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필자에게 기차여행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여행이라 늘 마음만 먹다가 말곤 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곳이 많아 더욱 그랬다. 그러다 보니 특이하게도 국내에서는 거의 해보지 못하는 기차여행을 해외여행 중에 하곤 했다. 뮌헨에서 잘츠부르크로, 프랑크부르크에서 로맨틱가도로, 또 파리에서도 그랬고,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로, 일본에서는 북해도나 하코다테에서도 그랬고, 교토나 고베 등 숱한 기차여행을 해외에서 많이 한 셈이다.
시드니 여행에서도 두 번 정도의 기차여행을 했다. 그중 동화 속 작은 마을 같은 울릉공(Wollongong)을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해서 시드니 센트럴 역으로 갔다. 아침 찬바람에 한기가 온몸으로 엄습했다. 그곳은 8월 중순이어도 아직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울릉공 역으로 향하는 시티레일은 남쪽으로 80Km 정도 달려서 약 두 시간쯤 걸리는데 차창 밖의 겨울 풍경이 우리나라의 늦가을의 풍경이었다. 차분하고 맑았다. 차츰 울릉공이라는 안내 글자와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기차가 역에 멈추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에 당연히 울릉공이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따라 내렸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다 보니 젊은 아이들이 모두 버스에 올랐다. 그제야 우리 부부는 그 버스가 울릉공대학 스쿨버스였음을 알게 됐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린 것이다.
“어쩌지?” 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후덕해 보이는 아줌마 운전기사가 내려오더니 우리에게 자기네 스쿨버스에 타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 정류장에서 하차해 그린색 셔틀버스를 이용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젊은 대학생들로 가득 찬 울릉공대학 스쿨버스 덕분에 우리는 목적지인 울릉공에 무사히 도착했다. 지금도 가끔씩 떠오르는 여행 장면이다.
그날 울릉공으로 들어섰을 때 멀리 있는 등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넓고 화려하진 않지만 정겨움이 느껴지는 해변이었다. 휴식을 위해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해서, 행복한 대화를 위해서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갈매기가 사람과 같이 놀아주는 곳, 낮은 파도가 마음을 위로하는 곳, 바람이 좋아서 맑은 날에는 행글라이딩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시드니의 명물인 오페라하우스의 화려함이나 거대한 하버브리지만큼 대단하지는 않아도 여행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정감 있는 곳이 바로 울릉공이다. 요즘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혼여행지로도 찾기 시작했다 한다.
해안가를 거닐다 보니 바닷가의 그들과 동지의식이 절로 생겼다. 여유롭게 벤치에 앉아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시간을 온전하게 누렸다. 그런 시간들을 다시 누리기는 어렵겠지만, 가끔삶이 고단하거나 숨이 차오를 때 가끔씩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울릉공에서의 하루는 값진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문득 호주 여행의 잔잔했던 그날이 떠오른 것은 가라앉은 계절 탓일 수도 있다. 그 바닷가의 반짝거리던 햇살만큼 따뜻했던 울릉공역 카페의 커피 한 잔이 그리워지는 초가을 아침이다.
돈으로 어떤 물건을 사면 ‘물질재(財)’가 되고 경험을 사면 ‘경험재(財)’가 된다고 한다. 세금이나 공과금처럼 강제로 내야 하는 돈도 있지만, 사고 싶은 물건을 샀을 때나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쓰는 재미가 확실히 있다.
신혼 때는 숟가락과 젓가락 등 살림도구를 하나하나 장만하는 재미가 있었다. 중동 건설현장에 나가 있을 때도 귀국할 때면 전기다리미, 믹서 등 요리 기구를 사와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큰돈이 들어가는 가전제품, 마지막으로는 평수 넓은 아파트로 차츰 옮겨가면서 물질재를 소유하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 나이가 되면 물질재가 시들해진다. ‘경제의 평준화’가 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좀 늦게 가질 뿐이지 결국은 모두 가진 자의 대열에 서게 되니 물질재에 대한 차별화는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 물질재가 부질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지금도 새 옷을 구입하거나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사서 집에 왔을 때 물질재의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물질재의 특징은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버리기 전에는 그 자리에 그냥 있다는 점이 흐뭇하다. 물론 너무 많은 물질재를 갖다 보면 정리정돈에 애를 먹는다. 버려야 하는데 버리자니 아깝고 안 버리면 짐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돈의 쓰임새가 물질재보다는 경험재 쪽으로 변하는 것 같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특별한 음식을 먹고, 여행을 다녀오고, 발레나 음악회를 감상하는 것이다. 경험재는 물질재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보고 머릿속, 가슴속에 특별한 경험을 축적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껴 쓴다’는 개념은 물질재와 연관이 깊다. 사고 싶은 데 돈을 아끼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재는 대체로 단가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돈을 쓴다. 경험재를 구입할 때 본인이 입 다물고 있으면 구입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물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음악회에 가면 무대를 촬영하고, 여행지에 간 사진을 올리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이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을 포함한 모든 물질재를 말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경험재들뿐이다. 그래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행복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죽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좋은 음식이나 좋은 여행지 못지않게 중요한 경험재가 바로 사람이다. 물론 돈과 관계는 없지만, 그동안 좋은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 바로 경험재인 것이다. 그 사람들과의 정은 그대로 가슴속에 남아 저세상 갈 때 가지고 간다. 그래서 결혼식 같은 경사에는 못 가더라도 장례식 같은 애사에는 빠지지 말고 꼭 가라는 말이 있는 것 같다.
