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술을 즐기다 보니 술 만드는 기술이 궁금해졌더란다. 그래서 양조법을 배웠고, 조예를 키웠고, 마침내 술도가를 차렸다. 최고의 술을, 독보적인 전통주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이게 그의 귀촌 내력이다. 산골 숲속에 터를 잡았다. 된통 외진 골짝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도란거려 술을 익히나? 술 아니라 맹물이라도 향긋하게 무르익을 풍광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산골 술도가 사장 정회철(56) 씨의 전직은 변호사. 변호사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집어치우고 고시학원 강사로 뛰어 이름을 들날렸다. 충남대학교 로스쿨 헌법 교수로도 재직했다. 남들 눈에는 활보였겠으나 그는 도중에 멈췄다. 시골로 내려가기에 마땅한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건강에 탈이 났기에. 일밖엔 난 몰라! 그는 그리 속으로 외치며 열렬히 직업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몸에 적신호가 켜진 것.
“머리 아픈 증상이 극심했어요. 오랜 세월 누적된 과로로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거죠. 온몸의 기(氣)가 머리로만 몰렸던 것 같아요. 단 5분도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어요. 밤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죠.”
“사법고시 준비생들에게 스타 강사로 널리 알려졌었다죠?”
“근 10년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했어요. 하루 너덧 시간을 내리 강의하는 식으로 열심히 했죠. 제가 고시생들을 위한 헌법 수험서 열 권을 펴냈는데, 날이면 날마다 글을 쓰는 일도 무리였어요. 명예도 좋고 부(富)도 좋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건강부터 되살리고 보자, 그런 생각으로 귀촌을 했습니다.”
“귀촌 이후 건강은 좋아지셨고?”
“강의하고 책 쓰고, 머리의 에너지를 모조리 써야만 하는 강행군에서 벗어나자 몸이 빠르게 회복되더군요. 요즘 다시 머리가 아파지려 하지만.(웃음)”
“양조장 일의 과로로?”
“양조사업 구상은 귀촌 이전부터 나름 충실하게 해왔어요. 양조 공부를 많이 해뒀죠. 덕분에 일의 진행이 빨랐어요. 그런데 전통주 사업, 이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일본 술 사케나 서양 와인은 1년에 한 번 빚으면 그만이지만, 저희 토속주는 1년 365일 계속 매달려야 하거든요. 게다가 양조장 개업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머리 아플 수밖에.”
“적자 발생 원인이, 문제점이, 어디에 있죠?”
“소비자들이 전통술을 잘 모릅니다. 변호사가 만든 술이라 호기심을 가질 법하지만, 별 관심들이 없더라고요. 전래의 청주 문화, 약주 문화는 이미 고사 직전이에요. 거대 기업들이 장악한 유통망을 저희 같은 작은 업체가 파고들기도 어렵고.”
정회철 씨의 양조장엔 ‘전통주조 예술’이라는 상호가 걸렸다. 그 옛날의 고귀한 양조 정통을 살려 예술에 맞먹을 술을 빚겠다는 의지를 실었다. 산중 유벽한 곳에, 수려한 숲속 5000평 부지에, 살림채를 비롯해 완벽한 수준의 양조 시설물들을 구축했다. 본때 있게, 맵시 있게.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개량 한복을 소탈하게 차려입은 정 씨. 안면에 자란 텁수룩한 수염이 입성과 오붓하게 어울린다. 숨어사는 사람처럼 표정은 고요하다. 넘치는 의욕으로, 신명에 찬 근면으로, 그는 오직 술 만들기에 전념해왔단다. 주조(酒造)만을 일삼진 않는다. 양조 기법과 술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체험교실도 운영한다. 게스트하우스도 겸한다. 하지만 아직은 불황! 세상의 그 어디에도 예외가 없다. 사업판이란 적자생존의 정글이라는 거.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지만, 전국 곳곳에 산재한 군소 전통주 업체들이 고전한다. 그는 그걸 몰랐을까? 몰랐단다.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상황을 알았다면 덤벼들지 않았겠지요. 몰랐기에 사업 착수가 가능했던 겁니다.”
“그 무슨 신념이 있었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셨던 전통주를 제대로 복원해 보급하고 싶었어요. 진정한 민속주를, 장삿속만을 추구하지 않는 술다운 술을 빚는다는 거, 그건 사업 성패를 떠나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어요.”
“전통주를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의 술이 최고라 자부해요. 장인정신을 표방하며. 당신이 만드는 술은 어떤 특장이 있나요?”
“좋은 술은 일단 맛이 빼어납니다. 미각과 후각은 물론, 시각까지를 미묘하게 자극해 만족을 주죠. 또 숙취라는 게 없어요. 그럼 좋은 술을 만드는 관건은 무엇인가? 누룩입니다. 어떤 누룩을 썼느냐에 따라 술의 품질이 결정돼요. 대부분의 업체들은 첨가물이 들어간 인위적 누룩을 사용하는데, 이게 술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겁니다. 저는 직접 자연발효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요.”
정 씨가 술을 내놓는다. ‘무작53’이라는 이름이 붙은 술이다. 알코올 도수는 53도. 조선의 명주 ‘적선(謫仙)소주’를 원본으로 해 빚었다는 정통 증류식 소주. 한 잔 털어넣자 감미롭게 혀를 굴러 뜨겁게 목으로 넘어간다. 그는 증류식 소주 외 약주와 막걸리도 만든다. 술마다 고가격을 매긴 건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자부심의 표출이겠지.
