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50+세대가 새로운 분야에서 경력 전환을 모색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현장실습 기회를 제공하는 50+인턴십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참여자 300명을 모집한다고 18일 밝혔다.
올해는 사회적경제, 중소기업, 그린·디지털 관련 분야 등 7개 부문에서 모집한다. 참여자는 전일제 또는 시간제 형태의 인턴으로 근무한다. 올해는 기존 영역 외에 서울시 투자출연기관 맞춤형 인턴십을 신규 개발했다.
서울50+뉴딜인턴십은 중소기업과 그린·디지털 분야에서 총 90명을 모집한다. 50+적합 직무에 채용 수요가 있는 기업·기관·단체 등에서의 전일제 인턴십 근무 기회를 제공한다. 주5일, 1일 8시간 전일근무를 원칙으로 하며 시급은 1만 770원이다.
서울50+뉴딜인턴십은 전일제(풀타임)로 총 90명을 선발하며 주 5일, 1일 8시간 전일근무를 원칙으로 하고, 시급은 1만 770원이다. 시간제로 운영되는 서울50+인턴십은 총 210명을 모집한다. 월 최대 57시간을 활동하고 최대 61만 3660원의 활동비를 지원받는다.
서울50+인턴십은 만 45세~67세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하며, 사업별 활동기간은 최대 6개월이다. 단, 서울시투자출연기관 인턴십은 55세 이상 65세 이하 서울 시민이 대상이다.
선발을 통해 최종 선정된 참여자는 ‘젊은 세대와 함께 일하기’, ‘인생2막 커리어 설계’, ‘직장 적응을 위한 교육’ 등 다양한 변화적응, 소양 교육을 받은 후 각 기업과 기관으로 배치된다. 활동처는 서울시 소재 민간기업·법인·협회·단체·서울시투자출연기관 등이다.
인턴십 활동기간동안 재단에서는 참여자 역량강화 지원을 위한 보수교육, 월례활동, 현장점검을 지원하며 적응력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디지털 역량강화, 비대면 프로그램 등의 사업 확대를 추진할 예정이다.
남경아 서울시50플러스재단 일자리사업본부장은 “서울시50+인턴십은 전문인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과 활기차고 의미있는 인생 후반기를 설계하려는 50+세대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며 “더불어 세대간 함께 일하기에 대한 긍정적 경험과 사회 인식이 확산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50+인턴십’사업은 지난 2019년부터 시작돼 3년간 총 804명의 참여자와 425개의 기업이 참여했다. 참여자의 절반이 넘는 52% 정도가 인턴십 이후 재취업, 창업, 기타 사회활동 등으로 연계됐다.
활기찬 노후 정착을 위한 노인 일자리 사업이 더욱 발전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환경 미화나 교통 지도를 하는 공익활동형 일자리를 넘어 사회 서비스형, 시장형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일자리가 등장했다. 음식 정기 배송, 농산물 재배, 취약계층 돌봄 등 보다 다양해진 일자리 현장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삶의 활력을 찾은 두 번째 청춘들을 만났다.
하나금융그룹의 100년 행복연구센터가 중장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만 60~64세의 60%는 70세가 넘어도 일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지난해 통계청이 공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1000만 명이 넘는 장래 근로 희망자 중 70~74세는 79세까지, 75~79세는 평균 82세까지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 ‘일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서’와 같은 이유로 대부분 은퇴 이후에도 근로 의욕을 드러냈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정책이 바로 ‘노인 일자리 사업’이다.
노인 일자리 사업을 통해 고령층에 제공되는 일자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지역사회 공익 증진을 위한 ‘공익활동형’(공공형)은 만 65세 이상 기초연금 수급자를 참여 대상으로 하며, 주로 노노케어(건강한 노인이 병이나 다른 사유로 도움을 받고자 하는 노인을 돌보는 일), 학교 급식 지원, 도서관 등 공공시설 봉사활동을 한다. 10~12개월간 하루 3시간, 월 30시간 이상 활동하면 한 달에 27만 원을 지급받을 수 있다.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곳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 서비스형’은 만 65세 이상 참여할 수 있고 복지시설, 보육시설, 금융기관 등에서 10개월간 월 60시간 이상 활동한다. 급여는 근로계약에 따라 다르지만 월 71만 원 정도의 활동비를 받는다. 참여자 인건비를 일부 보충 지원하고 추가 사업소득으로 운영하는 ‘시장형’은 식품 제조·카페와 같은 소규모 매장, 아파트 및 지하철 택배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만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근로 수익금에 따라 활동비를 배분한다. 다만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생계 급여 수급자나 직장 건강보험 가입자, 장기요양보험 등급판정자, 정부 부처나 자치단체에서 추진 중인 타 일자리 사업에 참여 중인 자는 신청 대상에서 제외된다.
사회에 기여하는 ‘사회 서비스형’
2021년 우리나라는 2조 6000억 원의 예산으로 82만 개의 노인 일자리를 만들었다. 이 중에서 73.8% 정도가 공공형 사업이다. 공공형 노인 일자리 참여자 평균 연령은 77세 수준으로, 참여에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은 주거환경 개선이나 스쿨존 안전 지킴이 등 단순한 활동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최근 변화하는 노인의 특성과 경력을 활용하는 사회 서비스형과 시장형 일자리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삼척시니어클럽은 사회 서비스형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2020년부터 ‘희망을 담는 빨래바구니’를 운영 중이다. 장애인, 독거노인, 한부모 가정 등 취약계층을 방문해 대형 빨래를 수거하고 세탁해 집으로 배송해준다. 이외에도 필요한 생필품이나 상비약을 주문받아 함께 전달하고, 가스·수도·전등 수리 및 가스 누출 점검 등 부가서비스를 제공한다. 세탁이 불가한 낡거나 보온성이 떨어지는 이불은 무료로 교체해주기도 한다. 백창석 강원도 일자리국장은 “빨래방 서비스와 더불어 생필품 구매 대행과 우유 배달을 진행해 취약계층 어르신과 지역사회의 연결고리를 하나 더 만든 셈”이라며 “통합 생활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발전,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보건복지부는 1월 16일 사회 서비스형 노인 일자리 ‘방역지원 사업단’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코로나19 대응 체계가 재택치료 원칙으로 전환되면서 재택치료자·자가격리자 증가에 따른 일선 방역 현장의 과중한 업무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사업단의 주요 업무는 재택치료 키트, 자가격리 물품 점검·배달 및 지역사회 방역 등 지자체와 보건소가 수행하는 포괄적인 방역 현장 지원이다. 방역수칙과 개인정보보호 교육을 통해 노인 일자리 참여자의 건강과 안전을 확보하고, 재택치료자의 개인정보 유출을 방지할 예정이다. 주철 복지부 노인지원과 과장은 “재택치료 키트 배달 등 방역 현장 지원이 절실한 지금, 노인 일자리 방역지원 사업단은 건강하고 경험을 갖춘 베이비붐 세대의 역량을 사회에 환원해 국민의 안전에 이바지하는 의미 있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어르신과 함께 키워나가는 ‘시장형’
구로시니어클럽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시장형 일자리 사업으로 주택가 한복판에 꽃송이버섯 재배 농장을 마련했다. 서울도시주택공사가 매입한 임대주택을 활용해 ‘시티팜’을 운영한다. 집 전체가 버섯 생육장이다.
여기서 자라는 꽃송이버섯은 암세포를 억제하는 베타글루칸 성분을 다량 함유해 항암식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습도와 온도에 민감해 생장 요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죽어버리는 탓에 키우는 과정이 꽤 까다롭다. 이곳에 근무하는 어르신들은 비치된 기계에 배양액을 채우고, 방 안에 고루 퍼지도록 버섯의 위치를 바꿔주는 등 생육 환경을 최적으로 유지하는 일을 한다. 다 자란 버섯을 수확하고 무게별로 포장하는 작업도 진행한다.
수익은 어르신들의 급여와 관리 유지비, 재료비 등으로 사용된다. 때문에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양임순 구로시니어클럽 관장은 “신생 사업이라 판로 확보를 위해 소상공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대형마트 등 직접 발로 뛰며 납품 계약을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꽃송이버섯은 원래 1kg당 10만 원에 거래될 정도로 고가지만, 중간 유통 과정이 없어 시중가보다 40% 이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구로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담아드림’ 역시 시장형 일자리 사업 중 하나다. 담아드림은 샐러드 정기 배송 서비스를 제공한다. 식자재 마트에서 직접 장을 봐 신선한 재료로 매일 아침 샐러드를 만든다. 재료를 깨끗이 씻어 말리고, 껍질을 까거나 고기를 삶는 등 하나하나 어르신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포장과 배송도 다 이들의 몫이다. 샐러드 종류는 아보카도, 훈제오리, 닭가슴살, 새우, 게살, 버섯 등이 있다. 가격은 5000~6000원으로 시중의 다른 가게들보다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어르신들은 제작 및 포장팀과 배송팀으로 나뉘어 주 2~3회 근무한다.
