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다리기가 재밌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멋있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어렸을 적 운동회 단골 메뉴인 줄다리기?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에 가본 사람이 아니면 콧방귀 뀌며 줄다리기를 논할 자격이 없다. 웅장하고 기운찬 줄을 대한다면 가볍게만 바라봤던 마음이 싹 가셔버린다. 이웃 주민의 안녕을 넘어 온 나라의 상생과 화합을 염원하는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 현장 속으로 들어가 봤다.
충청남도 당진시는 서해대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민속문화가 있다. 바로 500년 역사의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다. 지난달 6일에서 9일까지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리 일원에서 한 해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고 마을의 화합을 염원하는 축제가 열려 성황을 이뤘다.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기지시줄다리기의 시작은 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에 큰 해양 재난이 닥쳤는데, 강하고 센 땅의 기운을 누르고 흐트러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줄다리기 행사를 시작했다. 또 기지시리의 시장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내포지방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게 되면서 줄다리기 또한 지역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자연스럽게 남게 됐다.
기지시줄다리기는 19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또한 국내 여섯 개(당진 기지시, 창녕 영산, 밀양 감내, 의령, 삼척, 남해) 단체의 줄다리기와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3개 국가의 전통 의례와 놀이가 ‘줄다리기 의례와 놀이’라는 종목으로 2015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기지시줄다리기의 가장 큰 볼거리는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이다. 2월 15일부터 3월 10일까지 한 달여간 기지시리 주민 수십 명이 꼬고 이어서 만들어낸 줄은 직경 1m, 암·수 줄 길이 200m, 무게 40톤에 이른다.
물윗마을이 이겨, 나라가 태평할 것
‘기지시줄다리기민속축제’의 백미는 행사 마지막 날이다. 마을 주민의 땀과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암·수 줄 앞에서 줄고사가 행해진다. 이때 전국에서 모인 수백 명의 인파가 물윗마을[水上]과 물아랫마을[水下]로 나뉜 두 개의 줄을 들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줄나가기가 진행된다. 1km 남짓 되는 거리를 이동하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다. 각 줄 머리에 올라선 두목의 구령에 맞춰 사람들은 “의여차, 의여차!” 소리를 내며 서로의 기운을 모아 한 걸음, 한 걸음씩 이동한다. 시원한 바람이 때마침 불어주어 땀을 잠시 식히긴 했지만 행사장에 도착한 참여자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줄나가기는 지신밟기와 용이 승천하는 과정을 묘사해 한 해의 풍수를 통해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행사장에 도착한 두 개의 줄을 결합하면 곧바로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줄다리기는 물윗마을과 물아랫마을이 겨루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수상(물윗마을)이 이기면 나라가 태평하고 수하(물아랫마을)가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대로 이기고 지는 일보다 모두가 화합하는 데 의의를 둔다. 올해는 수상이(물윗마을이) 박빙의 승부 끝에 승리했다. 행사에 참여한 모두가 나라의 태평과 화합을 기대하며 기쁨과 환호 속에 행사를 마무리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2기 출범식에서 의례적인 선물처럼 건네받은 책이 바로 기시미 이치로가 쓴 라는 책이다. 바쁜 일상과 맞물려 책은 한동안 거실 한 귀퉁이에 처박혀 버렸고 잊을만한 시간에 ‘독후감’ 이라는 것을 써야 한다는 당부의 말이 떠올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책상밑에 팽개쳐 졌던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첫장을 넘기면서 격한 공감과 함께 책 속으로 빠져들면서 단숨에 한 권을 통독해 버렸다.
아들러 심리학의 권위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직접 자기 삶에서 체득한 심리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제시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며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화두는 개인을 넘어 사회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젊은 나이에 뇌경색을 앓아 재활 중에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목전에서 경험하고 삶의 궤도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를 지나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자신에게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사유(思惟)하는 계기를 경험한다.
부모님 두 분을 병수발 했던 저자이기에 현실에서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사소한 부분을 언급할 때 크게 공감하게 된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항상 작고 사소한 것들임을 감안하더라도 경험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저자는 어머니의 병수발과 아버지의 치매로 인해서 ‘나이든 부모’ 와 살며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당부한다. 매우 뻔 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라는 것을 조금만 읽어보면 알게 된다. 부모님도 몸이 아파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생활하는 것이 처음이고,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며 직, 간접적으로 간호해야 하는 자식들도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일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 사회에서도 더 이상 병간호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게만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아픈 사람도 그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 누구도 죄인이 아니지만 사랑으로 시작한 일이 한 가정을 파탄 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결국은 가족이라고는 하나 그것 또한 인간관계이다.
후회를 하지 않게 되게끔 ‘하루하루 이 사람과 사이좋게 생활하자’ 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존경입니다.(P.104).
병이 든 상태가 가장 낮은 위치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P.117).
자식 눈에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모님의 현재가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요.(P.12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의 철학자 기요카즈는 그의 저서 『끊을 수 없는 생각』에서 “무언가 하지 않고도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우리 사회는 잊고 있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에 극히 공감이 가는 것은 나에게 있어 2년 전 10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떠올리게 된다. 어머님은 90의 중반까지는 비교적 정신적으로 건강 하게 사셨으나 그 이후에는 오락가락하는 정신과 육체적인 피폐로 인해 병원과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셨다. 불완전한 모습의 어머니이지만 살아 계실 때에는 마음의 많은 위안이 되었고 형제, 자매들을 잇는 끈이 되어주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허탈함에 우울한 감정이 지속되기도 하였거니와 형제, 자매를 이어주던 끈도 끊어지고 말았다.
본문에서 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이렇게 주무시기만 하니 제가 안와도 되겠네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잠드는 거야”(P.14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생산성으로만 가치를 측정하는 이 사회가 낳은 문제이기도 하다.
부모님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후회’ 다. 언제나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드려야지 싶다가도 내 기분에 따라 행동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화는 보통 지르고 난 뒤에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반해, 부모님과의 갈등은 내가 화를 내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후회가 밀려온다는 것이다. 화를 낸 상대는 나지만 속이 후련하기 보다는 “조금만 더 참을걸. 하는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순간적으로 화가 끓어오르더라도 부모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 가능한 권력 싸움에서 물러나야 한다.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P.173).