술꾼들은 좋은 술에 대한 얘기만 나와도 엔도르핀이 솟는다. 이태백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더불어 풍진 세상 흥겨이 노닐었던가. 날이면 날마다 막걸리를 마시며 쓸쓸한 이승을 소풍처럼 살다 귀천(歸天)한 천상병 시인의 동류는 또 얼마나 많던가. 술로 구겨진 인생도 숱하지만, 술의 위무(慰撫)로 일어선 인생사도 즐비하다. 가장 복스러운 인생은 술 빚는 자의 것일지도. 향기로운 술로써 세상에 미만한 고독과 고통을 씻는 일에 일조하기에.
“술을 만드는 일, 좋은 술을 빚는 일, 거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정말 즐거워요. 용케도 만족할 만한 술이 만들어졌을 땐 기뻐 날뛰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죠. 모두들 세상에서 최고는 돈이라고들 하지만, 제겐 술이 최고예요.”
“‘최고의 술’을 만든다지만 부진을 면치 못하는 중이군요. 불안은 없을까?”
“귀촌 전, 진정 기꺼이 즐기며 남은 생 전체를 쏟을 일을 찾았어요. 그게 전통주 사업이었죠. 단순한 술도가가 아니라, 풍류를 중심에 두고, 모두 흥겹게 어울려 놀 수 있는 복합 술 문화공간으로 가꾸고 싶었어요. 그게 꿈이자 목표예요. 불안? 그런 건 없어요. 다만, 화증과 짜증은 많이 늘었죠. 화 폭발의 대상은 와이프이고.(웃음)”
“부인이 무슨 죄? 신사는 여자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는 법이죠.”
“아내가 하는 말, 서울에서 이토록 열심히 일했다면 빌딩을 벌써 사고도 남았을 거요! 저는 일벌레입니다. 부진한 수익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 그 하나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사업상의 향후 전망은 밝으니까.”
“활로를 찾았다는 얘긴가요?”
“예전과 달리 젊은이들이 전통주에 관심과 호감을 갖기 시작했어요. 제겐 고무적인 정황이죠. 어, 이거 맛있네! 기존 막걸리와는 다르잖아! 이게 뭐지? 전통주네! 그런 반응들.”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바람 잔 날에 바람개비를 쥔 사람의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람이 일기를 기다리기. 다른 하나는 앞으로 바람처럼 달려 바람 일으키기. 정회철 씨는 냅다 질주 중이다.
“선택과 집중. 돌아보면, 제 인생은 그걸 나름 잘 해왔어요. 뭐든 신중하게 선택하고 가차 없이 몰두해왔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바꿨어요. 이런 저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기분으로 조마조마 바라보는 건 와이프이고.”
“어릴 적 꿈은?”
“제가 대학 땐 운동권에서 뛰었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할까, 정치인이 되고 싶은 꿈이 좀 있었죠. 그러나 한계를 느꼈어요. 그건 나의 길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긴 해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판단을 했어요. 오늘날 이곳에서의 양조 일, 그건 인생 후반에 발견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 사업과 적성이 잘 부합하는 거예요? 비즈니스란 허울 좋은 요령과 처세가 무기일 텐데.”
“흠, 얼마 전 너무도 힘들어 난생처음 점집에 가서 사주를 봤는데요, 절더러 한량 타입이라 합디다. 한량? 내가 정말 그런 거야? 반신반의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정히 그렇다면 잠든 ‘끼’를 살려 재미있게 살면 되겠지, 워낙 모범생으로 성장해 내향적인 성격이 굳었지만 술과 더불어 한평생 즐겁게 살자, 그런 다짐을 해보는 것이죠. 저희 부부에겐 슬로건이 하나 있어요. ‘재미있게 살자!’ 부제(副題)도 있어요.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떠밀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한 것과도 같은, 그런 절박한 굽이를 곧잘 마주치는 게 인생이지만, 웬일인지 파도는 흔히 절로 가라앉는다. 그걸 문득 느끼자면, 순항도 재미요, 난항도 재미다. 자신이 선택한 상황 안에서 자극과 감흥을 발견해 즐기는 데에서 삶의 풍미는 돋아난다.
“귀촌을 해서 목가적인 낭만을 즐기겠다는 태도는 위험해요. 일 속에서 재미와 가치를 구해 행복의 실체를 찾아가는 게 옳다고 봐요. 귀촌을 환상으로 모색하는 건 실패의 첩경입니다. 시골 환경은 예상보다 더 단조롭고 답답할 수 있어요.”
“원주민과 흐뭇하게 지내는 일에도 공을 쏟아야만 하죠.”
“귀촌인들은 마을에서 백년을 살아도 외지인이에요. 애초 마을과 뚝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현명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도시보다 시골에 막대하게 많은 건 자연의 얼굴들이죠. 자연이 주는 안정감, 그건 귀촌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운이지 않을까?”
“사계의 변화에 자주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철 맞춰 꽃이 피고, 향기가 번지고…. 아아, 그럴 때면 넋을 잃어요.”
생물과 무생물이 섞인 도시. 생물과 생명이 얼크러져 순환하는, 시골이라는 자연. 자연을 향해 넝쿨처럼 뻗어나가는 마음이라면, 귀촌이란 자못 근사한 여행이겠지.
