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재미있게 읽는 는 사실상 라는 소설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전문가들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소설 는 황건적 난에 만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로 결의를 하는 데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그리고 이들 세 명은 그야말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이 결의를 지켜낸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오(吳)-촉(蜀) 동맹을 어기고 오나라가 형주를 지키던 관우를 공격해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장비는 연일 폭음을 하고 부하들을 두들겨 팼다. 급기야 장비까지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이에 대노(大怒)한 유비는 제갈공명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대패한 후 백마성(白馬城)에서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들 세 사람의 의형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출발점인 ‘도원결의(桃園結義)’는 과연 사실일까?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려면 먼저 삼국시대 역사서인 정사(正史) 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사 에는 도원결의가 나올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먼저 촉서(蜀書) 관우전(關羽傳)을 보면, “선주(先主, 유비)는 관우, 장비와 잠을 잘 때도 같은 침대에서 자는 등 서로 아끼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다. 관우, 장비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는 선주 뒤에 시립해 하루 종일 있었으며, 선주를 따라 천하를 다니며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나온 ‘은약형제(恩若兄弟)’라는 단어에서 나중에 나관중이 ‘도원결의’를 상상해낸 듯한데 실제 관계는 위에서 보듯 형제라기보다는 군신관계로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또한 촉서 관우전의 다른 부분에는 서주를 잃고 관우가 붙잡혔을 때 조조가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통해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겠냐고 관우의 의중을 떠보자 관우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공(曹公)이 베푼 극진한 은혜를 잘 아오. 하지만 나는 유 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서 함께 죽기로 맹서했고, 그러므로 그를 배신할 수 없소.” 즉 관우는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서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라고 말할 뿐, 의형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한편 위서(魏書) 유엽전(劉曄傳)에도 이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관우가 오(吳)에 의해 피살된 후 위문제 조비(曹丕)가 여러 신하들에게 과연 유비가 병사를 일으켜 오를 칠 것인가, 관우를 위해 복수를 해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시중(侍中)인 유엽(劉曄)은 “유비와 관우는 의리상으로는 군신이나, 은혜상으로는 부자와 같습니다. 관우가 살해되었는데, 유비가 만일 그를 위해 복수해주지 않는다면, 관우의 은의에 대해 시종일관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관우와 유비는 의리상으로는 군신, 은혜상으로는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있을 뿐 의형제로는 묘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촉서(蜀書) 장비전(張飛傳)에도 “어릴 적부터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모셨는데, 관우의 나이가 몇 살 많아서 장비가 형 대접을 하였다”라는 표현만 나올 뿐, 형제관계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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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여행전문가 한비야씨의 7번째 책이다. 58년 개띠 여자이다. 그저 여행이 좋아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여행에 인생을 건 여자로 봤었다. 멀쩡하게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 대학 언론대학원에서 국제 홍보학 석사학위까지 받은 재원이다.
여행 책이 최근 관심 있게 손에 잡히는 이유가 필자도 앞으로는 여행을 제대로 해보고자 하는 버킷리스트 때문이다. 가 본 나라도 많지만, 아직은 안 가본 나라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안 가본 나라들을 꼭 가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세계지도를 놓고 볼 때 가보고 싶은 나라들이 아직 즐비하다. 그러나 직접 가 보고 싶은 나라는 아니지만, 관심은 많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간접 경험을 얻고 싶은 것이다.
지도를 보면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가 있다. 잘 사는 나라를 먼저 보고 싶은 것이다. 못 사는 나라는 시간과 돈을 들여가서 볼 것도 없고 불편하고 위험하다면 후회할 것 같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그런 위험하고 가난한 나라들이 더 많다.
한비야씨의 이 책은 직접 가보기도 어렵고 위험한 나라들이다. 국제 긴급 구호 요원으로 아프리카의 말라위, 잠비아,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중동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아시아의 네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북한을 다녀와서 쓴 글들이다. 현재 전쟁이나 내전 중이기도 하고 각종 전염병 등으로 위험한 지역들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의 만행도 참고할 만 하다. 단순한 여행으로는 다녀오기 어려운 나라들인데 긴급 구호요원으로 활동 한 덕분에 한비야씨의 생생한 현지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다. 시에라리온은 ‘사자의 산’이라는 뜻이고 평균 수명이 25세~35세로 인구 대비 난민이 절반, 신체장애자 수도 가장 많은 나라란다. 내전 중에 전 인구 5백만 명 중 1/5이 죽었단다. 이웃나라 라이베리아는 ‘자유의 땅’이라는 뜻이란다. 미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나라로 다이아몬드 자원 때문에 내전을 겪은 나라들이다. 반군들이 양민들의 팔다리를 잘라 장애자 수가 많다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프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절반이 끼니 걱정을 하고 산단다. 한 달에 2만원만 있어도 먹고 살 수가 있는데 그 돈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아이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던 오드리 헵번 같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하고 왜 존경받는지 알 것 같다.
