보다 이렇게 그 자리에서 길 가던 사람에게 먹을 만한 밥 한 끼 내어주는 집이 정겹다. 머체왓 식당이 그런 곳이다(머체왓 숲에 들면 음주가무, 흡연, 음식물 반입, 취사 행위가 금지된다).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보룡제과
성산읍으로 나오면 시내에 유명한 빵집이 마주 보고 있다. 그중 보룡제과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클래식한 빵집의 분위기가 친근하다. 시그니처 마늘바게트를 비롯해 가격도 합리적이고 서비스도 후하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747-28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글라스 하우스’
머체왓에서 성산으로 나왔다면 섭지코지에 한번 들러보는 건 어떨지. 성산일출봉 옆 섭지코지는 제주엘 가면 누구나 가보는 곳 중 하나다. 게다가 영화나 드라마 촬영 단골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멋진 건축물이 제주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글라스 하우스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이 제주에 제법 많은데 그중 글라스 하우스는 제주의 자연과 풍광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제주의 햇살과 바다와 바람을 은유적으로 시각화했다는 건물 앞에서 인생 샷을 찍거나 실내의 전망 좋은 카페에 들러봐도 좋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46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비(詩碑) 거리
성산포를 사랑한 이생진 시인의 시비공원이 성산포 해안에 조성되어 있다. 성산 일출봉이 건너편으로 보이고 제주의 바닷바람과 햇살이 시비 위로 뿌려지는 곳. 오가는 이 별로 없는 그 바닷가에 지나듯 들러 시인의 시를 천천히 읽어본다면 여행의 기억이 더 풍성해진다.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305-1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난주에 ‘소리 좀 내지 말고 살아라’라는 글을 썼더니 여러 사람이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은 단톡방에 “내가 목소리가 커서 그렇지 실은 말수가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님”이라고 주장했다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모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쭝얼쭝얼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디”라고 버티다 “목소리가 큰 건 인정하셔야지”라는 핀잔을 받았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반응은 판소리와 가야금을 하는 여성이 내 블로그에 올린 댓글이다. 첫 번째 댓글은 이랬다. “프랑스 시인 장 콕토의 ‘귀(내 귀는 소라껍질)’라는 시를 읽고 실제로 소라껍질을 귀에 대보았을 때, ‘솨아--(쏴아가 아님)’ 소리를 듣고 ‘아! 정말!’ 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바닷소리에 섞여 아련히 바다의 향기까지 나는 듯했습니다.”
장 콕토(1889~1963)의 그 시 ‘Mon oreille’(내 귀)는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라고 돼 있다. ‘껍질’은 물체의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하지 않은 물질, ‘껍데기’는 달걀이나 조개 따위의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한 물질을 말한다. 그러니까 소라껍데기라고 써야 맞는데, 국립국어원은 조개의 경우 예외적으로 ‘조개껍질’과 ‘조개껍데기’를 모두 쓸 수 있다고 하니 진짜 헷갈린다. 소라껍질이라고 쓴 건 운율상 그런 거 같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따지지 말자. 원래 이런 거 쓰려고 한 글이 아니니까. 그 여성의 두 번째 댓글이 감동적이다. “순수한 자연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기압의 차이로 생기는 바람이나 조수 간만의 차이로 생기는 파도 소리, 이런 거 말고요.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내는 자연의 소리를. 꽃이 피는 순간을 본 적이 있나요? 꽃이 피어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고 시절, 친한 친구 집 대문간에 한 무더기의 달맞이꽃이 있었습니다. 요즘 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작은 달맞이꽃이 아니고, 키도 크고 꽃대도 꽃송이도 큰 튼실한 달맞이꽃 한 무더기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숨을 한번 고르고 계속 읽는다. “초저녁 7시에서 8시쯤 달이 올라올 무렵 달맞이꽃 옆에 서 있으면, 여기저기서 퍽! 퍽! 퍽! 하는 작은 소리가 나면서 달맞이꽃 꽃송이가 한순간에 벌어졌습니다. 오므려져 있던 달맞이꽃 봉오리가 퍽! 소리를 내면서 순간 꽃송이가 활짝 벌어지는 것입니다. 한 송이가 소리를 내며 피어나면 시샘하듯이 여기저기서 퍽! 퍽! 퍽! 하는 작은 소리가 나면서 꽃송이가 벌어지는데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그때, ‘아! 그래서 달맞이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이 떠오를 때 달맞이꽃이 피어나니까요. 다른 꽃들은 소리 없이 서서히 벌어지는데, 제가 아는 한 오직 달맞이꽃만이 순간에 벌어지면서 피어납니다. 그 순간을 위해서 달맞이꽃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했을까요? 온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모아 한꺼번에 확! 뿜어냈을 테니 말입니다. 요즘 같았으면 동영상을 찍어놓았을 텐데….”
