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 지난 바닷가 지키는 둥근바위솔!
- 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 걷는다 달빛은 모래 위에 가득 고이고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러운데 어깨 위에 쌓이는 당신의 손길~~ ― 송창식의 ‘철 지난 바닷가’ 중 당신이 정녕 ‘브라보 마이 라이프 세대’(이후 ‘브라보 세대’)가 맞는다면 찬바람 휑하니 부는 늦가을 저도 모르게 ‘소리 없는 사랑의 노래’를 주절주절할 겁니다. 송창식, 1960년대 말 통기타 하나 들고 불쑥 나타나 1970~1980년대 대중가요계의 한 봉우리를 차지했던 가수. 개인적인 선호의 차이는 다소 있겠지만 당신이 50대에서 70~80대 사이 ‘브라보 세대’에 속한다면 누구든 그의 노래 한두 곡쯤은 부지불식간에 웅얼거리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입가에 맴도는 그의 노래 하나가 바로 ‘철 지난 바닷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현재의 감각에 비춰 봐도 세련됐으면서도 서정적이며, 더없이 예쁜 노랫말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스러지고 이지러진 가을의 바닷가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첫 세 음절 ‘철 지난’은 이 노랫말의 백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원색 비키니 차림의 젊은 아가씨들과 터질 듯 검게 그을린 근육질의 사내들이 뒤엉킨 한여름의 뜨거운 바닷가가 아닌, 가버린 청춘과 사랑의 쓸쓸함과 애잔함, 애수만이 남아 있을 법한 철 지난, 늦가을의 바닷가에는 그러나 상상 외의 극적인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으레 “산에 가봤는데 도통 꽃이 없던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텅 빈 숲 마른 나무 사이로 의외로 여러 꽃이 남아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망초, 개쑥부쟁이, 서덜취, 이고들빼기, 마타리, 미역취, 달맞이꽃 등등. 그런데 이들은 새로 핀 게 아니라 봄여름부터 피고 지고 했건만 너무 흔하거나 평범해서 주목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못생긴 소나무가 뒷동산을 지킨다 하듯, 장삼이사 꽃들이 가장 늦게까지 산과 들을 빛낸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철 지난 바닷가에는 가을에 비로소 피는 꽃이 있습니다. 대개 10월부터 피지만, 곳에 따라선 11월은 물론 12월 초에도 새로 꽃대를 밀어 올려 싱싱한 꽃송이를 펼쳐 보이기도 합니다. ‘철 지난 바닷가의 수호신’이란 찬사가 절대 과하지 않은 둥근바위솔이 주인공입니다. 저 멀리 수평선부터 달려온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혀 스러지는 바닷가 절벽 위. 그 위 기나긴 오솔길을 거닐며 지나간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흐느끼지만 말고, 척박한 바위 겉에 뿌리를 내리고 기운찬 생명력을 보여주는 둥근바위솔을 찾아볼 일입니다.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던 18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스산했던 마음에 작은 위안이 찾아들 것입니다. 큰 것은 30cm까지 솟아오른, 촛대에 꽂힌 초 모양의 길쭉하고 뾰족한 꽃차례에 자잘한 꽃송이를 다닥다닥 단 채, 짙푸른 바다와 을씨년스런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둥근바위솔. 옷깃을 파고드는 찬 바닷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추선 둥근바위솔에선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을 듯한 굳건함과 의연함, 당당함이 엿보입니다. Where is it? 둥근바위솔은 오래된 기와지붕 위에서도 자란다 하여 와송(瓦松) 또는 순수한 우리말인 지붕지기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도 불리는 바위솔을 필두로 정선바위솔·연화바위솔·포천바위솔·가지바위솔·울릉연화바위솔·난쟁이바위솔·좀바위솔 등 국내에 자생하는 10여 종의 바위솔 속(屬) 식물의 하나다. 북으로 강원도 고성에서 삼척을 거쳐 부산, 거제 등 남해 도서까지 동·남쪽 바닷가에 폭넓게 자생한다. 잎이 가늘고 뾰족한 바위솔에 비해 넓고 둥글어서 둥근바위솔이란 이름을 얻었다. 주로 바닷가 바위 겉이나 모래 더미 사이에서 자란다.
- 2017-10-31 11:10
-
- 시간도 귀향도 멈춰버린 섬 ‘교동도’
- 강화도에 접어들어 관광객이 붐비는 도로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다 보면 앳된 군인이 차를 막아선다. 그가 전해준 비표는 이미 많은 이의 손을 거쳐 낡아 있었지만, 잃어버렸을 때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쥐어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때마침 잘 나오던 라디오 음악에 잡음이 끼어들며 괜한 으스스함을 더한다. 그렇게 언덕을 넘으니 교동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리 앞에서 다시 군인의 출입통제 시간에 대한 당부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이 섬과 마주할 수 있다.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와 말이다. 키가 큰 오동나무[喬桐]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자리 잡은 섬으로 면적으로는 14번째로 꼽힐 만큼 큰 섬이다. 섬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 때는 탈출이 어려운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연산군은 이 섬에 유배돼 생의 마지막을 보냈고 광해군과 임해군, 고종 황제의 조카 이준용도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고려 때는 중국과의 교역 중심지 중 한 곳이었지만, 교동도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부분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집성촌이라는 것이다. 교동도는 수영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탈북자가 있을 정도로 북한 황해도와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위해 교동도로 월남했던 황해도 도민들이 휴전 후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집성촌이 형성됐다. 교동도의 대표적 관광지로 꼽히는 대룡시장을 황해도 연백군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의 슬픈 사연도 시간의 흐름에 바래버린 것인지 대룡시장에서 만난 한 실향민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이 시장에서 실향민은 별로 없어요. 다들 일흔이 넘은 나이이니까요. 많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두 인천이나 서울로 떠나 남은 실향민 가족도 거의 없어요.” 실제로 대룡시장의 명물 중 하나였던 시계방도 이곳을 지키던 주인의 죽음으로 멈춰버렸지만, 이어받은 이가 없어 문을 닫았다. 시간이 멈춘 것이 이 때문인가 싶을 정도다. 실향민의 한, 켜켜이 쌓인 곳 이전까지 교동도는 북한 땅과 맞닿아 있는 탓에 출입제한이 있었고, 강화도에서 건너오는 뱃삯은 차량 편도가 1만6000원이나 되어 관광지로 환영받지도 못했다. 유동인구도 적었다. 이런 외부와의 단절은 시간이 지나도 그 시절을 붙잡아둔 듯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들었다. 약국이며 양복점이며 시계방, 잡화점 할 것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다. 교동도의 대룡시장이 유명해진 것은 지난 2010년 KBS2 TV 예능 프로그램 을 통해 소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19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얼마 후인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완공되면서 사람들의 높은 관심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이어졌다. 교동도 토박이들은 아직도 이런 관심에 의아해한다. 대체 이곳에 볼 게 뭐가 있다고 몰려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관광객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교동다방이다. 이 마을에 살면서 15년째 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은 섬의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한 이 중 하나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동네 장사였죠.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섬에 사람이 꽤 많았어요. 