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자들이 모였다 하면 빠지지 않고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이야기를 나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부터 시작돼 ‘밀회’를 거쳐 폭발한 김희애의 불륜 연기는 의사, 음악가 등 고스펙 불륜녀의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이번 ‘부부의 세계’에서는 너무 완벽한 삶의 조건으로 균열 하나 있을 것 같지 않던 부부 사이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남편의 오래된 불륜으로 급격하게 돌기 해 부부의 삶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인생까지 소용돌이치게 되는 부부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사실 간통죄까지 폐지된 마당이라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전대미문의 불륜들이 우리 주위에 넘실댄다. 드라마나 영화가 현실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침없고 솔직한 불륜들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은 이제 정치적인 은유는 물론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만 나무란다'라는 뜻으로 청소년들까지도 사용하는 대중적 언어가 된 지 오래다.
가만 생각해보면 한국의 중년 여성들에게 '불륜'이라는 단어가 은밀하게 회자하기 시작했던 건 아마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단아해 불륜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조용조용 속삭이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개봉된 지 벌써 25년이 흘렀다.
아일랜드 시인인 예이츠의 시를 읽고 이탈리아 가곡을 듣는 지적이고 단아한 가정주부, 메릴 스트리프(프란체스카)는 아내의 취향은 전혀 모른 채 큰 소리로 떠들고 문을 쾅쾅 닫아 프란체스카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그런 남편과 살고 있다. 엄마가 이탈리아 가곡을 듣고 있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자녀들은 요즘 유행하는 팝송으로 재빨리 바꿔버려 집안에서 프란체스카의 자리는 없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시간은 서로 나눌 이야기도 없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 침묵의 시간으로 변한 지 오래. 가족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 채 그저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부속품처럼 그렇게 하루하루 생활에 찌들어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어느 날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바깥세상의 살아 숨 쉬는 인생을 동경하게 해주는 그런 남자가 불현듯 나타난다.
배경은 1965년, 미국 중부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의 조용한 시골 마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조만간 철거될 이 마을의 명물인 로즈먼 다리를 찍기 위해 이곳으로 트럭을 몰고 온다. 낡은 청바지에 셔츠, 니콘 카메라를 메고 프란체스카가 동경하는 세상의 냄새를 풍기며 조근거리는 목소리로 ‘로즈먼 다리가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었다. 마침 남편과 두 아이는 나흘 동안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결혼 이후 처음 가족과 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길을 묻는 그 순간에도 가족들의 빨래를 널고 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지구를 사랑하는 패션 브랜드로 알고 있지만 이 잡지는 지구의 자연을 보호하고 현대화로 사라지고 있는 옛것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겨놓는 전통의 잡지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격조 높은 잡지다. 그러니 전 세계를 다니며 오지와 천혜의 자연을 촬영하는 로버트라는 사진작가의 영혼이 얼마나 깊고 넓을지 쉽게 상상하고도 남는다.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 자신의 꿈을 접은 채 한 남자와 자식만을 위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세계의 풍물과 삶의 모습들을 렌즈에 담는 로버트의 인생은 동경 그 자체였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사는 로버트가 부럽기만 했다.
게다가 그와의 대화는 익숙하다 못해 더 이상은 나눌 이야기가 없는 남편과 나누는 대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문학과 여행, 음악과 미술… 그 자체로서 너무나 환상적인 감정이입의 순간들을 공유한다.
두 사람의 섬세한 감정이 떨릴 듯 화면에 전해지던 장면이 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저녁에 초대해서 함께 부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에게 감자 스튜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산스럽기만 하다. 감자는 미국 중부를 상징하는 아이오와주의 대표적인 농산물.
프란체스카의 부산스러움을 느낀 로버트는 “제가 도와드릴까요?” 란 말로 그녀의 맘을 빼앗아 버린다. 너무나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과의 생활에 익숙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요리를 도와주겠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요리를요?” “예… 요리를” “당근을 깎아주세요” “이거 말인가요” “예… 끝은 이렇게 다듬어야 해요”
짧은 단답식의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낯선 두 남녀가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의 세계를 향해 들어오는 타인에게, 문을 열어주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부엌에서 함께 채소를 손질하고 감자 스튜를 저으며 그렇게 완성해갔다.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다고 해도 어느 날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날 수 있다. 뒤늦게 사랑의 열병을 앓다 제자리에 도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운명적인 사랑을 따라 지금까지 가꿔왔던 자신의 세상을 박차고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리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는 순서가 잘못돼 '만났어야 할 운명의 파트너'를 만나 인생을 살고 있기보다 '스치고 지나갔어야 할 그 누군가'를 만나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며 산다. 착각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 믿으며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된다.
이렇게 착각으로 쌓아 올린 결혼이라는 견고한 성안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일상을 쌓고 그 일상이 다시 모여져 삶의 결로 퇴적된다. 퇴적된 내 인생의 결이 어느새 작은 봉우리가 되고 제법 봉긋한 작은 산 하나 만들어질 때쯤 우리네 인생은 노년의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 이 영화를 보면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의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는 아직 중년의 감성은 아니었기에 100% 감정이입을 못했지만, 육체적 관계의 선을 넘는 것이 아닌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시선을 맞추며 안타까워하는 그런 '선'을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다.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그렇게 부산스럽게 타오르지 않는 사랑, 스튜처럼 오래 끓이며 뭉근히 재료의 맛을 우려내고 깊어지는 사랑. 하지만 ‘불륜’은 그러하지 못할 경우가 많으므로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속전속결로 잡아먹을 듯이 집안을 화염에 휩싸이게 한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는 며칠간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대화하며 깊은 울림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랑을 흔히 남녀들이 하는 것처럼 세속에서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의 간절함을 뒤로하고 프란체스카는 이 작은 마을에 남아 가정을 지키고 자녀에게 헌신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로버트의 유품이 프란체스카에게 도착한다. 로버트가 로즈먼 다리를 찍은 사진이 표지로 담긴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와 니콘 카메라, 그리고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남긴 다리 위의 쪽지.
프란체스카는 이 유품을 간직해오고 있다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남긴다. “살아온 인생은 가족을 위해 살아왔으니 죽은 뒤에는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에 뿌려 달라.”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로버트에 대한 숨겨왔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영화도 연령대에 따라 감상했을 때 차이가 크게 난다. 예전에는 이 부분이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프란체스카가 자신이 죽은 후,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 위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말의 뜻이 이제 정확하게 이해된다. 프란체스카는 죽어서까지 가부장적인 가족의 굴레에 매여있기 싫었던 것이다.
그녀처럼 나도 죽으면 화장해서 유골을 태평양에 뿌려달라고 딸아이에게 말했더니 눈을 살짝 흘긴다. 바다를 떠다니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딸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을 때 갈 곳이 없어서 곤란하겠다. 이런 생각이 드니 ‘난 또 어쩔 수 없이 엄마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난 연휴 주말 방영된 ‘부부의 세계’에서 김희애가 자신의 아들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할 수 없다며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는 전 남편의 알리바이를 증언한다.
뒤를 이어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이미 헤어진 부부가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고 옷이 흐드러진 침대를 보여주면서 끝나 전국의 여성들이 갑론을박 난리가 났다.
