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가, 화가로 변신…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인생 2막
- 최근 CNN은 힐러리 클린턴 미국 전 국무장관이 추리 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더불어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도 퇴임 후 소설을 발표한 이력이 주목받으며, 두 정치 거물이 ‘부부 소설가’로 거듭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화제가 되었다. 클린턴을 비롯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 후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초강대국의 수장으로 세계를 호령한 그들의 인생 2막을 소개한다. 소설가 클린턴 부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제임스 패터슨과 공저한 소설을 출간했다. 제목은 ‘대통령이 사라졌다’. 세계 정계를 배경으로 한 권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큼, 미국 대통령만이 알 수 있는 경험담을 녹여내 인기를 끌었다. 2018년 출간되어 300만 부 이상 팔렸다. 클린턴은 패터슨과 함께 두 번째 합작 소설 ‘대통령의 딸’도 집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부인이자 전 미국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도 소설가로 등단한다. 힐러리는 추리소설 작가 루이즈 페니와 함께 첫 소설 ‘스테이트 오브 테러’(테러의 나라)를 공동 집필 중이다. 장르는 정치 스릴러로, 재임 시절 경험담 등 자전적 요소가 다수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화가 부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전업 화가로 변신했다. 처음엔 고양이나 강아지, 정물화를 그리다 초상화에 빠져들었다. 상이용사, 이민자, 재임 중 만난 각국 정치인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2014년 전시회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선보였다. 2019년 방한 당시에는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참석해, 직접 그린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유족에게 선물했다. 부시는 “평생 미술관을 몰랐지만, 그림을 배운 이후 이제는 미술관에 서너 시간씩 머물며 화가의 붓 터치나 색감을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그는 “내 안에 렘브란트가 갇혀 있다”는 농담도 종종 한다고 전해졌다. 팟캐스트 방송인 오바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음악 스트리밍ㆍ미디어 서비스 업체인 ‘스포티파이’의 팟캐스트 출연자로 나섰다. 오바마는 록 음악의 아이콘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함께 출연했다. 스프링스틴은 오바마와 인연이 깊다. 오바마의 오랜 지지자로, 2008년 오바마가 처음 대선에 도전할 때부터 지지 공연을 하는 등 조력자 역할을 했다. 록의 대부와 전직 대통령은 결혼생활, 아빠의 삶, 인종 문제 등을 논하며 서로의 분야를 뛰어넘어 공감대를 형성했다. 오바마의 이런 시도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차별화되는 행보다. 오바마는 회고록을 출간하고, ‘오바마 재단’을 설립해 젊은 리더 양성에도 힘썼다. 이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유사한 활동이나, 팟캐스트 같은 뉴미디어와의 협업은 다른 전임자와 차별화된 도전이다.
- 2021-02-26 17:19
-
- 미쳤다는 소리 숱하게 들었지만
- 그는 직장 은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전에 가보지 않은 길에 자신의 전부를 투입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도래한 걸로 간주했다. 그런 그가 귀농을 선택한 건 매력과 환멸이 공존하는 서울이라는 기이한 대도시를 통쾌하게 벗어난 시골에서 삶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였다. 구체적으로는, 농업에의 투신이라는 미지의 모험을 통해 자신의 내공을 시험하고 싶었다. 올해로 귀농 7년 차. 허진영(64) 씨의 농장은 그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정신과 육체의 거의 모든 걸 쏟아 부은 결과가 그렇다.] 허진영 씨는 알아주는 눈이 많은 귀농인이다. 강소농(強小農)의 본으로 지역에 회자된다. 고행에 가까운 게 귀농생활이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몰입으로 치고 나갔다. 고전과 시행착오로 허우적거리기 쉬운 게 농사이지만 물 위를 뛰어다니는 물방개처럼 활개를 쳤다. 용의주도! 매사 빈틈없는 숙고와 실행을 숭상하는 자질을 어디서 얻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깐깐하게 돌다리를 두드려 물을 건넜으며, 건널 다리가 없을 경우엔 스스로 다리를 고안해 형세를 호전시키는 재능을 발휘해 귀농의 갖가지 난관을 타파했다. 요컨대 그의 머리는 전략적으로 작동한다. 32년간 일했던 ‘삼성맨’ 시절에도 두각을 나타내기를 밥 먹듯이 했다고 한다. 이 영민한 사람의 귀농 사전준비는 전혀 평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철저한 준비를 했다. 예컨대 작목 선정을 미리 해뒀는데 장단기 작물을 병행 재배하기로 했다. 귀농 당해에 수확할 수 있는 단기작물로 초석잠이나 복분자, 산딸기를 택해 귀농 1년 전에 미리 심었으며, 최소 이삼 년이 지나야 소득이 발생할 중장기 작물로는 베리 종류나 호두나무 같은 유실수를 선정했다. 이 모든 선택 작물들은 나름의 공부와 분석을 통해 고른 것들이었다.” 신중하게 작목을 선택하더라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게 농사다. “실로 그렇더라. 귀농 첫해에 거둔 소득이 예상을 거슬러 형편없이 적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받았던 한 달 치 봉급 수준밖에 되질 않았거든.”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첫 농사였던 만큼 생산량 자체가 미미했다. 게다가 판로가 막연하더군. 고구마, 감자, 고추도 심었지만 수익 발생이 되질 않아 무의미한 걸 알고 다시는 이것들을 재배하지 않기로 했다. 첫해의 성과는 초라했으나 덕분에 공부를 한 셈이고 비전을 세울 수 있었다. 향후의 대책을 수립했으니까.” 실의에 빠지진 않았고? “쓴맛을 보고서야 한결 정신을 번쩍 차리는 게 사람이지 않던가. 일종의 통과의례로 작은 실패를 했다 여기고 이듬해 농사에 만전을 기했다. 귀농 전에 구상했던 기본 방향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이기도 했지.” 어떤 기본 방향? “첫째는 다양한 작목을 재배해야겠다는 구상이었다. 여기엔 많은 강점이 있다. 우선은 노동력을 분산할 수 있어 탄력적이다. 그리고 자연재해나 병충해, 또는 가격폭락 등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부 작물들이 흉작이더라도 피해를 덜 본 일부 작물들이 손실을 보완해주니까.” 둘째는? “소량생산을 추구하기로 했다. 대량생산을 할 경우 흘려야 할 땀 역시 대량일 수밖에 없지만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하기 어렵다. 소량 규모여야 고품질 생산이 가능하고, 이는 고가격 정책의 밑거름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SNS 마케팅이 없으면 승산도 없다 허진영 씨는 귀향으로 귀농을 실현했다. 낳고 자란 산 깊은 벽촌으로 내려가 농사꾼으로 변신한 거다. 자식들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을 고향의 홀어머니를 모처럼 살뜰히 봉양하자는 생각도 귀농을 추동했다. 그는 선친이 생시에 농사를 지었던 농토 8000여 평을 다듬고 닦아 ‘산중햇살농장’이라 이름 붙였다. 농장의 반은 호두나무 과수원, 나머지는 갖가지 약용식물들이 생육하는 밭이다. 농장 가운데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산이 절반, 하늘이 절반이다. 그 사이를 천천히 흘러가는 뜬구름은 정처 없어 걸릴 게 없으니 자유로운 나그네임을 알 만하다. 숲속 언덕배기에 오두막 하나 슬쩍 짓고 세월아 네월아, 한가하게 노닥거리기 좋은 풍광이다. 하지만 그는 오직 농사에 용무가 많아 농사 외엔 매사 심드렁한 분위기다. 초심자로 농사에 뛰어들었으나 구상도 패기도 짱짱했던 그에게 첫해 농사의 섭섭한 소출은 약진의 발판이었나보다. 이듬해부터 곧바로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으니까. “다작물 재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경제성 높은 약용작물이나 핫이슈 작물을 발굴해 도입했다. 인디언감자라고 들어봤나? 북미 원주민, 즉 인디언들의 주식이었던 덩굴식물로 천연 자양강장제라 평가되더라. 이게 국내에 막 들어온 시점에서 종자를 구해 심었는데 결과가 좋았다. 치매에 좋다는 블랙커런트, 항산화 작용이 빼어나며 당뇨에 좋은 코끼리마늘, 오미자, 슈퍼도라지, 토종 보리똥 등도 재배해 재미를 봤다. 귀농 2년 차에 흑자가 나자 자신감이 솟구치더군.” 모든 작물이 효자 노릇? 그렇다면 당신은 작목 선정의 귀재다. “유행가만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아니다. 유행작물의 수명도 짧고 변덕스럽다. 나는 작목별 손익분기점을 계산해 상황이 나쁜 작물은 과감히 버린다. 신속히 대체작물을 찾아 채워 넣는다. 여기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수적이다. 한마디로 농사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우선은 목표치부터 확실하게 설정해야 한다. 귀농 시 나는 은퇴 전 삼성에서 받았던 연봉 수준의 농업소득을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그걸 4년 만에 달성했지.” 올해 7년 차다. 2020년의 소득액은 얼마였지? “매출 2억에 순수익 1억3000만 원 정도다. 이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하더라. 이른바 ‘강소농’의 기준 소득액은 연매출 1억이다.” 판정패와 케이오패가 드물지 않은 게 귀농이다. 귀농열차를 타고 내달리는 이들을 보면 그 용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농림부 자료에 따르면 전체 귀농인의 90%가 실패한다. 현상 유지 케이스는 8~9%, 성공하는 농가는 1%에 불과하다.” 그게 정말 믿을 만한 자료라고? 휴, 귀농은 실로 격렬한 레이스군. 실패 요인 중 가장 핵심적인 건 무엇이라 보나? “단연 판로 문제다. 피땀 흘려 농산품을 생산하고도 판로가 여의치 않아 고심들을 한다. 공판장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같은 곳에 상품을 줄 경우에도 가격을 후려쳐 실속이 없다. 결국은 직거래가 답이다. 내가 농장을 성장시킨 비결이 직거래망 구축에 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매개로 한 직거래 마케팅으로 활로를 찾았다. SNS 마케팅은 이제 필수다. 귀농을 해서는 반드시 SNS 마케팅을 해야 한다. 그게 없이는 승산도 없다.” 일 없이 노는 건 불행의 첩경 허진영 씨가 생산한 농산물은 기똥차게 잘 팔려나간다. 대부분 완판을 본다. 인터넷 마케팅 덕분이다. 지인들에게 상처를 줘가며 물건을 팔아치울 필요가 없다. 블로그 덕분이다. 댓글로 쌍방향 소통을 하는 블로그를 통해 막대한 수효의 직거래 고객을 확보한 덕분이다. 사실 농업인들의 블로그 운영은 이미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블로그의 품질은 제각각이다. 허 씨의 블로그는 높은 충실도로 차별화를 꾀했다. 단순하거나 얄팍하게 상품 홍보에만 주력하지 않는다. 귀농일지에 가까우리만치 귀농 경험담을 소상히 고백한다. 귀농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한다. 고난을 이겨내는 결기와 과정을 소박한 글과 사진으로 진솔하게 기록한다. 공감과 신뢰를 자아내는 휴먼 터치로 고객관리에 성공한 셈이다. “농사꾼들의 화두인 판로 문제를 인터넷 마케팅으로 해결하기 위해 귀농 2년 차부터 블로그를 독학으로 배워 운영했다. 죽기 살기로 블로그에 매달렸다. 전체 노동량의 50%는 농사에, 나머지 50%는 블로그에 쏟았던 거다. 그 결과는 너무도 좋았지. 많을 때는 하루에 7000~8000여 명이 접속한다. 그런 날엔 수백만 원씩 매출이 오르더라.” 이제 순풍을 매단 배처럼 질주를 한다고 보나? “보람을 느낀다. 귀농 멘토로서도 활동량이 늘어 뿌듯하다. 그런데 일이 너무도 많아 힘겹다. 새벽부터 온갖 노동에 시달리고 밤엔 자정까지 블로그에 매달리다 쓰러져 잔다. 남들은 이런 나를 미쳤다 하더라. 겨울철도 내겐 농한기가 아니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갈대나 뽕나무 뿌리, 유근피 등을 채취해 상품을 만들거든. 몸 아플 겨를조차 없다. 가끔 이런 생각한다. 이거 정말 내가 미친 거 아냐?(웃음)” 과중한 일에 속박돼 산다는 회의? “내겐 이미 퇴직 이전에 모아둔 재산이 꽤 있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퇴직을 하고 놀면 뭐하나, 일 없이 노는 거야말로 불행의 첩경이지 아니한가, 이런 생각으로 농사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게 새로운 삶이기에.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성공으로 만족감을 얻기에 이르렀지. 하지만 일의 스케일을 키워 더 많은 성취를 하고 싶다. 아직 갈 길이 먼 거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한다.(웃음)” 그의 아내는 서울에 산다. 가끔 내려와 남편을 챙겨주고 후다닥 달아난다. 귀농하자는 얘기를 들은 순간에 사색이 됐던 그녀는 길고도 격렬한 논쟁 끝에 당신 혼자 잘해보세요, 그리 선언하고 서울에 남았다. 여행이나 하며 부부가 오붓하게 인생을 즐길 나이에 웬 귀농 고생살이? 아내의 취지는 충분히 합리적이었으나 허진영 씨의 뜻을 꺾을 순 없었다. 그는 아내의 불만을 잠재울 유일한 길은 보란 듯이 사업을 확장하는 데 있다는 생각으로 뛰고 또 뛴다. 귀농의 기수로 줄달음친다. 이는 과욕의 산물? 아니면 진취적 기개? 허진영 씨가 주는 귀농 Tip •인생의 막다른 길에 접어든다는 결연한 각오가 없으면 귀농하지 마라.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는 게 농사다. •귀농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고 빈틈없이 실천하자. •농사로 소득을 얻기 쉽지 않다. 따라서 초기 투자비용을 최소화하고 매사 절약해야 한다. •농사도 기술이고 과학이다. 많은 정보를 섭렵하자. •SNS 마케팅을 적극 활용하라. 의외의 성과가 빠르게 도출될 수 있으니. •작목의 경제성을 과장 선전하는 묘목상의 상술에 현혹되지 말자. •가장 믿을 만한 농사 조언자는 귀농 선배다.