현재 인근 관공서, 공공기관과 가산디지털단지를 판매 지역으로 정해두고 있다. 양 관장은 “시장형 일자리는 어르신들이 일하는 보람을 느끼게 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서 “앞으로도 어르신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자리 현장 근무자들의 말말말
희망을 담는 빨래바구니 유을자(65)
“원래 보험 설계사 일을 했어요. 코로나19가 확산되자 본사에서 영업소를 축소하는 바람에 근무 지역이 멀어져 직장을 그만두게 됐죠. 구직 활동을 하다 노인 일자리 사업을 알게 돼 신청했고, 참여자로 선정됐을 땐 다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어요. 지금은 한 달에 총 12일, 하루 5시간을 일해요. 수거한 이불을 빨아서 생필품과 우유를 함께 배달하고, 도움이 필요한 집을 선정해 이불을 교체해요. 혼자 사는 어르신을 보면서 나중에 나도 더 나이 들었을 때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 일 같지 않죠. 그래서 진심으로 서비스를 제공해드리려고 노력해요. 몸은 바쁘지만 사회에 도움 되는 좋은 일이니,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담아드림 조규숙(68)
“일자리 모집 공고를 지역 소식지에서 발견했어요. ‘아, 이거다!’ 싶었죠. 자식들도 다 커서 집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많으면 100인분가량의 샐러드를 만들 때도 있는데, 아침부터 재료를 손질하려면 전쟁터예요. 특히 훈제오리나 닭가슴살은 기름기를 일일이 다 빼고 알맞은 크기로 잘라야 해서 굉장히 손이 많이 가죠. 그래도 소스나 재료를 어디에 배치하면 좋을지 의논하면서 메뉴를 발전시키는 재미가 있어요. 출근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같이 일하는 언니들과 중간중간 이야기도 하고, 바쁘게 움직이니 운동도 되는 것 같아요. 삶의 활력소를 찾은 셈이죠.”
시티팜 최수자(80)
“꽃송이버섯에 대해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효능을 알고 나니 좋은 농산물을 재배한다는 자부심이 생겼어요. 출근하면 버섯 보며 잘 잤냐고 말도 걸어보고, 비닐이 구겨져 있으면 일일이 손으로 펴주기도 하죠. 시간이 지날수록 손주 보듯 사랑으로 돌보게 된달까요. 판로 확보가 중요하다 보니 책임감을 갖고 어떤 요리에 넣어 먹으면 맛있을지 개발해보는 등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월급으로 가족들에게 선물을 한다거나 용돈을 줄 수 있어서 좋아요. 얼마 전에는 손주에게 시계를 선물로 사줬는데, 기뻐하는 아이를 보니 굉장히 뿌듯하더라고요.”
시티팜 송현순(65)
“집에 있으면 겉모습에 신경 쓰기보다 편하게만 있게 되는데, 여기 나오고부터는 얼굴에 화장품도 찍어 바르고, 눈썹도 그려보면서 관리를 하게 돼요. 아무래도 밖에서 사람들과 만난다고 생각하면 신경을 안 쓸 수 없더라고요. 불면증이 있었는데 열심히 활동하니 잠도 잘 오고, 좋은 배양액을 덩달아 맞아서 그런지 피부가 좋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전체적으로 제 삶이 윤택해졌죠. 저도 얼마 전에 손주가 입학한다고 해서 책가방을 선물로 사줬어요.”
'국민 MC' 송해가 자신의 인생을 담은 트로트 뮤지컬을 통해 대한민국 산역사의 증인임을 입증했다.
지난달 31일 KBS 2TV에서는 설 기획 프로그램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가 방송됐다. 송해의 95년 인생을 트로트 뮤지컬 형식으로 꾸민 헌정 공연으로 웃음과 감동을 전해줬다.
시청률 조사 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방송은 시청률 12.7%를 기록했다. 이는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29%)보다 낮지만, 지난해 추석 특집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11.9%)보다는 높은 수치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는 트로트 가수 정동원, 이찬원, 영탁, 신유 등이 송해를 각 나이별로 연기하면서 송해의 인생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악인 박애리가 송해 어머니 역할을 맡았고 국악인 송소희, 박서진, 김태연, 홍잠언 등도 출연했다. 이들은 모두 KBS 1TV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송해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극의 1막은 청년 송해의 유년기와 그가 실향민이 된 과정을 담았다. 송해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이름은 송복희였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1951년 1월, 송해가 사는 마을에는 6·25 전쟁의 여진이 지속됐다. 전세에서 밀린 인민군 3000여 명이 산에 숨어들었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사흘에 한 번 꼴로 마을로 내려와 식량 등을 빼앗아갔다. 그때마다 청년들은 집을 떠나야 했다.
인민군에 발각되면 징집됐고 반항하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을 피해 연평도로 몸을 숨긴 송해는 영영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송해는 극에서 어머니를 보지 못한 채 6·25 전쟁 피난길에 오른 청년 송해(이찬원 역)의 연기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송해는 무대에 올라 "제 가슴에는 언제나 어머님이 계신다.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를 한 곡조 부르려 한다"며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송해의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목소리에 관객들 또한 눈물을 닦았다.
2막에서는 송해가 1955년 '창공악극단'으로 데뷔하며 꿈을 찾아가는 내용을 담았다. 3막에서는 송해가 1988년부터 35년째 진행하고 있는 '전국노래자랑'의 이야기를 다뤘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매년 최소 관객 5000명에서 최대 1만 명까지 만났다. 34년 간 만난 관객수만 1000만 명에 달했다. 이들 중 전국 각지에서 200여 명을 관객으로 초대했다.
마지막으로 송해는 "땡과 딩동댕 중 뭐가 더 소중하냐고 하는데,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 나 역시 '전국노래자랑'에서 내 인생을 딩동댕으로 남기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노래 '내 인생 딩동댕'을 불렀다. 특히 모든 출연진이 노래를 함께 불러 감동을 더했다.
송해의 회고록과도 같은 뮤지컬을 통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속에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녹아있었다. 더불어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송해의 건강한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지난 1월 22일 송해가 '전국노래자랑' 녹화에 참여하지 못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걱정 어린 반응이 더해졌다.
한편, KBS는 최근 송해를 '최고령 TV 음악 탤런트 쇼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로 올리기 위해 기네스 협회에 신청했다고 밝혔다. 기네스 협회의 기초적인 검토를 마치고 도전 신청이 공식 확정됐다. 현재는 영국 기네스협회가 제공한 심사 지침에 따라 관련 자료를 수집 중이다.
그의 깍두기라는 표현에 내심 놀랐다. 국내 최초의 팝페라 가수. 3500회 넘게 무대에 섰고, 미국과 영국에서 성악을 전공한 유학파 출신이다. 자존심 높은 성악가가 후배들의 공연에 ‘깍두기’를 자처하다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강마루(59)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와 관객을 만나고, 노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1등! 강마루.”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까까머리 중학생은 어리둥절했다. 그간 그의 노래 실력을 칭찬해준 것은 학교 음악 성적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성가경연대회에서 1등이라니. 그것도 충남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회에서 말이다. 강마루 교수는 “성악의 길에 발을 내디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내가 재능이 있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죠. 물론 학교 음악 수업 시간에 성적이 좋긴 했지만, 그 정도 아이는 한 반에 하나씩 있잖아요. 당시만 해도 지역이나 교회마다 ‘가곡의 밤’이나 ‘성가의 밤’ 같은 행사가 많아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할 수 있었죠. 훌륭한 노래를 들으며 자란 것이 자양분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까까머리 중학생 성악가를 꿈꾸다
그날로 중학생 강마루의 미래는 성악가가 되었다. 음대 진학을 목표로 한 수험생 생활은 한양대 입학으로 결실을 맺었다. 장학금 덕분에 등록금 걱정도 없었다. 이후 그는 미국행을 선택한다. 성악가로 활약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고 강 교수는 이야기했다.
“당시 성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해외 경험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죠. 그리고 성악은 결국 서양 음악이니까, 그들은 어떻게 노래하는지, 발성은 어떤 식인지 현장에서 듣고 배우고 싶었어요. 물론 세계적인 무대에 서고 싶다는 야망도 있었고요. 한편으론 운이 좋게도 수업료를 면제받아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죠.”
미국 최고의 음악대학으로 꼽히는 메네스 음대(Mannes School of Music)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살인적인 뉴욕의 물가는 가난한 유학생에게 다양한 경험을 강요했다. 강 교수는 “안 해본 것이 없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택시 운전 같은 알바는 기본이고, 불러주는 무대에는 무조건 올랐다. 무대의 수준이나 어떤 관객이 오는지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다양한 무대에 올랐어요. 크고 작은 공연뿐만 아니라 한인 교회 성가대 지휘도 하고, 레슨도 하러 다녔죠. 생활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은 무조건 해야 했거든요. 덕분에 미국에서 공부는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어요. 이후 영국 런던 테임스밸리 대학원에서의 수학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죠.”
인생을 바꾼 노래 ‘슬픈 전쟁’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의 유학 시절을 “마치 아이를 품은 산모와 같았던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기대에 찼던, 현실은 괴롭지만 핑크빛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디에서나 차별을 겪어야 했어요. 한편으론 당연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죠. 실력으로 보여주고 이겨내면서 한국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해낼 수밖에 없었어요. 불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것을 이겨내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꿈이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유학을 다녀와 한국에서 만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으니까요.”
한국으로 돌아와 경원대와 협성대 강단에 서며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을 막 시작한 무렵, 그는 예기치 못했던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계기가 된 노래, ‘슬픈 전쟁’과의 만남이다. 1996년 가요계에선 낯설었던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만남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중앙일보 기사에선 “발라드의 미래를 제시했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사실 노래를 부른 최진경 씨와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당시 앨범 준비하던 제작자와 인연이 있었는데, 고음이 가능한 바리톤을 찾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선뜻 나섰는데, 지금 생각하면 제게는 숙명 같은 일이었어요.”
이 노래는 그에게 ‘국내 최초의 팝페라 가수’라는 칭호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안겨줬다. 물론 보수적인 성악계에선 그를 향한 비뚤어진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에 대한 그의 생각은 크로스오버나 팝페라에 대한 도전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대중이 쉽게 접하기 어렵잖아요. 일단 기본적인 공부가 되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분야니까요. 그러다 보니 소수만 즐길 수 있는 관상용 도자기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았어요. 그에 반해 제 음악은 그 안에 김치도 담고 찌개도 담는 생활용 그릇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랐죠. 좀 부딪히고 상처가 나더라도 모든 사람이 쉽게 쓸 수 있는 그릇이요. 저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문제되지 않았어요.”