한번 갈라진 부부의 길은 다시 합쳐지지 않는다. 잠깐 합쳐지는 듯하다가도 이미 다시 파국을 맞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 스펙의 의사도 자신의 감정 다스리기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세계’를 시청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코로나 19의 극복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부 혹은 가족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 알아야 하고 간섭해야 하고 내 뜻대로 콘트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들이 의외로 많다. 내 눈앞에서 안보일 때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내 가시권 안에 있을 때는 완벽한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시혜를 베푸는 모양새다. 흔히 똑똑하고 성공했다는 고스펙 여성들의 결혼생활은 평강공주 신드롬에 빠져 온달들을 관리하느라 부산스럽기 그지없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부부 사이의 적정한 거리 두기는 결국 나에 대한 객관화로 이어져 보다 성숙한 자아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제발, 몰빵 하지 말 것이다.
사랑은 다 가질 수 없어 안타깝고 그래서 귀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시니어들은 감자 스튜 같은 뭉근한 사랑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프라이팬에 와인을 부으면 불같이 일어났다가 금세 스러지는 그런 불꽃 같은 사랑을 꿈꾸나? 곰곰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봄볕이 포근히 내려앉은 숲길이다. 풀 틈새엔 홀로 암팡지게 피어난 노란 민들레꽃. 언제부터 몸을 들이민 놈일까, 벌이 꽃 속에서 삼매경에 잠겼다. 미동조차 없으니 이미 취해 혼곤한 게다. 영락없이 낮술에 대취해 엎어진 한량 꼴이다. 봄이란 탐닉하기 좋은 철이다. 그렇다고 다 가질 수야 있겠나. 꽃을 밝히는 벌인들 무슨 수가 있으랴. 무릇 아름다운 것들은 차지하기 어렵다. 차지할 수 없어 아름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진남휴게소에 주차하고 토끼비리를 오른다. 풍경보다 천년 벼랑길의 뜻을 음미하는 데 의미를 두면 좋다. 토끼비리의 길이는 불과 500m. 나머지 길들은 숲으로 변해 갈 수 없다. 일부 좀 위험한 구간이 있어 신경 써야 한다. 고모산성과 신라고분군도 둘러볼 만하다. 영강변에 뒤엉긴 여러 도로들에서 들려오는 차량 소음은 옥에 티.
봄이 좋다지만 움켜쥘 수 없다. 말뚝에 잡아매둘 수 없다. 온 줄을 알자마자 저만치 가는 게 봄이지 않던가. 연분홍 치맛자락 흩날리며 요리조리 내빼 산등성이 너머로 후루룩 사라지는 가인(佳人). 내가 아는 봄이 그렇게 무정하다. 그렇기에 봄이면 푼수처럼 들썩이다 헛물을 켠다. 결핍이 많은 자는 충만한 봄에도 이렇게 실속이 없다. 그저 아득해지더라. 그런 줄을 알면서도 봄날의 치맛자락 거머쥐는 심사로, 지금 산길을 오르는 중이다.
‘토끼비리’라 부르는 옛길이다. ‘비리’란 높이 솟은 벼랑을 뜻하는 ‘벼루’의 사투리이니 ‘토끼벼랑’이다. 이 길엔 유서(由緖)가 있다. 후백제 견훤을 치기 위해 진격하던 고려 왕건이 이곳 영강(穎江)변 산허리에서 길을 잃었더란다. 한데 어디선가 나타난 토끼가 벼랑 위를 내달리더라는 것. 왕건은 옳다구나, 토끼가 달린 벼랑길을 따라 군사를 몰아갔다. 조선의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전하는 역사다.
토끼비리길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조선의 핵심 도로 인프라였던 영남대로의 한 구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갔겠는가. 암벽을 까내고 축대를 쌓고, 인마(人馬)의 내왕이 잦아지며 추가 공사도 잦았을 게다. 선조들이 다듬은 흔적과 공들인 자취가 완연하다. 현재는 안전 데크를 설치해 꽤나 수월한 길이 됐지만 방심하면 큰일날 곳이 군데군데 있다. 조선의 서거정은 토끼비리를 일러 “기이하기가 양의 창자와도 같다”고 했다. 어변갑이라는 문신은 두려워 좀 얼었던가보다. ‘빨리 가다 보면 자빠지니 나는 기어가네, 부디 꾸짖지들 마소!’ 그런 내용의 시 구절이 보인다. 삐끗 자칫 실족하면 아스라한 절벽 아래로 한참이나 걸려 떨어질 참이라 미리 설설 기는 게 여기선 요령이었을지도.
위험한 길이라도 가야 할 길이면 가는 게 사람이다. 벼랑에 선반처럼 얹힌 길이라고 가지 못할쏘냐.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토끼비리를 밟았는지 바윗길이 닳고 닳았다. 유리알처럼 반질반질 바위에서 광이 난다. 천년을 밟고 지난 길인데 오죽하랴. 흔히 이 길은 한양으로 과거시험 치러 가는 이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일 보러 오간 이들이 그뿐이랴. 잘난 인생, 못난 인생, 서러운 인생, 뒤집힌 인생, 꿈 많은 인생, 각양각색의 군상이 토끼비리를 지나갔을 것이다. 굶주린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쫓아와 등을 후벼파는 밤에도 기어이 넘어야 할 길이라 얼어터진 맨발로 넘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천년에 걸쳐 지나간 발길들이 빛나도록 닦은 토끼비리는, 잊힌 삶의 흔적이자 잊히지 않아야 할 팔만대장경이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 가장 넓은 하늘의 압축파일인 것은, 사람이라는 소우주의 형적이 여기에 화인처럼 박혀 있기 때문이다.
풍경도 좋을시고! 벼랑 저 아래로 굽이치는 영강의 사행(蛇行)이 볼 만해 그렇게 감탄하다가도 멈출 수밖에 없는 건, 강물을 얼싸절싸 휘감고 혼재한 고속도로와 국도와 철로가 어지러워서다. 그러나 국도와 토끼벼랑길이 본질적으로 다를 게 뭔가. 인간의 기쁨과 슬픔, 애환과 희망을 품고 흘러가는 삶의 물결이라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천년이 흐른 뒤에는 저 국도마저 고고학으로 발굴돼 인간의 족적과 영욕을 웅변할 게다. 천년을 묵은 길에 서린 도(道)와 영혼의 얼굴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토끼비리길은 고모산성으로 이어지며 끝난다. 고모산성과 겹으로 지어진 석현성 안엔 고색창연한 성황당이 있다. 과거 보러 가는 총각을 사랑했으나 끝내는 배신당하고 목숨을 끊은 어떤 색시의 고혼을 달래느라 지어진 서낭당이다. 풋정을 애정으로 오해했다. 풋정일 땐 온통 꽃밭이지만 정작 진정일 땐 지옥이다. 봄바람 살랑인다고 함부로 윙크할 일 아니다. 할 때 하더라도 풋정은 풋정으로만 즐길 일이다.
65세 이상 서울시민 44%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서울시가 지난해 9월 만 20~79세 서울시민 남녀 총 52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 서울시민 중 44.4%가 본인 죽음에 대비하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연령별로 60대 53.7%, 70대 37.9%가 이 같이 답했다.
