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모든 시간이 머뭇거림과 탄식과 질투로 가득했다고 고백합니다. 끝없이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한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참회합니다. 혹시 질투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질투로 아파하는 모든 분과 마음 미장공 아홉 번째 이야기 함께하겠습니다.
아직도 질투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살림하는 전업주부로 산 세월이 많던 시절, 무릎 나온 바지에 애들 안 입는 낡은 티셔츠 입고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든 날 아침, 승강기에 같이 탄 이웃을 나도 모르게 훔쳐보게 됩니다. 옷차림부터 머리 매무새며, 들고 있는 서류가방, 풍기는 향수 냄새까지. 저는 물론 세수도 하지 않은 채입니다. 머리부터 발끝, 아니 구두 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또래로 보이는 여인. 역한 냄새 나는 쓰레기봉투를 든 나와 예쁜 백을 단정하게 든 그녀.
‘아 저 여자는 무슨 일을 할까? 얼마나 전문적이고 근사한 직종에 있는 걸까? 출근해서는 얼마나 재미 있고 또 의미 있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올까?’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던 때도 많았습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을 가꿀 수 없었던 제 모습이 창피스럽기도 했습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모습, TV에 나오는 유명인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다가 당신은 시기와 질투, 시샘하는 마음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까? 이 감정이 도대체 뭐길래 나를 초라하게 하고 내 신세를 형편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까요.
질투의 대상과 거리 : 최소한 사촌은 돼야 배가 아프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고어 비달, 미국 소설가
영성이 높은 한 수도사가 금식 기도하며 수련 중에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하고 훼방하려 해도 안 통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 교구 인사에서 당신 동생이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말을 맺기도 전에 “진짜? 말도 안 돼” 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질투의 대상은 질투의 거리와도 밀접합니다. 부부나 연인, 형제자매, 친구 사이처럼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가 관건입니다. 거론한 대상이 자신과 너무 동떨어지고 격이 차이가 나면 질투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또래일 경우 질투의 불길은 활활 타오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혈연 관계인 사촌이 땅을 샀기 때문에 내 배가 아픈 법입니다. 평생 일면식도 없던 먼 친척이라면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만만할수록 불붙는 질투심
수십조 혹은 수백억 달러를 상속받았다거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일론 머스크한테 질투를 느끼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막연히 부러워하거나 경탄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운동하는 이웃이 경매로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거나, 내 옆자리 동료가 주식으로 3000만 원을 벌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대가 성취한 부와 행복의 크기가 내가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할 때 질투가 솟구칩니다. 또 이미 세상을 떠난 과거의 예술가나 과학자에게 질투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고인(古人)과 경쟁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동시대를 사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질투가 한결 커집니다. 질투는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나와 가깝고, 내용이나 크기로도 만만할 때 더 폭발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질투는 죄가 없다?
질투(嫉妬)라는 글자에서 질(嫉)의 핵심은 계집 녀(女)에 있는 게 아니라 병 질(疾)에 있습니다.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성급한 마음 때문에 근심하다 결국 나한테 독이 되고 남에게도 독이 되는 것. 이러한 괴로움이 질투에 들어 있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투(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돌을 던졌으니 병이 들 수밖에요. 말이나 행동, 관계 따위로 손해나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병든 상태가 질투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질투의 신은 누구일까요? 바로 젤로스(Zelos)입니다.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질투를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꼽을 만큼 여자한테만 덮어씌웠는데, 서양에서 질투를 맡은 젤로스가 남신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젤로스는 폭력의 신 비아와 권력과 힘의 신 크라토스를 형제로, 승리의 신 니케를 누이로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양 문화권에서 젤로스는 질투의 개념보다는 경쟁, 열의, 전념 같은 긍정적인 뜻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의 이중주 : 스타 탄생과 몰락 이야기
1937년 ‘스타 탄생’이란 이름으로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8년 세 번째 리메이크된 ‘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은 사랑 영화이자 음악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질투가 주인공 못지않은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애리조나 하늘같이 타오르는
그대 눈동자
날 보는 그대 눈길에 불타고 싶어
내 영혼 깊숙이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묻힌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빛을
찾아낸 그대
목이 메고 할 말을 찾지 못해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파
해가 지고 밴드가 연주를 멈출 때
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할 거야
(중략)
그대가 날 바라보면
온 세상이 사라지고
우리 모습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대로
-OST ‘Always Remember Us This Way’(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해)
중에서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을 조심하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외모가 걸림돌이 되어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밤에는 무명 가수로 무대에 오르던 앨리(레이디 가가 분).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컨트리 뮤지션으로 명성을 날리는 슈퍼스타 잭 메인(브래들리 쿠퍼 분). 순회공연 중 우연히 찾은 바에서 노래하는 앨리를 보고 잭은 첫눈에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영혼 깊숙이 묻힌’, 그녀도 몰랐던 내면의 빛을 발견합니다. 나를 찾아내고, 무대에 세우고, 나를 키워주고 응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그녀. 내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무대에서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었으니, 두 사람은 이제 사랑밖에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망쳤어. 당신이 부끄러워. 안쓰럽고 그래. 당신 더럽게 못생겼어.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남한테 잘 보이는 게 더럽게 중요하지.”
전성기에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잭과 달리 앨리는 스타 시스템에 힘입어 대형 토크쇼에 초대되는가 하면, 그래미상 3개 부문 후보로 선정될 정도로 승승장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잭은 술과 마약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독설과 폭언을 퍼붓습니다. 심지어 신인상을 받게 되어 시상식에 초대된 날, 앨리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옆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소변을 보고 맙니다. 그 뒤 마음을 다잡고 알코올 중독 치료도 하는가 싶더니, 아내 앨리의 대형 해외 투어를 앞두고 목을 매달아 세상을 등집니다. 한 여자를 살렸지만 자신은 살리지 못했던,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남자. 앞선 기형도 시인의 독백과 겹쳐집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죄
질투는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 병이 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열의, 열정, 전념을 담당하는 젤로스 신을 불러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제가 처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남편의 공이 큽니다. 그 옛날 원고지에 글 쓰던 시절, 시외삼촌의 권유로 타자를 배운 남편을 보면서 마음에 질투의 불씨가 당겨졌습니다. 하지만 질투에 굴복하지 않고 선의의 경쟁과 열정이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어 저도 당시 ‘한메타자교사’로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매우 가까이에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 생기는 질투를 내 삶의 좋은 에너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뭔가를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건 자신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질투를 놓아주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 마음의 주인 노릇
질투에 함몰되어 자기 비하와 자학으로 자신을 파괴할 것인지, 그 감정이 나를 옭아매지 않도록 방향을 선회해 자기 발전, 자존, 자족, 건강한 자극으로 동기를 부여할 것인지 그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나일 때만 가능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질문해보세요. 질투는 남보다 나를 망칩니다. 내 화살로 나를 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질투할 시간에 나를 더욱 사랑해보면 어떨까요. 남과 견주며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지 말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에미(Emmy)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6관왕의 기염을 토했다. 무엇보다 ‘오징어 게임’은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 수상’이라는 역사를 새로 썼다.
13일 오전(한국시각) 미국 LA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열린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Primetime Emmy Awards, 이하 에미상)에서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는 남우주연상을, 황동혁 감독은 감독상을 각각 수상했다.
앞서 ‘오징어 게임’은 지난 7월 기술진과 스태프에게 수여하는 프라임타임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상(Primetime Creative Arts Emmy Awards, 이하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상)에서 게스트상(이유미), 시각효과상, 스턴트퍼포먼스상, 프로덕션디자인상까지 4관왕을 차지한 바 있다. 여기에 남우주연상(이정재), 감독상을 추가하며 6관왕을 달성했다.
특히 이번 수상으로 ‘오징어 게임’은 ‘최초’의 역사를 쓰게 됐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영미권이 아닌 지역에서 만들어진 드라마가 후보로 지명되고 상을 받은 것은 에미상 74년 역사상 최초다. 미국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The Academy of Television Arts & Sciences·ATAS)가 주최하는 에미상은 ‘TV 아카데미’로 불릴 정도로 권위를 자랑한다.
이날 감독상을 수상한 황동혁 감독은 “사람들은 내가 역사를 썼다고 하지만 우리가 함께 역사를 만들었다”라며 “역사상 영어가 아닌 드라마가 받은 첫 에미상이라는데, 이게 나의 마지막 에미상 트로피가 아니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시즌2로 돌아오겠다”고 덧붙여 박수를 받았다.
이정재는 아시아 배우 중 최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상을 주신 모든 관계자분과 특히 넷플릭스에 감사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이정재는 황동혁 감독을 향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탄탄한 극본과 멋진 연출로 구현해준 황 감독의 창의력에 감사함을 표한다”고 전했다.
