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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의 문화행사
- (전시)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일정 12월 4일~2019년 3월 3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미국, 영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 국외 5개국과 한국이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는 고려의 미술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주요 문화재 총 390여 점이 출품된다.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 일정 12월 6일~2019년 1월 27일 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출연 이순재, 박인환, 손숙, 정영숙 등 강풀 웹툰을 원작으로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대학로 연극 무대로 돌아온다. 우유 배달을 하는 ‘김만석’과 파지를 줍는 ‘송이뿐’, 주차관리소에서 일하는 ‘장군봉’과 기억을 잃어버린 ‘조순이’가 서로 인연을 맺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베테랑 연기자 이순재, 박인환, 정영숙 등이 출연한다. (축제) 보성차밭빛축제 일정 12월 14일~2019년 1월 13일 장소 한국차문화공원 일원 차밭 빛물결, 은하수 터널, 빛 산책로, 디지털 차나무, 차밭 파사드 등 아름답게 꾸며진 빛 조형물이 보성의 겨울밤을 장식한다. 주말에는 불쇼, 불꽃, 음악, 레이저 조명이 어우러진 불꽃 공연, 실내정원에서 펼쳐지는 판타지 공연, 해외특별 공연 등이 진행된다. 또 소망카드 달기, 문화장터 등의 상설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영화) 스윙키즈 개봉 12월 19일 출연 도경수, 박혜수, 자레드 그라임스 등 1951년 거제 포로수용소, 탭댄스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오합지졸 댄스단 ‘스윙키즈’의 탄생기를 그렸다. 종군기자 베르너 비숍이 포로수용소에서 촬영한 사진 한 장이 모티프가 됐다. (뮤지컬) 마리 퀴리 일정 12월 22일~2019년 1월 6일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김소향, 임강희, 박영수, 조풍래 등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 퀴리는 방사능 연구를 통해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는 등 새 방사성 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라듐의 유해성을 알게 된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작품에 담았다. (전시) 피카소와 큐비즘 일정 12월 28일~2019년 3월 31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입체미술 운동의 탄생 배경에서 소멸까지의 흐름을 연대기적 서술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근대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 등 유명 작가의 진품 명화 9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 2018-12-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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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수만 철새들의 고향 '버드랜드'
- 우리나라는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아름다운 비경이나 이름나지 않은 멋진 곳이 아주 많다. 친구와 여행했던 한 곳은 깨끗하고 조용한 환경이 파괴될까 봐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이야기를 하며 웃은 적도 있다. 요즘엔 각 지자체에서 자기 고장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축제나 행사에 초청하는 일이 많다. 그저 관광만이 목적이 아닌, 그 지방의 특색이나 역사까지 알게 된다면 다녀온 보람을 더욱 커질 것이다. 얼마 전 서산의 철새도래지인 천수만에 다녀왔다. 충남 서산에는 찾아볼 만한 유적이나 유명한 맛집이 많았다. 먼저 해미읍성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그 지방 사람들이 소풍하러 나오는 멋진 장소가 되었지만, 조선 흥선대원군 시절에는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었다니 가슴이 아팠다. 푸르게 펼쳐진 읍성 안에는 조선 시대 사용했던 신기전 기화차와 화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포즈로 각 문을 지키고 있는 포졸 인형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근처에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드라마 촬영 장소인 유명 떡볶이집도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어느 음식 평론가가 죽기 전에 맛봐야 할 음식으로 서산의 영양 굴밥을 꼽기도 했다니 한 번쯤 찾아가 맛보는 것도 좋겠다. 서산의 여러 곳을 돌아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천수만의 철새 도래지 ‘버드랜드’다. ‘버드랜드’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서산 천수만을 체계적으로 보전 관리하고 체험과 교육 중심의 생태관광 활성화에 주력하고자 조성된 철새 생태공원이다. 천수만으로 철새들이 무리 지어 찾아온다니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환경을 잘 보전해 언제나 철새들이 이곳을 찾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류 해설사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둘러 본 박물관 안은 새의 자취로 가득했다. 벽면에 전시된 수많은 박제 새들을 보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총으로 잡아서 박제했지만, 요즘엔 자연사한 새를 박제해 전시한다는 해설사의 이야기에 그나마 좀 안심했다. 이어 관람한 4D 영상은 정말 신나고 재미있었다. 이전에 극장에서 3D 영화를 봤을 때 바로 눈앞에 영상이 다가오니 마치 영화 속 인물이 된 듯 즐거웠는데, 4D는 실제로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한 동물이 진짜 나를 집어삼킬 듯 다가왔고, 물이 튕기는 장면에선 실제로 우리에게 물이 뿌려졌으며,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또는 세차게 직접 몸에 닿아서 신기하고 즐거웠다. 4D 영화에서는 향기가 나는 장면이면 실제로 관객이 향기를 맡을 수도 있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VR 체험이나 4D 영상이 왜 인기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이날 본 영상은 어미 잃은 뜸부기를 꿩이 거두지만 철새인 뜸부기는 언젠가는 제 엄마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겨울나기로 떠났던 아기뜸부기는 철마다 천수만으로 꿩 엄마를 찾아온다는 내용이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 작품이었다. 또, 아이들에게는 철새에 대한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니 많은 이가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드랜드’의 전망대 망원경을 통해 천수만의 너른 철새도래지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고, 옆쪽으로 숲과 예쁜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영상으로 본 것처럼 이곳의 철새들은 겨울이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났다가 이듬해 다시 고향처럼 이곳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새에게 좋은 환경을 망치지 말고 잘 보존해서 꼭 다시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휴일에 가족끼리 또는 손자손녀를 데리고 ‘버드랜드’를 찾아가 보자. 교육과 소풍의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다.
