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는 결혼을 하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산을 하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면서 살다 보면 젊은 시절의 경력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지’ 하면서 단념하려던 순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빛을 따라 즐겁게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취업과 생애 설계 분야 전문 강사이자 컨설턴트인 일·생애연구소 임순열 대표는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에요”라며 활짝 웃었다.
지난 10월 10일 경기도 파주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일·생애연구소 임순열(55) 대표와 만나기로 했다. 이곳은 임순열 대표에게 친정과도 같은 곳. 작년 말까지 센터 내에 있는 파주상공회의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직업상담 팀장으로 일해왔다. 이날은 일·생애연구소 대표로서 강단에 서는 날이었다.
“10월 1일에 일·생애연구소 사업자등록증을 받았어요. 직업상담사로 일하면서 취업 역량 강화,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작성법, 면접 교육 관련 일을 해왔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싶었어요. 취업과 생애 설계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할 계획입니다. 오늘은 ‘중장년의 셀프 마케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합니다. 일자리를 찾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얻는 방법을 전달해드릴 계획입니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살다
임 대표는 직업상담사로 사는 게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도와서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도, 취업이 된 사람들이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단다.
“거의 직업상담 일에 미쳐서 살았어요. 구직자들이 처음에 센터를 찾아올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십니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분들도 그렇고요. 어떤 경력이 있는지 자격증은 있는지 등등 초기 상담을 하면서 맞춤 일자리를 지원해드렸습니다. 이력서 쓰는 방법도 알려드리고 동행 면접 서비스를 원하시면 같이 갔습니다. 별종 소리를 들을 정도로 7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때를 회상하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냈을까 싶을 정도로 제대로 빠져 있었다. 막내아들의 군 입대가 계기였다고 했다.
“2010년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친구랑 동반 입대를 했어요. ‘그래, 넌 나라 지켜라. 엄마는 엄마 일 할게’ 이런 마음으로 가족상담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랑은 성향이 맞지 않았어요. 그 무렵 누군가 직업상담사도 있다고 소개해줘서 2011년 5월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상담에 필요한 자격증은 부지런히 공부해 하나씩 따냈다. 가족상담사 2급을 시작으로 직업상담사 2급, 평생교육사 2급 등을 취득한 후 2017년에는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까지 섭렵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따면서 동시에 교육자로서의 꿈도 함께 키우기 시작했다.
“고양시에서 직업 관련 교육을 받을 당시에 강사님이 인상에 남았어요. 나도 저런 강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강의를 너무 잘하셨어요. 상담사 공부를 할 때부터 강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특히 임순열 대표가 취득한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은 전국적으로 500명이 조금 넘는 정도. 직업상담사 2급 자격증 보유자가 5만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1%밖에는 안 된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임순열 대표다.
“2012년 파주시교육문화회관에서 계약직 직업상담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2년 후에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버렸어요.”
파주상공회의소가 고용노동부 사업인 중장년일자리 프로그램 사업을 따오자 임순열 대표의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2015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짜리 채용공고가 났습니다. 물론 제 판단으로는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자리였고 상담보다는 교육 관련 일을 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기계약직 체결을 해줄지는 알 수 없었어요. 그래도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는데 채용됐어요. 파주상공회의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팀장으로요. 무기계약직도 좋았지만 저는 상담보다는 교육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고 도전하는 것에 큰 두려움도 없었어요.”
비서교육 제대로 받은 커리어우먼
직업상담사의 길을 걷기 전까지 임순열 대표도 몇 번의 경력단절을 겪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을 하면 으레 회사를 나가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한국과학기술대학(현 카이스트)에서 학장 비서로 근무했어요. 그때는 비서 하면 커피나 타고 전화만 받던 시절이었는데 저희 학장님은 달랐어요.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오셔서 비서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분이셨죠. 스케줄 관리에서부터 서류작업, 각종 스크랩 업무 등을 보면서 VIP 응대도 자주 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그룹 회장님도 만났어요. 비서로서 제대로 일을 배웠습니다. 제가 결혼할 무렵 학장님이 한국과학재단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저도 함께 갔는데 그만둬야 했어요. 재단 쪽 분위기가 결혼한 여자가 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저도 학장님께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 후 아이 낳고 가정주부로만 살다 보니 좀 답답하더라고요.(웃음)”
임 대표가 집 밖으로 뛰쳐나온 계기가 된 건 2001년 친정부모님이 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부모님과의 이별에 우울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밖에 나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결국 주부가 쉽게 도전 할 수 있는 학습지 선생 일을 4년간 했다. 그리고 5년여를 다시 쉬다가 2010년부터 직업 상담 분야에 눈을 떠 지금에 이르렀다.
