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의 황제’ 설운도(64)의 노래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노래에는 추억이 녹아 있고(사랑의 트위스트), 아픈 이별의 기억이 떠오른다.(보랏빛 엽서) 힘든 순간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다함께 차차차) 설운도가 대한민국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그 스스로도 “오랜 시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정도로 가수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까탈스럽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젊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 있다. 40년의 역사는 결코 그냥 써지지 않았다.
설운도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그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작곡 실력도 뛰어나다. 설운도의 히트곡 ‘쌈바의 여인’, ‘보랏빛 엽서’, ‘사랑이 이런 건가요’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불어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 여자 여자’는 설운도가 작곡하고 아내 이수진이 작사한 곡들이다.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노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대박 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진정한 가수, 설운도.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DNA로 가수가 됐지만, 꾸준한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2선, 3선 계속하잖아요.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우리도 똑같아요. 노력하지 않고 히트곡이 없으면 안 되죠. 그래서 지금도 한해 한해 열심히 사는 거죠.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음악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작곡도 계속하죠. 제가 트로트 가수 작곡가 중 현대적인 감각의 노래를 많이 만들잖아요. 저는 현재 어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한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죠. 저한테 곡 받으려고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와요.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도와주고 싶죠.”
가수가 될 운명
설운도에게 가수는 ‘운명’이었다. 6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유독 어머니를 빼닮았다. 얼굴, 성격, 그리고 노래 실력까지. 설운도의 어머니는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단번에 MBC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설운도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됐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이에 그녀는 자신을 닮아 노래를 잘 부르는 설운도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너라도 내 꿈을 이뤄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어요. 저에게 가수가 되는 것은 과제였고, 결과적으로 효도했죠. 문화관광부 주최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이 있어요. 1995년에 어머니께서 그걸 받으셨는데 정말 많이 우셨어요.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고 하셨죠.”
설운도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울산의 한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설운도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울산 MBC 주최 노래자랑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설운도. 놀라운 노래 실력으로 울산 대표로 뽑혀 서울 MBC에서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까지 진출했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네 개 받았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는 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어머니는 제가 꿈도 이뤄드리고, 잘되는 모습을 보시고 돌아가셨잖아요.(2016년 별세)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서울 MBC에 갔다가 금메달을 하나씩 들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제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게 늘 가슴이 아파요.”
가수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설운도는 이후 부산의 극장 쇼,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에서도 인기가 많고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굳이 서울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때 군 복무를 마친 그에게 숙자매의 매니저 안태섭 씨가 찾아왔다. 안 씨의 권유로 설운도는 1982년 KBS ‘신인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설운도는 5주 연속 우승하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고, 이듬해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 곡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됐고, 설운도의 구슬픈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뜨거운 관심 속에 설운도는 그해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극장 쇼부터 지방 업소를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졸업도 못 하고 중퇴하고 그랬죠. 특히 제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어머니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해서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엄마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흩어졌어요. ‘잃어버린 30년’이 히트치면서 다시 만났죠.”
2세로 이어진 가수 DNA
마침내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주목받은 설운도. 그러나 그의 가수 인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1984년 회사에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된 것. 설운도는 당시에 대해 “졸지에 홀로서기를 하는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더라. 10대 가수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3~4년 일본에서 엔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설운도는 1991년 ‘다함께 차차차’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받으며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급부상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다함께 차차차’는 현재도 국민 송으로 통한다. 더불어 그해 겹경사가 터졌다. 설운도는 이수진과 결혼했고, 이듬해 설운도 작곡·이수진 작사 ‘여자 여자 여자’가 탄생했다.
설운도와 이수진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였다. 이수진은 1980년대 ‘빨간 앵두’, ‘자유부인’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였다. 연예인 커플, 특히 가수와 배우 커플은 흔치 않았기 에 두 사람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진은 결혼 후 설운도의 노래를 작사했고, 현재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설운도의 무대 위 화려한 의상들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설운도의 의상들이 유독 멋스러운 이유는 아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는 파티 장소에서 만났는데, 옆자리에 앉았어요.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말을 붙였는데 고향이 부산 쪽인 양산이라는 거예요. 더욱 호감이 갔죠. 사실 제가 숫기가 없는데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앨범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명한 작곡가라며 곡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아내를 꾀었어요. 사실 아내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당시 누가 아내를 가수로 키우려고 바람 잡았던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아내와 데이트를 했는데 큰아들이 바로 생겨버린 거예요. 이 여자를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거하다가 애 낳고 결혼했어요.”
설운도는 아내 이수진에게 ‘강원도 포수’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강원도는 워낙 숲이 우거져서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우리 아내는 돈을 벌어다 주면 돈이 밖으로 안 나온다. 그만큼 알뜰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애들도 잘 컸고 내조를 잘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둘 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해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고. 설운도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승현은 1990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아들 이승민이 태어났다. 막내딸 이승아는 1996년생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째 아들 이승현은 루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포커즈, 엠파이어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솔로로 신곡을 발표했다. 딸 이승아는 가수 지망생으로 KBS 2TV ‘트롯 전국체전’에 출연한 바 있다. 설운도는 이승아의 근황에 대해 “가수는 물론 연예계 생각을 접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엄마, 아빠가 연예계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어요. 애들이 워낙 하고 싶어 하니 막지는 못하지만, 노래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제가 어디 나가서 ‘우리 아들입니다’ 소개하는 그런 것을 못 해요. 우리 딸도 오디션에 나왔는데, 제가 심사위원인데도 내 딸 나온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떨어졌잖아요. 아무리 딸이라도 실력이 안 되면 떨어져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노력하고 실력도 향상돼요.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좋죠.”
다시, 트로트 전성기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트로트 열풍이 이어지면서 설운도는 제2의 전성기를 썼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효과로 설운도의 노래 세 곡이 동시에 히트를 쳤다. 설운도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웅이와 나는 묘한 조합이다. 둘의 시너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짚었다.
먼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보랏빛 엽서’를 불러 설운도는 23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썼다. 또한 2019년 나온 설운도의 노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임영웅이 부르며 재조명됐다. 이에 설운도는 임영웅에게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작곡해 선물해줬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5000만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트로트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다.
“‘보랏빛 엽서’가 히트하면서 나도 동반 성장하게 된 거죠. 영웅이한테 고맙잖아요. 그래서 곡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영웅이한테 가게 된 거죠. 많은 국민들이 노래를 좋아해주셔서 작곡가로서 기쁘고 뿌듯해요. 요즘 사랑이 메말랐잖아요. 사랑의 전도사 같은 노래예요. 삭막한 세상에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후배 영웅이 덕을 많이 봤으니까 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걔가 속이 깊어서 고마움을 알고 항상 감사해하는 친구예요.”
설운도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히트곡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꼽은 것. 그는 “젊은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 노래다. 펑키한 리듬이라 트로트 느낌도 안 나고, 이 노래에 자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설운도는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세대에도 통하는 음악이 된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트로트가 재조명받은 이유로 신선해졌다, 맑아졌다, 수준이 높아졌다, 트로트 하는 친구들이 젊고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트로트는 부모들이나 듣고 옛날 사람이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고 우리의 노래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트로트를 좀 더 신선하고 수준 높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운도는 이처럼 젊은 세대와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앞날을 선도해가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래 유망 사업인 NFT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체 불가 토큰을 말한다.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 LP를 등록해 NFT 기부 챌린지에 참여했다.
“NFT로 기부 챌린지 말고 조만간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NFT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에요. 죽더라도 나는 그 가상공간에 살아 있게 되죠. 가상공간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우주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오던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되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 온 거죠. NFT는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해요. 나중에 가서 하면 늦죠.”
설운도는 “트로트는 나의 모든 것”이라면서 파란만장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산 밤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좌절도 맛봤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을 배로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왔고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설운도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K-트로트’다. 한국의 정서가 담긴 트로트가 전 세계에서 통하길 바라는 대부의 마음이다.