누군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면, 상대의 표면적인 말과 행동만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의도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P.180).
진지하되 심각해지지 말라
부모님을 간병하는 일은 진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해 질 필요는 없다. 진지한 것과 심각한 것은 다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모님을 보살필 때에는 다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서 배려할 필요가 있다. 간병이 힘들다고 미간에 주름잡고 한숨을 쉴 필요는 없다.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간병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부모님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형제들이 간병의 고단함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간병이 큰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색할 필요는 없다. 간병이 힘든 일이란 걸 다른 이에게 과시하기 시작하면 간병하는 사람은 진지해 지기 보다는 심각해지고 만다.
여건상 103세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때는 나는 한참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 온종일 두서너 평의 작은방에서 보내셔야 했던 어머니는 가끔씩 전화를 하셨다. 대화 내용은 뻔했다. 어머니의 생각 속에 잠겨 있는 말들을 반복해서 하시곤 했는데, 한창 일처리에 바쁜 상황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 드릴 수는 없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아들이 그리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수없이 했으나 현실은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고 끊곤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뒤늦게 후회가 참 많이 된다. 그 상황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드리는 일 말고 더 급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뒤늦은 반성을 해 보지만 어머니는 이미 안계시니 그립기 짝이 없다.
이제 어머니의 나이를 향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어차피 사람은 늙어 갈 수밖에 없고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는 화두는 결국은 나의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이 한권의 책을 통해서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사회는 물론 우리 모두가 자각하여야 할 듯하다.
달력에 빨간 글자로 적힌 쉬는 날들이 많으면 사람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놀 수 있으니까요. 자칫 질식할 것 같았는데 ‘숨통이 트인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 좋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정말 누구나 그렇게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사로운 것이긴 합니다만 저는 젊었을 때부터 명절을 포함한 쉬는 날이 두려웠습니다. 현실적으로 잘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도, 시간도,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긴장도 그랬습니다. 게다가 후유증마저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쳇바퀴 돌듯하는 일상이 오히려 편했습니다.
다시 5월입니다. 5월에는 ‘날’이 많습니다. 모두가 반드시 쉬는 날은 아니어도 마음 쓰게 하는 날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번 제가 아는 대로 짚어보겠습니다. 1일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음력 4월 8일인 3일은 석가탄신일이고,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8일은 어버이날, 14일은 입양의 날입니다. 15일은 스승의 날인데 그날이 5월 셋째 월요일이어서 성년의 날과 겹칩니다. 18일은 민주화운동의 날, 다음 날인 19일은 발명의 날, 20일은 세계인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 25일은 방재의 날이면서 실종아동의 날이기도 합니다. 30일은 음력 5월 5일이니까 단오절이고, 31일은 바다의 날이자 금연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올해에만 끼어든, 그런데 어느 날보다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9일인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유권자의 날인 10일을 앞에서 빠트렸군요.
살면서 자칫 놓치거나 잊기 쉬운 귀한 가치를 ‘날로 정해’ 새삼 간직하려는 노력은 어색한 표현이지만 ‘기특한 문화’라고 일컫고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답기를 기하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습니다. 새삼 사람다움의 긍지를 확인하게 해주니까요.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5월은 날이 너무 많습니다. 예부터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 했는데 이 또한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라 생각하면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5월은 그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5월의 날들은 대체로 봄의 상징성과 이어져 있습니다. 겨울에 수박을 먹으면서도 계절의 흐름을 못내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단순화해보면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이 다 날로 정해져 있는 것이 5월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그 여러 날들을 하나하나 떼어 지내기보다 이를 한 다발로 묶어 ‘5월을 한번 5월답게’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연세 지긋한 분들이 이 달을 어떻게 지내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우리는 모두 어른인데 참으로 어른일까?’ 하는 물음을 묻는 달, 그러니까 5월을 ‘어른임을 반추하는 달’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까닭인즉 분명합니다. 어른이 젊은이보다 많아진 이른바 고령사회가 되었는데도 ‘나이 많은 어른’은 넘쳐도 ‘나이 든’ 어른들은 그리 많지 않아 우리의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온통 유치한 모습만을 부끄러움도 없이 다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종교학에서는 종교문화의 특징을 기술하면서 이른바 성년식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줄여 말하면 종교란 모름지기 ‘어른 만들기의 문화’라고 해도 좋을 거라고 할 만큼의 비중을 가집니다.
문제는 이른바 ‘어른다움’이란 어떻게 기술될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교 전통의례인 관례(冠禮)나 계례(笄禮)를 들어 설명해도 좋겠습니다만 두루 성년의례의 보편적인 특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서술해보겠습니다.
우선 어른은 자기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문화권에서는 그 공동체의 전래 신화를 읊곤 합니다. 어리지 않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사는지, 내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 있게 천명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름과 직업과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랍니다.
다음으로 어른이란 삶이 물 흐르듯 그렇게 졸졸거리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을 뜻합니다. 곤경, 좌절, 절망 등의 구비들을 한없이 거쳐야 하는 그런 것이 삶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직 어른의 삶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 모든 부정적인 삶의 정황과 당당하게 직면하면서 마침내 ‘고통에 의미 있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 그가 비로소 유치하지 않은 어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른은 생명의 어버이가 된다는 것과 대체로 함께합니다. 생명을 낳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생명의 신비에 대해 언제나 외경의 염(念)을 지니고 사는 사람,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그가 곧 어른입니다.
