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능력을 거래하는 ‘재능마켓’은 은퇴 후 구직난 속 시니어들에게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있다. 오랫동안 쌓아온 능력과 기량을 뽐낼 기회의 장이 되는 것. 또 나이가 들면서 풀타임(Full time) 근무가 체력적으로 버거운 시니어에게도 좋은 대안이 된다. 취미 여가 액티비티 플랫폼 ‘프립’, 중장년 인재 매칭 플랫폼 ‘탤런트뱅크’, 온라인 강의 플랫폼 ‘클래스101’, 전문가 서비스 매칭 플랫폼 ‘숨고’ 등이 대표적인 재능마켓이다.
디지털이 익숙하지 않은 시니어들에게 재능마켓은 도전 의식을 가져야만 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왠지 2030을 위한 장일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일단 하나씩 시작해본다면 시니어에게도 재능마켓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좋은 기회가 된다. 재능마켓에 도전해보고 싶은 시니어를 위해, 먼저 그 시장에 뛰어든 시니어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60대 후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었다. 2007년 12월 제주 올레길이 처음 시작되면서 서울에서 제주를 자주 오고 갔다. 그러면서도 도시를 벗어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 안에서 느닷없이 서귀포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 ‘알레올레 차방’을 운영하는 배정자(81세) 씨는 제주로의 귀촌이 “운명적이었다”고 말했다.
‘알레올레 할머니의 차방’은 배 씨가 프립을 통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2만 원을 내면 그녀의 집 거실에서 그녀가 가꾼 차밭을 감상하며 그녀가 키운 꽃을 말린 꽃차를 내리며 담소를 나눌 수 있다. 차와 함께 곁들이는 색색의 구절판 다식은 눈도 마음도 즐겁게 해준다. 이곳에 다녀간 이들은 하나같이 “따뜻한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Q 2009년 2월 서귀포로 귀촌하고 에어비앤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서귀포로 내려오면서 무엇을 할지 정하고 온 건 아니었어요. 당시에는 제주 올레길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숙소가 많이 없었거든요. 지인이 올레길을 가려 하는데 재워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런데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졌죠. 그래서 에어비앤비를 하게 됐어요. 잠자리뿐만 아니라 아침도 만들어 제공했어요.
Q ‘알레올레 할머니의 차방’은 언제부터 하시게 되었나요?
제가 뜰을 가꾸는데, 꽃이 많아요. 2013년인지 2014년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때 우연히 꽃차 교육이 있는 걸 알게 되어서 배웠거든요. 그러면서 꽃차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하게 됐어요. 이후에 꽃차 체험을 하러 온 관광객들을 위한 프로그램 강사로 조금씩 활동을 하게 됐지요. 또 뜰에 있는 꽃으로 차를 만들어서 친구들과 나누기도 했고요. 그러다 지난해 12월부터 프립에서 꽃차 호스트로 활동하게 되었죠.
Q ‘알레올레’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알레는 불어에요. 영어로 말하자면 'go!'의 의미죠. 어딜 가라는 뜻은 아니고요. 유럽의 축구 경기를 보면 응원할 때 ‘알레! 알레!’ 하고 외치는 걸 볼 수 있어요. “자자, 열심히 해! 뛰어! 힘내!”라는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이에요.
올레는 제주 올레길의 올레입니다. 이전에 에어비앤비할 때 알레올레라는 이름을 썼는데요. 이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서 알레올레 차방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Q 차방을 운영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지난해에 80세가 됐어요. 나이가 드니 제일 걱정되는 게 “내가 치매에 걸리면 어쩌나” 싶더라고요.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나를 알고 제대로 살다 가야 할 텐데 싶더라고요. 아마 내 나이쯤 되면 다들 치매를 두려워할 거예요.
그래서 운동도 하고 노력도 했지만, 사실 나이 들어가며 가장 부족해지는 게 사람들과의 소통이에요. 만나는 사람들도 제한적이죠. 온종일 서너 마디 할 때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정말 치매 문제가 생길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무의미한 일상을 좀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요. 내가 좋아하는 찻자리를 열어 젊은 사람들과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시작했죠.
Q 온라인 플랫폼으로 차방을 시작하신 건데,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우리는 아날로그 세대잖아요. 제가 인스타도 하고 블로그도 하고 또래와 비교하면 많이 하는 편이지만, 디지털 시스템이 노인이 하기에 그렇게 편하지가 않아요. 그래도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서 하나하나 조금씩 해나가고 있어요. 적극적인 마음으로 배우려고 하면 누구든지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플랫폼을 사용하면 무작위로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라 시간을 약속하고 예약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Q 많은 분들이 수익을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모든 시간에 모든 사람을 꽉 채워 운영하고 있지는 않아요. 수익을 내는 게 목적이 아니어서 그래요. 하루에 평균 두 팀 정도 하는데 가장 적을 때는 두 사람이 왔다 가는 셈이죠. 그래서 저는 충분히 넉넉한 용돈 정도를 얻고 있습니다. 아, ‘노인’에게 넉넉한 용돈이에요.(웃음)
Q 어떤 분들이 많이 오시나요?
20대 중후반부터 70대까지가 저희 차방을 찾는 고객들인데요. 자제분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경우도 있어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지고 찾아오니 매일이 다르잖아요. 정말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Q 운영은 어떻게 하시나요?
전체 손님 중에 한 40% 정도가 혼자 오세요. 제 프로그램은 원래 한 타임당 4명 정도를 받게 설계했는데, 모르는 사람들끼리 함께 하는 예약은 거의 안 받아요. 만약 혼자 오신다면 한 분만 받아요. 이곳에 와서 이야기하면서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매우 많으시거든요. 요즘 젊은 분들이 고민도 많고 아픔도 많더라고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과 섞이면 진솔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잖아요.
저는 차방을 비즈니스로 생각해서 수입을 내려는 목적이 아니었어요. 찾아온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인생을 먼저 살아온 선배로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거든요. 할머니가 손주 이야기를 듣고 “이러면 더 좋지 않을까~? 할머니 생각은 이래.” 정도의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제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볼 때면 저도 기분이 좋아져요.
Q 여러 사람과 소통하고 싶었던 마음이 잘 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맙게도 어떤 세대와 이야기를 해도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고, 찾아온 손님들도 만족해하시고요. 어느 연령대가 오더라도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 스스로에게도 고맙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소기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곳에 오는 손님들에게 방명록을 받아요. 우리는 들으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싶은 건 방명록에 안 쓰는데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아니면 아니라고 한다면서요?(웃음) 고맙게도 차방을 운영하는 10개월 동안 많은 분들이 방명록에도, 프립에도 좋은 리뷰를 많이 적어주셨어요.
차방을 찾아주는 분들을 굉장히 고맙게 생각해요. 알레올레 차방에 오시는 모든 분들은 저에게 ‘귀한 선물’이에요.
‘유서 깊은 도시이면서 별나고 소박한 곳이자 서울의 심장과도 같은 곳’. 지난해 문화·엔터테인먼트 전문 온라인 매체 ‘타임아웃’이 ‘2021년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 29곳’에 종로3가를 3위로 올리며 남긴 한 줄 평이다. 별나고 소박한 서울의 심장에는 유서 깊은 솜씨로 몇 십 년 가까이 그곳을 지키는 베테랑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한 사람의 고유한 성정이 도드라지듯, 지역에는 정체성이라는 나이테가 남는다. 대학로에는 스물의 젊음이 넘실대고, 여의도 빌딩숲엔 양복쟁이들이 평일만 되면 파도처럼 밀려들며, 홍대앞에는 예술인들의 아지트 같은 작업실이 빼곡히 들어찼다. 모든 과정이 지역을 대표하는 정체성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로는 다소 오묘한 곳이다. 탑골공원에서는 어르신들이 모여 바둑을 두고, 책가방 멘 청년들은 종로 학원가의 어학원을 들락이며, 그 옆 인사동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바글거린다. 종로의 거리에는 SNS상에서 인증샷 장소로 인기인 카페와 빛바랜 노점상이 공존한다. 서울의 어제와 오늘, 젊음과 노련함이 뒤섞이는 지역을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종로의 정체성을 정의해야 한다면 모든 것을 끌어안을 줄 아는 중후함이라 하겠다. 그중에서도 나이테처럼 남아 종로 그 자체가 되어버린 베테랑을 찾아 나섰다. 예지동 시계골목, 귀금속거리와 광장시장, 낙원상가를 들러 네 가지 빛깔의 노련함을 담았다. 가게 문 손잡이에 손때가 묻고, 매일 두르는 앞치마의 색이 바랬을지언정 그들의 열정은 청춘 못지않게 빛나고 있었다.
권동희(85)
58년 경력, 진선미주단
“스물일곱 때 시작해 여기서만 60년 가까이 일했어요. 여기에선 내가 최연장자일걸.”
1904년 개장한 광장시장은 12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권동희 사장은 광장시장 2층 주단한복부의 터줏대감이다. 곱게 빗어 올린 머리와 화사한 한복 차림으로 58년째 주단을 취급하고 있다.
그가 ‘출근 룩’으로 한복을 고집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사장의 옷차림이 보기 좋아야 손님에게 옷을 권할 수 있지 않겠냐는 논리다. 한 달에 딱 하루, 마지막 주 일요일만 제외하고 매일 한복을 입은 셈이다. 그 덕에 처음 보는 손님과 어울리는 색상의 주단을 뽑아 드는 것쯤은 예삿일이다.
“일? 안 지겹고 항상 즐거워요. 여긴 행복한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라 덩달아 즐거워지거든.”
결혼을 앞둔 신랑·신부와 혼주가 진선미주단의 주 고객이다. 알음알음 입소문 타던 ‘베테랑의 솜씨’가 인터넷에 알려지면서 개량 한복 찾는 젊은이들, 해외로 이민 갔던 사람들 발걸음까지 잡아 이끈다. 한복에 대한 어머니의 열정은 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큰딸은 강남에서 한복 사업을 하고, 막내딸은 한복대회 모델로 활동했다.
점차 예식 규모가 축소되고 결혼식 모습이 다양해지는 요즘, 불문율처럼 여겨졌던 한복 차림 혼주들도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됐다. 아쉽지만, 그는 끝까지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려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전통 한복 한 벌쯤 간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한국을 대표하고 빛내는 것이 한복이잖아. 요즘 같은 시대에 한복 입는 것이 나라 사랑이나 다름없죠.”
김득균(61)
40년 경력, 한일사
“시계 겉모습만 봐도 안에 무슨 부품이 들어갔는지 훤히 보여요. 이 동네에서 시계수리기능사 자격증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한국산업인력공단은 2005년 시계수리기능사 자격증을 비롯한 40종목의 국가기술자격증 시험을 폐지했다.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판단해서다. 디지털 시계를 쓰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태엽 감는 기계식 시계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종묘 돌담길 옆 한일사의 김득균 대표는 시계수리기능사의 명맥을 잇고 있다. 열아홉 소년의 취미였고, 밑천 없어도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시계 수리 일은 40년 넘는 시간 동안 한 가정을 먹여 살리는 든든한 생업이 되었다. 경력을 인정받아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장을 지냈고, 시계기술학원 강사로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신뢰를 주는 게 가장 중요해요. 손님들은 시계를 맡길 때도 인간성을 보거든. 이 일은 장사하고는 달라서 꾸밈이 없어야 하지.”