“2018년 12월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스 강사로 독립했습니다. 오랜 시간 참 많이도 다니면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좋은 인맥들이 생겼어요. 올해까지는 준비하는 상황이라서 홍보도 못했는데 강의해 달라고 연락을 주십니다. 한 달에 네다섯 번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서울 강의 입성기
임 대표가 주로 강의활동을 하는 곳은 고양, 파주, 청주 등 수도권이다. 그런데 지난 9월 처음으로 서울에서 강의할 기회가 찾아왔다.
“노사발전재단에도 중장년일자리지원센터가 있어요. 노사발전재단에서 퇴직 교원들을 위한 전문강사 양성과정을 진행했는데, 퇴직 교원이 아니더라도 구직자라면 그 과정을 들을 수 있었어요. 양성과정이 끝날 때 강의 시연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원하는 사람만요. 시연을 잘하면 노사발전재단에서 전문 강사로 쓰겠다는 문구가 떠올라서 저도 한다고 했습니다. 생애설계 관련 주제였는데 퇴직 교사들에게 맞춘 강의을 했어요. 전문 강사 한 분과 노사발전재단 소장님이 심사위원이셨는데 좋은 평가를 주셨어요. 이후 강의제안서를 냈고 제가 된 거죠. 노사발전재단은 공공기관이잖아요. 강의자리 따기가 쉽지 않아요. 서울에서 강의를 마친 다음 날 청주에서 강의가 있어 새벽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서울 입성기를 올렸어요. 라디오 DJ가 첫 사연으로 읽어줬습니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겪은 어려움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임순열 대표는 말했다.
“의미 없는 시간은 없어요. 비서 시절에는 높은 분을 많이 상대하면서 예절을 잘 배웠고요. 학습지 선생으로 활동할 때는 교육 일과 영업 일을 경험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제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됐습니다.”
60세 전에 퇴직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 뒤에도 20~30년은 더 살게 될 텐데 아무 일도 안 하고 지내기엔 너무 고약한 현실이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일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임 대표는 말한다.
“노년의 삶에 대해 공부를 더 해서 봉사도 하고 강사로도 활동하면 좋겠어요. 역량이 되는 한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며 살고 싶습니다.”
“마, 잡상인은 저리 가이소!” 아무리 농이 섞였다 해도 지인의 한마디는 그를 슬프게 했다. 23년간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경상도 사내로서는 분을 삭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빙긋이 웃는다. 사소한 냉대쯤은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거절도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보람상조에서 장례지도사 겸 상조상품 세일즈맨으로 활동 중인 김길후(金佶喣·48) 씨 이야기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칸 영화제를 휩쓴 영화 ‘기생충’의 대사 한 구절처럼 김길후 씨 역시 계획이 다 있었다. 23년간 근무하던 해운대구청을 떠날 때, 그는 당당했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명예퇴직 신청을 받을 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버티려고 했다면 정년퇴직 때까지 버틸 수도 있었죠. 퇴직 후 나름의 계획도 있었고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와 보니 예상과는 달라 당황했습니다. 그 후 제가 세운 원칙 중 하나는 ‘직접 눈으로 보고 결정하자’였습니다. 지금 입사한 회사도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해운대구청에서 23년 근무
그가 해운대구청에 입사한 것은 1996년 8월. 오랜 기간 구청에 근무하면서 안 해본 일이 없다. 주로 담당했던 업무는 재개발로 인한 토지수용 업무나 토지이동, 환경개선부담금 관련 일이었다. 당시 해운대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등으로 인한 재개발 수요가 많아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제가 입사할 때는 해운대에 수영비행장 자리가 남아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와 비교하면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죠. 재개발과 관련한 업무가 쉽지 않았던 건 다른 사람의 재산을 다루는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업무를 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죠.”
장례지도사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김 씨는 동부산대학교 장례지도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관련 업종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면서 웃는다. 그 후로도 그는 영산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고, 법무사와 공인중개사 공부도 병행했다.
“법에 대해 잘 알게 되니 많은 분을 도울 수 있게 되더라고요. 재개발로 집을 잃은 분들에게 임대주택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거나, 전세금을 날리게 된 가설건축물 임차인들이 최소한의 금액이라도 회수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죠. 그래서 구청 내에서도 절 찾는 사람이 많았죠. 공무원들이 업무상 송사에 휘말리는 경우가 간혹 있거든요.”
한때는 공무원 노조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정도로 조직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노조 지부 중 회계 내역을 홈페이지에 투명하게 공개한 곳은 그가 총무국장으로 있었던 해운대구청이 최초였다.
명퇴 후 삶, 계획대로 안 돼
그가 명예퇴직을 결심한 것은 2017년이다. 한때는 진급도 꿈꿨지만 공직사회에서의 한계를 느끼면서 두 번째 인생을 살아보고자 도전을 선택한 것.
