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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남기는 것에 대하여
- 이상교 시인의 동시 ‘남긴 밥’을 읽어봅니다. ‘강아지가 먹고 남긴/밥은/참새가 와서/먹고,/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쥐가 와서/먹고,/쥐가 먹고 남긴/밥은/개미가 물고 간다./쏠쏠쏠/물고 간다.’ 따뜻하고 좋은 시입니다. 설마 강아지(개가 아닙니다)나 참새나 쥐가 다른 짐승과 곤충을 위해 일부러 밥을 남기기야 했겠습니까? 작고 여린 것들을 보는 시인의 눈이 그렇게 읽는 것이지요. 여기에서의 남김은 배려와 순환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개미가 먹다 남긴 밥을 먹는 생명체가 또 있습니다. 그런 생명체가 죽어 밥이 되면 그 밥은 다시 시에 나오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누군가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콩을 심을 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었습니다. 벌레에게 한 알, 새에게 한 알, 우리 인간이 먹을 한 알입니다. 그런다고 벌레나 새가 기특하게 한 구멍에서 한 알씩만 먹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친구는 그런 의미와 생명에 대한 외경을 담아 ‘콩 세 알’, ‘三豆齋(삼두재)’ ‘세알콩깍지’라고 호를 지었습니다. 그의 호는 ‘콩밝(空朴)’으로 진화했습니다. 여기에도 배려의 남김이 있습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어머니는 마당에 뜨거운 물을 뿌릴 때 “눈 감아라, 눈 감아라” 그런답니다. 뜨거운 물이 스며들어 땅속의 벌레들에게 미치면 눈이 멀 수 있으니 눈을 감으라고 벌레들에게 일러준 것입니다. 미물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는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다 내가 아닌 남, 타자를 위한 남김입니다. 이와 달리 오로지 자신을 위한 남김이 있습니다. 남을 위한 남김이 결과적으로는 내가 남는 일이 될지 몰라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남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남김을 지향하며 삽니다. 남긴다는 뜻의 대표적인 한자는 遺(유)입니다. 가랑비, 남기다, 남다, 끼치다, 전하다, 잃다, 버리다, 두다, 떨어뜨리다, 빠뜨리다, 쇠퇴하다, 이런 뜻의 한자입니다. 반대되는 한자로는 遣(견)을 들 수 있습니다. 보내다. 떠나보내다, 파견하다, 떨쳐버리다, 내쫓다, (시집을) 보내다, (아내를) 버리다, 이런 뜻의 한자입니다. 생김새도 비슷한 두 글자가 처음엔 완전히 반대말인 것 같더니 쓰임새가 커질수록 의미가 비슷해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남기는 것은 자신을 위해 뭔가를 간직하는 행위인 것 같지만 실은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虎死遺皮 人死遺名(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르게 살라는 뜻입니다. 遺를 留로 쓴 경우도 많지만, 남긴다는 뜻에서는 遺가 더 어울릴 것입니다. 流芳百世 遺臭萬年(유방백세 유취만년), 꽃다운 이름은 백세를 가지만 더러운 악취는 만년 동안 남는다는 말도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줍니다. 인간은 나이 들수록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비하려 애쓰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이름으로 남을까, 자식들에게는 뭘 남겨주어야 할까, 이것은 전적으로 즐거운 일만은 아니며 근심이요 걱정인 경우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안 주면 맞아 죽고, 덜 주면 볶여 죽고, 다 주면 굶어죽는다는데, 어떻게 하는 게 슬기로운 일일지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노후가 괴롭고 고달픕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새끼를 위해 제 살까지 먹이로 내주는 늙은 거미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뜯어먹기 좋은 게 부모의 등골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는 사람은 하는 일이 헛되다.”[無孩兒浪營爲]고 합니다. 남김을 통한 명예의 보전과 존재증명의 중요성을 역설한 말일 것입니다. “자식에게 남겨주기에는 황금이 가득한 상자가 한 권의 경서만 못하다”고 책과 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김과 사후를 생각할 때 지금은 나의 모든 것이 다 짐이 되는 시대입니다. 많은 추억과 사연이 담긴 사진, 그 많은 인연과 손때가 묻은 책들은 내가 아끼는 소중한 물건이지만 자식들에게는 의미 없는 천덕꾸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걸 다 처분하고 가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한 권의 훌륭한 책으로 엮어 낸 학자를 인터뷰하면서 “어떤 인간으로 남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무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삶의 자취 자체를 무로 돌리고 싶다는 바람이 놀라웠습니다. 장자(莊子)는 제자들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려 하자 “땅 위에 있으면 매의 밥이 될 것이요, 땅 아래 있으면 개미와 지네의 밥이 되겠거늘 어찌 남의 밥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구애받지 않고 살아온 사람답습니다. 중국 소설가 루쉰(魯迅)도 “장례식을 위해 누구한테고 한 푼이라도 받으면 안 된다. 서둘러 입관하여 파묻어 치워 버릴 것, 무엇이든 기념행사 비슷한 짓을 하면 안 된다. 나의 일을 잊고 자기 생활에 정신을 돌려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바보다”라는 유언을 했습니다. 