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장석주님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경기도 북부에 있는 파주 교하로 거처를 옮겨 첫겨울을 맞았어요. 교하의 평평한 들을 덮은 한해살이 초본식물이 서리를 맞고 시들어 헐거워진 무릎을 꺾으며 가을이 끝나고, 곧 겨울이 닥쳤지요. 지구의 자전축이 태양에서 먼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북반구에 햇빛이 약해지고 동절기가 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올겨울은 유난히 눈도 잦고 한파도 자주 몰아쳤어요. 한파경보와 폭설주의보에 귀를 기울이며 겨우내 실내에 갇혀 겨울을 납니다. 기온이 영하 20℃ 이하로 떨어지는 혹한이 이어질 때 한강 하구 일대는 북극의 바다처럼 얼음덩이로 뒤덮였어요. 강가에서 건물 잔해처럼 나뒹구는 얼음덩이들이 펼치는 낯선 풍경을 하염없이 보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습니다. 노숙자가 동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진 날 한뎃잠을 자다가 얼어 죽은 길고양이도 드물지 않았지요. 고라니나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 언 땅에서 먹잇감을 찾지 못해 인가까지 내려옵니다. 이래저래 겨울은 네 발로 움직이는 동물이나 두 다리로 걷는 사람에게 두루 견디기 힘든 시련과 역경의 계절이지요.
사람이나 동물만 이 혹한을 견딘다고 생각하지만 풀과 나무도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묵묵하게 겨울을 납니다. 나무는 어떻게 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는 걸까요? 나무의 내부는 많은 수분이 있어 얼 수도 있을 텐데, 나무가 영하 20℃의 추위에도 얼지 않고 겨울을 난다는 게 신기하지요. 낮이 점점 짧아지면서 빛이 약해지는 신호를 받고 나무들은 월동 채비를 해요. 활엽수는 잎을 다 떨궈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하지요. 그리고 “세포벽의 투과성이 극적으로 증가해서 순수한 물은 흘러나오고 세포 안에 남은 당, 단백질, 산이 농축”된다고 해요(호프 자런, ‘랩 걸’). 아무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물은 얼지 않지요. 부동액이 얼지 않는 이치가 그것이지요. 살아 있는 유기체 거의 모두가 그렇듯이 나무 내부는 물로 채워진 상자이지만 그 액체가 순수한 상태여서 얼음 분자가 결정을 형성하지 못한다지요.
식물의 씨앗이 보여주는 기다림은 탄성이 나올 정도예요. 가을로 접어들며 초목들은 수백 개에서 수만 개의 씨앗을 제 발치께에 떨어뜨리는데, 씨앗은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배아가 함부로 자라지 못하는 구조이지요. “씨앗 안의 배아는 자라기 시작하면 일단 허리를 굽히고 기다리던 자세를 곧게 펴서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형태를 정식으로 띠기 시작한다. 복숭아씨, 혹은 참깨씨나 겨자씨, 호두씨 등을 둘러싼 딱딱한 껍질은 이런 팽창을 방지하려고 존재한다”(호프 자런, ‘랩 걸’).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배아는 딱딱한 껍질 속에서 긴 기다림을 시작하지요. 운이 좋으면 1년 만에 싹을 틔워 식물의 한 생애를 펼치지만 많은 씨앗들이 기회를 엿보다가 사라지지요. 중국의 토탄 늪지에서 나온 어떤 연꽃 씨앗의 배아는 2000년 만에 과학자의 도움으로 껍질이 벗겨지자 싹을 틔워 놀라게 했습니다. 연꽃 씨앗은 싹을 틔우려고 무려 2000년을 기다렸던 셈이지요.
씨앗은 껍질을 깨야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 수가 있지요. 씨앗은 생의 순환을 겪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저 울울창창한 숲은 작은 씨앗의 기다림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초목들은 지구상에서 공룡이 멸종하고 지구가 몇 번이나 빙하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도처에 숲을 이루며 번성했어요. 그 번성이 작은 씨앗의 분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아름드리 떡갈나무도 배아에서 싹을 틔워 자라난 결과일 뿐이지요. 그러나 무수한 씨앗들은 운이 나빠 싹을 틔울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아 사라지지요. 우리도 기다림 속에서 도약의 기회를 엿본다는 점에서 씨앗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요.
식물이 환경에 순응하며 인고와 복종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걸로 알지만 식물만큼 자기 숙명과 싸우는 존재는 드물지요. 붙박이로 자라는 식물이 침묵 속에서 싸움을 펼치는 까닭에 그 격렬함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할 뿐이죠. 식물은 땅속으로 뿌리를 뻗고 물과 자양분을 끌어다 줄기로 퍼 나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매화나무는 혹한을 견디며 꽃눈을 두툼하게 키우고, 튤립 같은 구근 식물은 땅속뿌리에서 싹을 틔울 준비가 한창이지요. 매운 추위라야 봄꽃이 더 화사하게 피어나는 법이지요. 화사한 봄꽃들이 혹한과 싸워 이긴 승리의 전리품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요!
우리는 식물이 환경에 맞서 싸우는 저 용기와 지혜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현호색, 복수초, 양지꽃, 노루귀, 산달래, 변산바람꽃, 개불알꽃, 제비꽃, 패랭이꽃, 민들레 같은 야생 풀꽃조차 한자리에 붙박인 채 저를 짓누르는 숙명과 맞서지요. 그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동백, 모란, 작약, 산수유, 풍년화, 목련, 영산홍, 개나리, 진달래, 매화나무, 벚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배나무같이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는 초목도 맹추위 속에서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가만히 들어봐요. 초목이 속삭이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요. 헤르만 헤세는 ‘봄의 말’에서 그 말을 받아 적었어요. “어린애들은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것을.//살아라, 자라라, 꽃피라, 희망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내밀라.//몸을 던지고,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느덧 입춘 지나고 우수입니다! 기세등등하던 겨울은 물러나고 곧 누리에 봄이 오겠지요!
파주 교하에서 첫겨울을 나며 오래 소식이 끊긴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젊은 날의 혼돈과 기쁨은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당신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은 따뜻한가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잘 살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살아냄은 태반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다림은 침묵과 혼돈을 견디는 인고의 시간이지요. 독일 철학자 니체가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의 그 혼돈! 기다림이라는 씨앗 속의 배아인 혼돈이 체념의 내성(耐性)을 만듭니다. 하지만 당신, 잊지 말아요. 생명은 춤추는 별이 그러하듯이 불가능한 필연으로서 꿋꿋하게 제 앞의 불확실함을, 제 안의 혼돈을 견디며 살아남음의 영광을 취한다는 것을. 삶의 광휘는 오직 혼돈을 견딘 결과로서 눈부십니다. 당신의 처지가 나쁘다면 좋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꿋꿋하게 기다리기를, 부디 불행에 꺾이지 말고 끝까지 견디고 잘 살기를 바라요. 잘 있어요, 당신.
>>장석주 시인
스스로 산책자 겸 문장 노동자라 일컫는다. 매일 사과 한 알을 먹고 산책하며 침묵과 고요, 단순한 것과 느린 것, 바다와 대숲을 좋아한다.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일요일의 인문학’,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베이비부머를 위한 변명’ 외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사진 촬영을 명령받을 때가 있다. 내 스스로 정한 곳이 아니라,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다녀와야 하는 지역과 대상이 정해질 때다. 프놈펜에서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보트 길이 주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함께 지냈던 유엔 요원들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나를 떠나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멈추면 절대 안 됩니다. 만약 보트 엔진이 꺼지면 침입자로 오인받아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나를 태운 보트는 두 대의 엔진을 가동하면서 만약을 위해 중간중간 연료를 채워 넣어야 했다. 막무가내인 엔진 소음도 투명한 긴장을 깨진 못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이 얕아지더니 구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한 진동이 일었다. 프놈펜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다. 보트가 바닥을 긁고 있었다. 좁고 얕아진 물길에서 배의 프로펠러는 물이 아니라 모래를 밀어내며 탱크처럼 움직였다. 한동안을 그렇게 가면서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제야 유엔 요원이 들려준 주의사항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가 엔진을 멈추는 게 아니라 엔진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야 했다.
마침내 그 고비를 넘기자 거대한 호수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목적지에 닿은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톤네샵 호수는 장관이었다. 두 시간 동안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소음으로 피곤해진 귀가 놀랐다. 고요함. 너무 조용해도 반응하는 것을 보면 귀도 상대적인 감각기관인가보다. 어디 귀뿐인가. 눈과 코가 열렸다. 피부도 긴장해 소름이 돋았다. 호수의 엄청난 크기와 고요 앞에서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내가 느낀 긴장감과는 아무 상관없이 평화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극적인 반전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오감을 되찾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에 내가 보여주고 싶은 사진은 나에게 주어진 다큐멘터리 취재 사진이 아니다. 거기 살고 있는 순박한 사람들을 감싸고 안아주는 구름과 하늘빛이다. 부드러운 메시지는 긴박한 현장 고발 사진보다 더 강했다. 거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물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난 거기서 알았다. 눈에 보이는 평화와 낭만과는 다른 현실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바람과 물 그리고 구름들로부터 위로받고 있었다. 호수 위로 바람이 불자 새들이 날았고, 사람들은 곧 있을 비바람에 대처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여자아이 둘이 아버지를 따라 지붕에 올라가 노는 모습이 뷰파인더에 잡혔다. 아이들은 지는 해를 배경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아이들의 겨드랑이 사이로 조금 더 빨라진 호수의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과 노는 아이들. 이들이 과연 어른들의 싸움에 휘둘리는 아이들인가? 불안으로 가득한 이 땅에서 누가 그들에게 평화를 가르쳤을까?
비 내린 다음 날 하늘은 맑았고 호수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다시 무더운 오후가 되자 그 얕은 평화 위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서너 명의 아이들은 벌써 연잎 하나를 꺾어 머리 위에 썼다. 물에 들락거리느라 벌거벗은 아이들은, 젖는다는 기준으로 보면 연잎 우산을 쓰나 안 쓰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이것은 아이들의 유희다. 세상의 아이콘이다. 자연과 함께 노는 아이들의 방식이다.
