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패션을 결합한 신개념 패션쇼에 시니어 모델들이 나섰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시 중구 신당동 르돔에서 진행된 ‘FASHION for ECO with EMA’가 성료했다.
이번 행사는 ‘친환경, 지구를 살리자’라는 주제로 (주)엘리트모델에이전시(EMA)와 K-패션의 리더 와이쏘씨리얼즈(Whysocerealz), 트리플루트(TRIPLEROOT)가 함께 기획했다. 패션쇼뿐만 아니라 MUD의 댄스 퍼포먼스, 나무 심기, 바자회 등 환경을 생각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시선을 끌었다.
패션쇼의 또 다른 특이점은 무대에 오른 모델들이 모두 시니어모델이라는 점이다. 엘리트모델에이전시는 시니어모델 전문 에이전시이자 아카데미다. 시니어모델들은 패션쇼의 의미가 좋아 적극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패션쇼의 의상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책임졌다. 즉, 환경보호를 주제로 신구가 조화를 이루며 의미를 더했다.
와이쏘씨리얼즈 이성빈 디자이너는 ‘FASHION for ECO with EMA’를 연 배경에 대해 “트리플루트와 EMA와 함께 행사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콘셉트에 대한 논의 중 ‘ECO’, ‘친환경’, ‘지구를 살리자’의 콘셉트로 하면 어떨까라고 의견을 제시했고, 모두 동의해 진행됐다”라고 밝혔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쇼를 두개의 파트 ‘일상생활 속 환경오염 vs 일상생활 속 지구 지키기’로 나눴고, 반전되는 무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그는 쇼를 준비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서 “그동안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모르고 살았다. 제가 일상에서 하는 행동들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도 몰랐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아는 것이 힘이더라”고 소감을 밝혔다.
쇼에서는 ‘일상생활 속 환경오염’에 대해 일회용 컵으로 커피 마시기, 텀블러·물티슈·치약 과다 사용, 유튜브 과다 시청 등을 언급했다. 반대로 ‘일상생활 속 지구 지키기’에 대해서는 전기 절약, 계단 사용, 헌 옷 기부, 손수건 사용 등 일상에서 쉽게 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이번에 쇼를 준비하면서 배운 게 많다. 당장 평소에 사용하는 일회용 컵부터 친환경 소재로 바꾸게 됐다. 포크·나이프, 포장재, 완충재, 봉투 등도 마음만 먹으면 모두 친환경 소재로 바꿀 수 있겠더라”고 말했다.
트리플루트 이지선 디자이너는 “환경과 패션의 만남을 통해 일상에서부터 작은 행동들을 실천해 변화를 희망했다. 모든 실천은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하신 100분께 감사드린다.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해 우리의 취지와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알렉스 강 EMA 대표는 “단순히 즐기는 패션쇼가 아닌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의미 있는 패션쇼를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패션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지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될 때 더 많은 의미와 멋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번 행사를 통해 환경보호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도 시니어모델들과 함께 친환경적,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패션쇼를 기획하려고 한다”면서 많은 응원을 당부했다.
세계 5대 패션위크 중 하나로 꼽히는 밴쿠버 패션위크. 지난 10월 ‘2023 S/S(Spring/Summer) 패션위크’가 성대하게 열린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른 한국인 시니어 모델 두 명이 이목을 사로잡았다. 시니어 모델이 입은 의상을 만들고 쇼를 기획한 사람은 젊은 디자이너 이성빈(29)이다. 신구 조화를 이룬 무대가 완성되기까지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남성 의류 브랜드 와이쏘씨리얼즈(Why socerealz!)를 운영하는 이성빈 디자이너는 지난 7월 시니어 모델 오디션 ‘올드 보이’(Old Boy) 모집 공고를 냈다. 올드 보이는 밴쿠버 패션위크 무대에 설 최후의 2인, TOP 2를 선발하는 오디션이다. ‘나이 많은’(Old)과 ‘소년’(Boy)이 합쳐진 오디션 이름처럼, 이 디자이너는 순수함을 지닌 시니어 모델을 원했다.
1차 오디션에서는 8명이 뽑혔다. 이들은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1박 2일간 합숙하며 서바이벌 경쟁을 펼쳤다. 뜨거운 경쟁 속에 살아남은 최후의 2인은 김진환과 이충희다. 두 사람은 밴쿠버에서 시니어 모델로 정식 데뷔하며 꿈의 나래를 펼쳤다.
“사실 최후의 2인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은 제가 처음 생각했던 우승자는 아니었어요. 시니어 모델로서의 헌신과 열정, 노력이 빛났기 때문에 뽑혔다고 생각합니다. 초반에 탈락할 줄 알았던 분들이 점점 성장하며 최후의 2인까지 되는 과정을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모든 참가자분이 오디션에 진심으로 임해주시니까 저도 어느 순간 엄청나게 몰입한 거죠. 또 두 분이 밴쿠버에서 멋진 무대를 보여주셔서 감사했어요.”
시니어 모델 오디션 탄생기
“사실 저도 시니어 모델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어르신들이니 제가 만드는 옷이 괜히 올드한 이미지를 얻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죠.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시니어 모델들 덕분에 더욱 많은 도전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자신의 무대에 젊고 멋있는 모델이 서길 바라는 마음은 어느 디자이너나 똑같을 터. 젊은 디자이너인 이성빈도 시니어 모델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있었다. 시니어 모델과 작업을 해본 뒤 그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해 12월, 이성빈 디자이너는 올 4월 밴쿠버 패션위크 무대를 준비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시니어 모델 전문 아카데미 ‘EMA’(엘리트 모델 에이전시)에서 패션쇼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디자이너는 “밴쿠버 무대는 와이쏘씨리얼즈의 첫 번째 패션쇼로 매우 중요했다. 그 전에 경험을 쌓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EMA 패션쇼에 참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시니어 모델들은 은퇴 후 제2의 직업을 가진 분들이지 않나.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셨다”면서 “시니어 모델들과 함께하면서 시야도 넓어졌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봤다”고 소감을 밝혔다. 무엇보다 그는 ‘그냥 무엇이든 해도 되는구나’를 경험을 통해 배웠다. 정식 패션쇼를 앞두고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쇼에 앞서 시니어 모델들의 사진을 보고 착장을 정했죠. 그런데 피팅할 때 뭔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모델들께 입고 싶은 옷을 골라서 입으라고 했어요.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으니 모델들의 포즈도 자연스러워지고 자신감도 넘치시더라고요. 시니어 모델들과 함께하면서 배운 게 많아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덕분에 밴쿠버에서 좀 더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이성빈 디자이너는 첫 번째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독특한 무대를 펼친 그는 ‘이런 패션쇼는 처음’이라는 해외 언론의 호평도 받았다. 출발선을 잘 끊었으니 본격적인 다음 무대를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10월 밴쿠버 패션위크에 초청받아 다시 무대에 서게 됐다. 이때 EMA의 알렉스 강 대표가 밴쿠버 무대에 설 시니어 모델을 뽑는 선발대회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득이 될까, 독이 될까.’ 이성빈 디자이너는 고민이 많았다. 최종적으로 득이라고 생각해 도전을 강행했다. 4월 패션위크 당시 현지 모델만 기용한 이성빈 디자이너는 소통의 한계를 느껴, 자신이 원하는 연기력과 에너지를 완벽하게 채우지 못했다. 한국인이면서 열정 넘치는 시니어 모델이라면 당시의 아쉬움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이왕 할 거면 선발대회를 재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올드 보이’ 오디션을 생각해냈다. 그는 “‘선발대회’라고 하면 보수적이고 재미없는 느낌이 든다. ‘슈퍼스타K’를 즐겨 본 터라 서바이벌 오디션을 기획하게 됐다. 영상도 찍어서 유튜브에 순차적으로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영상에는 TOP 2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는 시니어 모델 참가자들과 함께 심사위원인 이성빈 디자이너와 알렉스 강 EMA 대표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두 사람의 심사가 인상적이다.
“키 크고 잘생긴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심사 기준은 얼마나 미션을 잘 이해하고 수행하느냐, 얼마나 담대하고 재밌게 연기를 펼치느냐가 중요했죠.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이 뽑히신 이유예요.”
