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시인' 나태주는 백편의 시를 쓰는 것보다 한편의 시가 백사람에게 알려져야 좋다고 하였다. 이분은 특이하게도 젊은 날 좋아하는 여성에게 차인 얘기를 이력에 써 넣는다고 하였다. 완전 자존감 쩌는 남자였다. 자못 흥미로웠다. 그 아픔으로 그는 엎어져서 울었다고 하였다.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그 실연의 고통이 그를 시인으로 탄생시켰다고 하였다. 이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여자는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줬고 한 여자는 나를 남편으로 만들어줬다." 고.
수필가 피천득은 '봄'이라는 수필에서 첫사랑은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서로가 세월이 할킨 자국에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녀를 다시 만나보지는 않을 거라 했다.
풀꽃이 탄생된 배경은 그림을 그리려니 풀꽃을 자세히 볼 수밖에 없었단다. 자세히 보니 예쁘더란다.
그는 말했다.
"시의 특성은 개별성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시는 모든 인류가 이해하고 유용한(유명한이 아닌) 시여야 한다."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그 사람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도 했다.
"사람들이 왜 시를 외면하는데요? 어려우니까 그렇지요. 시를 어렵게 쓸 필요가 있나요?"
그렇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시의 역할이다.
광화문의 교보빌딩 꼭대기에는 커다란 글판이 있다. 거기에 적혀 있는 69개의 글귀 중 1위가 나태주시인의 풀꽃이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양지 바른 곳에 호젓하게 자리한 풀꽃문학관에는 그의 시가 적힌 병풍이 있었다. 그는 그림도 잘 그리셨다. 시에 들어간 삽화들도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어느 디자이너가 말했다. "새로운 디자인은 없다"고. 기존의 것을 재해석하여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글도 마찬가지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은 서로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20세때 본 소설, 막스 뮐러의 에 나오는 말인데 나시인도 그런 요지의 문장을 구사하였다.
적산가옥이 그의 문학관이 됐는데 아주 소박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그와 잘 어울렸다. 그의 문학 강의가 얼마나 맛있던지 홀딱 빠져서 들었다.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이란다.
"김용택의 어머니는 입으로 시를 쓰고 김용택 시인은 글로 씨를 쓴다"고 하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본 후 뵙고 싶었던 신영복 교수님을 끝내 못뵈었다. 나목'을 읽은 후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박완서 작가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나태주 시인을 직접 뵙고 강의를 들으니 너무 좋았다. 다른 분들도 이분이 살아 계실 때 만나 뵙고 그의 달관한 인생관과 가슴이 따스해지는 문학 강의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셔서 풍금도 잘 치셨다. 그 풍금소리에 맞춰서 '오빠 생각'과 '어머니의 마음'을 제창했다. 어머니의 마음을 부르며 나는 또 질곡의 삶을 살아낸 우리 엄마를 생각하며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만하루'가 있는 산에는 노오란 은행잎 비가 내리고 있었다. '휘잉'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커다란 몸짓으로 내리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미련 없이 나무를 떠나가고 있었다.
100세 시대의 행복경영 비결은 무엇일까.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 인생을 살아낼 새로운 설계와 순서는 어떻게 세워야 할까. 유필화(63)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마케팅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온 경영학계의 구루다. 뿐만 아니라 를 비롯해 , 그리고 최근작 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고전을 경영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100세 시대, 고전에서 배우는 인생 경영 지혜’를 듣고 싶은 생각에 인터뷰를 청했다.
대방동에 위치한 유 교수 서재의 섬돌엔 검정고무신 두 켤레가 정겹게 놓여 있었다. 유 교수는 부인(이기향 한성대 의류학과 교수)이 아침에 인터뷰 복장 코디는 물론 간식을 손수 준비해놓고 갔다며 미소를 지었다. 신혼 때부터 지금껏 수십 년간 변함없이 싸준 부인의 도시락 내조력을 들려주는 그의 얼굴에 일순 사랑과 감사가 환하게 번졌다.
인생은 60부터란 말도 있는데요. 교수님께선 예순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지요.
“나눔과 베풂의 봉사활동이 내 삶의 비중에서 늘어났습니다. 60이 넘고부터는 경력과 일에 관련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일에 에너지, 시간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두 여인의 영향 덕분입니다. 어머님도 생전에 ‘늘 베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아내도 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덕분에 전혀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을 알게 되고, 접하지 않았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기업과 경영 문제에만 쏟던 관심을 기업 바깥의 세계로 돌리게 돼 좀 더 크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을 알게 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이 키워지는 부수효과도 있더군요.”
사회봉사가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개인의 단순한 느낌이나 추정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근거가 있다. 코넬대학의 행복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남을 돕는 사람은 자긍심을 고양시키고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간에는 정신이 노쇠해가는 속도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봉사활동은 더욱 건강한 정신자세를 지니게 하고, 이는 다시 건강과 삶의 만족을 증진시키는 ‘행복의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게 연구의 골자다. 봉사는 이타적 행위일 뿐 아니라 이기적 행동이기도 하다.
인생 2막에선 성공보다는 행복이란 단어가 한결 실감 있게 다가온다고 다들 말씀하시더군요. 교수님께서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행복이란 마음이 편한 것, 마음의 평정과 평온을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기업인을 만나보면 ‘성공하면 뭐해’ 하며 자조하는 경우도 많고요. 어쩌면 남이 부러워하는 정상에 오르는 것은 울 일이 많다는 것과 동의어라고나 할까요. ‘살아 있는 게 축복이고 숨 쉴 수 있는 게 기적’이라는 마음을 갖고, 일상을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건의 충족이 아니라 그 수행 과정에 행복이 존재하지요.”
매일 참선과 명상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재에 명상실까지 두고 있으시지요.