영어로 소감을 이어가던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어로 “대한민국에서 보고 계실 국민분들과 친구 가족, 그리고 소중한 저희 팬들과 이 상의 기쁨을 나누겠다”고 덧붙였다.
이정재는 특히 시상식에 8년째 공개 열애 중인 연인 임세령 대상그룹 부회장과 동반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커플룩처럼 차려입은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레드카펫에 등장했다. 또한 이정재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자 임세령 부회장은 미소와 박수로 연인을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은 에미상 13개 부문 14개 후보에 올랐다. 다만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정호연,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오영수와 박해수는 수상의 영광을 안지 못했다. '오징어 게임'의 작품상 수상도 불발됐다.
이번 에미상 시상식은 ‘오징어 게임’ 축제였다. 에미상의 ‘오징어 게임’을 향한 환대가 눈길을 끌었다. 이정재와 정호연은 ‘버라이어티 스케치 시리즈’ 부문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는데, 이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영희 인형이 등장했다. 이에 이정재와 정호연은 게임을 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은 상금 456억 원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게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역대 최고 시청 시간 달성, 시청 가구 수 순위 1위에 오르는 등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두 개의 선이 서로 의지하며 맞닿은 형태의 사람 인(人)은 책과 또 다른 책을 잇는 징검다리 같은 모양새다. 김태경 임상수사심리학자는 범죄 피해자들이 후유증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다. 이번 북人북에서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조심스레 사람들의 흔을 어루만지는, 그만의 미지근한 응원을 담았다.
“안녕하세요,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는지요. 물 한잔 드릴까요?”
담백한 인사와 함께 컵에 물을 가득 따라 건넨 뒤 ‘꼴깍꼴깍’ 소리가 멈출 때까지 침묵을 지킨다. 잠시 말을 고를 여유를 확보해주는 듯 유난스럽지 않은 고요함이 지나고, 차분히 명함을 건넨다. 상상과는 다른 무게감에 이유를 물으니, 초반의 침묵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대면하며 터득한 방법이란다.
“상담자마다 방식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저는 전략적으로 첫 만남 때 기본적인 인사 외에는 말을 아끼는 편이에요. 그러면 오히려 상대방이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시작하죠. 보통은 요즈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주제를 먼저 꺼내요. 그러다 ‘아 참, 제가 요즘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네요!’라며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범죄자에 서사 부여하는 세상
김태경 심리학자는 서원대학교 인권센터장·학생상담센터장, 법무부 위탁 스마일센터 총괄지원단장을 지내고 있다. 그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임상심리학자로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더불어 범죄심리학자로서 형사사법기관의 의뢰를 받아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지 판단한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2015년 세 모자 사건의 진술 분석, 2017년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심리 분석을 맡았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 ‘차이나는 클라스’, ‘궁금한 이야기 Y’ 등에 출연해 냉철한 분석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운이 나빠 범죄 피해를 본 사람들이 삶을 재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일에 큰 비중을 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김 교수를 향해 범죄자에 관한 질문을 쏟아낸다. “프로파일러가 아닌지라 그런 종류의 자문이나 섭외는 조심스러워요. 이미 벌어진 사건을 놓고 그 사람이 어떤 심리 때문에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야기하는 건, 범죄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만들어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 될 수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대중 매체에서 살인마에게 별칭을 붙여주고 몇십 년 지난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걸 보면 불편해요. 피해자는 ‘왜 저 사람의 행위를 전문가들이 나서서 대변해주지? 그러면 내 가족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뜻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아슬아슬한 거리두기
인간의 내면은 여러모로 무궁무진하다. 상처의 크기와 깊이, 내담자의 성향, 상황에 따라 따스한 말이 도움이 될 때도 있고 반대로 냉정한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다. 상담을 통해 수많은 상처를 위로한 김 교수도 냉담과 몰입 사이 교묘한 줄타기는 언제나 어렵다. 내담자와 몇 칸을 떨어져 앉아야 할지, 식사 여부를 물어도 되는지와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한다. 워낙 변수가 많아 상담 전에 미리 사례를 수집한 뒤 실무자들과 심도 있는 논의를 거친다. 적절한 거리 조절을 위한 고민을 거듭하고,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다.
“거리 유지에 실패한 적도 물론 있어요. 살인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분들이었는데, 2차 피해가 우려돼 자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상담센터 입소 시설에 머물던 중에 피해자의 49재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안 됐는데, 저도 자식이 있는 입장이라 마음이 많이 흔들렸어요. 조심스럽지만 사비를 들여 국화 한 다발 보내드렸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죠. 가족들만의 시간을 방해받는다고 느끼셨나 봐요.”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내담자가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아무 이유 없이 폭행당해 몸이 망가지는 일을 당해도 결국 이겨내고 성장한다. 늘 인간의 내면에는 지혜가 있다. 극복을 응원하며 기적을 목격하는 경험은 무엇보다 값지다.
우리의 시선이 향할 곳
그는 ‘공감한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한 타인의 태도로 꼽는다. 스스로 공감을 잘하는 성격이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공감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단다. 가만히 곁에서 자리하며 상대방이 마음을 터놓게끔 믿음을 주는 편이 좋다. 가끔 고구마를 캐듯 마음 깊은 곳에서 한 번에 딸려오는 감정만 가지치기해주면 된다.
“예전에 우리 아이가 생일 기념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싶다고 해서 미용실에 간 적이 있어요. 얼마나 잘 어울릴지 내심 고대하고 있었는데, 미용사분이 ‘어유, 요즘 애들이 다 그런가 봐요. 우리 애도 똑같았어요’라면서 저를 섣불리 위로하려 하시는 거예요. 가볍게 동조하고 넘겼는데, 아이가 집에 와서 ‘필요하지 않은 조언을 한 사람과 그걸 받아준 사람 모두가 무례하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범죄 피해자들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하죠. 사실 말을 아끼는 게 제일 좋아요.”
자신의 감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 교수는 찾아온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고 일시적인 이상 상태를 인정하면 응어리를 빨리 흘려보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일종의 자기 조절 전략이다. “젊을 때는 감각과 경험을 추구하고, 욕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싶어 하는 시기예요. 40대부터는 청년 시절 바깥으로 향했던 에너지를 내면으로 들어오게끔 바꿔야 해요. 습득한 경험 중에 이해하지 못하고, 처리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던 부분을 나머지 시간 동안 다루는 셈이죠. 저도 그 시기를 겪고 있어요.”
20년, 누군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제쳐둔 배려의 시간이다. 앞으로는 짐을 내려놓고 그저 숲을 누비며 ‘방학’을 보내고 싶단다. 가만히 거닐다 보면 그의 삶이 무엇을 원하는지 답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고민의 끝이 조금이라도 홀가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테니 말이다.
마음 근육을 단련할 수 있는 책
by 김태경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앤절린 밀러 저)
“책에 등장하는 ‘인에이블러’는 우리말로 ‘조장자’입니다. 가족, 연인, 직장 동료 등 다양한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타인을 사랑해서 헌신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도움을 받는 대상이 삶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기회를 뺏는 존재예요. 어설프다며 아이의 신발 끈을 대신 매주고, 자식의 부채를 대신 갚아주는 부모가 대표적인 예죠. 누군가의 좋은 엄마, 아빠, 친구가 아닌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생각을 전환할 계기가 될 겁니다.”
아이와 함께 나누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 (얼 그롤먼 저)
“가족을 잃은 아이에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어리다고 생각해 ‘아버지는 멀리 여행을 가셨어’라는 식으로 에둘러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자녀뿐 아니라 어른들도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이 책에는 어른들조차 선뜻 다듬어보지 않은 죽음에 대한 개념이 잘 정리돼 있어요. 우리나라는 죽음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는 문화지만, 오히려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공포를 덜어낼 수 있어요. 어쨌든 누구나 겪을 일이고, 삶이라는 건 유한하기 때문에 더 값어치 있는 거니까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저)
“저자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스물여섯 살에 대기업 임원이었지만, 모두 내려놓고 스님이 됐어요. 루게릭병을 진단받고 2022년 1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쾌하고 따뜻한 지혜를 세상에 전했죠. 저는 이 책을 접했을 때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어요. 하지만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이다’라는 문장을 통해 얽매여 있던 감정에서 순간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마음을 괴롭히던 분노의 원인이 ‘내가 옳고 너는 틀려’라는 생각에서 왔다는 걸 깨닫게 해준 책이에요.”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로버트 존슨, 제리 룰 저)
“내가 의식하지 않은, 가려진 나의 또 다른 측면인 ‘그림자’는 융 심리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용할 수 있는 일과 포기해야 하는 일을 끊임없이 구분하고 선택해요. 그중 선택하지 못한 삶은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가 되어 무의식의 어딘가에 쌓이며, 어느 순간 무의식을 뚫고 나와 우리 삶을 이리저리 휘두르려 한다는 겁니다. 나의 억눌렸던 내면을 들여다보고 보살피는 ‘그림자 대면하기’는 슬기로운 마음 챙김의 방법입니다. 특히 중장년에게는 더욱 중요하죠.”
