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는 단순히 오래된, 옛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50년째 장사를 이어온 노포와 1970년대 인테리어로 새로 문을 연 식당. 전자는 전통이라 말하고, 후자가 ‘레트로’라 하겠다. 이러한 레트로 콘셉트의 가게들은 중장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와 함께 데이트 즐기기 좋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 익선동 한옥섬을 한눈에 ‘낙원장’
옹기종기 기와지붕 아래 레트로풍 맛집과 아틀리에가 즐비한 익선동 거리. 부티크호텔 ‘낙원장’에서는 골목을 가득 메운 한옥 150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지어졌던 ‘그린필드’라는 낡은 여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매입, 지역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시킨 공간이다. 클래식한 건물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레트로 플레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객실은 일반뷰와 한옥뷰, 프리미엄 한옥뷰 총 3단계로 나뉜다. 그중 LP플레이어가 있는 한옥뷰 룸을 선택하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선동 풍경과 함께 LP음악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5 숙박비 평일(일~목) 7만~9만 원, 주말(금~토) 9만~11만 원
◇ 아날로그 선율에 빠지다 ‘바이닐 앤 플라스틱’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PLASTIC)’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음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음악체험형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소재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 왼편으로는 턴테이블이 놓인 긴 탁자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바이닐 앤 플라스틱이 선정한 200장의 LP명반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서는 클래식, 재즈&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LP음반 9000여 장과 다양한 음향장비를 전시, 판매한다. 2층은 1만6000장에 달하는 CD와 더불어 음악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공간으로 꾸며져 여유를 즐기기 좋다.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이용시간 화~토요일 12:00~21:00, 일요일 12:00~18:00 (현대카드 미소지자도 입장 가능)
◇ 한국·태국의 퓨전 레트로 맛집 ‘동남아’
태국요리전문점 ‘동남아’의 입구.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검푸른색 철문을 활짝 열면 레드벨벳 커튼과 이국적인 샹들리에가 맞이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오묘한 식당은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한 실내는 태국 연회장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로, 동남아 여행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표현했단다. 메인 홀 외에 공간을 다양하게 나누었는데, 룸마다 강렬한 색감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중탕 욕조(?)를 연상케 하는 앞마당의 테이블은 겨울철 식사를 즐기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기 메뉴인 꽃게와 커리로 맛을 낸 ‘뿌빳 퐁 커리’와 태국식 볶음 쌀국수 ‘팟타이’ 등 현지 셰프가 요리한 다양한 오리지널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3-6 이용시간 매일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30~17:00(주말 제외)
◇ 도도한 모던걸의 화려한 외출 ‘경성의복’
익선동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개화기풍의 원피스와 정장을 입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궁 일대에서 한복 체험을 하듯, 이곳에서는 개화기 의상을 대여해 레트로 감성을 한껏 즐기는 것이 트렌드. ‘경성의복’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복고 의상과 셀프 촬영을 위한 포토존이 구비돼 있다. 고풍스러운 원피스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모던걸이 되어 거리를 누벼보는 것 어떨까?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56 2층 이용시간 매일 10:00~20:00
가격 의상대여(의상·장신구·모자·기타소품) 3시간 3만 원/6시간 4만 원/하루 4만5000원/1박2일 5만 원
◇ 딸과 데이트하는 날엔 ‘경양식 1920’
1980년대 전후, 가족외식 하면 떠오르는 경양식집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경양식 1920’. 레트로 거리로 유명해진 인선동 골목에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올 수 있는 외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추억의 메뉴들을 불러왔다. 24시간 숙성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실제 방문한 고객들을 살펴봐도 젊은 연인부터 엄마와 딸,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다. 사이드 메뉴로는 1980년대 경양식집에서 맛보던 수프와 멕시칸 사라다(샐러드)를 선보인다. 특별한 날에는 하우스 와인 한 잔 곁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17-30 이용시간 평일 12:00~22:00, 주말 11: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주말 제외)
◇ 뒹굴뒹굴 잠시 쉬어가는 ‘만홧가게’
과거 만화잡지 ‘챔프(CHAMP)’를 비롯해 ‘우주소년 아톰’,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과 그래픽노블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평일에 방문한다면 런치스페셜(라면·즉석밥·계란·김치/단무지+만화 1시간, 6000원)로 이용해보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3-7 영업시간 11:00~23:00 가격 1인 기준 10분당 500원, 좌석(주말 및 공휴일) 2000원
동년기자가 직접 다녀온 레트로 핫 플레이스
◇ 최원국 동년기자/ 돌고 도는 레트로 액티비티 ‘자이언트 롤러장’
부천의 레트로 명소 ‘자이언트 롤러장’. 방문한 날은 휴일이라 인파가 붐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여 년 전 부천의 ‘자이언트 롤러장’이 유명했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복고풍에 맞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30년 전 롤러를 타던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많이 찾는 듯하다. 롤러장의 경쾌한 분위기를 담당하는 DJ가 있어 음악에 맞춰 롤러를 타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곳곳에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을 이용하면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시니어라면 친구 또는 아이들과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위치 경기도 부천시 장말로 376 지하 1층 1일 입장료 성인 1만1000원, 유아~고등학생 9000원 영업시간 평일 12:00~22:00(무제한 이용), 주말 10:00~22:00(3시간 이용)
◇ 윤영애 동년기자/ 시간이 머무는 곳, 우유 카페 ‘희다’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하얀 3층집, 카페 희다. 낮은 계단을 테라스 삼아 나무 소반에 왕골방석이 놓인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젠가 분명 와본 듯 너무나 친숙한 느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냄새도 나는 듯하다. 높다란 1인용 앤티크 의자, 사각밥상 테이블, 양은 개다리소반, 자개문양 화장대와 거울, 낡은 찬장과 괘종시계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낡은 물건들에게 속말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니?’ 메뉴를 보니 우유가 주다. 기본 우유에 커피, 홍차, 말차, 페퍼민트, 미숫가루까지 6가지다. 사이드 메뉴로 옥춘당 때때사탕과 큼직한 레몬 마들렌도 있다.
프런트의 젊은이에게 주문을 하고 대표님이 누구시냐 물으니 본인이란다. 긴 생머리가 멋진 나두리 대표 역시 작년 7월 오픈 이래 가장 연로한 리포터가 왔다며 빙긋 웃는다. 주고객은 복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고, 우연히 동반한 부모님이 친구들과 다시 와서 단골이 된단다. 대부분의 물건은 나 대표 할머니가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고객의 평이 가장 맘에 든단다.
느슨한 공간에서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이 콘셉트였다는 나 대표의 의도는 조용한 음악과 소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 씌운 백열등, 도자기, 왕골바구니, 낡은 찬장 속 오래된 커피 잔과 유리컵까지 모든 것이 눈에 익어 정겹다.
