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나도는 ‘혼자 사는 법’에 관한 어느 자기계발서는 무려 마흔여섯 가지의 과제를 제안한다. 목차가 온통 ‘~하기’로 빽빽하다. 하긴, 목록대로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 혼자 살기는 이미 성공적일지 모른다. 마흔여섯 개를 외우느라 지루할 틈이 없을 테니까.
나는 그 방대한 과제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광야를 내달리는 초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히, 책의 저자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만약 다 해냈다면 책 따위 쓰는 대신 가부좌를 틀고 하늘로 훨훨 올라갔을 것이다. 숙제를 내팽개친 패배감으로 뒤돌아서서 툴툴거리는 게 아니다. 마흔여섯 가지를 빠짐없이 해내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나 빡빡하다.
평생 독신을 고수하면서 ‘혼자 살기’에 나름대로 노하우를 간직한 나는 딱 세 가지를 추천한다. 그 정도라면 삶이 제법 풍성해질 테고,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첫 번째
:
말 걸기
“거기 어떻게 올라갔니?”
영국 런던에 갔을 때다. 처음 그곳을 찾은 사람답게 버킹엄궁전으로 갔다. 왜 있잖은가. 파리에 갔다면 루브르박물관을 봐야 하고, 베이징에 갔다면 자금성에 들러야 한다는 식의 이른바 ‘촌놈 관광 리스트’. 버킹엄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은 리스트 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필수 코스. 그곳을 놓칠 수는 없었다.
나 같은 촌놈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날따라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덩치 큰 서양인들 틈바구니에서 교대식을 구경하겠답시고 까치발을 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결과, 좋은 곳을 발견했다. 2m 조금 넘는 장벽이었다. 그 위라면 멀리까지 훤히 보일 터였다. 가벼운 몸으로 두 손을 짚고 풀쩍 뛰어 벽 위에 걸터앉았다. 또래의 금발 여성이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어떻게 올라갔느냐고. 내 자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두 가지다. 첫째, 영어를 아주 잘하지는 못한다. 회화 쪽은 특히 시원찮아서 대답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가녀린 여성에게 “점프!”라고 말할 수도 없고…. 둘째,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머리카락만 금발이지 메릴린 먼로나 니콜 키드먼 같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긴 말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다. “원한다면 내 손을 잡아” 하면서. 금발 여성은 한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잠깐 생각하더니 곧 손을 잡았다. 손에 힘을 줘 끌었고, 금발의 그녀가 금방 딸려 올라왔다. 곁에 앉고는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촌놈 리스트 ‘대화’ 편의 1번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어디서 왔니?”
금발은 스웨덴에서 왔다고 했다. 어릴 때 죽어라 외운 그곳, 수도 스톡홀름에서. 다시 말하건대 매릴린 먼로는 아니었다. 다만, 처음 본 남자 손을 잡은 게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는 게 꽤 귀여웠다(이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털어놓으면 북유럽 여성답게 몸매가…).
남한에서 왔고 이름은 무엇이고 하며 주절거렸더니 금발은 ‘잉그리드’라고 이름을 밝혔다. 찬스를 놓칠쏘냐. 촌놈답게 물었다.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가 많이 웃었다. 그러면서 성은 요한손이라고, 영어식으로 조핸슨이라 불러도 좋다고 했다.
‘그 인연으로 금발의 잉그리드와 동서양을 넘나들며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다가 사랑하였으므로 헤어졌네라…’고 하면 거짓말일 게 뻔하고, 이실직고하면 꽤 오랫동안 이메일을 나눴다. 아무리 못해도 1주일에 한 번은 쓰거나 읽은 것 같다. 손꼽아 보니 5년을 그랬다.