- 2021-01-25 14:21
-
-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 정치인의 삶 살아갈 것”
- 원영섭 변호사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나와 중앙대학교에서 건설경영학과 석사와 건축시공 및 건설관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군 시절에는 카투사로 복무하다가 자원해 미 2사단 공중강습부대에 배치되었고, 제대 후에는 ‘공대생’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건설 부동산 분야의 법적 분쟁 해결을 위한 법률사무소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계에도 뛰어든 그에게 변호사 이후에 꿈꾸는 제2의 인생은 무엇일지 들어봤다. 집주인은 소비자가 아닌 사업자 그렇다면 건축 전문 변호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시니어들은 스스로 만드는 집을 어떤 의미로 봐야 하는 걸까? “집짓기를 스스로 하겠다는 분들은 자신이 ‘소비자’가 아닌 ‘사업자’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스스로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건축 행위는 분양을 받거나 매수하는 것에 비해 이익률이 훨씬 높습니다. 이익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한 자본을 고위험 사업에 투자한 것입니다. 고위험 사업에서 ‘무엇을 몰랐다’는 것은 전혀 변명이 안 됩니다. 소비자는 약자지만 사업자는 강자입니다. 법원 소송과정에서도 땅과 자본을 가진 건축주는 시공업자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가진 자로 간주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사업을 행할 준비를 철저히 하셔야 합니다.” 사업자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원변호사의 충고는 스스로 만드는 집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는 관점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에서 시니어들을 위한 주택의 방향성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이 들면 공기 맑은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농사나 지으며 편하게 살겠다는 분이 많지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고령자를 위한 가장 좋은 주택은? “어르신들은 응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병원과 가까워야 하고, 자식들과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기에 도심에 있어야 합니다. 각종 편의시설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분들도 고령자입니다. 결국 고령자를 위해 가장 좋은 주택 유형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상복합 아파트입니다. 신축 아파트를 많이 공급하고, 오래된 아파트를 쉽게 재건축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최고의 고령자 주택 정책입니다.” 아파트 공급량을 늘리고 쉽게 재건축하게 법을 바꿔야 한다는 원 변호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재개발과 재건축 정비 사업에서 유독 많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이 분야에서 전문가인 그가 봤을 때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송과 최근 추이는 어떤 양상일까? “재개발 및 재건축 정비 사업은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조합이라는 단체를 구성해서 의사를 통일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조합장 선임 등 여러 안건에 대한 총회의 결의가 가장 중요한데, 이 과정에서 총회 결의의 효력을 다투는 소송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정족수와 통지, 동의 방식 등이 문제가 됩니다. 판례의 방향은 과거에 비해 결의의 절차적인 부분을 점점 엄격하게 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IMF 시절부터 정치를 꿈꾸다 원 변호사의 이력에는 변호사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경력들도 있다. 그는 꾸준한 총선 도전 기록을 갖고 있으며 지난 총선에서는 자유한국당의 비례정당 TF팀장으로서 자매정당인 미래한국당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처음 정치에 눈을 뜬 것은 IMF 시절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IMF를 겪고 나라의 의사를 결정하는 정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는 법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사법시험을 본 것도 비록 건축학도지만 법을 알아야 정치를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단순히 정치 낭인이 아니라 확실히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 후 정치를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서초동 변호사 시장에서 제가 일해온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정리한 전문 서적을 여러 권 내고 10년 이상 활동하면서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앞으로 건설 부동산 정책 및 입법 분야에서 제 능력을 발휘해보고자 합니다.” 인생 2막을 정치인으로 열겠다는 그의 포부는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현재 그는 국민의힘 중앙당 윤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된 상태다. 그의 입장에선 고향인 부산에서 치러지는 오는 4월 7일 부산시장 보궐 선거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임 부산시장의 불미스러운 일로 갑자기 치르게 된 보궐선거입니다. 여당은 자기들의 당헌 당규에 따라 보궐선거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야당은 1년 정도 짧은 기간의 임기임을 감안해, 부산 시정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어 그동안의 업무 공백을 신속히 안정화할 수 있는 후보를 내야 합니다.” 부동산 시장은 2021년에도 불안정할 것 2020년 부동산 시장은 다사다난했다.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 사실상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를 보완하기 위해 24번째의 추가 대책을 내놓으면서 응급 대응을 양산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원 변호사에게 올해 부동산 상황은 어떨지 물어봤다. “여전히 국토교통부 장관 내정자는 공급 확대를 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경기 침체로 내수는 줄고 산업 투자는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중의 유동성은 많고, 그 유동성이 빠져나갈 부동산의 공급이 없기에, 부동산 시장이 쉽게 안정화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는 또한 최근 정국의 화제인 검찰 개혁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 개혁의 본질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입니다.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검찰을 조종하여 검찰권을 행사해왔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검찰 개혁의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윤석열-추미애의 갈등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이 아닌 권력에 굴종하는 검찰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청와대와 법무부 장관의 폭주를 보면 검찰 개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자명합니다. 우선 검찰총장의 임기를 보장해야 하고, 검사징계위원회의 자의적인 구성을 막아야 하며, 검찰총장의 인사권도 보장해야 합니다.” 이제 40대 중반. 인생으로 보면 중년이지만 정치인으로선 아직 젊은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변호사는 과거와 지금의 자신이 조금은 달라졌다고 본다. “옛날에는 뭐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지금 무엇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능력과 적성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경험까지 녹아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고생과 경험을 인정하기에 반대로 ‘잘함’에 대한 선망이 없어졌고, 제 자신이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만들고, 그 의견을 설파할 때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과정 등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현실과 이상의 조화는 끊임없이 지혜와 용기를 요구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낙선과 공천 실패는 말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인지도를 만들기 위한 쉬운 길의 유혹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한 정치인의 뜻이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그 무게감을 인식한다면, 이런 힘든 과정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정치는 수학의 미적분과 같다고 말한다. 그동안 경험하고 배운 모든 것들이 정치를 하기 위해 준비해온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제2의 인생,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생각하면서 상당히 길고 먼 길까지 각오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인생 2막의 성공률을 높이려면 자신이 일평생 해온 업무 범위 내에서 가장 새로운 일을 찾아 사회적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포인트라고 말했다.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 완벽한 이상향이 아니라 과거보다 발전된 미래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부단히 노력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 2021-01-01 09:11
-
- 재능기부 버스킹 커뮤니티 ‘우쿨랄라 한마당’