이런 유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결심을 하면 할 수 있는 정도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고 난 뒤의 일을 알 게 뭐며 알아서 뭘 하자는 거겠습니까? 고교 교과서에서 배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네가 장차 볼 길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도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장으로는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실제 삶은 비루하고 삶의 터는 진흙탕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죽으면서 “나의 영혼은 신에게, 나의 육신은 땅에게 바치며 나의 유산은 내 혈연에게 남긴다”고 말했습니다. ‘르네상스의 거장’이 남긴 말치고는 실망스러울 정도입니다.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미켈란젤로는 하나마나 한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인간은 결국 유언과 유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의미 있는 비명(碑銘)과 영향력이 긴 저작물로 남습니다. 이와 달리 순전히 재산으로 남는 인간의 삶은 금세 잊히고 자칫 갈등과 논란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죽기 전에 남기지 말고 다 쓰자, 사회에서 얻었으니 사회로 되돌려주자, 자식들에게 물려줘봤자 싸움만 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재물을 사용하고 소비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다 써야 할 것은 재물이나 인간관계 등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나의 생각과 재능, 그리고 올바른 마음을 나 자신과 남들을 위해 남김없이 다 쓰는 것, 그리하여 꽃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 그게 바람직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위한 남김과 남을 위한 남김의 조화를 지향하면서 그 방법을 찾아가는 게 삶의 후반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2015-08-07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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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사의 그 순간] ‘을사’ 최초의 순국열사 이한응(李漢應)
- 110년 전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으로 만들자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7.2~1905.11.30) 등 많은 지사들이 이에 항의하여 순국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6개월 앞선 이 해 5월 국은(菊隱) 이한응(李漢應·1874.9.21.~1905.5.12)이 만리타향 영국 런던에서 혼자 힘으로 다가올 파국적 운명을 막아보려고 발버둥 치다 순국한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는 구한말 국권상실과 관련한 순국 1호이다. 그의 순국에서는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 북벌의 대의를 저버릴 수 없어 온몸을 바쳐 힘쓸지니 죽은 뒤에나 그만둘 뿐이라는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 死而後已)’와 같은 고귀한 정신이 느껴진다. 영국 외무성 문서에는 이란 제목으로 2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그가 오늘날 국제정치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당시의 세계정세와 동아시아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비록 현실성은 희박했지만 탁월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국은은 좁게는 한국외교사에, 넓게는 한국근대사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 할 것이다. 이한응은 유학은 물론 영어를 포함한 신학문을 공부하고 1901년 첫 영국 상주공사로 임명된 민영돈(閔泳敦)을 수행하여 3등 참찬관(오늘날 서기관)으로 임지에 부임한다. 그러나 민씨 일가였던 민영돈이 1904년 초 귀국함에 따라 그는 서리공사(charge d’affaires)로서 혼자 공관을 지키며 이후 약 1년 5개월 동안 구국외교를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1901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극동위기’가 야기되며 결국 1904년 초 러일전쟁으로 발전한다. 이한응은 1월 13일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한반도 정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긴 메모(memorandum)와 각서(note)를 전달한다. 그리고 1주일 후 이 내용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다면서 메모 두 개를 다시 보낸다. 