“마음의 평화를 위한 제 수행 방법은 참선과 300배입니다. 1997년부터 해왔으니, 20년 가까이 해온 셈이네요. 가끔 40~50분씩 참선하고 300번 절하고 나면 마음과 몸이 깨끗해집니다. 현재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잡념을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명상을 하면 집중력, 몰입력이 높아져요. 건강한 긴장력이 생산된다고나 할까요. 삶을 객관적으로 제3자화, 관찰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면 자기에 대한 지독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지도 않고요. 참선을 하다 보면 나를 특별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수많은 중생 중 하나로 담담히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불만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으려고 하는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 교수에게 이순(耳順)(공자가 60을 가리켜 한 말)의 나이에 문자 그대로 이순(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칭찬, 아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있는데 비난, 싫은 말에는 그리 편하지 않고 신경이 쓰인다. 아직 이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고 고백한다.
교수님은 위기의 시대를 이기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꼽으신 바 있지요. 인생 경영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만심입니다. ‘왕년에’와 ‘내가 누군데’가 자만심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장군은 은퇴 후 모임에도 군복 입고 훈장 달고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를 알아달라는 의미이지요. 그래봤자 남들은 ‘그래서(so what)?’예요. 버려야 채울 수 있고, 낮춰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요. 우리 세대는 산업혁명, 민주화를 달성한 세대 아닙니까. 열심히 살아온 것이지, 결코 헛산 것이 아니지요.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이에는 부족한 경륜이나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고 늠름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만심과 자부심,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유 교수는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시원치 않다고 깔아뭉개는 마음이 자만심이라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상대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은 자부심”이라고 구분했다. 자만심은 남을 무시하지만 자부심은 남을 포용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서양통이신데 동양고전에 심취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동양이 서양보다 한결 깊고 차원이 높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병법서를 예로 들어볼까요. 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을 비교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고, 어떻게 이기느냐 거기에만 관심을 둡니다. 반면 동양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무력으로 싸우지 않고 지략으로 이길 방법을 모색하지요. 서양에선 지략이나 책략보다 전략, 전술에 관심을 두고요. 서양의 병서가 단지 전략서인 데 반해 동양의 병서를 정치사상서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시대를 이끈 리더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공부력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평생 학습의 끈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독서이든, 대화를 통해서든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배우려고 하는 학습력이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이는 동서양의 리더가 다르지 않습니다.”
리더들의 경쟁력이 공부력이란 사실은 인생 경영 지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저서 에서 공부력을 변형자산이라 명명해 강조한다. 변형자산이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튼 교수는 “돈 등 유형자산 못지않게 필요한 무형자산이 공부력”이라며 “학교 졸업, 취업, 은퇴라는 3단계 벽이 무너진 오늘날, 100년 인생의 풍요로움은 평생공부에 달려 있다”고 단언한다. 요컨대 100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미분의 인생관에서 적분의 인생관으로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생 전반기의 실력과 경력에 얹혀 후반전을 영위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전반전에 종언을 고하고 유연성과 개방성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라, 그렇게 공부력을 쌓는 것이 100세 시대의 생존비결이라는 진단과 처방이었다.
역사는 리더십의 스승이란 말을 강조하십니다. 역사적 인물 중 평생학습의 롤 모델로 누구를 꼽으시는지요.
“중국의 황제 당태종을 꼽고 싶습니다. 평생학습은 자기경영이 바탕인데요. 당태종은 죽는 날까지도 겸허한 태도를 잃지 않았지요. 그의 자기경영원칙은 경청, 자기경계, 자기절제, 긴장감 지속,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 구사 등 다섯 가지로 정리됩니다. 다만 집권 말년에 고구려 원정 등 쓸데없는 전쟁을 만류하는 신하들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이 결정적 실수였지요.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도 최초의 긴장감을 20년 이상 지속시키기는 어려웠다고나 할까요.”
당태종의 자기경영 비결 중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구사가 눈에 띄는군요. 이는 오늘날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소통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나서고자 하는 마음, 참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본인은 경륜이지만, 상대에겐 편견이고, 본인은 조언이지만 상대에겐 잔소리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 기준을 돌아봅니다. 먼저 내 의도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것인가, 내 능력 자랑을 위해서인가 성찰해봅니다. 즉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능력을 드러내 잘난 척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검토해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보는 상황이어서 불편하거나 부끄럽게 느끼지는 않을지를 살핍니다. 끝으로 내가 말하는 방식이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인지를 고려해봅니다.”
그는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할 뿐인데 연장자라고 말을 다짜고짜 낮추며 하대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며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겸양의 태도를 평생친구인 헤르만 지몬 교수를 통해 체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헤르만 지몬 교수는 ‘유럽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독일의 경영학자다. “일국의 대통령에서부터 차 나르는 직원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존중하고, 즐겁게 대화를 하는 지몬 교수에게서 학문적 열정뿐 아니라 리더의 소양까지 배울 수 있었다”는 술회다.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한 교수님의 ‘인생 경영 비법’을 듣고 싶습니다.
“가족, 친구,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지요. 가족, 친구와 잘 지내려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포용하는 게 필요해요. 또 나이 들수록 중요한 게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인데요. 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독서를 꼽고 싶습니다. 인생에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의 호기심, 혼자서 경험할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내용을 알게 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러기 위해선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건강이 필수이지요.”
그에게는 독특한 독서 버릇이 있다. 책 앞날개에 독서를 시작한 날짜, 독서를 마친 날짜, 책 구입 장소 등을 메모해놓는 일이다. 나중에 이 메모를 보면 책 내용은 물론 책을 읽게 된 동기, 시공간의 배경에 대한 추억까지 함께 떠올라 즐겁다고 한다. 또 세 종류의 책을 동시다발로 읽어나가는 독서 습관도 있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가 있으신지요.
