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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변으로 알 수 있는 나의 건강
- 나이가 들면 몸이 점차 약화된다. 한의학에서는 입이 얼마나 마르는지, 소변을 얼마나 자주 보는지를 통해 노화의 징후를 살핀다. 이외 노안이 오고, 새벽잠이 없어지고, 주름, 흰머리, 검버섯 등이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증상들 가운데 입이 마르고 소변이 잦은 상태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변강쇠가 오줌발이 센 이유는 방광에 소변을 오래 많이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광에 소변이 조금만 차도 소변이 마렵다면 오줌발이 셀 수가 없다. 양방에서는 소변이 잦으면 전립선이 비대해졌다고 표현한다. 전립선은 날렵해야 한다. 비대하면 기능이 떨어진다. 방광 속에는 오줌을 저장하는 물탱크가 있다. 이 물탱크의 수도꼭지를 열면 소변이 나온다. 그런데 아랫배, 단전의 힘이 약해지면 수도꼭지가 헐거워지고 방광막의 탄력이 떨어진다. 방광막의 탄력이 떨어지면 물탱크에 소변이 얼마 차지 않았는데도 소변이 새어나가거나 참기 힘들어 소변을 자주 보게 된다. 이때는 오줌발도 당연히 약하다. 반대로 단전의 힘이 강하면 수도꼭지가 단단하게 잠겨 있고 방광막의 탄력이 좋다. 물탱크에 오줌도 많이 저장할 수 있어 오줌발이 강하다. 나이가 들면서 입이 잘 마르는 증상은 방광과 관련이 있다. 소변으로 진액이 새어나가 버려 입까지 올라와야 할 진액이 부족해 입이 마르는 것이다. 또 입이 마르면 소화력도 떨어진다. 소화는 입에서는 침의 작용, 위에서는 위산의 작용, 십이지장에서는 담즙과 췌장의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입이 자꾸 마른다는 것은 소화력도 그만큼 떨어졌다는 의미다. 입에 침이 많은 사람은 소화도 잘된다! 그러므로 시니어들은 방광을 잘 관리해줘야 한다. 오장에서는 폐와 콩팥이 소변과 관련이 있는데 폐가 특히 중요하다. 폐와 방광은 형제 같은 존재다. 인간의 몸에서는 열이 발생하는 데, 건강을 위해서는 이 열을 식히는 것이 중요하다. 한의학에서는 병(病)의 원인 중 하나가 열[丙, 火]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폐는 공랭식으로 방광은 수냉식으로 열을 내린다. 방광의 기능이 떨어졌을 때 폐 기능을 강화하면 방광은 여유를 찾는다. 그리고 흉식호흡이든 복식호흡이든 호흡이 깊어지면 복부의 코어(core) 근육이 단단해진다. 코어 근육은 척추를 바르게 할 뿐 아니라 방광막, 괄약근에도 힘을 준다. 폐호흡이 좋아지면 소변이 잦고 참지 못하는 증상도 호전된다. 단전호흡을 할 때 혀를 입천장에 대면 침이 고이는데, 이는 몸의 진액을 잘 갈무리해서 침-소변 기능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소나무에 등을 부딪치면 척추와 폐를 자극해 호흡을 좋게 한다. 허리와 어깨를 펴고 코로 적당히 들이쉬고, 입으로 많이 내쉬는 호흡도 폐와 방광을 좋게 해준다. 요가, 단전호흡을 하면 더욱 좋다. 콩팥 또는 단전도 방광과 관련이 많다. 정력 좋은 사람은 오줌발도 강하다. 콩팥, 단전이 약해지면 소변이 약해지고 자주 보게 되므로 이럴 때는 성생활을 주의해야 하며 아랫배에 핫팩을 하거나 뜸을 떠주면 좋다. 관원이나 곡골이라는 혈자리에 직구를 뜨면 소변을 참지 못하는 증상에 좋다. 에는 다음 4가지의 음식이 방광 속 물탱크의 수도꼭지를 단단하게 잠가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째, 약간 시큼한 음식이다. 시큼한 맛은 끝 맛이 달면서 입에 침이 고이는 맛이다. 오미자, 남자에게 좋은 산수유, 요강을 뒤집을 정도로 오줌발이 강해진다는 복분자, 무릎을 튼튼하게 해주는 쇠무릎 등은 시큼한 맛으로 방광 속 물탱크의 수도꼭지를 단단하게 잠가준다. 음식에 간을 할 때 흑초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 유산균도 좋다. 여름철에 먹는 보신탕은 개고기와 부추가 궁합을 자랑하는데, 둘 다 약간 시큼한 맛으로 단전을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에 소변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을 때 먹으면 도움이 된다. 둘째, 후끈한 맛을 내는 음식이다. 후끈한 맛은 아랫배와 단전을 따뜻하게 해준다. 단전의 양기가 강해지면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수도꼭지를 단단하게 잠글 수 있다. 부추의 씨앗은 소변이 잦거나 밤에 자기도 모르게 이불에 소변을 보는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 생마늘을 먹으면 맵고 속이 아리지만, 군마늘을 먹으면 아랫배의 단전이 따뜻해진다. 보신탕 역시 먹고 나면 몸이 후끈해진다. 속이 차갑고 평소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에게 좋다. 셋째, 견과류다. 호두, 연자육, 은행, 잣, 밤 등 딱딱한 견과류는 구멍을 단단하게 틀어막는 효과가 있는데 겨울에 땀구멍을 막아 추위를 이기게 해준다. 그래서 정월에 부럼을 먹는다. 방광 속 물탱크의 수도꼭지도 틀어막아줘 노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단 견과류를 먹을 때는 먹기 직전에 껍질을 까서 먹는 것이 좋다. 견과류의 지질이 공기 중에 오래 노출될 경우 산화되어 몸에 해롭기 때문이다. 곡식 중에서는 좁쌀이 견과류와 같은 효과가 있다. 넷째, 쫄깃쫄깃한 음식이다. 에서는 돼지 오줌보를 추천한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어 축구를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돼지 오줌보는 워낙 탄력이 좋아 축구공처럼 발로 차도 잘 터지지 않는다. 탱탱한 돼지 방광막은 허약해진 방광막을 탱탱하게 해준다. 양이나 염소의 오줌보도 좋다. 쫄깃쫄깃한 닭똥집과 닭 내장도 잦은 소변에 도움이 된다. 탄력성이 좋은 양, 염소, 돼지의 밥통(위)도 좋다. 이것들은 고단백 저콜레스테롤 식품이라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 2017-08-2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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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방생활사 전문가 허운홍’ 낭만주부 나방 엄마로 허물 벗고 빛을 보다
- 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 2017-07-0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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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시월과 나누다] 정동골2
-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입구쯤에서 내 중년의 한 시절을 보낸 탓에 정동은 길 하나 사이의 낯익은 동네다. 하지만 살기에 바빠 막상 정동을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화여고와는 인연이 깊다. 이화여고를 다닌 큰 딸이 전체 1등을 해서 조회시간에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운동화가 구멍이 나서 친구 신발과 바꿔 신고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시절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과외는 커녕 워크맨 하나도 못 사주다가 고 3이 되어서야 청계천에서 중고를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전하게 자라 주었다. 어느덧 자라 중년이 된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살피는 착한 딸이어서 고마울 뿐이다. 정동 맞은편 신문로는 80-90 년대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대로 자주 교통이 통제되곤 했다. 큰 아이는 늘 교정을 울리는 시위행렬의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외침이 익숙해서인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학년부터 시위에 참여한 일이 비일 비재했다. 때로는 경찰의 곤봉을 피해 같은 과 동료 선배들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숨어드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아이가 벌써 중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오늘, 나는 다른 지역에 살지만 때마침 유관순 기념관 탐방 기회를 얻어 이화의 교정에 첫발을 딛는다. 물오른 바람이 마중 나와 초여름의 풋풋함을 한 아름 안겨준 유월의 오후였다. 유관순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하게 얽인 생각의 밑바닥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울렁거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16세의 어린 유관순이 왜 그렇게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냐고 질책 한 것 같아 발걸음이 주춤, 온 몸에 열이 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삼일 운동의 시위대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며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여섯 명으로 조직한 시위결사대와 함께 담장을 넘기로 했단다. 