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넘은 노래 교실이 최근 시들해졌다. 회원들은 그대로이다. 모두 10년 넘은 고참들인 것이다. 나이도 60대 전, 후반이다. 그런데 배울만한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의 노래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돌 노래 위주라서 나이 든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어렵다. 빠른 랩이 등장하는 노래도 많다. 굳이 하려면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을 뿐 더러 정서에도 안 맞는 것이다.
노래 교실 회원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은 발라드 곡들이다. 신승훈, 이승철, 이은미, 김범수, 박강성, 김광석, 부활 노래들이 가장 인기가 높다. 템포도 적당하고 정서에도 잘 맞는다. 그런데 요즘은 발라드 곡이나 발라드를 부르는 가수들이 많지 않다. 아이돌 곡 위주이다 보니 활동 무대가 줄어든 것이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드라마 OST들이다. 스토리가 있고 배경음악으로 쓰이다 보니 노래가 잔잔하다.
그러다 보니 최근 몇 년 동안은 옛날 대중가요를 주로 복습해서 배웠다. 새로 배우는 노래에 비해 호기심이나 신선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보통 한 주에 신곡 한두 개를 배우는데 복습 곡이다 보니 여러 곡을 할 수 있어 진도는 빠른 편이다.
한국 대중가요의 한 축은 트로트 곡들인데 대부분 노래가 비슷하다. 노래교실 회원들도 트로트를 배우기는 하지만 한 두 번 따라 부르면 외워질 정도로 곡조가 비슷하다. ‘안동역 앞에서’, ‘무조건’ 같은 트로트는 그래도 워낙 인기가 높아 국민가요 대우를 받는다.
노래 교실 강사가 개인 적인 일로 몇 주간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에 40대 다른 강사들이 자리를 메웠다. 그런데 노래가 완전히 딴 판이었다 최신곡인데 도무지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트 하트’라는 노래가 있다. 조은새 노래인데 후렴구가 중독성이 있다. “콩닥콩닥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정말 정말 이러다가 미칠 것 같아요. 오늘밤 그대 살랑살랑 내게로 오세요. 내 마음 다 드릴게요. 하트 하트 하트 핫 나에게만 사랑을 주세요.... 그대 오 오늘밤은 가지 마요” 남녀의 사랑 얘기이다. ‘하트 하트 하트 핫’에서는 율동까지 하란다. 이 노래를 부르면 옆 테이블에서 술 몇 병이 공짜로 건네져 온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 갔다.
‘따르릉’이라는 노래가 있다. 개그맨 김영철이 부른 노래이다 ‘따르릉’은 전화 벨 소리란다. 가사 중에는 “ 이런 놈 저런 놈 다 만나놓고 내 탓을 하지마”, 후렴구로 “오빠야 오빠 오빠야 네 오빠야”가 역시 중독성 있다. 단순히 가사를 읊으면 되는 노래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장난기 있게 불러야 한다.
노래 교실 회원 중에는 교장 선생님들이 몇 명 있다. 새로 온 강사는 신나는 노래인데 너무 경직되게 노래 부른다며 어깨도 들먹이며 몸을 흔들라는 것이다. 드디어 폭발했다. “도저히 못하겠어요!”라는 반발이 나왔다. 더 이상 외부 강사는 사양하겠다, 또는 노래 교실을 그만 두겠다는 사람들이 나왔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당연히 술자리도 자주 갖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술 잘 마시는 것도 하나의 능력으로 본다. 그래서 ‘술상무’라는 말까지 생겨났는지 모른다.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술자리가 큰 부담이다. 못 마시더라도 눈치껏 마셔야지 너무 빼는 모습을 보이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술은 약일까, 독일까. 한의학에서는 의미 없는 질문이다. 자연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존재 이유가 있다. 약과 독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약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독이 된다. 사물의 성질을 정확히 파악해서 적재적소, 적합한 사람에게 쓰고자 하는 것이 한의학이다.
의학(醫學)에서 ‘의(醫)’라는 한자에 술을 의미하는 ‘유(酉)’가 보인다. 이는 술이 병을 치료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뜻이다. 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약재는 술이다. 약방의 감초로 알려진 감초가 3467번 나오는데 술은 4384번이나 나온다. 을 술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술은 절대 나쁜 음식이 아니다. 많이 마시면 문제가 될 뿐이다.
술만큼 강한 약은 별로 없다. 빠르게 반응이 나타나는 음식도 많지 않다. 술을 먹으면 바로 심장이 뛰고,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면서 감정도 변한다. 어떤 사람은 구토를 하고, 졸려서 잠을 자기도 하고, 용감해지기도 하고, 말이 많아지기도 한다. 분노와 슬픔, 기쁨 등 온갖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술은 뜨겁고 향이 강하다. 약 기운을 전신에 운행시키고, 온갖 사기와 나쁜 기운을 없애주며, 혈맥을 통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두텁게 하고, 피부를 윤기 있게 하고, 우울함을 없애주고, 화나게 하고, 마음껏 이야기하게 만든다.
을 보면 인체의 기본인 정기신혈(精氣神血)을 보하는 보약들은 대부분 술과 함께 복용하거나 술로 빚어서 복용한다. 대표적인 보약인 경옥고도 술과 함께 복용한다. 피부에서 머리카락, 오장육부, 뼈, 뇌수, 자궁 등 인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약 기운을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한 약재는 보통 술에 담가 먹는다.
