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송시월과 나누다] 정동골2

기사입력 2017-06-29 10:22 기사수정 2017-06-29 10:22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입구쯤에서 내 중년의 한 시절을 보낸 탓에 정동은 길 하나 사이의 낯익은 동네다. 하지만 살기에 바빠 막상 정동을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화여고와는 인연이 깊다. 이화여고를 다닌 큰 딸이 전체 1등을 해서 조회시간에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운동화가 구멍이 나서 친구 신발과 바꿔 신고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시절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과외는 커녕 워크맨 하나도 못 사주다가 고 3이 되어서야 청계천에서 중고를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전하게 자라 주었다. 어느덧 자라 중년이 된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살피는 착한 딸이어서 고마울 뿐이다.

정동 맞은편 신문로는 80-90 년대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대로 자주 교통이 통제되곤 했다. 큰 아이는 늘 교정을 울리는 시위행렬의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외침이 익숙해서인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학년부터 시위에 참여한 일이 비일 비재했다. 때로는 경찰의 곤봉을 피해 같은 과 동료 선배들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숨어드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아이가 벌써 중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오늘, 나는 다른 지역에 살지만 때마침 유관순 기념관 탐방 기회를 얻어 이화의 교정에 첫발을 딛는다. 물오른 바람이 마중 나와 초여름의 풋풋함을 한 아름 안겨준 유월의 오후였다. 유관순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하게 얽인 생각의 밑바닥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울렁거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16세의 어린 유관순이 왜 그렇게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냐고 질책 한 것 같아 발걸음이 주춤, 온 몸에 열이 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삼일 운동의 시위대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며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여섯 명으로 조직한 시위결사대와 함께 담장을 넘기로 했단다. 교장 프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말렸지만 그들의 의지는 너무 확고해서 기어이 담을 넘고 말았다. 그 후부터 3.1운동 진원지의 핵이 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거 참여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 감리교 신자가 되어 향리에 홍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유관순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와 같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들의 총검에 아버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고 오빠도 투옥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화학당의 담장을 넘은 후 토막 난 시신으로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느 제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면 나도 담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본다. 실은 지금도 문화식민지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펴 놓고 걷어 올릴 기회만을 기다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유관순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남아 있었다. 어린 그녀가 식민지란 오욕을 두드려 빨아 헹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박두진의 시를 음미해 본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터져 솟아나는 ,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짖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는 ,

순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펄럭임을 알았다.

-박두진의 “3월 1일 하늘” 전문

*의사와 열사의 구분

총이나 칼등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안중근 같은 분을 의사라 하고

맨손으로 싸웠던 유관순을 열사라 한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계간 <시향> 편집 위원

저서로는 시집 <12시간의 성장>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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