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어느 새 12월, 당신의 생일과 기일이 함께 있는 달이 돌아왔군요. 가는 해와 오는 해가 조우하는 달 12월. 당신은 그렇게 12월 중에 세상을 오고 갔네요. 당신 기억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때도 12월이었다는 걸. 물론 기억하실 테지요. 만난 지 꼭 1년 되던 해, 그날에 결혼했으니까요. 우린 평범하게 만났지만 애틋한 사랑의 씨줄과 날줄을 엮기 위해 로맨틱한 무언가를 연출하고 만들어내곤 했지요. 처음 만난 날짜에 맞춰 결혼하기로 한 것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러고는 처음 만난 날에 헤어진 것도…. 하지만 그건 로맨틱한 결정이 아니었기에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리고 쓰리네요.
남편의 폭력, 어이없는 감금 불러
“내 동생한테 감히 손찌검을 해요? 당장 헤어지세요. 폭력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생각 말라고요.”
“처형, 집사람에게 손을 댄 건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가 지금 처형댁 문 앞에 있습니다.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제가 무릎 꿇고 빌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용서를 구한 후 다시 잘살아보겠습니다.”
나는 그날 당신이 집에까지 찾아온 것도 몰랐어요.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방에서 훌쩍이느라 문 앞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몰랐던 거죠. 하긴 문자로 주고받았으니 큰 소리는 고사하고 작은 소리도 들렸을 리가 없지요. 난 지금도 그 점이 의아해요. 언니처럼 성질 급하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냅다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이 문 앞에 당사자를 두고 어떻게 그렇게 차분히 문자 소통을 할 수 있었는지. 하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그 후로도 계속됐지만.
당신한테 한 대 맞고는 속이 상해서 언니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후 사실상 나는 언니네에 감금당한 꼴이 되었지요. 언니가 집으로 돌려보내 주질 않았으니까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가 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철없는 나보다 더 나를 염려해서 그런다고만 생각했어요. 왜 안 그랬겠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한날한시에 여의고 중 3, 중 1이던 언니와 나는 친척집을 전전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둘이 생활하게 되었지요.
친척들의 도움도 언니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였으니, 졸업 후 바로 취업이 되지 않아 전세금을 빼서 보증금을 얼마간 넣고 월세를 살면서 그 돈을 야금야금 생활비로 썼지요. 둘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버텨나갔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언니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열의를 잃고 그렇다고 마음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말하자면 방황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생활에 대한 부담은 내가 다 져야 할 형편이었지요. 하지만 운 좋게도 그런 와중에 나는 대학에 가게 됐고, 졸업하고 취업하던 무렵 당신을 만났던 거예요.
내가 만남 100일 기념 이벤트다 뭐다 하면서 애들마냥 유치하게 굴었던 것도 충분히 받지 못한 부모님 사랑에 대한 굶주림 탓이었다고 봐요. 그걸 당신한테 받으려 했으니 당신도 피곤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당신은 날 기쁘게 해주려고, 내 기대에 맞춰주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어요. 인정합니다.
다만 그날 결혼 후 처음으로 부부 싸움이 격렬했던 날, 당신이 나를 때린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날 때릴 수 있는지…. 무엇 때문에 싸웠죠, 우리?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사소한 일이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길로 헤어지게 되었지요.
언니의 시기 동생 부부 갈라놔
“언니, 나 이만 집에 돌아갈래. 그 사람이 걱정돼. 보고 싶기도 하고.”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한 번 때린 사람은 또 때리게 되어 있어. 계속 맞고 살래? 네가 뭐가 모자라서?”
“그 사람이 사과했어. 여기 있는 동안 문자도 오고, 전화도 오고.”
“뭐라고? 이리 내놔 봐.”
그래요, 언니는 분명 과잉, 과민반응을 했던 거예요. 처음에는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점차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부부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아무리 동생이고, 다른 집과는 다른 각별한 자매라 해도.
언니는 결국 대학에 가지 못했어요. 학비 부담 때문이라고 본인은 포기의 이유를 댔지만 그건 핑계고 실은 성적이 안 됐던 탓이었죠. 대학생의 꿈도 멀어지고 다시 취업하기에도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졌던 언니는 그때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아요. 그럴 만도 하지요. 부모님을 하루아침에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아, 당시엔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얼마나 컸겠어요. 대학에라도 합격했다면 그나마 우울증은 피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부턴 내가 언니의 보호자로 실질적 가장이 되었지요. 언니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병원을 가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조차 곧 그만두더라고요. 치료비 부담보다 정신과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언니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냐고요? 언니가 내게 주는 영향은 보통 이상이었기 때문이에요. 정상이 아니었죠. 언니는 내게 시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무의식적으로요. 비록 전문대지만 대학도 나왔고, 취업도 바로 되었고, 곧 결혼도 할 나에 비해 본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여긴 것 같아요. 더구나 당신과 난 간호사로 같은 병원에서 만났고, 함께 장래의 꿈을 키워가는 걸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언니가 나의 불행을 바랐다는 뜻은 아니에요.
남편의 교통사고, 생일이 기일 되다
“처형이 당신 걱정을 하는 건 당연히 이해하지만 당신이 미성년자도 아니고 너무 간섭이 심한 거 아니야? 도가 지나치잖아. 사과를 하려면 당신을 만날 기회를 줘야 하는데.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사과를 했고 당신도 이미 나를 용서한 마당에 처형이 왜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냐고?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당신이 전화로 했던 말 기억나죠? 결국 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한 당신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의 심정으로, 일단 언니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2년 기한의 외국 병원 근무를 택했지요. 그리고 3개월 만에 현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마침 당신 생일에. 그래서 생일이 기일이 되고 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운명의 남자.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군요.
청천벽력이란 그럴 때 쓰는 말이더군요. 나도 그땐 언니하고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지낼 때였지요. 고집을 피울 걸 피워야지, 당신이 그렇게 떠나니 괜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막무가내인 언니가 꼴도 보기 싫더라고요.
물론 우리는 그때 얼마든지 다시 만났어도 되는 거였어요. 언니가 우리를 미행할 것도 아니고, 내 다리를 묶어 한쪽 끈을 붙잡고 있을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 언니의 우울증이 심해져서 혼자 둘 수 없어 당분간 같이 지내게 되었고, 그 점이 당신을 답답하고 화나게 했던 것 같아요. 나까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거죠. 그 무렵 우리 사이가 서먹해진 것도 사실이었고요.
이래저래 심란하던 차에 바람도 쐴 겸 보수도 더 나은 곳에서 한 2년 일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도 어차피 나는 언니 옆에 있어야 해서 였어요. 당신의 손찌검이 빌미가 되어 별거를 원한다는 오해를 당신에게 주고 싶지 않아 당신의 결정을 존중했던 거지요. 그것이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요. 당신이 그렇게 세상을 뜨자 언니는 뒤늦게 자신 탓이라며 자살을 시도했고, 반복되는 자살 시도로 지금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중이랍니다.
남편 떠난 빈자리 채우는 유복녀
당신 그렇게 가고 나는 어떻게 살았냐고요? 나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당신이 외국으로 떠났을 때 나는 임신한 상태였어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말하려고 했지요. 근데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요. 그전에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언니 때문이었어요. 가뜩이나 내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질투와 시기심에 더 상태가 나빠질까봐 조심스러웠어요. 당신한테만 살짝 말하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당신은 몰랐지만 언니는 그때 나와 당신의 통화 내용, 주고받은 문자를 다 체크하고 있었어요.
언니는 그때 당신이 나와 아주 헤어져서 떠났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임신 사실을 바로 말할 수 있었겠어요. 물론 방법을 찾고 있었지요. 언니 몰래 알릴 수 있는 길을.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도저도 소용이 없었던 거지요.
이름은 혜원이에요. 당신과 나를 반반 닮았어요. 당신 떠난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똑똑하고 예쁜 딸이에요. 혜원이는 이담에 커서 아빠, 엄마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대요. 아, 그리고 나는 공부를 더해 정식 간호사가 되었어요.