- 2018-07-0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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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돌고 돌아 소설가 되다, 한보영 MBC 전 복싱 해설위원
-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 2018-07-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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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돌아온다’, 순수의 힘으로 다시 돌아오다
- 연극 ‘돌아온다’가 초연 3년 만에 대학로 무대로 돌아왔다. 미투의 칼바람이 휩쓸어버린 이후 연극계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관객의 발길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다. 연극 ‘돌아온다’의 재공연 소식을 듣고 찾은 혜화동은 조금이나마 다행스런 모습이다. 매진 행진을 이어가며 그리움과 먹먹함으로 수놓았던 연극 ‘돌아온다’. 초연에 이어 색감 따뜻한 영화로 찾아왔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작품 ‘돌아온다’를 잠시 좀 들먹여보도록 하자. 2015년 10월, 지인이 괜찮은 작품이 무대에 올랐으니 같이 관람하자며 혜화동으로 불러냈다. 연극을 보는 나름의 방식이다. 누가 같이 보자고 연락을 해오거나, 공연을 한다며 보러 오라고 하면 본다. 아주 수동적인 자세로 객석에 앉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 그런데 공연장에 끌려들어갔다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팬이 돼서 나온 작품이 바로 극단 필통의 ‘돌아온다’(선욱현 작/정범철 연출)였다. 연극 ‘돌아온다’는 당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해 서울연극제 우수상과 연출상을 휩쓸며 작품성 또한 인정받았다. 무대의 주 배경인 막걸리집에는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온다’라고 쓰인 표구가 걸려 있다. 등장인물 모두 그리움과 기다림이라는 정서를 안고 이곳을 찾는다. 누군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잔 또 한 잔을 기울인다. 하지만 막걸리집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운 상대가 돌아오는 방식은 다들 다르지만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와 서로에게 안긴다. 좋은 작품은 역시 생명력도 강하다 초연을 본 허철 영화감독은 선욱현 작가에게 이 연극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배우 김수로 또한 자신이 연극으로 제작하겠다고 러브콜을 보냈다. 2015년 말 연극 초연에 이어 영화로 제작된 이 작품은 2017년 제41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금상을 받으며 영화로도 성공을 거뒀다. 올봄 배우 김수로의 제안까지 성사돼 재공연에 이르렀다. 초연이 끝남과 동시에 영화 작업, 개봉, 연극 재공연까지 쉼 없이 이어온 작품이 ‘돌아온다’이다. 영화 제작 전 허철 감독은 선욱현 작가에게 “연극에 나온 배우들을 많이 기용하고 연극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독립영화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선 작가는 “상업영화로 만들게 되면 판권료를 훨씬 많이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감독을 만나 그 순수성이 영화로 잘 전달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영화라는 장치에 연극의 느낌과 원형을 그대로 살린 작품이 있었던가? 영화 ‘돌아온다’는 사실적인 색체가 강하면서도 연극과 영화가 스리슬쩍 교차하는 실험영화이기도 했다. 재공연과 관련해 배우 김수로가 제작에 나서면서 작품이 혹시 변색되는 것은 아니냐는 목소리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영화와 TV에서 보여준 김수로의 이미지가 한몫했다. 배우 김수로가 제작을 주도한 재공연. 극단도 달라졌고 극장 또한 달라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연극 역시나 좋다. 초연에 이어 다시 연출을 맡은 정범철 연출가의 뚝심이 빛을 발했다. 막걸리집 주인으로 등장한 대학로의 숨은 연기파 정상훈과 영화배우 강성진이 초연 연기자인 윤상호의 빈자리를 꽉 채웠다. 이전보다 배역을 줄여 무대의 몰입도도 높였다. 스크린이 더 익숙한 김수로와 강성진이 어색했다면 그건 편견일 뿐이다. 특히 김수로는 좋은 작품에 선뜻 손 내밀어 제작에 나섰고 주인공 아닌 배역을 맡아 최선을 다했다. 박수를 쳐줘도 모자라다.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만들어낸 이야기 ‘돌아온다’의 원작자이자 강원도립극단 예술감독인 선욱현 작가는 이 작품을 왜 썼냐는 질문에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입을 뗐다. “어느 순간 제가 아버지한테 너무 불효를 하고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언제인지 아세요? 제가 도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들어오고 나서입니다. 월급 받는 직장인이 되니까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제 가슴에 문학적 화두로 그리움과 기다림이 자리 잡았습니다. 실향민도 아니고 시련을 겪은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그리워할까. 지금도 못 풀었어요.” 공연을 보면서 관객들보다 더 많이 울었다고 고백하는 선 작가다. 재공연 관람 이후 작품 ‘돌아온다’ 전편을 다 본 듯 후련하다. 초연 때 인연이 영화로도 이어져 우리 잡지에 소개한 바 있다. 재공연을 끝으로 마무리 기사를 쓰고 있자니 느낌이 남다르다. 마침 공연을 보던 날 선욱현 작가뿐만 아니라 약속이라도 한 듯 영화팀 배우와 제작진까지 모였다. 제목 때문일까? 돌아온다. 모두 돌아와 만났으니 말이다.