정회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 돈을 줄여 쓸 수 있는 곳이다. 너무 열악한 경제 형편 하에서 귀촌하면 괴로워진다.
❷ 가급적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자.
❸ 시골의 문화 여건은 미비하다.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해서 귀촌하자.
❹ 도시에서 맺은 인적 관계를 꾸준히 관리, 지속하자.
❺ 사업을 할 게 아니라면 터를 넓게 잡을 필요 없다. 200평 정도면 텃밭까지 즐길 수 있으니.
6월은 여행하기에 어렵다. 화사한 봄꽃을 볼 수 있는 계절도 지나고, 시원한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절정의 여름도 아니니 말이다. 이런 계절에는 축제나 체험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오히려 반갑다.
서해안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팔봉산 기슭에서 해마다 6월이 되면 감자 축제가 열린다. ‘감자 축제가 뭐야?’ 할 사람도 있겠지만, 팔봉산 감자는 황토와 자갈이 섞인 흙에서 해풍을 맞으며 자라니 맛이 뛰어나다. 쪄놓으면 포실포실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6월이라곤 하지만 한낮 기온이 30℃에 육박하는 날씨에 감자밭에 쪼그리고 앉았다. 목장갑을 끼고 어느 고랑이 실한 감자를 품고 있을까 어림짐작하여 자리를 잡았다. 흙을 파기 위해 호미질을 하니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난생처음 해보는 호미질이 걱정이었지만 땅에 호미를 대자 주먹만 한 감자가 줄줄이 따라 나왔다. 웃음도 저절로 따라왔다.
따가운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감자를 깼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호미를 들고 감자를 캐는 등의 수확 기쁨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약간의 체험비를 내면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체험 여행의 묘미 같다. 5kg을 담을 수 있는 노란 봉지 가득 감자를 담고 허리를 펴자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즐겁고 재미있지만, 한편으론 이 감자를 수확하기까지 수고하고 애쓴 분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쿠 밥솥에 물 반 컵을 넣고 취사를 누르면 포실포실 맛있는 감자를 맛볼 수 있는 팔봉산 감자 축제에서는 5kg 8,000원, 10kg 15,000원 체험비를 내면 해풍이 길러낸 감자를 직접 수확할 수 있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서해안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가까이에 서산의 9경 중 하나인 간월암이 있으니 즐거운 수확을 마친 후에 함께 둘러보면 좋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 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썰물 때면 육지와 연결돼 걸어 들어갈 수 있고 밀물 때가 되면 섬처럼 보이는 신비한 암자다.
섬이라곤 하지만 아주 자그마한 암자 하나뿐이다. 육지에서 섬까지 100m도 채 안 되는 길을 걸어 들어가면, 깊은 산 속이 아닌 바다 위에 세워진 작은 암자를 만날 수 있다. 절집은 공사 중이었지만 넓디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간월도는 굴이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주변이 온통 굴밥 집이다. 맛이 뛰어난 굴이 듬뿍 들어간 영양 돌 밥을 먹고, 무학대사가 이성계에 진상했다던 이곳 특산품 서산 어리굴젓까지 사고 나면 완벽한 하루 여행이다. 서울에서 2~3시간이면 닿을 수 있으니 당일 여행으로도 좋은 코스다.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어렵다. 채우는 쪽으로 발육한 욕망의 관성 때문이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허기지는 게 욕심이지 않던가. 지긋이 나이 들어서도 사람은 때로 갈피없이 흔들린다. ‘비우기’에 능하지 않아서다.
귀촌은 흔히 이 ‘비우기’를 구현할 찬스로 쓰인다. 욕망의 경기장인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가급적 빈 마음으로 생활을 운영해 한결 만족스런 여생을 누리겠다는 의도, 귀촌한 시니어의 내심엔 대체로 그런 게 들어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게 인생. 시간의 골목골목을 통과하는 사이에 그려지는 굴곡의 궤적들. 남들 눈엔 평범해 보이는 인생에도 고유의 행적이라는 게 있으며, 기복과 부침의 과거사가 서려 있게 마련이다. 예순의 나이에 접어든 임미숙 씨의 행장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한 그녀는 엉뚱하게도 건설업에 뛰어들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은 순풍을 만나 쾌속 질주! 이 야무진 여자는 진로를 바꿔 쇼핑몰 사업에 자금을 투자했다. 이 역시 순항. 50명의 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규모를 키웠더란다. 그러다가 빙벽을 만나 한순간에 추락했다. IMF의 파랑에 침몰했던 것.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부채만 산더미처럼 남았다지. 간신히 부채를 정리한 그녀는 오랜 거점이었던 대구를 떠나 서울로 이주, 친구와 함께 커피숍을 차렸다. 그러나 그마저 신통치 않았다. 어이 하나? 고심이 첩첩 겹쳤을 테지.
“사업을 키워나갈 땐 남들의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체구도 조그마한 게 통도 크고 간도 크다고. 자부심도 넘쳤죠. 하지만 추락하고 보니 심하게 주눅이 들더라고요. 지나온 세월을 찬찬히 돌아보게 됐어요. 사업상의 성취가 있을 때 누렸던 만족감, 행복감, 이런 것들이 사실은 근거가 부실한 자부심에 불과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남들의 찬사도, 행복감도 단순히 돈의 힘에서 나온 거라는 걸 깨닫고 우울했어요. 본질적인 가치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거죠. 물질적 조건에 매이지 않고 제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 결론이 귀촌이었죠.”
