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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에 딱 맞는 한달살기 프로그램 찾는다면?
- 지역을 온전히 느끼며 소소한 일상을 만끽하는 여행, 한달살기가 인기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한달살기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역 활성화를 유도하고, 숙박업체는 장기 임대 상품을 선보인다. 한달살기를 하고 싶은 중장년이라면 이번 기사를 참고해 계획을 세우고, 당장 떠나보자. 중장년 10명 중 8명은 ‘장기간 살아보는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한달살기는 중장년의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 중 하나지만, 막상 떠나려니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비용으로, 얼마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이들이 많다. 자유롭게 떠나도 되지만, 가이드와 함께하는 여행이 익숙한 중장년이라면 프로그램으로 첫 한달살기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해 활동비를 받으며 한 달을 보낼 수도 있고, ‘작가로 한달살기’처럼 테마가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호텔에서 한달살기도 하나의 방법이 됐다. 조금 더 알찬 한달살기를 위해 입문이 되어줄 프로그램, 숙소를 찾을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 한달살기 꿀팁이 가득한 도서까지 참고가 될 내용을 소개한다. ◆한달살기가 처음이라면 많은 중장년이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는 곳은 제주다. 하지만 제주 외에도 한달살기에 적합한 다양한 도시들이 있다. 어느 도시가 좋을지 모르겠다면, 한달살기를 지원해주는 각 지자체 프로그램을 참고해보자. ‘남도에서 한 달 여행하기’, ‘경남에서 한 달 여행하기’ 등이 대표적이다. 예산을 지원하다 보니 조건이 까다로울 수 있지만, 기회와 혜택을 생각하면 도전해볼 만하다. 각 지자체는 지역의 특색을 담은 명소나 특산품 혹은 농장 체험 등의 다양한 여행을 제안하는데, 만약 프로그램 신청이 어렵다면 지자체의 추천을 참고해 자유 일정을 계획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 달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면 3박 4일이나 일주일부터 시작해도 된다. 지자체별로 지원하는 예산 범위와 신청 조건, 신청 시기가 다르므로 미리 알아두면 좋다. 예산 지원은 사전 지급이 아닌 사후 정산이라는 점 참고하자. ◆마을과 깊게 교류하는 한달살기 지역 주민들과 교감하고 머무르는 지역에 깊이 녹아들고 싶다면 ‘마을 호텔’ 형태의 도시에서 한달살기를 해보자. 한 건물에 라운지, 숙박, 헬스, 식사 등의 서비스가 모여 있는 호텔과 달리, 마을호텔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 기능을 한다. 마을 입구의 카페가 안내데스크 역할을 하고, 마을의 맛집이 다이닝 역할을, 곳곳의 공방 등이 체험 서비스 역할을 한다. 그러니 마을 전체가 곧 즐길 거리다.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건 덤이다. 관광형 한달살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한달살기를 찐하게 경험하고 싶다면 마을호텔은 어떨까. ㆍ공주 마을스테이 ‘제민천’ 공주 제민천은 주민들이 유기적으로 마을호텔을 구성하고 있다. 한옥스테이 ‘봉황재’에서 시작하는 마을호텔의 프런트는 ‘가가상점’이 담당하고, 커뮤니티이자 로비 역할은 ‘반죽동247’ 카페가 하고 있다. 봉황재 외에도 ‘공주하숙마을’ 등의 고즈넉한 한옥스테이가 곳곳에 위치하며, 제민천을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먹거리와 볼거리가 숨어 있다. ㆍ강원도 정선 ‘마을호텔 18번가’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마을호텔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고한읍의 낙후된 폐광촌에 고한18리 주민들이 힘을 모아 조성했다. 빈집을 리모델링한 숙소에 머무르면 마을식당, 카페, 사진관, 이발관 등에서 사용 가능한 할인 쿠폰을 받을 수 있다. 어르신들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은 로비 역할을 한다. 마을을 둘러보다 쉬어가도 좋고, 어르신에게 볼거리를 물어봐도 좋다. ㆍ군산 ‘후즈데어’ 군산 영화동에서는 ‘영화장’이라는 오래된 목욕탕과 여관이 게스트하우스로 재탄생 한 ‘후즈데어’에서 마을호텔이 시작된다. 프런트 역할은 영화타운에 있는 미국 음식점 ‘럭키마케트’가 담당한다. 스페인 레스토랑 ‘돈키호테’, LP바 ‘해무’, 청주바 ‘수복’ 등이 모여 있는 영화타운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유명한 군산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ㆍ서울 ‘서촌유희’ ‘서촌유희’는 오래된 한옥과 옛길의 흔적이 골목 곳곳에 녹아 있는 동네의 개성 넘치는 가게들을 연결하고, 걷기 좋은 골목과 장소를 제안한다. 서촌유희의 한옥 숙소는 휴식을 취하며 나를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책으로 미리 챙기는 한달살기 ‘꿀팁’〉 1_여행 말고 한달살기 저자 김은덕, 백종민 출판 어떤책 한달살기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이드북. 장기 여행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꿀팁이 가득하다. 특히 해외에서 한달살기를 해보고 싶다면 상황별·계절별 추천 도시들을 보고 나에게 맞는 나라를 찾아보자. 2_60대 부부의 피렌체와 토스카나,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 소도시 한 달 살기 저자 김영화 출판 바른북스 한 도시에 머무르며 주변 소도시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자유로운 여행자에게 어울리는 책. 대중교통을 이용해 유럽을 둘러볼 방법을 소개한다. 3_다녀왔습니다, 한 달 살기 저자 배지영 출판 시공사 일하며 한달살기, 은퇴 후 한달살기, 반려동물과 한달살기 등 나의 상황에 맞는 계획을 세우기 좋은 책. 국내에서 한달살기를 했던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떠나고 싶어진다. ◆호텔에서 한달살기 ‘호텔에서 보내는 바캉스’라는 의미의 ‘호캉스’가 유행하더니 ‘한달살이’ 상품도 등장했다. 깔끔한 공간과 다양한 부대 서비스로 중장년에게 인기가 많다. 즐길거리가 많은 도심에서 일상을 만들어가는 한달살기를 하고 싶다면 호텔에서 머물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가격은 천차만별. 롯데호텔이 내놓은 ‘한 번쯤 꿈꾸는 호텔에서의 삶’을 주제로 한 시그니엘 서울 한달살기는 1000만 원이 넘는다. 신라스테이, 포포인츠바이쉐라톤, 롯데시티호텔 등은 100만~200만 원대에 이용할 수 있다. 호텔별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다르니 취향에 맞게 골라보자. ◆주제가 있는 한달살기 하나의 주제를 정해 한달살기를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만 19세 이상 60세 이하인 작가들의 한달살기를 지원하는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 한달살기’, 제주 시골집에서 보내는 어른의 방학 콘셉트의 ‘제주맥주 한달살기’, 다른 지역에서 원격 근무를 하며 살아보는 일(Work)과 휴가(Vacation)를 함께하는 ‘강원도관광재단 워케이션’, ‘제주 세화리 질그랭이 워케이션’ 등이 있다. 〈쉼이 되는 공간, 숙소 찾는 플랫폼〉 한달살기에서 중요한 건 머무르는 공간이자 생활을 하는 숙소다. 장기 숙박 상품을 모아둔 플랫폼에서 살고 싶은 숙소를 찾아보자. ㆍ미스터멘션 ‘쉼’을 제안하는 장기 숙박 플랫폼. 한달살기, 보름살기, 일주일살기에 맞춰 전국의 숙소를 볼 수 있다. 추천 숙소, 호텔, 프라이빗한 곳,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있는 곳 등 다양한 테마가 다양하다. 개인이 숙소를 예약했다가 일어날 수 있는 ‘이중 계약’, ‘당일 입실 거부’ 등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 100만 원까지 숙소 비용을 보장하는 안전거래제도가 있다. ㆍ호텔에삶 한달살기를 할 수 있는 호텔만 모았다. 저렴한 3성급부터 5성급 프리미엄까지 서울, 수도권, 경상, 제주에 있는 호텔 숙박 정보가 있다. 호텔을 예약하기 전 미리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투어를 신청할 수 있다. 매월 할인 프로모션도 있으니 원하는 도시의 호텔 가격을 비교해보고 합리적인 호텔 라이프를 즐겨보자. ㆍ에어비앤비 에어비앤비는 숙박 공유 서비스다. 전문 숙박업체가 아니라 개인이 제공하는 빈집을 빌리는 개념이기 때문에 공간 상태도 천차만별이고 숙박업체와 같은 서비스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대신 저렴한 숙소를 구할 수 있다. 장기 숙박이라면 할인 제안도 해볼 수 있다. 특히 해외는 에어비앤비가 활성화되어 있어 잘 둘러보면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다. 숙소 선택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슈퍼호스트’가 제공하는 숙소 위주로 보고, 해당 숙소의 후기와 별점을 참고하는 게 좋다.