‘희다’는 기쁘다[喜]와 많다[多], 즉 기쁨이 넘치는 곳 혹은 우유의 하얀 빛깔을 뜻한다. 오래됨과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다. 카페 한편에 ‘검다’라는 글자가 쓰인 화분을 가리키니, 개업 후 “희다인지, 검다인지 카페는 잘돼가냐?” 했다던 아버님의 조크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창밖 현관 옆에는 ‘웃다’라는 이름의 화분도 있다. 잠시 후 혼자 들어온 고객은 동네 주민이라며 아이를 기다리다 들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다면서 레트로풍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흡족해한다.
바람 불고 서늘한 가을의 어느 날, 논현동 도심 한복판에서 어릴 적 시골집을 본 듯하다. 500㎖의 대용량 미숫가루우유는 인심만큼 넉넉하다. 남겨온 때때사탕을 구순 노모에게 드리니 어디서 이런 사탕을 사왔냐며 좋아라 하신다. 시간이 멈춘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녀온 것처럼 왠지 마음이 따시다.
위치 서울시 서초구 주흥15길 16-4층 영업시간 매일 11:00~21:00
생물학적 수명과 함께 사회활동 기간이 길어지면서 액티브 시니어에게 또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바로 외모다. 모임이나 대인관계가 계속 유지되다 보니 여성 못지않게 외모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것. 그러나 중장년 남성의 경우 성형이나 미용시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자연스레 그 관심이 ‘다이어트’로 쏠리고 있다. “뱃살만 빼도 더 젊어 보일 텐데”라고 입을 모으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 하지만 전문의들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들의 뱃살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일까. 비만치료에만 집중하는 365mc의 노원점 채규희(蔡圭希·42) 원장을 통해 그 이유를 들어봤다.
“나이 들면 살이 잘 안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뭔가 손쉬운 해결책이 있을 것을 기대했는데, 각오하라는 경고로 시작된다. 다이어트는 역시 쉽게 볼 일이 아닌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성장호르몬이 줄면서 체내 근육량이 감소해요. 또 젊을 때보다 활동량이 줄면서 근육량 유지도 어렵게 되고요. 근육이 줄어드면 기초대사량이 줄어 섭취한 음식이 가진 열량을 모두 소비하지 못하고 지방의 형태로 체내에 저장하게 돼요.”
다이어트 약 거부감 되레 병 키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을 빼고 날씬한 몸매를 가질 수 있을까? 역시 기대했던 마법은 없다. 채 원장은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음식으로 발생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은 기초대사량이 70% 정도를 차지하고, 10%는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소모됩니다. 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밖에 안 돼요. 기본적으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데, 결국 음식을 적게 먹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셈이죠.”
의사들이 비만도를 측정하는 방법은 이렇다. 비만도의 지표인 체질량 지수는 BMI(Body Mass Index) 지수라고도 부르는데, 체중(kg)을 키(cm가 아닌 m를 기준)의 제곱으로 나눈 숫자다. 만약 키가 170cm이면서 몸무게가 70kg인 사람이 있다면 체질량 지수는 70/1.72, 즉 24.2가 된다. 채 원장은 이 지수가 치료 계획을 세울 때 기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체질량 지수가 30을 넘으면 비만으로 보고 약 처방을 합니다. 만약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성인병이 있다면 27 이상일 때 처방을 시작하고요. 물론 혈압이나 당뇨 수치가 약으로 조절이 안 된 상태라면 그것을 먼저 안정화시킨 다음에 체중을 줄일 수 있는 계획을 세워요.”
“또 약을 먹으라고?” 처방 제안을 받으면 아마 많은 중장년들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흔히 4종 세트라고 말하는 혈압약과 당뇨약, 고지혈약, 통풍약까지 챙겨 먹어야 하는 시니어가 적지 않다. 여기에 약 하나를 더하라니. 하지만 채 원장은 성인병 치료를 위해서도 체중조절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혈압이나 혈당 조절을 할 때 체중 감량이 중요합니다. 저희가 적극적으로 치료를 권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요즘 나오는 약들은 장기간 복용했을 때 문제가 생겼던 약과는 다릅니다. 임상실험을 통해 장기간 복용해도 문제가 없음이 증명됐어요.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체중감량을 위해 처방되는 약은 크게 3가지다. 식욕을 억제하는 약과 체지방분해를 촉진하는 약, 음식물의 흡수를 억제하는 약으로 나뉜다. 안전하지만 넘어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최소 3개월 이상 복용을 해야 효과가 나고, 끊게 되면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 약값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다이어트에 치명적인 술자리
사실 남성들에게 가장 큰 다이어트의 적은 바로 술과 외식이다. 다이어트 식단으로 식사를 해보려고 해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식당밥’을 먹는 경우가 대다수라 지키기 어렵고, 잦은 술자리는 뱃살을 더욱 두둑하게 만든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중장년 남성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죠. 늘 밖에서 식사를 해야 하니 다이어트 식단 같은 것은 꿈도 못 꿔요. 게다가 생맥주 3잔 혹은 소주 1병이면 밥 두 공기만큼의 칼로리와 맞먹어요. 여기에 안주까지 더하면 한 끼에 1만kcal에 육박할 수도 있어요.”
성인 남성의 하루 권장 섭취 열량은 2500kcal. 한 번의 술자리가 미치는 여파가 가늠이 된다. 그래서 채 원장이 권하는 것은 ‘야채 도시락’이다. 방울토마토나 오이 같은 야채를 도시락으로 갖고 다니다가 식사 때 꺼내어 밥과 함께 먹는 것이다. 포만감을 주기 때문에 식사량을 줄여주고, 염분섭취도 낮춰준다. 이것이 곤란하다면 식사마다 밥을 3분의 1가량 덜고 조금만 식사하는 것이 최소한의 대책이다.
특히 시니어에게는 과일이나 떡과 같은 간식도 치명적이다. 송편 3개만 먹어도 열량이 밥 한 공기와 맞먹는다. 과일은 건강에 좋으니 맘껏 먹어도 된다 생각하기 쉽지만 오해다. 과일 속 과당도 엄연한 당분이다. 먹으면 살로 간다.
해야 하는 운동, 몸이 따르지 않는다면
“무릎이 나가 우리는!” 지난해 방영된 모 소화제 광고에서 소화가 되지 않으면 걸으면 그만이라는 젊은이에게 이경규는 이렇게 일갈해 화제를 모았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 시니어 입장에선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릎이나 어깨, 허리 등 주요 관절에 크고 작은 질환이 있는 경우가 많다.
“관절에 문제가 있다면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 수중운동을 권합니다. 수영이나 아쿠아로빅 같은 운동이 대표적이죠.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고, 심폐기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돼요. 복부지방을 빼고 싶다면 빨리걷기도 효과가 좋습니다. 이런 운동들이 익숙해지고 근력운동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죠.”
뽈록한 배, 지방흡입 효과 있을까
중장년 남성의 다이어트 지향점은 날씬한 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배만 좀 날씬해진다면 다른 부위에 살이 좀 붙은 것쯤은 신경 쓸 거리도 안 된다. 그러니 길거리에 붙은 지방흡입 광고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운동도 싫고 약도 곤란하다면 확 들어내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채 원장은 “지방흡입도 만능은 아니다”고 말한다.
