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필자의 별명은 스테미나 여사였다. 다들 춥다고 웅크릴 때 필자는 추위를 안 탔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거나 몇 날 며칠 여행을 가도 피곤하다거나 지칠 줄을 모르니 친구들이 부럽다며 그렇게 불러주었다. 그래서 필자도 필자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으며 살았다. 엄마 아버지와 윗대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혈압이 높았으니 조심하라는 말씀을 항상 들었지만, 집안 내력인 고혈압만 조심하면 다른 건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종합 건강검진을 받고 놀랐다. 걱정해야 할 부분이 세 개쯤 나왔는데 그중에 혈당이 있다. 혈당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거라 당황스러웠다. 몇 년 전까진 항상 손가락 끝을 찔러 피를 내어 검사해도 정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준치보다 높게 나왔고 당뇨라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필자가 당뇨라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겁이 났다.
당뇨라면 발가락이 썩어 잘라내야 하고 눈도 멀게 한다는 무서운 질병이 아닌가? 주위 사람에게 여기저기 연락하여 우는소리를 했더니 필자 수치쯤 되는 당뇨는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좋아진다고 격려를 해주었다.
그래서 가까운 산에도 틈나는 대로 오르고 걷기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 그러나 식이요법은 그리 만만치 않다. 워낙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당뇨로 인한 증상이 보이지 않으니 음식 조절을 잘할 수가 없다.먹고 싶은 대로 먹으며 막연히 그냥 좋아져서 혈당수치가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바람을 가졌다.
어떤 드라마에서 혈당이 높은 남편에게 아내가 음식을 제한하는 걸 보았다. 과일도 한두 쪽만 주고 당근 등 생채소만 먹으라고 한다. 과일이라면 수박도 반 통 정도는 먹어야 하고 포도나 복숭아도 한두 개로는 안 되는 필자의 식성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광경이다. 저 사람은 필자보다 훨씬 수치가 높은 사람일 거라는 자기합리화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 걱정스러움을 없앨 수가 없었다.
운동과 식이요법만으로 해도 될는지 아니면 약 처방을 받아야 할지 의사 선생님과 상의해야 하는데 몹시 나쁘다는 말을 들을까 봐 병원 가기가 겁이 났다. 인터넷 쇼핑을 하던 중 혈당체크기 광고가 있어서 주문했다. 일단 집에서 체크해 보기로 한 것인데 받아보니 설명서가 있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 대강 그림에 나와 있는 대로 맞춰서 손가락 끝을 찔러 피를 내기는 했는데 혈당 계에 에러라고 떴다.
기계치라서 조립을 잘못한 걸까? 애꿎은 피만 나오게 하고 성공을 못 했다.
다시 한 번 시도해 볼까 했지만, 손끝도 좀 아픈 것 같고 또 찌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픈 건 아닌데 병원에서 간호사가 찔러 줄 때와 내가 찌르는 건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
병원에 가서 상담하니 무슨 큰일이나 난 듯 검사하라는 게 많았다. 뇨 교육도 받았고 하루에 먹어야 할 음식량도 알려주었는데 그렇게는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직 심각성을 못 느끼나 보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는 안과로 연계해 몇십 만 원 드는 검사도 받았다. 필수 단계라 한다. 그후 계속 약 처방을 받으며 살고 있다. 절이 잘 되고 있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는 또 음식 조절은 잘 안 하게 되었다.
식도락은 빼놓을 수 없는 취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아픈 곳은 없지만, 아직도 스테미너 여사라는 별명을 들어도 될는지 모르겠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감성적인 카페와 맛집, 편집숍 등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동네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이곳을 ‘망리단길’(이태원의 경리단길 초창기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부른다. 그 소문만 듣고 찾아가 인근 홍대거리나 가로수길의 비주얼을 기대했다면 조금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망원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망원시장’의 아우라가 무척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걷다 보면 느낄 수 있다. 그 이중적인 분위기가 바로 망원동의 매력이라는 것을.
‘망리단길’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말하기는 모호하다. 그러나 어디서 시작해도 좋고, 어떻게 가도 망원시장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어느 가게를 가려고 정한 것이 아니라면 망원역 2번 출구로 나와 망원시장을 중심으로 지그재그로 거닐어볼 것을 추천한다. 주택가와 시장 사이 골목마다 보석 같은 공간이 숨어 있다.
사실 망원동 마니아들은 자신들의 단골집이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 수수하고 한적했던 몇몇 가게가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관광지처럼 변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상인들을 만나면 이곳이 ‘망리단길’로 유명해지는 것이 싫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 욕심 없이 장사하고 편안하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를 낸 것인데, 뜨내기손님들이 몰려와 일상의 여유도 사라지고 단골들도 떠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이들이다. 언론 매체에 소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거나, 그 가게에 두세 번 방문해 충분히 어떤 곳이라는 것을 느껴야지만 취재를 허락한다는 곳도 있었다. 잠시 카메라를 끄고 만난 한 상인은 “처음 이곳에서 느꼈던 매력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며, “월세도 많이 올라 조만간 다른 지역으로 가게를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망원동 사람들의 바람처럼 그곳만의 소소하고 느릿한 매력을 해치지 않는 좋은 방법으로 ‘혼자, 또는 둘이서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혼자 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편집숍을 둘러보는 이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그곳이 주는 즐거움은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함께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커피가게 동경 망원동 410-1 지하
드립커피를 주문하면 취향을 물어 그에 맞게 커피를 내려준다.
황인호의 원당수제고로케 망원동 486-39
망원시장 입구에 있는 고로케 맛집. 1000~1500원 선.
카페부부 망원동 376-15
노부부가 30년 동안 살던 주택을 젊은 디자이너 부부가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 커피, 디저트, 간단한 식사 주문이 가능하다.
디자이너 편집샵 RHOO 망원동 375-1
감각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하는 곳. 가게 한쪽에 있는 테이블 공간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장난감가게 마마미투 망원동 404-38
키덜트를 겨냥한 인형, 피규어, 캐릭터 문구 용품 등을 판매한다.인터넷 쇼핑몰(www.mamametoo.com)도 함께 운영.
만일 책방 망원동 399-46
대형 서점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아늑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 책방이다. 가게는 작지만 커다란 테이블이 인상적이다.
에그머랭&쇼룸 더 팩토리 망원동 376-14
핸드메이드 모자, 가방, 신발, 매니큐어 등을 구경하면서 음료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소쿠리 망원1동 414-16
‘작고 느린 상점’이라는 콘셉트로 운영하는 곳으로, ‘소쿠리’라는 이름처럼 투박하고 정겨운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옛날 시계나 접시, 물병 등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들이 눈에 띈다.
