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강이 만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삼랑진(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이다. 어린 시절 인근 지역에서 자랐어도 별생각 없이 다녔는데 삼랑진이라는 이름에 이런 아름다운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부산 구포역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갈 때마다 삼랑진역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행정구역상 밀양 내에 있는 읍이지만 당시는 밀양역보다 더 크고 번성했던 곳이 삼랑진이었다.
삼랑진 옛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삼랑진은 매우 화려하고 번성한 곳이었다. 낙동강을 통해 일본 상선이 삼랑진 포구까지 왔다.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다 보니, 삼랑진 지역 중심엔 일본인들 관사가 많이 지어져 현재에도 제법 남아 있다. 문화재보존정책 때문에 개·보수를 하지 못해 지금은 아주 초라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언젠가는 이 지역의 근대화 문물들은 보수·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삼랑진장에 가자!
삼랑진장은 4일과 9일에 들어선다. 삼랑진이 쇠퇴하면서 시장의 규모도 작아지고 사람 수도 줄었다. 최근엔 마트까지 생기면서 시골 장날의 분위기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삼랑진장은 인근의 김해시 생림면 사람들과 삼랑진 지역의 연세 많으신 분들이 주로 이용한다. 어릴 적부터 발길이 닿은 곳이라 마트를 이용하는 것보다 편해 장을 이용한단다. 어르신들은 마트의 물건보다 찬거리 등을 푼돈으로 흥정하며 살 수 있는 삼랑진장을 좋아한다.
가는 날이 장날
날씨가 매우 추웠다. 삼랑진에는 강바람과 산바람이 아주 매섭게 몰아친다. 도시처럼 바람을 막아줄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차에서 내려 삼랑진 장터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장날의 분위기를 느껴봤다. 큰 카메라를 들고 외지인이 이리저리 다니니, 상인들 모두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오방떡을 구우시는 할머니가 “오늘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왔능교?”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반갑고 기뻐서 “네~” 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더 붙였다. 잡지에 넣을 사진 촬영을 한다고 설명하며 할머니 모습을 찍었다. “찍지 마!” 하면서도 포즈를 잘 잡아주셨다.
추운 날 꽁꽁 얼은 생선을 파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찍으려 하니 할머니가 욕을 하신다. 그래도 상부상조하는 의미에서 4마리에 1만 원 하는 고등어를 사니까, 덤으로 작은 놈 한 마리를 끼워주신다. 고등어를 팔아주니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장터에서 파는 생선들은 냉장 시설이 없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냉동 생선을 녹여 손질해 판다. 이 추운 날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손질을 하신다. “할머니 장갑 좀 끼시죠?” 하니 “장갑 끼면 잘 안 된다” 하신다. 조용한 시골 장터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있다면 음악 테이프와 CD를 판매하는 트럭이다. 하루 종일 상인들과 손님들에게 최신 트로트를 들려준다. 시대가 변하면서 트로트 노래들도 USB용으로 나온다. 뭔가 하고 둘러보는 사람은 있지만 구입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보니, 물건 파는 사람도 차 안에 들어가 있다. 날씨도 춥고 사람들도 많이 안 다니니 일찌감치 포기한 모양이다.
장터 사람들
삼랑진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젊은 사람에게는 좀 생소한 것들이다. 주로 뜨거운 물에 우려먹는 뿌리 식품이나 보신용 식품이 많다. 우엉과 말린 연근, 둥굴레, 돼지감자 같은 뿌리 식품이 많다. 장날의 자리에는 권리금과 자릿세도 있다 한다. 보통 가게 앞에서 장사를 할 경우엔 상권의 성향과 위치에 따라 자릿세 차이가 있다. 삼랑진장에서 20년 동안 장사를 해온 한 분은 자릿세를 내기 싫어 장터 가장 끝 쪽에 자리를 펴고 물건을 판다. 추운 날이라 구멍 난 깡통 장작불에 손을 녹이며 요기를 하기 위해 고구마 몇 개를 넣어 굽고 있다. 그분에게 연근이랑 우엉, 돼지감자를 1만 원어치씩 구입하고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날씨도 춥고 심심했는데 20분 동안 말동무도 되어주셨다. 해는 점점 저물어가고, 오늘 펼친 물건들 재고가 많이 쌓였는지 상인들은 팔지 못한 물건들이 서로에게 필요하면 물물교환을 한다. 불과 몇십 분 전에 1만2000원에 팔던 김천촌닭을 5000원에 사가라고 한다. 삼랑진은 시내보다 더 빨리 어두워진다. 하루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도 잔영(殘影)첨럼 남아 있다.
예닐곱 어렸을 때부터 아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열두 살부터 무병을 앓고 열일곱에 만신(萬神)이 됐다. 내림굿을 해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나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金錦花·87) 선생의 무당 인생 첫 장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무당이 된 이후 세상 숱한 질문과 마주한다. 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만사형통합니까? 크고 작은 인간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을 모신 지 올해로 71년.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끊임없이 질문을 받게 될 만신. 그녀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신의 목소리를 전해 듣는 거 말고 인간 김금화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018년 대한민국에 대한 축원은 덤이었다.
너무 시간 많이 빼앗으면 안 돼
만신 김금화 선생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대충 낮 12시 이후다. 공연이 있거나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오후 12시쯤까지 한나절. 김금화 선생은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이나 금화당(강화에 있는 김금화 선생의 굿당)에서 점(占)을 보러 오는 손님을 맞이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만신이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이른 아침부터 점 보러 온 손님이 집 안에 앉아 있다. 예약 문의전화도 꾸준히 걸려온다. 무복(巫服)에 다양한 무구(巫具, 굿에 사용되는 도구)를 들고 춤을 추거나 작두를 타는 모습만 머리에 그려왔다. 무복은 특별한 날만 입고 평소 편하게 입고 지낸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무복 대신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었다. 인사를 나누고 잡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대뜸 김금화 선생이 물어본다.