“워낙 재개발 관련 업무 경험도 많고, 인맥도 넓어 일단은 그쪽 일을 시작했죠. 변호사 사무소의 사무장 역할이었어요. 처음엔 재미있었죠. 공직에서 나온 만큼 좀 더 자유롭게 일을 할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문제는 시장의 변화였어요. 로스쿨 제도 도입 등 이런저런 요인들로 인해 시장이 혼탁해져갔어요. 의뢰인에게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주고 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수임을 하기 위해 무조건 이긴다고 유혹하는 변호사 사무소가 늘기 시작한 거죠. 결국 1년을 못 버티고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김 씨의 방황은 다시 시작됐다. 경매학원에 등록해 부동산 경매에 대해 알아보고, 개인회생 분야도 조사했다. 한국폴리텍대학에서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방황이 끝난 것은 지난해 7월. 지인 소개로 보람상조개발을 소개받으면서부터다. 공무원에서 세일즈맨, 즉 영업직으로의 변신이었다.
“처음엔 나를 내려놓고 세일즈맨이 된다는 게 쉽지 않았죠. 이 제복을 입는 데 한 달이 걸렸어요. 공직자에 사무장 출신인데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인생을 턴할 수 있는 기회이고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문해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 고심 끝에 내린 결심입니다.”
세일즈, 나를 내려놓는 일
세일즈맨이 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지인들에게 핀잔을 듣는 건 기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리하지 않고 고객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상품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노력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초창기에는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실감하게 됐어요. 최근에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노력해요. 일부러 제복도 입고 가죠. 약속 장소로 정해둔 식당이나 카페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고요, 고객이 있을 만한 교육 과정에도 참여해 인맥을 넓히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공직자 때는 상상도 못했던 정치 단체에서도 활동해요. 또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다양한 교육들이 큰 도움이 되죠.”
김 씨는 중장년에게 자신의 직종과 같은 세일즈 분야는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의지만 있다면 정년 없이 계속 일할 수 있고, 노력에 따른 경제적 보상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중장년들은 자신이 한창 잘나갈 때의 추억에 젖어 있잖아요. 그러니 나를 내려놓기 쉽지 않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중장년의 이력서를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아요. 저도 면접관이 되어 중장년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자존심 버리는 것을 가장 어려워해요. 면접에 통과해도1년 이상 롱런하는 분들은 20%가 안 돼요.”
그는 지금 일하는 직장의 장점으로 ‘수평이동이 가능한 문화’를 꼽았다. 조직 내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해내면 영업직이 아닌 관리직 등 다른 부서로의 이동도 가능하다는 것. 김 씨는 “최종 꿈은 직영 장례식장에서 일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정보를 직접 확인하고 판단할 것을 당부했다.
“많은 분이 인터넷에서 떠도는 불확실한 정보만 가지고 판단해요. 그 정보들 중 상당수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어떤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꼭 눈으로 확인하고 결정하면 좋겠어요. 중장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게 세일즈라 해도요. 직접 부딪쳐보는 게 중요합니다.”
“국내 중장년 취업에 대한 지침의 상당수는 가짜 뉴스 수준입니다.” 2005년부터 한국과 미국계 전직지원(轉職支援) 회사를 통해 중장년 재취업과 인생 2막 설계 컨설팅 분야에서 입지를 다져온 돈·일·꿈 연구소 간호재(簡鎬宰·49) 소장의 일갈이다. 현재 인력수급기업 ㈜에이치알맨파워그룹에서 4050 재취업컨설팅 사업부에 소속돼 활동 중인 그는 40~50대의 재취업을 위한 제도가 빈약하고, 지나치게 단기적 성과를 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중장년들이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서 ‘4050 재취업 성공의 비밀’을 통해 중장년 재취업을 위한 다양한 전략을 제시한 그를 만나 40~50대가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할 5가지 원칙에 대해 들어봤다.
소극적인 태도를 바꿔라
간 소장은 우선 퇴직 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랜 직장생활로 굳어진 몸과 마음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조직생활은 사람을 경직시키고 수동적으로 만들어요. 특히 공기업, 대기업 출신이 더 심합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직장을 원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또 원하는 직장과 새로 진출하고 싶은 분야가 있으면 스스로 알아보고 기본 조사활동 등을 해야 하는데 수동적인 태도가 발을 떼기 어렵게 만듭니다. 퇴직자들이 일자리 관련 기관에서 무턱대고 좋은 직장을 소개해 달라고 하거나, 프랜차이즈 사업에 현혹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는 현장에서 구직자들을 만나보면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을 뿐, 대다수가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간 소장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라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거나 관심 분야에 대한 시장조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는 사람, 심지어 모르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받게 돼요. 그동안 쌓아온 인맥도 도움이 되고요. 하지만 방 안에서 인터넷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인터넷 정보는 한계가 있다
간 소장은 “갈 곳이 없다며 푸념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정보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구직자들을 만나 구직활동에 하루 몇 시간 투자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2시간도 채 안 돼요. 중장년 구직자, 특히 공기업·대기업 출신자들은 그렇게 해선 원하는 직장을 찾기 어려워요. 그 나이의 재취업은 부장급 이상을 바랄 텐데, 중견기업도 그 정도 직급은 채용공고를 통해 선발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까요.”