톤네샵이 준 선물. 사진을 찍을수록 나의 카메라가 그 선물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더라도 아이들에게서 바람과 비와 나무의 소리를 빼앗고 그 대용물로 장난감과 전자게임기를 건네준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아이들의 웃음과 울음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웃는 웃음 지키기와 빼앗긴 웃음 뒤에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몇 배의 돈이 드는지 나는 사진으로 전해야 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난감해 있는 내게, 연어 빛으로 물들어가는 톤네샵 구름이 보이지 않는 위로의 손이 되었다.
함철훈(咸喆勳) >>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Gems of Central Asia',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Quando il Vento incontra l’Acqua'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보이지 않는 손',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등이 있다.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인 홍익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65). 그와의 3시간여 ‘인생 2막’ 인터뷰는 한마디로 선입관의 전복이었다. 수치에 밝은 냉철한 전문가일 것 같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인문학자에 가까웠다. 직선의 경력을 쾌속으로 걸어왔을 것 같지만 굽이굽이 곡선의 지각인생, 갈지(之) 자 이력이었다. 경력과 브랜드를 보고서 지레 짐작한 선입관은 무너졌다. 홍익희 교수의 인생은 반전과 역전 그리고 결전의 파노라마였다.
첫째 반전,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는 32년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생활을 한 뼛속까지 코트라(KOTRA)맨이다. 중남미, 뉴욕, 유럽 각지에서 해외근무를 했지만 정작 중동 근무를 한 적은 없다. 둘째 역전,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정작 글쓰기와 관련한 일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정년퇴직 후 58세에 본격 글쓰기를 시작한 게 전부다. 셋째 결전, 코트라 무역관장을 거쳐 대학교수로 연착륙한 그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엔 꽃길이다. 정작 본인은 “내 인생의 8할은 열등감과 실패로 가시밭길이었다”고 술회하는 것 아닌가. 노력, 노오력을 넘은 사력으로 역경을 경력으로 전복시켜왔다는 고백이다. 자, 그의 인생 2막의 반전, 역전, 결전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로 꼽히시는데요. 코트라 재직 중 정작 중동 지역이나 관련 문화권에서 근무한 적은 없으십니다. 인생 2막에서 유대인이란 주제를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32년간의 코트라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금융산업을 포함한 서비스산업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내가 서비스산업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했던 유대인 이야기에 당의정을 입히면 공감대를 넓히는 데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32년간 수출전선에서 근무지가 늘어날수록 유대인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금융업뿐 아니라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게 배경이 되었지요.”
그가 맨 처음 유대인들의 힘을 느낀 것은 1983년에 파견된 콜롬비아의 보고타 무역관에서다. 유대인 대형 바이어들과 거래하고, 유대인 군수품 에이전트와 같이 입찰에 응찰하는 것을 비롯, 금융도시 뉴욕에서 근무하면서 유대인의 실체에 대해 보다 깊이 알게 됐다. 세계 각국에 투자된 외국인 자본의 3분의 2는 미국 자본이고 그 태반이 유대계 자본이더란 것. 한 줌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지켜보며 유대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근무지 곳곳에서 경험한 유대인의 힘의 근원을 천착, ‘유대인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유대인 전문가란 브랜드를 구축, 작가-교수로서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시작한다.
책이 작가로서 인생 2막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군요. 뼛속까지 무역맨인 분이 전문작가로 전업하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퇴직 후 투자에 크게 실패했어요. 경제적 손실이 컸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 후 모 중견기업의 경영자로 가기로 돼 있었는데 틀어졌어요. 알고 보니 의례적 인사말을 착각, 김칫국을 마신 것이었어요. 정말 깜깜절벽에 출구가 보이지 않더군요. 경제적 손실만이 아니고 미래의 대책마저 보이지 않으니 살아 있지만 산 것 같지 않은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현실을 잊기 위해선 무언가에 몰입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도피처였다고나 할까요. 온종일 글쓰기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자는 시간 외에는 글만 치열하게 썼습니다. 이때 탄생한 게 50여 권의 전자책들입니다.”
비록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전자책이지만 거의 이틀에 책 한 권 분량을 쓴 꼴이었다. 퇴직 후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갔더니 자그마치 10권 분량이었다. 이때 쓴 ‘유대인 경제사’ 10권을 한 권으로 축약해서 출판한 게 2013년 초에 발간된 ‘유대인 이야기’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썼던 전자책 원고들이 지금은 아이디어의 보물창고가 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 전문가도 투자에 실패하는군요. 퇴직 후 투자 실패였으면 더 타격이 크셨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더라면 강의와 저술을 하는 오늘날의 내가 되지 못했겠지요.(웃음) 외형적 성공은 몰라도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배부르고 등 따시면 하기 힘들거든요. 절박하고 절실해야 글이 써져요. 돌아보면 내 인생의 8할은 실패와 열등감이에요.”
홍 교수님의 이력에서 인생의 8할이 실패와 열등감이란 이야기는 의외입니다.
“열등감이 과도한 인정욕구로 이어지면서 자충수를 둔 경우가 많았어요. 지그재그 인생을 돌아가게 만들고요. 지각인생이고 뒤처진 삶이었어요. 대학 시절,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건축공학을 접고 대학과 전공을 바꿔 재입학한 것도 그렇지요. 외무고시 공부 죽어라 매달려 거의 붙었나 했더니 시위 경력으로 막판에 징집당해 군대를 갔다 오느라 동기들보다 사회 진출이 늦었지요. 코트라 다니면서도 또 사업 한답시고, 가구사업 벌였다가 부도났어요. 당시 채무자에게 전화로 재촉받은 트라우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전화를 늘 진동으로 해놓는답니다. 그런데 퇴직 무렵에 또 투자를 해서 재산을 날렸으니….”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란 말을 자주 했다. 돌아보면 당시엔 역경이고 힘들었던 일들이 나중엔 경력이고, 혜택으로 작용하는 일이 많더란 것이다. 상사의 신문칼럼 대필을 하느라 애면글면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글쓰기의 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해외의 경제상황 보고서 격무로 연일 야근을 하면서 몸무게가 10kg 이상 줄 정도였지만, 그것이 오늘날 경제사 집필의 원천 자료가 되고, 사업 실패가 경영자들에 대한 이해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가깝게는 책 출판이 예정 시기보다 지체된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대기(待機)하는 동안 자료를 보충하며 ‘대기(大器)’로 숙성시킬 수 있었다. 홍 교수가 되새기는 말이 ‘현재에 충실해라’다. “과거의 불완전성,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평하고 고민하느니 현재에 몰입한다.” 그가 인생 수업료를 비싸게 치르고 얻은 교훈이다.
말씀 들으니 참 곡절도 많으셨는데 잘 넘기셨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3초도 안 돼 그는 즉답했다). 제가 청소년기에 비뚤어지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했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을 어머니께 갖다 드릴 때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참 좋았어요. 만인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사랑이에요. 저는 그 점에서 운이 좋지요. 늘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집사람도 내가 사업 부도내고 힘들었을 때 만났어요. ‘학벌도, 얼굴도, 돈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을 나 아니면 누가 구제해줄까’ 하는 모성본능을 발동시켰다고 말하더라고요.(웃음)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돌아보면 돈으로 인한 고난이 제일 약하더군요. 생활수준을 낮추거나 참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건강, 사랑을 잃으면 회복 불능입니다.”
그는 인생엔 ‘동심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어려서 애늙은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애어른’으로 중심을 잡다 보니 지금 오히려 ‘철부지 어른애’로 허당기를 발동한다는 것.
남보다 훨씬 세게 좌충우돌하셨군요. 그러면서도 늘 티핑포인트와 터닝포인트를 마련해 헤어나오셨습니다.
“내가 뭐든 한 번 빠지면 깊이 빠져 잘 헤어나오질 못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역시 장점이 약점이고, 약점이 장점입니다. 무언가에 필이 꽂히면 무섭게 빠지는 것, 좋게 말하면 몰입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독인데요. 식음을 전폐하고 2박 3일 바둑을 둔 적도 있습니다. 인생 반전은 결국 결단력입니다.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결심을 무섭게 하고 바람직한 것에 몰입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그는 ‘인생의 3대 결단’으로 “첫째는 어려운 가정형편인데도 3년 반이나 다닌 대학을 그만두고 재입학 결정을 내린 것, 둘째는 중년기에 바둑을 끊고 그 시간을 독서 등 건설적으로 사용한 것, 셋째는 정년퇴직 후 투자 실패로 힘들었던 시기에 글쓰기에 올인했던 것”을 꼽았다.
아드님만 셋이시지요. SNS를 보면 아드님이 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가족을 위해 양갈비 요리도 하는 등 살갑더군요.
“(얼굴이 환해지며)요즘 세대는 우리와 근본부터 달라요. 나는 전쟁 치르듯 치열하게 살았지만, 얘네는 즐겁게 누리고자 하니까요. 공학을 전공했는데 모 방송 주최 랩 오디션에 나가 본선에 진출하기도 하고…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요. 내가 애들에게 오히려 배웁니다.”
그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영락없는 아들 바보가 됐다. 아들과 와인 관련 공동칼럼을 쓴 적이 있었단다. 소비자가 앱을 통해 와인 품질을 즉각 분석, 판단할 수 있게 한 와인평가 앱이 출현, 전문가 위주의 와인평가 2.0시대에서 소비자 중심의 와인평가 3.0시대로 넘어간다는 트렌드 기사였다. 기성세대인 홍 교수는 이 기사를 쓰는 데 그쳤지만 신세대 아들은 와인 검색 비비노 앱 창업자인 하이니 자카리아슨(Heine Zachariassen)에게 기사를 번역, 복사해 이메일로 보내 교신까지 하더란다. 그는 현재 아들과 ‘실리콘밸리 이야기’와 ‘유대 금융자본과 비트코인 세력 간의 세계대전’ 두 권을 공동집필하고 있다.