“저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고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트로트 가수로 남을 거예요. 트로트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어야죠. 힘들었던 역경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희망과 꿈,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K-트로트’라는 개념은 전 세계인이 트로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K-트로트’ 문을 누가 열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모두가 주력해야겠죠. 세계 문화를 주도해가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자는 거죠.”
한파가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다가오면서 극장에서도 감성을 건드리는 영화들이 개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음악'과 관련된 영화가 많다. 우리의 소리부터 아이돌의 세계까지 다양하게 다뤄졌다.
먼저 지난 24일 개봉한 영화 '광대: 소리꾼'은 2020년 개봉한 조정래 감독의 판소리 영화 '소리꾼'을 새롭게 편집해 내놓은 작품이다.
영화는 조선 영조 10년을 배경으로 한다. 최고의 소리꾼 학규(이봉근)는 괴한들에게 납치당한 아내 간난(이유리)을 찾기 위해 딸 청이(김하연)와 함께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광대패를 만들고 민초의 흥과 한을 소리로 담는다. 이 과정에서 '심청가'가 탄생한다.
우리나라 대표 판소리인 '심청가'의 탄생이 조정래 감독의 상상력으로 재해석 된 것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이해가 쉽고 공감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다. 아름다운 소리와 함께 북한의 수려한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또한 같은 날 개봉한 영화 '매미소리'도 우리의 소리, 다시래기를 소재로 했다. 다시래기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된 진도 지방 전통 초상 풍습이다. 출상 전날 밤 초상집 마당에서 광대들과 상여꾼들이 벌이는 민속놀이를 말한다.
'매미소리'는 2009년 '워낭소리'로 29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거둔 이충렬 감독의 13년 만의 신작이다. 이 감독은 다시래기와 부녀의 갈등과 화해를 엮어 이야기를 풀어냈다.
초상집을 찾아다니는 다시래기꾼 아버지(이양희)와 매미소리에 대한 트라우마로 자살 중독자가 된 딸(주보비)이 20년 만에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삶과 죽음,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휴먼 영화다.
그런가 하면, 지난 16일 개봉한 영화 '리프레쉬'는 가수 KCM이 주연을 맡은 그의 자전적 영화다. 한물 간 가수 'K'가 국립 마음 치유센터 환자들의 음악치료를 담당하게 되고 그들과 음악 경연 대회를 준비하면서 서로를 치유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힐링 무비로 관객들에게 웃음과 위로를 안겨준다.
아이돌 세계를 다룬 영화도 3월에 나온다. 20년 동안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한 이호성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기획됐다. 가수 이지훈, 달샤벳 출신 배우희와 함께 엘리스 소희, 소나무 출신 김나현, JBJ95의 켄타, B.A.P의 문종업 등 실제 아이돌 가수들도 총출동한다.
'아이돌레시피'는 청춘 뮤직 드라마 영화로 해체 위기에 놓인 무명 아이돌 그룹 '벨라'와 이들을 다른 회사에 팔아 넘기려는 매니저가 깊은 갈등 끝에 한 팀이 되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다. 아이돌 멤버들의 연기력이 궁금증을 자아내며 관객의 마음을 훔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된다.
세상에 책이 있고, 그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한 사람들의 인연도 사라지지 않는다. 윤성근(48)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는 책방을 꾸리는 것은 물론 절판된 책을 찾는 손님들을 돕는다. 수수료 대신 책과 사람에 얽힌 신비하고 특별한 사연을 수집하면서 말이다. 신간 ‘헌책방 기담 수집가’에는 소설보다 더 기묘한 진실들이 담겼다.
서울 은평구의 붉은 벽돌 건물.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 있다. 책장을 빼곡히 메운 헌책 때문인지 오래된 종이와 잉크가 어우러진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곳의 주인장 윤성근 씨는 원래 안정적이고 돈도 꽤 받는 대기업의 IT 부서에서 일했다. 그가 잘 다니던 직장을 불현듯 박차고 나와 헌책방을 차린 이유는 무엇일까. “어릴 때부터 책방지기가 꿈이었다. 우연히 대학로에서 김광석의 공연을 봤는데, 이러다 나도 ‘서른 즈음에’ 노래 가사처럼 하루씩 꿈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멀어지는 게 아닐까 번뜩 생각했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빨리 시작해야 망했을 때 다시 다른 걸 해볼 수 있는 여지도 있으니까.”
모두가 월드컵 열기에 휩싸였던 2002년, 종로서적의 폐업도 그가 사표를 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줄기차게 다녔던 곳이다. 정릉에 살던 시절 주머니에 돈이 조금밖에 없으면 두 시간 넘는 길을 걸어서 종로서적에 갔다. 버스를 타면 책 살 돈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층별로 도서를 분류해 운영하는 데에 마음이 이끌려 여러 층을 오가며 책을 실컷 봤다. 유년기의 추억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문을 닫다니. 망한 데 나도 일조를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갈 때마다 책을 샀던 것은 아니니까. 물론 나 하나 때문에 서점이 망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책과 사람은 연결돼 있다
개업을 위해 우선 금호동의 헌책방에서 일하며 운영 노하우를 익혔다. 그러던 어느 날, 책방에 들른 한 노신사가 일본 작가 구라다 하쿠조의 책을 찾는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제목인 데다 1963년에 출판된 책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었기에 책을 찾으면 연락하겠다며 연락처를 받아뒀다.
“반 년 정도 지나고 신기하게도 그 책이 우리 책방에 입고됐다. 그날 트럭에 실려 가게로 쏟아져 들어온 수천 권의 책들 속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이 내 눈에 보일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연락을 받은 어르신이 다시 책방에 오셨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부산에 살고 계셨다. 책값보다 교통비를 몇 배나 더 쓴 거다. 이상하게 여겨 그 책에 얽힌 사연을 물어본 게 사연 수집의 시작이었다. 2007년에 가게를 열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손님들에게 책 찾는 사연을 듣고 기록했다.”
책을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정보만 가져온다. 제목과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윤 대표는 손님에게 “해봐야죠. 수수료 대신 그 책을 왜 찾으시는지, 책과 얽힌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답한다. 흐려진 사랑의 추억, 아버지의 유품, 옛 친구와의 약속 등 하나씩 단서를 추가하며 책을 찾는 행위는 얽힌 실타래를 푸는 과정과 같다. 그렇게 ‘앙데스마 씨의 오후’(1968), ‘바보들의 나라, 켈름’(1979) 등 여러 책이 간절히 기다리는 주인을 찾아갔다.
“책을 찾는 사람들은 책에 자기만의 사연을 덧입혀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사랑, 가족, 기담, 인생 등 여러 종류의 사연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책은 사람의 삶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헌책은 더 그렇다. 누군가에게 한 번 이상 선택을 받았던 이력이 있고, 또 그런 책을 찾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의, 식, 주 그리고 책
윤 대표는 생각이 많을 때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펼쳐 본다. 그는 이 책이 ‘많이 배운 데 대해 우월의식을 가진 이가 있지만 사실 인간은 다 비슷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메시지를 준다고 말한다. 살다 보면 몰라서 어려움을 겪기보다 뭔가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혹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지식은 숨을 쉬거나 시간이 지나듯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제 내가 책이나 경험을 통해 뭔가를 알게 됐다 하더라도 어제까지의 일일 뿐이다.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라며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살아가려 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런 생각이 소위 말하는 ‘꼰대’를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어차피 과거에 해본 것으로 오늘을 완벽히 살 수 없다.”
그럼에도 아는 것을 늘리는 데 목적을 두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윤 대표는 독서를 ‘리듬을 타는 것’이라 정의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리듬에 예민할 수밖에 없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많지 않다. 독서를 통해 남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을 찾을 수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본인에게 집중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는 거다. 언제까지 남들과 같은 리듬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독서가 생활이 된다면, 나중에 교과서에서 ‘사람의 4대 필수 요소는 의, 식, 주, 책’ 이렇게 배우는 날도 오지 않을까.”