이성빈 디자이너가 시니어 모델을 이번 패션쇼에 기용한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와이쏘씨리얼즈의 2023 S/S 콘셉트와 시니어 모델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와이쏘씨리얼즈는 영화 ‘다크 나이트’ 속 조커의 명대사 ‘Why So Serious?’(왜 이렇게 심각해?)라는 물음에 위트 있게 대답하는 브랜드다. 재치 있고 독특한 옷을 통해 심각하고 완벽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2023 S/S 콘셉트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장 3~5절)라는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면서 성품이 생기고, 그 성품이 생겨서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시니어분들이 연단의 대명사잖아요. 시니어 모델이 무대에 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한계가 없는 인생과 패션
밴쿠버 패션쇼에서 시니어 모델 두 사람은 외국인 모델들이 지나간 뒤 마지막에 등장했다. 이충희는 조커를 연상케 하는 분장을 하고 범상치 않게 나타났다. 소리를 지르며 모델을 끌고 나와 공포감을 형성했다. 이어 등장한 김진환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비둘기 분장을 한 것도 모자라 손에 비둘기 모형을 들고 있었다.
“이충희 모델님은 고통을, 김진환 모델님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충희 님은 소리도 지르고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고요. 김진환 님의 의상은 희망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콘셉트로 잡은 거죠. 마지막에 두 사람이 줄다리기하는 것은 고통과 희망 중 누가 더 센가를 표현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희망이 이겼죠. 관객분들의 반응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다가 마지막에는 많이 웃으시더라고요. 김진환 님, 이충희 님이 아이디어도 많이 내주시고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더욱 완성도 있는 무대가 나왔습니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이성빈 디자이너.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옷 역시 독특하고 개성이 넘친다. 그의 컬렉션을 보면 천사와 악마, 조커 등에서 영감을 받은 옷이 많다. 2021 S/S 콘셉트는 ‘Fruits & Veggies’(과일과 야채)였는데, 이 디자이너는 상추·가지·키위 등을 활용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와이쏘씨리얼즈는 당시 ‘프로젝트 라스베이거스 국제 패션박람회’에 참가해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든 옷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고 한계가 없다. 스무 살까지만 해도 그는 부모님이 정해준 삶을 산 착실한 아들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진짜 자신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계속 다닐 이유가 없었다. 이후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2년간 해외를 돌아다녔다.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자유로웠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행복했다. 그때의 여행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여행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의 아들’, ‘어디 사는 누구’, ‘무슨 일을 하는 누구’가 아닌, 그냥 온전한 자신을 마주하게 되죠. 여행을 하면서 제가 옷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나라를 가든 옷 쇼핑이 가장 즐거웠죠. 이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해보자 생각해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성빈 디자이너는 패션 디자인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패션 디자인 학원과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다. 열정 넘치는 학생이었던 그는 선생님들에게 개인 레슨도 따로 받으며 실력을 연마했다. 동시에 이성빈 디자이너는 이태원에서 유럽 디자이너 브랜드 직수입 편집숍을 운영했다. 디자이너로서 실력을 갖춘 후에는 편집숍에서 자체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 브랜드가 바로 와이쏘씨리얼즈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옷에 자신이 투영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에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다. 이 고통 뒤에 좀 더 강해진 내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고통과 희망이 주제가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디자이너는 앞으로도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옷을 통해 성경의 좋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시니어 모델과의 작업 또한 지속하고 싶단다. 시니어에 대한 젊은 세대의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갓 서른 살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제가 시니어 모델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 고통받으면서도 인내하고 지금까지 살아오신 시니어분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제가 상상하지 못할 강함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1세대 여성 임원인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는 상징적 존재가 아닌 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저서 ‘우아하게 이기는 여자’를 통해 여성 팀장이 드물던 1990년대에 기업의 혁신과 변화를 주도했던 선례를 전하며 후배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더불어 다양한 강연과 코칭을 통해 성별을 넘어 많은 직장인에게 길고 짙은 호흡의 비결을 전하고 있다.
LG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이자 CEO. 어떤 조직에서든 리더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더불어 여태껏 없던 ‘최초’의 존재에게 보내는 타인의 시선과 잣대는 가볍지 않다. 윤여순 전 대표는 “여자에게 지시받고 일해야 해?”, “여성 임원은 능력과 야심을 모두 갖추면서 상냥해야 해” 등의 표현을 받아내면서도 최초의 여성 임원이라는 위치에 누가 되지 않게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LG인화원(연수원) 부장으로 시작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15년간 임원 생활을 이어갔고, LG아트센터 대표를 지냈다. 퇴임 후에는 기업 교육 역량을 살려 리더십 코칭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늦깎이, 임산부, 대학원생
“무엇이 지금의 나로 이끌었는지 묻는다면, 아마 30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네요.”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남편의 학업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함께 몸을 실었을 뿐이다. 그저 미국에서 앞으로 몇 년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유학생의 아내’였다. 외국인을 위한 영어 클래스, 영어로 하는 성경 공부, 살림꾼 미국 아주머니가 여는 쿠킹 클래스 등 다양한 활동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의 주립대학에는 장학금을 받는 대학원생의 배우자에게 무료로 9학점을 이수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수업을 듣기 시작할 즈음 임신을 했어요. 배는 점점 불러오는데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리포트도 써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틈틈이 아기 침대, 유모차 등 육아용품도 구하러 다녔어요. 그리고 종강 후 5일 만에 딸이 태어났죠. 아이 기르는 일에만 전념해도 부족한 상황인데,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학업을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뭔가를 고를 정도로 여유롭진 못했어요. 절박했거든요. 힘든 상황에서 영어교육학 석사, 교육공학 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었던 건 담당 교수님의 무한한 지지 덕도 컸어요.”
‘여자 외계인’의 기업 적응기
학업과 육아 사이에서 절실히 고민하기를 수십 번, 마침내 그는 박사 학위까지 손에 쥐고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한국 일부 기업에서는 ‘교육 분야에도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풍조에 따라 미국에서 공부한 젊은 박사들을 과장급으로 채용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변화와 도약을 위한 시도 속에서 그는 인연이 닿아 LG인화원 부장으로 입사하게 됐다.
“밑에서부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올라온 부장들의 눈에는 제가 달갑지 않은 ‘외계인’이었을 거예요. 그것도 ‘여자 외계인’이요. 그때는 부장급 여성이 거의 없었어요. 어려움을 나눌 동료도 없이 참 외로웠죠. 여기저기 도움을 구했다가 ‘여성의 한계’라고 여길까봐 고민이 생겨도 혼자 곱씹은 적이 많아요. 기업에 적응하기에도 벅찼죠. 슬슬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압박도 느껴졌어요. 나만이 할 수 있는 차별적인 일이 뭘까 고민하다, 교육공학 전공을 살려 온라인 교육 시스템 ‘사이버 아카데미’를 구축했어요. 지금은 당연한 온라인 교육이지만 그때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거든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윤 대표는 임원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는 ‘21세기라면 당연히 여성 임원도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곱지 않은 태도로 그를 대하거나,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는 식의 눈길을 주기도 했다. “최초라는 타이틀 때문에라도 무례하고 지나친 일에 더욱 휘둘리지 않으려 애썼어요. 제가 내딛는 걸음이 여성들의 첫 발자국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앞장서서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니 결코 감정의 흐름대로 행동할 수 없었죠. 우리 사회는 감정적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이잖아요.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은 더 유리한 결과를 이뤄낼 지원군을 얻기 위한 단계이기도 해요. 이런 태도로 매사에 임하니 결과는 항상 좋은 쪽이었어요.”