노력하는 블로거까페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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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와 카페 운영과 각종 SNS 활동에 집중하는 평화사랑 성경애의 ‘‘미니 자서전’’을 적어본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건강 때문에 일찍 퇴직하면서 시작한 사업에 실패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일찍 철이 들어 동네 아이들 과외선생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하게 됐고 대학 시절까지 모두 자신의 힘으로 학비를다 해결한 의지의 한국인이 필자다.
처음에 블로그 만들 때 블로그 이름이 ‘평화사랑 전 과목 블로그’’였다. 초중등학생 전 과목 과외 선생 노릇을 했던 것을 기억해 그렇게 지었다.
그 와중에도 노래는 좋아하여 숭의여고 시절 합창단 활동을 하였다. 아침에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일찍 가고 점심은 미리 알아서 먹고 점심시간 시작 5분안에 음악실로 모여서 연습했던 갓이 여고 시절 기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다시 짓기 전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합창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준 공연이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때는 얼마나 귀한 시간, 아름다운 시절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 안타깝다.
졸업 후 학자금 모아서 숭의여전 보육과와 경기대행정학과를 나오고 나니 이미 나이가 들어서 결혼하게 되었다. 필자는 사실 서울예대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성삼문 집안에 딴따라가 웬 말이냐고 반대하여 포기했다. 난 연예인 끼가 있다. 그때 우기고 갈 것을 하는 맘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마추어 영화 전문가분들과 모이고 있고, 워낙 활동적인 성격이라 동네 통장 10년을 하고 아파트부녀회장도 지내는 등 주변을 돌아보는 봉사활동 열심히 하고 있다.
결혼 후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기업체 주부모니터를 하게 되었다. 기업체는 기혼 여성직원이 있지만 그들에게서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의견도 있어 일반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물건에 대한 의견을 모니터링 하는 데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확인해 보니 기업체에서 발대식하고 위촉장을 받은 것만 33개 정도 되었다. 임기가 1년에서 짧아도 참여한 세월이 있어 위촉장이 꽤 쌓인 것이다. 거기에다 활동우수상, 수상표창장까지 상당히 많아서 거실 가득히 깔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 맘이 든다.
필자는 열성적으로 살아왔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는 달에는 뭔가 무료교육을 받는 것 좋아하고 비용이 들어가도 발전적인 항목이 있으면 배우기를 즐긴다. 네이버 밴드와 네이버 카페, 각종 카톡방 활동과 오프라인 모임까지 이웃이나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분들과 소통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1 년 이상 네이버 자회사 시니어 기업인 에버영코리아라는 곳에서 밤 근무한 경험도 있다. 밤에 근무하던 어느 날 칸칸이 처진 내 모니터와 키보드와 마우스밖에 없는 그곳에서 필자는 빅뱅의 ‘루저’를 들으면서 눈물이 쭈르륵 흘렀다. 루저의 뜻은 loser와 user의 합성어. 무엇을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 즉, 어찌할 바를 모르는 초보자 내지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루저’의 가사는 이렇다. ‘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솔직히 세상과 난/어울린 적 없어/홀로였던 내겐/사랑 따윈 벌써/잊혀진 지 오래/저 시간 속에/더 이상은 못 듣겠어/희망찬 사랑 노래/너나 나나/그저 길들여진 대로/각본 속에 놀아나는/슬픈 삐에로/난 멀리 와버렸어/I’M COMING HOME/이제 다시 돌아갈래/어릴 적 제자리로/언제부턴가 난/하늘보다 땅을/더 바라보게 돼/숨쉬기조차 힘겨워/손을 뻗지만/그 누구도/날 잡아 주질 않네 I’M A//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반복되는/여자들과의 내 실수/하룻밤을 사랑하고/해 뜨면 싫증/책임지지 못할/나의 이기적인 기쁨/하나 땜에 모든 것이/망가져 버린 지금/멈출 줄 모르던/나의 위험한 질주//이젠 아무런 감흥도/재미도 없는 기분/나 벼랑 끝에/혼자 있네/I’M GOING HOME/나 다시 돌아갈래/예전의 제자리로/언제부턴가 난/사람들의 시선을/두려워만 해/우는 것조차 지겨워/웃어보지만/그 아무도 날/알아주질 않네 /I’M A/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저 하늘을/원망하지 난/가끔 내려놓고 싶어져/WANT TO SAY GOOD BYE/이 길의 끝에/방황이 끝나면/부디 후회 없는 채로/두 눈 감을 수 있길/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LOSER/I’M A LOSER/I’M A LOSER/I’M A LOSER
다시 젊은 시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없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면 공부할 집안 형편이 아니어서 대충 포기한 공부를 열심히 해보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지 모른다.
요즘은 동영상 프로그램을 인터넷에 접목하기 위해 배우러 다니고 있다. 노력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는 필자는 자신도 궁금하고 기대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칠 때도 있다. 그러나 우울하게 다운되면 한도 없는 게 인생이다. 키도 작고 몸무게는 표준보다 많이 나가 여러 면에서 부족한 사람인데 루저가 안되려고 노력하다 여기까지 왔다.
자식이 낳아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어떤 제츠추어로도 표한 적이 없는데 필자 부부 맘대로 낳았기에 그 아이들에게 힘이 못될망정 짐은 되기 싫다. 그래서 열심히 산다. 이유는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오늘을 더 열성적으로 살아가려고 다시 마음을 다져 잡는다. 그러니 다가올 인생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플랜트커피에서 커핑수업
M.I커피: 라떼아트
2급바리스타: J클래스학원
1급바리스타: 훈스랩아카데미
커피지도사2급+홈카페마스타 (브루잉마스타2급) : CBS문화센터
커피지도사1급 : 서울바리스타학원
강사/커피지도사 워크숍 수료
그외 루소랩이나 어라운지, 커피미업 김동완씨에 수업받은 경력이 있고 계속 커피를 배우는 중이다. 언제가 장점을 따서 커피아카데미카페를 만들고 싶다.
