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희 FLP컨설팅 대표
김병호(59세)씨는 다음 달이 되면 정년퇴직이다. 30년 넘게 근무해온 직장을 떠나야 하는 김병호씨는 그야말로 시원섭섭한 마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몸에 배어버린 직장인의 삶을 접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두렵기도 하다. 김병호씨의 지난 60년의 삶은 퇴직 이후를 위해 준비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잘살아왔다고 자부를 하는 김병호씨는 남은 시간도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며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 김병호씨 현재 상황
김병호씨의 가족으로는 전업주부인 배우자(56세)와 현재 직장인 큰아들(29세),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작은아들(26세)이 있다.
김병호씨의 현재 재무상황은 아래([표1], [표2])와 같으며 퇴직을 하면 약 2억2000만원의 퇴직금이 예상된다. 김병호씨 가정의 현재 생활비는 매월 30만원의 대출이자를 포함해 350만원 정도가 지출되고 있으며, 취업한 큰아들이 매월 50만원의 생활비를 보조하고 있다. 대출을 전액 상환하고 자녀들이 모두 독립하면 가계생활비는 220만원 전후로 예상된다.
① 퇴직 후, 그리고 자녀 독립 후 예상현금흐름을 알고 싶다.
② 1억원인 부채를 어떤 방식으로 상환하는 것이 좋을지 알고 싶다.
③ 퇴직금의 전체 혹은 일부를 퇴직연금으로 수령하기를 원한다.
④ 자녀 1인당 1억원, 합계 2억원의 자녀독립 지원자금을 원한다.
⑤ 현재 가입 중인 보험상품의 적합성을 검토하고 싶다.
◇ 김병호씨 재무 진단 제안
부채상환 김병호씨는 부채 1억원을 현재의 여유자금으로 당장 상환할 수도 있고 퇴직금 중 일부로 상환할 수도 있다. 아니면 주택을 매각해 부채를 상환한 후 주택의 규모를 줄이거나 주택 비용이 싼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것도 방법이다. 만약 현재의 주택에 그대로 거주하면서 여유자금이나 퇴직금의 일부를 자녀의 독립지원자금(자녀 1인당 1억, 합계 2억원)으로 준비해두고 싶다면 주택대출상환용 주택연금을 고려해볼 수 있다. 주택대출상환용 주택연금은 주택연금지급가능액의 70%의 범위 내에서 인출(1회에 한함)해 주택담보대출을 상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주택에 그대로 거주하면서 부채를 상환하고 주택연금을 받을 수 있다. 김병호씨가 주택대출상환용 주택연금을 60세 시점에 신청하면 대출상환 후 매월 46만원의 주택연금을 종신 지급받을 수 있다.
◇ 실업급여
정년퇴직은 실업급여 수급사유에 해당한다. 김병호씨는 10년 이상 고용보험가입자에 해당하기 때문에 1일당 5만원 한도로 하여 월 150만원을 퇴직 후 8개월(240일) 동안 총 1200만원의 실업급여를 수령할 수 있다. 실업급여는 퇴직 후 12개월이 지나면 잔여기간에 관계없이 수급자격이 소멸되기 때문에 퇴직 후 지체없이 거주지 관할 고용센터에 신청해야 한다.
◇ 국민연금
1957년 생인 김병호씨의 완전노령연금 수급가능연령은 만62세가 되는 시점부터다. 연금액은 현재가치로 매월 110만원 정도 예상된다. 현재 김병호씨는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어 사업소득이 발생하지만 재직자노령연금의 지급이 제한되는 기준(2017년 기준으로 사업소득과 근로소득의 합계금액이 필요경비 공제 후 월 217만6483원원)이하이기 때문에 62세가 되었을 때 국민연금을 전액 수령할 수 있다.
◇ 퇴직연금
김병호씨가 퇴직금 중 일부인 1억원을 IRP(개인퇴직계좌)에 납입해 30년간 수령한다고 가정할 때 예상되는 월 수령액은 30만원이다.
◇ 개인연금
김병호씨가 가입한 연금보험은 현재의 공시이율 조건일 때 지금부터 김병호씨가 생존하는 동안 매월 40만원의 연금이 지급되고 만약 김병호씨가 먼저 사망하면 부인이 생존하는 동안 매월 20만원이 지급되는 부부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연금상품이다.
◇ 보장성 보험
김병호씨의 경우에는 연금과 부동산 임대수익만으로도 현재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다. 다만 고액의 치료비가 요구되는 질병이나 장기간 간병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현재의 수입으로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고령화로 인해 갈수록 치매 등 장기간병 상태의 환자가 증가하면서 장기간병보험의 보험료가 비싸지고 있는 추세다. 김병호씨 부부가 가입한 종신보험은 1급의 장해(치매로 인하여 항상 간호를 받아야 하는 경우 포함) 상태가 되었을 때 사망보험금(1억원)을 지급하는 보험상품이다. 그리고 꼭 치매가 아니더라도 고액의 치료비가 발생한 후 사망했을 때 사망보험금이 유가족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종신보험은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다.
암보험은 보장기간이 80세인 점이 좀 아쉽다. 부인이 가입하고 있는 실손보험의 특약에는 암이나 뇌졸중, 그리고 심근경색과 같은 주요 질병에 대한 진단비가 포함되어 있지만 김병호씨의 경우는 퇴직으로 인해 질병이나 상해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늦기 전에 월 보험료 10만원 수준에 100세까지 보장받을 수 있는 실손담보를 포함한 건강보험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3년 전에 대기업에서 퇴직하고 서울에 거주 중인 손병수(58세)씨가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손병수씨가 재무상담을 통해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은 매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현금흐름 확보 방안이다.
1. 현재 상황
손병수씨의 가족으로는 전업주부인 배우자(56세)와 출가한 딸(33세)과 작년에 취업을 하고 회사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29세)이 있다. 퇴직 후 2년 동안 손병수씨는 재직 당시 거래처였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며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1년 전 두 번째 퇴직을 한 이후 지금까지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 첫 번째 퇴직으로 인해 발생했던 퇴직금은 일시금으로 수령해 딸 결혼자금과 아들 대학등록금으로 대부분 썼기 때문에 퇴직연금은 없는 상태다. 매월 200만원 전후로 소요되는 생활비는 1년 전부터는 실업급여와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충당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아들 결혼자금으로 1억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고 있다.
2. 재무진단
3. 제안
손병수씨가 의뢰한 매월 200만원 전후의 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5층 연금체계를 활용해야 한다. 5층 연금체계는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 1958년생인 손병수씨의 완전노령연금 수급가능연령은 4년 뒤인 62세부터다. 연금액은 현재 가치로 매월 110만원 정도 예상된다. 손병수씨는 조기노령연금수급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여유자금이 있기 때문에 완전노령연금에 비해 12%까지 연금수령액이 삭감되는 조기노령연금을 미리 받은 받을 필요는 없다.
퇴직연금 손병수씨는 퇴직연금이 없다.
개인연금 현재 가입 중인 개인연금도 없다. 정기예금 중 1억원을 배우자 명의로 하여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손병수씨의 부인은 본인 명의의 국민연금이 없다. 남편인 손병수씨가 사망한 후에는 유족연금 명목으로 손병수씨 명의로 받던 노령연금액의 60%를 수령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의료비가 생활비가 될 정도로 의료비 지출이 많아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약 12년 정도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손범수씨가 부인을 피보험자로 한 연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일시납연금보험을 가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입 즉시 연금을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지급 시기를 충분히 여유 있게 설정해두고 그 이전에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현재 56세 여성이 1억원의 연금보험에 가입해 10년 뒤인 66세부터 연금을 개시한다면 매월 60만원 정도의 연금수령을 기대할 수 있다. 단 연금이 개시된 후 피보험자가 사망하게 되면 최초 가입금액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 연금총액을 차감한 금액만 상속인에게 지급하는 조건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주택 소유자나 그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일 때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손병수씨는 만 58세이기 때문에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7억원의 주택을 종신연금 수령조건으로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60세 기준으로 매월 146만원 정도의 금액이 지급된다.