더딘 세상, 변화를 일으킬 우리
기업 내 ‘외계인’이었던 윤 전 대표는 남성들의 사고방식과 성향, 행동하는 패턴 등을 깊게 들여다봤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점이 많았다. 특별히 여성을 적대적으로 여기려는 게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 관습으로 굳어진 대로 행동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들도 있었다. LG를 떠난 후 그는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기업 내 불평등을 해소하고 격차를 줄이기 위해 코칭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임원 교육팀장으로만 8년을 일했기 때문에 임원, CEO들의 고민을 면면이 알고 있어요. 그들의 중압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죠. 특히 워킹맘은 자녀의 양육과 가사노동을 병행해야 하니 어려움이 커요. 승진에서 미끄러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엄마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 자체로 아이에게 좋은 교육이 된다고 믿어요. 그러니 자신을 믿고 인내하면서 조직을 더 큰 시각으로 바라보고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해요. 기업에서도 남성 위주 사회에 여성을 받아준다는 자세가 아닌, 여성이 발휘할 수 있는 강점을 최대한 살려 화합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유리 천장은 깨졌지만 양적·질적 변화는 여전히 해묵은 숙제다. 그는 각자 다른 시간을 지나온 소수자들이 뭉쳐 목소리를 내고 개척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물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이 많아졌어요. 하지만 완벽히 해소됐다고는 말할 수 없죠. 때문에 여성들이 모여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더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뭔가를 요구하려면 우리가 뭘 원하는지 대화하는 게 먼저잖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이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요? 제 강연을 남성들이 들으며 조직의 여성 구성원들과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구할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인공지능 시대, 100세 시대에 노후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4060 스마트 라이프 디자인 포럼’이 대구에서 개최된다.
‘제6회 국제제론테크놀로지 엑스포&포럼’(IGEF 2022) 행사 중 하나인 ‘4060 스마트 라이프 디자인 포럼’이 10월 24일(월) 오후 2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대구 엑스코 서관 324호에서 열린다.
‘4060 스마트 라이프 디자인 포럼’은 은퇴 세대인 4060 중장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후 준비, 부모 돌봄 프로그램이다. 본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발행사 이투데이피엔씨와 신한은행이 공동주최하고, 실버산업전문가포럼이 주관한다.
10년 안에 50대 이상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 은퇴세대는 ‘앞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부모님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하실 수 있도록 어떻게 돌볼 것인가’ 등의 고민을 안고 있다. 이에 ‘4060 스마트 라이프 디자인 포럼’에서는 고령사회 전문가들과 함께 답을 모색하고자 한다.
먼저 김현곤 국회미래연구원 원장은 ‘100년간의 자기탐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친다. 이어 이관석 신한은행 퇴직연금사업부 컨설턴트는 ‘100세 시대 5대 장수리스크를 이겨라’를 주제로 강연, 중장년층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홍명신 에이징커뮤니케이션센터 대표는 ‘치매 100만 시대, 가족돌봄을 위한 케어 커뮤니케이션’, 표성일 라이프앤커리어디자인스쿨 대표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 100세 시대 일자리 일거리 찾기 만들기’를 주제로 각각 강연할 예정이다.
실버산업전문가포럼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대부분 경제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자녀한테 헌신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4060 세대는 퇴직 후에도 자기의 삶이 없고 노후준비가 안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행복해야 가정도 행복해지는 법이다”라면서 “그래서 콘서트에서는 퇴직 이전에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골자로 강연이 진행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제6회 국제제론테크놀로지 엑스포&포럼’(IGEF 2022)과 ‘제13회 국제제론테크놀로지학회 학술대회’(ISG 2022)는 ‘2022 제론테크놀로지 세계대회’로 통합, 진행된다. 10월 22일부터 26일까지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개최된다.
‘2022 제론테크놀로지 세계대회’는 학술대회, 쇼케이스, 고령친화 DX도시 포럼, 고글로벌 고령친화산업 정책 포럼, GT 아카데미 및 워크숍 등을 개최함으로써 기업 관계자, 연구자, 현장 실무자,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최신 연구개발 결과와 정책 및 시장 동향을 공유하는 장이 펼쳐질 예정이다.
또한 ‘2022 제론테크놀로지 세계대회’와 함께 대구시가 주최하는 ‘대구 액티브시니어박람회’도 연계, 개최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에미(Emmy)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6관왕의 기염을 토했다. 무엇보다 ‘오징어 게임’은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 수상’이라는 역사를 새로 썼다.
13일 오전(한국시각) 미국 LA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열린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Primetime Emmy Awards, 이하 에미상)에서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는 남우주연상을, 황동혁 감독은 감독상을 각각 수상했다.
앞서 ‘오징어 게임’은 지난 7월 기술진과 스태프에게 수여하는 프라임타임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상(Primetime Creative Arts Emmy Awards, 이하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상)에서 게스트상(이유미), 시각효과상, 스턴트퍼포먼스상, 프로덕션디자인상까지 4관왕을 차지한 바 있다. 여기에 남우주연상(이정재), 감독상을 추가하며 6관왕을 달성했다.
특히 이번 수상으로 ‘오징어 게임’은 ‘최초’의 역사를 쓰게 됐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영미권이 아닌 지역에서 만들어진 드라마가 후보로 지명되고 상을 받은 것은 에미상 74년 역사상 최초다. 미국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The Academy of Television Arts & Sciences·ATAS)가 주최하는 에미상은 ‘TV 아카데미’로 불릴 정도로 권위를 자랑한다.
이날 감독상을 수상한 황동혁 감독은 “사람들은 내가 역사를 썼다고 하지만 우리가 함께 역사를 만들었다”라며 “역사상 영어가 아닌 드라마가 받은 첫 에미상이라는데, 이게 나의 마지막 에미상 트로피가 아니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시즌2로 돌아오겠다”고 덧붙여 박수를 받았다.
이정재는 아시아 배우 중 최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상을 주신 모든 관계자분과 특히 넷플릭스에 감사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이정재는 황동혁 감독을 향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탄탄한 극본과 멋진 연출로 구현해준 황 감독의 창의력에 감사함을 표한다”고 전했다.
영어로 소감을 이어가던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어로 “대한민국에서 보고 계실 국민분들과 친구 가족, 그리고 소중한 저희 팬들과 이 상의 기쁨을 나누겠다”고 덧붙였다.
이정재는 특히 시상식에 8년째 공개 열애 중인 연인 임세령 대상그룹 부회장과 동반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커플룩처럼 차려입은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레드카펫에 등장했다. 또한 이정재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자 임세령 부회장은 미소와 박수로 연인을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은 에미상 13개 부문 14개 후보에 올랐다. 다만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정호연,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오영수와 박해수는 수상의 영광을 안지 못했다. '오징어 게임'의 작품상 수상도 불발됐다.
이번 에미상 시상식은 ‘오징어 게임’ 축제였다. 에미상의 ‘오징어 게임’을 향한 환대가 눈길을 끌었다. 이정재와 정호연은 ‘버라이어티 스케치 시리즈’ 부문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는데, 이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영희 인형이 등장했다. 이에 이정재와 정호연은 게임을 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은 상금 456억 원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게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역대 최고 시청 시간 달성, 시청 가구 수 순위 1위에 오르는 등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전북 정읍시 산자락으로 귀농한 송정섭(67, ‘꽃담원’ 대표)은 자칭 ‘꽃미남’이다. 아내 역시 ‘꽃미녀’로 쌍벽을 이룬단다. 외모를 내세우는 ‘자뻑’이 아니다. ‘꽃에 미친 남자’와 ‘꽃에 미친 여자’가 함께 사는 걸 빗댄 얘기니까. 못 말릴 강태공은 낚싯대 하나로 만족한다. 다인은 끽다로 세상을 건넌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 사는 것보다 나은 게 있던가. 송정섭은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매양 꽃과 동행한다. 귀농을 한 것도 꽃에 제대로 미치기 위해서였다. 그게 인생의 쓸쓸한 황혼을 북돋울 가장 유력한 방안이라 보았다.
송정섭의 거처는 온통 녹음이다. 600평에 이르는 너른 터에 자라는 온갖 식물이 초록을 내뿜는다. 하늘을 반쯤 가린 저 앞의 푸른 준령은 내장산이다. 범람하는 산기(山氣)로 한여름의 무더위는 물론 속기마저 씻어낸다. 산 위로 흐르는 구름은 또 어떻고? 꽁무니에 바람을 매달고 유유히 흘러 번잡한 세상사를 잊게 한다. 어디를 보더라도 진부한 게 하나 없는 산골 풍경이다. 개중에 흐벅진 건 송정섭이 귀농 8년간 꾸민 정원 경관이다.
