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뿌리를 찾아본다’는 거창한 구호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2015년 7월 14일부터 8월 2일까지 외교부와 코레일이 공동 주관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에 참여한 것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다시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2612km, 총 1만1900km의 거리를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19박 20일간의 대장정에 나서며 우선은 차창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시베리아 숲으로 들어가 식생을 관찰하겠다는 나름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분단된 조국에서 살아온 탓에 한나절 이상의 열차 생활을 해본 경험조차 없어 20일 간의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미지의 여행길이었지만, 야생화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대박이었습니다. 저녁 9시 35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밤새 어둠을 달린 열차가 시베리아 벌판에서 첫 여명을 맞을 즈음 차창에선 이미 분홍색 꽃물결이, 열차에서의 첫 밤을 설친 이방인의 잠을 저만치 쫓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국내의 경우 강원도 태백 지역이 남방한계선으로 대관령 등 몇몇 지역에서 수십에서 수백 포기 정도 자생하는 게 전부인 분홍바늘꽃이 철로와 자작나무 숲 사이 풀밭에 간단없이 피어 시베리아 횡단 철길 내내 꽃물결을 이루다니, 과연 북방계 식물의 텃밭임을 실감했습니다.
국내에 자생하는 4종의 바늘꽃 가운데 바늘꽃과 돌바늘꽃은 흰색의 꽃도 작고 키도 1m 미만으로 작은 데 반해, 분홍바늘꽃과 큰바늘꽃은 키도 1.5m 안팎으로 클 뿐더러 꽃색도 분홍색으로 화려한데, 둘 다 북방계 식물입니다. 꽃이 진 뒤 맺는 씨방이 바늘처럼 길다고 해서 바늘꽃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겨울에는 이른바 ‘설국열차’라 불릴 만큼 철로 좌우가 눈으로 뒤덮인다면, 여름에는 분홍바늘꽃을 비롯한 숱한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야생화 천국입니다. 남한에서는 이미 멸종되고 북한 일부 지역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좁은잎해란초와 애기황새풀, 바이칼꿩의다리 등이 역시 쉴 새 없이 철길 좌우에서 얼굴을 내밉니다.
블리디보스토크를 떠난 열차가 4일 만에 바이칼 호숫가로 들어섭니다. 바다처럼 넓은 바이칼 호를 열차가 다가섰다 멀어졌다 반복하는 사이 동은 트고 새벽 햇살을 받은 분홍바늘꽃이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출렁입니다. 달리는 열차에서 흔들리는 가운데 담은 분홍바늘꽃 사진이 오히려 수채화처럼 멋진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짝사랑하듯 멀리서 바라만 볼 수는 없는 일. 마침 이르쿠츠크에서 내린 ‘유라시아 친선특급’ 원정대가 바이칼 호수 인근의 ‘건축-인류학 박물관 딸지’를 둘러보는 사이 호숫가 숲으로 달려가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분홍바늘꽃을 카메라에 담는 데 성공했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여정은 옛말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무렵 한창 피어나던 분홍바늘꽃이 어딘가부터 다소 시들해 보이더니 열흘쯤 지나 모스크바를 지날 무렵부터는 분홍의 꽃 색을 잃고 옆구리에 기다란 씨방을 잔뜩 달고 서 있는 게 어느덧 황혼을 느끼게 합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분홍바늘꽃이 피고 지는‘한여름 밤의 꿈’을 경험하는 색다른 여정이었습니다.
굳이 전문가나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우리 야생화, 이름을 들어봤기에 많은 이들이 직접 만나보기를 원하는 우리 야생화를 꼽는다면 아마 금강초롱꽃이 가장 앞 순위에 들 것입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던가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기에 가장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고, 식물학적으로 희귀하기에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의 하나가 바로 금강초롱꽃입니다.
꽃의 크기나 모양, 색 등 미학적으로도 전 세계 어느 야생화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야생화에 대한 사진과 글을 연재하면서 금강초롱꽃을 건너뛰는 것이 가시가 목에 걸린 듯 편치 않았지만, 칼럼이 실리는 시기와 꽃 피는 시기가 맞지 않아 불가피하게 때를 기다려왔습니다.
지독한 봄 가뭄 속에 일찍이 불볕더위가 시작됐고, 여전히 8월 늦더위가 남아 있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지리한 무더위 속에서도 가을이 잉태돼 무르익어 갑니다. 특히 설악산 대청봉에선 금강초롱꽃이 이미 7월 중순부터 하나둘 피어 가을이 오는 길목을 밝히며 풍성하고 태평한 세상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제비 한 마리를 보고 봄이 온다는 걸 알 수 있다지만, 어디 금강초롱꽃 한두 송이로 성이 차겠습니까. 폭죽이 터지듯 하늘을 가득 메우는 꽃무더기를 만나지 않고서야 어디 금강초롱꽃을 보았다고 하겠습니까. 7월 대청봉에서 피기 시작한 금강초롱꽃이 서서히 남진해 8월 중순이면 오대산 등 강원도의 높은 산은 물론 명지산과 화악산, 용문산 등 서울 근교의 산등성이 곳곳에서도 청사초롱 밝히듯 무더기로 환히 피어나 힘든 산행을 마다치 않고 찾아오는 이들을 황홀경에 빠져들게 합니다.