그 내용은 간단히 말해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영국은 다른 열강들과 ‘양해(understanding)’를 통해 어느 쪽이 전쟁에 승리하든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 및 영토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fresh guarantee)’을 해달라고 요망한 것이다. 6장의 도표를 곁들인 국은의 메모는 세계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분석, 그리고 세계적 차원(global level)의 동맹체제를 동아시아 지역 차원(regional level)에서 전개되는 분쟁에 적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려는 아이디어 등으로 신선하기 짝이 없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독립은 동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서쪽(유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최근 들어 협력하고 있다. (3개월 뒤 ‘영불협력’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으나 이들 양국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경쟁하고 있어 균형상태가 건전하지 못하다. 일-러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과 한국이 압력을 받게 될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도 이 분쟁에 휩싸여 범세계적 균형체제가 파괴될 것이며 이들의 이권은 침해받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같은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러-일 양국과 함께 4개국조약(a quadruple treaty)을 체결하여 러-일 간의 불안정한 체제에 ‘못’을 박고 심판관의 자격으로 동아시아 분쟁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도의 분석적인 구상은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영국 외무성은 수일간 그의 메모를 철저히 검토한 끝에 이한응의 메모는 결국 영국이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후 그는 1년 이상 본국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1902년 영일동맹에 의거한 조선의 독립보장 요구, 경의선 철도 건설 제안 등을 통해 영국정부를 집요하게 설득하지만 영일동맹으로 동아시아 문제를 이미 일본에 일임한 영국으로부터 외면당한다. 동아시아 정세는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과 일본의 잇단 승리로 다음해 11월 17일 을사늑약까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다. 일본은 이에 힘입어 ‘내정개혁’이란 명목으로 조선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는데, 이 중 해외주재 공관을 축소하고 외교관들을 철수시킨 조치는 이한응의 장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1905년 3월 중순 이한응은 영국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만리타향에서 1인 공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다. 당연히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었을 것이다. 4월 12일 하이드 파크에 있는 서펜틴(Serpentine)이라는 긴 연못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일본인 같은 두 동양인이 위협적인 자세를 보였다면서 영국 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외무성은 이를 두고 ‘우스꽝스러운(ridiculous) 짓’이라는 논평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1905년 4월 말 병으로 눕는데 5월 10일 랜스다운(Lansdowne) 외상으로부터 빠른 회복을 바란다는 서신을 받는다. 이에 용기를 얻은 듯 외상과의 면담을 신청하며, 외무성이 이를 호의적으로 검토하는데, 국은은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5월 12일 음독, 순국한다. 순국에 즈음하여 이한응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이 평등을 잃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으리오?’ 영국 외무성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논평을 남기지 않았다. 1900년 4월 명예 한국총영사에 임명되어 있던 부유한 영국인 프리처드 모건(Pritchard Morgan)은 국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감회를 피력했다. “이 가련한 젊은이는 극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결과에 크게 실망했으며 외교관으로서 그의 경력이 끝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음이 틀림없다.” 국은의 죽음을 애국심과 경력 단절이라는 개인적 요소가 복합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을사늑약 후 고종은 이제 외세에 의존한 독립이란 불가능해졌으며 의병과 같은 국민적 봉기만이 일본에 대항하는 길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에 반일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안으로 순국열사들에게 시호와 관직을 추서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국은은 이에 포함된다. 을사늑약 체결 9일 후인 11월 27일 고종은 용인 군수를 국은의 향리로 보내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내무부차관)으로 추서하면서 그의 고귀한 희생을 기렸다. 국은의 묘소는 오늘날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 있다.(2015.5.5. 그의 110주기 기일을 앞두고) 구대열 (具汏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06-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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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CHILDREN] 오감만족(五感滿足), 손주와 함께 즐기는 '서울 한의약 박물관'