유대인 하면 교육열이 떠오릅니다. 자제분들께 적용한 유대인 교육이 있으십니까.
“웬걸요. 애들 어릴 때 저는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지요. 손주들한테는 유아 때부터 적용해보고 싶어요. 특히 베갯머리 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은 꼭 해보고 싶어요. 잠자기 전 동화를 읽어주고, 밥상에서 인생의 산 교훈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하는 것이죠.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교육열이 높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혼자 잘나길 원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협업을 강조합니다.”
그는 유대인과 한국인 교육의 가장 큰 차이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달란트 vs 베스트, 학업 vs 인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공부의 목적을 역량강화, 즉 성공력에 둔다. 반면에 유대인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개발에 둔다.
또 우리는 경쟁에서 승리, 최고가 될 것을 주문하지만 유대인은 단결력에 둔다. 어려서부터 합숙교육을 통해 협동력을 체화해 유대인끼리 서로 형제처럼 돕는다. 상대의 단점을 보며 시기, 경쟁하기보다는 강점을 보며 협력한다. 이들에게 협상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협동능력이다. ‘남을 비난하는 자’뿐 아니라 그것을 말리지 않고 들은 사람까지 ‘공공의 적’으로 금기시한다. 또 실력보다 매력, 즉 인성과 협동심을 우선시한다.
인생 2막을 앞둔 분들께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하늘은 일단 들이대는 사람을 좋아한다”입니다. 당장의 일자리를 찾기보다 오랫동안 할 일거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들이대고 저지르고, 그다음엔 밀어붙여라. ‘하늘은 열정에 반해 마법을 일으키게 한다.’ 힘들 때 내가 스스로에게 한 주문이기도 합니다.”
인터뷰 후, 홍 교수가 자작시를 문자로 보내왔다. 이 시를 읽으며 ‘절대 절대 절대’란 말에 목울대가 울컥해졌다. 지금 2막의 새 신발끈을 묶고 있을 당신, 거센 풍랑에 맞부딪히더라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제목은 ‘거센 풍랑을 만나거든’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고
박차고 일어나 맞서라.
일생에 한 번은 독해져라.
처절하리만큼 치열하게 맞붙어라.
길고 긴 힘들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출구 없는 절망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절대. 절대. 절대.
그 거대한 고난을 이겨내면 은혜는
슬며시 다가온다.
고난에 좌절하면 은혜 역시 고개 돌린다.
은혜는 항상 고난을 앞세우고 다가온다.
거저 오는 법이 없다. 얄미운 은혜다.
강신장(60) (주)모네상스 대표는 지식 디자이너이자 창조 프로듀서다. 지식 속에 숨겨진
창조의 씨앗을 찾아내고 가치를 재해석해 창조의 영감을 생산해낸다. 삼성경제연구소 근무 시절, 대한민국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고, 1만 개에 달하는 5분 동영상 콘텐츠로 1만 명이 넘는 CEO들을 매혹시켰던 그가 2014년 모네상스를 창업, 고전 전도사로 나섰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은 고전’을 세계 최초로 5분 동영상으로 시각화하는 무모한 작업에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다. 문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정치 등 비문학에 이르기까지 총 500권의 고전을 5분 동영상으로 제작하는 작업 대장정을 마쳤다.
“고전(古典) 보기,
더 이상 고전(苦戰)하지 마세요”
그가 만든 영상 고전의 가장 큰 장점은 쉽고 재미있다는 점. ‘읽기도 힘들지만 읽었어도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손에 잡히게 해설해준다. 고전의 줄거리와 평론을 결합, 5분으로 간결하게 만들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 디지털 기기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강력한 그래픽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해 ‘읽는 책’을 ‘보는 책’으로 구성한 게 특징이다.
강신장 대표는 요즘 고전과 노는 게 일이다. 5분 고전동영상(모네상스닷컴) 작업, 고전책(‘고전 결박을 풀다’) 집필, CEO를 위한 고전학교 ‘루첼라이 정원’ 운영 등 ‘고전 삼두마차’를 이끌며 고전의 바다에 풍덩 빠져 있다.
퇴직 후 창업 아이템(?)으로 ‘고전’을 선택하셨습니다. 고전을 5분 동영상화하는 작업에 도전한 특별한 동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창조는 ‘나다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에이티브’라기보다는 ‘오리지널’에 가까운 것이죠. 나다운 것을 만들려면 내가 왔던 곳 오리진(origin)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창조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역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기업 임원생활을 해보았지만 책임이란 짐, 권위와 형식,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틀에 박힌 삶이었어요. 작은 변화도 두려웠고, 나다움을 살리는 생활은커녕 생각 자체가 퇴화되더군요. 그래서 나를 되돌아보고, 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고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겨우겨우 읽어도 그 뜻을 알기가 어려웠지요. 누구나 고전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고전을 외과수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조는 전진이 아니라 역진이다.” 전진과 속도만 외치는 시대라 그 의미가 더 와 닿습니다. 창조력의 비밀을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창조력의 근원은 휴머니티(humanity)입니다. 창조력은 결국 사람을 보고 사람들 마음속에 충족되지 못하고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아픔과 결핍과 갈증을 보는 인문정신에서 출발하니까요. 그런데 휴머니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오직 연민의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기에 최고의 창조기술은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살펴보면 위대한 발견은 모두 연민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파편화된 삶을 살다 보니, 모두가 아픕니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민의 눈을 뜰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고전을 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상력은 자신이 가진 레퍼런스에 비례하게 마련이지요.”
“모든 혁신은 연민의 자식들이다.” 연민의 힘을 강조하셨는데요. 고전 공부를 통해 깨닫게 된 강 대표의 인생 모토는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수페르 아스트라(super astra)’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별보다 더 높이’인데요. 별보다 더 높은 곳은 고도가 아니라 흡수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철저히 상대방 입장에서 그 사람 마음을 봐줄 수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별보다 더 높은 곳이고, 또 만약 우리가 철저히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나를 보고 내가 하는 일을 볼 수만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별보다 더 높은 곳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고전을 통해 사람을 보고 나를 보는 성찰의 인문학을 비로소 만난 것 같습니다.”
고전 미니동영상의 부제가 ‘나를 만나는 5분의 기적’이더군요. 고전을 요약본으로 만든다, 특히 5분 동영상으로 고전의 맛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도 있는데요. 마치 사랑과 정성으로 만들어야 할 어머니의 손맛을 영양제 한 알로 해결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 같습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고나 할까요. 아마 제가 학자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고전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로부터의 비판이 너무나 두려웠을 테니까요. 저는 고전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탓하기보다, 읽도록 만들어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고전을 읽지 못하는 독자의 아픔을 공감했기에,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습니다. 제 장점은 복잡한 지식을 말랑말랑 쉽고 재미있게 만들 줄 아는 데 있으니까 이것을 결합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저명한 영문학자이신 김욱동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김 교수님께서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용기를 주셨기에 다른 전문가와 본격적인 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영상을 보고, 고전을 읽지 않기보다는 고전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리라 생각해요.”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는 책’이란 말이 있지요. 5분 동영상 500편 리스트를 살펴보니 저 역시 중도 포기한 책이 많더군요.
“어려움, 두꺼움, 두려움의 결박을 풀고 언터처블(untouchable)을 터처블(touchable)로 만들자. 읽는 고전을 보는 고전으로 만들자. 이것이 저의 목표였습니다. 단지 축약이 아니라 에센스 농축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고전을 한눈에, 한 손에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딱딱한 책을 오감을 자극하는 5분 영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고난도 외과수술이자 성형수술이었습니다.(웃음) 답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주인공보다 나를 만나게 하는 관점 전환에 초점을 뒀습니다. 고전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도와주고, 다른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을 키워줍니다. 다 읽고서도 그 뜻을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동영상을 통해 알게 됐다는 독자 소감을 들을 때 행복합니다.”
고전이 좋긴 한데, 일각에선 ‘돈이 되나?’ 하면서 실용적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하. 저는 고전, 나아가 인문학으로 팔자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접체험과 성찰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볼 수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보는 좋은 방법은 삶의 밑바닥으로 가보는 것입니다. 밑바닥에 내려가 보면 더 이상 남의 일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거든요.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지요. 초연결 시대에 그런 연결지능만큼 우수한 재능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전은 그걸 가능하게 하지요. 인생의 고전(苦戰)을 대리경험하게 해주니까요. 고전은 한마디로 고전(苦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닐까요? 역지사지, 백번 강조하지만 상상만으론 한계가 있어요. 바닥을 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치고 올라왔는지 대리경험을 하고, 내 삶에 적용할 지혜를 얻지요. 운이 좋아지고, 운을 바꿀 수 있는 혁신과 창조력의 원천을 얻는 데 이 이상의 방법이 있나요?”
그의 입에서 ‘주홍 글씨’, ‘노인과 바다’ 등의 고전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인생반전의 포인트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예컨대 ‘주홍 글씨’의 진정한 교훈은, 우리 모두가 의도하지 않았던 잘못으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을 때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그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을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 그 가치라고 설명한다.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삶과 투쟁 속에 그 길이 있기에 주홍 글씨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또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허탕을 친 후에 몇 날을 싸워 어렵게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모두 뜯긴다. 즉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한 가지를 이루었는데 그것마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때 과연 나라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성공이 아니라 과정 속에 있는 것이고, 비록 물질적 가치로는 파멸할 수 있지만, 정신적 가치로는 패배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기에, 공평하지도 않고 선택할 수도 없는 운명의 비정하고 부당한 공격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성찰해보는 것이 진정한 문학작품의 가치라는 조언이다.
강 대표에게 가장 와 닿은 고전은 어떤 작품이었는지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입니다. 성공한 중견 판사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겪는 마음의 분노와 불안, 치유를 다루는 내용이지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하다 생각하고 매달렸던 것들이 죽음이란 거대한 필연 앞에서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성찰하도록 해주는 내용인데요. 이 작품은 저에게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더군요.”
10년 전, 삼성경제연구소 상무 시절 만났을 때 창조학교에 대한 꿈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야심차게 설명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임원 시절의 그때와 지금의 늦깎이 고전 전도사가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는지요?