- 2022-07-1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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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고령층, 노후 자금 없어 '100세 시대' 불안 느껴
- 2022년 일본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 81.64세, 여성 87.74세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평균 수명은 매년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후생노동성에서는 2040년 일본인의 평균 수명이 100세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돈 때문에 100세 시대가 다가오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어떻게 노후 자금을 마련해야 할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머니 캐리어’를 운영하는 위즈립(Wizleap)이 20~50대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자산 형성에 대한 의식 조사’에 따르면 ‘100세 시대라고 하면 불안한가’라는 질문에 90%가 그렇다고 답했다. 불안한 이유로는 돈(수입·저축·자산)이 91.4%로 1위를 차지했고 건강·병이 87.9%, 일·경력이 74.5%로 뒤를 이었다. 불안한 이유로 돈을 선택한 응답자를 대상으로 어떤 점이 가장 불안한지를 물었더니 ‘노후생활 자금·연금’(43.4%)을 꼽았다. ‘수입이 늘지 않는 것’(15.8%)이 다음이었다. 노후 자금에 대한 걱정은 여성이 58.6%로 더 많았다. ‘노후 2000만 엔 문제’에 대해서는 78.4%가 위기감을 느낀다면서, 70.6%는 연금 이외의 노후 자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30대(58.3%)가 40~50대(41.7%)보다 노후 자산 계획을 세워야 한다(세우고 있다)는 위기감을 더 가지고 있었다. 지난 2019년 일본 금융청은 2019년 기준으로 65세 이상 남성과 60세 이상 여성인 부부가 2049년까지 30년을 더 산다고 가정하고 재테크 보고서를 내면서 다른 수입 없이 연금으로만 생활하면 매 월 약 5만 엔의 적자가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약 2000만 엔을 준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연금만으로는 노후 자금이 부족하니 100세까지 살려면 2억 원을 더 모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되면서 일본 내에서 ‘2000만 엔 문제’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특히 아베 총리가 2004년 연금 제도를 개혁하면서 ‘100년 안심’이라는 홍보를 했던 터라 국민들의 반발이 컸다. 실제로 응답자의 80.9%는 65세부터 100세까지를 사는데 2000만 엔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절반 이상은 노후에 3000만 엔 이상이 필요하다고 봤다. 물가가 오르고, 연금이 적어지고, 연간 수명이 늘어나고 있어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다. 위즈립은 “‘100세 시대’, ‘노후 2000만 엔 문제’, ‘연금 문제’ 등 노후에 관한 단어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 ‘저금을 할 수 없다’거나 ‘수입이 늘지 않는다’는 근시안적 고민보다 자산 형성이라는 미래 고민을 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여생을 즐기고 유산을 남기기 위해 노후 자금을 꼭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투자 등의 자산 형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고 덧붙였다. 저소득층일수록 노후 자산을 마련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크게 느끼면서도 실제로 자산을 형성하기 위한 행동을 옮기지는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축을 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응답자의 59.3%는 ‘자산에 관심은 높아졌지만 투자 등을 실제로 할 수 없다’고 답했으며, 특히 50대 여성의 경우 자산 형성 계획을 세우는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위즈립은 “‘100세 시대’가 단순히 수명이 연장된다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일하는 방법, 인생의 타이밍 등을 선택해 나갈 필요가 있다”며 “유연한 삶의 방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노후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2022-07-0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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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코로나 시대, 고도원이 전하는 치유를 위한 '멈춤'
- 청와대 연설비서관으로 일하다가 몸이 무너진 순간, 마치 파노라마처럼 빛을 봤다.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했을 때부터 ‘내 삶은 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매일 아침 400만 명에게 편지를 쓰며 꿈 너머 꿈을 꾸자고 이야기하게 된 계기다. 푸른 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속 맑은 옹달샘에서 명상을 전파하고 있는 고도원(70)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지금, 멈춰보세요! 들리나요?” 고 이사장의 말에 순간 숨을 참았다. 3초 정도 주변 모든 사물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마음에 고요함이 깃든다. 그때 마음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에는 내가 놓친 것들이 담겨 있다. 영감을 얻는 순간이다. 이유 없는 감사 ‘명상’ 고도원 이사장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담당비서관이던 시절, 추천 도서에서 발췌한 구절과 함께 짧은 글을 적어 ‘고도원의 아침편지’라는 이름으로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의 글을 받아보는 독자가 100만 명이 넘어가자 2004년에는 아침편지문화재단을 세웠다. 고 이사장의 글을 받아보는 독자는 이제 약 400만 명에 이른다. 2010년에는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 옹달샘’을 열고 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템플스테이처럼 옹달샘을 찾아 머무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이 늘었다. “명상은 스스로 성찰하고 사색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궁극적인 목표는 이유 없이 감사하는 거죠. 삶에서 우주의 본질 같은 것이랄까요. 명상을 통해 사랑과 감사를 회복하는 거예요.” 명상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먼저 긴장을 풀고 몸을 이완한다. 이완의 방법으로 주로 사용되는 게 호흡이다. 천천히 걷는 것도, 길게 심호흡하는 것도, 느리게 춤을 추는 것도,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이완의 방법일 수 있다. 몸이 이완됐다면 하나에 몰입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 지금 마시고 있는 차, 어딘가를 향하는 내 걸음, 무엇이든 몰입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다 명상이 될 수 있어요. 청소할 때, 설거지할 때도 몰입할 수 있죠. 집중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하는 거고, 몰입은 집중한 줄도 모르게 놀이처럼 되는 거예요. 무엇보다 이 과정에 ‘기쁨’이 있어야 하죠.” 몰입을 잘했다면 마지막으로 변화의 단계가 온다.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다.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 몸이 회복되고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정화된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를 성찰하면서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진다. “몸의 근육을 키울 때도 처음에는 1kg을 들었다면 다음에는 2kg, 5kg 무게를 늘려가잖아요. 정신도 그래요. 상처나 외로움을 견뎌내는 연습을 계속하면 마음 근육이 단단해지고 면역력이 생겨요.” 멈춤은 하나의 과정일 뿐 명상을 하려면 일단 멈춰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이완하고 몰입하려면 자연에 가깝고 조용한 곳이 좋다. 하지만 우리는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에 산다. “거실이나 베란다에 식물을 두어보세요. 정 없으면 그냥 한 공간을 설정해두어도 돼요. 이곳은 내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해두는 거죠. 시끄럽거나 빛이 센 곳보다는 조용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좋겠죠. 이런 장소를 찾고 명상을 위한 환경을 설정하는 행위 자체도 즐거울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차를 마시면서, 이 시간이 주어져 감사하다고 느낀다면 이것도 좋은 멈춤의 장소가 되고 도구가 되는 거죠.” 조용한 장소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순간, 머릿속이 시끄러워지곤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떠오르거나, 미처 해결하지 못한 걱정들이 몰려온다. 