- 2018-05-08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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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봄이 아쉬운 ‘레이디 버드’
- 어느새 벚꽃이 홀랑 져버렸다. 우리 동네가 내세울 것이 별로 없고 환경도 그저 그런 변두리 서민들이 사는 곳이지만, 유일한 자랑이 가로수가 온통 벚꽃으로 되어 있어서 봄날이면 그 화사한 자태로 그 어느 부잣집 동네 부러울 것 없는 풍요로운 때깔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매년 벚꽃이 만발한 열흘에서 보름은 그 기쁨을 만끽하곤 한다. 그런데 올해는 일주일도 안 돼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갑작스러운 이상고온으로 계절을 착각한 벚나무들이 평소보다 4~5일 빠르게 꽃을 피워낼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벚꽃이 피자마자 때맞춰 몰아친 추위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1년을 기다려 겨우 세상에 머리를 내민 여린 꽃들은 그 흔한 벌도 나비도 영접해 보지 못한 채 속절없이 때 이르게 스러져갔다. 그들의 쓸쓸한 낙화와 함께 동네 주민들의 마음도 봄을 잃은 설움에 잠겨버렸다. 우리 인생의 봄도 마냥 따뜻하지는 않다.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해 어린 시절부터 비바람을 맞는 불우한 삶도 있으며 혹은 일찍 핀 벚꽃처럼 스스로 되바라져 자신의 운명을 주체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는 이처럼 인생의 봄날을 맞은 한 소녀의 예민한 좌충우돌 성장기다. 그러나 벚꽃이 예기치 않게 일찍 사그라져도 내년을 기약하듯 이 소녀도 치열하지만 아름답게 성장한다. 이 영화의 주된 동력은 사춘기 소녀와 엄마 간의 갈등이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사는 평범한 가정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신의 환경을 부정하고 뉴욕을 꿈꾼다. 그래서 누추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레이디 버드로 작명한다. 물론 새장을 탈출하고자 하는 염원이다. 그녀는 세상과 불화하고 그 모든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푼다. 엄마(로리 멧칼프)와의 싸움은 오히려 그녀의 은밀한 에너지원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전개는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익숙한 소재를 익숙지 않게 빚어내는 힘은 감독의 능력이다. 이 영화가 대화 중심으로 진행됨에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맛깔 나는 대사와 치고 빠지는 장면의 리듬감이 뛰어난 때문이다. 결국, 좋은 영화의 조건은 소재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고전적인 예술성에 있다. 독립영화만 하다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감독 그레타 거윅의 능력이 놀랍다. 환경에 대한 불만을 엄마에 대한 반항으로 채워가던 크리스틴은 주변 친구들의 삶도 그리 화려하지 않음을 보며 차츰 자신과 화해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날아오르듯 고향을 떠나면서 ‘레이디 버드’가 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본래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레이디 버드를 주문처럼 되뇌던 그녀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은 것이다. 다시 고향 새크라멘토를 찾은 그녀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런 귀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된 의지였음을 느끼고 드디어 가족에게도 화해의 손을 내민다. 감독은 엄마가 홀로 운전하며 새크라멘토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신을, 성인이 된 크리스틴이 거의 똑같이 반복하는 모습을 통해 둘은 나무와 바닥에 떨어진 꽃의 관계가 아니라 한 뿌리임을 환기한다. 성장통을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지만, 이 영화는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여성 특유의 따스한 시선으로 갈등과 아픔을 감싸면서 소중한 것들을 일깨우는 솜씨가 초짜 감독을 골든글로브(작품상, 여우주연상)로 인도했다. 우리 모두 지나왔던 그 시간을 회상하며 이미 그 시절에서 한참 멀어진 딸과 영화 감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 찬바람이 불고 얼마 남지 않은 벚꽃 잎이 시나브로 흩어진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 2018-04-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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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맛있는 인생(Second Half)’