- 최근 한 논문 분석 자료에서 ‘손주를 돌본 경험이 있는 할머니가 그렇지 않은 할머니보다 삶의 만족도가 더 높다’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들의 만족도 점수는 100점 만점에 61.07점으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도, 함께 지내는 손주도 매일 집에만 있긴 답답하고 좀이 쑤실 터. 지루한 일상, 하루쯤은 손주 손잡고 공짜 나들이 한번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공짜인데 뭐 볼 게 있겠나’라는 생각을 바꿔줄만한 곳이 있다. 시니어와 손주의 오감만족은 물론 친밀감까지 높여줄 서울 한의약 박물관을 소개한다. 청각: 시니어 도슨트가 들려주는 한의약의 역사와 문화 서울 한의약 박물관은 조선 초기 가난하고 병든 백성들을 돌보던 ‘보제원(普濟)’이 있던 유서 깊은 곳으로, 현재는 우리나라 최대의 한약 유통 중심지인 ‘서울 약령시’에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한의약 관련 유물과 약재가 전시된 이곳을 그저 눈으로 스윽 보기만 한다면 손주에게도 시니어에게도 시시한 관람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혹여 호기심 많은 손주가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내기라도 하는 날엔 온종일 진땀을 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 전시관에는 관람객을 위한 시니어 도슨트가 항시 대기하고 있으니 걱정 없다. 단 한 명의 관람객이 오더라도 동행하며 한의약의 역사부터 각종 유물과 약재 하나하나의 쓰임까지 자세하게 들려준다. 시각: 실물로 보는 500여 종의 한약재와 각종 전시물 식물성, 동물성, 광물성 등으로 구분된 500여 종의 한약재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다.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약재와 독성약재들을 비롯해 버섯, 인삼, 녹용 등도 따로 전시돼 있다. 국산약재와 수입산약재를 함께 두어 돋보기를 통해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각종 약재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 있는 360개의 경혈과 경락의 종류와 기능을 패널과 영상 등으로 소개하고, 한방차와 한방 음식 등에 사용된 약재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1960년대 한약방을 축소한 모형과 관련 영상을 통해 그때 당시 서울 약령시의 넉넉한 분위기와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후각: 직접 맡아보고 확인하는 향이 좋은 약재들 전시관 내에는 ‘향이 좋은 약재’를 따로 모아 직접 그 향을 맡아볼 수 있다. 일반인에게 친숙한 박하부터 자단향, 팔각회향, 고량강 등 깊은 향을 내는 약재들이 전시돼 있다. 한의약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약령시장을 거쳐 가면 입구에서부터 솔솔 풍기는 한약재 내음을 맡을 수 있어 그 향만으로도 보약 한 첩을 먹은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다. 촉각: 손주가 직접 만지고 체험해보는 한의약 일반 박물관에 가면 ‘만지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해 온몸이 근질근질한 손주에겐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이러한 아이들을 위해 한의약 박물관에는 어린이들이 직접 만져보고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어 재미를 더한다. 나무, 풀, 꽃, 동물 등에 설치된 패널을 열어보기도 하고, 동식물 모양을 새긴 패널 동판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색칠도 해가며 한약재 채집여행을 즐길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직접 한약재를 갈아보거나 약첩 싸기 등을 체험해보며 온몸으로 한의약을 익힐 수 있다. 관람을 마치고 방문기념 스탬프도 쾅쾅 찍어가면 소중한 추억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미각: 쉬어가며 맛보라, 한방문화쉼터 한의약 박물관에서는 관람객들을 위해 우리 몸에 좋은 한방차를 제공한다. 그날그날에 따라 칡차, 십전대보탕 등 다른 종류의 차를 준비한다. 맛좋은 차를 마시고 한방문화쉼터에서 잠시 쉬어가며손주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좋아하는 한방체험실 손자만 즐기고 가는 게 아닌가 하고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면 그냥 가지 말고 한방체험실에는 들러 가자. 사상체질 감별을 비롯해 현재 스트레스 지수와 피로도, 혈관 나이 등을 측정해 볼 수 있어 간단하면서도 재미있게 자신의 건강을 체크해 볼 수 있다. APG(가속도맥파·혈관검사), HRV(자율신경계균형검사·스트레스검사)등을 이용해 2~5분정도만 투자하면 스트레스 지수와 저항력, 평균 심박수와 심박안정도, 자율신경활성도, 말초혈관 유형과 혈관 나이 등에 대한 결과 값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나는 어떤 체질에 속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을 것이다. 궁금해만 하지 말고 간단하게 몇 가지 질문을 통해 체질을 알아보자. 더 정확한 결과를 원한다면 시간을 조금 투자해 사상체질분류검사(ASCC-병원용)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체질을 알아보고 난 후엔 자신의 체질에 대한 설명과 조언이 담겨있는 결과지도 챙길 것. 혈압측정기가 있는 박물관이 또 어디에 있을까. 주기적으로 혈압을 측정해오지 않았다면 기왕 방문한 김에 혈압도 체크해보고 그 결과도 꼼꼼하게 기억해 두자. 서울약령시 한의약박물관 문의안내: 02-3293-4900~3 (http://museum.ddm.go.kr)
- 2014-07-3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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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설문] 5060에게 묻다. "2030, 이럴 때 정말 밥 맛 떨어진다."