다들 쌀농사를 크게 지어 풍족했죠. 술 마시다 흥에 겨워 2차, 3차 오는 모임도 몇 개나 됐으니까요. 그러다 사람들이 서울로 빠져나가면서 한동안 섬이 조용했다가, 다리가 생기면서 관광객이 밀려들었어요. 여기 사방에 붙어 있는 메모도 다리가 생기면서 다녀간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써놓고 간 것들이에요. 장사가 잘될 때는 쌍화탕을 하루에 100잔까지 팔아봤어요. 이후 석모도에 다리가 생기면서 서울 사람들이 그리로 갔고, 요즘은 손님이 좀 줄었어요.” 대룡시장에서 관광객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간식 ‘꽈배기’다. 관광객들의 배를 채울 만한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교동도의 한 주민이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시장의 대표 상품이 됐다. 일부 상인이 놀러온 사람들이 물건은 안 사고 꽈배기만 입에 물고 다닌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최근에는 외지 상인들이 대룡시장의 빈 가게들을 채우면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복각해 곳곳에 붙여놓은 군사정권 시대의 포스터들도 시장의 옛 모습 위에 개성을 더하고 있다. 1970년대의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등 일부 가게의 수익은 마을 공동체를 위해 쓰인다. 북한과 맞닿은 땅 키가 낮은 시장 건물의 처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제는 낯선 제비집이다. 교동도 사람들에게 제비는 지켜야 할 귀한 손님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건물 안에 집을 지어도 내쫓는 법이 없다. 바다 건너 고향 연백평야의 흙을 물어다가 집을 짓는 제비를 마치 북한의 가족처럼 대하는 실향민들의 마음 때문이다. 시장 곳곳에는 제비집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동네 주민 중 한 사람은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맘껏 드나드는 제비가 부러워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라며 심지어 이곳 사람들은 간식도 제비콩을 즐겨 먹는다고 말한다. 대룡시장에서 차로 30분 정도 달려가면 망향대를 만날 수 있다. 실향민을 위한 작은 쉼터와 고향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 두 대가 설치되어 있다. 섬에 많지 않은 높은 장소 중에 군사시설을 피해 고른 탓인지 접근도 쉽지 않고 전망도 그리 시원치 않다. 그래도 지척에서 황해도 땅을 볼 수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북한 땅이 가깝다는 것은 실향민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지만 외지 출신 주민들에게는 공포가 되기도 한다. 2010년 바로 옆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이곳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한 주민은 자다 깨면 눈앞에 간첩이 서 있는 것 같은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며 한동안 불안장애로 신경정신과 치료도 받았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교동도는 다리가 생긴 지금까지도 일부 통제가 이뤄진다. 교동대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왕래가 완전히 차단된다. 여행지 정보를 미처 챙기지 못한 남녀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갇혀 밤을 지새울 수도 있겠다는 괜한 걱정이 든다. 섬 안에 대형 숙박시설은 아직 없지만 몇몇 민박집이 운영 중이다. 인력으로 만들어진 평야 교동도의 또 다른 이색적인 모습은 벼 이삭으로 가득한 넓은 평야다. 섬에 무슨 평야가 있을까 싶지만 육지에서도 보기 힘든 대형 농기계들을 길에서 쉽게 마주친다. 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미소가 이곳의 쌀농사 규모를 짐작케 한다. 교동도의 쌀은 맛이 좋기로 소문나 섬 주민의 넉넉한 생활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되어왔다. 섬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교동 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곧고 길게 쭉 뻗어 있어 한국전쟁 때 활주로로 사용되었을 정도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넓게 펼쳐진 논이 바다처럼 보이고, 가운데 작은 동산이 황금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진다. 교동도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 즉 분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땅이기 때문이다. 3개 섬 사이의 바다였던 이곳은 고려시대 때 대대적인 간척이 이뤄져 평야가 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영 장군이 간척을 주도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섬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지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구저수지는 가물치와 베스가 잘 잡히는 낚시 명소로 낚시꾼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난정저수지는 농업용 저수지로 지정돼 낚시는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으로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교동도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교동향교와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교동향교는 고려시대인 1127년에 창건돼 국내에 남아 있는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초입을 따라 펼쳐진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군락이 빚어내는 풍광은 이곳이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또 하나의 이유다. 교동도를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다면 강화군에서 만든 강화나들길 중 두 개의 교동도 코스를 추천한다. 바로 ‘교동도 다을새길’과 ‘교동도 메르메 가는 길’이다. 한 코스당 소요시간은 6시간. 만만치 않은 거리이지만 그래야 교동도의 멋진 풍광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 2017-10-27 14:39
-
- 예술인의 애인 ‘주모’를 만나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
-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 2017-10-12 09:25
-
- ’가마골소극장’ 셋방살이 극장 미래를 여는 극장으로 우뚝 솟다
- 한 극장이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힘없는 연극인들은 도시 개발, 상권 확장에 쉽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기억 속으로 사라진 극장만도 헤아릴 수 없는 요즘, 부산의 가마골소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소극장의 옛 추억을 간직한 시니어 세대와 무대를 지키고 싶은 젊은 연극인의 꿈이 담겨 있는 공간 가마골 소극장에 다녀왔다. 오늘도 내일도 극장문은 활짝 열린다 지난 7월 7일,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조용했던 마을에 풍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낯익은 배우가 박자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고 모두의 얼굴은 상기돼 기쁜 모습이었다. 한산했던 시골 동네에 부산 연극의 중심이던 가마골소극장이 들어섰다. 6층짜리 화려한 건물 안에는 공연장을 비롯해 주점, 카페 등 연극인과 시민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워졌다. 1986년 부산 광장동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가마골소극장은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산실을 담당하던 곳이다. 연희단거리패의 활동 무대가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졌을 때도 꾸준히 실험연극을 비롯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면서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중앙동과 광안리, 다시 광복동을 거쳐서 거제리로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도 다수 공연의 매진 행렬과 최대 유료객석 점유율을 기록한 내실 있는 극장이었다. 