그가 권하는 방식은 “나를 마케팅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일을 잘할 수 있을 만한 기업을 골라 해당 기업의 임원이나 대표에게 직접 접근해보라는 얘기다.
“수십 년간 직장생활을 해왔으니, 자신이 조직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는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그 점을 기업이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지요. 부장급 이상 직원 채용에 관여할 만한 임원이나 회사 대표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회사에 어떤 성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제안서’를 보내보라는 겁니다. 물론 정성을 들여 작성해야겠지요. 특히 우편을 통해 전달된 서류는 의사결정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결원이 생겼을 때 자연스레 후보 대상이 될 수 있지요.”
임원 채용 시에도 자소서를 본다
그는 재취업 과정에서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수십 년 전 입사해 지금까지 일만 해온 분들이라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또 성장 과정 등을 작성할 때 빈칸 채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기업에서도 임원 채용을 할 때 자소서를 봅니다.”
간 소장은 입사하고 싶은 기업에 제출할 서류를 작성할 때 중요한 원칙이 있다고 했다. 바로 회사 입장을 생각하면서 쓰라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데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작성하고 마는 것이죠. 하지만 서류에 들어갈 내용은 회사가 듣기 원하는 것들이어야 해요. 자신이 해당 직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태도와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줘야 해요. 그러려면 성장 과정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합니다. 기업에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에요.”
눈높이 낮출 필요 없다
중장년 취업과 관련된 기관이나 전문가들은 구직자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한다. 부족한 일자리에 경쟁도 심하니 설령 낙오되더라도 좌절감에 빠지지 말고 눈높이를 낮춰 일자리 확보부터 하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간 소장은 반기를 든다. “그동안 전문성을 갖고 기업이나 기관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왔던 40~50대라면 눈높이를 낮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눈높이를 낮춘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최저임금 정도로 급여 수준이 낮다면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을까요? 또 연봉을 낮춘다고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연봉을 얼마나 낮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재취업할 기업을 위해 어떻게 이바지할까를 고민하는 게 훨씬 합리적입니다.”
그는 만약 연봉을 낮춰야 한다면 그 마지노선을 전 직장의 70%로 잡으라고 조언하면서 100일 안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계획을 잡고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자발적인 준비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할 경우 취업 요령이 생겨 원하는 시점에 회사를 옮길 수 있는 능동적인 삶의 기틀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간 소장은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할 때 “돈부터 쓸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돈부터 쓸 생각 버려라
“창업 업계에서 공무원, 군인, 교사 등의 퇴직자는 주요 고객입니다. 금전적 여유도 있고 돈으로 투자하는 결정을 쉽게 내리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지요. 퇴직 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6개월 정도는 무작정 쉬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여행도 하고 취미활동을 하며 시간을 잘 보내다가 어느 날부터 주변 눈치를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무턱대고 자격증부터 따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겪게 되는 초조함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체면을 세우기 위해, 창업이나 자격증 취득을 위해 돈부터 쓸 생각을 해선 안 됩니다. 잘못된 결정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경제적 타격을 입으면 남은 삶을 포기할 수도 있어요.”
창업을 하고 싶다면 자산 규모에 맞춰 실패를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고려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이다. 그가 기술·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40~50대가 여생을 설계할 때는 일보다 삶을 우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지금의 중장년들은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요. 조직에서 오래 생활했던 사람은 의존적인 태도를 버리고 온전한 독립을 이뤄내야 하고,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책임이 끝날 때는 완전한 해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 이 시점에 이루고 싶었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도 고려 사항이 되는 것이죠. 일이 인생을 결정했던 평생직장 시대와 달리 지금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고 나서 그에 맞춰 직업을 고민해야 합니다. 충분한 사유를 통해 인생 2막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시니어에게는 ‘평범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숙제가 된다. 예전엔 일상처럼 해왔던 운전이나 일, 독서, 운동 등도 어느 날부터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초고령 국가 일본에선 최근 시니어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노인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운전 능력 자가진단으로 해결
