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초반 정년퇴직과 함께 몸 좀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으로 가끔 타고 다니던 자전거로 장거리 라이딩이란 황당한 도전에 처음 나선 것은 지난해 가을. 동해안 최북단인 강원 고성군 금강산콘도에서 강릉시 정동진까지 2박 3일간의 해안선 라이딩에 나선 것이다. 심장이 방망이질 쳐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수백 번, 수천 번을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정동진까지의 라이딩에 성공했다. 비록 작디작은 성공이지만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던 필자는 올해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영원한 꿈인 낙동강 700리 길(3박 4일) 라디딩에 도전하기로 했다. 거리가 멀다 보니 혼자 달리는 것은 너무 외롭고 위험할 것 같아 필자가 속해 있는 자전거 동아리 SD21 회원 5명도 당돌한 도전에 동참하라고 사주했고 회원들도 흔쾌히 동의해줬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작은 도전기를 5회로 연재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출발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자동차에 자전거와 먹을 것을 싣고 경북 안동댐으로 향했다. 쾌청한 날씨는 왠지 모를 설렘으로 다가왔고 우리의 도전을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안동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쯤이었다. 낙동강 700리 길 자전거 라이더들이 도장 받는 안동보인증센터 주차장에서 모두 라이딩 복장으로 갈아입고 라이딩의 첫발을 뗐다. 오늘의 목표는 안동보에서 상주보까지다.
아직도 서늘한 기운이 있어 바람막이 옷을 입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등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자전거길 중간마다 나타나는 업힐을 오를 때는 숨이 막혀 오뉴월 개처럼 헐떡거렸다. 어쩔 수 없이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낙동강 700리 길의 첫 도입부는 무르익어가는 봄으로 상큼했다. 둑길에 가지런히 피어 있는 라일락 꽃의 향기가 코끝을 야릇하게 자극하고 서울에서는 아직은 철 이른 아카시아 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달콤한 향기와 백색의 우아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5월의 아카시아 꽃잎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린 시절 꽃잎을 입에 넣고 우걱거리면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낙동강 물줄기는 광활한 평야의 젖줄처럼 유유히 흐르고 물줄기가 휘돌아 치는 모퉁이마다 기암괴석과 수목이 어우러져 참으로 멋진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멋진 풍경 속으로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가히 한 폭의 그림이었다.
몇 개의 고개를 넘은 뒤 굽이굽이 강줄기를 따라 페달을 밟으니 어느덧 안동시 하회마을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잠시 가쁜 숨을 고른 뒤 다시 달려 예천군으로 접어들 무렵 온몸이 묵직하고 다리가 뻐근해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길가의 어떤 상점 앞에 멈춰 목을 축이는 동안에 우연히 해맑은 표정의 두 젊은이를 만났다. 그곳에서 만난 그들의 자전거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많은 짐이 실려 있었다. 숙식에 필요한 텐트와 일체의 장비를 갖추고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누군가 ‘청춘은 꽃’이라고 했던가?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그들은 부산까지 자전거로 이동한 다음 전남 목포시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점프해 목포에서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간다고 했다. 환상의 제주도 자전거 일주도로를 정복한 다음 서울로 돌아가는 방법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고 한다. 누구나 젊다고 해서 다 이런 도전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일행 모두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격려를 나눈 뒤 다시 출발해 달리는 내내 그들의 젊고, 건강한 향내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나만의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것은 중년들에겐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로망이다. 굳이 ‘님과 함께’ 가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때문에 내 집 짓기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시선을 사로잡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만약 직접 집 짓기에 성공한 사람이 세운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고제순(高齊淳·57) 원장의 흙집학교가 바로 그런 곳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고제순 원장은 애초에 농촌이나 건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곳에서 그는 ‘비판적 합리주의’로 잘 알려진 칼 포퍼(1902~1994)를 전공했다 .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원주에 자리를 잡고 연세대학교와 상지대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가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2년쯤 되던 시기였다.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의 물음에 대해 그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죠. 가장 큰 문제는 건강이었어요. 원주의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때는 ‘새집증후군’이라는 단어도 몰랐으니까 대처할 방법도 알 수 없었죠. 아토피와 천식이 생기더니, 나중에는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병도 얻었습니다.”
대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의식주를 공부하고,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衣) 식(食) 주(住)가 아니다. 의(醫) 식(食) 주(住)이다.
“현대사회에서 옷은 충분히 해결된 문제니까요. 우리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돌보는 것과 무엇을 먹는가, 어디에 사는가인데, 현대인들은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해결하기 어렵잖아요. 제도권에서 수십년 교육을 받았음에도 말이죠. 이런 삶의 기초적인 부분이 해결되어야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귀농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원주 외곽 지금의 자리, 현재는 흙집 학교도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에 터를 잡았다.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선생이 생을 마친, 지금의 토지문학관이 있는 자리 인근이다.
터를 잡는 것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 집에 대한 공부다. 그 전까지 못질 한 번 제대로 해본적이 없던 그였기에 공부를 기초부터 시작해야 했다. 공구도 조금씩 사 모았다. 황토로 벽돌을 만들 수 있게 유압식 장비까지 구입했다. 그런 준비과정을 통해 3년 만에 흙집을 완공했다.
왜 흙집이었을까? “다양한 형태의 집들 중에서 흙집을 선택한 것은 우선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많이 사용하는 참숯을 비롯해서 흙과 나무, 돌 등에서 나오는 좋은 기운이 이로운 에너지를 주거든요. 황토는 조직이 느슨해 온도와 습도를 자연적으로 조절해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태적인 집을 원했던 것도 이유입니다. 집의 수명이 다했을 때 자연으로 돌아가도 흙집은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요. 콘크리트로 지은 집은 뒤끝이 고약해요. 폐기물로 변해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니까.”
물론 흙집을 짓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집을 지을 당시 흙집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틈 날 때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옛집들을 살펴봤다.