본인의 죽음에 대비하고 있다는 응답자들은 ‘상조회사 가입’(26.3%), ‘묘지준비’(25.3%), ‘수의’(12.1%), ‘유서작성’(8.1%),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2.0%)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응답자의 75.3%는 평소 본인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중 5.7%가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고 답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40대(72.2%)부터 높아졌고, 60대(91.9%)가 가장 컸다. 70대는 91.3%가 평소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중 24.1%가 죽음을 자주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연명치료는 찬성이 25.3%였다. 반대는 74.7%로 수명만 연장하는 의료행위에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60대가 81%로 반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쓸쓸한 폐교였다. 마을 아이들이 재잘거리던 초등학교였으나, 시간의 물살이 굽이쳐 교사(校舍)와 운동장만 남기고 다 쓸어갔다. 적막과 먼지 속에서 낡아가다가 철거되는 게 폐교의 운명. 그러나 다행스레 회생했다. 미술관으로. 시골 외진 곳에 자리한 미술관이지만 1000명 이상이 관람하는 날도 많다 하니 이게 웬일? 이곳에서 관람할 게 미술 작품만은 아니다. 오래된 건물 안팎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 사계의 문양을 저마다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하는 정원수들의 동향. 야트막한 뒷산 위에 얹힌 하늘의 표정. 보란 듯이 있는 볼 것들이 많다. 충남 당진시 순성면에 있는 아미미술관이다.
화가 부부가 운영하는 미술관이다. 남편 박기호(65, 회화)가 관장으로, 아내 구현숙(58, 설치미술)이 큐레이터로 손발을 맞춘다. 애초 미술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단다. 지난 1995년, 그저 작업 하나만 마음껏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폐교를 빌려(나중엔 아예 사들였다) 둥지를 틀었다. 폐교의 환경은 이상적이었다. 공간은 헐겁도록 널찍하고, 어지러운 잡사는 침범 못할 시골 산자락이니 창작을 능사로 삼을 만한 환경이지 않은가.
이후 부부는 작업에 매달려 살았다. 미술만 작업은 아니었다. 퇴락한 교사를 단장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원형을 살려둔 채, 가필처럼 조심스레 부분적인 보수만을 한 건, 학교 건물에 서린 유서(由緖)를 존중해서였다. 시간이 머물다 간 흔적을, 시간 속에서 쌓여 이제는 숨결로만 남은 수많은 옛이야기들을, 그 애틋한 가치들을 또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폐교
외부 조경에도 정성을 쏟았다. 바지런히 수백 종의 나무와 화초를 심어 가꾼 건 식물을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자칫 건조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폐교 공간에 미감을 부여하려는 뜻도 컸다. 교장 관사로 쓰였던 한옥의 보일러 시설을 뜯어내고 구들장을 들이는 작업도 부부가 손수 해치웠다. 먼 데서 주워온 돌들로 쌓은 담장엔 한 드럼 이상의 땀방울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온갖 단장에 몸이 닳도록 힘을 쓰고 시간을 썼다.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모롱이도 부부의 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도록.
그렇게 보낸 15년. 어느덧 알아주는 눈들이 많아지고, 멀리까지 소문이 나면서 일부러 찾아드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신역(身役)을 마다않고 공간을 꾸민 건 오직 부부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공유공간으로 개방할 경우엔 더 가치 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 역량 있는 청년작가들을 밀어줘야겠다는 포부도 옹골찼다.
그렇게 아미미술관이 태동했다.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당진과 충남 지역을 넘어 전국적 명소로 부상했다. 부침이 없는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한 결과로. 근래 5년여 사이에 다녀간 유료 관람객 누적 인원은 자그마치 30여 만 명. 지역 미술관이, 그것도 시골의 폐교 미술관이 거둔 성과가 놀랍다. 자본력을 펀치로 약자를 링에 눕히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미술관들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재력으로 무장한 전문화랑, 공적자금이 투입된 공공미술관, 대기업 문화재단이 설립한 대형 미술관이 결국은 독주한다. 화가 부부가 맨몸을 우직하게 던져 가꾼 아미미술관이 그 틈새에서 기세를 돋우고 있으니 이 무슨 야무진 진격인가.
청춘들에겐 ‘취향 저격 핫플’
아미미술관이 지닌 힘과 매력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은 산기슭 자연 속에 자리해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을 꼽아야 한다. 부부가 공들여 가꾼 정원마저 아름다워 한결 순수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도시의 화려하지만 딱딱한 느낌을 주는 미술관에서 맛보기 어려운 자연미. 그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한다. 자연 속에서 얻는 담백한 쾌감보다 개운한 게 다시 있던가.
원형을 해치지 않은 지성적인 개량으로 근대 건축의 고태(古態)를 고스란히 유지한 교사, 즉 전시관의 멋과 맛은 아마도 이 미술관이 보유한 최대 자산이다. 쓸모를 잃고 폐기될 운명에 처한 사물이 인간의 혜안을 만나 부활, 다시금 쓸모를 되찾은 특유의 사례에 속할 건물이지 아니한가. 이 명물에 우련히 뒤엉긴 건 시간이다. 죽어라 내빼기만 하는 게 시간이지만(시간은 허무주의자?), 여기에선 아쉬워 차마 다 훌쩍 떠나지 못했나. 잔영으로 남은 시간의 형적인가, 무늬인가. 노랑 병아리처럼 동동거리며 복도 마루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룽거린다. 그립고 애잔하다, 아, 옛날이여!
우수 절반, 향수 절반으로 짜인 그리움이 가슴을 친다. 학동 시절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거로 돌아가는 의식이란 허망한 것이지만 그 옛날의 교실에 왔거들랑, 그대여 맘껏 추억에 잠기라! 교실이 두런거리는 소리의 뜻이 그렇다. 중장년 관람객의 거의 대부분은 어쩌면 추억을 움켜쥐기 위해 아미미술관을 찾아올 게다. 젊은 관람객에겐 근사한 빈티지 컬렉션처럼 느껴질지도. 근대와 모던이 결합된 이채를 오래 남기기 위해 그들은 인증샷을 찍는다. 자랑할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누른다. 다음에 만나 아미! 그러고선 다시 오기도 한다.
화가 부부에 따르면, 아미미술관이 단박에 부상한 건 순전히 젊은 디지털 유목민들 덕분이다. 그들은 미술관의 거의 모든 공간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건물의 내·외벽은 물론, 외부 정원 공간의 다양한 사물들에, 하다못해 나뭇가지에조차 모빌이나 조각 소품, 에스키스 등으로 데커레이션을 해둔 효과가 그렇게 크다. 어디건 포토 존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 청춘 군상들이 환호하며 사진을 찍어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 올렸고, 이게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단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홍보대사들이 대거 출현한 셈이다. 고즈넉한 운치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좀 과한 데커레이션으로 느껴질 테다. 청춘들에겐 ‘취향저격 핫플’로 많이 알려졌지만.
기획전시전이 열렸다. 부부는 어떤 작가를 선정하느냐에 따라 미술관의 품질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신중을 다해 매번 참여 작가를 엄선한다. 아내가 큐레이터이지만 또 한 명의 큐레이터를 고용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첨단 트렌드의 작품을 하는 유망한 젊은 작가를 주로 고른다. 현재 진행되는 4인전의 타이틀은 ‘Selfie시대의 자화상展’이다. 셀피족(스스로 자신의 사진을 찍길 즐기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이 넘쳐나는 이 사회를 작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걸 보여주는 전시회다.
