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joonlee@empas.com
화가 김환기(1913~1974)와 화가 도상봉(1902~1977)은 유난히 달 항아리를 좋아했다. 김환기는 여러 점의 달 항아리를 수집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 그림의 소재로 삼았고, 종이 오브제로 직접 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도상봉도 도자기를 좋아해서 아호를 도천(陶泉)으로 삼았다고 한다. 1950년대 많은 정물화에 도자기가 등장한다. 특히 직접 구입한 달 항아리를 그린 그림도 여러 점 전해진다. 시인 김상옥(1920~2004)은 조선백자를 평생 사랑하여 한때 인사동에서 고미술점 ‘아자방(亞字房)’을 직접 운영하며 수많은 조선백자를 수집하였고, 달 항아리도 여러 점 소장하여 백자를 주제로 한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다.
‘조선백자 대호(大壺)’가 정식 이름인 달 항아리는 두둥실 하늘에 뜬 보름달과 같다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고미술학자나 현대 도예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높이 40cm 이상이고 둘레가 120cm 이상의 구형(球形) 순백자에, 제조기법상 아래 위 반구형 두 개 결합해서 소성(燒成)하고 맑은 백자유를 시유해 1250도~1300도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대호라 이른다.
물레를 돌려 빚는다 해도 완성품보다 1.3배 정도 더 커야 하는 고로(번조 과정에서 약 30% 정도는 축소됨) 무게와 부피가 한 아름이 넘는다. 초벌구이 과정에서도 자체 무게 때문에 주저앉거나 파열되기 일쑤다. 이를 그대로 전승하고자 하는 도예가들도 열에 한두 점 완성품을 건지기 고작이다. 또한 전래품들은 술을 담거나 간장을 담는 등 생활용기로 사용했으므로 파손이 심해 남아 있는 수효가 극소수로 그 희소가치가 높다.
리움미술관 호림미술관 국립박물관 등과 지방의 전시회를 쫓아다니기 30여 해, 안복(眼福)은 누렸으나, 수집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백자를 꾸준히 연구하고 만들어 내는 현대 도예가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여성도예가 김익영(1935~ )은 서울대 공대에서 화공학, 홍익대에서 공예미술을 전공한 뒤, 미국 뉴욕의 알프레드 요업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 국민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길러냈다. 유학 중 영국 공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의 초청 강연에서 ‘한국의 조선백자가 현대인이 추구해야 하는 미의 세계’라는 열강을 듣고 감복, 백자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순백자의 담백하고 고졸(古拙)한 멋에 젖어 여러 형태의 백자를 빚고 구워보았으나, 1960년대에는 도자 가마가 적어 백자를 시연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1965년 일본 전시를 비롯해 지금까지 30여 회 가까운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도자의 실용성을 강조해서 생활용기의 격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75년부터 국민대 교수로 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태토(胎土)의 선별부터 가마의 과학적 제조, 특히 백자유약 데이터의 체계적 정리와 실행에 이르기까지 백자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1978년 개인 가마 ‘우일요’를 개설하고 그만의 개성 강한 도자기를 만들어 냈다. 특히 ‘면 깎기’라는 고난도 작업으로 합(盒), 푼주, 제기(祭器)등 전통 조선백자에 근원을 두되 이를 재해석하고 변용한 도자를 빚었다.
몇 년째 창덕궁 담 옆의 ‘우일요’를 드나들며 여러 기물을 보고 만지고 연적, 필통, 벼루 등을 사 모으던 중이었다. 달 항아리를 왜 안 만드시느냐고 여쭙자, “전에 몇 점 만들어 보았는데, 이제 무릎이 안 좋아 힘에 부치고 완성품을 얻기가 어려워 망설인다”는 노도예가의 진솔한 대답이었다. 조카따님을 졸라 2008년 여름에야 김익영의 달 항아리를 만날 수 있었다. 설백(雪白)의 유현(幽玄)한 유약의 흐름과 당당한 자태에 반해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이 달 항아리 앞에선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 나주 반닫이 위에 앉히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서너 시간 들으며 몰아의 경지에 젖었다.