가족과 함께 낙안읍성이나 용인민속촌, 안동 하회마을 등 옛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설계도 모눈종이를 사다가 직접 그려가면서 수정했다. 몇 번이나 수정해야 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물론 전기나 수도와 같은 전문적인 분야나 준공검사를 위한 행정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야 했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은 혼자 해내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해냈다. 2000년 5월부터 11월까지 반년이 걸렸다. 그렇게 완성된 첫 번째 흙집은 여전히 아름드리나무처럼 그가 기대고 쉴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 두 딸을 위해 만들었던 다락방부터 볕이 잘 드는 거실, 일하기 편해 보이는 부엌 등 집안 곳곳에 그의 정성이 배어 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이 좋은 것을 혼자만 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학교였다. 이야기 도중 그는 책을 한 권 소개했는데, 후나세 스케(船瀨俊介)의 이다. 그 책의 부제는 ‘콘크리트에 살면 9년 일찍 죽는다’인데, 다소 과격해 보이기까지 하다. “흙집에서 사니 너무 좋더라고요. 4년 동안이나 앓고 있던 질환들도 싹 나았어요. 나는 이렇게 좋은데, 사람들은 평생 일하고 돈을 모아 몸에 좋지 않은 아파트를 장만한다는 것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화가 나더라고요. 누군가 이 흙집을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건축 전문가라는 분들은 대부분 콘크리트 전문가들이니 할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래서 경험은 짧지만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포털 사이트 다음에 카페를 개설하고 ‘흙처럼 아쉬람’을 시작했죠.”
이름에 ‘흙처럼’이란 단어를 쓴 것은 그의 호 여토(如土)에서 따온 것이다. 자연 속에서 흙처럼 살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것. 또 다른 단어 ‘아쉬람’은 인도 힌두교도들의 명상을 위한 수행처, 즉 기거하는 집이나 촌락을 뜻한다. 인도 전역에는 수행자들을 위한 아쉬람들이 곳곳에 있고,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가 지냈던 간디 아쉬람은 수행자들이 순례하는 성지로 꼽히기도 한다.
고 원장이 학교 이름을 아쉬람으로 지은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노동을 넘어 정신 수양과 자기 공부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수행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교육을 위해 그는 그간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흙집 건축이론을 보완하고 체계화해야 했다. 어떻게 흙집을 지어야 이상적인 구조가 되는지, 구조적으로 어떤 요소들을 갖춰야 튼튼한 집을 얻는지, 단열과 건축공법, 디자인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등이다. 문득 이런 이론적 정리를 위해 그가 찾았던 스승이 궁금해지는데,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온다.
“저에게 집 짓기를 알려 준 스승이 있습니다. 바로 새와 벌이죠. 풀숲에서 새의 둥지를 살펴보다 그 구조적 완벽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어요. 벌집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집 짓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배워야 할 점들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자연 소재로 직접 짓고, 좋은 에너지가 넘치는 집을 튼튼하게 짓는다는 점이죠.”
그가 말하는 좋은 에너지가 넘치는 집은 방의 형태를 뜻한다. 대칭 형태의 원형이나 육각형, 팔각형 형태의 방 구조를 갖는 집. 세계적인 명상 공간들도 비슷한 구조다. 이런 구조는 에너지가 집중되는 특징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흙집학교 ‘흙처럼 아쉬람’의 교육과정에서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철학, 그중에서도 생명철학을 토대로 한 구체적인 기술과 함께 생태적인 삶에 대해 전달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는 말 그대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어요. 나와 남, 나와 사물을 떼어 놓고 생각하는 분리의식이죠. 하지만 실제로 우주에서 나만 잘되고, 나만 행복한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이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남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 중심적인 생명관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연과 인간은 분리될 수 없고,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합일 의식을 통해 생태학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죠.”
그의 흙집에 대한 철학은 전문가들에게도 인정받아 명지대학교에서 건축과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적도 있다고. 그가 운영하는 흙집학교를 건축과 교수나 건축사들이 찾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2004년 시작한 학교는 벌써 초급과정은 103기, 종합과정은 94기까지 배출했다. 인원으로 따지면 2700명 정도 되는 적지 않은 숫자다. 한 기수에 15~20명으로 운영되는 데, 초급과정은 이론 중심으로 3일 동안 진행되고, 종합과정은 13일간 이론뿐만 아니라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실습과 함께 가르친다. 학생은 주로 40~50대가 많고, 60대도 적지 않다. 30대나 여성도 기수마다 한 명씩은 있다고 한다.
“종합과정은 공구 사용법 같은 기초 지식에서부터 거푸집 설치, 구들이나 골조의 구성, 설비나 전기까지 모든 부분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함께 배운 동기끼리는 SNS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통하게 되는데, 안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집 지을 때 서로 품앗이를 하는 전통이 생겼어요. 건축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도 줄이고, 아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런 식으로 본인들의 집을 지은 졸업생의 수는 적지 않다. 학교 쪽에 알려진 것만 따져 봐도 30% 정도 직접 지은 것으로 추산된다고. 숫자로 따지면 900채 정도 되는 셈이다. ‘흙처럼 아쉬람’의 다음 카페(cafe.daum.net/mudhouse)를 방문하면 졸업생들이 직접 건축한 흙집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집을 짓으면 실제로 어느 정도 건축비를 절약할 수 있을까. 흙집학교에서 알려주는 방식의 단단한 집을 시공사를 통해 지으려면 토지 매입가를 제외하고 3.3㎡당 약 6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인건비를 제외하고 자재비만 따지면 약 250만원이 소요돼 절반 이상 절약이 가능하다고 고 원장은 설명했다. 예를 들어 165㎡(50평) 정도의 흙집을 짓는다면 1억2500만원에 나만의 집을 갖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시공사에 의뢰했을 때에 비해 1억7500만원을 절약한 금액이다. 물론 모든 건축 과정을 내 손으로 직접 하는 수고로움은 즐거운 마음으로 감수해야 한다.