그러나 시대 기류에 못 이겨 폐관이 기로에 서기도 했다. 결국 길고 길었던 셋방살이 30년에 종지부를 찍고 100년 길이 남을 극장으로 기장군에 세워졌다. 역사와 추억을 품다 “현재 부산 기장군에 신축 중인 6층짜리 가마골소극장의 건물 1층은 포장마차로, 2층은 카페 오아시스로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위층은 극장과 극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것….”(2017년 7월호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 中) 가마골소극장에 관한 계획은 작년 7월 연희단거리패의 꼭두쇠 이윤택 인터뷰를 통해 본지에 소개된 바 있다. 막연한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을 극장 건립을 통해 보여준 것. 1층에는 목로주점 양산박이 있다. 이윤택이 신문기자이던 시절 한 시인을 돕기 위해 부산일보 기자 네 명과 함께 출자해 부산시 광복동 입구에 차렸다던 ‘양산박’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2층은 부산 국제시장 근처에 있던 클래식 음악 카페 오아시스의 향수가 묻어나는 곳으로 꾸몄다. 이윤택이 20대이던 시절 당시 돈 80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악 듣고 시 쓰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곳이 바로 카페 오아시스였다고. 그때처럼 LP판은 아니지만 지금의 카페 오아시스도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천장에는 지금까지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했던 작품의 포스터가 촘촘하게 붙어 있다. 극단과 극장의 세월을 가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콘서트, 세미나, 북콘서트를 통해 시민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로 이용할 계획이다. 2층에는 가마골소극장과 연희단거리패를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연출가였던 故 이윤주의 기념관과 북카페 ‘책굽는 가마’가 함께 자리했다. 2015년 투병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꽃같이 사라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윤주를 기리는 이윤주기념관에서는 그녀 연극생활의 시작과 끝을 만날 수 있다. 가마골소극장의 대표로서 서울보다는 부산 연극무대를 지켜왔던 이윤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몸짓과 목소리를 가졌던 배우이자 연극쟁이였다. 아동극 연출과 연극 에서 배우를 마지막으로 영영 사라진 그녀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북카페 ‘책굽는 가마’에는 연희단거리패가 지금까지 출판했던 도서와 연희단거리패 연극 200선을 구비해놓고 판매도 한다. 조용히 책을 읽고 차를 마시기에 좋다. 3층과 4층이 바로 가마골소극장이다. 120석 규모의 극장은 작은 무대이지만 높이와 경사각이 깊어 무대가 답답해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5층과 6층은 배우들의 숙소와 연희단거리패의 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아카이브도 마련돼 있다. 배우와 스태프가 직접 만들고 운영까지 하는 곳 가마골소극장에는 남다른 시스템이 있다. 바로 극단의 모든 구성원이 운영 주체다. 1층과 2층의 주점과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배우들과 스태프다. 분장을 하고 커피를 만들거나 서빙을 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한 배우가 곧바로 무대에 올라가기도 한다. 극장의 무대, 조명, 음향, 객석 등 사람들이 오가는 곳곳에도 극단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서려 있다. 연희단거리패 조명감독 겸 가마골소극장 대표인 조인곤씨는 “가마골소극장은 연희단거리패와 극단가마골, 가마골소극장의 역사 저장창고라고 생각한다”며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기장에는 미역도 있고 멸치도 있고 해수욕장도 있다. 그리고 가마골소극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
- 2017-09-05 10:58
-
- 인생의 또 다른 관찰 <더 테이블>
- 영화가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가 플랫폼(platform)이다. 요즘 이 단어가 IT 기업의 용어로 변질되어 그 낭만성이 많이 퇴색했지만, 본래는 기차역의 승강장을 지칭하는 말이다. 기차역은 서로 무관한 사람들이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공간이다. 어찌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들이 각기 자기 나름의 삶의 애환과 사연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스토리의 공간이기도 하다. 플랫폼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남편과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의 공간이고 군대 가는 연인을 배웅하는 여인의 애틋한 마음이 깃든 공간이다. 철없이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모정의 공간이기도 하고 죽은 남편이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눈 오는 플랫폼을 서성이는 애절한 공간이기도 하다. 조금 다르지만, 의 이별 장면은 최고의 플랫폼 장면으로 기억된다. 플랫폼은 무정하고 건조하게 늘 그 자리에 있기에 인간의 격정과 대비되며 그 낭만성을 극대화한다. 인간들의 모든 사연을 알고 있지만, 말없이 홀로 삭이며 든든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 때문에 줄곧 의인화되며 삶을 관조하는 상징이 된다. 인간들의 삶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표현할 때 플랫폼이 즐겨 활용되는 이유이다. 영화 은 바로 플랫폼 영화의 전형이다. 카페의 탁자는 아무 연관 없는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사물에 불과하다. 감독은 이 가구를 플랫폼 삼아 스쳐 가는 인간들을 관찰한다. 오늘 이 테이블에는 총 8명의 등장인물이 네 번에 걸쳐 머물다 간다. 그들의 사연은 연결성이 없으며 극히 사소한 삶의 단면만 노출할 뿐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맥락 없는 이야기에 각기 색깔을 입혀 사랑에 관한 기승전결을 엮어낸다. 그날 오전 테이블이 보는 첫 번째 사랑 이야기는 정유미와 정원준이 펼쳐낸다. 이미 스타가 된 전 여친 앞에서 전 남친인 주인공은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의도와 말은 줄곧 불일치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다. 젊은 시절 우리가 그랬듯이 말이다. 두 번째 사랑은 차분하며 관리할 줄 안다. 급격히 진전한 관계를 뒤로하고 불쑥 인도로 떠난 후 연락 없던 남자가 돌아와 다시 사랑을 이어가려 한다. 정은채와 전성우는 성숙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오후 테이블에 올려진 세 번째 이야기는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전환의 단계이다. 한예리와 김혜옥은 결혼 사기단의 짝이다. 그들은 새로 물색한 대상을 속일 계획을 짜면서 느닷없이 다가온 진짜 사랑에 당혹하면서도 메말랐던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큐피드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돈 많은 사기 결혼 상대가 아니라 돈 없는 직원에게 꽂혀버렸다. 그렇다! 사랑은 기획 상품이 아닌 것이다. 저녁나절 마지막 손님들은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결론이 아니라 사랑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결혼을 앞둔 임수정은 옛 남친인 연우진을 만난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으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남았나 보다. 여기서 임수정의 입을 통해 “왜 마음이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라는 우리가 아는 사랑과 결혼에 관한 가장 통속적인 대사와 마주친다. 영화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테이블에 놓인 꽃을 클로즈업한다. 이 꽃은 사랑에 대한 은유이다. 마지막 손님인 연우진은 우리의 젊은 날 애인을 기다리며 성냥개비를 쌓듯 꽃잎을 다 뜯어버린다. 사랑의 죽음을 암시한다. 소설도 좋지만, 가끔은 부담 없이 읽는 에세이도 좋다. 솜씨 있는 독립영화로 이름난 김종관 감독이 써 내린 사랑에 관한 에세이 한 편을 읽은 느낌이다. 영화 속 홍차처럼 입맛이 개운하다.