남프랑스 니스에서 일주일 살기
어느덧 니스에서 일주일 살기도 중반을 넘어간다. 니스에서 10km 남짓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중세마을 에즈 빌리지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날이다. 아침부터 하늘이 유난히 눈부시게 새파랗다. 니스의 숙소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역시 짙푸르다. 어쩐지 하루의 예감이 좋다. 작은 손가방에 머플러와 500리터 물 한 병 담아서 호텔을 나섰다.
바닷가에는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하는 사람들이 내 옆을 휙휙 지나간다. 모래밭으로 내려가 아침 햇볕을 정면으로 맞아들이면 남부의 여행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다. 선탠하거나 알콩달콩 연애 중인 이들 옆을 지나가며 나도 너그럽게 행복해진다. 이곳에 일주일 머물면서 니스의 해변을 즐기는 일은 이렇게 틈틈이 해야 한다. 그게 새벽이든 한낮이든 밤바다이든 언제든 바라볼 수 있고 다가갈 수 있어서 어찌나 뿌듯한지.
니스에서 버스로 여행하기
니스에서 에즈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 먼저 트램으로 여섯 정거장을 가야 한다. 여섯 정거장 거리의 트램 안은 벌써 사람들로 꽉 차서 꼼짝달싹 못하고 서 있다가 Vauban역에서 내렸다. 그런데다가 에즈 빌리지행 112 버스는 떠날 시간이 되어 이미 시동을 걸고 있었고 빈자리가 없다. 서서 가야 한다. 참고로 니스 가리발디 광장에서 82번 버스도 있다. 버스비는 편도 1.5 유로 정도. 물론 기차편도 가능하지만 불편함이 커서 대부분 여행자들은 에즈행 버스를 이용한다.
버스 여행 중 삼사십 분을 서서 가는 건 버스 창가에 앉아 편하게 지중해 풍경을 보는 즐거움 하나를 놓칠 수 있다. 하지만 지중해의 차창 밖은 어디서 바라보아도 언제나 무한 아름다움이다. 해안가를 즐기려면 버스의 오른편에 앉는 게 좋다. 아침부터 짙푸른 하늘과 바다를 멋지게 보여주더니 잠깐 이렇게 다리품을 팔라고 한다.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선채 버스 차창 밖으로 에즈의 산비탈과 지중해의 풍광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에즈 빌리지(Eze Village)에 도착했을 때는 온 산하가 투명한 햇살의 빛 내림으로 환했다.
니스 근교의 선인장 마을 에즈빌리지
눈앞에 교회의 시계탑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여행길에 시계탑을 만나면 대부분 그곳이 목적지 인양, 마치 이정표 삼아 시계탑을 향해 걷는다. 어차피 느슨하게 보낼 셈인 하루다. 먼저 거길 오르지 않고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아랫동네를 즐겨본다. 골목마다 햇볕이 뿌려져 있고 몇 마리의 잘생긴 개가 왔다 갔다 한다. 마을조차 한가롭고 헐렁하게 여유만만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로움이 번진다. 언덕 돌담에 걸터앉아 사람 구경도 하고 할 일 없이 두리번거리며 마음껏 여유 부리며 가벼운 마음을 얻는다.
아껴두었던 걸 꺼내먹듯 이젠 비탈진 에즈 빌리지 언덕으로 올라간다. ‘사실 중세마을이 다 비슷하지 뭐’ 하면서 별스럽지 않다는 생각으로 처음엔 무심히 걸었다. 비좁은 골목마다 콕콕 박혀있는 작은 상점들이나 갤러리, 교회 건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걸을 수 있다. 직접 만지면서 느낄 수 있는 시간여행 시작이다. 손바닥의 감촉으로 거슬러 가보는 중세기 마을이다.
중세기의 언덕에서 만난 지중해, 그리고 니체
동굴과도 같은 조붓한 골목을 이리저리 걷다 보면 길을 잃을 수도 있는 해발 427m의 작은 성벽 마을, 그 모습대로 독수리 둥지라는 별명도 있다. 에즈는 13세기 로마의 침략을 피해 산꼭대기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마을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흑사병이 한창이던 14세기에 이곳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지금껏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중세마을로 자리 잡고 있다.
계단을 오르는 중에 예쁜 공방이나 기념품점이 줄지어 이어지고 테라스가 매력적인 갤러리가 자꾸만 튀어나온다. 남프랑스의 따스하고 환한 햇살과 꽃들로 어우러진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행복이 넘친다. 느릿느릿 에즈 빌리지의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걸으며 만나는 가시를 뻗치고 있는 다양한 선인장과 여신의 조형물들이 이 마을의 수호신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 정원에 뿌리내리고 오랜 시간 동안 저렇게 지중해를 지키고 있구나 하는...
13세기 지중해 높은 절벽 위에 만들어진 작은 요새 마을 에즈 빌리지. 수백 가지의 선인장이 독특하게 가꾸어진 길을 걸어 400m 높이에 위치한 열대 정원에 서면 바람결이 확 다르다. 해변 마을에서 에즈 빌리지까지는 니체의 오솔길이 있다. 니체가 사랑했던 연인 루 살로메에게 실연당하고 찾아온 니스와 에즈 빌리지에 머물며 가장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다고 한다. 14세기에 지어진 문이 마을 입구에서 맞는다. 그 길을 걸으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했다는 철학자를 떠올려 본다. 걸으면서 사유하기를 좋아했던 니체의 자연을 마주하는 비탈진 산책로를 두리번거리며 산책하듯 걷는 성벽 마을의 시간여행이다.
사방을 빙 돌며 파노라마 전경을 바라보느라 가슴이 벅차다. 가슴이 뻥 뚫린다. 좁은 골목의 올라오며 느꼈던 신비로움과는 달리 탁 트인 해방감으로 시원하다. 절벽 아래 붉은 지붕의 마을이 해안선의 아름다운 결을 따라 평화롭다. 발아래 지중해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눈앞에 펼쳐놓은 건 누구일까. 내가 본 지중해 풍경 중에서 최고다.
지중해 마을 정원의 기억
니스에서 모나코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석처럼 매력적인 마을, 놓쳤으면 후회했을 뻔했다. 아랫마을로 내려와 노천카페에 앉아 토르티야 샌드위치로 때우는 늦은 점심도 충분히 즐겁다. 오래된 중세 마을에 부는 가을바람 속에서 한나절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내게 에즈 빌리지는 여행길에 잠깐 들러 보는 곳이었다. 아니 누구에게나 작은 마을일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머무르려는 발걸음이 되어 느릿느릿 길게도 놀았다. 돌아와서도 종종 생각나는 걸 보면 나와 잘 맞는 곳인 듯하다.
에즈 여행은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계절이어야 한다. 푸른 지중해를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서 다시 한번 들러보고 싶은 마을, 에즈 빌리지(Eze Village)다. 지중해와 이토록 아름답게 어우러진 선인장 마을의 정원, 그 옛날 이곳엔 누가 살았을까. 그곳은 누구의 정원이었을까.
반짝이는 것은 늙지 않는다. 일을 향한 열정,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짝이는 이 역시 늙지 않는다. 춘삼월 여린 잎 같던 목소리는 푸르다 못해 영글었고, 소년은 단단한 어른이 되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은 24년 전과 다르지 않다. 예술과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푸른 청년(靑年)으로 남을 임형주(37)의 이야기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최연소’, 하나 덧댄다면 ‘최초’를 꼽겠다. 2003년 만 17세 나이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헌정사상 최연소 애국가 독창자가 됐다. 같은 해에 세계 남성 성악가 사상 최연소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데뷔 독창회를 가졌다. 국내 3대 공연장에서 독창회를 여는 대기록은 10년 전에 세웠다. 데뷔 15주년에는 앨범 누적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했고, 최근에는 스승의 날을 기념한 독창회를 열면서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무대(대극장, M씨어터, S씨어터, 체임버홀)에 서본 최초의 음악가가 되었다. 음악가로서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전부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살 소년이 상상 못한 숫자들
수집하듯 온갖 기록을 쓸어 담은 세월이 24년이다. 지금의 임형주는 데뷔 25주년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 팝페라 테너지만, 1998년 데뷔 당시 열두 살 소년은 이 모든 기록적인 숫자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24년이 ‘꽃길만 걷는’ 시간이었을 것 같지만, 그는 스스로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고 평가한다. 선배가 없는 팝페라 장르에서 활동하는 건 흙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과도 같았다.