진품을 가품으로 바꿔치기 하지는 않을지, 쓸데없는 수리를 추가하는 건 아닐지. 몇 백만 원에서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시계를 맡기는 입장에선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는 수리 전과 후 부품 사진을 찍어 고객이 확인할 수 있게 하고, 숙련된 솜씨를 바탕으로 저렴하게 수리한다. 한일사에 새로 온 손님은 단골이 되고, 단골은 새로운 손님을 소개해준다. 그렇게 그는 10년, 20년 뒤에도 종로 제일가는 시계 수리 장인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강규철(54)
31년 경력, 삼우주물
“낮에는 청소하면서 몰래몰래 훔쳐보고, 밤이나 새벽에 낮에 봤던 것을 한 번씩 만들어보고. 그렇게 배우느라 손일 익히는 데만 5년이 걸렸어요.”
반지 하나 잘 만들면 집 한 채도 거뜬히 사던 때가 있었다. 한 달 월급은 5000원, 그마저도 못 받고 기술 배우는 사람들이 훨씬 많던 시절이었다. 아는 형님 가게에 실습하러 나왔던 고등학교 시절의 강규철 대표가 주물 기술을 배우고자 마음먹었던 시기도 이때였다. 한쪽 눈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기술을 알려주겠다는 사람이 없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결국 주물집에 ‘시다’로 취직한 그는 남들보다 천천히 스스로를 단련해나갔다.
요즘이야 캐드(CAD) 프로그램으로 제품 설계와 제작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3D 프린터로 직접 샘플을 뽑을 수도 있다지만, 강 대표가 처음 일을 시작하던 시절엔 고무 가다(몰드)조차 없었다. 그럴 땐 열 개고 스무 개고 손수 똑같은 모양으로 주물을 만들어내야 했다. 오래도록 벼린 기술은 IMF 외환위기 이후 금값이 치솟으면서 닥친 불황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심지가 되었다.
아귀힘이 약해지기 전까지 마음만 먹으면 평생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는 2, 3년만 더 할 생각이란다. 아들이 더 이상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 산속에 들어가 살려고 일찍이 집도 마련해뒀다. 하지만 너털웃음 지으며 덧대는 마지막 말은 퍽 의미심장하다.
“이 일 하다 다른 일 한다고 나갔던 사람들 있죠? 4, 5년 정도 지나면 다 돌아와요. 일하던 가락이 있어서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작업할 거 하고, 자기 하고 싶을 때 일하는 게 편하거든.”
이세문(65)
40년 경력, 세영악기사
“아주 좋은데요. 소리도 괜찮고, 수리할 값어치가 있는 기타예요.”
세영악기사를 찾았을 때 이세문 대표는 30년 넘은 클래식 기타 줄을 튕기고 있었다. 아버지가 창고에 처박아뒀던 기타를 되살릴 수 있을까 싶어 찾아온 손님의 의뢰였다. 기타를 두드리고, 삐져나온 줄을 툭툭 잘라내는 손놀림이 경쾌하다. 관리 상태에 따라 100년 넘게도 사용할 수 있다보니 ‘기타 좀 안다’는 사람들은 멀리서도 믿고 맡길 수 있는 베테랑인 이 대표를 찾아온다.
“학교 다닐 때부터 기타를 만들었어요. 아는 형님이 기타 공장을 해서 접할 일이 많았거든.”
1982년 상경해 1986년부터 이곳 낙원상가에서 일했다. 지갑 가벼운 학생, 이름만 들어도 아는 기타리스트, 작곡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기타를 들고 세영악기사를 찾았다. 특히 밴드 ‘부활’의 김태원은 기타에 대해 아는 바가 많고 소리에 민감해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수리를 해줘도 맘에 드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다음 날 다시 기타를 가져와 ‘이 부속 바꿔달라, 저 부속 바꿔달라’ 하는 통에 많이 시달렸죠. 덕분에 기타에 대해 더 배울 수 있었지만요.”
직접 수리한 기타로 녹음한 음반을 챙겨줄 때,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때의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는 기타를 칠 줄 모른다. 기타 생각을 어찌나 지겹도록 했는지, 배우려고 붙잡고 있는 것조차 싫증 나 금방 그만뒀다며 웃는다. 건강만 따라준다면 평생 기타 수리 일을 할 생각이라는 이세문 대표. 그의 손을 거쳐간 기타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직장인의 90%는 기회만 된다면 이직하고 싶어 한다. 평생직장의 개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어느 분야에서 베테랑이 된다는 건 ‘시간’을 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투입 시간 대비 산출 결과의 효율을 생각하는 시대, 다양성이 더 중요한 시대다. 4차 산업혁명이 사람을 대체할 거라는 이 시대에 베테랑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누군가의 노하우를 배우려면 베테랑이 있는 현장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요즘은 유튜브, SNS 등에 ‘꿀팁’(매우 유용한 정보나 조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수없이 올라오는 통에 굳이 베테랑을 찾아가지 않아도 배울 방법이 많다. 그런 데다 시대 변화는 어찌나 빠른지 4차 산업혁명으로 2030년이면 지구상에 현존하는 직업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어쩐지 베테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라지는 영역의 베테랑은 디지털 시대에 다른 형태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새로 등장하는 분야에서는 새로운 베테랑이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시간이 빚는 베테랑
베테랑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이다. 의미상 숙련자, 전문가와 비슷하지만 ‘오랜 시간’을 들인다는 뜻이 조금 더 강하게 녹아 있다. 그렇기에 베테랑이라면 누구나 그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한 방법이나 요령은 어디에도 없는 그만의 기술이다.
한 분야에서 30년 넘게 일한 베테랑을 만나보니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휴, 그때는 누가 옆에 앉혀놓고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매일 청소하면서 어깨너머로 눈동냥하며 공부했죠.(웃음) 그렇게 종일 눈으로 배우고 일과 끝나면 무작정 따라 해보는 거예요.” 베테랑의 노하우를 얻으려면 눈치가 좋아야 했다. 알려주지 않아도 혼자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면 어느새 베테랑이 다가와 자신의 노하우를 하나씩 알려줬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이다. 특히 기술이 필요한 곳에서는 이렇게 도제식(徒弟式) 교육이 이뤄졌다.
그렇기에 베테랑의 노하우에는 시간뿐만 아니라 그의 감(感)이 녹아 있다. 요리책에 나온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이유는 개인의 손맛 때문이다. 같은 기술을 배워도 기술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제식 교육 하면 ‘무형문화재’ 같은 ‘장인’(匠人)이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기술자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많은 영역에서 도제식 전수가 이뤄진다.
영화 제작, 검사나 경찰의 수사, 기자나 PD의 취재, 조향사의 조향 과정 등에도 사수(師授)의 노하우가 입으로 전해진다. 사수는 ‘스승에게서 학문이나 기술의 가르침을 받음’이라는 뜻이다. 일터에서는 스승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수와 부사수’ 관계로 일을 가르치고 배운다. 요즘 버전으로 말하자면 ‘멘토링’(Mentoring)이다. 멘토링은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멘토, Mentor)이 지도와 조언을 통해 멘티(Mentee, 멘토링을 받는 사람)의 실력과 잠재력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거나 바뀌고 있다. 한 분야의 베테랑은 오랜 시간을 들여야 빚어지는데, 일자리가 아예 사라진다면 더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제빙기 개발은 얼음 장수를 사라지게 했다. 냉장고나 제빙기가 없던 시절에는 한강이 얼면 강의 얼음을 깨 파는 얼음 장수가 있었다. 하지만 냉장고와 제빙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정에서 얼음을 얼려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얼음 장수는 사라졌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온다고 한다. 또 한 번 사회가 크게 발전하는 시기다. 2016년 다보스포럼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에서는 “2020년까지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약 710만 개 사라지고, 20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분야의 베테랑은 더는 ‘시간’을 누적할 수 없어 도태될 것이고, 새롭게 생긴 일자리에서는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베테랑이 생겨날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의 칼 베네딕트 프레이와 마이클 오즈번 교수는 논문 ‘고용의 미래’에서 △정교한 손가락 움직임 △손재주 △좁은 작업 공간과 불편한 자세 △독창성 △순수예술 △사회적 지각 △협상 △설득 △타인의 배려 및 보살핌이 필요한 영역은 기계나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렵다고 봤다. 아무리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결국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베테랑의 감(感) 입는 디지털
단순·반복적이거나 숙련도가 떨어지는 일이 대체로 자동화되고 있는데, 이 자동화에도 베테랑이 필요하다. 바로 그들의 ‘감’이 자동화를 더 정교하게 만들기 때문. 포스코는 베테랑 근로자의 경험과 감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베테랑의 머릿속에 있는 주관적 데이터를 객관적 데이터로 바꾸어 ‘스마트 고로’를 만들고 AI가 학습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 결과 품질 불량률이 63% 감소했다. 사람이 아닌 AI가 베테랑의 노하우를 배우는 셈이다.
현대건설도 현장 베테랑의 지식과 노하우를 디지털화하고 있다. 특히 안전·품질 분야를 스마트화해 시스템으로 구축하는 데 공들이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노하우를 빅데이터화하면 신입 직원에게 밀려날까 불안해하던 중장년 베테랑도 이제는 스마트 기술에 적응하며 새로운 변화를 따라가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베테랑이 오히려 단순노동에서 벗어나 더 가치 있고 창의적인 일을 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겪은 일본 역시 숙련 기술의 디지털화를 시도하고 있다. 과거 일본의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는 생산 현장을 강조하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제조 설계부터 고객 만족까지 통합된 하나의 흐름을 가리킨다. 설계, 생산, 서비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등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 되었다. 최근에는 모노즈쿠리 혁신을 외치며 베테랑의 노하우와 디지털을 결합하는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은 보고서를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데이터 활용이 새로운 부가가치의 원천인데, 모노즈쿠리 과정에서도 수많은 데이터가 발생한다”면서 “일본 제조 기업은 이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생산 효율화를 목적으로 내세운 ‘스마트 팩토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제는 내부에서만 공유하던 데이터를 산업의 경계를 넘어 기업이 상호 거래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면서 “단순한 생산 효율화가 아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구축 등 오픈 이노베이션 추진이 목표”라고 분석했다. 베테랑의 노하우를 공유함으로써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노하우를 이어가는 베테랑도 있다. 과거 도제식 교육과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베테랑이 필요하다. 노하우를 축적한 베테랑과 그들을 찾는 사람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이 생겨난 이유다.