“그런데 누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거야?”
“저요.”
오전 내내 손님을 받아서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힘드니 시간 많이 빼앗지 말아 달라 기자에게 당부했다.
“자, 갑시다!(웃음)”
만수대탁굿으로 첫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10월 말, 김금화 선생은 생애 일곱 번째로 만수대탁굿을 성황리에 마쳤다. 황해도 지방의 재수굿(집굿)인 만수대탁굿은 이 지역에서 전승되는 굿 중 가장 크다. 집안의 번창과 가족의 건강, 불로장생 등을 빌며 노인의 만수무강과 죽은 뒤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굿이다.
“만수대탁굿은 굉장히 큰 굿이에요. 소 잡고 돼지도 두어 마리 올리고 말이지…. 첫째 날은 상산부군맞이하고 칠성, 제석굿을 해요. 다음 날은 일월성신을 맞이해서 솔문(소나무를 휘어서 만든 문) 앞에서 대화가 이뤄져요. 세태를 풍자한 사또놀이를 하고, 소 바치고, 도령돌기를 해요. 도령을 돌면서 칠성님한테 아들 낳게 해달라고도 하고, 명공(名公) 많이 달라고도 빕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동참해서 돌지 뭐. 그리고 나중에 굿이 끝날 때쯤 작두 타고, 대감놀이도 하고. 굿거리(극에서 장의 개념)도 마흔 거리는 되나봐.”
만수대탁굿은 무당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굿은 아니다. 큰무당 중에서도 일정 수준과 경지에 이른 무당에게 허락된 굿이다. 마흔 거리가 넘기 때문에 하루에 다 할 수 없고 최소 3일에서 5일 정도 기간이 걸린다. 특히 10년에 한 번, 무당 평생 세 번만 해도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데 김금화 선생은 일곱 번의 만수대탁굿을 치러냈다. 10년에 한 번이란 말에 못 가 뵈어 죄송하다는 말이 기자 입에서 절로 나왔다.
“왔으면 좋았을걸. 소 한마리 잡고, 막걸리도 많이 남았었는데. 굿을 크게 했어요. 소 잡는 것도 내가 삼지창으로 찍고 다 했어요. 제자들이 받쳐줘서 작두에도 올라가고.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는 거잖아.”
작년 치러진 만수대탁굿은 이제 마지마기라고 김금화 선생은 내내 얘기했다. 10년 후에도 꼭 다시 하셨으면 한다는 기자의 말에 고개를 흔든다.
“만수대탁굿을 할 때는 젊어지는가 싶었는데 요즘 날씨가 추워서 운동을 못하니까 영 좋지가 않아요.(웃음)”
세상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운명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건넨 질문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서일까? 자신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는 좀체로 꺼내지 않는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4세 어린 나이에 시집간 이야기부터 호되게 시집살이하다 도망친 얘기, 장티푸스에 걸려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일, 열일곱 살 신내림 받던 순간과 병에 걸린 한 사내를 낫게 해준 일화,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의 용호도라는 섬에서 했던 첫 대동굿의 감격에 대해서는 또렷이 들려줬다. 그 연세에 생생하게 당시 기분을 기억해내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들은 차창 너머 풍경처럼 넘기려고 한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김금화 선생의 이야기다.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 혹은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녀의 일상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만신 김금화가 아닌 자신의 걱정과 시름, 그리고 그것을 깨쳐내는 일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20여 분 지나자 김금화 선생이 시계를 봤다.
“나 지금 계속 말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질 거 같은데…. 힘들다. 어제 맞은 영양제 오늘 이러고 다 쓰겠다.”
다음에 만나 좀 더 편한 얘기를 했으면 하는 바람에 이만 자리를 무르기로 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다시 자택을 찾았다. 밥도 함께 먹고 편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또다시 약속은 낮 12시 이후. 오전 점사(占辭) 보는 일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두꺼운 바지 차림이 예전보다 편해 보였다. 목소리도 밝았다. 그런데 최근 부쩍 입안이 개운치 않고 입맛이 없다고 했다.
“배가 고픈데 뭐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원래는 잘 먹었는데 요즘 입맛이 없어. 밥도 먹기 싫고, 식빵이나 구워 먹을까? 아침도 억지로 먹었어.”
이렇게 말해놓고 재차 방문한 기자가 맘에 걸리는지 숙성시켜놓은 감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라며 손에 쥐어준다. 날씨가 좋지 않아 통 못 나갔던 새벽 운동도 이날만큼은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이라니. 운동하기도 쉽지가 않다고 했다.
“아침에 마스크하고 밖에 다녀왔는데 더는 못 나가겠다, 그럼. 좀 나가면 좋겠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어떻게 걸어.”
김금화 선생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이 굽은 지 5년이 됐단다. 당시 속 썩을 일이 있어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결국 류머티즘으로 왔다. 안마라도 해드릴 생각으로 손을 만지니 얼음장같이 차다.
“손에 염증이 있어서 계속 좀 부어 있어. 어떨 때는 얼얼해, 이게. 류머티즘이 자가면역질환이잖아. 자기가 자기를 친다는 거 아니야. 자기 살이. 손이 못생겼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병원이 또 2층이라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못 가. 물리치료 받으면 조금 나아지지.”