- 이런 영화가 있는 줄 몰랐다. 그리 대단한 흥행을 한 것도 아니고 마케팅도 열심히 한 것 같지 않다. 저예산 영화라서 그랬을지 모른다. 그런데 묘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의 자연스런 연기와 함께 마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조성규 감독 작품이다. 주인공인 영화제작자 조 대표 역으로 류승우, 젊은 여대생 민아 역으로 신인 배우 이솜이 나온다. 한때는 잘나가던 40대 영화제작자 조 대표는 최근 만드는 영화마다 망한다. 거래처 전화에 시달리다가 훌쩍 바다가 보고 싶어 차를 몰고 강릉으로 혼자 향한다. 무작정 떠난 것이다. 호텔을 정하고 레스토랑에서 차 한잔 하려는데 서빙하는 한 아르바이트 여대생에게 전류가 흐르듯 시선이 꽂힌다. 긴 생머리에 청순한 얼굴, 날씬한 몸매의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그런데 여대생이 조 대표가 유명한 영화제작자라는 것을 먼저 알아본다. 더구나 팬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쉬는 날이라며 강릉 가이드를 자청한다. 돌이켜보니 20년 전 친구들과 강릉에 왔을 때 묵었던 민박집에 또래의 딸이 있었다. 당시 친구들과 누가 그녀와 잘 수 있는지 내기를 했고, 조 대표가 그녀를 유혹해 하룻밤 정사를 나누곤 다음 날 새벽 서울로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둘은 강릉 일대를 다니며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아름다운 여대생과 중년 남자의 꿈같은 여행이었다. 유명한 명소와 맛집, 커피숍 등을 다니며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눈다. 조 대표는 민아에게 묘한 떨림과 끌림을 느낀다. 20년 전 하룻밤을 나눈 그녀의 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조 대표는 민아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점점 민아가 자기 딸이라는 심증을 굳힌다. 그리고 자책감에 시달린다. 드디어 여행 마지막 날, 둘은 어두운 바닷가에 앉아 서로 고백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조 대표는 20년 전 일을 고백하려고 했지만 민아가 먼저 고백하겠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가 바로 조 대표라고 말한다. 충격적인 그녀의 고백에 잠시 당황하던 조 대표는 돌아서서 그 길로 차를 몰고 서울로 돌아온다. 남자들에게는 조 대표와 비슷한 죄책감이 있다. 젊은 시절은 이성보다는 본능이 더 강할 때다. 여자들은 혹시 이 남자는 뭔가 다를까 하고 받아들이지만 결국에는 남자들은 다 똑같다는 말을 한다. 민아도 얼마 전까지 사귀던 또래 남자가 있었지만 헤어지고 보니 역시 똑같더라는 말을 한다. 영화 제목을 왜 ‘맛있는 인생’으로 지었을까 의아했다. 영어로 번역한 ‘Second Half'는 ’후반전‘이란 의미다. 40대에 인생 후반전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곰곰 생각해볼 나이다.
- 2018-01-0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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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쎈 영화 전성시대에 숨 좀 돌리고 본 영화 ‘돌아온다’
-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전만 해도 다양한 작품이 상영관에 걸렸다. 규모가 크건 작건 작품성이 입소문을 타면 영화관 속으로 관객이 파도처럼 빨려 들어갔다. 멀티플렉스라... 동네 구석구석 들어와 영화 보는 횟수를 늘렸지만 작고 소박한 영화가 설 자리를 빼앗고 말았다.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사람이 갈 곳 없는 지금의 현실. 그런데 이 척박한 영화 환경을 비집고 보석 같은 영화 한편이 개봉했다. 바로 영화 ‘돌아온다’이다. 정말 그 곳에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올까? 영화 ‘돌아온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담다 영화 ‘돌아온다’(감독 허철/제작 꿈길 제작소)는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온다’라고 쓰인 표구가 걸려있는 시골의 한 막걸리 집이 배경이다. 주인공을 비롯해 등장하는 인물마다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어머니를 찾는 스님과 아들을 찾는 노모, 집 떠난 부인을 기다리는 남자, 군대 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모두가 하나같이 막걸리를 들이키는 이유가 있다. 매일 이곳에 모여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염원하며 한 잔, 두 잔 막걸리 잔을 채우던 어느 날. 묘한 분위기의 주영(손수현)이 비밀을 감추고 나타나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었다 뭉쳤다를 반복한다. 영화 ‘돌아온다’는 원래 연극이 원작이다. 2015년 무대에 올랐던 연극 ‘돌아온다’(원작 선욱현/연출 정범철/극단 필통)가 허철 감독의 마음을 흔들었다. 수차례 공연장에 찾아가 연극을 보는 매 순간마다 눈물이 흘렀다고. 허철 감독은 이런 감정의 소요가 생기는 근원이 뭘까 고민하다 연극‘돌아온다’를 영화화하기에 이르렀다.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 김유석도 지난 6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친구인 허철 감독이 내민 ‘돌아온다’의 시나리오를 읽다가 세 번이나 눈물이 터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영화 ‘돌아온다’는 2016년 6월에 촬영해 올해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어 지난 9월, 제41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과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일종의 실험극이다 연극‘돌아온다’를 본 관객이 있다면 흥미로운 점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는 주인공인 김유석과 손수현 이외 주요 인물이 원작 연극에 출연한 배우라는 점이다. 스님을 연기한 배우 리우진, 노모에 김곽경희, 이황의, 강유미, 정연심 등이 원작에서와 같은 역할로 영화에 등장한다. 