술은 발효식품이라서 소화도 돕는다.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를 음식도 술과 함께 먹으면 1차, 2차, 3차, 4차까지도 먹게 된다. 나이 드신 분들이 식사 중 반주를 하는 이유는 소화가 잘되기 때문이다.
술만큼 혈액순환에 좋은 약이 있을까? 알코올을 조심하라는 권고는 주량 때문이다. 잠자기 전 정종을 소주 컵 한 잔 분량을 데워서 마시면 손끝과 발끝이 시리고 저린 데 도움이 된다. 혈액순환의 주체인 심장질환 약재에도 대부분 술이 들어간다. 여성은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데 혈액순환 장애가 잘 일어난다. 자궁질환 약재 역시 술이 많이 쓰인다. 어혈을 푸는 데도 최고다. 교통사고, 추락, 타박상, 허리를 다쳤을 때도 도움이 된다.
물론 많이 마시면 독이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 때문에 고생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주량을 능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억지로라도 마셔야 하는 분위기다. 그렇게 1년, 2년, 10년을 살다 보면 알코올성 간염이나 성인병 등 다양한 병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는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어깨와 전신이 무거우며 몸이 붓기도 한다. 속도 편치 않아 소화가 안 되고 소변도 시원치 않게 나온다. 설사와 구토를 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주습(酒濕)이라 표현한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인 것처럼 몸에 술의 습기가 잔뜩 쌓여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가면 당뇨, 황달, 시력 장애, 기침, 천식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술을 C2H5OH로 획일화할 수는 없다. 맥주, 막걸리, 소주, 양주, 과일주 등은 각각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어제 담은 술과 오늘 담은 술도 사실 다른 술이다. 과일주, 약초주에는 과일과 약초의 약성이 담긴다.
산행할 때 막걸리를 마시면 밥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든든하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중에 밥을 안 먹고 막걸리만 먹는 사람이 있다. 밥심만큼 힘이 나기 때문이다. 막걸리 한 사발은 밥 한 그릇이다. 곡주에는 곡기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밤에 막걸리 두 잔을 마시면 밥 두 공기를 야식한 셈이 된다. 그래서 다음 날 몸이 붓거나 전신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탁주는 숙취가 오래간다. 특히 면 종류를 같이 먹으면 해독이 더 어렵다.
양주, 안동소주 등 증류주는 입에 들어가자마자 기화되어 머리에서 손발 끝까지 퍼져나간다. 막힌 기를 뚫어주고 몸을 금방 덥혀준다. 곡주와 달리 머리가 아픈 것도 덜하며 소변도 잘 나온다. 물론 적당히 먹었을 때의 이야기다. 과음하면 어떤 술이든 문제를 일으킨다.
맥주는 발아시킨 맥아(麥芽)와 홉(hop)의 성질 때문에 차갑다. 맥주를 많이 마시면 아랫배가 차가워지면서 배가 나온다. 그래서 몸이 차가운 사람보다는 뜨거운 사람에게 좋은 술이다.
술을 마실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단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둘째, 면 종류, 감과 함께 먹으면 술독이 잘 풀리지 않는다. 셋째, 배불리 먹은 후에는 음주를 주의하고, 취한 후에는 억지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넷째, 얼굴이 흰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지 말아야 한다. 피부가 흰 사람은 폐가 술독을 잘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취한 후에는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섯째, 술은 적당한 양을 천천히 마시는 게 좋다. 일곱째, 취했을 때 갈증 때문에 물 또는 차를 찾게 되는데 많이 마시면 허리, 콩팥, 다리가 약해지고 무거워진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안동 역에서’라는 노래를 폭발적으로 히트시킨 가수 진성이 최근 노래 부른 ‘보릿고개’를 들으면 가난했던 옛날기억이 떠오른다. 보릿고개란 예전에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서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로서 음력 3, 4월에 해당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쌀이 없어서 밥을 굶은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면 쌀이 없으면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보릿고개 시절을 통 모르는 아이들에게 보릿고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진성의 보릿고개라는 노래가 애창가요로 사랑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보릿고개의 전설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내가 겪은 6.25이야기처럼 내가 겪은 보릿고개 이야기를 토해내어 우리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들이 똑 같은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보릿고개를 몸으로 직접 겪었고 눈으로 참상을 봤고 더 참혹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먼저 진성이라는 가수가 부른 보릿고개라는 노래의 가사를 들어보자.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흉년에 콩죽 한 그릇하고 논 서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배고픔은 참기 힘들다. 부잣집에서 초봄에 쌀 한가마니를 장리쌀로 빌리면 가을에 추수하면 한가마니 반을 갚아야한다. 이자로 치면 10개월에 50%인 셈이다. 과히 살인적이다. 장리쌀을 먹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덜익은 보리를 먹어야 한다. 보리가 덜 여물면 껍질을 벗기는 방아를 찧을 수가 없다. 보리이삭을 낫으로 잘라서 가마솥에서 덖으면 익으면서 딱딱해진다. 이를 대충 껍질만 벗겨서 밥을 한다. 이 밥을 삼킬 때 목이 뜨끔뜨끔 할 정도로 보리가시가 목을 찔러댄다. 물로 배를 채운다는 말이 있는데 소금이라도 먹어야 물이 삼켜지지 그냥 물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먹었다고 하는데 무었을 먹었을까? 산나물이나 쑥을 많이 채취해서 먹는다. 나물 자체만으로는 반찬이나 되지 요기는 될 수 없다. 밀가루나 하다못해 보릿가루라도 있어야 버무려 쪄서 식사대용으로 한다. 뿌리로는 칡뿌리에서 녹말을 내어 먹었다. 아이들이 칡뿌리를 학교에까지 들고 와서 먹었다. 목피라고하면 나무껍질인데 대표적인 것이 소나무 속껍질이다. 이것은 워낙 딱딱해서 그냥 먹을 수는 없다. 먹으면 죽는다는 양잿물을 넣고 삶으면 부드럽게 풀어진다. 이를 물에 담가 양잿물 독성을 빼고 먹었다. 거의 섬유질로 구성된 음식을 먹으니 변 보기가 어렵다. 위장의 기능이나 배변 힘이 약한 노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보릿고개를 넘은 사람은 다행이지만 배고픔을 참지 못해 장리쌀에 손을 대면 자식을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거나 농토를 팔아야 했다.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토를 헐값에 파는 것이 그나마 살길이다. 자기의 농토가 줄어들면 다음해는 더 고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논 한마지기 사려고 하지 말고 입하나 덜라고 했다. 새 중에서 제일 큰새가 먹새라고 먹을 입인 식구를 줄이는 것이 필요했다. 딸은 남의 집 식모로 공장으로 보내고 아들은 머슴으로 이발소나 관공서 사환으로 취직했다.
