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듯 뭉클한 영화 <천수위의 낮과 밤>

기사입력 2017-08-11 10:52 기사수정 2017-08-11 10:52

▲<천수위의 낮과 밤>(옥선희 동년기자)
▲<천수위의 낮과 밤>(옥선희 동년기자)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뭉개다 일어나 TV를 보는 고등학생 아들 가오(량진룡 분). 그 시각 어머니 정 여사(포기정 분)는 동네 ‘Wellcome’ 슈퍼마켓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도입부만 보면 게으른 망나니 아들을 둔 홀어머니 고생담 아닐까 싶지만, 점차 관객은 가오가 HKCEE(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학생이며, 신문을 사오라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달라는 어머니의 소소한 심부름에도 군말 않는 착한 아들임을 알게 된다.

외할머니 생신 잔치 때, 외국을 들락거리는 잘사는 외삼촌 가족 사이에서 쭈뼛거리는 정 여사와 가오. 외할머니가 입원하자 가오는 바쁜 어머니 대신 사촌 여동생(진옥련 분)과 함께 부지런히 죽 도시락을 날라댄다. 외할머니는 “네 엄마는 일밖에 모른다. 남동생 둘을 다 공부시켰고, 맏딸로 고생 많이 했다”며 울먹인다. 이 장면은 공장에서 일하는 홍콩 여성들의 옛 사진과 남편의 관 앞에서 서럽게 우는 정 여사 모습으로 이어진다.

정 여사는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혼자 사는 할머니(진려운 분)의 TV 구입을 도와주고, 할머니는 말린 버섯을 선물한다. 서로 의지하는 이웃이 된 정 여사와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의 시험 결과를 궁금히 여긴다. 세상 떠난 딸이 남긴 유일한 자손인 손자가 보고 싶지만, 사위가 재혼해 맘놓고 전화하기도 힘든 할머니. 정 여사는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가는 할머니와 동행한다. 손자는 아르바이트로 바쁘다며 나오지 않고, 사위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준 게 없어서…”라며 내미는 금반지를 물리치고, “새 장모님이 아프셔서…” 하면서 음식 값을 치루고 훌쩍 나가버린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할머니는 “자네와 가오에게도 주려고 은반지를 샀어. 손자와 사위 내외에게 주려던 금붙이도 자네가 갖게”라며 반지 상자들을 내민다. 정 여사는 “그럼 간직해둘게요. 무슨 일이든 도와드릴게요” 한다. “나도 가오를 손자로 여기고 기도할게”라고 답하는 할머니.

중추절을 앞두고 월병(月饼) 티켓을 구해온 외삼촌(고지삼 분)은 배웅 나온 가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다. “네 유학비용은 걱정하지 마. 외삼촌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허안화 감독의 <천수위의 낮과 밤>은 정 여사와 가오, 할머니의 일상(장을 보고, 조리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별스럽지 않은 하루하루)을 통해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밥 먹는 장면이 어찌나 많은지 고기와 푸성귀 볶음, 계란 부침과 국 등 두 개 이상 찬이 오르지 않는 식탁에,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입안에 쓸어 넣듯 하는 빠른 식사까지.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자랑하는 중국 요리를 느긋느긋 음미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초간단 조리와 초스피드 식사 장면으로 시간 흐름을 보여주며, 원제목인 ‘天水圍的日與夜’와 영어제목인 ‘The Way We Are’에 충실한 영화임을 증명하려는가 싶다.

먹는 문제를 중하게 혹은 별스럽지 않게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도 식사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중추절을 맞아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정 여사와 가오와 이웃 할머니. 웃으며 과일과 월병을 나누는 그들 뒤로 고층 아파트 불빛이 보이고, 창밖으로 이동한 카메라는 아파트 광장에 모여 중추절을 기리는 주민들을 보여준다. 노동으로 그날의 끼니를 장만하는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게도 달은 은은한 빛을 내린다.

이 영화는 허안화 감독의 생활 밀착형 세밀화 작품(<여인 사십>, <심플 라이프>)의 맥을 잇고 있다. 가족과의 마작놀이 셈도 바로 치루는 정 여사의 반듯함, 금목걸이를 주고받는 정 여사와 할머니의 정서적 연대를 식사 장면처럼 무심하게 그려낸다. 눈썰미 좋은, 영화에 푹 빠진 관객이 아니라면 물처럼 흘려보내기 쉬운 장면들. 산다는 것은 밥 먹고 잠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소소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아들은 교회 선생님을 잠깐 흠모하고, 어머니는 늙고 병들며, 친척 장례식장에서 종이돈 접는 품앗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설명이나 교훈 없이 담백한 장면을 그리기만 했는데도 허안화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이 뻐근해진다. 세월이 흘러도 뭉클하게 떠올릴 것 같다. 허안화 감독의 작품에는 영화배우 같은 배우가 아닌, 마치 그 지역에 사는 평범한 외모의 실제 인물이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한다. 무심한 표정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삶의 회한을 미세하게 드러내는 포기정과 진려운의 연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천수위의 낮과 밤>은 영화 배경으로 천수위를 택함으로써 홍콩 현실을 담아내는 사회적 책무에도 충실하게 복무한다. 천수위(天水圍)는 1990년대 홍콩의 토지 개간으로 생긴 서민 주거 지역이다. 198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이들 30여 만 명이 살며 고층 아파트형 공용 주택이 많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적응과 사회 지원 부족으로 가정 폭력, 자살, 실업 등의 불행한 뉴스가 많았는데, 2007년 10월 어머니와 두 자녀가 고층 주택단지에서 사망한 사건이 유명하다.

홍콩과 중국은 하나가 됐지만, 영화에서는 높은 벽이 그려진다. 특히 천수위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몽콕 지역처럼 묘사된다. ‘슬픔의 도시’로 알려진 천수위는 중국과 홍콩의 관계, 홍콩의 정체성 모순이 집약된 배경으로 등장한다. 천수위를 배경으로 한 유국창 감독의 <위성(圍城)>(2008)도 홍콩 영화 금상장 신인상과 미술상 후보에 오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천수위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허안화의 제안에 제작자는 영화가 음울해질 거라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그럼 아주 저렴한 텔레비전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9월에 촬영을 시작해 연말 전에 완성했다. 제작비도 100만 홍콩 달러 정도밖에 안 들었다. 고화질 HDV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천수위의 낮과 밤>을 본 제작진은 다음 작품인 <천수위의 밤과 안개 天水圍的夜與霧>(2009) 제작에 동의했다고 한다.

중국과 홍콩의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구 이동과 계급, 사회 격차를 은유적, 함축적으로 담아낸 <천수위의 낮과 밤>은 제28회 금상장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천수위의 밤과 안개>는 <천수위의 낮과 밤>과는 무관하다. 중국에서 온 웡히우링(장정초 분)과 리삼(임달화 분) 부부는 천수위의 아파트에 산다. 의처증 심한 리삼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아내를 폭행한다. 참다못한 웡히우링은 두 딸과 여성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한다. 리삼이 찾아와 마치 새 사람이라도 된 양 사과하며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가도 발작적으로 웡하우링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홍콩 남자와 사랑에 빠져 홍콩에서의 근사한 삶을 상상했던 중국인 아내의 팍팍한 일상. <천수위의 낮과 밤>이 나이를 초월한 두 여성의 우정을 그렸다면, <천수위의 밤과 안개>는 중국-홍콩 가족의 파멸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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