‘한국의 자립은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보다 불가능한 일’이라던 우리가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 원조를 1990년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무려 13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아직 그 액수가 22억 달러로 은혜의 빚이 많다는 것이다. 국민 총소득의 0.06%, 일인당 한 달에 400원 정도를 원조금으로 내고 있어 나라의 경제 규모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모양이다. 원조 1위국 덴마크는 국민 총소득의 0.91%, 유엔 권장이 0.7%이며, 국민총소득이 우리보다 못한 그리스도 0.17%, 포르투갈도 0.25%나 된다는 것이다. OECD 평균치도 0.23%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앞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흔히 듣는 얘기로 우리나라도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멀리 외국에 까지 원조를 할 필요가 있느냐, 그런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원조를 받을 때도 원조를 주는 나라의 국민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의 힘은 약하지만, 이 운동이 활발해진다면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지난 6월 22일 남부터미널역 ‘팜스 앤 팜스’에서는 계간 문학잡지 제 13회 신인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 자리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의 회원인 손웅익씨가 수필가로 등단하는 자리였다.
필자는 한마디로 겉모습도 속마음도 잘난 남자들을 좋아한다. 지휘자 중 가장 좋아하는 불세출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외모 자체가 명품이다. 이에 버금가는 손 수필가님도 외모가 근사하다. 글은 그 사람이다. 그동안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올린 그의 글들이 정말 훌륭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철학자인듯 싶은데 예술가이고 사색가인 듯싶은데 수필가이다. 그의 글에는 철학자의 깊이가 있고 예술가의 향기가 배어있다. 내 평생의 변함없는 친구는 문학과 클래식음악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수많은 문장들, 글들을 접해봤던 필자가 판단하기에 손수필가님의 글은 애저녁에 기성 수필가의 필력이었다. 문학지 어디에 실려도 모자람이 없는 빼어난 문장력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요,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완전 반전이었다. 그의 글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고생하고는 거리가 먼 귀공자같은 그의 모습 뒤에 숨겨진 비밀을. 그가 청소년기에 어렵게 살았다는 것을. 혹독한 IMF시절을 겪어낸 과정을 읽는 중에는 그에 대한 안쓰러움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지고지순한 사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 사모님께 ‘깨갱’ 꼬리 내리고 살아야만 한다.
여차하면 사모님 입장에서는 다 죽어가는 사람을 겨우 살려 놓으니까 은혜도 모르고 큰소리친다고 할 것이다.
인재는 키우는 것이다. 봄날에 손 수필가님께 구체적으로 심사방법을 알려드리고 작품을 출품하실 것을 권유 드렸다. 이쁜 남자는 이쁜짓만 골라 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작품을 내었고 일사천리로 작품심사를 통과하여 오늘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서리풀 문학회는 서초문화원에서 신길우 교수님께 수필지도를 받고 있는 문하생들의 모임이다. 그 문하생들도 수강한지 몇 년이 되었어도 아직 등단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단 한 번의 심사에 통과된 것은 엄청난 실력자인 손수필가님이 일궈낸 쾌거였다. 그가 수필심사에 통과하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내 일같이 기뻤다.
그런데 그 순간 프랑스의 샹송가수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이 연상되는 건 뭐지? 에디뜨 삐아프는 어렸을 때의 극심한 영양실조로 실명할뻔 했고 키가 142센치밖에 안된다. 불우한 환경 속에 내팽개쳐졌던 에디뜨 삐아프는 갖은 고생 끝에 가수로 성공하였다. 이후 여러 명의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삐아프가 뼈아프게 키워낸 남자들은 성공한 후에는 하나같이 그녀 곁을 떠나갔다. ‘내가 소설과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ㅋㅋ’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의 관계는 애정이고 손 수필가님과 애란이는 우정이다.
등단 후 수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의 얘기에 나는 속으로 ‘앗싸라비아 너무 좋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필자는 그가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다.’ 큰의미를 두지 않는줄 알았던 것이다.
시상식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참석했고 ‘세컨드 같은 퍼스트’인 손 수필가의 애잔하고 어여쁜 사모님이 동석하였다. 맞다! 유유상종이다. 미남미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잘생긴 장남도 함께 하였다.
그의 수상작 과 은 사랑스러운 사모님과 얼마나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여러사람에게 입이 아프게 자랑하고 있다. 그는 부정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다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를.
겉모습도 영혼도 아름다운 손 수필가님의 곁에는 늘 행복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이 달아나다가도 멋진 그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다시 돌아올 테니까.
어린 시절 학교에서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며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카네이션을 만들어 가슴 한 쪽에 달아드리면 그게 효도라고 말입니다. 나머지 364일은 그저 철없는 자식이었습니다. 속없는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부모님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사는 형편이 어렵다 생각하시는 부모님은 당신의 무능력 때문에 자식까지 고생한다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자연히 부모님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끝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어느 날 부모님은 안 계셨습니다.
365일 중 하루 5월 8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하자는 날이었죠. 이시대의 젊은이들이 부모의 은혜를 방치하고 저버리고 있음을 방증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국가에서 어버이날을 지정하여 하루만이라도 그 은혜에 감사하자며 강제하고 나섰을까요?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풀어야 할 본질적인 과제로 ‘나이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천사였고 슈퍼맨이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후원자였습니다. 영원한 내편이었고 인생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보지 않은 부모님은 조금씩 병들어 갑니다. 마침내 몸져 누워 자리를 보전한 부모님은 더 이상 천사도 슈퍼맨도 후원자도 아닌 귀찮고 쓸데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제 부모는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아무 것도 혼자서 할 수 없고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생의 크나 큰 의미도 함께 깨닫게 됩니다.