한국커피협회 1,2급 커피지도사/바리스타1,2급 취득
유럽 바리스타
SCAE(Speciality Coffee Association of Europe)자격증
SCAE Foundation /SCAEIntermediate/SCAE Professional
아이로봇 룸바 서포터즈(로봇청소기),
CJ홈쇼핑심미안(생활팀 2회, 디지털팀1회, 뷰티팀 1회)
: 참고로 한 번 활동하기도 매우 어려운 전설의 모니터 활동
중앙일보 리포터 3번 연임 후 명예리포터 활동, 중앙일보 명예통신원 회장
AVING코리아 객원기자, 구로소식지 기자 , 구로구인터넷방송 명예기자
uasis웹진기고, 아줌마닷컴 1기 기자단장 및 기사제공이나 아이디어 제공
다양한 기업 및 관공서의 패널, 서포터즈, 모니터, 주부모니터와 리포터:한국전력 패널, 국민보건보험공단, 서울시 모니터, 서울시 블로거, 도시철도공사 등
대한민국영화대상 일반심사위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 파트너즈 시니어 리더 4기
은퇴 후 생산적인 인터넷활용 강사: 블로그와 SNS
네이버 자회사 에버영코리아 업무 경험, 2014 2015년 서울 카페쇼 홍보대사
LG 서포터즈, 삼성 카메라 WB5000 체험단, 삼성하우젠 제로에어컨 체험단
프레소 스마트로스터기 체험단, 가찌야클래식 커피머신 체험단,어라운지서포터즈
세일즈커피 서포터즈, 마일커피로스터스 온라인 서포터즈,
웰크론 온리빙 마케팅팀서 활동
이투데이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단
홈앤톤즈(삼화페인트 프리미엄급 페인트) 마케팅팀
프레소 서포터즈1기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모니터
쇼핑하는 아내를 따라다니는 것은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의 스트레스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중국 어느 백화점에서 쇼핑광 애인을 따라다니던 청년이 극도의 스트레스로 자살한 일이 있었다.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든 채로 몇 시간 동안 따라다니다가 난간에서 몸을 날린 사건이었다.
필자는 결혼 초부터 아내와 쇼핑을 나갔다가 온전한 정신으로 집에 들어온 기억이 거의 없다. 쇼핑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성질이 대폭발해서 심지어 따로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뭔가 사려고 마음먹고 백화점이나 할인점에 가면 그 제품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서 오면 된다. 그런데 아내는 곧바로 필요한 제품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엉뚱한 것을 보고 다닌다. 심지어 필자 와이셔츠를 사러 가자고 해 놓고 여자 옷 코너를 다 돌고 가전제품, 가구, 화장품 코너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나서 마지막에 와이셔츠매장으로 간다. 와이셔츠도 행사상품 매대에서 한참 동안 고른다.
그나마 저렴한 제품은 이 정도의 과정으로 구입하나 조금 가격이 나가는 제품을 아내가 사는 과정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일단 이 경우도 목적한 제품이 있는 층으로 곧바로 가지 않는다. 여기저기 상관없어 보이는 제품을 둘러 본 후에 해당 제품을 보러 간다. 그리고는 꼼꼼하게 살핀 후 그냥 집으로 온다. 집에 와서 여러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서 동일 제품의 가격을 비교한다. 그러고 나서 백화점보다 조금이라도 저렴한 사이트에서 제품을 구입한다.
아내의 이런 쇼핑 행태는 필자를 극도의 스트레스로 몰아간다. 특히 이해 가지 않는 것은 백화점이나 할인점을 돌아다닌 시간과 교통비 등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바로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면 시간도 줄이고 교통비도 절약하는 효과가 있을 텐데 시간, 돈 낭비하면서 굳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내는 이상하게도 쇼핑갈 때마다 필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과 마지막에는 서로 얼굴을 붉힌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매번 쇼핑을 같이 가자고 한다. 그럴 때마다 따라나서는 필자가 더 이상한 인간임이 틀림없다.
몇 년 전 그날도 아내가 옷 하나를 살 게 있다면서 쇼핑을 가자고 했다. 할인점 하나를 통째로 다 돌고 나서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면서 다른 할인점을 가자고 할 때부터 필자는 이미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다른 할인점도 여기저기 다 구경하고 나서 옷 코너로 가더니 통로에 놓인 매대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면서 감정을 자제하고 있던 필자는 그날 드디어 득도[得道]하게 되었다. 할인점에서 옷 하나 고르는 데도 저렇게 신중하고 따지고 하는 여자. 그러고 보니 그동안 쇼핑 나와서 다툰 것이 모두 아내의 그런 신중함과 꼼꼼함 때문이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심장에서 ‘징’하는 울림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평생 반려자로 필자를 택하려고 했을 때는 얼마나 신중에, 신중을 기했을까. 그날 이후 아내와 쇼핑하러 다니는 것이 더는 필자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았다.
‘도랑 치고 가재 잡다'는 속담이 있다. 한 가지 일하다 보면 곁들여 또 다른 좋은 일이 겹쳐진다는 의미다. 늦깎이로 시작한 사진 취미가 바로 그런 예가 되었다. 60세에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그 사진취미가 바탕이 되어서 KBS 1TV ‘아침마당’ 출연을 비롯한 방송활동, 강사, 기자, 저자로 인생이 막을 의미 있고 재미있게 보내고 있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용돈도 벌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가를 어떻게 쓸모가 있게 보내느냐를 고민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상황은 많아지게 마련이다. 퇴직하면 매일이 일요일인 셈이다. 직장을 다닐 땐 대부분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게 되고 동료나 선후배, 관련 기관이나 거래처의 고객과 어울리며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낸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난 후에는 그런 인간관계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그리고 일상이 따분해진다.
수명은 날로 늘어난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늘어난다. 머지않아 120세에 이른다고 예측한다. 은퇴 후 보내야 할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의 발표로는 60세에 은퇴하여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였을 때도 하루 여가가 11시간으로 따져보면 잔여 시간이 8만 시간에 달한다. 그 긴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취미생활이다.
그래서 취미활동의 하나로 사진을 택했었다. 나이 60세, 그러니까 2010년 7월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일반인들과 같이 자동모드로 예전에 사진을 찍기는 하였으나 사진에 대한 지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기는 처음이었다. 필자가 사는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진행한 사진교실에 참가한 것이다. 6개월 과정이고 한 달에 1시간 반씩 세 번의 학습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진에 대한 기초지식을 익혔다.
물론 카메라는 큰아들 녀석이 인터넷 쇼핑몰을 할 때 사용하던 작은 콤팩트 카메라를 얻어 사용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듯이 취미활동에 끝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공인 사진작가가 되기 위하여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후부터 도전하였다. 사진작가 명함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 수상을 통하여 당해 협회의 정회원이 되는 길이다.