“복부는 윗배와 아랫배로 나눌 수 있는데, 윗배는 내장지방의 비중이 높고, 아랫배는 피하지방이 대부분이에요. 문제는 지방흡입 수술과 같은 방식이 효과적인 부분은 피하지방이라는 것이죠. 내장지방은 지방흡입으로 빼는 것보다는 운동이나 식이조절을 통한 체중감량이 더 효과적이에요. 결국 또 제자리인 셈이죠.(웃음) 지방흡입 수술은 내장지방을 직접적으로 감소시켜주는 건 아니지만, 체형 변화에 따른 동기부여 효과로 체중감량에 도움닫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남성들이 지방흡입을 주목하는 것이지요. 남성들은 시술에 대한 거부감도 여성에 비해 크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도 최근에 지방흡입 수술에 비해 간단하게 주사로 지방을 추출하는 시술이 개발되어서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합니다.”
채 원장은 마지막으로 효과적인 다이어트를 위해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환자들이 대부분 본인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 있어요. 말씀 나누다 보면 살찌는 원인을 파악하고 거꾸로 제게 알려줍니다. 갑자기 여러 가지를 뜯어 고치려 하기보다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한 두 가지 정도의 간단한 대책을 만들어 생활에 변화를 줘보시는 것이 지키기 좋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날 날씬해진 자신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이 맛을 모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해 본다. 한국인들만 김치찌개의 맛을 알고 즐기는 것이다.
어릴 때는 김치를 ‘짠지’라 하여 너무 짜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겨울철 채소가 귀하니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는 오래 두고 먹으려고 짜게 만든 것이다. 고춧가루가 제대로 안 들어가서 색깔마저 누랬다. 그러니 식욕이 날 리 없었다. 그러나 외식을 하면서부터 김치의 참맛을 알게 된 것이다.
외국을 여행할 때 주로 현지 음식을 먹다가도 한국 음식점이 있으면 반드시 들어가 김치찌개를 주문한다. 김치찌개를 먹고 나야 비로소 입맛도 살아나고 온몸에 활기가 도는 느낌이다. 한국에서도 이것저것 메뉴가 생각나지 않으면 김치찌개 집에 간다. 값도 싸고 어디에나 있어 가장 무난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김치는 배추에 여러 가지 양념이 들어간다. 종합 식품인 것이다. 양념에 따라 맛도 다르다. 그리고 익어가는 정도에 따라 맛도 달라진다. 이 세상에 그런 음식은 많지 않다. 위대한 발명이다. 대부분의 서양 음식은 음식 재료 그대로를 먹거나 기껏해야 익혀서 약간의 소스를 가미하거나 곁들여 먹는다. 그러나 김치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고급 음식이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갓 담은 김치보다 신 김치를 좋아한다. 배추의 하얀 속살과 가장자리 부근의 쪼그라진 노란 잎도 좋지만, 시고 매운 독특한 맛을 좋아한다.
김치 하나만 있으면 찌개 끓이기는 쉽다. 김치만 기름에 볶다가 물을 부어 다시 끓이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돼지비계가 들어가면 환상의 궁합이다. 돼지비계 대신 꽁치가 들어가기도 하고 요즘 구하기 쉬운 참치 통조림 하나를 까 넣어도 훌륭하다.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양파나 배를 갈아서 넣으면 꿀맛이다.
김치를 넣은 부대찌개를 먹으면서 김치를 뺀다면 무슨 맛일까 생각해 봤다. 원래 부대찌개의 기원은 한국 전쟁 직후 먹을 것이 없어 굶던 시절, 미군 부대 식당에서 버린 음식물을 찌개로 만든 것이다. 운이 좋으면 먹다 버린 햄, 소시지, 햄버거도 있고 뜯다가 만 닭 뼈도 들어 있었다. 먹다 만 빵조각이나 오렌지 껍질도 들어 있기도 하다. 심지어 담배꽁초가 섞여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냥 먹으라면 아무리 물을 붓고 끓였다지만 속이 메슥거릴 것이다. 그런데 여기 김치만 들어가면 훌륭한 부대찌개가 되는 것이다. 김치의 매운맛과 신맛이 부대찌개의 느끼한 맛을 없애주는 것이다. 빨간 기름 동동 뜬 국물은 입맛까지 돋워준다.
그러므로 각종 조림 음식도 김치가 들어가면 다른 양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국물이 많으면 찌개가 되는 것이고 국물 없이 조리하면 김치 조림, 김치 볶음이 된다. 꽁치나 갈치처럼 다른 식재료를 넣으면 꽁치조림, 갈치조림이 되는 것이다.
따로 먹더라도 김치는 훌륭한 배합이다. 밥 자체는 밍밍하지만, 김치와 같이 먹으면 짜고 매운 맛이 어우러지면서 풍미를 즐길 수 있다.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신 김치와 같이 먹으면 환상의 조합이 된다. 김치 없이 삼겹살만 먹으라고 한다면 고역이다. 몇 점 먹고 나면 더는 젓가락이 안 간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김치 선물이 들어온다. 냄새 나는 김치를 담아 온다는 것도 대단한 성의라서 받아 둔다. 깔끔한 플라스틱 용기를 일부러 사서 거기에 담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겨우내 다 먹지도 못한다. 김치가 없으면 안 되는데도 정작 많이 먹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침 한 끼만 집에서 먹고 점심 저녁은 밖에서 사 먹기 때문이다.
나는 당뇨 환자다. 2008년부터 벌써 10년이 되었다. 3개월마다 병원에 들러 건강을 확인한다. 그때 상황에 맞게 약을 써가며 관리를 해 오고 있지만, 체중은 자꾸만 늘어나고 당 수치도 점점 올라간다. 의사는 약으로 개선이 안 되면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단다. 인슐린 주사가 내심 겁나고 두렵다. 너무 비참한 생각이 든다. 인슐린 주사를 앞둔 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아직 검사도 안 했는데, 미리 겁먹고 두려워하는 것이 남 보기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래도 겁이 나는 걸 어쩌겠는가. 혹자는 그럴 것이다. 평소에 관리를 잘하지 왜 아플 때까지 있었느냐고.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당뇨병 진단을 받고부터는 운동에 식사조절까지 신경을 써가며 관리하느라 먹고 싶은 것도 마음 놓고 먹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이 즐거움이요 행복이라는데… 당뇨병 환자인 나는 이런 행복을 포기하고 살아온 지 벌써 10년째다.
모든 병이 그렇듯이, 당뇨도 하루아침에 생기는 병이 아니다. 우리 몸에서 발병하여 몸에 이상을 느낄 때쯤엔 벌써 많이 진행되어 버린 후다. 나도 그랬다. 2008년에 당뇨병 진단을 받았지만, 내 몸에서는 당뇨병 진단을 받기 15년 전쯤부터, 당뇨병이 야금야금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당뇨병 발병 15년 전에 유명한 종합병원에서 내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의사가 말했다.
“혈액검사에서 희귀병증세가 미세하게 나타나니까 체중관리와 건강관리를 특별히 잘해야 합니다.”
