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송광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무소유길을 오른다. 1km 남짓한 숲길이라 오르내리기 쉽다. 불일암에선 법정 스님의 수목장 묘를 놓치지 말자. 하산 뒤엔 조계산의 양대 거찰인 송광사와 선암사를 비교 답사한다. 풍경도 풍토도 서로 완연히 다르다.
얼씨구! 매화꽃 핀다. 조계산 기슭 곳곳에 매화가 지천이다. 이미 피었거나 피고 있거나 피어날 채비를 하거나, 여기저기 오나가나 보나마나 천지간에 매화다. 그렇다는 건 하고많은 초목 중에 유독 매화가 꽂히듯 쏘옥 눈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딴엔 매화에 취미가 있으니 이게 호사다.
예로부터 매화는 애호가들을 몰고 다녔다. 아직 봄 일러 눈발 날릴 때부터 매화는 홀로 고고히 피어 춘색몰이를 선동한다. 동면에서 겨우 깨어난 산야로 성급히 짓쳐드는 매화의 기세에, 은은해서 더 멀리 가는 향에, 희고 차가운 꽃잎의 미색에 사람들은 들떠 입방아를 찧었다. 어떤 고인은 매화를 아내 삼아 청산에 은거했다. 조선의 명인 강희안은 매화에게 정1품 벼슬을 내렸다. 퇴계는 한술 더 뜨셨구나. 이렇게. “아아.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벌 나비들, 매화를 가만 두고 보진 못하리라. 꿀을 얻기 위해 온몸을 들이밀 것이다. 그게 꽃이 바라던 바이며, 그게 기대했던 열락이며,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농밀한 체취를 풍긴다. 활활 타오르는 뭔가 황홀한 게 꽃과 나비 사이에 있을 게다. 그러나 다 지나간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꽃 피어 열흘 붉긴 어렵고 지기는 쉽다. 사람의 일도 이와 다를 게 있던가. 청춘남녀의 사랑도,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는 해로(偕老)도, 만개처럼 은성했던 삶도 종국엔 감쪽같이 시든다.
홀리고 끌리어 매화 앞에서 한참을 노닥거리다 숲길로 접어든다. 송광사 옆댕이에서 시작되는 ‘무소유길’을 걸어 오른다. 무소유를 설하길 평생 거듭했던 법정 스님이 즐겨 거닌 산길이다. 길 끝엔 불일암(佛日庵)이 있을 게다. 법정 스님이 많은 날들을 보낸 암자다. 경전을 읽거나 화두를 타거나, 채마밭을 일구거나 글을 쓰거나, 스님은 불일암에 수시로 머물며 할 일을 다 했다. 산수 간에 몸을 두는 게 수행승의 일이지만, 긴히 덧정 들고 딱히 속정 깊어서였을까, 그는 불일암을 각별히 좋아했더란다.
정겨워라, 초봄 숲. 정겨운 건 정 주고 봐야 한다. 흙을 들어 올리고 빠끔히 낯을 내미는 풀들을 보라. 어린것의 첫 어금니처럼 애틋하고 장하지 않은가. 저마다 미끈한 지체를 뽐내는 저 길찬 나무들은 편백이거나 삼나무다. 길 물매는 순해 걷기에 좋다. 이 나라 어디에나 있는 유정한 숲길이다. 쉬 오를 수 있어 만만한 산길이다. 그러니 길과 사람이 죽이 맞는다.
무소유길의 백미는 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다. 본새 없이, 하릴없이 목 깁스처럼 빳빳할 뿐 단 한 번을 굽힐 줄 모르는 대나무는 어쩌면 아집의 화신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대나무에게 대 회초리 맞아도 싸다. 꺾일 줄 모르니 절개의 상징이요, 속이 텅 비었으니 무욕의 표징이지 않은가. 대나무 죽창은 혁명의 무기였으며, 대나무 피리는 청아한 선율로 사람의 시름을 재운다. 불교하고도 인연이 깊은 게 대나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한 대밭에 세운 죽림정사는 최초의 불교 사원이며, 선가의 스승들은 죽비를 높이 들어 공부에 게으른 제자의 등짝을 후려친다.
대숲을 지나 이윽고 불일암에 닿는다. 대나무와 조릿대 무성히 어울렸으니 사립부터 초록이 짙다. 초록으로 지은 대의 터널이다. 걸어드는 초입이 숫제 컴컴하다. 그리곤 이내 햇살 아래로 채마밭과 요사채가 환히 드러난다. 소박한 구색은 여염집에 가까우며, 고요하기론 물속을 닮았으며, 단아한 기품은 연꽃을 연상시킨다. 이 모든 그윽한 풍경에 법정 스님의 눈길이 스쳤을 테지. 모든 사물에 스님의 손길이 어렸을 테지. 임종 즈음, 제자가 물었다. “생사의 경계가 어떠합니까?” 두고두고 모실 한 말씀 달라는 질문이었다.
“원래부터 없다.”
돌아온 건 그 한마디. 투병엔 격통이 따랐으나 종신(終身)은 그답게 가벼웠다. 장례식 하지 말라, 관 짜지 말라, 사리 찾지 말라, 탑도 비도 세우지 말라. 제자들에게 남긴 당부가 그랬다. 걸리적거릴 게 없는 활보로 이승을 건너셨구나. 불일암 뜰, 후박나무 그늘 아래에 유골을 남기고, 큰스님 후련히 떠났다.
삶이 즐거운 건 살고 싶은 대로 살 때다. 그러나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쉽지 않다.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대충 살기 십상이다. 이럴 때 삶이란 위태한 곡예에 가깝다. 곡예 역시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왕지사 한 번 태어난 인생, 심란한 곡예보다는 평온한 활보로 삶을 즐기는 게 낫겠지. 이 사람을 보라.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남들이 어떻게 살건,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내 방식대로, 내 지향대로 산다.
사는 것처럼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거지? 좋은 삶이란 뭐지? 나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거지? 김형태 목사(50)는 그런 궁리를 일찍부터 줄기차게 해왔던 모양이다. 뭐시라? 누군들 그런 생각 안 해보겠어? 그리 따질 입들이 많겠지만, 김 목사의 모색은 한결 심각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이미 신 안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해서 잡다한 혼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삶이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일에 늘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심지어 화두였다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 어떻게 살긴,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생인걸, 무슨 거한 포부가 있기에 화두까지 타셨나? 그리 또 따질 입들이 있겠지만, 김 목사는 화두를 파 궁구한 나머지 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귀농 행(行)! 바로 그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삶과 교육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변에 공동체생활의 이상과 실천을 말씀하시는 스승들도 많아 영향을 받았고요. 도시의 복잡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실천하고 싶다는 거.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고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여기 합천 땅 황매산 기슭으로 내려온 건 6년 전. 이곳에 오기 이전, 청송과 산청에서도 한두 해 시골살이를 했는데, 그건 워밍업이었단다. 이미 몸을 풀고 링에 올랐기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더란다. 기쁨에 들떠 산골에 입장했다니 행복, 혹은 행복의 조짐을 움켜쥔 셈이었다.
아까 나는 이 집 입구에 도착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오! 근사한걸! 집 뒤편으로 좍 병풍을 친 산경이 기차게 삼삼해서였다. 아울러 그의 거처가 아름다워서였다. 마당 너른 집에 들어앉은 자못 큼직하고 미끈한
2층집이니 말이다. 수려한 산봉들이 우아한 코러스를 공연하는 터전이니 땅값부터 겁나게 나가겠는걸! 난 속물답게 그리 여기며 은근히 부러웠더랬다. 하지만 그게 아니구나. 김 목사는 이 집에 세 들어 산다. 우리를 자주 속 터지게 하는 ‘쩐’이라는 거, 그 요상한 물건을 그는 거의 지니질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종잣돈이라도 마련한 뒤 귀농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한동안 귀농을 망설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스승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언제까지 준비만 하고 앉아 있을 텐가? 떠나라, 유목민처럼 서슴없이 떠나라!’ 그래 그냥 따랐지요.”
“맨손으로 내려왔다는?”
“별로 손에 쥔 게 없었어요.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준 퇴직금 2000만 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제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주민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됐으니까. 이 집 주인도 그중 한 분이에요. 저의 대안적 삶에 관한 포부를 듣고 집을 임대해줬을 뿐만 아니라 개축까지 거들어줬거든요.”
“‘토기장이의 집’이라는 북 카페를 운영하시는군요. 이 집 쥔 양반은 토기를 굽나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토기장이’란 성경의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따왔어요. 아내와 딸이 북 카페를 운영합니다. 저는 농사에 주력하고.”
“목회는?”
“카페 공간을 예배당으로 여기지만, 간혹 신도가 찾아오지만, 여길 와서 제가 목사라는 걸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땀 흘려 정직한 농사를 짓는 일, 농약으로 오염된 땅을 살리는 일, 이웃들과 어울려 품앗이를 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래하는 삶, 그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영성으로 사는 일 자체가 이미 목회라 여기며 삽니다.”