‘탤런트뱅크’는 전문 인력 상시 고용이 어려운 중소·중견기업에 고도의 비즈니스 문제가 닥쳤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를 프로젝트별로 연결한다. 현장에서 은퇴한 베테랑이 전문가로 투입되는 것. 재의뢰율이 60%를 넘어설 만큼 기업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클래스101’은 중장년 베테랑의 노하우를 교육과 강의 형식으로 전한다. 음악·미술·운동 등 취미 관련 강의부터 부업·재테크 노하우, 업무 능력 향상 등 일 잘하는 방법, 인문·사회·예술을 비롯한 교양 강의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숨은 고수라는 뜻의 ‘숨고’에서는 900여 분야의 매칭 서비스를 제공한다. ‘반려견 산책’, ‘주례’, ‘게임 레슨’ 등 소소한 영역까지 포함된다. 베테랑 전업주부의 노하우를 살려 ‘정리수납 고수’로 활동하거나, 기업에서 인사관리와 교육 일을 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취업 컨설팅 고수’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은 다양한 직종, 여러 분야의 베테랑을 사라지게도 하지만, 그들의 노하우는 무형의 가치로 남아 디지털과 융합해 또 다른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하루하루를 계획하며 살지 않는다. 거대 담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그 과정을 즐긴다. 그의 과학 이야기에 약 9만 명의 사람들이 열광하지만, 그는 “내 삶은 우연과 우연의 중첩일 뿐”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과학을 전하는 원종우 작가 이야기다.
‘파토’(Pato)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원종우 작가의 이력을 쭉 듣다 보면 맥락을 잡기가 쉽지 않다. 철학도, 록 뮤지션, 대중음악 운동가, 칼럼니스트, 정치사회 논객, 음모론 전문가, 다큐멘터리 작가, 과학 커뮤니케이터. 그를 수식하는 말이다.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하고 런던 칼리지 오브 뮤직&미디어에서 기타를 전공했다. 이후 SBS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코난의 시대’ 작가, ‘딴지일보’ 편집장 및 논설위원 역임,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 성공회대 교양학부 외래교수, ‘과학과 사람들’ 대표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라는 질문이 절로 나오는데, 그의 답은 한결같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어요.”
거대 담론을 농담처럼 던지는 과학
‘과학하고 앉아있네’는 거대 담론이라 불릴 만한 과학 이야기를 농담을 섞어 쉽게 전달하는 팟캐스트다. 2019년 말 기준 누적 1억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팟캐스트 플랫폼 ‘팟빵’의 구독자 수는 약 9만 명, 유튜브 구독자 수는 약 8만 명에 달한다. 사람들에게 과학을 더 쉽게 알리고 싶었던 원종우 작가가 2013년 ‘과학과 사람들’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시작한 채널이다.
철학을 공부하고 록 음악을 하던 그는 어떻게 과학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걸까? 그의 과학 사랑은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한 살 무렵, 당시로서는 거금인 4000원을 주고 과학 교양서의 고전이라 불리는 어마무시한 두께의 책 ‘코스모스’를 샀다.
“당시에는 대중교양 과학 서적이 거의 없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이 아무리 똑똑하대도 그 책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어요? 대신 예쁜 컬러의 우주 그림이 많았고, 1부는 스토리가 재밌었죠. ‘코스모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과학책들을 찾아 읽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생기더라고요. 세상을 더 흥미롭게 볼 수 있게 된 거죠.”
그가 팟캐스트를 시작할 즈음에는 대중 과학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예능 프로그램 ‘스펀지’에서 다루는 것 같은 ‘바닷속에서 상어를 만났을 때 건전지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이야기나, 맥가이버처럼 ‘무엇이든 고치는 과학’ 같은 접근이었다. 과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을 대중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던 셈인데, 원 작가는 반대로 바라봤다. 특히 인문학 대중화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인문학이 대중화될 때 두 가지 소비 방식이 있었어요. 수박 겉핥기처럼 가볍게 다루거나, 청중이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방식. 둘 다 좋은 소비는 아니죠. 쉬운 과학은 오히려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거대 담론을 편하게 던져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과학은 스토리지만 어떤 건 수학이고 어떤 건 실험이잖아요. 대중이 이걸 100% 이해하기는 어려워요. 그래도 그 안에서 딱 한 가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꼭 가져갔으면 했어요. 과학으로 인문학 이야기를 한 거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팟캐스트에서 제가 지향했던 부분이에요. ‘자, 지금부터 내가 거대 담론을 말할 거긴 한데, 듣는 사람은 과학하고 앉아있네 같은 시선으로 들었으면 해’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가 팟캐스트에서 다룬 상대성 이론 이야기만 모두 합해도 8시간 분량이다. 양자역학은 더 많은 분량의 오디오가 있다. 내용도 어려울 수밖에. 하지만 그는 그 안에 핵심이 있다고 강조한다. “핵심을 받아들이는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되면서 눈이 열려요. ‘유레카’를 외치는 것처럼요. 제가 과학을 통해 느꼈던 경외감, 놀라움, 충격, 그리고 세상을 일상적인 경험 이상으로 이해하게 된 지점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는 전문가의 입을 통해 거대 담론을 설명하면서 청중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중간에서 통역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교수가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다면 ‘나는 바보인가’ 싶을 수 있잖아요? 그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굉장히 중요했어요. 제가 중간에서 ‘사실 몰라도 돼요’라고 농담을 던짐으로써 청중은 긴장을 풀게 되죠. 그러다 보면 정말 이해하는 사람도 생겨요.”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시대
미디어 채널이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시대다. 팟캐스트가 흥행한 이후 유튜브와 같이 개인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채널이 많아졌다. 대중을 상대하는 개인이 늘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더 이상 통역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어려운 과학 이론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그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시원섭섭한 마음이었다.
“제가 연구자는 아니다 보니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스스로 한계를 느꼈어요. 이제는 대중 앞에 나서는 연구자도 늘었고요. 과거에는 연구자가 대중을 상대하면 ‘연구할 시간도 없으면서 한가하네’ 같은 안 좋은 시선도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세상이 아니잖아요.”
‘내 역할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그는 과학만큼이나 좋아하지만 한참이나 미뤄두었던 ‘픽션 쓰기’에 도전한다. 그렇게 나온 책이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다. 과학적 근거 위에 쌓아 올린 8개의 픽션이 실린 책이다. 각 픽션의 앞뒤에는 ‘앞설과 뒷설’을 달아 과학적 이해를 도왔다. 그는 픽션을 통해 생각해볼 지점을 남겼다. 영원히 죽지 않는 주사를 맞은 사람들이 죽음이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한다거나, 자의식이 없는 AI만이 지구에 남아 살고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묘사했다. 과학기술의 장점을 알지만, ‘인간에게 영생이란 어떤 의미인가’, ‘인공지능이 정말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책에서 다룬 주제들로 한참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야기하다가, 원 작가는 앞으로 120세까지 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120년을 산다는 게 결코 우리가 상상하는 120세의 모습으로 죽는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천천히 늙는다는 뜻이죠. 안티에이징의 연구 속도가 어마어마해요. 쥐 실험에서는 실제로 노화를 역전시키기까지 했어요. 쥐를 젊게 만든 거죠. 만약 사람에게 적용된다면 우린 정말 죽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인류는 그런 기술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길게, 더 젊게 살 거예요. 좋게 말하면 많은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고요. 문제는 그 시간의 지루함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죠. 그러니 그동안 어떻게 살 것인지 물을 수밖에요.”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 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인간은 언젠가 죽지 않을까.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자는 ‘웰다잉’(Well-dying) 개념이 나오는 이유다. 그에게 웰다잉에 대해 묻자 특유의 유머가 나왔다. “웰다잉의 반대는 배드 리빙 앤드 다이(Bad Living & Die)일 텐데요. 안 좋게 오래 살다가 안 좋게 죽는 거죠.(웃음) 모두가 느끼는 공포일 텐데요. 웰다잉에 대해서는 시야를 조금 더 넓고 멀리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지금 50대니까 70년을 더 산다고 가정하고 남은 생을 생각할 때는, 현재가 아니라 20~30년 뒤의 세상을 생각해야 해요. 그때는 또 얼마나 기술이 발전해 있겠어요? 연금, 기본소득 같은 개념도 오늘의 관점이 아니라 문제가 닥칠 미래 시점에 어떤 기술, 과학 등이 주변에 있을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야 해요. 사회는 거기에 맞춰 재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또한 AI나 로봇의 발전이 제 역할을 다한다면 노화를 눈치 보지 않는 노년기를 보낼 수 있을 거라 상상했다. 원 작가의 아버지는 올해 94세다. 지난해만 해도 정정했던 분인데, 올해 들어 컨디션이 안 좋아졌다. 자식들이 돌봄을 자처했지만 아버지는 오로지 어머니의 돌봄만을 허락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나이도 87세. 노노(老老) 케어다. 결국 요양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버지가 ‘남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일 거라 생각한다.
“요양원이라는 공간은 ‘수용자’가 되는 거잖아요. 이럴 때 AI, 로봇, 기계가 충실히 역할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로봇 앤 프랭크’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상황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로봇 앤 프랭크’는 따분한 전원생활을 하는 프랭크에게 아들 헌터가 ‘VGC-60L’이라는 로봇을 보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인간을 돕는 가정용 로봇이 보편화된 미래를 그렸다.
“상상을 해볼까요. 노인들은 아침잠이 없어 3, 4시면 일어나죠. 아무리 가족이 나를 잘 챙겨도 새벽 3시에 밥을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로봇은 항상 곁에 있고 부르면 원하는 걸 해결해줘요. 그렇다고 뒷말을 할 걱정도 없고요. 내가 돌봄을 받는데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게 굉장히 큰 부분이에요. 심지어 그냥 만사가 귀찮아질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꺼버리면 돼요. 로봇의 내면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적어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친구가 생긴다는 거죠.”
과학이 어디까지 왔는지, 그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이런 과학기술을 누구나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영생을 주는 기술이 나왔을 때 10억 원이 넘는 비싼 가격으로 책정되는 거예요. 소위 빈익빈부익부라는 양극화 개념이 단순히 건강이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까지 이어지는 거죠. 돈이 있으면 살고 돈이 없으면 죽는 거니까요. 그런데 저는 사회를 낙관적으로 봐요. 유동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물론 서브프라임 사태라든가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중간중간 에러가 생기지만, 인류는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게끔 조직된 생명체입니다. 게다가 지금 같은 초연결 시대에 인류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죠. 인류는 공도동망(共倒同亡)하진 않을 거예요. 그러려면 결국 기술은 가장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될 겁니다.”
스스로 일궈놓은 나만의 세계
노화를 늦출 수 있다면, 정말 120세까지 살게 된다면, 50세에 은퇴해도 70년이라는 세월을 더 보내야 한다. 살아온 시간 이상을 보내야 할 이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원 작가는 ‘나만의 세계를 꼭 일구시라’ 당부했다.