어렸을 적에는 가난은 개인이 게으르거나 부모를 잘못만난 탓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가난하게 사는 이유의 대부분은 지배계급의 착취가 바탕에 있다. 장리쌀의 횡포도 그렇거니와 남의 농토를 경작하면 가을에 추수해서 절반씩 나눈다. 하지만 나쁜 지주는 미리절반의 수확을 정해놓고 흉년이 들어 수확이 형편없는데도 약속된 절반을 가져가버린다. 불공정계약이지만 소작인은 힘이 없으니 대항할 수가 없다. 이를 잘 아는 위정자들이 가난한 소작농을 보호하기는커녕 지주와 한 통속이 되어 착취자의 편에 섰다.
지금의 세상은 카이스트 이병태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부모세대보다 훨씬 공정하고 살기 좋은 세상임에는 틀림없다. 지금의 세상이 살기어렵다고 헬 조선이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은 우리 부모세대의 보릿고개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열심히만 살면 배고픔에서는 해방된다. 대통령께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참혹한 보릿고개는 이제는 없는 세상이다. 보릿고개라는 단어도 우리세대를 끝으로 모두의 기억에서 잊어지기를 희망한다.
몇 해 전 소설 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개인적으로 소설가 김훈을 좋아한다. 사물의 본질을 캐 들어가는 생각의 집요함에 몸서리가 나지만 그의 언어는 절제되고 담백하여 울림이 크다. 때로 그의 언어가 고답적이고 사변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산문집 을 읽으며 그 생각이 바뀌었다. 본질적으로 그의 언어는 머리가 아닌 몸의 언어다. 그가 ‘길’에 천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은 감독(황동혁)의 영화라기보다 작가 김훈의 영화다. 이미 원작을 통해 빽빽이 작가가 세워 놓은 말의 숲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아니 감독은 애초에 그 삼엄한 언어의 포위망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가 전쟁을 배경으로 함에도 창과 칼보다 언어가 주 무기가 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매우 한국적인 ‘말의 전쟁’이 탄생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십 년 전 정묘년에 호란을 겪었으면서도 명나라를 향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조정은 아무 대비도 없이 또 한 번의 호란을 맞이한다. 정보는 어두웠고, 군대는 허약했으며, 국가 시스템은 흐트러졌다. 지난번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계획은 공신들의 이기적 작태와 정보 누설로 막혀 부득이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버틸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한겨울 추위와 허기로 가득 찬 47일간의 기록이다.
영화는 소설처럼 장으로 나뉘어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된다. 영화 초반 김상헌이 성으로 함께 들어가자는 말을 듣지 않은 뱃사공을 죽이고 나중 그의 손녀 나루가 성에 들어오면서 작은 스토리가 만들어지나 영화의 큰 줄기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과 주화파 최명길(이병헌)의 말싸움으로 구성된다. 미래를 모르니 판단할 근거도 없고 결론도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식량이 떨어져 간다는 냉혹한 현실뿐이다.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영의정 김류로 대표되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기득권층과 대장장이 서날쇠(고수)로 대표되는 민초의 대비다. 자신의 실패를 부하에게 뒤집어씌워 죽이는 김류의 비겁한 행위와 자신의 의무도 아니면서 김상헌의 부탁으로 적지로 뛰어드는 서날쇠의 행동은 비록 상투적이기는 하나 낡고 썩은 권력의 위선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의 백미는 김훈의 현란한 내공이 발휘된 김상헌과 최명길의 언어 대결이다. 둘의 논리는 한 치의 빈틈이 없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둘 모두 ‘길’을 말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각오하여 열리는 진정한 삶의 길도 있고, 비루하지만 삶으로써 얻어지는 내일의 길도 있다. 그리하여 김상헌은 자결로써 죽음을 얻었고, 최명길은 항복이라는 치욕을 통해 삶을 얻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늘의 현실을 떠올리며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보여주는 지리멸렬함과 해묵은 명분 싸움의 뿌리가 이리도 길고 깊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었다. 당시는 정보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모든 정보를 손바닥 보듯 하는 지금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역사 위에 잠자는 기분이 들어 모골이 송연했다.
영화가 사실과 다른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실 그는 죽지 않고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82세까지 장수했다. 오늘에는 지탄의 대상인 그의 명분론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로 그의 후손들이 승승장구하는 바탕이 된다. 그로부터 시작된 안동김씨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며 망국의 씨앗이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씁쓸하다.