자연의 영성 안에서 살기
목회라는 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려놨다는 얘기라기보다는 한결 진정한 목회자의 실천적 삶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일 테지. 그가 외로운 떠돌이로 산 바가 없었겠으나, 귀농으로 드디어 조용한 포구에 정박했다는 투의 안심과 자부심이 비친다. 그런 그에게 산골이란, 자연이란, 농사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이상적 조건일 게다. 도시의 빌딩 숲속에선 이상 구현이 어려운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야야, 어디서건 네가 너의 임자로 살면 참인 것이야! 불가에 전해지는 뉴스가 그렇다. 도시에서 그는 무엇에 식상했을까?
“사는 장소가 도시이냐 시골이냐는 물론 중요하지 않지요. 어떻게 사느냐에 문제가 있을 뿐이니. 그런데 도시에서는 마음을 돌보며 살기 어렵지 않던가요? 나를 돌아볼 짬조차 없질 않던가요?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한 발이라도 앞설 수 있지 않던가요? 산골에 산다는 건 자연의 영성 안에 사는 건데요, 가령 흙을 만지고 있으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놓쳤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선 얻을 수 없었던 힘이 생겨요.”
“농사란 여전히 못 믿을 직업으로 간주되고 있어요. 나오는 것 없이 골병만 든다고들 하죠. 김 목사님 농사는 무난할까?”
“애초 이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와서 보니 저와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 이미 살고 있더라고요. 시인 서정홍 선생님을 비롯해 유기농을 하는 ‘열매지기 공동체’의 아홉 농가 사람들, 이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구상하고 추구했던 공동체적 삶 속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간 거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농사 규모는 얼마나 되죠?”
“초기엔 200평이었으나 현재는 1200평으로 늘었어요. 마을 분들이 빌려준 밭이에요. 여기에다 아들과 함께 감자, 고구마, 수수, 생강, 양파,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수익은 없지만, 기계를 쓰지 않고 오직 몸을 써 일하기에 조금 고되지만, 그러나 만족합니다.”
“땀 흘려 노력을 했을 텐데 아직 수입이 발생하질 않다니, 이걸 어쩌나?”
“자급자족은 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게 없지요. 소출이 적더라도 우선은 땅을 살려놓고 보자는 게 유기농의 정신입니다. 문제는 요즘의 심각한 기후변화에 있어요. 노련한 토박이 농부들조차 대책을 찾지 못해 고심합니다.”
만물만상이 변하는 건 이치이지만 21세기의 날씨 변동은 왜 이 모양인가. 괴상한 게 기후뿐이랴. 나 하나, 내 가족 하나만 잘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일쑤 남을 짓밟기를 장기자랑하듯 해대는 이 시대의 이기적 세태는 또 얼마나 수상한가. 모름지기 학교 교육부터 창의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소리가 왁자하지만 정작 바뀌는 게 없으니 썰렁한 농담이다. 일찍이 이런 파행에 불신을 느낀 탓일 테지. 김 목사는 자식 셋 모두를 공교육에 맡기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양육했다.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말이다. 폼나는 학력을 걸치지 않고선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취급을 당할 세상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릴 땐 많이 불안했다 하대요. 불안과 마주앉아 자기 고민들을 많이 했다고. 근데 그게 필요한 고민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고민과 함께 내적 성장을 한 것 같아요. 학교나 학원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스스로 배워 찾아냈다고 봅니다. 야생의 어떤 감성으로 나답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나 할까.”
“성적 경쟁의 격투장인 학교에서 심히 시달리며 세상의 명암을 알아가는 건 딱히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고난을 겪고서야 근본이 강해지는 법인데.”
“공교육은 개개인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다움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제 아이들은 너무도 잘 자랐어요. 각자 자기 색깔이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어요. 모두 경제적 자립을 했고요. 일테면, 막내인 아들은 올해 스물두 살인데 어엿한 청년 농부입니다. 지적 욕구가 강해 책을 무섭도록 읽어대요. 저희 북 카페가 운영하는 ‘담쟁이 인문학교’에서 물리학이나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도 하는 아이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
어쩌면 위험한 모험일 수 있는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야무지게 키우고, 물적 토대 없는 용감한 귀농에 자족하고, 눈앞의 현실만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환상적일 수 있는 ‘자연의 영성’이라는 걸 가슴에 담고 사는 조용한 삶. 줏대와 슬기가 아니고선 꾸려내기 어려울 경관이다. 땅에 쏟는 떳떳한 노동과 자연을 향한 겸손한 순응 역시 맑은 생활의 원천이자 길일 테지.
“현실적인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합니다. 산 속에서 뭘 먹고 사느냐, 신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겠느냐고. 하지만 저는 만족하며 삽니다. 특히나 귀농으로 맺어진 좋은 인연, ‘열매지기 공동체’ 사람들을 만난 건 정말 만족스러워요. 커다란 행운이에요.”
“많은 공동체가 종단엔 실패를 하더군요. 그 가치는 아름답지만, 원초적 이기주의자인 인간이라는 종을 공동의 틀 안에 모아 함께 움직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필요한 일이죠. 같은 길을 가되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공동체라면 문제가 없을 거라 봅니다. 저는 귀농 후 자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열매지기 공동체’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마음자리를 늘 돌아보는 눈이 생겼어요. 예전 같으면 용납 못했을 일도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게 마음이 좀 넓어진 덕분이겠죠.”
“모두들 물귀신 같은 물신에 덜미를 잡혀 사는 세상이에요. 소박한 소유로 자족하는 김 목사님에겐, 가령 노후 불안 같은 건 없을까?”
“아무런 대책이 없으나 불안도 없어요. 늙어 병들면 그냥 죽으면 되지 않겠어요? 최소한의 물적 조건은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라는 건 먹고 입고 잠잘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돈 들어가지 않게 짜여 있어서 더더구나 문제될 게 없지요. 게다가 시골에선 굶어죽기가 아주 어렵습니다.(웃음) 온 산야에 먹을 것 지천이고, 경로당에서 뭔가를 챙겨주고 하니까.”
이루면 더 이루고 싶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욕망이다.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관성이다. 이런 삶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은 게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척하는 시늉이 아니라 안팎이 두루 한결같은 실천이자 실력이라면, 그건 내공이겠지.
“자연 속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됩니다. 자연 속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답게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더욱 소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힘을 빼고, 의도를 가지지 않고, 누구를 설득할 것도 없이,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자 해요. 죽음이 찾아오면 인디언처럼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겠죠. 자연이 그렇잖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
있다가 없어지는 것. 누구나 그 평범한 진리 하나를 몸에 붙이고 산다면 과히 걸릴 게 없겠지. 물신도 귀신도 사신(死神)도 두려울 것 없을 게다.
김형태 목사가 주는 귀농준비 Tip
•귀농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정붙이고 살 수 있다.
•은퇴자 귀농의 실패 확률은 매우 높다. 농사로 몸 건강을 망칠 수 있어서다. 도시와는 다른 시골 풍습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도 낭패를 볼 수 있다.
•귀농 초기엔 찍소리 안 하고 지내는 게 좋다. 원주민들과 융화하기 위해서는.
•땅으로 재테크하지 말자. 귀농인들 때문에 시골 땅값이 근거 없이 오르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대안적 삶을 원해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이상적인 병원 터는 어디일까. 아랍 의학의 아버지 라제스는 도시 곳곳에 신선한 고깃덩이를 걸어두고 장소를 물색했다. 가장 부패가 덜 된 고기가 걸린 곳에 병원을 세웠던 것. 한의사 김두섭 원장(62, 세종한방힐링센터)은 조용한 자연 속에 병원을 꾸리는 게 옳다고 봤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해서, 자못 후미진 산속으로 귀촌했다. 굳이 외진 산골까지 찾아들 환자가 몇이나 될까마는, 그는 즐겁다. 자신의 지향과 실천에 만족하기에.
준비기간은 길었다. 귀촌을 내심에 담고 이미 십수 년 전에 터를 장만해뒀다. 젊으나 늙으나 사람의 대망(大望)은 주로 서울로 쏠린다. 하지만 일찌감치 산골살이를 숙원으로 삼은 김두섭 원장에겐 오직 귀촌이 소망스런 답이었던 거다. 공들여 낫을 갈고 나서야 땔나무를 벨 수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 귀촌 준비를 해왔기에 본격적인 시동은 한결 가뿐했다. 드디어 산골에 들어가 시작한 건 4년여 전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군생활을 마치고서였다.