지쳤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에만 등장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노래하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명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뜬소문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음악평론가 임형주로 살았다. 대중과 멀어지면서 ‘세월호 추모곡 가수’, ‘애국가 소년’쯤으로 이미지가 축소됐다.
그러다 가수 임형주가 지난 5월 JTBC ‘뜨거운 씽어즈’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췄다. 출연자도, 시청자도 예상 못 한 깜짝 등장이었다. “음정, 박자, 테크닉은 다 차치하고 진정성을 전하는 노래가 최고의 노래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출연진의 도전을 응원한 그는 시니어 합창단과 함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겸손한 자세와 청아한 목소리가 갖는 힘은 여전했다. ‘뜨거운 씽어즈’에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함께 부르는 장면의 유튜브 동영상은 두 달 만에 134만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대중의 관심이 전보다 덜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수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수로서 노래하는 제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데뷔한 지 오래되다 보니 ‘왕년의 스타’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으니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의 데뷔 무대이자 첫 방송 출연이었던 KBS 2TV ‘이소라의 프로포즈’ 영상은 ‘온라인 탑골공원’(1990~2000년대에 유행한 콘텐츠를 올리는 유튜브 계정을 총칭하는 신조어)에 게재됐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며 너스레 떨지만, 대중의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는 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 사랑을 위한 노래
그는 노래를 고를 때도 대중을 생각한다. 스스로 청중이 되어보고, ‘팝페라 테너’라는 정체성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대중이 무얼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 고민한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곡들로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애정보다는 인류애에 가깝다.
“연인의 사랑을 다루는 가수는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 휴머니티를 다루었어요.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인 팝을 통해서 인간애를 노래하죠. 사실 예술은 무한하기 때문에 장르로 구분 지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는 향유, 즐기는 데 있거든요. 저는 세상에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 딱 두 가지 음악만 있다고 이야기해요. 예술가는 대다수가 공감하고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죠.”
고고하고 우아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에 괜히 으스대는 클래식 전공자들을 종종 봤다. 그 역시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그들만의 음악’을 하기 싫었기에 팝페라 테너로 전향했다. 정치·경제만큼이나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요즘, 그는 뿌듯한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전부터 ‘문화예술의 일상화’를 주장하던 입장에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전하기 위함이다. 즐기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콘텐츠가 일상에 스며들 자리는 없으니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향유하며 영감을 얻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감상은 물론,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고, 활자중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등.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세계 유수의 작가와 작품명이 쏟아졌다. 최근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도 그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타인을 돌보는 마음, 그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오늘도 살아 있다.” 인간애를 노래하는 가수다운 모습이다.
숲을 만드는 일을 꿈꾸다
올해로 서른일곱의 나이지만, 데뷔한 지 24년이 지났다. 인생의 3분의 2를 올곧이 음악에 바친 셈이다. 인간 임형주의 삶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지만 흘러간 과거가 아쉽지는 않다. ‘음악과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새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앨범 제작 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지만, 사람은 죽어도 앨범은 세상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면 열심히 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요즘 들어 점점 은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굉장히 일찍 데뷔했기 때문에 다른 음악가들보다 조금 이르게 은퇴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커리어상 최정상을 누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이 제 목소리의 전성기임이 느껴지거든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뒤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순응하려고 해요. 돌이켜보니 데뷔하던 때도 왠지 ‘나는 일찍 은퇴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네요.”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을 떠올리자니 가수 임형주를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도 아쉬움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태도다.
현역에서 은퇴한다 해도 문화예술계에 일조하려는 계획은 확고하다. 그는 예술감독으로 행사를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고 했다. 노래가 꽃이자 나무라면, 가수로서 노래 부르는 것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일이다. 예술감독은 행사에 쓰이는 모든 음악을 심고 가꾸며 배치한다.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하나의 숲을 만드는 작업이다.
숲을 울창하게 만들어줄 묘목을 가꿀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국내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팝페라’의 길을 걸을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또한 풍부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행정가로도 활약하고 싶다. 인생 2막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는 모습이 장래 희망이 너무 많아 고민인 어린아이를 닮았다.
바빠 나이 들 시간조차 없는 청년
차차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지만, 당장은 9월에 발매될 정규 앨범 8집 ‘Lost In Memory’를 제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번 앨범에는 1970~1980년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 대중가요를 담을 예정이다. 독립군 애국가나 ‘봉선화’, ‘사의 찬미’ 등 1920~1960년대 노래를 수록한 정규 7집 ‘Lost In Time’과 시대적으로 연결되는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의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는 ‘잃어버린 추억’에 대해 다뤄보려고 해요. 1970~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에는 트로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작곡가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와 그들의 뮤즈인 패티김, 혜은이, 정훈희나 이미자의 가요를 녹음하고 있어요. 패티김의 ‘이별’이나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정훈희의 ‘안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빠질 수 없죠.”
10월 1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신보와 같은 이름의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8집에 실린 노래 외에도 가을에 어울리는 추억의 팝송이나 연주곡을 함께 선보이려 한다고. 50인조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일 예정이라, ‘사랑은 생명의 꽃’(패티김)처럼 음역대가 굉장히 넓은 곡을 듣다 보면 특히나 코끝이 찡해질 것이라는 전언이다.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우선 첫 베스트 앨범을 내려고 한다. 그의 모든 대표곡을 앨범 한 장에 담을 예정이고, 앨범 발매 기념 독창회 역시 진행하려 한다. 내년에 코로나19가 완화되면 국내나 해외 순회공연도 떠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전국 25개 도시를 돌아보고 싶어요. 숫자 맞추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TV 프로그램이나 매체 인터뷰 등 섭외 제안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요. 순회공연을 돌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난 뒤겠지만, 내년은 인간 임형주이자 음악가 임형주로서 제 인생을 결산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의 계획을 듣고 있자니 “바빠서 나이 들 시간이 없다”던 유명 배우의 발언이 떠올랐다. 임형주는 배움을 멈추고 안주하려 할 때 사람이 비로소 ‘늙는다’고 생각한다. 고로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잠을 설치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받고 싶은 상이 남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라고 대답한다. 오래도록 푸르를 청년일 수밖에.
‘귀농’은 익숙하지만 ‘귀어’는 생소할 수 있다. 더불어 귀어를 하면 어부가 된다고만 생각하는 도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편견과 달리 어촌 관광과 해양 레저 사업을 통해 주목받은 마을이 있다. 타고난 자연환경과 지역민의 어업이 잘 녹아든 결과다. 출신 구분 없이 마을을 향한 귀어인과 어촌 주민의 애정이 모여 탄생한 새로운 매력의 어촌, ‘궁평 어촌체험마을’을 소개한다.
현대 사회가 빠르게 산업화되면서 대도시와 공업 지역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됐다. 반면 농·어촌은 급격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몸살을 앓았다. 그러나 최근 농촌, 어촌, 산촌에서의 삶을 새로운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답답하고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통해 위로받고, 인생 2막을 영위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농촌으로 돌아가는 귀농뿐 아니라 어촌과 어항을 찾아가는 귀어인도 늘고 있다는 것이다.
귀어·귀촌을 하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 어업뿐 아니라 양식장에서 전복·미역·김을 길러 파는 양식업에 종사할 수 있다. 소금 사업, 수산물 가공업도 있다. 더 나아가 직접 어업을 하지 않고 어촌 관광, 해양 레저 사업 등의 3차 산업으로 자리 잡는 방법도 있다. 2015년 화성 궁평리로 귀어한 김문호 체험 사무장과 ‘궁평 어촌체험마을’이 바로 그 예다.
궁평 어촌체험마을은 아름다운 일몰과 갈매기, 싱싱한 먹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어린이를 위한 체험 활동이 많아서인지 가족 단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해양수산부 ‘전국 어촌체험 휴양마을 운영실태 평가’에서 우수마을로, 7월에는 ‘이달의 어촌 안심 여행지’에 선정되기도 했다. 마을의 체험 분야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건 귀어인과 어촌 주민들의 협력 덕이다. 갯벌 체험뿐이었던 프로그램은 낚시, 페달보트, 모터보트 등으로 점점 확대됐다. 도시 사람들이 바다에 놀러 왔을 때 좋은 기억만 갖고 돌아가길 바라며, 궁평항의 상황에 맞춰 개발했다.