조카는 어릴 때 성당에서 같이 봉사하던 남자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자신의 친구 소개팅을 부탁했다. 조카는 마침 미혼인 친구가 있어 소개하기로 했다. 둘 다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긴 나이들이라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4명이 함께 만나 서로 소개를 해주고 좀 거들다가 둘은 빠져나왔다.
둘은 몇 번 만나더니 뭔가 삐꺽거리는 것 같았다. 조카는 중매를 잘해야 밥을 얻어먹는다고 상대의 장점을 설명하며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고민에 빠졌다. 소개받은 남자도 고민에 빠졌다.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조카는 친구의 남편이 될 수도 있는 남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남의 부인을 탐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를 통해 조카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안도하며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조카는 응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남자가 안동 양반가의 장손이라는 사실과 그 집에서는 손자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카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둘은 사랑하지만, 양가 어른들을 설득해야 하는 숙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안동으로 처음 인사 가던 날 조카는 여린 참새처럼 떨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려움이 더 컸으리라. 안동에 도착하자 그의 부모님은 따스하고 정중하게 조카를 환영해주었다. 며칠 전 시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뒤에 남자아이가 함께 오더라는 말을 했다. 조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랬다. 그때까지도 시부모님께는 알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카에겐 전 남편과의 사이에 중학생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효자였고 집안에서는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그 무게로 부모를 설득하고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이해시켰다. 그의 부모님이 아직도 서당을 운영하는 깨어난 선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갈등으로 연결될 일들을 얼마나 멋지게 서로 존중하며 풀어가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예비 조카사위와 처음 만나는 날,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어떤 조건이라도 살아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이 아니던가. 더구나 결혼에 대한 상처를 이미 겪은 조카는 더 조심스러웠다. 총각과 애 딸린 이혼녀. 조카와 아들은 친정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엔 상견례 날 중학생 아들은 그 자리에 있을 예정이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딸 상견례에 참석했다. 사돈 될 분과 나란히 앉아 아이를 소개했다. 모두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르신께서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바깥사돈 될 분은 머리를 숙이더니 장래의 손자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어려운 결정은 네가 했구나. 잘 왔다.”
안사돈도 촉촉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비로소 조카는 찬란한 빛 속에 서 있는 천사처럼 보였다. 사랑과 존경이라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학 소설가께서 故김용덕 교수님께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더러 예전 초등학교 시절의 방학숙제를 떠올리듯 가끔 교수님을 생각하긴 했지만 ‘인사’는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잘 계시겠지요? 이런 치렛말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그곳’, ‘계시다’ 등등의 언어들과도 전혀 무관하실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제 인사는 단지 저 혼자의 회억이고, 제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전해, 한국일보사가 우리나라 사상 초유인 1000만원의 원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일이 있었지요. 대상은 기성작가와 신인을 망라하는 것이었습니다. 1973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저는 그 몇 년 사이 작품 발표의 지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낙백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광고를 보곤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다시 공개 경쟁에 나서보자. 무명 신인작가의 설움을 씻을 호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한 조그만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저는 동료 직원들의 양해를 얻어 반년 넘게 소설쓰기에 매달렸습니다. 신촌의 와우아파트라고 아시죠? 어느 날 한 동(棟)이 와르르 무너져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파트. 제가 그 아파트의 단칸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돌이 갓 지난 딸애가 엉금엉금 제게로 기어오면 발로 아이를 밀어내면서 원고 칸을 메워나갔지요.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운 좋게 그 소설이 당선되었습니다. 신문 한 면 가득히 심사평, 당선소감, 인터뷰 등 저에 관한 기사가 실린 다음 날부터 세상이 달라지더군요. 작품을 들고 가도 거들떠보지 않던 문학지 편집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서 작품을 달라지 않나, 미리 장편 출판을 계약하자면서 출판사 사장들이 번갈아 찾아오질 않나(교수님 생전에는 문자메시지 같은 것도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요즘은 이런 문장 뒤에는 꼭 ‘ㅎㅎ’ 혹은 ‘ㅋㅋ’ 같은 이상한 부호를 붙인답니다. 옛사람들이 쓰던 ‘가가(呵呵)’와 흡사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덕에 화곡동에 마흔두 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했으며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다고 출판사도 때려치웠습니다.