필자는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제주 가족여행이었다.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하다 보니 국내 안 가본 곳들을 가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필자의 학창 시절에는 제주는 수학여행지나 신혼여행 중심지이기도 했다. 환상의 꿈으로 가득했던 천혜의 보물섬이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건강과 힐링이 대세인 요즈음에 제주 이주 열풍은 폭발적이다. 힐링의 성지로 떠오른 제주로 남은 시니어 인생을 보내려 하는 분위기도 급기야 찬반을 묻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제주는 공기가 청정하고 투명한 바다로 둘러싸여 자연환경이 단연 우리나라 최고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상 세계인의 관광지 명소가 되어 이제 명실공히 국제적인 유산이 되었다. 제주는 올레길, 둘레길 등 미음완보를 실행할 수 있는 천혜의 도보여행 코스를 지니고 있다. 미음완보(微吟緩步),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천천히 보고 겪고 생각하며 걷는 것이다. 제주의 도보 여행은 복잡한 삶의 경쟁에서 한발 물러나 휴식과 치유를 체험함으로써 제주의 매력을 보다 더 상승시켜 준다.
현재 다른 지역에서도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제주는 이미 즐거움과 치유의 걷는 도시로 확고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골목길인 올레길은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넓이로 제주인의 삶의 방식이 녹아 있고, 사람이 주체가 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도로 개설과 확장으로 자동차가 통행의 주체가 되고, 사람들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이제 몇 년 사이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으로 제주공항은 온종일 북새통이다. 약 200㎞의 일주 해안선은 이미 숙박업체들의 난장판이 되었고, 중국 고객을 상대로 한 부동산 개발로 하루가 바쁘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보면 서서히 전통적인 제주도 흔적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외국의 낯선 붐 타운을 연상시킨다. 부동산 투자에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 아니고는 외지인이든 토박이든 온통 혼란스럽고 불편하기만 하다.
조용하고 아름답기만 했던 섬의 분위기가 전혀 동떨어진 이상과열 현상에 날개를 치고 있다. 전통적 삶에 안주해오던 제주도 토박이 주민들도 이러한 현상이 사회 경제적 압박 요인으로 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제주로 이주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일 까. 나름대로 저마다의 사연은 있겠지만 결코 진정한 삶의 해답은 아닐 것이다. 답답한 도시를 떠나고 싶고, 여행을 하다 보니 라는 다양한 이유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부럽기에 앞서 안타까움마저 들기도 한다.
더구나 이주 이유 중 가장 많은 선호도가 연예인처럼 세컨 하우스를 짓고 올레 길 주변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하기 위해서라고도 한다. 이러한 꿈 같은 이유가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대책 없이 제주 이주를 꿈꾸게 하고 있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도 포화상태고 낭패를 본 이주자들 그들을 일컬어 “눈먼 외지인”이라고 까지 하며 그들 또한 엄청 많다고 한다. 이웃들이 너나 없이 간다고 해서 무작정 특별한 목적과 철저한 계획 없이 따라 하는 행위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그 첫 번째 반대이유가 된다.
바람도 많고 비도 많은 제주는 섬이라는 특성이 있다. 제주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어 지역마다 생활방식이나 환경차이가 크다고 한다. 사투리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고 주민들의 성향도 각각 다르다고 했다. 더구나 바람과 습기의 영향으로 거주의 쾌적함은 많이 떨어 진다고 한다. 잘 지어진 멋들어진 이층집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속안으로 들여다 보면 부딪쳐 겪어야 할 많은 삶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 한국은 주거이동으로 지역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치를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꼭 이주를 해야만 하는가? 왜 제주도 이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제주의 이주자들은 보다 나은 인생을 즐기며, 자연 속에 단순하고 느린 삶의 근사함으로 과연 무엇을 얻을 것 인가. 때가 되면 연어라는 물고기도 고향으로 돌아가 알을 낳듯이, 사람들의 삶은 더 편리하고 화려했지만 어디에서도 인간은 진정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쉽게 내 고향을 등지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제주도 시골 아줌마들도 90년대 강남 식 재테크에 몰려든 강남 아줌마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가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시장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불확실하다. 지역 정치 지도자들의 눈에 부동산가격 상승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지역발전은 부동산 붐을 유발할 수밖에 없고 주민들에게는 지역의 가치 상승효과를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크게 본다면 우리나라 제주도의 가치는 이 섬의 고유성과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박이는 물론, 제주로의 꿈을 갖는 외지인과 외국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이제 내려 놓아야 할 시니어의 삶들이 미래의 불확실성과 맞물려 돌아가고 순진했던 해녀들이 무분별한 투기에 관심을 쏟는다면 아름답던 섬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마지막 제주 이주 반대이유이다.
제주 남쪽바닷가에 사는 멋쟁이 한 사람은 말한다. 그는 제주이주가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왔던 모든 이력서를 버리고 과감하게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러나 제주도에서 사는 것을 부디 2박3일 단순여행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걷고 마시고 느끼고 얼마든지 우리나라 청정지역, 미음완보로 갈 곳은 여기저기 많이 널려있다.