물적 토대를 잃은 뒤, 임미숙 씨는 삶이라는 숙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조리를 따져 맹점을 찾아냈던 것 같다.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건 나 자신이 아니라 돈이었구나,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게 아니라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줬구나, 미련한 나여! 보라! 모래 위에 지은 가건물처럼, 이토록 빈약한 행복은 종단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런 인식이 머릿속을 환하게 흘렀던 모양이다. 그게 터닝 포인트였다. 그녀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후미진 산골로 내려온 건 2011년의 일. 당시 나이 53세.
“시골의 그 무엇에 끌렸죠?”
“조용한 시골 풍경, 울퉁불퉁한 돌담장, 담장 아래 피어나는 봉숭아며 채송화, 그런 게 좋았어요. 한적한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짓고 살아보고 싶었어요. 노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음, 그런 꿈이었죠. 절실하게 꿈꾸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죠? 이 산골에 들어오며 드디어 원했던 삶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즐거웠어요.”
“경제활동에 한계가 있는 게 시골이죠. 생계 대책도 미리 세워둔 귀촌이었겠죠?”
“미리? 그건 아니었고 내려가서 부닥쳐보자, 까짓것 도시에서 이미 실패했는데, 더 이상 잃을 게 뭐람! 그쯤의 생각뿐이었죠.”
“비에 젖은 사람은 더 이상 비가 두렵지 않은 법이죠.”
“결심은 굳었어요. 귀촌을 계기로 싹 비우고 살자는 것. 좋다, 이젠 가늘게 먹고 가늘게 살자! 그 생각 외 별 고민도 궁리도 하질 않았어요.”
외양간을 개조한 사랑채 안 풍경
거참, 두둑한 배짱이렷다. 가녀린 식물을 닮은 외양이지만 내부엔 깡이 서려 있는 모양이다. 천성의 산물이거나 세파를 거치며 단련된 근성이겠지. 물론 그녀가 철부지처럼 엄벙덤벙 무작정 산골에 덤벼든 건 아니었다. 믿을 만한 근거 하나가 있었으니 말이다. 선친이 남겨둔 1500평 규모의 땅과 집이 그것. 생시에 젖소 목장을 하려고 사두었던 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그녀는 부친이 작고하기 전까지의 25년 세월을 심청이처럼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며 알뜰히 봉양했단다. 갸륵한 행장에 응분의 선물이 주어진 셈이다.
산등성이 외딴 곳에 있는 임미숙 씨의 거처는 수려하다. 갖가지 초목이 들어찬 터전은 널찍하다. 집의 외벽엔 흰 칠을 해 흐린 날에도 태깔이 밝다. 돌덩이와 흙, 목재, 통유리를 적재적소에 옹골차게 도입한 센스도 예사롭지 않다. 집 내부에도 미학과 리듬이 생동한다. 외양간을 개조한 사랑채 안 풍경은 특히나 멋스럽게 튄다. 골방의 절반을 침대처럼 높이 띄워 구들을 놓은 정경은 이색이며, 1인용 간이식 사우나탕은 성냥갑처럼 비좁지만 기발하다.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할한 하얀 벽들은 이국정서를 야기한다.
햐, 한마디로 매력적인 집이다. 재활용 자재나 자연에서 무상으로 얻어온 재료를 적극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참신하며 창의적이다. 별반 큰돈을 들이지 않은 대신 공은 잔뜩 들였다지. 이 집은 원래 금방이라도 와르르 허물어질 듯 퇴락한 고가였다. 어떻게든 손을 봐야 거주가 가능할 상황이었다. 개축을 할까, 자그마하게 신축을 할까, 그녀는 양자를 놓고 고민하다 귀농 관련 인터넷 카페 회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허름하게 기울어진 시골집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려 조언을 구했어요. 용케 목수 한 분과 연결이 됐죠. 시골집을 철거하는 건 너무도 아깝다, 리모델링이 좋지 않겠는가? 그분의 얘기가 그랬어요. 바로 의기투합해 공사에 착수했죠. 제가 원래 인복이 많은데요, 저랑 코드가 맞는 유능한 목수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죠. 비용은 3000만 원이 채 들지 않았지만 저의 취향이 충실하게 반영된 집, 예쁘고 실용적인 집이 한 달 만에 완성됐던 거예요.”
“시골집을 개축하느니 신축이 낫다는 경험담들도 많아요. 비용이나 편의성, 완성도를 따질 때 그렇다는 거죠.”
“귀촌 희망자들에게 집짓기에 관한 조언을 한다면?”
“동네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크고 화려한 집을 짓는 경우가 흔하지만, 반드시 후회해요. 유지와 관리에 진절머리를 내게 돼 있어요. 시골에서의 집이란 주로 잠자는 공간으로 쓰여요. 마당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으니까. 가급적 작게 짓는 게 요령이죠.”
귀촌으로 얻은 값진 선물들
예쁜 집에 사는 된장녀. 주변 사람들은 임 씨를 흔히 그렇게 일컫는다. 그녀의 전공이 된장 사업이기 때문이다. 귀촌 이듬해부터 된장을 담갔으니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판로도 평판도 이젠 탄탄한 수준에 올라섰다.