작가 김태헌의 가벼운 소품 한 점이 재미있다. 꽃 속에 들어간 행복한 사내를 그려놓고, ‘나는 거짓말쟁이 화가’라 화폭 안에 써넣었다. “알고 보면, 나 나쁜 놈이야! 근데 넌?” 작가는 그리 묻고 있다. “나? 나라고 별수 있음?” 관람객은 그리 답하기 십상이지 않을까.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심지어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보신책이라 여기는 내 안의 위선, 가식, 내로남불! 작가는 그걸 까발리고, 관람자는 뭔가 켕기면서 ‘나’를 모처럼 들여다본다. 속된, 너무도 속된 외부로만 편재된 눈을, 두뇌를, 욕망을 내부로 돌린다. 잠시 잠깐이나마. 미술관 그림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을 환기시킨다. 족쇄를 풀고 자유롭게 살 생각을 해보게 한다. 너무 가르치려 드는 그림은 따분하지만.
아미미술관장 박기호
바닷가 소금창고, 통째 예술로 바꾸겠다
지난 1983년, 박기호 관장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구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부상으로는 프랑스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게 계기가 돼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아내 구현숙 역시 영국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 디종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은 파리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사귀다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과 동시에 귀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여기 당진으로 내려온 것이다. 당진은 박 관장의 고향이다.
널찍하고 천장 높고. 그는 그런 작업 공간을 찾다 폐교에 자리를 잡았다. 원하는 공간을 얻었으니 작업에의 몰두가 깊었을 게다. 폐교를 다듬는 데에도 비지땀을 쏟았다. 4600평 부지 안에서 폐허의 표정을 짓고 있었을 교사와 부속건물, 그리고 운동장. 이 모든 걸 쓸 만하게 바꿔놓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보냐. 청소를 하는 데만 반년이 걸렸단다. 방독면을 쓰고 천장을 털어냈을 때 쏟아진 쓰레기가 트럭으로 열 대 분량이었다. 쥐들의 낙원이기도 했다. 교실 한 칸에 꾸민 침실의 커튼을 타고 부산히 오르내리는 쥐들로 잠을 설친 밤도 많았다. 쥐보다 더 바삐 움직인 건 박 관장이었다. 다듬고 고치고 칠하느라고. 그러니까 청소부이자 수리공, 목수이자 페인트공으로도 살았던 셈이다. 어디서 이런 뚝심과 요령이 나왔을까.
“파리로 유학을 갈 때 1원 한 장 지닌 게 없었다.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고암 이응로 화백께서 쓰던 작업실을 한동안 얻어 쓰는 행운이 있었지만, 숙식 문제부터 늘 곤란했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 팔았다. 그리고, 알바 삼아 집 고치는 업자들을 따라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때 공사판에서 익힌 기술을 폐교 수리에 활용했다.”
“당신은 화가다. 폐교 단장에, 그리고 미술관 운영에 힘을 너무 소모하는 건 아닌가? 그림밖엔 난 몰라! 화가들은 흔히 그런 말을 하는데.”
“캔버스 안의 그림만 예술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긴 세월 동안 실로 많은 작업을 해왔다. 공간 곳곳을 디자인하고, 손수 가구를 만들고, 돌담을 쌓고, 심혈을 기울여 조경을 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단순한 인테리어라 규정할지 모르지만, 최상의 디자인이 가미된 작품으로 보길 바란다. 관점을 넓히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상에 이미 예술이 들어가 있는 걸 알 수 있다.”
소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장에 내놓았던 마르셀 뒤샹. 그는 공장에서 나온 기성품도 예술일 수 있다고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예술이라 했다. 박 관장이 뒤샹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관점을 확장하고 틀을 깨는 거. 그게 자유로운 삶이자 예술이라는 얘기이겠지. 그는 요즘 오브제로 사들인 해변 마을의 소금창고를 통째 작품화하기 위해 구상 중이다. 폐어선 한 척도 같은 용도로 이미 접수해뒀다.
신과 신화, 인간들의 이야기가 풍성한 코카서스 3국의 첫 번째 여행지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첫 여행지가 됐다.
먼저 한국엔 코카서스 3국으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다. 모스크바, 이스탄불, 카타르 혹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국제공항을 경유해서 가야만 한다. 둘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적대국이기 때문에 두 나라 간 국경 통과가 불가능하다. 셋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운행한 침대열차 1등 칸에 타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실크로드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세계에 몇 곳 없는 동서양 문화의 완충지대에서 출발해 유럽 문화의 변방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바쿠’라는 도시를 제대로 처음 본 것은 다음 날 아침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흐린 하늘 옅은 구름 아래로 반듯하게 서 있는 황갈색 사각형 빌딩들, 민트색 둥근 아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풍스런 정취의 건물들이 창밖으로 보였다. 동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희미한 푸른 잉크로 물들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여행이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솟아 있는 바쿠의 상징, 플레임 타워(Flame Tower)도 눈에 들어왔다.
바쿠는 구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의 고건축과 현대 건축물들(플레임 타워,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
12세기에 지어진 벽이 둘러싸고 있는 유서 깊은 ‘이체리 셰헤르’(Icheri Sheher)는 바쿠의 구도시다. 커다란 성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니 오랜 세월 밟히고 마모되어 반짝이는 돌로 포장된 길이 열렸다. 서유럽의 도시처럼 위대한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광장은 아니다. 사람과 시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길들이 성 안에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골목은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이 도시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큰길가 양쪽으로는 상점과 식당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은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다. ‘물탄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 카라반세라이’ 등 역사적 건축물들이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옛날 이토록 먼 길을 어떻게 이동해 여기까지 왔는지 상상이 안 되지만, 곳곳에 실크로드의 흔적들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그 카라반세라이는 기념품 판매점과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바쿠의 중세를 만나다
바쿠의 구도시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다. ‘처녀의 망루’라는 뜻을 지녔다.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전설도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성벽이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탑은 직경 16.5m, 높이 29.5m 규모의 원통형.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탑 꼭대기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탑 위에 올라서니 구시가지와 카스피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카스피해를 넘어온 바람의 숨결을 느끼면서 다음 일정을 위한 휴식을 가졌다.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도착한 곳은 ‘시르반샤 궁전’. 15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건축 양식의 진주로 불린다. 왕궁과 건물들이 균형감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전으로 가는 골목을 걸을 때 어디선가, 신을 부르는 듯한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 길게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아잔’(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따라가 보니 이슬람 사원 ‘무하마드 모스크’(Muhammad Mosque)가 나타났다.
성의 바깥 서쪽에는 성곽길을 따라 바쿠에서 첫 번째로 조성된 ‘필라모니야 공원’(Filarmoniya Park)이 있다. 주변에는 노란색 건물의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 ‘예술 박물관’, ‘음악 재단’이 있다.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은 100년 전 유럽풍 스타일로 지어진 극장으로 운치를 더해준다. 오래된 성벽에 기대어 숲을 안고 있는 공원은 언제든 지친 여행자의 등을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곳곳에서 공연을 하고, 한 레스토랑에서는 탱고 파티가 한창이다. 사랑에 취해, 춤에 취해 있던 커플이 카메라를 든 여행자를 보고 포즈를 취해준다. 계획에 없었던 장면들. 여행하면서 만나는 득템이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생의 피로를 씻어주는 경험이다.