- 2017-09-05 10:49
-
- 가시밭길에서, 다시 꽃길에 서다
- 여기에 잘 웃는 부부가 있다. 남편의 인상은 얼핏 과묵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빙그레 슬며시 웃는 얼굴이다. 아내의 얼굴은 통째로 웃음 그릇이다. 웃음도 보시(布施)라지? 부부가 앉는 자리마다 환하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다. 귀농을 통해 얼굴에 정착한 경관이라는 게 아닌가. 엎치락뒤치락, 파란과 요행이 교차하는 게 인생이라는 미스터리 극이다. 조물주는 낮잠을 주무시다 깨어 심심하면 인간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 이랬다저랬다, 줬다 뺐었다, 횡포가 심하다. 그러나 인간은 뜻밖에도 견고한 작품이다. 벼락을 일곱 번이나 맞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지 않은가. 지금 내 앞에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곽성진(75)·이옥희(71)씨 부부 역시 일종의 날벼락을 맞은 바 있다. 그러나 끄떡없다. 쌩쌩하다. 도시라는 정글을 벗어나 참신한 시골생활을 누리고 있다. 산봉우리들이 덩실덩실 강강술래를 하는 소백산 자락, 옴팡진 산촌에 산다.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곽씨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결혼을 했으며, 사업으로 오랫동안 승승장구했다. 선박부품업체를 경영했었다.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사장이었다. 그러나 인간사가 흔히 그렇듯, 그가 구가했던 꽃길은 어느 사이 가시밭길로 바뀌었다. 졸지에 파산하면서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이었다지. 곽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완전한 추락이었어요. 그렇다고 주저앉아 굶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리어카를 장만해 포장마차를 차렸어요. 부끄럽습디다. 아내가 용기를 주더군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고…. 아내는 안주를 만들고 저는 손님들 시중을 들었어요. 다행히 장사가 잘됐어요. 잘나가던 시절에 일식집을 수시로 드나들던 가락을 살려 일식집 스타일의 안주와 술을 내놓았는데, 그게 적중했어요. 단기간 내에 소문이 좋게 났죠. 제법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그 자금으로 통닭가게를 인수해 운영했고, 그 역시 매우 번창했어요. 이후 아내는 일식집을 개업했고, 저는 건축업에 나섰어요. 그런데 이 건축업에서 다시 철저하게 무너졌어요. 두 번째 도산을 경험했던 겁니다.” 온탕과 냉탕을 거듭 넘나들었구나. 그 와중에 세월이라는 도적은 곽씨에게서 젊음을 앗아갔다. 쓸쓸하고 스산한 황혼의 동구에서, 그는 황급히 다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초원을 뒤덮은 풀처럼 수북한 걱정과 불안이 주야간에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이때 그의 등을 툭툭 치며, 임이시여, 걱정 마소서, 까짓것 다시 시작하면 그만 아니겠소, 라는 투로 당차게 재기를 독려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내 이옥희씨였다. 시골로 가자고, 농사를 짓자고, 소박한 낙원을 일구자고, 아내는 그리 주동했다. 곽씨는 선선히 응했다. 강인한 기질과 낙천적 근성을 겸비한 아내의 민첩한 상황 판단력을 믿어서였다. 부부는 즉시 귀농을 결행했다. 그게 10여 년 전의 일. 결과는 성공적. 비결은 근면 혹은 부부애. 옛일을 회고하는 곽씨의 언사는 수굿해 온순한 성정이 묻어난다. 군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强小農) “여기 예천군 은풍면 산촌은 원래 아내의 고향입니다. 아내에겐 유난한 향수가 있었어요. 늘그막엔 고향에 돌아가 살자는 얘기를 자주 했어요. 사업 파산이 결국 아내의 숙원을 이루게 한 셈이니 사람의 일이라는 게 참 묘하죠. 물론 부담이 없지는 않았어요.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가, 게다가 모든 걸 잃은 빈손으로, 과연 시골 정착이 가능할지 불안했어요.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거처를 마련하는 일, 농지를 구하는 일, 뭐 하나 만만한 게 없었겠죠?” “아내의 친지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자립이 가능했어요. 특히 처남이 집과 배 과수원을 빌려주고 농사를 도와줘 비교적 순탄하게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었죠.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사기술을 부지런히 배우기도 했고. 주 작목은 배였어요. 생과 상태로 출하하기도 했지만, 배즙 가공이 그보다 세 배쯤 소득이 높다는 걸 알고 배즙 생산에 집중했죠. 요즘은 칡즙, 양파즙, 가시오가피즙, 헛개나무즙도 생산합니다.” “판로 확보는 어떤 방식으로 했죠?”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의 책에서 힌트를 얻은 게 주효했습니다. 그는 한 개인이 평균 250명 정도와 인맥을 형성한다고 봤습디다. 여기서 그의 성공철학인 1대 250 법칙이 만들어집니다. 한 사람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그와 연결된 250명에게 호감을 사는 것과 같다는 논리죠. 공감이 됐어요. 그래서 제 주변의 친척, 친지, 친구 등 지인들과의 유대 형성에 공을 들였어요. 그게 판매망이 되었어요. 현재 제 핸드폰엔 2300명쯤의 고객명단이 입력돼 있습니다.” 곽씨는 이른바 6차 농업을 구현하고 있다. 1차 농업은 생산을, 2차는 가공을, 3차는 체험이나 관광 농업을 말한다. 이 셋을 통합한 게 6차 농업이다. 그의 농장 ‘소백산 웰빙농원’은 예천 군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소농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이는 거저 얻어진 성취가 아니다. 지진을 겪은 사람은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지진이 우리의 발밑을 서성거리는 걸 안다. 심혈을 기울이고서야 재앙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곽씨 내외는 온몸을 써 농사에 매달렸다. 내외가 농장에 쏟은 비지땀이 몇 드럼에 달할지는 뒷산 신령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다. 땀뿐이랴. 부단한 열정, 상황을 물고 늘어지는 집요한 정신, 패잔병처럼 여기는 눈총을 감수하는 뱃심까지 가세했을 테지. 예순이 넘은 빈털터리 늦깎이로 농사에 입문, 마침내 기세를 돋운다는 건 아마도 거의 이변이다. 