연극이 영화화 된 작품이 지금까지 있어 왔지만 원작의 주요 배역을 똑같이 기용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덕혜옹주’나 ‘미스사이공’같이 공연 실황을 영화처럼 편집, 제작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영상으로 표현해야하기 때문에 영상에 맞는 배역을 대부분 찾아 나서지만 허철 감독은 연기 잘하는 기존의 배우를 제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연기파답게 영화에도 잘 녹아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데 연극배우들이 큰공을 세웠다. 두 번째는 배경과 장면을 마치 연극처럼 배치했다는 점이다. 허철 감독의 실험 정신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이야기 대부분은 막걸리 집에서 시작해 다른 시간과 장소 혹은 장면으로 이동한다. 사건이 해결되고 다시 막걸리 집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이야기로 사건이 번지고 말이다. 혹은 장소를 이동하는 대신 장소의 성격을 변화시켜 활기를 북돋거나 공간에 새로운 성격을 불어넣기도 한다. 새로운 손님이 오지 않는 막걸리 집은 적막하고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막걸리잔 마주치는 소리와 사람들이 조용조용하는 말소리가 전부. 그런데 이곳에 주영이 들어와 일하면서 SNS에 막걸리집을 홍보한다. 이후 막걸리집이 지역의 맛집으로 소개돼 조용했던 장소가 시장만큼 떠들썩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성격이 바뀌기도 한다. 하나의 무대를 마치 여러 장소처럼 이용하는 연극의 기법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셋째, 이 영화가 연극에서 왔든, 관객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실험 정신이 깃들어져 있든 ‘돌아온다’를 보고 나면 최근 영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후련함과 시원함이 느껴진다. 잠시 잊고 있던 순수를 찾은 것과 흡사하다. 혹시 잔혹하게 피가 철철 흐르는 장면이 보기 싫고, 온 몸을 휘감을 듯 한 대형 SF영화에 질린 관객이 있다면 이 겨울, 잔잔한 영화에 젖어드는 것은 어떨까. 끝으로, 영화 ‘돌아온다’의 허철 감독이 극적인 장면에서 카메오 출연을 한다는 스포일러를 남긴다. 아는 사람만의 깨알 재미이니 눈 부릅뜨고 찾아보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 2017-12-1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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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텔링의 공통 소재
- 담배 ‘말보로’는 'Men Always Love Because Of Romance Over'의 머리글자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처음에 말보로가 필터 담배를 만들었을 때 필터 담배는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을 만들었는데 그게 성공해서 말보로고 오늘날 세계적인 담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두 남녀가 서로 사랑했는데 집안의 반대로 여자는 가난한 남자를 버렸다는 것이다. 남자가 찾아 간 날 여자는 내일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하기에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이라도 같이 있자고 했다. 그 담배가 맛이 매우 썼을 것이다. 그래서 필터 있는 담배를 만들고 필터담배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자 남자는 돈방석에 앉았다. 그 후 그 여자를 다시 만낫는데 여자는 망하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남자는 이제라도 당신이 청혼하면 받아주겠다는 줄거리로 스토리텔링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러브 스토리를 좋아하는 것 같다. ‘폭풍의 언덕’에서도 고아소년 히스클리프는 그 집 딸 캐시와 사랑에 빠지지만, 캐시는 대저택의 아들에게 시집가고 온갖 구박을 다 받다가 그 집을 나온다. 나중에 성공하여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 미국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사랑하는 여인을 못 잊어 강 건너 대저택에서 밤마다 파티를 열면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젊었을 때는 돈이 없어 그녀를 차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돈이 생기자 다시 사랑하던 여인을 못 잊어 온 것이다. 에서는 검프가 사랑하는 여인 제니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검프를 떠나지만, 결국 병들어 포레스트 검프에게 돌아온다. 검프가 성공했기 때문에 보기 좋다. 영화 서는 젊은 말단 직원 바비는 사장인 삼촌의 여비서 보니를 사랑하지만, 보니는 돈 있는 삼촌을 택한다. 나중에 바비가 성공하자 보니와 다시 만난다. 이런 것들을 보면 사람들에게 감명을 줄만한 스토리텔링에는 공통 소재가 보인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이별, 엔딩은 다시 만난다는 공통소재이다. 순탄하면 이야기 거리가 안 된다. 불우해서 불행하게도 이별을 하게 되고 돈을 벌어 반전에 성공해야 이야기 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삶을 살아 온 사람들이다.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 또는 젊었을 때 돈이 없어 가난하거나 불우했던 사람들이 성공한 이야기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책을 보면서, 또는 영화를 보면서도 내 얘기처럼 주인공 편이 되어 주인공에게 푹 빠져 든다.