“이제 배우로서의 삶과 더불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예쁘게 잘 살겠습니다.” 스타 배우 김하늘(38)이 3월 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 살 연하의 사업가와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한 말이다. “평생 존중하며 사랑하고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닌 ‘우리’를 위한 인생을 위해 살겠습니다.” 가수 가희(36)도 3월 26일 세 살 연상의 사업가 양준무씨와 미국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처럼 올해 들어 여자 스타들이 속속 결혼하고 있다. 탤런트 김유미(37)는 두 살 연하 배우 정우와 1월 16일 서울의 한 교회에서 결혼했다. 걸그룹 핑클 출신 연기자 이진(36)은 2월 20일 미국 하와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여섯 살 연상의 미국 교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탤런트 황정음(31)은 2월 2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세 살 연상 프로골퍼 출신의 사업가 이영돈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또한, 스타 연기자 김정은(40)은 4월 29일 금융업에 종사하는 동갑내기 재미교포와 결혼했다. 걸그룹 쥬얼리 출신 연기자 박정아(35)는 5월 15일 두 살 연하의 프로골퍼 전상우와 부부의 연을 맺을 계획이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시선을 모은다. 그중에서도 여자 스타의 웨딩드레스, 결혼사진, 신혼여행지, 결혼식 장소와 형태 등 결혼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높은 관심을 끈다. 오죽했으면 ‘여자 스타 결혼식은 스타 마케팅의 종합전시장’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여자 연예인의 배우자는 대중의 관심을 넘어 사회적인 화제가 된다. 한류가 거세지면서 우리 스타의 결혼은 외국 언론의 주요한 기사 아이템이 됐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식은 일반인의 소비와 라이프 트렌드를 이끌고 배우자관에 큰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그동안 여자 스타의 배우자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연예인 역시 일반인처럼 결혼 배우자가 매우 다양하지만,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위상의 변화와 함께 여자 연예인의 결혼 상대자도 크게 달라졌다.
대중문화 초창기였던 1900~1950년대에는 유교적 인식이 엄존해 연예인들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고 연예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많았다. 1900~1950년대 대중문화 초창기에는 여자 연예인과 일반인 결혼이 많았다. 또한, 백설희-황해, 전옥-강홍식, 황금심-고복수 커플처럼 상당히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동료 남자 연예인과 결혼했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부정적 인식이 존재하고 TV 등 매스미디어가 본격 등장한 1960~1970년대에는 여자 스타의 배우자는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스타들의 우상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 시기에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상대는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이 시기 눈길을 끈 것은 여자 스타와 재벌 혹은 중견기업 오너와의 결혼이었다.
영화배우 문희는 1971년 당시 한국일보 부사장이었던 故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과 결혼했고 영화배우 안인숙은 1975년 미도파백화점 사장이었던 대농그룹 박영일 전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또한, 펄시스터즈의 배인순은 1976년 최원석 동아그룹 전 회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과 결혼한 스타 정윤희를 비롯해 황신혜, 고현정, 김희애, 김성령, 이요원, 최정윤, 박주미 등 여자 스타들이 재벌 혹은 중견기업 대표와 결혼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결혼했다 이혼한 고현정은 “결혼 당시 많은 사람이 재벌과의 만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됐고 사랑해 결혼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재벌이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일부 여자 연예인들이 재미교포 등 외국 교포와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물론 엄앵란-신성일, 윤복희-남진, 김지미-나훈아 커플처럼 동료 연예인끼리의 결혼 역시 성행했다.
대중문화 시장이 급성장하고 대학생이나 대학 졸업자의 연예계 진출이 두드러진 1980년대에는 연예인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이 시기 관심을 끈 여자 연예인의 배우자는 연예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결혼 후에도 연예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송사 PD, 영화감독 등 대중문화 분야 종사자였다. 원미경은 1987년 MBC 이창순 PD와, 양미경은 1988년 KBS 허성룡 PD와 결혼했다. 임예진 역시 드라마PD 최창욱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근래 들어서도 박성미-강제규 영화감독, 문소리-장준환 영화감독, 김민-이지호 영화감독처럼 여자 연기자와 영화감독의 결혼이 이어졌다.
원미경은 “결혼 후에도 연기를 계속하고 싶었어요. 연예계가 일반 직장과 성격이 크게 달라 배우자는 연예분야를 알았으면 했어요. (남편이) 드라마 PD라 연애할 때도 결혼 후에도 저를 많이 이해해주고 격려해줘요”라고 말했다.
대중매체가 급증하고 연예산업이 산업적 기틀을 갖추어 스타가 엄청난 이윤을 창출하는 주체로 떠오른 1990년대부터는 연예인을 발굴하고 육성, 관리하는 연예 기획사가 스타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됐다. 이에 따라 연예 기획사 대표와 연예인의 결혼이 흔치 않은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가수 양수경과 예당컴퍼니 변두섭 회장과의 결혼을 시작으로 배우 신은경-김정수 커플처럼 1990년대부터는 연예기획사 대표, 연예인 매니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들이 많아졌다.