교장 프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말렸지만 그들의 의지는 너무 확고해서 기어이 담을 넘고 말았다. 그 후부터 3.1운동 진원지의 핵이 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거 참여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 감리교 신자가 되어 향리에 홍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유관순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와 같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들의 총검에 아버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고 오빠도 투옥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화학당의 담장을 넘은 후 토막 난 시신으로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느 제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면 나도 담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본다. 실은 지금도 문화식민지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펴 놓고 걷어 올릴 기회만을 기다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유관순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남아 있었다. 어린 그녀가 식민지란 오욕을 두드려 빨아 헹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박두진의 시를 음미해 본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터져 솟아나는 ,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짖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는 , 순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펄럭임을 알았다. -박두진의 “3월 1일 하늘” 전문 *의사와 열사의 구분 총이나 칼등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안중근 같은 분을 의사라 하고 맨손으로 싸웠던 유관순을 열사라 한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편집 위원 저서로는 시집 이 있다.
- 2017-06-2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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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귀어촌에 성공한 은행나무민박낚시 문영석 대표
-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사랑받는 안면도. 그곳의 국도를 따라 들어가다 꽃지해수욕장을 지나면 대야도마을이라는 작은 어촌마을이 나온다. 30가구 안팎의 작은 마을인 이곳에서 도시생활을 마치고 성공적으로 고향에 정착한 문영석(文榮錫·61)씨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웃마을 처녀와 결혼한 토박이 중 토박이었다. 당연히 평생을 바다와 함께하고 이곳에서 뼈를 묻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변수를 가져온 것은 엉뚱하게도 서해안 일대의 지형을 바꾼 간척사업이었다. “1980년대 초 천수만 간척사업이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양식한 김을 일본으로 수출해 풍요로웠는데, 간척으로 한순간에 터전이 날아가버렸어요. 그래서 가족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했죠.” 서울에선 택시를 몰았다. 워낙 친절하고 싹싹한 천성 덕분에 금세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가 있었다. 연로한 어머니도 눈에 밟혔다. 결국 귀향을 결정한 것도 어머니의 병환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귀어촌을 결정하고 나서는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했어요. 평소에 낚시도 좋아하고 고향에서 경험도 있어 낚시어선을 운영해보자고 생각했죠. 손님 입장에서 느낀 점을 토대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기 시작했어요. 해기사 자격증도 취득했고, 아내는 요리사 자격증도 땄죠.” 어머니가 사시던 고향이고, 옛 동무들도 있었지만, 처음에 내려왔을 땐 그 역시 주민들 입장에선 도시민이고 타인이었다. “첨엔 서먹서먹했죠. 아무리 제 생각이 올바르고 정확하다고 해도, 살아온 사람들의 습관이나 정서를 바꾸긴 어려웠어요. 같이 살아가려면 제가 적응해야 했죠. 주민들에겐 삶의 터전인데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진 않았겠죠.” 문씨는 귀어·귀촌을 통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자신의 장점을 마을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지인들이 갖는 장점이 있잖아요. 상대적으로 젊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행정적 업무에 강점을 보인다든가, 정부 사업 도입에 힘이 될 수도 있고요. 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요즘에는 저희를 거쳐 간 관광객들에게 대야도마을의 싱싱한 수산물을 파는 일을 하고 있어요. 택배를 통해 소량으로 판매되는 것이지만 작은 힘이라도 마을을 위해 쓸 수 있고, 또 손님들에게도 좋은 일이니까요.” 그가 스스로 평가하는 귀어·귀촌 성공 비결은 틈새 공략과 철저한 사전준비다. “바다낚시체험과 숙박, 식사를 모두 해결해주는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아요. SNS를 통한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은 주민들과의 경쟁이 아닌 상생의 구조죠.” 그는 귀어·귀촌을 준비하는 이들은 자신의 재력과 체력에 맞는 적정 규모의 사업을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기본적인 체력의 뒷받침이 없는 너무 큰 규모의 사업은 지치게 만들어요. 또 수익이 작으면 재미가 없죠. 그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해요. 이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배우자도 힘들어하고, 하루하루가 도시생활보다 더 고될 수 있어요. 자신의 소질에 맞게 업종을 잘 선택해서 수입도 올리면, 부부간 대화도 많아지고 행복한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 2017-06-1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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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 자산가’ 백승우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 "재능보다 꾸준히 하다 성취하는 과정에서 삶에 긍정적 변화가 찾아와"
- 나이가 들수록 더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백승우(白承雨·59)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것 같은 백 상무는 자신만의 시간관리로 호텔리어, 사진가, 교수, 궁궐문화역사 해설가, 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즐겁게 하고 있다. 최근 클래식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고 싶다며 취미로 콘트라베이스를 배우고 있으며 그에 더해 오디오 수집에도 도전 중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활동이 단순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 프로의 경지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 그가 취미의 고수로 삶의 활력을 얻고 있는 비결을 들어보자. 백승우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취미’라고 부르자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지난 2016년 7월 파리 ‘La Capital Gallery’ 초청의 사진전 에서 그의 전 작품이 솔드아웃됐다. 뿐만 아니라 2017년 4월에 파리 샹젤리제 ‘The Gallery Boa’ 초청으로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이, 11월에는 ‘La Capital Gallery’ 특별 초청으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도저히 취미라고 할 수 없는 완전한 프로 작가. 전시할 때마다 작품이 매진될 정도로 그것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원숙한 작가의 모습이다. 파리 ‘The Gallery Boa’ 초청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 “파리 샹젤리제나 뉴욕에 초대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죠. 