필자는 그 길을 택하고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첫 번째로 응모한 제1회 너브내감성사진전국공모전에서 작품 '형상I'이 동상에 입상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동상의 경우 사진작가로 등록하기 위한 점수가 3점에 불과하다. 입선의 경우는 2점이다. 지금은 규정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점수의 합계를 50점을 넘겨야 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응모하였다. 입선이 잘 안 되어 포기할까도 수없이 망설인 적도 많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일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다. 나태해지는 마음을 재차 다스리며 또 도전하고, 도전하기를 반복하였다. 수도 없이 낙선되었다. 필자의 서재에는 당시에 낙선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지금 다시 그 사진을 살펴보면 역시 낙선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목적을 이루긴 하였어도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뇌를 반복하였다.
늘 카메라를 손에 놓지 않고 사진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사진 관련 서적도 꽤 쌓였다. 찍은 사진도 500기가 용량의 외장 하드가 6개를 넘어서고 있다. 사진 촬영을 위한 명소로의 촬영여행은 잘 가지 못하여도 이른 아침부터 거의 매일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와 봉사도 곁들인다. 사진강의와 촬영지도를 하며 사진과 관련하여 조선일보사 시니어조선의 사진 명예 기자로도 활동을 한다.
물론 작품을 사진대전을 비롯한 공모전에 출품하여 공개적인 평가를 받기를 좋아한다. 2013년에는 사진의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질주'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부산일보사가 주최한 제21회 부일전국사진대전에 '닭장'을 출품하여 우수상을 받은 것도 그런 과정이다.
이러한 사진에 대한 도전과 취미활동은 의 생활에 더없는 보람과 즐거움을 준다.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카메라 장비도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한 동안 필자는 똑딱이라고 칭하는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 다음에 며느리가 사용하지 않는 캐논 400D 구형 카메라를 주기에 사용하다가 50만원을 주고 산 중고 500D를 지금도 사용 중이다. 물론 렌즈도 번들형에 가까운 저가형이다.
필자 카메라 장비를 보고 사진을 좀 한다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런 장비로 어떻게 그런 작품을 만드느냐고 되묻는 눈치다.
좋은 카메라는 촬영자를 편하게 한다. 카메라 장비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필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겪는 노력의 몇 배를 하여야 한다. 쉽게 말하여 몸으로 때워간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생활이 노후를 편하게 한다. 뱁새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 필자 방식대로, 내 형편대로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진은 누구나 한번 도전해 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주변에 사진을 무료로 배울 기회와 공간이 많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비도 무척 편해졌다. 스마트폰이 그 중에 하나이지 싶다. 침팬지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신문의 기사로 뜬 적이 있듯이 사진 촬영이 손쉬워졌고 소셜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어서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아니 되된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사진 촬영 경험을 많이 했다.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음이다. 다만 사진이론적 측면에서 몇 가지만 가미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 여러 사람과 또는 자연과 어울리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진 취미는 노후에 한번 도전해 볼만한 취미다.
IT도사? 필자에게 이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일견 필자는 IT도사일 수도 있다. 지금 컴퓨터로 먹고사니 나름 IT도사 아니겠는가?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트 아들러는 “인생을 사는 방식, 즉 라이프스타일은 과거의 특수한 경험이나 트라우마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퇴직하면서 이 말대로 삶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필자는 1999년 40대 중반에 은퇴하고 인생 2막을 준비하려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 3년 정도 열심히 팠는데 상담으로는 2막을 시작하기 쉽지 않았다.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필자는 교육받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그래서 기관마다 회원으로 가입해 교육이란 교육은 죄다 섭렵하기 시작했다. 여성능력개발원, 구청 사이트, 문화원 등등.
그리고 그중엔 고용센터에서 취업 전략으로 교통비와 식비까지 주면서 무료로 하는 강의도 있었다. 필자는 이를 통해 ‘쇼핑몰 제작과 운영과정’을 배웠다. 그 과정 안엔 포토샵, 일러스트, HTML, 플래시 등 과목이 있었다. 난 사진작가이기에 포토샵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할 줄은 몰랐고 다른 것은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다.
처음 교육이 시작된 날 책을 보니 그 난이도가 ‘심오’ 그 자체여서 아차 싶었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듣기로 했다.
첫 시간이 끝나자 필자의 뇌리에 남은 단어는 ‘멍’하고 ‘우왕좌왕’. 그래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젊은 친구들에게 체면 불고하고 물어댔다. 그런데 문제는 40대 여성 한명도 계속 묻는다는 것. 필자보다 더 젊은 친구들이 얼마나 짜증났겠는가? 강의실 뒤에서 짜증 섞인 소리가 들리고, 들린 듯하다. 마침 앞에 앉은 아가씨가 착해 그 아가씨를 무척이나 귀찮게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나고 나니 눈치가 보여 묻는 것을 줄이고 집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일러스트는 그런대로 할 수 있었으나 플래시는 조금만 잘못 클릭해도 전혀 진행이 안 돼 무척 고전했다. 쇼핑몰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도 수업 땐 잘되다가 집에만 가면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국 독자 학습은 포기하고 다음 날부턴 다시 앞에 앉은 아가씨를 괴롭혔다. 밥을 사줘 가면서….
많은 시니어는 잘못될까 봐 기계 만지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잘못되면 돌아가면 되고 잘못되면 까짓 서비스센터에 가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하니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2014년 회원 가입된 여성능력개발원에서 메시지가 왔다. 서울시에서 은퇴자를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당연히 원서를 냈고, 사진작가로서 인터넷을 할 줄 안다는 스펙으로 합격해 홍보팀장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곳에서 모 기업 동우회에서 활동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됐는데 이 사람을 통해 해당 동우회에서 일하게 됐다. 만약 컴퓨터를 못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동우회에서 사무자료 작성을 제대로 하려면 엑셀 능력이 필요해 퇴근 후 고용센터 내일배움카드로 학원에서 엑셀을 무료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부한 덕에 사무자료 작성, 소식지 편집, 행사 사진 촬영, 홈페이지 사진 관리 및 편집을 전혀 어려움 없이 할 수 있게 됐다.
주 무대는 압구정이다. 마피아가 주로 애용한다는 보르살리노 모자와 젊은 층이 열광하는 디젤 청바지를 즐겨 입는, 멋을 제대로 아는 사람. 패션 감각이 조금이라도 빠진다 말하면 서러워할 이 남자의 직업은 ‘서예가’다. ‘서예가’라고 해서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나? 완벽한 오산이다. 현재라는 프리즘으로 시공간 너머와 호흡하는 서예가 하석 박원규(何石 朴元圭·69)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만났다.