체중을 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땐 젊었고, 체중도 약간 과체중 정도였다. 지금처럼 비대하지도 않아서 건강하다고 생각되어 의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때 의사의 말대로 체중도 줄이고 건강관리에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오늘날 당뇨 환자가 되어 있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가 밀려온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라는 말은 명언인 동시에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할 말이라는 것을 뼛속 깊이 느꼈다.
2007년에, 아들이 책을 세트로 샀는데 증정품으로 받은 책이라면서 권해준 것이 일본의 판타지 소설 작가 ‘히라야마 미즈호’가 2006년에 쓴 ‘달콤한 나’라는 책이다. 당뇨병에 관한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엔 2007년에 번역판이 출판되었다.
작가는 1968년생인데, 30대 중반인 2003년에 갑자기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그것도 하루아침에 당뇨병 진단을 받았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당뇨병 진단을 받은 후, 작가가 당뇨에 관한 전문서적을 공부해서 생활습관을 바꾸고, 칼로리를 계산해 가며 음식을 조리해 먹고, 혈당관리에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진솔하게 쓴 책이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당뇨병 환자가 아니여서 관심도 없었고,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당연히 무관심하게 넘겼다. 읽을 때도 별 느낌 없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당뇨병 진단을 받게 되었다. 국민건강보험에서 2년에 한 번씩 하는 건강검진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이다. 이후 ‘달콤한 나’의 주인공처럼 칼로리를 계산해 가며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놓은 2권의 칼로리북은 두고두고 지금까지 사전처럼 유용하게 잘 사용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울에 달지 않아도 대략 눈짐작으로도 칼로리 계산이 나오고, 음식의 양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은 관리를 열심히 하였는데 2014년 가을부터 시니어센터와 복지관에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식을 하는 횟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외식이 늘 때마다 식사량도 조금씩 늘어나게 되고 더불어 혈당도 점점 올라가게 된 것이다. 조금씩 늘어나는 것에 대해 점점 무뎌가고 있는데도 나는 관심조차 기울이지를 않았다. 당뇨 경구용 약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약에만 의존하고 안일하게 지냈다. 1년 전부터는 시니어센터에서 사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아예 건강한 사람과 똑같이 먹고 다녔다. 혈당도 체중도 점점 올라갈 수밖에! 외식 때문이라는 건 순전히 핑계다. 사실, 먹는 욕심 많은 내 탓이지. 그때부터 진료받으러 갈 때마다 의사의 경고를 들었다.
“비용만 나가고 병은 점점 나빠지니, 이래서 되겠습니까? 약은 먹으나 마느냐고 효과가 없으니, 환자분도 노력을 기울이셔야지요. 식사량도 조금 줄이시고, 다음에 오실 때는 체중을 좀 줄여서 오세요.”
그때마다 늘 대답만 시원스레 하고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의사와의 약속을 어긴 죄로 최악의 사태를 맞았다. 약이 듣지를 않으니 다음번에는 인슐린 검사를 하자는 것이다. 인슐린 검사결과를 본 후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잠이 오겠는가.
인슐린검사가 있는 날, 상태가 안 좋아서 주사를 맞게 될까 봐 병원에 가는 동안 걱정이 앞섰다. 검사가 끝나고 진료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검사결과, 혈당검사는 공복혈당이 300에 가까웠다. 이 정도면 고혈당으로 위험한 지경에 와 있는 것이다. 인슐린 검사에서는 그나마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고, 조금은 생성되고 있지만, 작동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을 또다시 바꿨다.
“다음 진료 때까지 체중을 많이 빼고 오세요. 그때 결과 봐서, 그래도 달라진 것이 없으면 인슐린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 그때는 더는 미룰 수 없어요.”
하늘이 노래지고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지난 4년간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최악의 사태를 맞았다. 위기의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다. 책 ‘달콤한 나’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아들에게 물어봤더니 상자에 넣어서 베란다 창고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책을 꺼내 달라고 했다. 아들이 무거운 책 상자를 8개나 뒤져서 겨우 찾아냈다. 다른 때 같으면 아들이 힘든 것이 안쓰러워서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그 책을 꼭 다시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욕심에 그만, 이 더운 날씨에 아들을 힘들게 했다.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내가 작가의 처지가 되어서 지금 다시 읽으니 읽는 순간마다 작가의 피나는 노력에 코끝이 시큰하고 눈물이 난다. 당뇨병 교과서 같은 그 책을 보면서, 요즘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칼로리를 계산하고 식재료를 골라 조리해야겠다. 체중 감량이 안되면 다음 진료 때는 인슐린 주사 처방을 받을 수밖에는 없으니….
옛날 가수 한 영애 씨의 ‘조율’이란 노래를 좋아한다.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잠자는 하느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 주세요.’
나도 외치고 싶다. “하느님이여! 그 옛날 건강했던 때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라고.
실제 이야기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불분명하지만 인터넷상에 떠도는 이야기다. 어느 할아버지가 가출을 했다. 아들에게 편지를 써놨는데 “3번아 잘 있어라. 5번은 간다”라는 다소 모호한 내용이 있었다. 3번은 누구를 뜻하고 5번은 누구인가? 그 집의 권력순위 1위가 고등학생인 손자이고 2위는 며느리, 3위는 가장인 아들, 4위는 애완견, 마지막 5위가 할아버지라고 했다. 이 내용을 풀어보면 “아들아, 애비는 서러워서 집 나간다”라는 말이 된다.
1번, 2번은 권력 순위라기보다는 집에서 관심을 많이 받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불편한 진실은 집에서 순위의 근거가 나이가 많다거나 돈 벌어오는 거와는 별로 연관이 없다는 점이다. 돈을 많이 쓰는 사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쓰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권력 순위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친구 모임에서도 돈을 펑펑 잘 쓰는 친구가 늘 대장이다. 다음으로 돈 많은 친구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도록 아주 기분 좋게 펌프질하는 친구다.
직장에서 필자는 돈을 벌어오는 부서에 있었다. 수입을 많이 올리면 당연히 사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봉급쟁이 고용 사장의 속 깊은 예쁨은 필자보다 예산부장이 더 많이 받았다. 적자일 때는 필자가 들볶이지만 흑자일 때는 예산부장이 먼저, 필자는 늘 후순위로 칭찬을 들었다. 예산부장은 회사의 살림을 맡은 사람이다. 어느 날 사장으로부터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돈을 벌어왔지만 실제 그 돈을 쓰게 해주는 사람은 예산부장이다. 예산을 적절히 편성해서 내가 쓸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도 목소리 큰 사람은 안주인이다. 돈 벌어오는 남편은 성능 좋은 돈 버는 기계 대접이나 받는다. 정부의 기획예산처 장관도 다른 장관들보다 파워가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오면 뭐하나. 내가 쓸 수 없다면 그림의 돈이다.