예술을 존중하는 나라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코카서스인과 튀르크족이 병합되는 과정을 거쳐 11세기에 셀주크 튀르크에게 정복당했다. 이때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크족에 동화돼 완전히 튀르크화됐다. 현재 아제르바이잔 언어의 80%는 터키어다. 그래서 터키와는 ‘한 민족 두 나라’로 불리고, 아제르바이잔 언어를 ‘아제르바이잔튀르크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은 언어와 문자, 문학작품을 매우 존중한다. 도시 곳곳에 시인의 동상이 있다. 특히 성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다섯 편의 서사시 ‘하므사’(Khamsa)를 발표하면서 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기념 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는 이 박물관 앞에서 시작된다. 바쿠의 현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성비 좋은 고급 레스토랑과 블링블링한 카페, 유명 브랜드 숍들이 이어지는 보행자의 거리다. 저녁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나와 밤을 즐긴다. 이곳에서는 인종, 국적, 나이, 언어가 달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결을, 사물의 결을, 세상의 결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다른 영혼의 결을 안아줄 줄 안다. 이곳에는 여행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소매치기, 강도, 도둑질 같은 경직된 단어도 없었다.
바쿠의 속살들
구 소련 치하에 있었던 영향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젊은이는 많았다. 영어를 하든 못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친절’이다. ‘28 May 광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한 아가씨가 도와줄 일 없냐고 먼저 물어왔다. 예약한 숙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만난 할아버지는 200m 정도를 걸어 숙소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줬다. 이곳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코카서스 3국 중 아제르바이잔의 물가가 가장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2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커피 한 잔은 3.0AZN(약 2100원), 슈퍼에서 파는 와인은 4.0AZN(약 2800원)쯤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0.2AZN, 약 140원) 등 대중교통비는 놀랄 정도로 싸다. 전철은 2개 노선에 정류장도 많지 않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바쿠의 속살을 보려면 전철역에서 파는 충전식 바쿠 카드로 대중교통을 이용해봐야 한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 끝으로 지나가는 큰 대로를 건너면 카스피해를 끼고 바쿠만을 따라 엄청 길고, 넓은 공원이 펼쳐진다. 바로 ‘불바르 공원’(Bulvar Park)이다. 공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카스피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공원 안에는 여객선 터미널, 요트 정박장, 대형 쇼핑몰, 국립 카페 박물관, 아즈네프 광장, 대형 회전 관람차인 ‘바쿠 아이’, 대규모 고급 호텔 등 새 시설들이 호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첫눈에도 공원 조성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음이 짐작된다. 하지만 뭐가 문제일까? 바로 앞 바다에서 원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
카스피해 보석에서 유럽 보석으로
카스피 해변과 근해에는 영화나 사진에서 많이 본 석유시추 시설이 곳곳에 있다. 지하를 뚫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나 많이 매장돼 있는 석유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가 있다. 바로 노벨상으로 유명한 스웨덴 사람 ‘노벨’의 형이다. 그가 이 지역에서 석유를 발굴하고 정유소, 송유관, 원유소 등을 개발해 바쿠의 석유산업이 발전했다. 바쿠의 경제기반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쿠 시는 1884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노벨형제석유사’(브라노벨)의 복지시설 건물을 ‘노벨 박물관’으로 바꿔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현재는 이곳에서 생산된 석유를 바쿠에서 시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1769km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보내고 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제이한 항구까지 이어진다. ‘Baku’, ‘Tbilisi’, ‘Ceyhan’ 세 도시의 약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이라 부른다. 카스피해에서 생산된 원유가 BTC 파이프라인을 거쳐 지중해로 가고 이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불바르 공원의 중심인 ‘무감 센터’(Mugam Center) 건너편에는 ‘업랜드 공원’ 정상까지 올라가는 푸니쿨라 승강장이 있다. 공원으로 올라가면 바쿠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보았던 플레임 타워가 보인다. 3개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건물의 높이는 190m.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완공했다. LED조명을 설치한 건물 외곽은 형형색색의 불꽃을 보여주며 화려한 쇼를 한다. 이제 바쿠는 ‘바람의 도시’에서 ‘불의 도시’가 되었다. 그 랜드마크가 플레임 타워다. 타워 옆 바쿠만과 카스피해가 한눈에 보이는 공간에 ‘순교자의 길’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충원처럼 전쟁 때(주로 소련이 붕괴할 때 일어난 독립운동) 희생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순교자의 탑’도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 옆에 추모 공간을 마련한 깊은 뜻을 헤아리며 카스피해와 바쿠의 야경을 감상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
여행이 끝나면 바쿠는 어떤 도시로 기억될까? 아름답거나 시각적인 즐거움만 제공한 도시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신을 향해 인간이 엎드리는 곳, 자그마한 모스크가 있다.
바쿠의 현재를 상징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여성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다. 우리나라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그녀가 디자인했다. 그래서일까. 친숙한 느낌이다. 건물의 경이로운 비정형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각형 건물이 가득한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바람에 흐르듯 우아하게 굽이치는 곡선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물결도 연상됐다. 멀리서 비탈진 광장의 초록과 물을 배경으로 놓고 봤을 때는 연체동물의 패각이 떠올랐다. 그 껍데기 집에 인간과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듯했다.
유서 깊은 옛길과 불교 유산을 함께 답사할 수 있는 명품 코스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대원지를 탐승 기점으로 삼는다. 하늘재 정상까지는 약 2km. 정상에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 재 너머 반대쪽 길이 끊겼기에.
옛날 이름은 계립령, 요즘은 하늘재로 부른다. 옛길 중에서도 옛길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옛길이다. 고증할 수 있는 역사로 볼 적에 그렇다. ‘삼국사기’는 적시하고 있다. 신라 초, 156년에 이 길을 열었다고. 근 2000여 년 전에 생긴 길이니 아득하다.
두 발 달린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마다 의미심장한 산길이 열렸겠지. 하늘재보다 더 오랜 길이 왜 없으랴. 역사가 채록하지 않은 고갯길들이 그 얼마나 많으랴.
그러나 인간은 시간 저편을 보는 눈이 없어 역사를 빌려 사라진 과거 한 줌을 움켜쥔다. 없는 게 시간을 보는 눈뿐이랴. 삶을 보는 눈이 없어 편견에 기대어 내가 아는 것만 우기며 산다. 사랑을 보는 눈이 없어 편린으로 남은 추억을 쥐어짜 아픔을 아로새긴다.
하늘재 옛길로 접어든다.
겨울 숲의 알싸한 냉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완만한 흙길이라서 걷기에 좋다.
물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작은 계류에 서린 물빛이 투명하다. 거기에 무엇이 있나? 들여다보니 송사리 떼가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무슨 열정으로, 무슨 정념으로 온몸을 휘저어 흐름을 거스르는가. 그러나 거스름이란, 거역이란, 살아 있는 증빙이기에 순연(純然)이다.