- 누구나 한 번쯤 취미로 악기 연주를 생각해본 적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쿨렐레는 배우기 쉽고 크기도 작은 편이라 시니어에게 인기가 좋다. 그렇게 취미 삼아 시작해, 이제는 아름다운 연주로 이웃을 위로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우쿨랄라 한마당’ 커뮤니티다. 취재 협조 서울시50플러스재단 ‘우쿨랄라 한마당’은 본래 2018년 구로여성회에서 ‘우쿨퀸’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모임이다. “악기 하나 배워볼까?” 하는 생각으로 뭉친 5명의 중년 여성. 기타나 다른 현악기에 비해 다루기 쉽고 어쩐지 친근한 모양이 마음에 들어 우쿨렐레를 선택했다. 처음엔 누구 하나 우쿨렐레를 연주해본 적 없는 그야말로 생초보들이었다고. 매주 모여 연습을 하고 2주에 한 번은 강사를 초빙해 레슨을 받았다. 그렇게 차츰차츰 실력을 키워나갔고, 어느덧 공연을 기획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우쿨렐레 배우길 참 잘했다! 40대부터 60대 중반까지, 총 9명의 회원이 매주 수요일 모여 우쿨렐레를 연주한다. 월 회비는 단돈 1만 원. 악기 레슨을 받으면서 내는 비용치고는 매우 저렴한 편이다. 그렇다고 공연을 통해 수익을 내는 건 아니다. 이들의 공연 대부분은 재능기부나 버스킹(거리 공연)으로 이뤄지기 때문. 우쿨랄라 한마당의 박순복(58) 대표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50+커뮤니티 활동 지원 사업’에 참여한 덕분에 모임을 잘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럿이 레슨비를 나누면 어느 정도 절감은 돼요. 그래도 넉넉한 편은 아니죠. 또 공연을 하려면 장소 섭외를 비롯해 챙겨야 할 게 많잖아요. 그런 점에서 ‘50+커뮤니티 활동 지원 사업’을 통해 지원금 외에도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죠. 그 밖에도 다른 연주 커뮤니티와 합동 공연을 한다거나 활동 영역을 넓힐 기회가 제공된 점도 좋았습니다.” 올해는 커뮤니티 프로젝트로 ‘찾아가는 경로당 버스킹’을 월 1회씩 진행하려 했으나, 코로나19 영향으로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아쉬운 대로 지하철역 인근이나 안양천 등 허가된 공간에서 버스킹을 하며 시민들에게 연주를 들려줬다. 그렇게 공연을 하고 나면 우쿨렐레 선율에 매료돼 커뮤니티 가입을 원하는 이가 꼭 생겨난단다. 최근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새내기 회원 최병혜(58) 씨는 역시 이러한 공연을 통해 긍정적 에너지를 얻는다고 했다. “혼자 연습하고 듣는 것보다, 회원들이 합심해 여러 사람 앞에서 공연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더 컸어요. 덕분에 또 다른 도전이나 새로운 꿈을 실현할 수 있겠다는 용기도 얻을 수 있었죠. 예전부터 아이들과 어르신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봉사를 해왔는데, 악기를 통한 재능기부도 참 즐겁고 뿌듯하네요. 우쿨렐레를 배운 건 올 한 해 가장 잘한 일 같아요.” 고비의 순간 넘어 함께 오래오래 회원들은 내년에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작은 음악회를 열거나 다른 시니어 동아리와의 연계 활동도 활발히 해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나아가 장수 커뮤니티로 거듭나기 위해 현재의 운영 방침 등을 보완하고, 커뮤니티 지원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라고. 박 대표는 이와 함께 새내기 회원 영입에도 더욱 신경 쓸 예정이라고 했다. “어느 악기든 초반에 배울 땐 재미있다가도 어느 순간 고비가 찾아와요. 실력도 잘 안 느는 것 같고 한계를 느끼기도 하죠. 그 잠깐의 고비만 지나면 훨씬 연주가 풍부해지는데, 종종 잘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분들이 계셔요. 이 나이에 갑자기 전문가가 되거나 예술가의 경지에 오를 건 아니잖아요? 소소하게 어울려 함께 따뜻한 마음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임해주셨으면 해요. 일상이 무료하거나 취미가 없어 고민인 시니어라면 저희 커뮤니티의 문을 두드리셔도 좋아요. 분명 우쿨렐레를 통해 인생 2막의 즐거움을 얻어가실 거라고 보장합니다. 아, 지금은 없지만 남자 회원도 환영입니다!(웃음)”
- 2020-12-11 09:04
-
- 이수영 회장의 통 큰 기부와 사유의 품격
- 할 말은 다 하고 센 듯 보이지만 공감이 가니 유쾌하다. 과거는 마음에 두지 않고 현재와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돈과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게 삶의 철학이지만 쓸 때는 통 크게 쓰는 여장부.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시니어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 676억 원을 포함해 20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총 766억 원을 출연하며 전 국민의 관심을 모은 그녀를 만나 이 시대의 어른, 그리고 시니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936년 서울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소녀는 이제 한 기업의 대표이자 막대한 기부금을 사회에 환원해 시니어의 지표를 새롭게 세운 유명인이 되었다. 그 주인공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화통한 기부금만큼이나 솔직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나는 과거에 매이지 않아. 오직 현재와 미래만 생각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니까.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옷 한 벌은 챙길 수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잖아.” 기부를 하면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된다 이미 팔순을 넘어 85세의 나이지만 오직 현재와 미래만 본다는 이 회장의 말에는 아직도 그녀가 젊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엄청난 기부금을 출연한 것도 현재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기부하면 이제까지 자신이 느끼지 못한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되고 엔도르핀이 돌아.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그녀가 기부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6.25전쟁 시절에 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떡 잘 먹었다” 하고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이 떡을 잘 먹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전쟁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떡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우리 애기가 떡을 나눠드리라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받을 감사를 딸에게 돌린 것이다. 그때 기부의 선한 영향력,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한 어머니의 부지런하고 알뜰한 모습이 이 회장에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신문기자로 자리 잡기까지 거듭된 좌절 이 회장에게 다시 기부의 힘이 각인된 것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들은 한 기독교 장로의 말 때문이었다. 온 나라가 구호물자를 얻으러 다니던 시절, 그 장로는 “우리도 가난하지만 주는 자가 되어보자”라고 설파했다. 그 말에 꽂힌 그녀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세상을 더 선하게 만들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쉬운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그녀는 당연히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녀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선풍기도 없는 도서관에서 밤낮없이 공부하니 땀띠 범벅에 몸 곳곳이 망가졌고, 처음 맛본 실패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도전했다. 그녀가 지원한 곳은 신문사. 기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내 파벌 싸움, 서울대 나온 여성에 대한 질시 등이 심해 퇴사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서울경제신문의 경제기자로 자리를 잡게 된다. 기자가 안 됐더라면 어땠을까. 기자의 질문에 이 회장은 바로 답을 했다. “지금은 고시에 떨어진 걸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 고시에 합격했다면 그 검은 옷을 입고 변호사나 판검사가 돼서 살았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싹 싸움꾼이야. 남의 싸움을 해결해주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살았으니 행동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할 말 다 하면서 많이 알게 됐지. 슬픈 사람, 잘난 사람, 못된 사람, 바보도 만나고…. 그때도 지금도 정직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 양심적으로 살려고 했지. 기자생활하면서 인생의 많은 걸 배웠어. 평생 배우면서 살아야지.” 40대 중반에 제2의 인생을 개척하다 이 회장의 기자생활 커리어는 화려했다. 경제기자로서 당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이병철 삼성 회장과의 인터뷰를 성사시켰고, 그 덕분에 다른 기업 총수들과의 만남도 무난하게 이뤄지면서 격의 없는 관계를 쌓게 됐다. 그러나 권력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5공화국이 언론통폐합을 하면서 그녀의 기자생활은 해직으로 끝나게 되었다. 40대 중반이었고 배우자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근심에 싸일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경제부 기자로서 수많은 CEO들을 만나면서 사업 수완을 익힌 덕분일까.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사업가로서 다시 개척하기로 했다. 사실 그녀는 기자생활을 하던 서른다섯 살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안양 하천부지를 구입해 주말이면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 농장은 퇴직 후 본격적인 본업이 되었다. 돼지를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했고 젖소까지 들였다. 이후 돼지가 1000마리까지 불어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사업 노하우는 인연의 중요함을 잊지 않는 것 숱한 위기와 고난을 헤쳐 온 그녀에게 다시금 시련이 찾아왔다. 이 회장의 땅이 도로 건설로 인해 수용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안양천에서 모래 채취 사업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울 여의도 맨하탄 빌딩의 5층을 매입해 깡패들과 싸워가며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다른 층도 계속 사들여 빌딩관리단 회장이 되었고, 미국 LA의 도심 빌딩까지 구입하면서 막대한 성공을 일구었다. 그녀는 사업의 성공은 운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운이 자신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또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로 성패가 갈린다고 보는 것이다. 이 회장은 또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한다. 아무리 작더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운명이 바뀌면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사업 노하우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지금은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허투루 보지 않고 면밀하게 검토하면 길이 나와. 그걸 안 하니까 문제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으면 감이 떨어져?” 이 회장은 땀 흘려서 번 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자신이 기자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부 또한 그런 기준에서 이뤄진다. ‘왜 카이스트에만 기부하고 모교인 서울대에는 기부하지 않느냐’라는 세간의 의문에 대해 그녀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모교라고 다 해줄 생각은 없거든. 그래도 의과대학은 좀 하려고 해. 법대는 인성교육이 안 돼서 안 했어. 내 후배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 연연할 필요도 없고. 내가 하는 기부의 기준은 국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기부의 가치가 서야 해. 빈민 구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번 돈인데 함부로 쓸 수는 없지.” 자식에게 무조건 돈을 주는 건 자식 망치는 길 이 회장의 기부금에 대한 단호한 기준은 최근 더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지금까지는 기부한 기관에 맡기고 활용하게 했는데, 부작용이 너무 커. 돈 만지는 사람들 손에서 돈이 다 녹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 누가 봐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운영할 생각이야.” 