곽씨는 은연중에, 노년의 귀농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소득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농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비유하자면, 작은 옹달샘 하나를 팠는데 거기에서 사시사철 샘물이 찰랑거린다 할까? 이 옹달샘은 계속 퍼 써도 마르질 않아요. 계속 샘물이 솟구치니까.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어요. 큰 분의 뜻이리라. 제가 천주교인입니다.” “머리 좋고, 의식 있고, 신념 강한 젊은 사람들조차 고전하는 게 귀농생활이라고들 해요. 정착 과정에서 가장 힘든 건 어떤 점이었나요?” “초기엔 괜히 왔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어요. 농사에 문외한이었다는 것, 그게 가장 난처했어요.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그러나 일단은 생계 문제가 워낙 다급해서 잡념을 거두고 일에만 몰두했죠. 실로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만만한 게 하나 없었지만 다 헤쳐 나왔어요. 사실,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겁날 건 없었어요. 왜냐면, 형편이 더 나빠질 수는 없었으니까(웃음).” 자연과 교제하며 산촌을 노니는 부부 사람의 난제는 대체로 시간이 해결해준다. 슬픔도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된다. 그러나 생계의 문제는 질이 다르다. 굴러떨어진 밑바닥 자체를 디딤돌로 삼아 기어이 뛰어올라야만 한다. 귀농은 그에게 비상 발령이었으며, 결과는 승전이었다. 도시에 버텨 재기를 꾀하기란 어려웠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그에게 도시와 시골의 장단점을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온갖 상품 시장과 문화가 구비된 도시의 편리성에 비하자면 시골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죠. 가령,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선 수십 리 먼 길을 달려 나가야만 하니까. 그러나 시골에선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명백한 장점이 있죠. 반면에 도시는 주로 인간끼리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고 말이죠. 경쟁과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골에 비해, 물적 조건이 중시되는 도시에선 정서적 안정을 취하기 어렵다는 점이 중대한 단점이라 봐요. 경제상의 기회가 많다는 건 도시의 최대 장점이겠고.” “시골의 자연이 좋다지만,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적막 속에 사는 일은 때로 고역이지 않을까요?” “단골 고객이라든가 도시의 지인들이 스스로 찾아와 식사와 대화를 즐기고 돌아갑니다. 그리운 벗들을 불러들여 회포를 푸는 일도 낙이에요. 고즈넉한 산촌에 살지만, 나름의 사교가 적절히 이뤄지는 것이죠. 갑갑증을 느끼진 못하고 살아요.”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에 잡음은 없었나요?” “이곳이 아내의 고향이라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에 용이했어요. 아내가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맹활약을 하기도 했죠. 농토에 질긴 애착을 갖고 평생을 살아온 원주민들에겐 특유의 자기 기준이라는 게 있습니다. 존중해야 할 대목이라 봐요. 과거의 시골 정서라는 게 붕괴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죠. 그러나 음식을 이웃과 나누길 즐기는 풍습은 여전합니다. 몸에 밴 나눔의 문화랄까. 이런 면은 꾸준히 지속되고 전승되면 좋겠어요. 그런데 남모를 고독을 느끼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호남 태생인 제가 영남에서 산 세월이 55년인데 아직도 호남사람이라며 은근히 무시한다는 거! 선거철엔 아예 입을 봉하고 살아요. 무시무시한 분위기라서(웃음).” 산등성이를 올라 사과 농장으로 들어선다. 사나운 8월의 폭염이 사과나무 잎사귀에 쏟아진다. 나무 아래론 푸른 그늘이 짙어 땀을 씻을 만하다. 재기를 목표로 삼아 귀농, 어언 70대 복판에 접어든 부부는 여전히 일벌레다. 그러나 사람이 일만 하면 무슨 재미? 여흥과 일락(逸樂)이 없다면 반쯤은 허사다. 부부는 자연과 교제하는 일로 산촌을 노닌다. 아침 햇살에 새벽안개가 어떻게 해산하는지를, 밤이면 별들이 모여 무슨 잔치를 벌이는지를 유심히 관람하겠지. 감관이 열리고, 촉수가 파랗게 서겠지. 그것으로 어쩌면 범람처럼 덮쳐오는 노년기의 우수를 능히 해치울 수도 있으렷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너럭바위, 사계 내내 짙푸른 솔숲에 번번이 눈이 가고 마음이 움직여요. 나 같은 노년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귀농으로 얻은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에요. 그럼에도 이즈음엔 다 부질없다는 허무감이 듭니다. 애초의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는 만족감 뒤에 찾아오는 허탈과 허무. 무엇으로 그걸 극복할지, 요즘 자주 생각에 사로잡혀요. 제가 말이죠, 사후 묘비명을 정해두기도 했어요. ‘여기 아내를 몹시 사랑하다가 떠난 사람이 묻혀 있다.’ 이게 제법 근사해 보였어요. 그러나 그마저 부질없다 느껴지는, 이 허무감의 정체는 무엇일꼬.” 인생의 황혼에 귀농이라는 새벽길을 훤하게 열어젖힌 사람의 눈가에 그늘이 서린다. 허무의 심연을 무슨 수로 건너나. 그는 화두 하나를 집어든 셈이다. 파란하늘에 뜬 흰구름 몇 조각, 당싯당싯 산을 넘는다.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8-30 10:42
-
- 고양이를 잡는 확실한 방법