초롱꽃은 물론 친숙한 산나물인 더덕과 도라지를 비롯해 만삼과 소경불알, 모시대, 잔대 등이 모두 종 모양의 꽃이 피는 초롱꽃과의 식물들입니다. 그중 꽃의 생김새나 색 등이 단연 뛰어난 금강초롱꽃은 우리 민족이 백두산만큼이나 각별히 여기는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된 초롱꽃이라는 의미 이상을 내포하고 있는 식물입니다. 금강초롱꽃은 다시 금강초롱꽃과 흰금강초롱꽃, 검산초롱꽃 등 3개 하위 종으로 나뉘는데, 셋 모두 앞서 말했듯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특산식물입니다.
그러나 금강초롱꽃에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제 식민 지배의 슬픈 역사가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국제식물명명규약(ICBN)에 보고된 학명 가 생생한 증거입니다. 즉 일제 강점기 한반도 식물 연구를 선점했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1911년 세계적인 특산종 금강초롱꽃을 발견하고선, 자신을 적극 후원했던 초대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의 공을 기린다며 학명의 속명에 하나부사(Hanabusaya)를 가져다 붙이고 맨 뒤엔 자신의 이름 나카이(Nakai)를 쓴 것이지요.
>>Where is it?
처음 발견된 금강산은 물론 설악산 태백산 오대산 대암산 도솔산 화악산 용문산 광덕산 복주산 등 경기도와 강원도의 유명한 산에 두루 자생한다. 그중 경기도 가평 화악산의 금강초롱꽃은 청자색 색감이 진하고 곱기로 단연 손꼽을 만하다. 개체 수도 풍성하다.
화악산 야생화 탐사 등반은 통상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을 잇는 화악터널에서 시작한다. 해발 1468m로 경기도 내 최고봉인 화악산은 3개의 큰 봉우리 가운데 정상인 상봉과 매봉이 군사통제구역으로 묶여 있어, 현재는 해발 1423.7m인 중봉까지만 접근 가능하다. 화악터널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군사도로를 따라가다 막판에 중봉을 올라도 되고, 등산로를 택해도 된다.
그 어느 곳을 택해도 오르는 내내 금강초롱꽃은 물론 희귀식물인 닻꽃을 비롯해 물봉선 구절초 까실쑥부쟁이 진범 바위떡풀 돌바늘꽃 쥐털이슬 투구꽃 눈빛승마 등 천상의 화원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중봉 표지석(사진) 바로 옆에 올라서면 명지산과 운악산 국망봉 백운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경기도 내 최고봉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보는 이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 야생난초가 있습니다. 바로 지네발란입니다.
처음엔 그 독특한 생김새에 놀라게 됩니다. 동의보감에도 등장할 만큼 유용한 약재라고는 하지만, 처음 보는 순간 누구나 징그럽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절지동물 지네를 어찌나 똑 닮았는지 참으로 신기할 정도입니다. 둥글고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양편에 어긋나기로 뾰족하게 나온 잎 모양이 지네의 발을 닮았다고 해서 지네발란이라 부릅니다. 지네난초라고도 합니다. 우리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학명의 종소명(種小名) 스콜로펜드리폴리우스(scolopendrifolius)가 바로 그리스어의 지네(scolopendra)와 잎(folios)의 합성어로서 ‘지네를 닮은 잎’이라는 뜻이니, 서양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증좌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놀라게 되는 것은 집채만 한 바위에 몸을 의탁하고 새벽이슬만 먹고 살아가야 하는 척박한 서식 환경입니다. 천 길 낭떠러지 바위 절벽에 담쟁이덩굴처럼 온몸을 붙인 채 천지를 굽어보는 지네발란은 보는 이를 경악하게 합니다. 뿌리 내린 바위 덩어리를 제아무리 비틀어본들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테니, 인근 바다나 저수지의 새벽안개가 만들어주는 이슬방울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 꽃을 피우는 지네발란의 유일한 생명줄일 것입니다. 물론 바위에 붙어사는 식물들이 거개 그렇듯, 지네발란 또한 줄기나 잎이나 모두가 통통하니 한번 들어온 물기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게끔 되어 있기는 합니다.
다소 흉측한 외모나 이름과는 달리 어린아이의 미소만큼이나 환하고 해맑은 지네발란의 꽃을 보는 순간 세 번째로 놀라게 됩니다. 흰색과 연분홍, 자주색이 어우러진 꽃 모양은 그 어떤 난 꽃 못지않게 화사한데, 생김새 또한 갓난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듯 귀엽고 깜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구는 지네발란의 꽃을 하늘의 별이라고 했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지네발란의 꽃은 가슴속에 일렁이는 하늘의 꽃물결이다.” 한 야생화 동호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쓴 찬사입니다. 지네발란 꽃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나타냈기에 소개해 봤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만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자생지가 제주도와 진도 등 극히 일부에 제한돼 있어 2012년부터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습니다.
Where is it?
제주도나 진도 등 전라남도 해안가에 가야 만날 수 있다. 몇 해 전 전남 나주에서 최북단 자생지가 발견되면서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다. 제주도의 경우 거대한 바위산인 산방산 남쪽 암벽에 솔잎란 석곡 등 다른 착생난초들과 함께 지네발란이 붙어 자생한다. 목포 유달산에 국내 최대 규모의 지네발란 자생지가 있는데 최근 주변에 둘레길이 개발되면서 불법 채취 등으로 서식지 훼손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나주의 경우 나주호(사진) 인근 야트막한 야산 바위에 자생한다. 나주시 다도면 대한기독교청소년수련원 인근의 한 야산을 10여 분 오르면 나주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 더미가 나온다. 바로 그 바위에 지네발란이 붙어 꽃을 피운다.