댓글은 끝나지 않았다. “소리를 주제로 쓴 글을 읽으니 아름다웠던 옛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젠 다시 볼 수도 듣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피는 소리.’ 전에도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번씩 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험이라서. 며칠 전 그 친구와도 전화로 달맞이꽃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는 그 소리를 수없이 많이 들었답니다. 혹시 그런 귀한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마지막 문장이 나를 찔렀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없다. 신문사 선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는 들었다. 대학교 몇 학년 때인가 캠핑을 가서 저녁을 차리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고 한다. 웬일인가 하고 둘러보니 여기저기서 노란 달맞이꽃이 환하게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황홀한 장면에 친구들은 다들 넋을 잃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고 한다. ‘불현듯’이라는 말은 그런 때 쓰는 게 아닌가 싶다. ‘불현듯’은 원래 ‘불을 켠 듯’인데, 불을 켜면 갑자기 환해지듯이 어떤 일이나 생각이 느닷없이 일어날 때 쓰는 말 아닌가. 불현듯 주위가 불 현 듯해진 것이다.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부른 ‘달맞이꽃’(지웅 작사 김희갑 작곡, 1972)의 가사가 이 꽃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그 이름 달맞이꽃/ 아 아 아 아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새파란 달빛 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달맞이꽃은 첫해에는 원줄기 없이 자라다가 겨울을 지내고 다음 해에 줄기를 만들어 곧추 자라 꽃피는 두해살이풀이다. 꽃은 여름에 잎겨드랑이에 한 개씩 밤에 피어 다음 날 아침에 진다. 월견초(月見草)라고도 부르는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 밤의 요정, 소원이다. 그런데 정원에 화초로 심는 분홍달맞이꽃과 황금달맞이꽃은 낮에 꽃이 피어 낮달맞이꽃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렇게 달맞이꽃 공부를 하면서 나는 남에게 내놓을 만한 나만의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고 머릿속의 주머니를 뒤져도 달맞이꽃처럼 멋진 건 없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기거했던 사랑방에 어느 날 밤 혼자 앉아서 들었던 뒷산의 솔바람소리, 그것은 깊고 아득하면서도 무서웠다. 부엉이소리까지 얹히면 더 그랬다. 그리고 계룡산 기슭의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들었던 밤 늑대 울음소리, 그 아기 울음 같던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사람은 중학교 국어시간에 ‘나를 슬프게 하는 소리’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할 때, 한밤중 성주산 고개를 허위허위 올라가는 트럭의 숨 가쁜 비명을 글로 써 선생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달콤하면서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소리보다 듣기 싫은 소리를 더 잘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슬펐던 소리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지난주 쓴 글에 듣기 싫은 소리로 개소리도 언급했지만, 사실은 ‘개띠 법무부 장관의 개소리’라고 쓰려다가 그냥 개소리라고만 썼다. 앞으로 나도 달맞이꽃이 피는 소리,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 아이의 이가 새로 나는 소리, 서산에 걸린 해가 모든 이들에게 인사하는 소리, 술이나 벼가 익는 소리, 가을 깊은 밤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이런 걸 들으면 좋겠다고 소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큰 마이크를 앞에 두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손으로 효과음을 내면서 오로지 소리만 들려준다. 제목에는 먹방, 롤플레이, 자연현상, 수면 등과 같은 단어가 달려 있다. 이쯤 되면 뭘 말하려는지 알아차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번 큐레이션의 주제는 바로 ‘ASMR’이다.
‘ASMR’은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줄임말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자율감각 쾌락반응이다.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을 뜻한다. 바람 부는 소리, 연필로 글씨를 쓰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등을 제공한다. 이런 설명 등을 요약해 ‘청각을 통한 오감 만족’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근래에 생긴 개념은 아니다. 2010년대 미국과 호주 등에서 유행하면서 전 세계로 퍼졌다.
“10년 전에 유행했던 걸 왜 이 시점에 소환하는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바로 ‘코로나19’ 때문이다. 9월 모바일 설문조사업체 오픈 서베이가 발표한 ‘건강관리 트렌드 리포트 2020’에 따르면, 정신건강을 위한 행동 1순위는 충분한 수면이다. 코로나19가 없었던 지난해보다 3.1%P 증가한 수치다. 실제로 숙면의 어려움을 호소한 경우는 작년보다 7.6%P 증가했다. 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상 동영상 혹은 ASMR과 같은 음성 콘텐츠를 찾는 경우가 47%로 가장 많았다. 코로나로 인해 ASMR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ASMR 채널을 소개한다.
ASMR Boyoung 반보영
엄마나 애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귀를 파다가 깜빡 잠든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이 채널은 사물을 이용한 소리를 주로 들려주는데, 특히 귀 청소를 콘셉트로 한 영상이 가장 많다. 이어폰을 끼고 들으면 실제로 누가 귀를 파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영상 중간에 눈앞에 있는 사람처럼 상황극을 해서 몰입도가 더 높다. 영상으로 이런 경험을 하면 좋은 점도 있다. 귀이개가 닿는 차가운 촉감이나 잘못 건드렸을 때의 고통이 없다. 한마디로 잠에 빠지도록 해주는 가장 좋은 환경을 구현하고 있다. 덤으로 빗질이나 샴푸하는 소리를 담은 영상도 있는데, 듣다 보면 미용실에 온 기분이 들어 마음이 차분해진다.
뚜비 Ddoobiii ASMR
실제로 황시목 같은 검사가 있을까? 직장에 황시목 같은 후배가 있으면 어떨까? 황시목의 사무실은 어떨까? 깨끗할까? 참고로 황시목은 얼마 전에 방영을 끝낸 tvN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끝나도 여운은 늘 남는다. 정말 좋은 드라마는 또 봐도 재밌다. 이 채널은 영화 혹은 드라마 속 장소나 장면 그리고 등장인물이 연상되는 ASMR을 들려준다. ‘황시목 검사의 사무실’이나 ‘호그와트 주방’이 그 단적인 예다. 드라마나 영화가 남기는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이 채널을 추천한다. 자기 전에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너무 피곤해서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들어도 좋다. 잠도 자고 드라마도 느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TV창비
갑자기 출판사 유튜브 채널을 소개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언뜻 보기에 출판사 채널이랑 ASMR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최근 이 채널이 시인의 ASMR을 마련했다. 시를 낭독하는 채널은 유튜브에 많다. 하지만 시인이 자신이 쓴 시를 직접 읽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요즘 상황은 코로나19 때문에 낭송회를 여는 일도, 참여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런 시기라서 그런지 더 반갑다. 시각의 청각화가 이런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박소란 시인의 ‘모르는 사이’를 추천한다.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단잠에 빠져든다. 그만큼 효과는 입증된 셈(?)이다.
힐링사운드 ASMR
이 채널 소개는 많이 망설였다. 혼자만 알고 싶은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구독자 수는 적지만 영상은 알차다. 영상을 들으면 영화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 상우가 떠오른다. 대나무숲에서 조용히 소리를 채집하던 그처럼 채널 운영자는 직접 자연의 소리와 영상을 모은다. 그만큼 생생하다. 평균 8시간이 넘는 긴 영상이지만 계속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 동시에 마음이 평온해져서 보고 있으면 몸이 노곤해진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빗소리, 계곡물 소리를 듣다 보면 커다란 숲에 들어선 듯한 기분도 든다.