“없습니다(답변의 속도는 30초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평소에 열심히 살고 아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게 제 신조라고나 할까요. 안 되면 그만이지요. 무엇인가를 바라고, 해야 된다고 마음먹는 순간 괴로워요.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는 순간 족쇄가 되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그렇게 자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 교수와 인터뷰를 하며 ‘인생 경영의 최고 비법은 공부력’이고 “궁극적 공부력은 마음 경영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세 인생 시대, 무한성장 시대인 오늘날이야말로 자기성찰력이 최고의 인생 덕목이자 경쟁력이 아닐까.
‘유필화’란 이름 석 자의 문패가 달린 파란 대문 집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시집 를 다시 펼쳐보았다. 그는 ‘나의 묘비명’이라는 시에서 ‘인간 유필화’를 이렇게 관조한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주 수행을 얘기했고 꾸준히 좌선도 하였지만, 생각만큼 행동이 안 따르는 자신의 한계를 늘 절감했다. 그는 물욕과 애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만심도 결코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장년 이후 눈에 띄게 화를 내는 일이 적어진 것에 대해서는 은근히 흐뭇해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숱한 약점,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수시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태도였다. 그의 이름은 유필화였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얘기하다 보니 3분 만에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투명하고 맑은 느낌이다. 마치 자신이 부른 노래들의 영롱함을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 주인공은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꿈을 먹는 젊은이’ 등의 명곡들로 80년대 초중반을 장식한 포크 가수 남궁옥분이다. KBS가요대상 신인가수상, MBC 10대 가수상 등 가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녀는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방송 MC, 광고 모델,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제 ‘그토록 기다렸다고’ 하는 60을 맞이하며 여전히 행복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현재와 인생관을 들어봤다.
글 김영순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인기 DJ 이종환이 1973년 종로2가에서 문을 연 음악감상실 쉘부르는 무교동에 자리한 세시봉의 뒤를 잇는 1970년대 대표적인 음악감상실로 수많은 포크 가수와 진행자 들을 배출했다. 그 쉘부르 출신의 남궁옥분은 포크로 대변되는 청년 문화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가수였다.
그 시절의 청년다운 건강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60을 맞이하고 있는 남궁옥분이 기자 앞에 있었다. 첫 인상은 섬세하고 차분했다. 그러면서도 호탕하다는 인상을 줬다. 이런 이미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책임져 온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에 가능하기 마련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
“윤회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확신하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보겠지 하죠.”
남궁옥분은 108배를 17년 동안 했다. 정신적 수련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윤회 사상과 108배를 봐도 알겠지만 그녀의 세계관에는 불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그 불교적 영향력은 삶에 대한 달관적인 시선으로도 드러나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새장 안에서 사는 새는 새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도 있죠. 나도 내 영역을 가진 것이니까 행복한 거예요. 누가 나를 보면 답답해 보일지라도, 내 기준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는 것이 내가 후회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는 말은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한다’는 말과 함께 남궁옥분의 생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즉,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마련한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외고집이 있다.
“애초에 돈이나 명예에 관한 욕망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떤 직책도 안 맡았었죠. 그러다가 최백호 오빠가 운영하는 한국음악발전소에서 이사를 맡게 됐어요. 과거에는 그런 일을 안 했지만, 이제는 선배가 후배들에게 큰 우산이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나도 그 역할을 하고 싶어진 거죠.”
한국음악발전소는 최백호가 독립음악인들의 창작 지원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사단법인이다. 그녀가 한국음악발전소에 몸을 싣게 된 것은 최백호에 관한 믿음 때문이었다. 최백호가 하는 일이라면 타협하지 않으면서 공공적인 선의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람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우는 흔치않다.
인터뷰 중 그녀는 물질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크다고 말했다. 유명인이 되고 연예인으로서 방송계 일을 하게 되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무수히 겪어야 했고, 심지어 허술한 인간관계로 인해 아예 2년 동안 방송을 완전히 안 한 시기도 있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키운 게 사람이라고 말할까.
오랜시간 다른 사람의 삶을 읽을 수 있게 된 그녀에게는 산과 사람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많은 사람 안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스승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크는 것이죠. 제가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다져지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을 거예요. 지난 시간 동안 저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없었으면 정신적으로 단단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생각이 저를 지탱시켜주죠. 그래도 사람으로 만들어진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줘요.”
노력한 만큼의 댓가는 확실히 있다고 믿는 그녀
그녀는 자신을 밟고 올라가서는 그 전과는 완전히 바뀐 사람들을 수없이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봤을 때 그들이 걷는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무작정 분노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가다듬는 쪽을 택했다.
“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고 싶으니까요.”
디딤돌의 마음가짐으로 고통을 깨닫고, 고통이 지나가는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맥없이 절망에 빠져 버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가진 인간적 역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힘은 평등과 박애로 무장되어 있는 어떤 의지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그러한 그녀의 박애 정신은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1993년에 돌아가셨어요. 1922년에 태어나셔서 지주 집안도 아니고 가장 평범한 사람의 한 명으로서 대한민국의 가장 힘든 시기를 살다 가셨죠. 근검절약이 몸에 배신, 완전 보살이셨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하셨죠. 김장철이 되면 김장을 엄청나게 해서는 어려운 동네에 갖다 주시곤 했죠.”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50대에도, 60대에도, 70대에도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자임을 포기하고 엄마로만 살다가 돌아가셨죠.”