편지가 끊긴 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검은 머리 여성에 사로잡혀 금발을 잠시 잊었고, 그 틈에 왕래가 뚝 끊겨 버렸다.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은 잉그리드의 한마디 말에서 비롯됐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물어주지 않았다면 나의 5년은 훨씬 초라하고 삭막했을 것이다. 잉그리드 또한 “어디서 왔느냐”는 나의 물음을 반겼으리라 믿는다. 장문의 영어 편지를 꼬박꼬박 보내온 것을 보면. 아, 참 좋았다. 편지를 읽을 때, 편지를 쓸 때. 읽을 때마다 반가웠고 쓸 때마다 흥분됐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그토록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 혼자 산다면, 그래서 삶이 건조하다면 산책 도중에, 여행 도중에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를 권한다. 가볍게 툭 던진 한마디가 삶을 한결 싱그럽게 만들지도 모른다. 비밀을 밝히면, 낯선 사람과 시답잖은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우리네 삶은 이미 풍성해져 있다.
물론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먼저 소재가 있어야 한다. 생뚱맞은 말을 마구잡이로 던질 수는 없는 노릇. 상황과 형편에 맞지 않는 뚱딴지급 의문문은 상대의 눈을 동그랗게 뜨게 할 뿐 미소 짓게 만들지는 못한다. 구체적 방법까지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란데, 어쨌든 제법 신중하고 현명해야 한다.
혹시 “뭐라는 거야?” 하면서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다는 식으로 무시할지도 모른다. 경험에 비춰보면 열에 한 번은 그럴 것이다. 겁낼 것은 없다. 별 쌀쌀맞은 사람 다 봤다는 식으로 역시 무시하면 된다. 언제 또 볼 거라고….
두 번째
:
취미 살리기
주위에 변변한 취미 하나 없는 이가 뜻밖에 많은 데 종종 놀란다.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술 마시기”라고 답하는 사람도 놀랍기는 마찬가지. 술 마시기는 취미가 아니다. 숨어 있는 명주를 찾아 방방곡곡 훑는 수준이 아니라면,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것은 생활일 뿐이다. “사람이 좋아 마신다”는 정도로는 취미라고 이름 붙이기가 민망하다는 뜻이다.
취미에는 나름대로 철학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뭔가를 좋아한다면 왜 좋은지 A4 용지 댓 장 안팎으로 늘어놓을 정도는 돼야 한다. 그쯤은 돼야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내 친구는 야구를 좋아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관중석에서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응원해서 방송 카메라에 잡혔을 정도다. 친구는 말한다. 야구는 팬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한다고. 그러므로 승패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꿈과 희망은커녕 몹쓸 인생관을 강요할 뿐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야구는 최선을 다할 뿐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야구라고. 현실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으니 그래서 야구를 사랑한다고. 나는 친구의 야구관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도 알고 있다. 그 전까지는 클래식에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인지 ‘지고이네르바이젠의 사라사테’인지도 몰랐다니 더 할 말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봄의 제전’을 들은 뒤로, 꼼꼼히 관련 서적까지 쓸 정도가 됐다. 몇 권 팔리지는 않았지만 어디 그게 중요한가. 공교롭게도 그 남자는 나와 동년배에다가 홀로 지내는 삶의 방식까지 같은데, 그 모습이 결코 측은하지 않다.
함께 술을 마시고 그네 집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가 아침에 들려오는 모차르트 음악 소리에 눈을 뜨면서 그만 탄성을 낮게 내지르고 말았다. 멋지네! 친구가 따라 주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좋은 게 없는데 뭐 어쩌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인생관을 먼저 둘러볼 일이다.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면밀히 돌아보다 보면 어울리는 뭔가가 손에 잡힐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게 취미가 되고, 그게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세 번째
:
동아리 만들기
취미가 생겼다면 동아리 만들기도 생각해봄직하다. 나는 앞서 말한 야구 좋아하는 친구의 동아리에 몸담고 있다. 열심히 참석하는 회원은 모두 여덟. 응원하는 팀이 똑같다. 모두 잠실야구장 3루 관중석에서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형태는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의사고, 어떤 이는 월급쟁이다. 방송 외주 제작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후배도 있다. 이 친구가 아주 걸물이다. 덕분에 프로야구 선수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도 있다. 지금도 내게는 그 추억이 작지 않은 자랑거리다.