*구독자 수는 2020년 10월 기준
● Exhibition
◇구정아: 2020
일정 11월 28일까지 장소 PKM 갤러리
특유의 기민한 감각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는 구정아 작가의 개인전. 야외 설치작업을 비롯해 회화, 드로잉, 조각 등 미공개 최신작 30점을 선보인다. 밤이 되면 녹색 빛을 뿜어내는 야광 스케이트 파크 ‘레조넌스’부터 어두운 전시장에서도 밝게 빛나는 ‘세븐 스타즈’까지 인광 페인트를 활용한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갤러리는 낮과 밤의 분위기가 다른 작품을 보다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일몰 이후인 저녁 9시까지 개방한다.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
일정 11월 15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빛을 통해 우리 문화재를 탐구한다. 제1부에서는 현미경으로 문화재의 빛과 색을 관찰하며, 2부에서는 빛으로 촬영한 문화재의 모습을 살펴본다. 특히 희미해진 유적 속 글귀나 그림 등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을 판독하는 과정을 밝힌다. 3부는 빛을 통해 문화재의 보존 상태를 점검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국가지정문화재 10점을 비롯해 전체 57건 67점이 공개된다.
◇여행갈까요
일정 12월 27일까지 장소 뚝섬미술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코로나19)으로 여행을 가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기획한 전시. 하와이, 베트남,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여행지를 연상케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마치 세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전시장 입구를 공항처럼 연출하고 비행기 객실 모습을 재현해 여행 전의 설렘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전시 후반부에는 세계 각국 여행지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단순히 여행에 대한 향수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행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던진다.
● Book
◇비건 하이프로틴 쿡북 (쥘 노이만 저·든든)
고기 없이도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90여 가지의 비건 요리를 소개한다. 모든 요리에 1회분의 영양성분표가 적혀 있으며 30일 식단표가 함께 수록돼 있어 균형 잡힌 채식을 돕는다.
◇쓰레기 거절하기 (산드라 크라우트바슐 저·양철북)
플라스틱 제로 운동으로 시작해 10년째 쓰레기 제로 운동을 실천 중인 한 가족의 이야기. 이웃과 차를 공유하고 냉장고를 반만 채우는 등 색다른 방식으로 쓰레기를 줄이며 깨달은 내용을 담았다.
◇착한 소비는 없다 (최원형 저·자연과 생태)
인간의 무분별한 소비가 환경과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일상 속 사례를 통해 차근히 짚어준다. 더불어 덜 쓰고, 다시 쓰는 소비를 통해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들어나갈 것을 제안한다.
● Movie
◇도굴
개봉 11월 예정 장르 범죄 감독 박정배 출연 이제훈, 조우진, 신혜선, 임원희 등
흙 맛만 봐도 보물을 찾아내는 타고난 천재 도굴꾼 ‘강동구’가 전국의 전문가들과 함께 땅속에 숨어 있는 유물을 파헤치며 짜릿한 판을 벌이는 범죄 오락영화다. 황영사 금동불상, 고구려 고분 벽화, 서울 강남 한복판의 선릉까지 거침없이 파내려가는 도굴꾼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껏 한국 영화에서 다룬 적 없는 기상천외한 도굴의 세계를 스릴 있게 조명한다.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지은 무덤과 화려한 유물 등 다양한 볼거리와 더불어 주연 배우 네 명의 환상적인 팀플레이가 작품의 재미를 높인다. ‘수상한 그녀’, ‘도가니’ 등 조감독을 거쳐 오랜 기간 노하우를 갈고 닦은 박정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내가 죽던 날
개봉 11월 12일 장르 드라마 감독 박지완 출연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등
오랜 공백 이후 복직을 앞둔 형사 ‘현수’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 ‘세진’의 실종사건을 추적하며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았다. 현수는 세진의 사건을 담당했던 전직 형사와 연락 두절된 가족, 사건을 목격한 ‘순천댁’까지 차례로 만나며 감춰졌던 비밀에 가까워진다. 배우 김혜수의 2년 만의 스크린 컴백 작품이자, 여고생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포착한 단편영화 ‘여고생이다’로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워 위드 그랜파
개봉 11월 예정 장르 코미디 감독 팀 힐 출연 로버트 드 니로, 우마 서먼, 오크스 페글리 등
같은 방을 쓰게 된 막무가내 할아버지 ‘에드’와 사춘기 손자 ‘피터’가 하나뿐인 방을 사수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골탕 먹이는 유쾌한 전쟁 이야기다. 아카데미상 2관왕, 골든글러브 2관왕에 빛나는 로버트 드 니로의 코믹한 연기와, 영화 ‘원더스트럭’으로 연기력을 입증한 아역배우 오크스 페글리의 호흡이 돋보인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각본을 쓴 팀 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웰메이드 코미디를 선보일 예정이다.
● Stage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일정 11월 3일부터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연출 박해림 출연 강필석, 정운선, 윤석현 등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 시인의 시 ‘나와 나탸샤와 흰 당나귀’를 모티브로 삼은 동명의 창작 뮤지컬이다.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이자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렸던 ‘백석’과 그런 그를 못 잊어 평생을 그리움으로 살았던 기생 ‘자야’의 사랑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풀어낸다. 모든 뮤지컬 넘버의 가사에 백석이 쓴 시를 차용해 마치 한 권의 시집을 읽은 듯한 여운과 감동을 준다. 2015년 초연한 이 작품은 제1회 한국뮤지컬 어워즈에서 극본, 작사상, 연출상, 작품상 등을 받았고 차범석 희곡상에서도 뮤지컬 극본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초연 이후 세 번째로 관객 앞에 서는 이번 시즌에서는 극본을 쓴 박해림 작가가 연출까지 도맡아 작품의 서정성을 한층 더 높일 예정이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좌석 간 띄어 앉기를 실시한다.