이 말에는, 지금까지의 막대한 기부를 멈추지 않고 되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기부금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고 공정한 운영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그녀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상속증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자식에게 무조건 다 남기려는 건 틀린 거야. 자식을 무능하게 만들어. 젊은 날에 부모가 뼈빠지게 돈 버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가르치면 돈을 지킬 수 있는데, 그건 안 하고 ‘내가 고생했으니 자식은 고생 안 시키고 돈만 주겠다’면 자식들이 사치하고 탕진하고 마약이나 하게 되는 거지.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줘서 값진 삶을 살도록 해야지.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제 돈이 아니야.” 82세의 초혼, 그리고 첫 부부싸움 이 회장이 핫피플이 된 데에는 막대한 기부금도 있지만 82세의 나이에 성사된 초혼도 한몫했다. 상대는 서울대 동기인 김창홍 변호사. 사업을 하면서 친구들끼리 골프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골프가 서툴렀던 그녀의 캐디 역할을 자임했던 사람이 바로 김 변호사였다. 그렇게 쌓인 친분 속에서 마침내 결혼이라는 결실이 맺어졌다. “동기생 중에 동아일보 기자가 있는데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우리 영감이 내가 먼저 프러포즈했다고 하는 거야. 무슨 개똥같은 소리를.(웃음) 결혼은 여자가 아무리 좋아해도 남자가 싫어하면 못하는 거 아냐? 화가 나서 반지랑 시계를 풀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지. 그랬더니 남편이 ‘내일 결혼식인데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니?’ 하더라고. 내 마음 달래줄 생각은 안 하고 결혼식이 걱정이었던 거야. 그래서 싸웠지.” 그녀에겐 인생 최초의 기념비적인 사랑싸움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감정을 묻어두는 사람이 아니고 그녀도 똑같은 성격이었다. “그렇게 티격태격 싸우고 난 뒤에 둘이 웃는 걸로 끝냈지. 칼로 물 베기지. 그래서 결국 결혼식을 했는데, 신부화장하는 데 와서 날 보곤 입을 다물질 못했어. 좋아서.(웃음)”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마리’ 이 회장에게는 남편 외에 애정을 주는 가족이 또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애견 마리다. 유기견이었던 마리는 얼마 전까지 그녀의 집 3층을 차지하고 살았다. “나는 2층에서 지내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틀어주면 막 뛰어나와. 그러고 같이 산책을 하러 나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계속 날 돌아보고, 쓰다듬으면 꼬리가 빠지게 흔들고, 밥을 먹을 때는 식탁에서 나를 바라보곤 했지.” 그러나 지금 마리는 없다. 지난 11월 1일 비 오는 일요일에,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마리는 불쑥 상추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리야!’ 하고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 없어진 거야. 누구는 발정이 났다고도 하고, 그러다 돌아온다고도 했지. 그런데 끝내 안 들어와서 CCTV를 보니, 들개 세 마리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이 나오는 거야. 급히 골짜기를 다 뒤졌는데도 못 발견했어. 먹힌 모양이야. 지금도 가슴이 아파. 그래서 남은 사진들로 앨범을 만들었어.” 그녀의 핸드폰 대문 사진에는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깊고 풍성한 마음이 닿는 찬란한 가치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마리의 사진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애견인 이 회장. 마치 손주 사랑에 흠뻑 빠진 시니어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과거에 비해 자신이 유해졌다고 말했다. “늙으면 서러운 게 많대. 나도 늙으면서 성질이 유해지더라고. 젊을 때는 칼 같았지. 아랫사람들에게도. 그런데 어느 날 ‘저 사람들이 나보다 정말 뛰어났으면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부터 납득하게 됐어.” 나이 들면서 철학적 사유와 희생이 그녀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어느덧 인생의 품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일한 장기 근무자들이다. 그녀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사람처럼 철두철미하게 직원들과 회사를 이끌어왔지만 그 강인함 뒤에는 직원들을 향한 애정이 숨어 있다. 이 회장의 형제 가족들에게 유언증서까지 마다하지 않고 측은지심으로 챙겨주는 그녀가 더 담백한 이유는 더 큰 세상을 향한 여정으로 이끄는 용기와 지혜에 있다. “잘못된 것은 그냥 못 넘어가는 성격이야. 세상 사는 데는 정직이 최고지. 그리고 신용이고. 내가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주려고 해야 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 인터뷰를 진행하며 왜 이 회장을 매스컴에서 앞다퉈 다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른다운 어른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녀야말로 이 무거운 코로나 블루 상황에서 통 큰 기부로 미담을 준,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온 영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이고 현명하며 나눌 줄 아는 그녀의 선행이 사회적 가치로 거듭나 진짜 선한 영향력을 행하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등불을 본다. 2021년에도 이 영웅의 스토리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 2020-12-02 10:55
-
- “세계 78억 인구 중 저만의 유일한 취미가 있습니다”
- 조동성 산업정책연구원 이사장의 경력은 그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1978년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임명된 이후 은퇴할 때까지 36년간 자리를 지키다 정년퇴직을 하고 베이징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직한 그는 2016년부터는 인천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어 혁신을 이끌었다. 올해 4년간의 임기를 끝내고 산업정책연구원 이사장으로 위촉된 그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 날을 위해 최근 중국어를 배우려고 방송통신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쉼 없이 제2의 인생을 추구하는 그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천대학교 총장으로서 성공적인 4년의 임기를 마친 조동성 산업정책연구원(IPS) 이사장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그는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인천대학교는 서울대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둘밖에 없는 국립대 법인으로 지배구조가 같아서 신바람 나게 일했어요. 4년이 짧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해요. 사람에 따라선 4년이 1년 같을 수도 10년 같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인천대를 가기 전 지난 서울대 총장 선거를 10여 년간 치르면서 조직선거가 아닌 정책선거를 추구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10여 년 동안 마련할 수 있었고 인천대에서 4년 동안 그것들을 마침내 도입했죠.” 50년 만에 다시 대학생, 중국어를 배우는 이유 사실 그는 2014년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한 후 인천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중국 베이징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임용됐다. 15년 계약으로 2029년, 80세까지 임기였지만 인천대학교로 가면서 무급휴직에 들어갔다. 총장 임기를 마친 후 다시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못 돌아가고 간접 활동만 하는 중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2020학번 대학생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음에 돌아오면 중국어로 강의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2029년까지는 이제 9년 남았으니 중국어로 강의할 수 있도록 실력을 갖추자는 게 목적이에요.” 그는 중국을 이해하면 한국이 보인다고 했다. 중국과 한국을 대비하면 재미있는 감각이 생긴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우리나라에서 연줄이라는 말은 중국말로 콴시라고 합니다. 둘의 공통점은 ‘이게 없으면 되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정도가 달라요.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이 이뤄지려면 연줄은 10% 정도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이뤄지려면 콴시가 90% 정도 비중을 차지합니다.” 연줄과 콴시를 비교하면 중국이 보인다 연줄과 콴시(關係, 인맥) 사이에는 더 큰 차이가 있다. 연줄은 과거가 필요하다. 고향이 같든 학교가 같아서 만들어지는 게 연줄이다. 그런데 콴시는 과거가 없다는 게 특징이란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 전에는 서로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한 번 맺어지니 계속 갔죠. 그처럼 콴시는 뿌리가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연줄을 보면 후배가 막 대해도 선배가 세 번은 봐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선배가 옹졸하다는 얘기를 듣죠. 콴시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처음 만난 관계니까요. 그래서 콴시는 만들어진 후에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저는 콴시를 살얼음판이라 여겨요. 살얼음판 걷듯이 콴시를 유지해야 하거든요.” 연줄이 혈연·지연·학연으로 맺어진 과거지향적 관계라면 콴시는 미래지향적이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서의 성공을 꿈꾸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연줄 만들듯 콴시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게 조 이사장의 분석이다. “콴시는 수단입니다. 앞으로 일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에요. ‘삼국지’에서도 콴시가 맺어지니 나라가 만들어졌잖아요? 우리와는 정반대죠. 우리는 활용한다는 개념이 없고, 설혹 그러면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하니까요.” 중국의 ‘콴시’를 한국의 연줄이라 착각하면 큰코다친다는 것이다. 콴시는 몸으로 부딪쳐 직접 습득해야 하며 머리로 깨쳐서는 안 된다고. 조 이사장의 설명을 들으니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를 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최근 중국에 대한 안 좋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중국은 미국과 함께 가장 중요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미국을 공부하는 수준으로 중국 공부를 해야 하는데 안 하죠. 미국은 잘 모르니까 공부를 하는데 중국은 어느 정도 안다고 대충 생각하니까요. 미국이나 유럽은 모르니까 열심히 공부하거든요.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고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중국을 모르고 사회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시대가 올 거라고 봅니다.” 책 한 권에서 한 단어만 배워도 된다 1949년생이지만 미래를 위해 다시금 처음부터 공부에 뛰어들 정도로 열정과 학구열이 높아서인지 조 이사장은 나이에 비해 동안으로 보였다. 그는 나이를 잊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청춘을 유지하고 싶어요. 나이를 안 먹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싶은 거죠. 청춘은 나의 미래이자 삶을 긍정적으로 관조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자신만의 영웅론을 갖고 있다. 