이 정원에선 나무들의 제전, 꽃들의 향연이 한창이다. 원래 감나무 세 그루뿐이었다. 외갓집 묵정밭이었다고 한다. 쓸모를 잃은 땅에 정원을 꾸려 쓸모는 물론 미감까지 고스란히 살려냈다. 애쓴 흔적, 공들인 자취가 완연하다. 식물에 관한 단순한 애호를 넘어선 빙의? 화초류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350여 종이라지. 게다가 본때 있는 솜씨로 적재적소에 배치해 조화롭다. 이곳에서 철 따라 도도한 자연의 순환과 드라마가 펼쳐질 걸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송정섭은 일쑤 무아지경을 느끼나? 그러고 싶어 꽃에 미쳤나?
“농촌진흥청 화훼 분야 연구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직장 생활 30여 년간 꽃을 전공으로 삼았던 것인데, 은퇴 이후 노년의 30여 년 역시 고향으로 내려가 꽃과 더불어 살고 싶었다. 꽃을 비롯한 식물이 지닌 매력과 선한 영향력을 잘 알기 때문이었지. 후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귀농하지 못했다는 점일 뿐이다.”
귀농이 만족스럽다는 뜻인가?
“조직 안에서 의무감으로 움직여야 하는 직장 생활에 비할 수 없는 만족을 느끼며 산다. 난 정년 2년 남긴 시점에 명퇴했다. 더 일찍 물러나 정원 가꾸는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면 좋았을 텐데, 한결 나은 생활을 괜히 유보했던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목적과 지향이 분명할 경우 귀농은 빠를수록 좋다.”
십중팔구 세상의 아내들은 남편의 귀농 제안에 일단 반기를 든다. 고생살이가 빤히 보여서. 이 대목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우리 부부는 주로 수원시에서 살았다. 10여 년은 단독주택에 살며 정원 가꾸는 재미를 충분히 맛봤다. 아내 역시 꽃에 관한 경험과 조예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꽃을 중심에 둔 귀농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웠다.”
정착하기까지 초기의 갖은 애환을 면제받기 어려운 게 귀농이라지?
“퇴직하자마자 혼자 곧바로 이곳에 내려와 텐트를 치고 살았다. 오랫동안 홀로 종일 일하고 밤이면 막걸리 한잔하고 잠을 잤지. 기반을 닦는 과정이었다. 몸이야 고달팠지만 좋아하는 일, 원하는 일이라 힘든 줄 모르고 지냈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가령 어떤 점이 어려웠나?
“이 터가 원래 맹지였다. 길을 내는 게 무엇보다 화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쉽지 않더라. 경계면에 있는 남의 땅을 사들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지주가 팔지 않았다. 시세의 두 배를 주겠다고 해도 통하지 않더군. 실로 어렵사리 길을 만들어내는 데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 때문에 귀농 2년여가 지나서야 살림집을 지을 수 있었다.”
향후 목표는 치유정원
집을 짓고 아내가 합류할 즈음 정원 역시 어엿한 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뿌리고 심고 가꾼 것들이 생육을 거듭했던 것. 비와 바람과 햇볕만 식물의 성장을 도왔으랴. 송정섭은 원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식물의 성장을 뒷바라지할 수 있는 경륜과 기술로 정원 만들기에 가속을 붙였다. 말하자면 그는 식물 재배에 도가 텄다.
“사실 ‘화류계’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도움을 준 이들도 많았다. 시골에 내려와 정원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보내온 나무들만 해도 자동차 14대 분량이었다. 덕분에 정원 조성 작업이 순탄했다.”
시골 정원을 열심히 가꾸다 몸을 망가뜨리는 경우도 있더라. 강철처럼 일어서는 풀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나동그라질 수 있으니 가급적 작은 정원을 즐기는 게 현명하다는 충고도 흔하다.
“프로에겐 얘기가 다르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몸을 쓰면 꽃 관리, 잡초 처리 등은 충분하다. 전지는 1년에 한 차례로 마무리한다. 나는 단순히 꽃을 가꾸고 즐기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나만의 특별한 생태정원을 구축하는 한편, 꽃을 보급하고 정원 만들기 지원 활동을 하며 시민정원사를 양성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과 꽃 아카데미를 운영해 식물의 인문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이 모든 부문이 다행스럽게 잘 돌아간다. 거의 날마다 체험자들과 수강생들이 찾아드니까.”
결국 공직 은퇴 이후 꽃과 정원으로 새 직업을 발굴한 셈인가?
“이곳에 귀농해 열심히 정원을 가꾸는 나를 주민들은 의아해했다.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저토록 꽃을 잔뜩 가꾸지?’ 그런 궁금증으로. 꽃 가꾸기가 소득과 연결될 수 있다는 걸 그들은 미처 몰랐던 것이지.”
그는 민박업도 병행한다. 귀농 초기에 사용했던 농막을 다듬어 에어비앤비(Airbnb, 국제적인 홈스테이 네트워크)에 가맹, 투숙객을 받는다. 이 역시 순항한단다. 자신이 보유한 물적 자산을 최대치로 활용하고 있으니 그의 두뇌가 기민하게 움직이는 걸 알 만하다.
“민박 수요는 넘친다.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 자제한다.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주된 목적인 정원과의 동행에 전념해야 하니까. 향후 치유정원으로 확장할 작정이다.”
치유정원? 그게 뭐지?
“의사들의 데이터를 보면 꽃이 치매까지 개선한다고 한다. 이렇게 원예로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데 착안한 게 치유정원이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에선 오래전부터 치유정원이 활성화돼 있다. 환자를 무조건 병원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치유정원으로도 보내는 것이지. 국내에도 치유정원을 표방하는 원예농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자신의 전공과 경륜을 고스란히 살려 인생 2막을 열어젖힌 뚝심이 인상적이다.
“귀농에 대한 로망은 아파트에 살던 시절에 이미 움텄다. 옆집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르고, 좋아하는 꽃을 기껏해야 베란다에서 기를 수밖에 없는 답답함에 질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일찌감치 생태정원을 구상했다. 개인이 가진 기능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은 삶이라는 인식은 뿌리 깊은 것이었고.”
식물의 능력은 사람보다 뛰어나다
그는 갑갑한 도시를 벗어나 우선은 ‘나’를 즐겁게 하고 싶었던 거다. 즐겁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오욕칠정으로 탁류처럼 흐르는 인생일망정 내 길을 내가 가는 한 뒤에 남을 미련한 미련이 적어진다. 그는 귀농으로 삶이 부과하는 갈등과 갈증을 해소했다. 귀농하며 가슴에 새긴 건 세 가지였단다. 변화한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자연을 소중하게 대하기. 죽을 때까지 공부하기. 개중 결연한 건 공부 욕심이 아닐까. 그런데 그가 가르침을 청하는 선생은 꽃이며 식물이다. 풀꽃 하나에서 생명의 신비한 노래를 듣고, 바람에 떠는 나뭇잎 하나에서 우주의 율동을 보는 영혼이 드물지 않은데, 송정섭의 사유 역시 비슷한 계보에 속하는 것 같다.
“호기심을 가지고 식물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면 얻을 것이 많다. 이를테면 꽃들은 무엇으로 대화를 할까, 그걸 공부하다 보면 향기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심지어 식물은 사람의 말뜻까지 알아듣기도 한다. 사실 식물의 능력은 인간의 재능을 뛰어넘는다.”
좁쌀보다 작은 상추씨가 흙을 들어 올려 싹을 틔우는 기적을 바라보면 천하장사는 저리 가라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얘기는 재고되어야 할지도.
“강의를 할 때 자주 하는 얘기가 있다. ‘꽃처럼 살자’는 거다. 꽃에서 배우자는 뜻이다. 그럼 무엇을 배우나? 한 가지 예를 볼까? 지구상의 꽃은 25만여 종에 이른다. 이 모든 꽃이 다 다르다. 저만의 개성으로 존재한다. 이는 개성을 살리기보다 욕망을 따라 달려가는 인간의 양상과는 사뭇 다른 게 아닌가.”
꽃인들 속 터질 일이 없을까마는 사람보단 덜 아등바등한 것 같다.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게 있다. 식물이 내뿜는 산소를 마시며 숨 쉰다는 걸. 인간의 생존에 이모저모 절대적인 기여를 하는 식물의 헌신을 기억하기만 해도 삶이 한결 나아질 거라는 얘기다.”