서예가 하석 박원규(이하 하석)는 만나기 전 겁부터 났다. 먹 묻힌 붓 들어본 지 어언 20년은 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하석의 기사나 인터뷰는 만만치 않은 도량 아니면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조금이나마 가깝게 하석을 느꼈다면 그건 임권택 감독과 영화 , , 작업을 함께했다는 정도. 하석을 만나기 전 첫인상은 그랬다. 마침내 하석의 작업실 석곡실(石曲室) 문이 열렸다. 생각지 못한 젊은 청년(?)이 빼꼼 문을 열어준다. 세련된 옷차림, 칠십을 바라보는 하석이 맞나 싶다. 하지만 생각도 잠시.
“아유, 나 같은 사람 인터뷰해서 뭐해요. 그냥 붓 잡아 글 쓰고 전각 공부한 사람이 뭐가 궁금해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듣는 순간, ‘주소는 바로 찾아왔구나!’
부잣집 아들로 산 세월에 대한 고마움
하석은 매일 석곡실에 들어서자마자 일종의 의식을 치른다.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과 마주하며 아침 문안을 드리는 것. 하석은 김제평야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직장생활 한 번 없이 살았다.
“아버지 말씀이 ‘먹고 사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금 부지런하면 먹고는 산다. 그런데 남자는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석은 선친에 대해 ‘시골 농부였지만 굉장히 깨어있는 어른’이었다고 회고했다. 시대를 앞서간 부모의 지원 덕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에 접근하며 살아왔다.
알 수 없는 끌림, 서예에 빠지다
하석이 서예의 매력에 빠진 건 이종사촌 집에 살면서 고등학교 다닐 때다.
“검사 집안이라 그런지 서화 작품이 많았어요. 집에 걸려있는 작품을 보고 한순간에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하석은 길을 걷다 어려운 한자가 있으면 그대로 그려 한문교사 조두현(1925~1989)을 찾아갔다. 조두현은 스테디셀러인 ‘한시의 이해’를 쓴 작가다. 하석이 서예대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스승 중 한 명. 조 선생은 하석의 서예 스승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1913~1999)을 만나게 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됐다.
“한 녀석이 흰 봉투 하나들고 조두현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자기 아버지 글씨를 가지고 왔다고 했어요. 그게 강암 선생 글씨였습니다. 조 선생이 남성여고 가정관 현판을 강암 선생께 부탁했더라고요.”
하석은 강암의 실력을 알게 된 뒤 그가 산다는 전주의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68년 강암 문하에 입문했다.
“전북대 법대에 다닐 때는 서예 공부를 위해 동양철학이나 국문과, 동양사 쪽으로 전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기회를 놓쳐서 법대에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 과목 교수를 찾아가 수업을 꼭 들어오겠지만, 법 대신 한문 공부를 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는 하석. 수업 시간을 열심히 들어서 시험문제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를 물어오는 학생도 있었단다.
“C 학점은 민법 말고는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 혹은 역경은 ‘아마 전과를 하지 못한 것’과 ‘민법에서 받은 C학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석은 무슨 얘기를 해도 살면서 어려운 게 없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말이 잠시 대학 이야기로 흐르면서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연애라……. 난 다 차여서…….”
의외의 대답이었다. 김제평야 대지주의 아들이 여자한테 차이다니.
“까무잡잡하고 눈만 빤질 했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도 고등학교 때 연서는 몇 장 써봤다고 했다. 언젠가 편지를 받았다는 여고생을 한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고교동창회 자리였다.
“내 고등학교 친구랑 결혼한 거예요. 난 잊고 있었는데 편지를 받았었다고 얘기해주더라고요.”
대만에서 마침내 무림고수를 만나다
하석의 연애 얘기로 즐거워졌을 때 대만 유학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 또한 무림고수 일대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기회는 1979년 제1회 동아 미술제에서 대상을 받고 난 뒤 찾아왔다.
“당시 동아일보가 대만과 관계가 아주 좋았습니다. 장다첸(張大千·1899~1983)을 비롯해 대만 최고 작가는 전부 모셔다 전시회를 열어줬어요. 그때 동아일보 측에서 권유했습니다.”
1회 대상자를 위한 특급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학위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견문을 넓히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지 않으려고요. 나의 현주소가 어딘지, 이 사람들은 뭘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하석은 서예 분야 고수들을 만나 기술을 연마하고 배움을 얻어나갔다. 그들이 쓰고, 깎고, 그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업이었다. 대만에서 유학하는 동안 언어의 장벽은 어떻게 넘었는지도 궁금했다.
“나 같은 돈 있는 사람이 치사하게 그러겠어요. 통역을 썼지요. 공부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물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화교 유학생을 통역사로 고용했습니다(웃음).”
이 시기 하석은 전각 스승인 독옹 이대목(獨翁 李大木·1926~2002) 선생도 만난다. 이들의 인연은 동아미술제 대상을 타기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각을 독학으로 공부할 때 책을 사러 가끔 명동에 갔습니다. 중국 대사관이 당시는 대만 대사관이었어요. 입구에 있는 중국서점에서 해교인집(海嶠印集第一集)을 찾아냈습니다.”
하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서 해교인집을 찾아 이대목의 전각을 보여줬다.
“이 각을 보세요. 재밌죠?”
언뜻 봐선 삼지창 모양인데 무엇을 느끼라는 건가.
“‘대’는 음각이고 ‘목’은 양각입니다. 음각과 양각 두 개를 한 공간에 새긴 건 처음 봤어요.”
하석은 대만 대사관을 통해 이대목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한문 실력을 총동원해 자신의 호와 이름 석 자를 전각에 새겨 달라는 편지를 썼다. 전각을 새겨주는 대가로 벽천 나상목(碧川 羅相沐·1924∼1999)이 그린 산수화도 동봉했다. 1년 쯤 대만에서 소포가 하나 왔다. 기쁨도 잠시. 열어보는 순간 이대목의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제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선생님의 각이 아닙니다. 선생님 솜씨가 이 정도면 소장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석은 이렇게 편지 한 통과 받은 전각을 싸서 다시 대만으로 보냈다. 그 이후 제대로 된 전각이 왔다. 하석이 몇 살인지도 모르면서 ‘하석 선생’이라고 쓴 전각을 만들어 보낸 것이다. 하석은 대만에 가자마자 이대목부터 만났다고 했다.
“너무 반가웠어요. 보통 인연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처음 만남 자리에서 제 이름을 전각에 새기는 작업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루가 걸렸어요. 저는 옆에서 열심히 지켜봤습니다.”