삶의 고역스러움은 거역해야 할 때 거역하지 못한 응징으로도 주어지는 게 아닐지.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성에 젖어 생활에 순종해왔던가. 얼마나 자주 본연을 잃은 굴종으로 ‘쌩쇼’를 일삼았던가.
송사리들의 용을 쓰는 역행엔 남세스러운 게 하나 없다.
잠깐의 걸음만으로도 숲의 안통에 닿는다. 숲이 깊어 나무들과 가까워진다.
헐벗은 저 나무들. 헐거운 저 표정들. 초록 이파리를 무성히 달아야만 생동하랴. 얻어 걸친 것 없이 태연한 겨울나무들도 알고 보면 씨억씨억 거센 숨을 토한다. 숲 그늘 새로 비집어 든 햇빛 한 조각이면 거뜬하다. 햇빛과 물과 공기만으로도 평생을 말짱히 사는 나무들의 청빈한 삶이라니….
그에 비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비경제적인가. 나무가 남이 아니라지만, 남이 아니기 이전에 어쩌면 고등한 선생님이다.
길은 굽이굽이 연신 휘어진다.
경사도가 낮아 숨찰 게 없다.
새소리마저 그쳐 그지없이 고요한 오후다.
쥐죽은 듯 조용한 숲길이다.
음미할 만한 적막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고요에 마음을 담근다. 그러자 새삼스럽게 귀가 열린다. 두 귀를 마냥 열어두는 건 산 아래 저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 이 순간엔 들을 수 없는 것들마저 듣는 기분이다.
일테면 메마른 낙엽들의 밀어를. 나무가 나무를 어루만져 내는 첼로의 저음을. 또는 하늘재 길 공사를 하는 신라인들의 두런거림을. 귀에 고이는 상상의 독주(獨奏), 들을 수 없는 걸 듣는 청각의 뻥에 나는 기꺼이 속는다. 만상의 비밀을 품은 고요가 주는 선물이라 믿기에.
하늘에 닿을 지경으로 높고 가파른 잿마루라 하늘재? 그렇지 않다. 해발 525m로 그다지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 경탄할 만한 산경을 펼쳐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하늘 아래 처음 열린 길이라는 뜻으로 지어 붙인 이름이리라.
신라의 드높은 이상을 유비(類比)한 지명으로도 손색이 없겠지. 신라가 이 길을 개설한 게 민생의 편익만을 위해서였겠는가. 영토 확장의 욕망과 군사적 요충 확보라는 계산까지 실린 길이지 않겠는가.
하늘재의 쓰임새는 실로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맞먹을 핵심 도로 인프라였으며, 불교문화의 유통 교차로였고, 툭하면 창검이 각축하는 전장(戰場)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멀지 않은 문경 새재에 열린 새로운 고갯길이 각광받으면서 하늘재의 이용 빈도가 낮아졌다. 종단엔 잊히기에 이르렀다.
하늘재 마루에 올라서자 전망이 탁 트인다. 백두대간 첩첩준령들이 출렁거린다.
마의태자도 저 헌걸찬 산 물결을 바라봤을까. 신라 패망의 한에 겨워 명멸하는 세사의 덧없음을 한탄했을까. 고증할 방법이 없으니 전설일 뿐이지만, 마의는 하늘재를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늘재 들머리에 있는 미륵대원지의 미륵리석불입상도 마의가 세웠다 하고.
하늘재에서 펼쳐진 인간사의 영욕과 부침의 드라마는 이미 연기처럼 사라졌다. 시간의 파괴력 앞에서 그 무엇인들 지속할 수 있으랴.
자연은 인간사와 달라 고요처럼 의연하다. 그저 유유자적으로 영속한다. 따져놓고 보면 놀랄 만한 대비이지 않은가.
사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구경이 목적인 여행에 비해 훨씬 더 생기를 준다. 생기 있는 ‘삶을 고양하기 위한’ 여행으로 니체는 두 종류의 여행을 말했다. 하나는 과거의 위대함을 숙고함으로써 인간의 삶이 영광스러운 것임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정체성이 과거에 의해서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 과정에서 연속성과 소속감을 확인하는 여행이다.
정읍으로의 여행이 내게는 니체가 말한 영감을 얻게 되고, 자아를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었다. 그곳은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재생시키는 자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 9곳’이 한국에서는 14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한 사립교육 시설이다. 서원의 역할, 지역을 중심으로 학파를 만들어가는 기능 등이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번에 등재된 서원은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영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돈암서원(충남 논산)과 전북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전북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은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정읍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했다 떠난 후 그의 선정을 기려 주민들이 세운 생사당에서 유래되었다. 무성서원은 앞에 칠보천이라는 개울이 흐르며 뒤에는 성황산을 등지고 자리한 배산임수형 위치이면서 마을의 중심에 있다.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에게 열린 학문의 공간이자 소통의 장이었다. 더욱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고,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 최익현 등을 중심으로 호남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입구 출입문으로 외삼문이 있다. 무성서원의 경우에는 1891년에 건립한 2층 누각의 현가루가 외삼문 대신에 출입구의 역할을 한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도 학문을 계속한다’라는 의미이다. 서원은 제례를 지내는 사당인 사우와 강학공간인 강당, 기숙사인 강수재, 서원 관리인이 거주하는 고직사 등의 건축물로 구성되어있다. 주변에는 각종 비석과 비각이 놓여있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들을 돌아보니 과거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시간 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무성서원에서 30km 거리에 한국 최고의 단풍을 자랑하는 내장산 국립공원이 있다. 올해는 따뜻하고 건조해서 단풍의 절정기가 예년에 비해 늦어졌다고 한다. 11월 중순을 넘겨야 명성에 맞는 내장산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계절의 변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많은 녹색은 조금씩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에 비친 나뭇잎들도 색의 변화에서 제각각 차이를 드러냈다. 녹색을 띤 황금빛, 붉은색을 띤 황금빛, 온통 시뻘건 붉은색, 레몬 빛 노란색, 녹색과 합쳐진 붉은빛, 체리색 주황빛...
내 영혼을 위해서 오래도록 풍경 속에 있고 싶었다. 노란색, 붉은색 나뭇잎이 떠다니는 호수의 우화정에 자리를 잡았다. 화려하게 변신 중인 숲길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고흐가 생각났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선과 비례의 아름다움을 그렸던 것처럼 그가 내장산 단풍을 그렸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색의 대비로 내장산의 가을을 표현한다면 그는 어떤 색의 대조를 선택했을까? 눈을 감고 잠시 고흐가 되어 상상의 화폭에 가을 내장산을 그려보았다.
▪ 무성서원: 전북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사람들은 제각각 피로를 벗어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 경우에는 ‘나‘를 벗어나 조금이나마 ’다른 존재‘로 살아보기 위해 아무 연고가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번 가을에도 그런 이유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찾은 곳이 동해시다. 오래전부터 두타산과 청옥산의 무릉계곡이 있는 동해시에 가고 싶었다.
동해시의 무릉계곡은 백두대간의 줄기로 동서 간 분수령을 이루는 깊고 험준한 두타산과 서쪽의 청옥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다. 내가 동해시의 무릉계곡에 갔을 때 두타산과 청옥산의 능선에 내려온 가을은 노랑, 빨강의 색들이 서로 합쳐지며 있었다. 그들은 서로 뒤엉키고 섞이면서 하나의 층을 이루었다. 가을 햇빛은 차가운 공기와 잘 어우러졌다. 언제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는지. 갈색 나뭇잎들은 가지를 길게 빼고 툭툭 떨어졌다. 숲속 길에, 골짜기 흐르는 물 위에.
