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늙어가는 이들을 만나면 세상이 참 고와 보입니다. 늙음 속에 낡음이 있지 않고 이채로운 새로움이 있습니다. 험한 한세상 곱디곱게 살아온 이들은 늙어도 낡지 않습니다. 늙음과 낡음은 글자로는 불과 한 획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 품은 뜻은 남북의 극지(極地)만큼이나 서로 멉니다. 늙음과 낡음이 함께 만나면 허무의 절망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늙음이 곧 낡음뿐이라면, 삶은 곧 죽어감에 다름 아닙니다. 낡은 것 꼭 거머쥔 주먹을 종내 펴지 못해 너저분한 구멍에서 손을 빼내지 못하는 노추(老醜), 세차게 불어오는 시대의 새 바람을 눈 질끈 감고 애써 거스르는 어리석음… ‘수구(守舊) 먹통’이라 조롱당해도 쌉니다. 늙은 나이에도 젊은 마음이 있습니다. 옛것과 새것을 한품에 아우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은은한 지혜입니다. 보수이니 진보이니 하는 어설픈 잣대를 들고 함부로 폄훼의 혀끝을 놀릴 수 없습니다. 연면히 흘러온 역사의 가치, 애환(哀歡)의 삶 속에 켜켜이 박힌 연륜의 무게를 ‘참을 수 없는 젊음의 가벼움’으로 감히 비웃지 못합니다. 젊은 나이에도 낡은 마음이 있습니다. 도그마에 사로잡힌 젊음, 현란한 이벤트에 넋이 빠져 우상의 상징 조작에 스스로를 묶어버린 젊음, 오래 묵혀진 삶의 지혜에 두 귀 꽉 막아버린 젊음이라면, 나이는 젊었어도 낡은 인격입니다.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한갓 정신적 노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직된 분별의 이념에 묶이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막히고 닫힌 젊음이나 낡고 닳아빠진 늙음에게는 진보도 보수도, 개혁도 전통도 모두 허위의 우상일 뿐입니다. 우상이 약속하는 자유 속에는 흐려진 노안(老眼)이나 철없이 젊은 눈이 쉬 알아채지 못하는 새로운 억압 장치의 속임수가 감춰져 있습니다. ‘늙어도 낡지 않는 삶’은 나날이 신선합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과 인격은 날마다 경이롭습니다. 껍데기 진보보다 더 앞선 깨우침, 입술의 개혁보다 더 싱그러운 에너지가 삶의 물길에 풍성하게 출렁입니다. 겉은 낡아가도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아름다운 늙음이요, 겉이 늙어갈수록 속은 더욱 낡아가는 것이 추한 늙음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이미 있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지금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니, 신은 지나간 것을 다시 찾는다.”(구약 전도서) 지혜로운 연륜의 가르침입니다. 기껏해야 시대의 한 단면을 서로 찢어 피 터지게 영역 다툼하는 보수와 진보의 칼날들을 유장(悠長)한 역사의 물줄기는 한낱 웃음거리로 휩쓸어갈 따름입니다.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보수로 쇠락하고, 오늘의 보수가 내일엔 개혁의 새 날갯짓을 하다가 어느새 다시금 끝 모를 수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역사의 눈길은 숱하게 지켜봐 왔습니다. 아니, 지금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역사를 들먹이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서로의 덧없는 삿대질을….
“가장 낡은 것 속에 가장 새로운 것이 있다.” 장장 16년에 걸쳐 티베트 고원 라다크 마을의 원시적 삶을 몸소 체험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 여사가 쓴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의 주제입니다. 머나먼 과거(ancient)를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future)와 합쳐놓은 이 책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과거와 미래의 두 시간적 영역을 하나의 장(場)으로 엮어낸 우주적 통찰입니다.
나이 먹는 일 겁내지 않는다
“라다크 사람들은 나이 먹는 일을 겁내지 않는다. 삶의 각 단계는 그 나름대로 각기 좋은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늙어도 낡지 않는 지혜를 라다크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옛 지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나는 것마다 옛것이 아니니, 어찌 빨리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所遇無故物 焉得不速老).” 송나라 때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실린 왕효백(王孝伯)의 글입니다.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옛것이 아니라 새것’이라는 말이니, 이런 당착(撞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묵혀진 옛것들 속에 오롯이 녹아 있는 근원적인 삶의 바탕자리를 되찾는 일이야말로 ‘오래된 새로움’(The ancient newness), 그 역설의 비의(秘義)일 수 있습니다.
현대의 새로운 철학들이 수천 년 전의 노장(老莊)사상에서 신선한 깨달음을 얻고, 까마득한 천지창조의 옛일을 기록한 성서가 세계의 종말(終末)을 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는 이유입니다. “젊음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뜻한다.”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이 노래하는 청춘(youth)입니다. 옛것이 늘 옛것 아니고 새것이 언제나 새것 아니니, 서로 다툰들 무슨 보람 있으랴. 사랑으로 서로 감싸 안느니만 못한 것을….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 또 먹으면 더 늙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네들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낡아가는 것입니다. 새해를 보지 못한 채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이가 많습니다. 저들이 그토록 바라다가 끝내 만나지 못한 새해를 우리가 어찌 탄식하며 어영부영 맞을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삶을 탄식으로 맞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낡아가는 일일 터…. 늙음은 은총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 감사가 늙어도 낡지 않는 비결입니다. 늙음과 낡음… 글자 한 획의 차이가 삶의 미추(美醜)를, 지혜와 어리석음을 가릅니다. 글자 한 획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삶이 다르고, 인격이 다릅니다.
대구 청라언덕으로 가는 길에 가곡 ‘동무생각’을 흥얼거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어릴 적 배운 노래인데도 노랫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근대 풍경을 묘사한 벽화 골목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났다. 정원으로 가꾼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 주택 세 채가 그림처럼 자리했다. 청라언덕은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다웠다.
걷기 코스
동대구역▶ 버스▶동산 청라언덕▶ 3·1만세운동길 계단▶ 계산성당▶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마당깊은집▶ 교남YMCA▶ 대구기독교역사과(구 제일교회)▶ 약령시한의약박물관▶ 진골목(종로)▶ 화교협회(화교소학교)▶버스▶ 김광석골목
청라언덕에서 부르는 연가
1890년대 조선에 들어온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은 동산언덕을 사들여 주택, 교회, 병원을 지었다. 푸른 담쟁이넝쿨이 붉은 벽돌로 지은 주택을 휘감았다. 대구읍성 동쪽 언덕이었던 동산은 이때부터 푸를 靑(청)과 담쟁이 蘿(라) 자를 써 ‘청라언덕’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1910년경 선교사들이 지은 서양 주택 세 채가 남아 있다. 선교사 이름을 딴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이 그것. 미국식 방갈로 형태로 지은 주택 둘레에 나무가 우거진 정원과 산책로를 조성해 이국적 정취를 더했다. 이 건물들은 각각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0년대 전후의 서양 의료기기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 3·1운동 역사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챔니스 주택과 블레어 주택 사이에서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1900~1986)이 곡을 붙인 ‘동무생각’ 노래비를 찾았다. 이 노래에 작곡가의 러브 스토리가 담겨 있을 줄이야. 박태준이 고교생 시절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훗날 이 사연을 들은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을 써줬다고 한다. ‘동무생각’의 ‘동무’는 동성 친구가 아닌 이성이었던 것.