고령자에 의한 교통사고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실제로 2014년 51건에 그쳤던 90세 이상 노인에 의한 교통사고는 2017년 131건으로 늘어나 큰 증가세를 보였다. 일본에서도 고령자 교통사고는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 3월 JAF(사단법인 일본자동차연맹)에서는 노인의 즐겁고 안전한 운전을 위한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공개했다. 연맹이 개설한 ‘고령 운전자 응원 사이트(jaf-senior.jp)’를 통해 공개된 이 프로그램은 안전운전과 면허갱신 등에 필요한 내용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간단한 퀴즈를 통해 운전자의 시각과 인지능력을 테스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운전 능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연맹 측은 “게임 형식으로 제작돼 즐기면서 훈련을 반복할 수 있고, 운전에 필요한 인지기능 유지와 강화에 일조할 것”이라면서 “사회 문제인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 방지를 위한 활동을 앞으로도 펼쳐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도쿄도민의 제2인생 응원 사업
도쿄도(東京都)는 지난 3월 27일, 6개월간의 교육이 진행된 ‘도쿄 세컨드 커리어 학당’의 수료식을 진행했다. 도쿄 세컨드 커리어 학당은, 평생 현역을 위한 두 번째 경력(직업)을 원하는 희망자 중 도내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사업으로 지난해 10월 시작됐다. 총 112명의 1기 수료생은 두 곳 시설에서 커뮤니케이션 스킬, 기획 실습 강좌 등 51개 수업을 수강했다. 도쿄도 측은 홈페이지를 통해 수강생 중 취업을 원하는 60명의 명단인 ‘시니어 인재 목록’을 기업을 대상으로 공개했다. 도쿄도 측은 “노인에게 취업은 단순히 수익 수단을 넘어 삶의 보람을 얻도록 하고, 사회와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면서 특히 “저출산 초고령 사회에서 발생하는 기업의 인력 부족에 시니어의 경험과 인맥은 도움이 되므로 앞으로도 노인이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새로운 시니어 아지트 ‘탁구 카페’
최근 일본에선 지자체와 기업, NGO, 의료기관이 힘을 모아 시니어를 위한 아지트 ‘탁구 카페’를 만들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구와나(桑名) 시와 기업 네슬레 재팬, 구와나 시 종합의료센터, 탁구로 건강한 일본 만드는 모임 등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탁구 카페를 거점으로 지역 시니어 등 다양한 계층에게 운동 등 건강에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모임 장소도 되고, 탁구대 등의 시설을 통해 운동 기회를 제공하는 헬스 공간도 된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또 필요에 따라 건강 강좌나 요리교실 등의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노인에겐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삶의 지혜와 경륜이 있다는 의미다. 당연히 대우를 받아야겠지만, 도서관이 너무 많아 희소가치가 떨어지거나 용도가 많지 않아서인지 대우를 제대로 못 받고 있다. 아는 것을 말이나 글로 조리 있게 표현할 줄 몰라서 사장되기도 한다. 자기 전문 분야를 강연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회도 잡기 어렵다. 고려청자의 비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사장된 것처럼 대부분의 노인이 입을 다문 채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나는 30년간 댄스스포츠에 몸을 담았다. 5000여 편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댄스 칼럼’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댄스는 몸으로 하는 것이므로 글로 표현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댄스의 본 고장인 영국에 유학 가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선생으로부터 열심히 댄스에 관한 글을 쓰라는 격려를 받았다. 유능한 댄스 교사는 몸뿐 아니라 글로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나는 영어에 능통해 외국 서적과 인터넷에서 얻은 댄스 정보를 번역해 소개했다. 세계 챔피언급 선수들과의 교류와 인터뷰로 궁금한 내용들도 물어봤다. 세계 댄스 기구, 각국 문화원에 문의해 정보를 얻어 칼럼도 썼고 책도 여러 권 냈다. TV에도 출연했다. 그럼에도 대학교수가 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교수가 되기에는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인맥이 없으면 대학 강단에 서기 어렵다.
‘ISTD’는 ‘Imperial Society of Teachers of Dancing’의 약자다. 영국에 본부를 둔, 100년 넘은 댄스 관련 민간기구인데 ‘영국 황실무도교사협회’로 번역되어 회자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곳에서 주는 자격증을 딴 사람이 많다. 명함이나 그들이 출간한 책자에는 버젓이 ‘영국 황실무도교사협회’ 회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얼핏 보면 영국 황실 산하단체로서 대단히 권위 있는 기구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단체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서 ISTD 본부와 영국문화원에 문의해 이 단체가 ‘영국 황실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답을 받아냈다. ‘Imperial’이라는 단어가 ‘황제의, 황후의, 황실의’라는 뜻도 있으나 ‘제국의, 대영제국의’라는 의미도 있는데 ‘영국 황실’을 갖다 붙인 것이다. 100년 전 영국은 ‘대영제국(The British Empire)’이었다. 거기서 나온 ‘제국’이라는 의미라 했다. 영국문화원에 이어 ISTD 본부에서도 같은 답을 보내왔다. 일본에서는 그냥 ‘ISTD’라고 부른다 했다.
이 일은 내가 댄스와 관련해서 한 일 중 가장 큰 업적이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ISTD’는 여전히 ‘영국 황실무도교사협회’로 오역되어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댄스계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영어가 가능했기에, 또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얻어낸 결과다. 댄스에 관한 한 나는 버젓한 도서관 한 채라고 자부한다.