지난번 전시에서 18점을 전시했는데 첫날에 모두 솔드아웃됐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탑 갤러리에서 초청 전시가 열리고 있는 중이죠.” 그는 이미 2009년에 ‘The Window 시리즈’를 강남의 일반 상업 갤러리에서 전시한 바 있으며 그때도 대규모로 판매가 이뤄졌다고 한다. 당시 작품은 포스코와 호텔 등지에서 주로 구매가 이뤄졌다고. 그렇다면 사진으로 얻는 수익도 꽤 되겠다 싶어 물었더니 그는 손사래를 쳤다. “다음 작품 준비하고 카메라 살 정도 들어와요. 제가 기자재비가 많이 들어가는 편이라. 이번 전시는 프랑스 쪽 은행과 정부 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10여 년에 걸친 사진 프로젝트들 진행 중 프로 작가답게 그는 사진 작품의 제작을 특정한 테마를 잡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The Window 시리즈’를 10년, ‘My Korea’ 시리즈를 12년 동안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The Window 시리즈를 하면서 두세 가지 전시를 준비 중에 있어요. 당장 6월부터는 유럽의 아트 퍼니처(예술과 가구 디자인을 접목한 개념으로 예술적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가미된 일상 속 가구) 작가와 제 작품을 컬래버한 전시가 1년 동안 잡혀 있습니다. 제 작품의 테마는 나무가 될 거예요.” 그의 말에는 유난히 힘과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제대로 한국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에 12년 동안 진행한 ‘My Korea’ 사진 작업은 같은 제목의 책 로 정리되어 그에게 작가라는 직함을 하나 더 달아줬다. 텍스트가 모두 영어인 이 책은 반응이 좋아 속편을 발행하기로 했다. 책을 쓰는 작가로서의 성과 또한 성실히 거두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다. 일하는 데서 작품의 소재 찾아 사진작가 외 백 상무의 다채로운 취미활동들을 살펴보자. 그는 교수이기도 하다. 본업인 호텔리어로서의 역량은 대학원과 석·박사 과정에서 호텔경영학과 경제학 등을 가르치는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또 궁궐문화역사 해설가이기도 하다. 문화재에 관한 사진을 찍으려면 알아야 할 지식이기도 했거니와, 가장 큰 문제는 일반인의 신분으로서는 문화재를 마음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그럼 내가 문화재청 해설가를 하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1년에 걸친 공부 끝에 그는 해설가 자격증을 땄다. 그의 사진 작품 세계가 더욱 점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활동은 철저히 호텔리어로서의 본업을 지키면서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일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찾는 게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전혀 어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저는 일하는 데서 사진을 찍을 소재를 찾아요. 그러니까 백 퍼센트 호텔이 배경이죠. 출장 가서 남는 시간에 촬영을 하는 거예요. 주말에 일부러 어딘가를 가서 찍은 적은 없어요. 직장에서 일하는데 시간이 어딨어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하라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은퇴를 맞이하면서 동시에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는 그의 성공에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법. 그는 자신의 성공이 결코 운이 따라줘서 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투자해야 했던 시간과 노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은퇴하면 모두 해외여행을 떠나요. 갔다 와서 돈이 떨어지면 자전거 타고 색소폰 불고 산에 가 있어요. 이게 (은퇴 후 삶의) 다예요. 그 세 가지를 하다가 그것들마저 안 되면 근처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죠. 그러다 몸이 아프면 집에 있게 되고 가족들과 싸우게 돼요. 결과적으론 남들이 입어본 옷이 멋있으니까 자신도 입어보는데 자기한테 맞지 않는 거죠. 왜 그런가 하면 준비를 안 해서 그래요.” 그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인 준비를 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도 타보고 교육도 받고 사진도 찍고 등산도 하고…. 다양한 걸 하면서 실패를 겪어야 합니다. 실패하다 보면 그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게 걸리게 돼 있어요. 저도 사진을 좋아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동료였던 일본인 아다치씨가 나보고 일만 한다고 취미를 가지라면서 저에게 카메라를 줬어요. 그러면서 시작된 거죠.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적어도 10년은 투자해야 고수가 된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맞는 게 걸리면 그것에 10년은 투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래야 은퇴할 때가 되면 남을 가르치면서 즐기는 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돈만 많이 쓴다는 게 그의 일침이다. “40대 넘어가면 앞으로 20년은 짧아요. 저는 2007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어요. 그게 10년 전이죠. 그때부터 했으니까 이제 파리에서 전시도 하는 거지 갑자기 파리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는 또한 취미를 익히는 노하우로 전문가를 꼽았다. 자신은 뭔가를 한다고 하면 최고의 고수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사진을 배울 때는 진동선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는 나중에 함께 미학 논문을 쓸 정도로 발전하게 됐다. 최고의 전문가에게 배워라 그가 최근에 열중하고 있는 취미 중 하나는 오디오다. 마치 사진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그는 그냥 시작하면 안 될 거 같아 오디오 책으로 유명한 파워 블로거이자 건축가인 박준씨에게 메일을 보내 오디오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수라고 불리는 오디오 파일(오디오 마니아를 가리키는 말)들과 3년을 함께 다녔다. 또한 클래식을 배우기 위해 음대 교수들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 결과 이제는 오디오를 들으면 오디오 너머의 악기 위치가 보인다고 한다. 듣는 게 아니라 음악이 보인다고. 그가 요즘 배우고 있는 콘트라베이스도 전문가를 찾는 그의 취미 철학이 적용된 경우다. “전주에 사진에 관해 5년간 강의할 일이 있었어요. 그때 그룹 중에 한 명이 정형외과 의사였는데 기타를 칠 줄 알았죠. 그가 제게 콘트라베이스가 잘 어울리고 잘할 것 같다고 추천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2년을 고민하다가 바로 악기를 샀죠. 지금 2년 반째 독일 마인츠 국립교향악단 단원에게 개인지도를 받고 있어요. 어려워요(웃음).” 최고의 고수를 만나 학습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고수를 만난다고 해도 노하우 전수가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고수를 만나면 무엇보다도 정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에티튜드가 중요해요. 배우는 일에 있어선 학생이 되어야 하는 거죠. 스승이 나보다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공부로 거듭난 제2의 인생 무엇을 해도 주저하지 않고 정직하게 접근하는 그에게 그렇게 공부하고 배우는 취미의 ‘참맛’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사람은 40대, 50대가 되면 가족, 회사, 미래에 대한 불만이 쌓이죠. 그런데 그것을 작품에 쏟으면 나도 행복해지고 주변도 행복해져요. 저는 평생 카메라를 잡아본 일이 없었어요. 오디오를 들은 일도 없죠. 클래식도 배운 일 없어요. 제가 한 일은 평생 회계학과 호텔경영밖에 없었어요. 그것 외에는 가진 게 없었던 거죠. 그런데 해보니까, 그리고 제대로 공부를 하니까 굉장히 재밌어져요.” 그는 보람이 단순한 감정의 승화를 넘어서 직업 수준으로까지 발전한 몇 안 되는 케이스다. 그래서 그의 도전이 이룬 성과는 그 희귀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 결과, 그의 미래는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보다 훨씬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퇴임 후요? 강의는 계속할 거 같고, 펀드 컨설턴트를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격주로 궁궐 해설을 하고 사진 작업도 해야죠. 책도 써야 하고 오디오 수집도 해야 하고. 콘트라베이스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정도로는 해야겠고. 바빠요(웃음).”