매일 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그 해,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엽서를 받았습니다. 좋은 역사소설거리가 있어서 작가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존함은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저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옆에 있던 ‘종로다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단아한 모습에 말씀도 적으셨지요. 뒤늦게 셈해보건대, 그때 교수님은 쉰을 갓 넘긴 연세였고 저는 겨우 서른에 올라선 철부지였습니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때 주신 말씀의 대강은, 여러 해 동안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한 연구를 해봤는데 연구를 할수록 여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논문으로는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할 수가 없다, 누군가 역사에 관심 있는 작가가 이를 소설로 형상화해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관련 저술이 든 노란 봉투를 제게 넘겨주셨지요. ‘역사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작가는 위대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저를 부추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선선히 제가 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저 또한 이전부터 이 사건에 소설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89년 전주에서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었고 이로써 수백 명이 희생을 당한 옥사의 실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송익필 등의 음모론을 실증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현대 역사가가 바로 교수님임은 누구도 부인치 못합니다.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조식 같은 선학(先學)은 물론 정철, 유성룡, 이발, 김성일, 이산해, 김장생, 조헌, 허엽, 허봉, 김우옹, 성혼 등 조선 중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죄 이 사건에 관련돼 있었기에 이를 소설화하는 일은 곧 우리 역사소설의 한 정점을 긋는 일이며 그 작업은 지난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는 당시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교수님께 약속을 드리고서도 저는 쉬 작업에 들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딴짓거리를 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중에도 그 약속은 무슨 채무인 양 제 심중에 남아 무게를 더해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10년이 더 지나서였습니다. 홀연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저는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죄스러움에 한동안 몸을 떨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해 전쯤이었던가요? 교수님은 또 한 번 제게 서신을 주셨지요. 대전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 지내느냐? 그런 안부의 글이었지만 저는 마치 질책하시는 것만 같아 답장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15년 전쯤 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여겨 방학을 맞아 안동 지례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산골 한옥 뒷방에 들앉아 한 주일 꼬박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500여 장을 만들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한 달 후, 읽어보곤 주저 없이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2005년 교환교수로 중국 남경에 가 있는 동안은 전초작업이라 여기며 화담 서경덕에 관한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교수님, 종로다방에서 만났던 그 새파란 작가가 어느새 교수님보다 더 긴 세월을 대학 교단에 있다가 재작년 정년을 맞았습니다. 그러곤 소설을 쓰겠다고 충청도 연산 산골에 임시 거처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첫해를 어영부영 보낸 뒤, 올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주말 1300장을 넘겼습니다. 2500장은 돼야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일단 이야기를 주재하는 동안은 퇴계, 율곡 같은 이도 사료를 근거로 제 의도껏 주물러볼 요량입니다. 제가 이미 율곡 죽은 나이보다 17년을 더 살고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1584년에서 1589년, 이 과거 5년의 시간에 몰입돼 있는 요즘의 나날이 제겐 경이입니다. 제 거처에서 5분만 걸어 나가면 김장생이 걸었던 길을 만나고, 차로 10분만 나가면 정여립이 머물렀던 절간 마당에 섭니다. 아, 그래서 누군가가 저로 하여금 이맘때 이곳에 있게 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가 많습니다. 명랑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 새소리도 제겐 16세기 말의 것이 됩니다.
성패는 뒷전으로 돌리겠습니다. 내년 봄날, 상하 두 권짜리 소설책을 존경하는 김용덕 교수님 묘소에 놓을 수 있다면, 종로다방에서 드렸던 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여기겠습니다.
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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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저서로 창작집 ·, 장편소설 ·, 산문집 ·· 등.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12월 마지막 날이었다. 압구정에 있는 뮤지크 바움 오페라 동호회 모임에서였다. 그녀는 30여 명 되는 회원들 모두에게 두세 송이의 꽃을 선물하고 있었다. 화사한 연핑크와 보라색의 리시안셔스라는 서양 꽃이었다. 예쁜 꽃을 선물 받으면 늘 행복하다. 마음이 예쁜 그녀와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도 필자와 같이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곧바로 의기투합해 필자가 수강하고 있는 '라임'이라는 탱고 교습소를 같이 다니게 되었고 그녀와 필자는 매주 일요일 오후, 탱고를 배우며 우정을 쌓았다. 키 크고 체구도 당당한 그녀는 몸치인 필자와 달리 금방 유연하게 춤을 잘 따라 하며 흥미를 보였다. 그러던 중 그녀가 새 학기를 맞아 고향인 창원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는 다양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서울이 좋지만 직장 때문에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창원에 있어야 할 그녀를 뮤지크 바움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깜짝 놀랐다. 발레 감상을 하기 위해 지난 토요일 무지크 바움에 갔는데 그녀가 서울을 떠난 지 몇 개월 만에 그곳에 온 것이다. 이런 우연이 있나? 필자도 일정이 바빠 몇 개월 만에 간 날이었다. 반가워서 얼싸안는 필자에게 그녀는 대뜸 '애란 언니'라고 부르며 안겼다. ‘애란 언니?’ 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이 필자를 여간 들뜨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딸보다도 한참 어린 후배 여교사였다. 언니는 언니 값을 해야만 한다. 발레 감상이 끝난 후 인근에 있는 안동국시 집에 데려가 점심을 사줬다.
차를 마시며 무언가 걱정이 있어 보이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물가 비싼 신사동에 얻은 집이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가 계속 많은 금액의 월세와 대출받은 보증금의 이자가 몇 달 동안 나가고 있다고 했다. 젊은 여교사의 피 같은 돈이 엉뚱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듣다 보니 부동산 업자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었다. 다른 업자와는 계약을 할 수 없으며 반드시 자신들하고 해야 일이 처리된다고 했단다. 집주인과 직접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전화번호를 가르쳐줄 수 없다고 말하더란다.‘한참 연장자인 인생 선배가 딸 같고 동생 같은 젊은이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하며 울분이 일어났다. 걱정하실까봐 부모님께는 털어놓지도 못하고 필자에게 처음으로 얘기한다며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싶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애란 언니가 아니다. 이럴 때는 정의의 사도인 애란 언니가 나서야 한다. '이 악당아~ 정의의 칼을 받아라~ 얍!' 당장 부동산 업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장장 24분이나 통화하며 업자를 설득했다. 퇴근 후의 휴식을 깨트리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애란 언니, 그 집 7월 말에 새 세입자가 들어오기로 했대요."
어제와 달리 그녀 목소리는 아주 밝았다.