손병수씨 부부는 주택연금 가입이 가능한 2년 후까지 현재 거주 주택을 보증금 1억원에 매월 120만원의 월세를 받는 조건으로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세 보증금 1억원과 현금 1억원을 합해 집의 규모를 줄여 서울 외곽 지역에 2년간 전세를 임차해서 살기로 했다.
직업 중장년층이 퇴직 후에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다. 눈높이를 낮춰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명함이 나를 설명하던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손병수씨는 우선 자신의 경력을 살려 고용노동부에서 추진하는 사회공헌 일자리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매월 30만원 정도의 소득을 기대한다. 동시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요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4. 실행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손병수씨는 최근에 와서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손병수씨는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는 정부지원사업 중심의 일자리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매월 100만원의 근로소득을 목표로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이 나오는 시기에서 부인 명의의 개인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근로시간을 줄여 매월 50만원 정도의 수입을 목표로 일을 하기로 계획을 짰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필자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자식 많은 가난한 농사꾼의 9남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마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에 마음 한구석 애잔함이 밀려든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농촌에서는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13명의 대가족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해야 할 만큼 식량이 필요했다. 봄날은 길고 보릿고개는 높았다. 봄에 장리쌀 한 가마니를 빌려오면 가을에 한 가마니 반을 갚아야 했다. 50%의 이자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과히 살인적인 이자요, 착취다.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사회 구조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해만 보릿고개를 넘을 때 장리쌀의 고리에서 벗어나면 되었지만 굶을 수는 없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걸 필자가 해보리라 결심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1년만 포기하기로 했다. 1년 동안 돈을 벌어보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어린 필자가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절이었다. 필자 동네도 정부에서 구불구불한 논둑을 똑바로 펴는 경지정리 작업을 시행했다. 지금 말로 하면 공공근로다. 읍사무소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그날 할 일을 지정해주고 저녁 무렵 성과를 측정해서 실적에 따라 밀가루 티켓을 나눠 줬다. 지원자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최저임금에 버금가는 적은 밀가루 지급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농사일이 다 끝난 겨울에 하는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논둑에 한 뼘 정도 들어 올릴 만큼의 범위를 정하고 곡괭이로 논둑에 구명을 낸다. 거기에 쇠로 된 긴 지렛대를 넣고 논둑을 들어 올리면 논둑이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에 직선화된 새로운 논둑을 만드는 일이다. 공사가 다 되면 바둑판처럼 반듯한 직선화된 논둑과 논이 만들어진다. 경지면적도 커지고 농토가 반듯해서 농사짓기에도 편하게 된다. 요즘 같으면 포크레인 등 기계로 하겠지만 당시는 순전히 사람의 노동에 의한 작업이었다.
공공근로라는 것이 다 그렇듯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하루 할당된 일의 양도 5~6시간이면 다 마칠 일이었다. 밀가루를 매일 주는 것이 아니고 며칠에 한 번씩 읍사무소에 가서 받아왔다. 이렇게 받은 밀가루가 10포대 정도 되었다. 필자가 벌어온 밀가루로 수제비도 해먹고 콩가루 넣은 칼국수도 만들어 먹었다. 늙은 호박에 팥을 넣은 호박범벅도 해먹었다. 덕분에 쌀이나 보리를 아낄 수가 있었다. 그해 장리쌀의 고리를 끊고 보릿고개를 넘었다. 이제 빚은 없어졌다. 어머니가 두고두고 필자 공을 인정해주었다.
당시는 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먹어야 사니까 흉년에는 콩죽 한 그릇 하고 논 서 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나이 어린 소녀들이 봉급 받은 다음 날 우체국에 줄을 서서 고향으로 돈을 보내는 모습도 봤다. 고향 집에 보내기 위해 손에 쥔 그 돈이 달랑 30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돈으로 오빠나 동생들 학교 다니게 하고 살림 밑천인 송아지도 샀다. 이런 돈들이 모여 논, 밭도 사고 고향 집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공신들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다. 땅값이나 집값이 지금처럼 비싸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는 다음 해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진학했다. 적성도 모르고 오직 취업이 잘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공고를 택한 이유라면 이유다. 당시는 공부를 못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빠른 취업을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자 동급생들이 하나둘씩 취업되어 학교를 떠났다. 필자도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전매청 연초제조창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담배를 만드는 기계는 이태리 제품인데 요즘처럼 완전자동은 아니나 당시로는 획기적인 자동화 기계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동화 설비에 대해 도면 보는 법을 익히고 고장 난 기계들의 점검하고 수리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군대에서 기술을 더 배워보려고 육군 발전기술병으로 지원했다. 처음에는 대대 참모부에서 군수품을 담당하는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그런데 전기 일을 하게 될 운명이었는지 부대 목욕탕 관리 병사가 전기 감전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후임으로 전기를 안다는 이유로 필자가 선발됐다. 목욕탕 관리사병은 보일러를 다룰지 알아야 하지만 필자는 보일러에 대해서는 통 몰랐다. 인근 부대를 다니며 독학으로 보일러의 운전법을 배우고 무난히 목욕탕 관리사병의 임무를 마쳤다. 한 번은 목욕탕에 사성장군인 군사령관이 방문했다. 별 4개를 보는 순간 벌벌 떨었다. 35개월을 마치고 제대한 후 한국전기안전공사에 입사하게 됐다. 27세 때었다.
필자 인생에서 전기안전공사를 빼놓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 공부도 시키고 60세 정년퇴직을 했으며 노후생활도 보장받았다. 안전공사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간부시험에 일찍이 합격한 것이다. 간부는 60세 정년이지만 직원은 58세가 정년이었고 급여에서도 차등이 있어 경쟁이 심했다. 간부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의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하는 근속연수 점수와 상급자가 매기는 고과점수를 합한 기본점수가 있다, 여기에 필기시험을 쳐서 학과 점수를 보태어 성적순으로 뽑았다.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역시 필기시험이었다.
필자는 상급자인 주임들을 제치고 간부시험에 입사 3년 만에 합격하였다. 간부로 첫 부임지가 공교롭게도 과거 근무한 적이 있는 사업소였다. 간부로 발령받고 보니 옛날 상사인 주임들이 부하로 바뀌어 있었다. 필자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주임들도 필자를 대하기에 곤혹스러웠다. 이런 때일수록 필자의 상급자인 과장이 잘 컨트롤 해 줘야 하는데 상급자인 과장도 주임들과 오래 근무한 정으로 심적으로는 주임들과 더 가까운 편이었다. 공식적인 술자리에는 필자가 참석했지만 주임들과 과장 간의 사적인 술자리에는 필자를 고의로 배제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의 힘으로 간부의 위치를 찾아갔다.