상념(想念)이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 ‘멈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종을 치는 거예요. 밥을 먹다가 종을 치면 그대로 멈춰요. 그럼 맛이 느껴질 거예요. 머릿속으로 종을 쳤다고 생각하고, 그 순간 하던 행위를 멈춰보세요. 존재했지만 내가 소란해서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들릴 겁니다.” 고 이사장은 상념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상념이 떠오르는 그 순간마저 경험이 된다. 그는 상념을 메모지에 적어서 던져둔다. 머릿속을 비우기 위함이다.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지는 걸 느낄 때, 그 고요함에서 오는 희열을 얻는다. 멈춤은 나를 비우는 하나의 ‘과정’이다.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시대 고 이사장은 코로나19 이후 ‘외로움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왔다고 표현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난 2년은 고 이사장에게도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힐링 산업은 대면을 해야만 하는데, 모든 게 멈춰버렸기 때문. “코로나19가 안겨준 현상 중 하나가 고립감과 외로움이죠.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는 코로나19를 통해 심화됐을 뿐 이전에도 있던 거예요. 고(故) 이어령 장관이 마지막으로 ‘사실 외로웠다’는 고백을 했어요.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이룬 사람도 느끼는 감정이죠.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이라는 자리도 생겼잖아요. 사회 전반으로 보면 외로움이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이고, 개인도 외로움을 남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된 거죠.” 2020년 6월 고 이사장은 ‘코로나블루 극복을 위한 대응 전략 세미나’에서 코로나19가 남긴 집단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사회적 생태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도 이 후유증을 다룰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코로나19 이전에도 고 이사장은 ‘사회적 치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깊은산속 옹달샘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세월호 유가족, 소방관 배우자 등을 초청해 휴식과 위로의 시간을 마련했다. “의료 계통 종사자, 학교 선생님, 공직자, 실업 청년 등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인해 더 많아진 거예요. 우리 마음에 어떤 후유증을 남긴 거죠. 우리는 외로움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내면의 근육을 단단히 할 기회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외로움은 마음의 근육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예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라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명상을 다시 강조하게 되네요.(웃음)” 공부하는 중년과 꿈 너머 꿈 머릿속이 소란할 때 내리는 판단과 고요한 상태에서 내리는 판단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면 이제 용기를 내야 한다. 고 이사장은 중장년층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판단과 예지력으로 인생을 전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그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의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다. 블록체인 아카데미를 준비하는 이유다. “중년 이후에는 실패를 만회할 시간이 별로 없죠. 그래서 훨씬 깊은 공부가 필요해요. 공부를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용기죠. 우리는 사회 흐름을 공부해야 돼요. 블록체인, 가상화폐, 메타버스, AI, ICT(정보통신기술), 새로운 흐름이죠.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어질 수밖에요.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벌어졌는지, 세상이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공부한 것을 토대로 방향 전환을 해야겠죠. 실패하더라도 최소화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거고요. 재수 없으면 100세까지 산다고 하는데, 50세에 시작해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고 이사장은 중년의 통찰과 혜안이 사회의 유산이 되기를 바란다. ‘꿈 너머 꿈’을 말하는 이유다. ‘꿈 너머 꿈’은 꿈을 설정할 때부터 꿈을 이룬 뒤 무엇을 할지까지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백만장자가 꿈이라면, 내가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치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자기 성취에서 이타성을 조금 가져보자는 거예요. 나에게도 의미 있고 다른 이에게도 의미 있는 쪽으로 인생 목표를 세워보는 거죠. 그래서 꿈 너머 꿈을 가진 사람은 이루지 않아도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이 행복하고 위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 2022-06-1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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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회복 다채롭게” 주목받는 전시들
- 기나긴 코로나19 대유행으로부터 벗어나는 5월, 단계적 일상회복에 발맞춰 다양한 전시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의 어제와 오늘, 근현대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예술 작품과 기록물, 이맘때에만 꽃을 피우는 북한 식물들부터 독서와 국가무형문화재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행사가 준비돼있다.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은 오는 22일까지 ‘기록으로 보는 청와대’ 기록전을 개최한다. 현장과 온라인에서 동시 개최하는 이번 전시는 대통령기록관 야외공간에 방문하거나, 대통령기록관 누리집 ‘이기록 그순간’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현장 전시관에는 총 114건의 기록물이 전시돼있다. 1부 ‘청와대의 시간’, 2부 ‘청와대 공간’, 3부 ‘기록으로 보존하는 청와대’로 구성돼, 청와대의 변천 과정, 경내 건축과 본관의 각 실, 그리고 그 공간에 있었던 대통령의 사진들이 함께 공개된다. 1부 청와대의 시간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청와대의 변천 과정을, 2부 청와대의 공간에서는 청와대 본관, 영빈관, 상춘재 등 청와대 경내 건축의 특징과 용도를 소개한다. 3부 ‘기록으로 보존하는 청와대’에서는 현재 대통령기록관에서 관리·보존하고 있는 청와대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온라인 콘텐츠 ‘청와대’에서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청와대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 사진, 문서 등 60여 점을 선보인다. 특히 1991년 개최된 청와대 준공식과 신본관에서 치러진 행사 기록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기록물이라 눈길을 끈다. 콘텐츠 원문은 대통령기록관 누리집 속 ‘기록컬렉션-이기록 그순간’에서 볼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예술원은 한국근현대미술사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지난 10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예술원 1층 전시실에서 ‘2022년도 대한민국예술원 소장작품전’(이하 예술원 소장작품전)을 개최한다. 1954년 예술원 개원 당시 초대 회장을 지낸 춘곡 고희동 선생을 비롯한 작고 회원 51명과, 미술 분과 현 회원 15명 등 총 66명의 작품 66점을 대중들에게 선보인다. 예술원은 1974년부터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미술 분과 회원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이중 일부를 소개하는 ‘예술원 소장작품전’을 격년으로 열고 있다. 올해는 고(故) 송영방 회원의 (2015년 작)와 고 김병기회원의 (2018년 작), 고 한도용 회원의 (2018년 작), 최의순 회원의 (1964년 작), 정상화 회원의 (2014년 작)를 처음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은 북방계 및 북한 식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강원도 양구군 소재 ‘DMZ자생식물원’의 북방계식물전시원이 오는 17일부터 이달 31일까지 특별 개방된다. DMZ자생식물원은 9개의 전문전시원으로 구성돼 있다. 비무장지대 분포식물의 61%인 1100종을 보유하고 있다. 해마다 이 시기에는 함박꽃나무, 가침박달, 설앵초, 갯활량나물, 애기자운, 물앵도나무 등이 피어 있으며, 이번에 특별 개방된 북방계식물전시원에는 너도개미자리, 백두산떡쑥, 흰양귀비, 오랑캐장구채, 만병초 등이 방문객들을 반길 것이다. 