아프리카 격언- ‘너무 빨리 걷지 말아라.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어라.’
그렇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무릉계곡의 길이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남’이 되어 걸으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길이다.
입구의 관리사무소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계곡 바로 옆에 있는 1,500평 정도의 넓은 반석을 만나게 된다. 이 반석 위에는 이곳에 왔던 명필가와 묵객들이 새겨놓은 수 많은 크고 작은 석각들이 있다. 그 글 중 이 계곡을 무릉선원(武陵仙源)으로 표현한 글귀가 있다.
무릉반석 위쪽에는 유서 깊은 사찰인 삼화사가 있다. 신라 시대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창건한 사찰로 고려 태조 때 ‘삼화사’로 개칭되었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철조 노사나불 좌상’이 있다. 길을 따라 서 있는 사찰의 담에는 배고픈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절경들로 학소대, 관음폭포,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 등이 있다. 화강암 암반 위에서 떨어지는 이 폭포와 소(沼)들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풍경이 있다. 각각의 이야기와 풍경을 함께 하다 보면 유체 이탈된 나를 만나게 된다.
무릉계곡 입구 맞은편에 맑은 공기와 물소리, 새소리로 신선한 기운을 찾을 수 있는 ‘동해무릉 건강숲’이 있다. 이곳은 심각해지는 환경성 질환을 예방하고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하루 1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숙박동과 테마체험실, 자연식 건강 식당 등을 갖추고 있다. 친환경 숙박 시설은 황토와 편백나무 등 친환경 자재를 이용해 만든 숙박 시설로 38개의 객실이 있다. 테마체험실에는 건강에 좋은 소금 동굴 등 각종 찜질방과 산소힐링방 등을 갖추고 있다.
‘동해 무릉 건강 숲’에서 힐링의 밤을 보낸 다음 날 ‘한국인이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 선정되었던 ‘추암촛대바위’가 있는 해안으로 갔다. 미묘한 해안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길에서부터 이어진 추암근린공원까지 잘 조성된 하나의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동해의 맑은 바닷물과 크고 작은 바위에 잘게 부서지는 파도, 그리움이 배인 촛대바위는 해안의 주인공이었다. 촛대바위의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리움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그 그리움은 단지 힘이 세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움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나에게 물었다. 움츠러든 가을 여행자의 마음을 토닥거려주었다.
동해시는 너무 볼 것이 많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자연체험 학습장인 ‘천곡천연동굴’도 도심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VR 체험 시설과 함께 석회암 동굴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긴 걷는 길인 ‘해파랑길’에 속하는 바닷가 길도 동해시에 있다. 해파랑길은 총 길이 770km로 부산의 오륙도에서부터 고성군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는 ‘태양과 걷는 사색의 길’이다. 이중 ‘해파랑길 33코스’와 ‘34코스’가 동해시에 속하는 길이다. 한섬에서 출발해 천곡항을 향해 걸었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바다를 낀 소나무 숲길도 좋았고, 잘 닦여진 데크의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도 좋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해파랑길을 걸을 때 들었다. 누구라도 무엇엔가 사로잡혀 있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데... 아직도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내가 꿈꾸는 나가 내 안에서 두 개의 심연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 언제까지고 가슴 아픈 방황을 계속해보자. 내 마음 깊은 곳의 온갖 울림과 떨림, 미세한 균열과 변화의 틈새를 지켜보자. 조금씩 전과 다른 나를 향해 아주 느리게 변해가는 나를 발견해보자.’
가을의 어느 날에 간 동해시 여행을 통해 1㎜(밀리미터) 변한 내가 보였다.
▪ 무릉계곡: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38.
▪ 동해 무릉 건강 숲: 관련내용 홈페이지 참조 (http://forest.dh.go.kr)
▪ 천곡천연동굴: 강원도 동해시 동굴로 50.
▪ 추암촛대바위: 강원도 동해시 촛대바위길 6.
▪ 해파랑길: 동해시청 관광과
김한승(金漢承·52) 국민대학교 교수는 저서 ‘나는 아무개지만 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니다’의 여는 글에서 인간을 ‘평범하게 비범한’ 존재라 일컬었다. 이는 ‘평범하지만 비범하다’거나 ‘평범하고도 비범하다’는 말이 아니다. 풀어 설명하자면 개개인은 저마다 비범하지만, 한편으론 모두가 그러하기에 인간의 비범함은 곧 평범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를 차별해서도, 차별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것. 그는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확장하기 위한 토대로 ‘인류 원리’라는 다소 낯선 주제를 끌어왔다.
김한승 교수의 책을 읽은 이들의 감상평에는 공통된 선입견이 있었다. 대부분 제목만 보고 자존감에 대한 자기계발서나 심리치유서 정도로 여겼다는 것이다. 또 감성적인 위로를 건네리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논리적 해석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위안을 얻게 돼 흥미로웠단다. 물론 책에는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지만, 그 내용의 근간으로 삼은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는 천체물리학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이러한 반응을 낳았다.
“인류 원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탄생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적당한 중력, 태양과의 적정 거리,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은 온도, 육지와 바다의 알맞은 비율 등 수많은 조건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우리 모두는 아주 희박한 확률 속에서 각자의 특정성을 갖고 우주에 태어난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모두 ‘비범한 존재’라 할 수 있죠. 다만, 이 기적 같은 일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일어났으니 ‘평범하다’고 보는 거고요. 이렇듯 인류 원리는 우리가 평범하게 비범하다는 점에 착안해 보다 근본적인 존재의 의미를 고찰하게 합니다.”
아무개를 아무나로 여기는 ‘갑질’
미국 소설가 마가렛 딜란드는 “‘아무개(somebody)’를 ‘아무나(anybody)’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nobody)’ 없다”고 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가령 ‘아무개를 사랑한다’와 ‘아무나 사랑한다’ 등으로 대입해보면 그 뉘앙스가 확연히 드러난다. 책 제목 역시 이러한 의미를 살려 주제를 드러냈다.
“아무개는 어떤 특성을 지녔지만 그것에 주목하지 않는 것이고, 아무나는 아예 그런 특성을 배제해버린 상태입니다. 때때로 타인을 아무개가 아닌 아무나로 여겼을 때, ‘갑질’ 같은 만행이 일어나곤 하죠. 우리는 상대를 아무개로 바라보는 동시에, 나 역시 그들에게 아무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근대철학에서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길 권하죠. 이는 달콤한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인류 원리의 관점에서 ‘나는 타인과 다르지 않다’는, 즉 ‘아무개’라는 연대성을 통해 궁극적인 위안을 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인류 원리의 관점을 자칫 모든 존재를 획일화한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각자 다양한 특성을 가진 존재임이 같다는 것이지, 애초에 두 존재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 원리는 평범함과 비범함, 특수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해볼 기회를 마련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정확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진단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건 단순히 주소처럼 공간적 좌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가령 ‘나는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진 시점에 살고 있는가?’,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과 나중에 태어날 사람들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 ‘나는 지금보다 앞으로 더 행복할까?’ 등 삶과 죽음, 인류, 자아의 세계를 아우르는 훨씬 넓은 차원의 질문의 답을 요구하는 일이죠. 이때 자신의 위치를 짚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답을 찾으려면 공간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시간까지 그린 ‘4차원 지도’가 필요하지요. 물론 정확하고 자세한 4차원 지도를 인간은 손에 쥘 수 없겠고요.”