흙집에 대한 그의 또 다른 꿈은 무엇일까? 그는 현실 속에서의 ‘흙집 전도사’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저처럼 자연으로 들어와 흙집을 짓고 사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현대인들에게 이런 삶은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자연 속 흙집으로 올 수 없다면, 흙집이 그들에게 가는 것이 맞지 않나하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아파트를 흙집공법으로 짓는다든가, 연립을 흙집으로 리모델링하는 형태의 일들 말이죠. 아직 구체적으로 시도는 못 해보고 있지만, 충분히 사업성도 있고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흙집 알리는 일을 더 열심히 하다보면 충분히 현실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따라 신촌 길을 걷고 싶었다. 봄바람이 불던 첫날.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걷던 길 멀리서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다다른 곳은 신촌 홍익문고 앞 피아노. 많은 젊은이가 멈춰 서서 익숙한 선율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갈색 모자에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길 위의 피아니스트 장요한(張요한·62)씨를 만났다.
차 한잔 함께 하실래요?
그의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봄이라지만 밤은 겨울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가 하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젊은이들의 장소에 나와 피아노를 치는지 묻고 싶어졌다.
“그저 취미로 피아노를 칩니다. 일과를 마치고 피아노 칠 수 있는 곳을 찾아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좀 풀린 거 같아서 신촌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니까 좋았습니다.”
겨울 동안 장요한씨는 신촌이 아닌 여의도 IFC몰 CGV영화관 안에 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20분이고 30분이고 피아노를 쳤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날이면 영화관 측에서 관객(?)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수줍음이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연주를 좀 해서 그런 지 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촌에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나온 겁니다.”
장요한씨가 최근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작년 3월 인사동에 설치된 ‘달려라 피아노’를 알고부터다. ‘달려라 피아노’는 연주되지 않거나 거실, 공공시설에 방치된 중고 피아노를 기증받아 화가들이 새롭게 디자인한 뒤, 지역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다. 2008년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해 한국에는 신촌 홍익문고 앞, 인사동, 선유도 공원, 어린이 대공원, 동대문 DDP 등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번지고 있다.
장요한씨는 인사동과 신촌, 여의도를 오가며 매일 연주를 했다. 피아노 칠 때는 모르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면 몸이 아주 힘들었다.
“쉬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퇴근만 하면 자꾸 발걸음이 피아노 있는 쪽으로 향하더라고요. 가끔은 왜 내가 아프면서까지 피아노를 치고 고생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중독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치고 난 뒤 쉬어야 하는데 박수를 받으면 연주를 끊을 수 없다. 몸이 좀 힘들어도 그가 연주하는 이유다.
피아노는 배운 적이 없다? 천재 아니십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풍금을 접한 것이 피아노를 치는 계기가 됐다.
“1974년 어느 날, 커피숍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었어요. 원래는 기타를 배우려고 했다가 때려치우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음악과 함께한 세월이다. 중·고등학교 악대부원으로 활동할 때는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악대부 유니폼을 입고 안동 시내 시가행진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취미활동도, 특별활동도 늘 음악을 선택했습니다.”
학교 음악선생님이 음대에 가라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고향인 안동에서 대구로 유학을 가 큰누님 집에서 살았다. 등교하기 전 피아노를 30분정도 치고 갔다. 전공자도 아닌 고등학생이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아니었나 싶다. 작곡가 출신이던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을 대신해 수업 시간에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는 장요한씨. 그런 그에게 음악선생님은 음대에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장요한씨는 음악은 그냥 취미로 여긴다며 음악선생님의 추천을 거절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대를 준비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 당시에 음악선생님이 대구시립 교향악단 지휘자였거든요. 음대에 가라고 했는데 저는 1년 더 공부해서 치과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피아노를 쳤다. 손님이 없는 레스토랑이나 피아노가 있던 대구교대 안에 들어가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가 남아 있는 듯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에 상당히 소질은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 재능을 알아보고 잘 키워줬으면 어땠을까요?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 살면서 음악을 더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과거의 이루지 못한 꿈이 미련으로 남아 장요한씨를 길 위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게 아닐까.
“그래도 대학 다닐 때 학교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조용한 음악이 좋지만 저도 나름 20대 때는 록 음악이 좋았습니다.”
그는 경북대 의대 그룹사운드 ‘메디컬 사운드’ 2기 출신이다. 본과에 올라가기 전까지 활동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는데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의 그룹사운드다.
낮에는 치과의사 장요한의 삶을 삽니다
장요한씨의 본업은 치과의사다.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1기로 졸업한 뒤 35년을 치과의사로 살고 있다. 최근 1년 사이 피아노를 치는 삶에 심취한 듯 보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는 순간 영락없는 의사 선생님으로 돌변한다.
“피아노만 치고 치과 진료에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최대한 정직한 진료로 꼼꼼하게 환자를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병원에는 과잉 진료를 피하는 방법도 적어두었습니다. 은퇴하는 날까지 양심적인 치과의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장요한씨는 마음을 비우고 일반 환자만 치료하고 있다. 임플란트 시술도 안 한다. 엑스레이 찍기, 스케일링도 장요한씨 스스로 한다.
“속은 편합니다. 수익이 별로 없는 게 문제지만, 돈에 대해 신경을 별로 안 써도 됩니다. 내 월급 누가 주는 거도 아니고 진료가 끝나면 저는 피아노 치러 나갑니다.”
치과의사를 하는 35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만큼 치과의사로서 열심히 살았다고 말한다.
“제 나이는 이제 은퇴할 나이잖아요. 하루에 받을 만큼만 예약한 환자들을 봐줍니다. 환자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봐서 에너지가 축적이 된 건지. 그래서 아마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요한씨는 피아노라도 안 쳤으면 서울서 살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힐링 되는 연주 선물하고파
“저는 레퍼토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냥 놔두면 2~3시간 칠 수도 있어요.”