육사 37기 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흐른 세월은 37년. 군에서 인생의 절반쯤을 살았구나. 애당초 군에도 의업(醫業)에도 청운의 꿈을 묻은 바가 없었다지. 우연이 그의 길잡이였던 모양이다. 소싯적에 부풀린 청운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로 살고 싶다는 것, 그 하나였더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성장기의 시골생활에 넌더리가 났기에.
“가난이라는 게 너무도 싫었어요.
9남매를 건사하느라 부모님은 모진 수고를 하셨지만 다들 늘 배를 곯았어요. 아, 나는 이다음에 농고를 나와 새마을지도자가 돼 돈을 벌 거야! 꿈이랬자 겨우 그쯤이었죠.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그러니까 고3 땐 그 가당찮은 꿈을 버리고 해양대학을 가기로 맘먹었어요. 외항선을 1년만 타면 1억을 번다는 얘기를 듣고서였죠.”
“해양대학에서 육사로 목표를 바꾸었군요.”
“해양대학 입시 준비 중에 연습 삼아, 실력 테스트 삼아 육사 시험을 봤는데 묘하게도 덜커덕 붙었어요. 뜻을 두지 않았음에도 우연히 엉겁결에 육사 생도가 돼버린 겁니다. 그러나 곧 방향을 잃었어요. 육사 나와서 뭐하나? 농사 기술을 배울 곳도 아니고, 돈을 맘껏 벌 일도 못되고,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1학년 말에 그런 심각한 회의에 빠졌어요. 그러던 차 과외활동으로 참여한 동양철학반에서 침술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게 한의사로 변신한 우연한 계기?”
“바늘 하나로 환자를 다루는 침술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어요. 침을 잘만 배우면 돈을 모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열심히 침술을 익혔어요. 그러자 점차 한의학 전반으로 관심이 확장됩디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장교 임관 뒤 우여곡절을 거쳐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육본에서 운영하는 위탁교육생 자격으로 5년간 공부하고 졸업했죠.”
육사 생도와 운명처럼 만난 한의학
한의사 자격증을 받은 김 원장은 이후 줄곧 한방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전역 시의 직책은 국군수도병원 건강증진센터장. 건강증진! 그게 김 원장의 평생 소임이자 방향이다. 즐겁게 살지 않고서 건강할 수 없다. 건강하지 않고서 즐거울 수 없다. 생의 모든 명암은 어쩌면 몸 건강 문제에서 파생하거나 귀결된다. 불가의 통신에 따르면, 이 세계의 근본은 고(苦). 죽음 앞에 서 있는 게 생이지 않던가. 불친절한 죽음이 우리를 방문하는 날까지 가급적 건강을 지속하고자 용을 쓸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숙명이다. 늘그막에도 삶은 때로 슬프도록 아름답다. 눈부신 노을빛처럼. 하나 몸은 부질없이 낡고 닳고 시들어간다.
머잖아 조락할 수밖에 없는 건강에 관한 쓸쓸한 사념은 낯선 게 아니다. 그러나 김두섭 원장의 생각은 영 다르다. 어허! 그게 아니오! 늙어서도 청년의 몸으로 살 수 있는 이치가 여기에 있는 것을! 그는 그리 탕탕 외치고 싶은 것 같다. 들어볼까. 경청해 모실 만한 대책이 흘러나올 수도 있으니.
“제가 내심 장담하는 게 뭐냐면, 난 얼마든지 장수할 자신이 있다, 칠팔십 살이 되더라도 청년처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겁니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고 관찰했는데요, 늘 궁금했던 건, 일단 병 치료를 잘 마쳤더라도 일상생활로 복귀하면 다시금 병증이 도지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어요. 이게 왜 이러지? 무엇이 원인이지?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은 나쁜 생활습관이 근본 병인이라는 거였어요. 타성에서 벗어나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게 무병장수의 첩경이라는 얘기.”
“매사 습관의 노예로 살다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게 사람이죠. 그걸 알면서도 쉬 고치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는 희비극일 테고.”
“무엇보다 식습관부터 바꿔야 해요. 저의 식생활을 들어보실래요? 부디 따라 해보시길. 아침엔 잡곡밥을 지어 말린 뒤 프라이팬에 볶은 튀밥 형태의 밥 한 공기를 아주 천천히 먹습니다. 아주 천천히! 이게 핵심이에요. 천천히 먹기 위해 오래 씹어야만 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좀 딱딱한 밥을 일부러 만드는 겁니다. 천천히 오래 씹을 경우 밥알에 침이 충분히 섞여 위장으로 내려갑니다. 입안의 침! 이거 놀라운 보약이에요. 침에 함유된 효소(酵素)와 프티알린(ptyalin). 이게 음식물이 위로 내려가기도 전에 입안에서부터 벌써 소화 작용을 해내는 겁니다.”
“침이 입안에서 소화 작업을 왕성히 하도록 음식물에 침을 충분히 섞어줘라? 그게 결국 위장기능을 극대화한다?”
“위장은 내장기관이라는 공장 시스템에서 중추 역할을 합니다. 위라는 장비가 부드럽게 가동할 경우, 위장이 튼튼할 경우, 오장육부가 평화로워져 온갖 병을 예방하거나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점심도 저녁도 딱딱한 밥을 먹는 거예요?”
“지나친 음식 금욕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져오는 법. 점심은 몸이 원하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최대한 잘 먹습니다. 밥상 가득 다양한 찬을 차려 식구들과 둘러앉아 천천히 즐겨요. 저녁엔 금식을 합니다. 밤엔 콩팥과 간이 하루치 독소를 거르기 위한 맹활약을 하거든요. 이럴 때 음식을 집어넣어 훼방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정 출출하면 과일즙 한 잔을 마시면 되고.”
좋은 습관이 무병장수의 첩경
인생은 육십부터라지? 이젠 백세 시대라지? 성난 수말처럼 부지런히 뛰어 세상의 정글을 괴롭게 통과한 뒤의 노후란 실로 진정한 낙원의 삶을 누릴 찬스일 수 있다. 그러자면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무병장수를 선망한다. 어떤 신들은 인간이라는 별난 종족이 오래 사는 걸 싫어할 수도 있다. 인간의 세력이 커지면 지상의 소음과 잡음도 그만큼 커지니까. 인간들 때문에 도대체 시끄러워 편히 낮잠을 잘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툴툴거리는 신도 있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거북이보다 목숨이 짧고 플라스틱 바가지보다도 빨리 썩는 게 인간 몸뚱이임을 명석하게 알아 저승사자가 호명하는 대로 겸손히 응하는 게 순리일 성싶다. 하지만 욕망의 공식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던가. 내남없이 한사코 병 없이 오래 살기를 숙원사업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 숙원사업을 성취하고 싶걸랑 아침밥만이라도 침을 담뿍 섞어 드소서! 김 원장의 훈수가 그렇다.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돌아다니는 건각이 있다. 굳이 양말을 꿰신지 않아도 발이 이미 따뜻해서다. 이 사람은 벌목장에서 얻어온, 절집 대웅전 기둥만 한 통나무를 둘러메고 사뿐사뿐 행진한다. 절구통처럼 굵다랗게 토막 낸 통나무를 퍽퍽 도끼로 패 순식간에 장작을 만든다. 힘 좋기로 인근에 소문났다지? 이 중뿔난 장정이 바로 김두섭 원장이다. 난 아직 청년이오! 늘 그리 외치는 모양이다.
건강상태가 유난하니 귀촌의 나날이 영일(寧日)이다. 자연 속에 살고자 자원한 산골살이에 별다른 시름이 없다. 이게 거저 주어진 게 아니란다. 지난날 오랫동안 시난고난 지병에 시달렸단다. 의사라도 병을 달고 살 수 있는 일이지만, 여하튼 스타일 심히 구겼겠다. 그러나 그는 병을 털어냈다. 지병에서 해방되고서야 안심과 자족이 있는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일찌감치 위장에 이상이 왔어요. 소위 시절부터 근 30년, 그 긴 세월을 위장병에 부대끼며 지냈어요. 그 덕분에 술이라는 걸 거의 마시질 못하고 군생활을 했어요. 위장이 비정상적으로 축 처져서 오는 소화 장애, 즉 심한 위하수증이었어요. 만성피로에 늘 시달렸죠. 원인은 과식에 있었는데 침, 뜸, 부황, 보약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30년 된 병증을 결국 무엇으로, 어떻게 다스렸죠?”
“침이나 보약 같은 치료 수단은 결국 보조제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즉, 나쁜 생활습관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건강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은 거죠. 간소하고 절제 있는 생활, 지나친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신, 자연을 마음에 담는 태도, 그런 게 좋은 건강과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겁니다. 식습관의 개선은 물론, 규칙적인 운동도 그 무엇에 앞서 중요해요. 귀촌 초기에 철저하게 식습관을 변화시키고 좀 격한 스트레칭을 하자 몸이 대번에 달라집디다. 현재 저의 몸 상태나 체력은 20대 시절보다 한결 낫습니다.”