그 사이 사무장이 식빵에 블루베리 잼을 잔뜩 발라 김금화 선생 앞에 내주었다. 어려서부터 단 것을 좋아했다지만 입속은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입안이 되게 아프다. 너무 달아서. 단거 먹어도 아프고, 뜨거운 거 먹어도 아프고.”
사무장이 계란을 권했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식사시간이 돼 음식이 한 상 차려졌는데도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러 가지 짧게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자신에 대한 소소한 질문이 어색한지 대답 이어나가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신은 은퇴가 없나요. 드라마 ‘왕꽃녀님’처럼요?
은퇴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아니고.
외국에서도 점을 보러 오나요?
꽤 와요. 지난번엔 중국에서 사람이 왔어요. 한국 신이 몸에 들어왔다면서요.
오전에만 점사를 보시는 건가요?
네. 하루에 세 명도 보고 많으면 일곱 명도 보고 그래.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글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뭐… 그런 거 없어.
어렸을 때 꿈이 있었어요?
꿈 그런 거 몰라.
귀도 한번 안 뚫으셨네요.
그거 왜 뚫어 아픈데.(웃음)
젊은 여성들이 가끔은 부럽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짧게 대답했던 이전의 질문과는 달리 곰곰이 생각하다 기운을 내며 답했다.
“으이, 부럽지 않아.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했는데 뭐. 돈 한 푼 안 내고 비행기 타고 외국을 오갔잖아. 그것도 비즈니스석에 타고, 대우받고, 돈도 많이 받아오고 말이지. 그때는 이렇게 문화재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세월이 좋으니까 중요무형문화재지.”
집 안 벽면에 붙여놓은 사진을 찬찬히 보다 김금화 선생이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한복 차림의 모습만 보다 양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35년 전인가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이야. 쉰세 살? 하와이대학교 초청을 받아 공연 갔을 때 찍은 사진이거든. 아무튼 사진들을 다 훔쳐가. 인터뷰하러 와서 가지고 갔다가 안 가지고 오기도 하고. 우리도 또 있다 보면 잊고.”
무당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 것 같은지도 물었다. 넘세(어린 시절의 김금화 선생의 이름)는 꽤 총명하던 아이였다.
“무당이 안 되고 공부 많이 했으면. 의사 아니면 검사나… 그런 거 했을 거야. 공부했으면.”
만약 그랬다면 시대를 선도한 검사 김금화로, 의사 김금화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곱고 당당한 얼굴이 꽤 어울렸을 것도 같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부름은 평생을 다른 이의 복을 대신 빌어주는 만신으로 살게 했다.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한 적 있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10여 년 전 연안부두에서 기자와 만나 사진을 같이 찍은 적이 있다고 했더니 뜻밖의 얘기를 꺼낸다.
“나랑 같이 사진 찍고 우리 김금화 신어머니라고 안 했어?(웃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금화 선생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김금화 선생이 자신의 신어머니라고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이 요즘 꽤 된다는 설명.
“무속인들이 나하고 사진 찍고서는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대요. 아침에도 어떤 여자가 왔는데 어떤 무속인이 김금화 만신이 자기 선생인데 무슨 큰 일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많은 돈을 보태라고 했답니다.”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져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잘 안 한다고 했다. 자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란다면서 말이다.
“우리나라가 괜찮지 그럼 어드래?”
끝으로 우리나라가 올해 잘될 수 있도록 축원의 메시지를 부탁했다. 김금화 선생은 매일 나라를 위해 축원한다고 했다. 나라가 편안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고 전쟁 없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 기도드린다고 했다.
“2018년에는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밤늦도록 술 먹고 길에 넘어지고 싸우고 막 그렇게 하지 말고 착실하고 정말 아름답게 모두 하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서로 아끼고. 음식도 아끼고요. 너무 많이 해서 내버리지 말아요. 하늘이 내려다봅니다. 아이도 많이 낳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정에 3명, 4명 낳아서 나라에 좋은 일 하고, 아이 안 낳고 자기들 혼자서만 살면 어떻게 해. 늙어서도 외로울 거 아냐? 가정과 사회에서도 좋은 일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상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효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가 드리는 축원입니다.”
올해 우리나라가 어떤지 물었다.
“괜찮지 그럼, 어드래? 안정도 되고….”
나라 만신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기를 바랐다. 안정된다는 말에 근심걱정 없는 한 해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헤치고 가녀린 노구가 지탱하고 섰다. 평소 조용히 행동하다가도 무대 위에 서면, 작두 위에 오르면 신빨(?) 날리는 젊은 만신으로 되살아난다.
올해도 7월이면 어김없이 서해안 배연신굿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공연과 굿판이 만신 김금화 선생의 몸짓을 위해 준비될 것이다. 김금화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기자는 간절한 마음이다. 10년 후 그녀의 여덟 번째 만수대탁굿을 꼭 볼 수 있기를 말이다.
필자의 집안은 3대가 개띠다. 아버지가 34년 개띠, 필자가 58년 개띠, 둘째아들이 94년 개띠다. 말티즈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집안이 온통 개판이라고 가끔 농담을 한다. 34년 개띠이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온 분들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58년 개띠도 나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4학년 성적표를 보면 104번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 반이 104명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학생이 너무 많아 3부제 수업을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때 만들어졌지 싶다.
필자도 그랬지만 그 시절에는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난했기에 추워도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다녔다. 겨울엔 참 추웠다. 특히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맹렬했다.