“이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나이가 120세여도 신체는 50세일 수 있죠. 그러면 그 사람은 50세의 능력치로 일하면 돼요. 노인이 많아진다고 무조건 생산성이 떨어지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겠죠. 과학기술이 이런 성과를 낸다면 사회는 그에 맞춰 움직일 거예요. 노화로 인해 일하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겁니다. 다만 그 기술이 적용될 때까지 우리는 늙어가잖아요. 이 시기를 살아갈 시니어들은 내가 경제적으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그 시간을 살아갈 내가 일궈놓은 세계가 있어야 해요.”
뭐라도 좋다.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는 악기 연주를 적극 추천했다. 오랜 시간 기타를 연주한 그의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다. “내가 계속해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을 해보세요. 남이 알아주고 몰라주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악기는 손가락이 고장 나거나 포기하는 게 아니라면 계속 늘어요. 어제보다 낫고, 내일 되면 오늘보다 낫습니다. 마흔이 넘은 친구가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를 칩니다. 그러니 좀 더디게 늘겠죠. ‘이걸 계속할까?’ 묻더라고요. 무조건 하라고 했어요. 20년 뒤에는 동네에서 피아노를 가장 잘 치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거라고요. 피아니스트 될 거 아니잖아요.(웃음) 무엇보다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 역시 음악을 다시 해 앨범도 내고 연주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안 되어도 그만이다. 그저 그 과정이 좋다고. 하루를 계획하며 살지 않는다곤 했지만 꿈이 궁금했다. 그의 꿈은 ‘세계 평화’다. 무언가를 꿈꿔야 한다면 ‘무엇이 되겠다’가 아니라 ‘흑인과 백인이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가치’를 꿈꿨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오늘도 그는 농담처럼 거대 담론을 던진다.
마네의 인상주의나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을 처음 본 당대 사람들은 ‘예술이 아니다’, ‘낙서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했다. 시간이 흐른 뒤 대중은 그들을 ‘창시자’라 일컬었고, 작품들을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듯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이들은 저마다 산통을 겪는다. 그리고 여기, 모바일 아트로 미술계에 한 획을 긋겠다는 남자가 있다. 국내 최초 모바일 아티스트 정병길(69) 씨다.
어떠한 창조적 본능이나 이끌림 같았다. 정병길 씨가 그림을 그린 까닭 말이다. 학창 시절 다른 숙제는 거들떠보지 않다가도 그림이나 공작(工作) 과제는 눈을 반짝이며 해냈다. 슥슥 휙휙 그렸다 하면 사생대회 1등은 떼놓은 당상. 뛰어난 실력에 담임선생님이 미대를 권유한 적도 있었다. 물론 뜻이 없진 않았지만, 당시엔 다른 꿈이 더 앞섰다. 우장춘 박사처럼 훌륭한 육종학자가 되어 농촌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것.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꿈으로 끝나버렸다. 아버지의 지병으로 가세가 기운 탓이었다. 원하는 전공보다는 장학금을 주는 농협대학을 택했고, 곧장 밥벌이를 시작했다. 30여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화실까지 마련해가며 붓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이란 목표로 하는 꿈보다는 오래 지니고픈 로망이었기에 쉬이 접지 못했을 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도 여느 직장인처럼 인생 1막을 정리할 때가 다가왔다.
“농협 지점장까지 하다가 2010년에 은퇴했어요. 당시 금융업계에서는 그만두고도 2~3년 더 일할 자리를 마련해줬거든요.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텐데, 당장 몇 년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겠더라고요. 눈 한번 질끈 감고 일자리를 사양했습니다. 프리랜서 작가로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써볼 요량이었죠.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게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저성장 양극화 시대에, 그것도 무명인이 문예활동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다고 여긴 게 큰 착오였죠.”
박수 받은 창직, 현실은 맨땅에 헤딩
정병길 씨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재주도 남달랐다. 당초 그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해 원고료로 생활비를 충당할 계획이었다. 은퇴 후 1년 동안 칩거하며 쓴 글을 ‘내 아이 이웃과 함께 더 큰 세상으로’라는 책으로 내놓았다. 2년 뒤엔 두 번째 책 ‘이젠 아빠를 부탁해’를 펴냈다. 주변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나마 다행히 그림으로는 ‘상하이아트페어’, ‘대한민국미술대전’, ‘행주미술대전’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개인전도 열며 초석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그 역시 취미를 넘어 직업으로 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유명 작가가 아니니 결국 홍보 문제다 싶더군요. 신문 광고도 몇 번 냈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죠. SNS를 배워 직접 홍보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관련 강의를 듣다 만난 정은상 맥아더스쿨 교장이 모바일 미술 앱을 소개해줬습니다. 태블릿 PC에 떠듬떠듬 그려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당시 강사에게 매주 새로운 그림을 그려 보여줬더니, 모바일 미술을 업(業)으로 삼아보면 어떻겠냐 하더라고요. 그게 창직의 신호탄이 된 셈이죠.”
‘모바일 미술’(아트)이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의 모바일 기기에 내장된 그림 앱을 이용해 창작한 미술이나 예술을 말한다. 물감, 붓, 캔버스나 이젤 등이 필요 없고, 그 덕분에 별도로 화실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온라인이나 SNS상에 작품을 게시하거나, 출판물에 사용하기도 하고, 캔버스나 종이 등에 출력해 유화나 수채화처럼 전시할 수도 있다. 그런 모바일 미술이 정병길 씨에겐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친김에 정보를 찾아보니 해외에서는 입소문을 탄 장르였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전무했다. “옳거니!” 창조적 본능이 되살아났고, 그렇게 개척자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당시 모바일 미술을 가르치는 학원도, 선생님도 없었어요. 거의 독학으로 기법을 습득하고 펜업(삼성전자 그림 공유 서비스) 도움을 받았죠. 작품을 만들어 뭔가 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이 분야를 알리는 쪽으로 초점을 맞췄어요. 시장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사람들의 반응을 보려고 SNS에 강좌 정보를 올렸더니 수요가 꽤 있더군요. ‘그러면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결론이 섰죠.”
그렇게 ‘모바일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탄생시켜 이를 개념화하고, 강좌와 전시를 통해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시대가 발전하며 모바일 미술용 앱과 플랫폼이 더욱 다양해졌고, 관련 툴(Tool)이나 출력 기술이 정교해지며 이 분야는 상승세를 탔다. 혹자는 찰나의 아이디어가 운때 맞았다 여길지라도, 이는 나름의 안목을 갖고 꾸준히 노력했기에 얻은 선물과 같다. 그 성과로 미래창조과학부 주최 ‘시니어 IT 일자리 사례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이라는 결실도 얻었다. 최근까지도 적지 않은 관심과 응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개척자의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에요. 미술계는 기득권의 장벽이 높고 굳건하니까요. 그런데 과거 예술 분야 개척자들을 보면, 대부분 목숨 걸어가며 단초를 마련하잖아요. 저는 아직 모바일 미술 때문에 목숨까지 건 적은 없지만, 돈은 참 많이 까먹었습니다.(웃음) 노후에 도움 되려고 한 일인데 오히려 리스크가 될까봐 걱정할 때도 있었죠. 그런데 그 말이 와닿더라고요. ‘안전한 길은 위험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안전하긴 해도 뭔가 즐거움이 없잖아요. 그거야말로 노후 리스크죠. 그래서 기왕 시작한 거 최대한 부딪혀보려 합니다.”
‘NFT, 줌’ 신기술과 만나는 모바일 아트
현재로서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보단 투자하며 판로를 개척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돈을 벌고 못 벌고의 문제가 아니다. 장차 모바일 아티스트가 촉망받는 직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 과제인 셈이다. 현재 작품을 판매하거나 저작권료로 얻는 소득은 높지 않다. 그보다는 학생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새로운 기술과 직업을 알리는 강의를 통한 수입이 주가 된다. 여타 예술처럼 경매에서 작품의 우수성을 평가받아 높은 금액이 책정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구조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은 생소한 분야인 데다, 작품의 고유성이 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가령 일반적인 경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 단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지만, 모바일 미술은 완성된 그림 파일을 종이나 다른 소재에 계속해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바일 미술의 가치 평가는 어떤 기준으로 해야 할까?
“판화 역시 여러 장 찍어낼 수 있잖아요. 대신 한정된 수량을 제작하고, 찍는 순서대로 숫자 표기와 서명을 남기죠. 가령 판화 아래 1/10이라고 표기돼 있다면, 10개 찍은 작품 중 첫 번째 에디션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판화의 개념으로 가치를 판단하면 좋겠습니다. 또 실크스크린 판화는 판면의 구멍에 잉크를 넣어 찍는데, 이 기법으로 여러 작품을 만들 수 있죠. 같은 방법으로 모바일 미술은 완성된 작품이라도 툴을 이용해 색이나 요소를 수정하고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는데, 그 과정이 쉽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그는 NFT(Non 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한 토큰)의 개념을 접목해도 좋다고 덧붙였다. 근래 디지털 수집품 거래가 활발해지며, 이러한 자산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도구로 NFT가 사용되고 있다. 미술 시장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는 추세다. 모바일 미술 작품의 경우 파일 형태로 저장돼 NFT로의 변환이 용이하다. 정병길 씨 역시 이러한 장점을 살려 수익 창출 모델을 만들기 위해 신기술과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에 집중한 아이템은 바로 ‘줌’(Zoom,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이다. 주로 방과후교실이나 사회교육원 등에서 모바일 미술을 가르쳤는데, 코로나19로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며 줌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첩하게 태세 전환을 하고 기술을 익힌 그는 이제 줌에 관해서도 반전문가가 됐다. 최근 2년 사이 ‘줌을 알려줌’, ‘줌 활용을 알려줌’이라는 줌 활용서를 두 권이나 펴냈으니 말이다. 물론 줌 역시 모바일 미술과의 접점을 꾀하고 있는 그다.
“제 목적은 모바일 미술의 매력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건데, 그동안 시공간의 제약이 많았거든요. 특히 섬이나 농어촌에 사시는 어르신처럼, 문화 수혜 격차를 겪는 지역민에게 줌으로 모바일 미술을 전파하려고 해요. 또 그런 분들도 모바일을 통해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줌 전시회도 활성화할 계획입니다. 꼭 전에 없던 무언가를 해야만 창의적인 건 아니에요. 이미 나와 있는 것들을 어떻게 융합하고 접목하느냐에 따라 창작과 창직이 가능하다고 봐요. 자신의 재능이나 관심 있는 분야를 신기술과 잘 연결 지으면 누구든 저처럼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정병길 씨는 2020년 설립한 모바일아티스트협동조합을 통해 체계적으로 자신의 분야를 넓혀가고 있다. 전문인력 양성도 꾸준히 해나가고 있고, 장차 자격증 발급 절차 등도 논의해볼 방침이다. 그런 그가 모바일 아티스트로서 갖는 최종 목표는 분명했다. 바로 ‘모바일 아티스트가 가장 많은 나라 대한민국’을 이루는 것. 어쩌면 자칫 거대한 포부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즘 BTS(방탄소년단)를 비롯해 가수들의 한류 열풍이 대단하잖아요. 사실 우리나라처럼 동네마다 곳곳에 노래방이 즐비한 나라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일상에 스며든 예술이 결국 거대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봐요. 노래방에서 노래하듯 모바일을 통해 손쉽게 미술을 접한다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흔히 말하는 우리 동네 가수처럼, 우리 모두 저마다 작은 예술가가 되는 거죠. 특히 나이가 들수록 가슴속 예술 감수성을 깨우고 자유롭게 표현해야 삶이 풍요로워져요. 많은 중장년이 모바일 아트에 관심을 갖고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중에도 그의 손엔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20초 남짓한 짤막한 순간에도 무언가를 스케치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시간을 무위(無爲)로 흘려보낸 기자가 이유를 묻자 그 또한 목표라 답한다. 어딜 가든 획 하나라도 긋고 오는 게 목표라고. 그 말을 들으니 수많은 획이 켜켜이 모여 언젠가 미술계에 큰 획을 긋게 될 정병길 씨의 모습이 더 선명히 그려졌다. 문제는 시간. 하지만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조급함이 없었다. 무언가를 이루기에 아직 인생은 늦지 않았으니까.