◇블랙메리포핀스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대학로티오엠 1관 연출 서윤미 출연 김도빈, 임준혁, 임찬민 등
환상적인 동화 ‘메리 포핀스’를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변주한 창작 뮤지컬. 1920년대 한 대저택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에 얽힌 유모 ‘메리’와 네 남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 시즌에는 둘째 ‘헤르만’의 시점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쳤다면, 이번 시즌에서는 막내 ‘요나스’로 중심 화자를 바꿔 같은 대본이지만 인물의 심리 변화를 색다르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퀄
일정 11월 22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2관 연출 이은영 출연 김지휘, 조성윤 등
어릴 적부터 폐병을 앓아온 ‘니콜라’와 그를 보살피는 친구이자 의사 ‘테오’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극작가, 배우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스에미츠 켄이치 원작의 작품이다. 2015년 도쿄에서 초연 후 한국에서는 처음 선보인다. 연금술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이용해 단 두 명의 출연진만으로도 긴박감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정확히 30년 전인 1990년 10월, 나는 미 국무부의 ‘국제교류 연수 프로그램’(IVP, International Visitor Program)에 초청을 받아 한 달간 미국을 여행했다. IVP는 각국 사람들을 초청해 돌아보게 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국익을 증진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영어가 서투른 나 같은 사람에게는 통역안내인을 붙여주고 매일 얼마씩 용돈(per diem)도 준다.
그때 나는 ‘미국의 교육’을 살펴보기로 여행 주제를 정하고, 땅을 딱 반 갈라 북쪽만 돌았다. IVP는 워싱턴에서 1주일간 국무부 의회 등 여러 군데를 방문(이건 필수)하고 나서 자유여행을 하게 돼 있다. 땅덩어리가 크니 나머지 3주 동안 욕심내지 말자고 그리 한 건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짓이었다. 미국 남부를 돌아볼 기회는 그 뒤 한 번도 없었으니까.
워싱턴 일정을 마친 뒤 나는 뉴욕, 보스턴을 거쳐 일리노이주의 프리포트(Freeport)라는 작은 도시에 가서 보스턴에 이어 두 번째 민박을 했다. 거기서 만난 분이 유리시(Urish) 할아버지다. 보험회사 부사장이었던 그는 명랑 쾌활하고 남을 잘 배려해주는 사람이었다. 이틀 묵는 동안 느슨하지 않고 즐겁게 나를 성심성의껏 안내해주었다.
그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아 찰스! 앞으로 널 찰스라 부르겠어”라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미국 와서 젊은 아가씨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이 주책아!)라고 했더니 자기 회사에 데리고 가서는 “여기 이 한국에서 온 찰스라는 청년이 젊은 아가씨들을 찾고 있다”며 이 방 저 방 떠들고 다녔다. 여직원들이 “나 젊은데”, “나도 젊은데?”라며 들이대 나는 거의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유리시 부부, 통역안내인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어떠냐?”라고 묻기에 “맛이 별로다”(이 주책아!)라고 해서 그들 부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솔직한 게 좋은 줄 알고 그랬던 건데, 옆에 앉아 있던 통역안내인은 자기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도 유리시 할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나를 따뜻하게 배려했다. 그 지역의 전직 하원의원(상원의원이었나?)을 만날 때, 나는 “미국 하원의원(상원의원이었나?)의 절반은 도둑놈이다”라는 미국 어느 신문의 보도를 거론했다(이 주책아!). 의원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자 그 신문은 “미국 하원의원(상원의원?)의 절반은 도둑놈이 아니다”라고 정정했다. 말하자면 정정을 하지 않은 건데, 통역안내인이 “그들은 도둑놈이 아니다”라고 정정했다고 옮기기에 잘못된 통역이라고 알려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리시 할아버지는 말뜻을 알아듣고 배꼽을 쥐며 크게 웃었다.
나는 신이 나서 미국 정치가 어떻고 한국 의회제도는 어떻고 하고 떠들어댔다(영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하니까 얼마든지!). 코리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던 그 의원은 내내 떨떠름한 표정인 채 “한국 의회도 양원제냐?”, 이런 걸 나에게 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유리시 할아버지는 내게 엄지를 치켜 올리며 “Charles, I’m proud of you!(찰스,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말했다. 자기 조카가 장한 일을 한 것처럼 즐거워하면서.
그는 매일 3마일씩 걷는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1마일이 1.6km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핼러윈이 다가오는 무렵이어서인지 유리시 할아버지는 나를 차에 태워 호박 등을 파는 농산물 시장에도 데려갔다. 미국 사회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집의 넓은 지하실을 혼자서 쓰는 동안 나는 화장실 변기에 남은 미제 똥도 보았다. 그때 이문구의 연작소설 ‘관촌수필’ 중 한 대목을 생각했다. 그 소설에 열차를 탄 미국인들이 철로에 남긴 똥을 주워 맛보다가 ‘고바또’(고씨+세퍼드)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이 나온다. 미제 똥이 궁금해서 그랬던 거다.
유리시 할아버지는 유대계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유대의 ‘유’ 자에다 ‘영광의 탈출’(Exodus)의 작가 레온 유리스라는 이름이 유리시와 겹쳐져 유대계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때 그는 거의 일흔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니 지금은 이미 돌아가셨을 것이다. 내가 두고두고 미안한 건 귀국한 뒤 소식을 주고받지 못한 것이다. 유리시 할아버지는 두 번인가 편지를 보내 “Charles, what’s new?”라며 소식을 물었는데, 나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이유는 사실 한 가지, 영어로 작문을 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이 한심한 멍청이, 주책아!). 그 편지는 지금 찾기도 어렵다. 미국 여행에 관한 기록이나 문서도 버리진 않았지만, 어디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그분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유머, 관용과 배려, 이웃에 대한 관심과 선의, 인류 번영에 대한 신뢰 이런 것들이었다. 9·11테러를 겪은 데다 트럼프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된 이후의 미국과 미국인은 많이 달라져 있겠지만, 30년 전에 미국, 미국인의 좋은 점을 알게 해주었으니 IVP는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 가이후 도시키 전 일본 총리, 이런 사람들도 젊어서 IVP 여행을 경험하고 미국을 호평하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이 제도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나 10여 년 전부터 여행기간이 3주로 줄어들었다. 한 달씩 시간을 내기가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있어 조정했다고 한다. 사실 한 달간 직장과 가정을 비우고 자기가 정한 주제 아래 마음대로 원하는 곳을 찾아다니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미국인들도 수도 워싱턴에 가보지 못하고 평생을 마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시인 최승자(崔勝子)가 어느 시에선가 “10월의 자유는 아름다웠다”라고 썼던 거 같은데, 그 10월은 아름답고 즐거웠다. 그리고 그 10월은 미안하고 빚진 기분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 음악 속 숨겨진 사연이나 명사의 말을 통해서 클래식에 쉽게 접근해보자. 아래의 인터뷰는 가상으로 진행했다.