실패작 된 최고의 명작
그러나 화려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만 받을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후학 양성을 위해 의욕을 갖고 나섰던 대학 설립은 결국 경제적 부담만 안겨줬다. 이후 의욕을 갖고 진행한 1집 활동은 매니저의 횡령으로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하고 져버렸다.
“1집 ‘산책’을 준비할 때 너무 행복했어요. 1년간 공들여 준비하고, 제작에만 세 달이 걸렸죠. 세션으로 기타의 함춘호, 드럼에 신석철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참여했죠. 곡도 너무 좋았는데, 많이 아쉬워요.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잊혔으니까요. 그래도 너무나 좋은 곡이라 언젠가는 ‘역주행’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어요.”
그리고 9년 만에 발매한 2집은 의외의 선택으로 화제를 모았다. 트로트 가수 태진아의 곡 ‘동반자’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성악계 일부에서 ‘딴따라’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던 그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태진아 씨가 흔쾌히 곡 사용을 허락해줘서 타이틀곡으로 부를 수 있었죠. 그저 신나는 전통가요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가사를 음미해보면 무척이나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노랫말을 갖고 있어요. 원곡의 ‘출신성분’ 같은 것은 제게 중요치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삶과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동반자’는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어서 제게 수많은 무대를 선사해준 고마운 곡이에요. 주변에서 “왜 태진아냐”며 폄하하는 분도 많았지만, 그분의 창법이 갖는 매력이 있고, 둘이 함께 선 무대가 많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의 화합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달려오던 그의 무대는 잠시 멈춰야 했다. 많은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의 등장은 그가 설 수 있는 무대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잠시 멈춘 사이 그동안 저의 활동을 되돌아보았죠. 음악인으로 살아오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음악이 나를 정화시키고 힐링을 주어야 하는데, 삶의 수단으로만 남용한 것은 아닌지 반성했어요.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면서 정작 제 자신은 위로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분은 저랑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난 11월 30일은 그에게 소중한 경험을 전해준 날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모처럼 관객 앞에 설 수 있었다. 한국경제TV의 팝페라 페스티벌 무대였다. 그가 설립한 한국예술문화재단을 통해 조직한 성악 그룹 ‘더 텐테너스 그룹’과 함께 공연할 수 있었기에 더욱 의미 있었다. 30~40대 테너 10명으로 이루어진 이 그룹을 조직하기 위해 그는 3년간 공을 들였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그룹은 해외에선 활동이 활발하지만 국내에선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11월 공연에선 관객들이 박수는 가능했지만 환호성은 지르지 못했어요.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방역수칙 때문이죠. 무대에 서는 입장에선 김 빠진 사이다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관객과 함께하는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누구나 열망하고 바라는 소망을 잊고 있었던 거죠.”
더 텐테너스 그룹에 대해서는 “성악계의 BTS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음악대학 강사 이상의 자리에서 활약할 수 있는 해외파 출신 테너들로 구성된 성악 그룹으로, 갈수록 설 무대가 좁아지는 후배들을 위해 강 교수가 기획한 작품이다. 후배 위해 깍두기 되고파 강 교수는 한국예술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꾀하고 있다. 대중이 성악이라는 어려운 장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마스터스 성악 최고위과정’은 벌써 21기가 되었을 정도로 전통을 자랑하고 있고, ‘노블레스 최고위과정’이나 ‘와인인문학 최고위과정’도 인기를 얻고 있다.
“어릴 적부터 음악이 꿈이었지만 이루지 못한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의 염원을 담아 한 분씩 가르치다 보니 정규 과정이 되었어요. 처음엔 예상치 못했던 일이죠. 사회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모니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람을 느껴요.”
그가 최근에 설립한 공연장 ‘하다 아트홀’도 같은 맥락이다. 2020년 10월부터 준비한 장소가 지난해 11월 결실을 맺었다. 하다 아트홀은 후배들에게 공연할 장소를 제공하고, 한국예술문화재단의 교육 장소로도 활용하기 위해 만든 공연장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만나 사회적 관계를 만들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놀이터’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도 담겨 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이 있잖아요. 인간의 본질이 유희라는 점에 기초하는 인간관인데, 저 역시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먹고 놀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장소가 되길 희망해요. 모두가 ‘놀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지만, 제대로 노는 사람은 찾기 어렵잖아요. 술밖에 모르는 우리 현대인에게 인문학에 기반한 다양한 ‘노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해요.”
하다 아트홀이라 이름 지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박정희 씨다. 노래를 하고 공부를 하는 다양한 행위의 산실이 되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이라고. 마케팅 전문가로 활약하다 은퇴한 박정희 씨는 현재 수만 명의 팔로어를 자랑하는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강 교수는 “저희 공식 유튜브 채널보다 팔로어가 많아 샘이 날 정도”라면서도, “아내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서 유튜브 채널 운영 등 여러 활동에 대한 다양한 조언에 늘 귀 기울이며 산다”며 웃었다. 가수 강마루로서의 계획은 어떨까? 그는 불쑥 깍두기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팝페라 가수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많이 만드는 것이 꿈이에요. 이제 저도 신체적인 상황이 젊을 때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져요. 앞으로는 제 무대에 대한 욕심만 챙기며 후배들과 경쟁하기보다는, 후배들이 성장하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팝페라라는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되고, 가수와 관객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길 기대하고 있어요. 전 그저 ‘깍두기’로 그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요.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무대에 서서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생활을 마지막 그날까지 유지하고 싶어요. 그게 제 희망입니다.”
사실 흔쾌히 하고 싶은 인터뷰는 아니었다 고백하고 시작해야겠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신분 확인이나 팩트 체크가 어려울 수 있고, 독자의 신뢰를 얻기도 힘들다. 게다가 상대는 작가.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는 상대는 실력을 겨루는 느낌까지 들어 신경이 쓰인다. 그럼에도 그를 모시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연구해온 부자가 되는 방법이 궁금해서다. 카메라 앞이 아닌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부자들이 고백한 돈 버는 비밀 말이다.
명칭에서 느껴지듯 유령작가, 즉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는 흔한 직업이 아니다. 정치적 영향력이나 정치후원금 등의 이유로 출판기념회가 필요한 정치인의 회고록이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성공담, 기업공개를 앞둔 기업가의 자서전 등의 출판물을 집필하는 이름 없는 작가를 말한다. 출판사의 기획의도나 의뢰인의 목적에 맞게 대신 글을 써주고, 본인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 대필 작가이기 때문에 고스트라이터라 불린다.
출판업계의 이름난 구원투수
이 유령작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인터뷰 후 그가 어떤 인물인지 확인해야 했다. 사진 속 가면을 쓴 그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만, 사실 그는 꽤 번듯한, 막 중년이 된 사내다.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의 팀장으로 활동 중이며, 출판계에서는 꽤 이름난 작가로 본인 이름으로 낸 자기계발서도 10권이 넘는다.
그가 고스트라이터가 된 것도 출판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괴팍한 부자 의뢰인의 등쌀에 못 이겨 다른 작가들이 연이어 쓰러졌을 때 편집자가 그를 찾았고, 단시간 내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됐다. 글솜씨와 친화력, 빠른 일처리 등의 장점이 그를 곤란할 때마다 찾는 업계의 대표적인 ‘구원투수’로 만들었다. 의뢰인의 성향이나 과거의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습관을 따라 하거나 등장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고집스러움은 그를 롱런하게 했다.
그를 만나게 된 계기는 최근 출간한 한 권의 책이다. ‘히든 리치’란 제목 그대로 숨겨진 부자들을 만나 부를 형성한 과정과 현재 자산의 정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물어본 책이다. 그는 과거 유령작가로 활동하면서 작성한 집필 노트를 오랜만에 들여다보다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모든 직장인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저 역시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은 이 세계에서 가정을 지키고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인데, 직장에서의 소득은 충분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니까요.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손에 쥔 것은 많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방법이 있을지, 어떻게 시드머니를 준비할지 고민하던 중 본가에서 대필 작업할 때의 노트를 발견했고, 일반인들이 따라 할 수 있게 내용을 엮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단지 과거의 노트를 요약해 끄적인 책은 아니다. 과거 대필해주었던 책 속 주인공이나 그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을 다시 찾아 노크했다. 그러고는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현재 자산은 얼마입니까”, “처음 시작할 때 수중에 얼마가 있었습니까”, “어떻게 자산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정성껏 대답해주진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성심껏 취재에 응해준 24명의 이야기를 자산 형성의 유형별로 구분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그는 책에서 부자의 유형을 일단 아끼고 보는 ‘고전형’, 위험을 무릅쓴 ‘전투형’, 자신의 전문 분야를 기반으로 한 ‘안전형’, 천재에 가까운 ‘변칙형’, 물려받은 자산을 늘린 ‘보수형’, 감을 갈고 닦아 수단으로 삼은 ‘천리안형’으로 분류해 설명했다.
뻔하지만 따라 하기 힘든 비결
그는 이 책을 부자가 되고 싶은 대중을 위한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이야기했는데, 읽어본 소감을 더하자면 부자가 된 사람들의 세밀한 사례집에 가깝다. 그들의 자산 형성 과정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나온다. 더 매력적인 것은 다양한 부자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산의 규모로 보면 상대적으로 수수한(?) 백억대 부자에서부터 수천억대 자산가의 이야기도 다룬다. 직업이나 자산 형성 과정도 다양하다. 그 과정에서 느낀 공통점은 바로 ‘돈에 대한 욕망’이었다. 모두 남에게 쉽게 지지 않을 만한 욕망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작가도 동의했다.