아직 ‘우리 것의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절,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은 물론 심지어 자연자원까지도 있는 그대로 내세우지 못하고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들여 비교하거나 대비해 소개하곤 했지요. 이때 쓰이던 표현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의 XXX’입니다. 우리 고유의 꽃 이름을 부르는 것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냥 산솜다리라고 하면 될 것을 ‘한국의 에델바이스’라고 부르다 보니 지금까지도 아예 진짜 ‘에델바이스’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거나, 우리의 식물국명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리 있는 지적이긴 하나, 1960 ~197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노래 이름의 하나가 바로 에델바이스였으니, 우리나라에도 그에 못지않은 고유 식물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한국의 에델바이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요즘도 청소년 축구 선수인 이승우에 대해 ‘한국의 메시’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한국의 XXX’가 열등감이나 무지의 소치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표현 방식이 아닐까 가볍게 넘겨봅니다.
물론 ‘한국의 에델바이스’는 식물명의 차원을 넘어, 산솜다리의 생존 자체에 심대한 위협을 초래했습니다. 수없이 듣고 불렀던 ‘눈처럼 빛나는, 마음속의 꽃’, 바로 그 에델바이스를 말려서 만들었다는 말에 1970년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온 중고생들이 너나없이 에델바이스 압화 액자에 아끼고 아꼈던 용돈을 기꺼이 상납했으니 얼마나 많은 산솜다리가 그 당시 사라졌을지 짐작이 됩니다. 지금은 소공원이 된 설악동의 여관과 가게마다 산솜다리로 만든 기념품이 즐비했었으니,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설악산의 웬만한 능선과 봉우리에서 산솜다리를 무더기로 채취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자생지가 매우 협소하며, 개체 수도 극소수이다”라는 설명이 현재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식물정보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실정입니다.
암튼 경위야 어찌되었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에델바이스와 우리나라의 산솜다리는 식물분류학상 같은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 솜다리속의 식물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학명(속명+종소명)이 에델바이스는 레온토포디움 알피눔(Leontopodium alpinum), 산솜다리는 레온토포디움 레이오레피스(Leontopodium leiolepis)로 마지막 종소명에서 달라지는 데서 알 수 있듯, 유사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의 식물입니다.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가기 위해 닐기리 산을 에돌아 내려서는 고원 길은 천상 화원이었습니다. … 한국에서는 설악산 깊은 곳에서나 어쩌다 만날 수 있는 산악인의 꽃. 에델바이스는 이곳에선 너무 흔합니다. 아예 꽃밭을 이룰 정도이니까요.” 몇 해 전 유명 산악인 오은선 씨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앞서 한·일 간 신문에 보내온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오씨 역시 에델바이스와 산솜다리를 같은 식물로 착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에델바이스가 꽃밭을 이룰 정도로 핀다는 말이 오래 기억됩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지진 참사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 고산지대에 전 세계 산악인들의 꽃 에델바이스가 눈처럼 환하게 무더기무더기 피어나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던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네팔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Where is it?
현재 국내에 자생하는 솜다리속 식물은 대략 4종. 솜다리와 산솜다리, 한라솜다리, 왜솜다리(사진)가 그 주인공들로, 꽃잎처럼 보이는 5~10장의 포엽이 흰 솜털을 뒤집어쓴 듯 보이는 데서 ‘솜다리’란 공통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포엽의 형태와 크기 등의 차이에서 머리 이름이 갈리는데, 식물학적 특성보다 자생지의 차이가 구별 요소로 훨씬 알기 쉽다. 즉 솜다리는 금강산을 비롯해 평안도와 함경도 등 지금의 북한 지역이, 산솜다리는 강원도 설악산이, 한라솜다리는 한라산이, 그리고 왜솜다리는 강원도 고성, 양양, 평창과 충북 단양, 경북 봉화 등이 주 자생지다. 이 중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산솜다리는 우리나라 모든 산악인의 마음의 고향 설악산 해발 1000m 이상 산등성이 바위 절벽 곳곳에 두루 분포한다. 물론 많은 설악산 등반 코스 중 공룡능선과 서북능선 등의 높고 험준한 암벽에 가장 많이 자생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권금성은 물론,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는 흘림골 코스에서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바위 절벽에 피어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장수대탐방소 ~ 대승령 ~ 안산 능선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과 포장 길이 4㎞ 정도. 하늘 향해 쑥쑥 뻗어나간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몇 개의 개울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시원한 계곡 길을 따라 지루할 정도로 한참을 가야만 민가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띄엄띄엄 텃밭 주변으로 민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에서야 겨우 사람 사는 곳이라는 곳을 알게 되는 곳. 바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응곡마을(일명 통바람골)이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마을 사람들은 뒷산에 매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응곡산(鷹谷山)’이 있어서 ‘응곡마을’이라고 하는데, 지도상에는 응복산(1359.6m)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11가구가 있다. 토박이들은 아니고, 10~20여 년 전부터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다. 대부분 겨울에는 마을을 떠나 있다가 봄철 산나물이 나올 즈음에 모여든다. 4월 말에서 5월 초순경이면 얼레지 나물로 초문을 연다. 얼레지는 일명 ‘가제 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산지대의 숲속 음지에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생 초본이다. 높이가 25㎝ 정도 자라고 4월에서 6월에 자주색(흰색 변이도 있다) 꽃이 핀다. 잎이 얼룩덜룩하여 얼레지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꽃말은 ‘질투’ 또는 ‘바람난 여인’이라고 한다. 얼레지는 씨앗이 발아하여 꽃을 피우기까지 7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오르는 동네사람들을 따라 함께 나서본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1시간 정도는 걸어야 한다. 나무들은 아직도 썰렁한 겨울 분위기를 내지만 산행 길에 간간이 피어난 야생화가 반갑다. 노랗게 피어난 ‘괭이눈’과 ‘꿩의 바람꽃’, ‘댓잎 현호색’ 노랗게 종 모양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한계령 풀’이 눈 속에 들어온다.