또한, 1980년대 최미나-허정무, 최란-이충희 커플처럼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이 등장하기 시작해 1990년대부터는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이 급증했다. 톱스타 최진실이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과 결혼한 것을 비롯해 이혜원-안정환, 김성은-정조국, 슈-임효성, 한혜진-기성용, 유하나-이용규 등이 여자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커플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에는 여자 스타의 배우자 중 가장 많은 것이 연예인이다. 하희라는 1993년 최수종과 결혼했고, 신애라는 1995년 연기자 차인표를 배우자로 맞았다. 이후 유호정-이재룡, 채시라-김태욱, 고소영-장동건, 유진-기태영, 이효리-이상순, 원빈-이나영 커플처럼 수많은 여자 스타들이 동료 연예인과 결혼했다.
신애라는 “같은 드라마 에 출연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했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은 연예계에서는 작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료 연예인과 사귀고 결혼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시선을 모은 스타 결혼식 중 하나가 최명길의 경우이다. 1995년 정치인 김한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후 흔치 않지만, 여자 연예인과 정치인의 결혼이 간간이 이어졌다. 심은하-지상욱, 황혜영-김경록 커플이 여자 연예인과 정치인의 만남으로 관심이 쏠렸다.
연예인이 청소년들의 직업 1순위로 부상하고 대중문화 산업이 만개한 2000년대 들어서는 여자 스타들의 배우자는 전문직 종사자에서부터 사업가, 스포츠 스타, 동료 연예인, 일반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해졌다
염정아-정형외과 의사 허일, 한지혜-서울지검 검사 정혁준, 전도연-사업가 강시규, 이영애-사업가 정호영, 소유진-요식업 사업가 백종원, 차수연-연예기획사 판타지오 대표 나병준, 전지현-금융업 종사자 최준혁, 한혜진-프로축구선수 기성용, 김지우-셰프 레이먼 킴 커플에서 보듯 최근 들어서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배우자의 스펙트럼은 사업가에서부터 전문직 종사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어졌다.
2000년대 들어 한류가 거세지면서 외국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스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해 등 중국 드라마에 출연한 채림은 2014년 중국 배우 가오쯔치(高梓淇)와 결혼해 눈길을 끌었다. 중국에서 드라마 회당 출연료로 1억원을 받는 스타로 부상한 추자현도 최근 올해 중국 배우 위쇼우광과 결혼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추자현은 예비신랑 위쇼우광(于曉光)에 대해 “힘들고 지칠 때 힘이 되어주고 연기자로서 발전을 도와주는 동료이자 연인이다. 중국인이라는 점이 결혼을 결정할 때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여자 스타들의 결혼 배우자는 시대 상황과 연예인에 대한 인식과 위상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또한, 과거에는 여자 스타들이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단하거나 인기가 하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여자 스타들이 결혼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결혼은 여배우의 인기의 무덤이 아니라 인기 상승 기폭제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은 나라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여신이 금방 환생한 듯한 아리따운 여성들이 활보한다. 특히 그리스 여행의 백미는 ‘섬’ 여행이다. 200개의 유인도 중에서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산토리니’다. 그곳뿐 아니라 꼭 가봐야 할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 떠난다 해도 모든 스트레스를 다 감싸 안아줄 것이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화산섬 보트 투어는 유용한 패키지
TV 프로그램 에 소개되면서 광고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이 그리스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큰 인기를 누리지만 이 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어느 누구하고 동행하더라도 상관없다. 단언컨대 ‘묵은 시름’이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그 아름다운 풍치에 반해 스트레스를 다 녹여줄 것이다.
산토리니는 에게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Kykladhes Is.) 남쪽 끝에 있다. 아테네에서 235㎞ 떨어져 있으며 중심 마을인 피라(Fira)를 포함해 13개의 마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티라(Thira) 섬. 티라는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중간에 위치해서 두 문명과 교류하며 발전했던 키클라데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 이곳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56년에도 화산폭발로 피라와 이아(Oia)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다.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고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들어섰다.