두 번째 사건은 고등학교 후배가 많은 지역에 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필자가 졸업한 공고는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동문회 야유회 때는 장난 비슷하게 선배가 후배 엉덩이를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나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매이니까 웃으며 맞았다. 부부동반으로 야유회도 다녔는데 선배들이 후배 벌주는 것을 부인들이 다 보고 있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고착화된 선후배 간 전통이었다. 그런데 회사 간부인 필자를 때리기는 아무리 선배지만 버거워했다. 필자로 인해 벌씌우거나 매를 드는 것은 차츰 없어졌다. 하지만 선배들을 사적인 장소에서는 더욱 깍듯하게 모셨다. 술을 따를 때도 3년 이상 선배한테는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사건은 기술직으로 감사반장이 된 것이다. 감사는 회계감사가 중요한데 기술회사에서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 감사반장을 해야 한다는 사장의 경영방침에 의해서 필자가 선택되었다. 부서별 부장급 감사반원을 이끌고 사업소를 순회하며 실무 감사를 했다. 잘못하는 점보다 잘하는 점을 찾아서 타사업소에 전파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징계도 했지만 표창도 많이 했다. 올바른 비판력과 판단력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네 번째 사건은 전문대학교에서 겸임교수를 맡은 일이다. 기술사 자격을 갖고 있고 현장 경험이 많다는 점을 들어서 대학교에서 섭외가 들어왔는데, 사장이 허락해 교수직을 겸임한 것이다. 전기응용 과목을 맡았는데 전기응용은 조명, 전동력응용, 전기철도, 전기화학 등 폭이 넓은 실무 분야다. 4년간의 겸임교수 시절은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다섯 번째 사건은 전기안전 부문에서 필자가 노력한 일들을 정리하여 공적조사로 만들어 경향신문이 주최하고 한국전력공사가 후원하는 에너지대상을 신청한 결과 국민봉사 부문 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굵직한 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부상으로 대만 여행을 보내주고 금 20돈의 황금 열쇠를 받았는데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60세 정년퇴직을 했다. 1남 1녀의 자식도 결혼하여 필자 곁을 떠났다. 비록 나이에 의해 정년퇴직했지만 아직은 신체 건강하여 일자리를 찾았다. 급여는 적지만 필자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다니고 있다. 나이 더 들면 직장에서 완전히 은퇴해야 한다. 그때를 대비해서 취미가 있는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글쓰기의 자산은 역시 독서이므로 도서관의 ‘책 읽기 마라톤’에 3년간 참가하여 언제나 1등을 하였다.
귀촌을 위해 도시 근교에 땅도 사두었다. 나이 들어서 버티는 힘은 경제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연금도 부었다. 체력도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올해 동호인 테니스대회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한 것이 기쁘다. 앞으로 전국테니스대회에 노년부로 참가하려고 한다. 우승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목표가 있어야 한다.
70세가 넘으면 봉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에 매진할 것이다. 이것도 공부해야 한다. 사회봉사의 이론을 갖추기 위해 인터넷으로 사이버대학을 수강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했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아니라 육체가 따라가는 봉사를 위해 발마사지와 경락안마도 배우고 민간자격증도 취득했다, 경험을 얻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치매센터에 치매전문 자원 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세상살이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신념을 늘 갖고 있다. 필자의 생애가 아직은 진행 중이지만 돌이켜 보니 준비하며 여기까지 잘 왔다고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밤새 내리던 비가 개었다.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하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들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냅다. 동 뛰었다. 동네 입구를 막 빠져나가는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범아! 어디 가니?” 논에서 줄을 지어 모내기하던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예, 학교 가요.” “오늘 일요일인데 무슨 학교에 가니?” 그랬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늦잠을 자다가 보니 깜박 잊고 학교가 늦었다고 생각에 빠른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신용리 장교부락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농사라야 논 1,200평 정도, 밭이 300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가난한 집안이었다. 소득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웰빙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래기밥, 콩나물밥, 무밥, 꽁보리밥 등으로 식사하거나 고구마, 감자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통구이 굽는 장면을 보고 고기를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겠다며 올라갔다. 이후 남겨진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장남이었던 필자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농사일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50여 평 되는 하천가 논은 품을 사지 않고 어머니와 필자가 직접 모내기를 하곤 하였는데, 중학생의 눈으로 보기에 넓기만 하였다. 다리에 행정을 두르고 모를 심는다고 엎드리면 허리가 너무 아팠고, 행정을 두른 다리에 수많은 거머리가 달려드는데 묶은 끈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머리를 때어보면 피가 한 대롱 맺혀 있는데, 이내 피는 종아리를 타고 줄줄 흐른다. 물린 곳은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농사는 짓고 살지 않겠다’고 되네 곤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연 서울에 올라간 아버지가 흑석동 성모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당시 동작동국립묘지에 다녔던 넷째 숙부 집에서 숙식하면서 고무신 노점상을 하였는데, 장사를 마치고 나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해서 강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위가 약해져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병원비가 28만 원(7년 후 공무원에 들어가 받은 첫 월급이 2만 원 수준)이나 되었는데, 필자 집에 그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을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누구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6남 2녀였고 아버지의 둘째 형님은 80여 마지기(16,000평)나 되는 농사를 지었는데도 고개를 돌렸다. 부득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눈을 돌려 4자매 중 가장 친근감이 있는 셋째 이모님 댁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모부님으로부터 3푼 이자로 돈을 빌려 병원비를 지급하였다. 그 돈은 필자가 공무원을 하면서까지 갚아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명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는 수술받은 이후 건강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그후 7년여 기간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시다 1984년 54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갔고, 어머니도 그후 5~6년 동안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합병증이 악화하여 2000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모가 모두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가진 재산이 없어 치료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필자는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이후 차츰 재정상태가 나아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4남 2녀의 장남으로서 돌아간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뒤치다꺼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 처지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고된 농사일만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한 고통에 돌파구가 생겼다. 하루는 집에 사촌 형이 찾아와 “공무원시험 보기 위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러 간다”며 “너 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 하고 물어온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따라가 함께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운 좋게 필자만 합격하고 형은 낙방하였다. 사촌 형은 3년 후 필자가 서울 관악노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가리봉동 한일합섬 부근에서 자취하였는데, 그때 함께 생활하며 필자가 수학을 가르쳐준 이후 서울시 공무원에 합격하였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은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으로 났다. 시골에 사는 필자로서는 사실 그곳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또한 당시 시골에서 동사무소나 우체국에서 근무하려면 돈을 써야 하는데 필자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였다는 말에 20만 원을 벌었다느니 50만 원 벌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 어디 가도 자연스럽게 필자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는데, 우연히 옆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처음 보는 노인장 한 사람이 “참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네”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노인장에게 “할아버지 노동청에 대하여 잘 아셔요. 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을 도와주려면 자기 돈을 써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공직 생활을 퇴직할 때까지 이를 새기고 일했다.
노동청에서의 첫 근무지는 부산 동래온천장에 있는 한독직업훈련원(발령일 74년 11월 11일)이었다. 한독직업훈련원은 진학을 못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정부가 무료 직업훈련을 시키고 취업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선배 한 사람이 지방 관서에 근무하다가 훈련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필자가 지 방관서 발령을 받은 이후 그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공직사회는 급여 수준이 낮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금품 수수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욋돈이 없는 곳에 발령받으면 좌천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다른 사람처럼 상납이나 술대접도 잘 못 하고, 배경도 없었던 필자는 공직 생활하는 동안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향마저 전라여서 그 고통은 더 컸다.
필자는 한독직업련원에서 일하다 지방 관서로 이동했다. 지방관서에서는 주로 산재보험 징수 및 보상 업무를 담당하였고, 25세가 되던 해부터 대부분 근로감독관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사분규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6.29선언 이후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때 분규는 너무도 거칠어 근로감독관들이 분규 현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경험이나 지식이
짦았음에도 책임감 때문인지, 젊은 혈기 때문인지 분규 사업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양쪽 이야기를 듣고 완화해보려고 노력하였고 뜻밖에 성과도 많았다.