자생한방병원의 설립자 신준식 박사가 ‘자생 신준식 장학금’을 신설하고 매년 12명의 한의학 인재를 돕는다. 자생한방병원은 21일 비대면으로 열린 ‘제1회 자생 신준식 장학금 전달식’에서 학업에 정진 중인 학생을 위한 기부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신준식 박사는 이날 직접 사재를 출연해 마련한 장학금과 장학증서를 각 학교에서 추천받은 12명의 한의대생에게 전달했다.
차세대 한의학 인재 양성을 위한 ‘자생 신준식 장학금’ 사업은 향후 한의학을 이끌 우수 인재를 발굴해 글로벌 리더로 육성하고 한의학 발전에 기여하고자 시작된 사회공헌사업이다. 장학생 선정은 각 12개 한의과대학과 한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인성과 발전 가능성, 경제적 사정, 대외활동 등 엄격한 심사를 거친 뒤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아울러 장학생들이 직접 작성한 학업계획서도 심사 대상에 포함됐다. 학생들은 각자의 관심 분야와 융합시켜 한의학의 진일보를 위한 실천 의지를 나타냈다.
늦깎이 대학원생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한 학생은 장학금 덕에 생업 문제로 중단된 학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아프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한의예과에 재학 중인 학생도 이번 장학생에 포함됐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교내 차석의 성적을 거둬 성실성을 높게 평가받았다.
이번 장학 사업은 신준식 박사가 직접 사재를 출연해 진행된다. 이에 12명의 장학생은 1년 등록금을 전액 지원받아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신준식 박사는 앞으로도 매년 같은 방식을 통해 새롭게 선정된 12명의 한의대생에게 연간 약 1억2000만 원 규모의 장학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신준식 박사는 “이번 장학금 전달이 예비 한의사들이 한의학을 선도해 나갈 인재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자 희망의 등불이 되길 바란다”며 “인술까지 겸비한 의료인으로 성장해 한의학의 세계화를 이끌어 갈 인재로 커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년에 가족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만화 ‘80세 마리코’에 나오는 주인공 마리코는 작가 생활을 하고 있는 80세 할머니다. 손자 부부와 함께 살다가 돌연 가출을 시도한다. 마리코를 통해 노인의 홀로서기에 대해 이야기했던 일본의 만화가 오자와 유키(おざわゆき)에게 노년 독립의 의미를 직접 물어보았다.
‘80세 마리코’는 60~70대 할머니들의 밝고 건강한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치매 등 노년의 중요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에서 고령자는 검소하고 다소곳한 노인, 깨달음을 주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제 주변의 중년 어머니들은 모두 젊고 활동적이며 멋 내는 것을 좋아하고 먹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80세 마리코’에서는 보다 실제에 가까운 중년을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것만으로는 나아질 수 없는 사회문제나 사건 뉴스 등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작품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희망이 담긴 결론을 보여줄 것인가가 큰 도전이었습니다. 현실을 묘사하는 게 괴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누구도 깊이 파고든 적 없는 영역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습니다. 특히 저장 강박 노인의 쓰레기 저택이나 손님이 찾지 않는 쇠퇴 상점가 문제 등은 이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묘사가 상당히 힘들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꼭 넣어보고 싶은 요소였습니다. 쓰레기 저택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나라면 어떨까 생각해봐도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80세 마리코’는 마리코의 가출을 시작으로 가족과 사이가 불편해진 노인의 홀로서기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결국 마리코의 독립은 가족, 사회와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나가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마리코는 그룹의 중심에서 점점 밀려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희망’이나 ‘기대’도 깎이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100세 시대에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지금의 역할에서 은퇴해도 다른 역할로 데뷔하는 거죠. 누구든 나이를 먹어도 사회적인 역할을 계속해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법적으로 말하는 노인의 기준은 65세입니다. 65세가 되면 약자로 취급되며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곤 합니다. 마리코처럼 ‘현업을 유지하려는 노인’에 대해 사회는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할까요?
한국의 법률은 상당히 엄격한 부분이 있네요. 65세는 아직 기력도 체력도 충분한 정정한 사람들이 많을뿐더러,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노인이라고 선을 그어버리는 것은 몹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물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이에 따른 구분을 지어야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개인의 능력으로 판단하자’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65세는 고령으로서 맞이하는 성인식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이 현역에서 물러났을 때 사회가 이 사람들의 활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모두 그곳에서 희망차게 일할 수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어른이 되면 부모님과의 관계로부터 독립하는데요. 생활이나 경제의 독립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노년의 독립은 성년의 독립과 어떻게 다를까요?
일본에서는 자식을 돌보고 싶지 않거나 속박으로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부부가 아닌 개인으로서 독립적인 생활을 바라는 사람도 많습니다. 외로움과 번거로움·미안함을 저울질하고, 가족관계를 단순하고 얽매이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의지하고 싶은 것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자신의 발로 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힘내서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가능하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자존감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코는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해체되었던 가족은 재결합합니다. 이 결말은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나요?
가족과 마주 보는 일은 현실에서도 해결하기 힘든, 도망가고 싶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이 연재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결말에서는 가족과 화해하고 희망에 차 있습니다만, 해결되지 않은 어두운 문제도 여전히 떠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인정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가족은 성립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스스로의 노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바뀌었습니다. 마리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80세의 할머니’가 아니라 ‘30년 후의 나’를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마리코가 미래의 나라는 생각으로 그려나가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묘사하는 사이에 저도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마리코는 일을 지속할 동력과 삶의 즐거움과 희망을 줬습니다. 제가 제대로 된 스토리 코믹 만화를 시작한 것은 40대 후반입니다. 늦게 꽃을 피웠기 때문에 가능한 한 기운차게 활약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년 독립’을 꿈꾸는 한국의 마리코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한국에서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무척 기쁩니다. 한국에도 마리코가 있다면 ‘주변에 귀를 기울여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의 의견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요. 혼란스럽지 않을 정도로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축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힘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인정해가면서 다른 사람도 인정해봅시다.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울고 있는 자신을 나무라지 말고, 오늘을 살아낸 나를 위로하며 토닥여줍시다.
만화가 오자와 유키(おざわゆき)
1964년생 나고야 출신의 만화가다. 2012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버지의 시베리아 전쟁 포로 억류 체험을 바탕으로 그린 ‘얼음의 손바닥, 시베리아 억류기’로 늦깎이 데뷔했다. 2016년 노년 독립을 다룬 ‘80세 마리코’를 내놓으면서 다시 사회적으로 주목받았다.
화가이자 만화가인 정석호(55) 화백은 36년째 먹 냄새를 맡으며 종이에 붓을 휘두른다. 호랑이해를 맞아 펴낸 수묵 만화 ‘불멸의 호랑이’는 어미 잃은 아기 호랑이가 산중호걸로 자라나는 짧은 줄거리지만,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동하는 호랑이의 기운을 전한다.
옛 고(古)에 집 헌(軒), 고헌. 정석호 화백은 어릴 때부터 옛것에 푹 빠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흰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회장님이 난초를 치는 장면을 보았다. 어찌나 멋있어 보였던지, 그는 그 후로 남몰래 화가를 꿈꿨다. 짧은 찰나였지만 붓끝의 힘 있는 움직임이 강렬히 머리에 남았다.
고달팠던 젊은 예술가의 삶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부터 태백에서 살았다. 한약방을 4대째 이어 꾸리신 아버지는 내가 4형제 중 장남이라 가업을 물려받길 바라셨다.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반대하신 거다. 노트에 낙서를 많이 했는데 가벼운 흔적조차 싫어하셨다.” 당시 아버지의 눈을 피해 동네에서 그림을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만화방이었다. 친구들을 따라 우연히 방문했는데, 아지트 삼아 부단히 들락거렸다. 그림으로 먹고살겠다 결심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만화계로 발을 들였다. 한국화의 전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컸던지라 유명하다는 선생님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묵화, 문인화 등 다양한 한국화 공부를 20여 년간 했다.