이제 또 한 해가 저무네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당신과 결혼하고, 또 당신을 떠나보낸 12월이 이렇게 막을 내리려나 봅니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육군에서 30년간 복무한 뒤 중령으로 전역한 김준한(63)이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신 귀농한 데엔 그럴 만한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건강을 회복하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신념이 그의 푯대였던 것. 인간만큼 다양한 재능을 지닌 생명체가 드물다. 그러나 육신의 구슬픈 비명 앞에선? 비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자구책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김준한은 귀농을 치유 방편으로 삼았다. 농사에 쏟는 정당한 근로와 산골의 자연환경에 잠재한 갖가지 치료제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보았다. 그가 내심 비상 사이렌을 켜고 찾아든 귀농지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의 산골. 올해로 귀농 12년 차다.
김준한의 거처는 거듭 휘어지는 농로의 끝, 살짝 외진 산기슭에 있다. 머리카락 보일라 장독 뒤에 숨듯이, 야트막한 야산의 품에 폭신하게 안긴 터전이다. 다소 은밀하면서 매우 아늑하다. 이른바 명당이란다. 그는 지관을 대동하고 예천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이곳을 찾아냈다. 처음엔 경기도 양평 지역에서 터를 물색했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지. 그래 고향인 예천에서 정착지를 찾았으며, 용케도 이곳을 발견하고 환호작약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좋은 터와 인연이 되다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는 사람의 기운을 돋우는 땅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이곳에 살면서 건강을 완연하게 되살렸다. 다시 말해 그에게 풍수는 아리송한 신비주의가 아니다.
여하튼 대뜸 편안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푸른 소나무 즐비한 야산이 두 팔을 벌려 집과 마당을 포옹하고 있으니 산이 보호자 역할을 하는 형국이다. 자연과 교류하며 은연중에 받을 수 있는 ‘인생 레슨’도 많을 환경이다. 이렇게 썩 이상적인 곳에서 김준한은 고독한 ‘나 홀로 귀농’의 막을 올렸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숙식하며 고추, 감자, 옥수수, 고구마, 메밀 등을 심는 것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이후 자두 농사로 전환했다. 사전 준비는 충실했다. 전역 3년 전부터 귀농이라는 거사를 위해 차근차근 대비했다. 중도에 퇴장하는 불상사만큼은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귀농을 하면 내 손으로 집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관하는 전통공예건축학교에 등록했다. 2년간 대목장 신응수 선생의 강의와 실습에 참여해 집짓기의 기본을 배웠다. 전역 직전에 ‘제대 군인을 위한 귀농 교육’도 받았다. 이곳에 내려와서는 예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많은 걸 배웠다. 그 외에도 다종다양한 농업 교육을 받았다. 귀농 교육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초심자가 믿을 만한 매우 유력한 기회라 본다. 수년간 열성껏 교육을 받자 마인드 자체가 달라지더라.”
자신감이 붙던가?
“자신감은 물론 성격마저 바뀌는 걸 경험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쪽으로 변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흔히들 재배 작목 선정에 귀농 성패의 관건이 달려 있다고 본다. 자두를 주 작목으로 정한 이유가 있겠지?
“처음엔 채소류를 소소하게 길렀으나 포기하고 자두 농사 하나에 집중했다. 집 앞의 밭 450평을 자두 과수원으로 꾸린 게 출발점이었다. 애초 블루베리 농사를 구상했었다. 그런데 예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만류했다. 가격변동이 심해 안전하지 않은 작목이라는 얘기였지. 그러면서 권장한 게 자두였다. 이건 예천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라서 유리한 요소가 많다는 설명에 이끌려 자두 농사에 뛰어들었다.”
귀농 이후 10여 년째 자두 농사만 하고 있다. 좋은 선택이었나? 아무리 작목 선정을 잘하더라도 이상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게 농사인데.
“주변을 보면 귀농에 실패하고 역귀농을 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 원인 중에 가장 큰 건 영농 실패이며, 이는 주로 작목 선택의 오류에서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난 매우 좋은 선택을 한 셈이다. 자두의 전망이 좋아 농장을 2300여 평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혼자 능히 운영할 만한 이상적인 규모라 생각한다.”
소득은 어느 정도 올리나?
“연매출 평균이 3500만 원 내지 4000만 원이다. 이 중 순소득은 70% 정도다. 물론 날씨에 따른 기복은 있다. 어느 해엔 너무 이르게 내린 서리 피해로 매출 제로를 경험하기도 했다. 자두나무 하나에 온전히 남아난 자두가 겨우 두어 개에 불과했다. 난 흙의 진리를, 땀 흘린 만큼 대가가 돌아올 거라는 진실을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자두 농사는 여느 작물에 비해 장점이 많아, 심지어 고행에 가깝다는 귀농 생활을 무난하게 이끌어왔다.”
스트레스 사라지자 건강도 좋아져
김준한의 귀농 이력은 어언 12년 차. 10년이 지나고서도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귀농인들이 숱하지만 그의 자두 농사는 일찌감치 궤도에 올라섰다. 온갖 교육을 섭렵하면서 얻은 식견, 날이면 날마다 농장으로 달려가는 근면성, 그리고 자두나무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머리와 감성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매출은 아니지만 혼자 생활하기엔 섭섭할 게 없는 수입이라, 이쯤이면 자리가 잡힌 거라고 그는 자족한다. 무엇보다 귀농 목적을 이미 완수했다는 점이 그는 기쁘다. 농업 수익보다 건강 회복을 목표로 한 귀농이었는데 서서히 건강이 좋아지더라는 게 아닌가.
마음은 물론 몸이 아플 때 삶이 비로소 소중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아픔이, 고통이 지름길로 데려다준다는 소식이 고래(古來)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쏟아진다. 불굴의 의지로 병든 몸을 추슬러 농사는 물론 건강까지 부양한 김준한의 행장은 고통을 차라리 견인차로 삼아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의 묘미를 웅변한다. 그는 중증 당뇨병으로 고초를 겪었으나, 어라, 농사에 병약한 육신을 투입하자 바뀌었다.
“오죽 암담했으면 아내의 격렬한 반대를 외면하고 달아나듯이 홀로 귀농을 했겠는가. 당수치가 600까지 올라가면서 시력이 나빠져 실명까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 서서히 당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안경을 벗었다. 당뇨병은 물론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건강 상태가 현저하게 좋아졌다.”
귀농의 무엇이 치유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나?
“내 병은 군대 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 누적에서 온 것이었다. 지시가 주어지면 임무 기간 안에 종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매우 컸다. 이건 고질적인 것이었으나, 정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조용한 산골로 귀농하면서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됐다. 깨끗이 벗어났다. 과도한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소규모 농사라서 즐거운 기분으로 일했던 점도 몸을 정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좋은 공기와 물, 산야에 흔한 약초와 나물들을 섭취한 것도 득이 된 것 같다.”
일취월장일까? 이젠 예천 관내에서 알아주는 농가로 부상했다지?
“자두 농사에 관한 한 달인 소리를 들을 때가 됐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전국 각지에서 견학을 오는 농부들도 많다. 자두 품질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재배 시설인 ‘Y자 다주지 방식’을 공부하러 오는 이들이다.”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Y자 다주지 방식’은 Y자 파이프 프레임에 자두 가지들을 가지런히 펼쳐 재배하는 기술로, 자두 생산량이 최대 5배에 달하는 등 이점이 많다. 그는 이미 안전한 수준에 올라선 탄력으로 머잖아 매출이 더욱 늘 거라 예측한다. 귀농 이후 드센 파도를 겪는 일 없이 행진해왔으며, 향후 탕탕 질주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상황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과욕을 경계한다.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스스로 분수를 가늠해 매사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을 꾸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게 귀농의 목적 중 한 가지이기도 했다. 그리 살자고 집도 자그맣게 지었다. 흙과 나무로 지은 15평짜리 한옥이다.
“자금 사정도 고려했지만 소탈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간소하게 지었다. 내가 도연명을 좋아한다. 그의 ‘귀거래사’를 보면 소박한 생활 정경이 나오더라. 작은 초가를 짓고, 작은 텃밭을 만들고, 뜰엔 복숭아와 자두나무를 심어 자족하는 옛사람의 모습에서 감흥을 느꼈다. 감히 위인을 흉내 낼 수야 없지만, 나 역시 소소한 것에서 만족을 누리는 삶을 맛보고 싶었다.”
손수 집을 지었다지? 한옥 건축엔 까다로운 공정이 많은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게다가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
“미장이나 조적 등 난해한 부분은 기술자를 불러 썼다. 하지만 설계 초안을 비롯해 많은 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원목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을 해 서까래 164개를 손수 만드는 식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업자에게 맡기면 두 달 안짝에 완공하겠지만 난 2년 반 만에 완료했다. 실로 고달팠다. 그런데 집을 완성하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일이?