동아리 들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인터넷 뒤지기. 내키지 않는 분들도 많을 줄로 안다. 생면부지 사람들 앞에 나서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나부터 그랬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거니와 겁도 많아서 함부로 마우스를 놀리지 못했다. 어린애들 노는 판에 괜히 끼어드는 것 아닌가 싶고, 혹시나 못된 사람들 만나면 어쩌나 싶고….
우리 동아리 만드는 데 결정적인 몫을 했던 프로듀서 후배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직접 나서면 됩니다. 동아리 만드는 게 어렵다면 어렵지만, 쉽다면 또 쉽거든요. 가장 힘든 것은 사람 모으기겠지요. 취미도 맞아야 하고 시간대도 맞아야 하고 생각도 맞아야 하고…. 우선, 두세 명쯤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수월하지 않을까요? 큰 욕심 내지 말라는 거지요. 그렇게 만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모양새가 갖춰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동지들이 뭉치게 돼 있습니다.”
동아리가 생기면 뭐가 좋을까? 하나마나한 대답이겠지만 정답은 ‘여러 가지로 좋다’이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같은 것에 대해서 갑론을박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 흔하겠는가. 건전한 취미가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어느 책에서 읽은 ‘친구 사귀는 데 필요한 자세’를 덧붙이면 이렇다.
일일이 따지지 말라. 이 말 저 말 옮기지 말라. 사생결단 내지 말라. 예스, 하고 받아 들여라. 육체 접촉을 자주 하라. 팔팔하게 움직여라. 구구한 변명 늘어놓지 마라. 10%는 베풀면서 살아라….
참고가 됐으려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성인군자가 되라는 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동네 바보처럼 굴어라 싶기도 해서….
1970년대를 풍미했던 ‘쎄시봉’ 가수, 라디오 장기 DJ, 예능 프로그램에 감초 게스트, 그리고 독보적인 소재를 활용하는 화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조영남. 올해 칠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조영남과의 인터뷰는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사고는 거침없었다. 하지만 그 거침없음으로 인해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수많은 대중의 호불호 속에서도 그가 지켜 가고자 하는 삶의 중심은 무엇일까?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짧고 굵다. 무뚝뚝하고 툭툭 던지는 듯한 조영남의 화법은 마치 묵직한 못을 박은 것처럼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답을 던진다.
“재밌게 사는 방법에는 낚시, 바둑, 골프, 등산…. 그중 하나 골라서 하면 되는데 돈 안 드는 걸로는 그림 같은 게 있지. 딴 것들은 돈이 드니까 추천하기가 거북하네. 그런데 낚시하고 똑같아. 뭐든 낚싯줄 드리우듯이 시작하면 하게 되는 거지. 일단 경험을 해봐.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그림 시작할 때는 아마추어로 시작했지. 그런데 이걸 계속 30년 넘게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프로 대접을 받더라고. 저절로 프로가 됐어.”
인생 후반전에 들어와 화가로서 이름을 세운 조영남. 그에게 인생 후반전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 길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을 때의 대답이다.
뿔테 안경 너머로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늙지 않는 청춘을 실제로 마주하니 더 진솔했다.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
화가가 된 그에게 그림이 좋다 나쁘다의 평가 기준이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돌아온 대답도 조영남다웠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거 그리는데 남이 뭘 보고 느끼겠어. 그런 건 모르고. 낚시나 바둑 같은 것보다 그림 그릴 때가 단순히 좋을 뿐이야. 그래서 하는 거지.”
그러나 대화를 더 진행하니 단순히 좋아서는 아니었다. 조영남이 화투를 통해 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미술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내가 노래 잘하는 사람과 똑같이 하면 금방 인정받잖아? 그런데 내가 피카소와 똑같이 그리면 미술계에서 실력이 없다는 굴욕적인 평가를 받아. 음악과 미술은 그런 차이지.