장요한씨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비롯해 영화 OST , , , 등 피아노로 치기 편하고 인기 좋은 음악들을 고른다.
“힐링이 되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제가 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보면 따뜻한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 연주가 편하고 좋다며 다가와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장요한 씨는 좋은 연주를 위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단다.
“어떤 팝송이 치고 싶다고 생각하면 원곡을 계속 열심히 듣습니다. 듣다 보면 내가 따라 할 수 있고 딱 듣기 좋은 부분들이 들립니다.”
영어 어휘력을 늘리듯이 그렇게 차근차근 손에 건반의 느낌을 익힌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다 잘 넘어가지 않고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잘 풀릴 때까지 연습한다.
“반복해서 하나하나 치다 보면 되더라고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던 악보도 치다 보니 됐습니다.”
장요한씨는 은퇴 후 의료 시설이 취약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는 사람들도 많고 또 치료해 줄 의사도 많다고 느낀다.
“치아 미백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하면서 돈을 번다는데 저는 그런 거하고 멀어요.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가족들이 서울이 더 좋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피아노 치는 게 그리울 거 같아 걱정이다. “내일은 뭐 하실 건가?”라는 질문에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니 여의도에 가서 피아노를 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장요한씨. 1년 넘게 그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피아노 연주를 위해 그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자제한다. 봄이 되면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피아노를 칠 생각이라는 장요한씨. 오늘 혹시 시간이 된다면 여의도 IFC몰로 가보기를 권한다. 산뜻한 표정의 치과의사, 아니 밤의 피아니스트 장요한씨를 만날 수 있다.
아침 교육현장에서 열성 참석자를 만났다. 경제 관료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경제 부분 전문성의 최고 자리라 할 수 있는 산업자원부 장관까지 지낸 이다. 그것도 모자라 경제 5단체 가운데 2개 단체의 수장을 지내고, 대기업 CEO도 두 번이나 맡는 진기록도 보유했다. 바로 현 LG상사 고문이자,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이희범(李熙範·66) 회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그런 그가 평범한 화요일 새벽 조찬 포럼에 나타났다. 형식적인 참석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포럼의 참석자 대표라 할 수 있는 총원우회 회장을 맡고, 이·취임식까지 가졌다.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aSSIST(서울과학종합대학원)의 CEO 포럼과의 인연을 묻자 그는 처음엔 입장이 달랐다고 했다.
“이 포럼이 처음 생긴 것이 2005년이니까, 장관 재직시절이었어요. aSSIST측에서 요청이 와서 CEO 과정의 강사로써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좋은 분들과의 매력을 느껴 눌러앉게 되었고,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아마 현재 서울 시내에만 경영자 포럼이나 모임이 100개 이상 되겠지만, 여기가 교육과정이나 내용이 다양하다고 생각됩니다. 참석자들도 중견기업의 CEO나 공직자, 민간연구소 연구원 등 다양해서, 여러 입장에서의 다채로운 의견을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이 안에서 비즈니스도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식견도 넓어지기도 하고 말이죠.”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모임을 참석해 열의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형식적인 것과 거리가 있다. 그의 배움에 대한 진정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독 국내에서 이렇게 조찬 모임이나 경영자 과정의 인기가 많은 것은 한국의 높은 교육열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칭찬한 적이 있잖아요. 제가 공직 시절 대통령을 보좌해서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현지 관계부처 장관과의 미팅을 조찬으로 추진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쪽에서 놀라더라고요. 아침은 가족과 함께 먹는 것 아니냐고. 아예 조찬회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것이죠. 결국 빠듯한 일정 탓에 무리하게 오전에 약속을 잡아서는, 수위도 출근 안 한 건물의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그 장관과 단 둘이 마주앉아 회의를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다면 이런 현상이 꼭 우리만의 일일까? 이에 대해 이제 우리보다 더한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중국이다.
“중국에서도 우리와 같은 경영자 모임이 점차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6개월 과정의 비용이 4만달러 수준이니 가격은 국내 수준보다 훨씬 높은 편이죠. 게다가 모임도 오전에 잠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말에 베이징(北京)이나 상하이(上海), 선전(深?) 등을 돌며 1박 2일 일정으로 해요. 그들에게 힘들거나 비싸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봐요. 이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상품 하나를 잘 만들게 되면 그를 통해 얻는 수익이 얼마인데 그런 소리를 하냐는 것이죠. 그들의 정보와 아이디어에 대한 가치 평가는 어떤지, 기업 경영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경험이었죠. 매일 빅데이터들이 계속 쌓이고 이를 활용하는 기업의 패러다임이 매일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경영자들에게 이런 모임들은 트렌드를 읽고, 도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정가에서 기업가로 변화하는 동안 그는 다양한 기관, 다양한 조직에서 변화의 순간을 맞이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이 모임을 놓지 않았다. CEO 포럼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마 산업자원부 차관을 맡은 뒤 바로 장관에 임명됐으면 많은 어려움을 느꼈을 겁니다. 그 사이에 한국생산성본부 회장과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맡으면서 관료 시절엔 알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체득하게 됐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우문현답,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것도 이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산업부 후배들도 이제 1일(日) 1사(社) 방문을 유지하고, 현장의 요구사항을 경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 경영자가 되고 나서는 그간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배웠다고 했다. 공직과 기업 간 시각차가 분명히 존재하고, 공직자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애정을 갖고 기업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는 겸손이 섞여 있지만, 실제로 그는 현장을 찾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2000년 산업자원부 자원정책실장 시절, 발전사업 분할 때 한국전력 노조가 전면 파업을 선언하자,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노조원들의 집결지를 찾아 사태 해결에 앞장선 일화는 유명하다. 또 장관 재임 시절에는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도시락 미팅’을 가지며, 일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수첩 사이에 노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흔히 포스트잇으로 부르는 접착식 메모지다. 그는 미소지으며 “제가 가장 애용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창조의 노란 패드’라고 부르고 있어요. 작성한 정보가 완료되지 않고 계속 업데이트할 수 있어 애용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이 수첩 안 메모지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공포의 노란 패드’. 사무관, 서기관 때부터 일벌레로 유명했던 그를 지칭한 별명이다. 수치 하나까지 틀림없이 기억하려는 철저한 그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따로 묻진 않았지만 또 다른 별명은 아마 그도 알고 있으리라.