청라언덕에서 계산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3·1만세운동길 계단을 내려간다. 좁고 가파른 이 계단은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 당시 고교생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집결지로 이동했던 통로였다. 계단 중간쯤에 멈춰 서니 가로수 위로 우뚝 솟은 계산성당 쌍탑이 보인다.
대구의 예술가를 만나는 골목길
계단을 내려와 큰길을 건너면 곧 계산성당 앞이다. 계산성당은 100여 년 동안 이 터를 수호하듯 하늘을 향해 뾰족한 쌍탑을 얹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외국인 여행자들 눈에도 멋있어 보이는지 성당을 배경 삼아 기념 촬영을 하느라 분주하다.
성당 뒤쪽에는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운동가 서상돈(1850~1913)의 고택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상화는 1934년부터 1943년 사망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면서 수많은 항일 시를 남겼다. 그가 해방된 조국을 보았다면 자신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대한 답시를 짓지 않았을까.
두 고택 앞을 지나는 골목에는 시인 이상화, 소설가 현진건, 화가 이인성 등 대구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예술가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근 이 골목에 한국전쟁 직후 대구를 배경으로 한, 한 소년의 성장소설 ‘마당 깊은 집’(1988)의 문학체험공간이 들어섰다. 이 소설은 김원일(1942~)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데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곳에서 5분 정도 걸으면 3·1만세운동 때 주요 지도자들이 회의했던 대구 구 교남YMCA 회관과 1893년에 지은 대구기독교역사관(구 대구제일교회)을 만난다. 모두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건축물이다.
한약재 향 머금은 약전골목
대구기독교역사관 옆에는 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 자리했다. 2층에서는 사상체질 진단, 무료 한방차 시음, 족욕 체험, 한방비누 만들기 등의 다채로운 한방 체험을 할 수 있다. 한의약박물관 골목 일대는 한약재상이 밀집한 약전골목이다. 카페에서도 한방차를 판다. 이 골목에선 늘 한약재를 달이는 냄새가 달달하게 풍겨온다.
약전골목을 빠져나와 조선시대 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 보러 한양 가던 길, 영남대로를 걷는다. 대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약재 상점과 음식점, 카페 등이 모여 있는 좁은 골목길이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담장 벽화가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벽화보다 눈길을 끈 것은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선 칼국수집이다. 대기하던 손님이 “이 집이 유명한 원조 칼국수집인데요, 빵게를 넣고 얼큰하게 끓여 맛이 기가 막혀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김이 펄펄 솟는 칼국수 찜통을 아쉽게 바라보며 다음 대구 여행을 기약한다.
넓은 종로 긴 진골목
영남대로에서 한 블록 위로 올라가면 열십자 모양의 대로인 종로가 있다. 종로 인근에 부자 동네였던 진골목과 약전골목이 있어 요정, 권번 같은 유흥 시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한약재상과 음식점, 전통시장, 백화점 등이 자리한 대형 상권을 이루고 있다. 종로에는 화교의 역사도 공존한다. 근대에 화교들이 정착해 요식업, 포목업 등을 하며 살았다. 이들은 대구 갑부 서병국의 저택을 매입해 화교협회 건물로 사용했고, 그 앞에 화교 소학교를 세웠다. 근대건축물인 화교협회 건물은 예약(053-255-0561)한 후 관람할 수 있다.
차와 사람이 뒤섞여 지나다니는 종로를 걷다 진골목으로 숨어든다. ‘진’은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 ‘질다’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에도 있던 골목이며, 근대에는 재력가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진골목 명소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에 지은 서양식 주택으로 소설 ‘마당 깊은 집’에도 등장한다. 노인들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미도다방도 이곳 터줏대감이다. 한때 유학자가 많이 방문해 양반다방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골목이 긴 만큼 옛이야기도 끊이지 않는다.
또다시 김광석다시그리기길
진골목까지 둘러본 뒤 버스를 타고 방천시장 인근 김광석골목을 찾아간다. 대구에 오면 왠지 꼭 들러야 할 것 같다. 애잔한 그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계절, 늦가을엔 더욱더 그렇다. 김광석(1964~1996)이 방천시장 골목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이 골목이 조성됐다. 350m쯤 되는 골목 입구에서 김광석의 기타를 본뜬 대형 조형물이 반긴다. 골목 담벼락에는 한몸 같았던 기타를 품에 안고 하회탈처럼 웃음 짓던 김광석과 그의 노래들이 벽화로 되살아났다. 오토바이를 탄 김광석은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실감난다.
그가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을 건네는 벽화 앞에 앉아 골목으로 흐르는 노래를 듣는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오늘도 그의 노래에 위로받는다.
주변 명소 & 맛집
안지랑 곱창골목
안지랑 동네의 넓고 긴 골목 양옆으로는 곱창집이 늘어서 있다. 식당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상가 규모가 크다. 안지랑에서 곱창을 주문할 때는 1인분, 2인분 단위로 주문하지 않는다. 꼭 한 바가지, 두 바가지로 주문할 것. 한 바가지는 500g이다. 매운 양념을 한 불곱창과 곱창, 막창 등의 메뉴가 있는데 숯불에 한 번 더 구워 불맛을 더한 불곱창이 인기다. 메뉴를 고르기 어려울 땐 반반 주문을 해보자.
동인동 매운찜갈비 골목
대구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데, 그 이유는 여름에 너무 더워서란다. 이열치열로 더위를 이기겠다는 전략 음식인 셈이다. 서문시장에 매운양념어묵이 있다면, 동인동에는 매운찜갈비가 있다. 굵게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새빨간 양념이 갈비를 뒤덮고 있다. 보기보다 맵진 않다. 매콤하고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조화롭다. 양은이나 스테인리스로 만든 양푼에 찜갈비를 내놓는 것이 특징이다. 낙영찜갈비, 봉산찜갈비, 싱글벙글찜갈비 식당이 유명하다.
별난 먹을거리 천국 서문시장
대구 최대 시장인 서문시장에는 5000여 개의 점포가 성업 중이다. 대구가 패션 섬유 도시로 이름난 만큼 원단, 한복, 의류 관련 제품을 파는 매장이 많다. 먹을거리도 풍성하다. 납작만두, 칼제비, 삼겹살자장면, 매운양념어묵 등 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음식을 판다. 납작만두는 당면으로 만든 엄지손톱 크기의 만두소를 얇은 만두피로 감싸 지진 것이다. 매운양념어묵은 맵게 조린 어묵 위에 콩나물을 수북이 올린 것인데 아귀찜과 흡사하다. 자장면에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열 조각을 올려주는 삼겹살자장면이야말로 서문시장의 독보적 아이템이다.
여행 정보 걷기 Tip
• 중구 도심의 근대문화유산을 탐방하는 걷기 코스 ‘근대로의 여행’은 총 5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본문에 소개한 코스가 가장 인기 있는 2코스 ‘근대문화골목’이다. 매주 토요일 10:00, 14:00 두 차례 무료 정기해설을 진행한다. 신청은 대구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 서문시장은 2코스 걷기 전후에 가면 좋다. 걷고 난 뒤 들를 경우 김광석골목을 먼저 둘러보고, 2코스 근대문화골목길을 역순으로 걸으면 된다. 청라언덕에서 서문시장까지는 도보 10분 거리다.