산토리니의 중심 도시는 피라다. 하지만 여행이란 ‘첫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 피라 마을이 산토리니의 중심지라 해도 섬 끝의 이아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이 뒤떨어진다. 이럴 때는 먼저 ‘화산섬 보트 투어(Volcano Tour)’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 마을 여행사에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1일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티니오스 신항구나 피론(Firon) 구항구에서 배에 오르게 된다. 배는 가장 먼저 산토리니 서쪽에 있는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를 간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의 척박한 화산섬의 돌멩이에는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다. 그다음 코스는 바닷속에서 용출되는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이다. 40도가 넘는 고온이다. 이어서 유인도인 티라시아(Thirasia) 섬에 다다른다. 배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매력을 갖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거나 마을까지 올라서 멋진 전경 사진을 찍으면 된다. 이때 당나귀(동키)를 타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화산섬 보트는 이아 마을을 잇는 항구에서 내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신 저녁 8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숙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온통 캘린더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곳, 이아(Oia) 마을
이아 마을을 산토리니 첫 마을로 보게 된다면 ‘아, 정말 산토리니에 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내 몸을 조금만 움직여서 셔터를 누르면 캘린더 사진이 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 집들. 미로처럼 나있는 좁은 길목에 피어난, 화사한 부겐빌레아 꽃이 눈 시리다. 앙증맞고 귀여운 숍들이 열지어 이어지는 곳.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하얀 교회의 파란색 돔과 에게해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는다. 발길은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섬의 건물들은 왜 하얀색일까? 건물 색채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은 제각각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토리니를 빛나게 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고 석양시간이 되면 굴라스 성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아 마을을 먼저 보고 난 후 피라 마을을 찾아보자.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명동 격으로 테오토코플루(Theotokopoulou) 광장이 중심이다. 골목을 구경하거나 교회나 수도원, 고고학 박물관 등을 보면 된다. 또 절벽 아래 항구까지 566개의 지그재그 계단 길이 놓여 있는데 당나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또 피라에서 10분 거리에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에서 유일하게 언덕 위에 지어진 성채 마을로 스카로스(Skaros) 성까지 걸어보자.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동쪽 해변의 블랙, 레드, 화이트 비치를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블랙 비치라고 불리는 ‘카마리(Kamari)’는 해변 길이가 1㎞가 넘는 산토리니 대표 해변으로, 별칭처럼 온통 검은빛의 모래가 깔려 있다. 카마리 비치 인근에는 고대 티라 유적지가 있는데 메사 보우노 봉우리(369m) 꼭대기까지 트레킹하면 된다. 또 페리사(Perissa) 해변 근처에는 워터파크가 있다. 피라의 남단 아크로티리(Akrotiri)에는 선사 유적지가 있다. 에게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붉은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만들어진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가 있다.
기암 위에 세워진 수도원 6곳 메테오라(Meteora)
그리스 여행 중에서 메테오라를 빼놓는다면 여행의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으로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칼람바카(Kalambaka)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을 뒤로 거대한 암산이 산봉우리처럼 연이어진다. 400m 이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Thessalia)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Peneas) 계곡과 칼람바카라는 작은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약 6000년 전,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났다가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메테오라의 기암들은 사암과 역암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암산이다.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기암 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기암 봉우리에 건물을 지었을까? 이곳은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건축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고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의 로케이션),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현재 수도원에는 수사와 수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바위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된다. 좁은 바위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는가 하면, 절벽 옆에 붙어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분명코 바위 위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저곳으로 훨훨 날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로 들어간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이스탄불~아테네 구간은 주 42회 운항한다.
음식정보 그리스의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수블라키(Souvlaki), 게미스타(Gemista), 무사카(Moussaka), 기로스(Gyro, 기로, 자이로, 지로스라고도 함) 등을 꼽는다. 수블라키는 흔한 꼬치구이라 말할 수 있다. 게미스타는 피망 등 야채에 고기와 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동양인 입맛에 잘 맞는다. 무사카는 야채와 고기를 볶아 화이트소스를 뿌려서 구운 것. 기로스는 피타 빵(Pita bread)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잘라 넣고 소스, 야채를 넣어 케밥처럼 만든 요리다. 또 슈퍼 등지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돌마데스(Dolmades), 혹은 돌마스(Dolmas)가 있다. 일명 ‘포도잎 꼬마 쌈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하기에 좋다.
전통 술 그리스의 국민 술이라 일컬어지는 우조(Ouzo)와 메탁사(Metaxa)가 있다. 2006년부터 오직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우조’는 40도 이상의 독한 술로 미틸리니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연다. 포도+아네스씨+각종 허브로 만든 이 술은 문어요리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신다.
숙박정보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사이트에서 순위를 확인하면 숙박 전문 인터넷 사이트로 연계가 가능하다. 가족 인원수가 많다면 메테오라에서 캠핑장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화정보 유로 사용
사용 전압 표준 전압 220V, 50㎐를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이 잘된다.
치안정보 그리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하철역 등에서는 날치기나 소매치기 등을 유의해야 한다.
기타 여행지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섬을 비롯해 희랍인 조르바의 배경이 되었던 크레타 섬 여행도 해봄직하다. 그 외 델피, 테살로니키, 올림피아, 칼라마타, 코린토스, 티바스 등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아테네 시내와 수니온 곶 여행도 좋다.
연애라는 기나긴 여정을 뚫고 마침내 결혼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할 때 어떻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경우가 많다. 또 대다수의 커플이 결혼을 준비하는 시기에 가장 다툼이 잦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결혼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신한은행 WM사업부 김희경 팀장에게 들어봤다.
1. 커플매칭 이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부유층 고객은 자녀뿐 아니라 부모의 기대치도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을 다 맞추어야 합니다. 때문에 미팅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많죠. 하지만 서로 호감이 있는 경우에는 양가 부모의 동의 하에 교제가 진행되기 때문에 편하게 사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보통은 만난 지 3개월 즈음 상대방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6개월이 되면 상견례가 이루어집니다. 대부분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까지 1년 정도 걸리는 셈이죠. 이렇게 커플 매칭을 통해 성사된 결혼이 올해 11월까지 총 34건입니다.
2. 결혼 준비 중에 가장 중요한 점은?
날을 잡고 혼수가 진행되는 과정에 파혼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파혼 케이스는, 여성은 프리랜서였고 남성은 외국계 기업에 근무했는데 만난 지 6개월 만에 날을 잡아 예물도 오가던 상황이었어요. 여성 측에서 남성에게 중형차를 한 대 사주겠다고 했는데, 남성 측에서는 이왕이면 외제차면 좋겠다고 해서 틀어지기 시작했죠.