- 2017-04-1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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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한 은퇴] 친도(親道)를 아시나요?
- 해가 어스름해지기 시작하자 연신 동네 어귀를 쳐다보는 노부부. 이제나저제나 읍내에 나간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늦은 시간인데도 아들이 안 오면 부모는 슬슬 동구 밖으로 마중을 나간다. 멀리서 희끗희끗 보이는 물체가 아들인가 하고 좀 더 높은 곳이나 나무 등걸 위에 올라가 굽어보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산골 혹은 시골에서 장이 서는 날이면 있음직한 장면으로 부모들의 애틋한 마음이 잘 느껴진다. 이 같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한자가 바로 부모 ‘친(親)’이다. 親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설 입(立) 밑에 나무 목(木)이 있고 그 옆에 볼 견(見)이 붙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는 듯한 한자다. 요즘엔 설이나 추석 명절에 오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이 그런 마음일 것이다. 명절을 쇠러 가는 차들이 한꺼번에 밀려 도로가 엄청 막히는데다 눈이나 비까지 오기라도 하면 자식들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장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마음도 급하다. 자신을 기다릴 부모님이 생각나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니나 다를까 동네 어귀에서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인다. 아들은 “아이고,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하며 지게를 내려 “다리도 아프실 텐데 이 지게 타고 가시지요” 한다. 지게가 없다면 업고라도 갈 태세다. 이런 장면을 보는 듯한 한자가 바로 ‘효(孝)’다. 아들[子]이 늙은[耂] 어머니(아버지)를 업은 듯한 글자다. 의미도 잘 갖다 붙인다고 하겠지만 필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한자 어원 풀이에 나오는 해석이다. 모든 도덕규범의 기초인 ‘효’ 효도(孝道)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 또는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뜻으로 표현돼 있다. 한마디로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라는 의미다. 효도를 대부분 유교적 도리라고 말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규범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가족을 넘어 사회(공동체)와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무언(無言)의 규범이자 사회적 합의라 할 수 있다. 효도를 근간으로 행복한 가족이 이뤄지고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사회에 나가 열심히 소득 및 소비활동을 함으로써 지역 공동체는 물론 국가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효가 모든 도덕규범의 기초를 형성해왔다.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 하나. 효도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의미하는 한자라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도리를 뜻하는 한자어는 없을까?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뜻을 가진 한자어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식을 낳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 도리를 지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한자어는 물론 순우리말에도 없을 거라는 게 주변의 해석이다. 그래서 필자가 한번 만들어봤다. ‘친도(親道)’. 글자 그대로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도리를 뜻한다. 부모의 도리도 생각해야 할 시대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집집마다 걱정거리가 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돌팔매를 맞을지도 모르지만 연세 많은 조부모 또는 부모가 오래 사시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가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경제적으로도 자식들에게 큰 짐이 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뭐랄 게 없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병도 하나둘 늘어나고 정신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 수년간 지속되고 있다고 해보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연세 많은 노인들은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전에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치매라도 걸려 정신마저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최근 지방 중소도시는 물론 서울 강남의 대로변에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것이 요양병원이고 요양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집이 일터이자 병원이었다. 가족 중에 누구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돌아가며 돌봤다. 하지만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집과 일터, 병원이 분리되고 조부모와 부모, 자녀들이 따로 살게 되면서 누가 아프면 보통 일이 아니다. 병이 길어지면 가족관계가 파탄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파산에 이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누구나 처음엔 내 부모인데 하면서 달려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돈과 정(情)은 떨어지고 갈등이 커진다. 하지만 누굴 탓할 것인가. 불효하고 싶은 자식은 없을 것이다. 기왕이면 남부럽지 않게 효도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살아야 하고, 내 자식부터 챙기게 된다. 늙은 부모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뭘까. 나이가 들수록 각자 스스로 부모의 도리, 즉 친도(親道)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예상보다 오래 살 경우에 대비해 의료비를 포함한 생활비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회생 불가능한 병에 걸리거나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치매 등에 걸렸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는 재산이 있다면 어떻게 증여 또는 상속할 것인가 등등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어설픈 기대는 자식에게 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이것이 오늘날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어려움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제나라의 경공이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이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의미다. 아울러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정치가 잘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군군신신(君君臣臣)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핵심이고, 부부자자(父父子子)는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핵심이다. 평균수명이 70세 정도일 때는 은퇴 후 10여 년 더 살다 가면 되니까 자식이나 다른 가족들한테 큰 짐을 지울 일이 없었다. 이제 평균수명이 80세, 90세를 넘은 100세 시대에는 수신제가로서의 ‘부부자자(父父子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좋든 싫든 친도는 100세 시대에서 생겨난 시대적 요청이다. 부부자자(父父子子)는 곧 ‘친친효효(親親孝孝)’, 즉 부모가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자식이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자식에게만 효도를 바랄 것이 아니라 부모의 도리도 함께 생각해야 할 시대다.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7-02-2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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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후원의 단풍나무
