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야생화] 제주 봄의 화룡점정 수선화

기사입력 2015-03-05 18:18 기사수정 2015-03-05 18:18

▲제주의 수선화. 사진=야생화 칼럼니스트 김인철

글ㆍ사진 김인철

춘삼월 제주의 꽃시계는 벌써부터 봄입니다. 제주의 봄꽃을 대표하는 유채꽃은 이미 곳곳에 단지 형태로 피어 있고 동백과 매화,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린 지 오래됐습니다. 산중에선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절정으로 치닫는 제주의 봄에 화룡점정을 하는 건 ‘맑고 깨끗한 향이 벼루에 떠돌고 편지지에 스밀 듯’ 그윽한 수선화 꽃입니다.

‘세한도’와 추사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긴 추사 김정희는 이미 160여 년 전 제주 유배 시절 “마을마다 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다. (제주의)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라며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면서 평생지기였던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화가 고상하다고는 하지만 뜰을 넘지 못하는데 “정월 그믐에서 2월 초 피기 시작한 수선화는 3월이 되면 산과 들, 밭두둑에 흰 구름이 깔린 듯, 흰 눈이 장대하게 쌓인 듯” 피어난다며 세세하게 설명합니다.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서귀포시 대정 들녘의 수선화가 추사에겐 몇 안 되는 정신적 위안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합니다. 또 보리밭에 많이 나는 까닭에 마을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호미로 캐어버리고는 하는데, 캐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마치 원수 보듯 합니다.” 이어지는 추사의 언급은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인 수선화가 이미 160여 년 전에 원예종이 아닌, 야생식물이자 자생식물로 제주도 전역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귀중한 현장보고서라 할 수 있지요.

현재 제주도에는 두 종류의 수선화가 피고 있습니다. 꽃이 크고(몰) 속 꽃잎이 마늘(마농) 뿌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제주도 방언인 ‘몰마농꽃(사진)’이라고 불리는 수선화가 그 하나입니다. 또 다른 수선화는 흰색 꽃받침 위에 황금색 부화관이 동그랗게 자리 잡은 게 마치 흰 쟁반(옥대)에 황금 술잔(금잔)이 앉은 것 같다고 해서 금잔옥대(金盞玉臺)라 불리는 것입니다. 추사는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가지가 많게는 10여 송이에 화피 갈래 조각이 8~9개에 이른다”는 설명과 함께 노란 부화관과 속 꽃잎이 여럿으로 갈라지는 그림을 남겨 당시 제주도에 자생하던 수선화가 몰마농꽃이었음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3월 제주의 봄 들녘을 거닐며 오래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린 야생 수선화의 향기도 맡아보고, 그윽한 향을 가슴 깊이 들이쉬며 간고한 유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생일대의 걸작을 남긴 추사의 발자취도 한번 되짚어보길 권합니다.

▲금잔옥대. 사진=야생화 칼럼니스트 김인철


Where is it?

제주도 전역이 수선화 자생지라 할 만큼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꽃 핀 것을 볼 수 있다. 바닷가는 물론 중산간에서도 만날 수 있다. 마을길이나 들과 밭, 돌 틈 등 어디에서나 자라는데, 최근에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된 때문인지 사람의 손길이 미치는 화단에서도 금잔옥대(사진)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만 추사가 제주도의 수선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만큼 그의 유배지가 있는 서귀포시 대정 들녘을 찾는 발걸음이 많다. 특히 대정읍 안성리 추사 유배지에서부터 안덕면 사계리 대정향교까지 2Km 구간을 비롯해 산방산이 보이는 대정 들녘 일대에 피어있는 수선화가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추사가 바로 이곳을 거닐면서 일대에 펼쳐지는 풍경을 묘사하고 진한 수선화 향기를 글과 시로 남겼기 때문이다. 유배지 바로 옆에 세워진 추사기념관 내 추사 동상 앞에는 조화로 만든 수선화가 늘 놓여 있고, 적거지 주변 탱자나무 담장 아래에는 금잔옥대가 심어져 있다. 추사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대정향교 안 곳곳에는 몰마농꽃이 한창 피어있다.


▲야생화 칼럼니스트 김인철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 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푸른 행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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