그 후에도 사소한 부분에서 마찰이 있더니 결국 파혼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렇게 한쪽의 욕심이 과할 때 파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혼은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만큼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우선돼야 할 것 같습니다.
3. 성혼커플의 공통된 사항은?
- 다양한 소개팅 경험으로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알고 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성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차고 차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야 이성에 대한 눈높이를 조절할 수 있고, 눈높이가 조절돼야 결혼할 확률이 높으니 소개팅도 많이 하고, 나이에 걸맞은 연애를 꼭 해보라고 권합니다.
- 누구나 선호하는 스펙의 소유자. 희망상대 조건은 단순하다
좋은 학벌과 직업, 빼어난 외모, 어린 나이 등 누구나 선호하는 조건을 지닌 사람은 소개팅 기회도 많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원하는 조건이 까다로운 경우는 그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개팅이란 누군가 나를 위해 대가 없이 애를 써 주는 것이니만큼, 상대를 추천해 주면 불만을 갖기보다는 일단 만나보기를 권합니다. 그래야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으니까요. 조건 때문에 만남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보다 만나서 싫으면 ‘NO’를 외치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죠.
- 성혼커플 90%가 남성이 첫눈에 반해 결혼한 케이스
서로 첫눈에 반해 결혼한 커플은 별로 없습니다. 남성이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대시하면, 여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요즘 젊은이들은 대화가 통하고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많이 찾는데 첫 만남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다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성이라면 최소 3번은 만나본 후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 집이나 직장 둘 중 하나는 가까워야 유리하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는 가까워야 자주 만날 수 있고, 자주 만나야 정이 드니까, 거리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 성혼커플 평균 연령. 남성은 32~34세, 여성은 28~29세
남녀 모두 적령기를 넘기면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기 어려워집니다. 여성은 자신을 만나 줄 상대가 부족해서 만남의 기회가 줄어들고, 남성은 만남의 기회는 많아도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날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제일 많은 적령기에 짝을 찾아야 하는데, 남성은 30세쯤부터 시작해서 35세 전에, 여성은 28세 전후 시작해서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4. 꼼꼼 결혼 준비 150일 가이드
D-150 상견례, 결혼 날짜 택일
상견례 날짜는 2~3주 전에 결정하는 것이 좋으며, 결혼 날짜는 신부 측에서 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D-100 결혼식장 예약, 예물과 예단 상의 및 신혼 여행지 결정
결혼식장은 양가 중간 지점으로 하고, 예단은 현금으로 대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단을 받은 후 신랑 측에서는 봉채비를 보냅니다.
D-80 ‘스드메’ 결정하기
‘스드메’란 웨딩사진(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의 줄임말로 예식과 관련된 본격적인 사항을 정리합니다.
D-60 청첩장 주문, 한복 맞추기
청첩장은 한 달 전에 발송합니다.
D-50 주례와 사회 부탁하기, 신혼여행 준비하기
주례는 신랑 신부가 함께 아는 지인이나 어른에게, 사회자는 보통 신랑의 친구에게 부탁합니다.
D-30 예단과 함 보내기. 혼수 구입
예단에는 편지와 은수저, 반상기, 이불과 같은 현물 또는 현금(신권) 중 선호하는 것으로 준비합니다. 신랑은 예단을 받은 후 신부 측에 함을 보냅니다. 함에는 예물과 혼서지, 한복, 예복 등을 넣습니다.
D-10 폐백음식 준비(2주 전에 주문),
각종 우편물 주소 변경, 드레스 가봉
D-5 주례와 사회자 연락(예식 시간 30분 전 도착 안내), 예약 사항 점검
신랑 신부를 도와 줄 도우미, 본식 사진 및 영상 촬영, 부케 및 코르사주, 연주, 축가, 메이크업 등 당일 필요한 사항을 점검합니다.
D-1 예식 당일 최종 점검
드레스, 부케, 한복, 차량, 폐백음식 등 최종 점검. 당일 신혼여행을 떠날 경우 짐과 여권을 준비하고, 컨디션 유지를 위해 휴식을 취합니다.
커플매칭 서비스가 결혼까지 관여한다?
커플매칭 서비스는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 주된 업무로, 주선자의 말 한마디가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교제가 시작되면 잘 만나고 있는지 중간에 알아보면서 성혼 날짜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자녀 혼사를 위해 어떠한 부분도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 도움말 김희경 팀장(신한은행 WM사업부 커플 매칭 담당)
이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아이가 각자 자취와 유학으로 집을 떠나고 나니 덩치 큰 집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포장이사를 예약해 두었지만 미리 짐 정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말숙씨입니다. 우선 옷장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원피스, 바지, 블라우스, 재킷 등은 물론 모자, 스카프, 가방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옷가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손질해서 입을 옷, 버릴 것, 누군가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입지 않아 새것과 다름없지만, 오십이 넘은 말숙씨의 몸에는 이제 맞지 않는 옷들도 여러 벌 있습니다. 옷 정리를 하는 도중 말숙씨는 자주 난감해집니다. 다시 입을 수도, 버릴 수도, 남에게 줄 수도 없는 옷들 때문입니다. 처치곤란. 그것은 바로 여행의 추억이 담긴 옷들입니다.