아키야마 준(秋山 潤·1970~ )은 일본인으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도자에 매료돼 10여 년 공방을 찾아다니며 도자 공부를 한 뒤에 조선백자의 연원을 찾아 2002년에 한국에 왔다. 한국 부인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경남 창원에 스스로 가마를 짓고 조선백자를 잇는 순백자를 굽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도예가들을 찾고,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백자 도예의 길을 정진하였다. 그 첫 결실로 2006년 드디어 인사동에서 백자전을 열었다. 그 이듬해에는 경북 청도로 옮겨 현재까지 백자를 굽고 20여 회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극도로 절제되고 유약이 너그러운 인사동 전시작품이 눈에 어려, 그의 가마를 찾고 싶어 알아본 끝에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2008년 봄날에 그의 초대로 청도의 공방을 처음 방문하였다. 그의 작품처럼 검소하고 정갈한 작업실을 거쳐 내실로 들어서면서 그의 달 항아리를 만났다.
수십 점을 소성해 보았으나 겨우 두 점만 얻었다며 망설이는 부부를 설득하여 한 점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열차로 운송하기가 어렵다며 며칠 후 서울의 집까지 손수 가져다주었다. 다른 일본 예술인 두 명과 함께 자리한 우리 거실에서 조촐한 다과와 함께 소리꾼 장사익의 절창 ‘허허바다’를 음반으로 듣던 순간이 선연히 떠오른다. 지금은 침실에 두고 밤을 함께하고 있다. 그의 백자유약은 난백(卵白)으로 부드럽기 그지없다. 흰빛이 너무 차가워 색을 바꿔 보았다고 하지만, 고국에 대한 향수가 녹아든 것이리라.
오늘날에도 많은 도예가들이 조선백자를 전승하거나, 모티브로 삼아 달 항아리를 만들고 있다. 그 무슨 마력이 그 힘들고 경제성 없는 고단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일까?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진흙을 반죽해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의 쓰임이 있다’고 하였다.
김익영도 “용(用)이라는 공예의 사회성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쓰임으로 보면 달 항아리는 경제성이 취약하다. 적지 않은 돈(이,삼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주고 사다가 간장 된장을 담고, 술을 담아 사용하겠는가. 귀하게 모셔놓고 완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텅 빈 공간에 애틋한 마음을 가득 채우고 허리를 두 팔로 안아보면, 어느새 휘영청 밝은 달은 심신을 정화해 주거늘, 어찌 세속의 시선이 두려우리요.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한국과 일본에 분포돼 있는 홍단풍은 단풍나무과의 낙엽활엽 교목입니다. 처음엔 가지가 녹색이었다가 차츰 회색이 됩니다. 새로 난 잎은 붉은색인데, 자라면서 다른 나무들처럼 녹색으로 바뀌었다가 가을이면 문자 그대로 빨간 단풍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유치환의 시 ‘춘신(春信)’에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가지’라는 표현이 있지만, 홍단풍은 나무등, 나무불이라고나 해야 할 만큼 그 빨강이 깊고 강렬합니다. 올해에도 홍단풍은 온 산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단풍의 楓이라는 글자는 나무[木]와 바람[風]으로 돼 있습니다. 나무에 가을바람이 스며들면 잎 색깔이 달라집니다. 빨간색, 노란색,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은 이제 나뭇잎이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잎이 활동을 멈추면 엽록소가 파괴되고 자가분해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안토시안이 생성되는 종은 붉은색 또는 갈색 계열의 단풍이 들고, 그렇지 않은 종은 노란 단풍이 듭니다. 노란색 색소는 원래 잎 속에 있었으나 그동안 엽록소의 녹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본색(本色)이라고 합니다.
올해 단풍은 9월 27일 설악산을 떠나 하루 20~25km씩 남하해왔습니다. 여름철 가뭄이 심해 첫 단풍은 예년보다 1주일가량 빨랐고, 색깔도 어느 해보다 더 선명합니다.
단풍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홍엽(紅葉)입니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는 말은 괜히 생긴 게 아닙니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단풍 시는 중국 당(唐)의 시인 두목(杜牧)의 작품입니다. “멀리 가을 산 위로 돌길이 비껴 있고/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이네/ 단풍든 숲의 저녁경치가 좋아 수레를 멈췄더니/서리 맞은 잎이 봄꽃보다 더 붉구나.”[遠上寒山石徑斜 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 붉은 단풍을 노래한 마지막 행이 천하의 명구로 꼽히고 있습니다.