“책 속에 등장한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얼마면 무릎을 꿇을 수 있냐? 1만 원? 10만 원? 쉽게 대답하지 못했죠. 그랬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라면 1원에도 꿇는다. 돈이 생기는 일인데 무릎 꿇는 것이 무슨 대수냐며 말이죠. 그럼 절을 한다면 얼마를 주겠냐고 되묻기도 했어요. 저울질 따위는 필요 없죠. 다만 작은 돈과 큰돈이 있을 뿐이죠. 돈에 대한 욕망을 바탕에 둔 실용적 사고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기기 힘들어요. 아마 그 과정에서 비리나 부정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겠죠.”
아끼고, 발품 팔고, 돈을 놀게 놔두지 않고,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사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돈 버는 기본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덕목은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부자가 되는 비결은 이 기본기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아니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사실 책 속 부자들의 자산 모으는 방법은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이에요. 하지만 부자들은 그 뻔한 방법 중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실천했다는 점이 다르죠. 실제로 만나보면 같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그것을 대하는 민감성이나 실천력의 차이가 매우 커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평범한 사람들도 ‘나도 도전해야겠다,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욕구가 생기길 바랐어요.”
빚투 그리고 재테크
작가는 복권이나 코인에 매달리는 청춘들에게도 조언을 전했다. 최근 경제지를 중심으로 MZ세대라 불리는 20~30대들이 직장을 통한 자산 형성을 기대하지 않고, 코인이나 주식에 매달리는 ‘빚투 열풍’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20대의 복권 구입 비용은 코로나 이전보다 300% 넘게 증가했단다. 그러나 실제 부자들을 만나보면 월급쟁이 부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사회가 계층화되고 고착화되었다는 분석이 많죠. 사다리가 치워져 젊은 세대가 계급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를 길이 잘 안 알려져 있을 뿐이에요. 블록체인, 메타버스 같은 첨단 기술의 발전은 젊은 직장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어요. 사실 이런 첨단 분야는 전통적인 부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죠. 정보를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일반인은 호재가 있을 때 삼성전자에 투자하지만 기술과 공정, 소재를 이해하는 사람은 관련주에 투자해 더 큰 이익을 얻기 마련이죠. 마치 용의 머리는 작게 움직이지만 꼬리는 크게 휘청이는 것과 같아요. 기술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능력은 회사 생활에 전념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죠. 또 그들이 근무하는 판교나 가산디지털단지에서 어떤 회사가 망해 나가고, 빈자리에 어떤 회사가 들어오는지, 주변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투자의 소재가 될 수 있어요. 옛날처럼 큰 시드머니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최근의 투자 트렌드이기도 하고요. 갈수록 기회도 많아지리라 생각해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마음만은 청년’인 시니어들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의 책을 자세히 보면 직업상담사나 창업 컨설턴트들이 하는 이야기와 맥락이 닿는다.
“은퇴 후 평생 직업이었던 분야를 접고 새로운 분야를 찾아 도전하시는 분이 많잖아요. 하지만 성공 확률은 대단히 낮죠. 부자가 되는 방법도 비슷해요. 본인이 직장 다닐 때 잘 알던 해박한 분야에서 더 공부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업무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노력이 더 유리해요.”
흔히 몇 차례 소심한 시도가 실패하는 경험을 하면 재테크 무용론자가 되기 십상인데, 이 책에는 재테크를 통해 부자가 된 여러 사례가 등장한다. 각종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재테크의 전형 같은 부자도 등장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부자가 목표는 아니더라도 재테크는 하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한다.
“큰돈을 벌지 않더라도 재테크는 누구나 해야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부는 팽창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조금씩 부자가 되고 있어요. 모두 다 움직이고 있는데, 나 혼자만 멈춰진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조금씩 가난해지고 있다는 뜻이 돼요. 사회가 부유해지는 것에 맞춰 재테크를 통해 나의 재산을 조금씩 늘려야 소득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요. 재테크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일이 된 셈이죠. 과거에는 가만히 있어도 시간의 흐름만으로 연공서열에 따라 월급이 오르고 집값이 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관심을 갖고 흐름에 맞춰 함께 달려줘야 해요.”
뒷조사까지… 부자들의 ‘면접’
각 분야의 성공한 명사들을 취재하다 보면 첫 만남은 ‘테스트’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본인을 상대하는 기자의 능력이나 이해도가 어느 수준인지 궁금해한다. 일종의 면접이다. 작가는 “부자들 중 대부분이 그런 테스트를 즐기고, 상대가 대필 작가라면 그 강도는 훨씬 세진다”고 말했다.
“간단히 훑어보거나 몇 마디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테스트’가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심한 경우도 흔해요. 감당 못 할 만한 행동을 던지고 반응을 보는 경우도 있어요. 약속 시간에 늦는다거나,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식이죠. ‘이거 하면 얼마 버냐’며 묻기도 하고. 또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경우도 있고, 일부러 단답형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부자도 있었죠. 제 뒷조사를 몰래 한 분도 있었어요.”
그 까다로운 면접들을 어떻게 통과했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뿐 다른 비결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저 비굴해 보이지 않게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만난 부자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작가는 간단히 유형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부자와 같은 스테레오 타입은 오히려 만나기 힘들다고 그는 설명한다.
“최근에는 젊은 부자들이 많아져서, TV 속 회장님 같은 분은 그리 많지 않아요. 자린고비 같은 타입이 있는 반면, 설렁설렁 있는 대로 벌고 쓰고 하는 사람도 있죠. 애써 공통점을 찾자면 본인들이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에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가족을 위해 애쓰셨던 분이에요. 흔히 부자가 되면 가족이나 친척들과 등을 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요. 가난한 부모에 가정사가 행복하지 않은 분이었는데, 부자가 된 뒤 가족에게 베풀면서 사시더라고요. 흔히 알고 있는 부자의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분이셨죠.”
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작가는 부자가 되었을까?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면 어떤 길을 가고자 할까?
“아직 부자가 되진 않았죠. 많은 이들과의 교류 속에서 배우려 노력하고 있어요. 자신의 비법이나 투자 방법 등을 서슴없이 알려주는 분도 많아요. 부자들은 자기 비법을 숨긴다는 것도 옛말이죠. 그렇다고 당장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회사원 신분에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책의 구분법으로 설명하자면, 지금은 ‘고전형’과 ‘안전형’의 방식을 따르는 정도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를 바탕으로 기회를 엿보는 중입니다. 다만 부자들과 함께하면서 저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하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변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곁에 있다 보면 그들에 대한 대접을 저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거든요. 그저 삶의 좋은 자극이 될 수 있게 유지해나가고 싶습니다.”
배우 문희경(56)은 유난히 빨간색이 잘 어울린다. 그녀에게서는 나이를 잊은 사랑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당차고 열정적이다. 문희경의 에너지는 강철 추위도 꺾지 못할 정도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동백꽃이 떠올랐다. 문희경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이맘때쯤 활짝 피는 꽃. 지난해 ‘대세’로 떠오른 그녀는 올해도 기지개를 활짝 켰다.
문희경의 2021년은 찬란했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에 이어 채널A ‘쇼윈도 : 여왕의 집’(이하 ‘쇼윈도’)에 출연했고, 티빙(TVING) 웹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에도 특별출연했다. 연이은 화제작 출연으로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녀는 2월에는 앨범을 발매하며 가수로서 못 다 이룬 꿈도 이뤘다. 문희경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행복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재작년에도 바빴지만, 작년에도 정신없이 일들이 휘몰아쳤죠. 올해 더 많은 일을 할 것 같아요. 한마디로 2021년은 올해 더 열심히 하라고 준비한 해가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체력은 늘 유지하고 있고, 즐기면서 일을 하는 편이거든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에너지를 받는 게 좋아요. 현장 체질인가 봐요. 집에 있는 것보다 편안해요.”
‘쇼윈도’로 새로운 배역의 갈증 해소
회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시청률도 상승 중인 드라마 ‘쇼윈도’. 문희경은 주요 역할로 출연 중이다. 그녀가 맡은 김강임은 패션 기업의 회장이다. 한선주(송윤아 분)의 엄마이기도 하다. 즉 문희경은 여성 회장이자 엄마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쇼윈도’와 김강임에 대해 “하고 싶었던 작품, 역할”이라고 강조하며 “그래서 굉장히 즐겁게 촬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쇼윈도’ 제작진은 문희경의 캐스팅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그녀가 송윤아의 엄마로 보일지 우려했다. 다행히도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제작사에서 제가 송윤아 엄마를 하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해서 망설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과감히 전화했어요. ‘나 김강임 역할 하고 싶다, 나를 대체할 배우 없을 것이다’라고 어필했죠. 제작진분들이 저를 직접 만나본 후 고민을 떨치고 저를 과감히 캐스팅했죠. 연기를 해보니까 저하고 송윤아는 진짜 엄마하고 딸이 되더라고요. 저는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어필하는 편이에요.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처럼 문희경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는다. ‘쇼윈도’에 앞서 출연한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랬다. 석형(김대명 분)의 엄마로 출연한 문희경은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나왔다 하면 통통 튀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화려한 스타일링도 한몫했다.
“모든 배우가 신원호 감독님, 이우정 작가님 작품을 하고 싶어 하잖아요. 어느 날 작가님이 저를 원하신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진짜 소리 지를 정도로 좋았어요. 그래서 덥석 물었죠.(웃음) 저나 김갑수 선배님, 김해숙 선배님은 역할의 크기와 상관없이 좋은 배우들, 스태프들과 같이 작업하는 것을 즐거워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좋은 기억이고 잊을 수 없는 일이죠.”