기시미 이치로의 부모님에 대한 애정은 각별합니다. 20대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학업을 중단하며 간호해야 했고, 50대에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어머니 간호에 지칠 즈음 어머니는 위독해졌고 오래도록 곁에 있었지만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채 깨닫기 전에 아버지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치로는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스스로도 늙어 가면서 아버지의 노화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이든 부모님을 간병한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 이상 노령화에 대한 문제를 개인에게 전적으로 맡겨서는 곤란합니다.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지만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일은 대선일입니다. 많은 대통령 후보가 노령화에 대한 대비책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령화 문제를 국가에 떠넘기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수없이 노인요양 병원을 짓는다 해도 삶에 녹아 있는 가치를 찾지 않고는 모두가 헛될 뿐입니다. 기시미 이치로는 설파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몰라본다 해도 부모님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김혜자(76), 나문희(76), 고두심(66).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다양한 성격과 문양의 한국적 어머니를 연기해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은 명배우라는 점이다. 그리고 45~56년 동안 시청자와 관객을 만나온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라는 것도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최고의 연기력을 인증하는 연기대상 수상자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래서 대중과 전문가는 이들에게 ‘연기의 신’, ‘연기 9단’, ‘연기 거장’, ‘연기의 달인’이라는 수식어를 거침없이 부여하고, 후배 연기자들은 이들을 닮고 싶은 롤모델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김혜자, 나문희, 고두심은 ‘최고의 배우’라는 상징적 신화에 머물지 않고 여전히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통해 대중과 왕성하게 만나는 현재진행형의 최고 연기자다. 이들에게 연기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저서 에서 “신인은 몸을, 스타는 영혼을 보여준다”고 했다. 영혼을 보여주는 스타가 바로 김혜자다. 그녀의 연기에 혼이 담겨 있기에 그렇다. 드라마 의 일상성이 짙게 배어 있는 어머니에서부터 영화 에서의 강렬한 엄마에 이르기까지 일상성과 강렬함이 깃든 다양한 캐릭터를 오가며 시청자에게 영혼이 깃든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김혜자다. 이 때문에 작가 김정수는 김혜자를 가리켜 “연기 9단의 입신 경지”라고 표현했고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 연기는 접신 수준”이라는 찬사를 했다.
1962년 KBS 1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김혜자는 드라마 , , , 영화 , , 연극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통해 대중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했다. 천부적인 재능과 끼 그리고 후천적인 성실함과 노력으로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연기력을 보이는 스타로 우뚝 선 김혜자는 “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며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삶도 연기만큼 아름답고 치열하다. 스타로서의 명성과 영향력을 기부와 봉사 등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활용하며 의미 있는 삶을 일구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한 것은 없어요. 힘든 사람들의 손을 잡으면서 내 삶이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것을 배웠으니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이지요.” 연기자로 살면서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해 자녀들에게 늘 미안하지만, 자녀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항상 기도한다는 김혜자는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긍정적인 희망과 밝은 꿈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어머니다.
“누가 배우 나문희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배우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또 누가 인간 나문희를 말하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화면에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던 인간이라고요.”
에서부터 까지 수많은 드라마에서 나문희와 함께 작업한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말이다. 그렇다. 화면의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고 드라마와 영화, 연극 속에서 진정으로 소생하는 배우가 바로 나문희다. 그래서 ‘70대의 나이에도 영화와 드라마에 주연으로 나서는 유일한 연기자’, ‘영화감독과 드라마 PD, 작가들이 가장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 ‘믿고 감동하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나문희에게 헌사된다.
라디오가 인기 매체였던 1961년 MBC 성우 공채 1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나문희는 드라마와 영화, 연극으로 활동무대를 넓히면서 대중과 만나왔다. 나문희가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로 부상한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주어진 배역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온 힘을 다해 개연성과 진정성을 부여하는 연기자의 자세다. 노역, 비중이 작은 캐릭터 등 온갖 배역을 맡으면서 다양한 연기의 문양을 체득해 최고의 연기자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는 말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연기자가 바로 나문희다.
화장실에 가는 순간에도 대본을 놓지 않는 엄청난 노력과 연습도 오늘의 나문희를 만든 또 다른 힘이다. 영화 에서 나문희와 함께 작업한 후배 연기자 설경구는 “나문희 선생님의 대본이 너덜너덜한 것을 보고 얼마나 연습하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후배들에게 연기자로서의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의 선배 연기자입니다”라고 말한다. 나문희는 “연기는 내가 하는 전부이자 전부를 거는 분야입니다. 전부를 거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시청자와 관객은 돌아서지요. 그래서 대본을 받는 순간에서 녹화를 끝낼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어요. 저는 연기가 너무 좋아요. 그리고 연기가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해요. 저에게는 지금도 연기 늘었다는 말이 가장 큰 찬사예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엄마(나문희)의 삶은 가족들에게 헌신적이고 생활은 담백해요. 연기밖에 모르는 분이지요.” 연극과 뮤지컬 공연장에서 가끔 만나는 나문희 딸들의 말 속에서 나문희의 삶의 문양을 엿볼 수 있다.
연기대상은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든 상이다. 최고의 연기력과 인기, 드라마 시청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972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한 고두심은 45년 연기생활 동안 KBS 연기대상 세 번(1989년 , 2004년 , 2015년 ), MBC 연기대상 두 번(1990년 , 2004년 ), SBS 연기대상 한 번(2000년 ) 등 총 여섯 번이라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기대상 수상기록을 세웠다.