젊은 예술가의 삶은 고달팠다. 중간중간 만화, 교과서 삽화 작업, 사극 대역이나 소품 제작 등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드라마 ‘다모’, ‘미스터 션샤인’, ‘성균관 스캔들’ 등 다수 작품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용모파기 그림이나 난을 칠 때 대역으로 많이 등장했다. “다양한 분야를 부지런히 배워둔 덕에 방송업계에서 자주 일감을 줬다. 보통 예술가들은 전문 분야 하나만 파는데 나는 그들이 원하는 산수화, 사군자, 서예 등 다양한 작품을 다 만들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순수미술만 고집하기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한국은 연륜과 경력이 있는 작가의 그림은 잘 팔리는데, 비교적 젊은 작가 것은 안 팔린다. 최소한 50세가 넘어야 인정받는 것 같다. 수묵화 경우에는 경력이 30년, 40년 되는 사람도 많으니까. 순수미술에 비로소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작년, 재작년부터다.”
정 화백은 수묵화에서 방향을 틀어 동물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워낙 동물을 좋아해 대한민국 국견협회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이 협회는 진돗개의 혈통을 지키고 보급하는 활동을 펼치는 단체다. 그는 이곳에서 진돗개 순종을 감별하는 일을 도맡았다. “감별사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돗개를 많이 그렸다. 눈을 감고도 진돗개의 특징이나 성향을 읊고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동물화를 집중적으로 그리는 사람이 없어 그 분야에서 자리 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 조금 더 강렬한 동물을 그려보고 싶어 호랑이 그림을 시도했다. 예상보다 주변 반응이 좋아 꾸준히 발전시켰다.”
수묵화를 알린 호랑이 도사
그는 올해로 20년 차 호랑이 화가다. 많은 동물 중 특히 호랑이에 꽂힌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동물에게는 찾을 수 없는 기상과 용맹성에 매료됐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좋아했고, 산신령으로도 여기지 않았나. 맹수보다 영물로서의 호랑이를 표현하려 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엔 서울대공원을 자주 찾았다. 동물들의 생김새와 활동을 보며 사진도 찍고 간단히 스케치한 후 작업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TV로 늘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고 도록을 독파했으며,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도 열심히 봤다. “호랑이 도사가 될 정도로 많이 그렸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 에이전시를 통해 후타바샤 편집국장의 눈에 띄어 2014년에 수묵 만화책 ‘백호’를 출간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수묵 기법을 알리고 싶어 만화로 장르를 넓혀봤다. 모든 컷을 손으로 한 장 한 장 그려낸 한국화로 채웠다.” 후타바샤는 인기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를 책으로 엮어낸 메이저 출판사다. ‘백호’는 지난해 모든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절판됐는데, 한국 출판사와 협업해 호랑이해를 맞아 다시 ‘불멸의 호랑이’로 새롭게 선보였다.
영웅은 일시적으로는 숨어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세상에 드러난다. ‘맹호복초’(猛虎伏草, 용맹스러운 범은 풀밭에 엎드려 있다)가 주제다. 시베리아 불곰에게 공격당해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은 어린 백호는 오랜 시간 홀로 시련을 극복하며 대자연에서 맹호로 성장한다. 그 후 원수였던 불곰을 물리치고 결국 산의 주인공이 된다는 게 전체적인 줄거리다.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어떠한 역경에도 당당히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는 말도 있듯이, 이 책에 담긴 그림과 메시지를 보며 독자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길 바란다.”
책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은 백호가 원수 불곰과 당당히 싸워 물리치는 부분이다. 모든 장면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다 보니 수정에 한계가 있어 그렸다 버리기를 반복했다. “전자 기기로는 느낌이 절대 안 살아난다. 수묵이 주는 중후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색을 가능한 한 적게 사용하되 묵의 농도로 질감을 표현했다. 부드러운 붓의 선과 역동적인 터치감에서 오는 매력이 있다. 특히 백호는 줄무늬가 도드라지는 짐승이라 수묵으로 그리는 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3~4시간 걸린 장면도 있고, 15일 이상 그린 그림도 있다.”
끝없는 붓질, 보장된 우연
온 마음을 쏟아내 작품을 완성하지만, 정 화백에게 그림은 항상 어려운 분야다. “쉬운 건 없다. 만화와 순수미술 둘 다 어렵다. 만화는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 보는 사람에게 재미와 감동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순수미술도 마찬가지다. 한 폭에 모든 걸 담아야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다.”
그는 오후 2시 30분에서 3시쯤 일어나 식사를 한 뒤 작업실로 나온다. 한마디로 저녁형 인간이다. 한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는 것 외에 나머지 시간에는 온전히 그림을 그린다. 작업이 길어지면 동이 틀 때까지 몰두하기도 한다. 낮에는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이라 집중력이 분산되고, 방해받는 게 싫어서 새벽에 작업하게 됐다. 노력과 연륜이 쌓여 한 점당 20만~30만 원에 팔리던 그림 가격도 몇 배로 뛰었다. “이제는 3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잘 안 판다. 제일 비싸게 팔린 그림은 1500만 원쯤 했다.”
수묵화의 경우 보통 한 달에 5~6점, 호랑이는 1~2점 정도를 그린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쉼 없이 그리는 게 아니라 구도를 잡아둔 뒤 벽에 붙여놓고 보고 또 본다. 어디가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중심이 제대로 잡혔는지 오랜 시간 살핀다. 그 후 호랑이를 조금씩 그리며 계속 진행 상태를 체크한다. 배경도 어떤 계절이 좋을지, 바위나 나무는 얼마나 그릴지 생각하는 데 며칠이 또 지난다. 완성까지 1년이 꼬박 걸리는 작품도 있다. “사람들이 보통 벽에 잠깐 걸었다 버리려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나. 10년, 20년 동안 걸려 있을 거라 생각하면 대충 그릴 수가 없다.”
정 화백은 호랑이 눈에 가장 공을 들인다. “표정이 편안하지 않으면 새로 그린다. 무섭지 않게, 최대한 차분하고 선한 모습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눈이 제대로 그려지면 90% 이상 완성한 거나 다름없다. 예전에 그린 그림들은 마음에 안 들 때가 많다. 결과물에 완벽히 만족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에게 선물로 주는 그림의 주인으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궁에는 그가 그린 ‘참매’, 인도네시아 대통령궁에는 ‘백호 부부’, 아랍에미리트 대통령궁에는 ‘설악 참매’가 있다. “처음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청와대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 매가 많으니 매 그림을 선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나 보더라. 그것이 계기가 돼 인도네시아와 아랍에미리트 정상 방문 때도 내가 그린 매와 호랑이 그림을 증정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도 아랍에미리트 첫 방문 선물로 내 그림을 채택했다. 이후에도 요청이 들어왔지만, 4점이 채택됐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우연 혹은 운이었다고 말한다. “특별히 내가 잘나서 그렇다기보다 당시 운 좋게 매 그림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우연히 비서관의 눈에 띄어 대통령 마음에도 들었다고 생각한다. 참 신기하고 쑥스럽다. 대통령이 선물로 주는 그림으로 채택된 게 생각보다 홍보에 도움이 많이 됐다. 이제는 내 그림을 하나만이라도 가지는 게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생겼다. 예술가로서 정말 뿌듯하다.”
한국 호랑이의 진정한 의미
35년의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 그 잔재가 그대로 남아 호랑이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직도 호랑이가 무섭게 포효하고 이빨을 드러내는 듯한 공격적인 이미지로 많이 왜곡돼 있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강한 기질의 호랑이를 그린 병풍을 방 뒤에 많이 놓았다. 특히 대나무 숲에 호랑이가 있는 그림이 대다수였는데, 그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같다. 벵갈 호랑이야 인도 쪽 기후의 영향을 받아 갈대나 대나무 숲에서 서식하지만, 사실 우리나라 호랑이는 대나무 숲을 싫어한다. 대나무 이파리에 몸이 쓸리면 소리가 나 먹이 사냥에 방해를 받는 탓이다. 민화를 살펴보면 보통 소나무와 함께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정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호랑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옛날 호랑이 그림을 살펴보면 주로 산신령이나 동자 등과 함께 편안한 모습으로 있다. 산에서 우리 민족을 내려다보며 든든하게 지켜주는 영물의 의미였던 거다. 김홍도 선생의 맹호도 정도만 살짝 거칠고 나머지 그림들은 대부분 재밌고 친근한 이미지다. 문헌 자료와 조선시대 그림을 많이 찾아봤는데, 조선시대 호랑이는 대표적으로 ‘까치 호랑이’로 설명할 수 있다. 편안한 인상의 까치 호랑이를 보고 이제는 해학적인 요소를 많이 담으려 노력한다. 눈도 좀 크게 그리고, 인상도 순하게.”