문희경은 부유한 상류층 역할을 많이 맡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사모님이었고, ‘쇼윈도’에서는 회장님이었다. 그녀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사모님이지만 아들만 바라보는 평범한 엄마였고, ‘쇼윈도’는 재벌 회장 역할이다”라고 차이점을 짚었다. 문희경은 그동안 사모님 역을 많이 맡은 것보다 ‘누군가의 엄마’에 그친 것에 아쉬움이 더 커 보였다.
“늘 배우로서 갈증이 있었죠. 살림하고 누군가를 뒷바라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쇼윈도’의 김강임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룹 회장이고 여성 경연인이잖아요. 그동안 부잣집 사모님은 많이 연기했지만 경영인은 처음이었어요. 엄마보다는 일하는 여성이죠. 그래서 스트레스가 좀 풀려요.”
사모님 역할을 주로 맡다 보니 캐릭터가 철부지거나 얄미운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인생작으로 꼽는 2010년 SBS 드라마 ‘자이언트’ 때부터 이어져온 이미지 같다. 극 중 계모 오남숙 역을 맡은 문희경은 악녀 연기로 큰 사랑을 받았다. 카카오TV 웹드라마 ‘며느라기’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평범한 시어머니로 분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더 얄미웠다.
“사실 저도 착한 역할 많이 했어요. 그런데 못된 역할, 카리스마 있는 역할만 기억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며느라기’ 역할은 악역도 아니고 가정밖에 모르는 현실적인 시어머니죠. 착하고 좋은 것 같으면서도 며느리들에게 시킬 것은 다 시키니까 욕을 먹더라고요. 이게 욕 먹을 일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문희경은 “포스 있고, 예민할 것 같고, 못될 것 같다”는 오해를 받는다. 때문에 실제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정반대 이미지에 깜짝 놀란다고. 귀엽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는 그냥 역할에 충실할 뿐이에요. 배우는 맡은 역할을 100% 해내야 하는 게 숙명이죠. 배우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요. 빨간색, 검은색 등 다양한 컬러를 입힐 수 있어야죠.”
출연작
드라마 SBS ‘자이언트’, KBS2 ‘감격시대’, JTBC ‘귀부인’, JTBC ‘품위있는 그녀’, MBC ‘슬플 때 사랑한다’, MBN ‘우아한 가’,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카카오TV ‘며느라기’, 채널A ‘쇼윈도 : 여왕의 집’ 등
영화 ‘좋지 아니한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간신’, ‘글로리데이’, ‘인어전설’, ‘어멍’ 등
가족, 그리고 제주
실제 엄마로서의 문희경은 어떨까. 그녀는 슬하에 작곡 공부를 하는 딸이 있다. 문희경에게 딸은 제일 친한 친구고, 둘도 없는 존재다. 딸 얘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 그녀. 그러다가 이내 언젠가 딸이 시집 갈 때를 떠올리고는 “어떻게 보내야 하나”며 울컥하기도 했다.
“딸은 제 인생의 원동력이에요.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는 경각심을 줘요. 엄마이기 때문에 책임감도 더 느끼고 열심히 하려고 하죠. 딸을 낳은 것은 축복이고,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에요. 딸은 소통이 잘되고 친구 같아요. 걔가 더 언니 같아요. 저를 막 혼내요.(웃음) 결혼은 안 하겠대요. 친구들과 같이 실버타운 들어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너한테서 해방되고 싶다고 하고요. 그런데 막상 걔를 보내면 눈물 날 것 같아요.”
도시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녀의 고향은 제주도다.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문희경을 포함한 여덟 남매는 아옹다옹 살았다. 중산층이었지만 가족이 워낙 많다 보니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제주도는 남아 선호사상이 심했어요. 아들 두 명을 낳으려다 보니 딸 여섯 명을 낳게 된 거예요. 그래서 8남매가 됐죠. 저는 다섯째고요. 부모님은 과수원도 팔며 자식들을 공부시킨, 자식들을 위해 사신 분들이죠. 형제들이 공부는 잘했어요. 선생님, 대학교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공부를 악착같이 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공부 잘하면 시키고, 못하면 안 시킨다고 하셨거든요.”
문희경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남몰래 가수라는 꿈을 키웠기 때문. 어린 시절부터 친척들 앞에서 빼지 않고 노래를 부르던 소녀는 자신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봤다. 나이 들면서 가수에 대한 꿈은 확고해졌고, 꿈의 실현을 위해서는 제주도를 벗어나 서울로 가야만 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 부모님이 서울행을 반대하셨어요. 당시 집안이 좀 어려웠기 때문에 제주교대에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죠. 저는 서울에 가야만 했어요. 그래야 대학가요제든지 강변가요제든지 나갈 수 있으니까요. 서울 안 보내주면 죽어버리겠다고 데모도 하고 그랬죠. 결국 대학에 합격하니까 보내주시더라고요.”
마침내 문희경은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고,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렸다. 1986년 ‘제1회 샹송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쇼86’에 출연했다. 이어 1987년 ‘강변가요제’에서는 ‘그리움은 빗물처럼’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대학에 가고 상도 받으면서 제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것 같았어요. TV에도 나오니까 부모님도 ‘어릴 때부터 노래 좋아하더니 하네, 가수 할 수 있으면 해라’라고 응원해주셨죠.”
그렇게 벗어난 제주도지만, 고향은 고향인가 보다. 문희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도, 애정도 커졌다.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인어전설’, ‘어멍’에 출연하기도. 배우로 제주를 찾아 해녀 연기를 하기까지, 감회가 남달랐을 듯싶다.
“내 고향 제주는 정신적 지주죠. 내게 배우로서 가수로서 감성적인 부분을 줬다고 할까요.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기도 하죠. ‘내가 어떻게 고향을 떠나왔는데, 꼭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그런 마음이 강했어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그렇게 벗어나고만 싶었는데, 나이 들면서는 고향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귀향 본능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에는 내려가서 살 거예요. 촬영이 있을 때만 서울로 올라오고, 귤 농사도 하고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25년 만에 다시 가수
앞서 얘기했듯이 문희경은 1987년 강변가요제 대상 출신이다. 가수가 되는 지름길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가수 인생은 잘 풀리지 못했다. 문희경은 1989년에 1집 ‘갈 곳 잃은 연정’, 1994년에 2집 ‘예전 같지 않은 너’를 발표하며 발라드 가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고 결국 뮤지컬 배우로 전향했다. 첫 작품은 1996년 ‘노트르담의 꼽추’ 에스메랄다 역으로 기록된다.
“문희경이라는 사람도 점점 잊혀갔죠. 가수는 내 길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서 서울에 왔는데 아닌 길을 억지로 갈 수는 없잖아요. 과감히 포기하고 뮤지컬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는 뮤지컬이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미래도 안 보이고, 암흑 같은 시기였죠. 하루하루 버티면서 그날그날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다. 마침내 문희경은 2007년 어둠을 벗어나게 됐다. 연극 무대에 선 그녀를 보고 정윤철 감독이 러브콜을 보내 영화 ‘좋지 아니한가’에 출연했다. 문희경은 제8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녀는 정윤철 감독을 ‘은인’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린 문희경. 오히려 가수의 꿈에 가까워지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2015년 문희경은 MBC ‘복면가왕’ 출연으로 노래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후 2016년에는 JTBC ‘힙합의 민족’에 출연했다. 딕션이 좋은 그녀는 놀라운 랩 실력을 보여주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2020년에는 MBN ‘보이스트롯’에 출연해 트로트 실력을 뽐냈다. 아름다운 음색으로 최종 5위를 거머쥐었다.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문희경은 결국 다시 가수가 됐다. 지난해 2월 트로트 정규 앨범 ‘금사빠 은사빠’를 발매한 것. 가수를 포기하고 배우가 된 지 꼭 25년 만이다. 그리고 지난 12월에는 ‘보령에 가자’, ‘서해랑길에서’, ‘대천에 가자’ 총 3곡을 발매했다.
“제가 ‘보이스트롯’을 하면서 정의송 선생님 노래를 세 곡이나 했어요. 그 인연으로 선생님께서 고맙다고 곡을 선물로 주시면서 앨범을 내게 됐죠. 제가 다시 가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생각도 없었어요. 악착같이 가수를 열망할 때는 정말 안 됐잖아요. 다 내려놓고 노래를 즐기면서 했더니 가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예요. 지금은 인사할 때 ‘배우 겸 가수 문희경’이라고 해요.”
정리해보면 문희경은 ‘가수→뮤지컬배우→배우→가수 겸 배우’의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노래 부를 때보다 연기할 때가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연기를 할수록 깊이와 재미를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노래 잘하는 배우’로 봐주기를 바랐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제주도 꼬마는 50여 년이 흐른 뒤, 자신이 배우 겸 가수가 될 줄 알았을까. “꿈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는 그녀의 메시지가 더욱 특별하게 와 닿는다.
“결국 돌고 돌아 가수도 하고, 뿌듯하고 만족한 삶이죠.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사람 일은 몰라요. 그러니까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지금은 백세인생 시대이기 때문에 나이가 있다고 망설이거나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꿈이 있다면, 꿈을 꾸라고 하고 싶어요. 꿈에는 나이 제한이 없잖아요.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면, 삶에 긴장감이 생기고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 꿈을 꾸고, 도전하세요!”
고령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시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기대수명에 따라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할 날도 함께 늘어나야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 은퇴를 미루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이에 은퇴한 시니어들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이 주목받고 있다. 탤런트뱅크는 ‘긱 경제’를 기반으로 한 일자리 중개 플랫폼으로, 고경력·고스펙 전문가와 기업을 매칭한다. 공장환 탤런트뱅크 대표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현재 우리 사회는 건강과 전문성이 온전하더라도 20~30년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은퇴해야 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지식이나 기술 등 능력치가 충분함에도 수십 년에 달하는 노년을 경제활동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에 절망과 무력감을 느끼는 시니어들이 많다.