그녀는 소위 엄마로서의 삶만을 강요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여기서 남궁옥분을 설명하는 단어가 또 떠올랐다. 바로 ‘자유’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그를 단호히 지킴으로써 그녀는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앞서 그녀가 말한 새장이란 표현은 그녀가 추구하는 법도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항상 60이 되기를 기다렸다
남궁옥분은 그녀 스스로가 말하듯이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긍정론은 극단적이고 무조건적인 행복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대신 그녀는 “안 행복하다고 불행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행복은 적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즉, 행복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많느냐 적느냐의 문제라는 것.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 극단의 정의가 아닌 행복의 높낮이를 주시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삶을 관조하면서 보다 침착해진 사람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가수 선배를 만나서 얘기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우리 나이에 싫은 일에 굳이 시간을 갖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코드가 안 맞는 사람과 시작된 일은 뭔가 트러블이 생겨요.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게 있죠.”
남궁옥분은 60 이전이 인연법에 의한 삶이었다면 60 이후부터는 자신이 지난 6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모습이 보이는 출발선이라고 정의했다.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녀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멋지게 살아온 것에 자신을 기특하다고 여기며 바쁘게 살고 있었다. 윈드서핑과 볼링 등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는 김해 공연과 라디오 출연, 봉사활동 등등의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또한 그녀는 미술가로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개인전에 관한 제안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문필가로서의 능력을 살려 책을 집필하려는 계획도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보다 복합적인 프로젝트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석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서 책과 전시, 공연을 합친 이벤트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60을 새로운 출발선이라고 정의한 사람답게 그녀의 머릿속은 창의적 시도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지난 20년 전, 그러니까 40대부터는 정리를 해야 하는 법이죠. 사실 60에 의미를 두고 살아서 그런지 작년부터 뭔가 열매가 맺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60만을 기다렸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니고(웃음). 너무 행복하게 맞아들이고 있어요. 주변의 상황과 함께 할 때 시너지가 생기는 법인데 요즘이 그런 것 같아요.”
사유와 자기 성찰에 전념하다
여전히 무명인 가수 선후배들을 챙기는 남궁옥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의 이유를 “힘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40대부터 60까지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의 보람에 대해 “돈보다 멋진 기억들을 얻었다”고 말한다.
“나에게 만족하는 삶, 그리고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삶이 제가 원하는 삶이에요. 천억 원을 준다 해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싶어요.”
그녀는 죽음을 절대로 알리지 않고 떠날거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녀를 ‘명예롭게 퇴진하는구나’는 정도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발견하는 누군가가 ‘아무 소리 없이 떠났는데 이걸 해놨네?’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삶. 딱 그 정도가 남궁옥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게 가지고 있는 소박한 욕심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한 욕심보다는 크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자기 원칙과 소신과 기준이 있는, 그리고 여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남궁옥분이 머지않아 60을 맞이하는 방법은 그렇게 단단하게 다잡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의 밴드 에는 행복한 것과 안 행복한 것에 기준을 아는 팬들은 그늘을 내어주는 그녀의 수다로 미소가 번졌다.
오랫동안 교육 책임을 맡아오면서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 20대를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학교 성적이나 공부에 열중하는 것보다는, 너희들이 50세쯤 되었을 때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모습의 사회인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문제의식과 삶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권고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더 소중한 과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문제를 갖고 인생의 목표가 확실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성공했고 보람 있는 장년기를 맞이했다. 그러지 못했던 젊은이들은 자기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하기도 하고 삶의 진로나 직업을 바꾸는 어려움과 세월의 낭비에서 오는 불행과 성공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는 후배들에게 꼭 권고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당신이 80세를 앞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부끄럽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스러운 지도자의 모습을 갖고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출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는 충고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확실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50대부터 사회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일과 더불어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런 인생의 목표도 세우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위한 가치의식도 없이 장년기 30년을 다 보낸다면 그것은 인생의 상실이며 사회적으로는 무가치한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실패했다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기대와 존경심까지도 배신당하는 과오를 범한다. 70 평생의 업적과 노고를 부끄럽고 창피스럽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언론에서도 자주 보도되는 때가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유혹과 실망스러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갖출 수 있다면 나는 누구나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의 탑을 쌓아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인생의 탑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필요는 없다. 나는 내 인생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으면 된다. 나이 들면 나에게는 나의 인생의 길과 목표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의 길이 있다. 왜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사회 속에 살면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나이가 60쯤이라고 본다. 그리고 75세쯤까지는 누구나 인간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75세쯤까지 성장한 자세와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하는가 함이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살펴보면 10년 정도는 연장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80대 후반기를 맞이할 때까지는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간은 60에서 80대 후반기까지가 아닐까 하고 기대해본다. 기대가 가능으로 채워질 것으로 믿는다.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렇게 살았고 나 자신도 체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마라톤 경기를 위해서는 90을 목표선으로 삼고 누구나 열심히 달려도 좋다고 믿는다. 또 그것이 100세 시대를 맞는 우리들의 인생설계여서 타당하다고 본다.
가장 먼저 찾아드는 어려움은 건강이다. 많은 사람이 50대쯤부터 관리했다면 유지할 수 있었을 건강을 소홀히 여기거나 방치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는 후회하기도 한다. 또 평소부터 잘 조절했다면 충분히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장·노년기를 질병과 함께 보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80이 넘으면 건강이 최고 제일이라고 해서 건강을 위한 건강이 인생의 전부인 듯이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포기한 건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소년 기간을 병약하게 자랐기 때문에 항상 열등의식과 조심스러움으로 살았다. 50이 되면서 건강의 자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을 찾아왔다. 산책과 수영이 건강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되었고 그때그때의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짤막한 휴식이나 오수시간을 갖는다. 나는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건강은 일을 위해서라는 신념을 갖고 산다. 그래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을 즐길 수 있고 일이 다시 내 건강을 이끌어준다고 믿는다.