나른한 퇴근길, 서울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서 그를 보고는 자동으로 인사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참 오랜 친구였다. 뽀뽀뽀 체조로 아침잠을 깨면 항상 볼 수 있던 뽀병이었고, 주말 밤에는 두루마기나 정장을 입고 앵커석에 앉아 “지구를 떠나거라~” 혹은 “나가 놀아라~” 같은 유행어를 쉴 새 없이 제조하던 웃긴 아저씨였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특이하고, 특별하고, 독보적인 캐릭터가 존재했었나 싶다. 지금은 그때의 기운 센 스타 말고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신사가 되어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시사풍자 개그의 효시이자, 명심보감 전도사, 조선대학교의 김병조(金炳朝·69) 특임교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역사에서 김병조 교수를 다시 만났다. 지하철에서 묵례만 하고 헤어졌던 짧은 만남을 이야기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알아본다고 기뻐하거나 알아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아요.”
지방 강연이 있는 날이면 용산역이나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개그맨에서 교수로 직업의 영역은 달라졌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그리고 명심보감과 함께한다는 점이다. 옛 기억에도 그는 어렵고 긴 한문 구절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읊곤 했다.
“방송하던 시절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어요. 마침 제 뜻에 공감하고 좋아하는 피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방송도 공익을 위한 것이니 교육 기능을 강조해야 한다던 분이셨죠. 고전에서 취득하자고 해서 명심보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제 평생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얄개
선비 집안의 장손인 김병조는 어려서부터 벗삼던 명심보감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작가가 써주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아이디어를 발굴해 글을 쓰고, 시사 개그의 앵커 멘트를 고쳤다. 짧고 간결하지만,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야기에 많은 시청자가 귀 기울였다. 그가 진행했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7년 동안 평균 70%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사 풍자 프로그램이었다.
“제 대본은 거의 다 제가 썼습니다. 고서 인용만이 이유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청중 앞에 섰는데, 그 끼는 타고난 것 같아요. 면 단위 동네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사회도 보고, 응원 단장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상도 타고 말이죠. 아주 오랜 경험이 쌓여 있었으니 사람들을 웃길 자신이 있었어요. 작가가 써준 대본을 수정할 경우 양해는 구했죠. ‘내가 고쳤는데 만약에 대사가 재밌고 유익하면 용서해달라’고요. 당연히 재밌지.(웃음) 작문에도 재능이 있었거든요. 개그맨은 작가적 소양을 지닌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던 우등생. 서울대학교를 바라봐도 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학교에 가야만 했다. 서울대 합격률이 높은 광주일고 대신 육사 진학률이 좋은 광주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육사에서 장학금 받을 정도면 연극영화과 학교에 가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영화와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 1학기 때 과 수석을 제외하고 4년 내내 학년 수석을 했습니다. 장학제도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전액 장학금을 받을 방법은 학년 전체 수석이었습니다. 정말 공부만 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뉴스 형식의 시사풍자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자양분이 됐습니다.”
김병조의 인터뷰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는 한학자 아버지와 가난에 대한 내용이다. 이번에도 지나치지 않았다. 고희가 다 된 나이에도 가난했던 얘기를 굳이 또 꺼내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김병조는 가난했던 그 시절이 어두웠거나 피해가고 싶은 시간들이 결코 아니기에 마음놓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스타가 될 사람이 아닌데 스타가 된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꼬장꼬장하고 성격도 강했죠. 타고난 재능과 끼가 있어서 연예인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덕망 쌓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가난하면 비관하고 항거하고 투쟁하는 쪽으로 이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수용했습니다.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복 받은 거죠. 집에 있는 가래떡이나 김만 봐도 너무 좋습니다. 제 행복의 비법은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귀이망천자불구(貴而忘賤者不久), 사람들은 성공하면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 오래가지 못하는 거예요.”
젊은 시절 ‘배추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병조는 방송 활동 내내 톱스타 중에서도 톱스타였다. 어린이 프로그램과 시사 코미디를 넘나들며 모든 세대의 사랑을 받던 슈퍼스타였다. 광고모델로 억대 출연료를 받은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다. 대체할 만한 인물도 없었다. 한학을 바탕으로 시청자를 배꼽 잡게 하는가 하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이. 말 그대로 김병조 전성시대였다.
그날 이후, 다른 삶을 살다
1987년 6월 10일. 이날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김병조는 이날의 사건으로 삶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현대 역사의 결정적 장면과 맞물려 제대로 된 소명 한 번 못해보고 시대의 막을 내려야 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혼란한 시절이었죠. 그날은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날이었어요. 당원들이 모여 투표하는데 누구 아이디어인지 축제와 함께 진행을 한 거예요. 당대 최고가수도 불렀고 저도 개그맨으로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당 측에서 코미디를 잘 모르니까 저한테 한 3분 정도 웃길 내용을 적어오라고 하더군요. 대본을 써가지고 보여줬더니 거기다가 뭘 또 적어주더라고요. 그 내용을 보고 사실 대단히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집권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폄하하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 단 몇 초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읽어야 할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던 김병조라는 게 문제였다.
“전당대회에서 대본을 읽기 전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최종적으로는 제 잘못이죠. 과감하게 ‘못합니다’ 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후회됩니다. 선비 집안의 장손답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았어야 해요. 저는 정치투사도 아니고 한 집안 가장이었어요. 또 늘 그래왔듯 대본대로 읽어야 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당원들끼리 하는 내부 행사라서 방송 전파를 타지 않았지만 한 일간지에 그가 한 말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로 사건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자숙의 기간이 필요해 방송을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쉬는 것조차 어렵더라고요. 우리 집사람까지 나서서 ‘원하는 멘트를 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문제를 확대해서 자기네한테 유리한 정쟁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죠. 잘 모르는 분들은 그 당시 제가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스스로 관둔 게 맞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정치권의 제의도 있었습니다만 다 거절했습니다. 또 방송에도 복귀했지만 실의를 느꼈습니다.”
SBS가 개국하면서 자리를 옮긴 김병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미 방송에 대한 매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침 그때 KBC 광주방송이 개국했습니다. 노래자랑 프로그램 ‘열창 무대’ MC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잘됐다! 고향의 방송을 하자!’ 하고 갔습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요. 그리고 조선대학교에서 강의 요청도 해왔고요.”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지도 벌써 23년째다.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학부와 대학원을 두루 다니며 강의를 해왔다.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모습이 시청자들 눈에서 서서히 멀어져간 과정은 그러했다. 몇 해 지나고 개그맨이 아닌 대학교수가 되어 나타난 그는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젊은 시절 흑발의 보글보글하던 머리카락은 단정한 커트의 은발이 됐다. 푸짐해 보이던 몸은 마라톤으로 다져 보통의 건강한 체격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사건의 스트레스로 오른쪽 눈은 결국 실명됐다.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 걸어 다닌단다. 당시 정치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의 길을 택했을까?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어요. 방송에 몸담고 있을 때도 어머니 교실이나 어린이 교실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죠. 지금 제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때 그 사건마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와 기사가 제 스승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시래기톡’
요즘 김병조가 강의 외에 집중하는 건 바로 작년 10월부터 아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이다. 카카오TV와 유튜브에 ‘시래기톡’이라는 채널을 개설해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세대 공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왜 방송 이름이 ‘시래기톡’일까. 파릇파릇했던 배추 머리가 세월이 흘러 묵직하고 담백한 맛과 향을 내는 시래기로 탄생했다는 의미다. 지금의 김병조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인 듯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살아생전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어요. 산소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엉엉 울었어요. 그 카세트테이프를 CD로 구워두었죠. 제가 올해 칠십인데 아버님이 일흔둘에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아들이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가 서서히 되어가시네’ 하더라고요. 뭔가 남기고 싶었나봐요. 아들의 생각과 명심보감 구절을 포함해 젊은이들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제가 느낀 것들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눈으로 보지 말고 상대의 눈으로 보고 다름을 인정하자’가 시래기톡에서 추구하는 의미란다. 아울러 유튜브 채널을 통한 한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 있고, 온고지신(溫故知新) 같은 방송도 있어야죠. 훌륭한 일을 하고도 대우받지 못하는 어른 세대와 희망과 꿈이 있음에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제 유언이기도 합니다. 남기 유(遺), 말을 남기는 것이죠. 먼 훗날 세상을 떴을 때 아들이 우리 아버지의 철학이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고요.(웃음)”
아버님이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겨놓은 것처럼 그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나 같은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가 제 철학입니다. 진분수 같은 삶을 살고 싶죠. 가식과 허황한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에서 있어도 없는 듯 낮추고, 줏대 있는 가난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여행지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혹은 맛있는 음식으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해 매혹적인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문화와 각종 체험으로 여행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곳도 있다. 그렇게 대부분의 여행지는 오감의 쾌락으로 여행자를 기쁘게 해준다.