아내는 자식들 앞에서 필자를 항시 앞세운다. “아빠가 오리고기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 외식은 오리고기로 하자” 하면 아무도 토 달지 않고 오리고기 집으로 낙착이 된다. 필자는 음식 메뉴 선택은 늘 아내에게 정하라고 하지만 아내는 언제나 필자 의중을 살핀다. 표정이나 말투에서 힌트를 얻어 필자 마음을 읽어낸다. 그리고 아빠의 뜻으로 몰고 가면 아이들도 반대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필자가 우리 집 권력순위 1위라고 늘 믿고 있다.
집 안에서 쓰는 돈 대부분은 아내의 손을 거친다. 설날 세뱃돈도 우리 부부 몫으로 합산해 아내가 단독으로 준다. 아내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왔지만 그 돈의 바탕은 할아버지이고 아버지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어린 손주들을 데리고 외식하면 아내가 카드로 계산을 한다. 이 장면을 아이들도 다 보고 있으니 당연히 할머니가 사는지 알까봐 아내는 “오늘 저녁은 할아버지가 쏘는 것이니까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드려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다. 아내는 직접 돈 쓰는 재미를 느끼고 나는 인사 받는 재미로 으쓱해진다.
최근에 경치 좋은 바닷가 리조트로 놀러갔다. 우리 부부와 딸 내외 그리고 외손자를 포함해 다섯 명이 갔다. 전날 저녁, 회를 안주로 과음을 해서인지 늦잠까지 잤다. 아침식사를 하러 나가자고 했지만 밥 생각이 별로 없었다. “곧 점심을 먹으면 되니 간단하게 라면이나 끓여먹자”라고 필자가 제안했다. 모두가 좋다며 컵라면을 사오겠다고 했다. “아니 컵라면 말고 끓여먹는 라면이 좋지”라고 즉각 제안을 했다. 당연히 아내가 필자 말에 맞장구쳐줄 줄 알았다. 그런데 “설거지하기 귀찮으니 컵라면 먹어요”라며 필자 말을 무시해버렸다. 게다가 필자 눈치를 살펴야 할 사위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컵라면 사오겠습니다” 하고 뛰어나갔다. 별것 아니지만 약간 체면이 손상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만한 일에 정색하기는 싫었다. 속으로 ‘이거 불안한 1위의 권력이 유지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잠깐 들기는 했다.
가정 내 가장의 권력은 경제력에서 나온다. 소설가 김훈은 남자는 죽는 날까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의 파워는 경제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남자들이 퇴직을 하고 수입이 없어 아내로부터 용돈을 받아쓰는 순간 날개 부러진 새의 신세가 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말하기 곤란한 곳에 돈 쓸 일도 있고 정당한 곳에 썼다고 해도 일일이 다 말해야 하는 상황도 마치 남자의 자존심이 구겨지듯 서럽다. 아이가 잘 때도 사탕봉지를 끌어안고 자듯 남자는 돈줄을 죽는 날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 이유다.
필자는 지금까지 번 돈을 아내에게 다 주지 않았다. 봉급의 일부를 아내에게 주고 재산 증식 등 대부분의 굵직한 돈 관리는 직접 했다. 물론 아내가 궁금해하지 않도록 쓰는 곳을 오픈했고 아내는 의심하지 않고 이해하고 잘 따라왔다. 아내는 엄밀히 말하면 가정살림을 꾸리는 필자의 고용 사장으로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본인의 의사대로 살림을 잘 해나갔다.
회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오너보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고용 사장이 실제 일은 다 한다. 우리 부부는 컵라면 사건처럼 작은 일에는 독단을 부리기도 하지만 늘 배려하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한다. 우리 집 권력순위 1위는 나인가? 아내인가? 필자가 아내를 받쳐주지 않으면, 아니 아내가 필자를 받쳐주지 않으면 우리 부부는 모래성의 성주에 불과하다. 평행선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 바퀴처럼 언제나 함께 달려야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집의 권력 1순위는 부부가 공동 1위라 하는 것이 맞겠다.
김영철(59) 바인그룹 대표는 가방에 MP3를 네댓 개씩 갖고 다닌다. MP3마다 영역별로 다운받은 강의 파일이 담겨 있다. 산책할 때도, 러닝머신에서도, 심지어 출장 갈 때도 늘 강의를 듣는다. “리더의 에너지는 공부에서 나온다. 공부는 가장 확실한 자기충전 방법이다. 리더가 직원들에게 나눠줄 것은 에너지다. 내가 매일 공부하는 이유다.” 김 대표의 지론이다. 알고 보니 그는 유도선수 출신. 무릎 연골 부상으로 유도를 그만두고,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동화책과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던 그는 35세의 나이에 1995년 교육전문기업 ‘동화세상 에듀코’를 창업한다. 동화세상 에듀코는 유아에서 성인까지 온·오프라인 교육을 망라, 티칭과 코칭을 아우르는 교육전문기업이다. 2017년 에듀코를 모체로 교육·유학·여행·외식·무역·건설 등을 계열사로 아우르는 바인(vine)그룹으로 전환했다. 말 그대로 포도송이처럼 선한 열매를 알차게 맺자는 의미에서의 새 출발 선포다.
신설동에 소재한 바인그룹 사옥은 마치 자기계발 실행의 모델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대표 집무실엔 실행 플랜 게시판과 2095년까지의 미래비전 백년달력이 걸려 있다. 직원 화장실엔 벽마다 눈 돌릴 틈 없이 명언이 빼곡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영철 대표가 건네는 명함엔 ‘나 김영철은 한평생 끊임없이 수양해 자신을 누리며 남들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명선언이 담겨 있다. 명함 타이틀도 바인그룹이 아니라 바인벤처다. 스타트업 벤처의 유연하면서도 맹렬한 야생정신을 배우겠다는 자기다짐의 의미다.
사옥 분위기뿐 아니라 김영철 대표도 마치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를 접하는 느낌입니다. 실제 저자들보다도 실행을 더 잘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교육의 힘을 믿습니다. 제가 그 덕을 실제 체험했고요. 자꾸 드러내서 가시화해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저부터 솔선하고 직원에게도 권합니다. 유도선수인 제가 사회에 나와 영업의 고수가 되고, 또 경영자로 변신할 때 사회에서 받은 강의, 교육이 큰 힘이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디에서든 교수, 강사란 말을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벌떡 일어나 90도로 감사인사를 합니다.”
김 대표는 직원들 교육에는 예산의 한도를 정해놓지 않고 좋은 프로그램은 아낌없이 받도록 한다. 권장을 넘어 아예 의무화해 놓았다. 아이디어 창조, 마인드, 스피치, 리더십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한 교육, 지닉스 교육을 받는다. 지닉스는 Genie(잠재력)+Explore(탐험·여행)의 합성어로 ‘내 안의 잠재력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기존 교육에 매번 새로운 교육이 더해지니 교육비 예산도 올라가게 마련이다. 직원의 성장판을 열려면 회사 예산의 천장을 없애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소신이다. 직원을 이용해 회사 성과를 올리기보다, 회사를 이용해 직원이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나름의 경영철학에서다. 본인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게 학력, 경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인재철학이다. 그는 “사과 씨 안엔 사과가 없지만 사과가 되지 않느냐”며 잠재력을 읽고 육성하는 게 바로 진정한 리더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잠재력이야말로 학력, 경력보다 확실한 인생 전공이기에 그것을 읽어주고 그것을 살펴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절부터 자기계발을 잘하셨습니까?