- 창덕궁 후원에 부용지라는 연못이 있다. 거기 갈 때마다 흐뭇한 추억에 잠긴다. 연못가에 큰 단풍나무가 한 그루 있다. 거기 올라가 찍은 사진이 필자 인생에서 큰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1972년 대학교 사진반에서 활동할 때의 일이다. 창덕궁 후원에서 전국의 프로 아마추어가 모두 참가하는 ‘전국 사진 촬영대회’가 있었다. 필자의 집에서는 필자가 사진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 사진을 찍을만한 카메라도 없었다. ‘미놀타 하이매틱’이라는 2안리플렉스 카메라로 기념사진이나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술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주제를 제외한 배경은 흐리게 찍히게 하는 아웃 포커스 효과가 있는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필수였다. 후배가 일안리플렉스 니콘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필름을 한 통 사주고 절반씩 찍기로 했다. 오전에는 광선 조건이 안 좋기 때문에 오후 측광이 들어 올 때까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측광이 되는 오후 4시쯤 되자 후배의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연못가로 갔다. 마침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여인들이 있어 피사체로 잡았다. 한복도 아름답고 춤추는 모습은 더 아름다웠다. 사진은 물에 비친 모습이 있으면 더 아름답다. 이것을 모두 한 커트로 잡아 셔터를 눌렀는데 3장에서 멈췄다. 그 당시 필름은 100피트 필름을 암실에서 20장으로 잘라 파는 형식이었는데 간혹 자투리에 걸리면 그런 일이 있었다. 후배는 정확히 먼저 10장만 찍었다. 인화를 해보니 단 3장의 사진이었지만, 왠지 큰일을 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유명 상업사진가로 이름을 떨치던 고문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술만 마시다가 겨우 3장밖에 못 찍었다는 것에 대해 큰 질책을 당했다. 사진 예술을 대하는 자세가 불량하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자신 있게 내 보인 사진도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느껴져 일단 사진을 대회 주최 측에 필자 임의대로 접수시켰다. 고문 선생님도 당연히 여러 작품을 접수시켰다. 심사 발표 며칠 전 다른 촬영대회 입상작을 전시한 사진전시회에 갔었다. 그때 대상작이 필자가 찍은 사진과 거의 유사했다. 장소와 모델, 그리고 화면 구성이 거의 비슷해서 놀랐다. 드디어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필자 작품이 당당히 입상한 것이다. 고문 선생님은 여러 작품을 냈는데 한 편도 입상을 못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입장이 ‘청출어람’이라 하기에는 난처했다. 이 작품은 1979년 미국은행(Bank of America) 재직 중에 다시 한 번 큰일을 냈다. 당시 미국은행 본사에서 월간으로 사내보가 나왔다. 전 세계 미국은행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진 콘테스트가 있어 이 작품으로 응모했다. 꿈에 내 작품이 표지사진에 실린 것이 보였다. 출근하자마자 지점장이 불러 갔더니 잡지 표지사진에 내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이었다. 꿈과 현실이 딱 맞은 것이 처음이다. 이 일로 당시 사내 결혼을 목표로 연애 중이던 아내가 처가에 알리고 장인어른이 필자에게 당시 50만원을 주며 카메라를 사도록 했다. 그 돈으로 니콘 FM을 샀다. 꿈에 그리던 일안리플렉스 카메라를 갖게 된 것이다.
- 2017-02-0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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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의 김장날 풍경
- 둘째 동생이 우체국에 예금을 많이 한 VIP 고객이라 한다. 요즘 시중 은행의 저축예금 금리가 바닥을 기고 있는데 그중 우체국은 금리가 더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왜 우체국에 예금을 하느냐고 했더니 나라에서 하는 금융기관이라 금리는 낮지만 믿을 수 있어 그냥 맡기고 있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높은 이자를 주는 제2금융권까지 찾는 필자와는 다르게 느긋하다. 그런데 이번에 신나는 일이 생겼다. 우체국에서 일 년에 한 번 김장철에 우수고객을 초청해 김치 투어를 하는데 동생이 초청된 것이다. 다른 사람 한 명과 동반해서 갈 수 있는 이벤트였다. 또 충청도 진천에 있는 식품회사에서 김장 체험을 한 뒤 자기가 만든 김치 10kg을 선물로 받아온다고 하니 은근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둘째 동생이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뛸 듯이 기뻤고 이 정도면 올해 김장은 안 해도 될 것이어서 신이 났다. 요즘은 김장철이라 해도 각 가정에서 김치를 많이 담지는 않는다. 소규모 가구 증가와 주거 양식이나 생활 방식의 변화로 김장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고, 한겨울에도 마트에 가면 배추를 살 수 있고 김치냉장고의 등장으로 언제든 만들어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김장 문화는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그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된 자랑스러운 문화다. 필자도 김장철이 되면 아예 안 할 수는 없어 대여섯 포기 정도만 담근다. 누가 김장 몇 포기 했냐고 물으면 슬쩍 민망해지는 양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11월이 되면 각 가정마다 김장을 하는 일이 대행사였다. 그 양도 100포기 또는 200포기 등 어마어마했다. 또 배추를 보통 4쪽으로 갈라서 소금에 절이기 때문에 그 수가 엄청났다. 김장철만 되면 필자가 살던 정릉의 마당 넓은 집은 분주했다. 약간 비탈진 언덕 위에 있던 필자의 집으로 시장에서 엄마가 고른 배추를 배추 장수 아저씨가 리어카로 서너 번 왔다 갔다 하며 날라다 주었다. 그러면 대문간부터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뒤란 수돗가로 옮기는 건 우리 식구 몫이었다. 아버지와 엄마, 우리 딸 셋이 총동원되었다. 김장은 꼬박 이틀이 걸렸는데 배추를 절일 때부터 윗집 꼭지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도와줬다. 커다란 함지에 맛있게 생긴 노란 속이 보이는 배추를 네 쪽으로 갈라 하룻밤 절이고 깨끗이 씻어 넓은 대나무 채반에 엎어 물기를 빼고 산더미처럼 썰어놓은 무채에 젓국과 고춧가루, 마늘, 파, 갓, 각종 양념을 섞어 새빨갛고 걸쭉한 배춧속을 만들었다. 김장하는 날 필자 엄마는 김장보다는 쌀밥과 쇠고기뭇국, 돼지고기 수육을 만드느라 바빴다. 몇백 쪽이나 되는 김치와 동치미까지 다 만들고 나면 모두들 둘러앉아 엄마가 끓인 고깃국에 밥을 말고 노란 배춧속에 빨간 양념과 돼지고기 수육을 얹어 싸 먹으며 왁자지껄 수다판도 벌였다. 솜씨 좋은 동네 아주머니들이었으므로 우리 딸들은 그저 심부름이나 하면 충분했다. 김장독은 마당 한쪽에 묻었다. 서너 개의 김장독은 한겨울 동안 땅속에 묻혀 요즘의 김치냉장고 맛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맛있는 김치를 먹게 해줬다. 그 시절 장독 속에서 갓 꺼낸 김치와 동치미의 맛은 어디에서 찾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특히 추운 아침 바가지를 들고 나가 살얼음 헤치고 떠온 동치미 국물은 사이다의 탄산의 짜릿한 맛보다 더 시원했는데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건 장독 위를 덮은 새끼줄로 꼬아 만든 예쁜 덮개다. 솜씨 좋은 아버지가 만드신 고깔 모양의 짚 덮개는 눈, 비로부터 장독을 보호해주기도 했지만, 그 모양이 참 예뻤다. 예전엔 이렇게 한겨울 반양식이라는 김장을 축제처럼 치렀는데 이제 그런 풍습은 사라져버렸다. 요즘에 아무리 성능 좋은 김치냉장고가 있다 한들 그 시절 땅속에 묻혔던 김치 맛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 마당 넓은 집에서 벌어지던 김장 잔치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동생과 함께 다녀 온 김치 축제는 즐거웠고 김치 맛도 정말 좋았다. 한 사람당 노란 속이 꽉 찬 배추 9쪽이 배당되었고 이미 만들어놓은 양념을 넣어서 김치를 만들었다. 다들 자신이 가져갈 김치라서 그런지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집으로 배송까지 해준다 해서 필자는 편하게 앉아 맛있는 김치를 맛보게 되었다. TV를 켜니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줄 김치를 대량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모습에 옛날 왁자지껄 떠들며 김장을 하던 날이 떠올라 아련해진 가슴으로 추억에 잠겨봤다.