가을이 한창일 즈음 찾아간 곳은 특별한 곳이었다. 일반적인 여행지처럼 감각의 만족만을 주는 여행지가 아니었다. ‘나에게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도시’였다. 마치 이탈리아의 친퀘테레와 프랑스의 투르빌을 합쳐놓은 것 같았다. 그곳은 한반도에서 해돋이로 유명한 해오름의 도시 ‘동해시’다.
동해시 묵호진동의 ‘묵호등대 담화마을’은 동해가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 묵호 등대를 중심으로 묵호항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등대오름길을 따라 올라가 바람의 언덕에 서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이탈리아 북서부 라스페리아 지방에 있는 다섯 개의 해안마을 ‘친퀘테레(Cinque Terre)가 떠올랐다. 해안 절벽의 가파른 지형에 테라스를 갖춘 화려하고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집들의 마을 풍경과 지중해를 따라 마을이 이어진 산책로로 유명한 곳이다.
묵호 등대 담화마을은 오랜 세월의 담에 지나온 시간의 소박한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려 여행자들에게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불러일으켰다. 겹겹이 쌓인 골목의 담벼락들은 저마다의 굵직한 사연을 여행자들과 함께 한다. 한적한 골목에도 자기만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의 노스탤지어는 잃어버렸던 시간을 다른 모습으로 만나고 느끼면서, 지나온 시간을 존중하고 곱씹을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노스탤지어가 아픔이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를 끌어내는 원천이 된다. 화려한 구경거리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이 빚어낸 삶과 추억의 기억들이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1941년 개항된 묵호항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마을에는 4개의 길이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어내고 있다. 묵호의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골목이 주제인 ’논골 1길‘, 떠난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 찾아올 사람들 모두가 기억하고 희망하는 묵호와 논골담길에 대한 사랑이 주제인 ’논골 2길‘, 묵호의 옛 이야기와 추억이 담겨있는 ’논골 3길‘, 새로운 희망과 바람에 관한 이야기로 지역사람들이 참여한 ’등대오름길‘.
시간의 흔적들이 있는 골목길을 걷다 보니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는 슬픔이 지나간 자리가 생각났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정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발아래로 보이는 동해를 바라보니 마치 어두운 배경 속에 밝게 처리된 여인의 나신을 그린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처럼 바다의 한정된 일정 부분만이 가을 햇살에 눈부시게 찰랑거렸다. 슬쩍 내 옆에 누군가 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덮어주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과거에 대한 후회가, 또 한 모금을 마시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졌다. 결국,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 동안 현재를 위협하는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마을 앞 해안을 따라 2km의 거리에는 도시풍 카페와 횟집들이 즐비한 풍경이다. 모네가 끝없이 변하는 바다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배운 프랑스의 투르빌 해변이 떠올랐다. 그곳의 싱싱한 해산물처럼 이곳 역시 동해 어업기지로 갓 잡은 싱싱한 활어를 즉석에서 맛볼 수 있다.
언젠가 이곳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와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
한편 동해시에는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존과 일상 공간이면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의미 있는 곳으로 “북평 민속시장”도 있다.
전국에 있는 다른 장터와 달리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영동지방 최대의 전통 오일장이다. 매월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에 열리는 장으로 200년 전통의 장터다. 1796년부터 시작된 이 장터에 가면 짙은 향토색과 서민들의 삶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동해시는 이렇게 오래된 흔적들을 고택의 기왓장처럼 가지런히 쌓아놓은 느낌을 주는 도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사람들과 담과 골목의 이야기들이 넓디넓은 동해 옆에 살포시 앉아있다. 그래서 동해시는 여행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설렘이 지속하는 특별한 곳이다.
36년 전통 ‘영동식당’
서대전네거리역 인근, ‘맛동네길’이라 불리는 계백로와 계룡로 사이 전문음식특화거리에는 오랜 전통과 맛을 자랑하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닭볶음탕을 비롯한 염소전골, 토끼탕 등 몸보신 메뉴로 사랑받는 ‘영동식당’은 대전광역시 인증 ‘모범음식점’, ‘3대·30년 전통업소’ 등의 타이틀로 믿음을 더하는 곳이다. 맛집들이 늘어선 큰길가가 아닌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자리 잡은 가게에는 뜨내기손님보다는 오랜 단골이 주를 이룬다. 정겹고 한적해 보이지만 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이들로 종종 줄을 서기도 한단다. 어머니 정원자(77) 여사에 이어 영동식당의 맛을 책임지고 있는 김대흠(56) 씨는 오래 기다리는 손님들에겐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말했다. 때문에 맛집 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와도 고사하곤 한다는 그다.
“방송을 타고 나면 갑자기 사람들이 확 몰려와 단골손님들이 불편해지는 상황이 벌어져요. 닭볶음탕 국물 반주 삼아 드시는 분이 많은데, 그분들도 여유롭게 즐기지 못하고, 밖에 있는 손님들도 오래 기다려야 하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애써 방송으로 사람을 끌어모으기보다는, 맛있게 드신 분들이 입소문 내주시면 그게 가장 고맙고 기분 좋은 것 같아요.”
단골 중에는 매번 다른 사람을 데려와 닭볶음탕을 맛보이는 이도 있단다. 누군가에게 식당을 자신 있게 추천한다는 건 늘 그 맛과 서비스가 실망스럽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주인장 역시 변함없는 맛과 친절한 응대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그것이 가게의 장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프랜차이즈의 경우엔 어디든 일정한 맛과 서비스를 기대하고 가는데, 대개 그런 기본을 지키지 않는 곳들은 금방 문을 닫게 돼 있죠. 우리처럼 작은 가게라고 다르지 않아요. 옛 맛을 잘 지켜내고, 언제나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 게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오래되고 유명한 가게라도 자칫 기본을 잊고 방심하면 안 돼요. 손님 마음이 돌아서는 건 한순간이니까요.”
영동식당의 닭볶음탕은 푸짐한 양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인데, 제철 나물이나 김치 등 다양한 반찬도 인심 좋게 내놓는다. 몇 해 전 닭볶음탕의 주재료인 감자 값이 폭등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격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땐 정말 빚 안 진 것만도 다행이지, 거의 남는 게 없이 장사했어요. 그런데 재룟값이 싸졌다고 가격을 내리지는 않잖아요. 그럼 비쌀 때도 가격을 올리지 말아야죠. 어떤 집은 대신 양을 줄이거나 재료를 덜 넣어주는데, 그러면 맛이 변하니 절대 안 되고요. 그렇게 오르락내리락해도 지금껏 버텨온 뚝심으로 변함없는 맛을 지킬 겁니다.”