그때 느꼈던 것은 사용자의 말을 들으면 사용자의 말이 옳고 근로자의 말을 들으면 근로자의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분규를 해소하려면 누가 잘못했는지 짚어내고 잘못한 쪽이여금 고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러한 갈등은 노사분규 현장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과학ㆍ문화ㆍ예술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음을 알았다.
필자의 공직 생활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라는 엄청난 국가적 정치적 변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국가적으로 보면 78ㆍ87ㆍ97ㆍ2008년 등 10년 터울로 변화했다. 우선 1978년 이후 YH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대통령 서거, 5.18광주민화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다. 87년에는 6.29선언 이후 공권력 약화에 따라 노사분규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97년에는 대통령 출마자 세 사람이 각서를 쓰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150만~200만 명의 근로자가 실직하는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2007년이 되면 다시 미국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건이 터지고 그 파장이 세계 경제에 미치면서 한국도 2008년에 또다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였다. 41년 7개월이라는 근무 기간 9명의 대통령(정부)이 바뀌고, 그때마다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고 정책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기 맞춰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힘든 삶이었다.
공직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느꼈던 아버지 형제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모습과 공직 생활 동안 직장에서의 편견, 편향, 편애, 편파 등의 모순, 노사관계를 지도할 때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무렵에 읽었던 책 등의 영향으로 필자는 정신세계 공부에 심취하였다. 1984년 무렵부터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종교, 사상, 철학, 역사, 역학 등 잡다한 서적을 사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다양한 단체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항상 생각한 것은 ‘진리라면 무엇을 공부하든 반드시 일맥상통한 것 즉 보편 당성이 있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차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스님들이 쓴 화두 관련 책을 집중으로 읽고 명상을 거듭하다 성(性)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낼 수 있었다.
94년에 그것을 정리하여 ‘진과 사(眞과 邪)’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세계에는 수많은 석학이 있고 평생 몸을 받친 종교인들도 많은데 필자가 아는 것을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혹시 허상이나 망상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다시 20여 년 동안 깨달은 내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사지도에 적용해보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해보고, 직장 생활에 활용해보고, 각종 고전 등도 다시 읽다. 그 결과 필자의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2015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원리로써 풀어낸 ‘새로운 경세학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논어 위정편 제4장에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삽십이입(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라고 하였는데 필자도 이순의 나이이다. 황하의 신이 바다를 보고 할 말을 잊는다고 하는데 고용노동부라는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알기 위하여 20여 년 전에 했던 방황을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중장년층과 베이비부머세대, 퇴직자들, 즉 시니어들이 공통적으로 최대의 관심 정보는 뭘까? 바로 일자리다. 재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고 연금은 부족하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55∼64세 고령자 고용률은 2012년 63.1%로 1995년 63.6%보다 0.5%포인트 하락했다.
고용지표상으로만 보면 베이비부머 세대인 50대 중심으로 취업자가 늘어가고 있고, 여성과 중장년층의 고용율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춰보면 시간제근로자, 기간제근로자 등의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숫자만 채우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50대 이후 시니어들 재취업은 정부와 기업의 전직지원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는 재취업에 절망
비자발적, 자발적이든 정든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던 퇴직자들은 인생2막을 열기 위해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재취업이 필수다.
그러나 시니어 계층의 재취업과 창업에 대한 절박한 사회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화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장년층 구직자들을 위한 전직 서비스가 아직 자리잡지 않았고, 기업들이 퇴직자를 바라보는 편견도 넘어야 할 벽이다.
명예퇴직 신청을 한 1년 전부터 50대 초반 A씨는 6개월 동안 ‘전직지원전문가’에게 심리상담, 진단과 피드백,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전직교육, 취업알선 등 전문 컨설팅을 받았고, 퇴직 후 곧바로 자신의 경력과 적성에 맞는 새로운 직장에 재취업했다.
퇴직이 배우자의 사망에 이은 가장 큰 심리적인 충격이라는 여론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퇴직은 개인에게 또한 매우 큰 시련이다. 게다가 고령화사회 정년퇴직 연령이 낮아지는 노동시장의 형태 속에서 퇴직은 고급 인력들의 사회 참여 폭이 작아지는 사회 해체의 문제와도 연관돼기 때문에 퇴직자들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고민은 매우 커져갔다.
따라서 그 동안 회사를 위해 기여한 근로자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그 대안으로서 아웃플레이스먼트(전직지원프로그램)가 도입되고 확대되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퇴직 후 일정기간 동안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또 재취업을 위한 각종 교육훈련제도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정년연장과는 별개로 기업들은 고령화의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전직지원서비스에 주목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의 최선의 복지는 일자리 제공이며, 일자리가 행복의 조건인 상황에서 이직하는 근로자가 가급적 실업 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지원하는 전직지원서비스의 중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즉, 퇴직자에게 일시적 희망 퇴직금이나 복리후생보다는 근로능력이 있는 중·장년 근로자를 일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장년의 재취업과 창업이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재취업에 대한 비틀린 시선이다. 시니어들에게 정부가 주도하는 재취업 지원이 시니어들의 전문성이나 그간 해왔던 일들과는 상관없는 일감들을 맡기기 일쑤라는 불평을 듣는 건 어렵지 않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실행이 잘 안되는 이유
소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도입한 기업일지라도 퇴직을 앞둔 1주일 전에 단발성으로 워크샵을 가거나 온라인 상담정도에 그친다. 이력서 쓰는 방법 알려주거나 면접 보는 스킬정도. 직전 퇴사 처리된 회사에 대해 악의를 품지 않도록 잘 달래주는 일이 겨우 아웃플레이스먼트라고 시늉하는 행태에 머물러 있다. 기업들의 평판에만 신경쓰는 저비용 고효과를 기대하는 변형 아웃플레이스먼트를 흉내내고 있다는 의미다.
전직지원프로그램이 있다고 소문난 기업에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개념도 모르고 있는 곳이 많다. 퇴직자들이 아웃플레이스먼트제도를 요구하지 않아서 도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HR부서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정보를 아예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기업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가 IMF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과 전직지원장려금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내 기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도입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한 기업들과 퇴직자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기업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해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할만큼 서비스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퇴직자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퇴직 시에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보다는 현금 보상을 더 선호하는 상황이다.
위로금을 선호하는 퇴직자들, 전직지원 서비스 요구해야
이런 이유들로 인해 도입 초기에 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계 기업 및 국내 기업은 많이 늘었지만,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만 커진 시장 규모는 역설적으로 그리 크게 늘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에 계류중인 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이같은 퇴직(전직)자에 대한 재취업, 창업 알선 등 지원서비스가 의무화 되면 전직지원서비스를 하려는 기업은 늘어 날것으로 전망된다. 퇴직자 가운데 장년을 대상으로는 전직지원 장려금을 지급하고, 사업주에게는 고용유지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검토된다는 것이다.
KT는 지난 4월 무려 8300여명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1조3000억원 가량을 명예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1억4457만원에 이르렀다. 또 한국시티은행은 최근 실시한 명예퇴직에서 5년치 급여를 특별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4억원에 달했다. 이밖에 자녀 학자금, 건강검진 혜택도 보장했다.
현대차그룹 계열회사도 최대 2억원을 넘게 퇴직위로금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감원인데, 막대한 인건비를 지출하게 된다.