고통이 엄습해도 얻어 채울 게 있다
이미 속세에 물든 범인으로선 모범적인 생활을 고수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자기 억압적인 절제는 자칫 인생을 따분하게 만들 수도 있겠고. 조선의 거목 추사 선생은 사람이 마땅히 즐겨야 할 세 가지 일을 꼽았다. 첫째는 독서, 둘째는 음주, 셋째는 호색. 독서를 첫째로 친 걸 보면, 야야 놀더라도 공부는 하고 놀아라, 뭐 그런 뉴스가 아닐까 싶지만, 일테면 하늘과 땅의 결합을 지상의 인간들이 재연하는 신성한 의식이 성(性)이지 않겠는가. 김 원장의 생각을 들어볼까.
“노년에 이르러서도 주색을 참답게 사용하는 게 현명하겠죠. 그게 무질서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사랑의 범주에 들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도 건강하게 살자는 겁니다. 비아그라 없이도 행복하게 살자는 겁니다. 몸 건강이라는 기초공사를 충실하게 하자는 거, 가급적 자연 가까이로 귀촌해 온유한 품성을 기르자는 거, 저 숲속에서 상생하는 생명들처럼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잘 사는 노후를 즐기자는 거, 이런 것들을 생각의 중심에 놓고 삽니다.”
생활습관을 바꾸라! 산속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는 남자의 입에 붙은 소리가 그렇다. 귀촌으로 모호한 낭만을 구가할 게 아니라, 몸을 남김없이 쓰는 노동으로 심신의 건강부터 복구하라는 얘기에도 뼈가 들어 있다. 편리 대신 불편을 추구해 기른 야성으로 자연을 닮으라는 권장 역시 대안이겠지.
“이런 생각 곧잘 합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부족하기에 태어났겠지. 완벽했다면 이미 전생에 해탈했겠지. 그런 생각으로 불편과 고통마저 긍정하며 살고 있어요. 불편과 고통이 엄습했을 때, 내가 깨졌을 때, 그때 오히려 얻어 채울 걸 발견하게 되니까.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이니까.”
김두섭 원장이 주는 귀농준비 Tip
•검소한 생활을 작정하고 귀촌하자. 그게 자연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가급적 모든 일들을 손수 처리하자. 인건비를 들여가며 남의 손 빌릴 것 없이 몸 단련 삼아 직접 노동을 하자. 젊게 사는 방법이다.
•감상적인 생각을 앞세운 귀촌은 실패의 첩경이다.
•처음부터 큰돈 들여 집 살 필요 없다. 일단은 세를 얻어 살며 차근차근 적응하는 게 옳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어디로 귀촌할까, 오랜 궁리 없이 지리산을 대번에 꾹 점찍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단다. 젊은 시절에 수시로 오르내렸던 산이다. 귀촌 행보는 수학처럼 치밀하고 탑을 쌓듯 공들여 더뎠으나, 마음은 설레어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흘러갔던가보다. 지금, 정부흥(67) 씨의 산중 살림은 순조로워 잡티나 잡념이 없다. 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흔히 들었다지. 정부흥 씨는 임야 1만8000평을 사들여 일을 개시했다. 이 거창한 행세에 쓴소리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외지고 으슥하고 가파른 산 덩어리여서다. 긴 고행이 빤히 보여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청한 고행은 고행이 아니라 순행(順行)이다. 절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정 씨는 도시에서의 지난 생이 오히려 고행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어라? 나를 목줄 채워 끌고 다닌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데 왜들 난리람! 아마도 그쯤의 생각과 각오가 머릿속을 굴렀을 게다.
정 씨는 전남대학교 자원공학과를 나온 공학 박사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2012년에 퇴직했다. 임야는 은퇴 이전에 이미 사뒀다. 수시로 터를 드나들며 정을 붙였다. 귀촌 마스터플랜을 근사하게 준비하고서 임야에 길을 닦고, 기반공사를 하고, 임시 거처를 지었다. 퇴직 후에는 완전한 이주를 하고 본집을 거하게 지었다. 크고 너른, 반듯하고 웅장한 그의 거처는 이제 숲속 대궐에 가깝다. 부부 단둘이 살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로 보이지만 정 씨의 꿈과 이상이 실린 공간이다. 그의 수완과 통과 너름새가 비치는 구색이다.
터에 들어선 품목들이 크고 많으니 해온 일, 헤쳐나온 시련이 산더미였을 것이다. 신역도 신산(辛酸)도 자심했을 테지. 그러나 그는 일에 신명을 냈더란다. 오지게 터진 일복에 심취할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는 투로. 그렇다면 그는 근력 짱짱한 장한(壯漢)? 실은 정반대다. 지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50대 후반쯤 당뇨병 여파로 들이친 풍을 맞아 반신마비에 빠졌고, 강철 같은 의지로 마비에서 탈출했으나 여전한 당뇨는 신중히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리산으로 가자, 그게 살길이다! 그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산중으로 귀촌했다. 몸이 망가졌으니 흐느껴 나온 생각들이 많았을 게다. 마음의 비장한 물결에 젖어 한탄을 거두고 속으로 다진 것도 많았을 테지. 그럴 즈음 지리산이 그를 호명했고, 그는 득달같이 응했던 모양이다. 이 불운하고도 야무진 사람의 눈은 단춧구멍처럼 간신히 째졌을 뿐이지만, 얼굴엔 자주 홍소(哄笑)가 출렁거린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스트레스 많은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두주불사가 잦았어요. 결국 몸을 망쳐 당뇨와 뇌졸중이 겹치는 지경까지 갔던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죠. 5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로 다행히 반신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귀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요.”
“귀촌이, 산골생활이 건강을 호전시킨 셈인가요? 귀촌을 통해 중병을 고쳤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두 가지 요인에 힘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조력입니다. 까다로운 식이요법을 아내 덕분에 철저하게 행해왔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랄까, 그런 아내에게 제가 꼼짝을 못합니다.(웃음) 또 하나의 요인은 귀촌을 해서 만난 좋은 자연환경이에요. 숲길을 날마다 걸었어요. 배수진을 치고, 즉 목숨을 걸고, 운동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줄기차게 걸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당뇨병이 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평생 친구라 생각하며 관리하는 중이에요.”
“이 너른 터전과 다수의 건조물, 숲과 텃밭, 이런 것들을 어떻게 능히 짓고 가꾸고 관리해왔죠? 온전치 않은 건강으로 말이죠.”
“젊음과 자금력, 이 둘의 추진력이었어요.”
“인생의 하오에 젊음이라니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산골에 들어온 초기엔 엄청 젊었던 것 같아요. 하늘을 잡고 도리뱅뱅이질을 쳤죠. 무모하긴 했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같은 연구원들의 특질이 뭐냐면, 항상 도전한다는 거.”
끊이지 않았던 사건 사고
그가 도전한 종목은 여럿이다. 귀촌의 성공 모델을 본때 있게 실현하겠다는 것, 몸을 아끼기보다 닳도록 써 건강을 살리겠다는 것, 자연과 호형호제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 오누이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잘 늙어 여생을 동행하겠다는 것. 가련하고 허무한 게 인생사이지만 선한 지향이 뚜렷한 사람의 발길엔 정채(精彩)가 서린다. 안간힘을 다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그는 열렬한 활보로 귀촌의 나날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정 씨는 거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왔다. 울울한 숲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를 주도했다. 귀촌을 위해 미리 배워둔 목공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목공실을 만들어 수많은 목재를 손수 자르고 깎고 다듬었다. 3차원 건축설계 소프트웨어를 활용, 60평과 40평짜리 두 채의 집 설계도 직접 해치웠다. 건축 공사도 업자에게 도급을 주지 않고 직영했다.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중에 사고도 많았다지. 요상하게 줄줄이 이어진 사건기록을 들어보시라.
“귀촌 초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한번은 석축을 쌓다가 바윗돌에 깔렸는데, 발목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집디다. 덕분에 반년 동안 깁스를 했고, 1년 반 정도 재활치료를 받았죠. 포클레인 작업 중 전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어요. 예초기로 풀을 베다 벌집을 건드려 벌떼의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응급실에 실려가 누울 수밖에 없었고요. 하하핫! 아내에게도 역시 사고가 많았어요. 집사람이 소형 덤프트럭을 몰아요. 어느 날 언덕에서 트럭이 뒤집혀 굴렀어요. 해충과 독충에게 시달리는 건 소소한 일상이었죠. 아내는 독사에게도 물렸어요. 응급실에 달려가 해독주사를 맞고 위험을 면했죠.”
“아이쿠, 괜히 산골에 왔어, 돌아가야겠어, 그런 회의는 없었나요?”