“혁신과 창조는 제 커리어를 관통하는 키워드였어요. 재미있기도 했고 열심히 일한 결과 과분한 인정도 받았습니다. 큰 실패가 없는 삶을 살았죠. 하지만 돌아보니 일에 대한 집착이 하늘을 찔렀어요. 그것은 쥐어짜는 상상력이지, 따뜻한 상상력이 아니었습니다. 일만 보고 사람을 돌보지 못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이제 인격의 바탕을 갈고 닦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지요. 잘난 리더보다 따뜻한 리더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 그게 가장 달라진 점입니다.”
58년 개띠이시지요. 개띠는 치열하게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도 첫 스타트 세대입니다. 올해 환갑이신데요. 인생의 뉴스타트 기점에서 되새기는 인생의 의미를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으로 좀 더 성숙해져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형식에 갇히지 않고, 모든 것을 해체해보고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고자 합니다. 환갑이 되었으니, 이제야말로 진정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찢어진 청바지에 빨간 운동화를 신어도 보고 자유롭게 살아보려 해요. 그 속에 행복이 있더군요. 원점에서 모든 것을 해체해 다르게 보려고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오는데 강 대표가 인용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한 구절이 귀를 맴돌았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삶, 살면 살수록 생기가 빠져나가는 삶, 나는 내가 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실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맞아.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산을 오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딱 그만큼씩 진짜 삶이 내 발 아래로 멀어져가고 있었어….”
2018년 한 해, 우리가 세우는 야심찬 계획은 산 정상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딱 그만큼 내려가면서도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계획인가. 혹시 우리는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진 않은가. 새해엔 별보다 더 높은 곳, 그곳에 이르는 사다리를 놓아보는 것 어떻겠는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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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성공하는 CEO의 습관’, ‘하이터치 리더’, ‘용인술, 사람을 쓰는 법’ 등이 있다.
이어령(李御寧·83) 전 문화부장관은 언제나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는 분이다. 이 시대의 멘토,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기억장치, 외장하드다. 어제 만났더라도 오늘 다시 만나면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샘솟는다. 그사이 언제 이런 걸 새로 길어 올렸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는 늘 말이 차고 넘친다. 스스로 ‘아직도 비어 있는 두레박’, ‘여전히 늘 목이 마른 두레박’이라고 말하고 있을 만큼 새로운 ‘샘’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회적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한 뒤 지금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직만 유지하고 있는 그를 만나 AI(인공지능)와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문명과 시니어 세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은 10월 중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의 대면 대화와 그 뒤의 이메일 인터뷰를 종합한 것이다.
우선 시니어의 관심사인 건강문제부터 질문했다. 올해 83세인 이 이사장은 종전 그대로 활기차게 말했지만 4년 전 병을 만나 세 번이나 수술을 받은 상태다. 그런데 투병이나 치병(治病)이 아니라 병과 함께하는 친병(親病)을 말하고 있었다.
요즘 어떠신가요.
“글 쓰는 사람들이 병이 나면 글을 못 쓰게 됩니다. 자기가 겪은 불행한 일은 글로 쓸 수 있으니 불행까지도 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병은 그렇지 않지요. 병이 나면 서양에서는 구술을 많이 하지만 우리말은 논리적 바탕이 약해 말한 걸 풀어놓으면 주술(主述)관계가 안 맞고 비논리적인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구술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나는 컴퓨터를 일곱 대나 가지고 있는데 병이 나니 그게 다 소용이 없더군요. 우선 키보드를 치기 힘들고 모니터 보기도 힘들고. 그래서 전자펜으로 필기를 해 텍스트 파일로 바꾸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조사(助詞) 하나 가지고 온종일 씨름할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인데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병이 나자 글도 못 쓰고 구술도 못 하고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아무것도 못 쓰니까 병 자체가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글을 쓰는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나처럼 병으로 시달리지 마시고.”
병의 문학적·문화적 의미가 크군요.
“사람들은 병이 나면 피해요. 피병(避病)이야. 병은 자랑하라지만 실제로는 직장인이건 정치인이건 밝히면 손해니까 속이고 피하지요. 그런데 지병(持病)이라는 말이 있잖아? 휴대전화처럼 병을 갖고 다니는 거지요. 옛날 선비들의 글을 보면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이렇게 읊거나 답장에 꼭 병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늙고 병든 몸이라는 걸 내세워 정치적 수난을 피하고 정쟁의 위험으로부터 피했어요. 병을 자기 재산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거지. 그래서 한국에서는 병이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큽니다. 당쟁 사화(士禍)가 많았던 시절, 병이 오히려 목숨을 지켜준 일이 많았지요(웃음). 근데 병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어요. 내가 건강했더라면 하고 땅을 쳐도 시원찮아. 그런데 병까지도 인간을 이길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친구로 삼는 거지요. 적으로 맞서 싸우면 병에 이길 수 없어요.”
그동안 그런 마음을 작품으로 쓰신 게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많이 썼지요. 그런데 다 메모 정도이고 알파고 때문에 쓴 시 하나가 생각나는 군요.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다는 내용입니다.”(‘이어령의 근작 시’ 참고)
이사장님은 은퇴를 선언했지만 정보시대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 거지요?
“은퇴 후 스마트폰을 없앴으면 신문사 전화를 안 받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알파고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하고 봇물 터지듯이 라디오 TV에 나가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은퇴에 관한 책 한 권을 썼지만 정보시대에는 은퇴가 불가능합니다.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지요. 그래서 TV, 인터넷, 휴대전화 일체를 일정 기간 플러그 오프하는 것을 정보단식이라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영화배우 사진을 보여주고 그 표정에 나타난 감정을 물으면 제대로 읽고 대답할 줄 아는 아이가 반도 안 된다고 해요. 하지만 스마트폰을 빼앗고 1주일 동안 캠프생활을 하게 한 뒤 같은 테스트를 하면 훨씬 능숙하게 사진 속 인물의 감정을 읽어요. 스마트폰 대신 서로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나눈 결과죠. 사람의 안면을 보지 않고 화면을 보는 시대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자찬명(自撰銘) 같은 글을 써놓으신 게 있는지.
“그런 건 없습니다만 스스로 묘비명을 쓰라고 한다면 ‘평생 퍼내도 퍼내도 항상 갈증을 느껴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하겠어요. 영원히 두레박의 갈증을 가지고 평생 살아온 사람. 두레박은 늘 비어 있어야 물을 퍼낼 수가 있지요. 이 비어 있는 것이 갈증입니다. 영원한 갈증이지요.”
스스로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말해오셨는데, 요즘 어떤 우물을 찾고 있습니까?
“지금 파고 있는 우물은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판 우물은 주로 글로, 펜으로 판 것입니다. 문학평론, 에세이, 소설, 희곡, 그리고 시나리오까지 많은 땅에서 우물을 파왔죠. 그런데 이번에는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야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젠 문학평론가나 인문학자가 아니라 나무꾼처럼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지요. 책을 읽기 전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옛날 얘기를 듣다가 잠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는 이야기였지요. 꼬부랑 할머니가 한 고개도 미처 넘기 전에 잠이 들었지요. 꼬부랑꼬부랑, 꼬부랑길을 따라 고개를 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듭니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입니다. 팔십이 지난 이제야 그 꼬부랑 할머니가 한국인인 우리를 낳아주신 생명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힘없어 보이는 그 할머니가 바로 보릿고개를 넘고, 나운규와 같이 일제 압박시대에 아리랑고개를 넘고, 전쟁과 가난과 모든 수난의 고개를 넘어온 영웅이었던 것이죠.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 현빈(玄牝), 즉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한다’고 했듯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지팡이는 미사일이나 원폭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자연의 힘이었던 겁니다. 마녀의 요술지팡이도 아니고 신선의 지팡이도, 개화기 때 개화장(開化杖)이라고 했던 서양의 단장도 아니었던 겁니다. 한마디로 폭력의 몽둥이가 아닙니다.”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계신다는 거군요. 신문에도 연재하고 방송에서도 들려줬던 그 글을 마무리하시는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시즌1밖에 쓰지 못한 ‘한국인 이야기’를 전부 정리하면 12권이 됩니다. 물론 그것을 정리 중이지요. 하지만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우물 파기는 알파고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고많은 땅 다 두고 일본, 중국 제쳐놓고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가 서울 광화문에 와서 전 세계에 AI 시대를 선포했겠습니까. 바둑을 두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알파고는 바로 우리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혁명을 일으키고 자율자동차가 되어 세계 모든 도시의 길을 달리게 될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병실의 환자들 머리맡에, 소외된 장애인들 곁에, 전쟁과 테러의 현장이나 폭력의 골목 속에서 알파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위협하는 것이 되느냐, 또는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처럼 인류를 도와주는 기능을 갖게 될 것이냐 그것이 한국인 손에 달렸다는 거죠. 할머니의 꼬부랑 지팡이는 곤봉이 아니기 때문이죠.”
왜 하필 알파고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이유가 있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을 떠날 때의 내 마지막 강의가 바로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빌 조이의 ‘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라는 글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리포트까지 받았어요. 그 글은 ABC(Atom, Bio, Chemical) 기술(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화생방 기술이죠)이 21세기에는 GNR(Genome, Nano, Robotics)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인공지능, IT(정보기술)가 이 기술들과 결합되면 인류는 파멸할 것이라는 경고였죠. 그런데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미국 기업인은 그러한 시대를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 부르면서 2045년이면 천지개벽해서 인간이 불로장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커즈와일이 바로 알파고를 만든 구글의 AI 분야에서 고문직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AI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문제이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특히 바둑권 문화인 아시아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자손들을 위한 한국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AI와 4차 산업혁명 등은 아주 중요한 화두이지만 시니어 세대는 낯설고 어려워합니다. 이런 시대에 어떤 생각과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4차 산업혁명은 생각 혁명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그동안 전문 분야에서 인간처럼 생각하는 도구는 일부 있었어요.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해서 탄도탄 발사 거리를 계산하는 식으로 군사용으로 사용되고, 이어 기업에서 물자를 만들 때 컴퓨터를 썼어요. 군에서 IT나 컴퓨터를 사용하면 강병(强兵)이 되고, 기업이 사용하면 부국(富國)을 이루었던 거지요. 그런데 IT를 금융과 연결해 금융공학을 만들어 파생상품을 판 결과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산업사회와 부국강병의 패러다임은 끝났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서 노동과 작업은 인공지능(AI)이 합니다.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검색에 매달리지 말고 사색을 해야 합니다.”