요즘은 담비나 족제비를 등장시켜 그림에 스토리를 가미해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호랑이 한 마리만 그리기보다 숲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작은 동물들도 함께 넣어서 마치 대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한다. 고 김기창 선생의 바보 산수도 많이 참고한다. 우리 민화를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나.”
국내에 프로스포츠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여러 가지 전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런 영웅담 중에서도 최고의 전설을 꼽자면 아마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두껍게 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흑색과 적색의 유니폼을 입은 그들이 나타나면 상대 팀 선수들은 기가 죽고, 상대 팀 팬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상대의 전의마저 상실케 했던 해태 타이거즈 군단의 맨 앞에는 1번 타자 이순철(60)이 있었다.
“당시엔 사실 잘 몰랐어요. 해태 타이거즈에게 상대 팀들이 그렇게 기가 죽었는지를요. 그 공포의 유니폼은 우리에게는 그냥 촌스럽고 덥기만 한 존재였는데.(웃음) 현역 때는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됐죠. 술자리 같은 사석에서 다른 팀 출신 동료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유니폼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말이죠.”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 공식은 아주 단순했다. 타자들이 상대 팀보다 앞서 점수를 내면, 투수들이 막아 승리를 지킨다. 1번 타자 이순철이 시작하면 마무리투수 선동열이 지키는 공식이다.
홈런이 귀했던 시대에 1번 타자가 10개 이상 홈런을 치고 50개 이상 도루를 밥 먹듯 하니, 상대 팀 입장에선 맞설 수도, 내보낼 수도 없는 골치 아픈 타자, 그가 이순철이었다.
“상대는 경기를 시작하면 무조건 선취점을 내려고 했죠. 선동열이 못 나오도록 해야 하니까. 그렇게 무리하다 보면 게임은 꼬이게 되죠.”
함께 흘렸던 목포의 눈물
1980년대 호남 사람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억눌린 울분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들이 겪었던 상처는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승수를 쌓아갈 때마다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래서 팬들은 관중석에 앉아 ‘목포의 눈물’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런 감정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이순철 위원은 이야기한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선수들도 대부분 호남 출신이었죠. 팀 내에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말은 아끼는 편이었지만, 그 응어리나 한이 없을 수 없죠.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경기 일정부터 달랐어요. 해태 타이거즈는 한동안 5월 18일이 다가오면 전후 일주일 정도는 원정경기만 잡혔어요. 기념일에 광주 구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하지만 원정을 가도 전라도 분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계속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셨죠.”
1980년대에만 해태 타이거즈는 5번의 시리즈 우승을 이뤘다. 전체 우승컵의 절반을 가져온 셈이다. 대체 어떤 부분이 해태 타이거즈를 그렇게 강하게 만든 것일까? 이순철 위원은 그 비결로 3가지를 꼽았다. 강한 위계질서와 헝그리 정신 그리고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다.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았고, 이 선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위계질서가 있었죠. 선배들이 짓누르니까 후배들은 압박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추억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 프로야구 구단 중에서 OB(구단 출신 은퇴선수) 모임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 해태 타이거즈일 거예요. 그만큼 서로 사이가 좋아요. 또 구단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릴 수밖에 없었어요. 보너스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말이죠.(웃음)”
사실 강한 위계질서는 후에 그가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거즈의 상징과도 같았던 김응용 감독에 대한 항명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후 비슷한 사건을 겪는다. 43세 젊은 감독으로 LG 트윈스에 부임하자마자 팀의 고참 선수였던 이상훈과 갈등을 빚었고, 에이스인 그를 당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를 보내게 된 사건이다. 한 번은 선수 입장에서, 한 번은 감독 입장에서 항명 사건과 맞닥뜨린 셈이다. 이 위원은 “철이 없었다”고 정리했다.
“철없던 짓이죠. 김응용 감독과의 갈등은 제가 철이 없었어요. 또 이상훈 선수와의 갈등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선배로서 더 아우를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죠. 이상훈 선수하고는 나중에 한잔하면서 갈등을 풀었어요. 직접 소통했어야 하는데, 가운데 누군가를 거쳐 말이 전해지다 보니 생긴 오해였더라고요. 김 감독님하고도 마찬가지예요. 얼마 전 감독님 팔순 잔치도 제가 주도해서 준비했을 만큼 지금은 모두와 잘 지내고 있어요.”
숙명의 라이벌과 한 팀으로
사실 이순철 위원이 처음 시작한 운동은 야구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 들어가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다른 인생이 펼쳐졌다.
“축구부 다음으로 육상부에 들어갔죠. 그러다 핸드볼을 잠깐 하고 나서 야구로 전향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부모님의 응원은 받지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시절은 아니었으니까요. 공부하기를 원하셨지만, 먹고살기 바쁘니까 적극적으로 막진 않으셨죠. 저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좋았으니까 계속 열심히 했고요. 운동부에서도 쉽진 않았어요. 당시 운동부는 지금 기준으론 범죄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체벌이 심했으니까요. 운동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체벌 흔적을 들키지 않으려고 감추기도 하고, 상처 때문에 엎드려 자야 하는 날도 많았어요. 자식이 학교에서 맞고 다닌다면 누가 운동을 시키려 하겠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진가는 빛났다. 광주상고의 에이스로 발전해 광주일고 선동열과 맞서는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관계는 대학 때까지 이어져 연세대학교 81학번으로 같은 학번의 고려대학교 선동열과 계속 맞서야 했다.
대학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을 때 세간의 관심은 1985년 신인왕을 어느 팀이 배출하느냐가 아니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누가 가져가느냐였다. 결국 신인왕은 0.304의 타율과 12홈런, 31도루를 기록한 이순철의 것이었다. 이 기록은 지난 시즌 기아 타이거즈에 입단한 이의리 선수가 신인상을 받을 때까지 36년간 이어졌다.
10시간의 비행이 만든 프러포즈
1989년 어느 날, 이미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은 이순철은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12시간이 넘는 비행이었지만 생경했던 기내식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허락할까?’
야구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스위스로 향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연인 이미경 씨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위원은 부인 이미경 씨를 연세대학교 학창 시절 처음 만났다. 그가 대학 시절 이미경 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골인한 것은 야구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아내 키가 170cm가 넘어요. 제가 좀 작은 편이라 키 큰 여자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미인인 아내를 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만나서 계속 구애를 했죠. 그리고 연애를 10년이나 했어요. 아내가 승마 선수로 스위스에 유학을 가 있을 때 프러포즈를 했어요. 그전까지는 전화카드를 잔뜩 쌓아놓고 공중전화로 장거리 연애를 했죠. 그러다 저도 혼기가 돼서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더라고요.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라서 어떤 말을 할지, 과연 승낙을 해줄지 이런저런 생각에 긴장이 돼서 기내식도 제대로 소화가 안 될 정도였어요. 걱정과 달리 순순히 허락을 해줘서 기뻤죠. 그리고 다음 해 바로 결혼했어요. 저 때문에 승마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아직도 가끔 불평을 해요.”
‘모두까기’의 야구 사랑
야구 골수팬들에게 이순철이란 이름 석 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엄청난 기록의 선수였지만 말년의 기복 있던 모습이나 감독으로서는 좋지 않았던 성적, 방송이라도 입바른 소리는 뱉고 말아야 하는 성격 탓에 ‘모두까기’란 별명까지 얻은 해설위원으로서의 모습. 그러나 불만을 가진 팬들도 인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야구에 대한 그의 사랑이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나서, 그는 단 1년도 야구계를 떠나본 적이 없다. 프로팀 코치나 감독 혹은 대표팀의 코치를 맡기도 했고,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이런 모습을 팬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다.