이렇게 전문 경력을 가진 시니어 전문가가 은퇴 후에도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해 일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이 있다. 탤런트뱅크는 수십 년간 전문 분야 경력을 쌓아온 시니어들과 기업을 연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8년 모기업 ‘휴넷’의 사내벤처 형식으로 출범했다.
고용 패러다임의 변화
탤런트뱅크 서비스의 바탕에는 ‘긱 경제’(Gig Economy) 개념이 존재한다. ‘긱 경제’란 빠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이 특정 프로젝트나 업무별로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 형태의 고용을 늘리는 경제 현상을 말한다. 프로젝트의 ‘문제 해결’ 방식에 초점을 맞춰 비효율적인 채용을 줄이고, 구직자는 원하는 업무와 시간을 선택해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긱 경제의 핵심이다. 탤런트뱅크는 전문인력 상시 고용이 어려운 중소·중견기업에 고도의 비즈니스 문제가 닥쳤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를 프로젝트별로 매칭한다.
탤런트뱅크는 출범 이후 국내 ‘긱 경제’ 시장의 성장과 고용 패러다임 변화로 사업이 크게 확장하며 지난해 말 별도법인으로 분사했다. 사업 초반에는 고령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 은퇴 전후의 전문가에 우선 주목했지만, 현재는 ‘긱 경제’의 성장으로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전문가들이 탤런트뱅크를 찾고 있다. 등록 전문가 수는 1만 명을 돌파했고, 그중 서류전형과 1:1 심층 인터뷰 등 까다로운 내부 검증 시스템을 통해 인증받은 전문가는 4000여 명 수준이다. 현재 프로젝트 의뢰 수는 3000여 건에 달한다.
전문가와 기업 모두 만족도 높여
탤런트뱅크 서비스는 은퇴 후 새로운 조직과 환경에서 업무를 보는 시니어 전문가들에게 높은 만족도를 선사하고 있다. 공 대표는 “인생 1막을 마친 전문가들에게 2막에 대한 대안은 없는 게 현실이다”라며 “은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탤런트뱅크는 전문성을 살리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라고 설명했다. 은퇴하기까지 열심히 달려온 시니어들은 풀(full) 에너지에서 벗어나 원하는 시간, 주기, 형식 전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긱 워커’의 삶에 더 만족하는 경향도 있다. 전문성을 갖췄다면 기존 연봉보다 높은 수입을 얻기도 한다. 공 대표는 “능력을 인정받은 전문가라면 주 1회 일하고 월 400~500만 원의 임금을 받기도 한다”며 “긱 워커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일할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맡으면 월 1000만 원 이상의 수입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진 지식·능력으로 자유로운 일상도 즐기고 전문성도 살려 일할 수 있는 것이다.
탤런트뱅크의 서비스는 재의뢰율이 60%를 넘어설 만큼 기업의 만족도 역시 높은 편이다. 탤런트뱅크만의 강점은 ‘고급’, ‘검증’, ‘신뢰’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까다로운 내부 검증 시스템으로 기업이 해결해야 할 문제, 전문가의 역량, 근무 조건, 인성 등을 사전에 철저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업과 전문가가 함께 일하는 방법에 더 많은 유연성을 제공하고, 기업의 비즈니스 발전을 돕는다. 공 대표는 “단순히 헤드헌터가 인재를 추천하는 수준이 아니라, 해결이 필요한 ‘문제’에 맞는 전문가를 사전에 철저히 검증해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미리 차단한다”며 “이에 따라 한 기업이 동일한 전문가를 반복해서 의뢰하다가 채용하는 경우도 다수다”라고 덧붙였다.
전문가 양성도 목표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100년 넘게 사는 장수 시대에는 평생직장에 취직해 60세 전후 은퇴하는 현재 시스템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재교육을 통해 새로운 직종과 직장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에 탤런트뱅크는 전문가 교육을 통해 전문가들을 양성·육성할 예정이다. 공 대표는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전문가’와 ‘전문가가 될 사람’이다”라며 “현재 탤런트뱅크는 ‘전문가’에 집중해 서비스를 진행 중이지만 앞으로는 교육을 통해 전문가를 육성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탤런트뱅크는 향후 ‘온라인 자문 서비스’, ‘전문가 서베이 기반 시장 리포트’ 등 더 발전된 서비스 개발로 다양한 서비스와 고용 형태를 제공하여 긱 경제를 대표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앞으로도 ‘위드 코로나’와 함께 독립적으로 일하는 방식인 ‘긱 워커’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 대표는 은퇴 후 재취업을 준비하는 시니어들에게 “인생 1막이 끝나도 2막이 있다. 그동안은 2막을 시작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고, 당신이 쌓아온 전문성을 발휘할 서비스와 기회들이 나오고 있다”라며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아 본인의 전문성으로 세상과 오래 소통하기 바란다”라고 전했다.
“Within the budget?” 짧은 한 문장이 갑자기 날아들었다. 영화 속 표현같이 비수 같았다. 깊숙이 새겨진 상처는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지만 제대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주변의 키득거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표현으로는 “자리까지 돌아오는 길이 멀어 보이고 건물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평범했다면 나중에 술자리용 에피소드 정도로 여기며 초심자의 실수로 넘겼겠지만, 그의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의 기억은 그가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되고 기업 대표로 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 ‘한국 위스키 대부’라 불리는 사나이, 김일주(62) 드링크인터내셔널 회장의 이야기다.
“외국인 부사장과 처음 독대하는 자리였어요. 해외파 직원의 도움까지 받은 품의서를 들고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덜덜 떨었죠. 그 짧은 한마디를 못 알아들은 것이 얼마나 창피한지…. 자리에 돌아와서는 좀 진정하고 나서 회사 못 다니겠다고 뛰쳐나왔어요. 집같이 편안했던 영업부서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죠. 하지만 상사들의 집요한 설득 끝에 마케팅 부서에 눌러앉았는데, 결과적으로 제게 큰 도움이 됐죠.”
김일주 회장이 두산씨그램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백화양조에 입사해 베리나인골드 영업을 맡았던 그는, 1986년 패스포트의 큰 인기를 등에 업고 백화양조를 인수한 두산씨그램에서 영업직 업무를 계속했다.
최우수 영업사원의 고난
당시 두산씨그램에서는 명칭마저 생소했던 ‘마케팅’ 부서를 만들고 유학파 사원으로 채워 넣었는데, 시작은 좋지 않았다. 현장과 동떨어진 아이디어가 먹힐 리 없었고, 한국 정서와도 맞지 않았다. 회사 입장에선 ‘최우수 영업사원 김일주’를 마케팅 부서에 배치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고, 그때부터 그의 고난은 시작됐다.
“매일 쏘다니던 사람이 앉아만 있으려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일부러 화장실도 들락거리고, 휴게실에 들러 줄담배를 피워댔죠. 그러다 적응되면서부터는 제대로 된 마케터가 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막 시작됐던 한국생산성본부 마케팅관리사 과정을 듣기도 했고, 우리 사회가 아직 마케팅에 대한 저변이 넓지 않아, 관련 서적 저자나 대학교수를 찾아다니면서 궁금한 것을 물어야 했어요. 당시 주요 기업 중 마케팅 부서가 있던 회사가 한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를 괴롭혔던 영어 역시 정복 대상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영어 학습 테이프는 있는 대로 사 모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민병철 생활영어’나 ‘잉글리시900’ 같은 것들을 닳도록 들었다. 집에 와서는 주한미군 방송인 AFKN만 틀어놓고 살았다. 아내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먼저 영어가 들리는 것이 숙제였다. 그는 “그렇게 꼬박 6년 정도 했더니 조금씩 들리더라”고 말했다.
혁신을 즐기는 그의 성향은 영업사원 시절부터 드러난다. 주류업계에서 그가 남긴 영업과 관련한 일화는 후배들에게 신화이자 교과서가 됐다.
본사 직원이 대리점이 아닌 업소를 직접 방문하고 제품을 소개하는 일도 그가 만든 문화다. 업주들 입장에선 ‘메이커’ 직원이 직접 술을 나르는 모습이 생경할 수밖에 없었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는 큰 회사 직원이라는 신분 자체가 계급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대표적인 일화는 도매상의 가능성만 보고 부도를 막아준 것이다. 보증에 필요한 금액은 3000만 원. 이 정도 금액이면 당시 강남 아파트 전세를 얻고도 중형차 한 대를 살 수 있었다. 월셋방을 살던 영업사원에게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친분 때문은 아니었어요. 탄탄한 영업망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회만 부여받으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죠. 큰 고객으로 성장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부도 직전에 몰렸던 그 사람은 6개월 만에 그 돈을 다 갚았어요. 그리고 그 지역에서 아직도 명성을 갖고 활동하는 도매상으로 자리 잡았어요. 지금도 안부를 물으며 만나는 사이로 지내고 있죠.”
혁신이 만들어준 수식어, ‘대부’
그에게 ‘위스키 대부’라는 수식어를 안겨준 술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양주 ‘발렌타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여러 분야에서 자유화가 이뤄졌는데 수입 양주의 유통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만 해도 존재감이 없었던 발렌타인은 김일주 회장이 브랜드 매니저를 맡으면서 날개를 달았다.