산림청 측은 “봄은 늦게, 여름은 일찍 찾아오는 비무장지대 특유의 기후 특성 때문에 이 시기에만 꽃을 피우는 북방계 및 북한 식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특별개방을 2주간 진행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국립무형유산원 누리마루 3층 라키비움 책마루에서 작은 전시 를 지난 9일부터 10월 28일까지 개최한다. 작은 전시는 책마루의 문화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서가 곳곳에 전시 공간을 마련해 다양한 모습과 방법으로 무형유산 관련 작품을 소개하는 행사다. 이번 전시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라는 주제로 다양한 전통 기술을 통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나전서류함(나전장)’, ‘은입사 차합(입사장)’, ‘화관(자수장)’ 등 국가무형문화재 10종목의 보유자, 전승교육사, 이수자들의 작품을 모았다. 더불어 작품에 활용된 국가무형문화재의 기록화 영상과 도서를 준비해 방문객들에게 더욱 깊이 있게 무형유산을 소개할 예정이다. 라키비움 책마루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에만 휴관한다. 도서 열람 및 대출 외에도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는 등 지역민과 방문객을 위한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2022-05-1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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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육아에 발목 잡힌 중년의 두 번째 사랑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두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였다. 여전사처럼 살아온 날들이 일순간 스쳤다. 기쁜 날이 슬픈 날인 사람들. 나도 그랬다. 남편 없이 10년을 혼자 달려왔지만 오늘처럼 그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남편 없이 치르는 애들 결혼식이 처음도 아니고 이번이 두 번째건만…. 기념 촬영을 마치고 피로연장으로 가려는데 막 걸음마를 시작한 외손녀가 하객들이 빠져나간 예식장 로비를 뒤뚱이고, 행여 넘어질세라 엄마인 딸애가 그 뒤를 부지런히 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일까, 다시금 갈등이 일었다. 연인산에서 받은 프러포즈 10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같은 대학의 등산 동아리에서였다. 그는 재수를 한 복학생 선배, 나는 새내기. 다섯 살이 많았던 그는 나를 여동생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귀염성 있는 내 외모와 활달한 성격이 말수 없는 그에게 친근감과 활력을 주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 두 살 많은 언니, 이렇게 여자 셋이서 단출히 살아왔던 내게 그의 존재는 오빠 같고, 때로는 아빠 같았다. 그는 맘도 몸도 넓고 듬직했다. 그렇게 서로 가까워지면서 동아리 등산보다 둘만의 등산이 잦아졌고, 주말마다 자연스레 손을 잡고 산자락을 누비며 산등성이를 오르내렸다. 동아리 회원들 앞에서 시치미를 딱 뗀 채 비밀 연애를 하는 스릴도 만끽했다. 그가 졸업 후 우리의 만남은 더욱 자유롭게 무르익어 어느 단풍 짙은 가을, 경기 가평 소재 지금의 연인산에서 그가 내게 프러포즈를 해왔다. 연인산, 로맨틱한 이름의 산. 단풍에 취해, 달콤한 키스에 취해 나는 졸업하자마자 그와 결혼했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하지만 다른 미련은 없었다. 미련은커녕 대기업에 근무하는 남편, 살림이 적성에 꼭 맞는 나, 연달아 낳은 3남매와 옥시글옥시글 가정 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졸업 후 진로 계획도 딱히 없었던 나의 결혼은 집에서도 환영하는 운 좋은 ‘취집’이었다. 주말이면 연애 때 기분을 살려 함께 산에 오르는 것도 같은 취미를 가진 부부라는 점에서 행복을 더했다. 자존심과 맞바꾼 캐나다 이민 남편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지고 침울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지금도 가슴 아프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종달새처럼 조잘대는 귀여운 여자로만 나를 대했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성숙한 아내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나대로 남편 뒷바라지에, 한창 손이 가는 아이들 치다꺼리로 그의 사정을 소상히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한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어느 날 저녁 밥상을 물린 후 남편이 이민 카드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자고 했다. 회사 사정이 나빠져 본인이 곧 밀려날 것 같다면서. 그렇게 되면 자존심 상해서 더는 한국에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 말대로 자존심이 문제였다면 당연히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듣기에 솔깃했다.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 않나.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 면에서 새로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캐나다 이민 생활은 남편에게는 시련의 시작이었다. ‘넥타이를 풀어야 산다’는 말이 있지만 그는 10년 가까이 넥타이를 풀지 못했던 것이다. 이른바 화이트 칼라가 영어권 선진국으로 이민 갔을 때는 본국에서의 커리어를 내려놓고 블루 칼라 노동 시장에 과감히 뛰어들어야 살 수 있다는 이민계의 정설을 예의 그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남편의 퇴직금 외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산이 얼마간 있었기 때문에 일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다른 이민자들에 비해 훨씬 적었다. 여유를 가지고 신중하게 일을 찾자고 한 것이 그만 세월만 흘려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만 위기를 위기로 의식하지 못하는 한 위기는 말 그대로 위기가 되어 덮쳐올 뿐인 것을. 넥타이를 풀지 못한 남편의 위암 이민 7년 차 무렵, 이미 50대 초중반의 남편은 일 찾기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고, 다섯 식구가 물가 비싼 나라에서 벌이 없이 의식주를 해결하다 보니 곶감 빼먹듯 가진 돈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이민 초기에 부부가 함께 청소라도 하자고 북돋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캐나다 생활에 잘 적응해주었다는 점이다. 백인 학생 위주의 학교도 무난히 잘 다녔고 교우 관계도 원만했으며, 별로 신경 써준 것도 없었는데 학업 성적도 그만하면 좋았다. 터울이 크지 않은 3남매가 원만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탈 없이 대학에 진학해준 것이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캐나다에서의 10년 세월이 흘렀다. 기왕 늦은 것, 아이들이 잘 정착해준 것에 안도하며 일이야 지금부터 찾으면 되지 않냐고 남편과 내가 뒤늦은 결의를 다진 것도 잠시, 불안은 불행이 되어 현실에 얼굴을 디밀었다. 남편이 위암 판정을 받았다. 10년의 무직 스트레스를 몸이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손써 볼 새도 없을 만큼 급박한 상태에서 3개월 후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허망하고 허탈했다. 아무리 본인이 선택했다지만 멀쩡한 내 나라 두고 이국에 와서 병 걸려 죽은 남편이 너무나 가여웠다. 체면 따위 생각하지 말고,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아무 일이나 했더라면, 돈을 떠나서 건강을 유지하지 않았겠는가. 뒤늦은 후회로 가슴을 쳤다. 사회에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자기 위치가 없다는 것이 남자로서 얼마나 좌절감과 자괴감이 들게 했을지, 가족들 건사하느라 바쁘게 돌아치던 나는 미처 몰랐다. 미련하고 지혜 없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아내가 바로 나였다. 생활 전선에 부는 칼바람 남편을 황망히 떠난 보낸 후 몰아닥친 것은 현실의 칼바람이었다. 그해 막 대학을 졸업한 맏이인 딸은 다행히 바로 취업이 되어 집안의 기둥이 되었고, 대학 3학년이던 큰아들과 신입생 둘째 아들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여 자신들의 용돈을 해결했다. 학자금은 장기 대출이 가능하고 취업 후 갚으면 되니 당장 재정적 압박이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나였다. 이일 저일 가릴 것 없이 취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한국에서나 캐나다에서나 남편만 믿고 살면서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던 내가 허드렛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겠나. 게다가 집에서 살림하며 가족끼리만 지내느라 영어라곤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니. 그런 내가 한인이 경영하는 시내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커피를 타거나 서빙을 할 처지는 아니라도 주방에서 빵을 굽고 간단한 샐러드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것만도 아무 기술 없는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집의 월세를 내고 생활을 꾸릴 수 있는 게 어딘가. 