“아내가 비로소 나의 귀농에 동의를 표했다. 애초 귀농의 ‘귀’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사람인데 집 지은 걸 보고 생각이 바뀐 것이지. 내가 귀농한 후 이곳에 아예 오질 않았던 아내였으나, ‘이젠 주말마다 내려오겠다!’고 하더라고.(웃음) 비로소 어둡고 추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그의 아내는 안양시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한다. 남편의 도발적인 귀농에 오만정이 떨어졌었나? 빗장을 건 마음을 풀어놓기까지 긴 세월이 걸린 셈이다.
애당초 한결 매력적인 설득과 회유로 부인과 동행하는 귀농을 할 수는 없었을까? 인생의 가을에 부부가 유유상종하며 흘러가는 모습처럼 진실한 드라마가 드문데.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낄 따름이다. 병을 안은 채 농사와 집짓기를 함께 했던 초기 2, 3년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내가 자청한 지옥이다. 그런데 아내가 건져준 게 아닌가. 머잖아 아내는 퇴직한다. 이후엔 이곳에 내려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살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아진 나이다. 귀농 12년 세월을 낭비라 느낀 적은 없었나?
“시간을 아껴 쓰며 살았다. 덕분에 건강을 되살렸고, 아내의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겠나? 이 정도에 만족한다. 더도 덜도 필요 없다는 거.”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인생을 통째 긍정하는 짧은 언설이 바윗장처럼 묵직하다.
김준한이 주는 귀농 Tip
•귀농으로 낭만적인 전원생활이 가능할 거라는 환상을 버리자. 이상향의 크기를 줄이라는 얘기다.
•기술집약적이고 소득 수준이 높은 작물을 찾아내자. 그러자면 갖가지 귀농 교육을 충실히 받아 물정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귀농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기 자본 투자에 무리하지 말자. 길게 보고 서서히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매스컴이 떠드는 귀농 성공 사례를 그대로 믿지 마라.
•혼자 하는 과수 농사의 경우 2000평 규모가 적당하다.
•농업 장비들은 가급적 임대해 사용하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잦은 음주는 금물이다. 무질서와 방황의 첩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온전히 나로 사는 순간은 언제일까.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 할머니… 삶의 대부분은 가족의 이름 뒤에 자신을 수식해왔다. 예순셋 나이에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난 후에야 ‘박영혜’라는 이름을 앞세우게 됐다. 홀로 우뚝 서 오롯이 자신을 마주한 뒤에야 깨달았다. 가족으로부터 놓여나는 것이 아닌, 가족 안에 놓여 있어야 ‘완전한’ 내가 된다는 것을.
박영혜 감독이 대중에 얼굴을 알린 건 SBS 예능 ‘미운 우리 새끼’였다. 아들인 배우 이태성과 손주 한승 군이 출연하며 덩달아 유명세를 탄 것이다. 한동안 ‘이태성 엄마’, ‘한승이 할머니’로 불리던 그는 영화감독 데뷔 소식과 함께 프로그램 패널을 하차했다. 당시 예순이 넘은 나이에 영화감독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화제를 모았지만, 이후 행보는 놀라웠다. 첫 작품 ‘짜장면 고맙습니다’가 50여 개 국내외 영화제 초청작 선정에 이어 40여 개에 달하는 트로피를 거머쥔 것. 개봉 후 영화의 성과를 공유한 박 감독의 SNS 프로필은 쉴 틈 없이 바뀌었고, 현재도 기록은 경신되고 있다. 데뷔작에 쏟아진 뜨거운 관심이 믿기지 않는다는 박 감독이다.
“꿈만 같은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어요. 내 얘기가 아니라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주변에서 영화감독 ‘데뷔’했다고 말하는데, 그것도 실감이 안 나요. 마치 대단한 일을 해낸 듯 보이잖아요. 그저 ‘인생에서 또 하나의 경험을 했구나’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많이들 인정해주시고 호평해주셔서 조금씩 성과를 체감하고 있습니다.”
아련히 피어오른 용기, 도전으로 불태우다
세간에는 박영혜 개인보다 누군가의 엄마, 할머니로 알려졌기에 그가 영화감독이 된 정황을 모르는 이가 많을 것이다. ‘짜장면 고맙습니다’는 신성훈 영화감독과의 공동 작업물이다. 신 감독이 먼저 협업을 제안했다. 영화 관련 이력이 전무한, 그것도 어머니 연배인 박 감독에게 손을 내민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장애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실제 주인공인 최종만·정명숙 부부는 제가 오래전부터 봉사를 통해 인연을 이어왔는데요. 신 감독이 이분들의 사연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 제 역할이 필요하다더군요. 실화 소재 작품은 그 이야기에 관련된 사람이 스태프로 참여해야 진정성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면서요.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데 마음속에 아련한 용기가 피어오르더라고요. ‘그래, 한번 해보자’ 하고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전까지 영화감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꿈도 아니었어요.”
꿈꿔온 일은 아니라 했지만, 지나온 삶을 듣노라면 그리 불가능한 도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무용을 전공한 박 감독은 결혼 후엔 육아에 전념했다. 그러다 다시 전공을 살려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심각한 허리 통증 때문에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크리스천인 그는 기도로 심신을 치유해나갔다. 차츰 종교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 박 감독은 ‘선교무용’을 접했다.
“단순히 찬양만 하는 게 아니라 무대 예술로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는 활동이에요. 전공도 살릴 겸 한동안 선교무용을 하다가 손주가 태어나고 다시 육아의 길로 접어들었죠. 한승이 키우면서 구연동화랑 마술을 배웠는데, 정말 재미있어하더라고요. 내가 줄 수 있는 이 즐거움을 더 많은 아이들에게 선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마구마구’라는 매직아동극단을 만들었습니다. 마술 퍼포먼스에 동화 줄거리를 입혀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해나갔죠. 주로 장애아동 어린이집이나 복지시설 등에서 공연을 펼쳤는데, 아이들이 행복해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마구마구의 대표였던 박 감독은 무대를 올리기까지 전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극본을 위한 글쓰기부터 무대 연출, 음악 선정, 소품과 의상 준비 등을 직접 해내며 한땀 한땀 정성껏 공연을 완성시켰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해온 극단 활동은 영화감독이 되는 데 훌륭한 자양분이 됐다. 잠재된 능력에 그치지 않고 세상 밖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성향도 한몫했다. 차분한 외모와 달리 모험과 도전을 즐긴다는 그다.
“예전에 카세트 같은 게 고장 나면 무작정 드라이버 갖다가 뜯어봐야 직성이 풀렸어요. 밖에서 맛있는 거 먹고 오면 꼭 직접 만들어보고, 뭐든 새롭게 해보고 배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심지어 난타 자격증도 있답니다.(웃음) 그렇게 무모한 제게도 영화감독은 크나큰 도전이었죠. 주변의 많은 도움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족의 응원이 가장 큰 힘이 됐습니다. 특히 남편의 격려에 용기가 많이 생겼어요.”
감독으로 인생 2막, 반쪽 가면이라도 즐거워
박 감독과의 인터뷰 중 현장 한쪽에 놓인 여러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가면은 그리스어로 ‘페르소나’인데, 최근 여러 사회적 가면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현상을 일컬어 ‘멀티페르소나’라고 한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 할머니이자 이제는 영화감독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얻게 된 그의 상황이 오버랩됐다. 박 감독 역시 공감했고, 이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가면을 소품 삼아 사진을 찍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가면을 고르라 주문하자, 반쪽짜리 가면이 그의 손에 들렸다.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내가 아내이고 엄마이고 할머니라는 사실은 변함없어요. 평범한 주부로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가정의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탈바꿈하는 건 쉽지 않죠. 저 말고도 인생 2막을 사는 많은 중년 여성이 그럴 거라고 봐요. 그런 점에서 아직은 온전히 변신할 수 없기에 반쪽 가면을 골랐어요. 그렇다고 서글픈 건 절대 아니에요. 박영혜 감독으로 내 이름이 타이틀이 되는 것도 의미 있지만, 태성이 엄마, 한승이 할머니라고 불리는 게 여전히 기분 좋고 행복하니까요. 또 그 모든 것이 합쳐졌을 때 완전한 ‘나’라고 볼 수 있고요.”