대만에서 유학하는 동안 이대목과 매주 만나며 돈독한 스승과 제자로 지냈다.
서예 대가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하석은 세계 중심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세계서예올림피아드’를 여는 게 꿈이다. 여기에는 한국 서예에 대한 하석의 걱정이 담겨있다.
“중국과 일본은 서예 인구가 많죠. 우리는 중국 인구에 막히고 일본의 축적된 문화에 안 됩니다. 우리 젊은 세대들은 한문과 꽤 멀어졌습니다. 나 때 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 영원히 (세계 서예계에서) 설 길이 없을 겁니다.”
혹시 ‘세계서예올림피아드’가 열리면 우승할 자신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감히 ‘자신 있다’라고 한다면……. 그냥 알아서 짐작하기를 바랍니다.”
한문 작업을 많이 하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 목표는 한글이다. 한글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만큼 어렵고 고민되는 부분도 없다.
“내가 쓰는 한글은 달라야 합니다. 창조는 나 혼자 해야 합니다.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나에게 계속 묻습니다. 혼자만 할 수 있느냐고 계속 물어요. 누구도 흉내 못 내는 것인가? 이 정도 가지고? 늘 생각을 해요. 그러나 즐거운 고민입니다."
패션의 완성, 예술가 느낌 가는 대로
사실 그의 미적 감각은 서두에서 밝혔듯 패션에서부터 드러난다. 석곡실 입구에는 세련된 운동화와 부츠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젊은 예술가라 느낄 정도로 색깔 선택도 과감하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1년에 한 번을 사도 질 좋은 것을 사는 게 현명한 쇼핑이라 생각합니다. 구두는 아테스토니 블랙라벨을 선호하고요.”
15년이 됐다는 그의 명품 구두는 어제 산 듯 깨끗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명품을 명품답게 보관할 것! 하석의 철칙이다. 그가 입은 청바지는 젊은층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젊은이만큼 멋지게 입으려면 몸매 유지는 필수. 하석은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사이클 25km를 탄다. 저녁은 아주 가볍게 먹고 매일 4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30년째 이어오고 있다.
하석과의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으로 새삼 익숙하진 바둑만큼 서예도 가깝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하석의 붓에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있다. 시니어돌 서예가 하석 박원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오래오래 사랑받길 바란다.
요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이 은퇴자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애호가라면 PGA투어 RBC 헤리티지대회가 매년 열리는 아름다운 하버타운 링크스코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힐튼 헤드 섬은 미국의 은퇴자들이 좋아할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는 한파에 시달리는 뉴욕, 보스턴 등 도회지의 은퇴자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30도를 넘는 여름 더위가 9월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수온은 수상 스포츠에 최적이다. 저녁이면 선선해지니 휴식과 숙면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대서양 해변과 하얀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마리나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항구의 전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모래와 맑고 깨끗한 습지 그리고 이끼로 뒤덮인 울창한 떡갈나무 숲은 대자연이 주는 은퇴기념 선물이며, 넉넉한 남부 인심은 은퇴자들에게 기를 불러 넣어주는 활력소다. 눈부신 햇살 아래 짭짤한 갯바람을 맞으며 160㎞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30여 개 골프 코스에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인생 후반기의 허무감은 어느새 충만감으로 바뀐다.
카약, 승마, 테니스, 낚시 등 갖가지 스포츠와 취미활동은 힐튼 헤드 섬의 주요 일과다. 19㎞에 걸쳐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무리지어 유영하는 돌고래를 유람선을 타고 관찰하며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해변의 조명을 모두 끌 때면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저지대 늪지에서는 새우와 게를 쫓아다니는 푸른 왜가리와 큰 입을 딱 벌리고 햇볕을 쬐는 악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있다.
맨해튼(여의도의 30배)만한 넓이의 힐튼 헤드 섬에서는 4만여 주민이 오순도순 지내지만 해마다 250만 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쇼핑 환경도 맨해튼 수준이다.
특가 상품에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와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할 독특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아웃렛과 상점, 그리고 6곳의 마리나 빌리지 상가는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자동차로 5시간, 사바나에서 45분(57㎞) 거리에 있는 힐튼 헤드 섬은 큰 다리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어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나 사바나국제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면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힐튼 헤드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따뜻한 기후와 야자열매, 풍부한 해산물을 즐기던 곳으로 1663년 영국의 윌리엄 힐튼 선장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힐튼 헤드’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섬의 73%가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
힐튼 헤드 섬의 73%는 10개의 대단위 리조트형 주택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 주택단지 가운데 상당수는 매입 자격을 55세 이상의 신중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 단지에는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실내외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테니스장, 연회장,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호수와 숲, 골프 코스와 마리나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섬에 정착한 은퇴자들은 평균 6차례 이상 방문하여 생활환경을 체험한 후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썰물 때면 90m나 밀려나 숨겼던 민낯을 드러내는 갯벌을 산책하면서 돌고래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섬의 지난해 주택매매 가격은 단독주택의 경우 52만달러, 타운하우스와 아파트는 20만달러 수준. 침실과 화장실이 각 2개인 아파트는 20만~40만달러, 단독주택은 25만~45만달러,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각 3개인 주택은 40만~70만달러를 호가한다. 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주택은 150만달러를 훌쩍 넘고 7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림 같은 주택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6개월 정도만 빌려 살아볼 수 있는 아파트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형은 월 평균 600달러, 침실 1개짜리는 800달러, 침실 2개짜리는 900달러 수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며칠만 빌릴 경우에도 임대료가 치솟는다. 침실 1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도 전망이 좋으면 1주에 1200~1800달러, 해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면 1000~1200달러 정도다. 봄과 가을에는 20% 정도 할인되고 겨울에는 50%나 싸진다. 2억달러 넘게 투입해 새 단장을 한 리조트의 하루 방 값은 일반형 기준으로 130~340달러 수준이다.