그런데 화투를 아무도 안 그렸었더라고. 내가 그걸 알고서 처음 화투 그림을 시작한 거지. 딱지도 그린 사람이 없었어. 딱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추억의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소재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서 2년 전부터 그리고 있어. 미술은 100% 자유야. 화투를 그려도 되고 딱지를 그려도 되고 하다가 말아도 되고. 그런데 음악은 까다롭잖아. 음정, 박자를 맞춰야 하잖아. 내게 음악과 미술은 정반대야.”
그는 치열하고 골똘하게 연구해 독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미술이라며 미술과 음악을 포함한 예술은 모순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에 닿는 그림을 담아내고 있다.
징징 짜면 죄(罪)라는 생각
우리는 동창들을 만나면 “그 친구보다는 내가 괜찮았는데 잘 안 됐어” 식의 추억 이야기를 곧잘 하게 된다. 조영남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그에게는 정말 안 어울리는 질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열등감 있게 보여? 나는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얼마나 무감각한 남자냐 하면 어렸을 때 가난했잖아? 가난도 실감을 못 하는 정도였어. 어렸을 적에 가난했다고 한숨 푹푹 쉬는 친구들 있잖아. 난 학교 가는데 하늘이 노랄 때가 있었거든? 그럴 때는 ‘아! 내가 굶었구나’ 생각하고 친구들 접선해서 얻어먹으면서 견디고 그랬지. ‘가난하다’, ‘불행하다’, 그런 느낌을 안 가졌었어. 그러려니 싶었던 거지.”
조영남은 자신의 낙천적인 면모가 피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부모님 양쪽으로부터 받은 긍정의 피다. 혹시 그런 천성이 그가 젊게 사는 비법이 아닐까. 그는 세대 갈등을 느껴본 적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나이를 먹었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이 나이 돼서 늘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보다 몸이 더 불편하잖아. 그러면 ‘늙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하지만 한탄하지는 않아.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태반이잖아. 내가 징징 짜면 안 되지. 그러면 죄 받는다고 생각해.”
그는 현재 딸과 함께 사는 중이다. 딸의 나이도 20대 중반. 딸의 결혼에 관한 생각을 물어봤다.
“그건 자기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나는 딸이 뭘 하든지 찬성하고, 간섭 안 해.”
딸과 함께 수다를 떠는 거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에게 문자를 보내도 외면당하는 요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조언을 물어봤더니 손사래를 쳤다.
“자식 문제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할 주제가 아니야. 두 번 이혼했는걸. 해선 안 되는 거로 생각해. 현대인들이 문제를 푸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냐. 안 돼서 안 하는 거지.”
“주된 관심사는 이성”
‘조영남’이라고 하면 스캔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 이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지 물어봤다. 그러자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가장 빠르고 굳건한 목소리의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내 제일 주된 관심사지.”
조영남 하면 다들 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활력이 나이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그런 반응에는 일말의 부러움이 섞여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왜 철딱서니 없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나한테 데려와 봐. 누가 철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해줄게. 나처럼 철딱서니 없으면 여자들이 좋아하는데.” (웃음)
솔직히 생각해보자. 요즘 사람들은 인생관을 세워도 그 인생관대로 삶을 잘 운영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조영남에게 철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관대로 잘 안 되는 이유가 있어. 돈 쓰기를 싫어하니까.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는데 되겠어? 그게 큰 원인이지. 그리고 사람들이 잔머리를 너무 써. 너나 할 것 없이. 그게 걸림돌이야. 그러다 보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못하지. 그런데 내가 그걸 솔직하게 말하니까 철딱서니 없다 하지. 진실을 얘기하니까. 진실은 항상 거북살스럽거든.”
진실을 직시하기 어렵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진실의 표현에 대한 수위 조절 또한 참 어려운 일이다. 그 물음에 그 또한 선선히 어렵다고 동의했다.