식물 예찬이 길게 이어진다. 새삼스러울 게 없는 얘기지만 새삼스럽게 들리는 건 외면하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귀농으로 일군 꽃 농장은 송정섭에게 세상의 중심이다. 세상의 한 귀퉁이를 꽃으로 채워 향기를 흩뿌리는 삶이란 얼마나 떳떳한가. 게다가 안정적인 소득 기반까지 다졌다. 그는 바야흐로 썩 괜찮은 인생의 열매를 거두는 시절로 접어든 셈이다. 귀농을 통해 마침내 얻고 싶은 걸 얻었고, 하고 싶던 걸 하게 됐다. 그렇다면 그가 으뜸으로 치는 귀농 수칙은 어떤 것일까.
“가장 중요한 건 주민들과 화학적 결합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을의 문화와 풍토를 존중해야 하는데, ‘3척’만큼은 피해야 한다. 시골에서 아는 척, 잘난 척, 가진 척을 하다가는 거의 죽음과도 같은 고난에 빠질 수 있다.”
허튼 우월감은 버려라?
“자세를 낮추는 게 좋다. 시골 사람들이 무슨 법 같은 것엔 무심할망정,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 외엔 함부로 말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직접 겪은 불화 경험은 없었나?
“불화라기보다 귀농 초기에 다소 서툰 처신을 해 미운털이 박힐 뻔한 경험이 있다. 마을회의 같은 곳에서 박사랍시고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라. 아하, 내가 팽당했구나! 뒤늦게 깨닫고 태도를 바꾸었다.”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없이 코너에 몰릴 수 있는 게 귀농 생활이라는 얘기다. 나를 내세우기보다 타자의 얘기에 먼저 귀 기울이자는 조언이고. 세상의 도처가 교실인 셈이다.
송정섭이 주는 귀농 Tip
꽃 농원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뜻을 이루기 힘들다. 우선 식물에 관한 공부를 미리 충실하게 해둬야 한다. 재배 기술 숙지는 기본이고, 식물심리학과 식물의 인문학까지 섭렵하는 게 필요하다. 농원의 공간 디자인도 핵심 요소다. 개성과 미감을 살려 구조를 설정해야 한다. 효율적인 동선 조성 역시 중요하다. 입지로는 들판보다 숲속이나 산자락이 이상적이다. 주변에 축사나 고압선 철탑이 있는 곳은 피하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근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난히 텃세가 심한 곳은 피해야 하는데, 단기간이나마 미리 살아보고 풍토를 판단하는 게 좋다.
귀농·귀촌을 꿈꾸지만 막막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특히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왔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에 정부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마련, 귀농·귀촌 인구 증진에 힘쓰고 있다. 다만,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정부 지정 교육기관에서 관련 교육을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귀농, 귀산촌, 귀어로 세분화해서 자세히 살펴봤다.
정부는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인구가 농가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귀농·영농 교육 100시간 이수’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농지와 농가주택 마련 방법, 작물 재배 방법, 판매와 홍보 방법 등을 배운다. 귀농·귀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귀농과 귀촌, 뭐가 달라?
귀농 농어촌으로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것.
귀촌 농·어업을 직업으로 삼지 않고 전원생활 등을 이유로 농어촌으로 이주하는 것.
귀농·영농 교육 100시간 채우기
농림축산식품부(농정원 포함), 농촌진흥청, 산림청 및 지자체가 주관 또는 위탁하는 귀농·영농 교육을 100시간 이상 이수하면 된다. 단,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에서 주관하는 농업교육포털(www.agriedu.net)에 등록된 교육 이수와 수료증만 인정받을 수 있다.
때문에 귀농·귀촌을 희망한다면 농업교육포털 가입과 이용은 필수다. 온·오프라인 교육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온라인 교육은 참여 시간의 50% 범위만 인정해주며, 최대 40시간만 인정된다는 점이다.
즉 온라인 교육으로 최대 40시간을 인정받으려면 80시간 이상 수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오프라인 교육을 60시간 이상 들어야 100시간을 채울 수 있다.
정부의 자금 지원은?
각 지자체에서는 100시간 이상 교육을 이수했는지, 농지원부·농업경영체에 등록된 주 경작자인지, 생산물에 대한 증빙자료를 갖췄는지, 경작 규모가 기준 이상인지 등의 조건을 충족한 경우 자금을 지급한다.
대표적인 혜택은 농업 창업자금과 주택 구입자금 지원이다. 농업 창업자금은 대출 한도 3억 원 이내에서, 주택 구입자금은 7500만 원 이내에서 가능하다. 대출 금리는 연 2% 고정 또는 변동금리이며, 대출 기간은 15년 만기다.
농업 창업자금은 농지 구입, 온실·하우스·저장 시설 설치 및 구입, 농기계 구입, 농식품 가공시설 설치, 축사 구입 등을 지원한다. 주택 구입자금은 주거 전용면적 150㎡ 이하 주택을 대상으로 한다.
지자체마다 귀농·귀촌지원센터, 아카데미 등이 있을 정도로 귀농과 관련된 교육 과정은 많고 다양하다. 그중에서 시니어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교육 과정을 꼽아봤다.
귀농·귀촌 맞춤형 교육
전직 창업농 교육은 40·50세대를 대상으로 하며, 농업인으로서 삶과 변화 관리, 농산물 유통 전략, 농촌에서의 가족 생활 등에 대해 배운다. 은퇴 창업농은 60대 이상을 대상으로 하며, 농촌에서의 보건의료, 자산관리와 재테크 등을 배울 수 있다.
농업 일자리 체험 교육
농업·농촌 이론 교육 5일, 농작업 실습 교육 5일로 구성되며, 총 80시간을 인정받을 수 있다. 서울,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등 지자체마다 교육이 진행 중이다. 교육비는 국비 100%로 무료다.
지자체 귀농학교
봉화비나리귀농학교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학교다. 봉화의 주요 농산물인 사과, 고추, 수박 등에 대한 농사 기술과 현장실습 위주로 교육이 진행된다. 5박 6일 과정이며, 60시간 인정된다. 현재 8월, 9월, 10월 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창녕생태귀농학교 매년 200명의 수강생이 거쳐가는 곳이다. 8월 26일부터 10월 28일까지 9주 동안 100시간의 교육이 진행된다. 귀농 선배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농장 견학과 체험을 할 수 있다.
임업(林業) 관련 일을 하는 귀산촌은 귀농 안에 속하고, 농업교육포털에도 교육 과정이 등록돼 있다. 다만 귀농은 농업진흥청이, 귀산촌은 산림청이 주무 관청이자 지원기관이다.
귀산촌은 행정적으로 산림기본법상 산촌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산림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산림 관련 커뮤니티 활동이나 생활·생업을 위해 산촌으로 이주하는 행위를 말한다.
보통 전원생활, 나무·열매·버섯류·산나물류·약초류 등의 임산물 재배, 산촌 유학, 체험농장 운영, 농·임산물 유통 등의 일을 한다.
임업후계자 교육
임업후계자 교육은 예비 귀산촌인을 위한 대표적인 교육이다. 임업후계자란 임업의 계승·발전을 위해 임업을 영위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산림청 소속 기관인 산림교육원과 전문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을 수 있다.
한국임업진흥원 산림청과 함께 귀산촌 교육을 기획·운영하는 곳으로, 다양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귀산촌 아카데미는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무료 공개 강좌로 귀산촌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 더불어 산양삼과 산나물 재배기술 과정도 진행한다.
경남귀산촌학교 퇴직 후 제2의 삶을 찾는 사람,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 귀산촌 정착에 관련한 교육·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농장디자인 과정, 산림경영 과정 비대면 교육도 있으며, 6월에는 야생화 소득증대 과정 교육이 열린다.
귀어업인은 농어촌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어업인이 되기 위해 농어촌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을 의미한다.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어촌어항공단이 귀어귀촌종합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지자체마다 귀어귀촌지원센터가 있다.
어촌에서 어업, 양식업을 희망하는 이들은 3단계 교육을 받아야 한다. 먼저 이론 교육을 받고, 이어 단기 기술 교육을 받아야 한다. 어업, 양식업 분야 현장견학 및 체험 위주의 단기 기술 교육으로 창업 업종을 선택하기 전 다양한 어업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그 다음에는 장기 실습 교육을 받아야 한다. 어촌에 임시로 거주하며 어업, 양식업 기술 등을 배우는 교육이다. 귀어학교를 통해 교육받을 수 있다.