아직은 ‘감독’이라는 호칭이 어색하단다. 영화 촬영 초반만 해도 누군가 “박 감독님” 하고 부르면 자신인지 모르고 딴청을 피우곤 했다. 그런 그가 처음 자신의 새 가면을 체감한 건 영화 편집 막바지쯤이었다.
“시나리오 쓰고 촬영할 때만 해도 내가 감독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영상들이 하나둘 모이고 편집되면서 작품의 형체가 갖춰져가니 그나마 와 닿았죠. 나중에 최종본이 나왔을 때 집에서 가족끼리 첫 시사회를 했는데, 좀 더 실감 나더라고요. 그 후 영화관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작품을 마주하니, 아 내가 감독이 되긴 했구나 싶었습니다.”
감독은 영화를 마중물로 관객과 소통한다.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주는 게 감독의 역할이자 재능이라 하겠다. ‘짜장면 고맙습니다’는 장애인 인권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로맨스 장르로 풀어냈다. 박 감독은 장애인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더 따뜻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실화가 바탕이긴 했지만, 장애인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의 사랑을 어떤 기교나 과장 없이 진솔하게 담는 데 충실했다. 그의 노력과 진심은 다행히 관객들의 마음에도 닿을 수 있었다.
“부산가치봄영화제에서 배리어프리 영화(시·청각 등 장애와 무관하게 누구나 감상하도록 자막과 화면 해설 등을 더해 제작한 영화)로 상영했는데, 그날 장애인 관객이 많았어요. 영화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분들이 계시니 더 떨리더라고요. 유심히 살펴보니 상영하는 동안 같은 장면에서 함께 웃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동시에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어요. 당사자들이 공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게 뿌듯했죠. 상영을 마치고 한 관객께서 자신의 감상평을 시로 적어주셨는데 저 또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영화를 통한 소통의 즐거움이 이런 거구나 깨달았죠.”
후회보다는 차라리 실패가 낫다
관객이 적어준 시의 제목은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하여’다. 시에는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세상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인생 후반전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 박 감독에게도 울림을 주는 내용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장애인을 비롯해 사회에 소외된 이웃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혹시 시니어 소재 영화를 만들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눈을 반짝이며 화답하는 박 감독이다.
“왜 없겠어요. 우리 중장년들이 어린 시절에 했던 놀이들 있잖아요.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자치기 등을 주제로 잡아 뭔가 해보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당장 영화까지는 무리이고, 짤막한 글들을 써두었다가 나중에 옴니버스(여러 에피소드를 한데 묶은 영화)나 시리즈로 연출해보면 어떨까 해요.”
첫 영화도 잘된 데다, 아이디어도 좋고 열정도 있다. 차기작 제안도 들어왔다. 모든 조건이 그를 감독의 삶으로 강하게 충동질하지만, 그는 오히려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체력 고갈.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 줄곧 말해왔지만, 젊은 스태프도 힘들어하는 영화 작업을 수개월간 매진하다보니 몸무게가 9kg이나 빠졌단다. 당분간은 외적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내면의 허기도 달래볼 계획이다.
“지금의 감독 박영혜를 있게 한 건 마구마구 극단 활동이 컸다고 봐요. 코로나19 때문에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는데, 다시 시작해볼 참입니다. 영화감독으로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것도 좋지만, 예전에 작은 무대에서 봉사하며 느낀 기쁨과는 맛이 또 다르더라고요. 뭔가 내 안의 깊은 곳부터 차오르는 게 느껴지죠. 그렇게 내적 에너지가 충만해져야 영화든 글이든 다시 꽃피울 수 있다 생각해요.”
서두르지 않고 한발 한발 꾸준히 도전을 이어가겠다는 박 감독. 그는 끝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한 해가 저물어가네요. 연말이 오면 이런저런 후회가 들곤 하죠. 그런데 인생 말년에도 그런 후회가 들면 큰일이잖아요. 너무 나이에 연연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하고 싶다’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의 중간에 있으면 결국 아무 것도 못 하거든요. 과감하게 방향을 틀어보세요. 안 하면 후회할 거고, 해서 안 돼봐야 실패인데, 후회보다는 실패가 낫지 않을까요? 어느 쪽이 됐든 경험이라는 산물이 인생을 충만하게 해줄 테니까요. 용기를 내서 내년에는 꼭 도전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제게 주어진 숙제를 다 하고 유튜브를 운영하는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 같아요.” ‘최초의 대법관 출신 유튜버’로 유명한 박일환(71) 변호사는 40년 넘게 법조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사이 직업에는 변화가 있었다. 판사에서 대법관을 거쳐 현재는 변호사 겸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삶에서 법조인이었던 시간이 아니었던 시간보다 더 긴데도 여전히 법을 사랑하는 그를 만나봤다.
1973년 제15회 사법시험에 합격, 19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98년 특허법원 부장판사, 2003~2005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05년 제주지방법원장, 2005~2006년 서울서부지방법원장, 2006~2012년 대법원 대법관.
박일환 변호사가 법조인이 됐을 당시는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동네나 모교에 축하 현수막이 걸리던 때였다. 현재는 로스쿨도 생기고 많은 변호사가 양성되고 있다. 이에 대해 박일환 변호사는 “장점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특허 담당 변호사, 등기 전문 변호사 등 전문 분야를 가진 변호사가 많아지고 있다”라고 짚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법조인도 많아졌고, 중요한 법도 달라지고 있다. 박일환 변호사의 법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대한민국의 역사가 보인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도 꾸준히 법 공부를 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을 지녔기 때문일 터. 현재 박일환 변호사가 유튜버로 활동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법이라는 것이 지루할 틈이 없어요. 옛날에 있었던 사건은 없어지고 새로운 사건이 계속 나오니 공부를 계속해야 해요. 제가 젊었을 때는 약속어음 문제, 교통사고, 산재 사고 등이 대부분이었어요. 예전에는 교통사고와 절도 사건도 굉장히 많았는데, 지금은 블랙박스와 CCTV가 있으니까 많이 줄었죠. 대신 층간 소음 같은 신종 문제가 발생하고 있죠. 또 IT 관련 저작권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고요.”
법과 함께한 35년
경상북도 군위군 출신인 박일환 변호사는 고등학생 때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그때는 1960년대니 직업이 별로 다양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유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법조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 변호사는 스물세 살의 이른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대학 동기들 중에서 시험에 빨리 합격한 편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회사가 많이 생겼는데 종합상사가 특히 인기였다. 동기들 대부분은 회사에 취직했고, 결국 법조인이 된 사람은 20% 정도밖에 안 된다”고 덧붙였다.
박일환 변호사는 연수를 받고 군법무관으로 근무한 뒤 19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그때부터 판사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앞서 말했듯이 화려한 이력을 남겼다. 그리고 ‘이왕 법원에 온 것 방점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법관에 지원했다.
대법관은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법관을 말한다.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대통령이 임명한다.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특히 대법관은 청문회도 하는데, 박일환 변호사는 탈세·위장전입·표절 등 문제되는 것이 전혀 없었다. 더불어 현재 박 변호사의 유튜브 채널에서도 악플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최초의 대법관 출신 유튜버’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의 채널은 댓글 청정 구역을 유지하고 있다.
박일환 변호사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2009년부터 2011년에는 법원행정처장도 겸임했다. 그 시기를 회상하며 그는 “1년 365일 계속 일해야 한다. 판결문, 기록물 등 봐야 할 양이 매우 많다. 대법관들은 병이 많이 생긴다”고 토로했다. 대법관으로서 느낀 책임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전해졌다.
현재 대법원은 상고허가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대법원에 사건이 과도하게 접수돼 적체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상고심에서 다툴 가치가 있는 사건은 선별한다는 취지다. 박 변호사는 “사실 대법원에서는 심판만 하고 결론을 내리는데 변론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아쉽다”면서 상고허가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현재 대법원에서 처리하는 사건이 1년에 2만 건 정도라고 해요.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하루에 10건 처리하기란 힘든 일이죠. 미국도 적체가 많아서 상고허가제를 도입했어요. 1년에 딱 100건 정도만 대법원에서 맡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상고허가제를 도입해 중요한 사건을 맡고 변론도 하게 되면 재판의 질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35년을 법조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판결을 내린 박일환 변호사.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일까. 그의 대표적인 판결로는 ‘소리바다’의 저작권 침해 책임을 인정한 것과 ‘초코파이’ 상표와 관련해 어느 회사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판결이 꼽힌다. 또 하나 제주도지사 무죄 판결이 있는데, 박 변호사는 이를 언급했다.