“모지스 할머니로 잘 알려진 미국의 국민화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곤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놓은 작품만 1600점이 넘는다고 해요. 그중 250점은 100세 이후에 그렸다고 하고요. 그분의 삶은 제게도 큰 영감과 희망을 줍니다. 제가 힘을 얻었던 모지스 할머니의 말을 독자분들께 공유하고 싶네요. 여러분,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일본의 70대가 중고 플랫폼에서 가장 많이 구매하는 음악 관련 제품은 K-POP, 60대 이상에게 가장 인기 있는 K-POP 그룹은 BTS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에게 지출하는 연간 평균 비용은 약 88만 원 수준이다.
온라인 중고거래 플랫폼 ‘메르카리’(メルカリ)가 조사한 ‘세대별 구매 카테고리 TOP3’에 따르면 50대와 70대가 음악 분야에서 가장 많이 구매한 것은 ‘K-POP’이다.
60대 이상 이용자가 가장 좋아하는 K-POP 그룹은 1위가 BTS(비티에스), 2위가 SEVENTEEN(세븐틴), 3위가 ATEEZ(에이티즈), 4위가 ENHYPEN(엔하이픈), 5위가 TWICE(트와이스)인 것으로 나타났다.
K-POP 아이돌 관련 상품은 직구를 하거나 일본 내 코리아 타운 역할을 하는 신오쿠보(新大久保)에 가서 구매해야 하는데, 직접 갈 수 없는 시니어들이 ‘메르카리’를 통해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시니어 여성 잡지를 발행하는 ‘하르메크’(ハルメク)가 운영하는 ‘하르메크 생활상수연구소’(ハルメク生きかた上手研究所)의 ‘시니어의 최애에 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50~84세 여성 중 35.2%는 ‘최애’(推し)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표현으로 ‘최애’(最愛)는 ‘최고로 애정한다’는 말의 줄임말로 ‘가장 좋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를 꼽을 때 “내 최애는 OO이야”라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오시’(推し)라고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를 뜻한다. 2021년에는 ‘오시카츠’(推し活, 아이돌을 응원하는 행위)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면서, 50대 이상에게도 유행하는 말이 됐다.
조사에 따르면 시니어 여성 중 83.3%는 ‘최애’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나의 최애가 있다’고 한 응답자는 35.2%였다. 3명 중 1명은 가장 응원하는 아이돌 멤버가 있는 셈이다.
‘최애’가 생긴 이유에 대해 29.4%는 ‘한눈에 반해서’, 26.4%는 ‘재능에 반해서’라고 답했다.
이들이 ‘최애’에게 사용하는 평균 금액은 연간 약 9만 엔(약 88만 원)이다. ‘원정비’(숙박, 교통비 등) 소비가 평균 8만 77167엔으로 가장 높았으며 다음으로 ‘콘서트 티켓 비’가 평균 5만 5699엔이었다.
‘오시카츠’ 활동을 하면서 생긴 일상의 변화로는 ‘동영상 사이트를 보게 됐다’, ‘새로운 목표·꿈이 생겼다’(각 29.9%)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웃음이 늘었다’(28.9%)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하르메크 생활상수연구소 우메즈 유키에(梅津順江) 소장은 “‘오시카츠’는 지난해 유행한 신조어지만 이제는 50대에게도 퍼지고 있다”면서 “아이돌을 응원하는 활동이 시니어 여성들의 행동과 생활을 바꾸고 마음과 가족 관계에까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전했다.
귀농 11년 차 김명옥(60, ‘영동구구농원’ 대표). 그는 잠자는 시간 외엔 일에 폭 파묻혀 산다. 마르크스가 말했다. ‘일에 매몰된 인생은 노예와 다름없다.’ 김명옥에게 이건 썰렁한 농담일 뿐이다. 그에게 일은 몸에 붙은 피부와 마찬가지다. 날이면 날마다 농사라는 레일 위를 열차처럼 질주한다. 그래 현재 도착한 역은 어디인가? 목적한 종착역은 여전히 멀다. 뒤로 달리거나 멈춘 적은 없다. 하지만 사고가 잦았다.
귀농 초기의 양상은 한마디로 실패의 전시장이었다. 실패라는 건 묘하다. 삶을 숙성시키는 효모니까. 김명옥은 실패 경험을 연료로 삼아 질주에 가속을 붙인 게 아닌가. 말하자면 그의 귀농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로까지 추락할 수 있는 인생사의 위험 요소를 어떻게 비켜나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처세서이기도 하다.
김명옥은 나무를 가꾸는 취미를 한껏 살려 조경용 나무를 심기로 하고 귀농했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후미진 산골의 싼 땅을 사들여 주목을 잔뜩 심으며 나무농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전에 살았던 곳은 대전. 거기에서 호프집이나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속세의 희로애락을 충분히 경험한 그는 어느 날 자신에게 도시 생활 졸업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나무와 새, 구름을 동급생으로 삼아 산골에 입학했던 것이다.
“자연 속에서 쉬고 싶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 질리고 지쳐서. 농원에 심은 나무들이 자라나는 걸 바라보면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우아하게 살고 싶어 산골에 들어온 것이다. 시간에 얽매이고 사람 관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도시에서 벗어나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할 기회를 마련했던 셈이다.”
자연과 음악을 즐기는 산골 생활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시골이 적성에 맞기도 해 만족감이 컸다. 나무농원으로 당장 소득을 거둘 순 없었지만 생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철도공사 직원인 남편의 월급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딱 반년쯤 지나자 슬슬 지루해지더라.(웃음) 나에겐 역시 집중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농사를 시작했다. 산야에 흔한 냉이를 캐 농산물 시장에 팔았던 게 출발점이었지. 그러나 대가가 보잘것없어 포기하고, 하우스 두 동을 지어 상추농사를 시작했다.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실패한 이유가 있겠지?
“농산물경매장에 가져갔는데 사정없이 가격을 후려쳤다. 죄목은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상추라는 데 있었다. 상추의 외모마저 농약으로 조절해 키운 농약농법 상추보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얘기였지. 예쁘게, 너무 크지 않게, 입에 넣기 좋도록 손바닥만 하게 만들기 위해 성장억제제를 사용한다는 걸 알고선 기가 막혔다. 허탈해 의욕을 잃을 지경이었지. 게다가 폭우가 하우스를 쓰러뜨려 깨끗이 접었다.”
이후 어떤 작물을 재배했나?
“복숭아와 자두로 수익을 거두는 농가들이 있는 걸 보고 이번엔 그 둘을 심었다.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어떤 자두 농가는 1000평 과수원에서 수천만 원의 소득을 올렸는데, 내가 기른 자두들은 대부분 벌레 먹어 팔 수 없는 식의 난항이 거듭되었다. 결국 자두나무를 모두 캐낼 수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땀 흘렸지만 결과가 그렇게 허무했다.”
최선을 다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농사란 왜 그리 어려울까. 그런데 귀농 초기의 실패는 공부이지 않나? 시행착오라는 통과의례를 심하게 겪지 않은 귀농인을 보기 힘들다.
“귀농 11년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건 농사로 돈을 벌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난 농산물 생산만을 전적으로 하는 귀농은 반대한다. 가공과 관광, 체험 프로그램을 병행하는 게 그나마 가망성 있다. 복숭아와 자두에 실패한 뒤 새로운 타자로 복숭아 농장 체험 프로그램을 내세웠다.
복숭아로 통쾌한 홈런을 쳤나?
“어림없더라. 또다시 실패했다. 애로점이 한둘에 그치지 않았다. 가령 체험자들이 복숭아를 따서 집으로 가져가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따도 되는 복숭아들을 지정해줘도 통하지 않았다. 무작정 따놓고선 맘에 들지 않으면 그냥 땅바닥에 버리거나, 덜 익은 걸 따 팽개치기도 했다. 아이고, 체험 프로그램도 소용없었던 거다.(웃음) 이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덤벼든 게 산골오징어 사업이었다. 물오징어를 사다가 산골의 청정한 햇살과 바람에 건조시키는 오징어 사업으로 판세를 역전하려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신통치 않아 몇 해 만에 접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던 셈이다. 당연하게도 김명옥의 농사를 훼방한 어떤 세력의 음모나 간계가 작동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동쪽을 향해 뛰었으나 서쪽에 닿는 식의 요상한 결과가 웬일인지 그냥 반복됐을 뿐이다. 이렇게 매사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는 게 농사다. 그걸 깨닫는 데 수년이 걸렸다. 비싼 수업료를 치렀던 거다. 덕분에 그는 비로소 농사의 방식을 바꿀 수 있었다.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농산물 가공과 위탁판매에도 나섰으며, SNS 마케팅으로 직거래 고객을 확보했다.
힘들수록 밀어붙인다, 끝을 보려고
김명옥이 현재 운영하고 있는 농사 종목은 자그마치 40여 종. 숲속에 묻힌 농원은 은둔처럼 잠잠해 보이지만 너른 터 도처가 생산 현장이다. 농원 뒤편 둔덕은 후덕하게 펑퍼짐한 장독들로 빼곡하다. 그가 만든 된장은 구수한 맛으로 인기가 있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귀농 초기의 시련은 가혹했으나 이젠 기틀이 잡혔다. 궤도에 올라섰다. 작물들의 비위를 능숙하게 맞춰줄 수 있게 됐으며, 그토록 힘겨웠던 판로 확보 문제에서도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농사에 번번이 타격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더 세차게 밀어붙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더 크게 일을 벌였다. 대전에 살 때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11번이나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목발을 짚고 장사를 했다. 나 자신도 통제하지 못할 뭔가 끈질긴 게 내 안에 있는 것 같다. 뭐든 좋은 뜻으로 시작한 거라면 난관을 넘어 끝을 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 하나는 놓지 않고 살아왔다.”
남다른 뚝심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한계마저 도전해온 셈인가? 귀농 후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것이었나?