신혼여행지에서 남편과 똑같이 입고 다녔던 줄무늬 커플 티에는 아직도 오색약수 물비린내가 나는 듯합니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떠난 유럽에서 입고 다녔던 분홍 원피스에는 파리의 낭만적인 거리가 골목골목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고 동창들과 놀러 간 상하이에서 사 입은 푸른 꽃무늬 블라우스는 와이탄의 야경으로 눈이 부십니다. 이제 너무 낡거나 작아져서 입을 수도 없는데,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몸에 맞는 누군가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추억이란 이렇게도 질긴 인연을 맺고야 마는구나.’
말숙씨의 난감한 짐 정리는 옷가지들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들춰보지 않는 사진첩도 너무 많았고, 1년 내내 바깥 구경 한번 못하고 차곡차곡 쌓인 그릇들, 먼지 앉은 책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사용했던 물건들, 여행지에 다닐 때마다 사 모은 각종 기념품과 장식품들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집을 좁혀 가는 것이니 짐도 줄여야 합니다. 정리를 한다는 것은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말숙씨에게 여행의 추억은 정리되지 않는 견고함으로 꿋꿋이 남아 있습니다. 옷이며 가방이며 기념품마다 함께한 사람들이 있고, 놀라며 감탄하던 아름다운 장소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추억을 사 모은 것이었습니다. 말숙씨는 문득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여행의 추억들이 하나같이 물건에 담겨 있다는 게 쓸쓸하게 여겨졌습니다.
‘나에게 여행은 사람들과 우르르 놀러 가서 구경하고 기념품을 사는 게 고작이었나.’
짐 정리를 대강 마무리하던 날, 말숙씨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제주도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말숙씨에게 이번 여행만큼은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경험입니다. 며칠 동안 짐 정리를 하며 들었던 생각을 감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번 여행을 위해 말숙씨는 자신과 몇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첫째,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 둘째, 완벽한 계획을 갖지 않을 것. 셋째, 기념품을 사지 않을 것.
마치 20대 젊은이들이 배낭여행을 떠나듯이 그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남편은 가는 날 아침까지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이사도 며칠 안 남았는데, 주말에 나랑 같이 가자”, “진짜 이유가 뭔지 솔직히 말해봐라”, “아줌마라도 여자 혼자는 위험하다”고 하다가 결국은 매일 수시로 안부 전화를 하는 조건으로 내키지 않는 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 들떴던 마음은 이내 가라앉고 말숙씨는 막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버스는 어떻게 타야 하나’, ‘호텔을 미리 정해둘 걸 그랬나’ 등 이미 여러 번 왔던 제주도인데도 불구하고 낯설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늘 누군가 리더가 있었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가이드든 누군가가 좋다는 곳, 유명하다는 곳을 추천하고 데려가 주었습니다. 막막한 적도, 불안한 적도 없이 마음 편히 따라다녔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여태껏 일행을 따라다녀놓고 말숙씨는 함께 여행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관광을 다녀놓고 여행을 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올레로 하자! 혼자 하는 여행은 올레길 걷기가 제격일 거야.’
말숙씨는 공항에서 올레길로 가는 버스 가운데 하나를 찾아 타고 창가에 앉았습니다. 습기 가득한 제주의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훅훅 들어왔습니다.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십니다. 혼자 온전히 만끽하는 바람의 냄새도, 소리도 처음입니다. 바람이 이렇게 생생히 살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 바람이 데려다 주겠지.’ 어디서 내리든 길이 시작될 거라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말숙씨는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 부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평균 40년. 진짜 부부생활은 은퇴 이후에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혼이혼이 처음으로 신혼이혼을 앞질렀다고 한다. 진정한 노후 대비는 재테크가 아니라 부부간의 ‘평화로운 공존’과 ‘갈등 관리’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병이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있어도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닫는다. 많은 경우 남자는 여자가 하는 말을 잔소리로 듣는다. 공통의 대화 주제를 갖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부부가 함께 영화나 공연을 본다든지, 여행, 악기를 배우는 등 같은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것도 좋다. 어느 봄날 부부가 폼나게 차려입고 호텔에서 우아한 디너를 하는 것은 어떨까.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1.배낭여행 부부 2.패셔니스타 부부 3.만돌린 부부 4.공연에 빠진 부부 5.손잡고 학교 가는 부부
CHAPTER 1 배낭여행 부부
“우리 부부 제2의 인생은‘여행연출가’랍니다”
165개국을 누빈 국내 부부배낭 여행가 1호 김현·조동현 부부
함께 산 지 47년이 넘은 70대 부부가 여행지 멋진 곳에서도 알콩달콩 ‘뽀뽀’를 일삼는다.
남편 김현(77)씨는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운동 40분, 매일 일간지 5개를 정독하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부인 조동현(74)씨는 여행 가방을 챙기고 같이 가는 여행자들에게 연락을 하고 준비물을 체크하는 일을 맡는다. 4박 5일 삿포로 눈 축제 여행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부부를 서울 가양동 그레이스힐(실버타운)에서 만났다.