그의 꼼꼼함을 알 수 있는 또다른 모습은 안주머니 가득 자리 잡고 있는 샤프들이다. 몽블랑 같은 명품이 자리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샤프 중에서도 흔히 우리가 ‘제도 샤프’라 부르는 흔하디 흔한 물건이다. 그는 “샤프로 작성하면 쓰고 지울 수 있으니까, 다양한 수치나 정보를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설명했다. 결국 두 가지 키워드다. 정보와 업데이트. 여러 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총원우회 회장을 수락한 배경에 대해서는 이제 좀 한가해졌다고 대답하며 소탈한 웃음을 보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장에서 물러난 후 30개가 넘는 직함을 함께 내려놓았다. 한때는 국내뿐만 아니라 두바이 아부다비 왕립 연구소 자문위원이나, 에티오피아의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 참여 등 여러 활동에 참여했던 그다.
“10기까지는 신입 기수 내에서 회장을 뽑았지만, 이제 모임이 성장한 만큼 본격적인 사업진행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이 형성되면서 요청이 있었어요. 저도 나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교류를 강화하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순 교류를 떠나 전체 790명 회원을 위해 소모임을 활성화하고, 문화예술 공연 지원이나 사회공헌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입니다.”
이희범 회장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정무직 공무원을 거친 뒤 기업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LG상사 고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이공계 출신 최초의 행시 수석 합격자로도 잘 알려졌다. 상공자원부 사무관을 시작으로, 주EU사무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산업자원부 차관 등 경제 관료로 이름을 알렸고, 공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003년 12월부터 2006년 2월까지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장관 퇴임 뒤에는 한국무역협회장을 역임하고, 2009년 STX그룹 에너지 부문 총괄 회장으로 영입되며 기업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2013년 LG상사 고문으로 이직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번 호부터 우리의 역사로 돌아가자. 한국사에서 ‘최대의 위기’를 꼽는다면 어떤 사건일까? 한 국가의 역사에서 ‘최대의 위기’란 일반적으로 국가멸망을 말하겠지만 보다 높은 차원인 민족말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역사에는 고대로부터 고구려의 수-당 전쟁, 몽고의 고려침공과 지배, 임진왜란, 한일 강제합방, 6·25전쟁 등등...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신라의 당에 대한 항쟁을 꼽는다. 1950년대에 중학생이었던 70대 중반 이상은 이 시대의 이야기로 국어교과서에서 유치진(柳致眞) 극본 ‘원술랑’을 읽었을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국가가 멸망하거나 외세에 종속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한민족 자체는 말살되지 않았다. 국가를 멸망케 한 일본의 강제합방이 100~200년 지속되었다면 민족말살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123년 간(1795~1918) 국가가 없었던 폴란드도 “국가는 사라졌지만 민족은 영원하다”고 말했다. 일단 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되면 완전 동화나 민족말살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산재했던 국가들을 ‘지리적’ 인접성을 기준으로 중국 정사(正史)에서 ‘조선’이라는 항목에 기록하고 있다. 이들 간에는 언어, 풍습에서 유사성이 있었던 것 같다. 중국 남조 양(梁, 502~557)의 역사서인 ‘양서(梁書)’에는 신라인과 중국인 간의 대화에 대해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고 하니 백제와 신라 간에는 말이 통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동일 민족이라는 관념은 당시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신라 이후 같은 민족, 한민족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신라의 대당항쟁 시기는 일반적으로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676년까지 8년으로 잡는다. 그러나 당의 병탄 야욕과 신라의 저항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시작되니 16년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신라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며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당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으로 강력하게 맞서며, 때로는 외교술로 굽히면서 갈등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여 오늘날 남북한 휴전선과 유사한 선에서 ‘한민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성당(盛唐)시기 중국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으로나 군사전략 면에서 성숙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연히 신라의 대당항쟁은 손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곧 바로 백제인들과 신라를 반목시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으로 신라를 견제했다. 백제 멸망 2개월 후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곧 이어 당에 포로로 끌려간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귀국시켜 웅진도독으로 임명, 신라와 동등한 자격으로 맹약을 맺게 하는 등 갈등을 부추긴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도 당이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게 넘겨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삼국을 모두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드디어 행동에 나서게 된다. 당이 서쪽에서 토번(吐蕃)과의 전쟁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670년 3월 압록강을 넘어 당군에 선제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군이 당군을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유민 부대가 당에 소속된 말갈군을 공격한 것이다. 말갈은 과거 고구려에 부속된 민족이니 고구려의 응징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군이 직접 나서자 곧 물러나서 ‘지켰다.’ 당군과의 직접 대결은 회피한 것이다. 정치적 수단으로 군사적 갈등을 이용할 때는 낮은 단계부터 갈등을 고조시킨다(escalate). 갈등을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볼 때 중간단계가 많을수록 대화와 타협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당을 상대로 한 교전도 대규모 전투보다는 분쟁을 ‘국지화’시켜 실리를 취하면서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동시에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고 있으며 백제라는 ‘악당’이 당과 신라를 이간질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당에 전달한다. 반면 고구려 왕족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 고구려 유민을 포섭한다. 주적을 단일화시키면서 부차적인 적[副敵]과 연합하는 전형적인 통일전선 전략인 것이다. 이같이 다양한 신라의 전략에 대해 당은 분노한다. 그러나 고구려 옛 영역인 요동이나 돌궐과의 서북 변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 문제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해야 했다. 정치적으로는 서신을 통해 신라의 ‘배반’을 책망하고 문무왕을 ‘파면’한 뒤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봉한다. 조공관계에서 왕의 파면은 최고의 징벌이라 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는 672년 중반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 혹은 경기도 화성군)에서 신라군을 격파하여 신라 전체를 공황상태에 빠트린다. 이후 전투에서 양측은 일진일퇴하며 항쟁 후반기에는 신라가 소규모 전투에서 ‘18차례’ 승리하지만 약자의 승리는 인적·물적 자원을 고갈시킬 뿐이었다. 당 역시 서북 지역과 만주에서 군사령부 격인 ‘안동도호부’를 매년 이동할 정도로 정세가 불안하자 신라의 ‘사죄사절’을 맞아 문무왕을 ‘용서’하는 선에서 분쟁을 매듭짓는다.