“하하. 웬걸요. 강원도 산골 가난한 농가 출신이라서 학교 다니는 것도 사치였어요. 유도를 하게 된 것도 고등학교, 대학교를 장학금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아보니 책 공부 말고 사람 공부도 큰 것 같아요. 동네 어른들께 어깨너머로 배운 예의범절, 더불어정신 등이 인생의 큰 공부더라고요. 남들은 흘려듣는 이야기도 저는 좋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게 귀담아들었어요. 유도하면 장학생 된다고 해서 유도 시작하고, 유도 국가대표 선수되려면 술, 여자, 담배를 멀리해야 한다고 해서 실천했고요. 그것도 자기계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하하.”
그가 자녀는 물론 직원들에게 늘 책, 이론 공부 못지않게 강조하는 게 정신 자세, 세상 공부, 즉 더불어정신이다. “혼자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다. 더 큰 성과는 옆 사람, 다른 분야와의 협업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기계발이 성공 처세술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라고 말한다. 박수 받는 것 못지않게 박수 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가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때 직원들과 비인기종목 외국선수팀 응원을 굳이 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누어주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계발이고 참교육이다.
유도와 경영, 얼핏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게 서로 통하는지요.
“유도를 하며 몸으로 익힌 정신력, 위기관리 능력, 팀워크, 후배를 챙기고 선배와 스승님을 모시는 진심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건 어느 분야, 어느 곳에서든 통하더군요. 그 외에 두려우면 피하기보다 부딪친다는 실행력, 모든 것에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성 등 몸으로 배운 것이 영업,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유도를 하다 다치시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출판사 영업사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최고성과를 내서 시쳇말로 영업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이 뭐였습니까.
“운동선수가 가진 승부근성과 체력이 도움이 됐어요. 좌절되니까 영업을 통해서라도 승부를 내겠다. 자존심도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달렸지요. 그러다 보니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더군요. 유도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라서 제 잠재능력을 잘 몰랐는데, 또 다른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고 영업뿐 아니라 조직관리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됐어요.”
선수를 그만둘 무렵 90kg에 육박했던 몸무게가 60kg대로 떨어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체력과 승부근성으로 넘길 수 있었다는 회고다. 영업사원 초기엔 거절당하면 상처도 많이 받았단다. 그냥 안 사면 되는데 모욕을 주며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영업사원의 근성이 있는데 그냥 물러설 수 없지 않은가. 때로는 덩치 좋아 보이는 그에게 시비조로 싸움을 거는 남자 고객도 있다. 어쩔 수 없이 한판 붙더라도 차마 때릴 수는 없으니 흠씬 두드려 맞고… 분한 눈물을 삼켰지만 그때 성질이 많이 순화됐다는 회고다. 그는 늘 현장정신을 강조한다. 관리직 직원들이 현장 경험을 필수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두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했다. 아버지의 궤도를 그대로 밟아 유도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현재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큰아들 김광섭 상무 역시 현장 경험을 거쳤다. 작은아들은 대학 때 아프리카에서 6개월 봉사를 하도록 했단다. 현장에서의 쓴맛은 인생에서 두고두고 위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해서다.
35세의 나이에 창업을 하셨지요. 23년간 사업을 해오시면서 위기의 격랑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역경은 몸을 다쳐 유도를 그만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위기도, 역경도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어떤 상황이든 역경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거든요. 제 평생 취미는 결심입니다. 창업을 하면서 결심했어요. ‘정상에 도전할 때 어떤 이유도 대지 않겠다, 어떤 장애물도 난관도 문제 삼지 않겠다, 나는 일이 힘들다고 불평 안 한다’라고요. 내 안의 잠재력을 작동시키려면 강렬한 의식을 계속 불어넣어줘야 해요. 나는 매일매일 결심해요. 고민하면 걱정이 생기지만 결심하면 꿈이 커집니다. 문제는 작아지고요.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을 초긍정으로 하면 그것이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더군요.”
습관이 운명이라고 하는데요. 운을 부르는 좋은 습관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운동과 신문 스크랩입니다. 사람은 배신당할 때 제일 상처가 깊다고 하는데요. 정작 사람들은 스스로를 배신해요.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 돌보지 않거든요. 그러다가 내 몸은 내가 잘 아는데, 이런 증세가 올 리가 없는데, 병에 걸릴 이유가 없는데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며 후회하지요.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해 배신을 당하는 것이지요.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운동습관을 생활 1순위로 놓고 있습니다. 평일 아침에는 달리기나 수영, 주말엔 가족과 등산 등을 규칙적으로 하려 해요. 그 외에 조간신문 6개 정도를 통독하고 직접 스크랩합니다. 한 달이면 얼추 스크랩 한 권이 채워집니다. 나중에 아들들에게 읽어보라 권하지요.”
정말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이시네요. ‘하면 된다’ 산업화 세대의 구호이지만 요즘 신세대는 ‘되면 한다’ 주의 아닙니까. 직원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력, 학력보다 미래의 잠재력을 믿어주면 서로 통하게 돼 있어요. 그들도 신임한다는 것 다 알더군요. 다만 7대 3의 법칙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7은 잘해주고 3은 요구하고 지적해야 해요.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면 자만심을 갖게 돼요. 반면에 지적만 해대면 심리적으로 위축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고요. 인재 육성을 할 때는 무조건적인 자애보다는 신념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자녀교육에도 적용됩니다.”
김 대표는 “한국 사람은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정해줄 때 능력을 엄청나게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 직원 4500명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공개했다. 이 번호로 하루에 200통의 문자가 온단다. 그중 제일 기쁜 내용은 “내 꿈을 이룰 계기를 마련했다.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바뀌었다”며 ‘비포 앤 애프터’의 성장기다. 직원들에게서 온 핸드폰 문자를 다시 읽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서도 기업이 매년 성장했습니다. 또 영역을 확장, 바인그룹으로 전환하셨는데요. 어떤 포부를 갖고 계십니까.
“창업할 때만 해도 말 그대로 한 맺힌 성공, 돈 많이 벌어 출세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습니다. 이후 기업의 가치관을 생각하게 됐어요. 성장을 통해 직원과 고객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직원성장, 고객성장을 통해 회사도 성장할 수 있는 백년기업으로요.”
김영철 대표는 앞으로 바인그룹은 엄청난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라며 3년 후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직원들의 잠재력을 믿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략)
리더가 팔로워를, 어른이 젊은이를 어마어마한 만남으로 서로 생각해 환대하고 대우할 때 우리 사회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김영철 바인그룹 회장
1960년생 강원도 양구군 출신으로, 학창시절 유도선수로 활동하였다. 대학시절 부상으로 유도의 꿈을 접고 출판사 영업사원을 했다. 1995년 교육전문기업 ㈜ 동화세상에듀코를 설립했고 2017년 10개 계열사를 운영하는 바인그룹으로 전환했다. 사람의 성장을 핵심가치로 둔 인재경영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간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중앙회 선정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상’ 수상,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얼마 전에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발언 중에 비정규직 급식 요원을 ‘밥 하는 아줌마’로 비하했다고, 매스컴의 공격을 받고 발언자가 당사자들인 급식요원 앞에서 공개 사과하고 곤욕을 치룬 일이 있었다.