- 70,80년대 농촌에는 쥐가 엄청 많았다. 먹이를 구하려고 집 마당의 볏단과 부엌을 뒤졌다. 논밭에는 분탕질 잔해가 널려있었다. 심지어 방안으로 뛰어들어 주인장의 밥상을 덮치는 녀석도 있었다. 지금의 멧돼지 출몰지역 주민처럼 농사를 다 망치지 말기를 바랄 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농산물 적당량을 쥐가 차지하는 것으로 양해할 지경이었다. “못 살겠다. 쥐를 잡자.” 주민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한 해에 몇 차례씩 같은 날을 잡아서 모든 주민과 학생을 동원하여 쥐잡기 운동을 벌였다. 그동안 집집마다 따로 쥐약을 놓았던 일은 풍선효과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을 전체에 쥐약을 놓고 쥐덫을 설치하는 일제소탕 작전을 하였다. 쥐꼬리를 모아서 실적을 보고하던 옛이야기다. 시간이 지나자 이 방법을 계속할 수 없었다. 개ㆍ돼지ㆍ닭 가축이 먼저 쥐약을 먹고 나자빠졌다. 영리한 쥐는 사람 냄새가 묻은 음식물이나 쥐덫에는 아예 접근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쥐덫에 걸리기도 하였다. “이건 아니지! 다른 방법을 찾자.”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쥐에게 시련이 커졌다. 쥐약과 덫을 없애고 집집마다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고양이는 항상 쥐를 잡는 구조다. 쥐가 고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고양이는 쥐가 파고들어간 땅굴까지 쫓아갔다. 쫓기는 쥐가 편안하게 살았던 논밭을 버리고 잘 보이지 않는 돌담장 틈으로 숨어들었다. 쥐가 잘 보이지 않자 농민들은 행복의 시작인 줄 알았다. “역시 고양이가 최고야!” 하면서 애지중지하였다. 고양이가 주인어른 밥상머리에 앉아서 음식을 받아먹기에 이르렀다. 강아지와 동급대우를 받는 반려동물이 되었다. 고양이의 전성시대였다. 그렇다고 고양이 때문에 쥐가 다 잡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자 배가 부른 고양이는 양지 바른 곳에서 낮잠 자기 바빴다. 쥐보다 덩치가 훨씬 큰 녀석들은 밤이 되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온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려운 쥐잡기 대신 닭과 계란의 포식자로 탈바꿈하였다. 고양이 수가 점점 많아졌다. 무대 위에 더 골치 아픈 주인공이 등장한 꼴이 되었다. “고양이 때문에 못 살겠다!” 하루아침에 반려동물에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돌담장 속에서 쥐가 아무리 떠들어도 몸집이 큰 고양이는 작은 틈을 뚫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긁어댔지만 뾰쪽한 방법이 되지 못하였다. 쥐들은 고양이를 무서워하거나 도망갈 이유가 사라졌다. 농산물이 풍부해지면서 추수하고 남은 ‘이삭’이 넓은 들판에 넘쳐났다. 쥐는 고양이에게 시달리던 때 먹이를 돌담장 속에 저장하는 요령을 터득하였다. 그전처럼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고양이는 말짱 허깨비야!” 고양이의 무용론에 힘이 실렸다. 고양이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가 식사 때에 나타나는 습성이 있다. 주인이 음식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면 집에 들어오지 않고 길고양이가 되고 만다. 주인과의 사랑 다툼에서도 애완견에게 밀려났다. 얼마 후 고양이가 마을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은 쥐들의 세상이 되었다. 항상 먹히기만 하였던 쥐들이 변화하는 환경을 이용하여 천적 고양이를 확실히 잡았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 2017-08-28 09:51
-
- 내 이름 사랑하기
- 한 살이 채 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읍내와 가까운 집성촌 친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첩첩산중 외가로 피난을 갔다.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살았던 외가는 차를 본 일도 타본 일도 없는, 해방소식도 종전 다음 해에야 알았다는 곳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입학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신원이나 부동산공부 정리가 매우 미진하였던 시절, 제대로 된 ‘호적’이 필요하게 되었다. 면사무소가 상당히 먼 거리에 있어서 한 차례 일처리하려면 며칠이 필요했던 옛이야기다. 민원서류가 당일 처리되지 않고 며칠 후 찾으러 다시가야 했다. 이장이 면사무소로 출장 갈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의 민원대행을 자청하였다. 농사에 바쁜 주민들은 그에게 민원심부름을 부탁하면서 고마워하였다. 아버님은 아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막걸리를 좋아한 그는 제때 심부름을 이행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급한 일 없는 주민들도 재촉할 이유도 없었다. 시간이 지난 다음 꼭 서류가 필요할 때에 챙기곤 하였다. 몇 해 넘겨서도 처리되지 않아 시비가 붙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른 사람과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형의 출생신고가 누락되어 동생 것이 먼저 되는 일도 생겼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이장이 내미는 호적등본을 보고 아버지는 기겁을 하였다. 집에서 부르고 족보에 기록된 내 이름 ‘백형섭’은 온데간데없이 ‘백외섭’으로 바뀌었고, 나이는 두 살이나 늦게 기록되어 있었다. 전쟁 중 태어난 세 살 터울 동생 이름에도 ‘외’가 붙었고 나이는 한 살 줄여서 두 살 차이로 만들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이렇게 틀려서 되겠느냐?”고 아버지가 추궁하였다. 이장은 술이 취하여 작사ㆍ작곡한 잘못을 부인하면서 “외가에서 자라면 외자를 붙여야 되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초등학교 다니면서 발생하였다. 동네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이름표에 새겨진 ‘외’자를 보고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외가 뭐야, 참외야 물외(오이의 사투리)야?” 참외는 맛이 있지만, 물외는 반찬이나 만드는 맛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별다른 관심이 없던 때였다. 부끄러워서 학교에 다니기 싫었다. 아버지에게 이름을 원래대로 바꾸어 달라고 떼를 쓰곤 하였으나 별 대책이 없었다. ‘외섭’은 수십 년 동안 족보에 오르지도 못했다. 성인이 된 다음에는 상대방이 내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원봉사 때나 사회교육 현장에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는 ‘백-외-섭’입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억하기 쉽도록 또박또박 끊어서 큰 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면 대부분 내 이름을 기억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 덕분에 편리한 점이 많다. 우편물이 착오로 배달되거나 엉뚱한 고지서가 날아오는 경우는 없다. 동명이인으로 헷갈리는 일도 없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하나뿐인 내 이름에 감격한다. 다른 사람과 혼용되지 않는 오롯이 나의 글과 이야기다. 이런 호사를 누린 경우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막걸리 한잔에 취하여 남의 이름을 확 틀리게 만들었던 옛 이장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는 대목이다. 이름은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아야 한다. 그렇다고 작명소를 찾거나 점집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 항렬을 따지다가 집안끼리 중복되거나 비슷하여 웃음거리가 되어서도 아니 된다. 한자식을 고집하여 남자 이름이 여자 같고, 여자 이름은 남자 같은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본다. 대한민국에 하나뿐인 내 이름이다. ‘참외든 물외’든 외자 붙은 내 이름을 사랑한다.