영웅은 마음은 있고 자질이 없으면 돈키호테가 되고, 마음은 없고 자질만 있으면 햄릿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진정한 영웅은 두 개를 다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영웅의 마음이란 젊은 마음, 즉 청춘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또래가 만나서 하는 얘기의 95%는 옛날 얘기예요. 그래서 제가 나가는 모임에서 ‘절대로 어제 골프 친 얘기 하지 말자, 미래에 뭘 할 건지를 얘기하자’는 원칙을 세웠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몇 달 해보니 한계가 와서, 아예 젊은 강사를 초빙해 강의를 듣기도 했죠.” 그러고 보니 그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독서모임인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의 경영자 독서모임(MBS)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모임에서는 1년에 책 40권을 읽는데, 올해로 25년을 했으니 1000권을 읽은 셈이다. 그는 독서를 어렵고 무거운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책을 내 걸로 만들겠다는 아집, 강박관념을 버리는 것이 독서법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독서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줄 치면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머리말을 보고 이 책이 왜 씌어졌는지 이해한 후에 관심 있는 것부터 읽으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책 한 권에서 한 단어만 내 것으로 하면 성공적으로 읽은 셈이죠.” 그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경영대학원에서 AI. 크립토 MBA 석사과정도 밟고 있다. 인공지능의 이론과 실제, 경영의사결정 활용 등을 배우고, 블록체인과 디지털금융 메커니즘 및 비즈니스 접목 등도 공부하고 있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은 빅데이터, 블록체인, 크립토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MBA 과정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최근 모든 석·박사 과정에 AI를 도입하기로 발표해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한 사람 25년째 MBS(Management Book Society)를 이끄는 것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조 이사장은 안중근 의사가 중하게 여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신봉하며 사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안중근 의사와 남다른 인연이 있기도 하다. “아버지가 안중근 의사의 오촌 조카였죠. 열 살 무렵에 고아가 되셔서 굉장히 어렵게 살았지만 공부를 잘해 연세대에 입학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연세대 교수를 하셨어요. 현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어서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가셨는데 안 되셨죠.” 그런데 그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한 아버지였다. 낙마한 날, 아버지가 러시아 책을 읽으며 러시아 공부를 하는 걸 본 것이다. “당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갔을 때였죠. 낙마한 날,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할 것 같은데 러시아가 어떻게 나올지 알아야겠다며 공부를 하시는 거였어요. 그날의 충격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과거와 단절하고 새 출발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제가 배운 아버지였어요.” 그러나 정치에 참여해 곤욕을 치른 남편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조 이사장의 어머니는 그가 1978년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때, 절대로 정치계로는 나가지 말라고 했다. 교수로만 일하다 정년퇴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제가 몇 번 정치 유혹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죠. 2014년까지 교수로 있겠다고 답하곤 했거든요.(웃음)” 잘하는 거 해야 하나, 좋아하는 거 해야 하나 조 이사장은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2013년 9월, 서울대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맞이하면서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제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얘기해왔는데 교수도 사회적 책임이 있지 않나 싶었죠. 그래서 그걸 수행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는 전국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을 불러주면 두 시간 무료 강의를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자 15개 학교에서 요청이 왔고, 매주 한 번씩 15주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15개 학교에서 똑같이 하는 질문이 있었어요. ‘잘하는 걸 할까요? 아니면 좋아하는 걸 할까요?’” 그는 고민 끝에 그런 질문을 가진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었다. 꿈이 확실히 있고 평생 지키는 독립군 같은 사람은 A형, 꿈은 있는데 바뀐 사람은 B형, 꿈이 있으나 자신이 없는 사람은 C형, 아예 꿈이 없는 사람은 D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름의 답을 찾았다.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은 결과 변수였던 거예요. 원인 변수를 생각해서 원인이 이럴 때는 이런 결과를, 저럴 때는 저런 결과가 나온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던 거죠. 원인을 종속변수로 보지 말아야 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ABCD 카테고리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선택은 달라집니다. A형은 좋아하는 걸 해야 하죠.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총을 잘 쏘든 못 쏘든 독립군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꿈이 없는 D형은? 잘하는 것을 해야 하죠. 그렇다면 가운데 있는 B, C형은? 꿈을 실행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첫날은 오늘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하자, 누군가가 조 이사장에게 ‘발칙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느냐?”라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저는 이걸 하면서도 제가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하기 싫더라고요. 이럴 때 빠져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타입인가?’라고 물었죠. 그 학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은 D형이었다가 B형으로 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감개무량한 충격을 받았어요. 저를 난생처음 본 학생이 정확하게 말한 거였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최근까지 꿈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소위 ‘엄친아’로서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산 사람이었죠. 그런데 최근에 꿈이 생겼어요. 제가 박사 학위를 도와준 사람이 400명 가까이 됩니다. 저는 좋아하는 사람을 박사 학위 받도록 해주는 걸 취미로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웃음) 그걸 보며 ‘이게 진짜 행복이구나’ 하는 걸 느껴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공부하는 기간도 길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부하는 시간을 인생의 3분의 1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평균수명이 50대였으니 중학교만 나와도 동네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었죠. 이승만 대통령 때는 평균수명이 60대였으니까 고등학교를 나와야 했고요. 박정희 대통령 때는 70대였으니 대학을 나와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평균수명이 80대니까 석사까지는 밟아야지요. 그리고 100세 시대에는 박사가 표준이 될 겁니다. 사치가 아닙니다. 즉, 박사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어요. 그러니 60대 시니어는 30년 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교육은 오래 사는 데 필요하기도 하지만,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도 중요하거든요.” 평생교육의 전도사인 조 이사장은 ‘우리 인생의 첫날은 오늘이다’라는 말을 믿고 따라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거를 회고할 때는 아닌 셈. 우리의 절정기는 오늘부터이니까 과거의 전성기를 회고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그 말처럼, 그의 프라임타임은 거듭나고 있다. >>> 조동성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67학번,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 수료. 1978년 최연소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돼 경영대학장을 지냈고, 36년간 재직하며 한국경영학회장·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장, 15개 해외 대학 초빙·겸임교수로 활동했다.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2014년 국가브랜드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6년에는 인천대학교 총장에 취임해 지난 7월 임기를 마쳤다. 8월에 싱크탱크 산업정책연구원(IPS) 제5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 2020-11-09 09:46
-
- 디지털 뉴딜 일자리 창출로 미래 양천구를 꿈꾼다
- 최근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전 세계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19가 장기간 이어지리라는 진단이 의료계에서 거듭 나오고 있는 지금, 경제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이루려면 기존과는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한 상황. 정부에서는 이를 위한 ‘한국형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지역에 안착해 주민들이 좋은 일자리를 체감하는 게 정부의 목표이자 지역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는 양천구를 책임지고 있는 김수영 양천구청장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직접 일자리와 양천구 개발의 미래상을 들어봤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지난해 7월 대통령 직속 일자리 위원회에서 지방정부를 대표하는 지역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목소리를 대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는 각 지방정부에서 시행되고 있는 우수한 일자리 정책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중앙-지방정부 간, 지방-지방정부 간 협업을 강화하는 소통의 창구 역할이다. 양천구는 2019년 119개 사업에 7231개 일자리 창출 목표를 수립해 119개 사업, 68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성과를 이뤘다. “일자리는 더 이상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닌,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핵심적인 복지 영역입니다. ‘일자리가 곧 복지’인 거죠. 질 좋은 일자리 창출에 힘써 다양한 계층이 체감하는 내실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는 모두의 바람이자 희망입니다.” 