만약 어른 됨의 이러한 서술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다면 5월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어린이날이면,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좋은 선물을 사주는 것도 좋지만,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어른이 되도록’ 키우고 있는지 아니면 ‘어린이로 머물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를 되살펴야 합니다. 스승의 날이면 내가 어떤 스승의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어떤 가치를 가르치면서 그들을 어른으로 키우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어떤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순응만을 강요하지는 않는지, 나 자신의 어른 모습을 단단히 해체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의 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따로 함께’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함께의 구실’로 상대방을 자신의 영토 안에 철저하게 예속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어른 됨을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런 자식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희망이 없습니다. 편하게, 쉬운 일만 찾아 살다 조금만 어려워도 주저앉고, 그러다 나이를 먹어 아비 어미가 되긴 하지만 아이가 아이를 낳은 ‘아이의 연쇄’만이 이어질 것이 빤한데, 그 가정이 제대로 된 가정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유치함의 지속일 뿐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없는 시민들로만 우리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그 모습이 어떠할지도 그대로 보입니다. 공직에 들어서면 그것을 곧 내 사적 공간의 확장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유치하고 철딱서니 없는 공인들을 보면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공직 아닌 자리가 삶의 자리에서 있기나 한 것인지요. 나이 먹어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른이 되어 산다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내 삶의 사적 영역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를 모르는, 아예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물음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른들이 이른바 온갖 ‘책임 있는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을 때, 그 공동체의 내일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견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문제가 아닐는지요.
5월에는 새삼 ‘어른 부재의 문화’에 대한 감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네처럼 나이 들 만큼 든 사람들이 조용히 내 안에서부터 이런 감각을 싹트게 하여 내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5월의 색깔이 채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칠인들 어떻습니까?
너무 구태의연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5월. 참 싱그러운 달입니다. 날에 맞추어, 누구나 즐겁고 환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유치하지 않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종교와 정치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노선이 달라 언제든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 간에도 하나의 통일된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간혹 관계를 힘들게 한다.
필자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대학교 4년을 늘 형제처럼 붙어 다녔던 친구가 있다.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우리의 우정이 영원할 것처럼….
그러다 관계가 틀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대통령 선거였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니까 이니셜로 밝혀도 되겠다. 당시 후보는 YS(김영삼)와 DJ(김대중)였다.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끈 두 거목이다. 두 사람은 수십 년간 야당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서게 되면서 따르는 사람들도 분열했다. 한 사람은 호랑이를 잡겠다고 여당과 합당을 했고 한 사람은 야당에 남아 정치를 계속했다. 결과적으로 두 분 다 목표를 달성하긴 했다. 그런데 두 사람만 헤어진 게 아니다. 두 사람을 지지했던 지지자들, 즉 우리 같은 일반인들도 갈라서게 됐다. 필자와 친구도 그랬다. 당시 친구는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필자에게 설득시키려 했다. 필자가 늘 자기편이고, 자기 생각과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달랐다. 친구 관계가 좋다고 지지하는 사람까지 똑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이었다. 학교에서 반장선거 할 때도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당선이 되면 좋겠지만 안 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친구는 집요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했고 필자는 그 주장에 응할 수 없었다. 잠시 설전이 있었고 그 후 만남도 연락도 소원해졌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의 친구로 돌아가지 못했다. 1년에 한두 번 모임 때 만나 의례적인 인사나 나누는 사이가 됐다.
정치뿐 아니라 종교도 관계를 힘들게 한다. 우리 부부는 성당에 다니고 어머님은 교회를 다니신다. 신교와 구교일 뿐 다 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머님은 우리 부부가 성당에 다니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신다. 자신의 교회로 와야 한다고 난리시다. 만날 때마다 그렇게 강조를 하시니 뵙는 것이 점점 불편하다. 물론 연세 드셔서 종교를 갖고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면 참 좋고 다행이다 싶다.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것은 좋은데 그게 지나쳐 강요를 하시니 문제다.
필자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았듯, 종교와 정치에 대한 대화는 참 어렵다. 갈등의 원인은 지나친 데서 나온다. 각자가 다른 인격체인 만큼 생각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상대의 관점을 존중하지 않고 동일시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 인정하지 않고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타인을 배척하거나 적으로 삼으면 갈등은 커진다. 특히 종교, 정치와 관련한 대화에서는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 생각이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의견도 중요하다.
요즘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를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다. 서로 상처받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화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가치를 인정해줘야 한다. 내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도 소중한 인격체로 인정받을 때 갈등은 치유될 수 있고 관계가 새롭게 형성될 수 있다. 아직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는 친구와의 우정이 마그마처럼 저장되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필자가 먼저 친구에게 연락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는 관심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친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굿’은 슬픔과 맞닿아 있다. 죽음 혹은 아픔이 전제하고, 한(恨)이 깔려 있으며 원한풀이로 이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작년 말 30스튜디오(서울 종로구 창경궁로)의 개관 작품으로 선보인 은 진도의 씻김굿을 연극무대로 옮긴 것이다. 개인의 슬픔을 넘어 한국의 역사, 풀리지 않는 현실 속 한국의 이야기가 한판 굿으로 관객과 어우러졌다.
‘순례의 삶에 한국 근·현대사를 담다
무대는 진도 바다 바위 언덕. 동네 아낙이 바위 주위를 돌며 섭(홍합) 채취를 하고 있고, 높은 바위에 앉은 남자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주인공 순례는 어기적거리며 무대를 돌아다닌다. 들어오는 관객과 무대 위 남자와 여자의 행동에도 간섭하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면 무대를 돌아다니던 순례는 바위 위 남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나, 간다” 한마디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
수난의 시대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살아온 순례의 죽음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통하는 세계를 열어 영혼을 달래는 ‘씻금’의 시간이 마련된다. 영혼이 된 순례는 굿을 통해 뭍으로 올라오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남도 민요와 함께 풀어낸다. 육자배기, 흥그레타령, 닭노래, 진도아리랑 등 진도 지역에서 내려오는 노랫가락을 통해 우리의 아픈 이야기 또한 발견하게 된다.