“나무농원을 조성하던 초기에 나를 땅 투기꾼으로 여긴 일부 원주민들의 색안경에 씁쓸했다. 그들은 심지어 길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른바 텃세를 맛봤던 셈이다. 외지인이 들어오면 일단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게 시골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인간관계에 충돌과 불합리가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길까지 끊는 건 너무했다.
“이곳에 내려와 큰 배신을 당한 일도 두 번 있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상처도 깊었지. 아예 떠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떠나는 건 지는 거라서 주저앉았다.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좋은 인연, 나쁜 인연 고루 있는 법인데, 사실 이곳에서 맺은 좋은 인연이 더 많다. 도시의 각박함에 비하면 한결 나은 곳이 시골이고. 처음에만 문을 닫을 뿐 알고 보면 정겨운 게 시골 사람들이다.”
농원의 크기는 광활하고, 일은 숱하게 많다. 이를 혼자 감당하다니.
“내가 걷는 모양새를 보라. 보행이 자유롭지 않은 걸 알 만하지 않나? 연일 계속되는 노동으로 관절 곳곳에 무리가 간 탓이다. 몸을 상해가면서도 일을 줄이기는커녕 갈수록 늘리는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남편이다. 우리 부부는 사실 이상적인 동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농원의 모든 실무를 맡았고, 남편은 직장에서 받아온 월급을 농장 조성과 유지에 털어 넣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남편은 이상적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가 자주 내뱉는 푸념이 있다. ‘아니,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툭하면 일을 벌이는 나를 못마땅해한다.”
부군이 뭐라 하든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으로 응수할 뿐인가?
“그냥 밀고 나간다. 끝까지 가볼 참이다. 이런 나를 남편은 이제 포기했다.(웃음)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둘의 성향엔 차이가 있다. 난 긍정을 중심에 둔 반면 남편은 신중하다. 그런 남편과 마주 앉아 커피 마시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때이기도 하다.”
아마추어 연극 단체 창단하기도
현존하는 조류 가운데 가장 작은 새인 벌새는 1초에 80번의 날갯짓을 한다던가? 김명옥은 벌새를 닮았다. 부지런한 노동력을 발휘해 성취를 향한 날갯짓을 하니까. 그는 몸이 닳을 때까지 일하고 또 일을 하는 게 요번 세상의 역할이라는 양 연일 농원의 사방팔방을 누빈다. 그는 어쩌면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한 최초의 인간이거나 마지막 인간일지도.
농원 일만이 다가 아니다. 낮이면 면 소재지로 조르륵 달려가 가게를 연다. ‘구구사랑방’이라는 간판을 단 이 가게에서 그는 양푼이비빔밥과 옛날식 토스트를 만들어 점심 영업을 한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이는 사랑방이기도 하고, 농산물 직거래 마켓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이곳이 아마추어 연극 단체의 아지트라는 점이다. 극단 이름은 ‘구구극단’이다. 김명옥은 이 극단의 창단 주역이자 연출을 맡고 있다. 올가을엔 ‘콩나물연가’라는 제목의 연극을 올릴 참이다. 참여 연기자들은 모두 지역민이다. 얼마 전 김명옥과의 인연에 이끌려 이 동네로 귀촌한 배우 주부진이 조력자로 나서 공연 준비에 탄력이 붙었다.
“심천면 소재지는 고풍스레 아름답다. 그러나 쥐죽은 듯 고즈넉하다. 뭔가 생기를 부여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극단을 만들게 됐다. 난 20대 때 대전에서 극단 활동을 했는데, 30여 년 만에 다시 연극을 즐기게 된 거다. 이건 귀농으로 얻은 보너스다. 그런데 귀농으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내 안에 있는 성취욕을 분출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지난 11년간의 농업 소득은 열악해 오히려 까먹은 게 더 많지만, 뭐 그런들 어떤가? 목표는 높게 잡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산다. 향후 목표는 농원에 예술촌을 접목해 성장시키는 데 두고 있다.”
그는 물심양면의 불황으로 괴로웠던 귀농 전반전의 애환을 거름 삼아 정신적 체력을 단련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질주한다. 예술이 실린 농원을 향해. 하지만 설령 어긋나도 무방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 담대하다.
김명옥이 주는 귀농 Tip
•귀농으로 수입을 창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귀농 3년 차쯤에 철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최소 3년은 버틸 수 있는 자금력과 정신력을 미리 다지자.
•농토 구입과 집짓기를 서두르지 마라. 일단 시골집을 임대해 살며 농사 수련을 하자. 과연 버틸 수 있을지 미리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급적 ‘즐길 수 있는 귀농’을 구상하자. 그러자면 농사 규모를 작게 잡고, 집도 작게 짓는 게 필요하다. 농막식 소형 주택을 짓고 실속 있게 사는 게 좋겠다. 대신 조경엔 신경 쓰자.
•농기계 장만 목적의 자금 투자를 자제하라. 귀농인 상당수가 고가의 농업 장비 구입 때 받은 대출 이자 상환 부담에 허덕인다. 임대 장비를 빌려 쓰는 게 현명하다.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윤영미(60). 그녀의 제주도 집 이름은 ‘무모한 집’이다. 직접 작명했다는 윤영미는 “제 인생을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무모하다’는 꼭 부정적인 말은 아니다. 누군가의 무모한 도전과 열정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기도 한다.
윤영미 역시 무모한 성격 덕에 아나운서가 됐고, 더 나아가 ‘여성 최초’라는 이름 아래 여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윤영미의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도전은 60대에 접어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윤영미에게 아나운서는 오랜 꿈이었다.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은 그녀는 진행의 매력에 푹 빠졌고, 아나운서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예 아나운서 명찰을 달고 다니던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윤영미 아나운서’라고 불렀다.
윤영미는 반드시 아나운서가 되어야만 했다. 목표를 정한 그녀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방법이 없다면 찾아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윤영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청량리역 역장을 찾아가 “왜 여자는 방송을 안 하냐”고 물으며 방송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에 한 달여 동안 안내 방송을 한 그녀는 ‘최초의 지하철 방송 여자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윤영미는 대학 졸업 후 춘천MBC 사장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당시 춘천MBC에는 공채 제도가 없었는데, 아나운서 시험을 볼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패기 덕에 윤영미는 1985년 춘천MBC 아나운서가 되면서 꿈을 이뤘다. 이어 그녀는 1991년 SBS 개국 당시 경력직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SBS 입사 후에도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 ‘최초의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를 갖게 됐다.
“제가 워낙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는데 방법을 알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저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걸 직접 해보고, 뭐라도 시도해보려는 편이에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이기도 했고요. 저희 어머니도 늘 ‘안 되면 끝까지 해봐라. 분명히 길이 보인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라’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런 말들이 많은 힘이 된 것 같아요.”
이런 아나운서 처음이라고?
춘천을 벗어나 SBS라는 큰물로 옮겨가니 고충이 따랐다. 윤영미는 “SBS에 들어가서 한 3년 동안은 TV 방송을 못 했다. 제 자리가 없었던 거다”라면서 “당시 아나운서 중에 순위를 매기자면 저는 거의 꼴찌였다”라고 말했다. 쟁쟁한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위기의식을 크게 느낀 윤영미. 그녀의 성격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윤영미가 찾은 돌파구는 ‘야구’였다. 당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자 캐스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윤영미는 자신이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구를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야구의 ‘야’자도 몰랐기에 그녀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당시에는 야구에 미쳐 살았던 것 같아요. 매일 근무 끝나면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봤어요. 당시에는 신문밖에 없으니까 스포츠신문을 탐독하고, 야구 중계를 켜놓고 따라 하면서 중계 연습을 했죠. 1년 동안 고시 공부하듯 공부했더니 야구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당시 아나운서 국장이었던 이계진은 윤영미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캐스터 오디션 기회를 줬다. 윤영미는 당당히 합격하며 마침내 ‘여성 최초 야구 캐스터’가 됐다. 그렇게 그녀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야구 캐스터로 활약하며 이름도 널리 알렸다. 지금도 그녀는 1994년 4월 7일 광주 첫 중계부터 한국시리즈 중계 등 영광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후 2000년대 윤영미는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추석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녀는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무대를 선보였다. 아나운서라는 고정관념을 깬 혼신의 무대는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후 윤영미는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됐다. 신신애와 이박사 성대모사는 물론 시원한 입담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최초의 아나테이너 탄생이었다.
“당시 ‘엽기 아나운서’라고 주목받았는데, 요즘 같았으면 짤이 엄청 돌아다녔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사실 아나운서실에서는 품위가 떨어진다면서 별로 안 좋아했어요. 저는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도, 인지도가 높은 아나운서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미지 실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고, 이왕 할 거면 어설프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즐겼을 뿐이에요. 시청자분들도 처음에는 제 모습을 낯설게 느끼다가 아나운서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때 아나테이너라는 말이 처음 나온 거죠.”
윤영미는 50대 진입을 앞두고 또 한 번의 도전을 했다. 2010년 12월 SBS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를 선언한 것. 그 이유에 대해 그녀는 “방송국에서는 50세가 되면 방송 진행보다 교육 등 다른 것을 하기를 원한다.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는 필드에 계속 있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아나운서로 빛나는 윤영미. 그녀가 생각하는 아나운서로서 자신의 강점은 무엇일까.
“저는 특별히 비주얼적으로 뛰어난 것도, 대단한 특기를 가진 것도 아니에요. 제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성실성밖에 없는 것 같아요. 누구나 다 성실하겠지만 저는 굉장히 프로의식이 강해서 평생 지각, 결석을 해본 적이 없어요.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아침 방송에 늦을까봐 전날 출근해 책상에서 잔 적도 있고요. 항상 미리 가서 준비하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믿음을 준 것 같아요.”
제주도, 그리고 가족
윤영미는 프리랜서가 된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종편 채널은 물론 홈쇼핑 채널에도 출연하고, 강연도 하고, 책도 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늘 가슴에 품고 있다. 현재 그녀는 제주도를 오가면서 살고 있다. 책을 쓰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가 제주도의 매력에 이끌려 정착하게 됐다.
제주도 살이를 한 지 벌써 3년째. 윤영미는 올해 종달리로 이사했다. 그 집이 바로 ‘무모한 집’이다. 그녀는 유튜브 채널 ‘윤영미의 무모한 집’도 운영한다. 이사를 하고 수리·인테리어 과정을 거쳐 집이 재탄생하는 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의 전통 양식을 살리면서 모던함을 가미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돌 부엌과 돌 인덕션, 찻장 등 윤영미의 감각이 녹아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저는 방송이 있기 때문에 서울을 왔다 갔다 해요. 그래도 한 달에 반은 제주도에서 사는 것 같아요. 남편은 제주도에 계속 있고요. 제주도 집에 있다 보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이 행복해요. 평생 생각만 하고 못 해봤던 일을 짧게나마 실현한 것 같아서 또 다른 꿈을 이룬 듯한 느낌이 들고 뿌듯해요.”