“2007년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에게 무죄를 판결하며 압수수색 과정에서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위법수집 증거배제 원칙’을 적용했죠. 요즘도 그 판결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디지털 정보를 수집할 때나 포렌식을 할 때 본인 확인 절차 없이 하면 위조가 가능하고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유튜버로 인생 제2막
박일환 변호사는 퇴직 후 약 1년의 짧은 휴식기를 갖고 2013년 법무법인 바른의 고문 변호사가 됐다. 왜 변호사를 선택했냐고 묻자 “나이가 60세 넘었는데 새로운 걸 배워서 할 수도 없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더불어 지금은 판사 때처럼 치열하게 일하지 않는다며 “지금은 일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이 상태로 있는 것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2018년 박일환 변호사는 딸의 권유로 유튜브를 시작했다. 유튜브 채널명은 ‘차산선생법률상식’. 과거 할아버지가 지어준 호로, 한시에 나온 표현인데 ‘저 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박일환 변호사가 친근하게 법에 대해 말하는 영상이 쌓여가자 구독자 또한 점점 늘어났다. 2020년에는 구독자 10만 명을 달성해 실버 버튼을 받았다.
처음에는 영상 촬영을 어떻게 해야 좋은지 전혀 몰랐다. 무작정 휴대폰을 앞에 두고 영상 촬영을 했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조금 익숙해지고 있다. 이제는 좋은 각도, 좋은 배경 등이 눈에 들어온다. 자막을 입히는 편집은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딸이 맡아 하고 있다. 그는 “저도 딸이 일을 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준다. 상부상조하는 셈이다. 딸과 대화도 많이 하게 되고 더 가까워진 것 같다”면서 웃었다.
박일환 변호사는 자신의 딸처럼 법을 모르는 사람도 알기 쉽게 법을 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다. 일종의 사회공헌 활동이다. 최신 이슈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조명하고 관련 법을 알려주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주제를 정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구독자 대부분은 20·30대로 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제 유튜브에서 특히 많이 본 영상은 ‘농담으로 한 ‘회사 그만둘래’ 발언 후 퇴직 발령?’이에요. 실제로 회사에서 농담으로 퇴사한다고 했다가 퇴직 발령을 받은 사건을 다룬 것인데, 사람들이 궁금해할 이야기죠. 또 부모의 빚을 자식이 갚아야 하느냐, 인터넷상 명예훼손은 어디까지인가 등의 영상도 많이 보셨더라고요.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고, 반응이 좋으면 뿌듯함을 느낍니다.”
박일환 변호사는 60세가 넘어 70세인 현재까지도 일하고, 심지어 유튜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어쨌든 자기 직업에 전문성을 갖고 30년 넘게 일하다 보니 이런 기회도 온 것 같다”고 자평했다.
박 변호사는 은퇴 후 무료한 삶을 사는 지인들에게 유튜버 활동을 추천한다. 나름대로 신념도 있다. 유튜버 활동을 일종의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유튜브를 통해 즐겁고 재밌게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업에서 완전히 은퇴하면 전문 유튜버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반 회사에 다닌 지인들을 보면 60세까지 일한 사람이 거의 없어요. 보통 55세까지 일했죠. 그 사람들은 은퇴한 지 벌써 17년이나 지났거든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육 기간을 합쳐봤자 16년인데 그에 비하면 17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길어요. 그런데 앞으로 또 17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게 되죠. 한 80%는 그냥 건강하게 살자를 최대 목표로 두고 살아요.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해서 수익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10%도 안 되죠.”
박일환 변호사를 보면서 진짜 어른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단지 똑똑해서, 법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법과 함께 한평생 살아왔지만 사실 법이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헌법에서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조항을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목숨 내걸고 싸워라’, ‘충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는데, 사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념이 인간보다 먼저일 수는 없는 거거든요. 저는 제 인생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죽을 때 편안하게 잘 죽는 일만 남았죠.”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2018년부터 5년간 중장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추진한 ‘굿잡5060’의 취업률이 60%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해당 사업에 참여한 인원은 1001명이며, 수료한 인원 950명 중 565명이 취업에 성공했다.
‘굿잡5060’은 전문 역량을 가진 중장년들이 중소기업 및 사회적 경제 분야로 취업할 수 있도록 맞춤형 교육과 취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자리 창출 사업이다. 현대자동차그룹, 고용노동부, 서울시50플러스재단, 사회적기업 상상우리가 협력해 2018년부터 추진했다.
지난 25일 코엑스에서 개최된 ‘굿잡5060’ 2022 성과공유회에는 이성수 서울시50플러스재단 사업운영본부장, 임성미 경영기획본부장, 이병훈 현대차그룹 상무, 하형소 고용노동부 통합고용정책국장, 신철호 상상우리 대표 등 주요 관계자들과 수료생 150여 명이 함께 자리했다.
취업 후 6개월 이상 고용유지율도 69%에 달했다. 전체 취업자 중 4대 보험이 가입되는 상용직 취업자는 85%, 퇴직 전 경력을 활용해 취업한 중장년이 58%를 차지했다.
참여자 평균 연령은 55.4세로, 참여자 중 남성이 71%, 여성이 29%였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 따르면, 퇴직 전 각 분야에서 평균 24년의 경력을 보유한 전문성과 역량을 갖춘 중장년이 참여했다.
이성수 서울시50플러스재단 사업운영본부장은 “중장년 일자리 문제 해결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4개 기관이 5년간 함께 협력한 ‘굿잡5060’은 중장년의 퇴직 전 경력을 활용한 전문적인 일자리,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며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며 “중장년의 역량과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 확대와 생태계 구축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고용 의지가 있는 기업들과 함께 중장년들의 취업 지원을 위한 기업 연계 일자리 채용설명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하반기 대규모 채용을 앞둔 코레일네트웍스와 협력해 역무 직종에 취업을 희망하는 중장년을 대상으로 28일 채용설명회를 열 계획이다.
설명회에 참가한 중장년 구직자는 각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직접 연사로 나서 소개하는 취업전략과 동년배 현직자가 전하는 실제 근무 환경 등 생생한 채용 사례뿐 아니라 당일 희망자에 한해 입사지원서 작성, 직무 체험, 현장 면접 등도 진행한다.
재단은 “이번 채용설명회가 중장년 채용을 희망하는 기업들과 연계해 진행하는 만큼 재취업을 희망하는 중장년 구직자들에게 실질적인 취업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했다. 설명회에 참여하고 싶은 중장년 구직자는 50+포털에서 기업별 일정을 확인하고, 온라인을 통해 신청하면 현장 참여가 가능하다.
이성수 서울시50플러스재단 사업운영본부장은 “기업 중에는 사회 경험과 업무 경력을 보유한 중장년의 채용을 희망하지만, 막상 우수한 인재 발굴에 어려움을 겪는 곳들이 많다”며, “앞으로 중장년 인력이 필요한 기업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여 중장년들이 자신의 역량과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힐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넓은 집에 살고, 고급 차를 끄는 화려한 삶. 최범호(58)가 꿈꾼 배우의 삶이다. 현실은 꿈과 달랐지만, 그는 배우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벌써 30년 차 배우가 된 최범호는 이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진정한 ‘베테랑’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1992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최범호는 다양한 작품에 크고 작은 역할로 출연했다. 특히 MBC 드라마 ‘하얀거탑’, ‘이산’, ‘히어로’, ‘마의’, ‘제왕의 딸, 수백향’, 영화 ‘알투비 : 리턴투베이스’ 등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더불어 그는 ‘회장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도 갖고 있다. OCN ‘TEN’ 시리즈에서는 경찰국장으로, tvN ‘도깨비’, MBC ‘자체발광 오피스’, ‘돌아온 복단지’ 등에서는 회장으로 출연했기 때문. 비교적 최근인 2019년에는 MBC ‘웰컴2라이프’에서 시각장애인 연기를 펼쳐 호평받았고, 이듬해에는 화제의 드라마 JTBC ‘부부의 세계’에 출연해 눈도장을 찍었다.