경력관리체계가 자리 잡힌 일본, 공공과 민간 양쪽에서 재취업 지원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치룬 해외 선진국에서는 재취업-창업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들이 우리나라보다 고도화되어 있다. 일본은 정부의 ‘헬로워크’와 민간의 ‘시니어살롱’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헬로워크는 일본의 후생노동성이 고용안정 기회 확보를 위해 만든 공공직업안정소의 애칭으로 전국에 약 500개가 만들어져 있다. 취직 상담, 직업 교육, 직업 소개, 고용보험 관련 업무 등 취업과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사실 일본에서도 헬로워크는 상대적으로 낮은 직무 능력을 가진 중·고령자들을 위해 단순한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시니어살롱’은 전문 경력을 가진 시니어를 대상으로 구인구직 및 직업 교육, 상담을 진행하는 민간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일본의 국가 공인 경력관리체계가 안착됨에 따라, 경력관리모델에 의해 노년에도 전문성을 충분히 살리는 일을 맡기기 때문이다.
베이비붐이란 단어의 탄생지인 미국은 비영리단체(NPO)가 잘 정비돼 있어 경험과 지식이 많은 계층의 재취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NPO는 200만 개 정도 있는데 그중 절반은 의료,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30% 정도는 각종 교육 활동, 나머지 20%는 기타 다양한 활동을 한다. 미국에서는 NPO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취업 인구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미국 전체 취업 인구의 10% 가까이가 NPO에서 일하고 있는 걸로 나온다. 즉 취업 알선 분야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그 분야 자체가 일자리까지 제공할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각 지역사회 내에서의 재취업 지원 활성화 시작
우리나라도 문제들에 대한 대책과 대안들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공공기관과 기업들은 매 시기마다 열리는 다양한 일자리 박람회와 함께 다양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있다.
‘중장년 재취업 프로그램’이 경제단체와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지만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40대 후반 항공회사 출신 조기 퇴직자는 “간혹 일자리를 연결해 줘도 그곳에서 추천해주는 일자리들이 너무 열악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양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앞으로 10년 뒤에도 폐지가 노인 일자리를 감당하는 비극적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기업은 퇴직을 앞둔 근로자에게 의무적으로 전직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한다. 고용정보원 한 연구원은 전직지원 서비스에 대한 기업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퇴직자에 대한 전직지원은 결국 기업과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라는 인식이 선진 외국처럼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숫자나 통계치 목표에 기준을 두지 말고 ‘양질의 일자리’를 모색한다면 퇴직자들이 전직 및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퇴직 후 재취업은 이제 근로자 개인의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중장년 퇴직자의 전직과 노후설계 지원은 기업이 정부, 전문가와 손잡고 수행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되어야 한다.
현재 많은 기업에서 전직지원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기업에 따라 기본교육만 실시하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전체 프로세스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기업도 있다.
기본교육은 퇴직을 앞둔 대상자의 변화, 심리, 가족, 건강, 여가, 경력, 법률, 재무, 인생설계 등 퇴직후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말한다.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 기업에 따라 집합교육 및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
아직 도입단계인지라 전직지원에 대한 집체교육을 실시하는 기업이 늘고 있으며 전직지원 상담의 경우에는 개인적 상황에 따라 시간을 유동적으로 하고 있다.
상담 및 컨설팅의 경우는 개인의 재무상태나, 경력 활용방안, 법률적 문제나 여가활용 방안 등 개인의 문제를 1:1로 전문가에 의해 심층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이며 창업이나, 재취업의 경우 컨설팅을 통해 재취업 실행까지 지원 하도록 해야 한다.
P&G, 수출입은행, 한전, KT에서는 이러한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이미 시행 중에 있으며, 퇴직 예정자 뿐만 아니라 이미 퇴직한 사람들도 유용하게 접할 수 있어 향후 기업들이 전직지원 서비스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삼성 그룹, 계열사별로 18개 경력컨설팅센터 운영 중
한편 대기업들도 자사의 직원들을 위한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를 차차 갖춰나가고 있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처음 탄생한 개념으로 우리 말로는 ‘전직 지원 프로그램’ 또는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들 중 80% 이상이 이를 실행하고 있을 정도로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된 개념이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IMF 이후 기업에서는 효율적인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정부에서는 실업률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활용돼 공공과 민간부문에서 지속 적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에선 아웃플레이스먼트를 실행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삼성 그룹을 들 수 있다. 삼성은 회사를 떠난 임직원이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게끔 퇴직 관리를 해주는 경력컨설팅센터를 2001년부터 시작하여 현재 각 계열사별로 18개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40~50대 중장년 퇴직(예정)자들의 재취업을 돕는 전직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경력컨설팅센터는 퇴직임원, 정년퇴직자(또는 예정자), 퇴직자(또는 예정자)를 대상으로 자문역 전직, 정년준비, 전직 상담을 해주며 재취업 알선뿐만 아니라 재교육, 창업지원을 하면서 퇴직 후 삶을 계획할 수 있게끔 종합적으로 관리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총 3천 600명이 재취업에 성공했다는 것이 센터측의 얘기다.
센터 관계자는 “전직지원 프로그램 제공을 통해 회사는 내부 고객으로서의 근로자와의 계속적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퇴직과 관련한 근로자 개인의 심리적 불안감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심리안정 후 여기서는 6단계의 교육을 실시합니다. 일에 관한 인식을 전환하고 자산을 체크, 가족, 건강, 여가, 관계 등을 탐색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한다”고 말했다.
재취업자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실패를 줄이기 위해 사후관리까지 해주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가 국내 전직지원서비스의 롤모델로 부각되면서 LG, SK 등도 벤치마킹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전직지원장려금제도 부활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부장, 재취업보다는 더 늦기 전에 생애설계부터 하지”
전문가들은 재취업 준비를 자신의 장점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로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물론 척박한 재취업 환경을 갖고 있는 현재에 그를 위해선 철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당연히 시니어 본인은 재교육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고 실행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은 어찌 보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재점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니어 취업자들이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도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이는 아직 현실적으로 시니어들의 취업 지망과 기업이 인재에게 바라는 요구사항의 격차가 큼을 우회해서 알려준다. 물론 시니어들의 눈높이 낮추기만을 강요하지 말고 기업에서 시니어들을 고용하는 일에 거부감을 갖는 풍토 또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를 위해선 시니어 재취업에 있어 정부에서 기업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 세금 감면, 인센티브 등이 보다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
중장년 대다수가 일할 의사가 있는데도 정년은 57세 수준에서 정체되어 있고 기업의 장년 채용 기피 관행이 있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중장년 재취업 대책의 실효성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보완책을 내놓아 중장년 고용률의 획기적인 변화를 유도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면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던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선택한 도시생활이었지만 50이 넘으면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아직도 어려웠다. 직장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며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이제 표고재배 등 새로운 희망을 품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 겪으면서 귀향 결심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농촌의 중농가정에서 나서 성장하는 동안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동화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요즘이야 논농사, 밭농사 모두 기계화되고 일손이 많이 가는 농사는 기피하면서 단위 노동력당 경영하는 면적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60~70년대에는 논농사만 하더라도 두엄내기, 논갈이, 써레질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하거나 일부 축력에 의존했다. 간혹 기계를 사용했지만 아주 초보적인 기계에 의존하는 정도였다.
농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퇴비장, 토끼사육장 같은 시설에서 토마토 같은 밭농사나 토끼사육 등 농사 체험을 배우고 익혔다. 이후 가까운 지역의 지명도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들의 소망에 따라 농업관련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때 체계적이고 학문화된 각 부문의 농업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등 과정을 이수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부모님은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용해 면 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농촌생활의 갖가지 어려움, 각종 편의시설의 부족, 2세 교육을 위한 교육환경의 열악함 등을 이유로 대도시의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이 보유한 농지는 두 분이 충분하게 경작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다.