건강 이외에도 문제가 있다.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때는 손아래 가족들의 죽음에서 오는 어려움을 담당해야 한다. 그 고통과 불행은 경혐해본 사람이라야 안다. 그런데 80을 넘기면서는 누구나 비슷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녀들의 사업이나 인생의 실패 때문에 그 짐을 분담하는 노년기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때는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의 체험을 거울삼아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한다. 체념할 것은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했으면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운명에 따른다는 것은 나의 노력의 한계 이상의 사건들을 대하는 지혜다.
나는 90의 나이를 넘기면서 누구나 겪는 시련을 받아들였다. 아내가 먼저 갔기 때문에 혼자 남는 어려움도 겪었다. 평생을 함께 일해오던 존경하는 친구들도 다 떠나갔다.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이 그렇게 힘겨운 줄 몰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직 일할 수 있는 건강이 남아 있고 정성스럽게 쌓아올렸던 학문과 인생의 교훈이 유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어 감사히 생각한다. 사람은 아직도 여러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 세월만큼 행복한 때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봉사와 섬김의 열매가 일을 통해 사회와 겨레에까지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간절히 기원해왔던 평생의 소원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에도 나와 함께 같은 일을 해왔던 두 친구의 생애를 잊지 못한다. 우리 셋은 60이 될 때까지는 공부하는 일과 학문적인 일에만 열중해왔다. 그러다가 60을 넘기면서부터는 언제나 사회와 겨레를 위한 대화와 걱정을 나누곤 했다. 그런데 사회와 겨레를 위한 관심과 걱정 때문이었을까? 셋이 다 90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사회가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김태길 교수가 먼저 떠나면서, 우리 세 사람이 50년의 우정을 계속하면서도 셋을 위한 즐거운 시간도 못 가졌지만 이제는 갈 나이가 되었으니까 조용히 서로 마음으로 위해주다가 차례가 오면 가자고 말했다. 이제 다시 정을 쌓았다가 한 사람씩 가게 되면 남은 사람이 힘들지 않게 남은 몇 해를 보내자고 말했다. 찾아올 이별을 슬픔 없이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김 교수가 먼저 떠났다.
몇 해 지난 후에 안병욱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너무 간단했다. “김태길 선생을 보내고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김 선생이 혼자 남을 것 같아”라는 얘기였다 건강이 힘드냐고 물었더니, “왜 그런지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라면서 말을 끊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나까지 가더라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당부다. ‘우리가 못다 한 일의 마무리를 위해 수고해주시겠기에 …’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이 다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그 이상의 인생을 산 사람도 많지 않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두 분을 보내드릴 의무가 있다. 그런데 안 교수를 보내면서 슬프지는 않은데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행복한 눈물이었다.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 교수
올해 97세인 김형석 교수는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저서활동과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 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이다.
결혼생활은 사람의 수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근 황혼이혼이 증가하고 있다.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독신으로 혼자 산다면 계속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보다 행복할까? 나아가 이혼 후 다른 배우자를 만나서 재혼을 하면 짜릿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까? 이혼과 재혼은 여명(餘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을 산 사람이 있고 결혼해서 부부가 함께 살다가 무슨 이유로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부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어쩔 수 없이 독신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별이든 이혼이든 혼자 살다가 다른 배우자를 찾아서 재혼을 하는 사람도 있고 독신을 고집하며 계속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삶이 행복한 삶이었느냐 불행한 삶이었느냐는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논외로 치고 이 중 누가 가장 오래 살았을까? 궁금한 사실에 대한 통계자료가 있다.
1921년 스탠포드대학의 심리학 교수 루이스 터먼 박사는 1910년 전후에 태어난 소년소녀 1500명을 선발해 무려 80년 동안(터먼 박사의 후배 연구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이들의 결혼과 이혼에 관련한 수명을 분석하였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달랐다고 한다.
결혼과 수명 사이의 관계를 살펴봤을 때 남자의 경우, 결혼하고 부부가 계속 같이 산 사람이 가장 오래 살았고 다음으로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그 뒤를 이었다. 다음으로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사람이 오래 살았고 맨 마지막이 이혼 후 독신으로 계속 산 사람이었다.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해로한 사람이 가장 오래 살았고 다음으로 이혼 뒤 재혼하지 않고 혼자 독신으로 계속 산 여자가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산 사람과 비슷했다. 다음으로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그 뒤를 이었고 가장 수명이 짧은 여성은 이혼 후 재혼한 여성이었다.
결혼 후 혼자가 된 홀아비는 일찍 죽지만 이혼하였거나 과부로 살아가는 여자는 오히려 재혼한 여자보다 오래 살았다는 통계는 일반인의 상식을 뒤집는 통계다.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 건강보조제를 먹는 것처럼 효과가 있다면 남녀에게 공평해야 할 텐데 남자에게는 적용되고 여자에게 적용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부부가 함께 살면 어떤 점이 좋을까? 우선 의학적인 면만으로 살펴보면 긴급한 사항이 닥칠 때 대신 119를 불러주고 아플 때 옆에서 간호해주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환자가 되어 말을 제대로 못할 때 의료진에게 병의 진행 상태를 대신 말해줄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배우자는 스트레스 완충 역할을 한다. 직장에서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나 아이들이 말썽을 부릴 때 기타 사건사고가 생겼을 때도 배우자에게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공동으로 해결책을 강구하는 정신적 원군이 되는 것은 분명 결혼생활이 수명 연장에 좋은 점이다.
부부가 함께 살면 어떤 점이 불편할까? 서로 지향하는 인생관이 달라서 사사건건 트집만 잡고 바가지만 긁는 배우자라면 오히려 결혼생활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수명이 단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갓 결혼한 부부라면 남자는 원래 이런 동물인가? 여자는 본래 이런 성격인가? 하며 자신을 상대에게 맞추려는 노력을 한다. 더구나 젊을 때는 유연성이 높아 자신을 변화시키는 범위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화성남자와 금성여자가 결혼해도 잘 맞추고 산다.