우수에 젖은 눈빛과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휘날리는 턱수염. 사진으로 봤을 때 그의 인상은 날카로웠다.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거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맥주를 앞에 놓고 집 앞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눈을 찡긋하며 물 대신 맥주잔을 건네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수더분한 동네 아저씨와 같은 모습에 다소 놀라웠지만, 곡이나 자신의 철학을 말할 때는 몹시 진지한 눈망울을 보였고, 사랑했던 그녀를 말할 때는 아련한 눈빛을 드러냈다.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과 '사랑' 그리고 '음악'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Q. 최근에 선생님의 삶을 모티프로 한 드라마가 한국에서 방영됐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새는 이곳도 5G가 들어오면서 원활하게 소식을 듣고 있어요. 후대에 나를 모티프로 한 영화나 소설이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후에 일이라서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영광인 동시에 부끄럽습니다. 곡이 널리 쓰이는 것은 좋지만, 제 얘기를 회자하는 것은 지금도 부담스러워요.
Q. 여기서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요?
슈만 선생님과 그녀도 여기서 함께 지내고 있어요. 이곳 관리자가 배려해준 덕분이에요. 그가 생전에 내 팬이었다고 해요. 그의 도움으로 여기서도 틈틈이 연주도 하고 작곡도 해요. 가끔 집에 놀러 오는 후배들과 함께 연주도 합니다. 어제는 굴드가 다녀갔어요. 까칠하고 괴짜 같은 구석이 있지만, 그가 연주하는 곡은 정말 좋아요. 어제는 인터메조를 들려주고 갔는데, 한참 멍하게 듣고 있었어요. 가끔은 나보다 그 곡을 잘 해석하는 것 같아서 밉지만, 한편으로는 그 곡을 잘 연주해줘서 고마워요. 그는 미워할 수 없는 악동 같은 친구예요.
Q. 언급하신 ‘그녀’는 100 마르크화 지폐에 나온 그분을 말하는 걸까요?
웬만하면 그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으면 합니다. 그녀를 존경하는 동시에 존중하고, 나로 인해서 피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Q. 그렇다면 슈만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스무 살 때 친구랑 함께 연주 여행을 떠났어요. 말이 연주 여행이지, 떠돌이처럼 독일의 곳곳을 유랑했어요. 우연히 하노버에서 요하임이라는 친구를 알게 됐어요. 그 친구가 소개해준 분이 슈만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에게는 참 고마워요. 당시 선생님은 ‘음악신보’라는 잡지를 만들고 계셨는데, 저의 재능을 높이 사시고 극찬하는 평론을 써주셨어요. 아마도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인터뷰를 못 했을지도 몰라요. 운이 참 좋았어요.
Q. 스무 살 이전의 브람스는 어땠나요?
제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문학 소년이었어요. 어머니가 주신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특히 시에 심취했어요. 독일의 시인들이 쓴 시집을 많이 읽었어요. 이런 것이 곡을 쓰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기도 했어요.
Q. 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음악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음악은 진입 장벽이 높은 예술이잖아요. 하지만 제게는 일종의 놀이처럼 다가왔어요. 아버지께서 시립극장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시는 분이었어요. 덕분에 악기를 접할 기회가 남들보다 많았어요. 아버지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기도 했고요. 악기를 연주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서 즐거웠어요. 코셀이나 마르크젠 선생님처럼 훌륭한 분들에게 음악도 배웠어요. 그 시기에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의 곡을 배우면서 음악적 소양을 쌓았어요.
Q. 그 시절에 음악을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어려움이 있었죠. 예술가들은 돈 얘기를 하고, 반대로 은행원들은 예술 얘기를 한다는 말이 있죠? 그만큼 예술가의 삶이 곤궁해요. 저도 뼈저리게 느꼈어요.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어요. 가정 형편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그때부터 안 했던 일이 없어요. 학교도 그만두고 시립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인형극의 반주를 했어요. 교회에 나가서 오르간도 연주하고, 밤에는 술집에 가서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정말 바빠서 밤낮없이 살았어요.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귀중한 시간이었어요. 선생님들에게 배웠던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면서 음악적 감각을 많이 키웠던 것 같아요.
Q. 곡을 쓸 때는 어디서 주로 영감을 얻으시나요?
독일 민요와 독일 시를 곡에 담으려고 노력해요. 민요는 예로부터 입으로 전해오는 선율이라 독립적이고 명확한 선율을 갖고 있어요. 스스로 여기서 음악적 가치를 발견했고, 민요를 저만의 방식으로 곡에서 해석했어요. 제가 시를 좋아해서, 곡에도 시가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쳤어요. 괴테가 쓴 유명한 시부터 무명의 시인이 쓴 시까지 다양한 시를 곡에 썼어요. '시가 얼마나 음악을 풍성하게 해줄 것인가?' 곡을 쓸 때 그런 것을 고민했어요. 시를 고를 때 시에 담긴 정서적 분위기도 많이 살펴봐요. 개인적인 취향을 말하면 감정적으로 절제된 시를 좋아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장인정신이에요. 장인정신이 없다면 영감은 바람 속에 부는 갈대에 불과해요.
Q. 말년에 작곡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는 어떤 마음으로 쓰셨나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는 제 인생을 따라다니는 화두였어요. 시와 성경에 심취했던 것도, 이 주제를 깊게 다루는 영역이라서 끌렸던 것 같아요. 그 이전에도 죽음을 목격했지만, 가장 큰 충격이었던 건 슈만 선생님의 죽음이에요. 제자로서 죄책감과 동시에 미안함이 컸어요. '선생님을 그렇게 몰아넣었던 것이 무엇일까?' '삶은 괴로운 걸까?'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한편 선생님 곁을 지키던 그녀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무척 괴로웠어요. 동시에 존경했던 그녀에 대한 애정은 날이 갈수록 더 커졌어요. 물론 좋아지는 만큼 각자가 처한 상황 때문에 심적인 거리는 더 멀어졌어요. 후에 아내와 누이를 먼저 보내면서 삶이 허무해졌어요. 외로운 날들이 많았어요. 죽음은 허무하고 비참한데, 깊어지는 사랑은 더 달콤했어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말이죠. 죽음의 허무함과 삶을 다시금 일으키는 사랑. 그 곡은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썼던 것이에요.