- 거침없이 달려왔다. 윗사람에게 치이고 아랫사람에게 쫓겨 여기까지 왔다. 뒤는 돌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앞만 보면서. 황혼에 문턱에 서 있을 즈음. 많은 것이 변했다. 젊은이들은 우리들과 등을 지려하는 것 같다. 심지어 거침없는 언행으로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이제는 밥이 보약인 나이다. 잘 먹고 힘내야 하는데 2030세대가 5060세대 밥맛을 떨어뜨리게 할 때가 있다. 밥 좀 맛있게 먹고 싶은데 2030세대 때문에 그럴 수 없는 5060세대 250명에게 물었다. ‘2030세대 이럴 때 정말 밥 맛 떨어진다’다. 가장 밥 맛 떨어질 때는 언제일까. 100명 중 36.5명이 이 항목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예의 없게 굴 때’다. 장유유서 사상이 깊게 뿌리내려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예의’는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로 해석된다. 또한 스마트폰과 인터넷 등을 통한 미디어 환경의 발달로 2030세대의 예의 없는 언행이 전해지면서 이 같은 결과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많은 응답은 ‘자신들만의 방식과 새로운 것만을 고집할 때’(34.3%)다. 이는 인생 선배로서 경험한 것을 공유하고 싶지만 그것을 듣지 않으려는 2030세대의 세태에 대한 5060세대의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풀이된다. “과거의 관습이나 관행이 모두 케케묵은 것은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5060세대도 20.3%나 됐다.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고 이끌어 온 장본인으로서 현재의 5060세대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관습이나 관행이 한국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 5060세대가 이 항목에 체크를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밖에 ‘나이만 들었다고 무시할 때’(5.9%)가 뒤를 이었다. 2030세대에 대한 5060세대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2014-06-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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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시도자 자살률, 일반인에 25배…주된 원인은 우울증
-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자살로 사망할 확률이 일반인보다 2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는 1일 자살사망자 통계와 자살시도자에 대한 면접 조사, 자살 사망자 심리적 부검, 대국민 자살인식조사 등을 토대로 한 자살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2007~2011년 자살시도로 응급실을 찾은 8848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이같은 대규모 실태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07∼2011년 자살을 시도해 응급실을 찾은 8848명 가운데 2012년 말 기준으로 실제 자살한 사람은 236명으로, 연간 10만명 당 약 700명의 자살률을 보였다. 이 수치는 일반 인구의 자살사망률인 10만명 당 28.1명에 비해 25배 가까이 높았다. 특히 남성 자살 사망자의 절반이 자살 시도 7개월 이내에 자살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60대 이상인 중ㆍ장년층의 자살률도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지난해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은 자살 시도자 1359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담을 실시한 결과, 이들 가운데 37.9%는 자살 시도의 이유로 '우울감 등 정신과적 증상'을 꼽았다. 이어 '대인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31.2%를 차지했으며, '경제적 문제'(10.1%), '고독'(7.1%), '신체 질병'(5.7%) 등이 뒤를 이었다. 이번 실태 조사에는 72건의 자살 사망에 대해 유가족의 심층 면담과 유서 분석 등을 통한 '심리적 부검'도 실시됐다. 복지부는 심리적 부검을 통해 자살에 이르는 유형을 △급성 스트레스 유형 △만성 스트레스 유형 △적극적 자해·자살시도 표현 유형 △정신과적 문제 유형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특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연령대별 징후도 분석했다. 20대 이하의 경우 SNS에 자살을 암시하는 관련 문구나 사진을 올리고, 30∼40대는 음주가 심해지며 점차 인관관계 단절의 양상을 보였다. 또 50∼60대의 경우는 자식들에게 '어머니(아버지)를 잘 모시라'는 당부의 말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안용민 서울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노년층의 경우에는 사회적 시스템의 간단한 개입만으로도 자살을 막아 낼 수 있다"며 "주변 사람들가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자살사망자 심리적 부검 확대 △자살예방 생명지킴이 양성 확대 △통합적 자살고위험군 지원체계 구축 △생명존중문화 조성 캠페인 등의 자살예방 대책을 올해 실시할 예정이다. 아울러 자살수단에 대한 접근성을 차단하고 국민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는 내용 등이 포함된 정부 차원의 중장기 자살예방종합대책을 올해 안에 수립한다는 방침이다.