대전1호선 서대전네거리역 4번 출구 도보 4분
주소 대전시 중구 계룡로874번길 27-9
영업시간 11:00~22:00
대표메뉴 닭볶음탕, 염소전골, 토끼탕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69년 전통 ‘성일집’
옛 부산시청 뒷골목, 현존하는 곰장어 가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성일집은 2대 주인장 최영순 씨와 그의 아들인 김성용 씨가 함께한다. 올해 68세인 최 씨는 여전히 하루 꼬박 4시간씩 곰장어 손질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 흔히 안주로 먹는 손가락 굵기의 곰장어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먹으로 한껏 움켜쥐어야 할 정도로 두툼한 데다 길이로 치면 주인장의 팔보다 길쭉하다. 품질 좋은 국산 곰장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인장 역시 식재료만큼은 따라갈 곳이 없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다른 집에서 곰장어를 먹던 손님들이 여기서 음식 나온 거 보면 놀라요. 대부분 가게는 저렴한 수입산이나 그보다 더 값이 떨어지는 냉동 곰장어를 쓰니까요. 수익만 보면 그편이 나을 수도 있죠. 그러나 이제는 돈보다 성일집의 전통과 내 명예를 위해 일하고 있어요. 이제 아들까지 이어가면 100년 역사인데, 그 정도 자신감은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돈을 좇지 않는다는 그녀이지만, 처음 시어머니에게 성일집을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생계가 녹록지 않았다. 6·25 전쟁 이후 어려운 살림에 8남매를 먹이기 위해 곰장어를 굽기 시작해 식당까지 차렸지만, 당시만 해도 그리 대중화된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 성일집을 일으켜 세운 데는 며느리 최영순 씨의 강인한 의지가 한몫했다.
“스무 살에 시집왔는데, 빚이 있어서 결혼식을 못 올렸어요. 시어머니께 ‘내가 열심히 일해서 10년 뒤에 식을 올리겠다’고 했죠. 정말 독하게 곰장어에 매진했어요. 덕분에 10년 만에 빚도 갚고 가게도 왕성해져서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곰장어로 자식들 잘 키우고 예쁜 손주들까지 봤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죠. 그뿐인가요. 이제는 남에게 안 빌리고, 내 것으로 남 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성일집의 자부심 또 하나.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23가지 한약재로 만든 육수가 양념의 감칠맛을 더한다. 이미 품질 좋은 곰장어에 한약재까지 고루 넣었으니, 그야말로 보양식이 따로 없다. 이만큼 정성을 다한 데에는 손주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됐다.
“곰장어가 영양가도 많고 고단백 식품이라 아이들 성장기에 참 좋거든요. 그런데 애들은 잘 안 먹더라고요. 손주에게 먹일 심산으로 최신 휴대폰을 사줄 테니 곰장어 20번만 먹자고 했죠. 그렇게 약속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맛을 낼까 밤새 고민했어요. 한약재며 해초며 야채며 이것저것 넣어보다가 지금의 양념장이 완성됐습니다. 앞으로도 조미료는 넣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직 손주에게 네 번 더 먹여야 하고요.(웃음)”
부산1호선 남포역 10번 출구 도보 3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대교로 103
영업시간 매일 11:00~23:00
대표메뉴 곰장어 소금구이, 곰장어 양념구이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쌀가마니를 공깃돌처럼 다루고, 바윗덩이로 공차기를 했다는 기인. 축지법과 경공법으로 허공을 날다시피 한 무림 고수. 탄허 스님이 삼배(三拜)를 올렸다는 도인. 원혜상인이라고, 전설적 고수의 이름을 들어보셨는가? 162세 장생을 누렸다는 그의 기적이 믿어지는가? 뻥이라고? 증인이 있었다. 원혜상인의 수제자 박대양(2017년 작고). 그는 타오르는 존경심으로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술회했다. 박대양의 무공 역시 초절정 판타지 수준이었다지. 구름을 끌어당겨 마음먹은 대로 부렸다는 게 아닌가. 박대양은 전통무예 집단 기천문(氣天門)의 초대 문주(門主)였다.
현재의 기천문은 2대 문주 박사규(70)가 이끈다. 문주란 문파의 주인이니, 최고 지도자이자 최강 실력자다. 외양을 볼까? 단단한 몸피에 걸친 개량한복은 희어 눈부시다. 머리칼과 수염 역시 세월의 채색으로 허옇다. 전체적으로 허연 작풍이라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도인 티를 느낄 수 없는 형용이다. 그렇다고 티 나는 게 없는 게 아니다. 눈매와 눈길에 공력이 서려 있다. 유난히 순하고 환하고 따뜻한 눈빛이지 않은가. 풍경을 바라보듯 가만히 바라보자니 심지어 동안이다. 도가 익으면 어린애 얼굴이 된다. 나는 그게 도인 티라 믿는다.
예로부터 신선이나 도인은 늙어 어린애가 된다 했다. ‘무(無)’를 공부하는 게 도 수련이기에 내공이 붙으면 내부에 아무것도 없게 된다. 세상에 올 때 붙이고 나왔던 천진이나 순진을 다시 내 것으로 삼게 되는 거다.
해서, 도인 영감님들이 모이면 소꿉놀이하는 어린애처럼 놀았다. 낄낄거리며 장난을 즐겼다. 티베트의 어떤 도인은 숨넘어가기 직전, 옷 안에 폭죽을 잔뜩 둘둘 말아 숨겨두었다. 화장 장작불이 붙자마자 폭죽이 사방으로 신나게 터졌고, 제자들은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터뜨렸다지. 박 문주의 동안과 눈빛에도 장난기가 설핏 비친다.
그나저나, 기천문은 뭐하는 사람들의 모임인가. 불철주야 무예를 닦고, 기필코 도를 얻어 어디에 용하게 쓰자는 건가. 박 문주의 얘길 들어봐야겠다.
“기천이란 한마디로 몸을 단련해 지혜를 얻는 수행입니다. 몸으로, 몸짓으로 행하는 ‘반야심경’이자 ‘천부경’이라 할까. 유불선(儒佛禪)을 초월하는 공부라 해도 좋고. 우리 사부 박대양 진인의 전언에 따르면, ‘우주 밖에서 우주를 보는 눈을 얻는 공부’인 게고.”
“불가의 참선이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천은 몸이라는 그릇 속에 고도의 정신을 담아내는 수행이라는 얘긴가요?”
“육신은 별것 아니라고,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을 닦으라고 선가(禪家)에선 가르치지만, 기천은 몸을 중시합니다. 몸이 어긋나면 마음도 덩달아 망가지는 게 아니던가. 활명(活命)이라, 존재의 기본인 몸의 생명력을 북돋워 도로 나아가는 게 기천의 지향이지요.”
“쉽게 말해, 몸으로 닦는 도(道)?”
“바로 그거! 그렇다면 기천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우리는 저 위대한 단군 할아버지를 기천의 시조로 봅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권법, 고구려의 선맥(仙脈)으로 간주되는 조의선인(早衣仙人), 신라의 화랑도, 풍류도, 또는 현묘지도, 이 모든 고대의 수련법이 기천과 통하는 거라. 이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를 백그라운드로 삼고 있고요.”