특히 한계령 풀은 무지 희귀한 꽃으로, 지리산 모데미골에서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처럼 한계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죽 길을 지나고 능선 참나무 군락지 밑으로 귀하디귀한 야생화가 눈에 띄더니만 능선을 넘어 고갯길에 이를 즈음에는 완전히 야생화 화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노란 꽃 사이로 이미 나물꾼들이 뜯어가 버린 얼레지의 보랏빛 꽃까지 합세해 더욱 빛이 난다. 생계가 아니라면 그냥 피고 지는 얼레지꽃 군락지까지 합세했다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야생화 화원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나물이나 뜯어가라고 하지만 보랏빛 꽃이 너무나 처연해, 가늘게 봄바람 한 줌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꽃잎이 가련해서 차마 뜯어버릴 수가 없다.
◇약수산에서 만난 신비한 철분 약수, 명계 약수터
그렇게 한참이나 야생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새싹 움트는 몸짓을 느끼면서 돌아오기 싫은 길을 되돌아 나온다. 나물꾼들이 얼레지를 채취해 내려와 나물 삶는 데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비켜 임도길 중간 즈음에서 계곡 물을 건너가면 소로가 나온다. 계곡 옆길로 난 길이라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가래나물, 팥고비, 풀고비, 당귀싹, 화살나물, 골담초 등 나물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오고 애기 괭이눈과 꽃잎에 점이 박혀 보기 쉽지 않다는 ‘긴 개별꽃’도 눈에 띈다. 산나물과 야생화를 관찰하면서 10분 남짓 올랐을까? 자그마한 폭포를 앞두고 약초꾼이 지어놓은 천막이 나선다. 켜켜이 장작을 싸놓고 부엌과 방을 들여놓고 뒤편에는 연통도 있다. 분명히 사람이 살았음직한 나물꾼의 천막은 당시에도 이곳에 있었는데, 여전히 사람은 만날 수 없다. 자그마한 폭포를 끼고 계곡을 건너면 암반 주변이 철분 빛으로 벌겋게 변해 있다. 누군가 계곡물과 섞이지 말라고 돌을 쌓아 막아 두었다.
자연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계곡 옆에 어떻게 이런 철분 약수터가 생겼는지 생각할수록 오묘하다. 붉은 물 사이로 뽀르르 기포가 올라온다. 물위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고 손으로 물을 마신다. 강한 철분 맛보다 톡 쏘는 탄산 맛이 느껴져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와 같다. 이 약수를 통상 명계약수라고 하는데 통바람 약수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산 이름도 약수산이다. 약수산을 둘러싸고 남으로는 명계약수, 서쪽으로는 삼봉약수, 북으로는 갈천약수, 동으로는 불바라기약수가 있다. 약수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고 하여 부른 듯하다.
◇직접 만든 아궁지에 산나물 삶아 말리고, 지친 몸에 술 한잔
두어 시간이 지난 후, 필자가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만났던 노부부가 사는 집을 찾는다. 자루에 나물이 가득 차면 집으로 와서 곧바로 나물을 삶는다.
시멘트로 네모진 통을 만들고 뒤에 연통을 단 아궁이가 있다. 장작불을 지피고 다듬지 않은 얼레지를 넣고 뚜껑을 닿고 5분 정도 삶아주고 양철통 위에 꺼내 말리면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나물을 삶는 동안 할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한다.
커다란 무쇠솥이 두 개, 고기도 구워 먹고 화로로 쓰는 널찍한 양철통이 한편에 놓여 있다. 깊은 산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은 채로 졸졸 물이 흘러내린다. 무쇠솥에 물을 한가득 넣고 군불을 지핀다. 자그마한 풀무를 돌려가면서. 가스렌지 위에서는 구수한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루 종일 나물 뜯느라 지친 몸을 얼레지 된장국에 찬밥을 넣고 김치 한 가지로 때우는 것이다.
“하루 정도만 우려내면 돼. 미역국처럼 맛이 좋아서 꼭꼭 얼려 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주지.” 겨울이면 춘천에 살다가 봄철 나물 뜯으러 온다는 할머니는 인심 좋게 된장국 한 그릇을 퍼준다. 그 맛이 얼레지 묵나물보다 훨씬 좋아서,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뜯어오지 못한 것을 후회할 판이다.
그때 이웃 할아버지가 됫병을 들고 나타나 술잔을 돌린다. 자그마한 부엌에 옹기종기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얼레지는 귀한 나물이라서 호텔이 아니고서는 먹기가 힘들지. 말려 팔면 제법 비싸게 팔리는 산나물이야. 얼레지는 1주일 정도 후면 끝이 나고 그 다음에도 참나물, 곰취, 전우치 등 두 달 반 정도는 나물 작업을 해야 해.”