58년 개띠는 고등학교 평준화 1세대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왜 뺑뺑이가 시작되었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뺑뺑이 추첨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평준화 기수를 후배로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준화 기수들은 선배를 선배로 대우하지 않는다. 필자도 명문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좋아하기엔 교사들과 선배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올해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가 많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담배 피우고 술 몇 번 먹을 정도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대책 없이 사직서를 냈다. 외부와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해 30대 초반에 건축사사무소를 차렸다. 온 나라가 건설 현장 같았던 시절이다. 일도 많았고 그만큼 직원도 늘었다. 결혼하고 전용면적 7평짜리 벌집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는데 집도 분양받았다. 골프도 쳤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화려한 30대는 40세로 막 접어드는 해에 터진 IMF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감각마비가 겹치면서 정신과 몸이 무너졌다.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몇 년 전 필자의 생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따라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야근을 하게 되었다. 야근하고 간다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건가’ 하고 의심을 하다가 속으로 ‘내가 속을 줄 알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동안 무슨 기념일이 되면 필자는 깜짝 이벤트를 자주 했다.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기념일 아침에 꽃을 준비한다든지 돈 봉투나 선물을 내놓는 식이다.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진 아내는 기념일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음식을 준비해뒀을 아내와 한잔하려고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설 때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개는 반갑게 짖으며 달려 나왔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큰아들은 컴퓨터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맥주를 보면서 야근하고 오면서 무슨 맥주냐고 아내가 한마디했다. 식탁을 힐끔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전혀 상황 변화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놈을 식탁으로 불렀다. 일단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말했다.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아서 한마디하겠다…. 오늘 내 생일이다!”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어 결과적으로 30분 안에 맥주 안주가 준비되긴 했지만 속으로는 좀 섭섭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전방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에게서 온 전화가 위로가 되긴 했다.
“아빠 생신을 엄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면서요….”
얼마 전에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시니어에게 강의를 하던 중 환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그날 필자는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남 눈치 보느라 환갑잔치를 안 한다고 하는데 왜 남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 베이비부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릴 때 판자촌에서 살며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다들 있지 않은가. 뒤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만하던 시기에 IMF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머리는 허옇고 주름도 많더라. 무엇을 이루려고,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쁘게 산 것일까 생각하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환갑상을 꼭 받자. 거창하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라도 모인 자리에서 술 한잔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쪽에 앉은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퇴직하고 반년 동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좀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 해가 바뀌어 필자도 이제 환갑이다. 주변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간다, 북유럽을 간다, 벌써부터 환갑 계획들을 자랑한다. 필자의 계획은 명확하다. 10년 전, 그러니까 오십이 되던 해부터 매년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 10년 계획을 실행해왔다. 그동안 이룬 성과로 상담 관련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공저로 책을 네 권 냈다. 기타 배우기, 목공예 배우기, 명강사 되기, 글쓰기, 그림 다시 그리기, 새로운 관계 맺기 등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환갑인 올해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10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원년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룬 성과를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물론 환갑상은 받고 나서.
우리 가족은 6·25 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이다. 저의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유학 생활 중에 만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 결혼을 하셨다. 시어머님은 3남 1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던 중 6.25 전쟁의 발생으로 시아버님이 납치 되신 것이다.
어머님은 6·25당시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셨다. 어머님은 저의 결혼 후 평생 우리랑 함께 사시다가 5년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 6·25를 맞아서 정부로부터 를 받고 남편은 많은 감회에 젖었다. 남편은 아버님의 납치 후 직장 생활 초기에는 혹시라도 이북의 아버님과 접촉할까봐 출장 허가도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맞벌이로 직장에 다니던 필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때는 지금처럼 건강 프로그램도 별로 없어 뇌졸중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한 상태이다. 내가 쓰러지자 가정 생활은 즉시 엉망이 되었고 또 남편은 곧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모 방송국에서 30 년 넘게 근무하고 정년 퇴직을 한 남편의 퇴직금은 그 때로서는 많은 금액이었다. 그 때는 퇴직금도 미래가 어떨지 모른다며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받지 않고 일시불로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당시엔 은행의 이자도 상당히 높아서 이자로만 살아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그 때만 해도 장수 시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은퇴 후의 생활 준비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떻게 퇴직금을 관리 해야할 줄도 몰랐다. 그 때는 지금 유행하는 ‘은퇴 이후의 재무 설계’ 같은 말은 존재 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할 일을 못 찾아 힘들어 하던 어느 날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은 주례 협회에서 직업적 주례사를 모집한다는 걸 보고 남편 몰래 응모를 했다. 남편이 방송국에서 방송 경험이 있으니 주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실제로 주례 경험도 많았기에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남편 대신 응모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았지만 하루 하루 똑같은 무료한 생활로 시간 보내는 남편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나름대로 활력을 줄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합격 통지를 받고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말을 했더니 엄청 화를 내면서 누굴 뭘로 보냐며 자기를 무시 했다고 몇 달 동안 나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면 남이 자길 얼마나 궁하게 보겠냐며 자긴 앞으로 돈을 버는 일은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 출근만 하면 하루 종일 온통 내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하루 종일 붙어 있기가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의 단순한 생각이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요령이 생겨, 퇴직 초기처럼 싸우지도 않고 서로 각자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필자를 보면 대견한 생각이 든다.