된장은 일용할 양식이다.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뚱뚱해져 식인종에게 잡혀 먹힐 수 있다. 된장은 탈날 게 없다. 누구나 좋아하며 누구나 먹는다. 비교적 수월하게 제조 기술을 익힐 수도 있다. 해서, 귀촌·귀농을 한 이들이 쉬 된장 사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하다. 흑자를 보는 된장 농가가 드물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임 씨는 기세를 돋우고 있다. 지난해엔 번듯한 된장 공장도 지었다. 현재의 연 매출은 5000만 원 정도. 김천 관내에 널리 알려진 강소농이다. 알찬 행진이다. 이건 단박에 쌓아진 탑이 아니다.
“어디에 갖다놔도 살아갈 여자,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웃음) 비록 돈 없이 귀촌했지만 이 시골에서 무엇을 해서건 밥은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저에게 없었던 건 돈만은 아니었어요. 농사 경험 없지, 시골 물정 모르지, 아는 사람 없지,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귀촌이었죠. 그렇다면 부지런하게 배우는 게 지름길. 귀촌·귀농 교육장을 찾아다니거나 밤새워 인터넷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익혔어요. 주경야독식으로 부지런히 공부했어요.”
“된장 사업은 교육장에서 권장한 종목?”
“아뇨. 이미 포화상태라며 뜯어말리던데요.(웃음) 그러나 저는 된장이 적격이라 판단했죠. 처음 한동안은 남들이 비웃을까봐 몰래 혼자 된장을 만들어 지인들과 나눠 먹었어요. 그런 수련기가 길었어요. 덕분에 실력이 늘면서 작년부터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있어요. 초기의 막막했던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출발을 해야죠.”
“어디를 향한 출발?”
“흠. 일단은 된장 사업을 안정적 궤도에 올려놔야죠. 그렇다고 얄팍한 장사치가 되긴 싫어요. 된장을 통한 공감과 소통이 전 참 즐거워요. 저의 시골생활과 된장 이야기를 올리는 블로그로 맺어진 인연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지역 귀농교육기관에서 가끔 강의도 하고, 견학차 찾아오는 방문자들도 많아요. ‘마음씨 예쁜 여자들’이 모인 ‘마녀 7인방’, 이 모임의 아줌마들과는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삽니다. 모두 귀촌한 분들이죠. 아차! 어디를 향한 출발이냐 물으셨죠? 궁극적인 목적은 여행입니다. 맘껏 여행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것, 그럴 수 있는 기반을 빨리 다지자는 것, 이게 현재의 목표예요.”
귀촌을 통해 맺어진 믿음직한 인연들에 그녀는 기쁘다. 그건 귀촌으로 얻게 된 가장 값진 선물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외기러기처럼 일쑤 외롭지 않을까? 그녀는 독신이다.
“어서 빨리 똘똘한 마당쇠를 구하라는 성화가 빗발쳐요. 은근히 다가오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나 필이 통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를 어쩌나. 일에 묻혀 사는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게다가 저에겐 병이 하나 있어요. 외로움이 없다는 것, 이건 지병일까? 외로워야 사랑의 갈증도 생길 텐데, 이거 참 문제죠?(웃음)”
“세상에 유일한 진실은 이성을 잃은 사랑에 있다. 뮈세의 말에요. 명심하시라.(웃음) 그런데 말이죠, 독신 여성의 귀촌, 이거 권장할 만한 거예요?”
“저를 보세요. 끄떡없이 잘 살고 있잖아요. 물론 표적이 될 수도 있어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저는 CCTV를 설치했지만, 처신을 똑떨어지게 잘하면 그만이에요. 사고가 나려면 명동 한복판에서도 나는 거 아니겠어요? 접시 물에 빠져 죽는 수도 있고 말이죠. 정 힘들면 짐 싸서 나가면 되지 뭐, 난 어디서건 잘 살 수 있어! 제게 그런 깡은 있어요.(웃음)”
시골생활의 새로운 문법과 맥락을 익히는 일. 이건 오솔길을 거니는 일과 달리 손쉬운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듯, 시련도 불안도 나그네처럼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길은 늘 그렇게 열린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했다. 귀농에 아무런 회의가 없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기에.
어릴 적부터 하득용 씨에겐 우렁찬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농사였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농사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쉰 줄에 접어든 그는 현재 오미자 농원의 쥔장. 말하자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서울의 요지 강남에 살며 근사한 직장을 다녔었다. 그랬던 그의 귀농 뉴스를 접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지. “야야, 놀랍지 않다. 너는 일찍부터 늘 시골에 살겠다 하지 않았냐.” 그의 오래 숙성된 꿈을 훼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아내 역시 순순히 부응했다. 뱀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파 위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식의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귀농을 실행했다.
농경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략 1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수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농업이란 가장 못 믿을 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무엇보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한 반면 타산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하 씨는 밀어붙였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관한 확신과 긍지에 찬 귀농임을 이미 알 만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농사의 그 무엇에 매력을 느꼈는가?
“제가 시골 태생입니다. 어린 눈에도 농사란 힘겨운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시골의 목가적인 정경이랄까, 그런 게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농부의 꿈이 발아했던 거죠. 중학생 때 치른 적성검사에선 농학 적성 비율이 98%로 나왔어요. 아, 농부가 나의 길이구나, 일찌감치 확신을 품기 시작했죠. 시골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농업이 내겐 가장 잘 어울린다는, 가장 좋은 삶일 거라는 끌림이 있었던 겁니다.”