힘겨운 산나물 뜯기 작업 후에, 푸성귀로 배를 채우면 얼마나 허기질까 할 즈음 아랫집에서 전화를 한다. 이 집은 더 풍성하다. 고기에 직접 재배했다는 표고버섯과 막 뜯어 낸 곰취와 참나물, 산마늘 쌈이 차려져 있고, 여름까지 먹는다는 묵은 김치와 된장, 굵은 소금장이 있다. 막 지은 밥과 꽁치조림까지 곁들여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계속 찾아든다. 할일 없는 겨우내 모여 술잔치를 벌였다는 사람들.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면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판을 벌인다.
이 지역에서 나물은 이들의 생계수단이고, 나물 철이 끝날 때까지 산길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이제 지긋지긋한 작업이 되지만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여행객의 눈에는 행복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것을 관광상품화한다면 덜 힘겹게 살 텐데 말이다. 돌아오는 길, 유난히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환하다.
주소 홍천군 내면 통바람길
찾아가는 방법 영동고속도로 → 속사IC → 운두령 넘어 창촌 방면으로 난 56번국도 이용 → 창촌 → 구룡령 가는 길에 우측 명계리로 들어가는 446번 지방도로 우회전. 다리 앞에서 왼편 비포장 길로 좌회전 → 응곡마을
맛집과 숙박정보 응곡마을 통바람 산장(011~9795~1684)에서는 식사와 민박이 가능하다. 또 가는 길목인, 이승복 기념관 주변에 운두령횟집(033~332~1943, 송어회, 용평면 운두령로 825), 장수촌(033~332~7419, 토종닭, 용평면 운두령로 286)이 괜찮다. 삼봉 자연휴양림(033~435~8535~6, 홍천군 내면 삼봉휴양길 276)이나 자연속으로(033~334~0770, www.naturalpension.com, 용평면 운두령로 109-49)와 같은 펜션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여행포인트 얼레지 채취는 올해 끝이 났고 계절에 맞는, 또 다른 산나물이 싹을 틔울 것이다. 여행객들은 필요하다면
주민들에게서 사오면 될 일이다.
△글ㆍ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계절의 여왕’ 5월입니다. 3월 물이 오르기 시작한 봄이 4월을 거치면서 농익을 대로 농익어가자 어느덧 사람들의 발길이 물가를 향합니다. 지구온난화의 여파인지 갈수록 봄은 실종되고 여름이 일찍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온이 솟구친다 해도 벌써부터 물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연한 홍자색 꽃이 천변에 한 무더기 피어나 옷깃을 잡습니다.
송이풀, 흰송이풀(사진), 한라송이풀(사진), 구름송이풀, 만주송이풀, 큰송이풀 등 10여 종의 송이풀속 식물 가운데 유독 ‘애기’란 접두어가 붙은 애기송이풀. 그 연유를 쫓다 보면 애기송이풀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애기가래에서 애기황새풀에 이르기까지 각종 식물도감에 나오는, 40여 종의 ‘애기’ 식물들이 대개 그러하듯 전초나 꽃의 크기가 작거나 여린 데서 연유할 것이란 선입견과 달리 애기송이풀은 결코 잎이나 꽃이 다른 송이풀에 비해 작지 않습니다. 쑥갓처럼 생긴 잎은 길이가 20~30cm에 이를 정도로 넓고, 5월 초순 피는 홍자색 꽃도 지름이 4~5cm에 이를 만큼 대형입니다.
게다가 꽃도 많게는 십여 송이가 뭉쳐서 피기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들어올 만큼 화려하고 화사합니다. 다만 뚜렷한 줄기가 없이 키가 크지 못하고 잎이 땅바닥으로 퍼지기 때문에 다른 송이풀에 비해 왜소해 보일 수는 있습니다.
또한 클로즈업한 꽃 사진에서 알 수 있듯 막 태어난 병아리나 어린 새가 부리가 달린 고개를 내밀며 세상을 살피는 듯한 윗입술, 어린 새 생명이 날갯짓을 하는 듯한 아랫입술의 모습은 애기송이풀 꽃이 가진 특유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기송이풀. 세계적으로 경기 연천과 가평, 강원 횡성, 충북 제천, 경북 경주, 경남 거제 등 일부 지역에서만 자라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입니다. 연천에서 거제도까지 비교적 넓은 지역에 분포하지만, 전체 자생지가 10개에도 못 미치는 데다 자생지 개발과 남획 등으로 훼손 가능성이 높아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보호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개성의 천마산에서 처음 발견돼 당시엔 ‘천마송이풀’로 불렸던 데서 알 수 있듯 북한에도 자생합니다.
Where is it?
멸종위기종 희귀식물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애기송이풀의 자생지는 대개 사람들의 거주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경기 연천과 가평, 충북 제천의 경우 반경 100~200m 내에 인가가 있고 도로도 지나간다. 특히 경기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절골계곡과 충북 제천시 백운면 덕동계곡의 애기송이풀 자생지의 경우 홍수 등으로 계곡물이 넘치면 바로 휩쓸려 갈 수 있는 저지대인 데다 인근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행락지까지 있어 각별한 보호 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남북으로 200km쯤 떨어진 덕동계곡과 절골계곡을 2년 전 5월 5일 하루에 둘러봤는데 양쪽 모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4월은 꽃이다. 속살 드러낸 자태, 눈부셔라]
요염하게 생긴 봉오리들이 생긋생긋 웃는다. 봄 바람의 속삭임에 작은 꽃망울들이 방긋방긋 미소 짓는다. 4월의 꽃은 화려하고 눈부시다. 설렘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꽃으로 물들이고 웃음꽃이 만발한다. 시를 닮은 4월, 4월의 꽃은 그리움일 수밖에. 마침내 마음의 뜨락에 꽃씨 뿌리다.