- 2014-04-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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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가 불러온 비극… 사회적 안전망 구축 시급
- 남양주 ‘재산 기부’ 유서 남기고 모녀 동반자살 고양에선 생활고 시달리던 부자 극단적 선택 서울 세 모녀 이어 도내서도… 사회안전망 시급 경기도내에서 치매 노인을 모시던 효심깊은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 세상을 등지는 동반자살 사건이 잇따르면서 치매노인 가정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지난달 서울 송파에서 발생한 세 모녀 동반자살로 이른바 ‘세 모녀법’까지 발의되며 복지사각지대 해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치매 문제도 법률적ㆍ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30일 보건복지부 조사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노인인구가 500만명에서 580만명으로 17% 증가했으며 같은기간 치매노인은 26.4% 증가해 2012년 기준으로 이미 54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우리나라 치매인구는 20년마다 두배씩 늘어 2020년에는 80만명을, 2050년에는 270만명을 넘는 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하거나 인지저하증을 겪는 노인을 수발하는 가정들의 대비는 부실하기만 한 상황으로 생활고까지 더해지면서 동반 자살 등 극단적인 결과까지 발생해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지난 29일 낮 12시50분께 고양시 일산서구의 한 모텔에서는 70대 노인과 4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자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7년 동안 돌봐온 A씨(48)와 그의 아버지(75)로, 이들 곁에는 재만 남은 번개탄과 유서가 발견됐다. 경찰 조사 결과, 사업을 하던 A씨는 아버지가 7년 전 치매 증상을 보여 병원에서 5년 간 생활했지만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사업까지 실패하며 생활고에 시달리자 2년 전부터 아버지를 직접 간호하며 살았던 효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함께 지난 27일 오후 7시20분께 남양주시 별내동의 한 아파트에서는 P씨(55ㆍ여)와 어머니 L씨(90)가 숨진 채 발견됐다. P씨로부터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받은 친오빠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원은 안방 화장실 앞에 쓰러진 L씨와 화장실 안에서 목을 맨 상태인 P씨를 발견했다. 유서에서 L씨는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 P씨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써달라’고 쓴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조사 결과, L씨는 최근 뇌경색 증상으로 일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치매 초기 판정을 받고 퇴원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숨진 P씨는 약사 출신으로 결혼도 미룬 채 간병인을 두지 않고 줄곧 뇌경색 등의 지병을 가진 노모를 보살폈던 효녀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배기수 경기도의료원장은 “치매 환자 문제는 부부간은 물론 부모와 자식간, 형제간에 갈등을 촉발해 가정파탄까지 이를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며 “정부도 7월부터 경증치매노인에 대해 노인장기요양보험 혜택을 주는 등 나서고 있지만 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홍석 심평원 수원지원장은 “인천만해도 시립으로 운영하는 치매전문병원이 있지만 아직 경기도에는 없는 상황”이라며 “민간 요양병원들이 있지만 치매노인을 전담하기에는 병원마다 차이가 있는 만큼 정부나 지자체의 좀더 깊은 관심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경기일보 이명관ㆍ하지은기자 mklee@kyeonggi.com
- 2014-03-3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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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리 찾기1부-대한민국 시니어들의 자화상]③외국에서도 걱정하는 처량한 한국의 노인