다시 사랑이 찾아왔으나 카페 주방 6년 차로 일이 익숙해질 무렵 매주 화·수·금요일마다 아침을 먹으러 오는 캐나다 현지의 중년 남자가 1년 전부터 내게 호감을 표해왔다. 그는 인근 대형 약국의 관리 약사로 주 3일을 근무하는데, 출근하는 날이면 내가 일하는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3년 전 이혼하면서 아내와의 재산 분배 문제로 운영하던 약국을 처분했고, 두 자녀의 재정적 부양에서도 이제는 자유롭다. 건강하고 외모도 괜찮고 진중한 성격이다. 나도 그에게 호감이 간다. 그가 오는 날,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는 설렘도 있다. 그와는 퇴근 시간이 맞을 때면 함께 저녁을 먹고 산책하는 정도의 데이트를 하고 있다. 그는 나와 더 가까워지길 원하지만 아직 나는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내 쪽에서 마음을 정하기만 하면 조만간 그와 재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딸은 결혼해서 한국에 나가 살고, 아들도 졸업 후 한국으로 취업이 되어 내 곁을 떠났다. 집에는 막내아들과 나, 둘만 산다. 내가 그와의 본격적인 교제를 망설이는 이유는 딸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는 딸은 내가 한국에 와서 외손녀를 키워주길 원하고 있다. 그러면 사실상 나는 캐나다를 떠나야 한다. 그와의 관계만 없다면야 남편도 없는 캐나다에 무슨 미련이 있으랴. 막내도 어차피 독립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나 혼자 남게 되니 딸과의 합가는 내게도 반가운 일이다. 나이 들어 자식과, 그것도 도움을 주면서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떳떳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기에.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와는 헤어져야 한다. 딸에게는 이번에 네 동생 결혼식 때 어차피 한국에 가니 그때 의논하자고 답을 미뤘지만, 딸은 이미 내가 승낙한 것으로 여기는 눈치다. 그 사람의 존재를 모르는 딸로서는 혼자 된 엄마를 모시게 된 것에 안도감도 느낄 테지.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해준 생각 깊고 대견한 아이니까. 물론 딸은 내 사정을 듣는다면 흔쾌히 나의 길을 축복하고 응원할 것이다. 아들도 아니고 딸이니 더욱. 그런데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내 행복 찾자고 다른 할머니들 다 해주는 걸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 손녀를 봐줌으로써 자식들과의 연을 끈끈하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만약 캐나다에서 그 남자와 살게 된다면 자식들과는 어쩔 수 없이 서먹해질 것이다. 그것은 내게 두려운 일이다. 남들은 내게 사랑을 선택하라고 말하겠지만, 나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조언하겠지만, 막상 내 일이 되고 보니 결정이 쉽지 않다. 그 사람의 나를 향한 훈훈한 미소도 그립고, 삐삐 머리 손녀의 앙증맞은 분홍색 리본도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이를 어찌할꼬.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2-04-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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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하는 수원, 매교동 역사 통해 한눈에
- TV나 유튜브를 통해 ‘1970년대 서울’과 같이 대한민국의 옛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영상을 보면 ‘그땐 그랬지’,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라며 감회에 젖는다. 현재 수원시에서는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알 수 있는 ‘매교동’ 전시가 열리고 있다. 매교동은 수원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대한민국의 변천사를 겪은 곳이다. 수원시에서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행궁동. 그 인근에 ‘수원 구 부국원’(富國園)이라는 곳이 있다. 붉은 벽돌의 외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임을 짐작케 한다. 100년 넘은 이 건물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부국원이란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만든 종자회사를 말한다. 수원 구 부국원은 해방 이후 관공서, 병원, 인쇄소 등으로 운영되다가, 현재는 역사를 배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이곳에서 ‘매교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구 부국원 1, 2층에는 매교동의 사진과 영상 자료가 가득하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물, 도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옷차림 등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매교동은 수원의 번화가로 꼽히는 수원역과 인계동 사이에 있다. 수원의 중앙에 위치하며 수원천을 끼고 있어 과거에는 활기 넘치던 곳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과 다른 곳들이 개발되면서 올드타운이 됐다. 노후 다세대·다가구주택뿐만 아니라 철물점, 공구상, 인력사무소 등이 많은 곳이었다. 현재 매교동은 재개발로 또다시 변화를 앞두고 있다. 오는 7월부터 1만여 가구가 입주해 아파트촌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이러한 때 시기적절하게 전시가 열리니 묘한 기분이 든다. 매교동만큼 수원에서 변화가 많았던 곳이 있을까. 매교동은 대한민국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시를 보면 수원시를 넘어 우리나라의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매교동은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형성되기 시작했다. 옛 국도 1호(현재 정조로)와 수원천이 가로질러 마을이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됐지만, 오래전부터 매교동 주민들은 수원천을 매개로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며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수려선 철도가 마을을 통과하면서 주거지가 작게 형성됐고, 1960년대 들어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시가지로 변모했다. 1971년에는 매교시장이 들어섰고, 1973년에는 수려선 철도가 철거됐다. 1977년 수원천 제방이 축조되면서 매교동은 한결 안전한 마을로 거듭났다. 1980년대에는 마을 곳곳에 주택과 편의시설이 들어섰고, 산업화와 함께 ‘공구상가’가 번영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동수원 지역이 개발되면서 매교동은 다소 정체됐고 낙후된 주택단지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2000년대 들어 도시 재생과 재개발 사업이 이뤄지면서 매교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과거처럼 다시 중심지가 될 수도 있다. 전시는 △1973년, 옛 1번 국도를 따라서(매교동을 관통하는 옛 국도 1호의 모습이 담긴 영상) △매교동 사람들(과거 매교동 주민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 △매교동의 변천 과정(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매교동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 △매교동 풍경(매교동 옛 사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수원시의 16번째 마을지 ‘매교동’ 발간 기념으로 개최됐다. 수원시 도서관·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법정 공휴일은 휴관하며, 화~일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 가능하다.
- 2022-04-08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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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려동물, 여생의 가족으로 주목받는 이유