꽃이라는 것은 묘한 마력(魔力)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 말이다. 꽃 한 송이로 사랑의 감정이 싹 트기도 하고,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꽃이다. 꽃이 한 여자를 화가로 만들었다. 꽃그림으로 일상의 우울함을 설렘으로 바꿔버렸다. 그림 작가 원은희가 꽃그림으로 설렘과 행복, 웃음을 전한다. 캔버스 안의 꽃다발로.
한마디 한마디가 조근조근하다. 거기에 생글생글한 미소로 무장한 그녀와 이야기 꽃을 피우면 금세 10대 소녀와 대화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녀가 별빛이 쏟아지고, 파아란 바닷물이 넘실대는 남해의 한 마을에서 야생화를 따 소꿉놀이를 하던 소녀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눈빛이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책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등굣길에 화단의 꽃을 꺾어 선생님께 선물한 이야기,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오빠들이 8남매를 옹기종기 모아 가곡을 불러준 이야기, 언니들이 사다 준 식물도감으로 꽃을 관찰한 이야기 등 수다의 꽃을 피운 그녀는 영락없는 소녀다.
그래서일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53세 소녀에게서는 긍정의 아우라가 흘러넘친다.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머금어지는 것은 그 아우라에 취해서이리라. 그래서 원 작가는 꽃이다. 보는 것 그리고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고 위로가 되는 그런 꽃 말이다. 그녀가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을 위로해줬던 꽃 그림. 이제는 그런 인생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에게 그녀가 꽃다발을 건넨다. 몇 년 전 자신이 받은 위로의 꽃다발에 사랑과 희망을 담아.
◇ 꽃은 위로였다
2012년 묵호항. 주부 일로 인생의 반을 바친 그녀가 홀로서기를 선언하고 떠난 곳이다. 홀로서기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익숙지 않은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고, 가족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물밀 듯이 쏟아졌다. 또한 신체적 변화에서 오는 우울감을 던지기 위해 묵호항을 찾은 것이다. 묵호항에서 찌든 때를 씻어내고 올라와 그녀가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색연필. 그리고 묵호항에서 본 등대를 그리기 시작했다. 남들 눈으로 보기엔 틀림없는 꽃이지만 그녀는 그것이 틀렸다고 일침을 가하는 듯 ‘등대’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누가 봐도 일반인이 연습장에 장난을 쳐 놓은 듯한 그 끄적임 하나가 인생을 180도로 바꿔 놓을 것이라고는 그녀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다.
“꽃과 등대. 무엇인가 길잡이가 되고 희망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등대를 꽃으로 표현해 봤는데 저 자신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는 겁니다. 꽃 그림을 그리는 거요? 처음에 그것은 제가 살기 위한 것이었어요. 저를 위한 위로의 꽃다발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마음에 꽃이 피어나더라고요.”
그때 시작한 그림의 세계. 배워보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그림은 독창적이고 감각적이다. 거기에 향긋한 꽃의 마력까지 담겨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그림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삶과 꽃에 대한 깊은 고찰 덕분이리라. 그리고 어린 시절 꽃과 함께 했던 순수함이 그림으로 발현돼 위로의 매개체로 승화했다.
“견디기 힘든 것을 견뎌냈더니 그림이라는 선물을 받게 됐어요. 꽃 그림은 저를 위한 시(詩)이자 기도였는데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런 기운을 느낀다고 하니까 신비로운 일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또 다른 힘이 솟습니다. 꽃을 주는 것은 고마움을 표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계속 이 고마움을 드려야겠어요.”
◇ 매일 매일 꽃다발을 주겠어요
“꽃을 준다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잖아요.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감사를 표시하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요. 사랑, 감사, 위로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긍정적인 수식어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꽃 그림을 그리는 것이죠. 그 꽃 그림 꽃다발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어린 시절 언니들이 사온 식물도감이 닳도록 식물 관찰에 몰두했던 호기심 대마왕 소녀는 이제 매일 자신이 그린 꽃다발을 매일 사람들에게 주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그림을 선물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요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한 법이라는 것을 오감으로 깨닫고 있는 그녀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이제는 보는 이의 행복한 표정도 그림을 그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단다.
“어느 날은 제 그림을 본 사람들이 길거리의 꽃을 찍어서 저한테 보여주더라고요. 이게 어떤 꽃이냐고 하면서요. 그때 참 뿌듯했죠.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을 나로 말미암아 한 번 더 보게 돼 그 생명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니까요. 꽃을 보는 사람이 누구나 그렇듯이 그분도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아름답다고 생각했겠어요?”
◇ 자유분방함 속 메시지
원 작가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경험이 없다. 그 덕분인지 그녀의 작품은 하나같이 어떤 방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분방하다. 또 3년차 작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삶에 대한 잔잔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보는 이들은 그 작품의 색감과 감각적 요소를 보고 미소를 머금지만 그 안에 새겨진 메시지를 알아차렸을 땐 진한 감동과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그녀가 그린 ‘재회’라는 작품은 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노란 나비에 둘러싸여 달콤한 상상에 빠져 있다. 눈으로 본 그림에서는 봄냄새 물씬 풍기는 따뜻함이 전해지지만, 사실 원 작가는 여기에 4·16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메시지를 담았다. 비탄함을 넘어 노란 나비와 함께 행복한 곳에서 재회할 수 있는 날을 꿈꾼다는 뜻이다.