하지만 이미 부부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전 남편 전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의 행동이 몸속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재혼한 지금의 상대와 비교를 하게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강하게 반발한다. 재혼이란 평탄한 결혼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양육 문제나 재산분할 문제로 시끄러울 확률이 높다.
방송에서 보도되는 사건사고를 보면 재혼 후 새롭게 구성된 가족 내에서 성폭력도 일어나고 계모나 계부의 방임이나 유기 등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발생한다. 결국 행복하려고 한 재혼이 파멸에 이르고 만 것이다.
실제 이웃이나 친척, 친구들을 봐도 행복을 찾아 단행한 이혼이 해피엔드로 끝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한쪽은 행복해도 다른 한쪽은 이혼한 것을 후회한다. 여자 혼자서 또는 남자 혼자서 살아가기가 뚜렷한 독신주의의 인생관이 있다 해도 녹녹하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찾아 결혼이나 재혼을 적극 권장하지만 재혼한 부부가 또다시 갈라설 확률은 높고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이혼을 하고 팔자를 고치면 노다지를 캘 것 같은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생은 두 번 살 수 없다. 선배들이 살아온 삶의 추적같은 통계자료를 보면서 처신에 신중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 외도란 정도의 차원을 높여주는 디딤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도를 걷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외도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성을 넘어서는 외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르지 않은 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잘못된 길임을 깨닫게 되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평소 해보지 않던 일을 해봄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들이 얼마나 내가 잘할 수 있고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간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 중 하나가 ‘외도’ 아닐까? 그것은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제목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처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동경 같은 것이 항상 마음속에 내재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이브와 아담처럼 삶의 곳곳에서 인간은 그런 유혹을 받으면서 사는 존재인 것 같다.
필자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인생관, 직업관 그리고 결혼관이다. 필자에게는 필자만의 그릿(Grit)이 있다. 그중에서 결혼관을 소개하면, 선택을 할 때 최대한 신중을 기하되 한 번 결혼하면 그 결혼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부족한 면이 있다면 좋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러한 삶은 결코 쉽지 않지만 결혼할 때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사랑하고 노력하며 살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면 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사르트르처럼 계약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혼할 때 약속한 것들을 서로 이행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졸혼이나 이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사랑과 용서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은 실수를 행하기 마련이고 신은 이를 용서한다”는 말이 있다. 한정된 지능을 지닌 인간이 무한한 변수가 작용하는 이 세상을 사는 과정에서 한 번쯤 실수나 외도는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성당에서는 고백성사를 통해 신부님이 신자들의 실수나 지은 죄까지도 용서를 해주는 것 같다. 물론 보속이라는 속죄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따르기는 하지만. 따라서 배우자가 외도나 실수를 했을 때도 한 번쯤은 용서해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수는 한 번으로 끝나야지 두 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
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혼한 사람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그만한 사정이 있어 어찌할 수 없이 선택한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대동소이한 삶을 살고 있기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노력하면 문제는 극복이 된다고 본다.
우리는 정도와 원리원칙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외도를 했을 때도 한 번쯤은 정도를 걷기 위한 디딤돌로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필자의 아내는 필자가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마치 단 한 번의 실수나 외도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볼 게 분명하다. 이제 필자의 아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다소 그런 편견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서 한 번쯤의 외도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도가 아닌 일상에서의 탈출, 보다 확실한 정도를 걷기 위한 한 번쯤의 일탈이라고 해두면 어떨까?
내가 처음 미국을 방문한 것은 1961년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교수들을 비롯한 지성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말 중의 하나는 ‘인생은 60부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나이가 되면 인생은 끝나는 때라고 흔히 말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은 인생의 전성기가 60부터라는 관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즐기기 위해 산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인생은 40부터라는 생각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값있고 보람 있게 살기 원한다면 60부터라는 판단이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즐기기 위해 사는 사람보다는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회적 의미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60은 100세 시대를 바라볼 때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60이 되면 인간적 성장과 성숙의 완숙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고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을 갖추는 연령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자기평가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정신 및 인간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 지식과 사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성 전반에 걸친 생산적이며 창의적인 노력과 사회 기여가 가능하다고 본다. 가능한 것만이 아니다. 100세 시대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내가 76세 때의 일이다. 한 후배 교수가 회갑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내 친구가 “그 친구 철도 안 들었는데 회갑부터 된다”라며 웃었다. 자기도 그랬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때였다. 내 나이를 물은 90대 초반의 선배 교수가 “좋은 나이로구먼…” 하며 부러워하던 얘기를 지금도 기억에 떠올리곤 한다. 60에서 75세쯤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사고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75세쯤까지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성장의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할 수 있는가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85 내지 87세까지는 연장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성장을 포기하는 편이다. 40대라고 해도 공부와 일을 포기한 사람은 녹슨 기계와 같아서 사회적 기여를 못한다. 그러나 70대가 되어서도 사회적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은 젊고 활기찬 생애를 이어갈 수 있다.
언제까지 연장될 수 있는가. 내 주변 친구들은 85세까지는 사회가 요청할 수 있을 정도로 봉사하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가깝고 존경스러운 친구들 중 김수환 추기경, 김태길 교수, 안병욱 선생 모두가 그랬다. 90 가까이까지 일하기도 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본다면 100세 시대의 후반기는 50대부터 시작하게 되고 50대가 되면 내가 80대가 되었을 때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되며 동료들과 사회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묻고 대답을 얻어가는 삶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실해야 한다. 나 자신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을 때를 회고하면서 스스로 후회스러운 반성을 해보는 때가 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20대 젊은이들에게, ‘내가 50쯤 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반드시 찾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하지 못한 잘못이다.