AI를 잘 활용해야겠군요. 시니어 세대일수록 백세건강, 수명연장을 위한 인공지능의 기여에 관심이 높습니다.
“알파고는 사람보다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AI가 효도를 하고, 사랑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AI 시대의 의학은 치료 위주에서 병을 미리 가려내주고 발병의 위험을 알려주는 예방의학, 미리 수술해주는 선제의료, 나아가 개인별 건강을 설계해주는 맞춤의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작용도 참 많지만 좋은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인공지능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지능이 문제입니다. AI가 발달했다고 무서워할 게 없습니다. AI가 하지 못하는 심성이나 덕성, 아름다움, 봉사를 사람이 하면 됩니다. 이제 가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까지 늘 즐겁게 일을 해오셨는데, 그런 자세야말로 은퇴 세대, 시니어 세대에게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다 좋아서 한 거지요. 장관도 안 한다고 고사하다가 초대 문화부장관이라고 해서 했습니다. 각종 이벤트를 많이 했는데, 먹고 놀면 안 됩니다. 놀면서 먹어야 합니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겁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님 말씀대로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지지자(知之者)는 인간이 아니라 AI입니다. 지지자 위가 호지자(好之者)이고, 또 그 위가 낙지자(樂之者)입니다. 바로 지호락(知好樂)이지요. 연애가 노동이라면 비 맞아가며 연인을 기다리겠어요? 골프가 땅을 파는 노동이라면 18홀을 돌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지호락을 추구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마음과 자세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이어령의 근작 시
차멀미가 나면 내리시게.
그게 자동차라면 길 이름 묻지 말고
그게 기차라면 역 이름 알 것 없이
얼른 내리시게나.
그런데 그게 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게 비행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래도 눈 딱 감고 뛰어내리시게나.
바다 속이면 발광어(發光魚)가 되고
하늘이라면 별똥별이 되겠지.
그러나 묻지 마시게.
그게 TV, 인터넷, 정보멀미라면 어쩌시겠나.
옛날 사람들은 ‘사람’멀미가 나면
산림 속으로 숨었지만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으니
황진이의 시조 한 수라도 읊어보시게.
‘나도 몰라 하노라’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김형석 교수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애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르다는 얘기를 하곤 했는데, 요사이는 내가 늙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8년에는 내 나이가 우리 관례에 따르면 99세가 됩니다.
10년 전에는 미수(米壽)의 나이라고 해서 미국에 다녀왔어요. 같이 가기로 했던 둘째 딸네는 집 일 때문에 못 가고 혼자이지만 가서 ○혜, ○애, ○순 세 딸들과 여행도 했어요. 막내인 ○순이가 벌써 대학 교단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애들과 당신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때마다 엄마와 같이 고생하던 옛날이 가장 행복했다 말하며 다들 공감했어요. 가난한 세월에 전쟁까지 겪었으니까 우리들의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지요. 그래도 사랑이 있는 고생이어서 행복했어요. 사랑이 깊을수록 행복은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그 시절이 제일 좋았을 것입니다.
내가 구십이 되던 해에는 미국의 애들도 한국에서 다같이 모여 5일간 제주도 여행을 했고요. 여행을 끝내면서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산소에도 다녀왔고요. 막내가 “이다음에 나도 한국에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누우면 안 돼?”라고 해서 내가 “신랑과 애들이 허락해줄까?”라고 했어요. 막내는 큰애들보다 부모와 머문 기간이 짧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요?
못했던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내가 2011년 봄에 ○진이가 교수로 있던 한림대학교에서 주는 일송(一松)상을 받았어요. 그때 여러 사람이 주는 꽃다발을 받았는데, 강원도 양구의 군수님이 주는 꽃다발도 받았어요. 뜻밖이라고 생각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양구의 뜻있는 분들이 나와 안병욱 교수가 50여 년 가까이 사회를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실향민이어서 갈 곳이 없으니까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양구로 모시자는 협의를 본 것입니다. 둘 다 구십 고개를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고마운 뜻을 전달하기 위해 군수가 직접 수상식에 와 꽃다발을 주었던 것입니다.
양구는 북녘땅과 가장 가깝고 우리나라 국토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파로호를 둘러싸고 있는 풍치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그 호숫가에 있는 공원에 나와 안 선생을 위한 기념관을 건설하고 우리 둘을 모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안 선생은 93세에 세상을 떠나 기념관 옆에 잠들고 계십니다. 부인께서도 세상을 떠나면 안 선생과 함께 잠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 선생의 안식처 옆자리에는 내가 당신과 함께 잠들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숫가이기 때문에 기념관에 온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고 가족들도 찾아오기 편한 곳입니다. 기념관 안에는 나에 관한 사진들과 기념품이 진열되어 있고 가족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어요. 당신에게 보여주지는 못했으나 나보다 더 고맙게 만족할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가족과 친지, 제자들은 물론이고 캐나다나 미국에 있는 이들도 한국에 오면 들러보곤 합니다. 다행히 내 건강이 허락하기 때문에 벌써 4~5년 동안 그 기념관에서 양구의 여러분을 위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인문학 강좌를 개최해 3년간 직접 강의도 하고 후배와 제자 교수들이 도와주기도 합니다. ○진과 ○우도 다른 강사들과 함께 강의를 돕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두 과정을 진행해왔는데, 내가 마지막 특강을 맡아주기도 했어요. 둘이 같이 잠들 곳이고 옆의 기념관에는 많은 사람이 참관해주겠기에 감사한 마음을 함께해줄 것으로 압니다.
또 한 가지 약간 놀라워할 사실을 얘기해야겠네요. 내가 당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 1960년 초부터 30여 년간 많은 일을 했지요. 그중에서도 라는 책이 나온 후부터 10여 년은 전국적으로 나와 내 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관심을 받기도 했지요. 그 후부터는 비교적 조용히 일하면서 꾸준히 저서도 남기고 강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정초에 KBS1 프로그램 에 나가 한 시간 동안 행복에 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반응을 일으킬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같은 방송국에서 한 시간씩 두 차례에 걸쳐 이 방영되었습니다. 내 생애에 관한 기록 다큐멘터리였지요. 그렇게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다른 TV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초청을 해와 내가 사양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마치 행복을 알려주는 멘토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또 그 방송들을 계기로 조선일보에서 두 차례, 동아일보에서도 두세 차례 내 얘기가 보도되었고 문화일보와 매일경제신문에서도 큰 비중으로 소개되는 기사가 실리곤 했습니다.
그 때문에 김 교수가 아직 살아 있고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내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의 교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의사 방군은 옛날부터 잘 아는 제자였지요? 한국까지 찾아와 큰절로 인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 간접적인 영향으로 과거에 썼던 책들 와 가 다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종교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가 다시 출간되었고 몇 권의 수필·수상집이 새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서 라는 책은 널리 알려진 출판사에서 나온 것도 아닌데 말년에 다시 한 번 장·노년층을 상대로 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애독자가 생겼습니다.
그 책 때문에 청탁이 들어와 강연회도 몇 해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2017년에도 한 달에 평균 15~16회의 강연에 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애가 전화를 걸어서, “아들과 사위들이 다 정년으로 쉬고 있는데 아버지 혼자서 일하시네요?”라면서 다른 애들과 같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내 남편이 최고!’라면서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함께 지낼 때는 내가 교만해질 것 같아 “당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했지만 지금의 내 나이를 보면 당신도 감탄할 것입니다. 어머니와 당신이 있다면 내놓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자랑하고 칭찬해줄 사람이 옆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가지 더 추가할까요? 내가 2016년 말에는 ‘도산인상 교육상’ 받았고요, 금년에는 유한양행에서 주는 ‘유일한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가을에는 동아일보에서 주는 ‘인촌상’까지 받았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세 분을 기리는 상을 다 받았습니다. 상금도 당신은 상상 못할 정도로 많았고요. 이제는 더 준다고 해도 사양할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식 때 ○예가 당신 대신 자리를 채우곤 했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예를 보고 사모님이 젊고 아주 미인이라고 부러워했어요. 사실은 당신이 더 아름다웠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랬어요. 어제도 지방에 강연을 갔는데, 사람들이 김 교수가 얼마나 늙었는가 보러 가자고 해서 왔는데 이전보다 강연이 더 좋았다며 감사하다는 겁니다.
여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대놓고 자기자랑을 하네…. 그러지 마세요.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에게는 얘기하고 싶은 것을 참았어요. 믿기 어려우면 주어지는 시간에 우리 함께 갈 양구의 기념관 ‘철학의 집’에서 내가 다 설명해줄게요.
무어라고 끝을 맺을지 모르겠네요.
보고 싶어요! 왜 눈물이 나지요? 많이 사랑했는데….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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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글쓰기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다.
아이디어 닥터, 트렌드 몬스터, 강연여행가, 브랜드 전문가…. 이장우 브랜드 마케팅 그룹 회장(62)의 여러 별칭이다.
이 별칭들엔 이장우 회장의 개인 브랜드 혁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현재 전통제조업에서 IT 스타트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의 기업 7곳에서 고정·비고정의 급여를 받는다. 1년에 최소한 5~6회는 미래 유망 트렌드를 찾아보고자 해외 아이디어 탐방 여행을 가 브랜드의 촉과 감을 갈고 온다. 삶 자체가 ‘살아 있는 브랜드’로 부단한 자기 혁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 햇빛이 투명한 어느 멋진 날,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화려한 컬러의 통 좁은 바지에 선글라스, 중절모는 물론 반지와 팔찌 등 액세서리 일습을 갖춘 그는 말 그대로 꽃중년 그 자체였다.
