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젓한 도서관 한 채

기사입력 2019-03-25 12:18 기사수정 2019-03-25 12:18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노인에겐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삶의 지혜와 경륜이 있다는 의미다. 당연히 대우를 받아야겠지만, 도서관이 너무 많아 희소가치가 떨어지거나 용도가 많지 않아서인지 대우를 제대로 못 받고 있다. 아는 것을 말이나 글로 조리 있게 표현할 줄 몰라서 사장되기도 한다. 자기 전문 분야를 강연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회도 잡기 어렵다. 고려청자의 비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사장된 것처럼 대부분의 노인이 입을 다문 채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나는 30년간 댄스스포츠에 몸을 담았다. 5000여 편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댄스 칼럼’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댄스는 몸으로 하는 것이므로 글로 표현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댄스의 본 고장인 영국에 유학 가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선생으로부터 열심히 댄스에 관한 글을 쓰라는 격려를 받았다. 유능한 댄스 교사는 몸뿐 아니라 글로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나는 영어에 능통해 외국 서적과 인터넷에서 얻은 댄스 정보를 번역해 소개했다. 세계 챔피언급 선수들과의 교류와 인터뷰로 궁금한 내용들도 물어봤다. 세계 댄스 기구, 각국 문화원에 문의해 정보를 얻어 칼럼도 썼고 책도 여러 권 냈다. TV에도 출연했다. 그럼에도 대학교수가 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교수가 되기에는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인맥이 없으면 대학 강단에 서기 어렵다.

‘ISTD’는 ‘Imperial Society of Teachers of Dancing’의 약자다. 영국에 본부를 둔, 100년 넘은 댄스 관련 민간기구인데 ‘영국 황실무도교사협회’로 번역되어 회자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곳에서 주는 자격증을 딴 사람이 많다. 명함이나 그들이 출간한 책자에는 버젓이 ‘영국 황실무도교사협회’ 회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얼핏 보면 영국 황실 산하단체로서 대단히 권위 있는 기구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단체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서 ISTD 본부와 영국문화원에 문의해 이 단체가 ‘영국 황실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답을 받아냈다. ‘Imperial’이라는 단어가 ‘황제의, 황후의, 황실의’라는 뜻도 있으나 ‘제국의, 대영제국의’라는 의미도 있는데 ‘영국 황실’을 갖다 붙인 것이다. 100년 전 영국은 ‘대영제국(The British Empire)’이었다. 거기서 나온 ‘제국’이라는 의미라 했다. 영국문화원에 이어 ISTD 본부에서도 같은 답을 보내왔다. 일본에서는 그냥 ‘ISTD’라고 부른다 했다.


이 일은 내가 댄스와 관련해서 한 일 중 가장 큰 업적이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ISTD’는 여전히 ‘영국 황실무도교사협회’로 오역되어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댄스계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영어가 가능했기에, 또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얻어낸 결과다. 댄스에 관한 한 나는 버젓한 도서관 한 채라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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