순례의 삶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순례는 시어머니가 낳은 어린 시동생들 보살피느라 정작 내 아이는 입히지도 먹이지도 공부시키지도 못한 것이 아쉽다. 그나마 제대로 키운 장남은 IMF로 잘 다니던 한국은행에서 실직하고 증권에 손을 댔다가 망해 결국 자살을 택했다. 순례의 가정사와 함께 진도 앞바다에서 생을 달리한 넋들도 등장한다. 정신대를 피해 나이 많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갔던 여자의 영혼, 빚을 이겨내지 못해 바닷물에 빠진 연인이 등장해 씻김을 받는다. 구천을 떠돌아 거지꼴이 된 순례의 장남도 돌아와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로 깨끗하게 치유받고 저승 갈 채비를 서두른다. 마지막으로 뭍으로 올라오지 못한 세월호의 영령들까지 달래기에 이른다. 수난의 역사이자 지금의 시대는 ‘씻김’과 ‘길닦음’이라는 제의를 통해 삶과 죽음, 개인과 역사, 극 전체와 관객이 서로 화해하고 보듬으며 화합한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어우러지다
이 연극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더욱 빛나는 작품이 된다. 마치 굿판을 구경하듯, 길거리 공연을 보거나 시위에 참가한 듯 어깨를 들썩이고 함께 어우러져야 제대로 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관객의 참여를 돕기 위해 무대 뒤 스크린을 적극 활용한다. 배우들이 부르는 남도소리 전곡을 스크린에 띄우고 관객이 따라 부르는 시간도 갖는다. 공연 전부터 순례로 등장하는 배우 김미숙이 무대를 걸어 다니면서 관객에게 툭툭 말을 건네는 것 또한 관객들과 함께 공연을 이뤄간다는 의미다.
특히 연극이 끝나고 나면 실제 굿이 끝나고 음식을 나눠 먹듯 배우들은 막걸리와 떡, 고기 등을 무대에 내온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어우러져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는다. 그 어떤 연극보다 더 쉽게 배우에게 다가가 사진 찍기를 권하고 덕담을 나누는 연극이 바로 이다. 또한 배우들이 정성스레 만든 ‘넋발(씻김굿에 쓰이는 종이 도구로 망자의 혼을 표현한 것)’을 관객에게 기념으로 나눠준다. 연극을 보고 나왔다는 느낌보다는 함께 공연을 하고 나온 느낌으로 극장을 나서게 된다.
굿극 은 2010년 국립남도국악원의 제안으로 진도 씻김굿을 무대 형식으로 제작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이때 연극학자인 서연호가 굿을 연극화했다 해서 ‘굿극’이라는 개념이 부여됐다. 공연의 맥은 잠시 끊겼다가 작년 말 대본 집필과 연출을 맡았던 이윤택이 국립국악원의 양해를 얻어 자신의 극단인 연희단거리패에서 제작하게 돼 다시 관객들 곁으로 돌아왔다.
‘진도 마지막 당골, 고(故) 채정례의 삶 녹아들다
씻김굿이란 서남해안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넋 굿이다. 살아생전의 좋지 못했던 기억과 마음 깊은 곳의 앙금을 깨끗이 씻어내 망자가 수월하게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돕는다. 굿극 은 진도씻김굿의 마지막 당골(세습무당)인 채정례(1925~2013)와 악사 함인천 부부의 실제 삶을 줄거리로 삼았다. 살아생전 채정례 선생은 씻김굿의 전체 무가와 장단을 당시 남도국악원의 모든 단원에게 전수해 후세에 남겼다. 굿에 사용되는 종이 무구(巫具)인 지전(紙錢)과 고깔, 넋 등의 제작 과정 또한 단원들에게 지도했다고. 국립남도국악원은 제작 초기 진도의 큰 당골인 채정례를 주목했다. 실제 진도에서 부부가 짝을 이루어 세습무계의 전통을 이으면서 원형을 고수한 원로는 채정례 당골과 남편인 함인천이 유일했다. 큰무당이 가지는 위대한 포용력과 함께 여러 당골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오랜 연륜과 탁월한 기예로 존경받아왔다. 씻김굿은 죽은 이를 위한 천도의례이지만, 채정례 당골의 씻김굿 현장은 죽은 이를 위한 자리인 동시에 산 자들의 슬픔까지 걷어내는 자리였다.
장사익 소리판 대전 공연이 있던 날. 대전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인터뷰에 앞서 도리였다. 노래가 전부라는 사람, 장사익(張思翼·68). 작년 초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대결절 수술대에 올랐던 그는 8개월 뒤 불사조처럼 힘차게 일어섰다. 공연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나.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진 소리가 가슴을 뒤흔들었다. 음악 안에서 행복하다는 그가 살아 돌아와 부르는 노래.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대전 공연에서 만나고 수 주가 지난 뒤, 찻상을 사이에 두고 장사익과 마주앉았다. 종로구 평창동 그의 자택 너른 창 앞이었다.
“다섯 잔은 해야 소통이 된대, 차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말을 건넸다. 인터뷰 때마다 치르는 장사익만의 통과의례이자 손님을 극진하게 맞이하는 인사법은 바로 차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수다스럽게 안부를 묻고, 지난 공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한창 담소가 무르익어갈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산 뒤쪽으로 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였다.
“나 어렸을 적 살던 홍천 우리 집에는 동산이 있어서 오전 9시나 10시나 돼야 아침이 됐죠. 대신 뻘건 일몰은 수도 없이 봤어요. 나이 먹으니 거꾸로 됐어(웃음). 그게 바로 인생이라. 초창기 때 내가 되게 힘들었어요. 노을만 보는 인생이었어. 근데 지금은 해가 뜨는 걸 본단 말이야. 지금이랑 옛날이랑 완전 정반대죠. 내 인생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사는 것과 지는 해를 보고 사는 것과 어떤 게 더 힘이 있어?”
대한민국 중·장년층에서 장사익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공연 때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장사익 콘서트 티켓은 효도상품이 된 지 오래다. 1만7000명이나 되는 팬들과 여름과 겨울 꾸준히 팬 미팅을 진행하는 대형 가수이자 올해 예순여덟인 시니어 세대의 젊은 오빠(?) 장사익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1994년. 그의 나이 마흔다섯 되던 해다. 노을 드리우던 굴곡진 젊은 시절을 지나 밝게 떠오르는 인생을 40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맞이했다.