평생 현역시대다. 이런 경향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10월 고용동향 발표를 살펴보면, 60세 이상 취업자 수는 2017년 같은 달에 비해 24만3000명이 늘었다. 중장년의 ‘일자리 찾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은퇴 후 새 일자리를 찾는 ‘베이비붐 세대’의 진입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장년은 성공적인 취업을 위해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노사발전재단 경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임선화 소장을 통해 그 방법을 알아봤다.
1 진짜 원하는 것이 뭘까? ‘나를 알아야’
일자리 지원 기관의 실무자들은 “상당수 구직자는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의 분야를 명확히 말하는 구직자를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 심지어는 “그냥 좋은 곳으로 하나 소개해 달라”며 떼를 쓰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일자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임선화 소장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아무데나 괜찮은 자리로 취업시켜 달라”고 요구하기보다, 자신의 직무 경력을 상세히 설명하고 지원 가능한 일자리를 소개받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물론 원하는 일자리의 이상향을 구체화하는 것도 좋다. 업무 분야나 지역, 근무시간 등도 미리 생각해야 구직에 유리하고, 원하는 급여 수준도 어느 정도 정해놓아야 한다. 생계유지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된다면 봉사활동이나 재능기부 형태의 일자리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방법이다.
2 취업시장에 경로우대는 없다 ‘나를 가꿔라’
“면접 보는 날 등산화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시는 분도 적지 않아요.” 일자리 지원 기관 실무자들이 꼽는 가장 난감한 경우 중 대표적 사례다. 애써 면접까지 성사시켜놨더니 최소한의 예의도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한다.
구직 행위는 기업에 나를 선보이는 일이다.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좋은 인상을 보여줘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다. 중장년 구직자 중 상당수가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다. 그러나 기업의 구직자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이 종이 몇 장에 의해 판가름난다.
내가 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자신 없다면 관련 기관 서비스를 이용해보는 것도 좋다.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전직지원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재취업 상담을 통해 작성을 도와주기도 하고, 구직서류클리닉에선 작성된 서류를 점검한 후 모의면접을 통해 면접 성공 가능성을 높여준다.
3 나를 위한 ‘꿀’직장은 없다 ‘눈높이를 낮춰라’
중장년 구직자 선호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재취업 시장에서는 잘나가는 대기업 출신 퇴직자가 ‘기피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의외로 크다는 것이다. 의외다. 가장 체계적이고 선진화한 시스템의 첨병에 있던 인재라면 사람을 취업시켜야 하는 입장에선 가장 좋은 상품 아닐까? 하지만 전 직장보다 주먹구구식인 시스템에 불만만 쌓일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 출신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중장년을 받아주는 일자리는 대부분 척박하다. ‘왕년에’ 근무했던 일자리와도 대부분 거리가 멀다. 통계청이 지난 10월 발표한 2018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 취업자의 산업 및 직업별 특성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취업한 50세 이상 취업자 고용 분야 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은 농축산 숙련직이 차지했다. 청소 및 경비 관련 단순 노무직이 뒤를 이었다. 이와 비슷한 통계가 있다. 바로 교육 정도별 취업자 통계다. 중졸 이하 취업자의 분야별 규모 역시 1, 2위가 농축산, 청소 및 경비 관련 순이다. 50세 이상 취업자 통계와 같다. 이는 결국 50세 이상이 얻은 일자리가 흔히 말하는 ‘양질의 일자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고 눈높이를 낮춰 내게 맞는 일자리를 찾는 것이 유리하다.
4 퇴직 후는 늦다 ‘경력 관리는 미리 준비하라’
정년퇴직 후 인생 2모작을 준비하는 중장년 중 상당수는 자격증을 돌파구로 삼는다. 퇴직 후 자격증 획득, 그리고 취업의 순서를 꿈꾼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퇴직 후 준비는 늦다”고 입을 모은다.
퇴직 후 자격증 취득 등을 위한 구직 준비기간이 길어지면 이력서를 받아보는 기업 입장에선 경력 공백이 길어진 이유를 의심하기 쉽다는 것. 또 자격증 취득 후 해당 분야로 취직이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준비기간은 말 그대로 허송세월이 될 뿐이다. 자격증이 들이대면 구직 문제가 술술 풀리는 ‘마패’ 같은 존재는 아니기 때문. 현장 전문가들이 “자격증 장사에 현혹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 소장은 “퇴직 전 본인의 평판이나 경력, 인맥 등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생애경력설계서비스 등을 통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하면서 “내가 취득하고자 하는 자격증의 전망 등 정보가 궁금하다면 중장년 취업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같은 기관을 통해 정보를 접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5 선입견은 금물 ‘공공기관의 구직지원 서비스를 이용하라’
정부부처 산하의 기관이나 지차체 등에서 다양한 구직지원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구직 경험자들이 꼽는 공공기관 구직지원 서비스의 장점은 크게 3가지다. 우선 대부분 별도의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 사설기관에선 교재나 경력설계, 자격증 취득 등을 미끼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별된 구직정보도 장점이다. 물론 공공기관이라고 모든 일자리에 대한 검증을 진행하진 않지만, 문제가 될 만한 다단계 등 불량 기업은 어느 정도 선별된다.