본인의 추억이 담긴 작품도 있다. ‘엄마의 빨랫줄’이라는 작품에는 남해 소녀시절 어머니가 마당에 널어놓았던 생선들과 빨래, 그리고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표현됐다.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50대 원은희가 아닌 소녀 원은희로서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원은희 그녀의 그림 인생의 미래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떨리고, 기대가 되고 설렌다는 수식어를 모두 붙이는 그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지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제 그림의 특징입니다. 제가 꽃을 보고 느끼는 것.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 세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을 가감 없이 그림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슬프거나 우울하게 표현하지는 않을 거예요. 세상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거든요.”
그녀는 ‘일단 살아는 있어야 돼’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그림들을 자살예방센터에서 전시했던 것을 공교롭다고 표현했다. 또한 지난해에는 서울 문학의 집에서 ‘매일 매일 꽃다발을 드릴게요’라는 개인 전시회를 열고 서울발레시어터 LIFE 콘서트에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전시회까지 열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그림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는 그녀다.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꽃 그림은 제게 정말 많은 것을 가져다 줬어요. 위로뿐만 아니고 많은 좋은 사람도 얻게 해줬으니까요. 그리고 전시의 기회도요. 그리고 예전의 저처럼 심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행복합니다.”
2월 중순 저 멀리 여수 금오산에 변산바람꽃이 피면서 꽃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복수초와 너도바람꽃·노루귀·꿩의바람꽃이 꼬리를 물고 꽃봉오리를 활짝 터뜨리며 전국을 뒤덮고 있습니다. 급기야 산이 산을 껴안고 강이 강을 휘감아 도는 강원도 정선 백운산 정상 아래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도 봄바람·꽃바람이 불어 화창한 봄날이 무르익고 있음을 알립니다.
특히 영월·정선·평창 지역 사람들이 ‘뼝대’라 부르는 석회암 바위절벽 틈새 곳곳에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동강할미꽃이 도도하게 피어나 첩첩산중 강원도 자연생태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냅니다.
앞서 고고성을 터뜨린 변산바람꽃이나 너도바람꽃·노루귀 등 손톱 크기의 자잘한 풀꽃에 비해 크기도 훨씬 클 뿐더러 많게는 10여 송이가 무리지어 피고, 꽃색도 자주·보라·분홍·흰색 등 형형색색이어서 가히 봄 야생화의 우두머리라 이를 만합니다. 헌데 그 이름이 동강할미꽃이니, 이른바 ‘5060세대’가 한창 피어나는 ‘아이돌’을 향해 “나 아직 안 죽었어. 어디 한번 붙어볼 테야?” 하며 황혼의 비장미를 불태우는 듯합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걸어가고 있네”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 허리 숙여 땅을 보고 피는 다른 할미꽃과 달리 동강할미꽃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곧추세우고 꽃망울을 활짝 터뜨립니다.
1997년 생태사진가 김정명씨에 의해 처음 일반에 알려졌고, 3년 뒤 이영로 박사에 의해 동강할미꽃(Pulsatilla tongkangensis Y.N.Lee & T.C.Lee.)이라는 이름의 한국 특산식물로 공인되었습니다. 동강할미꽃의 발견, 그리고 세계 식물학계의 한국 특산식물 인정은 결국 1990년대 논란이 되어온 동강댐 건설 백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사이 석회암과 맑은 물이 만나 환상적인 에메랄드빛을 만들어내는 동강과 그 상류 조양강을 따라 걸으며 형형색색의 동강할미꽃을 만나보기 위해 해마다 전국에서 수백, 수천의 야생화 애호가들이 줄지어 찾아옵니다. 그 행렬을 보면서 동강댐이 건설돼 동강할미꽃 등 자연생태계가 파괴됐을 상황을 상상하기만 해도 참으로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Where is it?
강원도 영월·정선·평창 일대 조양강과 동강변, 정선 백운산, 그리고 삼척 덕항산이 동강할미꽃의 주요 자생지이자 탐사지이다. 특히 동강과 그 상류인 조양강 유역 어디에서나 한두 송이 동강할미꽃을 만날 수 있지만,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정선군 신동읍 점재마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 영월군 영월읍 문산리 등이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집단 자생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정선 백운산 정상 부근 칠족령에 올라 조양강이 굽이치며 만들어낸 ‘한반도지형’을 내려다보며 천애절벽에 핀 꽃(사진)을 만나는 것은 동강할미꽃 탐사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글ㆍ사진 김인철
춘삼월 제주의 꽃시계는 벌써부터 봄입니다. 제주의 봄꽃을 대표하는 유채꽃은 이미 곳곳에 단지 형태로 피어 있고 동백과 매화,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린 지 오래됐습니다. 산중에선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절정으로 치닫는 제주의 봄에 화룡점정을 하는 건 ‘맑고 깨끗한 향이 벼루에 떠돌고 편지지에 스밀 듯’ 그윽한 수선화 꽃입니다.