못난 아들에서 못난 아비로
1964년생인 최범호는 민주주의 중심에 있는 이른바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생)다. 전남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밥을 준다’는 단순한 이유로 연극반에 들어갔다. 당시의 연극반이란 연극을 통해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때문에 최범호가 대학교 졸업 후 탤런트가 되겠다고 서울로 떠나자 선후배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연기’밖에 없고, 탤런트가 되어야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빨리 성공해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최범호의 예상과 달리 탤런트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섯 번 정도 탈락의 고배를 마신 후에야 마침내 MBC 21기 공채 탤런트가 될 수 있었다.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건만 현실은 잿빛이었다. 연기를 하고 싶어도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반면 동기 장동건, 김원희 등은 잘나갔고, 최범호의 열등감은 커져갔다. 무엇보다 자책하는 아버지는 못난 아들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제가 배우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가난해 뒷바라지를 못 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무능력하다고 자괴감을 느끼시는 거죠. 아버지는 지금도 저에게 배우 그만하라고 하세요. 아직도 저를 인정하지 못하신 거죠. 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을 아직 해소하지 못했어요.”
탤런트가 된 후 최범호는 암흑의 나날을 보냈다. 좌절감에 매일 술을 진탕 마시고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주선한 소개팅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두 사람은 1년 반 동안 신앙 얘기만 하며 지냈으나 마침내 결혼했다.
1998년 3월의 결혼식 날, 최범호는 ‘가진 것 하나 없는 나 같은 놈도 결혼하다니’라는 생각이 들어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인기나 돈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나를 불쌍한 영혼으로 바라보면서 엄마처럼 품어줬어요”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둔 그는 양육을 하면서 피부로 닿는 경제적인 타격이 점점 커지기만 했다. 최범호는 “나는 언제 자리 잡을까 고민이 컸어요.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죠”라고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 찾아온 작품이 인생작 MBC 드라마 ‘이산’(2007~2008년 방영)이다. 정조(이서진 분)의 동궁전 내시 역을 연기한 최범호는 “그때 이서진 씨가 참 많이 도와줬어요”라고 말했다.
특히 최범호는 이서진에게 감동받은 기억을 전했다. 어느 날 ‘이산’ 촬영장에 최범호의 아내와 두 아들이 놀러 왔는데, 이서진이 그들을 자기 가족처럼 챙기고 소고기를 대접했다는 것. 최범호는 마음 놓고 고기를 사준 적이 없던 터였다. 당시를 떠올리던 그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이서진에 대한 고마움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저는 애들이 ‘갈비 먹고 싶다’고 하면 고깃집에 가서 돼지갈비를 시켜요. 그리고 고기를 난도질해놓고 밥을 꼭 시키죠. 돈이 없으니까 꼭 상추에 밥과 고기를 싸서 먹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서진이가 우리 가족을 데리고 소고깃집에 간 거예요. 우리는 겁이 나서 그런 데를 못 가봤거든요. 맛있으니까 애들이 너무 잘 먹는데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이후 2019년 OCN ‘트랩’ 등으로 최범호와 이서진의 인연은 이어졌다. 특히 올해 최범호의 첫째 아들이 결혼했는데, 이서진은 아들의 통장으로 직접 축의금을 보냈다고. 이서진의 미담을 잊지 않고 전한 최범호는 “후배지만 존경하는 배우”라고 표현했다.
“참 서진이에게 빚을 많이 졌습니다. 돈 빚이 아니라 사랑의 빚이죠. 정조대왕의 대사 중에 ‘햇빛은 천하 지위 고하, 재산 유무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 대사와 같은 삶을 서진이가 묵묵히, 값지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에서 베테랑으로
배우로 살다 보니 최범호는 늘 성공에 목말랐고, 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의 인정을 갈구했다. 연기를 할 땐 괜찮지만 작품이 없으면 극도로 예민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화를 내기도. 이에 그는 배우가 아닌 사람 최범호로서 살기로 했다. 그렇게 또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배우가 아닌 사람으로 살면서는 자신에게 일이 얼마나 주어지느냐가 중요해졌다. 연기를 일 그 자체로 본 것. 그는 대본을 받으면 ‘최범호’라는 이름을 찾기에 급급했다. 5년 전 어느 날, 대본을 막 넘기는 그를 보고 아내는 “당신, 이제 사람으로 살지 말고 배우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내한테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죠. 생각해보니 내가 연기 자체를 좋아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더라고요. 그동안 저는 작품성이나 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가 작품에 얼마나 나오느냐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이제 배우로서 정식으로 연기에 집중해보자 생각하게 됐죠. 두 번째 터닝포인트를 맞았던 것입니다.”
아내의 말에 각성한 최범호. 실제로 이후 그의 연기는 깊어졌다. 앞서 말한 대로 최범호는 MBC ‘웰컴2라이프’에서 시각장애인 연기로 호평받았다. 특히 그는 극 말미 오열하는 뒷모습으로 시청자를 울렸는데, 아내도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최범호는 “그렇게 나를 알아봐달라고 발버둥질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일 때가 됐구나 싶었어요. 오열하던 뒷모습에 묵묵히 같은 길을 걷는 제 자신이 투영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최범호는 2019년부터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배우 정보석에 이어 현재는 최수종이 이사장으로 있다. 최범호는 사무총장 제의를 받았을 때, 연기 외의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던 터라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절했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다. 나날이 보람을 느끼는 중이다.
사무총장인 최범호는 에이전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배우 캐스팅, 출연료 책정 등의 일을 주로 한다. 지난해 한국방송연기자협회에서는 신협중앙회의 후원을 받아 웹드라마를 제작했는데, 역할의 크기와 상관없이 150명이 넘는 사람에게 출연료로 30만 원을 주었다. 최근에는 한국방송연기자협회와 새마을금고가 MOU를 체결, 새마을금고 60년 역사를 담은 영상 콘텐츠를 제작할 예정이다. 배우들은 일자리를 얻고, 새마을금고는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된다.
“협회에 와서 삶을 다시 한번 배우고 있어요. 그동안은 내가 일하고 돈 버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됐어요. 더불어 같이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죠. 젊은 후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기쁨을 느껴요. 부모들이 자식 밥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는 그 감정이죠.”
어느덧 60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최범호는 “앞으로도 묵묵히 저의 길을 걸어갈 겁니다.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 자체가 좋아서 이 길을 계속 가고 싶은 마음이에요. 가난하지만, 무명이지만, 그것들을 견뎌내면서 걸어온 것도 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그의 목표는 쓰임 있는 배우, 모범이 되는 선배가 되는 것이다.
“연기 경력 50년도 넘은 선배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제가 베테랑이라고 한다면 과찬이죠. 다만 성품이 훌륭한, 사랑을 나누는 베테랑이 되고 싶습니다. 배우를 떠나 어떤 사람이 한길을 걸어갔을 때, 결국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가 베테랑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성공 또는 실패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사람이 가진 가치를 이어갈 수 있게 멘토 또는 코치의 역할을 얼마나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드디어 내가 이혼을 했어. 우리 이제 함께 살 수 있게 된 거야.”
“그래요? 잘됐네요….”
“당신, 기쁘지 않아? 반응이 왜 그래? 왜 시큰둥한 거지? 너무 오래 기다려서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
“그런가 보죠. 어쨌든 당신이 원하던 거니까 잘된 일이네요.”
“나만 원하던 일인가? 그럼 당신은 안 원했단 말이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 거야? 도대체 뭐가 또 문제냐고?”
뭐가 또 문제냐고? 그 말에 성질이 발끈 돋았다. 그래, 지금까지 당한 것도 모자라 지금 와서 감정을 쏟고 화를 내는 건 정말이지 바보짓이지. 저 인간이 내게 뭘 해줄 수 있다고. 그렇게 당하고도 모른다면 나는 정말 하나님도 구제 불능인 인간인 거지. 이혼을 했다니 그 마누라는 드디어 해방인가? 그럼 이제 내가 저 인간을 차버려야 할 순서란 말이지?
남편 사별 후 운명처럼 나타난 남자
나와 그는 7년 전에 만났다. 그를 만나기 6개월 전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고 나도 따라 죽고만 싶은 시간을 보낼 때,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던 나날 중에 교회에서 그를 알게 되었다. 남편은 교회를 안 다녔고, 나도 큰 열정 없이 꾸린 가게가 한가해진 틈을 봐가며 이따금 출석하곤 했다.