- 예전에는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해 애완동물이라 했지만, 이제는 사람과 ‘심적 친밀감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로 반려동물이라 부른다. 신문이나 광고에서 반려동물 천만 시대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보이는 현재, 동물들은 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참고 ‘반려동물과 이별한 사람을 위한 책’, 한겨레 애니멀피플) 작은 몸에 올망졸망한 눈으로 한결같이 나만 바라보는 반려동물은 우리 마음의 정화를 불러일으킨다. 성별, 외모, 장애, 경제력 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며 비판하거나 질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최근 강아지, 고양이, 새와 같은 동물을 인생을 나누는 ‘반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는 638만 가구로, 인구로 환산하면 15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국내 반려동물 산업의 급성장으로 이어졌다. 펫 택시, 전용 유치원, 장례 서비스, 원격 양육 서비스 등 관련 시장 규모는 2015년 1조 9000억 원에서 지난해 3조 4000억 원으로 성장했으며, 전문가들은 2027년에는 6조 원으로 2015년보다 3배 이상 확대되리라 전망했다.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방송사마다 동물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SNS와 동영상 플랫폼에 동물 콘텐츠가 넘쳐난다. 반려동물의 긍정적 효과 우리 사회가 점점 고령화되어가고, 1인 가구가 꾸준히 늘면서 동물은 사람의 소외감과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이자 가족 역할을 해주고 있다. 반려동물이 사람의 심리와 정서 안정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육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노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19년 서울시 취약계층 반려동물 양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동물을 기르는 청장년 1인 세대보다 노인 부부 세대가 더 높은 심리적 효과를 누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하면서 책임감 증가, 외로움 감소, 삶의 만족도 향상, 스트레스 감소, 대화 증가를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반려동물이 노인들의 인간관계와 사회활동을 촉진하는 사회적 윤활유 역할을 하는 셈이다. 반려동물과 장기간 생활하면 기억력 감퇴와 인지 능력 저하 등을 늦춰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반려동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식사를 챙겨주고, 산책을 시켜주거나 털을 빗겨주는 등의 행동이 치매 환자의 정신 상태나 기동성을 향상시키는 작용을 해서다. 미국 플로리다주 제니퍼 애플바움(Jennifer Applebaum) 박사가 50세 이상 1300명의 인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53%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인지 능력 저하 속도가 느렸다. 애플바움 연구원은 “반려동물과의 상호작용과 스트레스 감소의 생리학적 측정(코르티솔 수치 및 혈압 감소를 포함해 장기적으로 인지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 사이에 연관성을 확인했다”며 “반려동물이 인지 저하를 예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초기 증거”라고 말했다. 동물들은 그저 존재하는 자체로 치유를 일으키기도 한다. 공원에서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걷는 강아지의 뒷모습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테니 말이다.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다양한 ‘애니멀 테라피’를 실시하고 있다. 애니멀 테라피란 동물을 통한 치료 방법을 말한다. 활용되는 동물로는 개, 고양이, 돌고래, 소 등 다양하다. 예컨대 난독증 환자의 치료법 중 강아지에게 책을 읽어주는 활동이 있다. 난독증 환자들은 자신이 더듬거리는 것에 대해 깊은 열등감이 쌓여 있거나 주눅 들어 있는 등 평소 자신감이 약한 태도를 보이기 쉽다. 때문에 편견을 가지지 않은 존재인 개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낮아진 자신감을 올려주고, 점차 말을 더듬는 증상을 완화하는 식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일본 내 유기 동물 문제 해결과 노년층의 건강 회복 모두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올해부터 요양원에 애니멀 테라피를 도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환경성은 지자체가 보호 중인 개나 고양이를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보내 노인의 심리 치료 효과를 높이고자 한다. 동물과의 아름다운 이별 노년에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거나 계획이 있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반려동물의 죽음이다. 보통 반려동물의 평균 수명은 15~20년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정들었던 동물 친구를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식처럼 기른 반려견, 반려묘가 죽어 큰 슬픔을 호소하는 ‘펫로스 증후군’을 겪기도 한다. 특히 노년층은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적고 반려동물을 향한 심리적 의존도가 높아 극도의 우울, 무기력, 자책 등의 감정을 동반할 수 있다. 애니멀피플이 공공의창·한국엠바밍·웰다잉문화운동과 함께 실시한 ‘한국 반려동물 장례 인식조사’를 보면, 펫로스를 경험한 응답자의 과반수가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52.8%)을 꼽았다. 우울증(19.5%), 반려동물 죽음 자체에 대한 부정(18.7%), 죽음에 대한 분노(7.9%) 등이 뒤를 이었다. 아낌없는 사랑을 주던 대상이 떠난 후 밀려오는 그리움과 상실감은 당연하지만, 이를 잘 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거나 관련 책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반려동물과 이별한 사람을 위한 책’의 저자 이학범 수의사는 “반려동물과 이별하며 슬픔을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여러 증상이 함께 나타나거나 기간이 길어진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려동물의 죽음으로 심리적·정신적 고통을 겪지만, 수습 절차나 방법은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주변 산에 묻는 행위는 불법이다. 보통 동물은 폐기물관리법에 따라 쓰레기봉투에 담아 생활 쓰레기로 배출하거나, 동물병원에 맡겨 의료용 폐기물로 처리한다. 최근에는 오랜 친구를 폐기물로 처리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늘면서 병원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합동 화장을 진행하거나, 반려동물 장례 시설을 이용하는 추세다. 동물 장묘업체는 반드시 이동식 장묘업체가 아닌 농림축산식품부에 등록된 업체여야 한다. ‘e동물장례정보포털’(eanimal.kr)을 통해 합법적인 업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반려동물을 부탁할 곳도 고민해야 한다. KB국민은행에서는 내가 죽고 나면 누가 내 강아지를 돌봐줄까 고민되는 사람들을 위해 반려동물 신탁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반려동물의 주인인 ‘위탁자’가 사망해 반려동물을 돌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수탁자’인 은행에 자금을 미리 맡기고, 본인이 사망한 뒤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부양자인 ‘사후 수익자’에게 반려동물의 보호 관리에 필요한 양육 자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반려동물을 돌봐주는 조건으로 가족 또는 제3자에게 자신의 유산을 일부 상속해놓는 것도 방법이다. 대신 어떻게 돌봐줘야 하는지 등 상세한 내용을 담은 유언장이 있어야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 한편 비교적 명확한 반려동물 관련 산업의 성장성에 비해 반려인 사망 시 반려동물에게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이에 돌연사, 고독사, 사고, 질병 등에 의해 반려인을 잃고 홀로 남을 반려동물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 마련 또한 필요한 시점이다.
- 2022-04-06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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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오는 길목의 느릿한 산책… 근대 문화 고스란한 강경
- 강경 읍내에 들어서기 무섭게 짭조름한 젓갈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한때는 밤낮없이 흥청거렸던 이름난 포구였고, 조선 말기에는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강경 장날이 있던 곳. 이제는 북적이던 그 자리에 그 시절의 낡은 건축물들이 세월을 지키고 빛바랜 표정의 골목 사이로 영화를 누리던 오래전의 시간들이 너울거리고 있다. 옥녀봉 아래 금강 물길 따라 흐른 세월 먼저 옥녀봉에 올라 강경의 풍경을 조망해보자. 강경 포구의 역사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 좁다란 골목길을 오르면 나타나는 해발 44m의 야트막한 봉우리. 당시의 통신 방법인 봉수대가 우뚝하다. 해조문 아래로 금강 줄기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파시가 2~3km 늘어섰고 고깃배가 빈틈없이 정박해 있었다는 포구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뿌옇고 조용하다. 옥녀봉에 올랐으니 비탈 낮은 절벽 위에 위치한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의 배경이 된 집까지 들여다보고 내려와야 한다. 박범신 작가는 강경읍에서 익산으로 기차 타고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새벽밥 먹고 집을 나오면 저 아래 금강변 갈대밭에 들어가 하루에 책을 두 권씩 읽었다고 한다. 작가를 키워낸 옥녀봉 일대의 갈대밭과 강경은 여전히 옛 모습을 지닌 채 평온하다. 흐린 날, 읍내 길 걸어 근대 문화 속으로 강경 읍내는 느릿한 도보 여행으로 맞춤한 소읍이다. 골목을 오르고 그 거리를 구석구석 꼼꼼히 걸어서 다녀야 제맛이다. 강경역사문화안내소에 가면 그곳에 상주하는 해설사님과 잠깐만 이야기해도 강경의 면면을 알기 쉽게 안내해주어 매우 유익하다. 구 강경노동조합은 등록문화재 제323호로, 1920년대 영향력 있던 조직체였지만 지금은 강경역사문화안내소 역할을 한다. 