마지막으로는 기관의 네트워킹에 있다. 중장년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유관기관과 연계하여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형식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이용해보기를 권한다.
점진적 은퇴란?
생애 주된 일자리 퇴직 후 바로 은퇴하지 않고, 일하는 시간을 줄여 기간제 또는 주 3회 정도 일하며 근로기간을 연장하는 은퇴 기법. 즉, 퇴직과 은퇴 사이가 점진적 은퇴기간 의미. 소득공백기간과 자산 소진 속도 감소 효과가 있음.
Tip① 직장인 때부터 제2인생 설계
준비된 사람은 퇴직 후에 충격도 덜하고 재취업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음. 퇴직 전후 5년이 제2의 일자리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골든타임. 늦어도 퇴직 3년 전부터 일자리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 실천에 들어가야 함.
Tip② 재취업을 위한 사전교육
은퇴를 앞두고 관심 분야의 교육을 미리 받고 자신의 인생 후반전을 맡길 만한지 진지하게 점검. 온·오프라인 교육기관 등을 활용해, 은퇴 전 3년 정도 퇴근 후와 주말을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노력이 필요함.
Tip③ 자신만의 주특기 계발
재취업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주특기(지식, 기술, 인맥)가 필수. 노후에 양질의 근로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 근로직이나 소자본 창업보다는 한 가지 기술을 배울 것을 추천. 나만의 주특기를 스스로 찾아보고 계발해나가야 함.
Tip④ 눈높이는 낮추고 체면은 버려야
퇴직 후에는 재취업 기회도 줄고, 보수가 많은 정규직보다 저임금의 시간제 일자리가 다수. 특히 비정규직 중 시간제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80만 원선. 꼭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눈높이를 낮추고 체면을 버리는 자세가 중요.
Tip⑤ 소득공백기를 대비하라
대부분 퇴직 후 소득은 줄지만 자녀교육비 지출은 여전. 최선의 대비책은 국민연금 수령시점까지 계속 일을 하거나 퇴직연금과 연금저축을 가교연금으로 활용하는 것. 근로기간 연금저축과 IRP 납입 시 연말정산 세액공제 혜택 부여.
우리는 귀촌이라 하면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안빈낙도의 생활을 즐기는 과정을 떠올린다. 제2인생을 위한 새 출발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령화 사회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이웃 나라 일본은 어떨까? 일본에서는 최근 다거점생활(多拠点生活) 혹은 다거점라이프(多拠点ライフ)가 새로운 귀촌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단어의 의미 그대로 생활의 거점을 여러 곳 만든다는 의미다. 또 다른 생활의 터전을 만든다는 면에서, 그저 자연을 벗 삼아 쉬는 것이 주목적인 별장의 개념과는 다르다. 이 이면에는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의 속사정과 특유의 합리성이 돋보인다.
일본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거점생활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귀촌이란 개념에 디지털 유목민, 즉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사고가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니 굳이 생활의 터전으로 도쿄와 같은 거대 도시를 고집할 필요가 있냐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다거점생활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살고 있던 거주지 외 농촌 등지에 또 다른 집(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단순히 집을 마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 거점에서 생산활동이나 인간적 교류를 통해 또 다른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개념이 더해지는 계기가 발생했다. 바로 2011년 3월, 일본을 뒤흔들어놓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지진 공포가 가져온 대피처의 필요성
평생을 한곳에서 살아온 지역 주민들은 대지진 후 삶의 터전을 잃고 가설 마을에서 어렵게 생활하거나 타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정착의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것은 언제든 자신도 재난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신속하게 몸을 옮길 수 있는 피난처의 필요성 등에 대한 고민이었다.
‘다거점생활 추천’의 저자이자 일본에서 다거점생활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언론인 사사키 토시나오(佐々木俊尚)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거점생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동일본 대지진 후 생활의 또 다른 거점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운전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카루이자와(軽井沢)를 선택하게 됐다”며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방사능을 피해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늘었다. 도시민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I턴’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사사키 토시나오는 후쿠이(福井) 지방에도 거점을 마련해 세 곳의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동시에 두 가지 삶, 인생에 활력 줘
‘언아더(another) 거점을 만드는 방법’을 출간한 Think Future의 편집장 사토 하야오(佐藤 駿)는 SNS를 통해 “기존 일본의 이주(귀촌)는 도쿄 생활에 지쳐 지방으로 돌아가는 현역 이후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말하고, “재해 대국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또 다른 생활거점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고, 이를 실행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동시에 여러 곳에 거점을 마련하는 삶은 어떨까. 사사키 토시나오는 다거점생활이 다양한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먼저 도시와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시생활을 겸하는 삶이기 때문에 일이나 사업적 관계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꼽는다. 농촌에서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평소 만나기 쉽지 않았던 농부나 어부 같은 사람들과도 인맥을 형성할 수 있다. 짜여진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도 장점이다. 거점마다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게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동시간은 심기일전의 계기가 된다. 그는 어딘가 떠나고 싶을 때 많은 짐이 필요 없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았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교통비가 비싸 경제적 부담이 따르고, 두 집, 세 집 살림을 하는 셈이니 세간을 마련하는 데 초기 비용이 든다. 또 일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낭패를 겪기도 한다.