아시아에서는 생소했던 브랜드 발렌타인은 한국 내에서 급성장해, 한때 전 세계 판매량의 대부분을 한국이 차지했을 정도였다. 17년산은 75%, 21년산은 85%, 30년산은 90%가 한국에서 팔렸다. 21년산의 경우 지나치게 부담 주지 않는 접대용 선물의 표준처럼 여겨졌다. 17년산 500ml는 한국만을 위해 만들어진 상품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00년 2월 15일 진로발렌타인스라는 조인트벤처 기업이 탄생했고, 이 회사는 대표적 국산 양주 임페리얼까지 더하며 위스키 업계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됐다. 이 회사에서 김일주 회장은 외국인 사장과 부사장을 보좌하는 마케팅 임원을 맡았다.
김 회장의 손을 통해 명성을 얻은 또 다른 술로는 글렌피딕과 발베니가 있다. 2013년 외국계 회사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싱글 몰트 위스키 ‘글렌피딕’을 국내 1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발베니가 업계에서 인기를 얻은 과정 역시 혁신에 대한 그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당시 업소의 바텐더들이 위스키나 싱글 몰트에 대한 설익은 지식을 설파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발베니의 전설적인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스튜어트와 함께 ‘발베니 마스터 클래스’를 만들었다. 처음엔 6명으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나중에 50명 넘는 바텐더들이 참여할 정도로 업계를 주목시켰다. 발베니의 지명도와 인기는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사람 얻어야 세상 얻어”
김일주 회장이 진로발렌타인스 마케팅 임원으로 자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회의에서 고성이 오갔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놓고 벌어진 대립이었다. 영어 욕설까지 난무했다. 당시 부사장이었던 데이비드 루카스와 견해차가 있어 거친 공방을 벌였다. 주제는 술의 입구에 장착해 혼입을 막는 장치 ‘키퍼’의 도입에 관한 것. 김 회장은 당시 가짜 양주가 판치던 주류업계의 악습을 깨고 임페리얼을 국내 1위로 올려놓기 위해 이 키퍼의 도입을 주장했고, 루카스 부사장은 비용을 이유로 반대했다. 일정 수량 이상의 판매량이 보장되어야 모험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으니까 강하게 밀어붙였어요. 사장님은 결국 제 손을 들어주었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얼마 안 가 벌어졌어요. 사장님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데이비드 루카스가 사장이 되었죠. 견원지간처럼 싸움을 벌였던 사이라 ‘회사를 나가야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제게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변하면 나와 일을 하겠느냐’고 말이죠. 몇 가지 조언을 했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알았으니 네 말대로 당장 고객을 만나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날로 저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녔고, 주류업계에서 푸른 눈의 영업사원은 유명세를 갖게 됐어요. 제가 루카스 사장을 존경하게 된 계기죠.”
루카스 사장과의 인연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김 회장이 설립한 드링크인터내셔널의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바탕에 있고, 현 루카스 고문의 국제적인 감각은 신제품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사례로 윤다훈 부회장이 있다. ‘세친구’의 주인공, 그 탤런트 윤다훈이 맞다. 현재는 드링크인터내셔널의 상근 부회장으로 다양한 마케팅 활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별도 소속사가 있지만,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회사로 출근한다. 김 회장과 그의 인연은 벌써 30년이 넘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났죠. 당시는 무명 배우여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단역이라도 맡게 되면 술자리에서 대사를 하며 연습한 연기를 보여줬는데, 그 열정을 보고 언젠가는 대성할 거라 생각했죠. 윤 부회장에게 감탄한 것은 스타가 되고 나서였습니다. 술자리에서 술값 계산을 못 하게 하니 종업원 한명 한명에게 봉투에 용돈을 주고 가더라고요. 그런 겸손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다른 연예인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줬어요. 그 인성에 반해서 지금은 제가 놓지 않는 형제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소중히 하기 위해 ‘손해 보듯 살자’는 구절을 가훈처럼 여긴다. 스스로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대하면 화낼 일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갑자기 청첩장을 전해도 시간 손해, 돈 손해 따위는 개의치 않고 응하는 식이다. 물질적 손해보다는 사람을 아끼는 데 노력한다는 그의 철학은 그가 거쳐온 인생의 주요 기점마다 빛을 발했다.
“사람에 대해 노력하면 주변인들의 중심에 서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소한 손해가 선한 영향력으로 되돌아오는 거죠.”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회사의 상품 판매가 급감했을 때도 이러한 태도는 리더십이 됐다. 회사 내부에서 인원 감축이나 임금 삭감 등의 대책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는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충성심과 팀워크를 다지는 계기로 만들었다. 김 회장의 이런 태도는 단계적 일상회복을 통해 회사의 판로가 열리자마자 직원을 열성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자극제가 됐다.
그는 인생을 통해 얻은 경험들을 최근 한 편의 글로 정리했다. 손주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것이다.
“며느리가 손주 돌잔치 때 편지를 써서 읽어주시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뭐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인생의 중요한 부분들을 정리하고 나니까 제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정작 행사에서 낭독할 때는 눈물이 나서 혼났죠.(웃음)”
손주에게 전하는 건강의 중요성, 손해가 주는 기쁨, 노력의 필요성, 가족에 대한 사랑, 사내가 가져야 할 의리 등을 담은 글은 병풍으로 만들어져 집 안을 장식하고 있다. 손주에 대한 사랑을 담은 ‘가보’가 된 셈이다. 손주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하고픈 김 회장의 사랑이 담겨 있다.
포스트 코로나의 승부수 ‘골든블랑’
그는 현재 또 다른 혁신을 준비 중이다. 바로 정통 샴페인 ‘골든블랑’이 그것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업계는 빠르게 변화했다. 혼술과 홈술이 늘면서 위스키 판매량은 줄고 와인이 대세가 됐다. MZ세대의 입맛은 가볍고 부담 적은 술을 원했다. 드링크인터내셔널도 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남들처럼 적당한 제품을 수입해 적당히 판매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정통 샴페인이다.
“스파클링 와인 중에서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생산된 것만 샴페인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행정구역처럼 아주 명확히 관리하죠. 그 외 지역에서 생산된 것은 크레망이라 부르는데, 크레망을 만들 수 있는 지역도 정해져 있습니다. 단순히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한국의 브랜드로 제조하고 싶었죠. 그래서 프랑스 볼레로 샴페인 하우스와 계약을 맺고, 프랑스 샴페인협회의 공식 라이선스를 얻어 골든블랑을 탄생시켰습니다.”
럭셔리 샴페인 골든블랑은 가장 크고 아름답게 빛나는 별을 의미한다. 번쩍이는 황금색 병은 김 회장만의 컬러 마케팅 감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브랜드 뮤즈로 선택했는데,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김 회장은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면 페가수스는 붉은색 적토마가 됩니다. 이때 함께 ‘자! 달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라며 웃었다.
골든블랑은 그가 시장에 내놓았던 많은 제품 중 그에게 가장 특별하다. 코로나19라는 업계의 ‘전쟁통’에 낳아 기른 자식인 셈이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힘든 업계 상황보다 더 힘들 국민에게 골든블랑이 위로가 되기를 기대했다.
“샴페인은 잘 알려진 것처럼 기쁠 때 마시는 술입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분들이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어요. 하루빨리 대유행이 종식돼 함께 잔을 들고 축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골든블랑으로 말이죠.”
인사동 골목의 널찍한 지하 1층 공간에 칼, 창, 도끼, 철퇴, 심지어 주사위까지, 철로 만든 다양한 것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도, 중국도, 일본도 등 동양 도검부터 중세 유럽 배경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창과 칼도 있다. ‘한국의 마지막 칼 장인’, ‘도검 전문가’ 등으로 불리는 한정욱(69) 씨가 운영하는 국내 최대 칼 전시장 ‘나이프 갤러리’의 모습이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격언도,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면 흥미를 잃게 되니 업으로 삼지 말라는 격언도 있다. 중학교 시절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위해 필요했던 작은 칼을 시작으로 50여 년간 칼과 함께한 한 씨다. 2001년 인사동에 나이프 갤러리를 오픈해 취미를 업으로 삼은 지도 20년이 흘렀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그에게 지난날의 소회와 현재의 감정에 대해 들어봤다.
한번 태어나 한번 사는 인생
“직장생활을 21년 했는데, 해외출장도 다니고 성과도 내고 재밌었어요. 만족스럽게 일을 했어요. 언론사에서 일할 때는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절 인터넷국 국장도 지냈고요. 돈과 만족은 잠깐의 행복을 주지만 그게 오래 가진 않더군요. 언론사에 1년 정도 있어 보니 한번 태어나 한번 사는 인생, 더 늦기 전에 하고 싶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이프 갤러리를 오픈하기 전, 한 씨는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했다. 짧은 교사 생활을 했고, 광고대행사에서도 일했다. 광고대행사를 그만둔 후에는 언론사에서 일할 기회도 있었다. 번듯한 직장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이 주는 행복도 있었다. 하지만 늘 마음 한켠에는 더 뜨거운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 늦으면 안 되겠다고 느낀 한 씨는 인사동에서 나이프 갤러리를 열어 수집한 칼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경기도 양주에 전통 방식으로 쇠를 내리는 제철소 ‘정강원’을 세웠다.
칼이 좋아서 하게 된 일. 지금은 도검뿐 아니라 주방 칼, 주사위까지 철로 다양한 공예품을 만든다. 한 씨는 자신의 일을 ‘작은 제철소를 운영한다’고 표현한다. 일반적인 제철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제철소처럼 철광석으로 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철로 제련한다는 것.
“사철 제련은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문헌에서부터 숱하게 나오는 전통 제련 방식이에요. 철광석을 녹이면 선철이 나와요. 그런데 선철은 탄소함유량이 높아서 잘 부서져요. 무기로는 못 쓰죠. 반면 사철을 제련하면 탄소함유량이 낮은 강철이 나와요. 선철은 담금질해도 단단해지지 않지만, 강철을 담금질하면 무기가 될 수 있죠.”