왕희지(王羲之)의 7남이며 아버지처럼 서예로 유명했던 왕헌지(王獻之)는 회계산(會稽山) 북쪽의 산음(山陰)을 여행하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산음의 길을 가노라면 산과 강이 서로 마주치면서 어우러져 하나하나 볼 틈이 없다. 특히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때에는 마음속의 정회를 표현하기 어렵다.” [從山陰道上行 山川自相映發 使人應接不暇 若秋冬之際 尤難爲懷] 이 말에서 응접불가(應接不暇)라는 성어가 생겼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응접불가인 단풍의 명소는 요즘 가을 정취를 즐기는 행락객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갈수록 가을이 짧아져 단풍은 더 황홀하고 소중한 선물처럼 보입니다.
인간에게도 ‘꽃의 나이’가 있고 ‘단풍의 나이’가 있습니다. 인간도 식물처럼 잎이 나고 꽃이 피어 푸른색으로 활발하게 광합성 작용을 하다가 계절의 변화에 의해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어떤 색깔의 단풍이 되느냐는 그 자신의 기질과 천성, 서식하고 활동해온 곳의 기후 환경 등 외부 여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실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식물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늘 향해 팔 벌리고 서 있는 나무는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인간은 나무’라는 생각을 펼친 문학작품도 많습니다.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생각하는 나무’(한광일)를 읽어봅니다. “나뭇잎은 어쩌면/나무들의/생각인지도 몰라//봄/뾰족뾰족/돋는 생각//여름/푸릇푸릇/펼쳐낸 생각//가을/알록달록/재미난 생각//‘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온갖 생각/다 떨쳐버리고/다시 생각에 잠기는/겨울”
단풍을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단풍이 든 인간은 아름다운가, 아름답다면 어떻게 아름다운가, 나무가 단풍 든 잎을 드디어 다 떨구고 겨울을 준비하듯이 사람도 그렇게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붉다가 푸르다가 다시 붉어지는 홍단풍의 본색은 어떤 것일까.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언제 모습이 고유한 나인가, 어떤 게 나의 진면목인가, 남들이 나를 어떤 얼굴로 기억할까.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은 여러 가지이지만 사람들은 수염을 기른 얼굴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대푯값입니다.
이런 조어가 가능하다면 초단풍(初丹楓), 만단풍(晩丹楓)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잎이 날 때의 모습과 단풍이 들었을 때의 모습이 다르듯 인간도 초단풍과 만단풍 시절의 모습이 같지 않습니다. 풍모는 물론 풍격도 달라집니다. 젊어서 무슨 일을 했든 사람을 평가하려면 다만 그 말년을 보라고 했습니다. 만단풍이 아름답고 멋져야 합니다.
최근 조선 선비들의 풍류와 우정을 알게 해주는 글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정조~순조 연간의 김조순(1765~1832) 서영보(1759~1816) 이만수(1752~1820)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고, 아주 친한 벗들이었습니다.
1806년 10월 중순(양력), 금강산 유람을 떠난 서영보가 서울에 있는 김조순과 함흥에 관찰사로 가 있는 이만수에게 금강산 단풍을 시와 함께 보냈습니다. 편지에는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가 모두 이 단풍잎으로 덮여 있음을 멀리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단풍을 받은 이만수는 마침 짓고 있던 건물에 홍엽루(紅葉樓)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벗이 보내온 단풍잎과 편지를 ‘홍엽첩(紅葉帖)’이라는 시집으로 엮어 서영보는 물론 김조순에게도 보냈습니다. 이만수는 당대 최고의 고문가(古文家)로 명성이 높던 홍석주(1774~1842)에게도 글을 부탁해 홍엽첩에 얹었습니다. 김조순은 이와 별도로 화가를 시켜 그 단풍을 그리게 하고 글을 붙여 ‘홍엽전조첩(紅葉傳照帖)’을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1824년, 단풍으로 물든 묘향산을 여행하던 김조순은 단풍가지 하나를 꺾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시를 썼습니다. 시에 붙인 주석에 서영보가 금강산 단풍을 보내온 일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단풍잎을 연적의 갑 안에 넣어두었더니 지금까지 손상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무려 18년입니다!