주거비가 웬만한 휴양지나 은퇴자 생활지보다 비싸지만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총지출은 맨해튼의 50%, 워싱턴이나 보스턴의 75% 수준을 넘지 않는다. 재산세가 다른 지역의 25% 수준인 데다 소득세, 소비세 등 각종 세율이 낮고 85세 이상의 주민에게는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보험과 휘발유 값이 저렴한 것도 수월찮게 도움이 된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현역 시절 주택을 구입해 별장처럼 이용하다가 은퇴 후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 세컨드 주택을 구입하면 세제 및 금융 혜택이 있는 데다 에어앤비를 비롯한 휴가용 주택 알선 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목 좋은 곳의 별장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테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다. 힐튼 헤드 섬 주민들은 1850년 이후 섬 주변 반경 80㎞ 이내로 81차례의 허리케인이 지나갔지만 큰 피해를 입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천혜의 지형 덕분인지 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취미활동 그리고 평생교육도
힐튼 헤드 섬에서는 축제와 이벤트가 풍성하다. 해마다 열리는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 해산물 축제, 고기잡이 경진대회, 카약과 보트 경주 등은 주민과 관광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멋을 살린 음악 카페, 길거리 밴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 늘어선 메이 강변에 각종 포장마차와 공예품 전시판매점까지 어우러지면서 남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16㎞ 떨어진 블러프턴의 소도심에서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남북전쟁 때의 화재와 파괴를 견뎌낸 대농장주의 저택과 교회는 박물관과 관광안내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옛 건물은 그림엽서로도 간직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요트, 카약, 낚시 등에 빠져 있는 ‘해양스포츠파’, 생태관찰 보존과 식물 재배에 몰입한 ‘에코파’, 골프, 사이클, 테니스와 달리기 등을 주로 하는 ‘육상스포츠파’, 공예품 만들기, 독서, 해변 일광욕, 흔들의자 등을 즐기는 ‘정중동파’ 등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봉사활동과 평생교육은 이곳 은퇴 생활자들의 공통된 일과다. 해안사구와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에서부터 노약자 서비스, 도서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은 오셔평생교육원은 1600명의 은퇴 생활자들을 대상으로 400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회비 40달러에, 수업료는 과목당 15달러. 모두 다 합쳐 연간 95달러를 넘지 않게 책정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가르치고 관심 분야를 배운다. 학습을 하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에 들어간다.
미국의 주요 언론과 관련 전문매체의 힐튼 헤드 섬 예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최고의 은퇴 생활지’, ‘인생을 바꿀 건강한 봄철 휴가지’, ‘하계 모임을 위한 남부 최고의 장소’, ‘2016년 북미지역 최고의 골프 휴가지’, ‘캐롤라이나 남부 최고의 사이클 친화지역’, ‘미국 남부 5대 하계 가족휴가지’, ‘세계 50대 테니스 휴양지’, ‘미국 최고의 섬’, ‘인터넷 검색이 가장 많은 섬’, ‘사우스캐롤라이나 최고의 해변’, ‘2015년 세계 최고의 여행목적지’ 등등. 이런 찬사 덕분에 이 지역 은퇴 생활자들의 만족감은 더 커지고 있다.
최근 분노조절장애(충동조절장애)로 인한 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얼마 전 초등학생 아들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하고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한 아버지도 경찰 범죄심리분석관의 범죄 행동분석 결과 충동조절장애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월에도 충동조절장애와 우울증 등 정신병을 앓던 50대 남성이 식당에서 흉기를 들고 ‘묻지마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붙잡혔다. 과연 이 충동조절장애는 무엇일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도움말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
흔히 일반적으로 분노조절장애 혹은 분노충동조절장애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의학계에서는 충동조절장애라고 이야기한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방화, 절도 등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하려는 충동을 자제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겨 해결하는 경우가 반복될 때 충동조절장애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범죄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충동조절장애는 이것보다는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단일 질환이 아닌 자기 조절의 어려움이 많은 대부분의 경우를 포함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가 될 수 있는 파괴적 행동을 반복하거나, 각종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등 행동이나 정서적으로 자기조절이 어려운 경우를 뜻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생물학적, 사회 심리적 요인 등 복합적으로 작용
그렇다면 충동조절장애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현장의 의료진은 충동조절장애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공통적으로는 유전적, 생물학적, 환경적, 사회심리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추측하는 정도다.
생물학적으로는 뇌의 변연계와 안와전두엽 부위의 기능장애, 세로토닌 신경전달이 감소한 경우가 흔히 원인으로 거론된다. 또한 과거의 뇌 손상, 두부 손상, 뇌염 등과도 관련이 있다고 알려졌다. 환경적, 사회심리적으로 볼 때는 아동기에 알코올중독, 학대와 방임, 부모 간의 불화 등이 많았던 환경에서 성장한 경우 이 장애가 더 흔하게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실제로 초등학생 아들을 때려 숨지게 한 아버지 역시 아동기에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부천 원미경찰서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체벌을 많이 받았다고 진술했다.
지속적인 음주, 충동조절장애 유발할 수도
노화와 충동조절 장애는 상관이 있을까?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의 김선미 교수는 “노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지만, 술과 같은 독성물질을 만성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엔 발병 가능성이 높아집니다”라고 설명하고, “섭취 기간이 늘어날수록 뇌의 기능 저하를 일으키면서 충동조절장애의 유발인자로 작용할 수 있어 위험합니다”라고 경고했다.
치매 등의 퇴행성 뇌 질환에서도 충동조절의 어려움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노인 우울증의 한 증상으로서 우울감과 함께 분노와 충동 조절의 어려움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 질환 중에서도 전두측두엽치매는 기억력 저하보다 충동과 행동조절의 어려움, 성격변화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초기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런 증상이 의심되면 진단도구로 신경인지검사와 함께 뇌 MRI(자기공명영상), PET(양전자 단층촬영) 등의 뇌 영상 촬영이 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중독도 충동조절장애 증상
충동조절장애의 증상으로는 단지 화를 참지 못하는 것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무차별적인 언어폭력이나 적대 행동도 증상 중 하나고, 폭력 행동이나 파괴적 행동, 방화, 도둑질도 이에 속한다. 특히 병적인 도박은 충동조절장애의 대표적 증상 중 하나로, 도박중독의 치료 역시 충동조절장애 치료에 기반을 둔다.
최근에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인터넷 중독이나 컴퓨터 중독, 게임 중독, 쇼핑 중독 등도 의학계에서는 충동조절장애로 보고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다.
충동조절장애를 진단하는 특이한 검사법은 딱히 없는 상황. 다만 원인을 감별하기 위한 혈액검사, 뇌파검사, 뇌 영상 검사(MRI), 심리평가, 고위인지기능검사 등이 진단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방방법 역시 딱히 알려진 것은 없다.
충동조절장애의 치료는 질환별로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약물치료와 정신치료(인지행동치료, 분석적 정신치료, 지지치료, 상담 등)를 병행하는 방법이 가장 흔히 이용된다.
때에 따라서는 약물치료도 겸하게 되는데, 우울감이나 분노, 충동성 등을 조절하기 위해 항우울제, 기분 조절제, 항정신병 약물 등의 다양한 약물이 치료에 이용된다.