성공적 인생의 클라이맥스
앞서 언급한 4차원 지도에는 시간의 차원이 포함된다. 김 교수는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중장년일수록 ‘과거의 나’와의 연결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체된 도로를 지나는데 알고 보니 길 위에 떨어진 매트리스가 원인이었다고 가정해보죠. 누군가 매트리스를 치운다면 그의 선행에 감탄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지나칠 겁니다. 본인이 치른 비용은 이미 허비한 시간이고, 내가 매트리스를 치워 생겨날 이익은 뒤에 오는 사람들이 누리게 될 테니까요. 즉 매몰비용이라 간주한 거죠. 그러나 이는 현재 겪고 있는 일과 앞으로 겪게 될 일만을 염두에 둔 결과입니다. 비록 꽉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직접 매트리스를 치우고 스스로 보람을 느낀다면, 과거의 시간을 더 이상 헛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짜증으로만 가득했을 그 시간을 훨씬 나은 경험으로 바꿔준 셈이죠.”
이처럼 대개 과거는 지난 일이고, 미래를 위해 현재에 충실한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김 교수는 이러한 태도는 과거 자신의 노력을 함부로 대하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과거의 경험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과거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일 때문에 후회하는 중장년이라면 이러한 태도 변화가 더욱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삶의 비극(?)일 수 있는데, 젊어서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많이 하지만 그에 대한 지혜가 부족하고, 나이 들어서는 혜안은 있지만 선택의 기회가 적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그때 이렇게 할걸’ 하며 때늦은 후회를 하곤 하죠. 하지만 매트리스 사례처럼 어떤 선택이 실패라고 판단할지라도,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노력을 얼마나 보람 있게 만드느냐에 따라 결과는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는 반대로 과거의 성공 기억에만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덫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어떤 상황에도 자신의 성공 방식만을 적용하는 것이 문제인데, 자칫 ‘꼰대’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노후에는 빛을 내야 할 과거, 잊어야 할 과거 등을 구별하면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잘 엮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령 음악회에서 교향곡을 듣는데 마지막에 이상한 소음이 발생했다면, 사람들은 이전의 좋은 경험은 다 잊고 결과적으로 망친 무대라고 판단합니다. 결국 클라이맥스 부분이 모든 것을 좌우해버리는 거죠. 그만큼 우리 인생 스토리도 뒷부분이 주는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장년은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죠. 실패, 후회,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일지라도, 현재의 노력을 통해 그 의미를 충분히 재조명할 수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중장년 부부나 연인의 안정적인 관계 유지를 위한 생활 방식으로 ‘LAT’(따로 함께 살기)를 꼽았다. 최근 중국의 시니어는 하루 170원 정도의 이용료로 원격진료와 식사배달 등 다양한 서비스를 누리는 ‘스마트 홈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한편, 한 70대 노부부가 의료비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미국 중산층을 둘러싼 ‘메디-메디’ 혜택에 대한 쟁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국 ‘LAT’ 시니어 부부, 독립성과 자유성 매력적
월스트리트저널은 결혼하지 않은 중장년 연인이, 젊은 연인들보다 더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 비결 중 하나로 ‘LAT(Living Apart Together)’ 방식을 꼽았다. ‘따로 함께 산다’는 의미를 지닌 LAT는, 결혼해서 한집에 동거하거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각자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일정기간만 상대의 집에서 사는 관계를 말한다.
미국의 새로운 가족 형태로 떠오르고 있다. 가령 일주일에 나흘은 한집에서 지내고, 나머지 사흘은 각자의 집에서 생활하는 식이다. 특히 주거공간을 소유한 중장년층 중에 LAT족이 많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이 꼽은 LAT족의 가장 큰 장점은 ‘독립성과 자유성’이다. 간헐적으로 함께 생활하며 즐거움을 누리되, 독립된 개인의 공간이 있어 사생활을 모두 공유하거나 일상 패턴을 맞춰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한층 자유롭다는 것. 최근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른 ‘졸혼’도 이러한 점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중국 시니어 돌보미로 거듭나는 스마트 홈 기술
중국에서 시니어를 위한 스마트홈 서비스가 출시됐다. 하루에 1위안, 원화로 170원 정도의 이용료를 지불하면 원격 진료는 물론 긴급 병원 호출, 주택 보안, 식사배달 등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중국 시니어 간호 분야의 선두주자인 란창 네트워크 테크놀로지(Lanchuang Network Technology)가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 시니어 세대를 위해 개발한 스마트 홈 서비스다.
TV와 페어링된 웹캠에 아이폰의 ‘시리(Siri)’와 유사한 음성 도우미 ‘샤오이(Xiaoyi)’를 불러 다양한 유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4개월 전에 시작한 란창의 스마트 홈 서비스에는 16개 도시에서 22만 명이 가입했다. 특히 중국 내에서도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산동 지역에서 절반 이상 등록했다. 란창은 지금까지 ‘차이나 모바일’과 협력해 시니어 스마트폰 서비스를 실시해온 회사다. 지난 4월 중국 정부는 스마트 기술과 재정 지원을 포함해 해당 부문을 위해 개발될 서비스에 대한 상세한 정책 문서를 발표했다. 란창의 스마트 플랫폼에 대한 보조금으로 약 2200만 위안(266억 원)을 제공했으며, 산동성 정부도 300만 위안(36억 원)을 기부했다. .
미국‘메디-메디’ 혜택 못 받는 중산층, 의료비 부담에 자살까지
지난 8월 미국 워싱턴 주 와콤카운티에서 70대 노부부가 의료비 부담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911에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자살을 예고했고, 유서에는 “더 이상 의료비를 갚아나갈 수 없어 극단적 선택을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미국 노인들의 경우 정부 의료보험인 ‘메디케어’와 저소득층 의료보조 제도인 ‘메디케이드’, 이른바 ‘메디-메디’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메디케이드를 받기엔 재산이 많지만, 의료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인 중산층 노인. 그들에게 남은 메디케어는 자기 부담률도 적지 않을 뿐더러, 양로병원과 자택간병 등 장기케어는 해당하지 않아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받기 어렵다. 이번 사건의 노부부 역시 이러한 고충으로 유명을 달리해 안타까움을 샀다. 그러나 미국의 중산층 인구는 점차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는 데 반해, 이와 관련한 정부의 대응은 미흡한 상황이다.
한편 우리 정부는 2017년 8월 환자가 비용을 부담하는 비급여를 건강보험에 적용하고, 노인,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의 의료비를 낮추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른바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제도다. 비급여 진료 문제가 있어 보험 적용을 받은 후에도 본인 부담금이 많고, 상한선이 없는 고액 진료비에 고충을 겪는 중산층을 위한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시행 3년 차, 소득 1~5분위 계층의 의료비는 42만~55만 원이 절감됐지만, 보다 면밀한 검토와 효율적 운용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