옛날 우리 모두가 못 살던 시절, 서울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이면 거의 대부분 ‘밥하는 아줌마’인 가정부를 집에 두고 살았다. 다만 한 식구라도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빈곤한 농촌에서 어린 딸을 서울로 올려 보내 흔히들 말하는 상주하는 식모살이를 시켰다. 당시엔 식모라고 불렀으나 언제부터인가 파출부나 가정부로 변하더니 요새는 가사 도우미로 명칭이 바뀌어서 조선족들이 그 일을 많이 하고 있는 걸로 안다.
그 시절 추석이나 음력 설 때가 되면 가정부 언니들이 자기 시골집에 다녀온다고 해서 주인이 차비랑 시골 식구 선물 꾸러미를 안겨서 잘 다녀오라고 보내면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되어 사라지는 일도 있고 또 다른 집으로 스카우트 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 친정도 물론 필자가 결혼 할 때까지도 아줌마가 계셨고, 또 결혼 후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할 때도 살림을 돌봐 주는 도우미가 언니가 있었다.
금자 씨는 시골에서 초등학교 졸업을하고 어려서 우리 시댁에 들어와서 우리 시어머니 시중을 들며 자란 시댁의 도우미 언니였다. 금자씨는 46개 띠인 필자와는 띠 동갑으로 58 개띠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3살 때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28살에 결혼하는 날까지 15년을 우리와 함께 살았다. 금자 씨의 한문이나 영어 등의 중등 교육은 시어머니가 학습지를 배달 받아서 직접 시키셨다. 금자 씨가 어느 정도 자라서는 시어머니 대신 우리 집 가사 일을 책임지게 되었다. 사실 금자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사나 육아에 꽝인 필자가 그 시절로는 드물게 결혼 후에도 워킹 맘으로 활동을 하면서, 승진을 하고 또 총수 비서실장의 꼬리표를 달 수 없었을 것이다.
금자 씨가 나이 들어 결혼 적령기가 되자, 필자는 당시 시동생이 사장으로 있던 중소기업인 의료기 회사의 기술 사원과 선을 보고 두 달만에 결혼을 시켰다. 데이트는 주로 아파트 앞 정원에서 만나 외식은 압구정동 맥도날드에서 했다. 신랑은 가방 끈은 짧지만, 손재주와 머리가 좋고 A/S 기술도 좋아 회사에서 매우 촉망 받았던 의료 기구 기술자였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 했다고 수줍게 말하는 청년이었다.
필자의 아들을 내 대신 키워 준 금자 씨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던 필자는 마치 본인의 결혼처럼 설레고 신이 나서 가구 시장을 함께 돌아다니며 혼수 감을 준비했다. 물론 비싼 물건을 사서 주지는 못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티크 장롱과 설합장을 구입했다.
금자 씨 부부는 시어머니가 해준 미아리 방 한 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고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후에는 동대문 지하상가에 조그만 의료 소모품 및 의료 기구 상회를 차렸다.
점차 사업이 안정되고 애들이 자라자 부부는 자연스럽게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금자 씨의 아들은 아빠를 닮았는지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더니, 그 어렵다는 의대를 입학하고 거기서도 우수해서, 요즘 제일로 쳐준다는 안과를 선택하여 수련의를 마치고, 동료 의사인 방사선 여의사를 만나 얼마 전에 결혼했다.
이제 금자 씨는 의사 아들에다 의사 며느리까지 둔 시어머니가 되어,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며 남들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사람이 됐다. 금자 씨, 그대가 부러워요.
올해의 마지막 달력을 한 장 남긴 12월의 첫날 국내 최대 벤처창업 축제에 다녀왔다.
창업이라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식사업으로 생겼다 하면 얼마 안 가 간판이 바뀌고 가게가 없어지는 일을 많이 보아왔는데 이번 전시장에 와보니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이렇게 많다는데 놀라기도 했고 뿌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홍종학)가 주최하는 벤처창업 페스티벌이 11월 30일부터 3일간 강남 코엑스 전시 홀에서 열렸는데 필자는 둘째 날인 12월 1일에 참석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매우 다양한 수많은 벤처기업의 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페스티벌 프로그램은 창업자-투자자-미디어 매칭, 글로벌 컨퍼런스, 네트워킹 파티, 토크 콘서트, 제품전시, 데모데이, BJ 리뷰 등이 있고 벤처 창업기업, 투자자, 엑셀러레이터, 예비창업자 및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 참여대상이다.
생소한 용어도 많았는데 스타트업은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벤처기업이고 엑셀러레이터는 창업기업을 발굴하고 투자해서 키우는 스타트업에 초기자금과 멘토링 등을 제공하는 단체를 말한다.
‘혁신성장, 스타트업 생태계와 함께!’라는 슬로건으로 열린 이번 페스티벌의 목적은 창업자, 투자자, 엑셀러레이터 등 창업생태계 구성원 간 협력의 장을 통해 창업기업의 글로벌 성장을 촉진하는 데 있다.
넓은 전시장은 글로벌 창업생태계 교류를 위한 B홀의 유료행사와 벤처창업 붐 확산을 위한 C홀의 무료행사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었다.
다양한 벤처기업의 부스를 돌아보니 예비창업자나 초기, 도약창업자, 그리고 창업에 관심 있는 학생이나 일반인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할 만한 프로그램이 많은 것 같았다.
필자는 먼저 세 곳의 안내받은 벤처 부스를 찾았는데 건국대학교 학생이 창업한 스타트업 ‘팜스킨’이 눈에 띄었다.
젖소의 초유를 이용하는 독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버려지는 초유를 활용할 방법을 연구하다가 피부에 좋은 효과를 주는데 착안하여 마스크팩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젖소가 생산하는 초유의 아주 작은 양만 송아지가 먹고 나머지는 버려지는데 초유에는 많은 천연 생체 활성 성분이 있지만 아쉽게도 개발기술이 없어 그동안은 폐기되었다.
이에 팜스킨에서는 기술을 인정받아 도전 K스타트업 2017 특별상을 받았다.
청주의 청원 목장에서 원료를 공급받아 여성들의 필수품인 질 좋은 마스크 팩을 생산하는데 다른 제품과의 차별점은 마스크 팩 후 바르는 영양 크림이 같이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척 관심이 가는 제품을 생산하는 팜스킨 스타트업이다.
두 번째 방문한 곳은 2000년에 개업했다가 2004년에 폐업했었다는데 문제점을 보완하여 재도전해서 성공한 업체이다.