- 2017-09-2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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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레스트 검프’의 여자, 제니
- 영화 는 몇 번을 봐도 재미있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지루하지 않다. 포레스트 검프로 나오는 톰 행크스가 천연덕스럽게 바보 연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 영화에 포레스트 검프가 사랑하는 여자, 제니가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아 발레도 하고 기타 치며 노래도 하고 운동권에도 들어가서 활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자이다. 포레스트는 그녀와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고 첫사랑이었지만, 그녀를 잡지 못한다. 살면서 몇 번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는 떠난다. 포레스트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연락도 안 했다. 나중에 다시 포레스트에게 돌아온다. 돌아온 탕자이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곧 죽을 운명이다. 결국 제니는 포레스트의 아들을 남기고 포레스트의 품에 안겨 편안히 세상을 떠난다. 포레스트는 어린 시절 제니와 자주 가서 놀던 자기 집 큰 나무 밑에 제니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가장 바람직한 죽음이다. 제니와 포레스트의 사랑을 보면 제니는 사람들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고 갈채 받기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포레스트는 좋은 사람이지만, 남자로서의 매력도, 짜릿한 삶의 재미도 없는 사람이라 인생을 같이 할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 그러나 말년에는 변함없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포레스트에게 돌아온다. 남녀의 사랑과 결합은 참으로 미묘하다. 한 사람은 좋아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부 조합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포레스트는 사람은 운명대로 살아야 하는 건지, 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살아야 하는지 갈등한다. 둘 다 맞는다고 결론짓는다. 제니는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여러 분야에 도전하고 인생을 만끽한 사람이다. 인생은 현재에서 즐기는 것이 가장 남는 것이라며 살았다. 자기 할 것 다 하고 그랬는데도 다행히 기다려준 포레스트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다. 평범한 남자들은 대부분 포레스트 스타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잘 난 여자를 잡을 능력이 없다. 잘 난 여자는 주변에 남자들이 들끓어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녀를 쟁취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잘 난 여자는 그런 것을 즐긴다. 남들은 댄스 계가 화려하다고 보고 있지만, 댄스 계도 마찬가지로 부조화가 심하게 나타나는 세계이다. 예쁘고 몸매 좋고 춤 잘 추는 여자는 제니 스타일이다. 남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어 그것을 즐기거나 잘난 남자가 채 가서 독점한다. 나머지 남자들은 포레스트 신세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어떨까? 춤 잘 추고 화려한 경력까지 갖추고 있으면 주변의 인기가 높다. 늘 여자들이 들끓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여자에게 국한하면 다른 여자들은 외면한다. 그래서 불가근불가원 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여자를 만났다면 올인 해야 한다. 그러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자가 볼 때 남들 앞에서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고 인기 있는 것은 좋지만, 막상 반려자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니 같은 남자로 보는 것이다. 미국도 아니고 한국에서는 제니 같은 여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 2017-09-2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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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돌아온다> 주인공, 배우 김유석 ‘이 남자, 당신 인생에 스며들다’
- 사람이 서로 알아갈 때 인사라는 과정을 통한다. 잠깐 동안의 첫인상. 목소리에서 기운을 느낀다. 표정을 읽는다. 차차 친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있었나 싶다. 마음은 허락한 적 없는데 친숙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없다. 반칙처럼 이름도 모르고 “나, 이 사람 알아!”를 외친 사람 손들어보시라. 이제 알 때도 됐다. 그의 이름 석 자 김유석(金有碩), 배우 김유석. 안방극장 터줏대감으로 익숙한 그가 은막(銀幕)에 모습을 드러냈다. 7년 만에… 돌아왔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배우다 친해질 기회를 언제 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무 친숙하다. 이름 대면 알만 한 배우만큼 참 가깝다.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봤다. “배우 김유석을 알아요?” 고개를 갸우뚱함과 동시에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면 안다고 백이면 백 대답한다. 사극에서 봤다던가, 찌질(?)한 연기가 좋았다던가. 연기 경력 20년이 훌쩍 넘은 배우 김유석은 이름보다는 얼굴 자체가 이름이고 또 얼굴인 셈. 사람들 대부분이 “어!” 하며 연예인으로 알아차리지만 세 단계쯤은 거쳐야 저 배우가 누군지 감을 잡는다. “제가 나온 작품을 재밌게 보신 분이 길을 지나다가 어디서 봤죠? 초등학교? 우리 동네? 아! 대학교? 연예인 누구 닮았는데? 