“처녀 때도 늘 아줌마, 할머니 역을 해 근사한 멜로드라마 주인공 한번 하지 못했다”는 고두심은 탤런트가 된 후 한동안 가정부, 술집 종업원 등 단역에 머물거나 그나마 배역도 없이 녹화장 주변을 서성거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무역회사 근무와 탤런트 생활을 병행해야만 했던 신인 시절을 지나 다양한 작품과 캐릭터를 맡으면서 연기력의 스펙트럼을 꾸준히 확장하며 최고의 연기자로 부상했다. 로 고두심에게 연기대상을 안겨준 장수봉 PD는 “고두심은 천부적인 연기자다. 고두심이 연기하면 캐릭터가 진정한 생명력을 얻는다”고 찬사를 보냈다.
고두심은 드라마 촬영장에선 놀라울 정도로 캐릭터에 몰입하는 집중력을 보인다. 그리고 촬영장 밖에서는 드라마 캐릭터에 관련한 인물을 지속해서 연구한다. “작품이 주어지면 항상 그 인물의 형상을 그린다. 양치질하다가도 거울을 보면서도 캐릭터를 생각한다.” 이처럼 철저한 고두심이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배역에도 자신을 맞출 수 있고, 모든 행동을 믿을 만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로 꼽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두심은 인생의 두 가지를 아름답게 피워낸 보기 드문 사람이다. 하나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고, 하나는 삶에 대한 진지함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고두심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삶은 아쉬움이 있지만 지난 46년 동안 제 꿈이었던 배우로 살아서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배우로 살아갈 겁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배우로서 오르막길을 올라왔으니 내려가는 일도 지금처럼 잘했으면 합니다”라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는다.
3월 2일 새봄, 쌍둥이 손녀ㆍ손자는 2학년으로 진급하였다. “동생들이 생겨서 기분이 좋다”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하였다. 초등학생이 되면 유치원생이 어려보이고,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생보다 엄청 크다고 느낄 터이다. 상급학교 진학과 한 학년 진급을 되풀이 하면서 어린이는 무럭무럭 성장한다.
쌍둥이가 2학년이 되고 방과 후 관리가 문제다. 두 아이가 한 반으로 편성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방과 후 일정은 각각 다르다. 아침 등교를 보살피고 오후에는 집에서 대기하거나 학습장으로 데려가야 한다. 할아버지ㆍ할머니가 꼭 필요한 대목이다. 아들가족과 가까운데서 사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내와 교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부터 오후까지 아이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유치원을 졸업한 외손자는 작년의 사촌 쌍둥이 누나와 형처럼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에 차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보다. 엊그제의 유치원 친구들과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다시 만남을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넓고 깨끗한 체육관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엄숙한 분위기다. 6학년 형들이 사이사이에 앉아서 신입생에게 입학을 축하하면서 선물을 주었다. 교장선생님의 환영사가 있었다. 신입생 대표의 선서가 또렷하게 진행되었다. 형들과 교가를 같이 부르는 신입생들의 모습이 든든하게 보였다. 며칠 전 유치원생과는 완전히 다른, 엄청 큰 아이로 느껴졌다.
교감선생님의 안내말씀에 좋은 학교라는 인상을 받았다. “혁신학교로 지정된 학교입니다. 공부만을 강조하지 않고,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아이들 지도에 많은 노력을 할 터이니 지켜보고 격려해주십시오.” 학부형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담임선생님과 방과 후 선생님 두 분이 아이들을 지도한다. 교실과 선생님이 부족하여 몇 개 학년 합반수업을 하였던 수십 년 전, 외손자의 부모가 다녔던 대도시의 학교와도 비교되었다.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는 입학선물로 이미 챙겼다.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를 좋아한다. 방과 후에는 뛰어놀면서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딸 가족과 함께 외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기념사진에 남기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오늘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아버님ㆍ어머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후세대에게 되돌리고 싶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순천 왜성은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바다가 변해 공단이 됐으니, 상전이 바다가 된 것보다 어찌 작은 변화라 하리오! 지금 우리 땅 어디인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420년 세월의 두께가 이렇게 두터울 줄 몰랐다. 성안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다리를 놓았다 해서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렸다는 옛 이름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택시를 타고 성터 앞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거대한 제철소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옛 격전지에 웬 공장인가 싶었지만 그건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한겨울 찬바람을 무릅쓰고 허위허위 성터에 올라서 조망한 모습은 너무 놀라웠다.
광양만 물결이 출렁거릴 것이라는 기대와 예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현대제철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 옆으로 무수한 공장 건물이 들어선 드넓은 공단이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저 넓은 공단이 얼마 전까지 바다였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뒤에 상세지도를 찾아보니 그곳은 여수반도 동안을 메우다시피 한 율촌 산업단지였다.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격전지 노루섬[獐島]도 뭍으로 변했다. 더 멀리 광양항 크레인이 보이지 않았다면 바닷가라고는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거대한 기린이 줄지어 선 듯, 오렌지색 크레인 무리 너머로 흰 연기를 내뿜는 광양제철소 공장 건물군, 그 너머로는 여수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 대교 트러스가 희미했다. 아,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살아나셨구나 싶어 겨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근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성터는 말끔해 보였다. 마른 수풀 너머 나지막한 구릉 자락에 문루 터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 보니 ‘제1문지(門趾)’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제1성문 자리인데 문루는 사라지고 돌로 쌓은 기단만 남았다. 그것도 허물어져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것을 근래에 다시 쌓은 것이다. 색깔이 어두운 돌은 옛것이고, 밝은 것은 다시 깎은 것이리라. 옛것과 새것의 부조화가 엇박자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제2문지가 나오고, 거기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오르니 병사(兵舍)들이 줄지어 있었을 병영 구역이다. 역시 옛 돌과 새 돌이 뒤섞인 복원 성곽 지대다. 거기서 한 구비 더 오르니 지휘부 건물들이 있었을 혼마루[本丸] 구역이 펼쳐졌다. 학교 운동장만 한 공터 저편 끝에 천수대(天守臺) 자리가 우뚝했다.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 옆 안내판에는 ‘천수대 위에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가 있었다’라고 씌어 있다. 명나라 종군 화수(畵手)가 그렸다는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에 나오는 조감도가 복사돼 있었는데, 그림 속 건물은 교회 첨탑을 닮은 목조 오층 누각이다.