이렇게 쉽게 나갈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왜 그렇게 그녀의 속을 썩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자가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손해를 최소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시지탄이었다. 어쨌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자가 도움이 된 것 같아 여간 기쁘고 후련한 것이 아니었다. 전화통화로 해결이 안 되면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항의하고 사안별로 문제를 조목조목 따져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악덕 업자들을 대할 때마다 인간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후배야, 애란 언니 역할을 어느 정도 해낸 거 맞나?
어느 날 나이가 들고 보니 살아온 삶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볼까? 하지만 손에 들려진 펜은 곡선을 그리다 갈 길 몰라 방황한다. ‘그것참, 글 쓰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하던 사람들이 모여 글쓰기에 도전했다. 생활의 활력이 생기더니 내가 변하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성장하는 감동 스토리도 하루하루 글로 쌓여갔다. 이웃들의 정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부천 글쓰기 모임’에 다녀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원미동으로 향했다. 마치 유니버설스튜디오나 방송사 드라마 세트장 방문만큼이나 기대됐다. 양귀자의 소설 의 배경이 된 이곳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천시 원미 2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반. ‘글쓰기 모임’ 강좌가 열린다. 강좌가 이어져온 지도 어언 6년. 수필집도 5권이나 출간했다. 등단한 회원, 부천 지역신문 시민기자가 된 회원, 이 강좌에서 공부한 것이 바탕이 돼 뒤늦게 대학 공부를 하는 회원도 생겨났다.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길을 찾고 발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다 빛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부천시 글쓰기 모임은 부천시 평생학습센터 특화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지원을 받는 강좌 중 하나다. 원미동 글쓰기 모임 외 시(市)의 지원을 받는 대부분의 강좌는 몸을 움직이고, 발산하는 활동 프로그램. 글쓰기 모임을 6년간 이끌고 있는 박창수(52) 작가는 이 모임이 꽤나 희귀하다고 설명한다.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데 6년 동안 모임이 이어져오는 것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덧붙였다. 올해는 19명의 회원이 글쓰기 모임의 문을 활짝 열었다.
노년의 글쓰기는 힐링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등단보다는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고민 끝에 문학에 도전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는 데 의미를 둔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의 기본 바탕은 ‘힐링’이라며 방점을 찍는다.
“글쓰기는 힐링 단계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하면서 풀어나가요. 그다음이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죠. 우리 수강생들 중에는 사실 상처받으신 분들도 많아요. 다 큰 자녀가 죽었다든가, 시어머니와의 갈등 등 정말 다양해요. 그런데 이곳에서 치유하고 가슴을 여는 것이죠.”
글쓰기를 하고 50세가 넘어서야 대학 공부에 도전한 회원도 여섯 명이나 된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 회원 개개인의 수필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등단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박창수 작가는 “열심히 글을 쓰고 또 부쩍 글쓰기 능력이 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며 “제대로 된 방법으로 회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mini interview
류인록(부천글쓰기모임회장·71) 글쓰기로 새로운 삶을 선물받다
이제 글 쓴 지 5년 됐습니다. 살면서 타자기 한번 못 만져봤습니다. 62세가 돼서야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했습니다. 독수리 타법 면한 지는 오래됐어요. 그리고 포토샵(사진편집 프로그램)과 파워포인트도 배웠어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오면 포토샵 스위시로 사진들을 꾸밉니다. 사별하고 저 혼자 산 지 꽤 됐지만 이렇게 살다 보니까 세상 지루한 줄 몰라요. 지금은 우리 원미마을신문 기자로 활동해요. 글쓰기 교실도 다니고, 주병률 시인에게 시를 배우러 다닙니다. 취미생활이 또 하나 있어요. 여행을 다니는 겁니다. 작년에 홍도에 다녀왔고, 제주도, 안동 이육사 문학관, 영월에도 다녀왔어요.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글감이 나오더라고요. 기행문 쓰는 게 좋아요. 제 입장에서 쓰기가 좀 쉽더라고요. 그것도 갔다 와서 일주일 안에 써야지 지나가면 금세 잊어버려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제가 원래 운동신경이 안 좋아서 다른 건 별 흥미가 없었어요. 글쓰기를 선택했고 버틸 만했어요. 첫 글을 쓰고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6년 전 먼저 간 마누라에 대한 글이었거든요. 그 글이 실린 책은 우리 마누라 납골당에 넣어두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몇 편이라도 더 써서 수필집도 내고 싶고, 시집도 내고 싶어요. 시도 쓰는데 현재 68편을 썼어요. 시집도 하나 내고 싶습니다.
이양순(요양보호사·61) 올 가을에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옵니다
글은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기록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2005년도에 요양보호사가 된 뒤 만나게 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보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한 요양병원에 입원한 분이셨는데, 치매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기억은 고스란히 안고 계셨어요. 제가 그 일에 대해 당시 글을 써놓았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수요집회를 TV로 접하다 제가 쓴 글이 생각나서 라디오 방송에 냈어요. 그런데 그게 방송으로 나오더라고요. 2013년도였어요. 방송에 채택된 뒤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 쓰는 거 행복합니다. 제 재능에도 놀라고 기억력은 한계가 있는데 글로 기록해놓으면 안 잃어버리니까 좋고요. 요즘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글감이 좀 많거든요. 아직 미흡해서 걱정입니다. 가을쯤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온다고 하는데 고민됩니다. 물론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광이지요. 부끄럽기도 하지만 기대도 됩니다.