“제 인생에는 야구밖에 없어요. 인생의 다른 기술이 없어요. 다른 것을 할 용기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까 야구에 몰두하는 것뿐이죠. 어릴 때부터 야구에 매달려 살았고, 야구를 하는 것이 가장 즐거워요. 편하고요. 그래서 인생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야구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는 인터뷰를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어색해하다가 소품으로 준비한 배트를 손에 쥐자 표정이 달라졌다. 타격 자세를 취하고는 “이제야 좀 편해진다”며 웃었다.
이제 그에게는 선수 혹은 감독이라는 호칭보다 해설위원이라는 직함이 더 편안하게 들릴 정도가 됐다. 2007년 MBC를 시작으로 활동을 해오다 지금은 SBS 스포츠에서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실 선수 출신 해설위원은 대표적인 ‘파리목숨’으로 불리는 자리다. 방송사에서는 매년 스타 출신의 선수가 은퇴하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 위해 해설위원으로 스카우트하지만, 시청자들 반응이 좋지 않거나 약간의 구설이 발생하면 바로 계약을 해지한다. 실제로 우리가 알 만한 레전드들이 2~3년을 채우지 못하고 방송을 떠난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방송국을 옮겨가며 장수하고 있는 이순철 해설위원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스타 해설가’인 셈이다.
“어릴 때부터 종이신문을 읽는 습관을 들였어요. 특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신문 사설을 많이 읽었죠. 당시 신문들마다 한자 사용이 많았던 탓에 웬만한 한자는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니까요. 프로선수가 되고 나서도 이 습관은 바꾸지 않았어요. 팀 매니저들에게 중앙 일간지는 꼭 로커 룸에 넣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니까요. 덕분에 해설위원이 되고 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지식도 많이 쌓고요.”
그가 해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MBC의 제안이 있기 훨씬 전부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야구 해설의 전설 하일성 선배에게 사석에서 해설에 대한 이야기를 묻기도 했다고. 그래서 첫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 없이 “하겠다”고 답할 수 있었다. 물론 해설은 평생 운동만 한 선수 출신에게는 쉬운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이 위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죠. 제가 처음 해설을 시작할 때는 일본 용어가 많이 사용됐어요. 시합, 계투, 데드볼 같은 용어들이요. 일본도 미국에서 야구를 받아들이면서 본인들 쓰기 편하게 바꾼 것이 많아요.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된 스포츠니까 외래어를 쓰려면 미국식 용어를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하나씩 고쳐나갔죠. 많이 변화시킨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요.”
이 위원의 중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단짝 정우영 캐스터를 빼놓을 수 없다.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함께 중계하다 SBS 스포츠에서 재회한 특별한 케이스. 이 위원은 “정우영이라는 좋은 캐스터 덕분에 해설위원이 빛나는 것 같다”며, “까칠한 성격도 이해하며 잘 받아주고, 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해 좋은 방송을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순철의 것이 아닌 이성곤의 야구
그가 야구에 대한 사랑을 쉽게 놓을 수 없게 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아들 이성곤 선수다. 이제는 프로 9년 차의 베테랑 선수가 된 이성곤은 지난해 삼성 라이온즈에서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됐고, 현재는 주전 자리를 꿰차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위원과 이성곤 선수는 야구계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이성곤이 1군 첫 홈런을 기록했을 때는 ‘비번’의 여유를 즐기다 방송국으로 호출당해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생방송에 출연해야 했다. 당시 선수 이성곤에게 늘 엄격한 해설을 날리던 이 위원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야구팬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됐다.
그는 아들 이성곤 선수가 “야구 실력에 비해 방송 출연이 잦다”며 투덜거리지만 동반 출연도 꽤 즐기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이순철 해설위원의 개인 유튜브 채널 ‘순Fe’(순페이)에 이성곤이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우리는 야구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는 부자 사이는 아니에요. 본인이 물어보면 그때 대답해주는 정도죠.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가 야구에 관해 깊숙하게 관여했으면 그것은 이순철의 야구지 나의 야구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만큼 야구를 사랑하고 진지하게 대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바라보다 정 답답할 때만 문자 정도 주고받아요. 아직 대전에 마련한 집도 못 가봤는데, 올 시즌 대전에 내려가게 되면 어떻게 사는지 들러보려고요.(웃음)”
증여는 가족 간 경제적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러나 잘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증여한다면 추후 증여세 면제 한도를 넘어 ‘세금 폭탄’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생활과 관련해 증여가 이루어지는 경우, 과세 대상과 비과세 대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증여는 한쪽 당사자(증여자)가 대가 없이 자신의 재산을 상대방(수증자)에게 수여하는 계약이다. 한편 수증자는 증여받은 금액에 대하여 증여세를 낼 의무가 있다. 부모 자식 간 증여는 어떨까? 세법은 자녀가 성인일 경우 5000만 원, 미성년자일 경우 2000만 원의 공제(10년간 합산)가 적용된다. 따라서 10년마다 자녀에게 위 증여재산공제액의 한도 내에서 증여할 경우 증여세가 과세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증여에 해당한다고 판단될 경우가 쌓여 10년간 누적 금액 5000만 원이 넘어가면 넘은 금액부터 과세표준에 따라 세율을 적용한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의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대주거나, 결혼 비용을 지원하는 등 생활과 관련된 경우도 과세 대상일까? 우선, 민법상 부양의무가 있는 자녀에게 교육비 또는 생활비로 이체하는 금액은 비과세 대상이다. 직계혈족 사이에는 함께 살고 있지 않더라도 부양의무가 인정된다. 해외에서 공부하며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아들 가족에게 부모가 보내준 돈이 생활비로 인정돼 증여세가 비과세된 경우도 있다.
대신 세무조사에서 비과세로 인정받으려면 이 금액이 실제로 생활이나 교육 목적에 맞게 사용돼야 한다. 생활비나 교육비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도록 각종 영수증 등 증비서류를 챙겨놓는 것도 방법이다. 만약 생활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받은 돈을 모아 예금·주식·부동산 등 재산 취득에 사용하면 증여세가 부과될 수 있다. 생활비로 받은 돈 중 사용하고 남은 금액으로 투자해도 마찬가지다.
또한 자녀의 직업, 재산 등을 보아 본인이 직접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증여세 과세 대상에 해당하므로 유의해야 한다. 경제력이 없는 스무 살 자녀는 학자금을 지원해도 세 부담이 없지만, 이미 직장에 다니고 있는, 경제력이 있는 서른 살 자녀는 학자금을 받을 경우 증여세 납부 대상이 된다. 조부모가 손자에게 대학 입학 축하금을 지급하거나 생활비를 보내주는 경우에는 구체적인 상황을 따져봐야 한다. 증여에서 제외되는지 여부는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달렸는데, 아버지가 소득 수준이 낮아 부양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보낸 생활비에 증여세가 과세되지 않는다. 반대로 아버지가 소득 수준이 높은 상황임에도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돈을 보냈다면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다.
결혼하는 성인 자녀의 혼수나 결혼 비용을 지원할 때는 증여세가 과세되지 않으나, 고가의 차량이나 귀금속 등을 제공하면 증여세가 과세될 수 있다. 신혼집 마련을 이유로 전세자금을 지원하거나 주택을 사주는 것도 마찬가지로 과세 대상이다. 결혼식에서 받은 축의금의 경우 누구의 명의로 들어온 돈인지가 중요하다. 부모 앞으로 들어온 축의금을 자녀가 사용한다면 증여가 되므로 증여세를 내야 한다. 결혼 당사자인 자녀의 손님이 낸 금액으로 명확히 판단되지 않는 축의금은 혼주인 부모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본인 앞으로 들어온 돈은 본인이 직접 쓰는 것이 가장 깔끔하다.