자신에 대한 반감에 투덜대지 않는 이유
조영남이 자주 가는 본인만의 아지트가 있을까? 그는 그런 곳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 좋아하는 술도 줄였다고 한다.
“난 독주가 좋아. 그런데 나이가 드니 술도 안 들어가. 맛도 없고, 흥도 안 나고.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술이 들어갈 때 마음껏 먹어둬라, 나중에 후회한다. 그렇게 얘기하고 싶어. 클럽도 한 번 가봤는데, 정말 재미가 없더라고. 젊었을 때 갔어야지. 뭐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해.”
조영남의 삶의 궤적을 보면 다른 것들은 열정이 보이는 게 많은데 유독 돈을 버는 일에는 크게 애정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돈 버는 직업은 아니잖아. 그래서 내 이름으로 해서 망한 적도 없고. 그런 걸 하면 죄 짓는 거라 생각해. 나는 신이 노래만 불러도 먹고 살게끔 해줬는데, 다른 걸로 먹고 살려고 하는 건 신의 뜻에 어긋나고, 나 자신에게도 어긋난다고 생각해.”
확고한 신념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연예인이다.
“꼼꼼하다기보다는 와이즈(Wise)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거 같아. 나는 현명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고 나름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그는 유명인으로서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볼 때가 가장 섭섭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가 유명하니까 나에 대한 몰이해도 나오는 거로 생각해. 그래서 나에 대한 반감에 대해 투덜거리지 않아. 사람들이 날 모르는 척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세상 사람 전부가 다 날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오늘 같은 인터뷰를 통해 조영남이란 사람에 대해 알 수 있겠지. 해서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거고.”
“없어지는 걸 생각 중…생텍쥐페리처럼”
그는 영화 ‘버킷리스트’를 좋아해서 네 번이나 봤다고 말했다.
“보면서, 난 어떤 버킷리스트가 있을까…. 한 가지가 딱 생각났어. 내가 손목시계를 좋아해. 그래서 제네바에 가서 손목시계를 3박 4일 보고 오는 걸로 버킷리스트를 정했지. 그런데 그걸 하고 나니까 너무 싱거워. 너무 싱거워서 뭐 다른 건 없을까 생각했는데…. 지금도 없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했더라고.”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하고 싶은 걸 다한 상태였다는 걸 깨달은, 억수로 운이 좋은 남자, 조영남의 정체다.
“없어지는 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생텍쥐페리가 비행기를 몰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잖아. 그게 늘 부러워서 흉내 내려고 했는데 비행기를 배우려면 학원에 다녀야 하고 귀찮아. 그러니 버킷리스트가 없을 수밖에 없지.”
최근 그의 화투 그림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 같아 인터뷰 막바지에 넌지시 가격이 많이 올라갔느냐고 물어봤다.
“굉장히 비싸졌지.”
그리고 바로 무심하게 툭 던진다.
“아, 그런데 그게 뭐 팔려야지.”
쎄시봉 큰형님으로 알려진 조영남은 이전까지 쎄시봉 콘서트와 별개로 개인 활동을 했지만 올해는 쎄시봉 전국투어 콘서트에 합류한다. 이번 콘서트에서는 영화 쎄시봉 OST에 등장한 신곡 백일몽 라이브 버전을 최초로 공개 할 예정이다.
다음은 2015 쎄시봉 친구들 콘서트 상반기 일정이다.
4월 4일 일산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
4월 11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
4월 12일 전주 전주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4월 18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
4월 2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hall D
5월 9일 대구 경북대학교 대강당
5월 23일 인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세상의 풍속도에 따라 인사법도 점점 짧아져만 가는 것일까?
저의 어릴적 인사법은 시도 때도 없이 “밥 무어십니껴?”(밥 먹었습니까?)로 일관된 인사법이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의식주 중에서도 먹는 것, 먹거리의 중요성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은 틀림없다.