“모든 사고들이 알고 보면 다 인재(人災)였어요. 숙달 과정으로, 필수적인 시행착오로 여겼어요. 요령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회의나 후회는 조금치도 없었고요. 산골살이는 오래 묵은 꿈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에 흥미를 못 느껴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서죠. 잘난 당신이나 혼자 내려가소서! 그런 소리 나오기 십상이죠.”
“산골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죠. 조용한 자연 속에서 과연 즐겁게 살아갈 소양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 저나 아내는 그런 면에서 시골과 적성이 맞았어요. 그러나 아내가 귀촌을 선뜻 동의하진 않았어요. 지역 선정에 반영할 네 가지 조건을 겁디다.”
“어떤?”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15분 안짝 거리에 있는 곳, 평소 늘 해왔던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요가원이 있는 곳, 수필가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가 쉽게 찾아갈 도서관이 있는 곳, 항상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네 가지였어요. 이곳 구례군은 갖가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아내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이죠.
저절로 생긴 수입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경관이 후련하고 수려하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어깨를 겯고 일렁이는 능선 마루로 파란 하늘 자락이 겹쳐진다. 빼어난 뷰! 동향으로 앉은 집이니 새벽이면 침실 창으로 햇살이 두근대며 들이칠 게다. 집 뒤 숲엔 편백나무 수림이 조성돼 있고, 숲 사이로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산책로와 정자를 꾸며뒀다. 뭐 하나 빈틈도 결함도 없어 보이는 입지이자 장원(莊園)이자 저택이다. 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정 씨는 서울에 있었던 아파트 두 채를 처분했다.
이제는 수고롭게 돈 버는 일은 작별이야. 부부는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뜻밖의 수익이란다.
“저희 임야 안에 고로쇠나무들이 다수 있어요. 봄철이면 수액을 받는데, 이걸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약간의 노동이 필요한 채취 작업을 해 연간 1000만 원쯤 수익을 올립니다. 비워두었던 아래채 2층집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걸 미처 몰랐어요. 1층은 월세를 주고, 2층은 민박 손님을 받았더니 해마다 1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가끔 귀촌인 상대의 목공 강의를 통해서도 약간의 강사료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은 해외여행 경비로 씁니다.”
이래저래 이젠 순풍에 미끄러지는 돛배처럼 순항이다. 지루하진 않을까? 그렇잖아도 함께 오래 살아온 부부가 새삼 24시간을 늘 같이 지내야만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귀차니즘’이 풍선처럼 부푸는 건 아닐까?
“제가 집사람에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요. 간간이 마찰이 없을 리 없죠. 대판 다투고 난 뒤 아내가 잠시 가출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의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찾게 됐어요. 오전엔 같이 텃밭이나 마당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하지만 저녁식사 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각자의 일을 합니다. 아내는 1층에서, 저는 2층에서.”
“귀촌인들은 흔히 조언해요. 가급적 집을 작게 지어라! 작은 집이라야 유지 관리가 쉽다는 얘기죠. 선생께서 집을 크게 지은 이유는 뭐죠?”
“내 손으로 한 번은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짓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자손들이 찾아오면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도 싶었고. 하지만 바람직한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해요. 우리 둘 가운데 하나만 남을 날이 머잖아 찾아올 텐데, 그땐 혼자서 이 너른 집과 터를 어떻게 간수할꼬, 그런 염려도 생기고.”
“산골살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죠?”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변하는 자연을 느끼며 배우며 사는 즐거움이 으뜸입니다. 몸이 녹아나는 혹독한 노동의 날들도 즐거웠어요. 건강을 유지할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뭔가 떳떳하다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기분 역시 노동을 통해 실감했어요. 노동에 휴식을 가미한 생활방식을 취하면서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행복감이 커요. 그러나 모자란 사람일 뿐이죠. 자연은 저토록 온전한데 나는 틀려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 가르치는 ‘공(空)’을 마음속으로 늘 되뇌이고…. 한 마리 배추벌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또한 기억하려 하고….”
세상의 탐욕과 광기가 침범 못할 이 고요한 산중. 몸 낮춰 마음을 평온으로 채운다면 고요마저 열락(悅樂)이겠지.
정부흥 씨가 주는 귀촌 Tip
•사전에 시골생활을 체험하자. 한두 달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월세 집이라도 얻어 살며 물정을 파악하는 게 좋다.
•집을 지을 경우 사전에 집짓기 교육을 받아두는 게 좋다. 건축은 업자에게 맡기지 말고 직영을 하자. 건축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대신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귀촌생활에 텃밭은 필수다. 그래야 적당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끗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깊고 외진 산골에 마녀들이 산다. 오순도순 친자매들처럼 정겹게 지낸다. 산골짝 여기저기, 멀거나 가까이에 떨어져서들 살지만 여차하면 만나고 모이고 뭉친다. 모임 전갈이 떨어지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녀처럼 모두들 득달같이 달려와 자리를 함께한다. ‘마녀들’이라지만 위험하거나 수상할 게 없는 아줌마들이다. ‘마음씨 예쁜 여자들’, 그걸 줄인 게 ‘마녀들’이라지.
‘마녀들’ 여섯 명은 모두 귀농인이다. 산골에서 산 세월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다들 농업을 통해 소득을 올린다. 모임을 제안해 만든 건 된장사업을 하는 임미숙(60) 씨.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녀는 귀농 동기인 강성대(70, 명박골 표고버섯) 씨를 왕언니로 해 동아리를 꾸렸다. 임미숙 씨는 도시에서 사업상의 부침을 거듭하다 활로를 찾아 7년 전에 이 산골로 귀농을 했다. 나 이제 욕심을 싹 비우고 살래! 그런 다짐을 하며 어버이처럼 푸근한 시골의 자연 속으로 거침없이 이주했다. 이후 용케도 그녀는 발랄한 또래 아줌마들을 만나 사교를 했다. 마침내 죽이 맞아 단단한 우애를 쌓게 되었다. ‘마녀들’이라는 모임 이름은 그녀의 작명.
“귀농으로 맺어진 우연한 인연이지만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지내니 큰 행운이죠. 귀농 직후 저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무엇보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힘도 부족했어요. 혼자 끙끙거리며 남들 몰래 공부를 하고 실습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던 중 인근 마을의 또래 아줌마들이 드나들며 일을 도와주었지요. 모두들 귀농 선배들이라 일 외에도 여러모로 배울 게 많았어요. 게다가 살가운 여자들이라 순식간에 정도 들었고요. 그게 ‘마녀들’ 모임의 배경이에요.”
우정이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주는 보약. 소소한 사교 이상의 결속력으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마녀들’ 모임은 시골살이를 한결 생동하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이들이 모이면 일이 벌어진다. 또는 일이 생길 때면 재까닥 모인다. 생일 같은 축일엔 파티를 펼친다. 김천농업기술센터가 개설한 음식연구회에 참여해 함께 요리를 배운다. 귀농 교육생들이 찾아들면 모두 발 벗고 나서 일을 거들거나 팜파티를 펼친다. 농번기엔 일손이 딸려 애를 먹는 곳이 농촌이지만 이들은 끄떡없다. 우르르 자매들의 농장으로 번갈아 달려가 일을 해치운다는 게 아닌가. 품앗이의 귀감이다.
“마녀들 또 뭉쳤네!”
때로 외롭거나 따분할 수 있는 게 산골살림이다. 뒷산 소나무 외엔 불만을 털어놓을 상대가 더 이상은 없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게 귀농생활이다. 하지만 ‘마녀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한다. 끝없는 수다와 깔깔대는 웃음이 꽃처럼 피어 내부에 웅크렸던 그늘을 헹궈낸다. 멀리 대구로 나가 뮤지컬이나 영화를 즐기기도 하고, 더 먼 곳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른다지. “어라? 마녀들이 또 뭉쳤네!”
농사란 어쩌면 희한한 방식의 고행. 난다 긴다 하는 고수가 아니고선 실패하기 십상이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마녀들은 모두 순항하고 있다. 다들 김천 관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으로 알려졌다. 면면을 볼까? 마녀들 가운데 유일한 독신인 임미숙 씨는 된장사업에 야무지게 매달려 기반을 잡았다. 조현숙(60) 씨는 보리떡을 만들어 기세를 돋운다. 구나윤(58, 삼도봉 천마농장) 씨는 천마 재배로 5억 원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전경정(58, 새송이 청암농장) 씨는 고품질 유기농 새송이버섯을 생산하는 유력 농군으로 부상했다. 양봉으로 꿀을 생산하는 이선화(57, 도마네 꿀집) 씨도 억대농.
화려한 이력들이다. 모든 귀농인들이 사력을 다해 성공을 추구하지만 숫제 물거품이 되는 경우마저 숱하다. 마녀들은 하늘의 자비로운 협찬을 유달리 옹골차게 누렸을까? 그럴 리가. 그들은 남들보다 더 분발하고 남들보다 더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고서도 참담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바닥을 친 그 좌절의 힘으로 다시 튀어 올랐다. 인생이란 실로 역전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얘길 들어볼까.