중장년층 일자리 확보를 위한 다양한 노력 김 구청장은 50대 이후의 중장년층을 위한 양천구만의 일자리 지원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양천구의 어르신복지과 ‘인생 이모작 팀’이 중장년층을 위한 여러 솔루션들을 기획 중이다. 그리고 50대 독거남들이 사회에 다시 진출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는 ‘나비남 프로젝트’, 80세 이상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의사, 간호사, 영양사 등 전담 팀이 직접 방문해 건강관리를 해주는 ‘백세건강 돌봄 사업’ 등 세대별 맞춤형 복지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외 양천시니어클럽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장년층이 제2의 인생을 준비할 수 있게끔 다양한 정보 제공 및 취·창업 지원을 위한 양천50플러스센터를 2021년 7월 개관할 예정이다. 또한 ICT 기술을 독거노인 및 취약 계층에 도입해 디지털 취약 계층과의 정보 격차를 줄이고 고독사를 예방하는 신중년 일자리 사업도 추진 중에 있다. 예를 들어 ‘ICT 기반 돌봄 서비스’는 신중년 ICT 케어 매니저들이 AI 스피커를 활용해 독거 어르신의 고독사 예방 및 신속한 위기 대응 등의 돌봄 서비스를 수행하는 일이다. 더불어 조리사 자격을 갖춘 신중년들이 어린이집의 대체조리사로 활동해 급식 공백을 최소화하는 서비스인 ‘대체조리사 지원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 지정 양천구가 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로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지정됐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양천구가 선정된 배경에는 먼저 ‘연의목공방’이 서울시 자치구 목공방 중 규모가 제일 크며, 목재 관련 박사학위가 있는 외부 강사를 인력풀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지자체에서 목공지도사를 직원으로 채용해 직접 운영하는 것도 높이 평가받았다. “양천구는 주거 지역이 전체 면적의 약 72%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베드타운으로 흔히 목동을 얘기하면 대입 전문학원이나 목동 아파트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런 입시학원 중심의 목동에서 평생학습 중심의 양천구를 만들기 위해 오목공원 내 창고로 방치돼 있던 공간을 목공예 체험장으로 조성한 것이 연의목공방의 시작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0년 7월 산림청에서 전국적으로 공모한 ‘목재교육 전문가 양성기관’에 지원하였으며, 지정을 받았습니다. 전국 총 44개 기관에서 신청했는데 6개 기관만 선정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양천구죠. 앞으로 목재교육 분야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국가자격증반도 운영할 계획입니다. 개강은 곧 할 예정입니다.” 12월부터 개강할 목재교육전문가는 산림청에서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지정한 기관만이 배출할 수 있다. 6개월 과정으로 운영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목재교육 분야의 전문지식·기술습득 및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면 목재문화체험장, 강사 활동, 학교 방과후 교사 및 마을 학교 강사, 소창업 등이 가능해진다. 양천구에 목공방 마을 1호가 머지않아 탄생될 것으로 기대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마음 치유는 공원에서 일자리를 못 구하는 일도 사람의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가혹한 생존의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코로나19다. 김 구청장은 자칫 몸과 마음이 삭막해질 수 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삶의 질’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 따라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서 여가를 보내는 대신, 쾌적하고 안전하게 ‘쉼’을 누릴 수 있는 공원을 추천했다. 양천구는 이러한 방향성에 맞춘 다수의 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양천구 면적은 17.4k㎡로 이 중 주거 지역이 71.8%인 12.5㎢입니다. 녹지는 23%인 4㎢로 그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며 전역에 크고 작은 공원 104개소가 조성되어 있어 힐링하기에 좋은 환경이죠. 특히 연의목공방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양천도시농업공원을 작년 4월에 개장했는데, 7000평 규모에 농업체험학습장, 친환경텃밭, 야생초화원, 생태연못 등이 마련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삭막한 도시 환경을 개선함은 물론 마을공동체 사업과도 연계해 건강, 교육, 공동체 개선 등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이끌고 있는 중입니다.” 양천도시농업공원에서 수확한 채소는 각 동의 취약 계층과 어르신 사랑방에 기부하거나 양천푸드마켓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된다. 작년 한 해 동안 기부된 채소들은 300kg이 넘는다. 공원을 가꾸는 재미가 정서적 위안과 함께 공동체 정신을 높이는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김 구청장은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2022년까지 연의목공방 맞은편에 제2의 도시농업공원을 하나 더 개장해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균형 발전을 위한 대규모 사업들 “양천구는 강남권과 비강남권을 말하는 서울시의 축소판처럼 목동과 비목동 간의 지역 격차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균형 발전에 대한 밑그림을 구상했고 민선 7기를 열면서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이 균형 발전을 위해 구상한 ‘H-Plan’은, 양천구의 큰 개발 계획을 통해 동쪽(목동)과 서쪽(비목동)이 균형 발전을 이루고 상생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정책 사업이다. 미래 양천의 30년 발전을 위해 주민들과 약속한 내용이기도 하다. 우선 동쪽에는 중소기업 혁신 성장 밸리를 조성하고 서쪽에는 서부트럭터미널을 개발해 도시 첨단 물류단지를 추진할 계획이다. 남쪽은 신정차량기지를 이전 및 개발해 문화 상업 복합 시설을 유치하며 북쪽으로는 국회대로와 차도를 지하화해 지상에 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신정3동의 서부트럭터미널 개발은 운영사인 서부T&D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해 그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경전철 목동선도 서울시와 정부에서 재정사업으로 추진하기로 발표한 이후, 국토교통부 국가교통위원회의 심의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의 승인이 끝나면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 다음 절차가 진행될 것입니다. 워낙 큰 사업들이라 임기 내에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는 없겠지만 미래의 먹거리 사업이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추진해나가려고 합니다.” 자발적인 착한 소비 운동에 감동 김 구청장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이후 양천구민들에게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 구청에서는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어려워지자 힘들어하는 소상공인을 응원하기 위해 ‘착한 소비’ 캠페인을 시작했다. 동네 단골집에 미리 ‘착한 선결제’를 한다거나 포장 주문을 하거나, 1+1 구매를 해서 주변 이웃과 나누자는 ‘착한 소비자’ 운동이 그 내용이다. “현장에 나가 보면 손님이 너무 없어 힘들다는 사장님이 많은데 ‘주민들이 이렇게 착한 소비 운동을 해주시니 그래도 버틸 힘이 난다’고들 하셨습니다. 그중 한 식당 사장님은 주민들이 방문 포장도 하고 선결제도 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자신도 단골 미용실에서 선결제를 하는 착한 소비자 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정부에서 재난지원금, 새희망자금, 소상공인 신용보증 융자 지원 등 여러 가지 정책들을 통해 소상공인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일시적인 지원보다 단골손님들의 응원과 소비가 더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사실 ‘착한 소비’ 캠페인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사업입니다. ‘나도 힘들지만 우리 이웃을 위해 함께 이겨내자, 힘내자’ 하면서 서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동참해주시는 주민들을 보면참 감사한 마음도 들고, 사회를 움직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주민들에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니어 구민을 위한 행정 최근 김 구청장이 관심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시니어 구민을 위한 디지털 격차 해소다. “얼마 전 모 신문에서 국민 10명 중 8명이 유튜브를 이용하고, 한 달 평균 30시간이나 시청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뉴스가 가장 많은 채널을 묻는 질문에 50대와 60대의 절반 이상이 유튜브를 지목할 만큼 가짜 뉴스에 노출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거짓 정보에서 진짜를 가려낼 수 있도록, 중장년 어르신들의 디지털 역량을 강화해줄 ‘디지털 문해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은 로봇과 시니어를 연결하는 일도 하고 있다. 관내 어르신들의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교육용 로봇 사업을 도입한 것이다. “어르신 복지관 3개소에 얼굴과 음성 인식이 가능한 카카오톡 교육 로봇인 ‘리쿠’를 40대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손님들이 비대면 주문을 선호하고, 사업주의 인건비 부담도 적어 매장마다 늘어나고 있는 무인단말기 ‘키오스크’ 사용을 어려워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패스트푸드점 주문, 기차표 발매, 영화관 티켓 발매, 무인발급기 이용 방법 등을 알려주는 교육용 키오스크를 복지관에 설치하고 관련 강좌를 개설할 예정입니다.” 김 구청장은 또한 ‘스마트폰 사용 기초 과정’을 시작으로 유튜버로 활동할 수 있는 ‘1인 크리에이터 교육’, ‘시니어를 위한 빅데이터 교육’ 등을 실시해 다가오는 스마트 미래 시대에 신중년들이 당당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라고 했다. 현재진행형의 인생 2막 “보통 정년이라고 해서 퇴직하는 나이가 정해져 있는 직업에서는 은퇴 후를 ‘인생 2막’이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계속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더 일해야 할 때라고 말하는 김 구청장은 양천의 미래 30년을 위한 굵직한 사업을 많이 추진하고 있다. 그런 사업들을 꼼꼼히 챙기면서 양천구민들을 위해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밝혔다. 50대 중반의 신중년인 김 구청장이 생각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은 뭘까. 그녀는 나무와 같다는 말로 비유했다. “울창한 산길을 걷다 보면 주위에 나무가 참 많은데, 이 나무들의 나이를 겉만 보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무는 우리처럼 나이를, 이마나 눈가에 주름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나무 속에 나이테로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봄이 되면 모든 나무가 푸른 잎을 꺼내는 것은 똑같죠.” 김 구청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성해지는 나무처럼 나이 들수록 더욱 울창하고 푸르른 나무가 되어, 누군가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그런 포용력과 배려심을 키우는 게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큰 나무처럼 양천의 미래를 책임지며 자신의 나이테를 깊이 새기고자 하는 그녀의 소망이 어떤 봄을 맞이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 2020-11-02 09:12
-
- “동티모르의 성장에 여생을 바치겠다”