강경은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시대부터 200여 년간 무역의 허브였다. 서해와 금강의 넉넉한 물길을 따라 강경포구에 이르러 활발한 장마당이 펼쳐지던 100년 전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이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관공서, 은행, 교회 등이 들어서며 가히 강경의 전성기였다. 그중에서 도시의 중심 상권을 본정통이라 했던 그 거리에 남겨진 근대 문화를 찾아가 본다. 그 길 초입의 강경상업고등학교 교장 관사는 뾰족한 기와지붕의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다. 문득 피천득님의 수필 ‘인연’이 떠오르는 느닷없는 상상력이 발동되기도 한다. 이제는 폐가인 듯 너무 낡아서 수필처럼 맑고 순한 이야기 속의 풍경은 아니지만, 교장 관사를 둘러보는데 아사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케케묵은 옛 일본식 가옥이다.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강경의 볼거리와 근대 문화유산은 양손의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정도다. 강경상고를 시작으로 1937년 준공된 등록문화재 제60호 중앙초등학교 강당과 스승의 날 발원지라고 하는 강경여중고가 그 길 양쪽으로 마주 보고 있다. 옛 사진에서나 보았던 듯한 1930년대 정도의 모습으로, 퇴색된 근대 문화의 흔적이 마치 릴레이식으로 이어진다. 강경읍 계백로에 위치한 붉은 건물의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강경의 번성했던 근대 문화를 상징한다. 지금은 강경역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들어가 보면 복층처럼 낮은 위층까지 전시관으로 포함된다. 특히 당시 사용되었던 묵직한 은행 금고를 볼 수 있다. 건물 뒤편으로 새롭게 조성된 일제 강점기의 강경구락부는 마치 시대극의 드라마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날씨조차 흐려서 은근히 옛 맛을 더한다. 강경의 근대 역사는 골목에도 켜켜이 묻어 있다. 걷다 보면 그 길 끄트머리 어느 모퉁이에 반듯하고 정갈한 자태의 2층 주택이 눈에 띈다. 강경 연수당 건재 약방은 전통적인 한식 건축물이지만 1층과 2층 사이의 난간에 기와를 얹은 것이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나이 많은 약방 건물이 동네 골목의 오래된 주택이나 낡은 적산가옥들과 잘 어우러진다. 고난을 감당해낸 선교의 성지, 강경 읍내 길을 걷다 보면 의외로 한국 초창기 선교 역사의 흔적을 자주 만나게 된다. 높은 건물은 별로 없고 예스러운 집들과 무수한 젓갈 가게 사이로 뾰족한 첨탑이 눈에 확 들어오는 강경성당, 배의 형상을 한 외관과 하얀 외벽에 붉은 지붕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김대건 신부 기념관도 가까이 있다. 한국에서 첫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기념비가 있는 구 강경 성결교회, 옥녀봉 아래 초가지붕의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국내 최초 예배지와 한옥의 강경 북옥감리교회 예배당, 100년이 넘는 근대역사전시관이 있는 강경 제일감리교회 등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답게 일제의 탄압 아래서 종교적 굳건한 믿음으로 고난의 역사를 감당했던 증거를 곳곳에서 보여준다. 성지순례지로 강경이 손꼽히는 이유가 있다. 강경읍 외곽의 금강가에 자리 잡은 죽림서원은 대숲이 배경이다. 왼편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강학 장소인 임이정과 팔괘정이 나지막한 야산에 자연스럽다. 조선 시대 사설 교육기관인 죽림서원의 낮은 담장 돌계단에 서면 안이 훤히 보이고 대숲에서 세월의 바스락거림을 듣는다. 금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내려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좋다. 아름다운 미내다리 이야기 읍내를 조금 벗어나 강경천 제방길을 걸어보는 시간도 특별하다. 그 둑방길을 가다 보면 멀리서 둥그스름한 원형의 다리가 보인다.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1731년)에 석재만으로 만들어진 3개의 아치형 돌다리로,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 시절 강경포구는 물길 따라 사통팔달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어느 해 큰 장마로 강경에 몰려든 상인들의 발이 묶였다고 한다. 비로 인해 그 길을 연결해주던 다리가 떠내려가고 오도 가도 못 할 지경. 강경포구에 살던 사람들이 서로 팔을 걷어붙이고 재물을 모아 다리를 만들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온다. 따뜻한 이야기와 어울리는 예술적 토목 건축술로 평가받는 다리다. 200년 전통의 곰삭은 감칠맛, 강경 강경을 입에 올리면 저절로 따라붙는 말이 젓갈이다. 잠깐만 둘러봐도 도처에 젓갈백화점과 젓갈상회 천지다. 강경 읍내에 위치한 젓갈 가게가 140여 곳이나 되고 전국 젓갈 유통의 60%를 차지한다고 하니 가히 강경만의 명물이 아닐 수 없다.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주는 천하의 별미 젓갈 반찬.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과학적 숙성 방법으로 예전보다는 짠맛이 덜하고 고소하다. 간 김에 젓갈 한 병 사면서 잊었던 ‘덤’ 문화의 즐거움도 경험한다. 옛 영화를 간직한 골목골목마다 오래된 시간이 반기는 곳, 강경.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극의 장면 속을 걷는 기분이다. 덜 변하고 자취 없이 사라진 것들이 많지 않아서 그리움도 적을 것 같은 곳. 쇠락한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있는 옛 시간이 고스란한 지난 100년의 유장한 기록들. 강경젓갈만큼 곰삭힌 날들이 거기 있었다. 강경 근대 문화 거리와 젓갈 이야기 자동차 : 서울 기준 당일 여행. 경부고속도로 천안→천안논산 고속도로→논산시 강경읍 도착, 약 두 시간 소요 기차 : 서울역에서 강경역까지 무궁화호로 2시간 반 정도. 레트로 감성의 기차 여행이다. 주소 : 구 강경노동조합(강경역사문화안내소)에 문의하면 근대 문화 여행 안내를 받을 수 있다. 041-746-5411 여행 코스 : 옥녀봉과 주변▷강경 읍내▷구 강경노동조합▷강경상업고등학교와 주변▷한일은행 강경지점▷강경구락부▷젓갈 가게▷강경성당과 성지순례▷강경 연수당 건재 약방▷죽림서원▷미내다리
- 2022-03-1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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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재부, 종부세 제도 보완, "일부 보유세 완화"
- 비투기 목적 주택도 종부세 부담 완화돼, 1주택 보유세 완화 방안 3월 중 발표 정부가 주택 유형별로 종합부동산세 제도를 보완했다. 앞으로 투기 목적이 아닌 주택에 대한 보유세 부담이 완화될 전망이다. 1세대 1주택 실수요자의 보유세 부담을 줄여줄 보완 방안은 다음 달 중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우선 상속받은 주택에 세율 적용 시 주택 수 계산에서 제외한다. 이는 종부세 부담이 급격히 커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존에는 지분율이 20% 이하고 공시가격이 3억 원 이하인 상속주택만 주택 수 계산에서 제외했다. 이번 시행령 개정으로 지역에 따라 상속 후 2년, 혹은 3년 동안 모든 상속주택을 주택 수 계산에서 제외할 수 있게 됐다. 수도권‧특별자치시(읍‧면 제외), 광역시(군 제외)는 상속개시일로부터 2년, 그 외의 지역들은 상속개시일로부터 3년 간 주택 수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다만 상속 후 정해진 기간이 지났음에도 상속주택을 매각하지 않고 계속 보유한다면, 과세원칙에 따라 상속주택에도 종부세를 부과한다.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 및 종중이 보유한 주택에는 개인과 동일한 일반 세율이 적용된다. 법인격을 남용한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높은 세율로 종부세를 과세해왔으나, 사회적 기업 및 사회적 협동조합, 종중의 주택이 투기를 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해당 주택에는 일반 누진세율(0.6~3.0%, 1.2~6.0%), 기본공제액 6억 원, 세부담상한(150%, 300%)을 적용한다. 그 밖에도 어린이집용 주택, 시‧도 등록문화재 및 주택건설사업자 등 멸실 예정 주택에는 종부세 비과세 혜택이 주어진다. 보육지원 강화, 문화유산 보호 및 주택공급 활성화 등의 정책적 필요성에 부합해서다. 기획재정부는 “이번 시행령 개정을 통해 2022년 고지분부터 상속주택 등 보유자에 대한 종부세 부담이 상당 폭 경감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 2022-02-2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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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신(墨神)이 머물다 간 자리