구나윤 “천마 재배 이전에 다른 작물을 다양하게 재배했어요. 하지만 실패만 거듭했죠. 가지고 있던 자금을 다 털어먹고 빚만 잔뜩 남았을 때 실의 속에서 착안한 게 천마 재배였어요. 그러나 이마저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복잡한 재배와 생산 과정을 숙달하고서도 판로가 여의치 않더라고요. 게다가 값싼 중국산마저 마구 밀려들었고요. 그러나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겠다는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초기엔 한 해 빚만 1억 원에 달할 정도로 큰 실패를 봤지만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것으로 실의를 털고 다시 일어서야만 했어요.”
전경정 “저는 귀농 1세대에 속해요. 원래 시골을 좋아했기에, 시골에 사는 게 꿈이었기에, 귀농에 만족했어요. 하지만 농업이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새송이버섯 재배에 나선 게 10년 전이었는데 처음엔 고전의 연속이었죠. 모든 재산이 경매로 사라지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어요. 벼랑 끝까지 몰렸던 셈이죠.”
구나윤 “저희 농장의 문제는 판로에 있었지요. 제아무리 고품질 천마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판로를 구축하지 못하면 헛수고에 그치고 말아요. 그래서 인터넷 마케팅에 주력했고, 그건 매우 정확한 타깃이었어요. 현재 인터넷 단골 고객만 600여 명에 달해요.”
전경정 “한순간에 부도가 나자 주변 사람들이 말도 안 걸더라고요. 배척하는 그 분위기, 참 서글펐어요. 급기야 제가 간암 판정을 받는 상황까지 맞이했어요. 제대로 잘 살아보기 위해 귀농을 했는데 죽을병에 걸리다니…. 금전적 압박이 중병을 가져온 것인데 의지로 떨쳐야만 했어요. 암 치료 중에 부단히 운동을 하고,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 순응을 하고 긍정심을 키우고…. 그런 노력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버섯 재배에도 더 각별한 공을 들였어요. 남편과 함께 새벽까지 농장에서 불을 밝히고 일했어요. 그 결과 5년 전부터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정적인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요. 저 들에 핀 꿋꿋한 풀꽃처럼.”
고진(苦盡)의 짝꿍은 감래(甘來)
하늘엔 때로 느닷없는 비구름이 엉기고, 인간사엔 자주 우환이 끼어든다. 하지만 지구상의 가장 강인한 생물에 속할 인간은 때로 무적함대처럼 용맹하다. 운세를 경영하는 촉이 살아 있을 경우 우환이라는 놈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귀농으로 고진감래의 여정을 연수한 두 ‘마녀’의 술회엔 가슴을 파고드는 감명이 서려 있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게 인간사라지만, 어떤 상황에서고 할 일을 능히 찾아 치열히 행하고 볼 일이렷다.
농사 혹은 돈벌이만이 마녀들의 본분사는 아니다. 심혼을 촉촉이 적시는 정서적 만족감이 있어야 생이 즐거울 게 아닌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간에 이른 이 아줌마들이 갈구하는 건 즐거운 나날들의 지속일 테지. 그 어엿한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귀농을 택했고, 시골은 그녀들에게 응분의 선물을 주었다.
임미숙 “여자 혼자 사는 제 입장에선 일 자체가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시골생활이에요. 마녀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고 격려하며 지내는 일에서도 커다란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흔히들 시골엔 문화 여건이 열악한 걸로 알지만 사실과 달라요. 가령 김천농업센터만 해도 다양한 문화강좌가 개설돼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우쿨렐레와 천연염색을 배웠어요. 제과제빵 기술도 배웠고, 한식요리사 자격증도 땄어요.”
이선화 “시골생활 초기엔 모든 게 힘들었어요. 그러나 원래 허약 체질이었던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건강해졌는데요, 우선은 거짓말 없는 자연에 마음을 두고 산 덕분이라 봐요. 잔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한 포기도 사랑스럽고, 하늘과 구름과 달과도 대화가 되는 기분이에요. 저희 부부는 이동 양봉을 합니다. 철 따라 꽃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제가 사실은 현대판 집시여인이에요.(웃음) 꽃이 좋아 꽃을 따라 늘 여행하는 여자라는 거.”
구나윤 “처음엔 시골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어요. 새벽부터 동동거리며 수많은 일들을 해야 했으니까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죠. 몸은 망가지고, 부채만 쌓이고, 화병이 생기고, 참 문제가 많았던 시절이 길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누군가 귀농을 한다면 뜯어말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시련기가 지나고선 서서히 안도와 행복을 느꼈어요. 판로를 구축해 천마 판매에 탄력을 붙이면서였어요. 나름의 부를 일굴 수 있었던 덕이죠. 이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삽니다. 사고 싶은 것 사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거의 맨날 붙어 지내는 남편과는 충돌이 많지만, 그동안 꾹 참고 살았지만 이젠 눌려 살진 않을 거예요. 밥을 찾아 먹거나 말거나.(웃음)”
전경정 “시골이 싫다는 여성이 많지만 저는 참 좋아요. 그래서 촌스럽게 생겼을까?(웃음) 마음도 촌스러워요. 주변 산과 꽃의 경이로움을 사진에 담는 일이 참 즐거워요. 그보다 좋은 건 ‘마녀’ 언니들과 어울리는 일이에요. 제겐 원래 언니가 없어서 이 언니들에게 더 기대는지도 몰라요. 음, 농사란 좋은 직업이라 봅니다. 생명공학도라 할까? 농부는 항상 자기개발을 하는 사람이라 봐야 할 거 같아요.”
인사만 잘해도 탈날 일 없어
수많은 인구가 넘실거리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골똘히 주시하지 않는다. 피차 피곤할 수 있는 간섭을 가급적 자제한다. 그러나 시골에선 다르다. 마을 인구가 워낙 적기에 이웃에게 자연스레 관심이 쏠린다. 게다가 마을 나름의 질서와 풍습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누군가가 귀촌을 했다면, 그는 이삿짐을 푸는 첫날부터 무대에 오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입길에 오른다. 야무지고도 건실한 마녀들, 이들은 원주민과의 융화에 애로를 느끼진 않았을까. 들어보자.
구나윤 “시골분들이 합리적이진 않을지라도 자연스럽게 물들며 살아왔어요. 가령, 모처럼 치장 좀 하고 외출할 경우, 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느냐는 투의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참견이죠. 하지만 귀농인들이 조심하며 지내는 게 상책이라 봐요.”
임미숙 “간섭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들을 간섭으로 듣지 않으면 돼요. 그냥 하는 소리니까요.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게 필요하고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만 잘해도 탈날 게 없어요.”
전경정 “시골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이웃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었어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적극 노력을 했어요. 저희 남편은 마을의 초상집을 찾아다니며 시신까지 만졌어요.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죠.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면, 결국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어요.”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마을 주민 모두를 내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실패할 일이 없겠지. 그게 쉽겠냐마는 마을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선 설 길이 없다. ‘마녀들’처럼, 우정과 공감에 찬 동아리를 만든다면 한결 든든할 테고.
소설가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지리산 중턱, 해발 800m, 계곡 물소리 쿵쾅거리는 산중이다. 한때 도류(道流)의 은둔 숲이었던 청학동 구역이다. 이젠 관광지로 변해 차들이 물방개처럼 활개 치며 드나들지만, 특유의 깊고 외진 풍색은 여전하다. 영화감독 김행수는 이 심원한 골을 일찍부터 자주 찾아들었더란다. 2년 전부터는 아예 집을 짓고 눌러 산다.
우레처럼 요란히 소쿠라지는 개울물을 건너고, 허리띠처럼 비좁은 비탈을 오르자 길 끝에 나타나는 외딴집 한 채. 김행수의 거처다. 마당에서 일하고 있던 그가 장승처럼 우뚝 멈춰 서서 객을 맞이한다. 얼마 전 미친 듯이 퍼부은 폭우로 무너진 돌담 귀를 보수하던 참이었다. 웃통을 벗어젖힌 바람에 드러난 몸피가 듬직하다. 볕에 그을린 구릿빛 살갗으로 내비치는 근골이 두루 짱짱하다. 산중 살림이란 노역(勞役)의 연속이기 십상이다. 해서, 몸이 단련되고, 그 와중에 마음도 덩달아 양양해지는 바가 있을 테지.