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수십 년 전 그들은 알았을까? 호롱불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했던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말이다. 교육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들을 매일 밤 가르치고 보듬었더니 사회의 귀한 일꾼으로 자라났다. 20대 초반 야학 선생님의 노력은 교육을 넘어선 사랑, 그 자체였다. 이와 더불어 스승을 향한 야학생들의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서둔야학.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현장에 찾아갔다. 짝사랑하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니 새록새록 옛 추억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서둔야학, 서울대 농대생의 열정으로 기억돼
‘야학’이 뭔지 모르는 젊은이도 꽤 될 것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농촌을 비롯해 어려운 지역의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가르치던 곳이 야학(夜學)이다. 서둔야학도 당연히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이던 1926년,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국어를 지켜내고자 생겨났다. 수원 서둔리에 설립된 서둔야학은 야학 선생님과 야학생 1000여 명을 배출해냈다. 이곳에서의 배움을 계기로 더 높은 실력을 쌓아 업적을 남긴 이들도 여럿이라고. 1980년 당시 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교를 결정하면서 공식적인 서둔야학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83년 잠시나마 야학으로서 기운을 내는가 싶더니 금새 사그라졌다. 1990년에는 야학 선생님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서둔야학회를 조직하고 소식지 발간과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홈커밍데이 행사도 명맥이 멈췄다 2011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좀 더 정기적인 모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야학당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서울 관악캠퍼스로 옮기기 전 서울대학교 농업대학교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기 청년문화 창작소’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문화 시설로 탈바꿈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 공간, 문화 한마당, 다양한 문화 지식들을 향유하고 체험할 수 있다. 오래전 서울대 농대의 원예학관으로 쓰였기에 옛 강의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서둔야학당으로 가기 전 모임 장소. 하나둘 서둔야학을 빛냈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여들고 들어설 때마다 반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맞이한다. 모두의 얼굴에 만발하는 웃음이 영락없는 야학 시절 모습 그대로다. 그 사이 많이 변했는지 이름을 알고 나서야 ‘그때 그 선생님이지, 그 학생이지’ 하며 기억을 되살려내는 모습이 정겹다.
황건식 서둔야학회 회장이자 전 서둔야학 교장은 인사말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서둔야학이 걸어온 길에 대해 입을 열었다.
“1963년, 제가 서둔야학에 들어왔을 때는 초등학교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문맹자 교육을 많이 했습니다. 해방 후 교육을 못 받아 글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65년에는 중등 과정을 상설했습니다. 서둔야학의 순수한 마음이 정치적 물결에 희생된 것이 사실이죠. 군부독재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죠. 젊은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야학 선생님과 학생들의 소개가 끝난 후 초대가수 3대 뚜아에무아인 김은영씨와 함께 추억의 노래를 듣고 함께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야학당 시절, 밤 10시쯤 수업을 마치면 선생님들이 목장길과 나무숲을 지나 매일 집을 바래다줬다고. 그때마다 한국의 가곡이며 미국 민요며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곤 했다. 동년기자 박애란씨도 이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다.
“우리들이 야학에서 공부한 것은 공부보다 사랑과 관심이었어요. 부모들은 생존에 허덕이고 있었죠. 아이들한테 사랑? 관심? 이런 것은 사전에 나오는 것이었죠. 야학에서 선생님들이 항상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사랑해주셨어요. 그리고 집으로 갈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데려다주셨어요. 위험하다고요.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금발의 제니’, ‘매기의 추억’이라든가 이런 음악이 나오면 어김없이 눈물이 나요.”
서둔야학교의 홈커밍데이
가을 소풍처럼 나무 밭에 모여앉아 도시락을 까먹은 후, 서둔야학교로 향했다. 1950년대 서울대학교 주위 교회나 기관의 건물에서 야학교를 열다가 1965년 야학 선생님들이 돈을 모아 교내 연습림 근처에 대지를 매입해 스스로 건물을 지었다. 당시 뜻이 있던 교수에게 지원을 받고 일일주점으로 맥주를 팔아 돈을 모았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농대가 관악캠퍼스로 넘어가면서 인적이 드물어진 서둔야학당 앞에는 ‘서둔야학 유적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잠겨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옛 야학당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몇 해 전, 황건식 회장이 사비를 들여 야학당을 복원한 덕분에 비교적 깨끗한 모습으로 야학당 사람들을 맞이했다. 비록 풀이 높이 자라고 사람이 찾아왔던 흔적은 없지만 말이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천장을 바라보니 상량문이 시절을 기억해내듯 적혀 있었다.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교가도 같이 불러보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황건식 회장님에 이어 내년부터 서둔야학회 회장을 맡게 되는 김기옥씨는 서둔야학당에 대해 “우리가 정규 교과과정에 의해서 제대로 가르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성교육 차원에서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기에 졸업생들이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이곳을 나온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이 선물로 받았다며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플라스틱 통을 들고 왔다.
‘나나스케’라는데 그게 뭐냐고 묻는다. 나나스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장아찌 음식이다.
‘나라스께‘ 라고도 불리지만 필자가 어릴 때부터 먹어서 아는 이름은 ’나나스케’이다.
단무지 종류로 보여도 전혀 다르고 고급스러운 ‘나나스케’는 어감으로 보아 일본이름인 것 같고 동봉된 설명서를 보니 울외 장아찌라 쓰여 있다.
‘나나스케’는 늙은 오이인 노각이나 참외로 만든다고 알고 있었는데 울외라고 쓰여 있으니 참외종류가 맞는 것 같으며 이 장아찌를 만든 회사에서는 울외 외에도 오이나 무, 마늘, 양파, 당근을 이용한 나나스케도 만든다고 한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하나를 꺼내어 겉에 묻은 노란 주박 (술지게미)을 깨끗이 씻어내고 얇게 썰어 한 조각 입에 넣으니 달콤, 짭짤 아삭한 맛이 옛날 맛과 똑같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흔하게 이 장아찌를 먹었다.