단돈 10만 원 쥐고 입산하다
박 문주에 따르면, 이 나라의 하늘엔 영기와 서기가 구름처럼 흐른다. 단군의 정신을 상속한 과거의 도인들, 역대 조사들, 혹은 영명한 조상들이 죽었으되 영영 시들지 않는 정기로 살아 움직인다는 거다. 기천은 그 상서로운 에너지를 몸 단련으로 내 안에 확 끌어당기는 수련이다.
박 문주는 진도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왔다. 한때 부를 누리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도매상을 해 동종 업자들의 선망을 살 만큼 표나게 이루고 모았다. 돈을 쓸 시간조차 없이 들어오는 돈을 세는 데에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다 IMF 때 와르르 무너졌다. 기천을 만난 건 사업을 하기 이전인 20대 때부터였다. 소싯적부터 태권도, 합기도, 복싱을 야무지게 배워 ‘맞짱’을 뜨면 누구나 고꾸라졌다. 나로다! 나랑 붙을 자, 게 없느냐! 그리 악악 외치며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다닌 시절이었다. 마침내 임자를 만났으니 그가 바로 박대양. 박대양이 서울 약수동에서 선무 도장을 운영할 때였다. 박사규는 이 박대양을 찾아가 한판 붙자 청했다. 박대양은 딱 한 수만 쓰겠다며 대결에 응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결판이 났다. 제대로 힘 한번 써볼 겨를 없이 박사규가 허무하게 나가떨어진 것. ‘아이고, 사부로 모시겠소이다!’ 박사규는 냉큼 무릎을 꿇고 제자 되기를 청원했다. 그 기이한 인연은 발화해 박사규를 기천의 심해로 데려갔다.
박사규는 남대문에서 사업하던 시절에도 기천을 정신의 지주로 삼고 살았다. 사랑으로 섬기고 자랑으로 닦았다. 그러다가 절호의 찬스가 왔으니 사업 부도가 바로 그것. 그는 처자를 서울에 남기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수중엔 단돈 10만 원뿐이었다지.
“알몸 하나로 이 산에 들어왔어요. 굴러 떨어지고서야 치고 오르는 법. 고행이 있고서야 길을 보는 법. 사업을 망해먹은 건 오히려 행운이었다고요. 하하핫!”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죠? 벼랑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으라는 게송!”
“치열하지 않고서도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있던가? 묵언 3년, 육합(六合, 내공을 연마하는 수련) 고행
3년, 총 6년의 담금질 과정을 거치자 사부께서 비로소 기천의 정수를 귀띔하더라고. 원효의 ‘대승신기론’,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유마경’을 읽으라 하시며. 과연 그 안에 진리가 있었어요. 기천이 우주의 생성 원리까지를 깨닫게 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는 걸, 미래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행법이라는 걸 관념으로가 아니고 온몸으로 느꼈어요.”
“입산하지 않고서는 도 공부가 어려운 거예요? 뒤에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홀연히 입산하셨나? 나 하나 좋아라고 닦는 게 도가 아닐 텐데.”
“예컨대 바다의 녹조를 가라앉힐 수 있는 건 무엇이던가? 태풍이 아니던가? 태풍이 바다를 한바탕 뒤집어야 본색을 되찾는 게 아니던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탁류처럼 뒤엉긴 삶을, 욕망을, 일체를 버리는 강단으로 한바탕 뒤집어엎어야 정화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계룡산은 예로부터 민족의 성산이자 수련의 장이었으니 마음이 흘러갈 수밖에. 태조 이성계도 이 산 국사봉에서 수련을 했어요.”
세상으로 향했던 눈을 감고, 입을 닥치고, 오직 계룡산을 스승 삼아 정진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게 도.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한 소식 환하게 한 도인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몸 낮추기에 능하다. 겸양은 기천이 중시하는 덕목이다.
“남들은 도사라고들 하지만 정진에 끝이 있을까. 그저 수행자일 따름이지요. 명산엔 자고로 항상 지킴이가 있었어요. 그 면면한 전통을 잇는 지킴이, 옛 도인들이 갔던 길을 등불 하나 들고 현대인들에게 안내하는 심부름꾼, 그걸 본분으로 삼고 삽니다. 세상과 남에게 누가 되지는 말자, 죄짓지 말고, 매 맞을 짓 말자, 그걸 항상 숙제로 여기며.”
“선하고 깨끗한 삶은 평범한 모든 이들도 미덕으로 압니다. 수행자라면 뭔가 더 진전된 정신으로 거침없이 사는 분들 아닐까? 심중에 바위가 들어앉아 뭐에 휘둘리는 바 없이 자유자재한 존재이지 않을까? 죄짓지 않는 생활 관습은 기본일 테고요.”
“앎을 내려놓아라! 이놈아, 앎이 곧 장애이니라! 제자들에게 자주 일갈하는 소리가 그겁니다. 도란 특별한 게 아네요. 알량한 앎에 갇히지 않고, 무릇 모든 평범하고 단순한 것에 진리가 있다는 걸 깨닫는 게 도라서.”
“눈이 있으나 없는 것과 같으니 단순한 진리를 무슨 수로 볼 수 있을까. 생활이란 삼엄한 것이라 먹고살기 위해 전전긍긍을 일삼다 파장을 보는 게 인생이기도 하죠.”
“그게 뭐지? 사람이 세상에 나온 이유, 그게 뭐지? 수행자는 그걸 생각하는 자라. 세 가지 사명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첫째, 전생에서 닦지 못한 걸 이생에서 한번 시원하게 닦으라는 사명, 둘째는 광구천하(匡救天下)라,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빛을 보태라는 사명, 셋째는 포덕천하(布德天下)라, 널리 덕을 베풀라는 사명! 기천문은 이 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수행 집단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늘 고요히 반성부터 합니다. 사명을 다할 만치 정진하는가, 그런 자성(自省)을.”
투철하게 깨달아 세상과 사람들의 빚이 되겠다! 요약하자면 그렇다. 현란할 것 없는 언설이다. 토 달 것 없이 공감되는 선의다. 그러나 말이다, 도라는 메뉴를 파는 사이비 도사가 횡행하는 세상이다. 누구나 입으로는 선의를 떠든다. 흔히들 시늉으로 설레어 세상에 협찬하는 척한다. 도와 속(俗)의 경계가 자명한 현세를 넌지시 묵시함인가. 45년을 닦은 수행자 입에서 ‘자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건 예사롭지 않다.
먹고 사는 정경엔 섭섭할 게 없다
배운 게 있으면 돌려줘야 계산이 맞다. 얻은 게 많으면 나눠야 한다. 그렇다면 박 문주는 무엇을 나누나? 이루어지는 것 없는 이 탁한 세상에 무엇을 실천으로 보태나? ‘어이, 사람들이여, 기천문에 오소! 여기에 세상을 건널 수 있는 뗏목이 있으니!’ 그는 그리 외치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천 행법을 알리는 일에 주력해왔다. 제자 양성에 공을 들였다. 그게 그가 세상에 가담하는 방식이다. 그걸 비즈니스로 여긴다면 아마도 협량이겠지. 박 문주의 먹고사는 정경엔 이미 섭섭할 게 없다. 하찮은 물욕을 하찮게 여기는 근기가 없다면 무늬만의 수행자이겠지.