암자 터에 혼자 지은 흙집
김행수의 나이는 예순다섯. 흔히들 은퇴를 해 세상의 뒷전으로 물러날 걸 고려하는 나이다. 경치 좋은 시골에 들어가 자연을 벗 삼은 평온한 생을 꿈꿀 만한 시점이다. 모아둔 재물이나 연금을 쪼개 쓰며 만족과 안식이 있는 일상을 추구할 시기다. 그러나 김행수의 생각과 지향과 현실은 사뭇 다르다. 영화를 삶의 반려로 삼은 그에게 일단 은퇴란 없다. 수려하고도 으슥한 산속으로 귀촌을 했지만 자연을 완상하며 한가하게 노닥거리길 목적으로 삼지도 않았다. 손에 쥔 게 별반 없는 물적 현실은 빈 술잔처럼 따분하지만 기죽을 일 없는 깡으로 버틴다. 독특한 양상이다. 남다른 이색과 이채가 서려 있는 삶일 게다.
김행수의 집터엔 과거 한때 암자가 있었단다. 불자 이상의 수행자이기도 한 그가 우연찮게도 폐사지에 들어앉았으니 궁합이 맞는 터다. 그는 한동안 이 터전에 비닐하우스를 대충 짓고 대충 지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흙집 한 채를 지어 붙박이로 눌러 살기 시작했다. 그가 ‘토굴’이라 부르는 이 집은 작고 허술하나 창의(創意)의 산물이다. 꾸밈과 치레가 없이 투박하나 통뼈의 집적처럼 늠름하다. 지붕 한쪽은 그저 투명 비닐 한 장으로 마무리해 별이 뜨고 지는 걸 바라볼 수 있게 해두었다. 햐, 놀라워라. 이 기발한 흙집을 혼자 지었다는 게 아닌가.
“간신히 비바람이나 가릴 수 있는 비닐 움막도 딱히 나쁠 건 없었어요. 하지만 여기에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살려면 도로명 주소가 있어야 한다 하더라고. 그러자면 가건물이라도 지어야 했어요. 그래 혼자서 주변의 통나무와 흙을 모아다 근 1년에 걸친 공사로 집을 지었어요. 그런데 이게 완전 실패한 집입니다.”
“실패? 어떤 점에서?”
“집 안의 습기나 냄새를 빨아들인다는 점에 흙집의 장점이 있다는 걸 실감하지만, 그 외 이 집에선 보잘 게 없으니 실패일 수밖에. 집짓기 경험도 식견도 없는 채로 엉성하게 지은 탓입니다. 흙에 볏짚이라도 버무려 벽을 쌓았다면 좋았을걸, 그리 하지 않았더니 벽이 마구 갈라집디다. 쩍쩍 벌어진 틈새로 지네 따위 별별 벌레들이 다 기어들어 와요. 바람이 숭숭 새들어오고 말이죠.”
“그건 적절하게 보완하면 되는 거 아네요? 이 후미진 산중에 손수 집 한 채를 지었다는 게 진기해요. 야생의 힘 같은 게 느껴져서.”
“뭐 골병만 들었습니다.(웃음) 그나마 자랑할 건 구들장을 제대로 놔 불을 때면 바닥이 절절 끓는다는 점이죠. 하지만 여름엔 온실처럼 덥고 겨울엔 냉장실처럼 차가워요. 벽채 단열 부실하지, 판자와 비닐로 지붕을 대충 얹었지, 이거 참 심란합니다.”
“비용은 얼마나 들었죠?”
“별로 돈 들어간 건 없어요. 철근이나 쇠파이프, 중고 창문, 구들장 정도를 구입하느라 돈을 좀 썼을 뿐이니까. 좀 더 작게 지었다면 지출을 더 줄일 수 있었겠지만 공사를 하다 보니 커지더라고.”
산방에 눌러앉아 쓴 소설, 올봄 출간
공사가 커졌다지만 자그마한 산방이다. 허세와 허영으로 뒤발한 건축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몸뚱이 하나 눕힐 공간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그런 생각으로 흙집을 지은 것 같다. 그런 소박한 태도로 이 난잡한 세속사회를 조용히 견뎌왔으며, 그런 허심한 인생관으로 애환의 연극무대인 삶을 줏대 있게 버텨온 것 같다. 그러하니 자신의 지향을 놓치지 않았다는 자족이 있겠으나, 상처 역시 은연중에 고여 일쑤 고독에 휩싸일 수도 있겠지. 훨훨 날아다니는 품새로 존재의 빛을 발하는 자에게만 눈이 쏠리는 게 세태이지 않던가.
김행수는 1985년 영화 ‘단(丹)’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이후 다수의 시나리오를 썼다. ‘신라승 김교각’, ‘재일동포, 아! 나는 누구인가’ 같은 로케이션 다큐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지난 20여 년간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건 정신의 지옥을 사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 괴로운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적막한 산방에 눌러앉아 소설 하나를 써 올봄에 출간했다. 불교 구도소설 ‘공유(空有)’가 바로 그것. 소설쓰기란 방울방울 혼신의 피를 뿜는 일. 그의 뚝심을 알아볼 만하다.
“오래전부터 불교영화를 하나 만들고자 나름 치열하게 노력해왔어요. 시나리오를 완성해 주머니에 품고 살며 근 20년간 영화화하기 위해 진력했죠. 하지만 제작투자자가 붙질 않더라고. 자본이 있어야 영화를 만들 텐데 길이 열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 시나리오를 소설로 바꿔 출간했어요. 제작비 마련의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였죠.”
“소설의 반응은?”
“신통치 않지만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어요.”
“제작자가 붙질 않는 이유, 뭐라 보시죠?”
“상업영화 시장은 대기업 중심의 자본논리로 돌아갑니다. 돈 될 영화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죠. 게다가 저처럼 나이 든 사람보다 말랑말랑한 신인을 선호해요. 나이 들었으니 고리타분할 것이다, 새롭지 않을 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요. 이게 한심한 편견이죠. 나이 먹어 오히려 새로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충분히 신선하다면, 충분히 흥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나리오라면 덤벼들지 않을까?”
“불교영화? 그게 돈 되겠어? 그런 선입견이 팽배해 있어요. 비애를 느낍니다. 당신의 시나리오 품질에 혹은 연출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냔 얘기도 듣지만 진지한 감독이라면 누구나 최선을 다하기에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에요.”
“물심양면으로 불황이 깊은 세월이었겠어요. 결례되는 얘기이지만, 영화를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자그마치 20년을 공들인 일에 활로가 찾아지지 않는다면 후다닥 바꾸는 게 상책일 수도 있지 싶어서.”
“영화가 아니면 무엇을 하나? 제작환경이 저열하고 열악하지만, 평생의 일이자 꿈인 영화를 포기하고서야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비슷한 처지의 감독들은 부업을 찾거나 아예 직업을 바꾸기도 하지만 제 경우는 그게 안 돼요. 내게 아직 운이 오질 않았어, 기다려보자, 그렇게 자위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영화를 생각하면 소년처럼 들뜨는 사람
영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을 자처하는 김행수의 행보엔 갈지자가 없다. 비바람 속 난항이지만 주저앉을 수 없다는 결의는 날로 굳어진다. 운명의 여신은 거칠게 다룰수록 복종한다지? 우직한 열망, 김행수는 그 하나로 운명과 거칠게 겨루는 사람으로 보인다. 일테면 꾀를 쓰는 기회주의로 강자에게 빌붙는 방식 따위에 그는 관심도 요령도 없다. 자신의 적성과 실천은 불교적 수행에 부합한다는 게 아닌가. 실제로 그는 거의 승려처럼 산다.
그렇기에 김행수는 외롭고 적막하고 돈 없는 산방의 소탈한 살림살이에 자족한다. 가만히 바위처럼 눌러앉아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산골에 들어왔지만, 물질에 시달리지 않을 무욕의 삶을 밀어붙이기 위해서도 산중 살림이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물신에게 절을 하며 산다. 가난을 원수로 여긴다. 김행수의 생각은 썩 다르다.
“소설 ‘공유’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진공묘유(眞空妙有)’를 풀어나간 작품입니다.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경지, 이게 진공묘유인데 본래의 성품인 참마음을 닦을 수 있는 이치를 알려주는 묘리죠. 마음이라는 거, 그거 하나를 잘 쓰면 무엇에 걸리거나 시달릴 게 없어요. 모두들 돈, 돈, 돈 하지만, 돈을 산처럼 모았다고 마음이 저절로 편해질까? 오히려 재산을 지키려고 더 불편하게들 살지 않던가요?”
“수행에도 예술에도 최소한의 물적 토대는 필요합니다. 돈에 목을 걸 일은 아니겠으나 지나친 궁색은 불편의 원천이기도 하죠.”
“돈의 노예로 사는 건 위험하다는 얘기입니다. 움켜쥔 손, 즉 욕망을 탁 놔버리는 그 순간이 부처의 자리이며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조짐이에요. 그런 사람이라면 물질에 시달릴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고.”
“욕망을 무슨 수로 탁 놓을 수 있을까? 욕망 중에서 좋은 욕망을 잘 가려 쓸 수만 있더라도 내공이겠죠. 무욕으로 포장된 말만의 청빈보다는, 때 묻을 수밖에 없는 돈벌이로 응분의 밥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더 떳떳한 수행이자 내공이겠고 말이죠.”