마흔다섯, 내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속이 뻥 뚫릴 만큼 유행가를 불러 젖히는 장사익. 소리꾼이 되기 전 그는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웃음기 없는 가장이었다. 15가지나 되는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동안 아련하게나마 위안이 됐던 것이 어렸을 적 동네 아저씨가 불던 태평소 소리였다.
“세상에 그 어려운 밥벌이하느라 직장에서 얻어터지면서 살았어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 그걸 죽을힘을 다해 한번 해보자고 선택한 것이 태평소였어요. 아부지 장구 칠 때 옆에서 정말 태평소를 잘 불던 아저씨가 제 기억에 늘 있었거든요. 아무 욕심도 없고 별 볼일 없는 것에 내가 좋아서 목숨을 걸었어요.”
태평소를 손에 쥐면서 삶의 판이 바뀌어갔다. 노래하는 인생에 길을 내어준 것은 분명 태평소였다.
“노래가 운명이었나봐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5년 동안 웅변 연습 삼아 목청을 풀었어요. 20대 초반에는 첫 직장 다니면서 대중가요도 3년 동안이나 제대로 배웠고요. 지금 부르는 유행가는 대부분 그때 알게 된 노래입니다. 군 3년 동안에는 문선대 가수로서 전라남도를 돌아다녔어요. 그땐 소리꾼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정말 신기하게 노래란 놈이 다가왔어요.”
그 운명의 끈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나게 해주었다.
“1993년 1월 4일부터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끼어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어요. 임동창은 그때 김덕수 쪽에서 악보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요. 나는 이광수 쪽. 그러니까 사물놀이 전설의 라이벌 밑에 둘이 각자 있었던 거야. 공연할 때 뒤풀이에서 둘이 운명적으로 만난 거지. 나는 ‘저 피아노 치는 친구 잘하네’ 했고 임동창이도 ‘어! 저놈 노래 잘하네’ 한 거야. 내가 뒤풀이에서 조용필이야 조용필(웃음). 그때 임동창이가 ‘형, 그러면 한번 나가봐’ 그랬어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그의 인생 첫 콘서트가 계획됐다. 1994년 11월 6일, 7일 이틀에 걸쳐 열렸다. 벼락이 치는 소리만큼이나 강렬한 임동창의 피아노와 김기영의 북장단에 맞춰 ‘찔레꽃’을 비롯해, 20대 초 장사익이 낙원동 골목에서 배우고 흥얼거렸던 유행가를 관객 앞에서 불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0석 규모 공연장에 이틀 동안 800명의 관객이 찾아온 것이다. 장사익이 드디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셋이서 그냥 논 거야. 웃기는 거 아냐? 그때 내 나이가 마흔다섯이었어. 밤새도록 연습해가지고 딱 한 번만 하자 했어요. 첫날 공연 끝나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이게 행복이구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어요. 노래를 딱하고 그다음 날 일어났는데 너무 행복하고 좋은 거야. 그때부터 웃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주름살이 웃는 주름인 거예요. 하회탈마냥 웃잖아.”
노래 부르는 인생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 장사익은 공연 뒤풀이에 가서도 노래를 꼭 부른다. 긴 시간 공연에 쉴 만도 한데 그의 흥은 죽지 않는다. 함께 고생한 스태프와 팬만을 위한 무대가 뒤풀이 장소에서 더해진다.
“제 인생에 신조가 있어요. 내가 속한 집단은 늘 행복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인상 쓰고 먹으면 독이 돼요. 아무리 허술한 음식이라도 즐겨 먹으면 약이 된단 말이에요. 일도 그래. 인생이 다 그런 거 같아요.”
근본 없는 세상, 희망가를 부르다
장사익의 대전 공연이 있던 작년 11월 2일은 온 나라가 대통령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떠들썩했다. 콘서트장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지만 무거운 돌덩이 하나쯤 가슴 한쪽에 안고 있지 않았을까. 장사익은 공연 중간 ‘근본 없는 세상이라 이런 일도 생긴 것’이라 말하고 ‘희망가’로 관객들을 위로하며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노래하는 놈이 목을 다쳐서 수술을 했단 말이지. 100m 달리기 선수가 달리다가 다리 부러진 거여. 그럼 어떻게 해요? 당장 앞이 안 보이잖아. 긍정적인 생각부터 해야지. 다행히 완벽하지는 않지만 목소리는 일단 찾았어요. 이렇게 노래하고 있을 때 행복하고 노래가 더 소중합니다. 우리나라도 똑같이 승승장구하다가 걸린 거예요. 정지.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는 거예요. 이건 아닌데. 가만히 보니까 폼도 잡고 있고, 객기도 부리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목을 다치니 뒤도 좀 돌아보고 내 모습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도 해보더군요. 이런 소중한 기회를 이번에 아프면서 알았어요. 이건 돈 주고도 못 사요. 그런데 딱 목에 신호가 와서 잠시 멈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반성하면서 곪고 터진 것들을 다 도려내야죠. 민주적으로 사정없이 혼내야죠.”
대규모 집회가 매주 집 주변에서 열리던 상황. 혹시 ‘희망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이 있다면 응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많이 했어요. 요즘에는 별로 얘기 않더라고(웃음). 나는 이렇게 같이 덩달아서 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지요. 제의가 있다면 늘 마음은 있습니다.”
인생, 3할대만 쳐도 성공하는 거예요
성대결절 수술 후 장사익은 8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절대안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병원에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목 또한 악기인지라 연습하고 가다듬어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 목 상태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음이라도 좀 내려 불러야 하련만 장사익 사전에 타협은 없다.
“여기서 죽으면 관둬야 해(웃음).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하는 거여. 노래가 모두 다 좋을 수가 없어요. 특히 찔레꽃은 클라이맥스에서 톡 쏘는 느낌이 관객에게 전달돼야 하는데 그게 안됐을 때는 노래 전체가 살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늘 숙제하는 기분입니다.”
그는 노래가 잘될 때도 또 안될 때도 있다면서 인생을 야구의 타할에 비유했다.