그러면 제가 ‘그게 저인데요(웃음)’ 그래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별하게 눈에 확 띄지는 않는데 뭔가는 있었고. 그렇게 기억해주시는 것 같아요. 물론 좋죠. 제가 누군지 그 사람이 알고 나면 ‘정말 그 연기 좋았어요’, ‘팬이에요’라고 말씀해주세요.” 배우란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대중 앞에 선 그들은 사랑받기 시작하면 자리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배우 김유석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살아왔겠지만 집중해보거나 느낀 적이 없다. 그저 어느 샌가 스며서 젖어버렸다. 어디에도 흔치 않다. 안정적이고 기복 없이 늘 있는 배우 말이다. “등산 같아요. 내가 나를 돌이켜보면. 저 위까지 가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밟아서 올라야 하잖아요? 단 한 번도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쑥 하고 올라간 적 없어요. 그냥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걷다가 ‘어, 좀 올라왔네’ 그래요. 한참 아래 있던 친구가 갑자기 올라가는 것도 보고 말이죠.” 고등학교 때까지 아무런 꿈이 없던 김유석은 우연히 본 연극 한 편으로 배우가 됐다. 대단한 성공 스토리는 없지만 행복한 삶의 형태 속에서 다른 것 안 하고 원하는 연기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제가 배우를 하면서 한 가지 색깔만 사용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일반적으로 배우를 하면 비슷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잖아요. 제가 안정적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꽤 독특한 연기도 했어요. 대박 난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운 거죠(웃음)” 영화 , 스크린으로 돌아오다 김유석을 처음 만난 장소는 4월 말 전주국제영화제 현장이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 (허철 감독)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첫 상견례를 가졌다. 김유석은 TV 탤런트로서 인상이 깊지만 데뷔 초 김기덕과 홍상수의 대표 영화에 출연해 주목 받았다. 2000년대 후반까지 틈틈이 독립영화에 출연하다 한동안 TV 드라마에만 몰두했다. 마지막 영화 이후 7년 만에 선택한, 아니 선택받은(?) 작품이 바로 이다. “이 영화를 감독한 허철이와는 사회 친구예요. 지금은 정치를 하지만 민변이던 송호창, 진선미 의원, 한지승 영화 감독 등이랑 어울려 친한데 지승이가 철이를 데리고 왔어요. 10년 전쯤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극영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다큐멘터리를 하던 친구가요. 어떤 연극을 봤는데 500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라더군요.” 허철 감독의 말에 김유석은 그저 친구가 잘되기만을 바랐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교수 허철이 한국에 와서 갖은 상황 속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고 뚝심 있게 영화 만드는 허철 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영화를 만들면 내가 뭐든지 할게. 필요한 거 있으면 묻지도 말고 시키기만 해. 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할게. 그냥 써. 그랬더니 ‘네가 그냥 그걸 해야겠다’ 그러더군요.” 허철 감독은 김유석에게 의 주인공인 변사장 역을 줬다. 이미 감독에게 선택당했던 것이다. 예술은 ‘얘’랑 ‘술’ 먹는 거 사실 김유석에게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예술영화는 이제 그만. 데뷔 초에 예술영화로 시작했더니 정말 대안영화나 독립영화 아이콘처럼 제가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예술은 ‘얘’와 ‘술’ 먹는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좀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고 편한 영화, 한마디로 흥행이 되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은 시나리오나 좀 보자고 말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정하고 읽고 또 읽다가 세 번이나 눈물이 터졌다. 순간적인 감정일지 몰라서 다음 날 또 읽었는데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관객들도 같은 감정을 느끼면 영화가 잘될 거란 확신이 생겼다. 개런티에 대한 생각은 애초에 접고 시작했다. “몇천만원으로 영화를 만드는데요, 무슨. 당연히 그래야 했어요. 영화를 만드는 것만도 고마운 거잖아요. 작년 3월에 만나 미팅하고 6월에 촬영 들어갔습니다. 영화 찍는 내내 정말…정말 행복했습니다.” 최근 방송 드라마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사전 제작을 도입했지만 모든 제작 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다. 대본을 받아 외우기가 바쁘게 빨리 찍어 내보내는 속도전의 연속이다. 줄곧 브라운관에서만 활동했던 김유석은 영화 촬영 하는 동안 기운을 얻고 더욱 특별한 경험도 했다.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제 나름 영화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영화 팀이 주는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영화 찍는 내내 허철 감독을 다시 알게 됐어요. 영화 현장에서 철이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정석대로 잘 배운 감독님이었습니다. 흔히 보지 않았던 노하우를 쏟아내는 그런 감독이었죠.”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연기 후배들은 김유석이 팀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며 입을 모았다. 이에 손사래를 치며 함께한 후배들에게 고마움을 돌렸다. 이 영화는 연극 를 영화화한 것으로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주역을 맡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허철 감독이 연극을 보고 그 배우들과 작품 만들겠다고 시작한 영화잖아요. 