활발한 활동이 정신건강 유지 비결
김선미 교수는 이러한 정신건강의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활발한 활동이 좋다고 조언한다.
“시니어들이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생물학적, 유전적 요인도 있지만, 질병, 퇴직으로 인한 경제력 상실, 배우자의 죽음, 신체적 능력 저하 때문입니다. 또한, 신체적 노화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자아존중감이 상실되며, 가정, 사회에서의 역할 상실로 인해 삶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우울해지기 쉽습니다. 가능한 한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늘리고 자원봉사, 종교생활, 평생교육, 재취업 등 사회적 활동을 통해 삶에 대한 이유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인대학이나 복지관 등의 시설을 이용해 꾸준히 평생교육을 받거나 취미, 운동, 종교, 자원봉사활동 등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며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우울증 예방에 도움이 됩니다.”
“선물이라고 다 같은 선물은 아니란다. 선물은 마음을 담아야 하는 거라지. 그래야 영원히 남을 수 있거든!” - 미국 동화작가 패트리샤 폴라코가 쓴 ‘할머니의 선물’의 한 구절.
2월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달이다. 설 명절이 있고, 아이들의 졸업과 입학이 줄줄이다. 초콜릿 선물로 대표되는 밸런타인데이도 있다. 이 얘기는 적어도 한 명 이상과 선물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뜻. 그런데 선물을 도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선물을 사기 위해 돈을 내는데 정작 내가 왜 선물을 사는지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다. ‘매년 하는 설 선물이니까’ 혹은 ‘다른 집 아이들이 그 선물을 받았더니 좋아했대’ 식의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조선시대 국왕은 선물에 대해 ‘마음과 마음을 맺어주는 끈’이라 생각했다. 조선왕조 500여 년 역사 동안 선물은 국왕이 신하에게 보내는 신뢰, 격려, 감사 등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에 대해 신하는 문서나 의식 또는 행동으로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 선물을 주고받는 데 큰 사명과 언약이 깃들어 있었다.
미국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선물의 역사-16세기 프랑스의 선물문화’라는 책을 통해 16세기 프랑스에서 선물은 사회 각계의 친구, 이웃, 친족, 그리고 동료와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정의했다. 선물은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어 억압관계를 완화해주고, 상업 거래에서 신뢰와 신용을 다지고 승진과 정치 관계를 쉽게 만들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에 따라 선물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정의와 평가가 있겠지만, 시대와 역사를 막론하고 선물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담은 정성의 표현이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표하는 방법의 하나
그렇다면 어떤 선물이 상대방에게 좋은 선물일까? 스튜디오W의 이형주 선물 포장 수석강사(이하 이형주 강사)는 선물을 주고받을 때 큰 유행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선물은 상대방에게 마음을 알리고, 고마움을 담아서 주는 것이다. 평소에 가까웠던 사람이 상대방을 지켜봤다가 평소 가지고 싶었던 것, 아니면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워했던 것들, 누가 사줬으면 했던 것을 챙기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굳이 최근 유행을 따지자면 자연치유나 감성을 자극하는 향초나 디퓨저(실내 방향제), 그림 등을 선물한다고.
포장도 선물의 일부, 상대에 따라 고려해야
선물을 상대방의 취향 혹은 필요에 맞게 골랐다면 그다음 생각할 것이 정성스럽게 포장하는 것이다. 포장에는 마음과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포장과 유통과정에서의 파손 방지를 위한 포장이 있다. 상품의 파손을 방지한 뒤 미적인 감각을 접목해 완성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선물 포장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물 포장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포장도 엄연히 선물의 일부분이다. 포장할 때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연령대와 성별, 어떤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어떤 취향인지, 준비한 상품이 뭔지에 따라 색깔, 방법, 재료 등이 달라진다. 고려해야 할 것 중 하나에 계절도 있다. 추운 겨울엔 따뜻한 색을 포장지로 고르거나 한여름에는 시원한 색 혹은 투명 포장지를 사용하는 등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설날 명절을 위한 특별한 선물 포장 방법은 없을까? 이형주 강사에 의하면 뜻밖에 설날이나 명절 선물 포장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주로 보자기와 노리개 장식을 많이 사용한다. 보자기는 치수에 따라 가격이 많이 달라지는데 보자기 가격만 3만~4만 원 정도 한다. 거기에 노리개 장식이 들어가면 2만~3만 원이 더 추가된다. 보자기 치수와 노리개 가격에 따라 포장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 예절이 있다면?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받는 사람이 들고 가기 편하게 쇼핑백을 같이 준비하는 것이 좋다. 누구든지 다 아는 상식 같아 보이지만 챙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리본 매듭을 풀기 편하게 매는 것도 선물 줄 때 예절이라면 예절이다. 대부분 선물을 받아 손으로 풀어보기 마련이다. 리본이 너무 단단하게 감겨 있어 풀다가 결국 가위를 들어 리본을 자르거나 칼로 포장을 거둬낸 기억, 다들 한 번쯤 있지 않나.
그렇다면 선물 받는 사람은 어떤 예절을 지켜야 할까? 혹시 선물을 받았을 때 포장지를 박박 찢어 버리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으신가? 그런데 이제 이 글의 독자라면 절대 그러지 말길 바란다. 선물을 받은 후 내용물에만 관심 있고, 포장한 사람의 성의를 생각 안 하고 찢어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선물을 받고 고마운 마음을 느끼는 시간은 단 10초면 된다. 그런데 포장 생각은 안 하고 막 뜯어버리면 선물을 준비한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다음부터 정성 들여 선물할 생각은커녕 선물 줄 대상에서도 제외할 것이다. 선물 포장은 내용물을 보호하는 의미도 있지만, 상대방을 대우해 주는 의미다. 어차피 뜯어버릴 거 포장은 왜 하나라고 평소에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막상 포장이 안 된 선물을 받으면 “왜 나는 포장 안 해주나?”라며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가. 선물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적어도 “너무 아깝다, 뜯어도 되니?” 정도의 따뜻한 말은 아낌없이 해도 되지 않을까? 감동해주고, 대우해줬구나 생각하면 서로가 좋다. 결국, 선물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매년, 매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경조사, 기념일 등으로 선물을 고민하고 산다. 특히 2월은 그 고민을 시작하는 연중 첫 번째 달이다. 혹시 의무감에 인터넷 쇼핑 창을 열어봤다거나 귀찮으니 돈을 주겠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선물에 마음이 담겨 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