천수각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되어 망해루라 한 것이리라. 바다를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높이 지어 올렸으니, 실은 적정을 살피는 장대 역할을 한 건물이었다. 그 밑은 바로 바다. 가파른 비탈 아래 접안 시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수많은 왜선이 정박해 있다.
물론 망해루 건물은 지금 없고 기단만 남았다. 이순신 장군의 공격을 받아 급하게 도망치며 불을 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98년 11월 하순에 소실됐을 것이다. 천수대 기단의 크기가 옛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 가로 18m, 세로 14m라니 그리 크지는 않다.
성 돌은 대개가 자연석이다.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엇갈려 쌓은 기법은 옛 축성법 그대로라고 하지만, 모서리는 바윗돌을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했다. 쐐기질로 깎았다는 설명으로 보아 큰 돌을 쪼아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쪼갠 것이리라. 그 많은 돌을 깎고 자르고 운반하고 쌓는 데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인가!
돌 다루는 기계나 장비가 없었을 시대, 왜병들의 채찍 아래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했을 고역이 다 인근에서 포로로 붙잡힌 백성들 몫이었을 것 아닌가. 백성들 피해가 어찌 그 노역뿐이었으랴!
성의 규모는 외성 3첩에 내성 3첩이다. 방대한 구조물이 다 돌과 흙과 목재로 이루어졌으니 노역의 고통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천수대 주변 땅속에서는 지금도 색깔이 서로 다른 와편이 출토된다고 한다. 왜병들이 근처 절집이나 민가 관공서 건물 기와를 걷어다 천수각 지붕에 올린 것이다. 여러 지붕에서 걷어낸 것이니 재질과 색깔이 제각각일 터다.
엄청난 성의 규모
축성에 3개월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행장(行長) 등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해 왜교에 결진,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는 정유년 9월 기사에 따르면, 축성은 1597년 9월에 시작됐다. 그해 12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게 보낸 축성 보고 서장에 따르면, 그 달에 축성이 끝났다고 돼 있다.
정왜기공도는 1598년 9월 조명연합군의 육상공격전 상황으로 보인다. 왜성 북쪽 검단산성에 주둔했던 조명연합군이 기병을 앞세우고 외성을 향해 들이닥치자 왜병들이 황급히 후퇴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됐다. 성 아래 당도한 보병들이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성루 안쪽에 점점이 뚫린 총안에 총신을 걸고 길게 늘어선 소총수들이 결사적으로 총을 쏘는 장면이 묘사됐고, 그 아래서는 판벽에 몸을 숨긴 왜병들이 반격하는 모습도 보인다.
성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1만4000명의 병력을 너끈히 품었음직하다. 높이 40m쯤 돼 보이는 혼마루를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세 겹으로 배치됐다. 성 한가운데 물길을 내고 두 개의 다리가 놓였는데, 밤이면 다리가 걷혀 내성과 외성이 물길로 갈리었다. 그래서 왜교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밤에 다리를 끌어당겨 물길을 텄다고 해서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불렸다.
물길은 외부 공격을 막는 해자 역할을 했다. 다리를 끌어들이면 내성 지역은 섬이 됐다. 그 물길은 지금 흔적만 남았다. 성 입구의 주차 구역에서 보면 갈대가 무성한 연못이 보이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
유키나가가 구사일생으로 순천 왜성을 탈출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철병이 얼마나 다급하고 치욕스런 것이었는지를 증언한다. 또 이순신 장군에게까지 뇌물공세를 취한 사실이 얼마나 화급했던 지를 말해준다. 화가 난 이순신은 “우리의 보화는 너희 대장 머리뿐”이라고 말하며 사자를 쫓아 보냈다.
유키나가는 사천시 선진리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명나라 장수에게 쓴 뇌물 덕에 명군이 철수하고, 지원군이 오는 길목인 노량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 총력전을 펴는 틈을 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
1598년 8월 18일, 침략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왜군 전 진영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곱게 돌아가도록 놓아둘 조선이 아니었다. 성안에 갇혀 농성 중인 왜병들을 수륙 협공으로 섬멸하자는 작전 계획이 수립됐다. 육지에서는 조선군까지 거느린 명군 장수 유정(劉綎)이,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명 수로군 대장 진린(陳璘)이 동시에 협공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군은 내 전투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유정은 처음에는 기세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조선군을 포함해 2만이 훨씬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군량을 맡았던 호조판서 김수(金睟)가 공격하자고 하면 성만 냈다고 한다.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의 장계를 근거로 한 기사에는 그 위인이 이렇게 적혀 있다.