“농부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은 서울에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뒤 의심의 여지없이 농대를 선택했고 일본 유학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접고 서울의 화학 회사에 취직하는 걸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처자를 건사하고, 기반을 다져야 했으니까. 10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20년이 지나고서야 사직을 하고 귀농할 수 있었어요. 여건이 비로소 무르익었다는 판단으로.”
“처음엔 혼자 산골로 들어갔죠? 선발대로 뛰어들어 일단 물정을 익힌 거예요?”
“귀농교육도 받았고, 귀농박람회도 찾아다녔고, 사전에 서울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뒀죠. 휴가를 얻어 전국을 돌며 마땅한 귀농지를 물색하기도 했어요.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이 맘에 들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귀농의 압구정동’이라 하더군요. 포기했죠. 이후 문경 산북면의 시골 농토와 빈집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걸로 귀농생활에 돌입했어요.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말이죠.”
“차근차근 신중한 수련 과정을 밟으셨구나.”
“단신으로, 초심자로 농사를 한다는 게 예상보다 버거웠어요. 정말 고생했죠. 1식 1찬으로 끼니를 채우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꽤나 시골 물정을 터득할 수 있었죠. 1년쯤의 견습기를 지날 즈음, 마침 이화령 산중에 괜찮은 부지가 나와 매입을 하고 이주,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접어들었어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식구를 불러들이고, 집을 짓고, 묵정밭을 갈아 농장을 만들고, 그렇게 나름의 공을 들여 꾸려온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의 ‘오래된 미래’는 시골
하 씨 부부가 이화령 기슭에 자리 잡은 건 2013년의 일. 터는 널따랗다. 5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3000평을 오미자 농장으로 개발했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지은 북유럽식 2층 페시브하우스도 큼직하고 준수하다. 자금력이 수반되지 않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행보렷다.
늘그막까지 우리를 일쑤 끙끙거리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헐거운 소유로 오히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도류(道流)도 없지 않지만, 일테면 시골살이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난적이 물적 토대의 여하라는 문제이기 십상이다. 하 씨는 이 난적의 농간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인다. 숙원의 해결 또는 삶의 질적 지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그의 머리는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준비는 충실했고, 실천은 적시에 행했다. 광란처럼 기똥차게 치솟은 강남의 아파트를 미련 없이 처분, 그의 ‘오래된 미래’인 시골에 무난한 터전을 장만한 행장은 슬기의 소산일지도. 이제 농사 얘기를 들어볼까. 오미자를 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라!’ 귀농교육을 받을 때 자주 들었던 얘기였어요. 합리적인 권장이죠. 이곳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와 오미자입니다. 기술 숙달이 필요한 사과 재배는 초보 농부에겐 너무 힘들다 판단해 오미자를 택했어요.”
“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노인께서 제게 권합디다. 구기자와 오미자를 장복하시오! 그 둘의 약성이 탁월하다는 얘기였죠.”
“이왕 농사를 할 바엔 가족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작물을 하자, 그렇다면 오미자가 적격이다, 그런 판단도 했습니다. 저나 아내나 서울에선 천식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는데 그게 싹 사라졌어요. 맑은 공기, 깨끗한 지하수, 그리고 오미자 덕분이라 봅니다.”
“문경은 오미자 주산지로 널리 알려졌어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하겠죠? 하 선생의 생산물은 어떤 특장이 있죠?”
“무농약 고품질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게 농사꾼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어요. 무엇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쓰는 게 요체라 봤고요. 과거의 농사엔 화학비료라는 게 쓰이질 않았어요. 자연과 절기에 순응하는 지혜를 필요로 했을 뿐이죠. 어떤 학자는,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농산물을 먹어 오히려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투의 말을 했는데, 경청할 만한 얘기이지 않겠어요?”
“요즘의 농작물은 파종 단계에서부터 농약을 투여하죠. 농약이 아니고서는 생육 자체가 어렵도록 농약 의존도가 심화됐어요. 무농약 농사를 실행할 경우엔 생산량도 매우 낮다죠? 결국은 채산성 악화로 이어지고 말이죠.”
“제가 오미자 농원 3000평을 운영하며 목표치로 잡은 게 연매출 5000만 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미달이에요. 농업 소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생계조차 위태로웠겠죠. 다행히 모아둔 게 좀 있어서 헤쳐 나가고 있어요. 향후 4년쯤 지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만, 무농약 농사란 어떻게 보자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생산량은 관행농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20%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암담한 상황이라는 거.(웃음)”
적막도 즐길 만한 대상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설사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돼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나를 쏟아 부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꿈이 실린 직업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준다. 이상으로 삼은 일에의 몰두가 깊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 하 씨의 경우는? 그는 양양하다. 속사정까지야 깊숙이 들여다볼 길이 없지만 그늘이 없다. 말쑥한 언사로 귀농의 만족감을 표한다. 비록 아직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함께 농장의 풀을 손수 뽑아야 하는 일부터 농사의 전 과정은 고됩니다. 일머리가 서툴러 고생도 많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한 해 농사에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고, 애환이 많은 게 농사예요. 하지만 매번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농사더라고요. 풀을 뽑고 난 뒤 깨끗해진 농장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오르는 오미자 덩굴을 바라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를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성취감을 톡톡히 맛봐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로 머리를 썼어요. 귀농 이후엔 달라졌어요. 몸을 덩달아 최대치로 쓰고 있어요. 그러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욕망이나 욕심이 줄어드는 반면, 몸으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성취감이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좋다, 참 좋다! 속으로 그렇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와 생동감이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예요.”