-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밀리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과 해남을 ‘남도 답사 1번지’로 꼽았다. 그 여파는 컸다. 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으니까. 그런데 진도를 젖혀두고 남도 문화의 끌텅과 태깔을 논하는 건 좀 어폐가 있다. 진도야말로 노른자다. 시(詩)·서(書)·화(畵)·창(唱)·무속의 곡간이기 때문이다. 2013년 정부에 의해 전국 최초의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알고 보면 돌올하고 뜯어보면 찬연한 문화지구 진도에서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빼어나다. 운림산방은 전통회화의 한 본산이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장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의 창작 산실이며, 5대에 걸친 그의 직계 화맥(畵脈)이 박힌 곳이다. 진도의 진산 점찰산 아래 둥지를 튼 품새는 또 어떻고? 널찍한 터는 호방한 맛을 준다.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안온하다. 산의 푸른 치맛자락을 거머쥐어 수려하고 청신하다. 겨울이 좋다고 혹한에도 얼싸절싸 피어나는 동백꽃 무리는 꾹 눌러 점점이 칠한 붉은 물감처럼 흥건해 기발하다. 원래 이곳엔 소치의 화실과 침식을 위한 초가 하나, 그리고 소치가 만든 연못이 있을 뿐이었다. 단출해서 오히려 그윽했으리라. 꾸밈없이 적막해 한갓졌으리라. 이후 현대에 이르러 보탠 구조물이 많아졌다. 그래도 본색이 어디 가겠나. 진도의 어떤 이들은 운림산방 일원을 ‘몽유진도’(夢遊珍島)라 부른다. 이곳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맞먹을 실경산수를 연상하는 거다. 소치가 뉘신가? 이름을 좀 날린 화가에 그치지 않는다. ‘소치는 묵신(墨神)이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걸 보면, 그림으로 달통한 게 많은 기재(奇才)였다.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을 주름잡았던 걸사(傑士)다. 헌종의 호감을 사 어연(御筵)에 먹을 풀어놓는 영예를 누리고, 함께 서화를 논하기도 했다. 임금을 패트론으로 삼았던 셈이다. 소치의 집안은 변변치 않았다. 허균의 후손으로 한때는 양반 가문이었지만 여러 대에 걸쳐 거듭된 영락으로 어디다 명함을 내밀 건더기가 없었다. 그러나 소치에겐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자청해 그리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낮잠과 끽다(喫茶)로 충분해 그렇다고 일취월장이 절로 가능했으랴. 화가의 창의적 상상력은 기초가 부실한 채로는 터져 나올 리 없다. 그리고 기초라는 건 확장과 성숙에 대한 본능이 추동한 탐구심으로 다져진다. 소치에겐 이 탐구 정신이 내장돼 있었다. 과연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가? 궁구가 깊었던 청년기에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에 갔다가 본 공재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통해 소치의 눈이 번쩍 열렸다. 그는 기록했다. ‘비로소 나는 그림 그리기에 법(法)이 있음을 알았다.’ 복 가운데 최고는 인연 복이라 한다. 난데없이 떠올랐다 간데없이 사라진 그림쟁이들이 숱했지만, 소치는 인연 복이 많아 비상을 거듭했다. 해남 두륜산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맺은 선연은 돛을 밀어주는 순풍이었다. 초의는 구도(求道)라는 이름의 양탄자를 타고 세사의 모든 영역을 비행한 인물이다. 일지암은 그 비범한 이착륙의 베이스캠프였다. 28세 때 초의의 문하에 들어간 소치는 이 작은 암자에 머물며 세상을 건너는 법을 배웠다. 소치는 자서(自敍)에 이렇게 썼다. ‘초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 어찌 고고하고 담백하게 살 수 있었겠는가?’ 소치의 생애에 녹아든 개결한 풍정은 초의에게서 얻은 지성과 화엄정신의 발현이었던 셈이다. 초의가 소치의 정신적 아비였다면, 추사 김정희는 예술적 푯대였다. 소치에게 추사를 소개한 건 초의였으니 인연이 인연을 낳았다. 천재는 준재를 척 알아보는 법. 소치의 작품을 본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 소치만 한 그림을 그리는 이가 없다”고 탄복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찬사만 능사로 삼을 추사가 아니다. 소치여! 그대가 서격(書格)을 터득했는가? 신운(神韻)을 익혀 구사하는가? 그쯤의 깐깐한 일갈로 갈 길 먼 예술 항로를 통찰하게 했다. 이른바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으로 예술혼을 돋우길 주문했다. 추사의 지향은 대상의 형상화보다 정신세계를 끄집어낼 수 있는 관조의 깊이를 중시하는 데 있었다. 소치는 추사의 이 고고한 예술철학에 감명을 받아 길을 교정하거나 노정했을 테다. 그러니 스승을 선망하는 마음이 오죽했겠나. 그는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를 번번이 찾아갔다. 버들잎처럼 작은 배를 타고 사나운 바닷길을 건너가 배움을 청했다. 소치가 제주에서 그린 ‘완당선생 해천일립상’은 추사의 지엄한 풍모를 오마주한 초상화다. 이제 소치의 그림을 볼까. 운림산방에는 소치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소치기념관이 있다. 그저 풍경을 즐기려 운림산방을 찾는 관광객이 즐비하지만 알짜배기는 소치의 그림들에 있다. 소치기념관은 한옥 건물 하나로 꾸린 미술관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기념관치고는 자그마하고 치레 없이 조촐하다 못해 밋밋하다. 소치의 담박한 성정을 고려한 구조라 봐야 할까? 전시실엔 산수화, 병풍 그림, 묵죽도, 모란, 괴석 등 다양한 유형의 그림들이 걸렸다. 물기를 배제하기 위해 붓에 먹을 살짝 찍어 바르는 붓질로, 마치 긁힌 자국 같은 필선을 연출하는 갈필(渴筆)에 능했던 소치의 개성을 직감할 수 있는 작품도 많다. 소치 허련은 ‘허모란’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모란 그림을 즐겨 그려서다. 전시실에서도 모란이 흔하게 눈에 띈다. 걸작이란 평판을 얻은 작품은 운림산방의 전경을 부채에 그린 ‘운림각도’(영인본. 원본은 서울대 소장)다. 소치 만년의 작품이다. 근골이 거칠게 드러난 점찰산과 억실억실한 노송들, 푸른 연못과 소박한 산방 두 채가 어울려 써늘한 정취를 자아낸다. 눈길을 붙잡는 건 지팡이를 짚고 연못가를 거니는 노인이다. 속세에서 벗어나 산야의 은자로 사는 이의 고독한 심회를 풀어냈을까? 늙어서는 산천이 스승이다. 말 없는 산야에서 음양의 조화를 읽는다. 여백에 쓴 화제엔 다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깊은 산골에 있는 나의 집에 여름이 오면 뜰에 푸른 이끼가 깔린다. 소로엔 떨어진 꽃잎들이 가득하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니 솔 그늘에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긴다. 단잠에서 깨어나면 솔가지 모아 차를 달여 마신다.’ 산림에 사는 이의 영일(迎日)이 완연하다. 인간사에 대한 관심일랑 안으로 거둬들였나? 낙화와 낮잠과 끽다(喫茶)면 그만이었다. 숫제 선풍(仙風)이 비친다. 그래도 긴가민가 늘 궁금한 건 그림이었을 테다. 말년까지 붓을 내려놓지 않았으니. 후손에게 남긴 유지에도 그림 소식이 난무해 두고두고 새길 만하다. ‘붓 재주 하나로 성가(成家)할 생각을 마라! 먹을 항상 입에 물고 다녀라!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서린 뜻이 여러 겹이다. 그림을 밥 먹듯이 그리되 통 크게 밀어붙이라는 독촉이다. 웅장한 메시지다. 소치 허련이 남긴 저작과 화맥의 아우라 소치실록 자서전 성격의 문집으로 소치의 생애와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정밀한 자료다. 소치 연구의 핵심 텍스트이기도. 1867년에 쓴 ‘몽연록’(夢緣錄)과 1879년에 집필한 ‘속연록’(續緣錄)을 합본해 ‘소치실록’(小痴實錄)이라 이름 붙였다. ‘몽연록’은 운림산방에서 완성했다. 소치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황량한 곳에서 홀로 슬퍼하며 서책은 물론 모든 것을 버렸다. 뜻밖에 손님이 찾아와 며칠을 쉬는 동안 문답한 것이 있는데 이걸 엮어 책을 만들었다.’ 문답식의 다소 특이한 유형의 자서전을 쓴 정황을 밝히고 있다. 대화체 문집이라 쉽고 흥미롭게 읽힌다. 조선의 화가 중 소치 외에 자신의 화필 생애를 세세한 기록으로 남긴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소치실록’이 현대의 대중에게 알려진 건 1974년 한 매체를 통해 한글 번역 연재물이 게재되면서였다. 당연하게도 소치 연구자와 애호가들의 환영을 받았다. 소치는 스스로 밝혔듯 ‘조실부모해 의지할 곳이 없었고 견문도 넓히지 못한 채로’ 성장기를 통과했다. 이 불우한 과거를 보상받고 싶었을까? 남종화의 거두로 부상하면서 그는 당대 명망가들과 적극적인 교유를 했는데, 사교 일화와 의미심장한 예술적 교감의 내용을 낱낱이 책에 담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군주 헌종, 고명한 선사 초의, 광활한 예술 세계를 구현한 추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술회한 대목들이 특히 재미있다. 소치의 생애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진면목과 삶의 방식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5대로 이어진 소치 화맥 진도에는 이런 얘기가 돌아다닌다. “양천 허씨들은 빗자루 몽둥이만 들어도 걸작이 나온다.” 소치 가문에서 화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생긴 우스갯소리다. 소치의 화맥(畵脈)은 직계 후손 5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전무후무한 화업의 행진이다. 소치의 화업 2대를 전수한 이는 넷째 아들 미산 허형이다. 소치는 원래 큰아들 허은의 재능을 높이 쳤다. 그러나 허은이 요절하는 바람에 허형이 맥을 이었다. 허형이 그린 묵모란과 묵매는 부친을 능가한다는 평판이 있다. 3대를 이은 건 허형의 두 아들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이다. 허건은 갈필로 그린 필선의 생동감으로 호평을 받았다. 동상 걸린 다리를 절단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장애를 오히려 창작의 화톳불로 삼는 강골의 근성을 과시했다. 소치의 운림산방을 복원하기도 했다. 허림은 사물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로 명성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요절하고 말았다. 4대 맥은 임전 허문에게 이어졌다. 그는 수묵의 농담(濃淡)을 활용한 독창적 화법인 ‘운무산수화’에 능하다. 임전 이후 현재의 5대째 화맥은 허건의 손자 허재와 허전, 허건의 조카 허청규와 허은에게 이어지고 있다. 물보다 진한 피가 5대째 그림으로 이어져 가문을 통째 수묵의 바다로 밀어 넣었다. 그 바다의 아우라가 휘황하다.
- 2022-02-23 0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