상속증여 전문가 박병곤 회계사는 SBS Biz ‘경제현장 오늘ʼ에서 “가족 간 금융 거래를 할 경우 그 성격을 분명하게 정의 내려서, 증여받은 것이면 증여세 신고 납부 및 상속세 신고 시 반영해야 한다”며 “생활비나 경조사비 등의 자금 거래에서 사회 통념을 벗어나는 과도한 수준의 경우는 증여로 판단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평상시 이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과거에 알지 못했던 다양한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와인이 각광받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홈술과 혼술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데, 주류 중에서도 특히 와인 소비가 괄목할 정도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와인 수입액이 전년 대비 27% 가까이 증가했다. 그 결과 와인은 20%가량 수입이 줄어든 맥주로부터 수입 주류 1위 자리를 넘겨받았다. 올해 와인의 수입 증가폭은 작년보다 훨씬 더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와인의 인기를 코로나19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규모가 큰 와인 수입사들이 저렴한 와인을 마트나 편의점을 통해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와인 대중화에 기여했고, 와인의 매력인 감각적인 즐거움과 다양성, 그리고 웰빙에 대한 관심이 근본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와인을 글라스에 따르자 화려한 꽃향기가 피어났다. 난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 시즈쿠처럼 어느 순간 장미꽃이 만발한 꽃밭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입안에 넣자 싱싱한 산딸기를 비롯한 과일 맛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어 달콤하고 부드럽게 입안을 조여주는 타닌(떫은맛)과 정교하게 짠 교토(京都)의 직물처럼 복잡하고 우아하며 섬세한 맛에 혀가 매료됐다. 그리고 어질어질할 정도로 오래 이어지는 여운까지…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일본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작가 아기 다다시가 1985년 빈티지의 DRC 에세조(Echezeaux) 와인을 마시고 느낀 바를 ‘와인의 기쁨’이라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와인을 마실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해 이보다 멋지게 표현한 것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우리는 보통 ‘맛있다’는 짧은 찬사로 와인의 맛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지 않는가.
독일의 게슈탈트 심리학자 칼 둔커(Karl Duncker)는 와인과 연관해서 아주 흥미로운 분석을 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어떤 객체(object)인가 아니면 그 객체가 주는 즐거움(pleasure)인가?’라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무엇이고, 즐거움이 객체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긴다’ 혹은 ‘무엇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객체의 세 가지 단계(level) 중 하나를 적시하는 것이라며, 와인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와인, 와인을 마시는 것(Drinking of the wine),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Sensory experience in drinking wine)이 와인이라는 객체의 세 가지 단계다. 와인은 객체 그 자체이고, 와인을 마시는 것은 객체와의 커뮤니케이션이며,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은 객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얻는 경험이다. 와인과 와인을 마시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fact)인 반면,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이다. 와인과 와인을 마시는 것은 즐거움의 수단 혹은 원천이고,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이 즐거움이다.”
심리학자 둔커의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는 와인을 ‘감각적 경험이라는 즐거움의 수단 혹은 원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와인이 감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알코올 음료라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와인 애호가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와인 애호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와인이 맛있다’라는 표현보다 훨씬 근사하고 유식해 보인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감각적 즐거움에 국한되는가?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와인을 마셔서 행복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행복한 경험에는 와인의 감각적 즐거움(sensory pleasure) 이외에 감정적인 즐거움(emotional pleasure)과 사회적인 즐거움(social pleasure)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즐거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와인에 대한 지식 때문에 와인을 마시는 것이 더욱 즐거워질 때 혹은 그러한 지식을 갖춘 사람의 설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실 때 우리는 지적인 즐거움(intellectual pleasure)도 가질 수 있다. 종교의식에서 와인을 사용할 때 와인 애호가는 정신적인 즐거움(spiritual pleasure)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티에리 타옹(Thierry Tahon)은 ‘와인의 철학’에서 와인을 분석하는 즐거움과 분석한 것을 말하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대담한, 영감에 찬 코멘트들이 쏟아지면서 아주 재미난 순간이 되기도 한다”고 경험을 들려준다. 즐거움의 종류 중에서 인지의 즐거움(cognitive pleasure)으로 분류할 수 있는 분석하는 즐거움은 사실 와인 경험이 적은 초보자에게는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와인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뽐내고 과시하는 수단으로 와인을 전락시키는 누군가 때문에 참기 힘든 괴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경험은 주관적이라는 사실과, 와인에 대해 느낀 것을 말할 때 와인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반드시 구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러한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알드 달(Roald Dahl)이 쓴 책 ‘맛’에서 소개하는 와인에 대한 분석은 주관적이고, 와인 전문가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흥미롭다.
“조신한 포도주로군. 약간 수줍어하고 망설이는 듯하지만 어쨌든 아주 조신해.” “명랑한 포도주로군. 자비롭고 명랑해. 약간 외설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명랑해.” “아주 재미있고 귀여운 포도주로군. 상냥하고 우아하고, 뒷맛은 거의 여성적이네.”
이와 같이 우리는 와인을 마시면서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럴수록 와인과 더불어 사는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해진다. 또 어떠한 즐거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와인의 냄새로 인해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어느 냄새를 맡는 순간 과거의 일이 갑자기 떠오르는 경험을 한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에는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작가의 이름을 딴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용어가 유래한다.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와인을 마실 때 코를 아주 활동적으로 만들고, 후각적인 경험을 즐긴다. 그래서 프루스트 현상은 어쩌면 와인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와인 전문가들이 냄새를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으로 자주 언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와인 전문가 마이클 슈스터(Michael Schuster)는 ‘Essential Winetasting’이라는 책에서 “후각은 미각이 주는 육체적인 만족감에 대한 지적인 전주곡으로서 사람, 장소, 상황과 감정 등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와인 전문가 제이미 구드(Jamie Goode)는 ‘와인 테이스팅의 과학’에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냄새의 힘”에 대해 말한다.
위대한 와인 애호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1905년에 발표한 수필 ‘와인연구’(Weinstudien)에서 “와인은 내게 컬러가 아니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유아 시절로 돌려보내는 와인도 있고, 학창 시절이나 여행, 사랑의 경험, 우정 등을 회상시키는 와인도 있다”고 강조했다. 1919년에 출판된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서는 와인을 ‘갖가지 추억을 여는 열쇠’라고 정의했다. ‘프루스트 현상’보다는 ‘헤세 현상’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헤세는 자신의 문학 작품에서 와인 한잔 마시며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
나는 와인을 마실 때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는 경험을 자주 한다. 숙성되어 페트롤 향을 물씬 풍기는 리슬링 와인을 마실 때, 오토바이를 탄 아버지 등에 매달려 논과 밭을 지나고 야산을 넘어 할아버지 산소에 가던 한식과 추석의 날들이 생각난다. 리치 향이 특징인 게뷔르츠트라미너 와인을 마실 때면, 가족과 함께 살던 독일 도시 부퍼탈에서 암스테르담에 당일치기로 놀러 가던 날 네덜란드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리치로 만든 디저트를 먹고 좋아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프랑스 와인 산지 루시옹에서 그르나슈 그리로 만든 짠맛이 아주 강한 화이트 와인을 마셨을 때, 칠레의 와인 산지 레이다 밸리에서 스테파노 간돌리니(Stefano Gandolini)라는 와인메이커가 만든 짠맛의 소비뇽 블랑을 마셨을 때, 나는 부모님과 처음으로 해수욕장에 갔던 1970년대의 어느 날을 그리워했다.
와인에 대한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와인을 마시는 순간이 기다려진다. 티에리 타옹은 와인을 마시기 전에 ‘상상하는 즐거움’, ‘욕망하는 즐거움’을 가져보라고 권유한다. 이러한 즐거움도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 저녁 가족과 함께 먹을 음식에 잘 어울릴 만한 와인을 마트에서 장바구니에 담으며 저녁 식사 시간을 기대하는 마음과, 와인 잔에 따른 와인을 바라보며 이 와인은 어떤 향과 맛을 선사할지 궁금해하는 짧은 순간을 상상해보라. 시인 황지우는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통해 기다림의 숨겨진 의미, 즉 능동적인 기다림에 대해 알려주고, 티에리 타옹은 와인을 마시기 전의 능동적인 기다림, 즉 와인을 마시는 다가올 시간을 상상하는 즐거움과 욕망하는 즐거움을 느껴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향과 맛에 의한 감각적 즐거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와인 애호가로서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보자.