또 다른 다거점생활자들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 수 있음을 장점으로 꼽는다. 주말마다 농촌 사람으로 변신해 지역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자신의 재능이나 기술로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다거점생활의 보람 중 하나다. 또 자신이 운영하던 사업체의 또 다른 지점을 개설하듯, 일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검토해볼 수 있다. 기존의 삶과 터전을 유지하면서 또 다른 거점을 개척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이다.
지자체에선 외지인 유치 방안으로 활용
지난 7월 21일과 22일, 일본 야마나시(山梨) 현 고슈(甲州) 시에서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다거점라이프 필드워크 프로그램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행사다. 이 행사는 지역 단체가 다거점생활에 관심 있는 도시민을 초대해 시골생활의 매력과 생활 수단으로 지역에서 생산 가능한 수공예품의 제작 방법 등을 알려주기 위해 진행됐다.
이런 행사는 고슈 시뿐만 아니라 일본 내 여러 지자체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개최되고 있는데, 다거점생활을 활용해 도시민의 유입을 유치하기 위한 지방 정부의 속내가 엿보인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지자체들이 도시민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정기적인 방문을 꾀하는 것이다.
도시민의 이주를 유치하는 데만 매달리고 있는 국내의 귀촌 정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도시민 유치를 거주인구 증가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생활인구 증가에 집중할지 양국 간의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무조건 이주만을 강요하는 국내의 도시민 농촌유치 사업에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연극표 두 장이 공짜로 생겼다. 같이 갈 한사람의 여분이 있다. 평소 알고 지내던 K가 선 듯 같이 가지고 한다. 흔쾌히 OK사인을 보냈다. 혹 잊어버릴지 몰라 전날 카톡을 보내고 연극시작시간 두시간전에 카톡을 다시 보냈다. K가 읽었다는 표시를 확인하고 태평하게 있었다. 그런데 연극시간 다 되도록 만나기로 약속한 매표소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 전화해도 어차피 오지 못할 시간이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무슨 일이 있을 거야! 그냥 약속을 지키지 못할 사람이 아니야 ’하고 속으로 좋게 생각하려고 했다.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어제 바빠서 못 갔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당신도 공짜표가 생긴 것이니 손해 본 것도 없지 않느냐는 말투다. 그럴수록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약이 더 오른다.
동호회 모임에서 어떻게 해서 사람이 빨리 늙는가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술, 담배, 스트레스, 질병 등 여럿 이야기가 나왔지만 결론을 큰 그림으로 간추리고 엮어가니 ‘사람을 많이 만나지 마라’로 귀결되었다. 사람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술도 먹게 되고 스트레스도 받게 된다는 논리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들면 마음이 대범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섬세해지고 소심해진다. 젊었을 때는 별것 아닌 말로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러들을 말도 나이 들면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강해 서럽고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50대 중반의 S여사는 치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필자가 치매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알고 치매에 대한 이런저런 상식을 얻고자 했다. 보건소에서 치매예방 교육이 있는 날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고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했다. 하필이면 그날 눈이 오고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였고 길바닥이 빙판이 되었다. 집도 멀고 당장 필요한 교육도 아니니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약속을 지켜 왔다. 내심 놀랐다. 필자와의 약속 때문인지 아니면 치매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 커서 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약속의 신뢰를 지켜준 것에 감사했다. 시니어들과의 약속은 부도 약속이 많아 속상할 때가 자주 있다. 교육시간에 늦게 참석해도 도대체 미안한 기색이 없다. 강사의 면전에서 버젓이 카톡을 즐긴다. 강사의 입장은 아예 무시해 버리고 나이를 벼슬 삼아 안하무인의 행동 한다.
블로거들의 모임인 ‘한국블로거협회’가 있다. 모든 모임은 고지한 정시에 시작하고 정시에 끝낸다. 늦으면 뒷자리는 당연하고 서있어야 하는 불이익을 의도적으로 준다. 처음에는 불평불만이 있었지만 점차 시간관념이 자리를 잡아 이제는 지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으로 고쳐야 한다.
빨리 가는 것보다 가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 사람을 많이 알고 있는 것보다 신용 있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많은 사람을 만나기보다 인맥을 다이어트해서 필요한 사람을 적절하게 만나고 싶다. 어중이떠중이 많이 안다고 좋다는 보장이 없다. 이기심이 너무 많은 사람, 남을 배려할줄 모르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인맥 주머니에서 골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