단풍은 선비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시서화로 유명한 표암 강세황 등 많은 사람의 집이나 누각에 홍엽루, 홍엽정 등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단풍을 보면서 200여 년 전에 단풍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더듬어봅니다. 삶의 성숙과 아름다운 우정, 소통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벗끼리 서로 통하는 것을 신교(神交), 그런 만남을 신회(神會)라고 한다는데, 홍석주는 ‘단풍의 우정’을 “천고의 풍류요 운치 있는 일”이라고 홍엽첩에 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풍은 떨어져 장차 사라지지만 그 정화(精華)만은 남아 바람과 서리가 매섭게 쳐도 그 색은 더욱 선명하게 됩니다. 군자의 만절(晩節)이 이와 같은 법입니다.”
1년 중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도, 봄을 상징하는 입춘(立分)도 지났다. 입춘은 24절기의 시작이고, 바야흐로 봄을 맞아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한다는 절기이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맹위를 떨치던 추위도 한풀 꺾이고 제법 봄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년의 기온을 보면 입춘이 지나고 설을 쇠어도 아직 춥기는 매한가지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설을 쇤 대지는 한겨울과는 다른 온기가 차오른다. 매섭던 칼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진 듯 하고 깊게 쌓인 눈도 하루하루 녹아서 없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역시 이름답게 봄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봄이 오면 만물이 생동한다. 특히 '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꽃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 피는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복수초(福壽草)라고 할 수 있다. 새해 달력이나 야생화를 주제로 한 사진 작품에서 하얀 눈 속에 노랗게 꽃이 핀 복수초가 흔히 등장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복수초는 자생지에서 2월 말께 개화하는 종도 있다. 복수초(Adonis amurensis)는 여러해살이 풀로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자생식물이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지역에 따라 독특한 개화습성과 형태를 지닌 복수초가 자생한다. 백두대간 산줄기에 자생하는 복수초는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잎이 나오는 특징이 있고 개체의 크기가 작으며 가장 일찍 개화한다. 그러나 제주도의 복수초는 잎과 꽃이 동시에 피고 키가 큰 것이 특징이다. 중부지방의 서해안 일대에서 자라는 복수초는 꽃이 크게 피지만 개화시기가 늦은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이렇듯 외국에 비해 국토 면적이 좁은 우리나라에 다양한 복수초가 자생하고 있다. 복수초는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가까운 일본에서는 무려 60여종의 원예품종이 육종되어 상업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식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식물체에서 아도닌(adonine)을 비롯하여 각종 유용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고 밝혀진바 있다. 따라서 이뇨제나 강심제 등의 생약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복수초 종류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의 반대편인 중남부 유럽에도 복수초와 유사한 종이 자생하고 있다. 보통 아도니스(Adonis aestivalis)라고 부르는 종으로 꽃이 새빨갛고 1년생 풀인 것이 다르다. 유럽에서 이 식물을 재배한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아도니스는 잘 생긴 미소년으로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애인으로 나타나 있다. 사냥에 나선 혈기왕성한 아도니스는 연적인 아레스가 풀어놓은 산돼지의 날카로운 어금니에 물어 뜯겨 죽었다. 아도니스의 상처에서 떨어진 붉은 피는 붉은색 복수초가 되어 피어났고 이를 애통해하는 아프로디테의 눈물은 흰 아네모네(바람꽃)라는 꽃이 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희한하게도 유럽과는 환경조건이 전혀 다른 우리나라의 산야에도 복수초가 피는 곳에는 반드시 바람꽃이 함께 자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지구상에는 비슷한 듯 하지만 서로 다른 생물 종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종의 다양성은 물론 인류 및 문화의 다양성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주제라 할 수 있다.
세계는 더욱더 글로벌화 되고 있고 가까워지고 있다. 이전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경제적 이유 등을 위해 방한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많고 더 다양한 외국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접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반만년 이상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큰 충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생 복수초가 있듯이 지구의 저 편에 또 다른 복수초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양한 복수초는 개발 여하에 따라 인류를 위한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지난 설 연휴동안 TV 방송에는 저마다 우리나라의 다문화 가정을 소개하는 설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이제는 우리들 주변에 너무도 가깝게 다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들 의식도 이제는 보다 범세계적이고 포용력 있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밝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건설적인 다문화를 보다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주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