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봄이 아쉬운 ‘레이디 버드’

기사입력 2018-04-19 15:21 기사수정 2018-04-19 15:21

어느새 벚꽃이 홀랑 져버렸다. 우리 동네가 내세울 것이 별로 없고 환경도 그저 그런 변두리 서민들이 사는 곳이지만, 유일한 자랑이 가로수가 온통 벚꽃으로 되어 있어서 봄날이면 그 화사한 자태로 그 어느 부잣집 동네 부러울 것 없는 풍요로운 때깔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매년 벚꽃이 만발한 열흘에서 보름은 그 기쁨을 만끽하곤 한다. 그런데 올해는 일주일도 안 돼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갑작스러운 이상고온으로 계절을 착각한 벚나무들이 평소보다 4~5일 빠르게 꽃을 피워낼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벚꽃이 피자마자 때맞춰 몰아친 추위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1년을 기다려 겨우 세상에 머리를 내민 여린 꽃들은 그 흔한 벌도 나비도 영접해 보지 못한 채 속절없이 때 이르게 스러져갔다. 그들의 쓸쓸한 낙화와 함께 동네 주민들의 마음도 봄을 잃은 설움에 잠겨버렸다.

우리 인생의 봄도 마냥 따뜻하지는 않다.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해 어린 시절부터 비바람을 맞는 불우한 삶도 있으며 혹은 일찍 핀 벚꽃처럼 스스로 되바라져 자신의 운명을 주체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이처럼 인생의 봄날을 맞은 한 소녀의 예민한 좌충우돌 성장기다. 그러나 벚꽃이 예기치 않게 일찍 사그라져도 내년을 기약하듯 이 소녀도 치열하지만 아름답게 성장한다.

이 영화의 주된 동력은 사춘기 소녀와 엄마 간의 갈등이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사는 평범한 가정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신의 환경을 부정하고 뉴욕을 꿈꾼다. 그래서 누추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레이디 버드로 작명한다. 물론 새장을 탈출하고자 하는 염원이다. 그녀는 세상과 불화하고 그 모든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푼다. 엄마(로리 멧칼프)와의 싸움은 오히려 그녀의 은밀한 에너지원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전개는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익숙한 소재를 익숙지 않게 빚어내는 힘은 감독의 능력이다. 이 영화가 대화 중심으로 진행됨에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맛깔 나는 대사와 치고 빠지는 장면의 리듬감이 뛰어난 때문이다. 결국, 좋은 영화의 조건은 소재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고전적인 예술성에 있다. 독립영화만 하다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감독 그레타 거윅의 능력이 놀랍다.

환경에 대한 불만을 엄마에 대한 반항으로 채워가던 크리스틴은 주변 친구들의 삶도 그리 화려하지 않음을 보며 차츰 자신과 화해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날아오르듯 고향을 떠나면서 ‘레이디 버드’가 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본래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레이디 버드를 주문처럼 되뇌던 그녀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은 것이다.

다시 고향 새크라멘토를 찾은 그녀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런 귀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된 의지였음을 느끼고 드디어 가족에게도 화해의 손을 내민다. 감독은 엄마가 홀로 운전하며 새크라멘토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신을, 성인이 된 크리스틴이 거의 똑같이 반복하는 모습을 통해 둘은 나무와 바닥에 떨어진 꽃의 관계가 아니라 한 뿌리임을 환기한다.

성장통을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지만, 이 영화는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여성 특유의 따스한 시선으로 갈등과 아픔을 감싸면서 소중한 것들을 일깨우는 솜씨가 초짜 감독을 골든글로브(작품상, 여우주연상)로 인도했다.

우리 모두 지나왔던 그 시간을 회상하며 이미 그 시절에서 한참 멀어진 딸과 영화 감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 찬바람이 불고 얼마 남지 않은 벚꽃 잎이 시나브로 흩어진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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