신라는 최대 목표는 아닐지라도 ‘고구려 남쪽 국경’인 임진강 유역을 포함한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당의 위협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당으로서도 이 선에서 신라의 북진이 저지된다면, 당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어느 일방의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인 것이다. 60년이 지나 문무왕의 손자인 성덕왕 35년(736)에 이르러 당이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 넘겨준다. 신라의 북진은 또 다른 변수인 발해의 등장에 기인한 것이다.
신라의 대당항쟁은 삼국통일 이후 ‘한민족’의 정체성을 구체화되려는 여정의 출발점에서 부딪친 시련이었던 것이다.
>> 구대열 (具?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날씨가 쌀쌀할수록 국밥의 풍미는 더해간다. 몸이 차면 뜨끈한 국물이 더욱 반가울 테니 말이다. 칼바람이 불더라도 국밥만큼은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이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큼지막한 솥에 갖은 재료들을 팍팍 넣어 오래 푹푹 끓여야 제맛이 우러나는데, 집에 있는 작은 냄비 정도로는 그 농염한 맛을 따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뜨거운 국물에 더운밥을 말면 뜨끈함이 배가된다. 이렇게 내놓는 것이 국밥의 정석이라 하겠다. 요즘은 따로국밥이라 하여 국과 밥을 따로 먹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후후 불어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을 때의 시원함은 그 육수보다 매력적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해장술을 부르는 ‘시골집’
술을 마신 다음 날 식사로 해장을 하며 곁들이는 술을 흔히들 ‘해장술’이라고 한다. 사실상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하지만 주당들에겐 그만한 해장이 또 없다. 그렇다고 커피 마시듯 술만 들이켜는 것이 아니니 그에 맞는 식사도 중요하겠다. 해장술의 맛을 아는 이들에게 속도 든든하게 채워주고 안주로도 손색없는 ‘시골집’의 ‘시골장터국밥’을 추천한다.
숙취 해소 효과가 있는 선지를 듬뿍 넣고 사태와 파, 무 등을 곁들여 얼큰하게 끓여낸 옛날식 소고기장터국밥이다. 국물이 약간 걸쭉하면서 간이 센 편이기 때문에 안주로 즐겨 찾는 손님들이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 ‘술국’이라는 메뉴를 따로 파는데, 실제로는 시골장터국밥과 똑같고 공깃밥만 없는 것이다. 가격도 딱 공깃밥만큼 1000원 차이다. (시골장터국밥 8000원, 술국 7000원)
저녁시간이 되면 시골집은 밥집보다는 술집에 가까워진다. 저녁 6시 이후에만 판매하는 전 메뉴를 비롯해 석쇠불고기, 육회, 안동사발문어, 홍어무침 등 다양한 안주에 술자리를 즐기러 오는 이들로 까딱하면 줄을 서야 한다. 이곳이 술을 부르는 이유는 맛좋은 음식에도 있지만 시골집이라는 이름처럼 구수하고 편안한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가운데 마당을 두고 있는 한옥 구조가 정취를 더하고, 식당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국물이 침샘을 자극한다.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2가 12-1
영업시간 11:30~22:00 (일요일 21시까지)
문의 02-734-0525
◇삼삼한 손맛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밥풀꽃’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날로 바뀌는 홍대의 맛집들 속에서도 10년째 같은 자리에서 며느리처럼 지조 있는 맛을 내는 곳이다. 대구에서 10여 년간 식당을 운영했던 주인장이 깊은 손맛으로 매일 변함없이 국밥을 끓이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동안 써온 뚝배기 그릇을 대신해 현대식 옹기그릇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맛만큼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 팔기 위한 국밥이 아닌 내 자식을 먹일 밥상을 차린다는 마음이 그 비결이다. 국밥 사진을 찍으려 하자 주인장은 “그저 내 집에서 먹는다 생각하고 하기 때문에 예쁘게 담고 꾸밀 줄은 몰라요. 보기엔 투박해도 정성을 다했으니 한번 드셔 보세요”라며 새색시처럼 수줍게 국밥을 내밀었다. 모양새는 꾸밈없음 그 자체였다. 맛 역시 삼삼한 간에 평범한 재료들이 들어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먹는 내내 입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극적인 맛과 재료로 이목을 끄는 여느 맛집과는 다른 수수한 매력이 느껴지는 곳이다. 상상 그 이상의 맛은 아닐지라도 가장 이상적인 국밥 맛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국밥은 다섯 가지가 있다. 비슷해 보일지라도 소고기무국밥(맑은 국)에는 양지 육수를, 소고기국밥(얼큰한 국)과 소고기미역국밥에는 양지와 사태 육수를, 시래기국밥과 김치국밥에는 맑은 멸치 육수를 사용한다. 시래기국밥에는 들깻가루를 약간 넣어 구수한 맛을 더했다. 다른 네 종류의 국밥과는 다르게 김치국밥만은 국과 밥을 함께 끓여 내고 담는 그릇도 뚝배기를 사용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더 맛있으니까. 밥의 풀기가 더해져 살짝 걸쭉해진 국물이 허기진 속을 더욱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계란을 풀어먹는 손님들이 있어 날계란이 함께 나오지만 주인장은 그대로 먹는 것을 권한다.
