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책이 있고, 그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한 사람들의 인연도 사라지지 않는다. 윤성근(48)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는 책방을 꾸리는 것은 물론 절판된 책을 찾는 손님들을 돕는다. 수수료 대신 책과 사람에 얽힌 신비하고 특별한 사연을 수집하면서 말이다. 신간 ‘헌책방 기담 수집가’에는 소설보다 더 기묘한 진실들이 담겼다.
서울 은평구의 붉은 벽돌 건물.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 있다. 책장을 빼곡히 메운 헌책 때문인지 오래된 종이와 잉크가 어우러진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곳의 주인장 윤성근 씨는 원래 안정적이고 돈도 꽤 받는 대기업의 IT 부서에서 일했다. 그가 잘 다니던 직장을 불현듯 박차고 나와 헌책방을 차린 이유는 무엇일까. “어릴 때부터 책방지기가 꿈이었다. 우연히 대학로에서 김광석의 공연을 봤는데, 이러다 나도 ‘서른 즈음에’ 노래 가사처럼 하루씩 꿈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멀어지는 게 아닐까 번뜩 생각했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빨리 시작해야 망했을 때 다시 다른 걸 해볼 수 있는 여지도 있으니까.”
모두가 월드컵 열기에 휩싸였던 2002년, 종로서적의 폐업도 그가 사표를 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줄기차게 다녔던 곳이다. 정릉에 살던 시절 주머니에 돈이 조금밖에 없으면 두 시간 넘는 길을 걸어서 종로서적에 갔다. 버스를 타면 책 살 돈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층별로 도서를 분류해 운영하는 데에 마음이 이끌려 여러 층을 오가며 책을 실컷 봤다. 유년기의 추억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문을 닫다니. 망한 데 나도 일조를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갈 때마다 책을 샀던 것은 아니니까. 물론 나 하나 때문에 서점이 망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책과 사람은 연결돼 있다
개업을 위해 우선 금호동의 헌책방에서 일하며 운영 노하우를 익혔다. 그러던 어느 날, 책방에 들른 한 노신사가 일본 작가 구라다 하쿠조의 책을 찾는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제목인 데다 1963년에 출판된 책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었기에 책을 찾으면 연락하겠다며 연락처를 받아뒀다.
“반 년 정도 지나고 신기하게도 그 책이 우리 책방에 입고됐다. 그날 트럭에 실려 가게로 쏟아져 들어온 수천 권의 책들 속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이 내 눈에 보일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연락을 받은 어르신이 다시 책방에 오셨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부산에 살고 계셨다. 책값보다 교통비를 몇 배나 더 쓴 거다. 이상하게 여겨 그 책에 얽힌 사연을 물어본 게 사연 수집의 시작이었다. 2007년에 가게를 열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손님들에게 책 찾는 사연을 듣고 기록했다.”
책을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정보만 가져온다. 제목과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윤 대표는 손님에게 “해봐야죠. 수수료 대신 그 책을 왜 찾으시는지, 책과 얽힌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답한다. 흐려진 사랑의 추억, 아버지의 유품, 옛 친구와의 약속 등 하나씩 단서를 추가하며 책을 찾는 행위는 얽힌 실타래를 푸는 과정과 같다. 그렇게 ‘앙데스마 씨의 오후’(1968), ‘바보들의 나라, 켈름’(1979) 등 여러 책이 간절히 기다리는 주인을 찾아갔다.
“책을 찾는 사람들은 책에 자기만의 사연을 덧입혀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사랑, 가족, 기담, 인생 등 여러 종류의 사연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책은 사람의 삶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헌책은 더 그렇다. 누군가에게 한 번 이상 선택을 받았던 이력이 있고, 또 그런 책을 찾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의, 식, 주 그리고 책
윤 대표는 생각이 많을 때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펼쳐 본다. 그는 이 책이 ‘많이 배운 데 대해 우월의식을 가진 이가 있지만 사실 인간은 다 비슷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메시지를 준다고 말한다. 살다 보면 몰라서 어려움을 겪기보다 뭔가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혹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지식은 숨을 쉬거나 시간이 지나듯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제 내가 책이나 경험을 통해 뭔가를 알게 됐다 하더라도 어제까지의 일일 뿐이다.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라며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살아가려 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런 생각이 소위 말하는 ‘꼰대’를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어차피 과거에 해본 것으로 오늘을 완벽히 살 수 없다.”
그럼에도 아는 것을 늘리는 데 목적을 두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윤 대표는 독서를 ‘리듬을 타는 것’이라 정의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리듬에 예민할 수밖에 없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많지 않다. 독서를 통해 남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을 찾을 수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본인에게 집중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는 거다. 언제까지 남들과 같은 리듬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독서가 생활이 된다면, 나중에 교과서에서 ‘사람의 4대 필수 요소는 의, 식, 주, 책’ 이렇게 배우는 날도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