“이곳의 산세는 통쾌하고 수려해요. 하지만 적막강산이에요. 아무리 일에 바쁘다지만, 때로 권태롭진 않을까?”
“삶이란 즐기라고 부여된 것. 일의 노예로 산다면 인생이 지루하겠죠. 낮에는 일하고 해 저무는 하오엔 읍에 나가 테니스를 즐깁니다. 한국화도 배우고, 난타와 색소폰도 교습받아요. 적막? 그 역시 즐길 만한 대상이죠. 언젠가 아내와 둘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좋았어요. 고요한 산중 생활에 깃드는 내적인 평화, 이 역시 귀농을 통해 받은 큰 선물이구나, 아내와 둘이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 씨의 농사 실적은 아직 시원치 않다. 애당초 귀농 목적을 돈벌이에 두지도 않았다. 가급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을 뿐이며, 용무란 농사 그 자체였으며, 마침내 농부로 변신, 결국은 해묵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세계가 조용하게 열렸다. 자연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것. 이미 유년기에 시골에서 싹 텄을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귀농으로 되살아나 생태계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한 것.
상쾌한 예화 하나를 볼까? 하 씨 부부는 어느 날 숲에서 꿩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 안에는 조르르 알들이 놓여 있었다. 알들의 일부는 깨져 있었다지. 뭔가가 둥지를 건드렸다는 증거였다. 일단 둥지가 노출되면 어미 새는 알들을 더 이상 돌보질 않는다. 그걸 알았던 부부는 읍내로 달려가 사온 부화기에 알들을 고이 길러 날려 보냈다.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나동그라졌어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서둘러 인공호흡에 나섰어요. 저는 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줬고, 아내는 부리를 벌려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었어요. 앗, 그러자 살아나 후루룩 날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소소하면서도 짜릿한 감흥을 주는, 동화를 닮은 일화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그물에 걸린 어린 고기나 금지 어종을 풀어주는 어부라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다.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희귀하게도 잘 사는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의 이기심이 종종 놓치는 건 공생의 가치이지 않던가.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청년 시절, 내 편이 되어준 처사(불교에서 성인 남자 신도를 이르는 말) 한 분을 잊을 수 없다. 그분을 생각하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그분과의 인연은 5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가 15세 때였다. 불일폭포 가까이에 있는 초가지붕의 한 암자에서 생면부지의 처사를 만났다. 행동과 말이 어눌한 60대 노인(지금은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엔 노인이었다) 한 분이 건강을 위해 입산해 혼자 살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빈둥거리던 필자는 새싹이 막 돋아나오던 이른 봄에 쌍계사와 불일폭포 여행을 했다. 그리고 암자에서 그분을 우연히 만났다. 그분은 혼자 생활하기가 적적하고 잔심부름할 사람도 필요해서였는지 필자에게 방 하나를 선뜻 내주었다.
필자는 그곳에서 산나물도 캐고 온돌방에 군불도 때며 지냈다. 농업전문대학을 나와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분은 덴마크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는데 유학 준비 중 건강에 이상이 생겨 직장까지 그만두고 건강을 위해 입산한 지식인이었다. 간혹 암자로 찾아오는 가족을 통해 그러한 신상을 조금 알게 되었을 뿐 이름도 나이도 몰랐다. 필자가 이름이라도 물어보려고 하면 이렇게 말했다.
“산에 올라올 때 모든 것을 땅에 묻어버렸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웅변을 아주 잘했다. 암자에서도 발성 연습을 한답시고 아침마다 10여 분 거리에 있는 불일폭포를 오가며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불일폭포 아래에서도 소리를 질렀다. 폭포소리를 한번 이겨보고 싶었던 것이다. 발성 연습이었다고 표현했지만 어찌 보면 진학도 못한 소년의 울부짖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산속이라 필자의 고함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데 근처에 스님이 수행하는 또 한 채의 암자가 있었다. 아침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필자의 고함이 수행에 방해가 되었는지 하루는 필자가 지내는 암자를 찾아와 처사에게 조용히 좀 해달라고 요청했다. 스님과 처사의 대화를 암자 뒤쪽에서 듣고 있던 필자는 불안해졌다. 스님이 가시고 나면 분명 꾸지람을 들을 게 뻔했다.
그런데 스님 말은 다 듣고 난 그분은 잘 타이르겠다는 대답 대신 오히려 스님에게 한마디 하셨다. 어떻게 수행을 하셨기에 고함소리가 들리시냐, 귀에 들리지 않을 때까지 더 정진하시라는 일침이었다. 비행기가 지나가면 시끄럽다고 못 지나가게 할 것이냐고 핵심을 찔러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이른 아침에 암자 근처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지적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필자에게 조심하라고 꾸지람할 줄 알았는데 그분은 오히려 더 열심히 연습하라며 격려를 해줬다.
처사의 말에 용기백배했다. 또 내 편이 되어주어 감사했고 든든했다. 그 후로도 필자는 발성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물론 스님을 생각해 조심하기는 했다. 그때 그분의 격려 덕에 필자는 오늘날 건강한 목소리로 서너 시간의 강의도 거뜬히 소화해낸다.