우리 아버지는 밀가루 묻혀 쪄서 양념장에 묻히는 풋고추 찜이나 밥에 얹어 쪄낸 보랏빛 가지를 젓가락으로 쭉쭉 찢어서 집 간장과 갖은 양념으로 무치는 가지나물, 새우젓으로 간한 애호박 볶음 같은 시골 반찬과 특히 ‘나나스케’를 좋아하셨다.
한여름에 아버지와 겸상해서 찬물에 밥을 말아 나나스케 한 조각 얹어 먹으며 그 아삭거리는 식감과 향긋한 맛에 같이 감탄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아마 친할머니가 손수 담아주셨던 이 장아찌의 맛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도 한번 만들어 보라는 부탁을 했는데 나나스케의 재료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엄마는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정릉의 마당 넓은 집에 살 때 대전에서 친할머니가 작은 몸집에 버겁게 보일 정도의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셨다.
갓김치와 나나스케를 만들어 오셨는데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시던 얼굴도 생각나고 좀 뾰로통했던 엄마의 모습도 기억난다.
그 옛날 장남인 아버지와 결혼하여 딸만 셋을 낳은 엄마는 시집으로부터 아들 못 낳았다는 데 대한 무언의 핍박을 받으신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친할머니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좀 냉정하게 보여 안타깝고 슬펐던 적이 있다.
그때 먹었던 친할머니의 나나스케는 정말로 감칠맛이 났지만 슬픈 느낌도 묻어있다.
그 후로는 입소문으로 알게 된 집에서 사다 먹었어도 느낌 때문이었을까? 할머니의 맛만은 못했고 서둘러 내려가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울외는 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식물이라고 한다. 참외와 비슷하지만, 참외처럼 단맛은 없다는데 이 열매를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내고 소금에 절인 후 꾸덕하게 말려 설탕을 첨가한 주박에 박아두면 울외장아찌가 되는데 주박이란 청주를 걸러내고 남은 술지게미이다.
단무지와는 달리 흔하게 볼 수 없는 나나스케, 울외장아찌는 채소절임이 발달한 일본 장아찌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군산지방에서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에는 군산에 일본인 청주양조장이 번성했고 거기에서 나온 지게미로 울외장아찌를 만들었는데 요즘에도 군산의 울외 가공공장에서는 대규모 양조장에서 나온 지게미를 받아다 장아찌를 만든다고 한다.
선물 받은 나나스케 하나를 꺼내 겉에 묻은 노란 주박을 깨끗이 씻어내니 황금색의 꾸덕한 장아찌의 모습을 드러낸다.
양념하지 않은 채로 얇게 썰어 물에 말은 밥 한 숟갈에 얹어 입에 넣으니 달콤하고 짭짤한 그 아삭거리는 식감과 독특하게 향긋한 맛이 일품이다.
이번엔 남편과 마주앉아 물 말은 밥에 나나스케를 나눠 먹었다.
오랜만에 맛본 울외장아찌 하나로 하늘나라 계신 아버지와 친할머니가 그리워지고 보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교과서에서도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민족의 뿌리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탁성에 파장 깊은 목소리는 빠르게 내달렸지만, 여성 방청객이 많았던어느 날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투박하고 투쟁적이었다고나 할까?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한 남자에게 다가가 시간을 드릴 테니 못다 한 뒷얘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시대의 풍파를 억척스럽게 이겨낸 예술가이자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김봉준(金鳳駿·63)은 한 일도 또 할 일도 많다.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 찻길을 지나 숲길, 논길, 밭길을 거쳐 다다르면 옛 기억을 찾아 떠나는 곳,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이하 신화미술관)이 있다. 김봉준 관장이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24년째다. 서울 토박이 김봉준 관장은 도시 삶의 피로감을 피해 시골로 탈출을 감행(?)했다고 말을 꺼낸다.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요. 직장생활도 해본 적이 없고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질서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요. 생존하려고 적응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죠. 그러니 20년 넘게 여기서 살아온 것입니다.”
강원도 산골까지 왜 왔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다가도 ‘천생 팔자이고 운명’이라는 답에 이른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과 아픔 또한 신화미술관에 담으며 살아왔다.
“나를 치유하고 거듭나지 않았으면 온전하게 살지 못했을 겁니다. 망가졌겠죠. 죽었거나 정신병자가 됐거나. 신화미술관 건물도 제가 지었어요. 꿈을 이뤄보겠다는 생각에 돈 한 푼 없이 맨땅에서 시작했습니다.”
신화미술관은 김봉준 관장의 안식처이자 낙원이다. 어릴 때부터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기 때문. 이 상처를 끊어내기 위한 여정의 결과가 신화미술관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맞고 자랐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됐죠. 한국전쟁 직후 세대인데 전쟁으로 인한 폭력 문화가 그대로 계승된 사회였습니다. 군인 출신 아버지에 군대를 경험한 선생이 있는 학교. 체벌이 너무 쉽고 당연한 사회였죠.”
김봉준 관장은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2차 폭력을 가하는 야만적 해소 대신 트라우마를 풀 수 있는 예술을 택했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라기보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더 컸죠. 딴 전공은 생각해본 적 없이 홍대 미대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입대한 군대에서도, 심지어 민주화 운동을 할 때도 폭력은 계속됐다.
“같이 운동하는 선배한테도 그런 일을 당했어요. 예술을 하는 입장이니 마음도 여리고 폭력을 당한 이후에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것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눈뜬 것이 바로 탈춤이었다. 역동적인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었다.