인터뷰 다음 날, 그는 인도로 3주간 홀로 명상연수를 떠날 예정이라며 한껏 부풀어 있었다.
보통 사람은 한 곳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좌불안석입니다. 무려 일곱 군데에서 급여를 받으신다니 부럽습니다(웃음). 퇴직 후 급여가 오히려 더 많아졌겠습니다.
“돈의 재미를 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현재 다섯 군데가 고정급여이고 두 군데는 비고정급여인데 늘었다가 줄었다가 합니다(웃음). 솔직히 퇴직을 앞두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최고경영자들이 퇴직 즈음해선 쪼잔한 상념이 많아지거든요. 부러진 날개 신세에서 영웅담을 생각한다는 것은 뻥이에요. 하다못해 국민연금, 4대보험 문제는 어떻게 하나, 별 게 다 걱정이 됐어요.”
퇴직 후 바로 이장우 브랜드 컨설팅 그룹을 만드셨지요. 직원 한 명을 둔 미니 지식기업을 창직(創職)하셨습니다. 퇴직 후, 현직 때 마지막 연봉의 두세 배를 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실정과 저의 현실을 냉정하게 본 것입니다.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리지 않은 것이지요. 퇴직 후 회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조직을 키우기보다 개인으로서 나, 이장우를 키우는 게 효과적이란 생각을 했어요. 규모의 경제에서 제가 대기업, 다국적 컨설팅 그룹과 경쟁하려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그런 기업들의 CEO와 경쟁한다면 승부수를 던질 만하지요. 개인 브랜드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퇴직 후 공황을 겪는 것은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려서입니다.”
퇴직 CEO들이 과거의 성공 스토리에 머물러 인생 2막 설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더군요.
“강의, 컨설팅 모두 부단한 콘텐츠 개발 싸움입니다. 대중의 열광, 과거의 영광 모두 거품이고 잠깐이에요. 길어야 1~2년 가기도 힘들고 곧 고갈되지요. 강의는 말이 아니라 콘텐츠로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해도 콘텐츠 있으면 오래 갈 수 있어요. 콘텐츠 없이 말만 잘하면 금방 바닥이 나게 돼 있지요. 멀리 보고 깊이 보려면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지요. 저는 책 공부보다 여행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차원에선 스몰데이터, 감(感)이 브랜드 차별성이에요. ○○에서 들었다, 읽었다는 개인의 스몰데이터가 기업의 빅데이터를 이기기 힘들어요. ‘내가 직접 해봤다, 가봤다, 느껴봤다’를 이야기해야 먹히지요. 경쟁력은 기능이 아니라 나만의 느낌에서 옵니다.”
브랜드 전문가, 아이디어 닥터, 그리고 강연여행가로 별칭이 계속 진화하고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브랜드 연구는 제 평생의 업으로 한 일입니다. 여행은 콘텐츠 개발을 위해 하다 보니 어쩌다 본업이 돼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인문학 강의를 좋아하더라고요. 트렌드의 발상지, 원산지를 직접 방문해보자는 데서 출발했는데요. 요즘은 여행인문학으로 관심이 확장됐어요. 저는 관심의 촉, 미래의 촉이 느껴지면 배울 만한 곳이 어디에 있나 찾아봐 세계 어디든 직접 가보려고 합니다. 가령 2009년 도쿄 책방을 갔을 때의 일인데요. 트위터에 관한 책이 한 코너를 다 차지하고 있더군요. SNS가 뜨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미국 뉴저지 스테이트대학으로 공부하러 갔어요. 동양의 중년 남자가 그 먼 곳으로 한겨울에 SNS 공부를 하러 왔다니 학교에서 놀라더군요(웃음). 공부는 선(先)투자이자 선(善)투자예요. 공부하면서 계발하고, 계발하면서 공부해야지요.”
일반인이 ‘트위터’의 ‘트’란 말에도 익숙하지 않을 때 조기유학(?)을 한 덕분에 그는 SNS 브랜딩 홍보 분야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재 페이스북 팔로워 6만 명. 카카오스토리 5만 명, 인스타그램 1만 명의 팬을 확보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의 ‘본산지, 원산지 찾아 아이디어 탐방 삼만리’는 SNS에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치즈학교, 미국 포틀랜드 커피 바리스타스쿨, 영국 수제맥주 학교, 이탈리아 전통 베네치아 파스타 학교 등 관심 분야도, 아이디어 탐방 지역도 무궁무진하다. 전국 방방곡곡, 아니 세계 도처를 누비며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익혔다. 말 그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배웠노라’였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부딪치는 소소한 사고와 우연한 사건들. 그것이 경험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느낌이 되어 그만의 브랜드로 승화된다.
제가 소심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비용이 먼저 걱정되는걸요. 항공비, 체재비, 게다가 연수비용까지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버는 것의 20%는 자기계발에 투자한다는 주의입니다. 되도록 스폰서를 잡지 않고 제 돈으로 가는 게 원칙입니다. 후원을 받으면 여행 순서를 깨뜨리고 구속이 되거든요.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공부하는 데 2000만~3000만원 정도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강연, 컨설팅 요청이 들어와 투자한 것의 10배 정도는 뽑게 되더군요.”
그는 처음인 일을 나만의 것으로 차별화하면 브랜드가 된다고 말했다. 가령 커피 바리스타 강의를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커피와 맥주를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브랜드 전문가는 흔치 않다.
흔히 “관광이 아닌 현지 체험, 풍경이 아닌 사람을 만나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회장님처럼 여행을 즐기면서 아이디어 탐방 기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여행은 필연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연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일단 떠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보세요. 너무 목적, 목적 하며 따지지 마세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틀에 갇히기 쉽습니다. 기회는 인과관계 밖에서 터져 나옵니다. 많이 가야 합니다. 삶은 가고 싶은 목적지를 갖는 것입니다. 여행은 꿈입니다. 꿈을 가져야 여행을 가게 되고, 여행을 가야 자꾸 꿈을 키울 수 있지요.”
이장우 회장은 “여행은 꿈이고 도전”이라며 “목적을 갖고 가지만, 가서 새로운 목적과 도전을 얻는 우연, 세렌디피티가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목적지를 정하면 온갖 정보를 검색, 6개월 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짜지만, 막상 가서는 널널하게 현지에서 자유여행을 즐긴다”고. 사전 계획 때는 채우고, 막상 가서는 비운다. 말하자면 서양식 사고의 과학적 플래닝과 동양적 사고의 인문학적 여백의 결합형이다. 이번에 가는 인도행은 이름하여 소울 트립(soul trip). 트렌드의 촉을 읽으면 정통 원산지를 찾아 도전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다듬어 전달하고 퍼뜨린다. 그것이 바로 브랜딩 아니겠는가.
외국어가 가능하다는 점도 세계 도처 어디든 도전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포함해 6개 국어를 하시지요. 최근에는 힌두어, 라틴어까지 공부하신다고요.
“새로운 언어를 하나 더 배운다는 것은 머리가 하나 더 생기는 일입니다. 언어를 한다는 것은 사고를 한다는 것이거든요. 여행한 곳을 더하면 새로운 마음의 눈이 하나 더 생기고요. 외국어 공부는 자기를 다른 세상으로 집어넣는 일종의 유체이탈 행위입니다. 리얼하지요. 비유하자면 번역이 사진 속 풍경이라면, 원어는 풍경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인공지능 즉시 통번역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외국어 공부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리얼한 것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니까요. 그것은 단지 속도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예요. 앞으로 세상은 지식이 아니라 필(feel)의 경쟁시대가 될 거예요. 지식과 상식은 보편화돼 검색하면 나오니까요. 느낌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아요. 새로운 아이디어 탐방을 멈추지 않는 이유입니다.”
요즘 문제되는 것은 세대 간 소통입니다. 기업 자문을 하실 때 신세대 직원들과 같이 일을 하셔야 할 텐데요. 그들이 어려워해 소통이 어렵진 않던가요.
“제가 얼마나 신세대랑 잘 노는데요(웃음). 저는 나이듦을 장점으로 활용해요. 바깥바람 막아주지, 아이디어 아낌없이 공유하지, 성과 올려주지, 이들의 입장에선 ‘성과와 실력은 향상시켜주면서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일은 쉽게 풀어가면서 어려운 책임은 상대가 가져가고’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신세대가 저처럼 나이 든 멘토와 일하는 장점이지요.”
그는 세대 간 불통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매력 자원이라는 무기의 문제라고 진단하면서 “신세대가 기성세대와 소통을 안 하는 것은 어렵거나 겁먹어서가 아니다. 기성세대를 무시해서다. 기성세대에게 배울 게, 물어볼 게, 아쉬울 게, 부러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다. 기성세대가 신세대와 소통하려면 호통이나 비위 맞추기는 불필요하다. 그보다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인은 재미와 의미를 갖고 일하지 않으면서 ‘나처럼 돼보라, 해보라’고 하면 누가 따르겠냐는 반문이다.
평생 재미와 의미로 점철된 흥미진진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서의 ‘그늘’이 궁금합니다.
“웬걸요. 제가 콤플렉스 투성이인걸요. 콤플렉스가 힘이 되니, 인생은 알 수 없어요. 단점이 강점이 되고, 엎치락뒤치락이에요. 집은 가난했고, 머리는 나빠 구구단도 못 외울 정도였어요. 다행인 것은 지식이 들어가기 힘든 대신 나가기도 힘들더군요. 외우는 데 오래 걸렸지만, 한 번 외우면 잘 안 잊어버렸어요. 그게 외국어 공부의 동력이 되었지요. 또 집이 가난해 구멍가게를 했고, 상고에 진학해야 했지요. 어렸을 때부터 물건 팔고 장사를 하다 보니 세일즈에 일찍 눈을 뜨게 됐어요. 머리 좋은 사람이 끝까지 하는 사람을 못 이겨요. 제 삶의 모토가 ‘긴 호흡으로 살자’입니다.”