20대에 문제의식을 갖고 50세를 맞이하는 사람은 대부분 보람과 성공의 기반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인생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인생의 전반기를 굳건히 다지지 못한 사람은 후반기에 가서도 그 빈자리를 메우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50대에는 80대 후반기까지의 장래를 계획하고 바르게 정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인생관의 가장 큰 과제는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일이다. 가치관의 핵심이 되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면 80대가 채워질 때까지는 마음 놓고 자신 있게 인생의 마라톤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결론이 된다. 나는 80대가 되면서 이제는 쉬고 싶고 쉬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그 휴식의 1년은 일하고 공부하는 1년보다도 더 지치고 무의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작해서 지금까지 17, 18년 동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계속해보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거나 객관적 평가를 원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의 삶의 의미와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누군가가 90 고개를 넘긴 후에는 어떠했느냐고 물으면 객관적인 권고를 할 자신이 없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는 개인적 소감을 피력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 같다. 내 주변의 90대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90대가 되면 자신의 신체적 건강을 뜻하는 대로 지탱할 수가 없다. 자연히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 부부 중의 한쪽은 떠나간다. 자녀들에게 의탁하는 것도 옛날과는 다르다. 여성들은 90대가 되어도 모성애의 대가라고 할까, 갈 곳이 있으나 남성들은 홀로 남는 것이 보통이다. 그 나이가 되면 친구들도 떠나간다. 그때 찾아드는 남성적 고독과 인간적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지금 나에게 하는 가장 적절한 문안인사가 있다면 “사시는 것이 많이 힘드시지요?”라는 말이다. 90대 후반은 더욱 그렇다. 그러한 부담을 극복할 수 있어야 90대에도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그래도 아직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숨기지 않고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짐은 무겁지만, 그래도 일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버거운 짐이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고생이라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겠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임을 깨닫는 사람이 최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1920년생. 안병욱 교수(숭실대), 김태길 교수(서울대)와 함께 한국의 1세대 철학자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현재도 활발한 저술 및 강연을 통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과 귀감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석학이다. 특히 100세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사랑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성찰과 깨달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자서전은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훌륭한 자기계발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때론 가슴을 적시는 소설이 되기도 하고, 희로애락이 한껏 버무려진 희곡이 되기도 한다. ‘내 이야기’ 즉, 직접 겪은 일을 자기 감정을 토대로 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내가 직접 쓰는 게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자서전을 만들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한 이들을 위한 방법을 정리했다.
민경호 세계로미디어 대표· 저자
>>STEP 1 준비 단계
자서전에는 소소한 일상부터 가치관이나 사상, 인생관, 국가적·사회적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 등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일반적으로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 목차를 구성한다. 오래전부터 써 온 다이어리 등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억력’과의 싸움이 된다. 과거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실행해 가며 토막글을 쓰거나 메모해 두는 것이 좋다.
◇ 과거를 떠올리는 방법
➊ 연대별 주요 사회 사건과 내 기억을 연관 짓기
10년 단위로 그 시대의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다. 각 사건이 일어날 당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일이 생겼는지 떠올려 보자. 큼지막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시간 순서대로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해 나갈 수 있다.
➋ 편지·사진 모으기& 추억의 장소 찾아가기
막연히 떠올리는 것보다 편지·사진을 보거나 고향 집, 학교, 직장 등을 다녀오면 새로운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직접 찾아가기 어렵다면 예전에 살던 동네나 이사 다닌 집, 사무실 등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방법이다.
➌ 질문지 활용하기
인터뷰를 하듯 세세하게 질문지를 만들어 시기별로 나누어 답을 적어 본다. 아동기·청소년기·청년기·결혼생활기·중년기·노년기 등으로 분류하고, 몇 가지 키워드를 활용해 질문을 이어간다. (예: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학창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나 선생님은? 첫 직장상사와 관계는? 신혼여행은? 중년기 공휴일에는 무엇을 했는가? 등등)
>>STEP 2 글감 만들기&구성하기
기억을 떠올리며 메모를 하거나 토막글을 써두었다면, 소주제를 정하고 여러 개의 토막글을 엮어서 서술해 보자. 소주제를 정하기 어렵다면 유명인의 자서전 몇 권을 읽어 보고 참고하는 것도 좋다. 다른 책의 목차나 구성을 활용해 글감을 마련하고, 얼추 윤곽이 잡히면 원하는 대로 재구성해 보는 것도 괜찮다.
◇ 자서전 내용을 독특하게 구성하는 방법
➊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 이름을 목차에 활용: 피터 드러커 자서전의 예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 목차를 보면 아주 독특하다. ‘할머니-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준유쾌한 사람’, ‘엘자와 소피-교육의 길을 제시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 ‘폴라니 가-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흥미로운 가족’ 등 자신에게 영향을 준 주변 인물 또는 유명인의 이름을 소주제로 해 자서전을 꾸몄다.
➋ 시간 순서가 아닌 중요한 사건 순으로: 러셀 베이커 자서전의 예
미국 언론인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흥미로운 구성이 눈에 띈다. 어린 시절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하는 일반 자서전과 다르게 그는 맨 처음 ‘제1장 어머니의 타임머신’이라는 소주제로 문을 연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와의 대화를 서두에 넣는 등 기억에 남는 사건을 먼저 이야기하고 당시 관련된 에피소드를 풀어 나가는 형식이다.