사철로 만든 강철은 철광석으로 만든 선철보다 단단하다. 철광석으로 철을 뽑을 때는 1500도 내외의 온도로 가열한다. 반면 사철은 그보다 높은 1800도에서 가열한다. 해변에서 모래를 채취하고, 모래에서 철 성분을 걸러내 더 높은 온도에서 제련해야 하는 만큼 작업은 더 길고 고되다.
철을 뽑아낸 후에는 불에 달궈 두드리는 ‘단조’와 철을 접는 ‘접쇠’라는 과정을 거친다. 철의 불순물을 없애 강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규모 있는 제철소에서는 50여 명 이상이 이 과정에 동원되지만 정강원에서는 한 씨와 직원 몇 명이 소수 인력으로 해낸다. 지난한 주조 과정이지만 수익이 적어 사업성은 떨어진다.
“그만두고 싶은 때도 많았습니다. 직원 5명 중 두 명은 제철 일을 하고, 세 명은 외국 물건을 수입해서 판매합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제철에다 쏟아부으며 버티고 있어요. 전통적인 제련 방식을 고수하고 지킨다 해서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공로를 인정받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2015년에 인간문화재 심사를 봤어요. 9년을 문화재청이랑 씨름해서 ‘야장’ 항목에 심사를 봤죠. 하루에 꼬박 여덟 시간을 망치질해가며 이틀 동안 심사를 봤습니다. 그런데 계보가 없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떨어졌죠. 그때 많이 속상했습니다. 예순넷의 나이에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나니 그런 타이틀에는 관심이 없어졌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아무도 안 하니까 합니다.”
인정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자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됐다. 망치질 한번이 생각대로 잘 됐을 때, 칼날 형태가 잘 잡혔을 때 기쁨을 느낀다. 결과물이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았을 때조차 ‘내 실력으로 이 정도면 됐지’라며 다음 작품을 기약한다.
“같은 나이대 친구들은 집에서 쉬면서 손주를 보거나 하는데, 매일 일을 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이제는 그저 건강하고 밥 잘 먹는 것. 그리고 지금 하는 일로 용돈 벌이가 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뭔가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이 일을 한동안 계속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철과 닮았다. 뜨겁게 달궈지고 두드려지면서 강인해진다. 철광석보다 뜨거운 온도에서 제련되는 사철처럼, 한 씨의 삶도 남들보다 뜨겁다.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고 얻은 한 씨의 즐거움은 사철 제련으로 만들어진 철처럼 질기고 강인한 것이지 않을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인생에서 돈이 주는 행복은 평생 가지 않습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세속적 가치와 관계없는 꿈 하나 정도는 품고 살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중년은 삶의 인터미션이자 새로운 기로에 선 시기다. 늦은 때는 없다지만 새로운 도전은 겁이 난다. 가슴 뛰는 열정은 사라진 지 오래. 연극 연출가 안은영(55)도 평범한 중년들과 다르지 않았다. 연극에 마음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불의의 사고로 인한 시련도 있었으나, 연극은 활기찬 2막을 위한 불쏘시개가 됐다. 아마추어 극단을 이끄는 연출가로서 연습실에 들어설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를 만나 연극의 매력과 도전하는 중년의 삶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코로나19 이후 막을 펼치지 못한 채 굳게 닫힌 극장이 수두룩하다. 시니어 배우들과 함께 극단을 이끄는 그녀도 연출가로서 고심이 깊었다.
“아마추어 극단이라 아직 연습실과 극장이 없다. 지난해에 연습실과 극장이 문 닫으면서 한동안 참 힘들었다. 대안으로 단편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찍거나 UCC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하면서 단원들과 영상 분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50·60대분들이 반사판을 들거나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스태프로 임했다. 하지만 할수록 연극에 대한 갈증이 더 커졌다. 줌(ZOOM)으로도 연습을 했는데 한계가 많았다. 그래서 현재는 조심스럽지만 일전에 무대에 올렸던 ‘강 여사의 선택’을 바탕으로 대본을 보고 진행하는 입체 낭독극을 준비 중이다. 대본을 보고 하는 연극이지만, 80% 이상을 암기한 상태로 진행하고 실제 연극과 유사하게 음향이나 조명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가 찾은 현실적 대안이다. 지금도 매주 연습을 하고 있다.”
여성의 이름을 되찾는 일
연출가로 시작한 인생 2막. 이전에는 직장 때문에 10년 넘는 세월을 미국과 멕시코에서 보냈다.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려던 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의 문턱을 잠시 밟았다가 돌아왔다. 그 교통사고 때문에 척추 쪽에 심각한 장애가 생겼다.
“정말 고통스러워서 밤마다 울었다. 살아 있다는 게 기적과도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심리적 절망에는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정말 무서웠다.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너무나 준비 없이 귀국했다. 중장년의 재취업을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취업도 안 되고 경제적 형편도 어려웠다.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심지어 삶을 비관하고 저버릴 마음도 품었었다. 귀국해서 심리적 바닥을 제대로 찍었다.”
연극은 고통의 나날 속에 찾아온 멋진 반전이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홈페이지에 뜬 연극교실 모집 공고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공고를 보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지난날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동화 ‘의좋은 형제’로 연극 놀이를 하던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학교, 직장, 행사 등 어디서든 필요할 때마다 연극을 연출하고 있었더라.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즐거움을 다시금 내 삶에 등장시키고 싶었다. ‘내일 죽어도 오늘은 연극 한바탕 하고 죽자!’는 마음이었다. 물론 성치 않은 몸 탓에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을 감수해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이를 계기로 연극교실에서 만난 인연들과 함께 ‘강 여사의 선택’, ‘말괄량이가 길들이기’와 같은 창작극 2편을 무대에 올렸다. 평균 나이 55세 배우들과 함께 이뤄낸 결과였다.
“몸을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오히려 연극을 하면서 체력이 많이 길러졌다. 버티는 힘이 생긴 것이다. 연극이 정말 좋은 재활치료가 됐다. 또한 연출가로서 중년의 목소리를 연극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우리 사회는 중년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요구할 뿐, 정작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묻지 않더라. 이름은 있으나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로 불리며 무명(無名)이 된 그녀들에게 연극으로나마 다시금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하나의 꽃이 된다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말이다.”
창작극 ‘강 여사의 선택’은 늙어가는 부모와 커가는 자녀들 사이에서 중년의 주인공이 겪는 애환과 동시에 존엄사를 둘러싼 선택에 관한 내용이다. 존엄사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중년 여성인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다. 덧붙여 ‘말괄량이가 길들이기’는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달리 미혼의 중년 여성이 길들여지는 객체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오디션을 통해 배필을 찾는다는 얘기로, 그 과정에서 중년 여성의 주체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오롯이 중년에 의한 그리고 중년을 위한 창작극이다.
문화적 게릴라를 꿈꾸며
그녀는 2019년부터 단원들과 함께 표현하는인생연구소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이 협동조합의 대표이자 치유적 글쓰기와 표현력UP 훈련 강사로 활동 중이다.
“삶에서 표현이 정말 중요한데, 우리나라 중년들은 표현에 서툴다. 나 역시 그랬다. 표현이 서툴면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쌓이면 불화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연극을 바탕으로 표현력을 기르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연극은 표현의 예술이고, 배우는 하나의 캐릭터를 통해 삶을 배우지 않나? 이처럼 창작극을 통해 다양한 역할을 체험하면서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로 힘들면 글로 써보게끔 한다. 그 과정에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시금 배운다.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다양한 표현을 익힐 기회다. 표현이 다채로울수록 중년의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그렇다면 연출가와 대표를 오가며 활약하고 있는 그녀의 희로애락은 무엇일까?
“협동조합의 대표보다 연출가란 말이 좋다. 물론 대표로서 늘 책임감을 느낀다. 조합원인 우리 단원들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책도 쓰고, 강연도 다닌다. 아직 수익 모델이 없기에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현실의 벽이란 게 참 무섭다. 연극을 위한 살림을 꾸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연습실에 올 때만큼은 정말 행복하다.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며 구현하고자 하는 캐릭터에 대한 견해를 나눈다. 물론 서로 조금씩 어긋날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나의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고 또 설득한다. 완벽히 역할에 몰입한 배우를 보면 정말 아름답다.”
끝으로 중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을 설명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중년에게 필요한 건 존중과 에너지다. 늙어갈수록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 쉬운데 이러한 태도는 남을 대할 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반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아낄수록 남도 귀하게 대한다. 또한 우울감에 빠져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오기를 추천한다. 밖에서 어울리며 창작활동을 통해 자신 안에 감춰진 에너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나 역시 그랬다. 중년도 할 수 있다는 걸 꾸준하게 보여주고 싶다. 최종적으론 문화적 게릴라가 되고 싶다. 중년으로 구성된 문화집단으로 문화예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싶다.”
자기다움의 아름다움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나? 연극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열정은 인터뷰한 소극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안에는 중년을 바라보는 깊은 사유와 자신의 성찰을 바탕으로 한 내공이 존재했다. 그녀에게 연극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연극을 통해 중년‘다움’, 남성‘다움’, 여성‘다움’ 등 규격화된 이해가 아니라, 자기다움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움을 좇고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시간을 통해 일종의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엿볼 수 있었다. 흔히 아마추어를 초보자로 비견하지만, 아마추어리즘의 핵심은 가능성과 순수한 열정이다. 물론 가능성과 열정으로 해결하기엔 현실의 벽이 높을 때도 있다. 하지만 삶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좋아하는 것만큼 귀한 재능은 없다. 그녀가 가진 아마추어리즘의 아름다움이 더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기대하며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