궁평리를 서해안 명소로 만든 체험 프로그램
●갯벌 생태 체험
궁평 어촌체험마을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어장 황폐화를 막기 위해 갯벌을 3등분해 차례로 개방하고 있다. 1년 동안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한 다음, 2년 동안 쉬게 해 갯벌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방식이다. 덕분에 언제나 잘 보전된 서해안의 갯벌을 만끽할 수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왔어도 당황하지 마시라. 마을에서 장화와 호미, 장갑, 바구니 대여가 가능하다. 바지락, 동죽, 농게, 소라게, 민챙이 등을 실컷 구경하고, 진흙을 매만지며 신나게 갯벌 탐구를 마친 후 손발을 씻어낼 세면장도 마련돼 있다.
●모터보트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즐길 수 있는 궁평항 모터보트는 김문호 체험 사무장이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김 사무장은 모터보트 운영을 위해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 면허도 취득했다. 안전을 위해 파도와 바람 상태를 보고, 체험 시작 전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는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다. 그 후 가족, 연인들이 차례로 보트에 앉으면 모터보트가 출발한다. 물살을 가로지르며 바람을 맞다 보면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페달보트
페달보트는 노를 젓지 않고 발로 페달을 밟으며 타는 작은 놀잇배다. 광장의 분수대 공간을 활용한 페달보트장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바닷물을 끌어올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물을 뺐다 채우기를 반복한다. 물은 30cm 정도로 얕게 받아 물놀이 사고에 대비했다. 부모들은 꺄르르 웃음소리를 내는 아이의 사진을 연신 찍기 바쁘다.
●어린이 낚시
궁평 어촌체험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갯벌 체험은 썰물 때 외에는 할 수 없어 시간을 맞춰 방문하거나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밀물 때 즐길 수 있을 체험을 개발한 것이 ‘낚시’였고, 이후 ‘어린이 낚시’로 이름을 바꿨다. 어린이 낚시라고 하나 아이뿐 아니라 부모들까지 합세해 체험에 나선다. 직접 고기를 낚는 성취감도 있겠지만, 한 마리만 낚아도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가족들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날 것이다.
●아르고 체험
궁평항을 찾은 손님 대부분이 좋아하는 이색 체험이다. 아르고는 지상과 수상에서 모두 달릴 수 있는 수륙양용차로, 작은 탱크와 같은 생김새여서 탑승 전부터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우렁찬 엔진 배기음과 함께 자유자재로 달리는 아르고 위에서 마을 주변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더위는 잊은 채 신나는 함성이 절로 나온다. 웬만한 놀이기구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아르고의 박진감은 상상 그 이상이다.
●달고나 만들기
겨울 바다는 놀거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겨울 궁평항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한 달고나 만들기 체험은 해마다 좋은 반응을 불러왔다. 김 사무장에 따르면 호황일 때는 하루에 1500여 명이 달고나 체험 부스를 다녀갔다. 체험 초창기에는 손님들을 위해 입이 마르도록 일일이 제조법을 알려줬는데, 새까맣게 태운 달고나를 보며 더욱 즐거워하는 가족들을 보곤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올겨울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힘입어 더 잘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파리에서의 1박 2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애초에 생미쎌의 소르본느 주변에서 어슬렁 놀다가 미술관 한 군데 돌아보는 걸로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기에 쫓기는 기분 없이 잘 보낸 1박 2일이었다. 틈새 여행으로 아쉬움 없다.
오를리 공항에서 탄 작은 비행기는 새하얀 구름 속 푸르디푸른 하늘 구경에 잠깐 정신 팔린 사이에 금방 니스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밖의 하늘과 구름은 어찌나 푸르고 새하얗던지 반짝거리는 니스의 푸른 바다와 콤비를 이룬다. 온통 코발트블루의 세상을 보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건 니스만의 블루다. 지중해의 니스 블루라고.
지중해의 니스 블루
사실 니스는 여행지로 생각지도 않았던 곳이었다. 때로는 이렇게 예상치도 않은 여행지를 다녀볼 수도 있다는 게 기분을 달뜨게도 한다. 공항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에는 칸느와 모나코행 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다. 또 한쪽엔 니스 역 방향의 98번 버스가 서 있다. 우리는 니스 해변 쪽으로 가는 99번 버스로 지중해가 펼쳐지는 숙소 앞에서 내렸다. 환한 햇살이 맞이할 것 같았던 니스는 비가 내린 후의 한기가 엄습했지만 다음 날부터는 니스의 햇빛 좋은 날씨가 날마다 이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코발트블루의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해변가의 전망 좋은 방. 호텔 방에 앉아 광활한 지중해의 풍경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위치 좋은 곳의 전망 값을 더 지급했다. 발코니에 앉아 새벽을 바라보고 찬란한 햇빛을 눈부시게 볼 수 있었다. 아름답게 휘어진 니스의 해안선에 내리는 노을을 향해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며 짜릿했다.
니스에서는 모든 것을 털어내고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맨발로 몽돌을 밟으며 걷는 해변엔 여행객들의 거리낌 없는 일광욕 자세가 민망할 것도 없이 금방 적응된다. 느릿한 트램을 타고 거리를 지나거나 메세나 광장에 나가보아도 무표정하거나 심각한 얼굴은 보기 어렵다. 경직된 근육 없이 자유를 가득 품은 몸짓이었고 더없이 편안한 표정들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도 모두 친절했다. 적대감 따윈 하나 없이 무장 해제된 표정들. 구시가지의 고풍스러운 골목을 걷다가 나와서 길 가던 노신사에게 지도를 들고 길을 물었더니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아예 다리 사이에 내려놓고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그리고 내 지도에 동서남북을 그리며 상세히 설명을 한다. 그냥 "조~오기로 돌아서 가면~"이라고만 해주어도 좋으련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기분이 든다.
노천카페마다 의자에 팔걸이를 하고 느긋하게 앉아 지중해를 즐기고 니스를 즐기는 모습들이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거나 와인과 지중해의 해산물 샐러드를 앞에 놓고 그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 모습이 여행자에게 전해지고 덩달아 행복감 충전이다. 하루쯤 지나면서 긴장감이라곤 일 그램도 없는 나를 발견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니스(Nice)는 나이스(Nice)다.
가끔 가십 기사로 프랑스 배우나 허리우드 스타들이 니스에서 휴양 중인 파파라치 사진들을 기억한다. 따스한 햇살로 반기는 곳 니스는 누구라도 마음 놓고 쉴 수 있게 하는 도시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알프스 산맥을 모두 품은 세계적인 휴양도시답게 여유와 풍요함이 흘러넘친다.
니스가 좋은 이유
니스는 프랑스 남부의 항만 도시로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모나코와 칸느가 옆동네이고 이태리 국경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당일코스로 하루씩 칸과 모나코를 다녀올 수 있다. 현재 니스는 프랑스령이지만 역사적으로 이태리와 영토분쟁이 있었고 한때는 이태리 령이기도 했다. 그래서 니스지방 사람들의 이름 중엔 이태리식 이름이 많고 풍습이나 음식도 이태리풍이 많다. 무엇보다도 신선한 지중해의 식재료로 요리한 해산물 요리가 풍성하면서도 가격도 부담 없는 편이다. 숙소 또한 비싸진 않지만 찾는 이들이 많아 성수기엔 예약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곳은 평균 기온이 15℃이고 연중 고르게 온난한 날씨다. 여름엔 덥고 건조한 편이긴 하지만 대체로 전형적인 지중해 도시로 시기와 상관없이 사계절 니스를 즐길 수있는 기후다. 내가 갔을 때는 시월인데도 해변가엔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풍경이 일상처럼 자연스럽다.
야자수 나무 사이로 다정히 손잡은 연인이 서 있고 바다를 향한 벤치에 어깨를 감싼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자전거를 탄 젊음이 쌩쌩 지나가고 잘 생긴 개를 끌고 걸어가는 모습이 여유롭다. 이처럼 여유자적한 풍경 속에 내가 있다.
지끈지끈한 일상의 피로나 두통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가벼워지는 듯했다. 마음껏 늦잠을 잘 수도 있고 거리를 지나가다 아무데나 들어가서 홍합이 가득 뒤덮인 지중해의 해산물 파스타를 먹는다. 골목길이든 대로든 해변가든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긴다. 몇 걸음 걷다가 야자수 가로수길 어드메쯤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아 지중해의 반짝거림을 언제까지나 멍하니 바라볼 수 있다니. 며칠 후면 다시 별스럽지 않은 내 일상으로 돌아간다 해도 괜찮다. 얼마든지 괜찮다.
남프랑스 맛의 기억
물론 남프랑스의 맛이란 제목으론 당치도 않다. 여행 중에 그곳의 맛을 골고루 맛본 것도 아니고 좋은 것을 찾아다니며 먹은 것도 아니다. 그나마 먹는데 정신 팔려 사진으로 남길 생각을 못해서 찍히지 못하곤 했다. 어쩌다 먹고 어쩌다 찍힌 별스럽지 않은 사진 몇 컷 일뿐이다.