귀어학교
이론부터 실습, 어업 소득 기반 실현을 위한 컨설팅까지 받을 수 있는 장기 실습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귀어학교는 경상남도 귀어학교로, 2018년부터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내년에는 인천시에서 8번째 귀어학교가 개교한다.
인천시 귀어학교 2023년 하반기에 문을 열 예정으로, 연간 80여 명의 수산 전문 인력을 배출할 계획이다. 어업과 양식업을 포함해 어촌 관광·서비스업 등 다양한 교육을 실시한다.
어촌체험휴양마을
본격적으로 귀어업인이 되고자 마음먹기 전, 어촌체험휴양마을을 찾는다면 어촌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다. 어촌체험휴양마을은 어업 체험을 중심으로 어촌 자연환경과 생활문화 등을 연계해 관광 기반시설을 조성한 곳이다. 현재 전국 121곳의 어촌마을이 체험휴양마을로 지정돼 운영 중이다.
남해 문항어촌체험마을 우럭조개잡이, 쏙잡이, 개막이 체험, 자연산 돌굴까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더불어 직접 잡은 해산물로 요리해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재미를 더한다.
울산 주전어촌체험마을 육지에서 유일하게 30년 이상의 베테랑 해녀 선생님들로부터 물질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해녀 밥상 체험도 가능하다. 또한 스킨스쿠버, 투명카누도 즐길 수 있다.
귀촌(歸村), 촌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오는 것. 보통은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귀촌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역에 살지 않고도 귀촌한 것처럼 그 지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구가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귀촌이 본격화됐다. 도시로 상경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U턴, 지방 출신이지만 다른 지방에서 정착하는 J턴, 도시 출신인데 지방으로 이주하는 I턴이 가장 흔했다. 경제적 이유, 가족의 사정, 한가로운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 등이 주된 이주 이유였다.
이제는 ‘그 지역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어서’ 귀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 지역에 가서 반드시 살아야지’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느 동네에 놀러 갔다가 그곳 사람이 혹은 마을이 좋아서 자연스럽게 물들듯 귀촌하는 것이다. 혹은 그 지역에 살지 않더라도 도시와 지역, 근교와 지역을 오가며 머무르지 않는 귀촌 생활을 하기도 한다.
여러 지역과 관계 맺는 사람들
어떤 지역에 살지는 않지만, 그 지역에 호감과 관심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든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을 ‘관계인구’라고 말한다. 관계인구는 관심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가고 지역 발전을 응원한다. 지역 특산물을 구매하거나 커뮤니티에 참여하기도 한다. 일종의 ‘팬’이 되는 것. 그런 지역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일 수도 있다.
‘관계인구’라는 말은 식품 생산자와 생산품 정보를 제공하는 일본 소식지 ‘도호쿠 먹거리 통신’의 다카하시 히로시 편집장이 그의 저서 ‘도시와 지방을 섞다 : 타베루 통신’에서 처음 사용했다. 2016년 처음 소개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역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지역의 행복까지 생각한다.
‘인구의 진화’ 저자 다나카 데루미는 책에서 “관계인구는 이주·정주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도 넓힌다”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지역을 오가면서 결국 정착하는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지역재생 전문 잡지 ‘소토코토’의 사시데 가즈마사 편집장은 ‘미래 시대는 관계의 시대’라고 말하며 관계인구를 네 부류로 나눈다. 지역에 살며 행정기관과 협력해 마을을 만들어가는 디렉터형, 도시와 지역을 홍보하는 허브형, 도시에 살지만 지역에도 거점이 있는 더블로컬형, 무조건 그 지역이 좋다고 하는 단순 소통형이다.
관계인구 개념이 지역 소멸을 해결할 열쇠가 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도쿄에 모여 ‘시마코토 아카데미’를 열었다. ‘이주하지 않아도 지역을 배우고 싶고 참여하고 싶다’는 모토로 관계인구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 사람과 지역을 연결하는 일이다. 아카데미에 참여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지역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이면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6년 동안 6기를 진행해 수강생 83명 중 29%가 지역에 정착했다. 다나카 데루미는 이 아카데미의 목적이 ‘이주를 촉진하기 위함’이 아니라, ‘떨어져 있더라도 관계를 맺고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있다고 평가한다. 각자가 삶의 문제의식을 고민하면서 전진한 결과라는 것. 그는 관계인구를 ‘동료’라고 표현했다.
지역에 얽매이지 않는 '관계 귀촌'
일본 정부도 관계인구에 관심이 많다. 정주인구 증가를 목표로 했던 지방창생정책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관계인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토교통성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주요 3대 도시권에 있는 관계인구는 약 1800만 명이 넘는다. 1800만여 명이 대도시에 살면서 크든 작든 다른 지역에 직접 이바지하는 활동을 한다는 뜻이다.
일본과 똑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농산어촌에 유동인구로 존재하는 관계인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의 ‘농산어촌 마을 패널 조사사업’(2/10차연도)에 따르면 농산어촌 마을 평균 77.4호 중 5.6호는 지역에 주소지를 두지 않은 가구다. 보고서는 관계인구가 있는 마을의 비중이 30.4%라고 분석했다. 마을당 약 20명의 관계인구가 있는 셈이다. 행정안전부는 2018년부터 ‘청년마을 만들기’라는 청년 정착 지원 프로그램으로 청년과 마을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사시데 가즈마사 ‘소토코토’ 편집장은 지역이 관계인구를 만들려면 ‘관계안내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관광안내소가 지역의 명소나 맛집을 안내한다면, 관계안내소는 지역에서 재미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 지역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 등을 안내하는 곳이다. 관광안내소 같은 어떤 건물이 아니라 마음 편한 장소나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시마코토 아카데미’가 대표적인 예다.
인구 감소 시대에 새로운 귀촌으로 관계인구가 떠오른다는 건 귀촌이 더 이상 지역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울에 살면서 제주의 농부를 응원하고, 강원도의 커뮤니티에 참여하며, 충남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활동을 하는 식의 관계 귀촌을 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말이다.
이번 호에서는 공주 원도심의 관계인구가 되었거나 귀촌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새로운 귀촌이 어떤 모습인지 들여다보려 한다. 공주 원도심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곳곳을 느슨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귀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역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공주와 연결된 사람들은 지역에 살지 않아도 마치 지역에 사는 것처럼 활동한다.
이야기를 좋아해 그 속에 푹 묻혀 살았다. 동네 사랑방, 길쌈하는 여인들 틈바구니 비집으며 이야기 구슬들을 집어 담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다듬고 정리해 하나씩 쓸모 있게 만들기 시작했다. 구슬은 서 말이라도 꿰어야 장신구가 되듯이, 최상식(77) PD의 손에서 잘 꿰어진 고향의 전설들은 한국의 여름을 대표하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 되었다.
최상식 PD는 1971년 서울중앙방송(현 KBS)에 PD로 입사했다. 1976년부터 1994년까지는 TV드라마 PD로서 ‘전설의 고향’(1977~1989), ‘보통사람들’(1982~1984), ‘춘향전’(1994) 등을 연출했다. 이후 KBS 드라마 제작주간으로 ‘젊은이의 양지’(1995), ‘첫사랑’(1996~1997), ‘태조왕건’(2000~2002), ‘겨울연가’(2002) 등을 기획 및 제작했다. 2002년 퇴사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 미디어공연영상대학 학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 ‘최상식 PD와 송도영 성우의 전설의 고향’을 운영하며 전설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있다.
‘촌스러운’ 캐릭터의 창시자
최상식 PD의 이름 밑으로는 제목만 봐도 OST가 귀에 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이 빼곡하다. 그는 시청률 공식 집계 이래 대한민국 모든 프로그램을 통틀어 역대 최고 시청률인 65.8%를 기록한 KBS 2TV 주말 연속극 ‘첫사랑’의 책임 프로듀서다. 491회로 최장수 일일 연속극 기록을 보유한 ‘보통사람들’의 책임 프로듀서이며, 김희선, 배종옥, 배용준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사람들은 ‘전설의 고향’부터 떠올린다.