‘세한도’와 추사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긴 추사 김정희는 이미 160여 년 전 제주 유배 시절 “마을마다 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다. (제주의)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라며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면서 평생지기였던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화가 고상하다고는 하지만 뜰을 넘지 못하는데 “정월 그믐에서 2월 초 피기 시작한 수선화는 3월이 되면 산과 들, 밭두둑에 흰 구름이 깔린 듯, 흰 눈이 장대하게 쌓인 듯” 피어난다며 세세하게 설명합니다.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서귀포시 대정 들녘의 수선화가 추사에겐 몇 안 되는 정신적 위안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합니다. 또 보리밭에 많이 나는 까닭에 마을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호미로 캐어버리고는 하는데, 캐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마치 원수 보듯 합니다.” 이어지는 추사의 언급은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인 수선화가 이미 160여 년 전에 원예종이 아닌, 야생식물이자 자생식물로 제주도 전역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귀중한 현장보고서라 할 수 있지요.
현재 제주도에는 두 종류의 수선화가 피고 있습니다. 꽃이 크고(몰) 속 꽃잎이 마늘(마농) 뿌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제주도 방언인 ‘몰마농꽃(사진)’이라고 불리는 수선화가 그 하나입니다. 또 다른 수선화는 흰색 꽃받침 위에 황금색 부화관이 동그랗게 자리 잡은 게 마치 흰 쟁반(옥대)에 황금 술잔(금잔)이 앉은 것 같다고 해서 금잔옥대(金盞玉臺)라 불리는 것입니다. 추사는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가지가 많게는 10여 송이에 화피 갈래 조각이 8~9개에 이른다”는 설명과 함께 노란 부화관과 속 꽃잎이 여럿으로 갈라지는 그림을 남겨 당시 제주도에 자생하던 수선화가 몰마농꽃이었음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3월 제주의 봄 들녘을 거닐며 오래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린 야생 수선화의 향기도 맡아보고, 그윽한 향을 가슴 깊이 들이쉬며 간고한 유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생일대의 걸작을 남긴 추사의 발자취도 한번 되짚어보길 권합니다.
Where is it?
제주도 전역이 수선화 자생지라 할 만큼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꽃 핀 것을 볼 수 있다. 바닷가는 물론 중산간에서도 만날 수 있다. 마을길이나 들과 밭, 돌 틈 등 어디에서나 자라는데, 최근에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된 때문인지 사람의 손길이 미치는 화단에서도 금잔옥대(사진)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만 추사가 제주도의 수선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만큼 그의 유배지가 있는 서귀포시 대정 들녘을 찾는 발걸음이 많다. 특히 대정읍 안성리 추사 유배지에서부터 안덕면 사계리 대정향교까지 2Km 구간을 비롯해 산방산이 보이는 대정 들녘 일대에 피어있는 수선화가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추사가 바로 이곳을 거닐면서 일대에 펼쳐지는 풍경을 묘사하고 진한 수선화 향기를 글과 시로 남겼기 때문이다. 유배지 바로 옆에 세워진 추사기념관 내 추사 동상 앞에는 조화로 만든 수선화가 늘 놓여 있고, 적거지 주변 탱자나무 담장 아래에는 금잔옥대가 심어져 있다. 추사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대정향교 안 곳곳에는 몰마농꽃이 한창 피어있다.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 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푸른 행복) 저자.
전통 한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ㆍ화ㆍ담의 메뉴들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유명 도예가의 작품에 담긴 음식은 식용 꽃과 야생화로 장식되어 오감을 자극하고, 계절마다 제철 최상의 식재료로 차려진 자연음식은 사계절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건물 외관과 갤러리를 옮겨놓은 듯한 품격 있는 인테리어는 격조 있는 음식 문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한 점의 예술 작품을 보고, 읽고, 맛보다
“내 생애 최고의 만찬이다.”, “음식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시·화·담을 다녀간 국빈급 외국인, 정·재계 인사 등 VIP 고객들의 찬사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기념 국빈 만찬을 담당했던 시ㆍ화ㆍ담은 청와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만찬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레스토랑 최초 세계 최고급 럭셔리 호텔·레스토랑 연합 릴레샤또(Relais&Chateaux)의 멤버이기도 하다. 시·화·담은 럭셔리 콘셉트의 파인다이닝 이태원점과 레스토랑 인사동점이 있다. 이태원점은 모두 예약제로, 특별한 혜택과 예우를 받을 수 있는 멤버십 제도를 운영한다.
점심 메뉴인 ‘한 줄의 시(11만원)’을 비롯해 ‘그림 한 폭(16만 5000원)’ ‘즐거운 이야기(27만 5000원)’ ‘미식가들의 만찬(38만 5000원)’ 등 10~18개의 메뉴로 구성된 코스 요리를 선택할 수 있다. 모든 음식은 조선시대 골동사발을 비롯해 유명 도예가들의 최고급 작품에 담긴다. 건강 주전부리 메뉴는 도자기 위에 슈거파우더 아트로 원하는 사진이나 글을 표현해주는 독특한 서비스가 함께 제공된다. 라운지에서는 Hans J. Wegner의 미들센츄리 오리지널 작품 가구들과 로비엔 이인진, 이헌정, 한애규 등 현대 도예작가들의 설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찾아가는 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경리단길 방향으로 100m지나 알제리대사관 옆에 위치해 있다. 내비게이션으로는 ‘알제리대사관’, ‘필리핀대사관’ 또는 ‘이태원동 5-5’로 입력하면 편리하다. 시·화·담 이태원점은 예약제로만 운영되며 전화 또는 인터넷으로 신청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