>>STEP 3 글다듬기&견적 의뢰
그동안 써 놓은 글감을 모아 자서전의 두께나 형태를 가늠해야 한다. 완성도를 높이려면 글쓰기나 스토리텔링 강좌 등을 참고해 글을 세련되게 다듬는다. 가능하다면 간단한 문법을 익혀 틀린 문장이나 단어는 없는지 확인한다. 인터넷으로 ‘맞춤법 검사’ 프로그램을 찾아 활용해 보는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자료가 정리됐다면 출판사 등에 자서전의 페이지 수나 크기, 레이아웃에 따른 견적을 의뢰한다.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해 검사로 활동하며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법무연수원 원장 등을 거쳐 10년 전부터는 변호사로 살고 있는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정진규(鄭鎭圭·69) 대표변호사. 탄탄대로의 그의 삶에는 분명 나름의 비법이 있을 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노라고 말하는 정 변호사에게 은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준 책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인터뷰에 앞서, 추천 도서 선정에 신중함을 잃지 않았던 그다. 한때 낭만을 가득 품고 읽었던 러시아 문학, 나폴레옹의 전기나 헬렌 켈러의 수필 등 많은 책이 그의 생각에 머물렀다. 학창시절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다 읽을 정도로 독서에 심취했던 정 변호사는 그때 읽었던 책들이 삶의 자양분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오랜 고민 끝에 선정한 책은 이다. 책에 대한 기억은 50여 년 전 처음 읽었던 그때가 전부라고 했다. 반세기 만에 꺼내든 책이지만 머리보다는 가슴에 새겼기에 그 메시지만큼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를 코앞에 두고 목표는 서울대 법대였는데 성적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모의고사를 보고 담임선생님이 어머니께 지금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은 어림도 없다고 하셨죠.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던 그때, 우연히 을 발견했어요. 마력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정말 순식간에 읽어냈죠. 사실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읽지 않았지만 그때의 감정과 메시지는 매사 잊지 않고 지내왔어요.”
정확한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강한 신념과 열망으로 최선을 다하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이 책은 정 변호사의 인생관과도 흡사했다. 본래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행동에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그였다. 책은 수줍음이 많았던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고, 그 자신감은 곧 행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념은 죽은 것이다’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신념에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 더해지자 그의 인생은 더욱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나아갔다.
“잠재하고 있던 능력들이 자신감을 통해 발현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이 책을 권하고 싶어요. 사람이 사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죠. 좋은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는 것과 매사에 의심하고 회의적인 자세로 사는 것인데, 기왕이면 좋은 것을 취하고 장점을 부각할 줄 아는 사람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꼭 무언가를 이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삶에 만족도 주고, 행복이나 가치 추구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또, 잘 안 되더라도 그 결과를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생기고, 과정이 즐겁게 남겠죠.”
마음속 그림대로 끌려온다
열망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신념의 마력. 그의 신념은 정말로 마력을 발휘했을까? 정 변호사가 열망해온 삶이 궁금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잖아요. 마음먹기 따라 달라지고, 믿는 만큼 이뤄낼 수 있어요. 명예롭고 정의로운 검사가 되고자 마음먹었었죠. 그게 목표였고, 국가와 사회, 이웃에 보탬이 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질 테니 그것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보자. 그렇게 검사로서는 서울 고검장, 법무연수원장까지 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한 셈이죠. 그 뒤로는 총장이나 장관이 돼야 하는데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해온 덕분에 만족스러운 지난날을 회상하는 정 변호사에게도 위기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날도 강한 신념과 노력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1980년대 말, 마산지방검찰청 충무지청장으로 있었는데 대우조선에서 1만여 명에 달하는 노조가 열흘 넘게 파업하는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죠. 그맘때 울산에서 현대 파업 사태가 난항을 겪어 분위기는 절망적이었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죠. 사용자와 노조의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분명히 해결되리라는 강한 신념으로 최선을 다했어요. 당시 공권력이 1만4000여 명 투입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실제는 경찰이 3000여 명밖에 없었는데도 파업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죠. 그렇게 굉장히 크다고 여겨지는 문제에도 해결의 길은 있기 마련이거든요. 어려움에 닥치면 좌절하거나 꺾이지 말고 ‘어! 왔어?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부딪혀보고 열심히 방법을 찾다 보면 분명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요.”
열망하는 삶, 다채로운 삶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그는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들이 무척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열망하는 인생 이모작은 어떤 모습일까?
“실은 검사직을 그만두고 학계로 가거나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인연으로 변호사를 하게 됐죠. 외국 기업으로부터 특허침해소송을 받은 우리 기업을 구제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일들이 참 보람 있더라고요. 기업이나 개인을 도우면 사회에 보탬이 되고 제게도 보람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그렇게 지금은 법인의 대표 변호사로서 주어진 일에 전념해야겠고, 후배들을 잘 격려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싶어요. 일로는 그렇고 궁극적으로는 다채로운 삶을 사는 것이 목표예요. 도둑질이나 남 해치는 것 빼고는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아왔죠. 가령 취미 생활을 해도 대충 하는 법이 없었어요. 바둑도 아마 5~6단 정도 될 때까지 했고, 테니스도 테니스 전문 잡지에 선수로 나갈 만큼 치열하게 했죠. 요즘은 클라리넷에 관심이 있는데 일이 바빠서 시작은 못 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에게선 삶의 만족과 행복이 느껴졌다. 너그러운 미소에서는 인생의 즐거움이 묻어났고, 반짝이는 눈빛에는 강한 자신감이 맺혀 있었다. ‘열망, 노력, 자신감’ 이 세 가지가 선순환하며 행복한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듯했다.
“빌 게이츠가 매일 뭘 하는지 아세요? 그도 신념의 마력을 아는 사람 같아요. 매일 아침 주문처럼 외우는 게 ‘아브라카다브라(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나는 할 수 있어’ 이 세 가지라고 해요. 그처럼 기왕이면 하는 일에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자신감을 느끼는 것이 긍정적 영향을 주죠. 무언가를 간절히 희망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그 성공이 다시 자신감으로 축적되죠. 그렇게 쌓인 자신감이 제 삶의 활력이자 원동력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