80년대 말 변환기에 나와 중소기업에 몸담게 됐다. 그러면서 값싼 노동력을 찾아 회사가 중국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10여년 간의 중국생활을 했다. 한 때 거침없는 성장으로 코스닥에 상장했던 회사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영업이익이 공장손실을 메꾸지 못하는 등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공장을 통폐합하고 조직을 축소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젠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돼 사직했지만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주식에 투자했던 여유자금마저 상장 폐지되는 바람에 허공에 날리고 실업자가 됐다.
실업급여를 받는 6개월 동안 ‘취업이야 되겠지’하는 기대 속에서 인크루트를 비롯한 취업포털을 통해 수많은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취업에 실패했다. 50을 넘긴 나이가 핸디캡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작은 아이가 대학졸업을 3년이나 남겨두고 있어 하루라도 소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가정주부라는 틀을 벗어난 적이 없던 안식구가 참다못해 월 100만 원 정도 급여를 주는 직장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팔순이 넘은 어머님 농사를 도우며 작은 농가 소득이라도 올리고자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계산해 본 예상농업소득만으로는 아이 대학 교육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부업으로 직장에 다니는 동네 친구를 따라 월 130만원 정도의 보수를 받으며 출근을 시작했다. 출근해서 8시간 내내 예초기를 메고 도로 가장자리에 늘어지고 제멋대로 우거진 잡초와 작은 나무를 베는 일을 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제설작업을 하면서 고된 2년여의 시간이 지나갔다.
고용노동부 취업포털인 워크넷(worknet)에 올린 내 이력서를 보고 주유소 소장을 제의해 온 주유소가 있어 일을 시작했지만 전 소장은 퇴사하지 않고 모든 일을 알아야 한다며 계산원, 주유원 등으로 월 130만원의 보수를 주고 일만 시켰다.
회사에 불만이 많은 가운데 계속적인 취업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한 지역 중소기업으로부터 입사제의를 받고 연 3300만원의 보수로 출하관리 업무로 출근하면서 농사일을 병행해 나갔다. 농사를 지으며 모르는 부분은 경험 많은 어머님이나 친구한테 자문을 구하며 또 남들이 하는 상황을 보거나 과거에 봐왔던 기억을 살려 해나가고 있다.
논에는 벼농사를, 밭에는 고추농사는 단모작, 감자농사는 후작으로 무를, 마늘 심은 후작으로 메주콩을 심고 논둑이나 유휴지에는 검은 콩, 들깨, 호박, 가지, 상추, 고구마, 쪽파, 시금치, 오이, 참외, 토마토 등 채소나 잡곡을 심어 자급하고 있다. 요즘엔 고라니가 많아져서 콩, 옥수수 등은 수확을 못 할 정도로 피해가 많고 논에도 수확기에는 적지 않은 피해를 준다. 하지만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지인의 표고농장을 보고 온 뒤 기대를 가지고 실험적으로 시작한 농사가 표고재배다. 매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 엔진 톱을 구해 산에 있는 참나무나 밤나무를 베어 1m 전후의 길이로 토막을 내고, 표고종균을 넣을 수 있는 가는 나무는 나무보일러에 들어갈 정도의 길이로 잘라두었다가 화목으로 쓴다.
1월말에 군 산림조합에 표고종균을 신청하고 3월말 종균이 도착하면 모아 놓은 참나무에 5cm 폭에, 길이 10cm 전후의 간격으로 천공기로 구멍을 뚫고 성형종균을 넣고 물 주기 좋게 쌓아두고 15일 간격으로 물을 주고 차양 막을 설치해 주는 등의 관리를 한다.
◇바쁜 일 없는 시기 수입 짭짤한 표고농사
관리를 잘 하면 종균을 넣은 당년 가을에 표고를 수확할 수 있다고 교재에 나와있지만 내 경우에는 다음해 가을에 표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확된 생표고는 거래처가 없어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다듬어서 햇볕에 말려 저장했다가 구매자가 나타나면 시중가인 1kg에 5만 원에 팔고 있다.
표고재배는 중장비 도움 없이 하려면 통나무를 자르고 나르고 세우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중노동이지만 표고수확이나 물주기 등이 비교적 수월한 일이다. 어느 곳에서나 중국산 표고가 넘쳐나기 때문에 가격이 낮아 일이 힘든 것에 비해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온성 표고를 선택하면 3~4, 10~11월에 수확되기 때문에 일이 없을 때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부족한 지식을 메우고자 산림조합에서 출간한 ‘표고재배기술’이라는 책자로 공부하고 의심나는 부분은 찾아 읽으며 다른 고수익 버섯품종도 찾아보았다. 표고 전업농이 되기 위해서는 3만본 정도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원목을 살 수 있는 거래처를 확보하고 급수 설비 등 시설에 대한 투자를 위해서는 토지 비용 제외하고 연 5000만원 정도 자금이 필요하다.
현재 실험적으로 재배하는 표고는 한 해에 200본씩 확보하여 5년 정도 지나면 1000본정도 되고 그 중 800본 정도가 수확된다. 연차적으로 농사에 필요한 40m×8m 규모의 못자리용 비닐하우스를 보조금 제외한 420만 원에 설치하고 백미 및 현미가공이 가능한 가정용정미기를 140만 원에, 비닐 피복 및 소규모 로터리 및 두둑 만들기가 가능한 아세아 관리기를 120만 원에 구입하는 등 최소 규모의 투자도 진행 중이다.
◇직장과 농사를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 들어 남의 밑에 가서 거슬리는 말 참아가며 직장 다니지 말고 농사에 올인 하면서 편히 살라고. 그러나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직장생활과 농사를 병행할 생각이다. 또 관심 있는 금송, 장뇌삼, 블루베리, 복숭아 등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꾸면서 가능성도 따져보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낙원이라는데 직장을 정년퇴직하면 젖 짜는 산양도 두세 마리 키워서 산양유를 짜서 마시고 남으면 치즈 등 제품 개발도 해보고 싶다. 또는 벌통을 두세 통 사서 남향 따뜻한 곳에 놓고 주위의 아카시아나 밤꽃 등의 꿀도 따고 작물의 수분도 좋게 하는 일들도 좋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러 곳에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도 정리하고 내가 흙으로 돌아갈 준비도 착실하게 해 놔서 후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조상을 숭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작은 바램이다.
* 귀농 전 거주 지역: 중국 대련에서 10년 거주
* 귀농 전 직업: 생산관리
* 귀농 결심동기: 노후준비
* 귀농 선택작목: 벼, 무, 배추, 감자, 표고버섯
*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 귀농연도: 2008년
* 귀농 시 나이: 52세
*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마을
* 귀농시 영농기반: 논 4000평, 밭 1000평
* 귀농 초기자금: 없음
* 재 영농규모 : 귀농시와 동일
* 연간 수익: 논 농사 800만원, 밭 농사 450만원(감자 100만원, 무·배추 100만원, 고추 100만원, 표고버섯 150만원)합 1250만원
# 박노철(52)씨는 상반기 한국폴리텍대학교 서울 강서캠퍼스에 입학했다. 영어영문학과 박사 학위를 가지고 외국계 항공사에서 근무한 그는 IMF 이후 대학교에서 영어강사로 일했다. 교수를 꿈꾸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인생 2막을 위해 과감하게 ‘기술’을 선택했다. 요리사의 길로 새롭게 도전하는 박씨는 “힘들게 쌓은 영어 실력도 활용할 수 있도록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 전통식당을 오픈하는 것이 목표다”며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지만 이제야 새롭게 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제2의 인생을 향한 발걸음이 아주 가볍다”고 밝혔다.