Q. 동시대 작곡가 보다 작품이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빨리 먹는 것과 천천히 먹는 것의 차이예요. 어느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없죠. 습성의 차이일 뿐. 속도가 느려도 감당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다른 분이 무책임하다는 것은 아니에요. 나름의 호흡과 스텝에 따라서 움직였을 뿐이에요. 곡을 개수로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이듯 작업을 할 뿐이에요.
Q. 혹시 다음 생이 있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나요?
글쎄요,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음... 저는 민망하지만 브람스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Q. 이유는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동물로 태어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악기를 연주하지 못하면 억울할 것 같아요. 이왕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음악을 하고 싶어요. 제 안에서는 늘 음표가 꿈틀거리는 것 같아요. 물론 다시 음악을 한다면 슈만 선생님과 그녀 곁에서 하고 싶어요. 그녀의 사랑을 얻지 못해 또다시 괴로워하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삶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프로이트가 그랬죠. ‘사랑하고 일하고, 일하고 사랑하라.’ 제게 사랑의 시련, 죽음의 허무함이 없었다면 곡을 못 썼을 거예요.
앞서 그가 몇 차례 언급한 그녀와 이성적인 교제는 없었지만, 그녀를 늘 존경했고 슈만이 떠난 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갔다. 말년에 쓴 ‘네 개의 엄숙한 노래’는 죽음이 임박한 그녀를 생각하며 쓴 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브람스는 그녀와의 관계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화가인 막스 클링거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그가 그녀의 이름을 끝내 인터뷰 내내 밝히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다. 세상은 불륜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지만, 그가 보여준 마음은 진실했고, 행동은 신사답게 했다. 스승에 대한 신의와 각자의 가정이 있는 상황 속에서 브람스는 선을 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는 그녀였고, 그녀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은 곡에 남아서 지금 이 시각에도 흐르고 있다. 브람스의 말대로 장인정신이 없는 영감이 한낱 바람 속 갈대에 불과한 것처럼, 그의 애절한 사랑을 빼고 그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여인을 위한 한 남자의 노래는 시간이 지나도 유효하다.
최근 모 대학에서 외로움의 경험에 대한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질문은 “어떨 때 가장 외로움을 느끼느냐?”로부터 시작된다. 외로움을 느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고, 외로움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무었을 하느냐로 질문을 닫는다. 특히 코로나19를 겪으며 그전과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구분해서 답을 달라고 했다.
“지금 외로우세요?”라는 질문을 불쑥 받고 보니 당황스럽다. 코로나19가 인간관계를 훼방하고 있다. 이런 사태가 장기화되니 너나없이 마음속의 작은 외로움이 꿈틀거린다. 국어사전에는 외로움을 “혼자가 되어 적적하고 쓸쓸한 느낌”이라고 정의한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 나이까지 오버랩되며 더 쓸쓸한 느낌이 밀려온다.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게’는 외로움에 대한 시상을 잘 표현했다.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 않는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씨는 자신의 저서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를 통해 사람은 외로움이 존재의 본질이니까 격하게 외로워보라고 말한다. 또 그러려면 사람도 좀 적게 만나고, 바쁠수록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조언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혼자 있을 때는 가끔씩 외롭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나보다. 특히 우리가 처음 경험하는 코로나19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요구하면서 또 다른 외로움을 강요한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외로움의 강도가 가장 큰 것은 배우자나 가족을 잃은 뒤에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한다. 그다음은 퇴직이나 졸업 등 집단에서의 이탈과 자식이 부모 품을 떠나면서 받는 빈 둥지 증후군이다. 나도 심하게 외로움을 느꼈던 적이 있다. 30여 년간 다닌 직장에서 정년제도의 덫에 걸려 비명 한 번 못 질러보고 혼자가 되었을 때다. 아침에 허둥대며 출근하지 않아도 돼서 ‘룰루랄라’ 할 줄 알았는데 막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허망하고 외로웠다. 유효 일자는 지났지만 겉은 멀쩡한 빵을 들고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사람처럼 무기력해졌다.
최근 그때와 비슷한 경험을 또 했다. 주말마다 이용하던 테니스장이 코로나19로 폐쇄되자 식사를 하며 정담을 나누던 여러 모임들이 취소되었다. 나는 주말의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했고, 이제 뭘 하며 지내나 고민에 휩싸였다. 혼자 산행이나 도보여행도 해봤지만 함께할 사람이 없어 외로웠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불안과 외로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안 되겠다 싶었다. 바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재취업을 했다. 급여도 낮고 지방근무도 해야 하는 작은 업체였다. 그 뒤 주말부부로 지내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혼밥’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저녁이면 불 꺼진 빈방에 들어가기가 싫다. 젊은 동료들과도 잘 지내지만 순간순간 외롭다는 걸 느낀다. 대화는 해도 마음은 닫고 있는 게 보인다. SNS에서 맺어진 사람들도 많지만 서로 친한 척만 할 뿐이다. 그들에게 100만 원을 빌릴 자신이 있냐고 물어보면, 없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김소월의 시 ‘나그네’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고 말을 하니 더 그런 것 같다. 아프다고 소리치면 더 아프고, 보고 싶다고 말하면 더 보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잊고 더 바쁘게 살려고 노력한다. 살아보니 외로움도 맷집처럼 면역력이 생겼다. 궁하면 통한다고 지독하게 외로워보면 반작용으로 이겨내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인간은 공동생활을 하지만 개별 생명체다. 언젠가는 누구나 혼자 남게 된다.