“1976년부터 드라마 PD로 일했어요. 1977년 10월에 시작한 ‘전설의 고향’은 PD로서 영글기 전에 만들었던 프로그램이죠. 저 스스로는 부끄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대표작으로 ‘전설의 고향’보다는 ‘보통사람들’을 꼽곤 하는데, 워낙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최 아무개 하면 ‘전설의 고향’부터 떠오르는 모양이에요.”
지금도 ‘납량 특집 드라마’의 대명사로 여겨지지만, 당시 파급력은 더욱 대단했다. TV 있는 집이라면 안 본 집이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전설의 고향’이 전파를 탄 다음 날이면 온통 전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2년 동안 프로그램을 제작한 불세출의 연출가임에도,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좋아할 만한 ‘전설’이란 소재 덕분에 인기 있었던 것이라며 겸손을 보인다.
마산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전설의 고향’ 역시 그가 유년 시절 접한 수많은 이야기들로부터 탄생했다. PD가 된 그는 연출자로서 어떤 점을 내세워야 성공할지 고심했고, 그동안 모아둔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야기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KBS에서 TV 드라마 방영을 시작한 지 10년이 막 지나던 즈음이었다. CG는커녕 촬영한 영상에 효과음을 넣는 편집 작업조차 다른 세상 이야기이던 시절, ‘전설 속 요괴와 귀신을 어떻게 구현하려고 하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려였다.
하지만 그는 제작을 밀어붙였다. 쑥을 태워 스튜디오에 연기를 자욱하게 내고, 시골 초가집을 표현하기 위해 스튜디오 바닥에 지푸라기를 잔뜩 가져다 깔았다. 물뿌리개로 카메라 렌즈 앞에서 물을 뿌려 비 오는 날씨를 연출했고,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뱀이나 구렁이를 직접 섭외(?)해 스튜디오에 풀기도 했다. 게다가 리얼함을 추구하는 연출자였던 그는 출연 배우에게 어떤 장치가 설치돼 있는지 미리 안내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 덕분에 촬영 중 실제로 울음을 터뜨리는 배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인 촬영 현장에서 생고생을 해야 하니, 배우고 제작진이고 ‘전설의 고향’ 참여를 원치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히 고생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프로그램을 크게 흥행시킨 것 말고도 구미호나 저승사자를 한국 납량물의 대표 캐릭터로 정립한 까닭이다. 하얀 소복과 하얗게 센 머리, 희고 큰 꼬리 아홉 개를 가진 구미호, 검은 갓과 검은 도포, 하얀 얼굴에 까만 입술의 저승사자. 이제는 당연하다 못해 자칫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최상식 PD가 고민 끝에 구현해낸 엄연한 창작물이다.
“저는 어릴 적에 여우 이야기를 많이 접했어요. 농한기인 겨울에는 사람들이 큰방에 모여서 새끼를 꼬면서 옛날이야기를 하곤 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 여우가 굉장히 많았고, 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소만큼 중요한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여우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죠. 하지만 1979년 처음 에피소드를 제작할 때만 해도 구미호는 ‘남자 간 빼먹는 여우 같은 여자’ 같은 욕으로나 쓰였어요. 관련한 설화를 아는 사람도 얼마 없었죠. 그래서인지 반응이 좋을 줄 전혀 몰랐습니다. 저를 포함한 제작진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했어요.”
1대 구미호를 연기한 배우 한혜숙은 길에 나서면 아이들이 ‘구미호 나타났다’며 돌을 던졌다. 방송 잘 보고 있다는 전화가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걸려오기도 했다. ‘전설의 고향’ 출연 섭외와 프로그램의 인기는 반비례했지만, 구미호만큼은 예외였다. 구미호로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이름 날리는 데 성공하면서 방송가에는 ‘여우 귀신이 도와줘 스타가 된다’는 소문까지 생겼다.
미래 콘텐츠 찾아 헤매는 이야기꾼
그의 취재 과정은 학자의 연구를 방불케 한다. 서재와 작업실, 거실을 가득 채운 책들과 고서, 그림 등 고문헌을 뒤지고, 취재하다 만난 동네 주민들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 기도 한다. 전설을 발견하면 현장에 직접 가서 증거물이 실제로 있는지, 전설에 등장하는 지역과 그 근방을 샅샅이 뒤진다. 이제는 동네의 오랜 전설을 아는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신 탓에 지역 주민이라도 전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네 여인 전설이 있는 서울 남산 부엉바위 약수터도 찾기 힘들었어요. 조사해보면 해방 전까지 한양, 경기 일대 최고의 약수터로 꼽혀서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데 남산을 아무리 오르내려도 전설에 등장하는 부엉바위 약수터는 없는 거예요. 2주일이 넘도록 찾다가 계단 난간을 넘고 가시덤불 밑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약수터가 있었어요. 하도 무당들이 찾아오니까 도시 정비를 하면서 그곳을 폐쇄해버렸던 거예요. 그러니 경비원도 주변 주민들도 전혀 몰랐던 거죠.”
그를 움직이는 건 사명감이다.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전국을 헤매며 현장의 영상을 담는 고생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1박 2일에 유튜브 방송 8~9회 분량을 취재하는 답사 일정이 점차 힘에 부친다. 그러나 그는 전설이 갖는 콘텐츠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만둘 수 없다. 한 가지 소재로 웹툰, TV 드라마, 뮤지컬, 영화까지 만드는 요즘이다. 전설이 빠지면 섭섭하다.
“전설은 이야기의 보물창고예요. 한국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구조의 이야기들이죠. 게다가 전설을 뜯어보면 당시 서민들이 무엇에 분노하거나 서러워했는지, 무엇을 꿈꿨는지 알 수 있어요. 인간의 삶과 죽음, 한(恨)이나 정(情)이 한데 들어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소스가 또 있을까요.”
그는 올해 초 국제영화제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안으면서 이를 증명해냈다.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측으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 11부 ‘짐승’ 편의 정재은 영화감독이 ‘전설의 고향-이어도’(1979)를 동반 초청작으로 직접 추천했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과거 선배들의 업적이 재조명된다는 점이 의미 있다’, ‘함께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다’라며 기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소식을 접하곤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처음 후배들한테 연락을 받고서는 ‘그걸 창피해서 어떻게 내느냐’면서 손사래를 쳤어요. 장비도 마땅치 않았고 편집은 거의 불가능한데다 막 컬러 영상이 도입되던 시절에 만든 영상이니 요즘 나온 작품들에 비하면 얼마나 어설프겠어요. 하지만 영화제 측에서 유튜브에 올라온 리마스터링 영상을 확인했고, 충분히 좋다며 재차 요청해서 결국 출품하게 됐죠. 그때 제주도에 태풍이 와서 비바람 부는 밖에서 힘들게 촬영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유튜브로 옮겨붙은 열정
열흘에 한 번, 10분 내외의 분량.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지난해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했다. ‘10대가 보지 않으면 유튜브로 성공할 수 없다’, ‘이미 야사나 민담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 너무 많아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등 대부분이 만류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제작을 밀어붙였다. 배우를 쓰는 대신 연필을 들었다. 직접 그린 삽화와 촬영해온 현장 영상,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메텔 역 등을 맡았던 유명 성우이자 아내 송도영의 더빙 음성을 합하면 ‘가내수공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퀄리티의 영상이 탄생한다.
유튜브 채널 운영은 순탄한 편이다. 구독자도 7만 명을 훌쩍 넘겼고, 영상의 조회수 추이도 좋다. 올린 지 한 달 만에 조회수 110만 회를 넘긴 영상도 있다. 야심차게 기획한 어버이날 특집 ‘고비사막을 넘은 효자’ 영상 조회수가 정작 낮다는 점이 아쉽지만 아무렴 괜찮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밑그림 작업이다.
지난해 4월부터 여태 그린 그림만 1000장이 넘는다. 이쯤 하면 실력이 늘 법도 하건만, 현장에서 연출할 때도 배우의 표정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그는 직접 그린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 마뜩찮아 애를 먹고 있다. ‘내가 남의 속에 들어앉는 게 아니고서야’ 맡길 수도 없는 일이라, 그는 오늘도 눈초리며 입 매무새를 그렸다 지우길 반복한다.