- #지난해 9월, 부산에서 간암 판정을 받은 노인 A(71)씨가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는 간암 초기 단계로 수술을 받으면 생존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자식에게 수술비 등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유서에는 “못난 부모를 만나서 평생 고생이 많았다. 몸이 너무 아파 못 견뎌 먼저 간다. 내가 수술을 하면 너희들에게 부담이다. 모두 돈 때문이 아니겠냐”고 쓰여 있었다. 한국 노인들의 삶이 참 처량하다. 지난 날 국가와 사회발전의 주역으로 이리저리 뛰었지만 돌아온 것은 아픈 몸과 빈곤, 주위의 싸늘한 시선뿐이다. 1960~1970년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들의 절박함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선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다. 노인들의 빈약한 생활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통계청이 지난해 말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3’에 따르면 2012년 노인가구(가구주 65세 이상)의 상대빈곤율은 49.3%였다. 상대빈곤율은 전체 가구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득을 거두고 있는 가구의 비율을 의미한다. 전체 노인가구 중 절반이 빈곤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전체 가구의 상대빈곤율은 2006년 13.8%에서 2012년에는 14.0%로 제자리걸음을 했지만 같은 기간 노인가구의 상대빈곤율은 46.0%에서 49.3%로 3.3%포인트나 상승했다. 외국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노인가구의 궁핍함은 두드러진다. 2010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국의 노인가구 상대빈곤율 평균은 12.8%에 불과했다. 한국의 노인가구 상대빈곤율은 47.2%로 33개국 중 가장 높았다. 노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 ‘추락’ B씨의 사례에서 보듯 예전과는 달리 자녀들도 노인에 큰 힘이 되지 않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노인가구 중 자녀와 동거하는 비율은 1990년 75.3%에서 2010년 30.8%로 급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 노인 1인가구 비율은 10.6%에서 34.3%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경제적으로 빈곤한데다 가족들과도 멀어지면서 노인의 삶의 만족도는 낮게 나타났다. 현재 생활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를 ‘매우 만족’부터 ‘매우 불만족’까지 5점 만점으로 조사해 평균을 낸 결과 60대는 2.89로 전체 평균 3.14보다 크게 낮았다. 10대가 3.52로 가장 높았고 20대 3.26, 30대 3.25, 40대 3.16, 50대 3.06로 연령이 높을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노인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이목희 의원이 발표한 ‘국내 자살률 및 노인 자살률 현황’에 따르면 2001년 1448명이었던 노인자살자 수는 2008년 3561명, 2012년 4023명으로 급증했다. 2008~2012년까지 노인자살자 수는 2만439명으로 하루 평균 11명의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내자살률 대비 노인자살률은 2배에 달했다. 2009년 국내자살률은 41.23명, 그 중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은 85.95명으로 국내자살률 보다 노인자살률이 2배 이상 높았다. 이는 OECD 국가 평균 노인 자살률 20.9명보다도 4배가량 높은 세계 1위의 수치다. 외국에서도 걱정하는 한국 노인들 우리나라의 우울한 노인들의 삶을 두고 외국에서 먼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1월에는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에서는 고성장을 이룬 이들이 가난 속에 살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사회안전망을 제때 구축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지난 2월에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도 한국 노인의 빈곤율과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이쯤 되니 노인복지에 인색한 우리나의 정책이 치솟는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의 원인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빈곤율 완화를 위한 노인복지지출과 정책과제’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노인복지 지출 비중은 1.7%로 OECD 평균(6.8%)의 4분의1에 불과하다. 멕시코(1.1%) 덕분에 다행히 꼴지를 면했지만 노인에 대한 낮은 복지지출이 결국 높은 노인자살률로 이어지는 것이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아졌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경제적인 이유도 크지만 그보다는 사회와의 단절이 더욱 큰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김현정 대한자살예방협회 대외협력위원장(국립중앙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장)은 “자식이나 이웃 등 사회적 유대관계가 끊기면서 노인들은 자신의 효용성이 떨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자식과의 관계가 좋은 노인은 자살을 안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노인이 한번 자살을 결심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예방이 중요하다”며 “생산성이 떨어지면 쓸모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문제다. 노인이 우리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14-03-1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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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황정순 유서공개, "한 푼도 줄수 없다…배신감 느껴" VS 의붓아들 상속다툼 "치매앓았다"