“유정은 한결같이 교만하고 경솔하며 여자를 좋아할 뿐입니다. 늘 적을 뒤에 두고 진군하기 불편하다고 합니다. 남원에서 거느리던 기생을 진중으로 데려 왔습니다.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도 다투어 여자를 데리고 다녀 진중이 문란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울산 왜성을 포위했던 마귀(麻貴)가 그랬듯이, 그는 싸우는 시늉만 하면서 세월만 보냈다. 아직 병기가 오지 않았다, 공격의 적기가 아니다 등등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군량만 축내다가 유키나가의 강화 제안과 뇌물에 눈이 멀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는 “성을 비워줄 때 군량과 약탈 재물을 그대로 넘겨주고 1000수급(首級)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다.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유정에게는 바라고 기다리던 떡이었다. 뇌물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적에게 그 정도 조건으로 포위망을 풀어주었겠는가. 뒷날을 기하겠다면서 유정이 순천으로 회군한 길가에 군량 쌀이 허옇게 흘려져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검단산성 주둔 중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수륙 협공 계획에 따라 이순신 장군이 진린 제독의 함대와 함께 강진 고금도 기지를 떠난 것은 1598년 9월 15일이었다. 조명수군연합 함대가 왜교성 공격을 시작한 것은 9월 20일. 광양만은 바다가 얕아 썰물 때는 배가 다니기 불편했다. 밀물 때를 이용해 치고 들어갔다가 빠지는 전법으로 10여 일을 보내는 사이 육지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정은 미적거리기만 하다가 10월 6일 철군하고 없었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큰 전과를 올렸다. 왜선 격침 30척, 나포 11척이었다. 노루섬 왜군 군량 창고를 털고 불태우는가 하면, 얕은 수로에 좌초된 진린 함대를 지원해 진 제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런 은혜를 입고도 진린은 유정의 행로를 답습했다. 퇴로를 얻기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것이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
일본 작가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의 에 따르면, 11월 14일 밤 붉은 깃발을 올린 왜선 2척이 명 수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진린은 통역을 대동하고 나와 배를 맞았다. 왜군은 돼지 두 마리를 그에게 바쳤다. 그날 이후 양 진영에 사자(使者)의 왕래가 있었는데, 16일 진린이 순천에 보낸 사자에게 일본 측은 창칼 등 무기류 3척분을 바쳤다. 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1월 14일 밤 왜 소장이 7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진린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와 술을 바치고 돌아갔다. 15일에도 왜 사자가 또 도독부로 갔고, 16일에는 도독이 부하 장수 진문동(陳文同)을 적 진영으로 보냈다. 조금 있다가 왜적 오도주(五島主)라는 자가 배 3척에 말과 창과 칼 등을 싣고 가서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갔다. 그 뒤로 왜 사자들이 도독부에 끊임없이 왕래하더니, 마침내 도독이 공에게 화친을 허락해주도록 부탁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의 에도 기록돼 있다. 14일자 일기에 ‘왜선 2척이 강화할 차로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마중해 붉은 기와 환도 등을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바치고 갔다’는 게 그것이다.
16일자 일기에는 ‘도독이 진문동을 왜영으로 들여보내니, 왜선 3척이 말 1필과 창칼 등을 도독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다.
진린은 뇌물을 받은 16일 밤 왜교성에서 나온 왜선 1척의 광양만 통과를 허락했다. 그 배는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남해에 주둔한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진린은 왜교성 앞바다에서 철수했다. 남해에서 농성 중인 왜군을 먼저 토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니 급할 것 없다”는 이순신의 만류에도 “이미 적에 붙었으니 적과 마찬가지”라면서 함대를 인솔해 떠나갔다.
같은 날 저녁, 왜교성에서 한 줄기 봉화가 올랐다. 사천, 곤양, 남해 등에 주둔한 왜군 진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신호였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은 원군이 오기 전에 맞아 싸우지 않으면 다 놓치겠다는 판단으로 왜교성 앞바다를 떠났다. 17일 물목이 좁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쳤다. 남해에 있던 진린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 지원군 왜선 500척과, 조명 연합수군 500척의 대회전이었다. 노량 앞바다가 포성과 불길과 피로 물든 틈을 타 왜교성을 탈출한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리 돌아 쥐새끼처럼 도망쳐갔다.
귀로에 ‘소서행장 전승비’를 찾아본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순천터미널 관광안내소에서 신성리 왜성 가는 길을 물을 때 친절한 안내원은 “성터만 보지 말고 충무사에 복원해놓은 비석도 보고 오시지요” 했다. 1930년 조선군 사령관을 지낸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천수대 꼭대기에 세웠다는 비석은 광복 후 지역 주민들 손에 철거되어 논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광복 후에는 면사무소 창고에서 발견돼 2013년 충무사 관리인 숙소 앞마당에 다시 세워졌다. 전면에는 ‘小西行長之城’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뒷면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야시 센주로는 중장 시절인 1930년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본국 허가도 없이 휘하 부대를 만주에 파견한 일로 일본 정계에 물의를 일으켰던 자다. 만주국 창설에 세운 공으로 승승장구, 1937년 제33대 일본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라 하여 이 비석은 소서행장 전승비로 불렸다. 명나라 장수들에게 뇌물을 쓰고 야반도주한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극우주의, 국수주의에 물든 군인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 마련이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 , , , 등.
매서운 한파가 며칠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차가운 날에 뜨거운 사랑 이야기 뮤지컬 한 편을 관람했다.
제목 ‘아이다‘는 이집트의 이웃 나라인 누비아 왕국의 공주 이름이다.