“요새 하는 생각인데요. 야구 상위 타자가 몇 타를 치는지 알아요? 3할 중반은 넘지만 4할은 못 넘어가요. 기가 막히죠. 백인천이 옛날에 4할을 치기도 했지만 말이죠. 국민 타자 이승엽도 10개 중 6~7개 정도는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못 치잖아요. 인생은 3할만 가도 성공하는 거예요. 세 번에 한 번. 그리고 두 번은 버려야 해. 욕심이야. 다 잘할 수 없어요. 그게 진리더라고요. 세 번에 한 번만 잘 쳐도 상위 타자로 들어가는 거야.”
그는 인생이 다 좋을 수는 없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가 오든 수용해야 한다고, 그게 세상살이라고 말한다.
“2할대 타자도 준수하게 치는 거야. 3할도 하고 5할도 하려다가 모두 도둑놈 되는 거여(웃음).”
은퇴와 죽음이 맞닿을 나의 무대, 무대!
늦은 나이에 소리꾼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섰지만 그에게도 분명 생각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이 있을 것이다. 특히 성대수술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역시 그의 끝은 무대 위를 꿈꾼다.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조갑녀 선생님이라고 있어요. 이분은 마지막 춤을 내 무대에서 췄어요. 90에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나왔는데 딱 일어나서 1분을 췄어요. 그 어떤 춤보다도 기둥 하나가 춘 거여. 밀양 북춤의 대가 하보경 옹의 무대도 제 눈으로 봤습니다. 그분도 제자가 번쩍 들어서 무대에 올려놓았어요. 농악 장단이 들어가고 1분 있다가 손을 번쩍 드는데, 언제 저렇게 땅이 무너지는 춤을 또 볼 수 있을까. 다 벗어버려야 해요.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해요.”
장사익은 최근 유명을 달리한 노래하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캐나다·2016)과 차벨라 바르가스(멕시코·2012)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들의 노래를 ‘죽음을 코앞에 두고 부르는 노래’라고 표현한다.
“이게 진짜 노래예요. 앞으로 나는 힘 좀 빼고 나이 먹는 것을 되게 기다리고 있어요. 남들은 나이 먹는 걸 두려워하잖아요. 나는 80에 90에 어떻게 노래를 부를까 궁금해요. 지금도 주름살이 골목길처럼 있는 놈이 더 늙어져서 지팡이 짚고 나와 비틀비틀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그런 꿈을 꾸고 있어요. 내가.”
일생에 좋은 노래 하나, 좋은 공연 하나, 안 했을 수도 있고 이미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장사익은 말한다.
“진짜 저런 공연, 저런 노래, 그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인지도 몰라요.”
40여 년 전 중·고교 시절의 겨울방학은 성탄절과 거의 시작을 같이했다. 통금이 없는 성탄절과 송년 제야행사 그리고 구정, 봄방학으로 연결되는 겨울방학은 여름방학과 달리, 자유로움과 함께 한 살을 더 먹으며 성숙해지는 청소년기의 통과의례였다. 그래서 겨울방학이 지난 후에는 뭔가 분위기가 확 달라져 나타난 녀석들이 많았다.
필자에게도 그런 변화가 왔다. 바로 중동발 ‘오일쇼크’ 때문이었다. 급등한 원유 가격으로 인해 40일 정도였던 겨울방학은 두 달을 훌쩍 넘게 연장되었다. 어려워진 국가 경제와는 상관없이 어떻게든 머리를 더 기르려던 당시의 철없던 고교생들에게는 큰 희소식이었다.
특히 정신통일을 강조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중·고교 시절은 물론 초등학교 때에도 항상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던 필자는 빨리 대학생이 되어 장발로 경찰에게 잡혀보는 게 꿈이었다. 필자는 머리를 열심히 길렀고 수염도 안 깎았다. 매일 거울을 보는 재미가 너무 쏠쏠했다.
거의 대학생 수준의 행색이 되어가던 2월 어느 날, 당시 회사원이었던 작은 형이 무교동의 매우 고급스런 대형 맥주홀로 필자를 데려갔다. 세련되게 차려입은 수많은 여급들이 생맥주를 손에 들고 손님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손님들 테이블에 앉지는 않고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없이 술을 따르는 그녀들에게서 특별한 기품이 느껴졌다. 당시 고교생 눈에 비친 여인들은, 단순히 유흥가에서 일하는 여성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내몰린,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여성으로 포장되었기 때문이리라. 빵집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던 그 시절,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유흥가에서 술까지 마신 고교생. 당연히 필자는 개학 후 친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한껏 개폼을 잡으며 그날의 성인체험(?)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그 겨울방학의 ‘오일쇼크’로 필자는 또 훌쩍 컸다.
어릴 적에는 설·추석 명절이 행복했었다. 근심 걱정 없이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새 옷도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명절 증후군, 명절 이혼, 고부 갈등이란 이름의 ‘명절 스트레스’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명절준비가 제일 큰 문제였다. 이제 명절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리는 큰 결단을 하였다.
◇명절 스트레스의 원인
손수 준비하던 결혼과 장례문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하여 결혼·장례식장이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명절과 제사는 아직도 ‘정성들인 음식‘이 필요하다.
대가족 맏이인 아내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40년 넘게 6남매 맏며느리 역할을 묵묵히 잘하였다.
부모님 모시고 형제자매끼리 모이던 명절은 조카들이 결혼하고 손자까지 태어나니 훌쩍 30명이 넘어섰다. 아내는 며칠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모든 일이 잘 되는 줄 알았으나 눈치 없는 필자만의 착각이었다. 한 해에 몇 차례 모임에 녹초가 된다는 사실을 사화은퇴 후에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아들과 딸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였다. “아빠, 엄마의 건강과 변화하는 세상을 생각하여 가족모임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 깊이 생각해보자!”고 대답하였으나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대가족 분가 작전
두 달 전 어머님께서 소천하셨다. 부모님을 하늘나라로 모시고 나니, 필자가 우리가족의 ‘대권’을 이어받았다. 개혁은 집권초기에 번개처럼 하라고 하였다. 장례를 마치고 마무리 가족모임을 가졌다. “부모님 추모회는모두 참가하고, 명절모임은 직계가족끼리 갖도록 하자.”고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허전하다는 등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과감하게 ‘분가’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올 추석부터 대가족 모임이 사라졌다. 아들·딸 가족과 손주까지 9식구만 모였다.