살면서 가끔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는다. 잘잘못을 떠나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기심이 팽배해 있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자신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외로워지고 절망한다. 그 시절 필자가 그렇게 소리라도 질러야 응어리가 풀리고 설움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 고인이 된 그분이 몹시 그리워지는 날이다.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서울 일부 지역의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정부의 부동산대책은 백약이 무효다. 젊었을 때 입주하여 산천이 세 번 넘게 바뀌도록 이사 한번 안하고 관악구 같은 집에서 산다. 이때쯤 관악에서 사는 아유를 밝힐 때가 되었다. 몇 년 전 사회은퇴를 앞두고 오랜 도시생활을 벗어나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을 하였다. 전원이주 지인들을 살피면서 취향은 맞는지 환경변화는 어떠한지 검토하였다. 취향과 성격에 어울리는지가 제일 큰 문제였다. 전원은 어릴 적 추억일 뿐, 이미 도시민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젊었을 때 휴가철이나 휴일에 짬짬이 시간을 쪼개서 여행을 즐겼다. ‘아! 아름답다. 또 와야지’ 감격을 먹고 다시 올 것처럼 다짐을 하였으나 같은 곳으로 또 갔던 기억은 거의 없다. 추억은 얼마 지나면 잊어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여행이 더 즐거웠다. 한 곳에서만 꼼작 못하고 살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었다. 전원으로 이주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편리한 도시에서 살면서 쾌적한 전원으로 여행’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전원이 그리울 때는 주말농장을 찾으면 되었다.
서울 어디서든지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관악·북한·청계산은 우리의 전원이다. 수도권 전철 경춘·중앙·경강선을 타면 가는 곳마다 명승지다. 매주 친구들과 서울근교·원거리 산행을 즐기고 있다. 봄꽃·여름녹음·가을단풍·겨울함박눈 따라 학교동창·자원봉사동료·사회평생교육동기들과 산행을 즐긴다. 각자의 신체조건에 맞춰서 산을 찾으면 바로 그곳이 전원이다. 관악전원마을에서 즐겁게 사는 이유다.
첫째, 관악산이 포근히 감싸는 천혜의 자연을 자랑한다.
관악산은 관악구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연주대 정상에 오르면 암자가 추녀 밑 제비집처럼 앙증맞게 매달려 있다. 서울둘레길·관악산둘레길이 잘 정비되어서 등산을 하거나 산책하기에 편리하다. 관악산 계곡과 도림천은 여름철 물놀이 천국이다. 잣나무 삼림욕장은 천혜의 치유광장이다. 어디서나 몇 십 분이면 관악산에 연결된다. 아침마다 뒷동산 체육공원에서 건강을 다질 수 있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다.
둘째, 관악은 교육특별구다.
집주위에는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고, 가까운 곳에 대학교가 있다. 한곳에서 오래 사는 덕분에 아들과 딸은 전학 한번 없이 교육을 마쳤다. 결혼 후에는 가까운데서 살고 있다. 쌍둥이 손녀와 손자가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다닌다. 아들과 손주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등학교 부자동문’이 되었다. 앞으로 오래도록 관악에서 더 재미있게 살아야할 이유다. 손주를 정성껏 돌보자. 올바른 시민으로 기르는 인성교육 첫걸음이다.
셋째, 오순도순 분위 좋은 전원마을이다.
관악구청·평생학습관·문화원에서 열리는 사회교육이 활발하고, 도서관 운영은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청운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가 많아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늦었던 사회개발도 경전철 등 지역발전에 불을 댕기고 있다. 골목길·고갯길·사이길 등 도시화가 덜 된 ‘시골길’이 많다. 정이 넘쳐 활기 찬 골목길이 있는가 하면 인적이 뜸해 정을 그리워하는 고갯길도 있다. 도심 같지 않는 포근한 사이길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주민 간 통행 문제로 다투는 일이 종종 있으나 이곳은 오히려 이웃과 상생하는 정이 넘치는 곳이다.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북한산 백운대 산행을 위하여 새로 개통한 북한산우이선 경전철을 탔다. 좌로 흔들, 우로 뒤뚱거리면서 무인 경전철은 잘도 달렸다. 사람이 만든 꼬마 전철은 운전원도 없이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도선사 입구 종점이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였다. 산행인파가 근래에 보기 드물게 많았다. 능선을 따라서 지원센터를 거쳐 하루재에 이르렀다. 가을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산장을 지나서 떠밀리듯 천천히 올랐다. 위문을 지나 정상까지는 밧줄을 붙잡고 바위를 오르는 본격적인 등반이다. 오르는 사람과 내려오는 등산객이 뒤엉켜서 정체가 발생하곤 하였다. ‘우측보행’ 누군가 부르짖지만 이내 인파에 묻히고 말았다. 서다가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정상은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웠다.
친구와 품앗이로 기념사진 한장 겨우 남겼다. 미세먼지로 하늘이 희부옇다.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다.맞은편의 깎아지른 듯 인수봉이 울긋불긋 단풍에 둘러싸여 있다. 암벽등반가들이 꽃술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1983년에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78.5㎢에 이른다.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 기슭에는 세검정과 성북동·정릉·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를 비롯하여 태고사·화계사·문수사·진관사 등 많은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비봉에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진흥왕 순수비의 복사본이 있다. 이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 유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진흥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이유 등이 기록돼 있으며,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북한산은 백운대(837m)·인수봉(810m)·만경대(800m)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데서 유래해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삼각산이라 불려졌다. 1915년 조선 총독부가 북한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후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북한산이란 명칭이 공식화됐다.
북한산성 입구로 내려가는 길은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