로스토우가 말한 경제발전도 첫 단계인 전통적 사회에서 선행조건단계를 거쳐 도약단계로 나아감은 각 단계별 핵심요소를 얼마나 조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발전속도가 빨리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 끝난 제18대 대선을 통해서 극명하게 나타난 문제가 바로 세대간 갈등국면이다. 지역갈등- 이념갈등의 벽을 넘어 세대간의 충돌은 위험수위까지 치닫고 있다. 양보와 타협은 아랑곳 않고 소지역, 소집단 이기주의에 편승한 새로운 문화충돌의 양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영국에서 일어난 'Angry young man'이 젊은이들의 욕구분출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된 적이 있었다. 여성시대, 무상보육, 안전한 사회, 행복한 대한민국의 캐치프레이즈도 복지 포퓰리즘을 내새운 한낱 빈 공약에 지나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창밖을 내다보며 행복한 100세 인생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워낙 많은 미래학자나 전문도서, 교수진들의 입을 빌어 웰빙이니 건강이니 연금이니 등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물론 다 맞는 말이고 나름대로의 일리도 있다. 얼마전 신바람 건강법으로 TV와 라디오 등의 매스컴을 통한 이 시대의 건강 대명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박사분이 고인이 되었다.
뉴스를 접한 저와 우리 집사람은 약간의 충격과 엄청난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세상만사 밤새 안녕’이란 말도 있지만 허-허-허- 너털웃음으로 다가온 그분이 타계했다니...
그래서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자기 인생의 실제 나이에서 100세까지 장수한다고 가정하면 50세가 반환점이 될 것이다. 실제 나이와 잔여 수명을 합쳐 100세가 되는 공식을 적용해 보자는 얘기다. 다시말하면 실제 나이 56세 되는 사람은 44세의 잔여수명이, 45세는 55세의 잔여수명이 남게 된다.
그래서 잔여수명의 나이에 맞는 사고와 행동의 프레임을 제안하고 싶다. 앞서 말한 56세는 44세의 사고력으로 인생을 살 것이며, 45세는 55세의 인생관을 갖자는 의미이다.
실제 나이 56세가 44세의 보다 젊은 사고의 틀로 무장한다면 얼마나 활기차고 보람된 인생이 될 것이며, 45세는 55세의 보다 원숙한 중년 인생에 걸맞는 소양과 식견으로 무장한다면 가치있는 삶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 매년 이 공식을 대입해 보자. 그러면 실제나이 70세 노인은 실버가 아닌 30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변모될 것이고, 거꾸로 35세의 성년은 65세의 품격있는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갑자기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날 그날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준비하고 실행하여 인생의 금자탑을 쌓아가야 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공식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여러분이 잘 아는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가 한말을 상기해 보자.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이는 습관의 중요성과 함께 인생을 사는 올바른 자세를 설명한 명언중 하나다.
결국 70세 젊은이로 살든, 30대 늙은이로 살든 각자의 인생은 생각과 행동, 습관의 바탕에서 이뤄짐은 당연하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 인생길은 곳곳에 도사린 암초와 고난의 벽을 넘어 순간 순간의 짧은 환희와 성공을 지나가는 고단한 길이지만, 꿈과 희망을 안고 열정을 에너지를 발산하는 자에게는 늘 새로운 길임과 동시에 아름다운 도전의 길이다.
100세 인생,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당신의 길이기에 또한 나의 길이기에 아침단상을 통해 가감없이 적어 봤습니다. 오늘도 지금 이 시간 소중한 하루~ 님의 앞길에 항상 신의 가호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당신이 있기에~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시니어 기자 최재영(kthigh11@naver.com)
△OCJP 국제공인자격 △RABQSA ISO9001 △27001 국제 심사원 △KBS n 리포터△정부3.0 맞춤형서비스 △생활공감정책모니터 용인시 대표 △서울시 인터넷시민감시단 △한국소비자포험 화이트슈머 △금융감독원소비자리포터('금소리') △한국가스안전공사 경영공시모니터 △분수네신문사 칼럼리스트 △직업 특강 & 컨설턴트 △IT 및 보안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