- 2016-12-0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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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과 건강] 겨울철 음식으로 챙기는 건강관리
- 어릴 때부터 늘 궁금했다. 정월 대보름에는 왜 단단한 부럼을 먹는 것일까? 동지에는 왜 팥죽을 먹을까? “메밀묵 사려~ 찹쌀떡!”은 왜 겨울에만 들리고 여름에는 안 들리는 걸까? 겨울은 만물이 얼어붙는 시기다. 식물의 지상부는 시들고, 곰은 동면에 들어간다. 한의학에서는 겨울 3개월을 폐장(閉藏)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피부를 닫고[閉], 속으로는 열과 에너지를 저장[藏]하는 시기라는 의미다. 사람 역시 웅크리고, 살찌며, 피부는 두터워지고, 따뜻한 집 안으로 숨는다. 겉으로는 찬 공기와 많이 접하기 때문에 수족 냉증이 잘 생기고, 찬 바람에 감기, 폐렴, 중이염, 비염이 많이 생기며 피부가 많이 건조해진다. 속으로는 열이 몰리면서 중풍, 심장마비, 심근경색, 협심증 등 심혈관계 질환이 많이 발생한다. 겨울철에 적합한 음식은 찰진 음식, 따뜻한 음식, 견과류 첫째로 추운 북쪽에서 자라는 곡식(찹쌀, 찰기장, 밀, 메밀 등)은 찰기가 있다. 이런 찰기를 이용해서 면, 빵, 묵, 떡을 만들어 먹는다. 이러한 찰기는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면, 빵, 묵, 떡을 먹고 속이 뭉쳐 체하는 부작용도 있지만, 피부를 뭉치고 두텁게 해서 추위에 대비하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메밀묵 사려~ 찹쌀떡!”이라는 외침은 겨울철에만 들리는 것이다. 동지 팥죽에 새알이 들어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메밀의 원산지는 바이칼 호, 히말라야, 동북아 등 아주 추운 지역이다. 메밀을 원료로 해서 만드는 메밀국수(소바), 냉면, 막국수는 원래 추운 지역의 겨울 음식이다. 이 음식들이 피부를 틀어막아 추위를 견디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면도 함흥냉면, 평양냉면 등 북쪽 겨울 음식이 유명하다. 일본의 소바도 북알프스, 중앙알프스, 동계올림픽으로 유명한 나가노 현의 추운 고산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겨울철에 피부가 두꺼워진 상태에서 옷을 두껍게 입고 뜨거운 음식만 계속 먹다 보면, 내부에 열이 몰려 심혈관계 질환이 발생하기 쉽다. 겨울철에 중풍이 가장 많이 발병하는 이유다. 메밀은 성질이 차가워서 겨울철에 뜨거워진 속의 열을 식혀준다. 겨울철에 가끔 메밀국수와 냉면, 막국수를 먹어주면, 밖으로는 피부를 틀어막아 추위를 이기게 해주면서, 속으로는 열을 식혀주고 기름진 음식으로 탁해진 피를 맑게 해준다. 메밀이야말로 겨울철에 꼭 필요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설날에 떡국을 먹듯 일본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에 소바를 먹는 풍습이 있는데, 떡국처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계절과 관련된 식문화가 비슷한 데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뭉친 음식을 먹으면 잘 체한다. 체할 때는 떡 한 조각, 빵 한 조각에도 체한다. 이런 음식을 먹을 때 체하는 것을 막으려면 팥이나 매운 식재료(생마늘, 생파, 생무, 고추, 차조기 등)를 같이 먹는 것이 좋다. 붕어빵, 동지팥죽, 찐빵, 타이야끼에 모두 팥이 들어가는 것도 밀가루의 독이 뭉쳐 체하게 하는 것을 풀기 위해서다. 팥은 강한 신맛이 있어 뭉친 것을 잘 풀어주고 녹인다. 팥의 붉은 색이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전염병을 예방해준다는 속설이 있어 동짓날 팥죽을 먹기도 한다. 둘째로 체온 보존을 위해 염소고기, 양고기, 보신탕 등 따뜻한 음식들을 많이 먹는다. 중국 북부와 몽골 사람들은 추위에 버티기 위해 양고기를 많이 먹는다. 부추도 속을 따뜻하게 해서 추위를 이기게 해주므로 자주 먹는 것이 좋다. 그래서 겨울에 많이 먹는 만두에는 항상 부추가 들어간다. 부추만두는 콘셉트가 참 좋다. 만두피로 피부를 두텁게 해서 추위를 막아주고, 부추로 속을 데워 추위를 이기게 하는 음식이다. 으슬으슬 추울 때는 생강차나 고추, 마늘 등 매운 음식이 도움이 되지만, 장복하는 것은 좋지 않다. 에는 겨울에 생강, 마늘, 파를 많이 먹으면 봄에 간과 눈이 나빠지고 흰머리가 나며 수명이 짧아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면해야 할 겨울에 매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 땀구멍을 열게 하고 정액, 피를 땀으로 내보내면 봄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다. 보약 먹을 때 파, 마늘, 무를 먹지 말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셋째로 견과류의 딱딱한 껍질은 내부의 엑기스는 꽁꽁 응집시켜놓고 외부의 세균, 바이러스 등 이물질은 완전히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정월 대보름에 견과류를 먹는 것은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다. ① 딱딱한 견과류는 정액, 진액을 갈무리하고 기침을 멎게 한다. ② 피를 맑게 해 겨울철에 자주 발병하는 중풍, 심장마비, 심근경색, 협심증 등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한다. 피가 맑아지면 부스럼 등 피부 질환도 예방할 수 있다. ③ 이빨은 뼈의 일종인데, 뼈 중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뼈에 자극을 주면 뼈가 더 단단해지고, 뼈가 단단해지면 기력과 면역력이 높아지고 장수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기공법에서는 이빨을 서로 부딪치게 하는 고치법(叩齒法)을 자주 실천한다. 딱딱한 부럼을 직접 이빨로 깨서 먹는 것은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겨울에는 연자육, 밤, 호두, 은행, 잣, 아몬드, 피스타치오를 먹어주면 좋다. 그런데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내열이 생길 수 있으므로 적당히 먹어야 한다. 하루에 한 주먹 정도의 분량이면 적당하다. 겨울철은 꽁꽁 얼어붙는 계절이므로, 갈무리를 잘해야 한다. 땀을 많이 흘리는 것도 좋지 않으며, 멀리 나다니는 것도 좋지 않다. 태양의 운행에 맞춰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좋다. 새벽에 찬 공기를 맞으며 운동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외면하고 늦게 자고 무리하게 일하곤 한다. 이렇게 겨울을 보내면 봄에 춘곤증이 심해진다. 겨울에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봄에 ‘spring’처럼 튀어 오르지 못한다. 겨울에 너무 따뜻하게만 지내는 것도 여름철 냉방병만큼 좋지 않다. 몸이 추웠다 더웠다 하면서 면역력, 적응력이 높아지는 것인데, 겨울에 춥다고 더운 방에서만 생활하면 면역력, 적응력이 떨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밖에 나가 찬 바람을 맞으면 금방 감기에 걸린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2016-11-2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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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귀티나는 촌사람)] 노년의 부부는가급적 산골 외딴집에 살아야