주소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15길 38
영업시간 11:00~23:00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 휴무)
문의 02-332-2479
가격 소고기무국밥 9000원, 소고기국밥·소고기미역국밥·김치국밥 7000원, 시래기국밥 6000원, 오늘의 밥상 3만2000원(2人)
◇쌈 싸먹는 나주국밥 ‘삼태기’
국밥을 먹을 때면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이 바삐 움직이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젓가락이 할 일이 더 많다. 바로 쌈을 싸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쌈이라 하면, 상추쌈 정도를 떠올리겠지만 이곳에서는 김이 주인공이다. 식당에서 소개하는 방법대로 하자면, 먼저 김 위에 무말랭이무침을 올리고 그 위에 콩나물파절이와 국밥에 들어 있는 고기를 차례로 얹은 뒤 김으로 잘 싸서 먹으면 된다.
지방이 적은 소 앞다리 부위를 사용해 고기 맛이 담백한데, 국물이 맑아 일반 국밥처럼 말아먹게 되면 조금 심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방법대로 쌈을 싸먹으면 다양한 식감을 느낄 수 있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개하는 방법에는 반찬으로 나오는 신김치를 쌈에 넣지는 않지만 취향에 따라 함께 즐겨보아도 색다른 맛을 경험할 수 있다. 간단하게 국밥 한 그릇 먹으러 가서 귀찮게 쌈을 싸먹겠나 싶을 수 있어도 먹다 보면 중독되는 그 묘미에 손놀림이 분주해질 것이다. 쉽게 손을 뗄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국밥에 들어간 고기의 양이 꽤 푸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공깃밥을 반 정도만 채운다. 양이 부족하더라도 공깃밥 추가는 공짜라 부담 없다.
‘삼태기’ 1호점은 여의도역 인근에 있는데 올해 KBS별관 근처에 2호점을 열었다. 그 기념으로 올 한 해 동안 2호점에서는 1호점보다 2000원 더 저렴하게 나주국밥을 판매하고 있다(1호점 1만원, 2호점 8000원). 두 곳은 저녁메뉴에도 차이가 있다. 1호점은 삼겹살을, 2호점은 무쌈, 깻잎, 파채를 곁들여 쌈 싸먹는 냄비수육을 판매하고 있으니 취향에 따라 구분해 가보는 것이 좋겠다.
주소 (1호점)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08 아일렉스상가 2층 (2호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45-19 서린빌딩 2층
영업시간 (1호점) 11:00~22:30 (2호점) 10:00~22:00/ 일요일, 공휴일 휴무
문의 (1호점) 02-786-4579 (2호점) 02-761-5957
음반을 모으면서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은 물론 분야별로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게 되자 이제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것까지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전에 소개했던, 중학교 때 본 라는 영화의 OST(Original Sound Track)로 음반가게에만 가면 한 번씩은 꼭 확인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1997년쯤 미국에 갔을 때, 그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틈만 나면 음반가게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타워 레코드 체인점에 들러 음반을 보다가 우연히 한쪽 구석에 비디오 코너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비디오에 별 관심이 없었고 집에 VTR조차 없었지만 그 전에는 음반가게에서 비디오를 파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지라 호기심도 생기고 또 시간도 좀 있고 하여 그쪽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아, 그곳에 그렇게 찾아다니던 가 그것도 영화까지 볼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로 있지 않은가.
우연히 조우한 ‘사랑의 종이 울릴 때’의 감동
그뿐이 아니었다. 청순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젊은 시절 나의 우상 중 하나였던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 ‘녹색의 장원(Green Mansion)’과 나탈리 우드의 ‘초원의 빛’도 있었고 이름만 들어도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마릴린 먼로의 ‘나이아가라’와 ‘돌아오지 않는 강’, 진 켈리와 데비 레이놀즈의 춤과 노래가 너무나도 신나던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도 있었다. 또 안동에서 군 복무 중 휴가를 가던 길에 기차시간이 남아 안동극장에 들어가서 보다가 기차시간이 되어 중간에서 나오는 바람에 늘 결말이 궁금했던 ‘피와 장미(Blood And Roses)’라는 영화도 있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옛날의 명화들이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비디오에는 워낙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터라 이 순간은 필자에게 또 하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잊혀졌던 영화에 대한 향수가 다시 되살아나면서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나 해야 할까, 타워 레코드에서 이들 영화 외에도 전에 본 기억이 있던 상당수의 비디오테이프를 더 샀고 귀국해서는 바로 VTR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국내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주로 인터넷을 통해 미국에서 옛날 영화들을 사 모은 것이 200여 개를 넘어섰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우리나라에도 옛날 영화들이 비디오로 출시되고 있다는 것, 비디오 테이프의 총판들이 황학동 도깨비시장에 모여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어 이때부터 틈나는 대로 주로 황학동과 그 외에도 비디오를 파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50, 60년대의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유럽영화의 경우, 꽤 인기가 있었던 것들 중 국내에서는 물론 인터넷에서도 팔지 않는 것이 여러 개 있었으나 얼마 전 그들 중 몇 가지는 일본에서는 발매되었음을 알게 되어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와 ‘부베의 연인’, ‘지하실의 멜로디’를 일본어 자막판으로 구했고 그 후 일본을 자주 다니던 고교동창 K군을 통해 ‘형사’와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도 구할 수 있었다.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
알리다 켈리가 구슬픈 목소리로 부르는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라는 주제가가 흐르는 가운데 고도(古都) 로마의 한 주택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도둑이 도망가는 장면으로 ‘형사’라는 영화는 시작된다. 임신한 애인에게 목돈을 마련해 주려고 도둑질을 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돼 결국 경찰에 잡혀 연행되어 가는 애인 디오메데의 이름을 절규하며 뒤쫓아가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는 영화도 영화지만 주제가가 엄청나게 유행했다.