- 故 황정순 유서 공개됐다. 10일 MBC '리얼스토리 눈'은 지난 3일에 이어 황정순의 죽음 이후 벌어지고 있는 상속자들의 갈등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날 고인이 된 황정순의 조카딸 황 모씨가 공개한 친필 유언장에는 "많은 지원을 했지만 너희들은 늙은 나를 전혀 돌보지 않고 평생 용돈 한번 준 적이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황정순의 유서에는 "지금까지 나를 희생해 너희들을 뒷바라지 한 걸로도 충분하니 내 재산을 한 푼도 상속할 수 없다. 고작 1년에 두세 번 식사 대접한 게 전부이니 배신감과 함께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며 의붓아들에 서운한 속내를 드러냈다. 이 유서에 대해 의붓아들은 "오랫동안 치매를 앓아왔다"며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표현했다. 앞서 종합편성채널 MBN은 지난달 27일 고 황정순의 유서를 공개한바 있다. 공개된 유언장에는 도장과 지장이 찍혀 있다. 황정순 유서를 접한 네티즌들은 "황정순 유서, 정말 안타깝다" "황정순 유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황정순 유서, 재산싸움 그만했으면" "황정순 유서, 상속금이 얼마길래 그리 난리인가"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 2014-03-1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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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명암 '생텍쥐페리家'
- 어린 시절 생텍쥐페리에게 영감을 준 것은 저택에 있던 할아버지의 서재였다. 생텍쥐페리는 친할아버지 페르낭 백작의 집에서도 생활하게 된다. 할아버지의 저택에는 수많은 장서가 있었다. 어린 생텍쥐페리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천문학에 관한 책들이었다. 생텍쥐페리는 할아버지 서재의 영향으로 훗날 할아버지 페르낭 백작을 ‘어린왕자’에서 여섯 번째 행성에 살며 아주 커다란 책을 쓰고 있는 지리학자로 등장시킨다. 어머니 마리 드 퐁소콜롱브는 음악가 집안 출신이었는데 음악과 미술, 시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녀가 그린 파스텔 그림은 지금도 리옹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어머니는 직접 생업에 종사하며 2남3녀의 자녀를 지극한 사랑으로 키웠다. 어머니는 밤이면 아이들에게 안데르센 동화를 읽어주었는데 아이들은 즉흥 연출을 하며 놀기도 했다. 시를 좋아한 생텍쥐페리는 어머니가 준 보들레르의 시집을 읽고 그 느낌을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처럼 생텍쥐페리의 어머니는 큰아들인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는데, 그 결과 생텍쥐페리는 아주 제멋대로인 소년으로 성장했다. 호기심이 왕성한 소년이었지만 응석받이로 키웠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몇 번이나 전학을 다녔다. 성채에서 왕자처럼 자라 남과 어울리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 책을 읽고 상상의 세계에 빠지면서 아이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학교 기숙사 심지어 군대에 있을 때도 툭하면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돈을 부쳐 달라고 요구했다. 어머니는 평생 생텍쥐페리의 뒤치다꺼리를 했다. “길을 들인다는 것이 뭐야?” 어린 왕자가 묻자 여우가 대답한다. “서로에게 관계가 생긴다는 거지.” 그런데 ‘어린왕자’를 통해 전 세계 수많은 독자를 길들여온 생텍쥐페리는 정작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만은 길들이지 못했다. 이 부부는 서로를 길들이지 못했다. 비행을 간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부인 콘슈엘로(재혼)와는 평생 불화를 겪었고 아이도 갖지 못했다. 아이를 좋아했던 생텍쥐페리는 “나는 임신한 여인을 좋아하고 젖 먹이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천년 넘게 이어온 유서 깊은 가문은 불행한 그의 결혼생활로 아쉽게도 막을 내렸다. “우리는 마음으로 봐야만 잘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생텍쥐페리의 이 말처럼 결혼생활이야말로 ‘마음’으로 봐야만 잘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어야 할 조언 중 장차 결혼을 하면 아내와 화목한 결혼생활과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도 들려주어야 한다. 좋은 사람, 특히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안목을 갖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가끔 아들에게 공부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거라고 말해주곤 한다. 생텍쥐페리 가문은 막을 내렸지만 ‘어린왕자’는 영원히 살아 있다.
- 2014-02-12 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