“기천 수련만 유일한 길인가? 그건 아니라. 기천문이 오직 구도자들의 전당인가? 그것도 아니라. 흔히들 달라이 라마에게서 정신을 구하고, 라즈니시를 애호하지만, 우리 민족의 전통 행법 안에 우리에게 맞는 수련 방법과 정신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 그게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이롭게 쓰여야 한다는 것. 제겐 그 사실들을 널리 알려야 할 소명이 있는 겁니다. 과욕을 부릴 일은 아니고요.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을 벌여놓은 것 같기도 하고.”
2003년 개천절, 남북한 인사들과 해외동포들이 평양 단군릉 앞에 모여 행사를 가졌다. 박사규는 당시 기천무(舞)를 공연해 갈채를 받았다. 기천 행법은 무예이자 춤이다. 기천의 예술적 성격을 직감한 많은 무용가가 박 문주에게 배우기도 했다. 김매자, 육완순, 이숙재 같은 무용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기천의 정신과 춤사위를 수용했다.
인간의 능력이란 개발하면 상상 불허의 초경지에 이른다. 이쯤에서 궁금하지 아니한가? 박 문주가 보유한 그 뭔가 기똥찬 초능력이. 별 시답지 않는 걸 묻는다는 투로 정수리를 득득 긁으며 그가 예화를 들려준다. 내용은 이렇다. 그는 굳이 몸을 이동하지 않고서도 갈 곳을 가는 모양이다. 한번은 산에서 수련하던 제자들 앞에 박 문주가 턱 나타나 독려를 하더란다. 그러나 박 문주는 그 시간, 산 아래 거처에 머물렀을 뿐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게 스승의 심영(心影)이었음을 알고 경악했다. 아아, 스승께서 ‘심영’을 자유롭게 구사하시는구나!
“호흡을 멈추고 외공을 써 뜻한 장소에 심영을 보내는 일은 우스울 지경으로, 옛 도인들은 갖가지 초능력을 행했을 거라 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거든. 하지만 수행자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아야 해요. 평범 속에 도가 있다는 자각, 세상에 가급적 많은 수행자가 출현하길 바라는 기원, 그런 게 더 본분에 가깝습니다.”
“산에 앉아 모호한 관념이나 낡은 정신주의에 안주한 채 도통했다 자부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것 같아요. 진정한 선지식은 차라리 진흙탕 속세에 있는 게 아닐까?”
“과거와 달리 요즘은 산에 도인이 없습니다. 지지고 볶는 저자거리에, 질퍽질퍽한 세속에 차라리 도인이 많아요. 일테면, 피땀 흘려 번 재산을 사회에 쾌척하는 사람들, 또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그들이 도인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밭두렁 잡초를 뽑으며 어느 할머니가 하는 말씀, 야야, 미안하다 풀들아, 여기는 너희들이 살 자리가 아니구나! 그 할머니의 내공 역시 도에 가깝다 봅니다.”
“자연을 내 안에 들여놓아 매사 자연스럽게 사는 이라면 그 또한 고수죠. 스승 중에 큰 스승은 자연이고.”
어려운 문자를 쓴 게 없다. 나를 내세우는 폼도 없다. 시종일관 시원한 솔바람으로 방 안을 채운 사람. 도 타령도 이쯤이면 절창이다.
스케줄이 빡빡하다고 했다. 아침 시간에는 요양원 봉사에 오후에는 영화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바쁜 일정 쪼개서 만난 이 사람. 발그레한 볼에서 빛이 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웃으며 나왔을 것 같은 표정. 미련 없이 용서하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다 보니 그 누구에게도 남부끄럽지 않은 환한 미소의 주인공이 됐다.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곳이 꿈의 무대. 시니어 마술사 겸 영화인 조용서(趙鏞瑞·92) 씨를 만나 90대 소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전 11시에 복음병원에서 6월 생일인 분들의 생일잔치가 있었어요. 거기에 20명가량이 모였는데 그 앞에서 제가 마술을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는 서울노인복지센터 영화교실에서 영화 만들기 수업을 들었어요.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할 영화 막바지 작업을 해야 해서 요즘 좀 정신이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요즘 왜 바쁜지 설명하는 조용서 씨다. 배낭에는 뭣이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지 무거워 보였다. 영화 제작에 마술 공연도 하기 때문에 가방은 가벼워질 날이 없을 듯싶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총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각종 영화제에서 입선해 실력을 인정받은 시니어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손수 영상물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촬영에 대본에 내레이션도 직접 한다.
“서울노인영화제, DMZ국제다큐영화제 등에서 시니어 감독으로 네 차례 입선했습니다. ‘어르신 통역사들’이라는 작품은 작년에 대한극장에서 상영했어요.”
이번 영화 ‘긴 세월 살았다네’는 조용서 씨와 아내가 주인공이다. 단편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기자와의 인터뷰가 끝난 이후 영화제 출품을 마쳤다고 전해들었다.
“작업을 해보니 러닝타임이 5분 40초더라고요. 90세 노년의 생활은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0월에 영화제가 있는데 입선이 되면 상영할 겁니다.”
조용서 씨가 만든 영상은 담담하고 담백한 게 매력이다. 노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자신과 주위 동료가 배우이자 주인공. 이 시대 시니어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러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방송인 송해 선생이라고 했다.
“저보다 한 살 위인 송해 선생이 건강하게 전국을 누비는 모습이 참 훌륭해 보입니다. 저에게 많은 소재와 영감을 주십니다. 나이가 많아도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시는 삶의 지표 같은 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나이를 먹고 머리도 하얗게 변해요.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잖아요. 제가 팔십이 넘어 영화를 만들게 될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2008년부터 영화 수업을 받고, 영화 제작을 하고,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어서일까? 봉준호 감독 부럽지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반짝이는 관객들의 눈이 좋다
영화와 엇비슷한 시절에 입문한 것이 바로 마술이다. 현재 조용서 씨는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의 ‘꿈전파 문화공연단’ 마술팀 소속으로 매주 틈새 없이 복지관, 병원, 어린이 도서관 등을 돌며 공연을 펼친다.
“영화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는데 마침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에서 마술 교육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웠습니다. 붓글씨나 노래교실도 있었는데 마술 수업을 보자마자 좋았어요.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제가 할 수 있는 마술은 200여 가지 됩니다. 손에 완벽하게 익어서 공연할 수 있는 마술은 30개 정도 되고요.”
조용서 씨의 마술 도구는 큰 공연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많게는 200~300명 정도의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는 마술을 주로 구현한다고.
“손재주가 있어야 한다는데 저는 없어요. 그래서 동작도 크고 화려해 보이는 마술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마술은 분위기에 따라서 다른데 부채 마술이랑 인형 비둘기가 나오는 마술입니다. 스펀지나 꽃을 사용하는 마술도 있고요. 특별히 잘하는 건 우산과 꽃을 이용한 마술입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신기해 보이겠죠?”
애로사항이 있다면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은 보지 않으려 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서는 이유는 관객들의 눈 때문이라고 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반짝반짝 빛나요. 어린아이들이 손뼉 치는 거 보면 희망을 주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저는 무대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봐주는 게 행복해요. 자부심도 갖게 되고 말이죠.”
92세 시니어가 하는 말이 소년 감수성 저리 가라다. 사실 조용서 씨는 꽤나 매스컴을 탄 인물이다. 장수 관련 방송 다큐멘터리와 시니어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굉장히 건강해 보인다. 꼭 물어볼 질문이 생겼다. 장수 비결 말이다.