- 글 박원식 소설가 대전에서 은행원으로 살았던 홍성규씨(75)가 명퇴 뒤 귀촌을 서둘렀던 건 도시생활에 멀미를 느껴서다. 그는 술과 향락이 있는 도회의 풍습에 착실히 부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지럽고 진부한 일상의 난리블루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돼 있는 게 삶이라는 행사이지 않던가. 그러나 문득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색을 하고 화드득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 찾아오는 법. 홍성규씨는 그렇게 소스라치듯 자신과 독대한 뒤 곧바로 산골로 들어가기로 했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반백년 이상을 살았던 도시생활을 일거에 청산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금강이 굽이치는 산발치에 터를 잡은 홍씨는 아내 박명자씨(70)의 손을 슬며시 잡아 유혹처럼 이끌었다. 처음에 아내의 반응은 미미하다 못해 썰렁했다. 난 싫소, 당신 혼자 잘해보시구려! 강과 산이 얼싸안고 춤을 추는 경관이야 기차게 삼삼했지만, 스러져가는 폐가와 길길이 웃자란 잡초들만 무성한 묵정밭으로 이루어진 터전에 아내는 초장부터 정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뱀이 대가리를 쳐들고 튀어나올 것처럼 뒤숭숭한 쑥대밭 앞에서 단박에 우아한 감흥을 느낄 여자란 세상에 없다. 홍성규씨는 기함을 치고 앵돌아진 아내를 거듭 꼬드겨 답사를 반복했다. 마침내 부부는 귀촌에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드나드는 사이, 아내 역시 외진 호젓함과 빼어난 풍치에 마음을 열었던 것. 20여 년 전, 귀촌의 시동은 그렇게 걸렸다. 풍경을 볼까. 산과 강이 긴박한 교제를 한다. 산은 제 늠름한 하체를 강에 들이밀었고, 강은 수줍은 듯 살포시 온몸으로 산을 받아들인다. 이 소리 없는 통정과 협연을 관람하는 건 능선마루에 늘어서서 관음증에 취한 수목들이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후끈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염탐하겠다는 양, 수면 위 허공으로는 연신 물새들이 선회한다. 밤이면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겠지. 달빛은 요요히 쏟아져 산을 흘러 강물로 스며들겠지. 홍성규씨는 시를 짓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을 게다. 알아주는 이가 많은 수묵 화가인 아내에게도 역시 이하동문이렷다. 풍경이 수려하다지만 풍경만 뜯어먹고 살 수 없는 게 생활이라는 난적이다. 유유히 음풍농월을 즐기며 참하게 찻잔이나 기울이면 그만일 것 같지만, 철따라 피고 지는 꽃들의 마술에서 시를 건져 올리고 그림을 길어 올리면 그만일 성싶지만, 그러나 널리 알려졌듯이 삶이란 고달픈 나그네 길이라서 고난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홍성규씨 내외는 거하게 손에 움켜쥔 것도 없는 채로 산골에 입장했다. 산골이 주는 고립감과 권태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리라. 홍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가령,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데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귀촌하면 안 됩니다. 정서가 맞질 않으니까. 그 무엇보다, 그저 편안하게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시골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싹 비우고 갖가지 고생을 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산골의 적막이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부부도 초기엔 생각이 마구 왔다 갔다 했어요. 마치 향수처럼 도시 생각을 하곤 했는데, 우리가 지금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고 사나? 하는 회의가 없지 않았어요. 3년쯤 지나고 나자 비로소 만족감이 찾아듭디다.” 강물에 자동차가 떠내려가기도 “강철 같은 기세로 올라오는 풀들을 해치우는 일은 거의 전쟁이라죠? 선생의 거처 면적은 자그마치 2000평이에요. 이 너른 터를 간수하는 일부터가 벅차겠어요. 노년에 적당히 살기로는 터를 작게 잡을수록 이상적이라는 충고들이 많던데, 이건 믿을 만한 정보일까요?” “연로한 분들의 경우엔 무리해서 너른 터를 잡지 말아야겠죠. 하지만 300평 이상은 돼야 뭐든 마음먹은 대로 활개를 쳐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온갖 노동과 정성을 쏟아야 기반이 잡히는 게 산골 살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둘러보고 거참 근사하다고들 하지만, 구석구석 비지땀을 쏟은 현장이라는 걸 알진 못해요. 물론 시골에서의 건강한 노동은 커다란 성취감을 줍니다. 모든 주변 사물과 정들게 되고요.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들듯이….” “과도한 노동으로 골병이 들거나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저 돌담장은 3년에 걸쳐 쌓았어요. 돌담을 쌓다 보니 재미가 생겨 봄가을로 열심히 돌을 주워다 쌓아올린 것인데 3년이나 걸렸어요. 그 와중에 병을 얻기도 했지만, 햐, 완성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좋던지…. 마치 영화 한 편을 만든 감독처럼 신나더라고요. 골병은 피해야겠지만, 하나하나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크기에 시골살이를 애호할 수밖에 없어요.” 강의 이름은 올목강이다. 강굽이 형세가 오리의 목을 닮아 ‘올목강’이라 부른다. 