이장우 회장과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원고를 한 자 한 자 치고 있었다. 마침 그의 블로그에 인도에서 쓴 따끈따끈한 새 포스트가 올라왔다. 아쉬탕가 요가의 요람인 인도 마이소르의 한 수도원에서 올린 사진과 글이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주황색 승려복을 걸친 모습이 얼핏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시켰다.
“요가와 명상을 배운다는 사실이
설레었고, 그 느낌은 참 편안하고 좋았다.
영혼이 춤추는 세상을 찾아가는 새로운
배움의 여정임에 틀림없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명상과 요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by 이장우
어느 날 문득 그가 명상과 요가 브랜드 전도사로 새롭게 나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여행가 뒤에 붙을 그의 새로운 브랜드 네임이 문득 궁금해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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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앤티크는 세월과 함께한 흔적을 통해 멋을 발한다. 대대손손 물려받은 가보로서 또한 기꺼이 그 값을 지불한 사람들 곁에서 100년, 200년의 시간을 이어간다. 취미로 앤티크 제품을 수집하기란 쉽지 않다고들 한다. 백정림(白瀞林·53) 대표는 앤티크 물건들을 모아 이고 갤러리를 열었다. 그가 경제적으로 넉넉해서일까? 그렇기도 하지만 그전에 그는 앤티크의 멋에 푹 빠졌다고 한다.
자연과 어우러져 더 빛나는 ‘이고 갤러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엔 꽤 큰 별장촌이 숨어 있다. 꼭대기까지 오르는 길을 따라 근사한 별장이 들어서 있는데 그중 맨 위쪽에 위치한 곳이 바로 백정림 대표가 운영하는 이고(以古) 갤러리다. 이곳은 그가 20여 년간 모아온 앤티크 컬렉션을 일부 전시해 여러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자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개인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좀 더 특별하다.
“이고 갤러리를 차린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많아진 작품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어요. 지금 와서 수집을 그만둘 수도 없고…(웃음). 그래서 이왕에 만드는 거 상업적인 공간보다는 앤티크를 좋아하는 사람, 관심 있는 사람이 모여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자 해서 하우스 갤러리 개념의 공간으로 꾸미게 됐죠.”
대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정원에서부터 그의 앤티크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 주위로 물확, 석등, 항아리 등 시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골동품으로 정원을 꾸몄다. 통유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거실과 부엌을 장식한 앤티크 컬렉션을 비추며 갤러리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갤러리를 마련할 장소를 찾기 위해 안 가본 곳이 없어요. 그러다가 이곳을 알게 된 거죠. 무엇보다 자연 속에 위치해 탁 트인 느낌을 주는 곳이라 좋았어요.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한눈에 조망하고 그때마다 어울리는 앤티크 물건으로 갤러리를 꾸며 새로운 분위기의 공간으로 탄생시키기도 하죠.”
알수록 빠져드는 앤티크의 매력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앤티크 컬렉션의 향연이 시작된다. 주방, 거실, 침실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화병 제품은 18세기 세브르 화병이고 아르누보 시대의 화병도 있어요. 그리고 19세기 초의 저그, 빅토리안 시대의 티 캐디… 아! 탁자는 조선시대 교자상입니다. 쿠션은 10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방석을 재해석해서 만들었고요. 2층으로 가면 크리스털과 은으로 된 빅토리안 시대 디캔터도 볼 수 있어요. 거의 다 100년의 세월을 거친 아이들이죠.”
집 안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앤티크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뿜어져 나왔다. 백 대표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대학생 때 본격적으로 앤티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엔 7년 동안 서양 앤티크를 공부하며 홈 인테리어나 커트러리 위주의 수집을 시작했다.
“어머님이 상당히 상류층 분이셨어요. 그 당시 유행했던 제주도 연자방아를 활용한 테이블과 조선시대 반닫이를 집에서 볼 수 있었죠. 덕분에 일찍 앤티크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어요. 앤티크 물건은 들여놨을 때 집 안 전체를 우아하게 마무리해주는 문화의 힘이 있어요. 정리정돈을 해준다고 해야 하나? 그게 바로 앤티크가 갖고 있는 세월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한 점도 안 사는 사람은 있지만 한 점만 사는 사람은 없다고 하죠. 그 매력에 빠지면 그야말로 중독되는 거 같아요(웃음).”
재력가들이 앤티크 물건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이태원에 앤티크 가구거리가 조성되면서 우리나라도 2000년대 초반 앤티크 열풍이 한차례 불었다. 사실 진짜 골동품이기보다는 그 모양새를 흉내 낸 ‘앤티크풍’의 가구가 유행한 것이다.
“앤티크가 주는 고급스러움과 멋스러움도 한몫했겠지만 상류층 사람들이 즐긴다는 이미지가 있었기에 더 많은 모조품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다수의 사람이 앤티크는 다 비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아요. 누구나 취미로 할 수 있는 게 앤티크 수집인걸요. 단 소비를 어느 정도의 선에 둘 것인가의 문제죠. 취미로 하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리고 싶어요. 제발 공부를 하고 난 후에 시작하면 좋겠어요!”
앤티크를 잘 아는 사람이 워낙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관련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섣불리 다가가면 예상치 못한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백 대표는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작품을 사는 것 또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며 추천했다.
“고려청자로 만든 기와를 뭐하러 사겠어요. 가치는 있겠지만 박물관에 있어야 더 잘 어울리겠죠(웃음). 저 같은 경우 테이블에 세팅해둔 빅토리안 시대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어요. 깨지면 어때요! 깨질 수 있는 DNA인걸요. 무서워서 쓰지 못한다면 앤티크를 최상으로 즐길 수 없어요.”
앤티크 강연 펼치며 제2인생 시작
젊은 시절 영어 강사로 유명했던 백 대표는 남편과 함께한 교육사업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전국 프랜차이즈 망까지 갖춘 사업을 대기업에 넘긴 백 대표는 그 후에도 강의에 대한 열정을 놓지 못했다. 앤티크 물건을 수집하면서 차곡차곡 배운 지식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강의를 시작했다.
“이고 갤러리에선 한 달에 한 번씩 앤티크 인문학 강의가 열려요. 또 반얀트리에서도 1년에 두 번 정도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죠. 강의하면서 행복해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역시 나는 강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해요(웃음).”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집안일을 도와주는 남자, 살림하는 남자가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백 대표는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품격 있는 홈 문화를 퍼뜨리는 게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tvN의 를 보니 남자가 다 일하고 그러는 모습… 에휴. 요즘 여자가 너무 중성화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요. 아내가 아내 역할을 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게 정말 중요한데 말이죠. 품격 있는 홈 문화를 가르쳐 가족에게 정성껏 대접하고 그럴 때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고 싶습니다.”
어느 날 인생 이모작을 잘 준비했다는 지인을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부분이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엔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또 죽을 때까지 공부를 멈추면 안 된다는 것. 하기 싫은 일이나 시험을 위해 하던 공부에서 해방되었으니 허락된 시간을 누리자는 생각이었다.
인문학 책을 함께 읽고 나눌 그룹을 찾다가 독서클럽은 아니지만, 글 쓰는 훈련을 하는 그룹이 있어 탐색 겸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 보통은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 모두가 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끔 글은 좋은데 강의는 엉망인, 작가 반열에 오른 분을 만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잠깐 들어본 강의가 맘에 척 달라붙어서 계속 듣게 되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주옥같은 박식함이 무슨 보석처럼 인생의 경험에 녹아 나오면 수업 내내 행복한 마음으로 강의를 경청하곤 했다. 3개월 12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주 1회 1시간 30분씩 듣는 강의였다.
수필을 쓰고 퇴고를 거치며 글쓰기를 연마하는데 인간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솔직한 표현들이 좋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따스함으로 가만가만 스밀 때는 저절로 눈이 감긴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수필을 외워서 문학회의 ‘연간 행사’로 무대에 올라 낭송하게 되었다. 원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처음엔 외운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요령은 그냥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어느 단계가 되면 저절로 외워진다. 외우다 보면 작품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고 또 독자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좀 힘들어도 얻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좋은 작품을 외우게 되면 글쓰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부수적으로 발성, 호흡에 대해서도 기본 훈련을 하게 되어 발음이 정확해진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느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고, 무대 울렁증이 있는 사람도 있어서 열심히 외웠어도 보통 7분 정도 소요되는 중간에 잊어버리거나 어색해져서 진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한번은 남여 듀엣으로 아포리즘 고전 수필 낭송을 했었다.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신흠’의 아름다운 수필이었다.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으로 한가로움과 풍류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필자와 남자는 함께 호흡과 감정을 조절하며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작은 몸짓까지도 맞추며 우린 무대 위 완벽한 커플로 탄생할 참이었다. 그는 감청색 양복을, 필자는 양반가의 여인답게 하늘색 모시 저고리와 연청색 모시 치마를 기품 있게 받쳐 입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인사도 맵시 나게 연습한 대로 잘했다.
이제 마이크를 숨소리 같은 부담스러운 잡음이 나지 않도록 조절하며 낭창거리는 소리로 낭송을 시작했다. 그와 필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선비의 멋스러움과 풍류를 살려가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갔다. 필자의 대사가 끝나고 그가 할 차례가 되었다. 시작을 잘하는가 싶었는데 아뿔싸! 이상하게 같은 대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두 번쯤 그러더니 소리가 끊겼다. 난감했다. 필자는 그의 대사까지 외우지 못했다. 스토리가 연결되는 글은 잊어먹어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나갈 수 있지만 이런 수필은 단락이 끊어져 있어 외우기도 어렵고 중간에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20개 정도의 단락을 각자 외우고 있었는데 단락의 시작을 찾아야 꼬이지 않고 술술 나오게 되어 있다. 그는 순간 당황했는지 단락의 처음부터 다시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을 맺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혹시 잊었으면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해도 사람들은 반복이겠거니 생각하기도 한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그럴 일은 별로 없다.
묵독이 아닌 낭독의 문화 즐기기
시는 글이 짧고 은유가 많아 청취자에게 전달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에서 나온 글이라 이해가 쉽고 공감이 잘된다. 그 대신 시보다는 외워야 할 분량이 많다는 어려움이 있다. 시와 비교해서 감정을 잘 살리면 즐거운 시간이지만 아니면 지루한 시간이 되기도 쉽다.