“저는 90대의 모범생으로 살고 있다고 봅니다. 바쁘게 살아요. 그게 장수하는 비결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뭐하겠어요.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노인 일자리를 통해서 시니어나 어린이들 앞에서 공연하고 박수 받는 시간들이 기쁘고 즐거워요.”
90년 인생 철학을 묻다
장수의 관문인 구십 문턱을 넘어 건강하게 살고 있는 시니어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안 해봤던 옛이야기 혹은 꼭 한 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쉼 없이 이야기를 펼치며 한껏 들떠 있던 그의 들숨날숨이 순간 잔잔해졌다. 그리고 정적이… 잠시 동안의 정적이 이어졌다.
“그저 하루하루 마음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죠. 그게 복이고요. 아프지 않게 우리 부부가 더 오래오래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 한숨 돌리더니 옛일이 파란만장했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의 제1차 경제 부흥을 일으켰던 세대에 속합니다. 서독 간호사, 광부들 아시죠? 그 시절 사람이에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 있었잖아요. 제 삶도 주인공과 비슷해요. 베트남전쟁 때도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도 항만하역 근로자로 긴 시간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이제 몇 안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백전백패의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많았다고 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다시 일어나서 오늘이 있는 거 같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오늘 하루 즐겁게 행복하게사는 것이 지금 제 인생 최대의 바람입니다.”
이후에도 나긋하게 살아온 얘기를 하는 얼굴에 잔잔한 평화가 보였다. 본인 스스로를 연예인이라고 했던 초반의 긴장감이 없어서 더욱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앞으로도 그 미소 잊지 말고 마술가로 영화감독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시기를….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수년째 폭염이 이어지고 있으니 일단 더위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말이다. 집 안에서 에어컨 바람 쐬는 것도 좋지만 전국 각 지역의 더위를 잊게 해주는 축제에서 가는 세월을 즐겨보면 어떨까? 더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핫(?)한 여름을 책임질 전국 방방곡곡의 축제를 찾아봤다.
연재순서 ① 축제? 먹고 즐기자! ② 개운하게 한잔 촤악! 마시자 ③ 시원하게 솨악! 물놀이
사진 제공 각 지자체
축제? 먹고 즐기자!
잘 먹어야 더위도 이겨낼 수 있다. 축제에서 빠트리면 안 되는 것은 단연 먹거리 아닐까. 그 지역만의 문화와 먹거리 특산품을 전면에 내세운 놀이마당이 우리나라 축제의 특성. 지역의 정취를 느끼고 특산품을 현지에서 직접 맛도 보고 비교적 싼값에 구매할 수 있어 시니어 관광객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7월에는 여름 과일을 대표하는 수박축제가 열리며, 여름 야채인 토마토 는 5월부터 9월까지 부산, 화천 등지에서 수확 시기에 맞춰 축제가 열린다. 마침 7월과 8월 사이에는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이 있다. 시골 냇가에서 고기 잡아 먹던 추억에 젖게 해주는 은어축제와 섬진강 맑은 물길 따라 몸도 마음도 시원하게 해주는 재첩축제도 먹거리 축제 중 하나다. 향기 그윽한 연꽃을 주제로 연꽃차 등을 시음할 수 있는 축제도 있다.
봉화은어축제
올해로 21회째를 맞이하는 ‘봉화은어축제’는 조용한 산골마을을 들썩이게 한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잃어버렸던 옛 시골 정취도 느끼고 냇가에서 놀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낙동강 상류인 봉화 지역에서 회유하는 은어는 수라상에만 오르던 귀한 민물고기였다. 봉화의 역사와 함께해온 은어이기에 더 의미 있는 축제다. 은어반두잡이와 은어낚시, 맨손잡이 체험이 기다리고 있고, 은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도 맛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다슬기잡이와 물싸움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기간 7월 27~8월 4일 장소 경북 봉화군 내성천 체육공원 일원
진안고원 수박축제
올해로 11회째인 진안고원 수박축제는 청정 고랭지 지역인 전북 진안 동향에서 열린다. 동향수박은 20℃ 이상의 일교차가 큰 고랭지 기후의 영향으로 아삭한 식감과 12브릭스 이상의 당도를 자랑한다. 이번 축제에도 할인된 가격으로 동향수박을 무한 구입할 수 있다. ‘진안고원 수박축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각종 체험, 전시, 판매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수박 공예를 비롯해 수박부채만들기, 수박터널걷기 등은 휴가철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체험 행사다. 체련공원 특설무대에서는 깜짝 수박경매, 수박퀴즈 등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기간 7월 27~28일 장소 전북 진안군 동향면 체련공원 일대
부여 서동연꽃축제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령 인공연못인 궁남지에서 펼쳐진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축제 이름도 부여서동연꽃축제다. 매년 7월에 열리는 이 축제장에서는 백련, 홍련, 수련, 가시연 등 330여 m² 규모의 연못에서 자라는 50여 종의 다양한 연꽃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용을 품었다는 포룡정은 더없이 아름답고 연꽃 단지 곳곳에 추억 어린 원두막이 놓여 있어 나들이 장소로도 좋다. 또한 야생화와 수생식물이 많아 아이들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인기가 높다. 무왕의 탄생과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담은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연꽃쿠키 만들기, 연잎차 다도시연 및 시음, 연꽃디퓨저 만들기 등 연꽃을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기간 7월 5~14일 장소 충남 부여군 서동공원 일원
무안 연꽃축제
동양 최대 백련 서식지인 회산 백련지에서 펼쳐지는 무안 연꽃축제는 뜨거운 여름의 정점에서 열린다. 1997년부터 매년 열리는 이 축제에서는 백련을 비롯해 홍련, 수련, 어리연, 가시연 등 각종 연꽃과 함께 수생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랑, 소망 그리고 인연’이라는 주제로 소망등을 달고 백련가래떡 나눔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연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카페를 운영하며 연차시음 및 행다시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밖에 연꽃얼음물길, 연꽃우산거리, 안개분수거리, 바람개비동산 등 연꽃의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특별 산책로도 걸어볼 수 있다.
기간 7월 25~28일 장소 전남 무안군 회산백련지 일원
알프스하동 섬진강문화재첩축제
경상남도 하동군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알프스하동 섬진강문화재첩축제’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을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로 손꼽힌다. 2015년부터 시작한 ‘섬진강문화재첩축제’는 먹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남녀노소가 참여하고 소통하는 축제로 인기다. 재첩홍보판매관 및 재첩시식관을 운영하고, 특산품 전시와 판매도 겸한다. 축제의 주요 행사로 ‘하동청년회의소와 함께하는 치맥페스티벌’, ‘정두수 전국가요제’, ‘황금(은) 재첩을 찾아라’, ‘섬진강을 날아라!(무동력 행글라이더대회)’가 열린다.
기간 7월 26~29일 장소 경남 하동군 송림공원 및 섬진강 일원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
토마토를 주제로 한 축제가 논산에서도 열린다.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인 스페인토마토축제를 벤치마킹한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은 무더운 시기에 열리는 만큼 물총축제도 겸한다.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토마토 던지기, 토마토를 주제로 한 요리와 샴페인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는 복합문화체험 축제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여름 페스티벌로 자리 잡을 계획이라고. 매일 밤마다 버스킹 공연이 이어지고 주말 저녁에는 K팝을 좋아하는 외국 여행객들을 위한 콘서트도 열릴 예정이다.
기간 7월 19일~8월 18일 장소 충남 논산시 성동면 원남리 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