동호회 모임도 만날 때는 만남에만 열중하고, 모임이 끝나고 헤어지면서 외롭다는 말을 하지 말자. 외롭다는 말을 하면 더 외로워진다. 어차피 겪어야 할 코로나19 위기를 혼자 있는 기회로 삼자. 책도 읽고 공부도 하자. 밝은 햇빛을 받으며 걷고 신선한 공기도 맘껏 마셔보자. SNS 활동도 열심히 하고 줌(Zoom)으로 화상회의에도 적극 참석해보자. 인터넷 세상에 순응하고 따라가야 외로움이 덜하다. 외로움의 맷집을 길러야 한다.
자식들이 결혼해서 집을 떠나도, 다니러 온 손자들이 재잘거리다 돌아가도 잠시잠깐 허전함을 느끼고 이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니어의 연륜이야말로 외로움의 면역력이다. 하루하루 바쁘고 보람 있게 보내자.
● Exhibition
◇남겨진, 미술, 쓰여질, 포스터
일정 10월 24일까지 장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광고나 홍보를 위해 사용된 미술 포스터를 한데 모아 선보인다. 전시기간이 지나고 나면 본연의 목적은 사라지지만, 포스터가 지닌 예술·기록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 기획했다. 전시작은 박물관이 자체적으로 입수해 소장하거나 기증받은 것으로, 총 1000여 점의 포스터 중 미술사적 의의가 큰 작품 60여 장을 선별했다. 1960년부터 2010년까지 시대별로 다양하게 만들어진 포스터의 발전 과정과 이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일정 12월 19일까지 장소 스페이스 씨
한국을 대표하는 동물이자 한민족 정서 깊은 곳에 자리하는 존재, 호랑이의 상징성을 유물과 회화, 설치 작품 등으로 살펴본다. 액운을 물리친다고 알려진 호랑이 발톱 노리개부터 조선시대 무관의 의복을 장식한 호랑이 문양 흉배 등 특유의 용맹성과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위주로 전시한다. 더불어 도상의 전통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잃어버린 호랑이를 찾아서’ 등 현대적 관점이 담긴 동시대 작가의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 호랑이 기운을 얻어 힘을 내길 바란다는 관장의 소망이 담겼다.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
일정 10월 8일~2021년 2월 7일 장소 롯데뮤지엄
‘그라피티의 제왕’이라 불린 흑인 낙서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 기획전으로 바스키아가 남긴 예술세계 전반을 조망한다. 대표작 150여 점과 팝아트계의 거장 앤디 워홀과 협업한 작품도 선보인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초 미국 뉴욕 화단에 작품을 공개하며 이름을 알렸고, 2년 뒤 첫 개인전을 열며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미술뿐 아니라 음악, 패션 등 여러 영역에서 해석되고 있다.
◇1978, 우리 가족의 라디오
일정 11월 15일까지 장소 서울생활사박물관
1978년 서울에 사는 가상 캐릭터 영희의 집을 재현해 당시 유행하던 라디오 문화를 되짚어본다. 택시 운전사인 영희 아버지의 카 라디오부터 오빠의 휴대용 라디오, 영희의 카세트 라디오까지 다양한 추억의 라디오와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프로그램을 조명한다. 영희의 방에서는 1970년대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진행했던 황인용 전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들어볼 수 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금성 A-501과 1960년대 라디오 편성표 등 라디오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 Movie
◇돌멩이
개봉 9월 30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정식 출연 김대명, 송윤아, 김의성 등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30대 청년 ‘석구’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범죄자로 몰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드라마 ‘미생’의 김 대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양석형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입체감 있는 캐릭터로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김대명의 섬세한 연기력이 돋보인다. 실제로 김대명은 8세 지능을 가진 어른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연기를 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빌런’으로 종종 등장했던 배우 김의성은 석구의 보호자인 노신부 역을 맡아 인자한 매력을 선보인다. 2017년 한 배우 오디션에서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만장일치로 합격한 신예 배우 전채은의 활약 또한 주목된다.
◇테슬라
개봉 10월 21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마이클 알메레이다 출연 에단 호크, 이브 휴슨 등
교류 전류 전송 장치를 비롯해 라디오, 무선 원격 조종 기술, 리모컨 등 유용한 발명품을 만들어 오늘날 천재 과학자로 평가받는 니콜라 테슬라의 삶을 조명한다. 테슬라의 라이벌이자 상사였던 토머스 에디슨과 결별한 뒤 자본가 J.P. 모건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커런트 워’가 테슬라와 에디슨의 대결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오로지 테슬라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감독은 선댄스영화제에서 네 차례나 상을 거머쥔 마이클 알메레이다가 맡아 과학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감각적 비주얼을 연출했다.
◇언힌지드
개봉 10월 예정 장르 스릴러, 범죄 감독 데릭 보트 출연 러셀 크로우, 카렌 피스토리우스, 가브리엘 베이트먼, 지미 심슨 등
도로 위에서 크게 울린 경적 때문에 분노가 폭발한 한 남자가 복수를 하기 위해 운전자를 뒤쫓는 내용으로, 현실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보복운전을 소재로 한 영화다. 영화 ‘레미제라블’, ‘노아’ 등에서 활약한 배우 러셀 크로우가 필모그래피 사상 최악의 악역으로 변신해 눈길을 끈다. 러셀 크로우의 살기 가득한 눈빛 연기와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이 극한의 공포를 선사한다. 북미 개봉 당시 셧다운 이후 극장가에 처음 선보인 영화로, 북미 및 해외 7개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코로나19를 날려버릴 최고의 스릴”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 Book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김재환 저·북하우스)
김재환 영화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을 촬영하며 3년간 느낀 점을 섬세한 시선으로 풀어낸 책이다. 문해학교에 다니며 한글 공부를 하고 아들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써보는 등 배움과 설렘으로 가득한 칠곡 할머니들의 노년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냈다. 칠곡 할머니들이 직접 쓴 순수하고 담백한 시도 함께 실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최윤 외 공저·생각정거장)
올해 한국문학을 빛낸 단편소설을 엄선한 작품집이다. 총 여섯 작품이 수록됐으며 대상작은 최윤의 ‘소유의 문법’.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수상작 외 최윤의 자선작 ‘손수건’과 지난해 대상 수상작가 장은진의 자선작 ‘가벼운 점심’도 함께 수록됐다.