‘굿’은 풍물 자체이자 문화의 뿌리다
“제가 그때 풍물에 미쳤어요. 홍대 탈춤반을 데리고 1970년대에 우리 가락이 있던 곳을 찾아서 답사를 다녔어요. 전라북도 남원, 진안, 임실이 풍물로 가장 유명해서 찾아갔습니다. 남원 산골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농악’이란 말을 못 알아듣더라고요. 열심히 설명을 해드렸더니 그제야 ‘굿, 우리 굿이 셌지’라고 하셨어요.”
농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 가락을 깎아내려서 부른 말이었다. ‘굿’의 의미에는 무당의 굿만 있는 게 아니었다.
“풍물, 마을 전체를 합쳐서 하는 큰 행사를 대동굿, 별신굿이라 불렀어요. ‘굿 구경 가자’ 하는 것이 예술굿이었고, ‘두레굿하자, 풍장굿하자’ 하는 것은 노동굿이었죠. 노동의 조직만이 아니라. 이 마을의 난리굿이 셌어. 의병굿이 셌어. 이런 말도 해요.”
당시 일제는 조선민속연구를 통해 조선 사람의 조직적인 힘의 원천이 굿에 있다고 보고 이를 없애고자 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의병운동도 당시 사람들은 ‘의병굿’으로 불렀으니 굿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민중의 언어는 한자말이 아니잖아요. 그 말을 써왔고 굿이 다 그 말을 포괄했다고요. 동학굿을 난리굿이라고 불렀어요. 동학 때 그냥 갔을 거 같아요? 풍물굿이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신앙으로서의 굿이 있단 말이야. 그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자기 신앙. 옛날부터 뿌리 신앙 굿이었던 거죠.”
탈춤에 미쳐 있던 시기 자연스럽게 탈에 표현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불화(佛化)를 배우게 됐다.
“옛날 탈을 만들려고 보니까 대학에서 배운 그림 기법으로 안 되는 거야. 가만 보니까 단청 그림하고 비슷해. 양식이 내가 배운 수채화나 유화로는 표현할 수 없겠더라고.”
고민하다 보니 탈에 표현된 느낌이 단청하고 같은 양식이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그림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인간문화재인 봉원사의 만봉 스님을 찾아갔다.
“대처승이던 만봉 스님이 단청 장인이었어요. 어떤 절이든 상관없이 주문이 오면 후불탱화를 그려주는 분이셨어요.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사람은 배우겠다는 사람을 가르칠 의무가 있어서 한 달에 얼마씩 지원금이 나왔고 저는 무료로 불화를 배웠습니다.”
만봉 스님에게 배운 불화는 고대부터 내려온 화법이었다. 대학교의 동양학과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고유의 것. 그렇게 대학 생활 3년 동안 힘을 기울여 배운 불화는 김봉준의 그림과 조각, 글씨에 그대로 배어 여전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유학을 포기하고 신화미술관 문을 열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 생활을 했던 김봉준 관장은 탈춤을 계기로 접하게 된 마을 문화와 지역 신앙, 정신에 매료되기에 이른다.
“마을 문화를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외국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친구들 대개 뉴욕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는 거야. 미대 조소(彫塑)학이다 보니 서양을 유학의 성지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나는 거꾸로 이리로 온 것이죠. 더 공부해야겠다. 그래서 마을 문화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지역 문화 축제를 열고 관여하다 2007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지역 문화 만들기 프로젝트에 선정돼 받은 돈으로 신화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2008년 10월에요.”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 탈춤으로 시작해 굿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왜 탈춤이 아닌 신화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신화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죠. 굿을 뿌리로 한 신화 구조이죠. 신화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가 있고, 일종의 기도, 음악, 춤, 미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신화미술관 안에는 김봉준 관장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신상을 모아놓은 구역이 있고, 건국신화를 비롯해 창세, 토템(동물상), 저승, 도깨비, 마을의 신화를 모아놓은 것이 각각 있다.
“현대 사회는 마을을 무시하지만 아주 중요한 단위입니다. 가족, 마을 문화가 무너진 광장 문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뿌리가 없는데 시민사회 공동체가 이뤄지겠어요? 사람도 세포가 있어야 형성되는데 마을 문화도 일종의 세포입니다.”
암 환자의 의지, 씩씩한 조각상으로
초야에 묻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김봉준 관장은 지극히 사회 참여적인 인물이다. 광화문에서 열렸던 촛불 집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찾아가 유족들을 위로하는 조각상과 판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화가로, 탈춤에 빠져 있었던 연출가로, 시민운동가로 살고 있다. 그저 마음이 가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전천후 예술가의 삶이 김봉준 관장의 하루하루에 녹아 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병이 든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부천에서 시민운동을 하다 이곳으로 왔는데 임파선암 3기 말이었어요. 자가진단을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위쪽인 줄 알고 위 내시경만 했거든요. 다행히 전이가 안 된 상태였어요. 암 치료받은 지 17년 됐고 아주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은 아프고 난 다음에 지었다고 했다. 암과 한바탕 결투를 벌인 이후 만든 조각상이라 씩씩하고 힘찬 느낌이라고.
“암에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잖아요. 절망의 시기를 겪고 죽음의 절벽과 언덕을 넘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블랙리스트 인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다
“나는 3번의 블랙리스트를 겪은 거 같아.”