내가 아니고 연극배우들이 중심이죠. 연극에도 출연했던 리우진, 정연심, 이황의, 김곽경희, 강유미 같은 배우가 탄탄하게 잡고 있었어요. 내 나이가 조금 많은 관계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같이 술 한잔 마시고 그러는 거죠. 제가 슬쩍 낀 건데 이질감 안 느끼고 받아줘서 고맙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 는 전회 매진을 기록했고, 영화계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를 가지고 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것도 뜻깊었다. “영화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어요. 어느 순간 드라마 방송만 하다 보니 영화가 굉장한 동경의 대상이 돼 있더라고요. 심지어 영화하는 친한 친구도 저를 방송 연기자로만 생각해서 당황한 적이 있어요.” 애써 외면했다. 영화제나 시상식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좋은 한국 영화가 개봉돼도 찾아보지 않았다. 영화제에도 가지 않았다. 이번 영화를 찍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TV로 챙겨봤다. “무명배우 33명의 축하공연이 인상적이었어요. 시상식에 앉아 있는 배우들이 모두 울더라고요. 배우 심정이 다 그런 거 같아요. 충분히 재능 있는 연극배우나, 안정적이지만 뜨지 못한 배우나, 연기를 막 시작한 배우나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오빠냐, 아저씨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특히 한국사람) 상대방 이름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나이에 대해 궁금해한다. 새파랗게 어려보이는 김유석이지만 사실 반백(?)을 넘긴 중년의 남자.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외국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가 영어로 “My first son is twenty years old(내 큰아들은 스무 살입니다)”라고 했을 때 ‘twenty(스무 살)’란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됐다. 너무나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오빠로 느껴야 할지, 아저씨라 해야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오십? 네? 물리적인 나이는 그렇지만 나의 생각과 신체적인 나이는 아닌 거 같아요. 가끔 제 친구들을 보면 놀라요(웃음). 언제부터 그랬냐면 스물일곱 살 때 러시아에 유학 가서 서른두 살에 왔어요. 그리고 서른세 살에 데뷔를 했는데 지금도 그때랑 마음이 똑같아요.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7년 만에 영화를 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금방 갔나. 큰아들 키가 제 키를 훌쩍 넘었는데 이렇게 애가 컸나 싶죠.” 데뷔 초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이 사실 별로 없다. 신체 중 노화가 빠른 것 중에 목소리가 있다는데 예전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젊은 외모에 중년의 멋이 가미된 정도.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젊음을 유지하기보다 잘 늙고 싶은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런 노력 중 하나가 불편한 것은 안 해요. 불편한 사람과 술 안 마셔요. 제가 술을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랑 술을 먹으면 한두 잔에 취하다 체해요. 물론 피할 수 없을 때는 버텨보지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아요.” 김유석은 어느 순간 살아온 모습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기길 바란다고 했다. 여태까지 믿고 살아왔던 삶이나 연기가 퇴색, 변색, 탈색되지 않으면 좋겠단다. “그렇다고 어떻게 늙고 싶은지가 지금 당장의 고민은 아닙니다. 할 게 많아서 그런 고민할 여지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나이 먹다 보면 자기가 바뀌는 모습을 못 느끼더라고요. 나도 저럴까 걱정은 하죠. 편안해지고 옛것 얘기하고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거 말입니다.” 중년의 배우, 나이 앞에 유연해지다 언제쯤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극 중 배역에 녹을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다고 했다. “배우는 자기 나이를 중심으로 위아래 열 살 정도는 연기할 수 있어야 해요. 나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또한 이번 영화처럼 나이 많은 연기도 가능하고 또 젊은 역할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웃음)” 혹시 인생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을까 싶어 물어봤다. 지금까지 못해본 캐릭터를 연기해보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단다. 마흔을 넘겨보니 대충이라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고 채우는 것만큼 비워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연기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냥 소소하게 놀고 술 마시고 힐링하고 비우는 시간이 필요해요. 비워야 또 무엇이 들어올 수 있어요. 가끔씩 작품이 끝나면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절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오거든요.” 김유석은 배우로서 일상에 대한 호기심,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식지 않길 바란다. “제가 맡는 캐릭터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요.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이 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보내고 싶습니다.”
- 2017-06-05 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