- 2017-08-25 10:51
-
-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라
-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면 ‘엄정대응’ 하겠다는 말 한 마디로 아까운 세월 다 보냈다. 강 건너 불 보듯 하다가 급기야 표적사격 하겠다는 엄포가 터지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핵을 쥐고 흔들면 고양이요, 핵이 없으면 그 앞의 쥐 신세가 지금의 세계다. 쥐에게는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쥐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그 소리를 듣고 미리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를 놓고 여러 날 동안 의논했지만, 목숨이 달린 그 위험한 일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처럼 실행에 옮기지 못할 일을 두고 공연히 의논만 하는 것을 ‘탁상공론’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속담 풀이는 여기까지다. 과연 고양이는 영원한 강자이고 쥐는 항상 약자인가. 고양이가 쥐에게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고양이 때문에 쥐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들의 생존법칙은 따로 있다. 필자가 어릴 적 살았던 농촌에는 쥐가 엄청 많았다. 집 마당은 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심지어 방안으로 뛰어드는 녀석들도 있었다. 지금의 멧돼지 출몰지역 주민처럼 농사를 다 망치지 말기를 바라고, 농산물 적당량을 쥐가 차지하는 것으로 양해할 지경이었다. 정부주도로 한 해에 몇 차례씩 모든 주민과 학생이 동원되어 ‘쥐퇴치’운동을 펼쳤다. 마을 전체에 쥐약을 놓고 쥐덫을 설치하였다. 쥐꼬리를 모아서 실적을 보고하던 옛이야기다. 몇 해가 지나자 이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사람 냄새가 묻은 음식물이나 쥐덫에는 아예 접근하지 않았다. 쥐약과 덫을 없애고 집집마다 고양이를 보급하였다. 고양이는 쥐가 파고들어간 땅굴까지 끝까지 추적하였다. 쥐가 도망갈 곳이 없어 보였다. 농민들은 행복의 시작인 줄 알고 고양이를 애지중지하였다. 그 수는 쥐보다 훨씬 많아졌다. 거기까지가 고양이의 한계였다. 쥐보다 덩치가 큰 녀석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농토를 운동장으로 만들었다. 몇 년 사이에 쥐들은 돌담장 사이로 도망가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 안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몸집이 큰 고양이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발톱만 긁어댈 뿐이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이 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쥐들은 옛날처럼 늘고, 고양이의 무용론이 힘을 얻었다. 애완견에게 주인과의 사랑 다툼에서도 밀려났다. 몇 년 사이에 들고양이가 되더니 아예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쥐들은 고양이에게 쫓기면서 마련한 돌담장 속에서 옛날보다 더 안전하게 살았다. 눈을 돌리면 숨이 막힌다. 우리의 머리 위로 핵폭탄이 날고 미사일로 우리 강토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고 야단법석이다. 생존을 위한 핵무장론이 힘을 얻고 있다. ‘핵전쟁 위협을 피할 수 없는가?’ 북한과 미국은 상황을 더 악화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나라는 한길밖에 없다. 북핵 위기 해결의 독자적 개입점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과제이다. ‘탁상공론’으로 치부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항상 먹혔던 쥐들이 환경을 잘 이용하여 천적 고양이를 몰아낸 이야기를 하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 2017-08-17 20:50
-
- 무심한듯 뭉클한 영화 <천수위의 낮과 밤>
-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뭉개다 일어나 TV를 보는 고등학생 아들 가오(량진룡 분). 그 시각 어머니 정 여사(포기정 분)는 동네 ‘Wellcome’ 슈퍼마켓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도입부만 보면 게으른 망나니 아들을 둔 홀어머니 고생담 아닐까 싶지만, 점차 관객은 가오가 HKCEE(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학생이며, 신문을 사오라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달라는 어머니의 소소한 심부름에도 군말 않는 착한 아들임을 알게 된다. 외할머니 생신 잔치 때, 외국을 들락거리는 잘사는 외삼촌 가족 사이에서 쭈뼛거리는 정 여사와 가오. 외할머니가 입원하자 가오는 바쁜 어머니 대신 사촌 여동생(진옥련 분)과 함께 부지런히 죽 도시락을 날라댄다. 외할머니는 “네 엄마는 일밖에 모른다. 남동생 둘을 다 공부시켰고, 맏딸로 고생 많이 했다”며 울먹인다. 이 장면은 공장에서 일하는 홍콩 여성들의 옛 사진과 남편의 관 앞에서 서럽게 우는 정 여사 모습으로 이어진다. 정 여사는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혼자 사는 할머니(진려운 분)의 TV 구입을 도와주고, 할머니는 말린 버섯을 선물한다. 서로 의지하는 이웃이 된 정 여사와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의 시험 결과를 궁금히 여긴다. 세상 떠난 딸이 남긴 유일한 자손인 손자가 보고 싶지만, 사위가 재혼해 맘놓고 전화하기도 힘든 할머니. 