- 민간·공공기관 퇴직자로 구성된 ‘월드프렌즈 NIPA 자문단’(이하 NIPA 자문단)은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단 사업으로, 개도국 정부 및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전공 분야의 기술 및 산업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전수하고 있다. 정보통신, 산업기술, 에너지자원, 무역투자, 지역발전 등의 자문을 통해 파견국의 경제, 사회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퇴직 후 자신의 경력을 나눈다는 보람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성장에 일조했다는 자긍심까지 느낀다는 그들. NIPA 자문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해양수산부 근무 30년, 스스로를 ‘뼛속까지 공무원’이라 칭하는 채진규(72) 씨. 수산 관련 국제협력 업무를 보며 해양장관회의 유치, 자동선박위치정보시스템 구축 등에 힘썼고, 해양수산공무원 교육을 담당하면서 개도국의 수산 인력을 국내에 초청하는 일을 주관하기도 했다. 2007년 만 60세 나이로 퇴직한 후 그는 자신의 표현처럼 ‘뼛속까지 배인 경험’ 덕분에 포항시의 해양수산 자문위원으로 위촉돼 관련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미지의 세계로 눈을 돌려 한국국제협력단(이하 KOICA)의 개도국 자문관 파견에 지원하게 됐고, 2014년부터 동티모르 수산청에서 수산자문관으로 3년간 일하며 수산양식훈련센터 건립이라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잘 마치고 귀국했는데, 한편으론 수산양식인력 훈련만으로는 발전을 꾀하기 힘들 거라는 우려와 아쉬움이 남더군요. 그러던 차에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하 NIPA)의 NIPA 자문단으로 동티모르 수산청에서 다시 근무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죠. 그길로 바로 동티모르로 향했습니다.” 채 씨가 NIPA 자문단이 되어 동티모르에 도착했을 때 그에겐 3년 치의 원대한 목표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모두 성사하지는 못했다. 신규 지원자의 파견 기회 확대를 위해 2019년부터 정책이 바뀌어 NIPA, KOICA, NRF 파견자 활동 기간이 통합 3년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KOICA 활동을 통해 그쪽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놨죠. 1년 차에 수산물 유통센터 부지 확보를 시작으로 2년 차, 3년 차에 따른 목표가 있었어요. 아쉽게 기간이 줄어 1차년도의 목표달성 후 귀국했습니다.” 한국 공무원 시절 경험이 노하우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채 씨가 이룬 성과는 적지 않다. KOICA 활동 때부터 추진했던 수산훈련센터 건립 마무리를 비롯해, 딜리공항 내 홍보 TV 설치 및 투자유치 홍보 콘텐츠 방영, 딜리해변 수산물유통센터 건립을 위한 공공부지 확보 행정절차 진행(거의 마무리 단계까지) 등 현역 시절 못지않은 기량을 발휘했다. “물론 한국과 동티모르의 업무 환경 차이는 있었지만, 공무원 시절의 경험이 값지게 쓰였어요. 동티모르는 한국에 비해 정부 예산이나 민간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죠. 국내 해양수산부에서도 수산 정책을 직접 입안하고 담당했던 터라 관련 업무 흐름을 빨리 파악하고 합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어요.” NIPA 자문단 활동 이후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던 채 씨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동티모르에 다시 가겠노라고. 비록 NIPA의 지원은 종료되었으나, 동티모르 수산청의 그를 향한 신뢰는 여전하고, 공공이익 추구를 통해 인생의 보람을 찾는다는 목표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삶의 목표를 금전보다는 보람에서 찾고자 했죠. 앞으로도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모토가 될 것입니다. 가족과 협의해 무보수 봉사를 감행하기로 했습니다. 퇴직 후의 연금 일부를 동티모르의 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요. 물론 국내 봉사도 의미 있지만, 개도국에서 느끼는 보람이 남다르고 더 큽니다. 그러한 기대가 저를 다시 동티모르로 이끈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NIPA 자문단 재파견은 불가능해졌지만, 당초 목표로 했던 계획들은 모두 현재진행형입니다.” 노후의 행복, 자문단 활동으로 찾아보길 채 씨는 올해 초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WHF(World Harmony Foundation)과 접촉해, 현재 동 재단의 투자자들이 동티모르에 10억 달러 내외의 자본을 투자하는 건을 정부기관과 협의하고 있다. 이를 통해 수산 분야뿐 아니라 관광, 에너지, 수자원 등 다방면의 투자유치를 꾀해 동티모르 경제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계획이다. 소속은 달라졌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하나하나 사업을 추진해가며 본래의 목표를 달성해가는 모습이었다. 물론 다시 NIPA 자문단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한달음에 지원할 그다. 무엇보다 NIPA 자문단으로서 느꼈던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채 씨는 자신처럼 한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온 시니어라면 NIPA 자문단에 도전해보길 권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그리고 자기 분야에 자신이 있다면 NIPA의 도움을 받아 자문단이 되어보십시오. 분명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보람을 인생 2막에 찾으실 겁니다. 노후에 비싼 경비 들여가며 해외 관광 가는 대신, 개도국봉사활동으로 좀 더 의미 있는 삶의 목표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평생을 투자해 쌓은 귀한 노하우를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는 행복을 꼭 경험해보길 바랍니다.” △ 채진규 자문단원 ㆍ파견 국가 동티모르 ㆍ파견 기간 2018년 6월 22일~2019년 6월 21일 ㆍ파견 분야 무역투자 ㆍ파견 직종 무역투자 일반 ㆍ파견 기관 수산청 ㆍ자문 내용 수산물유통센터 설립 및 투자유치 홍보 자문
- 2020-10-29 09:03
-
- ‘책인감’ 동네 책방에서 크라우드 펀딩 출판까지
-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책방도 사업입니다. 지속 가능성이 없다면 문 닫아야죠.” 어? 이 사람 ‘찐’이다. 소위 공트럴파크(공릉동+센트럴파크), 옛 경춘선 철길 따라 조성된 노원구 시민공원 한쪽 2층에 위치한 동네 책방 ‘책인감’. 이곳에 위치해 있던 책방 ‘51페이지’를 인수해 간판을 바꿔 단 지 2년 9개월 됐다. 이제 막 전업 3년 차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기업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동네 책방 운영자, 1인 출판사 사장 및 출판 기획자, 저자, 강연자, 콘텐츠 기획자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세포분열 중이다. 이철재 대표는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 18년 동안 안정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조금씩 직책이 높아지고 중간관리자가 되면서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단다. 합리적이지 않은 상사의 지시, 몇 차례 설득과 설명을 해도 돌아오는 건 “까라면 까”라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싫었다. 부하 직원에게 자신 역시 똑같이 불합리한 지시를 내리고 업무 성과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됐을 때 인생 2막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무작정 그만둘 수는 없어 ‘뭘 해볼까?’ 고민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해보자’ 마음먹고 동네 책방 쪽을 알아보게 됐단다.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기존 사업체 인수가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51페이지’와 계약을 하면서 미련 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딱히 책을 열렬하게 좋아했던 건 아니었단다. 자전거 타고 전국을 누비며 여행을 하다가 동네에 자그맣게 자리한 동네 책방들을 만나게 됐고 콘텐츠로서 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고 나와 새로운 인생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지만 ‘바깥은 전쟁터’라는, 드라마 ‘미생’의 대사를 실감하고 있다. 그래도 대기업 출신이 운영하는 동네 책방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주인장 ‘이철재’를 궁굼해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정답은 없지만 계속 도전하는 이유 현재 이철재 대표는 꾸준히 책 관련 콘텐츠 기획을 하며 외연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처음부터 동네 책방 운영만이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인 출판사 ‘책인감’을 통해 ‘이철재’ 이름으로 두 권의 책을 펴냈고 책을 출간하고 싶은 이들과 협업으로 세 권의 책을 더 세상에 선보였다. 이 대표의 저서 ‘1인 가게 운영의 모든 것’은 서점 주인만을 대상으로 펴낸 책이 아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1인 가게 운영자들이 꼭 알아야 할 A부터 Z까지의 노하우를 담았다. 경영학도답게 1년간 동네 책방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시장분석을 통해 스스로를 컨설팅하고 전국의 동네 책방까지 컨설팅해준다. 이 책이 동네 책방에서 판매되고 지역 서점조합의 주문도 받게 되면서 종종 서점조합이나 도서관에서 열리는 행사 강연자로 초대되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동네 책방 업계에 ‘이철재’라는 세 글자를 알리게 된 셈이다. 그런데 책 출간 방식이 기존 출판사 문법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책을 먼저 판매한 뒤 출간을 진행한다. 지난해 3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을 통해 펀딩에 나섰고 220명으로부터 531만3800원의 후원을 받았다. 그 뒤 ‘1인 가게 운영의 모든 것’이 출간됐다. 이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펴낸 두 번째 책은 ‘제주 힐링 여행 가이드’. 대한민국 자전거길 국토 완주 그랜드 슬럼을 달성할 만큼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볐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은 제주 토박이와 관광객으로 이분화돼 있는 제주의 숨은 여행지와 맛집 등을 중간자적 입장에서 소개한 안내서다. 역시 텀블벅 펀딩으로 79명으로부터 164만 원의 후원을 받아 출간됐다. ‘책인감’ 이름으로 펴낸 세 권의 책은 모두 책방 고객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작 출간됐다. 서울시민정원사회가 펴낸 ‘서울시민정원사가 들려주는 가드닝 이야기’, 시와 꽃 동인들이 펴낸 시집 ‘꽃씨한톨’, 간호사 김미정 씨가 펴낸 ‘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다’ 등이다. 책방에서 독서모임을 갖거나 자주 방문하는 고객들이 토로한 출판의 어려움을 듣고 시작된 프로젝트들이다. “동네 책방은 왜 대박을 기대하면 안 되죠?” 이렇듯 이철재 대표는 동네 책방을 기반으로 문화 콘텐츠 기획자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두번째 외연 확장은 마을공동체 및 서울시, 공공기관의 다양한 지원사업 도전이다. 하루에도 수십 개는 뚝딱 만들어내던 기획서 작성 능력을 바탕으로 공공기관의 다양한 수행 사업을 실행 중이다. 특히 마을공동체 사업 등은 책방 공간을 활용한다.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이 모여 그림을 배우거나 기타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장소이자 ‘책인감’을 널리 알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동네 책방의 단골 이벤트라 할 독서모임도 눈길을 끈다. 과학책 읽는 모임인 ‘과학강좌’와 ‘여행강좌’, 그리고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이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모여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금요와인’ 등이 있다. 과학에 관심이 많고 여행과 와인을 좋아하는 주인장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Mini interview '책인감' 이철재 대표 현재 텀블벅 프로젝트 3탄을 준비중이다. 책방 운영하랴… 공공 지원사업 신청하랴… 부족한 시간 가운데에서도 세번째 책 집필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철재 대표가 회사 생활할 때 ‘엑셀의 신’으로 불렸던 본인의 꼼꼼한 엑셀 활용법을 복기하면서 직장 생활의 애환을 담을 예정이다. 엑셀의 무한한 활용을 꼼꼼하게 전수할 실용서에 회사 생활의 애환을 함께 담는 실용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집필 시간이 너무 부족해 월요일 하루였던 책방 휴무를 화요일까지 이틀로 늘렸을 정도다. 이전 텀블벅 프로젝트보다 훨씬 대중적인 분야라 모금액이 더 많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있다. 올해 안에 출간하는 것이 목표란다. 남들이 안 하는 것들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는 질문에 이철재 대표는 아래와 같이 답을 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정답은 없지만 이런 시도를 계속하는 건, 그래야 발전하니까요.” ‘책인감’ 서울 노원구 동일로 182길 63-1, 2층