은퇴에 따른 베이비부머들의 새 인생 찾기는 결코 녹록지 않다. 오랜 시간 익숙했던 직장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일을 손에 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은 직장생활과 가족부양의 역할만 하다 자신들의 노후는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은퇴를 맞이한다. 결국 준비 부족으로 재취업이나 창업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곤 한다. 이와 관련해 정부를 비롯한 각종 유관기관에서는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재취업과 창업에 임하는 마음가짐과 실전에 필요한 기술 및 지식을 중점적으로 교육시켜 제2의 인생을 원활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한국 폴리텍대학은 지난 2008년부터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교육훈련을 실시해 왔다. 최근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다양한 강의와 기업들과 연계를 통해 충실한 취업 장려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지난 4월에는 고령화 사회의 빠른 진입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요구 및 베이비부머 썰물 은퇴에 대응해 베이비부머 대상 직업훈련을 15개 캠퍼스에서 1000명을 대상으로 전면 확대 실시했다.
박종구 폴리텍대학 이사장은 “베이비부머들은 은퇴 이후 재취업에 실패할 경우 바로 취약계층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한다”며 “베이비부머가 직업훈련을 통해 재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나아가 실업난과 일손부족을 해소하겠다”고 말했다.
베이비부머 훈련과정은 만 45세 이상 60세 이하의 중장년층인 실업자, 전직예정자, 영세자영업자 등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지난해까지는 보일러, 특수용접, 전기공사, 도배 등 블루칼라 직종의 교육훈련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산업현장에서 융합·복합·첨단 등의 창조적 직업 역량이 요구됨에 따라 올해부터는 물류처리, 쇼핑몰 관리운영, 스마트전기통신설비 등의 다양한 직종으로 확대해 훈련을 추진할 계획이다. 교육과정이 대부분 기술과 관련된 내용이어서 당초 고용노동부와 사업을 논의할 때 중장년층의 적응문제를 고려해 부득이하게 나이를 60세로 제한했다.
교육훈련 기간이 3개월 이상인 훈련생에게는 최대 25만원에 달하는 교육훈련 수당도 지급된다. 교육훈련 문의는 해당 캠퍼스 교학처(팀)로 하면 상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베이비부머 대상 훈련은 2008년 당시 성남캠퍼스에서 유일하게 시작했다. 지난 2011년 3개 캠퍼스에서 11개 직종으로 확장한 데 이어 작년에는 6개 캠퍼스에서 14개 직종으로, 올해 15개 캠퍼스에서 21개 직종으로 점차 확대시켜 왔다. 또 2008년 195명에서 작년 333명으로 늘렸고 올해는 큰 폭으로 확대해 1000명을 목표로 훈련을 실시한다.
충실한 내용 덕분에 경쟁률이 높다. 상반기 경쟁률은 3대1이었으며 하반기에도 대전은 3대1, 광주는 5대1이었다. 원주와 같이 수요가 많은 곳을 위주로 하반기에 또다시 개설했다.
특히 항공캠퍼스의 경우 항공기체 제작 직종의 시니어 항공인력 양성사업을 실시했다. 모집 경쟁률은 4대1을 기록했고, 모집인원 20명 전원이 수료, 85%가 취업에 성공했다. 올해 취업 목표는 50~60%로 잡고 있다. 산업설비나 보일러 시공, 아파트나 전기실 내선공사 등 나이가 들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로서 자영업으로 창업이 가능한 쪽으로 연계가 된다.
하지만 힘들게 교육을 이수하고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예컨대 고액 연봉을 받다가 한참 못미치는 연봉으로 재취업을 했을 때 오는 괴리감에 그만두는 이들도 종종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무엇보다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단순하게 기술을 배우겠다는 생각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취업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현철 폴리텍대학교 교수는 “전문 기술훈련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데 화이트칼라에서 블루칼라로 넘어오는 분들이 대부분이다”며 “그래서 마음가짐이나 기타 인식, 기초 소양교육이 중요한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급여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분들도 일부 있다”며 “본인의 의지가 있으면 기업에 취업할 수 있도록 교수님들은 아는 업체를 총동원해서 취업을 연계시키는 등 일자리 창출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폴리텍대학 측은 이 같은 문제들의 관리를 위해 기술 외적인 교육 과정을 개선하고 나섰다. 올해 고용센터 등에서 전문강사를 초빙해 기초 소양교육과 건강교육, 생애교육 등 일부 과정을 취업 교육 커리큘럼에 편성했으며, 내년에는 관련 강좌를 늘리고자 한다.
김 교수는 “배우는 분들의 의지는 매우 높으며 단합도 잘 되고 있다”며 “최대한 이분들의 만족을 위해 도서관과 실습장, 심지어 기숙사까지 전부 개방하는 등 복지 증진에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만족도도 전반적으로 높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고용센터와 중장년일자리센터와 연계한 맞춤훈련 쪽이 미흡했다. 내년부터는 좀더 맞춤형으로 기업들과 협약을 하는 등의 개선을 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장 일을 그만둔다고 생각해 보세요. 설상가상으로 10년 이상 주부로만 살아온 저를 어디서 받아 줄까요.”
지난해 2월 시간제 근로자가 된 신미선(42)씨는 결혼 15년차에 접어든 두 아이의 엄마다. 결혼 전 그녀는 무역 오퍼레이션 회사에서 3년 동안 근무한 ‘커리어우먼’이었다. 결혼 후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뒀지만 식구가 점차 늘어나자 다시 일터를 찾아 나섰다.
우옥자(49)씨 역시 신씨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시간제 일자리를 조금 더 일찍 찾은 주부 사원이다. 그녀는 2004년 고용노동부가 단시간 근로자 제도를 도입하자 곧바로 시간제 근무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매일 4.5시간을 일하고 남은 시간을 활용해 국비지원을 받으며 컴퓨터 자격증은 물론 바리스타, 직업상담사 자격증까지 땄다.
지난 6일 기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고용노동부 콜센터를 방문해 두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시간제 근로자를 채용하기 시작한 효성ITX를 통해 고용부 콜센터 업무를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여성고용 정책인 ‘시간선택제 일자리’ 마련이 본격화된 지금, 현장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을 통해 시간제 일자리의 현황을 살펴본다.
△현재 어떤 일을 맡고 있나. 또 근무 시스템도 궁금하다.
(우옥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효성ITX에 속한 시간제 근로자로 고용부의 콜센터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주 상담 내용은 고용보험 피보험자, 실업급여 등이다. 효성ITX는 지난해부터 이곳 콜센터의 업무 위탁 계약을 맺고 경력과 신입을 구분해 채용하고 있다. 기본급은 최저임금보다 높은 편이며 근무 기간에 따라 시급금액을 차등화시켰다. 승진은 없다.”
(신미선) “모든 직원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4시간을 일하고 30분 쉬는 ‘4.5시간제’로 근무하고 있다. 근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오전팀과 오후팀으로 나뉜다. 팀 변경은 6개월마다 이뤄지며 수시로 변경도 가능하다. 다른 팀 동료와 개별적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한 합의점을 찾으면 팀장에게 변경사항을 최종 보고한다.”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신) “이곳에 입사하기 전에도 구직활동을 했다. 대부분 8시간 근무였는데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들을 돌보기에는 시간과 체력 모두 부족했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크고 나만의 시간은 가질 수 있는 반면 교육비 지출은 늘어나게 돼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하게 됐다. ‘직장맘’에게 4.5시간 근무는 적당한 것 같다.”