필자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주의 설날 음식은 떡국이 으뜸이지만 함께 내놓는 향토 음식이 있다. 바로 붉은 매운맛의 식혜다. 일명 안동식혜라고 하는데 영주와 안동은 이웃한 고을이기에 음식도 비슷하다. 안동식혜는 경상북도 북부지방인 안동, 영주 봉화 지역만의 향토 음식으로 다른 지역에는 없다.
안동식혜는 일반 식혜 만드는 과정에서 추가로 붉은 고춧가루 물과 생강을 다져넣고 무를 잘게 채 썰어 발효시켜 만든다. 고추의 매운맛과 생강의 맵고 싸한 맛을 순화시켜주는 것은 무엇보다 살얼음이 살짝 얼어 있는 차가움이다. 요즘은 냉장고가 있어서 사시사철 안동식혜를 먹을 수 있지만 살얼음이 얼어 있어야 하는 특성 때문에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 안동식혜는 대표적인 설날 음식이었다.
필자 고향에서는 설날이면 나이 드신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녔다. 세배객은 설날을 기점으로 2~3일에 집중되었지만 드물게는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졌다. 어른을 모시고 있는 자식들 입장에서는 찾아오는 손님 접대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만한 것이 붉은 안동식혜여서 요즘의 커피나 홍차처럼 손님상에 내놓았다.
같은 음식이라도 집안 가풍과 가족들의 식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진다. 안동식혜도 집집마다 차이가 있었다.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부자들은 찹쌀 식혜에 고명으로 잣을 넣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찹쌀 대신 차조를 쓰고 잣 같은 고급 고명은 넣지 못했다. 하지만 단맛을 내는 엿기름과 고춧가루와 무는 필수 재료였다.
요즘 시판하는 안동식혜는 설탕을 추가로 넣어 엿기름의 단맛만 이용하던 전통식혜보다 너무 달다. 전통 안동식혜는 설탕을 전혀 쓰지 않는다. 엿기름의 단맛은 미각을 유혹하고 고추의 매운맛과 생강 특유의 톡 쏘는 맛은 입안을 화끈하게 한다. 씹으면 아삭아삭 씹히는 무와 뽀드득 부서지는 살얼음 조각들은 매운맛을 상쇄시켜주고 뱃속에 들어간 뒤에는 든든함을 느끼게 해줬다.
안동식혜를 어려서부터 먹어오던 사람은 거부감이 없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전라도에서 시집온 형수는 안동식혜를 처음 봤을 때 누가 음식을 토해놓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아마 고추에서 우러난 붉은 색과 채 썰어서 넣은 무 조각들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안동식혜가 전국적인 음식이 되지 못한 이유에는 처음 봤을 때의 비주얼이 비호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또한 매운맛, 생강의 맵고 알싸한 맛이 처음 먹는 사람의 입맛에는 거부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주 먹다 보면 푹 삭힌 홍어를 찾듯 중독된다.
최근 들어 안동식혜가 건강음식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은 심폐기능 강화와 혈소판 응집작용의 억제 기능이 있고, 생강의 진저롤 성분은 체온을 올려 모세혈관을 확장하고 면역력을 증강시켜준다. 또 무에는 비타민 C와 항산화 기능이 있으며 식이섬유도 풍부하다. 안동식혜는 소화도 잘 되지만 무엇보다 고혈압 완화와 면역력 증강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퇴가 다가오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2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로 살 수 있다는 등 제2의 인생에 대한 말도 많다. 하지만 그 달콤쌉싸름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전하려고 하면 어렵다. 무슨 일이든 첫 시작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베테랑 보험설계사가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자신감 하나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황보환(黃寶煥·52) 메트라이프 보험설계사. 그는 얼마 전 트로트 가수 하진필이라는 이름으로 ‘난 당신 편이야’를 녹음했다. 보험설계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경력을 가진 그가 트로트 가수라는 외도를 과감히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명 황보환. 메트라이프의 베테랑 보험설계사로서 자신만의 탄탄한 영역을 갖고 있는 그는 최근 하진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멋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과감한 선택을 위한 준비를 나름 충실히 하고 있다. ‘행사’를 뛸 준비를 신경 써서 갖출 정도로 말이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한 기념으로 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해서 가죽 재킷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요새 패션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어요(웃음). 아는 사람들이 보더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걸 입냐고 타박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패션이 트로트 행사용으로는 어필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인연을 통해 이어진 트로트 가수로의 길
보험설계사가 갑자기 가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된 걸까?
“10여 년 전부터는 CEO 위주로 보험설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CEO 과정에서 일 년 정도 성악을 배우게 됐어요. 거기서 작곡가 최왕국 교수님을 알게 됐는데 그분이 제게 가곡을 하나 선물해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이라는 노래였어요. 그 후 최 교수님이 이번에는 트로트 곡을 작곡했다고, 저에게 맞을 것 같다며 주시더군요. 그러니까 트로트 가수를 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고 급작스럽게 이뤄진 거죠(웃음). 그런데 저도 이게 제2의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조금씩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하진필씨는 아직 트로트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데뷔를 위해 트로트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지만 아직 성악 톤을 완전히 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과 함께했던 인생
하씨의 도전이 마냥 뜬금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음악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는 청소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학력고사 세대인 그는 옥상에 올라가 자주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고 한다.
“제가 84학번인데 대학가요제를 나가서 1차 예선은 붙었지만 2차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갑작스럽게 출전 일주일 전에 후배 여대생을 소개받고 듀엣을 하게 됐죠. 300여 팀에서 50팀 뽑는데 통과가 되더라구요. 사실 너무 쉽게 통과한 거예요. 연습도 많이 안 했고. 그때 선배님이 작사 작곡을 해주셨는데, 사회운동을 많이 하던 때라서 가사가 사회 풍자적이었죠. 결국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제게는 큰 추억이 됐습니다. 그때 대상을 유열씨가 탔어요. 이정석씨는 제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299번, 이정석씨가 298번이었죠.”