- 2020-10-19 09:48
-
- 멋진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애쓰는 닮고 싶은 진짜 어른
- 지성언 차이나다 대표는 과거 모 패션 대기업 중국 법인장을 지낸, 자타가 공인하는 1세대 중국통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통보된 퇴직 소식에 쓰라린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되려 적극적으로 제2의 인생 기회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중국어 교육 스타트업 기업 차이나다의 공동대표이자 SNS 시니어 패셔니스타, 그리고 안티에이징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 저자로 자리 잡았다. 그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와 묘미를 찾는 시간을 가졌다. “환갑이 되던 해에, 앞으론 매년 한 살씩 더 먹는 게 아니라 한 살씩 빼며 살겠다고 다짐하고 주위에 공언도 했습니다. 덕분에 올해 주민등록증 나이 65세인 저는 아직 55세 팔팔한 청춘입니다. 그리고 이제 몇 해만 더 지나면, 드디어 40대에 진입하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젊게 살기 위한 고된 그러나 즐거운 행군(?)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중에게 지성언 차이나다 대표는 일반인임에도 친숙하게 다가온다. 출판계에서, SNS에서 그는 이미 그 누구보다도 유명한 시니어들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길거리 캐스팅이 돼 TV 광고를 찍을 정도로 성숙한 세련미가 돋보이는 그지만, 정작 자신은 옷을 그리 많이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의외다. 시니어 패셔니스타의 코디법 “제가 직접 작정을 하고 구매한 옷은 별로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패션 대기업의 중국 법인장으로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자사 브랜드 옷을 얻을 기회가 많았고 패셔니스타로 알려진 뒤로는 협찬도 꽤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옷은 많지만, 구매할 때부터 매칭을 고려하고 산 옷들은 별로 없어요.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매치해서 멋스러움을 창출할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지 대표는 단순히 옷에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구두나 운동화, 양말 같은 소품으로 변화를 많이 주고, 팔찌 등의 액세서리로 살짝 에지를 더하는 방법을 애용한다. 그의 패션 포인트를 요약하면 ‘재킷은 기본에 충실하되 젊은 실루엣의 팬츠, 그리고 애교 있는 액세서리다.’ 그는 “그래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것이죠”라고 말하며 웃는다. “재킷은 가능하면 다소 짧은 기장으로 상하 비율이 좋아 보이게 하고, 팬츠의 밑단 폭은 18cm 전후로 하고 기장은 복숭아뼈가 보일락 말락 하는 정도로 맞춰야 전체적으로 젊고 세련된 느낌을 줍니다. 상·하의가 다소 밋밋하면 과감한 신발로 액티브함을 더하기도 하고 재킷에 부토니에르를 꽂아 클래식함을 연출하기도 하죠.” 은퇴 후에는 ‘나눔’이 삶의 방향 패션 철학에 대한 단호하고 간략한 설명을 듣다 보니 지 대표의 경력이 다시금 떠올랐다. 과거의 경력과 함께, 그는 지금 스타트업 기업의 대표이자 자신의 안티에이징 노하우를 소개한 책 ‘그레이트 그레이’의 저자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일로 제2의 인생을 채우는 지금의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오래전부터 은퇴 후에는 ‘나눔’이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30년 넘게 중국 주재원을 했던 사람으로서 그 경험과 노하우를 후학들과 나누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인생 2막의 큰 방향과 지금 하는 일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레이트 그레이’를 쓴 것도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동안의 경험, 특히 은퇴 후의 새로운 도전들과 그로부터 얻은 행복의 비결들을 여러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는 것이다. “책이 나온 후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제 강연을 들은 분들이 인생 2막 설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피드백을 주실 때 더없이 행복함을 느낍니다. 말로만 듣던 ‘선한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미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책을 낸 덕분에 방향을 다잡으며 삶에 대한 다짐도 한 번 더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책을 쓰지 않았다면 어쩌면 포기했을지 모르는, 책 속에서 언급한 소위 ‘멋있게 나이 드는 법’들은 독자들과의 약속이니만큼 계속 견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설령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어도 저 자신은 알잖아요? 저부터 배신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위 마인드 에이지(Mind Age)를 매년 더 젊게 가지니, 자연스럽게 그에 걸맞은 피지컬을 갖추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패션 감각도 해가 갈수록 더 젊어졌다. 쉽지 않은 일들일 텐데, 얘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무척이나 즐겁게 나이 들어가고 있기에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뛰는 일은 도전만으로도 승리한 것 “일단 초긍마(초긍정 마인드) 스위치를 켜야겠지요. 그러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크고 작은 재미 요소도 많아집니다. 그 재미 요소를 진짜 재미로 승화하려면 평소 습관이 중요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하잖아요? 일상의 작은 것에서 자주 행복을 느끼는 소확행을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그게 일상이 되고, 행복한 일상이 모여 재미있게 나이 들어가게 되는 거죠.” 지 대표는 즐겁게 나이 드는 대단한 비법은 없다고 단언한다. 어쩌면 아는 사람한테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데, 모르는 사람들한텐 너무 어려운 게 재미있게 살면서 나이 들어가는 게 아닐까? 그는 소확행이라는 단순하고 우직한 해법을 확고하게 믿기에 그게 가능한 사람인 듯했다. “먼저 자신을 살펴보세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에 가슴이 뛰는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 가슴 뛰고 즐거운 일들을 리스트 업한 후에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하나씩 해보는 겁니다. 은퇴 후의 이런 도전들은 굳이 대단한 목표일 필요도 없습니다. 도전해보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하면 결과에 관계없이 이미 그 도전은 성공한 것이고 당신은 승리자입니다.” 부부관계의 해법은 ‘공감’과 ‘공간’의 조화 지 대표를 촬영하는 날, 아내도 함께했다. 그가 아내와 친구처럼 잘 지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부 사이는 곧잘 위기에 처한다. 그가 생각하는 중년 부부의 아킬레스건과 위기 대처 비법은 무엇일까? “은퇴 후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중년 부부들이 친구처럼 잘 지낼 수 있는 비법은 부부가 아니라 친구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친구처럼 잘 지내기 위해선 ‘공감’과 ‘공간’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하고요.” 나이 들수록 부부 사이에는 대화가 줄고 공감 능력, 공감할 소재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는 부부끼리 할 수 있는 놀이나 취미를 일부러라도 갖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그가 촬영 현장에 아내와 동행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남편이 하는 일에 아내도 참여하면 공감대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부부가 함께하면 좋은 운동 중 최고는 걷기입니다. 같이 걷는 동안 그냥 걷기만 하지는 않잖아요.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쉼 없이 주고받습니다. 부부가 걷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 건강은 물론, 따로 소통의 시간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공감 능력이 증가됩니다.” 아울러 지 대표는 중년 부부들에겐 ‘공감’, ‘함께하기’도 중요하지만 ‘공간’, ‘따로 하기’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년 부부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배우자와 아이들을 위해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야 아내나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만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생기는 시점입니다. 따라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요. 각자 하고 싶고 좋아하고 가슴 뛰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배우자가 원한다면 딴지(?) 걸지 말고 허락해주세요. 그렇게 일정 부분 상대방만의 ‘공간’을 허락해야 친구처럼 잘 살 수 있습니다. 상대는 내 아내, 내 남편이기 훨씬 이전부터 독립된 한 인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와 연결된 시니어가 돼라 얘기를 듣다 보니 그가 겉으로만 젊어지려는 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젊어지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SNS를 계속 하고 있는 이유 또한 그러한 생각에서였다. “100세 시대죠. 아직도 몇십 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다가올 미래와의 접속은 꼭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거든요.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며 추억만 먹으며 살기엔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나 길어요. 그러므로 SNS 같은 새로운 소통 도구들도 적극 활용하고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손주들과의 소통도 SNS로 해야 더 활발해지고 공감대도 넓어집니다.” 손주 얘기가 나오니 그에게서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 나왔다. 시니어 패셔니스타에게도 손주는 생각만 해도 즐거워지는 존재인가보다. 그에게 손주의 존재는 지켜야 할 삶의 법칙을 다시금 되새기는 이유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목숨 다하는 날까지 멋진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애쓰다 떠난, 닮고 싶은 진짜 어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손주들아! 몇 년만 더 지나면 너희들은 훌쩍 클 것이고 할아버지는 오히려 작아지고 허리도 굽고 더 쭈글쭈글해지겠지. 그때 냄새 난다고, 말 제대로 못 알아듣는다고, 걸음 늦다고 타박하기 없기다. 그냥 지금처럼 할아버지를 보면 빛의 속도로 활짝 웃으며 달려와서 와락 안겨주렴. 그리고 귀에 대고 조금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해주렴. ‘할아버지 사랑해요’라고.”
- 2020-09-30 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