정 여사는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가는 할머니와 동행한다. 손자는 아르바이트로 바쁘다며 나오지 않고, 사위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준 게 없어서…”라며 내미는 금반지를 물리치고, “새 장모님이 아프셔서…” 하면서 음식 값을 치루고 훌쩍 나가버린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할머니는 “자네와 가오에게도 주려고 은반지를 샀어. 손자와 사위 내외에게 주려던 금붙이도 자네가 갖게”라며 반지 상자들을 내민다. 정 여사는 “그럼 간직해둘게요. 무슨 일이든 도와드릴게요” 한다. “나도 가오를 손자로 여기고 기도할게”라고 답하는 할머니. 중추절을 앞두고 월병(月饼) 티켓을 구해온 외삼촌(고지삼 분)은 배웅 나온 가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다. “네 유학비용은 걱정하지 마. 외삼촌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허안화 감독의 은 정 여사와 가오, 할머니의 일상(장을 보고, 조리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별스럽지 않은 하루하루)을 통해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밥 먹는 장면이 어찌나 많은지 고기와 푸성귀 볶음, 계란 부침과 국 등 두 개 이상 찬이 오르지 않는 식탁에,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입안에 쓸어 넣듯 하는 빠른 식사까지.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자랑하는 중국 요리를 느긋느긋 음미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초간단 조리와 초스피드 식사 장면으로 시간 흐름을 보여주며, 원제목인 ‘天水圍的日與夜’와 영어제목인 ‘The Way We Are’에 충실한 영화임을 증명하려는가 싶다. 먹는 문제를 중하게 혹은 별스럽지 않게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도 식사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중추절을 맞아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정 여사와 가오와 이웃 할머니. 웃으며 과일과 월병을 나누는 그들 뒤로 고층 아파트 불빛이 보이고, 창밖으로 이동한 카메라는 아파트 광장에 모여 중추절을 기리는 주민들을 보여준다. 노동으로 그날의 끼니를 장만하는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게도 달은 은은한 빛을 내린다. 이 영화는 허안화 감독의 생활 밀착형 세밀화 작품(, )의 맥을 잇고 있다. 가족과의 마작놀이 셈도 바로 치루는 정 여사의 반듯함, 금목걸이를 주고받는 정 여사와 할머니의 정서적 연대를 식사 장면처럼 무심하게 그려낸다. 눈썰미 좋은, 영화에 푹 빠진 관객이 아니라면 물처럼 흘려보내기 쉬운 장면들. 산다는 것은 밥 먹고 잠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소소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아들은 교회 선생님을 잠깐 흠모하고, 어머니는 늙고 병들며, 친척 장례식장에서 종이돈 접는 품앗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설명이나 교훈 없이 담백한 장면을 그리기만 했는데도 허안화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이 뻐근해진다. 세월이 흘러도 뭉클하게 떠올릴 것 같다. 허안화 감독의 작품에는 영화배우 같은 배우가 아닌, 마치 그 지역에 사는 평범한 외모의 실제 인물이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한다. 무심한 표정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삶의 회한을 미세하게 드러내는 포기정과 진려운의 연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은 영화 배경으로 천수위를 택함으로써 홍콩 현실을 담아내는 사회적 책무에도 충실하게 복무한다. 천수위(天水圍)는 1990년대 홍콩의 토지 개간으로 생긴 서민 주거 지역이다. 198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이들 30여 만 명이 살며 고층 아파트형 공용 주택이 많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적응과 사회 지원 부족으로 가정 폭력, 자살, 실업 등의 불행한 뉴스가 많았는데, 2007년 10월 어머니와 두 자녀가 고층 주택단지에서 사망한 사건이 유명하다. 홍콩과 중국은 하나가 됐지만, 영화에서는 높은 벽이 그려진다. 특히 천수위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몽콕 지역처럼 묘사된다. ‘슬픔의 도시’로 알려진 천수위는 중국과 홍콩의 관계, 홍콩의 정체성 모순이 집약된 배경으로 등장한다. 천수위를 배경으로 한 유국창 감독의 (2008)도 홍콩 영화 금상장 신인상과 미술상 후보에 오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천수위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허안화의 제안에 제작자는 영화가 음울해질 거라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그럼 아주 저렴한 텔레비전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9월에 촬영을 시작해 연말 전에 완성했다. 제작비도 100만 홍콩 달러 정도밖에 안 들었다. 고화질 HDV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을 본 제작진은 다음 작품인 (2009) 제작에 동의했다고 한다. 중국과 홍콩의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구 이동과 계급, 사회 격차를 은유적, 함축적으로 담아낸 은 제28회 금상장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는 과는 무관하다. 중국에서 온 웡히우링(장정초 분)과 리삼(임달화 분) 부부는 천수위의 아파트에 산다. 의처증 심한 리삼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아내를 폭행한다. 참다못한 웡히우링은 두 딸과 여성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한다. 리삼이 찾아와 마치 새 사람이라도 된 양 사과하며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가도 발작적으로 웡하우링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홍콩 남자와 사랑에 빠져 홍콩에서의 근사한 삶을 상상했던 중국인 아내의 팍팍한 일상. 이 나이를 초월한 두 여성의 우정을 그렸다면, 는 중국-홍콩 가족의 파멸 드라마다.
- 2017-08-11 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