◇척추·관절 되살리는 자생력 스트레칭 (이진호 저·비타북스)
자생한방병원이 집필한 척추·관절 종합 건강서다. 척추·관절에 통증이 생기는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결리고 뻐근한 목, 묵직한 허리 등 통증을 관리할 수 있는 부위별 스트레칭 55가지와 질환별 스트레칭 45가지를 담았다. 스트레칭 전후 지압하면 효과를 높여주는 혈자리도 소개한다.
◇우리 술 한주 기행 (백웅재 저·창비)
코로나19로 ‘혼술’, ‘홈술’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주목해볼 만한 도서. 한주 전문가 백웅재가 양조장의 메카 홍천, 충주, 문경 등 전국 각지의 특색 있는 양조장 20여 곳을 소개한다. 한주 관련 산업에 종사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전통주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고 맛깔스럽게 풀어낸다.
◇길 (박노해 저 ·느린걸음)
‘하루’,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에 이은 박노해 시인의 세 번째 사진 에세이. 20여 년간 지도에도 없는 길을 걸으며 직접 담은 37점의 흑백 사진을 실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길 차마고도, 눈 덮인 만년설산과 끝없는 사막길 등 길 위의 다양한 풍경을 소개하며 ‘나만의 길’을 찾아나갈 것을 제안한다.
● Stage
◇오만과 편견
일정 9월 19일~11월 29일 장소 예스24스테이지 3관 연출 박소영 출연 김지현, 정운선, 홍우진 등
영국이 사랑하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연애소설을 2인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18세기 영국,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빙리’와 ‘다아시’가 조용한 시골 마을로 와 베넷 부부의 다섯 딸을 만나며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인 만큼 다양한 방식의 각색본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연극 ‘오만과 편견’은 단 두 명의 배우가 21개 캐릭터를 연기하는 독특한 연출이 돋보인다. 배우들의 퇴장과 무대의 이동 없이 의상과 소품만으로 캐릭터를 전환하는 것도 작품의 관람 포인트다. 제인 오스틴의 섬세한 감성에 극적인 매력이 더해져 고전 특유의 클래식한 아름다움과 로맨틱한 서사를 한층 더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풀어낸다.
◇머더발라드
일정 8월 11일~10월 2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출 김은영 출연 김재범, 김소향, 이건명 등
욕망을 향해 가는 세 남녀의 비틀린 사랑을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뮤지컬판 ‘부부의 세계’다. 결혼 후, 무료한 일상에 지친 ‘세라’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남편 ‘마이클’, 한때 불같이 사랑했던 옛 연인 ‘탐’과의 엇갈린 관계를 그려낸다. 귀를 사로잡는 강렬한 록 음악과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이 시너지를 이뤄 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을 이어가는 송스루 뮤지컬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다.
◇아들
일정 9월 15일~11월 22일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연출 민새롬 출연 이석준, 이주승, 정수영 등
프랑스 유명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가족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이자 최신작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관객을 찾아간다. 이혼한 부모와 그 사이에 놓인 아들의 갈등을 통해 가족의 해체와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마음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가족 간 발생하는 불편한 상황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유휴열은 미술의 다양한 장르를 무시로 넘나든다. 출발은 회화였지만 부조와 입체, 설치작업까지, 그에겐 그어놓은 금이 없다. 이는 재능과 자유정신의 소산일까? 그럴 게다. 그러나 더 궁극적인 배경이 있다. 그는 미술을 놀이의 방편으로 보는 것이다. 놀이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삶의 비루한 속성에서 해방되기 어렵더라도, 낙관과 낙천을 위주로 한세상 가뿐히 넘을 수 있는 풍류를 삶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의식이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은 흥(興)의 작렬이며, 그의 창작 행위는 코피 터지는 고행이 아니라 고무된 흥타령이다. 흥을 돋울 수 있는 작업이라면 어떤 장르이건 그는 촉수를 내뻗는다.
유휴열은 눌변의 달인에 가깝다. 선생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머리를 득득 긁으며 음, 어려운 질문이군, 그리 더듬거린다. 그러고선 내놓는 얘기가 ‘놀이’에 관한 것이다.
“천상병 시인은 소풍으로 세상을 품었다가 떠났다. 나는 놀다가 간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삶도 예술도 놀이라는 생각이거든. 나의 그림은 놀이의 흔적이며, 죽음의 문제마저 놀이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미술관을 개관하고서 개관 이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한 게 있다면?
“와이프를 너무 고생시킨다는 송구한 생각이 커지더라. 이왕지사 문을 열었으니 사람들이 이곳에서 위안과 휴식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전시공간이 너무 비좁다는 생각도.”
술은 요즘도 즐기시나?
“그림도 인생도 재미있는 게 좋은 것이고 좋은 건 재미있는 것이다. 술은 창작과 일상에 활력과 재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요즘은 술 마시는 재미가 별로 없다. 더불어 놀 사람들이 드물어서다. 다들 늙어 만나면 하는 말이, 내가 종합병원이네, 걸어 다니는 약국이네, 그런 소리뿐이다.(웃음) 그저 하루 작업을 끝낸 뒤 혼자 막걸리 한 통을 즐긴다.”
유휴열은 종일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원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실에 박혀 그림을 그린다. 이건 오래된 관습이란다. 심신의 소모가 많은 게 창작이니 사실상 날마다 중노동이다. 다산(多産)과 다재가 절로 얻어진 게 아니다. 안주하지 않는 갱신의 정신도 부단한 작업에서 오는 성찰의 힘을 웅변할 게다.
“미술은 끊임없이 기존 개념을 깨야 한다. 신과 인간의 중간쯤에 놓인 게 예술일 게다. 그 중간으로 돌입하는 경로를 찾아가는 게 나의 작업이다. 그러자면 날로 새로워져야만 한다. 하지만 새로움은 어디에 있나.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이미 새로운 게 아니며, 오늘 새로운 걸 발견했더라도 내일이면 별것 아닌 게 되고 만다. 더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내 재주에 회의와 갈등을 느낀다.”
그는 느슨해지고 싶지 않은 거다. 연착과 지체가 없는 행보로 예술놀이를 만끽하고 싶은 거다. 그러기에 ‘천방지축도, 덜 철드는 일도, 어깃장’도 여전히 그의 생필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