‘아이다’를 알긴 했지만,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가슴 아프게 이렇게 목숨까지 거는 사랑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아이다’는 우리나라에서 2005년에 초연되었고 2012년까지 총 574회의 공연을 한 대표적 뮤지컬 작품으로 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팝의 거장 앨튼 존과 음악의 전설 팀 라이스가 함께 완벽한 음악을 만들었고 고대 이집트가 무대이므로 의상이나 장신구가 매우 화려해서 듣고 보는 즐거움이 컸다.
이번 공연의 무대는 샤롯데 씨어터로 지난해 보았던 여러 대작 무대보다는 좀 작은 규모여서 뮤지컬이 어떻게 표현될지 관심이 갔는데 900개의 고정 조명과 90대가 넘는 무빙라이트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빛을 나타내었고 무대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800여 벌의 의상과 머리 장식 등이 어우러져 매우 환상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벽화에서나 봄 직한 고대 이집트를 표현한 안무도 강인함과 섹시함, 처절함과 비장함을 역동적으로 표현해 춤의 마력에 빠져들게 했고 웅장한 음악은 가슴 속에 한동안 남았다.
이 작품은 무대, 의상, 조명, 안무 등 모든 면에서 현대적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던 해 최고의 뮤지컬에 주어진다는 토니상 음악상과 그래미상 베스트 뮤지컬 앨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아서 작품의 훌륭함이 증명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운명 같은 애절한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다. 뮤지컬 ‘아이다’는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나일 강 변에서 시작된 전쟁 속에서 피어난 사랑 이야기다.
이집트의 장군 ‘라다메스’는 승전보를 울리며 귀국 항해하던 중 부하들이 잡아 온 누비아 포로들 가운데 끊임없이 반항하는 여인 ‘아이다’에게 관심을 두게 된다.
노예가 될 운명의 포로 사이에서 고귀하고 용감한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라다메스’는 이집트에 돌아와 누비아 사람인 부하 ‘메렙’에게 ‘아이다’를 자신의 약혼녀인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의 하녀로 보낼 것을 명령한다.
‘메렙’은 ‘아이다’가 누비아의 공주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지만, ‘아이다’는 자신의 신분을 감춰 달라고 부탁한다.
‘라다메스’ 장군은 9년째 약혼상태인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가 있음에도 자꾸만 노예 ‘아이다’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이다’ 또한 끌려온 백성을 구해야 하는 신분임에도 포로가 되어 적국의 장군을 사랑하게 된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괴롭기만 하다.
한편 상큼 발랄한 이집트 공주 ‘엠네리스’는 ‘라다메스’의 사랑을 갈구하며 ‘아이다’에게 속을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 누비아의 왕이 잡혀 왔다. 감옥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이다’는 누비아 백성을 이끌고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하는데 누비아 왕과 누비아 포로들이 배를 타고 출발하려는 때 ‘아이다’는 ‘라다메스’를 보기 위해 동행하지 못하게 된다. 배만 타면 고향으로 갈 수 있는데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아이다’는 이집트에 남아 ‘라다메스’와 만난다.
‘라다메스’를 사랑한 ‘엠네리스’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그들을 잡아들인다.
병중인 이집트 왕 파라오는 그 둘을 죽이라고 하지만 ‘엠네리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이 여왕이 될 것을 선포하고 ‘라다메스’와 ‘아이다’를 한 공간에 넣어 매장하는 벌을 내린다.
큰 죄를 지었으니 살아날 길이 없는 그들에게 함께 죽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 후 ‘엠네리스’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나라를 잘 이끄는 현명한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뮤지컬의 처음과 끝나는 부분에서 현대의 이집트 박물관이 나온다.
고대의 이집트 문화와 유물이 전시되는데 한 전시물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이 환생한 ‘아이다’와 ‘라다메스’라는 설정이 가슴 찡하고 전생에서의 인연을 잊어 서로 알아보지 못하니 애틋하기만 하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 뮤지컬은 ‘아이다’ 보다는 ‘엠네리스’가 더 큰 비중을 가진 것 같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공주의 역할을 잘해 낸 가수 아이비에게 환호를 보낸다.
‘엠네리스’는 ‘라다메스’와 결혼해 그를 이집트 왕으로 만들려 했다.
사랑에 배신당했지만, 그 둘을 같이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장면에서 한 왕국을 이끌 수 있는 여왕으로 큰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건 한 남자와 적국의 남자를 사랑한 죄를 진 공주와의 애절한 이야기 ‘아이다’가 가슴에 다가왔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 가슴 저미는 사랑에 애틋함을 느낄 수 있는 시니어가 되어보면 어떨까? 한 번 권하고 싶다.