유튜브에는 과거 ‘전설의 고향’에서 다뤘던 전설과 새로운 전설에 대한 영상이 골고루 올라간다. 전설만 12년 넘도록 소개했지만 아직도 다루고 싶은 내용이 차고 넘친다. 일본에서 살았던, 살아야 했던 한국인들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리적·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이 깊은 나라예요. 이미 잘 알려진 귀무덤이나 코무덤 말고도 가야, 백제 때부터 임진왜란, 일제강점기까지 합치면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엄청날 거예요. 국내에서 다룰 전설도 많고 시간과 체력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다뤄보려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 갔을 때 작은 돌다리 간판석에 백제 관직과 이름이 새겨져 있거나, 얼굴 반절이 탄 채로 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우리나라 불상을 많이 봤어요. 그런 유물, 지명에 담긴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은퇴 후 학생들 앞에 설 때도 좋았지만 무언가 부족했나 보다. 촬영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꿈을 종종 꿨다. 무언가 잘못돼서 촬영 전체가 어그러지는 꿈은 귀신 꿈보다 끔찍했다. 20년 가까이 그를 쫓아다니던 꿈은 지난해 유튜브 시작과 함께 멎었다. 천직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그가 소망하듯, 이야기꾼이 꿰어낸 보배는 길이길이 K-콘텐츠의 든든한 원형이 되어줄 것이다.
청와대 연설비서관으로 일하다가 몸이 무너진 순간, 마치 파노라마처럼 빛을 봤다.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했을 때부터 ‘내 삶은 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매일 아침 400만 명에게 편지를 쓰며 꿈 너머 꿈을 꾸자고 이야기하게 된 계기다. 푸른 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속 맑은 옹달샘에서 명상을 전파하고 있는 고도원(70)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지금, 멈춰보세요! 들리나요?”
고 이사장의 말에 순간 숨을 참았다. 3초 정도 주변 모든 사물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마음에 고요함이 깃든다. 그때 마음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에는 내가 놓친 것들이 담겨 있다. 영감을 얻는 순간이다.
이유 없는 감사 ‘명상’
고도원 이사장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담당비서관이던 시절, 추천 도서에서 발췌한 구절과 함께 짧은 글을 적어 ‘고도원의 아침편지’라는 이름으로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의 글을 받아보는 독자가 100만 명이 넘어가자 2004년에는 아침편지문화재단을 세웠다. 고 이사장의 글을 받아보는 독자는 이제 약 400만 명에 이른다. 2010년에는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을 열고 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템플스테이처럼 옹달샘을 찾아 머무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이 늘었다.
“명상은 스스로 성찰하고 사색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궁극적인 목표는 이유 없이 감사하는 거죠. 삶에서 우주의 본질 같은 것이랄까요. 명상을 통해 사랑과 감사를 회복하는 거예요.”
명상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먼저 긴장을 풀고 몸을 이완한다. 이완의 방법으로 주로 사용되는 게 호흡이다. 천천히 걷는 것도, 길게 심호흡하는 것도, 느리게 춤을 추는 것도,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이완의 방법일 수 있다. 몸이 이완됐다면 하나에 몰입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 지금 마시고 있는 차, 어딘가를 향하는 내 걸음, 무엇이든 몰입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다 명상이 될 수 있어요. 청소할 때, 설거지할 때도 몰입할 수 있죠. 집중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하는 거고, 몰입은 집중한 줄도 모르게 놀이처럼 되는 거예요. 무엇보다 이 과정에 ‘기쁨’이 있어야 하죠.”
몰입을 잘했다면 마지막으로 변화의 단계가 온다.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다.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 몸이 회복되고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정화된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를 성찰하면서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진다.
“몸의 근육을 키울 때도 처음에는 1kg을 들었다면 다음에는 2kg, 5kg 무게를 늘려가잖아요. 정신도 그래요. 상처나 외로움을 견뎌내는 연습을 계속하면 마음 근육이 단단해지고 면역력이 생겨요.”
멈춤은 하나의 과정일 뿐
명상을 하려면 일단 멈춰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이완하고 몰입하려면 자연에 가깝고 조용한 곳이 좋다. 하지만 우리는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에 산다.
“거실이나 베란다에 식물을 두어보세요. 정 없으면 그냥 한 공간을 설정해두어도 돼요. 이곳은 내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해두는 거죠. 시끄럽거나 빛이 센 곳보다는 조용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좋겠죠. 이런 장소를 찾고 명상을 위한 환경을 설정하는 행위 자체도 즐거울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차를 마시면서, 이 시간이 주어져 감사하다고 느낀다면 이것도 좋은 멈춤의 장소가 되고 도구가 되는 거죠.”
조용한 장소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순간, 머릿속이 시끄러워지곤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떠오르거나, 미처 해결하지 못한 걱정들이 몰려온다. 상념(想念)이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 ‘멈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종을 치는 거예요. 밥을 먹다가 종을 치면 그대로 멈춰요. 그럼 맛이 느껴질 거예요. 머릿속으로 종을 쳤다고 생각하고, 그 순간 하던 행위를 멈춰보세요. 존재했지만 내가 소란해서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들릴 겁니다.”
고 이사장은 상념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상념이 떠오르는 그 순간마저 경험이 된다. 그는 상념을 메모지에 적어서 던져둔다. 머릿속을 비우기 위함이다.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지는 걸 느낄 때, 그 고요함에서 오는 희열을 얻는다. 멈춤은 나를 비우는 하나의 ‘과정’이다.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시대
고 이사장은 코로나19 이후 ‘외로움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왔다고 표현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난 2년은 고 이사장에게도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힐링 산업은 대면을 해야만 하는데, 모든 게 멈춰버렸기 때문.
“코로나19가 안겨준 현상 중 하나가 고립감과 외로움이죠.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는 코로나19를 통해 심화됐을 뿐 이전에도 있던 거예요. 고(故) 이어령 장관이 마지막으로 ‘사실 외로웠다’는 고백을 했어요.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이룬 사람도 느끼는 감정이죠.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이라는 자리도 생겼잖아요. 사회 전반으로 보면 외로움이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이고, 개인도 외로움을 남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된 거죠.”
2020년 6월 고 이사장은 ‘코로나블루 극복을 위한 대응 전략 세미나’에서 코로나19가 남긴 집단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사회적 생태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도 이 후유증을 다룰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코로나19 이전에도 고 이사장은 ‘사회적 치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깊은산속 옹달샘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세월호 유가족, 소방관 배우자 등을 초청해 휴식과 위로의 시간을 마련했다.
“의료 계통 종사자, 학교 선생님, 공직자, 실업 청년 등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인해 더 많아진 거예요. 우리 마음에 어떤 후유증을 남긴 거죠. 우리는 외로움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내면의 근육을 단단히 할 기회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외로움은 마음의 근육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예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라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명상을 다시 강조하게 되네요.(웃음)”
공부하는 중년과 꿈 너머 꿈
머릿속이 소란할 때 내리는 판단과 고요한 상태에서 내리는 판단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면 이제 용기를 내야 한다. 고 이사장은 중장년층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판단과 예지력으로 인생을 전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그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의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다. 블록체인 아카데미를 준비하는 이유다.
“중년 이후에는 실패를 만회할 시간이 별로 없죠. 그래서 훨씬 깊은 공부가 필요해요. 공부를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용기죠. 우리는 사회 흐름을 공부해야 돼요. 블록체인, 가상화폐, 메타버스, AI, ICT(정보통신기술), 새로운 흐름이죠.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어질 수밖에요.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벌어졌는지, 세상이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공부한 것을 토대로 방향 전환을 해야겠죠. 실패하더라도 최소화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거고요. 재수 없으면 100세까지 산다고 하는데, 50세에 시작해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고 이사장은 중년의 통찰과 혜안이 사회의 유산이 되기를 바란다. ‘꿈 너머 꿈’을 말하는 이유다. ‘꿈 너머 꿈’은 꿈을 설정할 때부터 꿈을 이룬 뒤 무엇을 할지까지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백만장자가 꿈이라면, 내가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치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자기 성취에서 이타성을 조금 가져보자는 거예요. 나에게도 의미 있고 다른 이에게도 의미 있는 쪽으로 인생 목표를 세워보는 거죠. 그래서 꿈 너머 꿈을 가진 사람은 이루지 않아도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이 행복하고 위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