작품에 따라 무대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효과음악을 고르고 표정과 작은 몸짓도 연구하고 무대에 오른다. 작품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마치 새로운 연인을 만나듯 가슴이 뛰고 활기가 넘친다.
필자는 4년째 기획, 연출, 낭송을 즐겁게 하고 있다. 함께하는 회원(10명)과 1년에 두 번씩 공식무대를 만들고 외부 초청 낭송에도 응한다. 작가의 강연 때 그의 작품을 낭송해 강의를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
꼭 문학단체가 아니라도 격조 있는 모임에서 옛 선비들이 시조를 읊듯 시나 수필 낭송을 원할 때도 있다. 종종 감동한 관객이 끝나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보람이다. 얼마 전 어떤 문학회 출판기념회에서 초청, 낭송을 했는데 70명 정도 모이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그 모임 지도교수님의 대표작 낭송이 끝나자 교수님은 벌떡 일어나 젖은 눈으로 다가와 필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 잘했다, 문우들은 그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작품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말했다. 낭송하는 시간은 마치 앞에 앉은 사람이 필자에게 눈을 맞추고 자신의 얘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듯하다. 그래서 몰입하면 깊은 내면을 함께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수입은 낭송 작품당 보통 20~30만원을 받는다.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해서 그리 주시는 것 같다. 필자는 현재 두 개의 작품이 예약되어 있다. 하나는 피천득 기념 강좌에서 선생님의 작품 ‘보스턴 심포니’를 낭송하고, 또 하나는 일현수필문학회 송년회에서 손광성 선생님의 ‘누나의 붓꽃’을 낭송하기로 되어 있다.
제목만 말해도 그 시대의 풍경이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 등등 발표될 때마다 가요 차트를 점령하며 시대의 유행가로 자리매김한 그 노래들. 특유의 여린 목소리로 그 시절의 애절한 감성을 노래했던 양수경(52)이 무려 27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긴 세월을 넘어 그대로 도착한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꾸는 소녀와 삶의 부침을 겪고 거듭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철두철미한 가수였다. 그녀가 인생 2막을 열면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가수 양수경의 귀환은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8090’ 가수들의 복귀 붐 속에서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작년부터 여러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대를 가진 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단독 콘서트를 27년 만에 연 것이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짐작된다.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 답은 노래였다
“준비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몇 번이나 들었어요. 추억 속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이들 엄마이기에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어요. 사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어요.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눈감는 날까지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무지 많이 고민했죠. 답은 노래였어요.”
양수경은 공연을 앞두고 2014년 일기를 봤다. 공연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써놓은 자신의 글이었다. 그 막연했던 희망이 3년 정도 지나 이제야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무대가 찾아오니 갈등과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번만 하고 다시는 못하는 것 아닌가, 무대에 섰는데 노래가 잘못 나오지 않을까, 차라리 안 보여주면 망신이라도 안 당할 텐데….’
공연 끝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잠 못 자
“요즘 공연 시장도 안 좋지, 음반업계도 안 좋지. 내 나이에 뭔가 시작한다는 것도 두려웠고. 공연 날 표가 백몇 석이 비었다는 얘기를 듣고 무대를 올라갔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 객석이 꽉 차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했는데… 모르겠어. 시작했는데 끝나 있었어요.”
성공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떠올렸던 모든 어둠과 고통을 날려버릴 정도의 성공. 공연 전날 불안감에 잠을 못 잤던 양수경은 공연이 끝나고 정반대의 이유로 그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잠을 못 잤다.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서 들은 “다시 또 오고 싶어요”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게 상상을 초월했죠. 우리 밴드는 최고의 세션이에요. 최고의 가수들과 해외 공연을 다 해본 사람들이라서 무대에서 설렐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나처럼 잠이 안 온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누나, 이상해. 아직도 안 가셔. 모르겠어. 어떤 힘인지 모르겠는데 아직은 설레’라고.”
세상의 무수한 따스함과 마주하다
양수경은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하면서 자신을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다. 그 만남들은 그녀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후회하게 만드는 계기도 됐다.
“옛날에는 제가 말을 잘 안 했어요. 그게 너무 후회스러웠어요. 좀 어렸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하고 사귀면 그게 추억으로 남는 건데 그걸 못한 거죠. 어렸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너무 포장했어요. 지금은 내가 풀어놓으니까, 많은 걸 내려놓고 나니까 세상이 따뜻해요. 전보다 가진 것도 없고, 모든 걸 다 잃은 줄 알았는데 여기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계셨어요.”
그녀가 세상의 따뜻함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슬픔과 인고의 세월이기도 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 인간 양수경은 내비게이션 아니면 어디에도 갈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자꾸 ‘수호천사’들이 나타나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뜻밖에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거라곤 생각 못해봤어요. 단절된 삶, 이슬에 젖어 산 세월이 참 길었지. 해 뜨는 것도 싫고 해 지는 것도 싫었던 때가. 너무나 많은 배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사람을 볼 때 눈을 본다고 말했다. 눈은 숨길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신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녀는 힘든 시간에 ‘제 마음에 분한 게 없게 해주세요, 내 눈에 사악한 게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소원 덕분일까, 그녀의 눈은 30여 년 전처럼 여전히 해맑았다.
“아직도 아픈데, 그 아픔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울고 웃고 용기를 얻으면 좋겠어요.”
내년 데뷔 30주년 공연도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서 고통을 보지 않고 힘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은 철저한 대중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2의 인생 또한 첫 번째 인생처럼 가수로서 다시 문을 연 셈이다. 컴백 공연 전에는 조관우의 ‘늪’, 김범수의 ‘약속’을 만든 베테랑 작곡가 하광훈과 손잡고 신곡 ‘애련’을 발표했다. 그것은 과거에만 함몰되지 않는 ‘현역’ 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증명해주는 의지처럼 보였다.
“지금 리메이크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웃음). 과거에는 음반을 내면 많은 수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음반이 안 나가요. 그래도 우리 또래 사람들은 CD를 가끔씩 사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의 낭만은 산업에 묻혔어요. 음반이나 예술 하시는 분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시대를 따라가다 보니까 앨범 한 장을 만들면서 생기는 추억이나 낭만이란 게 묻혀서 없어졌어요. 그래도 난 앨범을 만들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양수경이 소화한 장르는 굉장히 넓다. 트로트, 발라드, 댄스, 탱고 등등. 자연스럽게 그녀가 어떤 가수가 되길 원하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대중가수예요. 그럼 대중이 좋아할 쉽고 편한 노래를 부르면 되죠. 노래는 안 되면 언제든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내가 노력이라는 걸 잊지 않는 가수면 좋겠고 확실한 내 색깔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전 분명 이선희, 현미 언니와도 다르니까요.”
비굴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
인터뷰를 하면서 양수경은 그 소녀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직업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이 센, 흡사 장인에 가까운 의식이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타고난 성정일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일지도 모른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요. 그런 시선들이 좋지 않았고, 나라도 똑바로 살아야겠다 싶었죠. 연예인은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 직업이에요. 그럼 많은 걸 포기해야 해요. 외로운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에 몸을 담아야 했기에 체득해야 했던 그 완고함을 도와줬던 것은 책이었다.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읽었죠. 맨 연애소설만 읽었지(웃음). 특히 시드니 셀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사람들은 그 소설에서 연애를 읽지만 잘 읽어보면 가난한 여자가 상류사회로 진출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이 나와요. 전 그 여자의 성공 과정에 대한 내용을 계속 읽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인문학 서적만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드니 셀던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발견했고, 과학, 경제,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도 읽었어요.”
소설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신선한 관점. 그렇다면 그녀가 삶을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굴하게는 살지 말자. 누군가 내 눈동자를 봤을 때 무엇을 감추려 하거나 비굴하게 보이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나이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오는 것
양수경은 화가 날 때면 하늘을 보며 웃는다고 말했다. ‘예쁘게 살기도 힘든데’라는 말이 그녀의 반문이었다. 예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은 그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여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예쁘게 사는 것 또한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일부였다.
“우리 나이의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와요. 그러니 잘 때도 웃으면서 자야 해요. 그건 돈으로도 할 수 없고 시술로도 안 되는 부분이죠.”
그녀는 여성의 삶에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딱 잘라 대답했다.
“아, 그건 없어. 내가 신데렐라가 돼야 해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연애? 예전에는 연예인이라서 다 막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하지만 지금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스스로 일어나고 싶은 거죠.”
그녀가 여유가 없다고 말한 이유, 바로 내년이 데뷔 3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생각들보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급해 보였다.
“이번 콘서트가 끝나고 다른 가수들의 공연을 본 뒤에 ‘난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할지 그걸 짜야 한다’ 했어요. 3년 전에 생각한 걸 이제야 한 거잖아요. 그래서 공연 다음 날 바로 다음 공연 기획을 짰어요. 물론 아무리 계획을 세워봤자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없죠. 꿈과 희망을 가질 수는 있는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진 않아요. 그래서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이 예뻤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양수경은 예능 프로그램인 에 출연했다. 방송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답은 지극히 ‘가수 양수경’다웠다.
“방송? 불러줘야 나가죠. 그런데 방송 욕심보다는 공연 욕심이 더 커요. 그렇다고 방송국에서 절 안 부르는 건 아니에요(웃음). 부르긴 불러요. 하지만 난 대중가수예요. 대중들을 위해 쇼를 하는 가수이고 싶어요.”
가수로서의 삶 외에도 양수경에게는 또 다른 삶에 대한 꿈이 있다.
“혼자 사는 여자들, 싱글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여유가 생긴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양수경 본인은 몰랐을지라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팬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에게는 남편과 사별하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고마운 선물 같았을 것이다. 힘겹게 먼 길을 돌아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도착한 그녀는 그 시절 그때처럼 여전히 꿈꾸는 소녀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꾸면서 살고 싶었어요. 지금도 꿈을 꿔요. 밝고 맑은 세상에서 그렇게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