그런데 무모한 집은 정확히 말하면 윤영미가 산 집이 아니다. 6년 반 동안 장기 렌털한 집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집도 아닌데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윤영미 역시 생각보다 많은 돈을 썼지만 후회는 없다. 그녀는 “저는 남들과 다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에 살던 제주도 집은 ‘체리집’이었어요. 벚꽃(체리 블러섬)이 굉장히 아름다운 집이었거든요. 이번 집은 감나무가 있어 ‘감나무집’이라고 하려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남의 집에 그렇게 억대의 돈을 투자하느냐, 무모한 짓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저도 돈이 그렇게 많이 들 줄 몰랐는데, 무모한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제 인생 자체를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무모한 집’이라고 이름 지었죠.”
윤영미는 자신의 무모한 삶에 관해 얘기하면서 ‘결혼’을 언급했다. 결혼 또한 무모했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에 출판사 직원이었던 황능준 씨와 결혼했다. 화려한 아나운서였던 윤영미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다. 결혼 전 소개팅, 선을 많이 봤는데, 황능준 씨만큼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즉 사랑 하나만 보고 결혼한 것인데, 결혼 생활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윤영미는 가장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했다. 황능준 씨가 결혼 후 3년 만에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전업주부가 됐기 때문. 졸지에 가장이 된 그녀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윤영미는 지난해 한 방송을 통해 그동안 쌓였던 가장의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늘 밝고 당당한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윤영미는 남편과 ‘졸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냐고 묻자 그녀는 “지금 남편과 거의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졸혼이나 마찬가지다. 30년 정도 같이 살았으면 많이 산 거다”라고 말했다.
“남편의 장점은 밝고 긍정적이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이에요. 결혼할 당시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만 좋으면 됐지’라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그건 아니더라고요.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요. 가장으로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면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윤영미가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산 이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 때문이었다. 현재 20대인 두 아들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특히 첫째 아들은 미국 아이비리그에 편입한 바 있다.
“첫째는 경영을 전공해서 월스트리트 쪽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고, 둘째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해요. 나중에 정말 우리 집을 지어줄지도 모르죠.(웃음) 저는 아이들이 무엇이 됐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애들을 속박하며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그렇게 하니까 오히려 애들이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윤영미는 어느덧 60대 시니어가 됐다. 동안 소리도, 젊게 산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잘 모르겠단다.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을 뿐이라고. 윤영미는 나이를 먹을수록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과 여행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무모한 도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뛰어들 그녀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우리 애들 학비를 대는 것이 목표예요. 그리고 제주도 집을 6년 반 계약했으니 잘 살아야죠. 또 욕심이 있다면 강원도나 전라남도에 새집을 얻어 제주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살고 싶어요. 인생의 목표는 오늘을 재밌게 살고, 하고 싶은 대로 살자예요. 독자 여러분도 마음에 어떤 갈망이 있다면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행하면서 즐기며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현장에서 배우는 과정이 이야기가 된다. 특별한 일을 평범하게 만드는 데서 큰 동력을 얻는다. 그래서 사람을 더욱 들여다본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들의 특별한 일상을 담거나, 평범한 그들의 일상에 이벤트를 넣는다. ‘K-로컬’(Korean Local)을 콘텐츠에 담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지만, 그는 자신을 ‘동네 소년’이라고 소개한다.
이영락(50) 국장은 2001년 MBC충북에 입사했다.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 라디오 PD, 뉴스데스크 앵커를 거쳐 뉴미디어팀장, 미래전략국장을 역임하다 올해부터는 신성장전략국의 장을 맡게 됐다. 직장 생활 20년 차. 이쯤 되면 질릴 만도 한데, 그는 아직도 일이 즐겁다 말한다. 오늘의 경험이 당장은 쓰이지 않더라도 푸티지(Footage, 미완성 필름)로 남아 언젠가 연결된다는 걸 알기에, 그는 매 순간이 재미있다. 올해 그의 목표는 “‘평범’으로 ‘비범’하고 패기 있게”다.
‘시절의 인연’ 떡국씨
이 국장은 ‘이용자의 즐거움이 끊김 없이 연결되는 경험’을 콘텐츠에 녹이기 위해 늘 고민한다. 그가 기획하고 감독한 글로벌 농촌 커뮤니티 콘텐츠 ‘촌스런 떡국씨’는 귀농한 20대 청년의 경험으로 시작해 세계 각국의 농부 이야기로 확장됐다. 영상으로 시작했지만, AR 지도로 이어지고, 모바일 농사 게임으로 연결된다. 게임에서 키운 농산물은 마동리에서 실제로 교환할 수 있다. 영상 하나만 보고 그치는 게 아니라, 모양을 바꿔 콘텐츠 경험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촌스런 떡국씨’의 주인공은 청주 문의면 마동리로 귀농한 청년농부 안재은 씨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라디오 프로그램 PD로 있을 때다. 섭외를 하고 보니 그녀가 가진 이야기가 너무 좋아 ‘농사는 처음이지’라는 고정 코너를 만들어 3년째 이어가고 있다. 이 국장은 안재은 씨의 이야기를 조금 더 가까이서 풀어보고 싶었다. 유튜브 ‘촌스런 떡국씨’의 탄생이다.
‘촌스런’(촌’s Run, Chon is run·learn)은 안재은 씨가 운영하는 농업회사법인 이름이다. ‘떡국씨’는 마동리에서 어르신들이 그녀를 부르는 별명이다. 귀농하고 가장 먼저 떡국을 끓여 돌리면서, 동네에서 떡국이라 불리게 됐다고. ‘촌스런 떡국씨’는 안재은 씨의 회사 이름과 별명을 따 만들었다. 시즌1은 ‘시골 오지마을에 들어와 여성 청년 이장이 돼보겠다는 꿈을 꾸는 과정’을 ‘정말 이뤄질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으로 바라본 콘텐츠다.
“그냥 농촌에 들어와 사는 청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 영상을 보고 제2의 안떡국씨가 나오도록 하자는 게 저희 제작진의 목표였어요. 그런데 영상을 보고 정말 귀촌한 ‘조떡국씨’가 나왔죠.(웃음)”
그렇게 시즌2로 이어진 ‘촌스런 떡국씨’는 시즌1에 나왔던 마을 주민 신해인 할머니, 김경순 아지매, 해밀당 최고야 씨가 개인의 미션을 해결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후위기’가 자주 등장했다. 특히나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농촌의 먹고사니즘’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세계가 공감했다. K-농업의 글로벌화를 꿈꾸며 시즌3에서는 ‘글로벌 청년농부’를 다룬다.
“저에게 안재은 씨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자 뮤즈(Muses)예요. 저 혼자라면 다큐 한 편은 기획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여러 편으로 만드는 건 어렵거든요. 뉴미디어를 시작한 지 5년 정도 되었는데, 기존 방송과는 다른 톤&매너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재은 씨 같은 크리에이터 한 명이 있으면, 그가 성장하고 경험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는 그 과정 자체가 콘텐츠가 되죠. 그런 안재은 씨의 도전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커요.”
‘K-경험’을 수출하다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하는 이 국장의 무대는 세계다. 특히 ‘K-경험’의 글로벌 콘텐츠화 가능성을 봤다. 그래서 기획하고 있는 다음 콘텐츠는 ‘브레이브하트(Brave Heart)50’이다. ‘청년 창업가의 존버(끝까지 막연하게 버티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 인사이트’가 주제다.
“저와 같은 월급쟁이들은 누구나 ‘언젠가 회사 때려치우고 나만의 창업을 할 거야’라는 마음을 품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용기가 없어서, 준비된 총알이 없어서, 미래를 확신할 수 없어서 등 여러 이유로 품고만 있죠. 그렇다면 창업이라는 도전을 한 사람들은 얼마나 용감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집을 사든 창업을 하든 1억 원을 대출받는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부담을 갖게 되잖아요. 창업가들은 그 두근거리는 순간을 매일매일 겪겠죠. ‘첫 대출 1억을 받던 날’이라는 공통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담아보려고 해요. 너도 겪고 나도 겪은 공통의 경험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인사이트가 될 테니까요.”
한 사람을 소개하는 영상을 비틀어본 기획이다. 매월 1만 명의 자영업자가 폐업을 하고 그만큼의 창업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하지만 저마다의 인사이트는 달라진다. 외국 사람이 영어로 한 TED 강의 영상을 한국어 자막으로 보면서 우리가 동기부여를 받는 것처럼, ‘K-경험’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도, 알래스카에도, 파리에도 창업가는 있으니까.
그가 글로벌 콘텐츠의 가능성을 본 건 ‘할매레시피’(Grandma’s Recipe)라는 다큐를 제작하면서다. ‘할매레시피’는 마동리 최고령인 91세 신해인 할머니의 떡볶이 레시피를, 마을에 귀촌·귀농한 세 청년이 밀키트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다큐다. 이 작품으로 암스테르담 쇼트필름 페스티벌 어워드에서 수상을 했다.
“충북이라는 지역 창업가의 경험을 처음 해외로 수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어요. 그리고 다큐에 참여한 분들에게 선물이 됐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죠. 그저 자신의 일을 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상을 받은 셈이잖아요. 나의 경험이 세상에 보편타당한 지식처럼 전달된다면 더 기쁘겠죠? 그래서 ‘브레이브하트50’은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와 함께 이들의 인사이트를 모아 학문적인 데이터로 만들어보려고 해요.”
개인의 경험은 특별하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도 특별하다. 특별한 일을 누구나 공감하고 도전할 수 있는 보통의 일로 만드는 것. 이 국장의 기획 동력이다.
가치를 더하는 협업
기획이 콘텐츠로 만들어질 때는 언제나 협업이 필요하다. 그에게 협업이란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막 헤어진 날, 술 한잔에 이야기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프로젝트에 더욱 진심이다. 텐트에 비유하자면 사람이 폴대가 되어준다. 연결을 많이 할수록 더 큰 텐트를 칠 수 있다. 그는 이를 가리켜 ‘가치를 더하는 협업’이라고 했다.
“같은 장르인데 그 안에 약간의 변주를 주는 사람을 봐요. 안재은 씨 같은 지역 창업가들이 주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요즘은 로컬크리에이터라고도 불리죠. 그냥 내 삶을 배경으로 하는데, 거기에 가치를 더하는 거예요. 지역에 존재하는 기존의 틀은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는데, 거기에 내 창호지를 얹어서 조금 색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거죠. 이를테면 농사짓는 방법이 엄청 드라마틱하지는 않잖아요. 로컬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나만의 색을 입히는 것. 어떤 결핍을 그저 자신의 역량만큼 채워보려는 거죠.”
한 마을의 결핍, 농촌의 문제, 기후와 같은 글로벌 이슈 등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문제가 있긴 한데, 해볼 만해’라는 자세로 바라본다. 그런 개인의 노력과 경험을 콘텐츠화하는 게 이 국장의 실험이다.