니스의 메인스트릿을 지나 골목길 포장마차처럼 생긴 레스토랑 Temple Bar. 가족단위의 손님이거나 연인들이 가득 차서 바글바글했던 저녁시간. 파스타도, 홍합요리도, 감자튀김도 푸짐 푸짐했다. 이런 인심 대환영이다. 맛있다. 그런데 국물이 간이 좀 세다. 조금만 덜 짰으면 좋으련만, 하긴 괜한 트집이다. 그 분위기 속에선 이렇게 잊지 못할 또 다른 맛을 낸다는 사실이다.
니스의 호텔 조식은 메뉴가 다양했다. 그 중에서 자그마하고 대충 만든 듯하지만 부드러운 크레페가 따끈따끈 금방 구워져 나와 그 맛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크레페(Cr^epes)의 생김새는 동그란 금빛 형태로 밝은 날 떠오른 태양을 상징한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춥고 어두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하고 밝은 봄을 맞을 때 먹는 빵이었다는데 이제는 우리의 호떡처럼 길거리 어디서든 사 먹을 수 있으니 그 의미를 떠올릴 틈이 없다.
그리고 어딜 가나 빨강과 보라, 그리고 노랑과 초록으로 선명한 색감이 빛나는 지중해의 채소와 과일들이 가게마다 넘쳐났다. 사진 한 장만으로도 그 시간들이 내게 우르르 몰려온다. 맛의 기억이 여행의 기억이기도 하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친구들은 나를 얄밉도록 운 좋은 놈이라고 한다. 뭐, 얄미울 것까지야. 하지만 운 좋은 건 인정! 50대 초반에 이혼한 걸 두고 대운(大運)이라고 할 순 없지만 1년 만에 재혼한 건 확실히 ‘운발’이 좋았다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재혼 상대가 30년 전 나를 짝사랑하던 ‘그녀’였으니. 친구들은 그 부분에서 나의 운을 얄미워하는 것일 테고.
우리 부부가 재혼한 지 올해 3년째다. 아, 그건 내 입장이고 아내로서는 초혼이다. 그러니까 나를 좋아했던 그녀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그것도 자기 친구랑) 나라는 남자를 못 잊어(믿거나 말거나) 50살이 다 되도록 혼자 살다가 내가 이혼한 후 나를 다시 만난 것이다. 첫 결혼에 실패한 후 ‘혹시나’ 하고 그녀에게 연락을 취해봤더니 ‘역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건 좀 과장이고, 어쨌거나 그녀는 그때까지 미혼인 상태였다. 용감한 자가 사랑을 쟁취한다 했던가? 이혼남인 주제에 감히 용기를 내어 여태껏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고, “와이 낫?”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나를 환대했다. 그러고는 일사천리로 결혼이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남달리 관계가 좋다거나 남다른 결혼생활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부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있어서 안정되고, 없어서 불편한. 그러고는 각자 자기 생활로 바쁜. 다만 우리 부부의 질긴 연이 특별하다면 특별하니 오늘은 그 특별한 연을 문어 다리 씹듯 잘근거려보련다.
강아지 그녀와 고양이 그녀
지금의 아내와 나는 같은 대학 같은 과 동기생으로 만났다. 이혼한 아내는 과는 다르지만 역시 같은 대학 출신이다. 두 여자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친한 친구였고, 나는 뒤늦게 대학을 들어가 그녀들보다 몇 살 더 많았다. 지금 아내를 가운데 두고 셋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다녔는데, 조합이 조합인지라 친구들한테서 삼각관계냐는 놀림을 받곤 했다. 당시 나는 두 여자 틈에서 보호받는 편안함을 느끼던 터라 연애로 인한 감정 소모와 긴장된 줄다리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두 여자 중 어느 누구도 내게 연애 감정을 품지 않길 진정으로 바랐다.
언제나 살가운 쪽은 지금의 아내였다. 모성 본능으로 나를 잘 챙겨줬고 이성 본능으로는 나를 잘 따랐다. 시험 기간에는 먼저 새벽에 나와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두기도 하고 여학생 특유의 감성이 담긴 자잘한 선물도 주곤 했는데, 고마워하면서도 그 모든 것에 무심코 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각별한 감정으로 대했던 것 같다. 나는 또래보다 늦게 대학에 들어간 처지라 동성 동급생들보다는 이성들 속에서 지내는 게 편했다. 내성적인 성격에다 여린 선의 외모로 같은 남자 집단에서는 약간 주눅이 들곤 했으니까. 나같이 생긴 사람을 요즘은 ‘꽃미남’이라고 해서 여자들이 호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남자답게 생기지 않은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그러니 나를 잘 챙겨주고 싹싹하고 상냥한 그녀와 함께 지내는 것이 편안하고 한편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께 다니면서 그녀의 친구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또한 그녀의 친구는 강아지 같은 아내와 달리 고양이처럼 도도한, 그야말로 둘은 ‘개와 고양이’ 사이 같았다. 언뜻 생각하면 앙숙으로 지낼 법한데 예의 배려심 많은 아내의 마음 씀씀이 덕에 둘이 잘 지냈다. ‘고양이 그녀’는 좀처럼 마음을 주는 법 없이 언제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를 대했는데, 신비감과 매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연애를 하기에는 나의 에너지가 부족한 편이라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는 ‘강아지 그녀’가 역시 편했다.
나를 친구에게 빼앗긴 아내
일은 셋이 춘천에 가기로 한 날 벌어졌다. 4학년 학기말 시험이 끝난 주말, 내 친구 한 명을 끼워 넷이서 당일치기로 여행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데리고 나오기로 한 친구 녀석이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아마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치 않다) 못 나오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여행을 취소할까 하다가 어차피 주 멤버는 우리 셋이었으니 그냥 셋이 가도 별문제 없겠다 싶어 그대로 추진했다. 거기까지는 실상 아무 문제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아내인 ‘강아지 그녀’마저 일이 생겨 못 온다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그때는 휴대폰도 없었을 때라 이미 나와 ‘고양이 그녀’는 약속 장소로 나와 있는 상태에서 소식을 들었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오는데도 모이기로 한 청량리역에 나타나지 않는 ‘강아지 그녀’. 기다리다 못해 ‘고양이’가 ‘강아지’의 집으로 전화를 걸고 나서야 사정을 듣게 되었다.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을 접지르는 바람에 꼼짝 못 하게 된 상황에서 연락할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집애야, 발을 다쳤는데 어떻게 발을 동동 구르니? 내가 먼저 전화 안 했으면 마냥 그대로 있으려고 했어?”
걱정은 고사하고 얼마나 다쳤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첫마디부터 쏘아붙이던 ‘고양이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상대를 할퀴는 목소리, 그때부터 인정머리 없는 여자라는 걸 알아봤어야 하는데.
“진철 씨, 제 친구가 발을 다쳤대요. 그냥 우리끼리 가요.”
“어떻게 그래요? 나으면 다음에 함께 가요.”
“일껏 준비하고 나왔는데 그럼 이대로 돌아가잔 말이에요?”
“그래도 우리끼리 가면 섭섭해할 것 같아서….”
‘강아지 그녀’를 사이에 두지 않고 ‘고양이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어색했던지라 그렇게 핑계를 댄 것인데, 그 말이 ‘고양이’의 성질을 건드린 것 같아 내심 움찔했다. 그녀와만 따로 만난 적도, 함께 있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숫기 없고 붙임성 없는 내가 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물이나 공기처럼 부지불식 중에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강아지’의 존재가 그때처럼 절실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좋아요, 그럼 춘천은 다음에 가기로 하고 우리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어요.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가네요. 어차피 열차는 떠나버렸으니 가고 싶어도 오늘은 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일이 왜 이렇게 풀려가나. 왜 내가 이 상황을 전적으로 떠맡아야 하는 거지? 나는 적이 긴장되고 당황해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의 힘이라도 빌려보고자 밥 대신 술을 마시자고 했고, 아니 대낮부터 밥과 술을 함께하자고 했고 일은 그렇게 터져버린 것이다.