“일주일 여행을 위해 70일을 준비하는 우리 부부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함께 대화하고, 여행을 하면서 함께 얘기하고, 돌아와 여행을 정리하면서 다시 대화한다. 비록 배낭여행이라도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돈은 조금씩 부족해지겠지만, 풍성한 추억과 대화가 그 자리를 메우니 가난해지기는커녕 더욱 부자가 되는 느낌이죠. 서로를 존중해주니 존경심이 느는 것 같아요. 부부가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런 좋은 시간들, 기회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살고 있죠.”
70대를 신나고 재미있게 보내는 비결
문화산책 ‘청류회(淸流會)’는 김현·조동현 부부의 주도 아래 월 1회 연극, 영화, 음악, 오페라, 그리고 각종 전시회와 박물관 참관은 물론이고, ‘포도주 시음회’, ‘테이블 매너 실습을 겸한 만찬’ 등의 행사를 갖는 일종의 문화단체이다. ‘2Hyun’s Travel Club’은‘대한민국 부부 배낭여행가 제1호’라는 별칭에 걸맞게 부부가 1999년부터 공동 대표가 돼 이끌어오고 있고 부부와 함께 여행 가기를 원하는 이들의 신청을 받아 해마다 3~4차례 해외여행에도 나선다.
이들 부부는 일흔을 넘긴 현재까지도 이 두 가지 일에 역점을 두고 즐긴다. 또한 “70대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자신이 좋아하면서도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에 매진하면 얼마든지 노후를 신나고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방송국 PD 출신의 남편 김현 씨와 영어교사 출신의 아내 조동현 씨는 국내 최초의 부부배낭여행가로 알려져 있다.
1989년 1월 1일 처음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부부는 한 해에 2~5회씩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경험한 여행지가 지금까지 165개국에 이른다. 개중에는 여러 번 방문한 곳도 부지기수. 일본은 무려 70번이나 여행했다고 한다. 현지인도 가기 힘든 곳을 샅샅이 찾아 여행하는 데 고수다. 26년 배낭여행의 노하우일 것이다.
“여행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싶었습니다. 직장 다닐 땐 시간이 없어서 벼르기만 했던 세계여행, 은퇴하고 나자마자 배낭을 둘러멨어요.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겪는 일들이 인생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해줘요. 혼자 하면 외로울지 모르는데, 부부가 함께 하면 몇 배로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쌓이지요. 대신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관심사에 따라서 주제를 정해 여행하는 것을 권합니다.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보거나, 반고흐의 흔적과 작품들을 보러 가는 것이지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먼 곳으로의 여행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여행이란 게 습관이 돼서 괜찮다고 김씨는 말했다.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은 부부의 대화
만약 부부에게 여행이 없었다면? “지루했겠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 혼자보다는 동반자와 협력해서 하는 게 신나고 효과적이지 않겠소. 서로 역할을 나눠 돕기도 하면서 말이오. 그런데 요즘은 기억이 나질 않아 아내한테 늘 확인해야 해”라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이 부부는 여행이 부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대화’라고 말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을 가서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리고 여행을 다녀와서… 공통의 화제를 두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매우 뜻 깊은 일이죠.”
부부 사이에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이 부부는 굳이 말로 다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끝으로 덧붙인 아내 조동현 씨의 말. “간혹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남편과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 중 달콤한 추억들을 꺼내 스스로를 위로하곤 해요. 인생의 반려자와 함께 여행하는 기쁨은 말로 다 못할 만큼 큰 힘이 되죠.”
이제는 김씨의 풍부한 여행 경험과 식견을 인정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여행지의 역사와 다양한 정보도 함께 전해주는 ‘여행연출가’로 제인생을 산다.
최근 열 번째 책을 펴냈다. ‘요셉과 피나부부 70대 인생을 재미있고 신나게 사는 이야기’다. ‘요셉’은 남편 김씨 세례명이고, ‘피나’는 아내 조씨 세례명의 애칭이다.
에는 책 제목처럼 재미있고 신나게 사는 부부 이야기가 담겼다.
이 부부는 이미 여행 관련 책을 다수 펴냈고, 1995년부터는 12년 동안 KBS TV 여행 프로그램 ‘세상은 넓다’에 출연한 바 있다. 신부님(장남 김환수)의 부모라서기보다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은 황혼이혼이 급증하는 요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오늘도 부부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결혼생활 중 항상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늘 겸손과 배려로 상대를 존중하며, 자녀에게도 자존감을 바탕으로 사회에서의 제 역할을 강조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뤘으니 이 부부는 부러움과 공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들 부부의 모습은 어쩌면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의 로망’일지도 모른다.
#부부 배낭여행 10계명
1. 배우자를 최대한 편안하고 기쁘게 해주도록 노력하라.
2. 여행 기간의 10배에 해당하는 준비 기간을 가져라.
3. 여행 준비는 부부가 나눠서 해라.
4.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치밀한 일정을 짜라.
5. 경제적 여행을 계획하라.
6. 숙식은 가능하면 친구나 친지의 집에서 해결하라. (단, 잠자리만 부탁하고
다른 부담은 주지 마라. 그리고 그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꼭 보답하라.)
7. 가장 싼 비행기 표를 구하라. (최소 3개 회사 이상을 비교하라.)
8.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하라.
9. 맛있고 멋있는 음식점에서 꼭 한 번은 식사하라.
10. 여행의 멋을 연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