1980년대에는 5·18 포고령 수배자였다. 1년 후 다행히 포고령이 풀려 개과천선하고 살 수 있나 싶었는데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들고 나온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에도 김봉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난 정부 9년 동안 그는 예술가 지원 정부 사업에서 제외됐다. 인터뷰 초반 ‘자유롭게 살아왔다’는 말은 알고 보니 당시를 추억하는 씁쓸한 넋두리였다.
“근데 말이지 문화 창조는 비주류에서 나온다고. 지금은 주류에 임박했는데(웃음).”
과거 그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없었다. 탈춤을 찾아 방황하고 탈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배움의 길을 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대학 졸업을 해도 이미 사회에서 계속 찍혀왔기 때문에 좋은 직장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요.”
신화미술관 한편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동양적 색채가 강한 그림과 광장을 표현한 판화 등 다양하다. 지금의 정권이 아니었다면 걸어놓지도 못했을 거라고 웃어 보인다.
“그런데 촛불 집회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꼭꼭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판화도 다양하게 많은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에게 컬렉터들이 붙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 눈치도 빠른 거 같아요. 춥고 배고플 때 좀 사주지(웃음).”
생업 작가로서의 삶은 계속된다
정말 본의 아니게 전업 작가로 살아온 60여 년의 세월이다. 홍대 미대 출신, 깔끔하고 단정하게 뉴욕의 화랑에서 멋들어진 전시회 여러 차례쯤은 열었을지도 모를 사람. 그러나 많은 시간을 숨어 살았고 민족의 뿌리 문화를 찾아 헤맸으며 지금은 신화와 숨 쉬는 인생을 살고 있다.
“나 그래도 판화도 팔고, 디자인 주문 들어오면 글씨도 써요. 70년대부터 스님으로부터 고법으로 붓을 쓰는 법을 잘 배웠잖아(웃음).”
예술가로서 마음속으로 꿈꾸는 좋은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과정에서 좋은 미래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가는 거겠죠. 내 세대의 징검다리에서 다음 세대의 징검다리로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나가야겠죠. 내가 가는 길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나 또한 예술을 배반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이 뿌듯합니다. 당당합니다.”
날씨도 매우 쾌청해서 여행 떠나기 딱 좋은 날이다.
군산은 얼마 전 다녀온 곳이지만 두 번 세 번 가보아도 볼거리와 느낄 점이 많은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군산의 밤을 체험하게 되어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역사적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찾아보기로 했다.
군산은 한편으로는 슬픈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비옥한 우리 땅에서 나는 곡물과 물자를 자기네 나라로 수탈해 가는 통로로 군산을 발전시켰고 많은 일본인이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일본의 가옥이나 문화가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 근대화의 아픈 역사를 없애지 않고 잘 보존하여 더는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다짐한다는 의미로 일본의 잔재인 세관이나 조선은행 등을 근대건축관이나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역사를 보존하고 잊지 않는다는 취지를 가졌다니 멋진 도시이다.
2017년 10월 28일~29일은 군산의 축제로 근대역사박물관과 월명동 일원에 '가을밤, 근대문화유산은 잠들지 않는다' 는 슬로건으로 군산 야행의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야밤에 본 문화유산의 모습들은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곳곳에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밤 나들이 나온 군산시민의 모습이 매우 화목해 보였다.
여러 곳에서 음악콘서트의 흥겨운 노래가 들리고 광장에선 가족끼리의 투호 게임도 벌어지는 등 축제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근대역사박물관과 구 군산세관, 조선은행 군산지점, 근대미술관이 된 일본 은행 건물이 아름답게 조명되었다.
뒤쪽으로 군산항의 뜬다리 모습도 예쁜 불빛으로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필자와 친구들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쪽으로 따라서 길 건너 축제 장소로 이동했다.
그쪽에는 잘 보존된 일본식 절인 동국사와 신흥동 일본식 가옥, 그리고 한석규와 심은하의 아름다운 동화 같았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인 초원 사진관도 찾아볼 수 있다.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골목마다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거리 축제가 진행되고 많은 관광객과 군산시민이 어울려 밤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긴 골목 끝까지 예전에 있던 학교나, 관공서, 병원, 정미소, 경찰서, 주막 등 여러 임시건물을 지어놓고 관광객에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이벤트도 하는 등 군산시에서 이번 축제에 매우 공들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편에선 '소리나무'라는 연주 팀의 고운 선율이 우리를 붙잡아 한동안 몇 곡을 감상하고 박수를 보내주었다. 참으로 낭만적인 밤이다.
일본가옥에 도착하니 실내를 보려면 줄을 서야 했고 긴 줄에도 우리는 기다렸다가 일본가옥의 내부도 돌아볼 수 있었다.
상당한 부잣집이었던 듯 규모가 매우 컸는데 일본인의 생활상도 엿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예전 어렸을 때 우리 외갓집도 일본인의 적산가옥이었다. 패망으로 돌아가는 일본인의 집을 외할아버지께서 매입하셨다는데 그 집은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는 꿈의 동산이었다.
집안 구조도 재미있었지만, 앞쪽의 넓은 정원이 아름다웠다.
일본인 특유의 정원문화로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정도의 동산이 있고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도 있었다.
돌로 만든 거북도 있고 쭉쭉 늘씬하게 피어 있던 보랏빛 난초도 잊히지 않는다.
군산의 일본인 가옥을 보니 옛 외갓집과 많이 닮아 불현듯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군산 야행의 밤이 깊어갔다.
이런 축제로 인해 군산이라는 도시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 떠나기 좋은 가을이다. 모두들 문화가 있는 곳으로 한 번쯤 다녀오기를 권한다.