(우) “요즘 고용시장은 30세 미만 여성뿐 아니라 경력직을 원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직장을 구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가정과 육아에 신경 쓰느라 경력단절이 오래된 주부들이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시간제 일자리라고 본다. 나중에 노후 대비 차원에서도 좋을 것 같다.”
△풀타임과 비교할 때 시간제 일자리의 득과 실이 있을 것 같다.
(신) “풀타임보다 급여가 적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그러나 작게나마 학원비라도 보탤 수 있으면서 아이들 교육에도 더 신경 쓸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모든 것을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학교 행사나 일정에 맞춰 시간 변동도 가능하고 애가 아플 때도 챙겨줄 수 있어 좋다. 앞으로 국비지원으로 자격증도 더 따고 싶다.”
△급여가 풀타임 근로자의 절반 수준인데 가계경제에 도움이 되는가.
(우) “시간제 일자리는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생계를 책임질 정도로 돈을 벌어야 한다면 8시간 근무제를 알아보는 것이 맞다.”
(신) “용돈벌이 수준이지만 잠시 거쳐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자격증을 따거나 오랜 학업 이후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 일시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많이 봤다.”
△시간제 일자리의 경우 복지가 취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는 어떤가.
(신) “경조사 때 화환, 용품, 휴가 등의 지원이 있다. 시간제이지만 정규직에 해당되는 4대보험, 정년 등의 복지 혜택도 제공된다. 연차는 1년에 15일이며 신입은 2년간 15일이다. 또 업무상 질병이 발생했을 경우 휴직(병가)도 가능하다.”
△사실상 시간제 일자리는 시행 초기다. 현재 일하는 환경에서 개선점을 꼽는다면.
(우) “시설 지원이 된다면 업무 환경이 개선되면서 일의 능률이 오를 것 같다. 지속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10년 된 컴퓨터가 운영되는 등 시스템이 노후된 것이 많다. 이 같은 경우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개선 사항을 요구해야 하는지도 다소 불분명하다. 이에 대한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본다.”
‘고용률 70% 달성’은 박근혜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난 1년간 고용 취약계층인 경력단절 여성, 청년, 중장년층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창출, 근로시간 단축, 일·학습 병행제도 등은 정부가 한국 고용시장의 체질적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며 내놓은 정책들이다.
지표상으로는 지난해 일자리 38만6000개가 증가하는 등 ‘고용 훈풍’이 불었다고 정부는 자평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청년실업은 악화일로를 달리고 여성 고용의 질도 나빠졌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서 청년의 취업단계별 애로를 해소하고 여성이 경력단절을 겪지 않는 방향으로 청년·여성 고용률을 제고하겠다는 방침을 제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여성 고용과 청년 일자리에 올인하면서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비정규직 등 다양한 노동 현안들을 놓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엇갈린 여성고용·효과없는 청년고용 = 지난 1년간 고용은 수치상으로 호조세를 보였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고용동향’을 보면 지난해 취업자 수는 2506만6000명으로 1년 전보다 38만6000명 늘었다. 정부가 지난해 6월 27일 ‘하반기 경제전망’에서 예상한 30만명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박근혜 정부의 고용률 70% 목표 기준인 15~64세 고용률은 64.4%로 전년 대비 0.2%포인트 높아졌다.
하지만 청년 고용시장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지난해 청년층 고용률은 39.7%로 1982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 40% 밑으로 떨어졌다. 또 청년층 취업자 수는 379만3000명으로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청년층 실업률도 전년 대비 0.5%포인트 높은 8.0%를 나타냈다.
특히 올해의 경우 매출 규모가 큰 기업들도 채용예정 규모를 작년보다 소폭 줄인 데다 경기회복세가 뚜렷하지 않아 중소·중견기업의 경영 여건이 여전히 어렵다는 점에서 청년고용의 개선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주로 지난해 청년 고용책의 확대 방안만 내놓은 정책당국의 방침이 2년차로 접어든 박근혜 정부의 ‘70% 고용’ 공약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 미지수다.
경력단절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각종 대책도 아직 그 실효성엔 의문이 제기된다. 경력단절 여성을 경제활동에 참여시킬 만한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이다. 여성계 일각에선 여성 경력 단절의 가장 근본 원인인 비정규직, 저임금, 사회보험 배제 등의 해법이 미흡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8개 여성단체는 최근 ‘박근혜 정부 1년의 여성 관련 정책에 대한 평가자료’ 보고서를 통해 △출산휴가·육아휴직 보장으로 고학력 여성의 노동시장 퇴출 방지 △경력단절 여성이 노동시장에 재진입할 때 주어지는 일자리의 질 향상 △기존의 시간제 일자리에 최소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도록 개선 등에 대한 세부적 실천안의 부재를 지적하기도 했다.
시간제 일자리를 창출해 고용률을 높이겠다는 정부의 정책도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 은수미 민주당 의원이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에게 의뢰해 받은 ‘시간제 일자리 확대의 문제점’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시간제 일자리는 2003년 92만9000여개(전체 임금근로자의 6.6%)에서 2013년 188만3000여개(10.4%)로 10년간 2배 이상 늘었지만 고용의 질은 악화됐다.
실제로 지난해 여성 시간제 근로자의 임금은 남성 정규직 월 평균 임금의 21%, 시간당 임금의 46.7%에 불과했다. 2003년 정규직 월급의 24.2%, 시급의 62.8%에서 격차가 점점 벌어진 결과다. 2003년 여성 시간제 일자리 근로자가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은 비율은 14.4%였지만, 지난해에는 36.9%로 높아졌다.
전문가들은 시간제 일자리 확산을 통해 여성고용을 확대하거나 기존 일자리 쪼개기로 시간제 일자리를 만든다는 박근혜 정부의 고용정책은 전반적으로 고용의 질만 떨어뜨린 결과를 낳고 있다고 우려한다.
◇통상임금·임금피크제 등 고용난제도 여전 = 지난해부터 고용정책의 발목을 잡고 있는 통상임금, 정년연장 등의 고용난제도 여전히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대법원 판결에서 비롯된 통상임금 문제는 현재 노사정위원회의 불성립으로 표류 상태다. 법원의 판결까지 지난 1년간의 기간이 있었지만 정책당국인 고용노동부가 늑장 대응을 한 데다 철도노조 파업으로 민주노총에 이어 한국노총까지 노사정위에서 탈퇴해 협상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년 연장에 대한 정부 정책도 표류 중이다. 정부는 정년 연장 정책을 통해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현재 임금피크제 도입이 더딘 상황이다. 특히 개별기업들의 상이한 임금구조에 대한 대대적 수술 없이는 정년 연장이 진통을 거듭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고용 측면에서 정부가 추진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개발·활용, ‘일·학습 병행제도’ 또한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노력에도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학벌 등 능력 외적인 것에 의존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을 기피하고, 능력보다 학벌, 실력보다 스펙에 의존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박근혜 정부가 추구하는 고용정책의 암초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고용시장의 유연성을 더욱 높일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고용안정을 위해서는 경기 부침에 따라 직장을 잃어도 다시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최소한의 급여 그리고 재교육이 보장되는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 하지만 올해 노동부의 업무보고는 단기 대책들만 앞세워 정작 핵심인 고용 유연성 문제를 방관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