자기를 길러준 부모에게 등을 돌리는 패륜아는 당장은 호의호식 하는 것 같아도 길게 보면 하늘의 응징을 받는다. 어머니가 자식의 배를 불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았다면 남들은 다 욕을 해도 자식만은 훗날 성장해서 어머니에게 손가락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받아 출세를 해 놓고도 나를 도와준 사람이 곤경에 빠졌는데도 본체만체하는 것도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이다. 일부는 도와준 사람이 잘못을 했다면 변호해주고 덮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꼬리 자르기를 하고 도와준 사람을 오히려 욕하고 은혜를 헌신짝처럼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설화에 의하면 석가모니의 전생은 아홉 빛깔의 사슴이었다고 하고 사람이 지켜야할 보은에 대한 계도의 뜻으로 이 이야기가 구색록경(九色鹿經)에 전해지고 있는데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 아홉 빛깔의 털과 눈처럼 새하얀 뿔을 가진 아름다운 사슴이 깊은 산속에서 한 마리 까치와 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다가 겨우 나뭇가지를 잡고 멈추었으나 강기슭으로 올라올 수는 없었다. 곧 죽게 된 그는 큰소리로 도움을 청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사슴이 달려가 뿔을 잡으라고 일러주고 사슴은 뒷걸음을 쳐 겨우 사람을 구했다. 사슴은 기진맥진하여 꼼작할 수도 없게 되었다. 사나이는 땅바닥에 엎드려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사슴에게 하며 ‘풀이든 물이든 무엇이라도 시키는 대로 갖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슴은 사양하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저에게 은혜를 갚으려거든 제가 여기 산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람들이 제 거처를 알게 되면 제 가죽과 뿔을 탐내어 반드시 저를 죽일 것입니다.’사나이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사슴에게 굳게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이 무렵 그 나라의 왕비가 아홉 빛깔 사슴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는 꼭 그와 같은 사슴가죽으로 만든 방석과 뿔로 만든 부채를 갖고 싶어 했다. 왕의 총애를 받던 왕비는 너무나 그 물건을 갖고 싶은 나머지 왕에게 그것을 얻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했다.
왕은 상금을 걸어 아홉 빛깔의 사슴을 찾게 했다. 그러자 그 사슴을 보았던 사나이는 상금에 마음이 흔들려 사슴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왕에게 자기가 사슴이 있는 곳까지 군사들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했다. 그 순간 사나이의 얼굴에 보기흉한 종기가 돋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나이는 왕과 군사를 안내하여 사슴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사슴의 친구인 까마귀가 사슴에게 위급한 사실을 알렸지만 이미 사슴은 군사의 포위망에 갇힌 후였다.
사슴을 본 왕은 사슴이 너무 아름다워 군사들에게 활을 쏘지 못하게 하고 사슴을 생포했다. 그리고 사슴으로부터 사나이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은혜를 저버린 사나이에게는 벌을 주고 사슴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지만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고 짐승에 불과하다. 짐승들은 오직 먹이사냥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머리를 땅에 가깝게 두고 있지만 사람은 염치와 체면이 있기 때문에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산다. 짐승은 자기를 키워준 사육사에게도 덤벼드는 본능이 있지만 사람은 베풀어준 은혜를 갚기 위해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도 들어가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시니어라면 살아온 나날이 많다 당연히 남에게 베푼 것도 있고 도움을 받은 은혜도 많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처럼 더 늦기 전에 은혜에 보답을 해야 한다. 은혜 중에서 부모님의 은혜가 제일 크다. 자식으로서 효도의 실천을 장려해야 예의가 바로서는 문화민족이 된다.
은퇴하면서 비로소 종합건강검진 기회를 가졌는데, 암 검진에서 대장암이 발견되었다. 말수가 적은 의사는 “조기 발견으로 암세포를 제거해 천만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의사의 묵직한 한마디에 새 생명을 얻었음을 실감했다.
은퇴와 종합검진
필자는 5년 전 은퇴했다. 샛별 보면서 집을 나와 달빛을 벗 삼아 귀가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방학을 한 학생처럼 해방된 기분이었다. 은퇴 후의 장년은 건강관리가 제일 중요하다는데, 무엇부터 챙겨야 하나? 건강검진기록부터 살폈다.
국가검진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나이를 감안해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으라는 권유를 받긴 했지만 바쁘고 검사 과정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다. 은퇴 후 비로소 필자를 돌보는 황금 같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퇴임 전 종합검진 예약을 했다. 그리고 퇴임 며칠 후 암 검진을 받았다.
대장암 발견과 치유
대장내시경 검사 결과 용종 1개와 선종 3개가 발견되어 제거 시술을 했다. 2주 후 상쾌한 기분으로 검진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담당의사가 정색을 하면서 “선종 한 곳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귀를 의심했다. “아차!” 뭔가 심각한 상황임을 느낄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배가 아프거나 자각 증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더니 “암은 증상을 느끼면 이미 늦다. 조기 발견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암세포는 추가로 발견되지 않았고 시술 부작용도 없으니 안심하라. 치료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주기적인 추적 관찰만이 필요함을 친절히 설명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필자에게 유일한 위안의 말이었다.
‘암환자’라는 사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뱃속에 시한폭탄이 들어 있어 곧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병원에 가는 동안에는 뱃속이 뒤틀리고 쑤시다가, 별 이상이 없다는 검진 결과를 들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졌다. 대장암과 함께 위장·방광·당뇨·전립선과 갑상선도 암 전이 가능성 때문에 검진을 했지만 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행스런 결과에 위안을 받으면서 암 극복 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암세포 제거 시술 후 어느덧 5년이 다 되어간다.
봉사하면서 사는 새 삶
앞으로 살아갈 세월은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사회로부터 얻었던 소중한 은혜를 후세대에 되돌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회평생교육기관에서 시민강좌 강의와 청년창업 멘토 재능기부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백 마디 말보다 작은 실천 하나가 진정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길이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숭고한 정신으로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
시청·구청과 사회평생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평생학습·교양강좌를 찾아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다. ‘손주에게 들려 줄 새 이야기’도 배운다. 은퇴 후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 꾸준하게 등산도 한다. 아무리 건강에 좋은 운동이 있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등산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인내가 필요하다.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건강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준 은퇴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