술김에 결혼, 술 깨자 이혼
술의 힘은 묘했다. ‘고양이’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호기심이 동했고, 2차, 3차로 옮겨가는 동안 밤이 깊어갔고, 취할수록 괜스레 안달이 나면서 도도하고 앙칼진 그녀를 한번 꺾어보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나를 유혹했는지 내가 그녀를 유혹했는지 엉망으로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우리는 몸을 섞었고, 그 하룻밤의 일로 그녀가 덜컥 임신을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술김에 한 결혼이었지만 아주 몰랐던 사이도 아니고 집안 환경도 비슷해서 ‘복불복’이라고 꼭 잘못되라는 법도 없었다. 근데 잘못됐다. 무엇보다 그런 동기의 결혼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결혼생활 내내 구겨진 자존심을 만회하려는 안간힘인 양 덤터기를 죄다 내게 씌웠다. 그나마 관계가 순조로울 때는 잠잠하다가 일이 꼬일 때면 나를 무슨 성폭행범처럼 몰아세웠다. 내가 그때 그러지만 않았어도 나 따위와 인생을 함께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라며. 그렇게 한 번씩 퍼부어댈 때면 내 자존심은 안중에 없었다.
아내의 기질과 성질을 잘 아는 나로서는 대거리를 하는 게 일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 묵묵히 듣곤 했는데, 그 자체가 인정하는 꼴이 되어갔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수십 년간 혐오스러운 소리를 듣자니 나로서도 더 이상 참아지지 않았고 참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생긴 딸 하나 외엔 어찌된 게 자식도 더 이상 생기지 않아 딸을 볼 때마다 그날의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는지 아내는 딸조차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 점이 가장 나를 화나게 했고 무기력하게 했다. 동시에 그 점 때문에 어떻게든 아내를 달래서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진짜 속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그 점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그랬다. 전 아내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현 아내가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고 한결같이 사랑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러나 감정보다는 가정을 지키고 싶었기에 딴에는 노력했다. 설혹 잘못 꿴 첫 단추라 하더라도 단추 구멍을 추가로 내겠다는 각오로. 하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오래 산 부부들이 아무리 밋밋하고 멋없이 산다고 해도 그 바탕에는 장처럼 묵은 정의 강이 구수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술김에 한 결혼이 술 깨자 이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할지.
다시 찾은 나의 강아지
그렇게 나는 고양이와 헤어진 후 강아지를 다시 만났다. 어떤가. 사연을 듣고 나니 얄밉도록 운이 좋았던 건 아니고, 나 역시 겪을 만큼 겪고 나서 겨우 찾은 일상의 안온함일 뿐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강아지 아내’는 여전히 나를 잘 따르고 내게 충성스럽다. 참 고마운 일이다. 내가 자기 친구와 그날 밤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도 말없이 받아들였던 여자다. 그때 자기와 내가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해도 내심 얼마나 당황하고 실망스러웠을까. 아니 그녀는 분명 나를 특별하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나의 허망한 지난 결혼에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밤엔 꼭 물어보리라. 당신은 나의 30년 전 연인이었냐고. 그래서 나를 잊지 못하고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었냐고. 위로받아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아내인가?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너를 위한 거야”라며 가면을 쓰고 상대를 조종하는 행위, 가스라이팅(Gaslighting).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하고, 주변인들과 격리해 가해자에게만 의존하도록 하는 일종의 심리적 학대다. 심리적 지배라고도 하는 가스라이팅은 가정, 연인, 친구 등 가까운 사이에서 자주 발생한다.
최근 세 딸이 60대 친모를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제3자인 한 무속인이 세 딸을 ‘가스라이팅’했다는 점이다. 범행 이후에도 세 딸은 무속인의 잘못을 줄이고 감싸려고 했다. 이 무속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를 가족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범죄 사건에서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일까. 2021년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는 ‘가스라이팅’이었다.
“나니까 네 이야기를 들어주지”
가스라이팅은 누구나 당할 수 있지만 자신이 피해자거나 가해자라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른 폭력과 달리 연인, 부부, 부모 자녀, 상사와 부하직원과 같이 아는 사이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대체로 평등한 관계보다는 위계질서나 권력 구조가 있을 때 발생한다.
심리적 지배는 “내가 아니면 누가 네 이야기를 들어주겠니. 널 위하는 건 나밖에 없어”라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관심인지 학대인지 깨닫기가 어렵다. 이후 가해자는 반박과 무시를 반복하며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돌연 화를 내면서 상대가 마치 문제가 많은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피해자는 ‘내가 잘하고 있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가해자에게 확인하게 된다. 가해자가 어떤 판단을 해주기를 기다리게 되는 것. 즉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심리에 조작을 하는 행위다. 더불어 가해자는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내가 널 제일 잘 알아. 다른 사람들은 너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거야”라며 주변의 관계들을 끊어놓고, 오로지 가해자 본인에게 의지하도록 만든다.
용기 내 단절하기
만약 주변의 누군가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 같다면, 가해자를 설득해 바꾸려고 하기보다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사람들은 거절을 잘못 하거나, 지나치게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이 많다. 따라서 관계 단절이 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박사는 “상대가 어떤 지시를 했을 때 ‘알겠어’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해볼게’라고 대화의 주체를 나에게로 가져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설사 상대가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는 가해자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해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거절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상대와 있었던 일을 문자나 이메일로 저장해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불어 주변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나 전문가와 상담하고 도움 요청을 주저하지 말자.
가스라이팅 자가진단 체크리스트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의 자가진단표와 심리 전문가들의 체크리스트를 재구성했다. 아래 내용 중 한 항목이라도 여러 번 겪었다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봐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상대와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
1 간단한 결정도 스스로 내리기 어렵고, 왠지 몰라도 항상 상대방 방식대로 일이 진행된다.
2 상대에게 “너는 너무 예민해”, “이게 네가 무시당하는 이유야”, “비난받아도 참아야지”, “나는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어”, “너 혼자 상상한 것이겠지” 등의 말을 들었고, 스스로 내가 예민한 건 아닌지 자주 돌아본다.
3 주변에 상대에 대한 변명을 하게 되고, 결국 상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게 된다.
4 내 생각보다는 상대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가 좋아하는지보다 상대가 좋아하는지를 늘 염두에 둔다.
5 상대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하고, 상대가 화를 낼까 봐 안 해도 되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
6 상대를 알기 전보다 자신감이 없어졌고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됐다.
영화 ‘가스등’
“아니야. 당신 예민해서 그래”, “또 상상으로 만들어낸 거야?”
남편 그레고리는 일부러 집 안의 등을 어둡게 해두었으면서 아내 폴라가 “여보, 가스등이 너무 어둡지 않아요?”라고 물을 때마다 시치미를 뗐다. 폴라는 점점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신을 의심하게 됐다. 그러면서 그레고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 영화의 원작은 1938년에 만들어진 연극 ‘가스등’이다. 주인공인 남편은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해 아내의 심리를 조작했다. 미국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은 이 작품을 인용해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를 만들었다.
남경주(58)는 자타 공인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 배우다. 그가 뮤지컬 배우로서 무대에 오른 지도 벌써 약 40년. 강산이 네 번 바뀐 시간에도 무대 위의 남경주는 나이 들지 않았다. 한결같은 에너지를 자랑한다. 비결을 묻자 그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화려한 무대를 벗어나 마주한 진짜 남경주는 소탈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히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사랑꾼임을 알게 됐다.
“제가 오랫동안 뮤지컬 배우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해요. 좋아하는 일을 만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질린 적도 없고 즐기면서 일할 수 있었던 거예요. 하나 더 말해보자면 창조적인 습관을 잘 길러놓았고, 늘 호기심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결혼한 후부터 제 삶의 원동력인 가족도 한몫 하고요.”
남경주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1982년 연극 ‘보이체크’로 공연계에 입문했다. 뮤지컬 데뷔는 서울시립가무단 시절인 1984년 출연한 뮤지컬 ‘포기와 베스’다. 이어 그는 데뷔 초 뮤지컬 ‘가스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1990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90년대 당시 남경주의 인기는 여느 아이돌 부럽지 않았다. 꽃미남 외모에 연기력까지 겸비한 그를 보고자 공연장에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팬클럽까지 생겼다. 뮤지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였다는 평을 받은 남경주는 최정원과 함께 ‘뮤지컬 1세대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저는 1세대가 아니라 1.5세대”라고 생각을 밝혔다.
“항상 저는 1세대가 아니라고 해요. 우리 형님(남경읍)도 계시고, 형님 위에 선배님들도 계시죠. 우리나라에서 뮤지컬을 최초로 했던 그분들이 1세대인 거죠. 뮤지컬 대중화 1세대라고 할 수는 있겠네요. 그런데 저는 우리 후배들이 2세대고, 저는 1.5세대라고 생각해요. 비유를 해보자면 저는 밭을 일궜고, 후배들이 비옥해진 토양에서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선배로서 느끼는 책임감은 매우 크죠.”