한편 는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본 미국의 흑백 인종갈등을 그린 영화로 백인소녀를 사랑한 죄로 흑인소년이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요행히 피부가 흰 친형이 동생의 복수랍시고 백인처녀들을 범하고 다니면서 범행이 끝날 때마다 동생의 하모니카로 ‘갈색의 블루스’라는 주제가를 연주하는, 영화는 그저 그렇고 그랬지만 가슴을 저미는 듯 파고드는 주제가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된 아버지께서도 무척 좋아하셨던 영화라 다시 보는 감회가 더욱 깊었다.
명화 4000여 장 수집의 재미
그런데 영화 수집을 이렇게 구입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만난 영화(1)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10 수년 전의 몇 년간은 KBS, MBC, SBS, EBS 등 각 TV 방송이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 시간 등에 방영하는 영화들 중 필자가 소장하지 않은 영화는 거의 모두 녹화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신문이나 TV를 통해 영화 방영계획을 확인하여 예약녹화를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녹화해 놓은 영화도 400장은 훨씬 넘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명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또 그들 중에는 외국영화뿐 아니라 국산영화도 꽤 많이 있고 국내에서 방영은 되었지만 비디오나 DVD로 출시되지 않은 것들이 상당히 많다. 최근에는 비디오 대신에 DVD를 모으고 있지만 이제는 50, 60년대 영화나 그 이전 것들뿐만 아니라 그 후 최근까지 나온 영화들 중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 중 구할 수 있는 것은 대개 다 모았다. 녹화한 것들까지 포함하면 이것 역시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족히 4,000여 장은 되는 것 같다. 가끔 필자에게 그 영화들 다 보느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필자는 집에 있는 사전을 그 안에 있는 단어들 다 찾아보려고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하곤 한다.
그분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옛날 영화 생각이 날 때 그것을 찾아서 다시 보며 음미하는 재미를 모르실 것이다. 필자는 주변에서 옛 추억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분이 계시면 언제든지 빌려드린다. 그리고 경복궁 옆 사간동에 있던, 또 다른 고교동창 K군이 운영하는 화랑 베아르떼에서 매월 1회씩 교양미술 강좌를 하던 큐레이터 P씨의 제안에 따라 2008년 12월부터는 그 화랑의 고객과 고교동창들을 대상으로 화랑이 익선동으로 이전하게 된 2012년 12월까지 강좌가 끝난 후 매월 한 편씩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1944년 서울 출생.
아호 무애(無碍). 경기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 서울대대학원 교통공학 박사. 서울대, 명지대 토목공학과 및 교통공학과 교수 역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
“상조업의 근본적인 취지는 굉장히 좋습니다. 그런데 드러나는 모습이 신뢰를 못 얻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필도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교수는 다른 나라는 장례 문화와 상업적 지점들이 겹쳐지는 게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장례용품을 중심으로 발전한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장례 관련 업체들이 서비스는 최소한으로 하고 주로 용품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특성이 장례회사들과 상조회사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장의사는 죽음과 관련된 의사입니다. 의사까지는 못 가더라도 적어도 사회적 자부심을 부여해 줘야 하는데 지금껏 민간자격증만 줘왔어요. 그러다 결국 국가자격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민간자격증보다 더 못합니다. 시험도 없고 학원에서 300시간만 배우면 돼요. 국가 입장에서는 염습과 입관만 하면 장례지도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과거 대가족 체제에서는 체계화된 장례를 제대로 수행하는 장년의 전문가가 가족 안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게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례라는 문화 자체는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전문가가 사라져버린 상황이지만 문화적 욕구와 필요는 존재한다. 당연히 가짜와 부실의 문제가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상조업체들 모두 자기네 상조가 값이 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땐 싼 게 비지떡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별로 싸지도 않다는 겁니다.”
이 교수는 장례용품들의 경우 값을 속이려고 마음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예를 들어 안동 삼베로 만든 명품 수의라고 해도 진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확인이 안된다는 것.
“장례는 믿음으로 이뤄집니다. 그래서 그러한 요소들에 대해 진짜라고 말해줄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문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한 표준이 필요합니다. 용품까지 어렵다고 한다면 서비스만이라도 표준화를 하자는 게 제 의견입니다.”
이 교수는 그래서 장례 서비스 표준화를 위해 기본용어 연구를 했고 이를 발표하기도 했다. 국가에서도 관련 사항을 현장에서 받아들이도록 추천 작업도 해줬다. 덕분에 100% 공설로 만들어지는 화장장에서는 표준장례서비스가 어느 정도 이뤄졌고 서비스 수준도 개선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 상조 서비스에 표준 등급을 매겨 신뢰 회복하자
상조업이 시작된 일본에서는 이미 40~50년 전에 만들어진 상조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상조법이 없다. 일본의 사례를 받아들이면서 문화에 대한 검토 없이 돈 버는 부분만 받아들인 셈이다.
“보건복지부는 아직도 상조법을 우리가 왜 만들어야 하느냐고 하는 중입니다. 왜 돈 거래하는 것까지 관여해야 하느냐는 거죠.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는 이 부분의 정립이 많이 늦습니다. 장례식장도 최근에야 보건복지부 소관이 됐어요. 그 전까지는 묘지, 화장, 납골당만이 보건복지부 소관이었죠. 사실 상조업에 관한 법이 순수하게 산업하고만 연관돼 있으면 다른 부서에서 만들어도 됩니다. 그런데 상조업은 ‘장례’로써, ‘예’로서의 문화적 요소가 들어가 있어요.”
산업에 대한 무게중심이 있어야 불신이 사라진다, 이 부분을 국가에서 조절해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국가는 관리-감독만 잘하면 됩니다. 제가 예전부터 꾸준히 주장하는 게, 장례식장이나 상조 서비스도 무궁화 갯수별 차등을 두는 호텔식 등급을 매기게 되면 문제가 상당수 해결될 거라는 말입니다. 무궁화와 별을 국화로 대체해 표기하면 상징성도 가질 수 있죠. 이를 심사할 수 있는 표준과 전문가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