“음식준비를 하지 않으니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는 아내의 이야기였다. 멀지 않는 곳으로 소가족 여행을 갔다. 아이들과 어울려서 추석을 즐겁게 지냈다. 가족밴드에 사진을 올려서 가족끼리 재미있게 지내는 동생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과거를 떨치고 미래로
부모님이 계실 때에도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장로봉직 중인 큰 동생의 ‘예배’가 모든 행사를 대신하였다. 비신도가 필자를 비롯하여 절반이 넘었지만 예배는 30년 넘도록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큰 동생은 올 추석에도 가족과 함께 ‘믿지 않는 형제들을 구해주소서!“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이다. 40년 넘게 진행되었던 가족모임이 없어져 조금 허전하였다. 북적거리는 추석도 이제 한시절의 추억이 되었다.
가족모임 때마다 손자들에게 족보를 펼치시고 조상님 설명에 애쓰셨던 아버님 생각이 났다. 부모님 추모일에는 ‘메모리얼 파크’에서 온 형제자매가족이 꼭 모일 예정이다. 지난 한해의 이야기를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가족밴드’에 올려서 공유하기로 하였다. 과거회상만이 아니라 재미있는 내일을 찾는 노력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정은 전통의례를 존중하는 경우도 많다. 위에서 밝힌 이야기는 필자의 조그만 경험이다. 추석이란 명절이 온 가족이 모여 감사절의 의미를 더 되새기는 날이 되면 좋겠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박명수(59·여)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양가 하객을 50명씩만 초대하기로 했는데, 남편과 딸의 손님, 친척들을 꼽다 보니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친구는 10명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친구 몇 명을 추려 결혼식을 마쳤지만, 그 후가 더 골치 아팠다. 왜 자신은 부르지 않았냐며 섭섭해 하는 친구들을 달래기 바빴고, 기껏 청첩장을 주었는데 오지 않은 친구 때문에 실망감도 컸다. 고향 친구, 동창, 회사 동기, 동네 이웃도 모자라 SNS로도 친구를 맺는 요즘, 박씨처럼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많거나 관리를 잘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이 늘었다. ‘진정한 우정은 친구의 수가 아니라, 그 깊이와 소중함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영국 극작가 벤 존슨의 명언처럼, 몇 명의 친구를 사귀는가보다는 어떤 친구와 어떻게 지내느냐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도움말 윤선현 베리굿 정리컨설팅 대표
참고 및 발췌
베리굿 정리컨설팅 윤선현 대표의 저서 를 살펴보면 “가장 친한 친구를 꼽아보고, 왜 그가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말해보세요”라는 물음에 90%가 넘는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를 말한다고 한다. 윤 대표는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옛 속담이 있지만, 어느새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란 오래될수록 성공적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오래된 친구가 가장 친한 친구일 경우도 있지만, 응답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그들 중 절반 이상이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당연히 그렇지 않으냐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 친구 관계, 이상과 현실 사이
‘오래된 친구가 좋은 친구다’라는 말처럼 흔히들 착각하는 게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윤 대표는 “자신의 인맥과 범위를 자랑하는 이들이 있다. 집으로 비유하자면 ‘우리 집엔 비싼 물건이 엄청 많아 창고가 세 개나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비싼 물건이 많다는 것은 부유함을 나타내지만, 그 부유함이 꼭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거나, 그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나타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조언한다. 몇 명을 알고 있는지와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왜 친구가 없을까?’라는 불안한 마음에 인맥을 채우려 한다면, 우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관계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체크리스트를 참고해 내가 꿈꾸는 관계와 실제로 관리할 수 있는 관계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1. 나의 VIP(아주 친한 친구)들은 1년에 [ ]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나의 보통 친구들은 1년에 [ ]번은 직접 만나고 싶다.
3. 각각 친구 수를 곱해서 두 숫자를 더한다. 이것은 1년에 약속이 [ ]번 있다는 뜻이다.
4. 나는 한 달에 [ ]번 정도 약속에 나갈 수 있다.
5. 내가 1년에 나갈 수 있는 약속은 [ ]번 이라는 뜻이다. (4×12)
3 의 숫자와 5의 숫자의 차가 클수록 내가 꿈꾸는 관계와 현실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관계의 괴리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년에 나갈 수 있는 약속 수(5)보다 내가 나가고 싶은 약속 수(3)가 많다면, 뜻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버거운 상태일 것이다. 윤 대표는 “한 사람에게 필요한 관계의 양이란 결코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먼저 제외하고, 가장 소중한 가족과 VIP들에게 쏟고 싶은 시간을 제외한 뒤, 그 외의 시간에 감당할 수 있는 관계의 한계를 가늠해야 한다”며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시간부터 확보하고 나면, 양부터 먼저 채우려던 마음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스마트한 세상의 똑똑한 친구 관리
윤 대표는 인맥을 정리할 때 가장 유용한 방법으로 ‘휴대폰 연락처 삭제’를 추천한다. 아마 일일이 전화번호를 외우거나 수첩에 적어 다니던 시절에는 불필요한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휴대폰만 있다면 단 몇 초 만에 연락처를 저장할 수 있고, 외워야 하는 부담도 없기 때문에 요즘은 친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의례적으로 휴대폰 번호를 입력해 둔다. 채우기 쉬웠던 만큼 정리도 쉬운 게 휴대폰 연락처다. 다음 기준을 참고해 지금 바로 연락처를 삭제해보자. ‘그래도 연락할 일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과감히 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 1년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사람
- 앞으로 서로 연락할 일이 없는 사람
- 내 삶을 방해하거나 안 좋은 감정을 주는 사람
- 연락처가 변경된 사람
이 방법을 통해 윤 대표의 한 지인은 휴대폰에 있는 전화 목록 중 무려 600명을 삭제했다고 한다. 스마트한 세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SNS 친구다. 대체로 친구를 쉽게 만들고 초대할 수 있어 정신없이 친구가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윤 대표는 “몇 년 전 맥도날드에서 페이스북 친구 10명을 지우는 사람들에게 햄버거를 공짜로 주었더니, 1주일이 채 되지 않아 23만 명이 넘는 사람이 페이스북 친구 리스트에서 지워졌다고 한다. 쉽게 맺은 관계일수록, 쉽게 끊어지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휴대폰 연락처처럼 친구 목록을 보며 정리도 하고 내가 하는 SNS 특성에 맞게 관계를 유지해보자.