그는 또 모교인 연세대학교 100주년을 기념해 연세글리클럽이 조직됐을 때 창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봉사로 노래를 하고 합창단원으로 행사를 뛰는 등 노래와 함께한 그의 삶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보험설계사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계속 억대 연봉이었죠. 보험 업계에서 19년 일하면 굉장히 오래한 겁니다. 저는 외국계 보험사에서 일한 1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 외국계 보험사는 90년대 초반에 들어왔거든요.”
그는 한국타이어에서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큰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6년 담당하며 9년동안 다니고 그후 푸르덴셜에 입사하여 영업을 하다 부지점장 업무를 맡으면서 8년을 다녔다. 당연히 사람 관리가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럴 바에는 다시 영업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메트라이프로 옮긴지 12년 째다. 메트라이프에서는 중소기업 CEO 위주로 보험설계 업무를 맡고 있다.
한 달 만에 첫 트로트를 녹음하다
“최왕국 교수님과 통화하다 보니까 저를 위한 트로트 곡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보자 해서 다음 날 만났어요. 제목이 뭐냐고 물으니 ‘난 당신 편이야’래요. 그 제목이 마음에 확 와 닿았어요. 누구라도 끝까지 자기편이 돼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잖아요. 악보를 받아 가사를 보니 가사 내용도 너무 좋은 거예요. 멜로디도 너무 쉽고.”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들자 트로트 가수를 해보자는 마음도 먹게 됐다. 그는 곧장 보컬 트레이너를 소개받아 트레이닝을 받고 불과 한 달 만에 노래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런데 제가 기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후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열악하죠(웃음). 그래서인지 믹싱 작업이 약간 잘못돼서 제 목소리가 작게 나왔어요. 조만간 수정할 예정입니다.”
트로트 가수로의 삶을 선언한 그에 대한 주변 반응은 다양하다. 의외라는 사람도 있고 ‘너에게 딱 맞는다’ 하는 사람도 있다.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어쨌든 시작된 일이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수로 데뷔했으니 앞으로 노래 부르는 게 경제적인 부분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가수 데뷔 전에는 동기들하고 노래 봉사도 다녔어요. 생각해보니 봉사 때는 묘하게 트로트를 많이 불렀네요. 그리고 저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트로트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친구들도 네가 하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는 트로트를 배우게 되면서 트로트의 넓은 세계를 새삼 깨닫게 됐다.
“진성씨의 ‘안동역에서’라는 노래는 모르는 노래였는데, 어느 날 친구가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작년부터 뜨는 노래라고 하더군요. 안동역에는 그 노래의 비석도 있다고 해요. 노래라는 게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노래를 통해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가 베푸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신념과 경험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인생에서 ‘큰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2014년 9월에 큰 수술을 받았어요. 종합검진을 하다가 우연히 췌장에서 종양을 발견한 거예요. 암일 확률이 굉장히 컸어요. 특히 췌장암은 생존율도 적고 암으로 진단받으면 일 년을 살기가 쉽지 않아요. 검사해보고 암이든 아니든 수술해야 한다 해서 9시간에 걸쳐 수술을 했죠. 그때 CEO 과정에서 성악했던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고, 최왕국 교수님이 제 소식을 듣고 끝이 안 풀리던 가곡 ‘바람이 불어오면’을 마무리했다고 해요.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저는 그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갖게 된 거죠.”
악보를 보자마자 확신이 든 노래, ‘난 당신 편이야’
하씨가 트로트 가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영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회장이 제 선배예요. 그래서 그분께 ‘이런 곡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문의했죠. 당연히 말리셨죠(웃음). 그분이 워낙 연예계를 잘 아시니까 ‘네가 돈이 있냐, 젊길 하냐, 특출나게 잘생겼냐, 과연 시장에서 먹힐 거냐’ 하는 것들이 의문이었죠. 그런데 지인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면 반응은 굉장히 좋아요. 가사도 좋고 중독성도 있고. 사실 이건 좋은 쪽 얘기고, 나쁜 쪽으로는 확 부각되는 게 없다는 얘기가 있긴 했어요. 트로트라면 어떤 부분이 확 튀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부분은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확 느꼈거든요.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도 와 닿았고.”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곡이든 발라드든 다 좋아했어요. 트로트는 관심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트로트는 이렇다’라는 정형화된 스타일을 좇고 싶지는 않아요. 특히 너무 튀고 화려한 정형화된 이미지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노래도 좋고 가사도 좋은 트로트 가수로 평가받고 싶어요.”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 이미지에 국한되고 싶지 않아
하씨는 올해 중에 ‘난 당신 편이야’의 녹음을 새로 할 예정이다. 그리고 현재 유튜브에 노래를 올려놓은 상태다. 물론 이제 막 데뷔한 그가 앞으로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요즘은 늦은 나이에 트로트 가수로 입문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업계에서 30여 년을 있다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마땅히 박수 받아도 될 일이다. 그는 현실을 냉정히 보면서도 자신의 도전이 앞으로의 삶에 즐거움과 희망과 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디너쇼까지 할 수 있는 경지가 된다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해보고 싶어요. 트로트, 가곡, 발라드… 다만 댄스는 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