이 강엔 교각이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부어 납작하게 가설한 잠수교가 걸려 있다. 이 옹색한 다리나마 없었던 시절엔 배로 강을 건넜다. 폭우가 쏟아지면 잠수교는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갇힐 수밖에. 장마철이나 봄가을의 폭우 때는 여러 날씩 외부와 고립된다. “별안간 고립될 가능성에 대비해 음식이나 가축 사료를 늘 충분히 비축해둡니다. 한번은 새벽에 잠이 깨어 나가보니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아예 싯누런 바다로 변했더라고요(웃음). 세상에 물 구경, 불 구경처럼 신나는 게 없다지만 기가 막힙디다. 우당탕탕 굽이치는 물살에 아름드리 통나무며, 컨테이너 박스며, 자동차며, 뭐든 막 떠내려가더라고요. 그 난리 통에 강 저편에 세워뒀던 우리 승용차도 떠내려갔어요. 졸지에 차를 잃어버렸지만, 차보다 정말 아까웠던 건 마당의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했던 집사람의 그림이었어요. 모조리 물에 잠겨버렸죠.” 아내 박명자씨는 그림 그리기를 밥 먹듯이 해온 인물이다. 무채색 먹의 농담(濃淡)으로 사물을 표현한다. 세필을 활용한 정교한 사생보다 일필휘지, 대담하고 호방한 작풍을 구사한다. 그림만 봐서는 여자의 작품이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활달하고 후련하다. 남편의 눈에는 이런 아내의 작품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이다. 그런 판국에 수해를 입어 그림들이 모두 물속 용궁 나들이를 했으니 상심이 컸을 게다. 수려한 강변에 사는 가혹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런 변을 겪을 때면 귀촌이 후회될 성싶지만, 아서라, 홍씨는 수해이든 수난이든 자연의 형제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한 자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수련이거나 단련의 계기로 받아넘기는 낌새다. 정든 오누이처럼 홍성규씨는 이라는 시집을 낸 바가 있다. 염염한 로맨틱이 비치는 제목이지만, 그의 적성은 자연과 사교하는 쪽으로 사뭇 발육했다. 이를테면 그는, 산골에서 꽃향기가 천지간에 가득하면 황홀해져 춤추고 싶어 하고, 비바람에 갈피없이 흔들리는 꽃들의 비통한 몸부림에도 섬세하게 가슴이 닿아 시적 충동을 느끼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일찍이 세간에 횡행하는 욕망이나 허영은 대충 놔버렸기에 간소하게 먹고도 뿌듯하게 자족하는 생리가 몸에 익었다. “시골에선 도시에 비할 때 생활비 지출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습디다. 한 달에 150만원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을 지경이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70만원 남짓으로도 까딱없어요.” “텃밭에 키우는 작물들로 충분히 자급자족이 되겠죠? 닭들은 마구 알을 낳을 테고.” “불필요한 외출을 즐거이 자제하며 살기 때문에, 거처 내부에서 사는 재미를 쏠쏠히 느끼기에,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죠. 승용차 대신 작은 트럭을 굴려 유지비를 절감하고, 가끔 먼 곳을 여행할 경우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검소한 살림을 운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역시나 돈 문제로 충돌하게 마련인 동물입디다. 때론 아내와 토닥거리기도 하는데 그게 주로 금전 문제 때문이었어요. 끙.” “금전의 여유가 있으면 덜 싸우게 될까요?” “부자들은 돈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디까(웃음)?” “도무지 싸우지 않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어엿하게 살 수 없는 게 원래 인간일까요?” “저 고고한 하늘에도 가끔은 번개가 치지 않나요?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산다는 건 맹물 마시고 술 취하려는 것처럼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충돌과 마찰 속에서 부부 사이가 더 단단해지는 법이거든요. 우리 내외가 말이죠, 도시에 살 때는 불행하게도 부부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툭하면 밖으로 나돌아 다녔고, 아내는 아내대로 스케치니 전시회니 하면서 며칠씩 나가 살고 그랬거든요. 모든 시간을 같이 붙어살게 된 귀촌 이후엔 싹 달라졌어요. 자못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부부싸움을 전개해서 진정한 친선을 도모하게 되었으니까요. 이거 쾌거 아닌가요(웃음)?” “앗! 부부싸움도 창의적 예술이라는 말씀?” “집식구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뭐 제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뜻이죠. 대충대충 사는 저에 비해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꼼꼼한 여자라는 점도 아주 매력이죠. 그러나 단점이라면 예민하다는 점이에요. 전엔 송곳이었다면 지금은 부지깽이처럼 좀 무뎌졌지만, 아무튼 이런 아내에게 제가 그림 비평을 인정사정없이 해대곤 했어요. 그러니 다툼이 없었을 리가. 오해는 마시라. 다툼의 날들은 이젠 추억의 잔영으로 남았을 뿐이니까(웃음).” 느티나무를 맨손으로 뽑을 천하장사가 있던가. 불화와 앙앙불락이 없는 부부가 있던가. 홍성규씨의 언설은 자주 아내와의 역사를 술회하는 쪽으로 번진다. 20년 세월을 산골에 살며 그는 자연과 교감하는 도락을 만끽해왔다. 일상의 근로로, 절간의 중들이 비운 발우와도 같은 허심(虛心)의 내공으로, 또는 우슬(牛膝, 일명 쇠물팍)이니 쇠비름 같은 산야초를 장복한 건강생활로, 그는 인생의 저물녘을 훈훈하게 통과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한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아내라는 고백을 차마 참지 못하고 토설한다. “아내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을 때면 대통령에게 표창장을 받은 것보다 기쁩디다. 그런 아내가 강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한지…. 노년의 부부란 말이죠, 가급적 산골 외딴집에 살아야 합니다.” 졸혼(卒婚)이라는 요상한 잠정적 결탁이 예찬되기도 하는 이 부박한 세상. 그러나 강변에 사는 내외는 정든 오누이처럼 단란하게 어깨를 겯고 산골의 나날을 동행한다. 이는 아마도, 귀촌이 아니었다면 도달하기 어려운 비경이렷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6-10-27 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