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발언 중에 비정규직 급식 요원을 ‘밥 하는 아줌마’로 비하했다고, 매스컴의 공격을 받고 발언자가 당사자들인 급식요원 앞에서 공개 사과하고 곤욕을 치룬 일이 있었다.
옛날 우리 모두가 못 살던 시절, 서울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이면 거의 대부분 ‘밥하는 아줌마’인 가정부를 집에 두고 살았다. 다만 한 식구라도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빈곤한 농촌에서 어린 딸을 서울로 올려 보내 흔히들 말하는 상주하는 식모살이를 시켰다. 당시엔 식모라고 불렀으나 언제부터인가 파출부나 가정부로 변하더니 요새는 가사 도우미로 명칭이 바뀌어서 조선족들이 그 일을 많이 하고 있는 걸로 안다.
그 시절 추석이나 음력 설 때가 되면 가정부 언니들이 자기 시골집에 다녀온다고 해서 주인이 차비랑 시골 식구 선물 꾸러미를 안겨서 잘 다녀오라고 보내면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되어 사라지는 일도 있고 또 다른 집으로 스카우트 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 친정도 물론 필자가 결혼 할 때까지도 아줌마가 계셨고, 또 결혼 후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할 때도 살림을 돌봐 주는 도우미가 언니가 있었다.
금자 씨는 시골에서 초등학교 졸업을하고 어려서 우리 시댁에 들어와서 우리 시어머니 시중을 들며 자란 시댁의 도우미 언니였다. 금자씨는 46개 띠인 필자와는 띠 동갑으로 58 개띠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3살 때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28살에 결혼하는 날까지 15년을 우리와 함께 살았다. 금자 씨의 한문이나 영어 등의 중등 교육은 시어머니가 학습지를 배달 받아서 직접 시키셨다. 금자 씨가 어느 정도 자라서는 시어머니 대신 우리 집 가사 일을 책임지게 되었다. 사실 금자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사나 육아에 꽝인 필자가 그 시절로는 드물게 결혼 후에도 워킹 맘으로 활동을 하면서, 승진을 하고 또 총수 비서실장의 꼬리표를 달 수 없었을 것이다.
금자 씨가 나이 들어 결혼 적령기가 되자, 필자는 당시 시동생이 사장으로 있던 중소기업인 의료기 회사의 기술 사원과 선을 보고 두 달만에 결혼을 시켰다. 데이트는 주로 아파트 앞 정원에서 만나 외식은 압구정동 맥도날드에서 했다. 신랑은 가방 끈은 짧지만, 손재주와 머리가 좋고 A/S 기술도 좋아 회사에서 매우 촉망 받았던 의료 기구 기술자였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 했다고 수줍게 말하는 청년이었다.
필자의 아들을 내 대신 키워 준 금자 씨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던 필자는 마치 본인의 결혼처럼 설레고 신이 나서 가구 시장을 함께 돌아다니며 혼수 감을 준비했다. 물론 비싼 물건을 사서 주지는 못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티크 장롱과 설합장을 구입했다.
금자 씨 부부는 시어머니가 해준 미아리 방 한 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고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후에는 동대문 지하상가에 조그만 의료 소모품 및 의료 기구 상회를 차렸다.
점차 사업이 안정되고 애들이 자라자 부부는 자연스럽게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금자 씨의 아들은 아빠를 닮았는지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더니, 그 어렵다는 의대를 입학하고 거기서도 우수해서, 요즘 제일로 쳐준다는 안과를 선택하여 수련의를 마치고, 동료 의사인 방사선 여의사를 만나 얼마 전에 결혼했다.
이제 금자 씨는 의사 아들에다 의사 며느리까지 둔 시어머니가 되어,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며 남들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사람이 됐다. 금자 씨, 그대가 부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