한국인들의 첫 서양 나들이는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에 비해 늦었다. 개항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30년 이상 늦어진 까닭이다. 중국의 개항은 아편전쟁 후인 1842년(남경조약), 일본의 개항은 1854년인 데 비해, 한국은 일본과의 개항조약을 1876년(강화도조약), 미국·영국과는 1882년에 맺었다. 또 일본이나 중국은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각국을 ‘견학’하지만 우리에겐 이 같은 의욕이 부족했다.
조선은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정부 차원에서 허용된 몇 개 항구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해로와 육로를 통한 교류와 통상을 금지하여 문을 잠갔다. 바로 ‘쇄국정책’이다.
조선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약하다고 스스로 평가하여 접촉을 가능한 한 피하려 한 것이다. 교류가 빈번하면 강대국의 영향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이 결과 정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 정권의 안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금지한 근본적인 배경이다. 단지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1년에 네 번 조공 사절을 보냈다.
중국의 명(明)왕조 역시 외래족인 몽골제국 원(元)을 몰아내고 건국되었기 때문에 외부와의 거래는 중국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태조 주원장(朱元璋) 때부터 대외접촉을 억제했다. 주변국들의 조공도 3년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평화가 정착된 후 교류 확대를 허용했다.
조선 정부는 일면 중국과의 접촉을 정부 차원으로 제한하면서 동시에 중국에게는 국경을 철저히 감시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조선인의 압록강·두만강 월경은 극형으로 처벌했다.
그러나 세상만사 자기 뜻대로 되던가.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멈추어 주지 않고’ 조선이 혼자 꿈속같이 편안히 살려고 하나 주변국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제정치가 그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학자들은 1860년대 이후 조선이 중국과 일본 외에는 중국의 허락이 있어야 개항할 수 있다고 내세운 것은 핑계이며 ‘조선의 쇄국은 그 뿌리가 서울에 있다’고 평한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되고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에 대한 풍문이 베이징(北京)이나 도쿄(東京)에서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중국은 조선이 미국·영국 등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도록 주선한다. 서양 국가들을 이용하여 러·일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 전략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서양 국가들은 조선이 자기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수교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국이며 중국의 속방(屬邦)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조선에 특명전권 공사를 파견했다. 미국이 일본과 중국에 파견한 공사와 동등한 직급이다. 영국은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공인되어야 러시아가 열강의 동의 없이 조선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이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조선 문제는 텐진(天津)에서 자기와 먼저 논의하자는 요청을 무시하고 조선 정부와 직접 거래하는 방식을 택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그동안 정치권에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자 중국은 경악한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복귀하면 조선을 개방시켜 러·일을 견제하려는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밑바닥부터 뒤집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 대원군을 지지한 세력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텐진으로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통적으로 중·조 종속관계는 ‘정교금령(政敎禁令)’, 즉 ‘내정과 외교’의 자주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조공, 책봉 등 형식적, 의례적인 문제들을 제외하면 조선이 내정이나 대외문제를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독립국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모호한 ‘종속관계’를 내세워 마치 원(元)나라 시대 고려에 주재한 다루가치와 같이 조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 나선 것이다. 이제 조선은 기막힌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중심인물이 원세개(袁世凱)이다. 이홍장(李鴻章)이 파견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면서 조선 정부를 장악했다. 1859년 생으로 대원군을 데리고 인천에 들어온 것이 1885년 10월 3일(양력)이니 이때 26세 청년이었다. 그는 1894년 청일전쟁 이전까지 오늘날 을지로의 중국 대사관 자리에서 ‘유안 다이런(袁大人)’으로 마치 총독처럼 행세했다. 우리나라가 1946년 10월 서울의 지명에서 일본식 이름을 정리할 때 ‘을지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원세개 등 중국인들의 본거지를 수(隋)양제를 무찌른 을지문덕 장군의 정신으로 제압하려 한 것이었다.
원세개는 서울 주재 외교단의 수장(doyen) 직을 맡으라는 서양 외교관들의 권고를 거부한다. 자기는 중국이 조선에 파견한 외교관이 아니라 조선 문제를 전담한 이홍장(李鴻章)이 조선의 정치를 감독하라고 파견한 ‘주찰조선 총리교섭 통상사의(駐紮朝鮮 總理交涉 通商事宜)’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과 중국은 한가족이라면서 외교사절들을 초청할 때도 자신이 주빈 자리에 앉고 조선의 늙은 외무대신을 말석에 앉혀 손님들을 접대하고 시중들게 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중으로 들어가거나 고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고 인사문제에도 개입했다.
서양 열강은 이에 중국의 조선 통제를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정책을 재평가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1884년 말 “조선에서 미국의 이해는 경제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서울 주재 미국공사의 지위를 특명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minister resident)로 한 단계 격하시킨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영국도 중국과의 협조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판단하면서 조선 독립에 대한 지지를 포기해 버린다.
조선은 중국의 압력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과거와는 판이해졌다. 열강들과의 수교와 만국공법의 도입으로 평등성에 기초한 유럽적 국제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과거에는 중국만이 강대국이었으나 이제는 중국을 굴복시킨 강대국들이 포진하고 있다. 1885~1887년 영국의 거문도 철수는 중국을 통한 교섭이 실패한 후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해결됐다. 국내에서도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독립당-개화파가 대두했다.
이에 정부는 1884년(고종 21) 조선·러시아 수교조약 체결 후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해가는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는 밀약을 두 차례 추진하며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조치를 취한다. 해외 나들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