‘바이5남매’ 시리즈도 개인의 고민에서 시작됐다. 세종시에 정부청사가 생기고 여러 산업기관이 자리 잡으면서 서울을 오가는 직장인이 늘었다. 수도권에 가족이 살고 있는데, 직장이 오송이어서 내려온 사람들은 자취 생활을 한다. 친구들도 다 수도권에 있다 보니 일이 끝나면 놀거리가 없다. 그래서 ‘화요조찬운동회’를 만들었다. 매주 화요일 아침 뒷산을 오르고 내려와 커피와 함께 아침을 먹고 헤어지는 모임이다. 그때 누군가 ‘K-바이오’가 더 크려면 융복합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신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뭉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바이오 산업의 연결 생태계를 콘텐츠로 풀어낸 것이 ‘바이5남매’다. 바이오라는 산업 이야기를 기술 수혜자가 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내는 콘셉트로,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설명해준다. 이 과정에서 산업계의 연결이 일어났다.
이렇게 그의 기획은 제작하는 사람, 등장인물로 참여하는 사람, 영상을 보는 사람 모두에게 가치가 더해지는 콘텐츠로 완성된다.
“그냥 말로만 가치를 더한다는 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비슷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새로운 걸 보여주는 과정이에요.”
‘동네 소년’ 이영락
노트북을 열자 수많은 기획 파일이 쏟아졌다. 실현된 것도, 실현 중인 것도, 실현되지 못한 것도 있다. 주로 일상에서 콘텐츠를 발견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날 기획이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실현하지 못한 아이템들도 잘 두었다가 적시에 꺼내본다. 경험이 쌓이면서 기획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예산이 부족하거나 기술이 없어 콘텐츠로 만들지 못한 10년 전의 기획이 기술 발전으로 구체화되는 때가 온다. ‘보이는 라디오’처럼.
“처음 ‘보이는 라디오’를 우리 MBC충북에서도 해보자고 제안했을 때는 가지고 있는 장비나 예산으로는 어려웠어요. 그런데 2년 후에 다시 보니 소프트웨어가 프리웨어로 풀려 있고, 마침 회사에 안 쓰는 장비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서울 방송국처럼 있어 보이지는 않더라도 구현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지금 안 된다고 앞으로도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엎어진 기획서라고 의미 없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죠.”
그는 일상의 결핍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여전히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지만, 그라고 매 순간 목표를 가지고 달리기만 한 건 아니다. 어느 날은 전파로 날아가 버리는 방송 일에 헛헛함을 느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데 남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주말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건강을 챙겨야겠다고 느꼈을 때는 ‘동네 소년단’을 만들었다. 40~50대 어른들이 그냥 주말마다 동네를 뛰는 모임이다. 그렇지만 국가대표처럼 전지훈련까지 가면서 진심을 다한다. 이렇게 쌓이는 하루하루가 언젠가 기획을 할 때 툭 튀어나올 걸 알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를 보며 아내는 ‘동네 소년 같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별명은 ‘동네 소년’이 됐다.
“아직도 배울 게 많아 일이 즐겁다고 말하지만, 저도 똑같이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요. 고단한 인생이라고 느낄 때도 있죠. 그렇지만 오늘 나의 하루가 내일의 푸티지가 되어줄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아직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좀 더 큽니다.”
나이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일컫는다. 공자가 50세에 하늘의 명을 깨달았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여기서 천명은 인생을 뜻하기도 하지만, 넓게는 우주의 섭리나 보편적 가치를 이른다. 쉰 살이 되던 해, 이광식(71) 천문학 작가는 지난 삶을 내려놓고 우주를 탐닉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그렇게 2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인생은 ‘별 볼 일’이 더 많아졌다.
이광식 작가가 천직이라 여긴 출판사 일을 그만둔 것도 따지고 보면 우주 때문이었다.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천문학 서적을 두루 펴냈고, 한국 최초로 천문 잡지 ‘월간 하늘’을 창간하며 사심을 담았지만, 우주를 향한 갈증은 계속됐다. 발은 땅에 닿아 있어도 머릿속은 늘 별밭을 거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자신의 처지가 억울해졌다.
“하루는 야근하고 가는데 어느 집 베란다에 누런 조등이 걸려 있더군요. 그걸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아, 이렇게 정신없이 밥벌이하다 죽으면 저런 조등 하나 켜고 끝나겠구나. 내가 사는 우주라는 동네는 아직 산책도 못 해봤는데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대문 걸어놓고 지내다 집 안에서 죽는 꼴이잖아요. 마침 출판사를 인수하겠다는 임자도 나타났겠다, 그길로 일을 접고 강화도 퇴모산에 들어왔습니다.”
우주의 가르침, 그것은 사랑
‘우주로 떠나기 전(죽기 전) 백수가 되어 맘껏 빈둥빈둥 게으름 피우며, 읽고 싶은 책 읽고 별 보며 우주나 사색하다 가자.’ 이것이 그의 버킷리스트였다. 그리고 퇴모산에 들어오며 모든 것을 단번에 이뤄냈다. 쉰이라는 나이에 자칫 무모한 선택일 수도 있었을 터. 그러나 이 또한 천명이었을까. 우주를 사색하던 시간 속 그는 천문학 작가라는 제2의 직업을 얻었다.
“낮에는 자연 속에서 빈둥거리다가 밤에는 별을 보고 책도 읽었어요. 그런데 제가 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수식이 많은 천문학서는 반도 이해 못 하겠더라고요. 오죽하면 중고등학생 수학, 과학 참고서를 사다가 공부했다니까요.(웃음) 그렇게 해도 천문학 책들은 쉽게 읽히지 않더군요. 어쨌든 10년 정도 관련 책만 100여 권 읽다 보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천문학 서적을 재미있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렇게 집필을 시작했죠.”
가을부터 시작한 작업은 그해 겨울에 마무리됐다. 교양천문학서 스테디셀러에 빛나는 ‘천문학 콘서트’(2011)가 그렇게 탄생했다. 인문학적 융합형 천문학 도서라는 호평에 이어, 쇄를 거듭하며 인세도 적잖이 받았다. 들어온 돈은 고스란히 별과 우주를 산책하는 데 쓰였다.
“그 인세로 지금 사는 집 2층 베란다에 개인 관측소 ‘원두막 천문대’를 지었어요. 요즘도 가끔 올라가 10인치 돕소니언 반사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죠. 여름엔 안드로메다은하를 많이 보는데, 지구로부터 250만 광년 떨어져 있어요. 인간의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먼 천체라고 해요. 또 우리가 보는 별은 대개 수백 년 전에 출발한 빛 알갱이들이죠. 그렇게 별과 우주의 방대한 시공간에 비하면 인류는 모닥불에서 탁 튀어 올랐다 사그라지는 불씨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철학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천문학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고 했다. 밤하늘을 마주할 때면 그러한 물음을 통해 삶을 성찰한다고. 오랜 사색 끝에 이 작가가 내린 결론은 하나, 바로 ‘사랑’이다.
“수십 년 우주를 고찰하며 깨달은 점은 ‘결국 인간이 할 일이라곤 사랑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주의 나이는 138억 년인데, 그 장구한 시간 앞에 우리네 인생은 그야말로 찰나입니다. 보이저 1호가 명왕성 궤도에서 찍은 사진 속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아요.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지요. 그렇게 조그만 행성에서 길어야 100년 남짓 머물면서 욕심내고 아옹다옹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천명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슬기로운 삶이라 생각해요. 셰익스피어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죠. ‘머지않아 헤어질 것들을 열렬히 사랑하라.’ 그게 우주가 제게 준 가르침입니다.”
불을 끄고 별을 켭시다
이광식 작가는 우주를 잊고 사는 현대인을 일컬어 ‘우주불감증’을 앓는다고 표현했다. 특히 지금처럼 광해(光害)가 심하기 전, 깜깜한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보며 꿈을 키웠을 중장년조차 우주감수성을 잃어가는 데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에 우주와 별을 더 가까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50, 우주를 알아야 할 시간’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책에서 “우주와 별을 알아가고, 나와의 관계를 이해하면 보다 균형 잡힌 가치관을 갖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실제 거리만큼이나 별과 인간의 관계는 다소 멀게 여겨지기 십상이다. 이에 그는 인간은 ‘메이드 인 스타’(Made in star)라며 관계성을 설명했다.
“흔히 별을 까마득한 존재라 여기는데, 알고 보면 인간은 별 먼지로 이뤄졌습니다. 수소를 제외한 지구상 모든 물질은 별과 초신성에 의해 생겨났으니까요. 철, 칼슘, 탄소 등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 또한 별들의 레시피로 만들어진 셈이죠.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닌 과학적 사실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어버이별’에서 몸을 받고 태어난 존재랍니다. 즉 별이 없으면 인류도, 나도 없었을 거예요. 그만큼 별과 인간은 밀접한 관계죠. 별지기들이 별을 동경하는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별지기 대부분이 이러한 별의 존재를 알리는 일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가령 어떤 별지기들은 길가에 천체 망원경을 설치해놓고 행인들에게 토성을 보여주는 등 자신이 아는 별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기도 한다. 과거에 비해 천체 망원경이 많이 보급되고 관측 기술이 발달했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별 보는 일’을 어렵게 여긴다. 하지만 이 작가는 “당장 오늘 밤이라도 별지기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사람들은 제가 수백만 원 하는 어마어마한 장비를 가진 줄 알아요. 그런데 지금 있는 굴절 망원경도 20만 원 정도고, 원두막 천문대에 놓은 몸체만 한 반사 망원경도 100만 원대입니다. 그거면 달 분화구는 물론이고 목성 줄무늬도 관측 가능해요. 관심 있다면 투자할 만한 금액이죠. 꼭 망원경을 살 필요도 없습니다. 북극성을 비롯해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만 2000개가 넘거든요. 그러니 별지기가 되고 싶다면 일단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보세요. 동시에 우주와 별과 나의 관계를 헤아린다면 그것으로 별지기의 자격은 충분합니다.”
이 작가는 서울 같은 불야성 도시에서는 별 관측이 어려우니, 강원도나 강화도 등 인가가 적은 지역을 찾길 권유했다. 더불어 그는 한국의 빛 공해 문제를 일컬으며, ‘별 볼 일’ 많은 세상을 위한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이 빛 공해가 심각한 걸로 세계 2위라고 해요. 빛 공해 지역이 국토의 89.4%를 차지하죠. 때문에 국내에서 밤하늘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곳은 강원도 양양 ‘별빛 보호지구’처럼 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단순히 별 관측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수면 장애나 생태계 교란 등 환경 문제도 일으킨다고 해요. 그러니 인간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밤에는 불을 끄고 하늘의 별을 켜보면 어떨까요?”
“2022년 개기월식 놓치지 마세요!”
인터뷰 말미에 이광식 작가는 별지기를 꿈꾸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희소식을 전했다.
“다가오는 11월 8일은 개기월식을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월식은 지구가 달과 태양 사이에 위치해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가려지는 현상이죠. 우리나라 어디서든 관측할 수 있는데, 좀 더 잘 보려면 주변에 큰 건물이나 높은 산이 없고 동남쪽 하늘이 트인 지역이 좋아요. 꼭 실제로 그 장엄함을 마주하시고, 우주와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갖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