그도 나처럼 아내 없이 혼자 교회를 다니던 터라 두 사람 다 미적지근한 교인으로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치 짐승의 후각처럼 그가 싱글인 것을, 아니 명확히는 돌싱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혼자가 된 나는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눈치채게 되었고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끌림의 법칙이 있는 걸까. 멀쩡한 유부녀였을 때는 내 삶 반경 내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그 남자. 그러나 혼자가 되고 나니 그 남자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가 10년 넘게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흔히 말하는 무늬만 부부로 지내며, 나를 만났을 때는 이미 함께 살지도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카페를 꾸리고 있었기에 각자의 거처에서 아침에 따로 출근해 밤에 퇴근할 때까지 함께 일만 할 뿐이었다.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였지만, 치열한 일터에서 부대끼다 보니 바쁘고 지쳐 헤어질 법적 절차를 미루고 있었다고 할지. 나도 카페를 운영하기 때문에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영업이란 게, 특히 카페란 게 식당보다는 여유가 있지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해본 사람은 안다.
그런 그에게 이혼 성사는 그 자체로 축하할 일인 건 맞다. 그 바쁜 와중에 아르바이트도 거의 두지 않고 생업을 꾸리면서 차일피일 미루던 일을 강행하여 결론을 냈으니.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랴.
두 시간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남편
“이선희 씨가 본인인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죠?”
경찰 둘이 가게로 들어서며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머뭇대는 순간 직감이 들었다. ‘남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구나’ 하는.
“남편 되시는 분 성함이 최성호 씨 맞나요?”
“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로…?”
“잠깐 서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확인해주실 일이 있어서요.”
마음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두려움에 주춤대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가서 확인부터 하셔야 하는데… 남편께서 오늘 오후 4시경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카페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러 나간 지 2시간 만에 남편은 주검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바쁜 점심 시간을 막 치른 후 몇 가지 떨어진 품목을 구입하려고 잠깐 재료상에 갔던 길이었다. 주차하기 편하다며 짧은 거리는 주로 오토바이를 이용했는데, 도로를 가로지르다 마주 오던 차에 정면으로 부딪혀 즉사했다고 한다.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도, 하늘이 무너지던 마음도 반추하고 싶지 않다. 또다시 가슴이 헤집어진다면 나도 남편도 두 번 죽는 꼴이기에. 한 달 가까이 가게 문을 닫고 두문불출 칩거하다시피 지냈다. 대학과 직장에 다니며 각자 사는 딸과 아들의 위로도 귀찮기만 해서 같이 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렇게 나는 혼자 그 시간을 버텨냈다.
그와의 동거가 시작되었으나
이러다 영 사람 구실 못 하겠다 싶어 허깨비 같은 몰골로 교회에 나갔고, 그렇게 반년이 지났을 즈음 그와 가까워진 것이다. 그는 동종 업계 종사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운영하는 카페를 들락거리며 내 주변을 자연스럽게 맴돌았다. 자기 가게는 뒷전인 것 같았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남편이 떠난 후의 빈자리에 절대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데다 원래부터 나는 일이 서툴렀기 때문에 그가 와서 도와주는 것이 고맙고 반갑기만 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혼자 운영하기 벅차 일찌감치 카페를 접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이 들었고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카페는 규모도 크고 매상도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가뜩이나 사이 좋지 않은 아내와 붙어 있는 것보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기 가게는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리고 우리 가게로 출근했다. 나는 고마움을 핑계 삼아 퇴근 후 그에게 늦은 저녁밥을 지어준다며 집에까지 그를 끌어들였다.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가 나를 찾아와 머리끄덩이를 잡는다거나 하는 통속극은 없었다. 나를 만나기 전부터 별거를 하던 부부이니, 그가 어디서 누구와 살든 그의 아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 데다 내 탓 또한 아니었다. 우리 사이는 평온했고 나는 그가 좋았다.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고 외로운 마음만 달랠 수 있어도 더없이 고마울 상황에 가게 일까지 도움을 받으니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게다가 그는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고, 나와 나이 차이도 두 살밖에 안 났다. 50대 초반인 우리는 얼마든지 새 출발해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드디어 이혼을 했다고 하는데 왜 반가워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가 기혼 상태일 때 그의 이혼을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다 내 곁을 훌쩍 떠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탓에 그 사람 앞에서 늘 저자세였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자녀도 없다. 이혼 후 재산의 절반이 오롯이 그의 것이 되니 재혼하면 내게 유리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자기 재산을 내게 나눠주겠다고 한 적은 없지만, 딸린 자식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홀가분하지 않은가.
가스라이팅으로 피폐해져
“당신, 어쩌면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어? 도대체 몇 번을 가르쳐줘야 알아듣겠어? 도대체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카페를 꾸릴 생각이었어? 너처럼 덜떨어진 여자랑 함께 살았던 죽은 네 남편이 불쌍하다.”
사귄 지 반년이 지났을 무렵 그가 폭언을 퍼부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에 내가 계산 실수를 하자 카운터 앞에서 대뜸 성질을 부린 것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다 나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니 내가 참아야지. 앞으론 잘하자’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당한 창피함을 애써 잊으며 혼자 삭이곤 했다. 그 후로도 몇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고, 그럴수록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곰곰이 이성적으로 따져볼 생각은 점점 더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면서 나를 바보 취급하며 몰아붙였고, 아내와 다투기라도 한 날은 그 화풀이까지 해댔다. 나중에는 반찬 투정에 음식 타박까지 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며, 자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겠냐며, 공연히 자기 감정에 겨워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나의 주눅 듦과 정신적 혼란은 더욱 심해졌으니, 이른바 나는 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서러웠다.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이런 수모를 겪을 일도 없었을 거라는 원망 아닌 원망도 올라왔다.
남편을 떠올리니 나도 더는 참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용기가 솟았다. 하루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까지 힘들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가게는 나 혼자 알아서 꾸릴 테니 일과를 마친 후 밤에 만나자”고 단호히 말했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듯 갑자기 겁먹은 표정으로 그가 내 눈을 외면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했지만 그는 꾸역꾸역 나와서 예의 고약을 떨었다. 그랬다. 그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기생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아내에게 쫓겨났고,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자 나의 약점을 이용해 기생충처럼 파고들면서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
그의 나약하고 비겁한 성질이 폭로될수록 그의 이혼이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제야말로 나도 그를 쫓아내야겠다는 복수심마저 들었다. 그가 왜 이혼 위기에까지 몰렸으며, 딴 여자를 만나고 있음에도 그의 아내가 전혀 반응하지 않았는지 이제는 이해가 된다. 그의 아내가 떼낸 혹이 내게 붙어버렸으니 이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처치할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두 개의 선이 서로 의지하며 맞닿은 형태의 사람 인(人)은 책과 또 다른 책을 잇는 징검다리 같은 모양새다. 조우성 변호사는 특유의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분쟁을 겪거나 억울하게 지탄받는 이들이 본질을 찾도록 돕는다. 이번 북人북에서는 남다른 발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이상한 변호사’의 내공을 담았다.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최근 성황리에 종영했다. 이 작품은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우영우가 다양한 사건을 해결하며 진정한 변호사로 성장하는 내용을 다뤘다. 6월 29일 0.9%로 출발한 시청률(닐슨코리아 기준)은 마지막 16회에서 17.5%라는 기록을 세우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드라마 대본을 쓴 문지원 작가는 변호사들이 경험한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를 구성했다. 16부작 중 4화, 11화, 13화, 14화에는 조우성 변호사의 저서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의 일부 내용이 차용됐다. 형들에게 속아 아버지로부터 받은 토지 개발 보상금을 5대3대2로 나누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은 막내, 불법 도박장을 드나들다 우연히 로또 1등에 당첨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당한 아내 등 실제 그가 맡았던 사건들이 각색돼 드라마에 등장했다.
검사가 되지 못한 이유
조우성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97년부터 18년간 국내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일했으며, 서울중앙지방법원분쟁조정위원, CDRI 기업분쟁연구소장 등을 거쳤다. 현재 법률사무소 머스트노우의 대표이자 올해로 26년 차 변호사다. “시골 출신인 데다 장남이다 보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사법시험 합격 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고도 고시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죠. 연수원 동기로는 윤석열 대통령,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있어요.”