“가족보다 직장보다, 오롯이 나 자신의 시간을 나답게 쓰고 가는 게 더 소중해요. 나 아닌 남들에게 시간을 다 빼앗기고 나면 결국 나 자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저를 두고 이기주의자라고도 하지만, 이건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김행수는 쉰 살이 넘어 결혼을 했다. 아내와 어린 딸은 현재 도시에 살고 있다. 영화 하나에 홀려 평생을 살아온 그는 용케도 가족부양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가족들이 그를 숫제 포기한 덕분이라지. 이토록 요상한 행운이라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행운은 언제 오려나. 자나 깨나 그가 기다리는 건 영화제작자의 출현이지만 아직은 진도가 더디다. 영화를 생각하면 그는 소년처럼 들뜬다. 세상의 외면에 분노의 아드레날린이 굶주린 짐승처럼 혈관을 달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산이 성큼성큼 가슴으로 걸어 들어와 위안의 밀어를 건네줄 테지.
“산중에 살며 점점 산을 닮아가는 걸 느껴요. 저의 몸이 영혼의 집이라는 걸 깨달아요. 남들은 무위도식하는 걸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영화 외의 모든 걸 다 놓고 사는 삶은 낭비가 없기에 분주하고, 지루할 게 없어서 생동해요. 물론 때로 오욕칠정에 휘둘리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자주 괴롭지만….”
번뇌도 보약이겠지. 괴롭고 슬퍼야 빛깔이 짙어지는 법이니까. 영화를 향한 간절한 열망, 그게 투명한 감옥일지언정 허공으로 비끼는 몽환일 리가. 해 저물어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김행수가 소박한 밥상을 차려낸다. 텃밭 부추를 밥에 넣고 비빈 부추비빔밥이다. 상큼한 부추향이 산방에 번진다.
김행수 감독이 주는 귀촌 준비 Tip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사는 삶은 한결 만족스러울 수 있다. 도시에서는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모으려는 사람들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질 경우엔 낙오자 취급을 받지 않던가. 그러나 산골에선 경쟁 대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닮게 마련이다.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겠는가. 즉각 행동에 옮기는 게 옳다. 귀촌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세 번째는 안동 봉정사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한 봉정사는 조계종 16 교구 본사인 의성 고운사의 말사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꼽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보유한 고찰(古刹)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심포 건축인 극락전과 가장 오래된 다포 건축인 대웅전이 각각 마당을 갖춘 병립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대웅전의 석가 신앙과 극락전의 아미타 신앙을 구현한 봉정사에는 종합 승원으로서 스님들과 신도들의 신앙과 수행, 생활을 위한 다양한 건축물들이 존재하며, 아직도 주변 밭에서 음식재료를 재배하고 식용하는 수행 합일을 실천하는 산사(山寺)이다.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으며,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건축물을 보고 싶다며 찾아와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세계유산에 등재된 올여름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들르며 또 한 번 세인의 관심이 쏠린 곳이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이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히며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로도 수행을 이어간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 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이후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그리고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
봉정사는 7개 산사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절집이며 여느 사찰처럼 오 리나 십 리 숲길도 없고 초입이나 산자락 어딘가에 수십 개의 승탑이나 탑비가 줄지어 있지도 않으며, 높다란 당간지주나 우람한 산문이 위압적으로 길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해탈문이나 사천왕문도 없다.
안동시내에서 30분 남짓,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절 아래 사하촌도 복잡하지 않아 그 흔한 산채백반 식당가도 없고 몇 채의 민가와 식당이 있을 뿐이다. 매표소를 거쳐 오르막 왼쪽으로 퇴계 이황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정자 명옥대(鳴玉臺)를 지나면 잠시 평지가 되는 곳에 일주문이 서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인데 이내 평지 주차장 겸 작은 절집 앞마당이 나온다. 다시 경사진 돌계단을 올라 만세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하면 대웅전이다. 제법 긴 오르막 지형인데 그리 험하거나 지루하게 길지는 않아 차분하게 올라갈 수 있다.
누각 2층 안쪽에는 ‘萬歲樓’(만세루) 현판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과 ‘德輝樓’(덕휘루) 현판이 걸려있다. 즉, 만세루가 한때는 덕휘루였다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만세루로 바뀐 것인데 ‘癸丑中夏(계축중하) 金嘉鎭(김가진)’이라는 낙관을 보면 1913년 여름에 썼다는 것이니 최소한 100년 정도는 덕휘루라 불렀던 것 같다.
덕휘루라는 명칭은 이곳을 유생들이 제법 많이 찾아와 공부도 하고 경전을 읽으며 지낸 흔적이라고도 한다. 입구에 명옥대가 있는데, 이는 유교와 불교가 반드시 배척한 것만은 아니고 잘 지내기도 했다는 흔적으로 보인다.
만세루에 올라서면 대웅전 마당인데 왼쪽에 있는 극락전을 먼저 보기로 한다. 극락전 앞에는 대웅전 앞 만세루처럼 우화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영산암으로 옮겼다고 하며 바라보는 정면이 극락전, 왼쪽에 고금당, 오른쪽에 화엄강당이 ‘ㄷ’자 형태로 모여 있고 마당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통칭되어 왔으나 1972년 완전 해체 시 발견된 상량문에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한 기록이 나옴으로써 1376년 중수한 무량수전에 앞서는 건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한옥의 건물 중수(重修)는 대개 150년에서 200년을 지낸 후에 하게 되므로 건축연도를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정확한 건축연도가 나온 것은 아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을 묶어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하는데 건축양식은 극락전이 더 고식(古式)이라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참고로 창건연도가 확실한 건물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1308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지만 측면 칸은 좁아서 정면이 긴 직사각형 건물이며 배흘림기둥을 세운 주심포식 맞배지붕 형식이다. 1972년도 해체 복원 시 근대식 안료를 이용한 단청을 했다는 등 졸속 복원의 비난이 있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극락전 옆은 대웅전 영역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보물 제55호였으나 2009년에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선덕 10년: 1435년, 세종 17년)이라고 적혀있고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라고 되어있어 대웅전 창건이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이나 앞선다는 것이니, 현존 최고의 건물이 극락전에서 다시 대웅전으로 바뀔 판이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지정 21년: 1361년, 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되어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삼존불 뒤에는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를 걸었는데 이 부분을 보수할 때에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또 다른 후불탱화를 발견하였다. 대웅전 초창기 때 그린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 제161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사찰에서 별도 보관 중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둘러보았으면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을 다 본 것이다. 그만큼 봉정사의 규모는 크지 않고 당우(堂宇)들도 많지 않다. 그밖에는 작은 삼성각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 보았다고 하산을 해서는 안 된다. 대웅전 오른쪽 언덕 위에 영산암(靈山庵)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립문을 나서 흐르는 물을 건너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올랐다는데 지금은 계단이 잘 놓여 있다. 그저 고즈넉할 뿐 따로 볼만한 것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산사의 분위기가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이다.
극락전 앞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다는 우화루(雨花樓)에 들어서면 정면에 응진전(나한전)과 삼성각이 있고 왼쪽에 송암당, 오른쪽에 관심당이 역시 네모꼴(ㅁ) 구조로 모여 있다. 가운데 마당에는 자그마한 동산을 만들고 기암괴석을 심어 휘어진 향나무 고목과 함께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봉정사를 일컬어 목조건축의 박물관이라고 한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국보로 지정된 것을 일컫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고졸하고도 검박한 건물들인지라 더욱 맘에 끌린다. 과연 영국 여왕에게 보여줄 만큼 가장 한국적인 건물임에 틀림이 없다.
다른 절집들보다 작은 규모에, 크고 화려하게 추진하는 중창불사 하나 없어 더욱 맘에 드는 진정한 산사(山寺) 봉정사였다.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정이품송과 식당가를 지나 산사 7곳 중 가장 비싼 입장권(4000원)을 끊고 떡갈나무 우거진 맑은 계류(溪流)를 따라 오리 숲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 즉 호서(충청)지방 제일의 절집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아래 안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씌어 있어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오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나오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오리 숲길을 벗어나 계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는 사실상 첫 관문인 금강문이다. 마곡사가 해탈문이 첫 관문이듯 법주사는 금강문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분들은 문수, 보현보살과 금강역사로 똑같다.
다만 마곡사는 보현과 문수 모두 동자상을 모셨는데 법주사는 어린 동자상이 아닌 보살상을 모신 점과 해탈문이 아닌 금강문으로 부르는 점이 다르다.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산중에 위치한 산사(山寺)지만 전체적으로 평지 지형에 크고 작은 당우(堂宇)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금강문을 들어서서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주사 경내는 대략 돌아보았다. 물론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또한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