왕궁리 유적지로 들어가면서 ‘여유롭다’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유적지든 공원이든 시설물로 가득가득 채워지고 볼거리가 많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복잡한 풍경이 늘 아쉬웠던 터다. 널찍한 익산의 왕궁리 옛터엔 휑한 여백의 미가 팍팍, 신선한 바람 맞으며 헐렁한 여유감으로 벅차기까지 하다. 물씬한 황량함이 어쩐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그 넓은 터에 혼자 온 듯한 여행자 두 사람만이 각자 이쪽저쪽에서 뚝 떨어져 호젓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유난스러운 유적지의 시스템이 있을 법한데 여긴 그렇지도 않다. 딱히 꾸며진 모습 없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널널한 풍경이 된 역사 속을 걷는다. 관람 동선 안내문이 있지만 이 넓은 공간을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오가면 된다. 입구에서 호위하듯 고목이 숲을 이룬 길을 산책하듯 홀린 듯 걸으며 유적지를 돌아보는 맛,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멀리서도 홀로 오롯한 왕궁리 오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포토존 프레임 안으로 바라보는 석탑 또한 기품 있다. 오랜 세월 너른 터에 우뚝 서서 품격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왕궁터를 돌아보건대 세련되고 웅장했을 백제 옛터다. 끊임없는 보존 노력으로 이제는 풍경이 된 역사 속에 서본다.
주변으로 몇 개의 건물터, 금당터가 자리를 지키고, 왕궁 둘레를 감아 도는 길에 단을 높인 대형 배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왕이 휴식하던 후원과 공방, 화장실까지 옛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는 설명서를 읽으니 그 시절 장인들의 디테일한 기술이 놀랍다. 이런 길을 따라 궁궐과 정원의 멋을 누렸을 백제 시대의 영화를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고 상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주, 부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로 당당히 자리 잡은 후에도 여전히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천년 넘는 역사 속의 백제 문화유산은 무궁무진할 터.
왕궁리 유적 옛터에 내리는 노을을 보러 저녁 시간에 다시 와볼 생각이었는데 딴전 피우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일몰이든 일출이든 천년이 훨씬 넘는 왕궁터가 배경이 되어준다면 그 풍경은 더 말할 게 없을 듯하다. 푸른 하늘과 늦가을 왕궁리의 조화가 이렇게나 멋진데, 날씨 따라 변화하는 백제 옛터 왕궁리의 사계는 또 어떨까.
미륵사지 석탑이 품은 이야기
왕궁리 유적지에서 미륵사지 석탑까지는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정문에 들기 전에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쇼’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게 뭐지’ 하면서 보고 있는데 이 지역 주민인 듯한 분이 지나다가 얼마 전에 진행된 행사라면서 참 볼 만한 쇼였다고 말해준다. 미륵사지 석탑 동·서쪽에 프로젝션 매핑 및 드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빛과 형상을 표현하고 음악을 활용한 종합 미디어 쇼로 구현된 행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의 가치 확산과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 들면서부터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이렇게 너른 대지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이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륵사지 석탑, 백제 시대 최대 사찰이던 미륵사지는 국보 제11호다.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붕괴된 모습이다. 그동안 꾸준히 보강하고 섬세한 복원 작업을 해온 결과, 지금은 미완의 6층 석탑으로 우뚝 서 있다. 복원 작업 중 해체 수리하면서 내부에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현재 내부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의 기술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옛 석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들어가 보았더니 시원하다. 그 서늘함이 그 옛날의 기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길 양옆의 연못이 차분하다. 연못 속으로 비치는 석탑의 반영이 오랜 세월 속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길 지나 미륵사지 앞마당에는 동·서 방향으로 당간지주 두 기가 서 있다. 다가가 보니 생각보다 매우 크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놓는 돌기둥이다.
미륵사지 주변으로는 큼직한 돌이나 파편들이 몇 군데 자리 잡고 있는데 석탑의 노반 덮기 돌이라고 한다. 동원 금당터가 있고 몇 군데 터마다 목탑이나 석탑이 있었지만 화재로 사라지기도 하고 지금은 이렇게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젊은 커플이 내 사진 속에 몇 번씩 담긴 걸 보았다. 널찍널찍한 터에 스며 있는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살피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 예쁘구나 했다. 한적한 미륵사지 터를 돌며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그저 그림이다. 백제 유적지의 풍경 속에서 그들만의 하루는 참 멋진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가족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이렇게 가족과 나들이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접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특히 백제 무왕의 흔적이 가득한 익산의 모습을 보려면 이곳 미륵사지를 빠뜨릴 수 없다.
한옥마을에서 호젓하게 하루
익산으로 떠나면서 그곳의 숙소를 검색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어찌된 게 이 시기에 빈방이 없다고 나오는 곳도 제법 있다. 시내를 벗어난 곳의 숙소를 클릭해보았더니 한옥 숙소가 있다. 이름도 낯선 ‘함라’라는 곳에 위치했다. 일단 통화를 해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예약을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익산시에서 20~30분 정도 달려 해질 무렵에 도착한 ‘함라마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통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체크인하고 밖으로 나와해 저무는마을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농촌 지형을 그대로 살린 울퉁불퉁 돌담길의 자연스러움, 토담에 매달린 주먹만 한 호박과 노란 호박꽃, 가을을 알리는 담쟁이들의 뒤엉킴…. 알고 보니 토석담이 주를 이루는 함라마을의 이런 토담, 돌담, 화초담 등의 전통 담장이 등록문화재 제263호라고 한다.
그리고 시·도문화재로 지정된 함라 삼부자집의 조해영 고가, 김안규 가옥, 이배원 가옥 사랑채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전통적 경관이 볼 만한 곳이다.
함라 삼부자가 베푼 인심은 호남을 대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노잣돈까지 얻어 갔다는데, 당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들이었다고 전한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서니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정원의 꽃들이 선명하다. 풀잎에 아침 이슬이 송송송… 잔디 마당을 걸으니 운동화가 촉촉해진다. 관리동 어르신이 지나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이 먼 데까지 뭐하러왔냐신다.이렇게 조용한 거 처음이라니까, “조용하기로야 예가 절간이지 뭐” 하신다. 더러 시끄러울 수도 있을 테지만 하루 있는 동안 정말이지 한 점 소음이 없었다.
마을 바로 위쪽으로 함라향교가 마을을 품듯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조선 세종 19년에 세워진 함라향교는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느낌이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였지만 여전히 실용적인 향교로 건재한 채 지금껏 이어져오는 듯했다. 어르신도 말하신다. “이게 우리 아버지 때도 있었던 향교지요. 그때도 지내던 제를 지금까지 빠짐없이 이렇게 지냅니다.” 점잖고 선한 인상으로 꼭 존대어를 하신다.
한옥 숙소엔 도문대작이라는 식당이 있다. 허균(許筠)이 함열 유배 시절인 광해군 3년, 전국 팔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정리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했다고 한다. 함열관아 객사터 가까운 곳이 허균 선생의 유배 생활공간이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곳 함라 숙소의 식당 이름이 ‘도문대작’이다. 정이 넘치는 마을분들이 차려주신 수수한 한 상으로 흐믓했던 아침 시간이다.
그냥 시내의 흔한 숙소에서 묵었다면, 따끈한 온돌의 맛도 모르고 덜컹거리는이중 창호문여닫이도 못 해봤을 것이다. 아침 이슬 촉촉한 담장이 이어진 멋진 아침 산책도, 새벽 정원의 이슬도, 정다운 아침밥상도, 점잖으신 향교 어르신도 못 뵈었을 텐데. 교외로 조금 더 달려가서 묵은 조용한 한옥마을의 하루가 기억 속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호젓해보기의 진수, 익산 여행은 확실한 힐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