벡터 방식의 인쇄기술을 PDF 그대로 전자책을 제작할 수 있으며 사진도 확대 수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음원을 넣을 수도 있고 읽어주기도 가능하며 현재는 교육 쪽으로만 사용하지만, 일반 전자 인쇄 등으로 확대할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세 번째 취재한 곳은 노즈클린이라는 투명 코 마스크를 생산하는 곳이다.
실은 필자도 황사나 미세먼지 방지를 위해 마스크가 필요한 점은 잘 알고 있지만, 안경을 착용하는 입장에서 마스크 쓰는 게 매우 불편해 착용하지 않았다.
이 벤처창업가는 이점에 착안하여 콧속에 삽입하는 코 마스크를 개발했다는데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샘플로 하나씩 받아 착용해 보니 피톤치드의 상쾌한 향이 코를 시원하게 해주는 것처럼 청량한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실리콘 재질로 속에 한지 필터가 들어 있다는데 콧속에 넣었지만, 이물감도 없고 이대로 미세먼지나 나쁜 냄새까지 걸러준다니 기존의 쓰는 마스크보다 참으로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넓은 전시 홀의 각 부스마다 자신들만의 좋은 아이디어로 만든 제품을 홍보하려는 벤처 창업업체가 많았는데 이들 모두 성공해서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수많은 중소 벤처기업의 파이팅을 응원한다.
요즘은 출산율 저하로 인구감소를 걱정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둘만 낳아 잘 키우자’는 표어가 골목마다 나붙을 정도로 정부에서 산아제한을 적극 장려했다. 당시의 자녀의 평균수가 6명이라고 했으니 많긴 많았다.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난 필자는 생일날 아침에 쌀밥정도 먹는 것으로 생일날 호사는 끝났다. 요즘처럼 저녁외식이나 가족들이 모여 케이크를 자르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의식은 아예 모르고 살았다. 다만 농경사회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니 부모님 생일은 생신이라고 높여 부르며 인근에 사는 자식들이 모여들었다.
가족의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주는 것은 서로 가족임을 인식시켜준다.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밖에 나가서도 천대 받는다는 생각은 옳다. 가족의 생일을 기념하고 챙겨주는 행사는 어느 집에서나 잘한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일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 외식도 하고 케이크 위에 나이숫자대로 촛불도 밝혀 생일축하 노래와 촛불 끄는 행사를 하고 있다. 가족들이 손뼉 치며 노래하고 웃음꽃이 핀다. 지켜보는 가장인 필자도 흐뭇하다. 돌아가며 생일을 맞은 식구에게 한마디씩 덕담을 하도록 한다.그러나 필자의 생일만은 필자가하는 독특한 의식이 있다. 식구들보다 먼저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간편한 옷을 고쳐 입은 후 부모님 산소 쪽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마음속으로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는 말을 먼저 한다. 다음에 자녀들의 근황도 말씀 올리며 지금처럼 계속 보살펴 달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렇게 큰절을 올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부모님의 영혼도 좋아하실 것 같다는 느낌은 받는다.
산소 쪽 방향은 마음속 느낌으로 판단한다. 나침판을 사용하지 않으니 틀릴지도 모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내는 이런 필자의 행동을 보고 있지만 특별한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너희네 가정사정 이런 문제를 조상님께 보고하더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뜻을 쫒아서 실행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보아 느낌으로 짐작할 뿐이다.
21세기 문명과학시대에 귀신은 없다. 하지만 잠시나마 부모님이 우릴 키울 때 고생하시던 모습도 떠올리며 건강한 몸을 주신데 대해 부모님께 늘 감사한다. 생전에 자식 걱정만 하시던 분들이 부모님들이시니 하늘나라에서도 언제나 가족을 지켜주실 것으로 믿으니 든든한 빽이 있는 기분이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생일날 축하 인사만 받으려 하지 말고 나를 있게 해준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 먼저다. 건방진 소리지만 자식들에게 효행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의식이 나는 남과 다르다는 또 다른 자신감이다.
사돈은 아주 멀고도 어려운 사이라고 한다. 필자는 아들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사돈댁과 멀리 지내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서 필자는 “남들은 사돈이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는 좋은 사돈 사이가 돼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라고 말해버렸다.
그렇게 서로 격차가 나는 사이도 아니고 장인 장모 될 분들의 인상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쉽게 그 말이 튀어나왔나 보다.
우리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처음 보는 자리인데도 술을 좋아하시느냐며 자주 만나 술친구가 됐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사돈어른도 술을 몹시 즐기신다며 의기투합으로 화기애애한 자리가 되었다.
필자 주변에서 사돈들끼리 해외여행도 같이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은 적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필자도 사돈이 생기면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싶었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아이들이 결혼한 후에 충청지방에 계시는 사돈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1박 2일동안 계룡과 전주 시내까지 안내받아 여행도 잘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전주로 가는 길에 들른, 처음 가본 대둔산은 충남 논산시와 전북 완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는 명산으로 멀리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케이블카도 보이고 올려다본 하늘이 정말 맑고 푸르러 청정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근처의 수목원에는 이름도 모르는 탐스러운 꽃들과 소박한 야생화가 지천이었고 온통 꽃동산으로 예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계룡시와 전주는 충청도와 전라도로 그리 가까운 곳은 아닌듯한데 전주의 한옥마을 구경도 시켜주시고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대접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전주에는 막걸리를 주문하면 따라 나오는 안주가 10여 가지가 되는 술집이 유명하다고 한다.
맛집 소개 책에서 보았는데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할 때마다 푸짐한 토속안주가 한 상 가득 차려지며 필자가 좋아하는 삭힌 홍어는 기본으로 나온다니 언제든 전주지방 여행을 하면서 꼭 한번 들러야지 마음먹고 있는 곳이었다. 이번엔 사돈댁과의 동행이었으므로 그냥 간판만 보며 지나쳤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사람들이 많아 너무 혼잡해서 제대로의 모습을 감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옥마을이 생긴 유래를 알고 보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뿌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일제 강점기 중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데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고 한다.
그림 같은, 기와의 늘어진 곡선이 아름다운 용마루가 즐비한 한옥들이 눈길을 잡았다.
그리고 전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맛있기로 유명하다는 비빔밥집을 찾았다.
이렇게 초대를 받아 1박의 즐거운 여행을 다녀온 터라 그 후로 사돈이 서울에 오실 때면 자연스레 식사 대접을 하게 되었다.
외식도 몇 번 했지만, 집으로 오시게 하는 일이 많았다. 없는 솜씨지만 정성으로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사돈이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올라오셨다.
저녁에 오시라 해서 소박하게 한 상 차려 식사를 같이 했다.
친구들에게 사돈을 초대해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집에서 대접을 했느냐며 필자보고 대단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도 대단할 게 없는 게 특별한 요리를 한 것이 아니고 한식으로 불고기 상추쌈에 잡채, 생선구이 등 평소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준비를 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단한 음식을 생각하지 않고 소박하게 정성을 다해서 만든다면 초대가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혹시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은 되지만 "맛있네요" 라는 인사를 들으니 정말 기쁘다.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니 사돈이라고 다 어렵고 불편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필자에겐 하나밖에 없는 사돈댁과의 이런 사이가 너무 좋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