벌써 네 번째, ‘넥스트 투 노멀’
대배우인 남경주에게도 코로나19의 충격은 컸다. 처음 겪어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예정된 공연이 갑자기 취소되고, 1년 넘게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직업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은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코로나19로 배우들은 자의식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오랜만에 무대에 올랐는데 풍경이 생소했어요. 관객들이 띄어 앉고,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까 반응이 잘 느껴지지 않는 거죠. 그러다 보니 연기에 몰입되지 않고 어렵더라고요. 우리가 뭔가 잘못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고요.”
남경주는 코로나19 이후 더욱 무대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그는 이번 달까지 서울 광림아트센터에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로 관객과 만난다. ‘넥스트 투 노멀’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국내에서는 이번이 네 번째 시즌으로 7년 만의 귀환이다. 초연부터 ‘넥스트 투 노멀’에 출연하고 있는 남경주는 “보통 뮤지컬과 달리 이 작품은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라면서 “우울한 이야기를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표현한, 음악의 힘을 보여주는 뮤지컬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차별점을 짚었다.
남경주는 극 중 아빠 댄 역할을 맡았다. 그의 아내 다이애나는 과거의 상처로 신경정신 질환을 앓고 있고, 딸 나탈리는 아픈 엄마로 인해 가족에게 소외감을 느낀다. 댄은 아내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헌신하는데, 정작 자신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 가장의 무게가 느껴지는 외로운 캐릭터다.
“저도 꽤 가정적인 편이에요. 그래서 제 자신에게서 댄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내가 병이 있는 아내와 같이 산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을 많이 했죠. 댄이 한시도 아내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어요.”
극 중 댄의 아내인 다이애나 역은 배우 박칼린과 최정원이 연기한다. 남경주는 박칼린과 초연 때부터 부부 호흡을 맞추고 있다. 남경주와 최정원은 두말하면 입 아픈 뮤지컬계 콤비다. 남경주가 느낀 박칼린과 최정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칼린 씨는 처음부터 같이했으니까 서로 교감, 호흡이 잘 맞죠. 그리고 저는 칼린 씨가 다이애나 역할의 연기 장인이라고 생각해요. 연기하면서 저도 도움을 많이 받죠. 정원 씨는 이 작품이 처음이어서 아직은 힘들어해요. 그래서 저를 많이 믿고 있고, 저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하죠.”
가족은 나의 힘
남경주는 ‘넥스트 투 노멀’이 ‘가족 힐링 뮤지컬’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 역시 연기하면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저는 가족의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가정 안의 문제가 뭔지, 가족한테 가장 필요한 것이 뭔지 알게 되죠. 공연을 보면서 공감도 하고 펑펑 울면서 힐링도 하셨으면 좋겠어요.”
남경주는 이번 시즌에 특히 감정이입을 하면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 이유는 남경주의 딸과 극 중 딸 나탈리의 나이가 비슷하기 때문. 남경주는 2005년 팬으로 만난 연인과 결혼했고, 2008년 딸을 품에 안았다. 남경주는 아빠로서 자신에 대해 “한없이 다정한 딸바보”라고 자평했다.
“우리 딸내미는 제가 조금만 엄하게 얘기해도 아주 싫어해요. 그래서 엄한 얘기는 엄마가 담당하고, 저는 늘 응원해주려고 해요. 딸이 부탁하는 것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고요. 딸은 발레 전공으로 예술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새벽에 집에서 일찍 나가고 방과 후에는 또 학원에 가서 개인 레슨을 받아야 하죠. 안쓰러울 때가 많아요.”
알고 보니 남경주도 초등학생 시절 체조를 했다고. 그는 중학생 때 키가 부쩍 크는 바람에 체조를 그만두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고 밝혔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음악도 좋아했던 터라 밴드부 활동을 하고, 고고장에도 자주 놀러 다녔다고 한다.
이후 고등학생이 된 남경주는 마음을 다잡고, 미대 진학을 목표로 미술 공부를 했다. 그러나 결국 고등학교 3학년 때 연기로 전공을 바꿨다. 배우로서 넘치는 끼를 막을 수 없었다. 형인 배우 남경읍의 영향도 컸다. 당시 대학생인 남경읍이 연기하는 모습에 매료된 그는 형을 따라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것. 남경주에게 남경읍은 어떤 존재일까.
“어릴 때는 형님이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어요. 많이 삐뚤어질 뻔한 절 잡아주신 덕분에 지금까지 제가 배우 생활을 하는 것 같아요. 형님은 미숙한 제가 연기할 수 있게 영감을 준 존재이고, 늘 제 삶의 구심점이 되어준 분이에요. 요즘은 형과 친구처럼 지내요. 자주 만나서 공연 얘기도 하고 일상 얘기도 하죠.”
5남매 중 남경읍은 첫째, 남경주는 셋째다. 남경주는 “둘째 형은 목공 일을 했고, 남동생은 미대를 졸업했다. 막내 여동생은 승무원이다”라고 설명했다.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집안이다. 그러면서 남경주는 “어머니가 고생하며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셨다”고 말했다. 약사였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어머니가 생선 장사를 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2017년 당시에 어머니께서 요양병원에 계셨어요. 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연락이 와서 공연을 마치고 병원에 갔는데 이미 눈을 감으신 후였죠. 임종을 지키지 못한 거예요. 그때 정말 목 놓아 울었어요. 어머니께서 고생하셨던 게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더라고요. 그래도 생전에 어머니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안겨드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형이 문화예술계에서 자리 잡은 공로로 상을 받으신 거니까 어머니가 뿌듯해하셨죠.”
슬럼프 극복 후 롱런하기까지
앞서 말한 대로 데뷔와 동시에 주목받은 남경주의 젊은 날은 화려했다. 인기가 많다 보니 여러 방송과 공연에서 남경주를 찾았고, 그의 피로는 쌓여갔다. 이에 남경주는 1997년 돌연 ‘굿바이 남경주’ 콘서트를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제 몸은 하나인데 부르는 곳이 너무 많았어요. 쇼 프로그램 MC, 라디오 DJ 등 방송 활동도 많이 했죠. 그러다 보니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년 조금 넘게 공백기를 갖고 미국에서 공연도 많이 보고 잘 쉬고 돌아왔죠. 무대가 그립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미국 유학은 재충전의 시간이 됐다. 남경주의 진짜 슬럼프는 40대 진입을 앞두고 찾아왔다. “이제 더 이상 젊은 주인공 역을 하기 쉽지 않은 나이가 된 거죠.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주인공만 하던 사람에게 아빠 역할, 조연 역할 제의가 들어오니까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더라고요. 힘이 많이 빠졌어요.”
그때 남경주에게 찾아온 작품이 바로 원조 로맨틱 뮤지컬 ‘아이 러브 유’다. 2004년 초연한 ‘아이 러브 유’는 중형 뮤지컬로서는 이례적으로 1200회 공연을 돌파하며 50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작품이다.
남경주는 첫 시즌 594회를 포함해 2009년 앙코르까지, 총 830회 무대에 올랐다. 남경주라는 존재감이 재확인된 작품이다. 그 스스로도 ‘아이 러브 유’를 인생작으로 꼽았다. 더욱이 남경주는 이 시기에 공연 중 프러포즈를 했고, 결혼에도 골인했다.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아이 러브 유’는 에피소드 20개를 묶은 옴니버스 형식의 뮤지컬이에요. 배우 4명이 60명이 넘는 인물을 연기하죠.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하면서 연기 변신을 했고, 자존감도 되찾았어요. 결혼이라는 좋은 일도 치렀고요. 당시 슬럼프를 잘 극복한 덕분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 러브 유’ 최장 공연 외에도 남경주가 남긴 기록은 많다. 그는 1995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뮤지컬 ‘그리스 록큰롤’로 인기상을 받았다. 남경주는 “뮤지컬 배우가 인기상을 받은 것은 최초였다. 그 이후에도 연극 쪽은 수상자가 있었지만 뮤지컬 배우가 수상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1997년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 2005년 한국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19년 제13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브로드웨이 42번가’, ‘노트르담 드 파리’, ‘위키드’, ‘시카고’, ‘빅피쉬’ 등이 꼽힌다.
수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롤모델로 꼽는 남경주. 그는 교수로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2014년부터 교단에 선 그는 현재 홍익대학교 공연예술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남경주는 “뮤지컬 배우는 노래, 연기, 춤 3박자를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저는 학생들에게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얘기해요.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장 좋은 연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노래를 아름답게 잘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솔직하고 풍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공인으로서 책임, 의무감을 갖고 후배한테 좋은 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광대’ 남경주의 롱런에는 이유가 있었다. 관객의 고마움을 아는, 성실한 배우라는 사실이 그의 특별함이었다. 남경주는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가정과 내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 배우는 정년이 없기 때문에 체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감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살까,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일까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독자분들도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함께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어요. 행복은 내가 많이 갖는 게 아니라 남들을 웃게 만들고 나눌 때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