1992년 연수원의 실무 교육을 받고 1993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수습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직접 피의자들을 앞에 두고 경찰에서의 진술 과정을 확인한 다음, 보완할 내용을 적어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다. 처음 담당한 ‘아리랑 치기’ 사건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리랑 치기는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말한다. 대학생 김 군이 술에 취한 피해자 최 씨의 양복 윗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 있던 현금 5만 원을 절취했다는 것이 범죄 사실의 요지였다.
“김 군의 사정을 들어보니 참 딱했습니다. 입원 중인 어머니의 수술비가 필요했대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뿐이라 학교가 끝나면 늦게까지 근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나 봐요. 집에 돌아가던 길에 쓰러져 있던 피해자의 양복 안주머니가 불룩한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했어요.”
일단 범죄 사실에 대한 진술을 정리한 뒤, 그는 김 군의 안타까운 사연을 피의자신문조서에 자세히 기재했다. 더불어 김 군이 대학교에서 장학생이며 교내 봉사상을 받은 내역도 포함시켰다. 내용을 확인한 검사는 난감하다는 듯 “조 시보님, 이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가 아니라 변호인이 작성한 변론요지서 같습니다. 이 아래로는 전혀 필요 없는 내용이에요”라며 지적했다. 비슷한 사례를 여러 차례 겪은 뒤 검사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낀 그는 결국 변호사를 택했다.
소송 아닌 화해 권하는 괴짜
갓 변호사가 됐을 때는 내공이 부족해 애를 먹었다. 수많은 소송 건과 자문 사건을 동시에 진행하며 사무실에서 쪽잠을 잤다. 설상가상으로 나이 많은 의뢰인들과 결혼, 이혼, 자식 관련 문제 등으로 상담해야 하니 법적 지식만으로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직접 이끌어야 하는데, 법 조항만 기계적으로 늘어놓으면 발전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소양을 높일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동양 고전을 보게 됐습니다. 술을 마시거나 골프를 치기보다 책에 깊이 파고들었어요. 나름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터득하게 됐죠. 어느 순간부터는 의뢰인들과 대화가 통하더라고요.”
사건과 관련해 기본적으로 중요한 건 승소지만, 조 변호사는 사람과 그의 감정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사건의 단면만 생각하는 것은 두 시간짜리 영화를 시작한 지 40분 지난 후의 지점부터 보는 일과 같다. 의뢰인을 처음 만나는 변호사와 영화 상영 중간쯤 영화관에 도착한 관객은 이러한 면에서 닮았다. 우선 의뢰인을 진정시키고, 보지 못한 앞부분의 스토리를 최대한 자세히 듣는 일이 중요하다.
‘그분과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상대방으로부터 이상한 조짐을 느낀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볼 때, 상대방이 좀 이해되는 부분은 있나요?’의 순으로 질문을 던지며 상태를 판단한다. “형제간의 재산 분쟁에서 형을 대리한 적이 있습니다. 2년 동안 치열하게 노력해 승소했지만, 의뢰인은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얼마 후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검투사처럼 싸워서 이기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차라리 의뢰인의 감정을 알아채고 동생과 화해하는 쪽으로 이끄는 게 맞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그 후로는 법정 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의뢰인께 분쟁 상대와 대화 혹은 사과를 먼저 권하게 됐어요. 근본적인 감정을 잘 보듬어주면 문제가 금방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9부 능선 넘어선 ‘조변보감’
임상의학이 직접적인 진단 및 치료를 목적으로 한다면, 예방의학은 병의 원인을 찾고 그에 따른 예방 방법을 개발하는 분야다. 그는 ‘임상 변호사’의 삶을 마무리하고, ‘예방 변호사’로서 더 멀리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개인의 사건을 맡아 처리하고 승소를 끌어내는 일에서 나아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법에 관련된 정보를 재밌게 소개하는 온라인 사이트를 열 계획이다.
“여전히 법률이라는 분야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용어가 딱딱하고 내용이 어렵다 보니 법적 다툼이 일어났을 때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아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지적하고, 분쟁 전 충격을 줄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예방 변호사’의 덕목 아닐까요. 전문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유튜브, 책, SNS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제가 소개하는 법률 상식을 알아가셨으면 해요. 실제 상황에서 잘 활용할 수 있게끔 돕겠습니다.”
‘생각의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책
by 조우성
중장년이 되면 본질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려면 관점을 달리하는 것이 우선이죠. 내 안의 힘을 믿고 인생의 목적을 다시 설정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제가 추천한 책들이 남다른 통찰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저)
“세계적인 MBA 와튼스쿨의 교수 스튜어트 다이아몬드가 강의하는 ‘협상 코스’의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사람과의 관계, 진정한 의사소통,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 실전에 유용한 전략 등 협상을 위한 기본 개념은 물론, 통념을 뒤엎는 창의적인 문제 해결 방법도 담겨 있죠. 저자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사례를 들며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의 비밀, 가격 흥정과 생활의 혜택을 얻는 비법 등을 독자들이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냈습니다.”
노이즈 : 생각의 잡음 (대니얼 카너먼 외 2명 저)
“저자는 인간이 저지르는 오류를 편향과 잡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쉽게 파악 가능한 편향을 제거하고, 다소 발견하기 어려운 잡음을 예방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편향과 함께 판단 오류를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인 잡음을 최초로 규명한 연구 보고서인 이 책은 형사사법제도, 의료제도, 비즈니스 예측, 근무평정, 지문 감식, 정치 등 여러 분야 속에 숨은 잡음을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가 (후안 엔리케스 저)
“우리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한다고 여깁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해석하고, 평가하고, 구분 짓기도 해요.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확신을 무너뜨립니다. 옳고 그름은 시간에 따라 바뀐다는 거죠. 우리는 윤리를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대상으로 여기지만 규칙은 변하고,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겁니다. 거듭된 발전으로 변화한 사회 속에서 어떤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봐야 할지 고민해볼 수 있겠습니다.”
채근담 (홍자성 저)
“채근은 나무 잎사귀나 뿌리처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말합니다. 송나라 학자 왕신민이 ‘사람이 항상 나무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죠. 이 책도 읽다 보면 나무뿌리 같은 투박하지만 깊고 담담한 맛이 느껴집니다. 저자가 말하는 삶의 진리나 깨달음도 소박하고 단순해요. 자연의 이치를 통해 삶을 성찰하고 그 본질과 기틀을 깨닫게 하며, 헛된 욕심을 다스려 항상 자신을 바로 세우는 길을 제시하고 있어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데 고민이 있는 중장년층을 위한 ‘노후준비 콘서트’가 열린다. 해당 행사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KB국민은행과 협력해 자산관리 전문가들의 특강으로 구성했다.
최근 서울시민의 노후 준비 현황을 조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울시 중장년층의 재무 노후 준비지수(53.62점)는 비재무 노후 준비지수(57.71점)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노후 생활비 준비 여부도 서울시 중장년층의 50.73%만 준비했다고 응답해 절반 정도는 여전히 노후 준비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단은 이번 행사를 통해 재무적 노후 준비가 필요한 중장년 세대를 대상으로 노후 자산관리의 기초지식과 정보를 전달해 안정적인 노후 준비를 돕고, 은퇴 이후의 재무관리에 대한 인식을 제고한다.
이번 콘서트는 9월부터 12월까지 부동산·세무·연금 등 노후 재무 설계에 중요한 주요 영역별 전문가 특강으로 진행된다. 9월부터 12월까지 매월 50플러스캠퍼스(북부·서부·남부·중부 순)를 순회하며 총 4회 시리즈로 진행하며, 매회 다른 주제의 자산관리 특강으로 운영한다.
콘서트에는 박원갑 KB금융그룹 수석전문위원(부동산), 이호용 세무사(세무), 곽재혁 KB금융그룹 수석전문위원(연금/보험) 등 KB국민은행 내 WM스타자문단 전문위원들이 참여한다. 강연 후에는 현장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실제 중장년층의 노후 준비 관련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노후 준비에 관심 있는 중장년층은 누구나 참여 가능하고, 50플러스포털과 ‘KB골든라이프X플랫폼’에서 신청할 수 있다. 특강 현장 참여는 회차당 선착순 50명으로 진행되며 온라인은 사전신청자에게 발송되는 참여 링크를 통해 누구나 실시간으로 참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